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에 나타난 자살과 그 유형
2. 한국인의 자살 실태와 기독교인의 자살
3. 기독교인 자살의 심각성
4. 자살의 역사적 이해-(1) 고대(古代)
5. 자살의 역사적 이해-(2) 교부시대
6. 자살의 역사적 이해-(3) 르네상스 시대
7. 자살의 역사적 이해-(4) 종교개혁 시대
8. 자살의 역사적 이해-(5) 계몽주의 시대
9. 자살의 역사적 이해-(6) 낭만주의 시대
10. 자살의 역사적 이해-(7) 19-20세기
11. 자살의 원인-(1) 생물학적 원인
12. 자살의 원인-(2) 심리적 원인
13. 자살의 원인-(3) 병리적 원인
14. 자살의 원인-(4) 사회적 원인
15. 자살의 유형-(1) 운명론적 자살
지금까지 우리는 자살에 대해 역사적·원인론적으로 고찰했다. 이제는 자살의 유형을 다룰 때다. 자살의 유형은 매우 다양하기에 적절한 기준과 원칙으로 범주화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죽는 방법을 중요시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은 자살이 갖는 특성을 중요시할 수도 있다. 그런 이유로 여기서는 자살의 방법이나 특색보다는 자살의 성격과 의도를 중심으로 유형화하고자 한다. 가급적이면 자살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순위로 해 다루면서 자살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와 함께 정리해 나가려고 한다.
1) 운명론적 자살
운명론적 자살(fatistic suicide)은 절망적 상황에서 일어나며, 자살의 가장 부분을 차지한다. 자신의 환경을 반전시킬 수 없다고 판단되는 상황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운명론적 자살은 뒤르켐이 사회학적으로 구분할 때 사용했지만, 자살의 성격적 측면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 점에서 하나의 자살로 유형화하는데 무리가 없다.
운명론적 자살은 자신에게 삶의 조건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조금도 없다고 생각할 때 일어난다. 얼마 전 강원도에서 일어난 동반 자살은 이런 성격이 짙다. 그런 점에서 운명론적 자살은 극도의 절망감이 중심을 차지한다. <자살의 사회적 원인>에서 기술한 대로 감옥 또는 정신병원에 수용돼 있거나, 전체주의적 정권에서 속박을 받고 있다고 느끼는 경우, 특히 경제적 압박을 견디지 못하는 경우 등이 이런 경우다.
운명론적 자살은 힘들고도 어려운 상황에서 자살로 분출구를 찾는 현상이다. 더욱이 개인의 심리가 심각하게 약화된 상태에서 극도의 무력감을 깨닫는 데서 비롯되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현재의 힘든 상황을 도저히 바꿔낼 수 없다는 무력감은 자기 자신을 연속적으로 지키거나 보존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한다. 그런 점에서 최근 경제적 어려움으로 파산과 실직이 증가하는 현상은 운명론적 자살을 부를 위험성이 높다고 봐야 한다. 개인 환경이 급격히 달라지고 변화가 일어나는 시기에 자기 보존능력이 결여된 사람들이 자살할 가능성이 더 높아지기 때문이다. 운명론적 자살은 특성상 다음 몇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1) 절망적 상태로서의 자살
기묘한 이타성과 맞물려 ‘최악의 선택’으로
절망적 자살은 극도의 절망으로 삶을 포기하는 상태다. 개인이 삶을 포기할 때는 이미 우울한 상태로, 절망이 그를 지배하게 된다. 우울이란 맥이 빠지는 현상으로, 정신 기능이 갑자기 멈춰서는 현상이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은 정상적으로 생각하기 어렵다. 특히 평소 정상적인 사람이었더라도 갑자기 우울해지면 밝은 면은 보이지 않고 자신을 가로막고 있는 어두운 벽만 보게 된다. 이 상황에서 매우 단순한 행동이 일어나는데, 이런 상황을 탈출하는 것이 바로 죽음을 선택하는 일이 된다. 심각한 절망이 그를 죽음으로 내모는 현상이다. 이런 절망은 먼저는 우울이 절망의 상태가 된 것이지만, 삶의 포기가 더욱 절망감으로 발전하는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특이한 것은 절망적 상태가 자살 시도자의 기묘한 이타성을 작동시킨다는 점이다. 이러한 이타성의 심리에는 물론 왜곡이 자리하는데, 모든 것을 ‘자기 탓’으로 돌리는 현상이다. 이 이타성으로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는 함정에 빠진다. 그러면 자살 시도자는 자신이 타인에게 폐를 끼치고 있는 사람이기에 자기 하나만 죽으면 모두가 기뻐할 것이라는 생각에 지배된다. 이때 주변 사람들이 간병에 지친 모습, 힘들어하는 모습, 흐트러진 모습을 보면서 그 모든 것을 더욱 자기 탓으로 돌린다.
중병에 걸려 오래도록 병상에 있는 환자나 노인이 돼 스스로의 생활력을 잃고 폐를 끼친다고 생각하는 경우 절망적 자살의 위험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그들은 때로 옆에서 열심히 도와주는 모습조차 ‘내가 없으면 이 사람도 다른 일에 힘을 쏟을텐데…’라 생각한다. 이런 상황에서 충고를 들으면, ‘이 사람도 힘이 드니까, 내가 털고 일어나기를 바라기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라고 왜곡 해석한다. 만약 당사자가 생명보험 가입자인 경우 자기만 죽으면 모두가 살 수 있다는 생각까지 들어 마지막으로 좋은 일을 하고 죽을 수 있다는 기묘한 매력에 사로잡히면 절망적 자살은 더욱 쉬워진다.
(2) 극도의 슬픔으로서의 자살
개인을 효과적으로 초토화시키는 ‘무력감’
극도의 슬픔은 자살을 유발하게 만드는 특성이 있다. 극도의 슬픔은 심각한 심리적 고통을 수반해, 탈출구를 찾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런 극도의 슬픔이란 자신을 보호해주던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고립된 경우나 중요한 것을 잃었을 때, 삶을 포기하고 싶을 때 느끼는 최악의 감정이다. 슬픔에 따르는 고통은 정신적 피로를 급격히 증대시킨다. 그리고 이 정신 피로에 의한 고통은 슬픔으로 저하된 상태와 맞물려 사태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저하시키고 무력감에 빠뜨린다. 이 자살이 대개 심각한 고립이나 갑작스런 상실을 경험할 때 일어나는 이유다.
물론 이렇게 구분하고 있지만, 자살을 하나의 이유로 단순화시킬 수 없는 점을 전제해야 한다. 자살이란 언제나 복합적으로 작용하지만, 편의상 특정한 것으로 대표해 말하는 수가 많기 때문이다. 극도의 슬픔에 의한 자살만 해도 절망과 혼합적인 감정으로 구성되지만, 그래도 슬픔이 더 많이 작용했으리라 단정할 수 있는 것에 불과하다. 슬픔이 지배적인 상태에서는 어두운 절망에 압도된다. 그것이 바로 개인을 효과적으로 초토화시키는 ‘무력감’이라는 것이다. 무력감은 상태에 따라 얼마든지 상상하는 것 이상의 상황으로 내몰 수 있다. 실제로는 그럴만한 이유가 전혀 없는데도 극도의 슬픔으로 악화시키는 것이다.
이런 극도의 슬픔은 물론 단순히 삶을 포기하는 상태로 발전되지는 않고 일단 절망적인 상태를 몇 번 반복한다. 자신은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없거나 도움받을 가치가 없다고 느끼게 되고, 마침내 폐만 끼치는 사람이므로 삶을 끝내야 된다고 결심하는 것이다. 이런 유형은 술을 많이 마시는 것이 치명적이다. 술이란 어느 정도까지는 기분을 상승시켜 좋을 수 있지만, 지나친 정도는 ‘마음의 지하실’이라는 무의식에 들어가게 만든다. 그 지하실은 슬픔과 고통 외에는 아무런 희망이 있을 수 없는 곳이기에 죽음 외에는 달리 생각할 여유를 갖지 못한다. 최근 어느 유명 연예인의 자살이 만취 상태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은 이를 방증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3) 욕구 좌절로서의 자살
좌절감이 분노로 바뀌고 공격성을 띠는 일종의 보복적 심리
욕구 좌절로서의 자살은 자신이 소유하고 싶거나 행하고 싶은 욕구가 충족되지 못할 때 시도되는 현상이다. 욕구 좌절이 심하면 개인은 갑자기 삶의 의욕을 상실한다. 삶의 의욕이 현저히 상실되면 새로운 분출구로서 자살을 선택한다. 욕구 좌절로서의 자살은 예전 폐쇄적인 사회에서 결혼과 관련해 많이 일어나곤 했다. 자신이 원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은데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집안에서 도저히 허락하지 않는 것에 대해 죽음으로 보상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보상은 일종의 보복으로, 사실상 공격성에 기초한다는 점이 특이하다. 실제로 심리학에 의하면 욕구 좌절이 심하면 좌절감이 분노로 바뀌고 공격적으로 돌변한다고 한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사람이 욕구 좌절의 상처를 받으면 이를 보상받기 위해 상처를 준 대상에게 위장된 공격을 가해 상처를 준다고 설명한다. 이렇게 심리적 보상을 받는다는 것으로, 욕구 좌절감이 커지면 자기 방어를 위해 공격을 가한다는 이론이다. 윗사람이나 부모의 가르침 혹은 요구에 대해 거칠고 난폭하게 대응함으로써 부모를 화나게 하거나 거짓말, 훔치기, 폭언, 자기 학대, 가출 등으로 자신의 가슴아픈 내면의 모습을 위장, 공격으로 보상받으려는 행동이 그 예다. 이러한 충동적 행동에는 ‘이뤄지지 않는 자아실현’의 현실이 반영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최근 욕구 좌절은 아동이나 청소년에게 더욱 중요하게 부각되고 있다. 이들은 때로 자기 욕구를 이루기 위해 부모에게 무리한 요구를 한다. 이들의 욕구는 대개 신체적이고 소유에 집착하거나 놀이에 치중돼 있다. 그러나 이를 무조건 거부하면 욕구 좌절이 일어난다는 점을 아는 부모는 많지 않다. 물론 그들의 요구는 현실성을 감안하는 능력이 결여돼 적절하지 않은 점이 있다. 그렇다 해도 부모의 지나친 기대나 통제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가 좌절되는 부적응을 경험하면 심리적으로 더 힘들어진다. 그런 점에서 부모는 자녀들이 어려서부터 자기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현하고, 신뢰감을 갖고 살아가는 법을 배워 나가도록 도와야 한다. 욕구 좌절로서의 자살이 대개 성질이 급하고 인내력이 없고 자기 중심적인 청소년, 욕구 좌절시 심한 분노와 발작을 보이는 주의력 결핍 과잉 행동장애, 품행 장애 청소년들이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모들은 성장기 아동·청소년들을 주의를 기울여 보살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4) 체면 상실이나 불명예로서의 자살
죽음으로 보상받으려는 심리
체면 상실이나 불명예로서의 자살도 있다. 수치심이나 치욕, 명예훼손 또는 중상모략 등이 사람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경우다. 이는 때로 사실과 다르게 매우 단순한 사건인데도 오히려 그들이 자살을 시도하게 만든다. 극도의 수치심이나 심각하게 명예가 훼손됐다고 생각하면 사람들은 극단적 방법으로 자신의 정당성을 알리려는 심리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매우 특별한 방법을 사용하는데, 그들에게는 그 중 한 가지 방법이 바로 자살이라는 것이다. 자살이야말로 자신들에게 주어진 모든 불명예를 씻어준다고 이들은 확신한다.
이들의 자살을 두고 사람들은 자신이 비웃음거리가 됐다고 죽기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고 생각하지만, 당사자들의 심리는 그렇지 않다. 그들에게는 이런 치욕과 불명예를 당하고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1960년대 그리스 과학자 지시스는 납을 원료로 하는 도료를 사용해 파르테논 신전을 보수하자고 제안했지만, 신문에서 그 제안을 비웃었다는 이유로 자살한 일이 있었다. 후에 그의 제안이 옳은 것으로 판명돼 안타까움이 더했다. 이는 사실과 다르게 자신이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정당성을 자살로서 입증하려는 시도다.
체면 상실이나 불명예로서의 자살은 반드시 사실이 아니어도 심각하게 코너에 몰린다고 생각되는 경우 시도될 수 있다. 그들은 밀려오는 강한 힘에 대항하기 위해 극단적인 방법만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1978년 영국의 헨리 벳슨(Henry Bedson) 교수가 자살한 사건도 여기 해당한다. 그는 세계보건 기구에서 천연두를 연구하고 있었고, 천연두 박멸을 선언했다. 그러나 3년 후 천연두 증세가 다시 발발했는데, 그때 병에 걸린 사람이 바로 자신의 연구소 내 기술팀 중 한 사람이었다. 여기에 깊은 비탄을 느낀 벳슨 교수는 치욕을 느껴 자살을 택했다.
이처럼 때로 치욕과 불명예는 죽음으로 보상하려는 심리를 자극한다는 점에서, 극심한 모함과 비난을 받는 경우에도 자살의 위험성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물론 이들에게는 실제 사실이나 진위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 언론의 집중타를 맞고 있으며, 뭇 사람들이 자신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를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들은 정적과 일부 반대파에 휘말리고 과장된 이야기와 터무니없는 소문에 의해 죽음으로 내몰린 측면이 있다. 어이없게도 하찮은 비밀이 죽음을 맞게 한다는 점에서 더욱 안타까운 것이다.
(5) 경제 문제로서의 자살
돈은 자신의 능력과 자존감을 한꺼번에 드러낸다
경제 문제로서의 자살은 돈 문제로 일어나는 죽음이다. 언제까지 지불해야 하는 돈을 구하지 못하거나 빌린 돈을 갚지 못해 심한 협박을 당하거나 인격이 침해받을 때 그 고통의 출구로 자살을 생각하는 것이다. 은행 돈을 막기 위해 카드로 돌려막기를 하다 지친 사람, 사채를 빌려 눈덩이처럼 커지는 것을 도저히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 누군가에게 빌린 돈 때문에 심하게 인격이 모멸당했다고 생각하는 사람 등이 모두 여기 해당한다. 심지어 자녀의 학자금을 마련하지 못한 부모가 비관 자살하는 경우도 있다. 이렇듯 돈 문제는 사람 마음을 일시적으로, 그리고 가장 효과적으로 파멸의 구덩이에 몰아넣을 수 있다.
자신의 능력과 자존감을 한꺼번에 드러내는 점에서 돈은 개인의 인격을 심하게 무너뜨릴 수 있는 강력한 요인이 된다. 경제 문제로 인한 자살은 반전시킬 수 없는 상황을 탈출, 회피하기 위해 가장 쉽게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되고 있다. 우리는 이미 보도를 통해 몇몇 탤런트의 자살이 경제 문제와도 상당히 관련돼 있음을 알고 있다. 그들 중에는 많은 돈을 빌려 갚을 능력이나 해결이 어렵게 돼 벽에 부딪히자 자살을 선택한 경우다.
경제, 즉 돈 문제는 삶의 기초를 흔드는 가장 뿌리깊은 것이다. 이는 개인의 차원을 넘어 국가적인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기에 지금 우리 사회를 강타하는 경제적 어려움이 자살을 부를 위험성을 높인다는 점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한다. 역사적으로도 오스트리아, 영국,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등 세계 어디서나 경제와 재정적 위기가 닥쳤을 때 결혼률은 저하되고 자살률은 높아졌다. 이런 경제 상황은 물론 상황이나 형편보다는 심리적 측면이 작용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런 문제를 두고 사회심리학자들은 그러한 사태가 닥쳤을 때 그 위험에 너무 집착하는 사람은 위기를 벗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빠지며, 자신의 생활 방식과 행복에 대해서도 불안을 느낀다고 말한다. 우리는 지난 1929년 미국 경제공황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나라를 휩쓴 경제공황은 많은 사람들을 자살로 내몰았다. 이 공황은 비슷한 상황에서 자살한 사람의 수가 가장 많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주식 대폭락으로 수백 종류의 주식이 휴지조각이 되자, 3일동안 210명이 자살했다. 파산한 사업가 수십명이 창문에서 뛰어내렸고, 뉴욕의 공원에서는 매일 아침 자살자의 시체가 발견됐다. 빌딩 지하에서 죽은 사람, 이스트강에서 익사한 사람, 아파트에서 가스 중독으로 사망한 사람 등 죽음의 방식은 다양했다.
이런 자살이 잇따르기 바로 전만 해도 미국은 경제적으로 상당히 번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1929년 한 해 동안 실업 가정이 250%나 증가했고, 공장과 회사 등 수백 곳의 회사가 도산했다. 며칠만에 은행가는 문을 닫아야 했는데, 1929년에만 은행 642곳이 도산했으며, 1930년 1345개, 1931년 3천곳에 가까운 은행 관련 회사들이 문을 닫았다.
경제적 위기 속, 신앙인들은 어느 때보다 영적 건강 유지해야
세계적인 경제공황에 이르렀다고 말하는 지금은 운명론적 자살을 부를 위험성이 높다. 회사 경영이 어려워 감원을 단행하거나 극심한 재정 악화로 회사가 문을 닫아 가장들이 거리로 내몰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어려움은 앞으로 경제가 회생되기 어렵다는 비관론과 맞물리면 겉잡을 수 없게 된다. 이때 개인은 자기 삶의 조건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조금도 없다고 좌절하기 쉽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다른 어느 때보다도 신앙생활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 규칙적인 신앙생활로 영적 건강을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신앙이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고, 파국을 맞을 수 있는 위험에 노출될 수도 있다. 우리가 알듯 기독교인들에게서도 신앙이 상당히 무력화된 상태에서 자살이 시도돼 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도저히 견뎌내고 극복할 수 없다고 생각되면 자살로 그 분출구를 찾았다. 교회는 교인들의 신앙 상태를 정기적으로 점검하고 갑자기 힘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는 예방적 대책을 세우거나 방지하는 일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강원지역 동반자살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다. 경제위기로 자살행렬이 늘 것이라는 경고가 잇따랐던 것이 실제 상황이 되고 있는 느낌이다. 여기에 28일에는 신인탤런트 우승연 씨가 안타깝게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미니홈피에는 네티즌들이 방문해 ‘조금만 더 참지 그랬느냐’며 애도의 글을 남기고 있다. 더 이상 이런 우울한 소식이 들리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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