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기둥 십자가의 복음
하나님의 교회는 그리스도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자기의 사명은 교회의 터를 닦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닦아놓은 터 외에는 어떠한 터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 터는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전3:10-11]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1:23-24]
오늘날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문제는 십자가에 대한 편협한 이해와 실천입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과 목회자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우리들이 처음으로 구원 받을 때 의지하는 그 무엇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들이 구원 받을 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날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들이 승리의 삶을 사는 비결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사도가 되어 하나님의 놀라운 사역을 담당하고 있는 시점에도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자신의 유일한 목표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전2:2].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우리들이 날마다 순간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하여 설 때, 주님 안에 거하는 삶을 살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요6:57]
그런데 우리들이 날마다 십자가에 의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신앙과 삶에서 몇 가지가 반드시 다루어져야 합니다. 즉, 율법주의 신앙이 철저하게 이해되고 깨어져야 합니다. 세상 사랑하는 것이 철저하게 다루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믿음에 의한 삶인 것이 분명하게 이해되어야 합니다. 올바른 신앙의 각도(방향) 위에서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져야 합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날마다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하여 서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십자가의 승리를 우리의 삶 속에서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예, 우리들이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을 부분적으로라도 깨닫고, 우리의 죄 용서와 구원을 위해 예수님을 의지하고, 그분을 우리의 구주와 주로 영접할 때,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나 위의 요소들이 다루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절대로 십자가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날마다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하여 서고, 그 능력을 경험하며, 그 능력으로 세상과 죄와 자신을 이기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율법주의 신앙, 세상 사랑하는 것, 하나님의 손만을(도움) 구하는 잘못된 신앙의 각도(방향) 등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그저 십자가에 관한 몇가지 사실들을 이론적으로 배우면 다 되는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관한 사실들을 이론적으로는 잘 알지 모르지만, 그들의 삶에서 사도 바울이 경험했던 것과 같은 십자가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음의 두 구절만 보아도 사도 바울이 날마다 그의 삶에서 어떠한 십자가의 능력과 십자가로 인한 승리를 경험했는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2:20]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6:14]
오늘날 많은 성도들은 이 두 구절을 매우 잘 압니다. 그들은 이 구절들을 암송하기까지 합니다. 이 구절들을 매우 좋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구절들이 말하는 삶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위에서 열거한 요소들이 그들의 삶에서 전혀 다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우리들이 십자가의 삶을 살기 위해 반드시 다루어져야 할 요소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십니다.
율법주의 신앙이 깨어져야 합니다.
십자가의 능력과 승리를 경험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율법주의 신앙이 우리에게서 철저하게 깨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개인의 삶이건 교회의 삶이건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주의 신앙은 영적으로 십자가의 복음을 대적하기 때문에 율법주의 신앙을 가지고는 절대로 십자가의 승리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많이 기도해도 안됩니다. 아무리 많이 헌신과 봉사해도 안됩니다. 갈라디아서에 보면 매우 잘 나와 있습니다만, 개인이 혹은 교회가 율법주의 신앙에 빠지게 되면, 그 개인과 교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상관이 없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지게 되고, 참다운 성령의 역사와는 상관이 없게 되고, 믿음에 의한 삶은 불가능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의 의(self-righteousness)만 남게 되고, 오직 인간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야 하는 의무만 남게 됩니다. 이 얼마나 심각한 결과입니까?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뿐입니다. 우리의 인간적인 헌신과 노력으로는 절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아무리 온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준다 할지라도 안됩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행하고 이룰 수 있는 것은 오직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또 우리들이 주와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오직 성령님의 도움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심각한 결과입니까?
물론 율법주의 신앙 가운데서도 부분적인 성령의 은사와 능력들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는 사모하는 자에게 주어지기 때문에, 율법주의 신앙 가운데 있으면서도 간절히 사모할 때, 성령의 은사들이 나타납니다. 또한 성령의 은사는 돌이킴이 없기 때문에, 성령의 은사를 가지고 잘못 사용해도 계속해서 은사들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주의 신앙 가운데서는 절대로 성령님과의 교제가 있을 수 없습니다.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순종하는 삶도 불가능합니다. 성령님의 조명과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가 없습니다. 따라서 성도들의 삶 속에 어떠한 진정한 변화도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열매도 없습니다.
사실, 율법주의 신앙의 배후에는 사탄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주의 신앙의 대표적인 인물들인 바리세인들에게 그들의 아비가 사탄이라고 하셨고, 갈라디아서와 고린도후서도 이점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이 율법주의 신앙은 그 영향력이 막강해서 쉽게 많은 사람들을 오염시킴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에게까지 이 율법주의 신앙을 의미하는 바리세인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수 차례에 걸쳐 경고하셨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그 위대한 선생님으로부터 배우고, 또 그 놀라운 역사들을 직접 경험했던 그 당시 제자들에게 이 율법주의 신앙을 그토록 강하게 경고하셨다면, 다른 사람들은 어떠하겠습니까? 실제로, 사도 바울이 쓴 서신서들의 거의 대부분이 이 율법주의 신앙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것만 보아도, 그 당시 거의 모든 교회들이, 최소한 일시적으로라도, 이 율법주의 신앙의 영향을 받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교회 가운데 이 율법주의 신앙이 가득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성도들과 교회들이 처해있는 상황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는 걷혀 있고, 세상의 죄 중에 교회 안에 없는 죄가 없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의 삶 속에 종교적인 언어들은 가득하나, 그 실재는 경험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무엇보다 우리 가운데 팽배한 율법주의 신앙의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의 삶과 교회에서 십자가의 승리를 날마다 경험하고, 참다운 성령의 인도와 역사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율법주의 신앙이 철저하게 분별되고 깨어져야 합니다.
세상 사랑하는 것이 철저하게 다루어져야 합니다.
성경에 의하면, 세상 사랑하는 것이 영적 간음이요,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입니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약4:4). 그러므로 우리들이 세상 사랑하는 것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절대로 십자가에 의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사실, 율법주의 신앙의 배후에는 세상 사랑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마치 양파 껍질을 벗기듯이, 율법주의 신앙의 껍데기를 하나한 벗겨가면, 그 가장 중심에 남는 것은 바로 세상 사랑 탐심입니다. 우리는 예레미야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이러한 삶을 매우 잘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남하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렘6:13-14).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근본적으로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참된 선지자들의 메시지를 싫어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탐심을 버리기 원치 않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소위 평화의 메시지를 듣기 원했습니다. 반면에 그 당시 많은(거짓) 선지자들은 평화의 메시지를 외쳐댔습니다. 그래야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인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마치 암에 걸린 것처럼 온갖 죄와 세상과 원수의 억압 가운데 있는 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마치 상처에 진통제를 놓아주고 그 위에 반창고를 붙이는 것과 같이 그저 일시적인 위로만을 주기에 급급했습니다.
세상 사랑하는 것을 가지고 십자가에 의한 삶을 살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세상 사랑하는 것이 우리의 눈을 어둡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순간순간 십자가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성령의 조명이 필수적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순간순간 의지하는 것은 십자가의 이론을 아는 것으로 되지 않습니다. 성령님의 조명으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선명하게 인식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그분을 의지함으로 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눈을 어둡게 하기 때문에, 세상 사랑하는 것을 가지고는 성령에 의한 삶도, 십자가에 의한 삶도, 믿음에 의한 삶도 절대로 살 수 없습니다.
우리 신앙은 믿음에 의한 삶인 것이 분명하게 이해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마르틴 루터가 외쳤듯이,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믿음에 의한 삶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7). 그래서 구원도, 성화도,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영화롭게 되는 것도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뿐 만 아니라, 하나님의 치유를 경험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것도, 하나님의 능력을 받는 것도, 하나님의 지혜를 받는 것도, 때를 따라 돕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도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성도들은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인 줄을 알지만, 그 다음에는 모두 행위로 얻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끊어지는 행위입니다.
얼마 전에 다른 교회에 다니는 한 분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분은 사업을 하는 성도인데, I.M.F를 당해서 극심한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아내와 함께 100일 작정 새벽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200일을 해야되나 싶어 100일을 추가했습니다. 그런데도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신앙생활을 포기하려고 까지 했습니다. 그 때 저에게 찾아 왔습니다. 그분은 오자마자 하나님은 너무한 분이라고 말했습니다. 99를 채워도 소용이 없고, 100을 채우지 않으면 응답해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200일 가운데 한 두 번은 빠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바로 한두 번 빠졌다고 해서 응답해 주지 않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의 삶이 아닙니다. 이것은 율법주의 신앙이며, 종으로의 삶입니다. 자기의 노력이나 헌신으로 자기가 원하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내려는 잘못된 자세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이 새벽기도를 한 두 번 빠졌다고 해서 응답하지 않는 분이 아닙니다. 설령 그분이 200일을 꼬박 채웠다고 해도 절대로 그것이 하나님의 기도 응답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모든 면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믿음뿐입니다.
(우리가 금식 기도원에 가면 그곳에서 금식하는 사람들의 대화 내용을 옆에서 많이 듣게 되는데, 그들은 대부분의 참된 금식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금식하면 자신이 죽어야 되는데 오히려 더 혈기가 살아나는 것을 볼 수 있고, 더 깊은 시험에 빠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많은 금식기도를 했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기도 응답의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은 이사야 58장 말씀을 믿음으로 순종하는 삶이 되어야 소위 그들이 외치는 기도 응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은 심지어 믿음이 무엇인지 조차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에 관한 사실들을 지식적으로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성경은 귀신들도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 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2:19).
우리들이 주님의 십자가의 능력을 우리의 삶에서 날마다 경험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교회 안에 주님의 십자가의 능력이 놀라웁게 역사하기 위해서는 개인과 교회가 믿음의 삶에 대해 분명하게 이해하고 그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올바른 신앙의 각도 위에 서야 합니다.
나누는 방식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눌 수 있겠지만, 저는 두 가지의 매우 대조적인 신앙의 각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광야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과 모세를 통하여 잘 보여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은 구약시대의 사람들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히브리서 3장과 4장은 바로 그들을 예로 들면서 우리를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모세는 똑같은 길을 갔습니다. 똑같은 환경에 처했습니다. 똑같은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를 경험했습니다. 똑 같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지고 있던 신앙의 이해는 근본적으로 달랐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차이를 한 쪽은 신앙이 어리고, 한 쪽은 신앙이 성숙한 차이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 차이는 단순히 그러한 차이가 아닙니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다른 신앙의 각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각 신앙의 각도는 각기 다른 특징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들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신앙의 각도를 가지고 있으면, 아무리 열심히 기도하고 노력한다 할지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던 신앙의 특징들만 우리의 삶속에 나타납니다. 절대로 모세가 가지고 있던 신앙의 특징들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던 신앙의 각도가 팽배합니다. 그 결과, 우리 삶 속에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던 특징들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3장과 4장은 그것에 대해서 매우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가운데 그러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더 많은 기도가 아닙니다. 더 많은 헌신과 봉사가 아닙니다. 더 많은 성경공부가 아닙니다. 그 모든 것들도 다 중요하겠지만, 우리 가운데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올바른 신앙의 각도로의 전환입니다. 그것이 없이는 아무리 많은 기도를 하고, 아무리 많은 성경공부를 할지라도, 별로 변화되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그 동안 우리 나라 성도들이 기도가 부족해서 이렇게 됐습니까? 헌금과 봉사가 부족해서 이렇게 됐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졌던 그릇된 신앙의 각도와 모세가 가졌던 올바른 신앙의 각도 사이로 갈라지는 분기점은 그들이 무엇을 구하는가에 달려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의 필요를 위한 하나님의 손 혹은 능력만을 구했습니다. 반면에 모세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번은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주실 뿐 아니라, 천사들을 앞서 보내어 적들을 물리치게 하심으로 그 땅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행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모세는 하나님께서 같이 가지 않으시려거든 그들을 그곳에서 올려보내지 말라고 기도했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지금 사막에 있습니다. 돌 뿐인 사막, 낮에는 기온이 50도까지 올라가고 밤에는 거의 영도까지 떨어지는 사막에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지금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그들의 노력이 전혀 없이 줄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월 일억원 수입 이상의 사업의 축복과 매년 5천명 이상씩 늘어나는 교회의 성장을 약속하고 계시다고나 할까요.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그 모든 것보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그 사막이 더 좋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세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습니다. 그 단어조차 알지 못합니다. 그저 축복이면 됩니다. 능력이면 됩니다. 성공이면 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손만을 구하는 신앙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신앙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길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근심시킬 수 밖에 없고, 하나님을 분노케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참다운 믿음도 갖지 못하고, 그 믿음은 환경에 따라 좌우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본인이 원하건 원치 않건 하나님께 불순종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신앙을 가진 성도들은 결국 하나님의 약속을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 쓰임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 신앙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져야 합니다.
호세아 6:1-6은 구약성경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신앙의 근본이 무엇인가를 매우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근본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두 개가 서로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만큼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특히 말세지말인 오늘날 하나님을 깊이 아는 교회를 세우고 계시며, 따라서 예수님을 깊이 사랑하는 교회를 세우고 계십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 기도, 찬양 등은 모두 의식입니다. 이 의식들은 반지라는 본질을 담는 케이스처럼, 우리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표현하고 나타내는 수단입니다.
그런데 반지가 없는 케이스가 아무 의미가 없듯이, 본질이 없는 의식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그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호세아 시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함도 없었습니다. “이 땅에서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호3:1,6)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호6:4). 그런데도 그들에게는 많은 희생과 제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절기를 다 지켰습니다. 이사야는 호세아와 같은 시대 선지자인데, 이사야 1장에 보면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의식을 전혀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네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사1:11-14).
의식이 본질을 대체해 버리면, 그것이 바로 율법주의입니다. 그리고 율법주의 신앙이 타락하면, 사람들은 의식을 남용합니다. 그래서 엘리 제사장 시대에 전쟁에 패하자 하나님 앞에 죄를 회개하려고는 않고 언약궤를 앞세우고 전쟁에 나간 것과 같이 합니다. 오늘날 성도들 중에는 심지어 여관을 운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복도에 온갖 성경구절을 붙여놓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신앙이 극심하게 타락한 형태입니다. 그것이 사업이 잘 되는 비결이 아닙니다. 그것은 의식을 남용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 사람의 살 길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서서, 하나님을 더욱 알기를 힘쓰고 사랑하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심지어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조차 잘 모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에 관한 이론적인 사실들을 아는 것을 하나님을 아는 것과 혼동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소위 성수주일이나 십일조와 같은 의식 그 자체들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영적으로 어두운 시대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