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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노하는 무리

시리즈설교/침노하는무리

by 발의무리 2007. 9. 6.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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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노하는 무리(이사야서 하반부)



 

“예루살렘이여 내가 너의 성벽 위에 파숫군을 세우고 그들로 종일 종야에 잠잠치 않게 하였느니라 너희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아 너희는 쉬지 말며 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62장 6절)
  
이사야서 42장부터 66장 사이에 보면 하나님의 백성의 회복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다고 그랬습니다. 거기에 보면 예언이 크게 세 가지라고 볼 수 있는데, 첫째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복될 것을 예언하고 있고, 그 다음에 예수님의 구속을 예언하고 있고, 더 나가서 거기에 보면, 하나님 백성의 회복, 그러니까 교회의 회복과 이방인들 뭇 백성들을 구원할 대 추수,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부흥과 교회회복에 대한 예언이 들어있다는 부분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섞여있고,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면서 이를 위해 하나님이 쓰시는 종들이 나오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는데 고레스 왕이 쓰임 받았고, 예수님의 구속, 새 이스라엘인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일을 위해서 메시야이신 예수님이 오셔서 그 일을 이루셨고, 특별히 이사야서 그 하반부는 고난의 종으로 오실 메시야에 대해서 예언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집중적으로 자세히 살펴보고 또 우리에게 현시점에서 의미 있는 부분이 하나님의 부흥과 교회회복, 그러니까 교회회복이란 말은 하나님의 백성의 회복이고, 하나님의 부흥이란 말은 하나님의 백성이 회복될 뿐만 아니라, 안 믿는 세상의 잃은 영혼들이 수없이 주께로 인도되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누구를 사용하시냐 면 침노하는 무리를 사용하신다. 하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불충한
이스라엘
교회
새 이스라엘



자! 그러면서 침노하는 무리가 누구냐? 하는 것을 살펴보기 위해서 최근에 이사야서 하반부를 통해서 부흥의 본질이라는 책을 쓴 지금 전 세계적으로 알파코스를 총 책임지고 있는 ‘릭키 검불’ 목사님이 이것을 아주 잘 표현해 놨습니다. 그러면서 여기 이사야서 하반부에 종과 종들이 단수로 나오고, 복수로 나옵니다. 지금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 그 속에 들어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고난의 종으로 오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을 종으로 부르고 있고, 더 나아가서 금방 말씀드린 그 예언적인 혹은 그 침노하는 무리 그러한 종에 대해서도 들어있습니다.

우리가 어제 보았듯이 그래서 이 관계를 그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느냐? 그래서 이것을 잘 표현한 것인데, 이것은 지금 십자가를 옆으로 그려 논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충한 종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이스라엘을 완성한 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래 그림은 십자가로 예수님을 표현한 그림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그러니까 이렇게 세워 논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로 딱 정점으로 귀결되어져서 예수님으로 완성되어지는 것처럼, 사실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 백성의 완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불충한 이스라엘의 완성이요. 순종하는 하나님의 종인 참 이스라엘의 완성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참 이스라엘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예언들이 완성되어질 뿐만 아니라 성경에 보면, 예수님 안에 거하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주신 약속들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너희가 자녀이면 후사요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이 말은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니 그 말입니다. co -  heirs with Christ 영어에 보아도 그렇게 나와 있듯이 그래서 공동상속자라고 말하고, 에베소 1장 2장을 보아도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주신 모든 권세가 우리에게도 정확하게 주신 것이라고 말씀하는 등 그러한 여러 가지 성경을 볼 때에 이렇게 예수님을 완성하셔서 참 이스라엘이 되셨고,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게 될 때, 하나님이 주신 그 모든 약속들이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복수가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이들이 바로 침노하는 무리들입니다. 그래서 이런 교회회복과 하나님의 부흥에 대한 역사들이 이 침노하는 무리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하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교회사를 보더라도 그 하나님의 부흥이 임할 때마다 하나님이 이렇게 정확하게 그러한 침노하는 무리들을 세우셨습니다. 우리가 어제 밤에 한 가지 그 특징들을 살펴보았는데, 그래서 특별히 말세지말인 이때에, 과거 어느 때보다 놀라운 하나님의 부흥이 예비 되고 있습니다. 그 조짐들이 전 세계적으로 우리 가운데 보여지고 있고, 성경이 그것을 분명히 예언하고 있고, 요한계시록을 보아도 알 수 있고, 그 외에 여러 성경구절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엘서 2장에 보면 내가 말세에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라고 했고, 그래서 오순절 날 하나님의 성령이 임했을 때, 일부 비방하는 사람들에게 베드로가 일어나서 하는 말이 지금은 낮이지 않느냐 이 사람들이 술 취한 것이 아니고, 바로 요엘서 2장의 그 약속이 이루어진 거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면 요엘서 2장에 나오는 말세에 내 영을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라는 그 약속은, 오순절 날 이루어졌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느냐.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말세라는 것은 성경적으로 신학적으로 보면, 예수님 초림 때부터 재림 때까지가 말세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요엘서 2장에 약속은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주어진 약속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부흥의 역사를 보아도, 부흥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성령으로 강력하게 한 지역, 혹은 한 국가에 임하셔서 교회를 회복시키시고, 하나님의 백성을 회복시키시고, 안 믿는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때로는 그 지역 전체의 도덕적인, 그러한 영적인 분위기까지 완전히 바꾸시는 그런 역사들을 부흥이라고 그러는데, 이러한 부흥의 역사들을 보더라도 하나님께서 그 요엘서 2장에 약속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성령을 부어 오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부흥의 시대마다, 그러니까 부흥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말하기를 부흥은 오순절의 반복이다라고 말하는 이유가 뭐냐 면, 이렇게 오순절은 하나님의 성령이 쏟아 부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 그러면 이것이 오순절 날 성취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약속은 예수님의 초림부터 재림까지가 다 말세인데, 그 모든 시대에 주어진 약속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도 그 약속에 대하여 말씀하면서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의 자손, 그리고 모든 먼데 있는 사람, 여호와께서 얼마든지 부르는 그러한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라고 말함으로서, 이것이 모든 시대에 되어질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무엇을 볼 수 있냐 면, 말세지말이 되어질수록 이것이 급속도로 가속화되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보아도 알 수 있고 아까도 말한 다른 구절들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말세지말에 이런 부흥이 임하되 전래 없는 부흥, 과거 어느 시대에도 없었던 가장 강력한 부흥이 말세지말에 부어질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면 아까 말씀드린 하나님의 부흥과 교회회복, 이것 또한 침노하는 무리에게 주신 거라고 하면서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교회에게 주신 약속인데, 그것이 이루어지되 말세지말이 다가올수록 이것이 더 강력하게 가속화되어질 것이고, 어느 때보다 더 강한 하나님의 부흥이 말세지말에 일어나게 될 것이고, 어느 때보다 더 큰 대 추구가 말세지말에 일어날 것이라고 성경에 예언하고 있지 않습니까. 요한계시록에서도 명백히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모든 시대에 해당하는 것인데, 말세가 될수록 가속화되어지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임하셨던 부흥의 모든 시기를 보더라도 하나님이 침노하는 무리들을 세우셔서 그들을 통해서 역사하셨습니다. 그 침노하는 무리들이 이사야서 하반부에 나오는 정확하게 똑같은 특징을 가진 무리들입니다. 바로 그 침노하는 무리입니다.

그러니까 침노하는 무리는 교회를 가리키는데, 믿는 사람들을 가리키는데, 왜 침노하는 무리라고 말씀드렸냐면, 우리가 그냥 예수 믿는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뜻이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침노하는 무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우리 가운데 자동적으로 하나님 뜻이 이루어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침노하는 무리는 누구냐? 침노하는 무리를 제가 정의하기를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자신의 모든 것으로 하나님에 행하심에 동참하는 자들이 침노하는 무리라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은 침노하는 무리를 세우십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어제 밤에 살펴보았던 게 뭐냐 면, 이렇게 이스라엘의 완성 참 이스라엘이 예수 그리스도인데, 그리고 그 예수님이야말로 침노하는 무리의 모델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 예수님의 삶을 보아도 예수님이 철저하게 침노하는 무리를 예비해 오셨던 것을 볼 수 있다 하는 것을 우리가 살펴보았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사도행전에 하나님의 부흥의 모델인 오순절을 보더라도 오순절이 있기까지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3년 반을 통해서 무엇을 하셨냐면, 예수님은 침노하는 무리를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날 목회자적인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의 사역은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예수님의 사역이 실패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 목회자들의 관점이 틀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이 무슨 이야기냐 면, 예수님을 통해서 그렇게 놀라운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죽은 자들이 살아나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이십 세 이상 어른만 오천 명, 아이들까지 이만 명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고, 뭐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것은 부지기수고, 눈먼 자가 눈뜬 것은 부지기수고, 몸이 뒤틀린 자들이 그 자리에서 펴지는 것도 부지기수고, 문둥병자가 오늘날로 말하면 암과 같은 그런 환자가 그 즉시 깨끗함을 받는 경우도 부지기수인데, 또 누구보다 예리한 말씀, 이 놀라운 능력, 그러기 때문에 그 많은 사람들이 굶어가면서까지 예수님을 따랐는데, 한꺼번에 수만 명이 예수님을 따랐는데, 그 정도의 말씀과 그 정도의 능력과 그렇게 사람들이 사모하는 예수님이라면, 오늘날 관점에서 최소한 몇 십만 명의 모이는 교회의 목회를 해야 당연히 성공한 목회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제 말이 틀립니까? 최소한 예수님은 몇 십만 명은 되는 목회를 했어야 오늘날로 말하면 성공한 목회자라고 우리는 그렇게 말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그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달려올 때, 예수님은 마치 사람을 떨어뜨리려고 작정한 분 같았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언급하면서 너희가 나를 따르려면 네 자식, 네 남편, 네 아내, 네 부모를 미워하지 않으면 내게 합당치 않다. 이 말은 진짜 미워하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너희의 사랑과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하는 너희의 사랑을 비교해보면, 가장 가까운 사람에 대한 너희의 사랑이 미움이 될 만큼, 하나님을 무엇보다 더 사랑해라. 너희의 모든 것으로 사랑하라 그 말입니다. 여러분 이 말이 받아드리기 쉽습니까? 사람들에게 그러니까 많음 사람이 실망했습니다. 부담이 되고, 상처가 됩니다. 저는 하늘나라 가면 모세에게 꼭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하늘나라 가자마자 모세를 만나면 그걸 물어볼 겁니다. 제가 한 가지 추측하는 게 있는데 뭐냐 면, 어쩌면 모세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제일 많이 사용했을 말이 상처받았다는 말일 것입니다. 자기들을 누가 데려가라고 그랬습니까. 그래서 왔는데, 오니까. 홍해가 앞에서 가로막고, 뒤에는 애굽 군대가 좇아 와, 그러니까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하고 울부짖어 더니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하시는 말이 이 불신자들아, 그러니 얼마나 상처받았겠습니까. 그들의 입에서 날마다 하는 이야기가 상처라는 이야기였을 겁니다. 예수님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그렇게 사모해서 나오는데, 예수님은 그랬습니다. 그랬는데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깐 이마 또 깐다고 사람들이 흔들리기 시작하고, 제자들은 아이구 예수님 그렇게 하면 다 떠날 텐데, 아마 그렇게 염려했을 것 같습니다. 안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좆지 않으면 나를 따라올 수 없다. 네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목에다 십자가 목걸이 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네 남편이 십자가야, 그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당시에 십자가 지고 가는 사람은 뭐 하러 가는지 뻔히 알았습니다. 그것은 죽으러 가는 것입니다. 십자가 지라는 말은 죽으라는 이야기입니다. 무슨 말이냐 면, 오늘날 우리가 예수 믿어도 자기가 세상에서 원하는 것, 자기가 세상에서 목표하는 것, 자기가 세상에서 누리고자 하는 삶에 어떤 일정한 수준, 자기가 구하는 것 이것이 다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예수를 믿어도 이것을 채워달라고 예수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와서, 그것이 부이건, 사업의 성공이건, 자녀의 출세 건, 아니면 내 인생의 만족이 건, 어떠한 삶에 보람이건, 사람 앞에 인정받는 것이건, 혹은 내 꿈의 어떠한 성취 건, 내 사역의 확장이건, 사람마다 다를지 모르지만 자기가 원하는 바가 있습니다. 자기의 의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것을 뒷받침 해주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어떠한 메시지를 듣기를 원하는지 아십니까. 이것을 뒷받침 해주는 메시지를 찾습니다. 그걸 뒷받침 해주는 교회를 찾습니다. 그것이 말하면 소위 은혜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정확하게 말씀하시는 바는 뭐냐 면 이것 버리라는 겁니다. 이거 죽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라는 말은 그것 십자가에 매 달아라 그 말입니다. 그거 박살내고 내 의제를 택하라고, 그거 박살내고, 내가 가지고 있는 너를 향한 삶의 목적, 삶의 이유, 삶의 목표, 내 의제를 택하라고 하니까 사람들이 대단히 싫어했습니다.

그러니까 또 흔들리기 시작하는데,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까지 하십니다. 너희가 만 명의 군사를 가지고 이만 명을 대적하러 나갈 때, 계산해 보고 나가지 않겠느냐? 만약 계산을 안 해보고 나가서 중간에 싸우다 보니까 지게 생겼다면, 그럼 어떻게 되겠느냐, 차라리 시작하지 않는 만 못하지 않느냐. 그 말은 무슨 말이냐 면, 나를 따를 때, 나를 따르는 대가를 분명히 알고 따라야지, 따르다 보니까 예수님 따르는 것이 장난이 아니라서 중간에 포기하면 아예 따르지 않은 것만 못하지 않느냐, 그러니까 분명히 그 대가를 계산하여 보고, 나를 따르라 그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시고 난 다음에 뭐라고 말씀하시냐면, 너희가 너희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네게 합당치 않다. 그 말을 들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말하면서 하나님 나라는 숨겨진 보화를 찾는 자 같으니, 보화를 발견하고 자기의 모든 것을 팔아 그 땅을 샀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에서 가장 값진 진주를 구하는 자 같으니 발견하면 자기의 모든 것을 팔아서 그 진주를 샀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나라가 우리의 모든 것으로 사는 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말씀드린 대로 부자 청년은 그렇게 사모하고, 사람들 앞에서 자기의 체면 구겨지는 것, 그야말로 그는 개의치도 않았고, 그가 속해있는 상류 사회에서 거지 대장으로 평가받는 그 예수님에게 나오기를 니고데모는 예수님께 열린 마음이 있었어도 창피하니까 밤에 찾아왔는데, 이 부자 청년은 대낮에 사람들 앞에서 그것도 달려와서 무릎을 꿇고 영생을 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좆으라 고, 진실로 그를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의 길을 알려주셨는데, 그는 그의 소유가 많음으로 근심하며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120명밖에 안 남았습니다.

그럼 예수님의 사역은 뭐 하는 사역이야? 예수님은 사람을 떨어뜨리는 게 목적이었느냐? 아닙니다. 예수님은 뭐 하는 자들이 찾으셨느냐 면, 하늘나라의 가치를 보는 자들을 찾으셨습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가장 값진 진주를 발견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사람이 자기 재산 파는 것은 문제가 안 될 겁니다. 왜요? 자기 제산 가지고는 비교도 안될 만큼 값진 것인데, 그런데 그 값을 모르면 자기 재산 파는 것은 어렵습니다. 무슨 이야기냐 면, 어떤 자들만 주님을 따르게 되어있었냐 면, 베드로가 우리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를 좆아 사오니 라고 말했던 것처럼, 모든 사람이 떠나갈 때, 베드로가 영생의 말씀이 여기 있사오니 우리가 어디로 가오리까? 말했던 것처럼, 어떤 자들이 주님은 찾느냐 면,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자기의 전 존재로, 모든 것으로 주님을 따르는 자들을 찾으셨습니다. 사실 그것이 교회이어야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오늘날은 사람 잡아두기 급급합니다. 할 수만 있으면 어떻게 하면 사람을 데려오나 하고, 그래서 그들이 원하는 메시지를 줍니다. 그러면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사역하는 방법이 너무나 다릅니다. 지금까지 무엇을 말씀드렸냐면, 이처럼 예수님의 사역은 침노하는 무리를 준비하는 사역이었습니다. 왜 그게 중요하냐면 하나님의 부흥이 오려면 반드시 침노하는 무리가 예비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서 54장 1절에 보면, 거기에 보면 잉태치 못한 자, 생산치 못한 자, 구로치 못한 자, 남편 없는 자가 남편 있는 자보다 더 자식이 많이 났게 될 것이고, 했습니다. 제 이야기는 설교를 어렵게 해서 사람들 떨어뜨려야 옳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 떨어뜨리는데 목적이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희석시키지 않았을 뿐입니다.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어제 살펴본 게 뭐였냐 면 이 부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침노하는 무리를 세우시되 어떻게 침노하는 무리를 세우셨느냐. 예수님의 사역을 보면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었는데,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전하고, 하나님 나라의 능력의 사역을 감당하시는 것이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였다는 그 말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침노하는 무리를 세우셨다 그 말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하나님 나라의 사역은 사도들의 삶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을 보면, 정확하게 오늘날의 말로 표현한 게 뭐냐 면 십자가의 복음과 성령의 사역입니다. 예수님은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을 전 존재로 사랑하는 것을 전했고, 하나님이 유일한 우리의 삶의 목표요. 목적이요. 모든 것인 삶을 전했고, 예수님은 십자가의 복음을 전했고, 성령의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바로 그래서 십자가의 복음과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 예수님은 바로 침노하는 무리를 세우셨는데, 예수님은 어떠한 반대도 무릎 쓰고 아버지가 오늘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하면서 줄기차게 앞만을 바라보고 십자가의 복음과 성령의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심으로, 그 다음에 이 침노하는 무리를 세우기 위해서 예수님의 삶을 보면, 두 번째 한 것이 뭐였냐 면, 예수님은 제자 양육을 하셨다는 겁니다.

제자 양육이란 말을 제가 그것을 별로 그렇게 잘 안 부르려고 한다고 그랬습니다. 왜냐 면, 오늘날 제자 양육하면 제자 훈련시키는 것처럼 이렇게 말하는데, 제가 말하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올 때, 사람들이 많이 몰려온다고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왜냐 면, 우리가 어제 요한복음 6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사람들이 와서 예수님이 메시야라고, 하나님이 그 입술에 하나님의 말씀을 주셔서 우리에게 반드시 들으라고 명령하신 바로 그 선지자 메시야라고, 그래서 자기들의 왕 삼으려고 했던 그 사람들이 바로 다음 순간에 돌아가면서 하는 말이 도대체 예수님이 가르치는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하면서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은혜 받았다고, 이렇게 저렇게 칭찬하는 것 예수님에게는 별 의미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공공연하게 대적하는 그 수많은 종교지도자들이 있는 반면에, 예수님을 사모하여 그 많은 사람들이 달려왔으되 이들은 대적하는 자들과는 전혀 다르게 그렇게 사모하는 자들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에게는 별 큰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길을 선명하게 전하시면서 두 번째 예수님이 하신 것이 뭐였냐 면,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는 자들을 찾으셨습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전 존재로 주님을 따르는 자들을 찾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신의 삶을 투자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하신 일입니다. 오늘날 목회자로서 침노하는 무리를 세우려면 이렇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에게 그대로 배워야합니다.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건 아까도 말씀드린 대로 그렇게 많은 사람이 왔다가 다 떨어져 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사람들 붙잡아 놓기 위해서 메시지를 희석시키거나 사람들 앉혀놓기 위해서 그들이 좋아하는 메시지를 전하거나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것을 연구하여 그들에게 원하는 것을 주거나 이러한 자세를 가지고는 우리가 원하는 세상에서 생각하는 성공적인 목회는 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부흥과 교회회복을 위해서 주님의 부흥을 담을 쓰임 받을 침노하는 무리를 세우는 일을 절대로 돼지지 않습니다. 될 수가 없습니다. 안됩니다. 그럼 침노하는 무리가 세워질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전해야 합니다. 제가 십자가의 복음이라고 한마디로 요약해서 말한 것, 전체 신앙의 본질이 포함된 십자가의 복음과 성령의 사역을 예수님께서 하셨던 것처럼, 줄기차게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든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사람들이 좋아하든지 싫어하든지 하나님의 길이니까 전해야 합니다. 그것이 사도들이 전했던 복음,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복음입니다. 집중적으로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동참하는 자들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신의 삶을 투자해야 됩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이것을 더 배우기 원합니다. 여러분 씨 뿌리는 비유에서도 나오지만 거기 씨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예수님께서 전했습니다. 그 당시 그리고 그 말씀을 전할 때, 그 받는 사람들이 네 종류가 나옵니다. 길가와 같이 딱딱하여 자기의 편견을 가지고 자기의 종교적인 어떤 틀을 가지고 안 받아드린 자들, 이것이 종교적인 지도자들인데 이것이 길가와 같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전혀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보면 또, 돌밭이 나오고 가시밭이 나옵니다. 이들은 받아드린 자들입니다. 이들이 누구냐 면 바로 그 기적을 보고, 그 말씀을 듣고 은혜 받아 가지고 예수님을 그토록 사모함으로 따랐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결국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말씀으로 인해서 그들에게 대가가 요구될 때, 조종이 요구될 때, 핍박이 올 때, 어려움이 닥칠 때 그들은 다 떠나갔습니다. 그들 중에 어떠한 세상에 대한 집착이 내려지지 않아서 떠났습니다. 그것이 돌밭에 떨어진 씨앗이고 가시밭에 떨어진 씨앗입니다. 그래서 그 따르는 수 만 명 가운데서 120명을 제외한 그 나머지가 거기에 다 속한 자들입니다. 그러면 좋은 밭이 누구냐? 보고 깨달은 자들입니다. 본 자 들이고, 그들이 바로 제자들입니다. 120명, 그들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을 거라고 그랬는데, 보십시오. 베드로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여러분 그 당시 베드로하면 사람들이 아는 사람 누가 있었습니까. 같은 동네 사는 사람들이나 베드로가 누군지 알지, 베드로하면 그 사람 들어본 사람 아무도 없었습니다. 갈릴리 호수에 있는 일개 어부를 누가 압니까. 예루살렘에 종교지도자들에게 베드로씨라는 분아십니까? 그러면 베드로, 흥 그런 사람 도대체 누구야, 그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그는 율법을 잘 배운 사람도 아니고, 대학을 나온 사람도 아니고, 율법사도 아니고, 가말리엘과 같은 문하에서 배운 사람도 아닌데 누가 그따위 사람을 알아봅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자기의 전 존재로 주님의 행하심에 동참했을 때, 그 베드로를 오늘날은 모르는 사람 없습니다. 안 믿는 사람도 베드로를 다 아는데, 그의 생애요. 30배, 60배, 100배의 결실만 맺었습니까. 수천 배, 수만 배 결실을 맺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바로 그 비유입니다.

그래서 여기 보시면 씨 뿌리는 비유가 나오는데, 길가도 있게 되어있습니다. 돌밭이 있게 되어있습니다. 가시밭도 있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면 좋은 밭도 있게 되어있습니다. percentage는 사 분의 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그 대부분의 종교지도자들은 대적했습니다. 그것이 길가입니다. 바로 자기의 편견 때문에 자기의 가지고 있는 신앙관 때문에 안 맞아서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표현하기를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관점에서 보기에 안 맞았기 때문에 버린 것입니다. 그것이 길가입니다.

또한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따라왔으나 다 떠나간 것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그 돌밭과 가시밭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소수가 될지 몰라도 반드시 들을 귀 있는 자는 있게 되어있습니다. 제 아내가 하는 말이 그 말인데 저는 참 옳다고 생각합니다. 제 아내가 뭐라고 그러냐 면 하나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전하면 반드시 들을 자가 있더라, 들을 자가 있게 되어있습니다. 그 수가 작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있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리더는 무엇을 해야 되느냐면, 들을 귀가 있어서 듣고, 전 존재로 주님의 일에 동참하는 그들을 발견해야 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분별할 수 있는 눈은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왜 은혜 받았다고 해서 그렇게 앞에 와서 크게 칭찬한다고 본 것은 아니니까요. 아까 말 한대로 가시밭과 돌밭인 사람들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떠나갔습니다. 그러나 진실로 보고 자신의 전 존재로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 그것을 찾는 건 쉽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우리는 구해야 됩니다. 영적인 분별력을 주시도록 구해야 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세우셔서 우리가 그걸 배워야 됩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어제 말씀드린 대로 침노하는 무리를 세우기 위해서 십자가의 복음과 성령의 사역을 집중적으로 전했습니다. 두 번째는 바로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동참하는 그들을 발견하여 그들에게 자신의 삶을 투자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일 많이 누구에게 자신의 삶을 주셨습니까? 베드로, 요한, 야고보에게 주셨습니다. 그 다음에 12제자, 그 다음에 70명의 제자들, 예수님은 그들에게 시간을 많이 주셨습니다. 예수님 편해했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자신의 삶을 투자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야 됩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의 삶에서 배울 수 있는데, 이렇게 하시면서 예수님은 자신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사셨습니다. 그래서 그 예수님의 삶의 특징들을 앞으로 제가 연구하고, 그래서 이것을 보면서 이렇게 예수님의 삶에 침노하는 무리를 준비하는 삶이 다 나와 있습니다. 어떻게 복음을 전했고, 금방 말 한대로 어떻게 일군들을 양육했고, 일군들을 분별하여 양육하는 것이 리더십에 관한 부분들인데, 우리가 그 부분 배워야 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삶을 사신 거 보세요. 그분은 아버지와의 친밀함 삶 가운데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아버지와의 친밀함 가운데, 하나님의 질투가 그 안에 있었습니다. 성전 된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하나님을 신뢰하셨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사면초가와 같았습니다.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전 국가적인 종교적인 조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돈, 인력, 조직, 그들이 일괄적으로 예수님 대적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와서 은혜 받고 따르던 사람 중에서 진실로 보고 따른 자는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따라올 때, 예수님께서 하나님 말씀을 정직하게 전했더니, 금방은 메시야라고 그랬다가 다음 순간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그러면서 다 떠나 버렸고, 그래서 보고 따르던 자들이 그렇게 소수인데, 그나마 그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별 볼일이 없습니다. 제대로 공부한 사람 한 사람 없습니다. 그러한 열악한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하나님만 의지 하셨습니다. 전적으로 그 일은 하나님이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하나의 면을 주님께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영적 전쟁이 그대로 있습니다. 지난 화요일 날 분당에서 우리가 바로 이 부분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때 전체적인 윤곽은 못 살피고 요 부분을 살펴보다 보니까 사람들이 잘 이해를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중요한 부분이라고 했는데, 사람들이 설교할 때 참 잘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살아가시면서 예수님에게 나타났던 영적전쟁이 그대로 오늘날 우리가 그렇게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며, 성령의 사역을 감당하면, 우리에게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갈라디아서 4장을 보겠습니다.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기록된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기록된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 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갈4:21-31)

“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한 너는 노래할찌어다 구로치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찌어다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니라”(사54:1)

제가 그냥 설명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시간이 없기 때문에, 거기도 보아도 말세지말에 세워질 아까 말한 그 침노하는 무리 그 무리가 가장 먼저는 십자가의 복음에 기초한 자들인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이사야서 54장 1절이 바로 갈라디아서에 인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보면 사라와 하갈을 상징적 대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갈은 무엇을 의미 하냐 면 율법주의, 인본주의를 대변합니다. 종의 종교, 그 다음에 사라는 약속으로 십자가의 복음을 대변합니다. 그러면서 이사야서 54장 약속이 말세지말에 이루어질 그 하나님의 부흥과 대 추수와 교회회복의 약속을 이룰 침노하는 자들에게 주어진 약속입니다. 그것을 감당할, 하나님이 감당하게 하실 그 놀라운 약속이 누구에게 주어지냐 면, 바로 이 사라에게 주어질 거라고 말하면서 십자가의 복음에서 약속이 주어질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똑같이,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고, 말세지말 뿐만 아니고, 모든 시대에 그렇게 하실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 이렇게 예수님께서 침노하는 무리를 준비하셨고,. 그 다음에 침노하는 무리들 120명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그들은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이것이 중보기도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오순절 날 능력으로 임하셨습니다.

자! 이렇게 되는데, 이것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이사야서 하반부에 보면 첫째는 이 침노하는 무리가 세워지되 그들은 철저하게 십자가에 복음에 세워진 자들입니다. 그래서 침노하는 무리가 세워지려면 십자가의 복음이 강력하게 전파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날 거듭 말씀드리지만 목회자들의 목적이 교회성장이라면 그것은 진짜 타락된 것입니다. 그 상태로는 절대로 침노하는 무리는 세워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교회 성장시키도록 부르지 않았습니다. 교회성장은 하나님이 시키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직하게 하나님을 대변하도록 부르심을 받았고, 먼저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찾고, 그리고 그 예수님을 전하도록,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지, 교회성장 시키려고 부르심을 받지 않았습니다. 어떤 분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나에게 10명을 맡겨주시고 평생을 그렇게 섬기라고 하면 우리가 그것을 기꺼이 섬길 자세가 우리에게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목자가 뭔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사람들이 이렇게 유리하며 방황한다고 그랬습니다. 영어성경에 보니까. separation helpless 도와줄 사람도 없고, 소망도 없고, 어찌할 수 없는 속수무책인, 어떤 다른 구절을 보면 hopeless helpless 이렇게 저렇게 상처를 받고, 폭행을 당하고 찢김을 당하고, 그러면서도 아무도 도와 줄 자가 없는, 그 당시 사람들은 그랬는데, 왜 목자 없는 양같이 유리방황했습니까. 그럼 예수님께서 왜 그 시대가 목자 없는 양 같다고 그랬습니까. 왜 목자가 없었습니까. 여러분 그 당시에 성경을 올바로 가르치는 사람들 많았습니다. 최소한 이론적으로는 성경공부 잘 가르치는 사람 많았습니다. 율법사들도 수없이 많았고, 회당장도 수없이 많았고, 바리세인도 수없이 많았고, 사두개인도 수없이 많았고, 대 제사장도 수없이 많았는데, 그런데 왜 예수님은 목자가 없다고 그랬습니까. 이것이 리더십에 관한 것입니다. 왜 목자가 없다고 그랬을까요? 왜 목자가 없다고 그랬냐면, 목자가 뭔지를 알면 그럼 이해가 됩니다. 목자가 뭡니까? 목자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는 구절은 민수기 17장 17절을 보면 나옵니다. 나중에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모세를 가나안 땅에 안들이십니다. 그가 므리바에서 죄를 지었음으로, 자! 그랬더니 모세가 하나님 앞에 기도한 내용이 그것입니다. 하나님 이 백성이 목자 없는 양처럼 방황하지 않기 위해서 목자를 세워주세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여 세우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면 여호수아가 목자란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또 누가 목자란 이야기입니까. 모세가 목자란 이야기입니다. 모세가 목자이고, 여호수아가 목자라는 이야기입니다. 맞습니까?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목자가 뭔가요. 간단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목자는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그리로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는 자들이 목자입니다.
핸리 불랙가비 목사님의 리더십 책을 보니까 성경에 의하면 리더가 뭐냐? 그는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사실 정확하게 정의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의제가운데로 인도하는 자”가 리더라고 말합니다. 무슨 이야기냐 면,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하나님의 백성을 그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자가 목자입니다. 그럼 예수님 시대에 목자가 없었다는 말은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 그 당시 큰 회당장을 맡은 목회자들도 많았고, 신학교 교수와 같은 율법사들도 많았고, 랍비라고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그야말로 철저히 연구했고,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잘 전했고, 그야말로 감동적인 설교를 했고, 성공적인 목회를 한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 그 시대에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그리로 그의 백성을 인도하는 자는 없었습니다. 오늘날 너무나 그런 목회자가 많습니다. 교회 숫자만 채우면 그것이 목회인줄 아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그리로 그의 백성을 인도하는 자가 리더입니다. 목회자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평신도 리더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지 못하고 그리로 인도하지 않으면 그것이 무슨 리더입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바리세인들에게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진다고 했습니다. 바리세인들이 성경을 몰라서 소경이 아닙니다. 그들은 성경 박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지 못했습니다. 왜요. 그들은 침노하는 무리가 아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너무나 타락한 시대에 살다보니까. 목회에 대한 이해부터도 우리는 너무나 다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잃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이제 우리의 사역만 남아있습니다. 세상에서 사역의 확장과 성공적인 목회가 목적이 되어버렸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간음이고 타락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뤄내기 위한 수단과 프로그램을 동원하기에 바쁘고, 사람들을 그리로 동원하기 위해서, 그들을 붙잡는데 바쁘고, 그들을 붙잡기 위해 그들이 원하는 것들을 주기 바쁘고, 그래서 그들이 듣기 좋아하는 메시지를 전하는데 바쁘고, 그들이 기뻐하는 메시지를 연구하는데 바쁩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간 곳이 없습니다. 얼마나 타락한 것입니까. 그것이 무슨 목회입니까. 그렇게 해서 숫자가 많이 모인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시대에 그렇게 하나님 백성들이 많았으나 저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저들이 목자 없는 양처럼 hopeless helpless 세상에서 찢기고 할퀴고, 마치 목자 없는 양처럼 짐승들이 와서 할퀴고 하는데, 도와줄 자가 없었습니다. 왜 그 당시에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등쳐서 자기의 배 채우는데 그들은 앞장섰습니다. 얼마나 그랬으면 그들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안 지켜도 되는데 제물로 맹세하면 지켜야 된다고 했겠습니까. 왜 그들은 돈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부모를 공경하라’ 공경하라는 말은 부양한다는 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십계명 중에 하나인데, 그러나 부모를 공경할 것을 가지고 ‘고르반’ 하나님께 드렸다고 하면 부모를 공경 안 해도 되는 것처럼 가르쳤습니다. 왜, 그래야 교회 헌금이 들어오니까요. 그만큼 그들은 하나님 백성들이 자기들의 배를 채우는 수단들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백성들이 세상에서 helpless hopeless 소망도 없는데 도와 줄 사람도 없는 목자 없는 양같이 방황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너무나 심각한 가운데 서 있습니다. 대부분이 우리는 교회성장에 혈안이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몇 명을 맡겨주시든지 그것은 하나님이 선택하실 일이고, 나는 나에게 맡겨준 하나님 백성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자들이 되어야합니다. 그것이 리더입니다. 그것이 목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의 생각하는 관점과 오늘날 소위 말하는 교회성장 학자들이 생각하는 관점과 너무나 다르다 그 말입니다. 다르다는 이야기는 우리가 틀리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당연히 옳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침노하는 무리들이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세워져야 되는데, 또 하나의 특징은 중보기도 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서 64장, 62장에도 그렇고, 하나님이 중보기도자들을 세우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왜요? 이 침노하는 무리의 또 하나의 특징은 중보기도가 될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난 전국 7차 컨퍼런스 주제가 중보기도에 대한 부분이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그 전에 중보기도에 대해서 하라고 감동 주셨는데, 막상 시작할 때가 되니까. 제가 주저대더라고요. 왜냐 하면, 중보기도라는 제목을 가지고 컨퍼런스를 한다는 자체가, 그것도 삼박 사일 동안 하루에 세 번씩 모인다는 것이 제게 너무나 부담스러웠습니다. 왜냐 면, 사람들이 교회성장 하면 눈이 둥그렇지만, 그런 일에 별로 관심이 없잖아요. 사람들이 얼마나 올까 하기도 하고, 그러니까 제가 얼마나 믿음이 없나 보세요. 그랬습니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발견하고 결국 우리가 하게 되었는데, 그때 참석하신 분은 알겠지만, 참 하나님께서 어느 때보다 더 강하게 함께 하셨습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 강하게 함께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전에 이길수 목사님만 하더라도 그 컴퍼런스 이후로 하나님께서 그 목자의 심정을 더 부으시는 것을 느낀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부어 가시는 것을, 중보기도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뒷받침하고 계십니다. 사실 오늘 이 자리에 나오기 전까지도 아주 머리가 복잡했습니다. 왜냐 면 가닥은 안 잡히고, 그런데도 한시간은 중보기도를 전해야 되는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해야 될지는 모르겠고, 지난번에 삼박 사일, 그것도 하루에 세 번씩 하는 그 전체를 컴퍼런스를 중보기도에 대해서 했는데, 한 시간에 이와 관련해서 어떻게 얼마나 나눌 수 있을까. 너무나 구체적으로 깊이 들어가게 되면 우리가 전체적인 그림을 놓칠 것 같고, 또 전체적인 것만 이렇게 보자니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해야 될지 몰라 가지고 제가 나오기 전까지만 참 하나님 앞에서 기다리면서 당황했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하나님께서 조금씩, 조금씩 정리해 주십니다.

‘중보기도’ 그것이 얼마나 중요하냐? 중보기도의 중요성, 그 다음에 하나님이 오늘날에 세우시는 중보기도 이러한 면에서 두 가지 부분만 전체적인 윤곽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까 예수님의 사역에서 보았지요. 그 하나님의 부흥이 임하는 패턴을 보셨습니다. 침노하는 무리가 세워지고, 그런데 사실 침노하는 무리 속에 중보기도가 또 하나의 특징입니다. 여기 이사야서 62장 6절-7절을 보아도, 그리고 예수님 자신이 중보기도 하셨습니다. 우리는 몇 몇 사람들의 예를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일으키실 때마다 항상 중보기도자들을 먼저 세우십니다. 중보기도 자들이 누군지 아십니까. 전령과 같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일으키실 때, 중보기도 자들을 세우십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기도하게 하시고,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역사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세우십니다. 그리고 기도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기도에 들으셔서 역사하십니다. 그러니까 이 중보기도 자들이란 말은 하나님의 역사를 앞서가는 자들입니다. 예를 들면, 옛날에 임금님 행차시오. 하면 앞에 가는 사람을 뭐라고 합니까. ‘물러거라’ 하는 것이 길을 예비하는 자입니다. 임금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들이 앞서가는 자들인데, 이들이 중보기도 자들입니다. 임금님 행차와 같이 하나님의 임하심이 부흥입니다. 여러분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임하신 것은 하나님이 임하시는 것입니다. 만왕의 왕이 오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왕이 오시기 전에, 주님이 오시기 전에 부흥으로 건,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로 건, 그 앞에 그 길을 예비하는 자들을 보내신다고 항상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누구냐? 중보기도 자들입니다.

우리가 이번에 집회기간 동안에 어제도 그리고 아까도 낮에 우리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어떤 한 목사님에게 이번 기회에 계속 말씀을 주시는데, 말라기 4장의 말씀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인가요. 한번 보겠습니다.  말라기 4장 5절-6절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데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 이 말은, 주님이 오시기 전에 반드시 뭐가 있느냐 면, 길을 예비하는 자가 있게 되어있다는 말씀입니다. 왕이 행차하시면 물러거라 하는 자들이 있게 되어있습니다. 준비하게 되어있습니다. 반드시 주님의 역사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길을 예비할 자들의 기름부음 특징 중에 하나가 뭐냐 면, 부모의 마음을 자식에게로 자식의 마음을 부모에게로 돌이키는 것이 그 기름부음의 특징 중에 하나입니다. 거기에 나타날 것입니다. 불순종한 자들을, 영적인 자녀들의 마음을 영적인 부모에게로 영적인 부모의 마음을 영적인 자녀에게로, 이것이 뭐냐 면, 그 주님의 길을 예비할 자들의 기름부음의 열매입니다. 이렇게 이러한 일이 없으면, 두렵건데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이 말은 무슨 말이냐 면, 이렇게 주님의 길이 예비 됨이 없이 주님이 오시면 그건 축복이 아니라 심판이란 그 말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주님의 길을 예비할 자들이 오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그 주님의 길을 예비할 자들을 엘리야의 심령을 가진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처음 오셨을 때,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러 온 자가 누구입니까? 침례(세례)요한, 그래서 누가복음 1장에 보면, 침례요한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천사가 하는 말입니다. 사가랴에게 그 주어질 아들에 대해서 주의 길을 예비하러 올 요한에 대해서 15절-16절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라” 여기 보십시오. 여러분 구약의 이사야서 하반부를 보면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 백성을 어디로 돌아오게 하냐면, 하나님께로 회복입니다. 하나님 백성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잃은 뭇 영혼들을 부흥을 통해서 주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하나님 역사입니다. 자 그러면서 또 보십시오.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눅1:17) 자 여기 보십시오. 요한에 대해서 말하면서 뭐라고 말하고 있는가 하면, 주님의 길을 예비할 자로 올 거라고, 엘리야의 영과 능력으로 오게 될 거라고 말하면서, 그 길에 나타나는 그 기름부음의 특징 중에 하나가 뭐냐 면,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로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며, 영적인 자녀의 마음을 영적인 부모에게로, 영적인 부모의 마음을 영적인 자녀에게로, 여기 보시면 “거역하는 자들의 마음을 슬기 있는 자에게로” 그 뜻이 그런 뜻입니다. 그렇게 돌이키게 하리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시겠지요.

이렇게 주님이 오심은, 임금님 행차신데 그 행차가 있기 전에 반드시 길을 예비하러 온 자가 있는데, 그 길을 예비하러 온 자는 엘리야의 영과 능력으로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나타날 특징 중에 하나가 금방 말씀드린 대로 그러한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의 영 중에 가장 주된 게 뭔지 아십니까? 중보기도입니다. 엘리야의 기도를 보면 선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중보기도 자를 세우셔서 하나님의 길을 예비하게 하십니다. 그들이 물러거라 하는 자들입니다. 사람들에게 물러거라는 안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길을 예비하는 자들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 야고보서 5장에 보십시오. 믿음의 기도에 대해서 말하면서 17절에 보면 “엘리야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 즉, 삼 년 육 개월 동안에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한 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여기에 보시면 중보기도에 관해서 아주 중요한 몇 가지를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질투를 가지고 기도하는 것이고, 둘째는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고, 셋째는 믿음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기 엘리야의 기도가 하나님의 질투를 가지고 기도하는 것이었고, 여기 믿음의 기도에 대해서 말하면서 나온 것입니다. 그 다음에 여기 간절히 기도했다는 이 말이, 아까도 말씀드린 대로 엘리야의 영으로 온다고 그랬는데, 엘리야의 영으로 온다는 말은 무엇보다 중보기도의 기름부음을 말하는데, 우선적인 것 중에 하나는 어디서 그러한 것을 볼 수 있느냐 면, 열왕기상 18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에 보시면 제가 하나님의 질투를 가지고 기도했다고 그랬는데, 어디 하나님의 질투가 나오느냐? 엘리야의 속에는 하나님의 질투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열왕기상 19장에 보시면, 이제 나중에 불이 내린 다음에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려고 하니까. 그가 도망해서 하나님께 기도한 내용 중에서 알 수 있습니다. 10절에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히 특심 이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니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실재로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을 남겨두었다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자기 눈에 보기에는 자기만 남을 만큼, 그 시대는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섬기며, 하나님 앞에 진실 된 삶이 되도록, 주님만을 전 존재로 사랑하는 신앙의 본질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이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보면 하나님 “내가 열심히 특심이오니” 이 말은 열심이라는 말이 질투라는 말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질투가 그 속에 있었습니다. 그럼 하나님의 질투라는 뭐냐? 하나님도 질투하시냐? 성경은 하나님이 질투의 하나님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질투는 인간의 질투와는 다릅니다. 인간의 질투는 죄 된 것이고 우리 가운데 반드시 버려져야 합니다. 시기와 질투는 지극히 타락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질투는 하나님에게 속한 거룩한 것들을 보호하시고, 이루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열심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질투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하여 질투를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에 대하여 질투를 가지고 계시고, 성령님에 대하여 질투를 가지고 계시고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무슨 말이냐 면, 엘리야의 기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엘리야가 비가 오지 않기를 위해서 기도했다고 그랬습니다. 여러분 우리나라 조금 가뭄드니까 어떻습니까. 농사짓는 분들은 금방 알텐데, 몇 개월만 가뭄이 들어도 난리입니다. 그렇지요? 지난번에 몇 개월 가뭄드니까. KBS 에서 나왔는데, 어느 시골마을은 논물을 끌어다가 먹더라고요. 그런데 나중에는 그것마저도 없어서 빨래 할 물도 이제 없다고, 어떻게 할지를 모르겠다고 한숨을 쉬는데, 고작 몇 개월 가뭄이 들고, 다른 지역에는 물이 있는데도 그 난리인데, 그런데 이스라엘 나라는 우리나라처럼 물이 많은 나라입니까. 그 나라에는 비가 제 때에 오지만 않아도 큰 문제인데, 삼 년 동안 비가 만약 안 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슬도 안 내리고, 아니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것은 너무너무 심각합니다. 온 국민이 받을 고통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그러한 고통을 알면서도 왜 엘리야가 비 오지 않기를 기도했을까요. 엘리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 고소해서입니까. 아니면 엘리야는 자기가 그 시대에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랬습니까. 아닙니다. 그럼 왜 기도했습니까. 성경에는 안 나옵니다. 그런데 나중에 불을 내릴 때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은 칠천을 숨겨 놓았지만 자기 눈에 보기에는 자기 혼자만 남은 것처럼,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의식은 가득했습니다. 제사는 많이 드렸습니다. 안식일은 지켰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온갖 세상이 목적이고, 하나님은 수단에 불과하며, 전 존재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섬겼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아합 왕으로부터 시작해서 우상숭배와 음란이 온 땅을 가득하게 퍼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백성들이 거기 깊숙이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 백성들 가운데 우상과 음란이 가득한 것 아십니까. 우리나라에 지금 급속도로 퍼지고 있는 것이 우상과 음란인 것 아십니까. 그런데 하나님 백성들도 여기에 예외가 아닌 걸아십니까. 나는 다른 여자하고 자본적이 없다고요.

하나님께서 언젠가 우리 가운데 너무나 가득한 ‘금송아지’ 회개하라고 그러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로마서 6장에 말한 것처럼, 우리가 자유자가 되었으나 그러나 우리 지체를 가지고 죄에게 순종하면 죄의 종이요. 의에 병기로 들여서 하나님께 순종하면 의에 종이라고 말하면서 그것을 깨닫게 하시면서 오늘날 하나님 백성들이 심지어 교회에서 장로나 때로는 목사나 이렇게 리더들까지 교회 와서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는 하나님, 하나님만이 나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신 유일하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할지 모르지만, 세상에 나가 돈을 버는 대해 있어서는 마치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면 망할 것처럼, 하나님은 전혀 경제를 모르시는 것처럼 무시하고, 돈을 버는 대해 있어서는 돈에 법칙만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여호와의 절일에 하나님께 예배한다고 하면서 금송아지 앞에 엎드려, 오!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신이라고 우상숭배 하던 거와 똑같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일날 교회 와서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면서 하나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할지 모르지만, 실제 우리의 삶에서는 바로 금송아지인 돈 앞에 엎드려 오! 돈이여 우리를 인도하는 신이시여 하고 이야기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오늘날 교회 가운데, 하나님 백성들 가운데 금송아지가 가득하다고 그러시는데, 실제로 그렇습니다. 너무너무 가득합니다. 음란은 어떻습니까. 그 시대가 그랬습니다. 그때 왜 엘리야가 하나님 하늘을 닫아주세요 기도한 줄 아십니까. “하나님이 하나님이심을 알리시고, 하나님은 이 백성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분임을 알게 하시고” 불을 내릴 때 그가 기도했던 것처럼, “내가 하나님의 종 됨 것과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이 일을 행함을 알게 하옵소서.” 그 말은 무슨 말이냐면 자기를 들어내 달라는 말이 아니라, 자기를 통해서 하나님이 주신 메시지가 하나님께로부터 주신 메시지인 것을 저들로 알게 하시고, 그래서 하늘을 막아달라고, 그리고 불을 내려달라고 기도할 때도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중보기도입니다.

하나님의 길을 예비할 전령들에 있어서 엘리야의 영과 능력으로 올 것이라고 했는데, 그 엘리야의 영, 그 중에 가장 주된 것은 중보기도 영입니다. 하나님의 질투를 가지고 하나님이 이 시대에도 하늘을 닫으시고 불로서 임하시고, 하나님 능력으로 응답하셔서 하나님이 하나님이심을 알리소서. 하나님은 이 백성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분임을 알리소서.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의 종 된 것과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이 일을 행함을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응답하소서, 여호와여 응답하소서. 그렇게 하나님께 그들을 하나님이 세우고 계십니다.

침노하는 무리의 또 하나의 특징은 중보기도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그렇게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생각하기에 침례요한 같은 경우에 그는 6개월 사역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여호와 앞에 큰 자라고, 말씀하셨는데, 6개월 사역했습니다. 그의 사역은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그리고 감옥에 갇혀서 죽었습니다. 그는 “그분은 흥하여야 되고 나는 망하여야 하리라” 나는 그분이 말씀이라면, 그분의 말씀을 전하는 목소리, 형체도 없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에 불과하다. 그리고 6개월 만에 죽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보시면 요한이 어려서 젖을 땐 다음에 매우 어려서부터 광야에서 자란 것 아십니까. 그리고 30세가 되었을 때, 그에게 하나님 말씀이 임했습니다. 그리고 6개월 동안 사역하고 주 앞에 갔습니다. 그 수많은 기간 그가 무엇을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 그의 부모들로부터 중보기도로 준비하게 하셨습니다.

엘리야의 영과 능력으로 주의 길을 예비할 자들을 보내신다고, 그 기름부음의 특징이 자녀의 마음을 아비에게로,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다시 말하면 가정에서부터 회복이 일어나게 할거라는 말씀입니다. 부부간의 회복, 부모와 자식간의 회복, 실제로 하나님이 그 일들을 이루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이러한 이들이 있을 거라고 말하는데, 그 기름부음의 가장 주된 특징 중에 하나는 엘리야의 영인 중보기도입니다.

그것을 이사야서 하반부가 말씀하고 있고, 기독교 역사가 증명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오실 때, 예수님 때가 되셔서 오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때가 되매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때가 되매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시기 전에 하나님 뭐 하신 줄 아십니까? 중보기도자들을 세우셔서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기도를 응답하셔서, 그 중에 하나는 지금 말씀드린 요한이었고, 또 다른 자들이 성경에 나옵니다. 한번 보세요. 누가복음 2장, 예수님께서 드디어 태어나셨고, 21절-22절, “할례 할 8일이 되매... 모세의 결례의 날이 차매” 그 당시 전통을 따라 하나님께 드려지기 위해서 예루살렘의 성전으로 올라갑니다. 이때에 예루살렘에 보면 어떤 사람이 있었냐면 시므온과 안나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누구냐 면 중보기도 자들입니다. 25절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는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이스라엘의 위로가 누구입니까? 메시야입니다.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밤낮으로 메시야가 오기를 간구한 자들입니다.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었습니다.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여기 보십시오. 중보기도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하나님 일을 알리십니다. 하루는 시므온이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죽기 전에 네가 그렇게 기도하고 기다리는 메시야를 보게 될 거라고, 얼마나 놀라운 약속입니까.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하루는 예수님이 바로 드려진 그때에, 하나님의 성령께서 시므온에게 말씀하십니다. 뭐라고, 성전에 들어가라고, 성전에 들어갔을 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요셉이 예수님을 하나님께 헌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성령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뭐라고요, 그가 바로 그라고, 그랬더니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하는 말이 그 말입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 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이사야서 하반부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 다음에 또 보시면 거기에 또 누가 있었습니까. “또 아셀지파 비누엘의 딸 선지자가 있어 나이 매우 늙었더라 출가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사라가 과부 된지 팔십사 년이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섬기더니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니라” 이 선지자는 중보기도 자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받아서 사람들에게 전한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간구한 자, 중보기도의 기름부음입니다. 중보기도의 기름부음은 선지자적 사명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사야서 62장에서 볼 수 있듯이, 파수꾼이라고 그랬습니다. 거기 보면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구속됨을 바라는 사람들이 더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 보시면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실 때, 그 당시에 그 엄청난 제사가 하나님께 드려지고, 그 엄청난 헌금이 소위 하나님께 드려지고, 그 엄청난 조직과 제도와 인력을 가진 종교사회에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생각하기에 예수님이 오시면 당연히 바리세인들에게 제사장들에게 알려야 될 거라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안 하셨습니다. 그들은 새까맣게 모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서 역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에게 안나라는 분아십니까? 안나, 그 사람이 누군데, 안나라는 사람 아무도 몰랐습니다. 시므온이라는 분 들어보셨어요. 저 시므온씨를 찾아왔는데요, 시므온, 다른데 가서 알아보세요. 시므온이 누구인지 안나가 누구인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알려지지도 않았습니다. 안나는 일개 과부에 불과합니다. 그 당시 과부는 땅도 갖지 못하게 되어있기 때문에 가장 불쌍한 사람 중에 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서는 과부와 고아를 불쌍히 여기라고 했습니다. 왜, 그들은 소외 계층의 사람들입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과부, 나이도 많고 늙어서 사람들 앞에 별로 내세울 것도 없는 사람들에게 알려지지도 않은,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서 역사하신 것 아십니까. 그들에게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에게 말씀하시고, 그리고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메시야가 오셨을 때, 그들에게 알리셨습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에 예수님이 드려질 때, 보십시오. 날마다 난지 8일 된 사내아이는 다 예루살렘에 들여졌으니까. 이스라엘 전체에 사내아이들이 하루에 한 명만 태어났겠습니까. 많았을 것입니다. 매일, 지금 사람들의 눈에 보기에는 예수님도 그 사내아이 중에 한 사람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중보기도 자들에게 볼 수 있는 눈을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전혀 모르고 있을 때, 일개 아기에 불과한 그 예수님 안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보게 하셨습니다. 영적인 눈이 열린 것입니다. 다가오는 부흥을 보았습니다. 갓난아이 형태로 있는 그가 메시야였습니다. 그가 이스라엘의 구원이었습니다. 그가 이방의 빛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몰랐습니다. 그러나 중보기도 자들은 알았습니다. 보입니까?

우리는 거대한 조직을 선호합니다. 우리는 수많은 헌금, 인력 동원하는 것을 선호합니다. 그래서 그것으로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운 목적은 이루어질지 몰라도 하나님의 일은 그렇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성경에 보아도, 기독교 역사를 보아도, 하나님의 일은 비록 소수일지 몰라도 하나님을 전 존재로 사랑하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기다리는 자들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중보기도 자들이었습니다. 여러분 보이십니까.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이, 이 시대에 하나님의 부흥이 오면 최소한 성도가 만 명이 되는 교회를 통해서 오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나라에 최소한 1. 2위되는 교단을 통해서 하나님이 역사하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큰 교회나 큰 교단들을 비방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큰 교단이라고 해서, 큰 교회라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께 쓰임 받을 조건은 전혀 되지 못합니다. 그 엄청난 교단과 교세를 가지고 있는 그 시대에도 하나님은 그리로 오지 않으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일개 이름도 전혀 알지 못하는 일개 과부에 불과한 이름도 나타나지 않는 그 소수의 무리, 시므온과 안나는 그나마 이름이 여기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세우셔서 기도하게 하시고, 그들을 통해서, 그 기도를 응답하셔서 주님은 오셨고, 아기로써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그 나약한 아기로 오셨을 때, 그들은 이스라엘의 구원 세상의 열방의 빛을 보았습니다.

1904년-5년 사이에 웨일즈에 하나님의 부흥이 임하셨을 때, 6개월 동안에 무려 십만 명이 구원받았습니다. 그 부흥의 여파로 우리나라 평양에까지 놀라운 부흥이 불길이 옮겨왔습니다. 거기에 주역으로 쓰임 받은 사람이 누군 줄 아십니까. 이반 로버츠라는 26세 된 청년에 불과 했습니다. 그는 13세 때부터 탄광에서 일하는 광부였습니다. 초등학교도 제대로 다녔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13살 때부터 영적 부흥에 대한 큰 부담을 안고 중보기도하게 하셨습니다. 그 시대에 타락한 교회 상황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회개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성령을 쏟아 부으셔서 하나님의 교회를 치유해 주시고, 잃은 영혼들을 구원해 달라고, 어떤 때는 하나님께서 밤중에 밤 자다 일어나게 하셔서 밤 세도록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게 하시고, 그 다음 날 또 탄광에 가서 일하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13년 동안 기다렸습니다. 그가 26세가 되었을 때,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설교자로 부르신다고 확신하고 준비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이 이반에게 로우홀에 위치한 그의 본 교회에 돌아가서 청년들을 위한 집회를 일주일 간 하고 와야 된다는 부담을 주셨습니다. 1904년 10월 31일 월요일 밤 기도회 후에 17명의 청년들이 이반의 메시지를 듣기 위해 남았습니다. 17명 전원이 그날 메시지에 응답했습니다. 그리고 두 달 만에 70,000명, 5개월 만에 85,000명, 그리고 6개월 후에 100,000명을 넘었습니다. (참고, 하나님과의 신선한 만남 27-28쪽) 이렇게 해서 순식간에 그 하나님의 부흥의 불길은 전 웨일즈를 쉽쓰렀고, 더 나아가 여러 나라로 옮겨갔습니다. 심지어 중국을 거쳐서 평양에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웨일즈의 부흥입니다. 침노하는 무리는 중보기도하는 자들입니다.

제가 원래 서울 송파구 오금동에서 개척을 해서 교회를 하다가 그 기간동안에 하나님께서 저를 이렇게 하나님의 길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제 표현에 의하면, 하나님이 사방을 막아 놓으시고, 지하실에 가둬놓으시고 팍팍 밟으시니까. 주님을 찾으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어떤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서 저를 바꿔주시고, 변화시켜 주시고, 하나님의 길로 인도해 주셨는데, 그런데 1994년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저에게 그 교회를 사임하고 다시 개척을 시작하라고 그래서 그 교회도 저를 통해 개척한 교회인데, 그대로 사임하고 그 당시 있던, 전도사님이 후임자로 그 교회에 세워지고, 제가 뭐 후임자에게 돈을 받았거나 후임자를 제가 임명한 것이 아니라 저는 그냥 사표만 내고 나왔습니다. 그래서 사임하고 다시 처음부터 전혀 없는 상태에서 새로 1995년부터 분당에서 개척해서 지금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왜 하나님이 다시 하라고 하신 줄 아십니까. 그 교회도 하나님께서 저를 통해서 개척하게 하시고 시작한 교회인데, 하나님께서 교회 가운데 중보기도를 세워 가시려고 그러는데 성도들이 반대하는 것입니다. 왜냐 면,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처한 상황, 지금 우리나라에 가득한 음란과 사술, 교회 가운데 가득한 죄, 우리 가운데 가득한 시기와 질투와 후욕, 세상사랑, 탐욕, 이러한 죄들을 하나님 앞에 회개하면서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을 구하면서 하나님 우리 가운데 하나님 부흥을 보내주세요. 세상에서 우리가 조롱과 멸시를 당하고 있으며, 예수 믿는 우리로 인해서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졌고, 세상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여호와여,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황폐한 성소와도 같은 하나님의 교회 가운데 임해주세요. 주의 얼굴빛을 비춰주세요. 그렇게 기도하는 것이 중보기도인데, 그래서 그 당시에는 다니엘서에 나온 것처럼 “주의 이름을 위하여 주의 황폐한 성소에 주의 얼굴빛을 비추소서.” 그 구절이 그렇게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늘 그런 기도를 드리고, 이렇게 기도하니까 성도들이 뭐라고 그러냐 면 내 코가 석자인데, 내가 지금 이런 문제 저런 문제가 있는데, 중보기도 한답시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나라와 민족의 죄가 어떻고, 자기와 거리가 너무나 멀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구하면 우리 마음의 생각까지 아시고, 우리 머리카락까지 세신 바 되었다고 하셨는데, 우리는 그저 우리가 원하는 것 줄기차게 두드려야 조금이라도 얻을 줄 아는 고거에만 집착된 너무나 타락하고, 너무나 세속적이고, 세상사랑이 가득한, 하나님이 수단에 불과한, 그러니까 그렇게 반대하는 것입니다. 잘 참석하지도 않고, 그런데 참석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전화해 가지고 자기네들끼리 자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그 당시에 성숙하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성숙하지 못하지만 그 당시에 더 성숙하지 못했습니다. 지금만 같았더라도 하나님 앞에 그들을 위해서 막아설 텐데, 그때는 제가 그런 걸 몰랐습니다. 그래서 기도만 하면 하나님이 안 기뻐하신다고, 그렇게 감동을 주시는 것 같아서, 제가 설교할 때 그럽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이 그렇게 하시는 것을 안 기뻐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누가 나한테 고자질해서 그러는 줄 알고 더 그럽니다. 그럼 하나님은 더 안 기뻐하십니다. 저는 또 그렇게 설교하고... 그러니까 지금 같으면 그렇게 안 하고, 제가 하나님 앞에 하나님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세요. 하면서 그들을 딱 막아서서 주님 앞에 서는데, 그때는 그런 것을 몰랐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수평으로 딱 달리게 되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뭐라고 그러시냐면 다시 시작하라고 그러셨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저를 통해서 개척된 교회였는데, 그대로 사표 내고 돈 일 푼도 없이 다시 시작해야 하는데 쉽습니까. 누구한테 아무런 도움을 구하지도 않고, 하나님이 하셔야 되거든요. 그 당시 분당에서 시작하려면 억대의 돈이 필요했는데, 저는 돈 백 만원도 없는데, 도와주겠다고 약속한 사람 하나도 없는데, 지금 월급 안 받으면 다음 달 생활비가 없는데,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다시 시작하라고 그러셨습니다. 1994년 8월 15일 제가 사표를 내고, 그 해 11월 30일 날 분당으로 이사를 와서 그 다음 해 2월 달에 임시처소로 들어가게 되었고, 그 바로 4월 달 부활 주일 날 창립예배를 드려서 오늘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 당시만 해도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돌이켜 볼 때, 왜 하나님이 그렇게 하면 시간이 더 늘여질 거고 그 때 한참 교회가 막 성장하려고 자리를 내리고 했는데, 그렇게 하셨는가 돌이켜 보니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따라감에 있어서 중보기도가 얼마나 중요한가, 필수 중에 필수인 것을 봅니다.

그것이 없으면 못 따라갑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중보기도를 세우시려고 하는데, 그것이 장애가 되니까 다시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제가 그래서 분당에서 개척할 때, 말씀드린 대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방문했습니다. 저희 교회는 침례교회라 잘 안 오는데, 그런데도 200명 이상이 방문했습니다. 교회 혹시 거기 다닐까 하고, 그런데 메시지는 엄청 세고, 예배드리는 방법은 다르고, 그러면서도 그렇게 드리니까 안 옵니다. 다섯 명이 안 남았습니다. 월세는 한 달에 250만원씩 나가는 그런 상황에서도, 그런 대도 제가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밖에 할 수 없었던 이유가 뭐냐 면, 교회가 세워져 봐야 뭐합니까. 하나님이 역사하시지 않고, 다시 시작하라고 하면 다 버리고 또 다시 시작해야 되는데, 저는 나이만 점점 들어가는데 언제까지 계속 시작만 할 겁니까. 그래서 사실은 어떻게 되든지 간에 하나님 주신대로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만큼 중요합니다. 여러분 실제로 중보기도가 없이는 못 갑니다. 우선 하나,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도 이건 필수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은 놔두고라도 우리 입장에서 한번 보십시다. 여러분 침노하는 무리로 선다는 것은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것이고, 전 존재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인데, 여러분 교회에서뿐만 아니라 비즈니스(business)에서도 세상에서 오늘날의 방법과 타협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길로 세워진 그러한 business를 하나님이 세우시기 원하시는데, 그것이 쉬울 것 같으십니까. 교회를 그렇게 세우는 게 쉬울 것 같으십니까.

그 때, 김영식 목사님이 저를 위해 기도해 주는데, 하나님이 그런 그림을 보여 주셨답니다. 하나님이 김 목사님에게 예언적인 기름부음을 주셔서 그림이 잘 보이십니다. 기도해 주는데, 화분을 거꾸로 탁 놔졌답니다. 그러면 나무가 죽어야 되는데, 나무가 더욱 잘 자랐답니다. 그 말이 무슨 말이냐 면, 제가 어디 부흥회 가서 어제 설교한 것 같이 설교했더니 어떤 목사님이 그러시는데, 저 말이 다 맞는데 저렇게 설교 해 가지고 누가 교회 오겠느냐, 맞는 하나님의 말씀인 건 분명히 맞는데 저렇게 해 가지고 어떤 성도가 교회 남아있겠느냐 그 말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전파한다는 것은 200명이 온 가운데 5명도 안 남으니까 그것은 무엇과 똑 같으냐 면, 화분 거꾸로 엎어 논 것과 같습니다. 우리 사익에는 화분을 거꾸로 엎어놓으면 당연히 죽어야 됩니다, 그런데 당연히 안 죽습니다. 왜요. 교회는 하나님이 세우시기 때문입니다. 제 이야기는 뭐냐 면 그러한 상황 가운데서 믿음으로 밀고 나갈려 면 여러분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어떠한 행하심을 여러분에게 지속적으로 보여줌으로써 하나님의 약속을 여러분에게 보여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여 주심으로 여러분에게 용기를 주시고, 여러분이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이시고 그것을 붙들고 나가게 하지 않으면 갈 수 있을 것 같으십니까. 못 갑니다. 환경 적으로는 엄청난 영적 전쟁이 오게 될 것이고, 경제적으로 엄청난 억압 가운데, 압박 가운데 오게 될 것이고, 말씀드린 대로 한 달에 250만원 적자가 나버렸다니까요. 그렇다고 어디서 빚내어 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 면, 하나님이 채우셔야 되니까요. 그런데 거기다가 십일조만 100만원 하는 분도 교회를 떠날지 모르겠다고 그러고, 그러면서 결국 몇 분이 떠났는데 그분들이 헌금 합하면 200만원 이상이니까. 이제는 한 달에 500만원 적자가 나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은 월세 딱 계산해보고 보증금 계산해 보니까. 500만원으로 나누면 몇 개월 후면 교회가 문 닫을 거라고 생각하고 나갔습니다. 제가 부족해 나갔습니다. 그분들 잘못도 있지만,  그러나 제 이야기는 뭐냐 면, 그렇게 여러 가지 압박이 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하나님 말씀을 타협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러하니까. 차라리 그럴 바에는 목회자로 부르실 때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서 여태까지 왔는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다면 무엇 때문에 목회 하랴. 차라리 다른 것을 했으면 이거보다는 더 잘살지, 하는 마음을 가지고 주님 말씀하신 대로 갈 수밖에 없었는데, 그렇게 간다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힘이 없이 될 거 같으십니까. 하나님이 지속적으로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시켜 주시고,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여주시고, 하나님께서 속사람을 강건케 하시고 능력을 부어주시지 않으면 그것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십니다. 영적인 방해는 엄청난데, 내 외적으로 외부 사람들이 조롱하고, 비방하고, 내부 사람들마저도 목사님 그렇게 해 가지고 교회가 되겠습니까. 라고 흔들고, 남아있는 사람들마저도 그렇고, 그나마 오는 사람들도 왔다가 오지 않고, 왔다가 비웃으며 가고, 갈 때는 어떤 사람들은 예배 중간에 가버리고, 가면서 싱긋이 웃고 가버리고, 다시는 나타나지 않고, 어떤 때는 성도들이 와서 하는 말이 목사님이 조금만 쉽게 가르친다면 우리가 벌써 이 교회로 왔을 겁니다. 그렇게 말하는데, 그것도 다른 교회에서 목사님의 오른팔이라고 말하는 그렇게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데, 그런 생각할 때, 그럼 우리 교회는 과연 누가 올 수 있을까싶어서 생각하니까 교회는 당연히 성장해야 되는데, 교회가 될 거 같지가 않은데, 그런데 하나님 말씀 붙들고 가지 않으면 갈 수 있을 것 같으십니까. 못 갑니다. 거기에서 가게 하는 게 중보기도입니다.

왜요, 우리가 당한 처지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설 때, 하나님의 안목을 부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엘리야에게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그래서 우리가 목회하는 목적이 우리의 성공이 아니고, 우리가 세상에서 주님을 따르겠다고 결단하며, 주님을 따랐을 때에는 더 돈도 많이 벌 수 있었고, 더 안락한 편안 삶을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 기꺼이 포기하고 주님의 뜻이 우리의 삶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만 있다면 기꺼이 고생이라도 각오하겠다고 해서 주님을 따랐는데, 우리가 주님의 길이 아닌 걸 뻔히 알면서도 현실적인 것을 택해서 주님이 안 기뻐하신다면 우리 가운데 목회를 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주님을 위해 순종할 수밖에 없는데, 이때 우리에게 힘을 주고 하나님 마음을 부어주고 이기게 하시고 주님의 약속을 확인시켜 주시고 이렇게 하는 게 중보기도입니다.

뿐만 아니고요. 여기는 엄청난 영적 전쟁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에서 그랬습니다. 그 당시 전 종교사회가 예수님 대적한 것 아십니까. 주님 따라가다 보면 여기저기서 많이 대적합니다. 제가 유명해 졌습니다. 여러분, 제가 지난번에 대전에 침례교 선교사님들 교육받으러 오셔서 말씀도 전하고 식사라도 한번 대접하려고 갔습니다. 그런데 식당에서 카드로 지불하고 나왔는데, 선교사님이 한참 안 나오시는 거예요. 김만조 선교사님이라고 필리핀에서 지금 안식년으로 쉬러 한국에 들어와 계신데, 그런데 나중에 나와서 왜 이렇게 늦으셨느냐고 물었더니 거기에서 계산하는 형제가 그러는데, 저분 포도나무교회 여주봉 목사님 맞지요. 그러더래요. 그래서 어떻게 아느냐고 했더니 인터넷 들어가서 봐서 안다는 겁니다. 어떤 때는 제가 전혀 모르는 저 구석에 있는 식당하는 분들이 저를 알고, 제가 유명해졌습니다. 그런데 이거 아십니까? 저에 대한 평가는 정확하게 양쪽으로 홍해처럼 나눠진 것을, 한쪽에서는 선한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한쪽에서는 악한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저를 한번도 와서 만나보지 않은 분, 예배 한번 와보지도 안은 분, 제가 쓴 책을 읽어보지도 않은 분들이 저를 이단이라고 그러고, 이단은 아니지만 이상하게 간다고 그러고, 은사에만 치우쳐서 신비주의에 빠진 사람이라고 그러기도 하고, 별 사람들이 다 있습니다. 이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사람들이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마10:25>그렇게 말씀하셨는데, 아무것도 아닙니다. 별소리 다합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좋은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그랬는데, 예수님이 그랬던 것처럼, 사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여러분이 주님을 따라가면 반드시 두 종류의 반응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칭찬을 받을 것이고, 하나는 아까 말 한대로 대적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한 웨슬러 선생님이 그랬다는데, 돌이 날라 오는데, 한동안 돌이 안 날라 오니까 고민했다고 그럽니다. 자기가 타락한 모양이라고, 그래서 그렇게 생각하면 돌이 팍 날라 오더랍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감사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그 상황에서 줄기차게 사람의 평가 내려놓고, 하나님의 평가만을 소중히 여기며, 사도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나 자신을 평가하지 아니하니 그 날에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숨기운 것까지 드러내실 것이고 감추인 것까지 드러내실 거라고, 그렇게 하나님만을 신뢰함으로 나간다는 게 쉬울 것 같으십니까. 그 중보기도가 없으면 안 됩니다.
뿐만 아니라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의중에 있는 것들을 구합니다. 저희가 지금은 지하 전체를 사서 들어와 있지만, 그 건물 3층에 있을 때, 제가 앞에서 이렇게 중보기도 시간에 앉아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저에게 그러시더라고요. “넌 내 꺼야” 그 말이 무슨 의미였냐 면, 예를 들면 신랑이 예쁜 신부 하나를 얻으면 넌 내 꺼야 그러지 않습니까. 이때 신부가 가져올 폐물에 관심이 있으면서 내 꺼야 그럽니까. 저 여자가 해 줄 밥을 먹게 될 거니까 내가 신나겠다 싶어서 넌 내 꺼야 그럽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그를 얻는 자체가 기쁨이지요. 그가 자기 곁에 있는 게 기쁨입니다. 그와 마음을 토로하며 대화를 나누며, 사귐이 기쁨입니다. 하나님이 저에게 기뻐하신 것이 뭐냐 면, 제가 하나님을 위해서 뭔가를 열심히 하는 게 기쁨이 아니고, 제가 뭔가를 열심히 봉사해서 기쁨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 앉아서 하나님의 의중에 있는 것들을 구하며 하나님 그분만으로 기뻐할 때, 하나님 그분도 그것이 기쁨이요. 내가 하나님 곁에 있는 것이 하나님에게 기쁨이며, 하나님의 의중에 있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이 기쁨이며, 그것이 참으로 기쁨입니다. 넌 내 꺼야, 여러분은 무슨 말인지 모르지요. 전 압니다. 그 자리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보기도의 자리입니다. 그것이 주님과의 친밀함 자리고, 주님은 우리 자신을 기뻐하십니다. 신랑이 신부를 얻어서 그 곁에 있는 자체가 기쁨이듯이, 여러분들이 주님을 위해서 뭔가를 열심히 하기 이전에 여러분이 주님 앞에 서서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을 전 존재로 사랑하며, 하나님이 여러분의 사랑이며, 하나님의 의중에 있는 것을 가지고 주 앞에 간구하며, 그분이 기쁨이요. 그분만이 만족인 그분으로 족한 그 가운데 주님과의 교통함이 주님에게도 너무나 큰 기쁨이요 감격입니다. 주님은 저와 여러분이 그 자리에 있기를 원합니다. 사역요, 주님이 해 가십니다. 교회회복과 전 세계에 임할 부흥, 하나님이 하십니다. 제가 사역의 확장을 위해서 여태까지 아무것도 수고한 게 없습니다. 사역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이길수 목사님도 그렇지만 지금 엄청 바쁩니다. 제 아내 작은 아버님이 여기 와 계신데 목사님입니다. 이길수 목사님 옆에서 가까이 몇 번 보았는데, 그분이 하는 말이 아무리 젊더라도 하나님이 힘주니까 저렇게 하지, 주일 날 하루에 설교를 몇 번합니까. 성경공부 인도하지요. 월요일 날 하루에 세 차례, 아침부터 저녁까지 인도하지요. 이제는 화요일 날 대전에서도 인도해야지요. 목요일 날 훈련원 강의 나와서 여섯 시간 강의해야지요. 한 달에 몇 주간은 수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집회를 인도하면서 이렇게 해야지요. 토요일 날 돌아와서 성경공부 해야지요. 주일 날 그렇게 해야지요. 일년 365일 그렇게 돌아가며, 합니다. 기도 많이 하셔야 합니다.

제 이야기는 무슨 말이냐 면 우리가 주님 사랑하기만 하면 사역은 우리가 발벗고 좆아가도 못 좆아 갈 만큼 할 일이 많습니다. 그때도 우리는 사역이 목적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그랬습니다. 내가 다른 모든 사도들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한 것이라고, 그런데 이 중보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하십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계시하십니다. 그것이 여러분에게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인 줄 아십니까.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은 여러분의 결단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결단은 한계가 있습니다. 여러분 마음 속에 주를 향한 열정이 불타게 될 때, 여러분은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아가서 거룩한 삶을 위해서도 중보기도는 필수입니다. 왜요, 주님 앞에 나아가 주님, 주님만이 저의 목적입니다. 그때는 사역이 내려집니다. 제가 주님만을 사랑합니다. 주님이 저의 모든 것입니다. 주님 저는 주 앞에 이렇게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족합니다. 주님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주님,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너무나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주님, 우리의 죄악을 용서해 주세요. 우리가 하나님의 길을 떠나 하나님의 길을 알지 못하며, 영적인 지도자들이 눈이 멀었으며, 하나님의 백성들이 눈이 어두어 하나님의 길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많은 종교적인 의식은 가득하나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이 우리 가운데 세상사랑과 죄악이 가득합니다. 아버지여 우리를 사하소서. 그러나 하나님 우리는 하나님 백성이오니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로 인하여 우리에게 임하시며 이 땅을 고쳐주시고, 하나님의 부흥을 이 땅에 보내주시며, 뭇 백성들을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대화하는 거요. 그분만이 목적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계시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하십니다. 주를 향한 열정을 여러분 속에 불붙여 주십니다. 제가 처음에 중보기도 할 때는 그랬습니다. 그렇게 중보기도가 기쁨입니다. 그리고 그 시간만 되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이십니다. 하나님의 그 하시는 일들이 마음에 꽉 느껴집니다. 그런데 끝나고 나와서 텔레비전 5분만 봐버리면 싹 사라져버립니다. 그 시간 동안은 느껴지는데, 그러니까 그렇게 기도하곤 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기도할 때뿐만 아니고, 길을 갈 때도, 집에 있을 때도, 하나님 이 마음이 느껴지게 해주세요. 하나님 이 마음이 내 속에 있게 해주세요. 왜냐 면 그것이 너무나 좋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그런 건 아닌데, 그때뿐만 아니라 다른 때에도 그러한 것을 더 부어주세요. 이렇게 할 때 하나님 마음을 알게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오늘날 죄가 많지요. 이거하고, 여러분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가운데 오늘날 하나님 백성들 가운데 세상 사랑이 얼마나 가득하며, 그것이 영적인 간음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한 것을 이만큼만 안다면 여러분은 전혀 태도가 달라질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 우리 가운데 죄가 많지요. 하는 이론적인 개념은 여러분에게 별 도움을 안 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가운데 가득한 세상사랑 영적인 간음으로 인하여 하나님 마음이 얼마나 아픈 것인가를 여러분이 부분적으로만 알아도 여러분은 전혀 달라질 것입니다. 그때부터, 다른 사람은 어찌하든지 여러분은 다를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언제 부어지느냐. 중보기도할 때, 부어집니다. 그 중보기도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제 책을 보세요. 성령의 역사하는 교회 뒤에 있고, 중보기도란에 있습니다. 제가 지금 자세히 설명할 시간이 없습니다.

이렇게 중보기도 드릴 때에 아버지의 마음이 부어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집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저에게 가장 많이 말씀하시는 두 가지 시간이 있습니다. 하나는 찬양과 경배 시간이고, 또 하나는 중보기도 시간입니다. 그런데 그 두 시간 다 공통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면, 나의 모든 의제 내려놓고, 내 생각 내려놓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러 나가는 시간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면서 내 전 존재로 그분을 높이고 찬양하는 것이 경배와 찬양입니다. 주님의 마음에 있는 것들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이 중보기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때 가장 많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여러분 중보기도는 그러기 때문에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들에게 있을 기름부음입니다. 엘리야의 영, 그리고 하나님이 세우시는 침노하는 무리의 핵심적인 한 부분이 중보기도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오늘날 다윗의 장막을 회복시키고 계십니다. 이 다윗의 장막의 회복은 말세지말에 있을 대 추수를 위해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저희 새물결 선교회 분당에서 다윗의 장막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셔서 그것이 지금 이루어지도록 하나님의 길을  찾으며 더 양육하며 실천에 나가려고 합니다. 다윗의 장막이 뭐냐?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다윗의 장막을 회복시키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교회를 가리킵니다. 구약에 보면 다윗의 장막이 있었는데, 그 장막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위하여 다윗이 친 장막인데, 일반 텐트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특별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 다윗의 장막이 있을 동안에는 장막이 두 개였습니다. 하나는 모세의 장막이 있었고, 하나는 다윗의 장막이 있었습니다. 똑같이 있었습니다. 40년 동안 솔로몬 장막이 세워지기 전까지, 그런데 다윗의 장막에서는 특별한 것이 뭐였냐 면, 다윗의 장막에서는 짐승으로 드려지는 제사가 드려지지 않았습니다. 가장 특별한 것이 뭐였냐 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언약궤가 있었는데, 그 언약궤가 특이한 것이 뭐였냐 면, 모세의 장막에서도 나중에 솔로몬의 장막에서도, 언약궤 앞에 휘장이 드려져 있었습니다. 왜냐 면, 그 언약궤 위에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러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개방되지 않았습니다. 구약시대에는 그러기 때문에 휘장이 드려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예루살렘 성전에 있던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이것은 하늘나라에 하나님 보좌가 열린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 언약궤는 하나님의 언약의 상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 아십니까. 다윗의 장막 안에는 그 앞에 휘장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노출되어있었습니다. 그래서 시편 26편, 27편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보실래요. 26편8절 “여호와여 내가 주의 계신 집과 주의 영광에 거하는 것을 사랑하오니” 27편4절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이것이 한가지예요. 많은 것 중에 첫 번째도 아니고요. 단 한 가지 그가 원하는 소원입니다.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one thing I ask of the LORD N.I.V에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 한 가지를 구한다. this is what l seek 이것이 내가 찾는 것이다. that l may dwell in the house of the LORD all the days of my life 내 생애의 모든 날 동안에 내가 하나님의 집에 거하면서 to gaze upon the beauty of the LORD 주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and to seek him in his temple 그분의 전에서 그분을 찾는 것이라. 무슨 말이냐 면, 거기에서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러 계셨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계시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그 속에 들어가서 뭐했느냐 면, 그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머물며,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 가운데서 하나님 그분을 바라며, 그분의 얼굴을 구하며, 그분과 교통하며, 그분 안에 거하는 것이 그에게는 그 무엇보다 기쁨이었고, 감격이었으며, 그것이 그에게 있는 유일한 소망이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다윗은 우리가 역대 상을 보면, 이제는 제사장들을 세우는데, 모세의 장막의 제사장들은 짐승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장막에서는 한번도 짐승의 제사가 드려지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멘 처음에 헌당식 할 때 빼놓고는 짐승의 제사가 드려지지 않았습니다. 여기에서는 제사장들이 뭐 하느냐 면, 찬양하는 제사장들입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밤낮으로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를 드렸습니다. 이들이 또한 뭐 하는 자들이냐 면, 예언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역대 상 25장에 보면, 다윗의 장막은 뭐와 똑 같냐면, 아직 신약시대가 되기 이전에, 하늘의 예배를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요한계시록 4장과 5장에 보면 하나님 보좌에 드려진 예배입니다. 거기 하나님의 보좌가 노출되어 있습니다. 거기 하나님의 영광이 계십니다. 하나님이 영광으로 머물러 계십니다. 스랍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24시간 하나님의 영광 앞에 찬양과 경배를 드립니다. 거기에 장로들이 있는데, 한 손에는 거문고를, 한 손에는 대접을 가졌습니다. 여기에 성도들의 기도가 들어있다고 그랬습니다. 경배와 찬양이 있고, 중보기도가 거기 어울려져 있습니다.

신약의 예배가 바로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인데, 지금 말씀드린 하늘의 예배를 드리는 것이 곧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 좋은 옷 입고 와서 단정하게 앉아서 예배드리는 것이 참다운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하나님 보좌가 열려져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못 박히고 돌아가실 때, 휘장이 갈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의 장막에서는 신약의 예배가 예언적으로 나와 있는 것입니다. 벌써, 주전 1,000년 전에 하늘의 예배가, 그래서 오늘날은 성령의 도움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그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 앞에서 그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분으로 인하여 기뻐하며, 하나님 그분 자신이 우리의 기쁨이요. 감격이요. 그분의 얼굴을 구하는 것이 우리 예배입니다. 우리 예배는 하나님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장막은 뭐냐 면, 이처럼, 하나님의 교회에서 24시간 쉬지 아니하고 하나님 백성들이 하나님께 나아오되 하나님 얼굴을 구하여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하나님 그분을 찾아서, 아까 말했죠. 넌 내 꺼야 하나님 그분 자신이 목적인 것입니다. 그분과 함께 있는 것이 삶의 목표고, 그분의 의중에 있는 것들을 가지고 그분과 교통하는 것이 한 가지 유일한 소망이고, 그분이 가장 귀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얼굴을 구하여 나오되 거기에 찬양과 경배가 같이 갈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 예언과 중보기도가 같이 갑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예언을 따라 기도하게 하십니다.

엘리야가 예언자였습니다. 하나님의 질투로 기도하게 하신 것처럼, 뭐 했습니다. 불이 내린 다음에 엘리야는 빗소리가 들린다고 그랬습니다. 그 소리는 모든 사람들이 들은 소리가 아닙니다. 예언적으로 들린 소리입니다. 그리고 그때 올라가서 기도했습니다. 이처럼 거기에서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을 따라 하나님께서 기도하게 하신 대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입니다. 이처럼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이고, 찬양과 경배와 중보기도가 어울러 질 것이고, 바로 하나님의 보좌에서 드려진 것처럼 다윗의 장막에서 그림자로 보여준 것처럼, 그것이 회복될 거라고, 신약시대에 사도행전 15장에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언과 중보기도가 같이 어우러질 것이고, 거기에 이렇게 중보기도를 통해서 열방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그 일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사야서 58장, 이사야서 62장, 아모스서 9장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이 세계적으로 이러한 일들을 지금 이루고 계십니다. 여러분 인터넷 홈페이지에 가끔 들어가 보시면 지금 여러 나라들에서 다윗의 장막에 대한 이야기들이 퍼지고 있는 것을 볼 것입니다. 그리고 24시간 그렇게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일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면, 우리가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침노하는 무리를 세우고 계시는데, 그들의 한 특징은 중보기도하는 자들입니다. 주의 길을 예비하는 엘리야의 영의 특징 중에 중요한 하나가 중보기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중보기도를 또한 세우시되,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주야로 아까 이사야서 62장에 나온 것처럼,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를 따라 기도하게 하시고, 그 중보기도를 세우실 것이고 인도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되어지게 될 때, 대 추수는 예비 될 것이고, 하나님의 부흥은 그야말로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 조짐들이 이미 보이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제 밤에도 하나님이 얼마나 놀라웁게 함께 하셨습니다. 그것은 그 조짐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그 일들을 이루고 계십니다. 여러분 손바닥만한 구름이 보이지 않습니까? 빗소리가 들리지 안습니까? 중보기도 하세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다 중보기도 자로 세워주시기를 축원합니다. 햇빛교회 가운데 중보기도를 하나님께서 놀라웁게 세워주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침노하는 무리로 세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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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노하는 자  (0) 2007.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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