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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단원 4과 기름부음과 스티그마

성경공부교재/십자가의복음

by 발의무리 2007. 8. 23. 09:28

본문

 

제7단원 성령에 의한 삶

제4과 

기름부음과 스티그마


우리는 성령께 민감하여 순종할 뿐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령의 능력의 나타나심은 오순절날 그랬던 것처럼 종종 다양한 현상들을 동반합니다. 하나님의 부흥이 있었던 때마다  다양한 현상들이 나타났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일부 성도들은 이 현상의 문제 때문에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 마음을 닫습니다. 하나님의 부흥이 일어날 때마다 일부 사람들은 이러한 현상들 때문에 부흥을 대적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스티그마의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스티그마


주님을 따라가는 길에는 스티그마를 져야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스티그마를 지니고 다닌다고 말했습니다(갈 6:17). 우리말에 흔적이라고 번역된 단어가 헬라어로 󰡐�스티그마󰡑�입니다.


(갈라디아서 6: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스티그마는 헬라어의 󰡐�스티그마󰡑�라는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스티그마의 동사형인 󰡐�스티조󰡑�는 󰡐�문신을 새기다󰡑�, 󰡐�날카로운 도구로 표시를 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대 헬라 세계에서 스티그마는 뜨거운 쇠도장으로 몸에 새겨진 문신이나 표시를 의미했습니다. 그것은 주로 도망하거나 물건을 훔친 노예들에게 새겨졌습니다. 그래서 스티그마를 지니는 사람은 부정직한 사람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주님과 동행하면서 스티그마를 져야 한다는 것은 우리 삶에 예수 믿는 흔적 혹은 열매가 보여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의 종된 󰡒�수치의 요소󰡓�를 기꺼이 지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그 스티그마를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볼 때, 스티그마는 성경에 나오는 󰡐�스칸달론󰡑�과 유사한 것입니다. 󰡐�스칸달론󰡑�이라는 헬라어 단어에서 스캔달이라는 영어 단어가 나왔습니다. 󰡐�스칸달론󰡑�은 사람들로 하여금 걸려 넘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는 󰡐�스칸달론,󰡑� 즉 거치는 것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고전 1:23, 갈 5:11).


삼위일체 하나님의 스티그마


삼위일체 하나님 모두 스티그마를 가지고 계십니다. 영국 웨스터 민스터 채플의 담임목사인 R. T. Kendall은 그의 책 『Anointing』에서 이 점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의 스티그마는 그 분의 주권입니다. 하나님은 주권자로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하시고, 하나님께서 원하실 수 있는 것을 말씀하실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기준을 따라서만 가능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됩니다.


성자 예수님의 스티그마는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나아감에 있어서도 철저하게 자기-의를 버리고 오직 십자가의 공로를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이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편협한 것이라고 비방하게 만드는 스티그마입니다.


성령 하나님의 스티그마는 그 분 자신입니다. 그 분의 임재 자체가 많은 사람을 넘어지게 만듭니다.


그런데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온전한 연합이 있듯이, 각 스티그마도 서로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주권 아래 살며, 오직 십자가의 공로만을 의지하고 서 있는 사람은 성령의 행하심에 대해서도 열린 마음을 가지고 환영합니다. 그러나 반면에 전통적인 이해에 따라 소위 신앙생활을 잘 하지만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지 아니하며, 율법주의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성령의 역사에 의해 걸려 넘어집니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를 대적합니다. 결국 어떤 사람이 성령께 대해 어떠한 반응을 보이느냐 하는 것은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그 사람의 진정한 자세를 나타내 보여줍니다.


스티그마의 목적


스티그마의 목적은 사람들의 중심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2:34-35을 읽고, 다음의 물음에 답하십시오.


(누가복음 2:34-35)

34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여 비방을 받는 표적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하더라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의 어떻게 됨을 위하여 세움을 입었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또한 무엇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렇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성경은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의 패함과 흥함을 위해 세움을 입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의 흥함을 위해 세움을 입었다는 말은 쉽게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패하게 하기 위해서 세움을 입었다니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방문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축복과 심판을 동반합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에 대해서 사람들이 어떠한 자세를 취하느냐에 따라 축복과 심판으로 갈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항상 사람들을 거치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사 8:13-15). 그래서 올바른 중심을 가지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오지 않는 자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선입견과 편견을 가지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판단하게 될 것이고, 그것을 비판하고 심지어 대적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바로 이러한 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비방 받는 표적이 될 것을 말씀하시고, 또 그러한 자들이 바로 패함을 입을 자들인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사람들의 중심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이사야 8:13-15)

(13)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로 너희의 두려워하며 놀랄 자를 삼으라 (14) 그가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거민에게는 함정, 올무가 되시리니 (15) 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거칠 것이며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걸릴 것이며 잡힐 것이니라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대로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그렇게 넘어지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가진 지식과 전통을 가지고 예수님을 판단하고 평가하고 대적했기 때문에, 그들의 영적인 눈은 더욱 어두워졌을 뿐 아니라, 그들에게 결국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습니다.


⑴ 베데스다 연못가의 예


요한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삼십 팔년 된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고치실 때, 예수님은 그에게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말씀하셨고, 그는 즉시 고침을 받고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그 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러자 그것을 본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더욱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게 하심으로써, 안식일을 범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을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안식일에는 일을 하지 말라는 명령을 철저하게 지키기 위해 그 날에는 어떠한 물건도 옮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대적하고 핍박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에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그러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전통적인 안식일관을 어겼을 따름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왜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더욱 대적할 줄을 뻔히 아시면서, 그렇게 하셨느냐는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그 사건을 설명하시면서 말씀하셨듯이 예수님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그 일을 행하셨습니다(19-20절).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도록 하셨습니까? 그 자리는 매우 더러운 것이었을 것입니다. 아무 쓸모도 없는 물건이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지 않으셨더라면, 유대인들이 대적할 구실은 더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스티그마입니다.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심으로써 유대인들 속에 진정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도 없는 것을 드러내셨습니다(37-38, 42, 46-47). 그들의 신앙이 그저 전통에 따라 의식의 나열과 인간적인 가르침의 집합에 불과한 것임을 드러내셨습니다(마 15:7-9). 그리고 그 결과 그들의 마음은 더욱 강팍하게 되었고, 그들의 눈은 더욱 어두워졌고, 그들의 귀는 더욱 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마 13:14-15).


(마태복음 15:7-9)

(7)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8)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9)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마태복음 13:14-15)

(14)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우리들이 하나님의 행하심을 주시하여 보고 그 행하심에 우리의 전 존재로 동참하려면, 반드시 제3단원 영적 분별력에서 살펴본 것과 같은 겸손한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걸려 넘어집니다.


각 세대는 그 세대의 스티그마를 가집니다.


각 세대는 그 세대의 스티그마를 가집니다. 그리고 그것에 의해 그 세대의 성도들은 자기들의 믿음을 시험 받을 것입니다. 어제의 스티그마는 오늘은 더 이상 스티그마가 아닙니다. 그것들은 쉽게 받아들여집니다.


마태복음 23:29-32을 읽고, 다음의 물음에 답하십시오.


(마23:29-32)

(29)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30)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예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31)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 (32)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바리새인들은 예레미야나 이사야와 같은 과거의 선지자들을 어떻게 받아들였습니까?


                                                                      


예수님은 그러한 바리새인들의 자세를 어떻게 보셨습니까?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바리새인들은 자기 조상들이 핍박하고 심지어 죽였던 과거의 선지자들을 참다운 선지자로 인정하고 그들의 무덤을 단장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바리새인들의 자세를 외식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도 그들의 조상과 똑같은 자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조상들은 예를 들어 예레미야나 이사야와 같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 선지자들을 거짓 선지자로 핍박하고 심지어 죽이기도 했습니다. 그 선지자들의 하는 행동이나 전하는 메세지가 그들을 거슬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중심에서부터 하나님을 사랑하는 올바른 자세가 없었기에 하나님의 종들을 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대적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과거의 그 선지자들이 참다운 하나님의 선지자들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심지어 자기들이 그 시대에 살았더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시대에 보내진 하나님의 아들을 그들의 조상들처럼 똑같이 대적하고 핍박하고 심지어 죽였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조상과 똑같은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960년대 우리나라에 성령의 바람이 놀라웁게 불어닥칠 때, 많은 교회들과 성도들은 다른 성도들이 방언하는 것을 보면 이단이라고 대적하고 핍박했습니다. 오늘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방언은 오늘날 더 이상 스티그마가 아닙니다. 오늘날은 오늘날의 스티그마를 가지고 있습니다.


스티그마의 종류


기름부음에는 여러 가지 스티그마가 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두 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⑴ 우리가 져야 할 스티그마 중의 하나는 외로움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진실을 말해 줄 수 있는 참다운 친구가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궁극적으로 하나님 앞에 홀로 서야 합니다. 예수님이 당연히 그러셨고, 사무엘, 모세, 아브라함, 엘리야, 바울 등 하나님의 사람들은 다 그랬습니다.


⑵ 가장 고통스러운 스티그마 중의 하나는 오해받는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들은 평생 동안 사생아를 낳은 사람들로 오해를 받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아이가 잉태 되었다고 설명한다고 해서 그 오해가 풀릴 것 같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더욱 비웃었을 것입니다.


십자가 위의 예수님, 벌거벗고 다니는 이사야, 자기가 세워 놓은 왕을 버리고 다른 사람에게 기름 붓는 사무엘 등 모두 오해받는 스티그마를 진 분들입니다. 특히 그 스티그마의 고통스러운 점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서도 오해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지나가는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았을 뿐 아니라, 제자들로부터, 가까이 따라 다니던 여인들로부터, 그리고 가족들로부터 오해를 받으셨습니다.


많은 경우에 이 스티그마는 우리들이 자신을 변명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건, 이사야건, 사무엘이건 그 분들은 한 번도 자신을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스티그마는 그저 스티그마로 우리 삶에 남아 있도록 하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성령의 움직이심을 따라 온 삶으로 동참해야 합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섬기는 삶


이러한 스티그마들이 있기 때문에,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주님을 따르는 삶에는 몇 가지 중요한 자세들이 요구됩니다.


 첫째, 주님을 위해 기꺼이 바보가 되고자 하는 자세입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은 스티그마와 함께 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성령의 기름부음 가운데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려면, 사도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주를 위해 기꺼이 바보가 되고자 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고린도전서 4:10).

(고린도전서 4:10)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둘째, 담대함입니다.


주님을 따르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는 담대함입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그것과 같이 오는 스티그마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시면서 그렇게 담대함을 강조하셨습니다(수 1:5-7, 9). 여호수아는 결코 심약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 보고하는 그의 자세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솔하여 블레셋과 전쟁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민 14:1-9, 출 17:10-13). 그런데 그에게 그토록 담대함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셋째,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공통분모만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는 것입니다.


성도들 사이의 관계는 오직 더 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온전히 헌신하는 관계에서만 의미를 갖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이 모든 관계의 공통분모가 되어야 합니다. 어떤 인간적인 끈이나 단순한 인간적인 충성심이 성도들이나 사역자들을 묶는 끈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우리는 주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넷째, 하나님의 평가만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예수님이건 사도 바울이건 하나님의 사람들은 다 그랬습니다(요 5:41, 갈 1:10, 살전 2:4).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요 5:44). 우리들이 하나님의 평가만을 소중히 여기는 자세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기름부음과 함께 하는 스티그마 때문에 주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5:41)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갈라디아서 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데살로니가전서 2:4)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요한복음 5:44)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이과의 요점


♡ 성령의 기름부음에는 스티그마가 있습니다.

♡ 스티그마는 사람들의 중심을 들어내기 위한 것입니다.

♡ 그러므로 주님 앞에 겸손한 자세가 필수입니다.

♡ 주님과 동행하려면 기꺼이 스티그마를 지는 자세를 가져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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