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를 통해 죄에 대하여 죽음
“이와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롬 6 : 11)
본문의 문맥을 알면 그 의미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앞 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이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그는 여기서 죄라는 것을 하나의 지배하는 원리(the principle of reigning) 혹은 군주(monarch)로 묘사하고 있고, 은혜도 역시 지배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다음에 6장에서 계속해서 말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이와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여러분은 여기서 인간, 그 옛 죄인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덕적 능력에 의해 그와같이 죽었기 때문에 한때 죄인이었던 그가 결코 더 이상 죄를 섬기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히고 장사되었다고 그가 말할 때, 복음이 영혼을 죄로부터 구한다는 위대한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 그가 비유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우리가 이해하는 것은당연한 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죄를 위해 죽으신 것 같이, 우리도, 비유적으로 말해서, 죄에 대해 죽습니다. 한편, 그가 새롭고 한없이 영광스러운 새 생명으로 부활하신 것같이, 그처럼 회심한 자들도 순결하고 거룩한 복된 새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특별히 우리 본문으로 돌아가서 우리 번역에 사용된 말은, 죄에 대한 우리의 죽음이 죄를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과 정확히 일치되는 것처럼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 봅시다.
그러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죄에 대해 죽었다는 것은, 죄가 전에는 우리를 지배해 왔었는데 이제는 더 이상 우리의 지배자가 되지 못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나 죄는 한번도 예수 그리스도를 지배했던 적이 없었고 그의 지배자였던 적도 없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지배하는 죄의 권능을 철폐하기 위해 죽으신 것이지, 자기 자신 위에 있는 어떤 죄의 권능을 분쇄하기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는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아무 권능도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죄와 관련한 그리스도의 죽음과 우리의 죽음 사이의 유사성은 이 정도에 국한된 것이지, 그 이상은 아닌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대속하시고 모든 사람들의 심령 속에 있는 죄에 대한 사랑을 죽이는데 효과가 있는 도덕적 능력을 창조하시기 위해 죽으셨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이 죄에 대해 죽었다는 것은 죄를 동조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이탈해서 죄의 통제에서 해방되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본문 자체를 살펴 보면서, 아래의 질문을 제기하고자 합니다.
Ⅰ. 본문에서 의미하는 바, 죄에 대해 죽었다는 것은 무엇인가?
Ⅱ. 하나님을 향해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Ⅲ. 우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로 말미암아 하나님에 대해 산 자로 여긴다는 것은 무엇인가?
Ⅳ.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대해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Ⅴ. 이 본문 속에 내포된 권면은 무엇인가?
Ⅰ. 죄에 대해 죽는다는 것은 죄 가운데서 죽는 것의 반대임이 명백합니다.
후자는 부인할 수 없이 완전한 죄성의 상태입니다. 죄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영혼이 모든 선에 대해 죽은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과 정반대되는 것으로서 죄에 대해 죽는 것은 죄의 영향권 밖으로 벗어나서 죄의 모든 매력에 대해 무관심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마치 죽은 자가 세상에 있는 감각의 대상으로부터 옮기워진 것같이, 죄의 영향력에서 옮기워진 것을 말합니다. 자연적 의미에서 죽은 자는 더 이상 지상의 사물들과 아무 관계가 없는 것처럼 죄에 대해 죽은 자도 죄의 매력이나 죄짓는 것 그 자체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Ⅱ. 하나님을 대하여 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를 위한 생명으로 가득한 것입니다. 깨어서 그의 뜻을 행하는데 열심인 상태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을 그에게 바치는 영원한 제물로 만드는 것이며, 우리 자신을 계속적으로 그에게 바쳐서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며 그의 관심사를 수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Ⅲ. 우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 여긴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긴다(reckon)고 번역된 단어는 가끔 간주한다(account)로도 번역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그에게 의로 간주되었습니다. 그처럼 이 본문에서도 ‘여긴다’는 것은 당신 자신을 정말 죄에 대해 죽은 것으로 믿고, 그렇게 여기라는(esteem) 것입니다. 이것이 그러한 경우라고 간주하십시오. 이것이 실로 죄에 대한 당신의 관계인 것으로 생각하십시오. 즉 당신은 죄에 대해 완전히 죽었다는 것; 죄가 더 이상 당신을 지배하지 못하리라는 것 말입니다.
이 원어가 사용된 본문을 면밀하게 검토해 보면 이것이 그 낱말의 본래의 통상적 의미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복음 신앙의 진정한 의미 -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개인적으로 붙잡는 것 -를 보여 줍니다.
Ⅳ.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로 말미암아 당신 자신을 정말 하나님을 대해 산 자로 여긴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분명히 이러한 뜻입니다. 즉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받을 것을 소망해야 하며, 이 구원을 당신 자신의 것으로 기대해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이 죄에 대하여 완전히 죽었고 결국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있을 생명과 평화로 옮기워진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Ⅴ. 우리 본문의 권면에 포함된 내용은 무엇입니까?
이러한 기대, 즉 이러한 축복들을 현실화 시키기 위한 적절한 준비가 갖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현실화시킬 아무 근거가 없다면 그러한 명령은 아주 터무니 없는 명령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것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면 - 만일 한편으로는 죄에 대해 이런 관계로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저런 관계로 우리가 들어갈 수 있게 하는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면 - 우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을 향해 산 자로 여기라는 명령들은 완전히 무의미한 소리가 되어 버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축복들이 합리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더러 그것을 기대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전적으로 불합리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요청되는 그 상태를 위해 토대가 마련돼 있고 충분한 채비가 갖춰져 있다는 것을 명령 그 자체가 함축하고 있다는 것을 누가 의심하겠습니까?
이 명령을 준행하는데 내포된 사실은 무엇입니까?
1. 그러한 일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죄를 피할 수 있고 죄짓는 것을 떠날 수 있으며 죄를 완전히 포기 하고 영원히 버릴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의 실천 가능성에 대한 이러한 믿음이 없다면 이 명령을 지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될 것입니다. 적합한 은혜에 의해서 실제로 실천 가능하게 된 상태가 이 명령의 전제가 되는 것입니다.
2. 우리 자신의 독립적이고 독자적 노력에 의해 이러한 상태를 획득할 수 있다는 모든 기대를 버리는 것입니다. 본성적 행위에 의해 그것을 얻을 수 있다는 모든 기대를 버리기까지는, 은혜에 의해 그것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충만해지기 시작하는 것은 오직 우리 자신을 비울 때인 것입니다.
3. 지금 당장 죄로부터 구원받고 싶다는 용의입니다. 우리는 그와 같이 실제로 모든 죄를 버려야 합니다. 그것이 죄이기 때문에 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세를 마음이 견지해야 합니다. 즉 나는 범죄와는 더 이상 아무런 관계를 가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죄를 미워하시고 나는 이제부터 영원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그를 영화롭게 해 드리기 위해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 영혼은 이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그의 뜻을 행하는 일에 온전히 바쳐졌습니다.
4. 현재뿐 아니라 장래에도 죄로부터 구원받기 위해 당신의 전부를 예수 그리스도께 온전히 의탁하는 것을 함축합니다. 이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입니다. 그것은 항상 죄로부터 구원받는 위대한 사역에 있어 결정적인 단계, 주요한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5. 그것은 또 유혹에 대해 마음의 문을 닫는 것을 포함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마음으로 정말 순수하게 하나님께 헌신된 삶을 살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실한 결혼 서약을 할 때와 같은 그러한 종류의 것입니다. 성경은 어디서나 이 점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신부로 묘사됩니다. 그들의 그리스도에 대한 관계는 신부의 신랑에 대한 관계와 비슷합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마음을 온전히 그분께 드리고 애정을 바치며 모든 좋은 것을 얻기 위해 그분을 신뢰할 때, 그들의 마음은 유혹에 대해 굳게 닫혀지는 것입니다.
여기 관련된 원리들은 단순히 인간 관계 속에서도 발견됩니다. 두 사람이 엄숙한 결혼 서약을 하게 되는 이제 더 이상 한눈을 판다든가 흥미와 사랑의 다른 신선한 대상을 찾아 방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 마음이 정해진 것입니다. 자발적으로 신실하게 서약함으로써 확정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사실 때문에 거의 전적으로 유혹의 힘을 물리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배신의 유혹에서 마음을 지키는 것이 비교적 쉬운 일이 되는 것입니다. 신성한 서약을 행하기 전에는 각자 주위를 둘러 본다든가 사람을 찾아본다든가 혹은 누구에게 알아본다든가 하는 것이 허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엄숙한 서약을 하고 난 뒤에는 절대 안됩니다.
결혼 서약에 의해 둘이 하나가 된 이후에는 더 나은 사람이 있지 않을까 하는 따위의 생각은 더 이상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관계를 바꾼다거나 한번 준 마음을 철회한다거나 하는 일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 어떤 방황도 허락되지 않습니다. 영원한 충성과 맹세를 행했고 영 단번에 확정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자신의 예증입니다. 어떤 비유도 이보다 더 적절하거나 더 강력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죄를 어떻게 보아야 하며 죄에 대한 유혹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이지를 가르쳐 줍니다. 그는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죄야, 내 마음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려라. 나는 그 유혹에 굴복하는 것을 상상도 할 수 없어. 나는 잠시라도 그러한 생각을 즐길 수 없어. 나는 죄짓는 일과는 어떤 관계도 가질 수 없어. 내 마음은 정해졌어. 그 문제는 영원히 결정되었어. 나는 큰 죄에 대해서 뿐 아니라 작은 죄에 대해서도 유혹을 받아들일 수 없어. 내가 세상의 우상들에게 마음을 줄 수 없는 것은 살인을 범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야. 한 남자나 여자가 시험삼아 결혼을 해 볼 수 없는 것과 같이 나도 그게 어떤 것인지 한 번 알아 보려고 시험삼아 신앙 생활을 시작하지는 않았어. 마치 가장 신실한 남자와 여자가 죽을 때까지 자신의 서약을 충성스럽게 지키려고 생각하는 것같이 내 마음은 온전히 그리스도께 바쳐진 것이야.”
이러한 마음 상태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큰 죄를 짓지 않으려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작은 죄도 지으려 하지 않습니다. 죄를 그 차체로서 그리고 그것이 그리스도께 가증한 것이기 때문에 미워하므로 아무리 작은 죄일지라도 그들에게는 살인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고로 만일 그 후에 마음이 유혹을 받아 시험에 들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전혀 그들의 의도와는 반대되는 일인 것입니다. 그것은 본래 계획에는 전혀 없던 일이었고 꿈도 꾸지 않았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옛 습관이나 옛 친구들의 예상외의 공격을 받은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마음 상태에 있는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위대한 힘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그는 그것이 금식이나 구제나 기도나 공적 사적 의무를 행하는 것이나 심지어 결심이나 어떤 자기 노력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영접한 그리스도에게만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가 그리스도와 분리된 자기 자신의 영적 생활을 기대하지 않는 것은, 제 정신이 있는 사람이 팔을 허공에 휘저음으로써 날기를 기대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의 영혼 깊은 곳에는 그의 모든 힘이 그리스도에게만 있다는 확신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 사실을 참으로 이해할 정도의 빛을 받은 때에도 온전한 구원을 위해 온 영혼을 그 분께 의탁한 결과로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그 이하의 것을 기대한다는 것은, 사실상 계시된 구주로서의 그를 거절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그것은 그분에게 합당한 영광을 돌리지 않는 행위입니다.
그것은 말씀에 제시된대로 그분을 영접함으로써 그의 말씀 안에서 그가 친히 계시하신 사실들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행위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구원의 첫 번째 요소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지옥으로부터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죄로부터 구원받는 것입니다. 처벌로부터의 구원은 어떤 의미로든지 이차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죄에서 구원받은 결과일 뿐이지 복음의 구원에 있어 첫 번째 요소는 아닌 것입니다. 왜 아기 메시아가 예수라고 불리겠습니까? 그것은 그가 자기 백성을 죄로부터 구원해야만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성경 어디에 이것과 다른 견해를 가르치는 부분이 있습니까?
결 론
1. 오늘의 본문,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는 넘치는 은혜로 말미암아 죄없이 사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 정당함을 보여 줍니다. 만일 이 사실을 보여 주는 본문이 이것뿐이고 다른 데에는 전혀 없다 하더라도 이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에게라면 그리스도 안에서 그러한 소망을 가질 이유로 이것만을 제시하더라도 필요한 만큼의 충분한 이유가 주어진 셈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를 정당화하는 다른 많은 구절들이 있습니다.
2. 그러한 기대를 하는 것은 위험천만의 오류라고 가르치는 것은 불신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만일 바울 사도가 우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기라고 요청하는 이 명령에 다음의 말을 덧붙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나 경고컨대 이 세상에서는 아무도 죄에서 자유케 되리라는 소망을 가질 수 없다. 하나님께서 본문에 나타내신 그러한 기대를 즐기는 것은 아주 위험한 실수라는 것을 여러분은 기억해야만 한다.” 이러한 말이 롬6:11절에 부가된다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이 본문이 성화를 다루고 있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한 마디로 문제는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구속주 안에서 사죄 받고 영접된 뒤에 계속 죄 가운데 거할 것인가?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죄를 위해 죽으신 것처럼 그들도 죄에 대해서 죽어야 하며 또한 죽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더 높고 영화로운 삶을 사시는 것같이 그들도(그의 은혜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새롭고 영적인 삶을 살 수가 있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애쓰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귀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이 하자.”(고후 6:14-18, 7:1)
이것은 아주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는 귀절입니다. 명령과 약속이 어떻게 섞여 있으며 어떻게 가장 영광스러운 약속 위에 성결을 온전히 이루라는 명령이 주어져 있는지 주목해 보십시오.
만일 바울이 그리고 바울을 통해 말씀하신 성령께서 그 말씀 뒤에 즉시 다음과 같은 말을 첨가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너희는 이 말 때문에 너희가 거룩함을 온전히 이룰 수 있다거나 이 세상에서 영이나 육의 모든 죄에서 너희 자신을 깨끗케 할 수 있다는 위험하고도 그릇된 기대를 하지 않도록 조심해라.”
이것은 모든 시대를 통해 그 분의 말씀을 읽는 모든 독자들의 이성과 양심에 갈등을 일으켜 오지 않았겠습니까? 우리는 그것이 실질적으로 신성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간주하지 않겠습니까?
성경은 결코 자신의 말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일 부인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만일 성경이 다음과 같이 엄숙히 주장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떤 사람도, 스스로든지 혹은 받은 은혜에 의해서든지 하나님의 계명을 온전히 지킨 적이 없으며 혹은 앞으로도 지킬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그것을 날마다 깨뜨릴 것이다.‘
그러한 기대를 하는 것이 위험하다고 가르치는 것은 아예 아무런 가르침을 주지 않는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합니다. 차라리 사람들이 혼자서 성경을 읽고 판단하도록 버려 두는 편이 훨씬 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할 때 혹시 성경을 오해하는 일이 있을지 모른다 하더라도 그처럼 비참하게 오도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로부터의 구원을 기대하는 것이 위험하다구요? 위험하다구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모든 죄에 대한 승리를 기대하는 것이 위험하다니, 만일 그렇다면 복음이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좋은 소식이라고 할 만한 무슨 복음을 우리가 가지고 있단 말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정반대의 기대를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사도가 그들에게 기대하라고 인정하는 어떤 것을 기대하기는 커녕 그들은 전혀 그런 것에 대해 꿈도 꾸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보다 더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항상 죄 속에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들은 평생동안 죄에 대해 정말 죽은 것이 아니라 약간은 살아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대해서도 약간 살아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완전한 승리 같은 것을 기대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자연히 그것을 위한 적절한 수단을 사용하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믿음이야말로 그 수단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이란, 적어도 그것이 가능한 것이라는 확신을 포함합니다.
이 장과 다음 장(6장과 7장)에는 복음의 좋은 소식의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죄 - 그의 도덕적 자아 속으로 깊숙히 파고드는 그 쓰라린 칼날 - 에 의해 상처입고 고통을 당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것의 고통을 알고 그의 영혼으로 침투하는 그 독을 느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죄로부터 구출된다는 사상 속에 있는 영광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구원이야말로 그의 영혼이 가장 크게 필요로 하는 것이며, 죄와 사망의 몸으로부터 피하는 것과 견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그는 확실히 알게 될 것입니다.
로마서 7장을 보십시오. 거기에는 죄에 대한 깨달음을 가진 정도가 아니라 죄에 대해 참으로 깊은 확신을 가진 사람이 나타나 있습니다.
죄를 깨닫는 것(to be convinced)보다 훨씬 심도가 깊은 것이 죄에 대한 깊은 확신을 갖는 것(to be convicted)인 것입니다. 후자는 다른 편의 사역까지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법정에 나온 범인은 눈 앞에 보이는 광경 때문에 자기 죄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를 깊이 확신케 되기까지는 아직 멀었는데, 그것은 증인과 배심원이 그의 죄를 깊이 확신케 해 줄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어떤 분들은 자신을 죄인으로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안다고 해서 어떤 아픔이나 쑤시는 듯한 아픔을 꼭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영혼 깊은 곳을 칼로 찔러 도려내는 것같은 아픔을 주지는 않는 것입니다. 한편 또 여러분 중의 어떤 분들은 죄가 마치 무장한 군인같이 단검으로 당신을 깊이깊이 찔러 들어오는 것 같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당신은 이와같이 부르짖게 되는 것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 마치 영혼이 독약으로 가득한 것같이 스며드는 고통을 당신은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어둡고 사무친 원한과 함께 바로 그 지옥의 고뇌가 당신의 영혼 깊숙히 확산되는 느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에 대한 깊은 확신을 가진다(being convicted)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죄를 깨닫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죄의 살과 찌름이 마치 화살이 꿰뚫는 것같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마치 전능자에게서 날아온 화살이 당신의 영혼을 삼켜 버린 것 같습니다. 당신이 이러한 체험을 할 때, 그 때 당신은 복음의 좋은 소식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심한 고통을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의심할 나위 없는 복음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이 구원한다는 것을 아는 지식은 정말 죽어 가는 영혼에 생명수와 같이 느껴질 것입니다.
만일, 살을 꿰뚫어 저미는듯한, 이 죄에 대한 확신을 가진 사람에게 그 구제책이 없다고 말해 준다면, 그는 절망의 나락 속으로 빠져들어 갈 것입니다. 그의 죄많은 영혼을 위한 어떤 구제책도 없으며 영원히 절망 속에 울고 있어야 한다고 말해 준다면, 세상에 그것보다 더 끔찍한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수 년전 펜실바니아주 리딩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마음이 강퍅하고 체격이 건장하며 무뚝뚝한 한 남자가 거기 살고 있었는데 그는 부흥을 반대하는 일에 아주 적극적이고 담대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기도하는 아내와 기도하는 여동생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마음을 모아 간절히 그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능자의 화살이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명중된 것이 명백해 보였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고뇌에 빠졌습니다. 어둡고 지독히도 추운 어느 밤이었습니다. 그가 더 이상 도무지 살 수 없는 것 같았습니다. 가족들이 사람을 보내서 나더러 와서 그를 좀 봐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갔습니다.
아직도 300m 가량이 남은 지점까지 갔을 때 벌써 그의 비명소리와 고뇌의 울부짖음이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그 소리는 마치 지옥 구덩이에서 새어 나오는 메아리와 같이 나를 섬�하고 무섭게 만들었습니다. 도착해 보니 그는 고뇌 속에서 마루 위에 누워 뒹굴고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는 듣기 어려운 그러한 울부짖음이었습니다.
날씨가 차가운데도 그는 땀을 비오듯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온 몸을 사시나무 떨 듯 떨고 있었습니다. 오, 그 신음소리! 그는 고통으로 자기 혀를 질근질근 씹고 있었습니다. 그 광경을 볼 때 저주받은 자의 운명이 어떠한 것인가가 깨달아졌습니다. “오, 죄를 깊이 확신하는 것만 해도 이러한데 지옥은 어떠하겠는가?”
그는 죄에 대하여 듣는 일을 참을 수 없어 했습니다. 그의 양심은 이미 죄의식으로 가득차 있었고 그의 양심은 하나님의 율법의 두려운 면모를 분명히 드러내었습니다. 나는 단지 그리스도를 그에게 제시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오직 그리스도만을 보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곧 쉼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만일 내가 그 때 이런 말밖에 할 수 없었다면 어떠했겠습니까? “B씨, 당신의 경우에는 도울 길이 없습니다. 당신이 아무리 슬피 울부짖어도 이 우주에 당신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에게 지옥에는 불이 없다고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는 이미 불타는 영혼 속에 충분한 불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지옥에 있는 어떤 불도 이보다 더 나쁘지는 않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죄로부터의 구출을 기대한다는 사상을 반대하면서 그들의 땅위에서의 남은 나날들을 죄 속에서 살아갈 것이라고 조용히 말하는 것이 얼마나 끔찍하고 무서운 일입니까?
내가 아는 장로 한 사람이 집회에서 일어서서 주님께 기도하기를, 자기는 여태껏 죄 중에서 살아왔으며 앞으로도 사는 날 동안 계속 죄지을 것을 예상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도 범죄했으며 의심할 바 없이 내일도 범죄할 것입니다.” 게다가 그 말을 아주 차분하게, 마치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일은 바보스러운 짓이라는 것처럼, 또 좀더 나은 삶을 살려고 하는 시도는 불가능한 일인 것처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모든 말을 차분하게 내뱉다니! 생각해 보십시오. 남은 여생을 죄 중에서 보내겠다는 말을 하면서 그토록 차분하다니!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아내가 남편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상상해 봅시다.
“저는 당신을 좀 사랑헤요. 하지만 당신은 제가 많은 다른 남자들도 사랑하는 줄 아시죠. 그리고 저는 그들과 노는 것이 즐거워요. 당신이 아셔야 되는 것은 여자란 모두 연약한 존재이며 계속해서 유혹에 넘어가기 쉬운 존재라는 사실이예요. 그리고 저도 살아 있는 한 가끔 넘어질 수 있다는 것을 예상하고 있어요. 그러니 당신은 나에게서 때묻지 않은 정숙함 따위의 실천불가능하고 환상적인 것은 기대하지 말았으면 해요! 당신도 아시다시피 현세에서 완전해질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요? 우리는 그런 따위는 믿지 않죠.”
이 여자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 당신은 경악하지 않고 이 여자의 말을 들을 수 있습니까? 이 여자가 아내라고요?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서 결혼의 순결에 대해 논하다니!
그러나 그것도 다음과 같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살아있는 동안은 매일 범죄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그것도 아주 태연히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의 생애를 통해 매일 예수를 배신하겠다는 말입니다. 날마다 새로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겠다는 것이며, 날마다 그를 공개적으로 모욕하겠다는 것이며, 날마다 그의 이름을 불명예스럽게 만들겠다는 것이며, 그의 마음을 슬프게 해 드리겠다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슬픔과 수치를 가져다 주겠다는 태도인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은혜로 말미암는 소망을 가지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다니!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은 이같이 말합니다. “만일 내가 죄없이 살 수 없다면 차라리 죽게 해 주시오.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분께 날마다 범죄하는 것을 어떻게 견딜 수 있단 말입니까?”
이러한 생각에 정말 반대하는 사람들은 복음이 무엇인지를 모르거나, 회개하지 않은 자들이어서 죄로부터 구출된다는 것에 관심이 없거나 혹은 기껏해야 커다란 불신의 죄를 범하고 있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 중 어디에 속하는 지는 자기 자신의 양심과 하나님 사이에서 자신이 판단해야 할 문제일 것입니다.
신앙인이라 자처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두 개의 분명한 구원관이 있습니다. 따라서 종종 한 교회 안에 두 종류의 신앙고백자들이 있습니다.
(1) 한편은 복음을 죄로부터의 구원이라고 간주합니다. 그들은 천국의 소망이나 이 땅의 소망보다 이것을 더 크게 생각하고 더 높게 칩니다. 그들에게 있어 최대의 사실은 죄로부터 구원받는다는 사상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매력이요 영광인 것입니다. 그들은 이것을 지옥에서 구원받는 것보다 더 귀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죄 자체에서 구원받는 것을 죄의 형벌에서 구원받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후자에 대해서는 오히려 별로 많이 생각하지 않고 기도도 많이 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죄악의 속박으로부터 건지시고 그들을 비참한 상태에서 들어 올려 사랑의 자유를 주시기 위해 보냄받았다는 것이야말로 그들의 영광이요 기쁨인 것입니다. 그들은 이것을 깨닫기 위해 애쓰고 있으며 이것이야말로 복음 구원의 좋은 소식인 것입니다.
(2) 다른 한 편의 사람들은 지옥에서 구원받는 것에 주로 관심이 있습니다. 죄에 대한 형벌이야말로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사실상 두려움이 그들의 모든 종교적 노력의 원천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죄로부터의 구원의 수단으로 생각되지 않고 하나의 거대한 면죄부의 체계 - 그들을 죄 가운데 살게 내버려 두면서도 두려움과 위험을 제거해 주는 거대한 장치 - 로 생각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복음 신앙에 대한 자신들의 체계를 면죄부 제도라고 부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부르면 틀림없이 화를 낼 것입니다. 그들은 이 점을 분명히 생각하지 않았는지 모르지만, 사실상 그것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저주의 공포를 없애 주고 그러면서도 그들을 죄 가운데서 자신들을 위해 살도록 내버려두고 그들이 평생을 죄 가운데서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 마침내 그들을 천국으로 데려갈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의 거대한 면죄부제도 임이 분명한 것입니다. 정말이지 그것은 아주 거대한 규모의 타협입니다. 그로 인해서 온 교회가 평생동안 죄 중에 뒹굴더라도 후에는 천국에 갈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견해는 아주 널리 퍼져 있고 흔해빠진 것이기 때문에 어는 교회에 가든지 발견됩니다. 여러분들은 교회 안에서도 세상적이고 이기적인 사람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에 동화되어서 여러 가지 의무를 소홀히 하며 평생동안 다소간 죄에 빠질 것을 예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들에게 “당신은 그것이 옳다고 생각합니까?” 하고 물으면, 그들은 “아뇨, 옳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고 대답합니다. “그렇다면 왜 그런 식으로 삽니까?” “오,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인간이잖아요. 그러니 육체를 가지고 사는 현세에서는 불완전 이상의 것을 기대할 수 없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결국 구원을 받으며 죄 용서를 받으리라고 기대합니다. 어떻게? 그들의 모든 죄에서 진실로 돌아선다는 조건 위에서가 아니라, 복음이 하나의 거대한 면죄부체계, 교황 레오10세가 발행해서 그 시대의 범죄하는 신앙고백자들을 위로하는데 사용했던 것 보다 더 거대한 면죄부체계라는 가정 위에서 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기는 그때와 같이 이따금씩 죄짓는 사람들만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죄 안에 살고 있으며 또 자기들이 그러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사는 날 동안 죄 중에 살 것을 기대하면서 드디어는 구원받을 것을 바라고 있는 사람들까지 포함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실한 신앙고백자들은 스스로 순결한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초월해서 사는 경우 외에는 구원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죄 중에 사는 것에 관해 말해 보십시오. 그들은 그 생각 자체를 미워하고 두려워 합니다. 그들에게는 독사의 독이 그 생각 안에 있는 것입니다. 죄는 그들의 영혼에 쓰리게 느껴집니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듯 죄를 두려워합니다.
어느 교회에 가더라도 방금 내가 묘사한 바와 같이 두 종류의 복음에 대한 이해를 가진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편은 자신이 단지 미끄러진다는 것만 알아도 고뇌 속에 잠깁니다. 특별히 그들은 자신을 유혹에 노출시키지 않으려고 조심합니다.
다른 한 편은 그렇지 않습니다. 두 목사가 함께 있었습니다. 한 목사는 다른 목사에게 어떤 일을 하자고 자꾸 졸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절했습니다. “왜 안 갈려고 그러지?” 첫 번째 목사가 물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내 자신을 그러한 유혹에 노출시키는 것이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그런 이유 때문에 안 가겠다니, 우리는 조금씩 범죄할 수 있는 인간이잖아. 우리가 할 일은 나중에 회개하는 것 뿐이잖아.”
놀란 첫째 목사는, “나는 그것과는 전혀 다른 복음을 믿고 있어.”라고만 말할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어떤 아내가 남편에게 “저는 꼭 극장에 가야겠어요”라고 말했다 합시다. 남편이 말하기를, “오 여보, 거기는 나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잖아. 당신은 유혹을 받을지도 몰라.”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신경쓰지 마세요. 범죄하면, 나중에 회개하면 될테니까요.”하고 대답했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죄에 가까이 간다는 생각만 해도 고뇌 속에 빠진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단 한 순간이라도 죄 속에서 산다는 생각을 참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 있는 청년들 중 참된 그리스도인인 학생들은 오는 방학에 대해 조심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경계해야 하는 이유는 죄에 빠질까봐 두렵기 때문입니다. 내 말은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곳에 가는 것을 두려워하라는 것이 아니고 죄에 넘어지는 것이 끔찍한 일이라는 것이며 여러분도 그렇게 느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영혼에 죄의 화살에 의한 상처를 입는 것이 무엇인지를 안다면 여러분은 분명한 위험이 있는 곳에 갈 때 조심스럽게 걸을 것이며 많이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틀림없이 경계를 단단히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아, 죄지으면 회개하면 되잖아요?”라고 한다면 나는 여러분에 대해 뭐라고 말해야 되겠습니까? 회개하겠다구요? 그게 그렇게 쉽게 될 것 같습니까?
가령 여러분이 방학을 맞아 바깥으로 나가서 몇번 술에 취하고 한 두 번 사람을 죽일 것을 미리 예상할 수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오 그리도 나는 좋은 그리스도인일 수 있어요. 일이 다 끝난 뒤에 회개를 꼭 하면 되잖아요.”라고 말하겠습니까? 무서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자신을 좋은 그리스도인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까?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죄를 회개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이것을 죄로써 회개합니다. 그는 작은 은밀한 죄니 큰 죄- 예를 들면, 살인 -니 하는 구별을 짓지 않습니다. 어떤 죄는 적당히 지어도 되고 어떤 죄는 피해야 한다는 식의 구별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을 슬프시게 만드는 것은 무엇이든지 끔찍한 일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로 하여금 이렇게 외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고 계신다.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릴 것이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느끼시겠는가 하는 이것이야말로 그에게는 세상 천지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유죄로 보인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이러한 상태에서 구원받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라면, 그리스도인이 유혹의 상황에서 어떻게 느껴야만 하는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범죄할 위험이 있는곳에서 그의 머리털은 끝까지 곤두서게 됩니다!
하나님게 대항해서 범죄하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그리하여 그를 위험으로 이끌어 갈 우려가 있는 것은 어떤 것이든지 그의 영혼을 경계 태세로 돌입시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부터 받을 수 있는 것에 관한 교회의 불신은 그들로 하여금 구원을 경험하지 못하게 하는 커다란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신앙고백자들에게만 커다란 저주가 될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또한 커다란 슬픔이요 쓰라린 시험인 것입니다.
죄로부터 구출된다는 기대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마음을 강팍케한 것 같습니다. 그들은 그 교리가 설교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누군가가 죄로부터의 이러한 구원의 상태에 있다는 고백을 하는 것을 들었고 그러한 사람들 중 어떤이가 다시 타락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그들은 고의적으로 그 교리 전부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복음을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일치가 됩니까? 그리스도는 신자에게 무엇입니까? 세상에 대한 대한 그의 사명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무엇을 하고 있으며 무엇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까?
그는 마음에 있는 죄의 권능을 부수기 위해서 그리고 신자의 생명이 되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것은 신자 안에 죄로부터의 영원한 구원을 이룸으로써, 오직 그렇게 함으로써 결국에는 그를 천국으로 인도할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당신 자신을 그리스도께 드려서 그가 당신을 위해 당신 안에서 이 일을 이루실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려 하신다는 이것 외에 당신은 그리스도에 대해 무엇을 믿으려 하십니까? 다른 어떤 것을 말할 수 있습니까? 성경이 다른 어떤 것이나 이보다 못한 어떤 것을 기대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이 사실이 제대로 이해되지 않은 것이야말로 교회의 최대의 걸림돌이 되어 온 것입니다.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의 보편적인 경험이 진리를 잘못 전달하고 오해하게 했던 것입니다. 성경으로부터라기보다 이러한 경험으로부터 자신들의 견해를 형성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 혹은 기껏해야 그러한 경험을 성경 해석에 적용하고 있는 사람들은 복음의 본질과 계획에 대한 극히 결함이 있는 (거짓되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견해를 채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바울이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하면서, 만일 그들이 은혜 아래 있다면 죄가 그들을 지배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시켜 준 것을 완전히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로부터 이러한 축복을 기대하지 않을 때 그들은 그것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이 그처럼 적은 것을 기대하니 그처럼 적게 받는 것도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그들은 믿는 이상의 것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성화는 종종 이론으로만 주장되고 마음으로는 사랑 안에서 그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일이 많습니다. 그것은 이론적으로만 자신이 새로운 마음을 가져야겠다고 주장하면서 회개는 하지 않는 죄인들의 경우와 비슷합니다. 그들은 그것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정말 그것을 이해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이 그들의 마음에 계시되어서 그들이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게된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들은 새로운 사실을 보게 되지 않겠습니까? 자신들이 회개하지 않고 있는 동안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것과는 얼마나 먼 거리에 있으며, 자기들이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얼마나 많이 변화되어야 하겠는가 하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겠습니까?
성화에 대해서도 그러합니다. 비록 이런 사람들이 이론적으로는 그것을 믿는다고 하지만 그것을 묘사하고 있는 성경 귀절은 그들의 경험과 일치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진리의 전모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진리의 전모를 이해하고서도 그것을 거절한다면 (내가 믿기로는) 그것을 용서할 수 없는 죄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들에게 복음의 진정한 의미를 밝혀 줄 때, 그들이 그것을 고의로 거부한다면 그 죄가 어찌 성경에서 용서할 수 없는 죄라고 말하는 죄보다 작겠습니까? 한번 비췸을 받고 구원에 이르는 진리의 지식을 받은 후에 돌아서 버린다면 어찌 다시 새롭게 회개할 수 있겠습니까?
최소한 한 가지 사실은 지적되어야 합니다. 우리 시대의 많은 신앙고백자들이 깨닫지 못하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들은 현재의 성화를 위해 복음이 준비한 것들에 대해 너무 많은 빛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만일 그들이 이 빛을 실제로 거부하고 마치 복음이 그리스도인들을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아무런 준비도 해 놓지 않은 것처럼 여전히 죄 가운데 살아간다면, 그들은 커다란 위험 속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맹목적으로 이 끔찍한 위험 속으로 달려가서 파멸을 초래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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