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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김의 자세와 동기 / 여주봉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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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의무리 2007. 7. 17. 08:10

본문

섬김의 자세와 동기
설교: 여주봉 목사

고후 5:11-15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어졌으니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어지기를 바라노라 12 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로 말미암아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에게 대답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 13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후서 1장에서부터 계속 사도 바울은 복음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3장에서는 신약의 새 언약은 문자에 의한 삶이 아니고 성령의 의한 삶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힘으로 잘 지키는 것이 우리 신앙생활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우리의 힘으로 지킬만한 능력이 우리에게 없다. 그것은 구약의 삶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법을 우리 마음에 두신다고 했는데, 그것은 고린도후서 1장이나 여러 곳에서 말하는 대로 하나님이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셔서 그분의 도우심을 따라 살게 하셨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신앙은 하나님 말씀에 기초해서 성령에 의한 삶을 사는 것이다. 라는 것을 앞에서 살펴보았습니다.

3장 18절에 보면,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우리가 성령으로 살아가는 삶 중에 하나가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에게 예수님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비추시므로, 우리가 하나님 그분을 개인적으로 알도록 우리 삶에 빛을 비추시므로, 그래서 주의 영광을 보는 만큼 우리가 주의 형상으로 변화되어 자라나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고후 4장 1절- 2절, 5절-6절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2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 5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6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사도 바울은 자신은 복음을 전하되 혼잡하게 아니하고, 또 사람들의 감정에 호소해서 어떻게든지 저들을 붙잡아 놓으려고 하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전하고,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빛을 비춰주셔서 저들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면 근본적인 변화가 저들의 삶에 일어날 것이니까요. 이렇게 말하면서 자기는 그 복음을 위하여 기꺼이 고난에 동참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5장에 들어오면 이 복음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저 하늘나라에서 우리가 부활의 몸을 입고서는 그 날까지 포함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고후 5장 11절로 마지막 부분까지는 그럼 어떻게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어떻게 화목케 하는 그리스도의 사신(대사)가 되었는가? 우리가 이 직분을 어떻게 감당하게 되었는가? 하는 부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부분은 뭐를 다루고 있느냐 면 자기가 그리스도를 전하는, 참 그래서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그리스도의 대사가 되었는데, 어떠한 동기와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주님을 섬기느냐? 하는 것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섬김에 있어서 동기와 마음의 자세 세 가지

1. 성도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목회자와의 옳은 관계가 필수적이다.

이 부분이 사단이 옛날부터 계속해서 틈타왔던 부분 같습니다. 성경에 보면, 고린도 교회의 경우에도 거짓 사도들을 통해서 사도 바울과 교회 사이를 이간질 시켰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본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바로 그 점을 다루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이고, 사도 바울이 가서 복음을 전할 때,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났는데,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떠난 이후로 거짓 사도들이 틈타서 한 일 중에 하나가 뭐냐 면, 사도 바울이 사도인 것을 의심하게 만들어서 사도와 교회를 이간질 시켰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한번은 고린도 교회를 방문했으나 쫓겨나서 눈물 흘리며 돌아오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참 근심하는 중에 디도를 보냈는데, 디도가 돌아와서 저들이 회개하는 자세를 가졌다는 좋은 소식을 듣고 기쁨으로 쓴 편지가 고린도 후서인데, 이 고린도후서를 쓰면서도 나중에 특별히 10장부터 집중적으로 쓰고 있습니다만, 바로 지금 읽은 본문에서도 그 점을 다루고 있습니다. 11절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어졌으니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어지기를 바라노라” 이것이 바로 그 부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12절 “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로 말미암아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에게 대답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 이들이 바로 거짓 사도,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우리에 대해서 다시 자부심을 갖기를 원한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사도 바울과 성도와의 그 관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말을 하느냐 면, 하나님 백성들에게 있어서 오늘날로 치면, 목회자와 성도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목회자에 대한 올바른 자세가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데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문제가 무너지면 은혜를 못 받습니다. 그런데 여기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구약시대도 물론 마찬가지입니다만 그것은 놔두고, 신약시대만 보더라도 하나님의 교회가 이 땅에 태어나게 된 이 후로 오늘날까지 사단은 집중적으로 이 부분을 공격해 왔습니다. 물론 다른 부분도 있지만, 목회자와 성도들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지게 했습니다.

참 제가 마음이 아픈 것이 오늘날 우리나라 현실을 살펴볼 때, 일반적으로 얼마나 이 신뢰가 서로 무너져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이 성도들은 성도들대로 목회자를 불신하고, 목회자는 목회자대로 성도들을 불신하고, 무시하고 있는가? 이것이 사단의 역사인데, 이러한 관계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어떠한 은혜도, 어떠한 역사도 진정으로 경험할 수 없는데, 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이러한 것들이 이 나라 가운데 회복되도록 기도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저는 과거에 이러한 일들을 겪으면서 어려움도 있었습니다만 지금은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귀한 은혜를 주셔서 우리 가운데 이러한 일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치유하시고, 새롭게 하시고, 성도와 목회자 사이뿐만 아니라 성도와 성도의 사이에서도 우리 가운데 하나하나 만져 가시면서 진실로 우리가 마음을 터놓고 서로 사랑할 수 있도록 더욱 더 만져 가시고 빚어 가심을 진실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데요. 이것은 우리나라만이 아닙니다만 그런데 우리나라는 더 심한 것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부분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우리가 참 기도해야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12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우리를 인하여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이 부분을 보면 사도 바울이 자기 자신을 내세우는 사람이라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을 전혀 내세우지 않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참 배워야 할 것 중에 하나가 그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10장에서 13장까지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데, 거기에 보면 이러한 성격을 선명하게 볼 수 있는데, 그 당시 거짓 사도들이 사도 바울이 사도가 아니라고 몰아친 이유 중에 하나도 사도 바울의 겸손입니다. 예를 들면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사례비를 받지 않았습니다. 11장 9절에 보면 다른 교회에서 보내 준 선교헌금을 받았습니다. 그래도 당연히 사례비를 받아야 마땅하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왜, 복음으로 사는 자는 복음으로 먹으라고 했으니까요. 그런데 자기는 하나님의 은혜로 기름부음이 임해서 복음을 전하는데,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가 함께 하심으로 이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내가 상급을 받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이 당연히 받을 수 있는 사례비라도 받지 않으므로, 하나님 앞에 상급을 받겠다.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짓 사도들은 이것을 뭐라고 비방했는가 하면, 봐라 사도가 아니니까 떳떳하게 사례비를 받지 못하지 않느냐, 이렇게 말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자기의 영적인 체험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거짓 사도들은 자기들의 영적인 체험으로 사람들을 휘어잡았습니다. 제가 최근에 읽은 책의 제목이 이세벨의 영이라는 책입니다. 우리나라에 아직은 번역이 안된 책인데, 그게 어떠한 자들을 말하느냐 면, 주님과 성도들 사이에서 중간에 자기가 끼어들어 성도들을 자기 부하로 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와 성도들을 이간시키고, 교회를 완전히 반쪽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세벨의 영이 한번 들어오면, 교회는 완전히 산산조각이 납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성도들로 하여금 목회자와 이간시킬 뿐만 아니라 결국은 죄를 짓게 하는데도 빠트리고, 음욕에도 빠트리게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세벨의 영이 틈타게 하는 것이 뭐냐 면, 은사를 가지고 그럽니다.

이번에 순천 영호남 집회에 가서, 거기서 들은 얘기인데 어는 분이 음식점에 갔는데, 뭐 젊은 여자들이고 나이든 여자들이고, 겉으로 보면 꽤 배우고 괜찮은 여자들 같은데, 한 남자를 줄줄이 따라 다니더랍니다. 그런데 테이블에 맥주를 쫙 따라놓고 앉아서, 하는 말이 목사님. 목사님 그러는 것 같더랍니다. 그래서 무슨 목사가 저런 사람이 다 있어 하고 알아 봤더니, 목사가 아니고 법사더래요. 그런데 그 여자들이 왜 법사님, 법사님 하면서 따라 다니느냐 면, 그 남자 법당에 여자가 찾아 갔을 때, 그 여자가 어제 밤에 부부싸움을 하고 그 문제로 찾아간 거였어요. 그래서 찾아 왔는데 들어오자마자 그 법사가 하는 말이 어젯밤에 부부싸움 했구나, 그러니까 뿅 가버리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그 어떤 능력을 가지고 조종하는 것입니다. 그 삶을 조종하고 영어로 manipulate, 사람을 교묘하게 다루고, 조종하고, 농간부리고, 이용하는 것입니다. 어떤 투시의 능력으로 하는 것입니다. 사단도 능력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교회 내에서도 그럴 수 있습니다. 그것이 이세벨의 영입니다. 때로는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은사일 수도 있습니다. 그 경우는 귀신의 역사이지만, 하나님의 은사를 가지고 때로는 정확하게 맞추기도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능력 앞에 가면 벌벌 떱니다. 그 사람만 따라다니면 뭔가 될 것처럼, 그럼 그때부터 조종하는 것입니다. 자기 부하 삼고, 자기 사람 삼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세벨의 영의 특징인데, 여러분 성도들이 아주 지혜로운 것 같지요. 금방 넘어갑니다. 그래가지고 자기의 목적을 이루게 하고, 헌금하게 하고, 자기를 보살피게 하고, 이럽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 당시 거짓 사도들을 보면, 고후11:20 “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 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 하는 것을 보면, 거짓 사도들은 저들을 조종해서 돈을 뜯어내고, 그 영향력을 행사하고, 그들을 이용했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이 넘어갔느냐 면, 영적인 자랑 때문입니다. 은사가 나타나서 한 두 마디 얘기하면, 자신 외에는 아무도 모르고 자기 마음속에만 있는 얘기를 말하니까. 확 돌아 서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에 대해서는 저는 사도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왜 사도 바울은 그런 체험을 자랑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고후 12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심지어 셋째 하늘에 다녀온 얘기를 14년 동안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거짓 사도들이 사도 바울을 비방해도 다른 것은 괜찮은데, 문제는 사도와 성도들 사이를 이간질함으로써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에서 고린도 교회가 떠나게 하고, 저들이 곁길로 가게하고, 그래서 저들의 신앙이 병들게 함으로 그것을 막게 하기 위해서, 그래서 사도 바울이 부득불 그 체험을 말하는 것입니다. 고후 12:1-5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2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3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4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5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 이것을 보면 사도 바울은 영적인 자랑을 한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겸손한 것들이 거짓 사도들의 공격하는 빌미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내가 너희에게 자랑할 기회를 준다 그 말은 사도 바울 자신을 내세운 것이 아니라, 여기에 가장 중요한 것이 뭐냐 면, 사도(목회자)와 성도와의 사이에 신뢰가 저들 자신을 위해서 얼마만큼 중요한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다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성도들이 목회자에 대해서 존중해야 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살전5:12-13). 그리고 신뢰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그러기 때문에 목회자에 대한 비방은 두 세 사람의 증인에 의해서 확실하지 않으면 절대로 듣지도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딤전5:19). 그런데 이런 설교를 하면서도 그 마음에 안타까운 일이 그겁니다. 오늘날은 이 벽이 무너져 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은 목회자는 목회자대로 성도들을 신뢰하지 못하고, 성도들은 성도들대로 목회자를 신뢰하지 못하는, 그래서 심각한 가운데 있기 때문에, 물론 우리에게는 이런 문제가 없습니다만, 제가 여기에서 예를 들면 설교를 하면서도, 여러분들이 믿음 안에서 영적으로 세워질려면 목회자에게 순종해야 한다. 이렇게 성경에 분명히 말하고 있지만, 그것만도 강조할 수 없는 것이, 오늘날에는 그 구절을 이용해서 때로는 성경에 전혀 합당치 않은 부분들에 순종을 강요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만, 한 가지 여기에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성도들이 믿음 안에서 세워질려면 목회자와의 관계가 원만해야 합니다. 좋은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그 관계에서 신뢰가 무너지면 그때는 어떠한 진정한 은혜도 경험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문제만 제기하고 그냥 넘어갈 수 있겠는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성도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에게 얻어내기 위해서 종교적인 행위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내 삶을 조종하여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나가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이 영적인 분별력을 주십니다.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그 말씀을 읽기 때문에, 그러기 때문에 이러한 자세를 가지고 설령 목회자가 엘리 제사장 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사무엘은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하는 것처럼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엘리 제사장 밑에서 사무엘이 나온 것을 기억하셔야 됩니다. 그래서 설령 목회자가 그런 입장이라 할지라도 여러분이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자세를 가지고 따라가면 여러분에게 분별력이 있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합한 것이면, 순종해야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심지어 바리세인들에 대해서 말하면서 저희가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저들이 말하는 것은 지키라고 했습니다(마23:2-3). 예수님은 바리세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하고,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그랬는데, 그러한 바리세인들이 가르치는 것도 하나님 말씀에 합한 것이면 그것은 지키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제 얘기는 여러분들이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세를 가져야 분별력이 있게 되고, 반대로 여러분의 신앙이 세상에서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이 수단이 되어지면 그것은 절대로 분별력이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듣기 원하는 말만 듣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목회자가 아무리 엘리 제사장 같은 사람일지라도 여러분은 목회자를 중심에서부터 존중해야 합니다. 존중하지 못하면 여러분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아무리 상대방이 부족해도 존중해야 됩니다. 왜 존중해야 되냐 면 하나님이 세우신 자이기 때문에 존중해야 됩니다. 아멘.

하나님이 언젠가 저에게서 권위의 문제를 다루셨습니다. 그게 뭐냐 면, 하나님이 비추시는데, 제가 제 아버지의 권위를 전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아버지에게 대들고 그러지 않았습니다. 지금 여기에 제 어머니도 계시고, 형제들도 있는데, 제가 아버지를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뭘 비추냐 면, 제 중심에서부터 한 가정의 아버지로써의 하나님이 주신 그 권세와 권위를 제가 존중하며, 그래서 전폭적으로 순복하는 그 마음의 자세가 없는 것을 비추시고 다루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행동 이전에 마음의 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작은 일에서부터 가정에서 권위에 순종하는 것을 배워야 되는데, 그 배워야 할 자리가 아버지입니다. 거기서 못 배우니까 다른 곳에서도 못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국가적인 면에서도 저뿐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부분이 반골기질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정에서부터 안 배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뭐가 또 있느냐 면,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도 큰일들은 잘 섬길지 몰라도, 작은 일들을 쉽게 그냥 에이 나중에 그냥 그렇게 하면 되겠지 하고 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위 앞에 전폭적으로 들어가서 순종하는 것을 배웠어야 되는데, 못 배웠으니까요.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이것을 보이셔서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회개했습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제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 권위에 문제가 있으니까. 목회하면서 그동안 어려움을 많이 당했던 것이 뭐냐 면, 성도들로부터 그 권위의 문제를 가지고 집중적으로 사단이 틈탔던 것을 보겠더라고요. 왜냐하면 그 방면이 사단에게 문이 열려져 있으니까요.

그러므로 문제는 여러분들이 먼저 하나님 앞에 그러한 올바른 자세를 가져야 되고, 두 번째는 상대방이 엘리 제사장과 같은 목회자일지라도 여러분은 존중해야 합니다. 왜 존중해야 되냐 면, 그분이 뛰어나기 때문에 존중할 것이 아니라 그분은 하나님이 세우신 종이기 때문에 존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것이 구약이건 신약이건 선명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여러분에게 유익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주님 앞에 세워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공급받지 못합니다. 그리고 존중하지 못하는 대는 사실 따져보면 교만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 번째는 모든 말을 무조건 순종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계시고, 예수님이 계시고, 교회로 치면 목회자가 있고, 성도가 있는데, 여러분 군대에서도 소대장이 있고, 중대장이 있고, 대대장이 있고, 연대장이 있고, 사단장이 있는데, 위에서 내려오는 명령은 ⓐ라는 명령인데, 중대장이 ⓑ라는 명령을 내리면, 아래 사람은 올바로 따지면 그 명령 안 들어도 됩니다. 왜 그 명령은 틀린 명령이고 위에 명령이 더 큰 명령이잖아요. 그러기 때문에 목회자가 얘기할 때, 하나님의 말씀에 맞는 부분은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합하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바리세인의 가르침도 순종하라고 그랬습니다. 단 하나님 말씀에 어긋난 내용은 순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존귀하게 여길 수 있느냐? 상대방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자기는 그를 하나님이 세우셨기 때문에 그를 귀하게 여기며, 좋게 여기며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했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 하나님 말씀에 합한 것이면, 누구를 통해서 주어졌든지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여러분은 살아요. 이것은 여러분이 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은 목회자는 목회자대로 다루실 것입니다. 성도들에게는 어떠한 자세를 가지고 대해야할 것인가도 그런데 이것은 중요합니다. 이게 무너지면 교회가 세워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무너지면 성도들이 절대로 은혜 받지 못합니다. 이것이 무너졌는데 은혜 받는 사람 보았습니까? 그러면 이렇게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이 교회서 안 되면 다른 교회로 도망가면 될 것 같이 생각하지만 안 됩니다. 그것이 해결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무너졌는데 다른데 가면 될 것 같습니까? 안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여러분들이 중심에서부터 올바른 자세가 되어질 때에, 그때에 여러분들을 귀하게 세워주실 줄로 믿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상황들을 보면서 우리나라에 참 우리가 이 부분을 위해서 우리가 기도하며, 우리 자신들이 특별히 이 부분에서 넘어지지 않도록 잘 해야 되겠다 싶습니다.

우리는 권위에 순종하는 것을 못 배웠습니다. 요즘 아이들이 선생님의 말에 얼마나 순종하는지, 제가 사무실에 앉아 있다가 우리 주일학교 아이들 가르치는 것 얘기를 들으면서, 한편으로는 저도 옛날에 그렇게 배워왔고, 그렇게 가르쳤고, 제 모습이이고 다 그랬으니까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너무 마음 아프더라고요. 아이들이 몇 명밖에 안 되는데도 아이들이 안 들으려고 떠드니까 선생님은 악을 발악. 발악 써가면서 어떻게 하든지 안 들으려고 떠드는 애들을 하나라도 집어넣으려고 하는지, 얼마나 이 거역함. 얼마나 질서가 없는지, 얼마나 그 권위에 순복하는 것이 없는지요. 그것이 어려서부터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커서도 그것이 잘 안됩니다.

제가 공부하면서 미국에서 한 7년 동안 있었습니다. 미국 사람들이 잘못하는 것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그런 부분은 잘 하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공부하면서 절대로 그러지 않습니다. 공부 시간 당연히 아이들이 조용히 합니다. 토론이 되어집니다. 왜 그것이 되어지는지 아세요? 가정에서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미국도 다양하기 때문에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그럽니다. 예를 들면 다른 사람 집에 가잖아요. 부모가 아이에게 너 여기 소파에 앉아있어 그러면 부모가 다른 말 할 때까지 거기에 앉아있지 절대로 돌아다니지 않습니다. 거기 고대로 앉아 있습니다. 영화에서 보실 것입니다. 거기 앉아 있으라고 하면, 나올 때까지도 거기 그대로 앉아있습니다. 아무리 시간이 많이 지나도 그럽니다. 왜 그렇게 되느냐 면, 그것이 당연히 그렇게 돼야 할 것처럼 인식이 되어 자라나기 때문에 권위에 순종하는 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자기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면서 매일 두 마디를 당부하면서 보내는데, 그것이 뭐냐면, 공부 잘하라는 것도 아니고, 싸워서 지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두 마디를 날마다 당부하면서 학교 보내는데, 그 중에 하나가 선생님의 권위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가정들이 많이 깨어지면서 그런 부분들이 요즈음 미국도 우리나라도 이런 부분이 많습니다만, 정상적인 가정의 경우에는 그런 부분이 어려서부터 되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려서부터 권위에 순종하는 것을 배워야 하는데,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너무 중요합니다. 우리의 신앙의 문제를 위해서도 중요합니다.


2. 하나님의 생각에 내 생각을 굴복시킴

고후 5:13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영어 성경에 보면, 우리가 미쳤으면 그것은 하나님 때문이고, 우리가 정신이 올바르면 그것은 너희 때문이다. 이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미쳤으면 하나님 때문이라는 말이 무슨 말 같으세요. 반면 우리가 정신이 똑바르면 너희 때문이라는데, 여러분 이게 참 중요한 부분입니다. 어떤 중요한 부분이냐 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입니다.

우리가 만일 미쳤으면 하나님을 위한 것이다,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는데 있어서 하나님과 친밀하게 동행하는 삶을 살면, 그것은 사람들에게 때로는 미친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에 보시면 선명하게 나옵니다. 영적인 것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고, 육적인 눈을 가진 사람들은 어떻게 보이느냐 면 어리석게 보일 것이라고요. 그러니까 안 믿는 사람들에게 어리석게 보일 뿐만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들도 육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입니다. 사 55:8-9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9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우리의 생각은 사고를 말합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 면 여러분이 아무리 머리가 좋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아니큐가 200 이고, 여러분이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때로는 성경을 많이 알고, 성경의 배경과 언어를 알고, 성경의 역사를 알고 조직신학을 안다 할지라도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만 가지고는 절대로 하나님의 뜻을 다 알 수 없습니다. 인간의 생각만 가지고는 절대로 하나님의 일을 판단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은 하늘과 땅이 다른 것처럼 인간의 생각만 가지고는 하나님의 생각을 완전히 놓칠 수 있는 것을 말하고, 인간의 생각만 가지고 하나님을 따라갈 수 없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15:32-33에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33 제자들이 이르되 광야에 있어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가 배부를 만큼 떡을 얻으리이까” 여기 보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올 때에 저들이 배가 고파서 가다가 그냥 쓰러질 것 같으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그랬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하는 말이 저들에게 배부를 만큼 빵을 주려면 이백 데나리온이 넘는 돈이 필요한데 갑자기 그 많은 돈이 어디 있으며, 또 설령 돈이 있어도 지금 어디 가서 그 많은 빵을 사올 수 있느냐고 했습니다. 얼마나 합리적입니까? 그들은 금방 계산이 나왔습니다. 너무나 냉철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계획을 전혀 알지 못했고, 예수님의 의중을 전혀 판단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하고자 하는 것을 전혀 깨닫지도 못했습니다. 아주 뛰어나고, 아주 냉철하고, 정확하고 합리적입니다. 여러분 합리적인 사고만 가지고는 절대로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사고, 우리의 생각, 우리의 합리적인 사고만 가지고는 절대로 하나님의 행하심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합리적인 사고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마음의 자세입니다. 다시 말하면 겸손한 마음입니다. 배우고자 하는 마음의 자세입니다. 배우고자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러하면 내가 지금까지 배우고 듣고 알았던 것, 생각했던 것, 경험, 지식, 전통 등,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내 삶을 조정하여 하나님의 뜻이 내 삶에 이루어지리라고 하는 그러한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말씀을 따라 배우고자 함으로 순종하여 나아가는 그 자세가 겸손함입니다.

마음의 자세 중에 교만한 마음은 다른 사람의 조언을 받아드리지 않는 것입니다. 배우고자 하는 자세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절대로 합리적인 사고만 가지고는 아무리 뛰어날지라도 하나님의 일은 모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합리적인 사고를 초월합니다. 그러니까 영적인 것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입니다. “하나님께 미쳤어도”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아세요? 하나님께 가까이 동행하면 사람들 눈에 미친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다윗이 하나님의 법궤가 성으로 들어오니까 너무나 좋아서 하나님 앞에서 찬양하고 춤을 추는데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하던지 바지가 벗겨진 것도 모르고 춤을 추었습니다. 그런데 왕이 혼자 방안에서 춤추는 것도 아니고, 거기에는 온 백성이 눈이 보고 있고, 계집종들의 눈이 보고 있고, 고관들과 부하들이 다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앞에서 바지가 벗겨진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인 미갈의 눈에 보기에도 정신 나가게 보였습니다. 왜냐하면 미갈은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사람들 앞에서 체면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합리적인 사고로는 맞는 말입니다. 한 나라의 왕이 체면도 체통도 없이 그런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날 이후로 미갈은 다윗 왕의 신임을 잃었고, 하나님의 신임도 아울러 잃었습니다. 그래서 그 일로 인하여 미갈은 아이를 생산치 못하는 수치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다윗 왕의 그러한 행동은 사람들의 눈에 보기에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했나요? 다윗은 하나님의 임재가 자기 집에 회복된다는 것이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창고에 온갖 금은보화가 가득합니다. 명예 권력, 영토도 엄청난 확장이 있었고, 그 모든 것을 얻을 데로 다 얻었습니다. 그래서 그 모든 것과 비교도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임재가 자기 집에 찾아오시는데, 그것이 너무나도 소중하고 너무나도 고귀한, 그 하나님이 너무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찬양하는 것은 사람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너무나 좋아서 바지가 벗겨진 것도 몰랐던 것입니다. 아마 알았는데도 춤을 멈추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미쳤어도 하나님께 대한 것이요.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는 것은 이 말입니다.

여러분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외국에서 나오는 경배와 찬양 테이프들도 확실히 색깔이 많이 다릅니다. 제가 얼마 전에 미국에 집회 갔다 오는 길에 들렸던 세미나에서도 보니까 하나님과 친밀한 찬양을 별로 않습니다. 찬양을 할 때,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진실로 우리 중심에서부터 우리의 모든 것을 쏟아 그분을 높이고, 그분을 구하고, 그분을 사모하고, 그분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찬양은 별로 하지 않습니다. 왜 그러한 찬양을 하지 않느냐 면, 그러한 찬양을 하려면 영적인 친밀함이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영적인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없이 절대로 그러한 찬양을 못합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안합니다. 그러면 어떤 찬양을 많이 하느냐 면 ‘주님은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강한 산성’ 이런 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손뼉 치세요. ‘할렐루야 찬양’ 사람 앞에 보이기에는 이렇게 할 때 더 매우 그럴 듯 합니다. 특별히 여러분이 목회자이건 성도이건 찬양을 드린다고 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본다고 그러면서 손을 들고 눈을 감고 눈물을 질질 흘리면서 ‘주님 사랑해요’ 그러면서 막 웁니다. 옆에서 보니까. 가관입니다. 야! 미쳐도 단단히 미쳤지. 무슨 놈의 교회에서 찬송하면서 사람이 우냐? 미쳤지 그럽니다.

우리가 변화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아야 변화됩니다.(고후3:18) 우리가 살아 계신 하나님, 그분을 더 알기 원하고 그분을 더 알면 알수록 우리는 주의 현상으로 변화됩니다. 해바라기가 해를 향하는 것처럼, 우리의 낯이 인격체 되신 주님을 향하여 우리 중심에서부터 그분을 사랑하기를 원하고, 그분을 사모할 때, 이 찬양과 경배야말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요한계시록에 나오고, 성경 전체에 나오며, 시편에도 나오는 그것이 바로 예배요 핵심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만날 때, 우리의 삶이 변화되고 이것이 우리에게 새 힘을 줍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님을 알게 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합니다. 이것이 합리적인 사고를 초월한 우리의 마음의 올바른 자세로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는 은혜를 줍니다. 이러한 예배는 우리 삶에 핵심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어도 육적인 사람들은 찬양과 경배를 싫어합니다. 손뼉 치면서 큰소리치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리고 점잖게 앉아서 찬송 한 두 번 부르는 것은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마음도 없고, 형식적이고, 그냥 입에서만 부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그럴듯하게 잘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망가져도 한참 망가진 것입니다. 어떻게 눈물을 질질 흘리면서 그냥 얼굴을 쳐들고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을 향하여 찬양한다고 울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들 앞에서 미친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필수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가까이 갈수록,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그분을 사랑하게 되니까. 예수님이 그랬고, 다윗이 그랬고, 바울이 그랬습니다. ‘내가 미쳤으면 하나님을 위한 거라’ 왜 이 말을 여기에 했느냐 면, 그러한 사도 바울의 삶을 보고, 그 거짓 사도들이 바울을 공격한 것입니다. ‘저가 미쳐도 어떻게 저렇게 미쳤지, 예수를 믿어도 꼭 저렇게 믿어야 되냐.’ 그래서 바울과 고린도 교회 성도들 사이를 이간질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지금 자기가 주님과 동행하는 삶에 대해서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도는 자기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망가졌습니다.

3. 하나님을 경외함이 있어야 한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고후 5장 11절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그랬습니다. 여기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이 말은, N.I.V 성경에서는 fear the Lord 그랬습니다. ‘주님을 경외함’ 이것을 보면 사도 바울 속에는 하나님을 경외함이 있었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하나님을 경외함,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늘 살펴본 것처럼, 신앙의 본질은 인격체이신 하나님, 그분을 성령의 조명으로 알고, 그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그분을 우리의 전존재로 사랑하는 것인데, 예배는 바로 그러한 신앙의 본질을 담는 그릇인데, 그가 그의 삶에서 이렇게 하나님을 알기 원하고, 하나님을 더 바라보며 하나님의 영광을 알기를 원하고, 주님을 사모하며 사랑하는 가운데서 그 하나님의 마음이 부어지고, 하나님을 경외함이 부어지고, 하나님의 진실함, 하나님의 거룩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성도들을 대할 때도 하나님의 진실함과 거룩함으로 대했다고 그랬습니다. 성도들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주어도 전혀 아깝지 않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는 하나님을 경외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거짓 사도들을 보세요. 그들은 사람들 앞에서 그럴듯하게 잘 보일 수 있습니다. 아주 영적으로 뛰어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 뒤 문맥을 살펴보아도 알 수 있듯이 그들 중심에는 탐심이 있었습니다. 돈사랑, 사람들에게 평판이 좋은 것, 인기, 자기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중요하게 여김을 받는 것, 중요한 자리, 중요한 요소, 중요한 위치, 중요한 어떤 직분, 중요한 프로그램의 책임을 맡은 것, 이러한 것들이 그들에게는 중요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대면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대면할 때(영광을 볼 때, 형용을 볼 때) 변합니다. 그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 속에 하나님을 경외함이 있게 됩니다. 여러분 이것이 간단한 말 같지만 간단한 말이 아닙니다. 바울이 하는 말입니다. ‘내가 미쳤으면 하나님 위한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사람들이 놀렸습니다. 마27:3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42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43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44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이렇게 욕해도 예수님은 할 말이 없습니다. 무방비 상태입니다. 방어할 말이 없습니다. ‘내가 미쳤으면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

여러분 요셉을 보셨어요? 그는 누구보다도 신실하게 주인을 섬겼습니다. 그런데 주인의 아내는 기회만 있으면 요셉을 유혹합니다. 요셉은 그것을 물리쳤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경외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얼마든지 유혹에 넘어갈 수 있습니다. 아무도 쳐다보는 사람도 없고, 상대방이 적극적으로 달려듭니다. 지금 누가 지켜보는 사람도 없고 자기는 멀리 떠나있고 종의 신분입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이 같이 계심을 알았고, 하나님을 경외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단호하게 물리쳤습니다. 창39:9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얼마나 충성스러운 종입니까? 그런데 그 여인이 자기의 의도가 좌절되니까 요셉을 모함합니다. 창39:10-18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11 그러할 때에 요셉이 그의 일을 하러 그 집에 들어갔더니 그 집사람들은 하나도 거기에 없었더라 12 그 여인이 그의 옷을 잡고 이르되 나와 동침하자 그러나 요셉이 자기의 옷을 그 여인의 손에 버려 두고 밖으로 나가매 13 그 여인이 요셉이 그의 옷을 자기 손에 버려 두고 도망하여 나감을 보고 14 그 여인의 집사람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보라 주인이 히브리 사람을 우리에게 데려다가 우리를 희롱하게 하는도다 그가 나와 동침하고자 내게로 들어오므로 내가 크게 소리 질렀더니 15 그가 나의 소리 질러 부름을 듣고 그의 옷을 내게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갔느니라 하고 16 그의 옷을 곁에 두고 자기 주인이 집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려 17 이 말로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데려온 히브리 종이 나를 희롱하려고 내게로 들어왔으므로 18 내가 소리 질러 불렀더니 그가 그의 옷을 내게 버려두고 밖으로 도망하여 나갔나이다” 요셉은 변호할 수 있었습니다. 변호한다고 통하지도 않았겠지만, 그것은 가정만 파괴하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아무소리 않고 입을 다물었습니다. 사람들의 보기에는 어리석게 보입니다. 그래서 왕의 사면이 없으면 나오지 못할 감옥으로 들어갔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반듯이 사람들에게 nice gentleman 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많은 경우에 하나님 앞에서 평가보다 바리세인처럼 사람들 앞에 평가를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우리가 그러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미친 짓해야 그것이 신앙생활 잘한다는 말은 전혀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그건 어리석은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진실로 주님을 사랑하면 사람 앞에 그렇게 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고후5:13 “내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그 다음에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이것은 뭐를 볼 수 있느냐 면, 바울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사람들의 평판을 중요시 여기지 아니하고, 때로는 그들에게 미쳤다고 취급받는 그러한 것은 상관없이, 진실로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를 원했고, 하나님만의 평가만을 소중히 여기면서 행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 앞에 대할 때는 그들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 정신 든 사람처럼 행동했습니다. 왜냐하면 계속해서 그대로 행동한다면 그들이 세워지겠습니까? 안 세워지겠습니까? 안 세워집니다. 그러니까 저들의 유익을 위해서는 정신들은 것처럼 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둘 다 중요합니다. 이러한 사람이 진실로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그러한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함이 있고, 사람들은 어떨지 몰라도 그 중심에서부터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운데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 앞에서는 아름답게 포장해서 진실하고 거룩할지 모르지만, 그 중심은 바리세인처럼 썩어서 온갖 세상의 죄와 탐심과 탐욕으로 가득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버림받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과 동행함에 있어서 이러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멘,

사도 바울은 십자가에 의한 삶을 살았습니다. 고후 5:14-15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자 보세요. 참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단순히 십자가를 전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고린도 전서 1장에서 늘 살펴본 것이 참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 인격체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십자가에 관한 몇 가지 사실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2장에서는 뭐라고 그랬어요? 자기는 십자가에 목 박히신 그분만을 알기 원했다고 했습니다. 잘 들으세요.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인격체이십니다. 사람들이 우리의 죄를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성령의 조명으로 만나게 될 때, 놀랍게 변화됩니다. 십자가에 관한 몇 가지 이론을 들어서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인격체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 그분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인격체이시기 때문에 자신이 먼저 그 예수님을 진실로 알기를 원했습니다. 그 당시 거짓 사도들도 당연히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여기서부터 차이가 납니다. 물론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들도 당연히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가 먼저 예수님을 알기를 사모하지 않았습니다. 제 말은 뭐냐 면 사도는 자기가 먼저 예수님을 알기 원했기 때문에 여기 보면 ‘주님의 사랑이 나를 강권 한다’고 그랬습니다. 이 말의 뜻은 자기는 그저 사역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그냥 전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자기의 삶의 목표는 인격체이신 예수님을 자기 자신을 위해서 먼저 아는 것이 그의 목표였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과의 교제 가운데서 그 십자가의 사랑과 능력을 말로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십자가의 능력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큽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셨는데, 말로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십자가의 사랑을 날마다 경험한 사람입니다. 여기에 보면 날마다 체험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이 자기를 강권한다고 그랬습니다.

여러분 우리를 주님이 사랑하십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내어주신 만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내 속에는 어떠한 감동도 없으면서 이렇게 말하기 쉽습니다. 옆 사람에게 말하기 쉽습니다. 또 주일학교나 중. 고등부에서 아이들 가르칠 때 그러기 쉬습니다. 목사가 설교할 때도 그렇게 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얼 만큼 사랑하시느냐 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실 만큼 사랑하십니다. 내 속에는 그 사랑에 대한 감격도 없으면서 말입니다. 그 말은 맞습니다. 그런데 별로 파워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한다.’ 이 말 한마디 속에서 뭐를 볼 수 있느냐 면, 사도 바울은 그냥 이론적인 사실을 아는 것을 전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먼저 그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만을 알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것이 신앙의 본질이었기 때문에, 그 십자가의 능력을 실재로 경험한 사람이요. 그 사랑을 경험한 사람이요. 그 사랑이 자기를 움직여 가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그래야 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십자가의 사랑을 전하는 것은 많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그 십자가의 능력을 경험한 사람은 적습니다. 그 십자가의 사랑이 내 속에서 나에게 감격을 주는 사람은 적습니다. 이 면에서는 저도 더욱 더 진실로 주님을 더 알기를 원해야 됩니다. 물론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 자신이 먼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알기를 원해야 합니다. 그 사랑, 그 능력, 그 십자가의 능력을 알기를 구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그 사랑이 강권했다고 그랬습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많이 인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해서 사역할 때는 그 사랑으로 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내가 그 사랑이 나를 강권하지 않으면 나는 그 삶을 안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보아도 바울은 자기가 먼저 그 삶을 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의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이론적으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아멘, 저와 여러분은 그렇게 될 줄로 믿습니다.

또 십자가의 삶을 사는 증거가 뭔지 아세요?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예수님이 대표로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연합되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의 죽음이요.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이고, 예수님의 승천이 우리의 승천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권세가 우리의 권세, 에베소서 1장. 2장에서, 그 놀라운 일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사도 바울은 그것을 이론적으로 전하고 있지 않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자기가 먼저 알기를 원하고, 그 예수님을 사랑하기 원하고, 주님의 그 영광을 더욱 보기 원하는 가운데. 그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자기의 옛 사람이 죽은 것을 깨닫고 있고, 그래서 주님이 나를 위해 돌아가신 것은 이제 더 이상 나를 위하여 살 것이 아니라 내가 주를 위하여 살도록 주님이 부르셨다는 것을 알기에 자기는 지금 그 십자가의 능력을 의지하여 주님을 위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의 의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사랑뿐만 아니라 그 삶에 있어서도, 그러니까 그 속에 하나님을 경외함이 있습니다. 말이 아닌 경외함, 그러니까 성도를 대할 때, 하나님의 진실함과 거룩함으로 할 수 있고, 사역이 자기의 욕심을 위한 어떠한 구실이 아니고, 사람들은 비방할지 몰라도, 그처럼 겸손하게 헌신적으로도 할 수 있고, 그 다음에 ‘내가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그러한 삶을 살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주님을 그렇게 찾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저녁예배는 낮 예배보다 더 헌신된 분들이 많이 나오는데, 그래서 여기에 교사들도 있고, 각 사역의 리더들도 있고 하는데, 우리가 진실로 먼저 십자가의 삶을 살아야 됩니다. 우리가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나의 유일한 목표와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내 자신이 그 십자가의 감격을 경험하게 되고, 그 능력, 그래서 십자가에서 내 옛 사람이 파괴되고, 세상을 향한 내 정욕이 파괴된 것을 경험하며, 믿음으로 주님을 의지하여 내 속에 십자가의 승리로 인하여 세상 세상이 파괴되고, 사단의 권세가 깨뜨려지고, 사단의 정죄함이 파괴되고, 세상에 대한 집착이 깨뜨려지고, 주를 향한 열망이 내 속에 샘솟는 것을 우리가 경험해야 됩니다. 그래서 주님이 날 위해 죽으심으로 내가 죽었고, 이제는 주를 위해 내가 사는 그것이 나의 삶인 것을 내가 경험되어져서 그 삶을 살게 되고, 우리가 그 삶으로 다른 사람을 가르칠 때에 하나님이 더욱 놀랍게 역사하실 것이고, 다른 사람에게 십자가를 전할 때, 그것이 단순한 이론이 아닌, 참으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사도 바울이 전한다고 했는데, 그러한 삶을 살 수 있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들이 먼저 그렇게 살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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