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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부흥을 위한 중보기도

시리즈설교/중보기도

by 발의무리 2008. 7. 7.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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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장. 부흥을 위한 중보기도


이 시간 살펴볼 부분은 부흥을 위한 중보기도입니다. 전체적인 이번 주제를 부흥을 위한 중보기도로 보는데, 그 가운데서도 오늘 저녁에 살펴볼 부분은 부흥을 위한 중보기도가 무엇이고, 또 부흥을 위한 중보기도가 어떤 단계로 이루어지고, 그 내용이 어떤 것인가 이런 부분들을 좀 살펴보려고 합니다. 두 가지를 살펴 보고 하는데, 하나는 부흥의 단계이고 그 다음은 부흥을 위한 중보기도의 요소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나누는 가운데 참 빛을 비추시고 또 깨닫게 해주시기를 구합니다.

1. 부흥의 단계

1] 처지인식에서부터 부흥은 시작됩니다.
부흥을 위한 중보기도의 단계에서 첫 번째는 처지인식에서부터 부흥은 시작됩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쓴 “부흥” 책에 보면 이렇게 얘기합니다. 부흥에 대해서 체계적이고 아주 잘 정리한 분입니다. “부흥의 첫 번째 단계는 우리가 여기서 보는 것처럼 자기의 처지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의 의미를 깨닫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어떤 부흥의 역사든지 교회사에서 일어난 어떤 위대한 영적운동에 대한 기록이든지 다 읽어보라고 촉구하는 바입니다. 그러면 한 번도 예외 없이 언제나 그러한 일이 일어났음을 즉시 발견할 것입니다. 오늘날 그런 것이 어느 정도 있기 까지는 참된 부흥에 대한 소망이 전혀 없습니다.” 저는 이 글을 쭉 읽어가면서 두 가지 단어가 와닿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예외 없이” 그것도 한 번도 예외 없이, 처지를 인식하는 일이 있기 전에는 부흥이 온 적이 없다. 오늘날 우리는 1907년 평양 대 부흥의 100주년 되는 해를 맞아서 가는 곳마다 'again 1907' 로 얼마나 많은 집회와 기도모임을 갖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그런 부흥이 우리 가운데 임하기를 위해서 우리가 살펴볼 때, 사실 이 부분은 우리가 필수적으로 살펴보아야 할 부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또 한 가지는 “어느 정도 그런 것이 교회에 있기 까지는 참된 부흥에 대한 소망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 일이 있지 않고서는 전혀 소망이 없다는 겁니다.” 부흥이 올 때마다 언제나 예외 없이 무슨 일이 있느냐? 그 처지를 인식하는 일이 있었다는 겁니다. 처지를 인식한다는 말은 자기들의 상태를 보는 것입니다. 보되 하나님의 관점에서 자기를 보는 일들이 일어나지 않고서는, 한 번도 부흥이 온적이 없다는 겁니다. 엄청난 얘기입니다. 그래서 처지인식을 하는 것이 부흥의 첫 번째 단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처지를 인식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현실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우리의 현실을 보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재보려면 잣대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제가 사람들과 대화하는 가운데 보면 많은 사람들에게 편견이 있습니다. 왜곡되고, 자기 성장환경에서 또 자기 관점에서 편견이 있어서 얘기하다보면 자기 나름대로 좋은 사람, 싫은 사람이 참 많습니다. 한 번은 어떤 두 사람이 얘기하는 것을 옆에서 가만히 듣다가 그 사람들이 얘기하는 기준에 저를 비춰보니까 저는 진짜 안좋은 사람이더라고요. 그런데 사실은 그분들의 잣대가 구부러진 것입니다. 자는 반듯해야 됩니다. 구부러진 것을 가지고와서 재보면서 ‘에이 틀렸네’ 그러는데, 사실 어떤 자로 재보느냐가 아주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 기준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비춰질 때, 우리의 실상이 실제인지 아닌지를 적나라하게 볼 수 있습니다. “부흥” 책을 좀 더 보겠습니다. ‘우리는 어떤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상태를 시험하는 방식은 분명히 잘못된 것과 교회를 비교하여 대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상태를 시험하는 시금석은 교회를 신약이 말하는 교회 상에 비추어보는 것입니다. 아니면 개혁이나 부흥이 일어났던 위대한 시기나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이 위대한 영적 표증으로 나타났고, 하나님의 임재가 교회 가운데 있었던 시기에 교회가 어떠한 모습을 취했던가를 살펴보면서 거기에 현재의 교회 상태를 비추어보는 것입니다. 복음적인 교회가 그러한 교회와 자기들을 비추어볼 때, 어떤 모습으로 보일지 의아합니다.’ 구부러진 잣대를 가지고 교회를 재면 안된다. 그래서는 처지를 인식할 수 없다 이 말입니다(225p)

우리가 어떤 절대적인 하나님의 기준 가운데서 우리 자신을 보지 못하는 이유가 뭐냐면, 그 시대에 어떤 성장하는 교회나 잘나가는 교회와 비교해서 우리 자신을 비교한다는 것입니다. 또는 상대적인 비교의식으로 우리 자신을 살핍니다. 내가 그래도 저 사람보다는 나아, 그래도 우리 교회가 저 교회보다는 나아, 이러면서 극단적인 예들을 들어서 우리는 그보다 낫고, 우리는 평균 이상이고, 우리는 괜찮은 것처럼 이렇게 생각해서는 절대로 처지를 인식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철저하게 처지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부흥이 일어났던 시기나 하나님이 능력으로 역사하셨던 시기에 또는 초대교회의 그런 예들을 들어서 우리 자신을 살펴볼 때에 뭐가 잘못되었는지, 뭐기 삐뚤어졌는지, 뭐가 아닌지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얼마나 마음 아픈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떤 눈으로 보실지에 대한 인식이 우리 가운데 일어나게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한 인식이 올바로 되지 않고서는 우리가 진정으로 부흥의 역사를 경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관점에서 그 처지를 인식하게 될 때는 근본적인 회개의 자리로 돌이키게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피상적인 자리에 서게 됩니다.

오래전에 나온 “목회와 신학” 잡지에서 본 내용입니다. 98년도인가 꽤 오래 되었는데, 약 10년 전에 나온 것 같습니다. 그때 거기 나온 통계의 질문 내용이 이런 겁니다. “오늘날 교회가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합니까?” 그 질문을 목회자와 평신도를 대상으로 했는데, 약 93.5%가 “한국교회가 문제가 있다.” 그중에 상당수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답했습니다. 문제가 있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인식하고, 그 중에는 아주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우리 가운데서 근본적으로 어떤 조치를 취하며 삶의 전환을 가져오는 그런 자리에 서야 될 필요를 보면서 근본적으로 전환한 이들은 사실 얼마나 될지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뭐가 문제인지. 어디서부터 뭐가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 잘 모르는 자리에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심각하다고 표현하는 부분에서 한 예가 교회에 새신자가 더 이상 들어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리고 더 이상 교회 가운데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능력들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만 성장하면 우리 교회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우리가 얼마든지 무시하고 지나갈 수 있다는 겁니다.

사실 우리가 진정으로 처지를 인식하면 우리 삶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 중에 하나를 예를 들겠습니다. 느헤미야 1장 2-4절까지 봅니다.
“2 나의 한 형제 중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 사람과 예루살렘 형편을 물은즉 3 저희가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은 자가 그 도에서 큰 환난을 만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훼파되고 성문들은 소화되었다 하는지라 4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느헤미야는 어떤 사람입니까?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사람으로서 매우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는 왕의 술 맡은 관원장으로 왕의 측근에 속하여 인정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포로로 잡혀가서 그 정도의 수준이면 얼마나 성공한 사람입니까? 어쩌면 그는 지금의 자리에 있으면서 자기 민족이 염려가 되겠지만 가능하면 자기의 신분을 감추고 싶은 그런 입장을 가졌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면 자기가 포로 출신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 별로 유익이 없을 것이니까요. 우리는 불리하면 본능적으로 뭔가를 숨기고 싶은 속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동생으로부터 예루살렘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소식을 물었더니 동생이 하는 말이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이 말을 들은 느헤미야는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나님 앞에 금식하고 기도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 참 중요함이 있는 것 같습니다. 뭐냐면 우리는 어떤 문제를 보되 피상적으로 보는지, 아니면 진짜 그 중심에서 처지를 인식했는지, 다른 말로 말하면 이론적으로 봤는지, 아니면 실제로 봤는지 그 차이를 좀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과연 우리가 진짜 보고 있는지, 아니면 그냥 두루뭉술하게 보고 있는지, 그럼 두루뭉술하게 보게 되는 것과 실제로 보는 것의 차이는 뭡니까? 그것은 그들의 반응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마 예루살렘 소식을 느헤미야만 듣지는 않았을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들었을 겁니다. 그런데 특별히 느헤미야만 예루살렘의 상황을 전해 듣고 수일 동안 울며 금식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애통하며 회개하는 자리로 나갑니다.
“5 가로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6 이제 종이 주의 종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이스라엘 자손의 주 앞에 범죄함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나의 아비 집이 범죄하여 7 주를 향하여 심히 악을 행하여 주의 종 모세에게 주께서 명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8 옛적에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만일 너희가 범죄하면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 흩을 것이요 9 만일 내게로 돌아와서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청컨대 기억하옵소서 10 이들은 주께서 일찍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구속하신 주의 종이요 주의 백성이니이다”

느헤미야는 자기 민족의 죄를 자신의 죄로 여기고, 나와 아비집이 범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다고 고백하면서 전환하는 자리로 갑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현실과 처지를 피상적으로 인식하는 자리에 머물게 될 때, 어떤 입장에 있습니까? 참 오늘날 우리가 문제야, 오늘날 한국교회가 문제야, 그런 말은 많이 하지만 본인이 엎드려 하나님 앞에 애통해하며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자리에 근본적으로 돌이키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렇게 서지 않습니다. 그렇게 선다면 그 다음 행동으로 나아가 느헤미야처럼 결국은 중보기도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처지를 인식함이 우리 삶의 관건입니다. 하나님의 관점과 우리의 관점은 다릅니다. 예를 들면 요한계시록 3장 1절에 보면 “사데 교회” 같은 경우에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진 교회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실상은 죽은 교회라고 말합니다. 그 당시 팽배한 가치관으로 볼 때, 사데 교회는 자타가 인정하고 칭찬하는 살아있는 교회였습니다. 저(우리) 교회는 능력이 있어, 저(우리) 교회는 많은 사람이 모여, 저(우리) 교회는 왕성한 프로그램이 있어, 저(우리) 교회는 왕성한 활동력이 있어, 저(우리) 교회는 잘 모이고 기도를 많이 해, 이렇게 자타가 칭찬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는 죽어있는 교회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사람의 관점과 하나님의 관점이 다릅니다. 자기 처지를 인식함의 아주 중요한 한 가지는 내가 하나님을 인식하고 그분이 현재 나의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아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과연 내 현재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이사야 62장을 보겠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처지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1 나는 시온의 공의가 빛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같이 나타나도록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인즉”

지금 여기에 “시온의 공의가 빛같이” 그랬는데, 그럼 시온의 공의가 빛같이 지금 있다는 겁니까? 없다는 겁니까? 없다는 겁니다. 시온의 공의가 완전히 무너져버렸다는 겁니다. 그렇게 앞으로 나타나기를 위해 기도한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같이 나타나도록” 그랬는데, 지금 그 구원이 있다는 겁니까? 없다는 겁니까? 없다는 겁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 뒤에 보면, “2 열방이 네 공의를, 열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 여기도 앞으로 그렇게 될 것인데, 그런데 지금은 없다는 겁니다. 3절, “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면류관,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 앞으로 그렇게 될건데 지금은 형편없다 이 말입니다. 4절, “다시는 너를 버리운 자라 칭하지 아니하며”, 그럼 이 말은 지금 버리운 자라는 겁니다.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칭하지 아니하고”, 그러면 지금 그들은 황무지라 칭한다는 겁니다. 소망이 없는, 생명이 없는, 능력이 없는, 똑같은 현실을 보면서 어떤 사람은 소망이 있다고 말하지만, 어떤 사람은 다른 관점으로 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 땅을 바라보되, 두 가지 관점으로 보고 있는데, 그 중 하나는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고, 또 하나는 처지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들은 황무지와 같은 소망이 없는 땅에 있다는 겁니다. 사실 우리가 처지를 인식하게 되면, 그때 우리가 어디로 나갈 수 있느냐? 우리의 이러한 처지를 위해 구원자이신 주님을 찾게 됩니다. 여러분 이건 개인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오늘날 우리 가운데 상실된 것 중에 하나가 십자가의 능력이라고 봅니다. 십자가의 능력이 오늘날 상실된 주된 이유가 뭐냐면 저는 두 가지 이유라고 보는데, 하나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잘 모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을 잘 모른다는 겁니다. 제가 모른다고 표현하지 않고, 잘 모른다고 그랬습니다. 뭐냐면 대충 안다는 겁니다. 우리 자신을 알되 성경이 말하는 관점에서 우리 자신을 잘 모른다는 겁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의 의는 선함이 없되 하나도 없다는 겁니다. 십자가에 누가 달리느냐? 죄인 중에 죄인, 저주받은 자들이 십자가에 달립니다. 그럼 그 십자가에 누가 달려야 합니까? 내가 달려야만 합니다.

오래 전에(10년 전쯤) 교회에서 사순절 기간 동안 집회하면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가지고 설교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설교를 하는데,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이 본문이 저에게 질문하는 것 같았습니다. ‘너, 십자가에 못 박혔느냐?’ 그 말에 제가 개인적으로 못 박혔다는 것은 신학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지만, 정직하게 저 자신을 보면서 ‘내가 못 박힌 자인가?’ 라는 물음에는 제가 머리로는 대답하겠는데, 가슴으로는 대답을 잘 못하겠더라고요.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저는 그때 가슴으로 대답이 안나왔습니다. 솔직히 그 말이 무슨 말인지도 몰랐습니다. 신학적으로는 이해하는데, 저와 관련해서는 잘 모르겠는 겁니다. 그래서 그때 개인적으로 무척 씨름하며, 금식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찾는 가운데, 비추셔서 이해하고 넘어간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의 이해와 나를 스스로 보는 이해가 같지 않습니다. 많은 경우에 어떤 때는 성경을 보면서 동의하지만, 다음 순간 자기 의와 자기 잘난 것 붙잡고 갈려고 하는 경향이 우리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성경적인 관점으로 인간의 타락의 정도를 물으면 빵점이라고 말하는데, 자신이 빵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함이 잘 안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우리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해지는 겁니다. 우월의식을 갖습니다. 내가 된 것처럼 생각합니다. 내가 원래 있어야 될 자리에 잘 않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과 친밀함이 안됩니다. 또 한 가지는 반대로 죄책감에 있을 때, 하나님과 친밀함이 안됩니다. 우리가 죄책감과 우월의식에 빠지는 이유는 자신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였고, 내가 원래 그런 자였고, 그래서 내가 우월의식을 가질 수 없는 이유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로만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내가 죄책감보다는 죄책감에서 돌이켜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여 보좌 앞에 설 수 있는 이유는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된 자로써 하나님 보좌 우편에 있는 하나님의 가족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처지를 인식하는 것이 우리 가운데 아주 핵심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십자가가 나의 유일한 처방이었음을 우리가 이해하게 될 때, 십자가의 능력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사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처지를 잘 모를 때, 교만해 지거나 우리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할 때 우리는 안일함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관점과 우리의 관점은 다릅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교회를 향해 실상은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우리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함이 없다고 말합니다. 자신들의 처지에 대한 인식이 없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자기 의와 자부심에 빠져 우월의식에 빠지고, 안일함에 빠져서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사실 저는 오늘날 교회가 라오디게아교회와 같은 상태에 상당히 근접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만약에 그런 자리에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실상은 영적으로 헐벗고 굶주리고 아무 것도 없는데, 우리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함이 없다고 자만하고 있다면, 진정한 예배자로 설 수 있겠는가? 그러한 상태에서 진정한 예배의 삶이 가능하겠는가? 우리가 우리의 처지와 형편을 인식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살 수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선명하게 인식하면 우리는 진짜 우리의 전존재를 다해서 주님을 찾고 구하고 예배하는 자리에 서게 될 것입니다. 시편 139:4입니다.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우리가 이 말씀을 인식하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리로 서게 된다면 안일함에 빠져 습관적으로 예배드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실상을 보라고 말씀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처지를 인식해야 합니다.

이사야 29장을 보면 심판을 예고하고, 30장을 보면 심판의 결과가 나옵니다. 29장 13절입니다.
“13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실상은 내게서 멀도다.”

저들이 입술로는 하나님 사랑한다, 존경한다고 말하지만 그 중심을 하나님이 보실 때, 실상은 멀리 떠나있다는 겁니다. 그 결과 1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 심판이 뭐냐면 저들을 영적으로 소경되게 하는, 영적분별력이 가려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30장에 보면 1-17절까지 다섯 가지로 나타납니다. 30장을 자세히 보면 A. B. C. B-. A- 이런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성경이 이런 구조를 많이 씁니다. C를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A에 보면 믿음이 없습니다.(인본주의로 빠진 현실) 그 다음에 A-, 17절을 보면 그 결과 하나님의 말씀이 더 이상 처방이 없기 때문에 그 권세와 능력이 없습니다. 레위기 26: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 다섯이 백을 쫓고 너희 백이 만을 쫓으리니 너희 대적들이 너희 앞에서 칼에 엎드러질 것이며” 이런 권세를 주셨는데, 현실은 반대입니다. 17절에 보면 “한 사람이 꾸짖은즉 천 사람이 도망하겠고 다섯이 꾸짖은즉 너희가 다 도망하고....” 또 거기 B는 정직함이 없는 부드러운 설교, 좋은 설교, 소위 축복설교만을 듣기 원합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서 그럽니다. 사실 우리 가운데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지면 삶이 변화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강한 설교만 한다고 해서 사람이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특별히 영적으로 소경된 시대는 강한 설교를 해가지고는 사람이 안 변합니다. 강한 설교하면 도망갑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변호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처방이 뭐냐? 신앙의 본질 가운데 사람들이 세워지도록, 개인적으로 주님을 알도록, 하나님을 찾도록, 인격체 되신 주님의 그 임재 가운데 서도록 이끌어 주는 게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그렇게 되어져야 개인적으로 하나님 말씀 앞에 자신의 삶을 조정하고 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자신이 비춰지는 일이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그게 잘 안됩니다. 그러니까 자꾸 부드러운 설교만을 원합니다. 그리고 강한 설교하면 사람들이 정직하게 말씀에 대면하지 않고, 싫어하고, 도망가려고 합니다.

얘기가 좀 옆으로 가는 것 같은데, 우리가 진짜 심각한 것 중에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토대가 뭐냐는 겁니다. 저는 우리가 순종하는 것의 유일한 근거를 하나님 사랑이라고 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4절에서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시는도다.” 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기초해서 순종해야 된다고 믿습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개인적인 사랑의 관계에서 지속적으로 자라고 성숙되게 될 때에 하나님을 알고, 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심을 알고, 이런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을 때, 우리는 기꺼이 하나님의 의중과 의도 앞에 우리의 옥합을 깨뜨리는 헌신의 자리로 갑니다. 그런데 신앙이 의식으로 본질을 대체하는 자리에 있으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사야 29장에서 빠져있는 것처럼, 입술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습관적으로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지만 그 중심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습니다. 그러면 그때 나타나는 특징이 뭐냐면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냐면,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모르니까요. 그러니까 일정부분의 수준까지는 헌신하지만 그 이상은 안합니다. 정해놓고 거기 까지만 딱 하고 그 이상은 안합니다. 그렇게 될 때, 그렇다고 하나님의 기준을 강력하게 제시하면 강한 설교한다고 도망갑니다. 여기만 교회냐! 딴 교회도 있다. 우리 목사님은 치려고만 그래, 지금 I,M.F 보다 더 어려운 시대인데, 이러면서 반응하니까 삶이 변하지 않습니다. 이때 목회자들이 고민합니다. 어떻게 사람들을 끌고 갈까. 순종은 하게해야 되겠고, 교회도 성장하고, 재정도 돌아가야 되겠고, 그러면서 그때 쓰는 방법이 있는데, 그게 뭐냐면, 채찍과 당근입니다. 십일조를 예로 들면, 십일조하면 축복받는다. 이런 제목을 가지고 설교하면서 십일조해서 복 받은 사람의 예를 쫙 들면, 우리의 종교적인 심성이 도전을 받습니다. 아! 복 받으려면 십일조 해야 되겠구나. 이왕 다니는 것 십일조는 해야 되겠네 하면서 반응합니다. 그래도 말을 안들으면 이번에는 채찍을 듭니다. 성경에 십일조 안하면 황충이 온다고 했다. 그리고 십일조 안해가지고 어려움당한 사람들의 예를 쫙 들면, 웬만한 심장가지고서는 십일조 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 머리속에 어떤 인식을 가지고 순종을 하냐면 하나는 복 받으려고 하고, 또 하나는 안하면 두들겨 맞을까봐 합니다. 그러니까 이래저래 안할 수가 없어 하는 겁니다. 이래서 순종한다면 여러분 그게 진정한 순종은 아니지 않습니까? 오늘날 왜곡 될 대로 왜곡돼서 가는 겁니다. 제가 지난 주간에 어디 가서 집회를 하면서 학생들에게 왜 순종하냐고 물어봤더니, 학생들도 대답이 복 받으려고 순종한다. 두드려 맞을까봐 무서워서 순종한다. 그러는 겁니다. 진짜 하나님을 사랑해서 순종한다는 말은 별로 많이 없었습니다. 마태복음 7장 24절에 보면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자가 지혜롭다.”고 하셨는데, 여기 반석 위에 집을 짓는다는 말은 순종하는 걸 말합니다.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가 지혜롭다.” 그러면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가 지혜로운 사람인데, 두들겨 맞을까봐 순종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인가요? 아니면 복 받으려고 하는 순종이 지혜로운가요? 그건 둘 다 지혜로운 게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랑의 관계에서 이런 부분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왜곡하는 자리에 있게 될 때에, 부드러운 메시지가 통하고, 사람들이 좋아하고 반응하니까 목회자들이 메시지를 전하는데 얼마나 많은 유혹을 받습니까? 또 그런 교회가 성장합니다. 그리고 주변에서 성장하는 교회들마다 왜 성장하는지 연구하고 그런 세미나에 가서 듣다가 ‘야, 이거다’ 그러면서 가져다가 그대로 또 합니다. 왜 먹히니까요. 뭐가 잘못 된건지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사실 성경이 축복을 말합니다. 그런데 축복이 앞서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수단으로 복 받으려고 하나님을 얼르고 달래서 뭔가 얻어내려고 하는 게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순종이 아닙니다. 그것이 올바른 축복이 아닙니다. 축복 받으려고 뭔가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우리가 그분의 뜻을 따라 우리의 삶을 전존재로 동참하며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시고 또 그 순종하는 종들을 하나님께서 세우시며, 거기에 축복하시겠다고, 축복이 따라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30장 10절입니다.
“그들이 선견자에게 이르기를 선견하지 말라 선지자에게 이르기를 우리에게 정직한 것을 보이지 말라 부드러운 말을 하라 거짓된 것을 보이라”

여기 B-를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그게 뭐냐면, 그러니까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렇게 말씀합니다.
“15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가 말씀하시되 너희가 돌이켜 안연히 처하여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어늘 너희가 원치 아니하고 16 이르기를 아니라 우리가 말 타고 도망하리라 한 고로 너희가 도망할 것이요 또 이르기를 우리가 빠른 짐승을 타리라 한 고로 너희를 쫓는 자가 빠르리니”

위기 가운데서 하나님은 말씀을 보내사 그 백성에게 처방을 내리시고 또 말씀을 따라 위기에서 건지신다고 말씀하는데, 저들은 듣지 않고 말 타고 도망하리라고 한다는 겁니다. 더 이상 말씀이 그들의 삶에 능력이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처럼 하나님 말씀이 그 속에 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는 하면서 자기는 안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하면서 인본주의가 훨씬 앞섭니다. 그 결과 삶에 억압이 가득합니다. 14절에서는 물웅덩이에서 물 하나 뜰 그릇도 없으리라고 하십니다. 제가 볼 때 오늘날 우리의 처지가 저들과 비슷하고 한편으로는 그와 너무너무 유사하다고 봅니다.

제가 지난번에 미국에 가서 집회하는 가운데 진짜 심각한 게 보이는 겁니다. 그게 뭐냐면 미국에서 어떤 개척 교회하는 분들 얘기를 들어보니까 미국에서 영주권을 얻기 위해 제일 좋은 방법 중에 하나가 뭐냐면 신학교 가는 거랍니다. 신학교에 가 가지고 어느 교회에 전도사로 가면 영주권 나오니까 그래서 어떤 분은 명목상은 어느 교회 전도사로 있는데, 사실은 다른 교회에 나가고, 아니면 다른 교회도 잘 나가지 않고, 심지어 교회도 잘 안나간다고 합니다. 심지어 그런 사람도 있대요. 한국에서 원불교 다니다가 미국에 가서 신학교에 들어가서는 어느 교회 전도사 신분으로 영주권 받고, 가족들을 다 미국에 옮겨놓고 본인은 한국에 나와 가지고 다시 원불교 다니고 있대요. 왜 이런 일이 통하는가? 그것은 교회 성장과 관련해서 어떻게든지 교회가 한 사람이라도 끌어 모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실상은 인본주의가 판을 치는, 이것이 오늘날 능력이 없는 교회의 현실입니다.

최근에 부산에 있는 어떤 교회에 집회를 갔다 왔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1층 파, 2층 파로 나눠져 있는데, 제가 너무너무 안타까웠습니다. 어떤 목사님 얘기를 들으니까 우리 교단에 속한 많은 큰 교회들이 그런 어려움이 있다고 합니다. 여기 대만에서 오신 선교사님이 있는데, 제가 대만에 가서 집회를 하면서 그런 얘기를 했더니 좀 그런 상황에 있는 교회들이 있겠지 라고 생각하셨다가 한국에 오셔서 본인이 상황을 실제로 보면서 진짜로 심각한 오늘날의 현실을 보게 되었다고 하십니다. 오늘날 교회 내에 문제없는 교회가 거의 없습니다. 또 오늘 점심식사하면서 이번에 아이합에 다녀온 목사님께서 그러는데, 거기서 한국교회의 심각성을 그렇게 많이 얘기하더라고 했습니다. 사실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어떤 자리에 있는가? 우리는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1,200만 그리스도인이 있고, 이렇게 빨리 교회가 급성장한 나라가 없고,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가 우리나라에 있고, 놀라운 기도의 용사들이 얼마나 많고, 그러면서 자랑을 늘어놓습니다. 그런데 아이합에서 강사들마다 다 서서 이구동성으로 우리와 아주 크게 다른 기도를 하고 있다고 하더래요. 물론 그분들의 말이 다 100% 옳고, 우리가 다 잘못됐다. 저는 그렇게 보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우리의 관점이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 대부분의 교회가 잘 보지 못합니다.

몇 년 전 얘기입니다. 제 친구가 영국에서 공부를 하고 왔는데, 그 친구가 처음에 영국에 갈 때만 해도 한국교회, 그러면 굉장히 부러워했대요. 그런데 나중에는 한국교회, 그러면 기복신앙 이렇게 결론을 내린대요. 한국교회 회개해야 된다고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되게 많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로 인하여 땅에 떨어져 멸시를 받고 있는 그게 오늘날 우리의 현실이라고 봅니다. 에스겔서 36장 22절에 보면, “너희로 인하여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고 하나님께서 반복적으로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방 나라에 포로로 잡혀가니까 그 땅 백성들이 놀리는 겁니다. “그들을 가리켜 이르기를 이들은 여호와의 백성이라도 여호와의 땅에서 떠난 자라 하였음이니라” 그 당시 전쟁은 민족과 민족의 전쟁으로 이해했고, 또 그 뒤에 그 나라 신이 있음을 이해했고, 그러니까 그들이 전쟁에 진 것은 그들을 돕는 신이 무력한 것으로 이해되어졌습니다. 물론 이스라엘 민족이 포로로 잡혀간 것은 하나님이 무능해서가 아니라 저들이 하나님께 범죄해서 그 심판의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이방 민족들이 볼 때는 그들이 믿는 하나님 여호와가 무능한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들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고, 그들로 인하여 더렵혀진 나의 이름이라고 하나님께서 반복적으로 얘기하고 있습니다.

아프가니스탄 사건과 관련해 가지고 처음 제가 미국에 집회 갔을 때, 워싱턴 메릴랜드에서 인터넷을 열어봤습니다. 열어보고는 저는 엄청 충격적이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보면서 어쩌면 한국교회가 이걸 보면서 충격을 받아서 진짜 대규모 기도운동이 일어나지 않을까. 이렇게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아침에 금식했습니다. 그걸 보면서 진짜 힘들더라고요. 물론 얼마 안가서 다 잊어버렸지만, 한편으로는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어떻게 이렇게 심각하게 대할 수 있는가? 얼마나 지금 심각한 상황 가운데 우리가 있는가? 우리가 오늘날의 현실을 보면서 참 심각하다. 심각하다. 이런 얘기는 되게 많이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처지를 인식한다는 말은 그냥 그렇게 말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처지를 인식하면 행동으로 옮겨지게 됩니다. 삶의 일상적인 생활을 그대로 영위하면서 가는 게 아니라 뭔가 획기적인 전환이 이루어지는 그런 자리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부흥의 시작이라는 겁니다. 특히 부흥은 중보기도 없이 온 적이 없다고 그러는데, 부흥을 위한 중보기도의 자리에 은밀히 들어가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에 있어서도 처지를 인식하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처지를 인식하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주셔야 됩니다. 은혜로 눈을 열어주셔야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안목으로 보는 그런 일들이 없이는 부흥의 소망이 없습니다. 그런데 개인의 삶에서도 똑같습니다. 개인의 삶에서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자신을 인식하게 되면 획기적인 전환이 이루어집니다. 제가 볼 때, 우리의 삶에 능력이 없는 이유는 우리가 성경의 관점에서 보는 자신의 이해가 참 부족해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관점에서 자신이 비춰지기 전에는 우리는 잘 가고 있다는 인식을 갖기가 쉽습니다. 이만하면 괜찮다. 난 잘 가고 있다. 특별히 자신의 삶에 별 문제가 없다면 더 그렇습니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제가 한 예를 살펴보겠지만, 진짜 하나님의 관점에서 자신을 보면 이전의 삶과는 전혀 다른 자리에 있는, 그러니까 이대로는 안되겠다고 하는 절박한 삶의 전환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왜 예수님이 오셔야만 했는가를 다시 인식하게 되고, 그럴 때 우리 가운데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선명하게 이해되고 깨달아집니다.

하나님의 부흥이 임하기 전에 예외 없이 중추적인 진리들이 재발견된 이후에 하나님의 부흥이 왔다. 다시 말하면 오직 십자가의 공로만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진리가 재발견된 이후에 부흥이 왔다. 그러면서 마틴 루터나 요한 웨슬리나, 그 외에 많은 사람들의 예를 쭉 듭니다. 그럼 믿음으로 의롭게 됨이 재발견된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어떤 사람이 생각할 때 자기는 신앙생활 잘하고 있고, 자기는 별 문제가 없고, 자기는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한다고 생각했다가 하나님의 거룩하신 임재의 관점으로 자신이 비춰지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겁니다. 처지를 인식하는 겁니다. 특별히 부흥 책에 보면 부흥의 특징 중에 하나를 이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이시는 거다.” 그럼 하나님의 선하심을 계시하는 것이 뭐냐? 거룩하신 성품을 우리에게 계시하시고 그분의 공의를 드러내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어느 날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그분의 거룩하신 성품 앞에 서게 될 때,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가를 깨닫게 되고, 그리고 죄인 된 우리가 그분의 그 공의의 속성,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될 때, 정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우리가 얼마나 형편없는 존재인가를 인식하게 되면서 어떻게 하면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고민하고 탄식하면서 심지어 믿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까지도 교회로 몰려온다고 합니다. 바로 그때 십자가의 진리들을 사람들이 더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이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셔야만 했구나. 이렇게 형편없는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보혈이 우리에게 능력이구나 하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르는 대부분의 보혈찬양은 부흥 때에 나왔습니다. 하나님이 영광으로 임재하실 때, 우리가 얼마나 죄인이며, 얼마나 연약하며 형편없는 자인가를 성령의 비추심 가운데 깨닫게 되고,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자리에 선다는 겁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됨이 재발견된다는 말이 뭡니까? 바로 그런 의미에서 어느 날 문득 자신을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자기의 처지를 인식하는 겁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내가 얼마나 선함이 없는 가를 보는 겁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오랜 시간동안 고민을 통해서 발견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마틴 루터나 요한 웨슬리 같은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에 엄청 많이 고민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꼬, 그러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서지 못하는 자신과 씨름한 경험들이 있습니다.

요한 웨슬리 같은 경우에는 미국에 인디언 선교사로 갔다가 철저하게 실패하고 돌아와서 일기에다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구원받지 못했다” 그때 그는 목사이며 선교사였습니다.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에서 성경학교 교사였습니다. 그는 선교에는 완전히 실패했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한 가지를 분명히 깨닫게 하셨는데, 그것은 내가 구원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 할까봐 유감스럽지만 지금 나는 제정신이다. 이렇게 그의 일기에 썼습니다. 후에 모라비아교도인 벨러라고 하는 친구하고 대화하는 가운데 믿음으로 의롭게 됨에 대해서 나눕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성령님이 그의 마음에 깨닫게 하셔서 하나님의 관점에서 자신을 보게 된 것입니다. 마틴 루터도 똑같습니다. 처지를 인식하는 것이 우리 삶의 능력입니다. 왜 능력이냐? 주님의 처방을 우리가 온전히 의지하는 자리로 서게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자리에 우리가 서게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전존재로 신뢰하는 자리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한계, 자기의 자원과 자기의 능력으로 해보려고 하다가 하지 못했던 일들, 안되는 것들을 가지고 씨름하던 사람이 어느 날 자신의 처지를 인식하고, 내 힘으로 할 수 없음을 절박하게 인식했을 때, 그 너머의 세계, 예수님이 아니면 내게 소망이 없었구나. 이걸 발견하면서 아! 그래서 예수님이 오셨구나. 내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내 자원이나 내 능력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구나. 이걸 깨달으며 하나님을 의존하게 될 때,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자원을 의존하지 않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리에 서게 된다는 겁니다. 사실 자기의 처지를 인식하는 것을 성경은 능력이라고 표현합니다. 사사기 6장 11-12절을 보겠습니다.
“11 여호와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상수리나무 아래 앉으니라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 12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사사기의 패턴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떠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징계하셔서 적국에게 어려움을 당하게 하십니다. 그러면 그들이 다시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고, 그러면 하나님께서 다시 사사를 세우셔서 저들을 적국으로부터 구원하십니다. 그리고 사사가 사는 날 동안은 그들이 평화를 누리다가, 사사가 죽은 후에는 또다시 슬그머니 하나님을 떠납니다. 그러면 다시 하나님께서 징계하셔서 보호막을 거두면 적국이 또 쳐들어와서 어려움을 당하는 이런 패턴의 연속입니다. 그런데 이때 또 미디안이 쳐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합니다. 특히 추수 때 쳐들어와서 곡식들을 다 빼앗아 갑니다. 여기 기드온도 곡식을 미디안 족속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포도즙을 짜는 틀 속에 몰래 숨어가지고 밀을 타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갑자기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뭐라고 그러냐면, “큰 용사여” 그럽니다. 얼마나 웃기는 일입니까. 아니 큰 용사가 틀 속에 숨어서 밀을 타작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도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시도다.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반복적으로 그럽니다. 그랬더니 13절입니다.
“13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미쳤나이까 또 우리 열조가 일찍 우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한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이제 여호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이런 꼴입니다. 여호와께서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는 증거가 어디 있습니까? 이렇게 반문합니다. 그랬더니 14절을 보세요.
“14 여호와께서 그를 돌아보아 가라사대 너는 이 네 힘을 의지하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힘, 기드온의 힘, 누구의 힘을 의지하고 가라고 합니까? 본문을 자세히 보시면 하나님 힘이 아니고 기드온의 힘입니다. ‘너는 이 네 힘을 의지하고 가서’ 그랬습니다. 아니 기드온이 무슨 힘이 있다고요. 그럼 여기서 말하는 네 힘은 뭘 얘기하는 걸까요? 여기서 말하는 “네 힘”은 문맥상으로 볼 때, 13절을 의미합니다. 기드온은 처지를 알았습니다. 여호와가 함께 하시지 않으면 우리 삶은 꽝이라는 것을, 그 대신 여호와가 함께 하시면 우리 삶에 놀라운 능력이 있음을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것을 지금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13절입니다.
“13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미쳤나이까”

기드온이 볼 때, 지금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면 우리가 지금 이런 상태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기드온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열조 가운데 행하신 놀라운 일들(애굽에 행하신 일과 홍해를 가르신 일)이 지금 우리 삶에 어디 있습니까? 지금 아무 것도 없다는 겁니다. 우리는 보통 하나님이 함께 하신 일을 축복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까? 그러면 -아멘- 합니다. 우리는 그냥 대충 넘어갑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명확한 인식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안하시니까 우리가 이렇다는 겁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그걸 너의 힘이라고 말씀합니다. ‘네 힘을 의지하고 가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내가 너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랬더니 기드온이 줄기차게 뭐합니까? 나에게 말씀하신 분이 하나님이신지, 과연 하나님이 나를 보내시는지, 시험하되 여러 번 시험합니다. 기드온이 하나님의 능력을 시험한 게 아니고, 하나님이 과연 자기와 함께 해주시는지, 말씀하시는 분이 진짜 하나님이신지를 시험합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신실하게 응답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 결과 그는 300백 명의 용사로 수많은 적군을 대적하는 자리로 나갑니다. 어떻게 보면 그야말로 미친 짓이지요. 그런데 그는 알았습니다. 자기 능력의 한계와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놀라운 능력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처지를 올바로 인식하는 것, 이건 굉장한 능력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처지를 인식하는 것, 우리의 상태를 인식하는 것, 지금 우리에게 하나님이 함께 안하신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이 상실되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가? 개인적으로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온전치 못한 자인가? 내 삶에 하나님의 임재가 걷혀있는 것을 우리가 진짜 인식한다면, 우리는 하나님 임재를 당연히 구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 하지 않으면 우리 삶에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당연히 배고픔과 갈망이 있게 됩니다. 이처럼 처지를 인식하는 것이 놀라운 능력입니다. 오늘날 우리 삶에 그런 일들이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이것이 중보기도로 가는 부흥을 위한 첫 번째 단계라는 것입니다.

2] 하나님 앞에서 자신과 교회와 나라의 죄를 회개하게 됩니다.
중보기도로 가는 두 번째 단계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과 교회와 나라의 죄를 회개하게 됩니다. 이사야 64장 5-7절을 보겠습니다.
“5 주께서 기쁘게 의를 행하는 자와 주의 길에서 주를 기억하는 자를 선대하시거늘 우리가 범죄하므로 주께서 진노하셨사오며 이 현상이 이미 오랬사오니 우리가 어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6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7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을 인하여 우리로 소멸되게 하셨음이니라”

우리가 범죄 했다는 겁니다. 사실 회개의 시작은 자복하는 겁니다. 역대하 7장 14절에 나오는 것처럼, 지금 이사야 선지자는 스스로 겸비하여 하나님 앞에 우리가 범죄 하였다고 엎드립니다.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 앞에 범죄 했고, 우리가 당한 결과는 우리의 범죄의 결과라고 그는 고백합니다. 다니엘서 9장 4-7, 10-11, 20절을 봅니다.
“4 내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며 자복하여 이르기를 크시고 두려워할 주 하나님,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위하여 언약을 지키시고 그에게 인자를 베푸시는 자시여 5 우리는 이미 범죄하여 패역하며 행악하며 반역하여 주의 법도와 규례를 떠났사오며 6 우리가 또 주의 종 선지자들이 주의 이름으로 우리의 열왕과 우리의 방백과 열조와 온 국민에게 말씀한 것을 듣지 아니하였나이다 7 주여 공의는 주께로 돌아가고 수욕은 우리 얼굴로 돌아옴이 오늘날과 같아서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거민들과 이스라엘이 가까운 데 있는 자나 먼 데 있는 자가 다 주께서 쫓아 보내신 각국에서 수욕을 입었사오니 이는 그들이 주께 죄를 범하였음이니이다”
“10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며 여호와께서 그 종 선지자들에게 부탁하여 우리 앞에 세우신 율법을 행치 아니하였음이니이다 11 온 이스라엘이 주의 율법을 범하고 치우쳐 가서 주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으므로 이 저주가 우리에게 내렸으되 곧 하나님의 종 모세의 율법 가운데 기록된 맹세대로 되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음이니이다”
“20 내가 이같이 말하여 기도하며 내 죄와 및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자복하고 내 하나님의 거룩한 산을 위하여 내 하나님 여호와 앞에 간구할 때”

여러분 느헤미야나 다니엘이나 이사야는 사실 자신들이 그렇게 죄를 지었다고 고백할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느헤미야의 기도도 보겠습니다. 1장 6-7절입니다.
“6 이제 종이 주의 종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이스라엘 자손의 주 앞에 범죄함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나의 아비 집이 범죄하여 7 주를 향하여 심히 악을 행하여 주의 종 모세에게 주께서 명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이렇게 처지를 인식한 이들의 특징은 자기들이 범죄했음을 하나님 앞에 고백합니다. 회개합니다. 그러면서 뭐하느냐? 동일시 회개를 하고 있습니다. 동일시 회개는 민족의 죄를 자신의 죄로 여기고, 자기 가족의 죄를 자신의 죄로 여기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 앞에 절박하게 회개합니다. 오늘 날 우리가 일본 식민지 시대에 신사참배한 것에 대해서 우리가 그것을 우리의 죄로 여기고 회개하는 것처럼, 민족의 죄를 자신의 죄로 회개합니다. 느헤미야나 다니엘이나 이사야나 그렇게 회개할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들의 개인적인 삶을 보면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입니다. 특별히 다니엘의 삶을 보세요? 느헤미야는 그 전의 삶이 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그도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면 그전에 삶이 어떠했는지를 우리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은 얼마나 철저히 하나님을 경외했던 사람입니까? 그런데 그는 민족의 죄를 자신의 죄로 여기고, 사람들의 죄를 자신의 죄로 여기고 애통하며 회개합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가? 이건 사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성에서 나온 일입니다. 우선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향한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뜨거웠는가? 그런데 범죄하여 하나님을 떠나므로 말미암아 얼마나 하나님을 마음 아프게 했는가? 이걸 이해함으로 말미암아 그 하나님 앞에 민족의 죄를 자신의 죄로 여기고 엎드려 기도하는 겁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모세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의중과 의도를 알았기에 그는 이스라엘 민족이 범죄 할 때마다 하나님 앞에 죄를 고백하고, 고백할 때마다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대로 응답해 주십니다. 사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개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중보기도가 되어지는 게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의중과 의도를 가지고 엎드려 구하고 찾을 때, 하나님께서 놀라운 역사로 인도해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때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해야 될 아주 중요한 게 있는데, 회개와 후회는 다르다는 겁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자기가 한 일에 심각성을 깨닫는 것에서부터 회개는 시작되는데, 이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제일 중요한 것을 깨닫는 일로부터 시작된다.”이렇게 표현합니다. 회개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하는 겁니다. 인격체 되신 하나님을 인식하고 그분 앞에서 내 삶을 전환하는 게 회개입니다. 그래서 회개와 관련되서 선포된 모든 메시지를 보면 궁극적으로 여호와께 돌아가자는 선포입니다. 핸리 불랙가비 목사님이 쓴 “하나님과의 신선한 만남” 책에 보면, 구약시대에 하나님께 돌아가자는 말은 의식으로 돌아가자는 말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그 말은 인격체 되신 하나님께로 돌아가자는 말이었다.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의 죄를 깨달을 때, 우리의 처지를 인식할 때, 우리가 해야 될 일은 바로 그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관계성으로 돌아가는 일이 필수입니다. 그리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우리의 삶을 조정하는 자리로 서게 될 때, 그것이 근본적으로 회개로 이르게 됩니다. 참된 회개는 행동을 유발하고, 입술로만 말하는 자리에 머무르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 다니엘이나 느헤미야 같은 경우는 사실 성공한 사람입니다. 느헤미야 같은 경우는 포로로 잡혀가서 왕의 술 맡은 관원장까지 오른 정말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직위나 직책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기꺼이 그 자리에서 내려서서 하나님 앞에 애통하며 수일 동안 금식하고 기도했더니 그의 얼굴이 수척했습니다. 그는 왕의 술 맡은 관원장으로써 연회장에 나갈 때는 화사하고 밝은 얼굴로 나가야 되는데 그는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들어갑니다. 그는 자기의 직위에 연연하지 않고 근본적으로 하나님 앞에 돌이킴을 사모하고 열망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회개는 입술의 고백만이 아니고 행동을 우리에게 가져옵니다. 여러분 구약에 나오는 불성실한 회개를 우리가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뭘 원하시고, 어떻게 회개해야 되고, 그 회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보여주는 아주 좋은 한 예가 있습니다. 호세아서 5장 13-14절입니다.
“13 에브라임이 자기의 병을 깨달으며 유다가 자기의 상처를 깨달았고 에브라임은 앗수르로 가서 야렙 왕에게 사람을 보내었으나 저가 능히 너희를 고치지 못하겠고 너희 상처를 낫게 하지 못하리라 14 내가 에브라임에게는 사자 같고 유다 족속에게는 젊은 사자 같으니 나 곧 내가 움켜갈지라 내가 탈취하여 갈지라도 건져낼 자가 없으리라”

하나님께서 에브라임을 징계하실 때, 그들이 자기의 상처를 깨달았다.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앗수르 야렙 왕에게 도움을 청하러 갑니다. 이사야 30장에도 보면 유다 민족은 북쪽에 앗수르가 강대해지니까 도움을 구하러 남쪽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둘 다 똑같습니다. 그리고 이사야시대나 호세아시대는 동시대입니다. 그 동일한 시대에 남과 북이 하나님을 떠난 모습도 똑같습니다. 그래서 앗수르로 저들이 사람을 보냈지만 그들이 결국 치유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인본주의적인 방법으로 해결이 안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14절에서 “내가 에브라임에게는 사자 같고 유다 족속에게는 젊은 사자 같으니 나 곧 내가 움켜갈지라 내가 탈취하여 갈지라도 건져낼 자가 없으리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면서 15절에 보세요.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서 저희가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기다리리라 저희가 고난을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여 이르기를” 궁극적으로 회개는 뭐냐?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리로 가는 것, 하나님 그분에게로 돌아가는 겁니다. 하나님 그분을 찾는 겁니다. 그 하나님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기준 가운데 서는 것이 근본적인 회개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뒤를 보면, “저희가 고난을 받을 때, 나를 간절히 구하여 이르기를” 하나님께서 독백하시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한다는 겁니다. 호세아 6장 1-3절까지 봅니다.
“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여기 호세아 6장 1-3절을 우리가 참 많이 인용합니다. 이 구절은 너무너무 성경적이고, 참 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개가 근본적인 회개가 아니라 불성실한 회개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4절 이하를 보면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간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놀라운 은혜를 부으실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서 하나님께 돌아가자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회개는 불성실한 회개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해만 뜨면 없어지는 아침 이슬과 안개로 비유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그래서 5절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그들을 치고 내 입의 말로 그들을 죽였노니 내 심판은 발하는 빛과 같으니라”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알기를 구하여, 하나님을 열망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자 라고 말했지만 하나님 보실 때, 그것은 표면적인 회개에 불과했다는 겁니다. 근본적인 회개가 아닌 불성실한 회개였습니다.

여러분 저는 이걸 보면서 개인적으로 참 많이 도전을 받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를 깨달았을 때, 근본적으로 돌이키는가? 근본적으로 전환하는가? 저는 참 많이 봤습니다. 어떤 때는 자신의 모습이 선명히 비춰지면 회개하고 울고 그럽니다. 그리고 끝나면 나가서 눈물 싹싹 닦고 밥 먹으면서 이런저런 얘기하다가 다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그 다음 시간되면 비슷해집니다. 어떤 때는 막 충격을 받았다고 얘기하면서 한 일주일 한 달 지나면 다시는 안보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운데 회복하고 돌이키도록 초청하시는데, 많은 사람이 그 자리에 서지 않습니다. 회개한다고 말하지만 표면적인 회개에 불과합니다. 입술로는 너무너무 중요한 의미를 얘기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선명하게 처지가 인식이 안된 게 원인이고, 그리고 근본적으로 중심에서 돌이키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외에는 대안이 없는,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아가지 않으면 아무런 소망이 없음을 심각하게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표면적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을 봅니다. 수련회에 가서 보면 그렇더라고요. 오전에 집회하면 눈물 콧물 흘리고 회개하다가 오후에 물놀이 하고 저녁에 오면 다 원위치 되어있습니다. “내가 선지자들의 말로 저희를 치고 저희를 죽였다.” 그러니까 선지자들의 말의 강도가 더 높아졌다는 겁니다. 작은 망치, 더 큰 망치, 자꾸 더 큰 망치로 치는, 사실 근본적인 전환이 되지 않는, 입술로만 하는 회개, 제가 볼 때, 이게 우리의 심각함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번 집회를 통해 여러분에게 어쩌면 돌아오도록 초청하고 계신지도 모릅니다. 비추신다면 근본적으로 돌이킬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제가 압니다.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유혹이 있습니까? 교회성장이라는 유혹, 그래서 금방 현실로 눈이 돌아가서, 이렇게 해가지고는 교회성장 안되겠다. 거기다가 조급한 마음인 빨리빨리, 이런 마음이 들면 그 다음 순간 우리는 그냥 옛날로 돌아가 버립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리에 서야 되겠습니다.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금송아지 사건 이후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9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 10 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그랬더니 모세가 기도합니다.
“11 모세가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12 어찌하여 애굽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가 자기의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는 악한 의도로 인도해 내었다고 말하게 하시려 하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심지어 모세는 자기 목숨을 내놓고 중보합니다.
“32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그 말을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용서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33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 내가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어 가나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고 3 너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길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 이 말씀을 듣고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은, “4 백성이 이 준엄한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한 사람도 자기의 몸을 단장하지 아니하니”
그리고 15절에 보면 모세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15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 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그 풍요의 땅보다 이 광야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우리가 더 원하는 바입니다. 이게 근본적인 회개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내 삶에 소망이 없는, 이게 바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 내가 서기로 결단하는, 내가 기꺼이 하나님과 동행하기 원하는, 임재 가운데 있기를 원하는, 우리가 그런 자리에 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3] 인식이 전적인 헌신을 가능케 합니다.
전적인 헌신으로 인식이 우리를 이끕니다. 이사야 62장 1절입니다.
“1 나는 시온의 의가 빛 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 같이 나타나도록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인즉”

이사야 선지자는 잠잠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처지를 인식하고 이제 그곳을 향해 잠잠하지 않겠다. 라고 말합니다. 여기 잠잠하지 않겠다는 말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고 봅니다. 하나는 부지런히 외치겠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중보기도 하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6-7절입니다.
“6 예루살렘이여 내가 너의 성벽 위에 파수꾼을 세우고 그들로 하여금 주야로 계속 잠잠하지 않게 하였느니라 너희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아 너희는 쉬지 말며 7 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우리의 처지를 하나님께 알리겠다는 거고, 또 하나는 엎드려 하나님 앞에 중보하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돌아보아 달라고 기도하겠다는 겁니다. 이렇게 처지를 인식하고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얼마나 멀어져 있는가를 인식할 때, 그리고 오늘날 우리의 처지가 얼마나 심각한가를 인식하고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인가를 인식할 때, 우리는 그 일에 자신의 삶을 드려 헌신하는 자리로 갑니다.
출애굽기 33장 7-8절을 봅니다. 4-5절을 보면 그들이 단장품을 제하고 회개합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모세가 어떻게 하느냐?
“7 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 8 모세가 회막으로 나아갈 때에는 백성이 다 일어나 자기 장막 문에 서서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기까지 바라보며”

모세는 진밖에 진을 쳤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회막이라는 말은 meeting으로 만나는 장소입니다. 성막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만나는 장소입니다. 당연히 하나님과 만나는 장소는 진안에 있어야 되는데, 왜 진을 떠났는가? 그것은 진이 오염되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임재가 떠난 곳에 머물러 있기 보다는 그곳을 떠나 구별되는 자리에 있을 필요를 느끼고, 진밖에 진을 치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부흥의 때도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상태를 보면서 깨닫게 될 때 진밖에 진을 치는 일들을 보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모세는 그리로 사람들을 몽땅 끌고 가지 않고, 자기가 제일 먼저 갔다는 겁니다. 그랬더니 여호와를 경외하는 무리들이 함께 진밖에 따라 나갔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진이 오염되었기 때문에, 진안에서 하나님의 부흥이 일어날 수 없기에, 하나님의 임재가 떠나있기에, 그는 진밖에 진을 쳐 구별됨으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삶을 드려 하나님을 찾는 시간을 갖는 자리로 나아가게 되었다는 겁니다. 사실 이 떨어짐의 요소, 구별됨의 요소에 대해서 ‘부흥’ 책에 보면 그 부분을 많이 말하고 있습니다. 읽어보겠습니다. ‘모세는 전에 진영 가운데 있던 장막을 옮겨 진밖에 쳤습니다. 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말입니다. 여기에 주목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부흥의 역사 속에서 필연적으로 발견하게 되는 여러 요점들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 요점도 오해될 수 있습니다. 거의 모든 진리가 오해될 수 있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어떤 어리석은 사람들이 그것을 오해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든지 강조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여기서 모세는 기도와 중보의 처소를 세우는 행동을 취합니다. 그는 백성들이 회개하는 것을 보고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사라졌습니다. 구름기둥이 없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앞으로 그들과 함께 가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는바와 같이 회개만으로는 만족해서 안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임재를 다시 되찾기를 갈망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도처소를 세운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행해졌는지 주목합시다. 그것은 섬세하고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어떤 전술도 하지 않았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백성들에게 연설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다만 무거운 짐을 느끼며 전과 같이 진영 가운데서는 중보기도를 할 수 없음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진 밖으로 옮겼고, 역시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는 사람은 그곳에 나아갈 수 있도록 했습니다.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밖 회막으로 나가며,’ 이것은 분명히 겸손한 행동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방식이 모든 부흥의 역사 속에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제임스 멕켈퀴는 다른 두 사람에게 말했고, 그들은 전체적인 상황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세 사람만이 작은 학교 교실의 좁은 통로에서 함께 모였습니다. 제가 북 아일랜드에 갔을 때, 그곳을 방문할 특권을 얻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와 같은 것을 보고 싶어 본래의 여행목적에서 벗어나 그곳을 방문한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코너마을이나 켈스마을에서 모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마을 밖에 있는 이 조용하고 작은 교실로 왔습니다. 그곳은 평화롭고 고요한 곳으로써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 마을에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충분히 기도할 수 있는 장소였습니다. 또한 그 주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기도하라는 부르심을 느꼈던 것입니다. 저는 이 시점에서 이 표현을 좋아합니다.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들은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가며, 그들 모두가 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혼자 기도하기 위해서 그리로 가고 있다. 자 우리도 함께 가자. 우리도 모세와 합세 합시다. 이렇게 그들은 하나씩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하나씩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그러한 일들을 통해서 놀라운 일을 이루셨다는 겁니다. 처지를 인식하고 나서 구별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을 발견하고, 그리고 구별됨의 요소로 많은 사람들이 회개는 했지만 하나님만이 유일한 대안인 자리에 머물러 있는 상황에 있지 않은 것을 보면서 그는 구별되게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구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섰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진정한 소망도 생명도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만이 유일한 소망인줄 알고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자리에 섰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회개를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어떤 부분 죄를 지적하고 회개하면 십자가 복음 안에서 자유케되면 되지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은 훨씬 더 민감합니다. 어떤 부분에서 다른 사람들은 별것이 아닌 것으로 여기는 문제를 죄의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합니다. 이것이 바로 헌신이라는 겁니다. 좀 더 읽어보겠습니다. ‘제가 강조하는 또 다른 요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진밖에 회막을 세우는데 있어서 모세가 또 다른 동기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바로 헌신의 전체적인 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이러한 일이 진중에서 일어날 수 없음을 느꼈습니다. 진은 부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일부러 장막을 거둬 진에서 떨어진 곳에 세웠던 것입니다. 이것은 의도적인 행동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방식으로 일을 해야 한다. 부정에서 벗어나야 하고, 이 죄악 된 분위기에서 떠나야 한다. 우리는 대신 여기에 함께 모여야 한다. 이것이 헌신입니다. 이것이 바로 거룩으로의 부르심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주장합니다. 모든 부흥의 역사를 살펴보면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바로 이 요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일단의 무리들이 구별됨이 필요했던 것을 알고 떨어져서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계속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사람들에게 일어난 일은 무엇입니까? 그들 중 어떤 사람을 보더라도 첫 번째 관심사는 교회의 상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영혼의 상태였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거룩이었습니다.’ 교회의 상태 이전에 이런 자리에 서는 일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거룩하심 앞에 자기의 상태를 보며, 처지를 인식하고 이 일이 시작되게 되었다는 겁니다. 개인적인 삶에서, 그래서 구별되게, 누구 때문이 아니라, 우선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 구별되게 서야 되겠구나. 우리 교회가 이렇게 하면 뭔가 잘되겠지 이런 차원 이전에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 내가 하나님을 마음 아프게 했고, 내가 하나님을 근심케 했고, 교회가 떠나 있다면 그 이전에 내가 떠나 있는 것을 인식하고 개인적으로 그 자리에 서서 구별되게 하나님 앞에 서고, 하나님 그분을 찾고, 구별된 자리에 서게 되는, 이게 바로 헌신이라는 겁니다. 이건 개인의 삶에서 정확하게 일어납니다.

이사야 6장 1-8절입니다. 하나님을 근심케 한 그러한 부담감으로부터 그가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자리로 가게 되는, 그런데 개인의 삶도 정확히 같이 갑니다.
“1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2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4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6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7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우선 이사야 선지자는 성전에서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는 경험을 합니다. 웃시아 왕이 하나님의 징계 가운데 문둥병으로 죽은 것을 그가 어쩌면 착잡하게 생각하고 있었을 시점에, 그가 성전에 들어갑니다. 그때 어떤 일이 벌어지냐면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합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이러면서 천사들이 찬양하는 장면을 목도합니다. 하나님의 거룩성을 하나님이 스스로 계시하십니다. 그러자 두 번째 무슨 일이 벌어집니까? 이사야는 자신의 죄를 심각하게 인식합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으로서 영광의 주를 뵈었음이여” 처지를 인식한 자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회개합니다. 나는 부정한 자라고 스스로 고백합니다. 사실 이건 부흥의 때에 나타나는 공통적인 고백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그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의 죄과를 제거해주시고 그를 깨끗하게 만드십니다. 거기서 우리가 어떤 일을 경험합니까? 사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로 의롭게 됨이 무엇인지를 재발견되는 놀라운 역사를 발견하게 됩니다. 부흥의 때마다 그런 역사가 나타납니다.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를 높이 올리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자리에 서는 자리로 가게 된다는 겁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당신의 의중을 보이십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이사야가 그 일에 자신의 삶을 드립니다. 하나님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의중과 의도를 알게 될 때, 그리고 자신이 먼저 하나님 앞에 어떤 자인가를 깨달고 그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난 것을 인식하면서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말할 때, 그때 하나님은 그를 보내면서 그들에게 전할 사명을 맡기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가 잠잠치 않겠다고 말합니다. 처지를 인식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의 의중을 알기에 근본적으로 그 부담감을 가지고 구별된 자리로 나아가 거기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께 믿음으로 반응합니다. 그런데 누구로부터 시작하느냐면 개인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겁니다. 사실 많은 사람이 중보기도하면서 자기는 다른 사람 위해서 기도하니까 자기는 안 그런척하면서 나갑니다. 그런데 동일시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자신의 처지가 인식되어져야 우리가 근본적으로 그 자리로 갈 수 있습니다.

이게 부흥을 위한 중보기도의 세 가지 단계입니다. 부흥이 올 때마다 하나님은 헌신된 자들을 통해 일하시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에 우리가 우리의 모습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선명하게 깨달을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그런 자리에 서기 위해서는 저는 두 가지로 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어느 날 하나님의 거룩함을 확 비춰주셔서 우리가 한순간에 뒤집어지는 경우입니다. 또 하나는 우리가 인격체 되신 주님을 사랑하고, 신앙의 본질에서 하나님을 알기를 구하고 그분을 찾고 열망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관점에서 우리를 비추시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원하는 열망이 그때 부어지고 하나님 뜻대로 살기 원하는데 그렇게 살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이 보여 집니다. 그럼 보일 때, 어떻게 합니까? 우리는 많은 경우에 우리의 자원으로 도전합니다. 그런데 안됩니다. 한 번해봐 두 번해봐, 하면 할수록 안됩니다. 어떤 때는 좀 되는 것 같다가 그 다음에 또 안됩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비추실 때, 우리의 초점이 자기에게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에게 머무는 한 우리는 자꾸 실망하고 낙심하고 죄책감에 빠지고 실패감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다가 많은 사람들이 타협합니다. 말씀대로 살 수 있나 뭐, 최선을 다하면 되지, 그러면서 적당히 삽니다. 강단에서 말씀을 선포하지만 그대로 살 것을 별로 기대하지 못하고, 그냥 괜찮아 주님은 우리 육신이 약한 걸 다 아셔, 이러면서 서로 위로하고 그러면서 그냥 넘어갑니다. 그런데 또 한쪽은 비춰지면, 거기서 정직하게 대면하고 씨름하는 가운데 자신의 처지를 인식합니다. 내 속에 선함이 없음을, 내 자원으로 할 수 없음을 발견합니다. 로마서 7장에서 사도바울이 경험했던 것 같은, 자기 속에 선함이 없음을 발견합니다. 사도 바울은 내 마음에 두 법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 속에서 그는 자기 속에 선함이 없음을 알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는 24절에 보면 그는 절망합니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처지를 인식한 사람은 그럽니다. 그리고 씨름하는 가운데 그가 뭘 발견하느냐면, 아- 그래서 예수님이 내게 필요했구나. 그래서 십자가가 내게 필요했구나. 이걸 체험적으로 경험하면서 로마서 8장에서는 이제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구나. 이제 내가 율법에 속한 자가 아니구나. 율법에 대해 내가 이미 죽어있는 자구나. 죄와 사망의 법과는 관계없는 자구나. 나는 이제 생명의 성령의 법아래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도 바울도 처음에는 자기의 자원과 자기의 열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했지만 할 수 없음을 발견하고, 자기의 처지를 인식한 다음에, 그리스도가 우리 가운데 오지 않으면 안됐구나. 그래서 내게 예수가 필요했구나. 그걸 발견합니다. 그러고 나서 그의 다음 고백을 보면, 8장 3절입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전에는 자기가 하려고 했지만, 그 다음에 그의 초점이 이렇게 바뀝니다. “하나님은 하시나니”, 그는 더 이상 자기가 하려고 하기 보다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에 의한 자리로 서게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믿음으로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구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리로 나갑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사랑이 얼마나 큰지 깨닫고, 그분의 의중과 의도가 이루어지기를 열망하고 찾고 구하는 자리에 서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인식한 자들은 하나님의 부흥을 위해 중보기도하게 됩니다.

2. 부흥을 위한 중보기도의 요소

1]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의지하여 나아갑니다.
중보기도의 요소 중에 하나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의지합니다. 느헤미야 1장 5절입니다.
“5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느헤미야는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 앞에 하나님 긍휼을 의지하여 간구하고 나아갑니다. 다니엘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니엘서 9장입니다.
“9 주 우리 하나님께는 긍휼과 용서하심이 있사오니 이는 우리가 주께 패역하였음이오며” “18 나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눈을 떠서 우리의 황폐한 상황과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옵소서 우리가 주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공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니이다 19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지체하지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의지하여 믿음의 사람들은 기도했습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뭘 의지하여 나갈 수 있습니까? 우리의 자원, 우리의 의, 아무런 공로도 없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가 나옵니다. 그날 의롭다고 한 바리새인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들으시지 않으셨습니다. 반면에 죄인을 상징하는 세리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들으셨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세리는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긍휼을 의지하여 나갈 때, 하나님께서 그 긍휼하심에 기초하여 세리를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때, 우리의 의나 우리의 자원이나 우리의 열심이나 우리의 열정가지고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감동시키고 바꿀 그런 아무런 능력이나 힘이 우리 가운데 없습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그분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고, 우리를 먼저 택하시고, 우리를 항상 풍요케 하시고,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손을 내미신 주님의 사랑에 기초하여 우리는 그분 앞에 나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새물결선교회 중고등부 수련회 2차 때인 것 같습니다. 대전 삼천리 수양관에서 할 때인데, 경배찬양 드리는데, 하나님께서 물으시는 겁니다. 너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 용서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느냐? 그래서 제가 7×70=490번이죠. 이렇게 대답하려고 그러는데, 대답하기도 전에 묻자마자 즉각적으로, ‘그게 바로 내 십자가다.’ 말씀하시는 거였습니다. 제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답변입니다. ‘그게 바로 내 십자가다.’ 주님이 우리를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 용서한다는 말은 우리를 용서하기로 작정하셨고, 그것이 긍휼하심이며, 그래서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내어놓으심으로 우리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시며,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우리에게 은혜를 부으셔서 다시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중보기도 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가 뭡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근거가 뭡니까?  바로 그분의 긍휼하심입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예레미야애가 3장에 보면 예레미야 선지자가 그걸 깨닫습니다. 그가 쑥과 담즙을 먹는 것처럼 매우 낙심된 상황이었습니다.
“19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20 내 심령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이 되오나 21 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 22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23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저와 여러분을 반드시 회복시키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니엘도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호소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다니엘서 9장입니다.
“19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들으시고 행하소서 지체치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깨닫지 못할 때, 교만해집니다. 이사야 64장 6절입니다.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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