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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다윗의 장막과 중보기도(18차 중보기도)

강의자료/컨퍼런스 정리

by 발의무리 2011. 2. 7.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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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다윗의 장막과 중보기도        


어제 저녁에 부흥을 위한 중보기도를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중보기도의 정석이라고 할 수 있고 특별히 부흥을 위한 중보기도의 기본적인 이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토대로 해서 우리의 중보기도를 좀 더 풍성하게 발전시켜 나가는 모델이 다윗의 장막의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은 ‘다윗의 장막’이라고 많이 들으셨을 텐데 오늘 그 부분을 같이 좀 나누고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이러한 중보기도를 우리 가운데서 더 활성화 시켜 주시고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을 더 놀랍게 경험하고 또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초석이 되는 하나의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다윗의 장막이라고 하는 것은 특별히 이 시대에 24시간 기도운동을 지칭합니다. 성경 사도행전 15:16절에 보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16 이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였으니”
  
개인적으로 제가 다윗의 장막에 대해 살펴보게 된 계기는 제가 오래 전에 마이크 비클 목사가 인도하는 집회에 참석하고 돌아와서 부터입니다. 제가 과거에 미국의 세미나에 종종 참석했는데 저는 여기저기 가지 않았고 제가 간 곳이 한정되어 있었는데 그중 한 곳이 캔자스 시티의 마이크 비클 목사가 인도하는 집회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부분을 살펴보고 돌아와서도 그 당시만 해도 교회가 지금보다 훨씬 작은 사이즈였기에 그런 상황에서 24시간 중보기도를 하는 것은 우리 여건상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부분을 나중에 기회가 되면 (물론 중보기도는 그때 계속 하고 있었습니다.)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선교회에 동참하는 지체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지금 그것을 하기를 원하신다고 말씀하시고 또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저에게도 그러한 것을 추구하라고 말씀하셔서 사실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이 교회를 이전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분당에서 본당과 교육관이 실 평수가 한 150평이 되었기 때문에 저희 교회 숫자로는 장소가 부족하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24시간 계속 기도하려면 그러한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 있던 자리를 다윗의 장막과 교육관으로 사용하고 집회를 위해 보다 넓은 장소를 본당을 겸해서 구하도록 하셔서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장소를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분당에 있는 넓은 장소를 경매로 받게 되었는데 그 장소는 지역주민들이 단지 내에 교회가 들어온다고 반대해서 우리가 공사하는 과정에서 장벽에 부딪히게 되었고 그러면서 기도 중에 하나님께서 다음 단계로 추진하라고 하셔서 지금의 부지가 구입되게 되고 그 장소는 바로 임대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또 그렇게 추진하는 과정에서 교회가 성장해서 기존의 장소가 도저히 좁아서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우리가 새로 구입했던 그 건물 일부를 우리가 다시 사용하면서 훈련원도 하고 그렇게 하면서 그 부족한 부분을 메우다가 하나님께서 이 장소를 주셔서 이 장소로 오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전혀 계획하지도 않았던 일들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제가 정확한 날짜는 모르겠습니다만 24시간 중보기도를 지금 일이년 전부터 시작하게 되었고 그리고 지금 현재 중간 중간 이빨 빠진 시간들이 있지만 대부분의 부분들은 채워져서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여기 오면서 저기 2층에 다윗의 장막 공간을 따로 만들어 거기에서는 주님을 찾는 공간만 되게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기 오면서 예배당 장소를 위해 기도하도록 크게 세 가지를 또렷하게 보이셨는데 하나는 “하나님이 영광으로 임할 거룩한 처소가 되게 해 주세요.”라는 것입니다. 사실 목회자 컨퍼런스에 이번에는 지난번보다 조금 적게 오셨는데 평신도들은 훨씬 많이 옵니다. 그래서 도저히 합해서 할 수가 없어서 두 번을 나누어서 합니다. 전 같으면 서울이나 넓은 공간을 빌려서 할 수 있는데 우리가 구태여 나누어서라도 여기서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주셨던 약속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부분에 기인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 주셨던 기도제목과 목적이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처소가 되게 하소서.” 라는 것인데 이것은 다윗의 장막과 관련됩니다. 세 번째는 “열방으로 나아갈 일꾼들을 양육하는 곳이 되게 하소서” 인데 이것은 훈련원이나 하나님께서 지금 실제적으로 하고 계신 일과 관련이 됩니다. 그래서 입구에 그 세 가지 기도제목이 쓰여 있는데 그냥 써놓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바라보고 늘 유념해야할 사항이고 다윗의 장막의 기도입니다. 우리가 이런 계기를 통해서도 점점 그것이 자리 잡고 활성화되고 점점 발전하고 자라나서 원래 하나님의 취지대로 될 수 있도록 나아가야 합니다. 지금까지 하고 계신 것도 정말 놀랍지만 그렇게 발전해 나가야 합니다. 포도나무 교회도 다음 주가 바로 평신도 컨퍼런스인데 이런 부분을 살펴보면서 더 다윗의 장막이 활성화되고 하나님께서 의도하신바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이 시간에는 다윗의 장막의 개요에 대하여 살펴보려고 합니다.

1. 다윗의 장막이란 무엇인가?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말세에 (말세는 예수님이 오실 때부터 말세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회복시키겠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럼 다윗의 장막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장막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이 말씀은 구약의 아모스 9장 11-12절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무너져있는데 회복될 다윗의 장막이 무엇인지 알려면 구약에서 다윗의 장막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구약에는 다윗의 장막이 두 종류가 나옵니다.

1] 다윗의 왕국으로서의 다윗의 장막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이사야서 16장 5절인데 제가 읽겠습니다.
“5 다윗의 장막에 있는 왕위는 인자함으로 굳게 설 것이요 그 위에 앉을 자는 충실함으로 판결하며 공평을 구하며 의를 신속히 행하리라.”

여러분 우리나라 서울에 가면 청와대가 있습니다. 서울이 수도지만 청와대는 수도 내에 있는 통치기반이 되는 장소입니다. 청와대 하면 우리나라 통치권의 상징이고 통치권의 기반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에서 예루살렘이 수도지만 예루살렘 내의 통치기반, 다윗의 왕권, 왕위가 있는 곳을 시온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서울의 청와대와 같은 곳입니다. 그것을 시온이라고 했는데 여기에 보면 바로 다윗의 왕위, 통치권의 핵심을 다윗의 장막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말하는 다윗의 장막은 하나님이 다윗을 위하여 세운 집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 다윗의 장막에는 다윗의 언약에 포함된 모든 다윗의 왕국, 다윗의 왕권, 다윗의 가문, 다윗의 계보 등이 다 여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전체를 하나님이 부르시기를 다윗의 장막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다윗의 장막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가장 근본적으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왕권이 성취됩니다. 그렇게 볼 때 여기 다윗의 장막이라고 표현된 말은 이사야서 9장 6-7절에 나오는 예수님에 관한 예언과도 밀접하게 관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메시야를 통해 다윗의 장막이 회복되고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그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데 바로 이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야를 통하여 회복시킬 것을 말씀하신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의미에서의 다윗의 장막에서는 왕으로서의 다윗의 역할이 강조됩니다.

2] 다윗이 세운 예배 질서로서의 다윗의 장막입니다.
구약에 보면 또 한 종류의 다윗의 장막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윗이 세운 예배질서로서의 다윗의 장막입니다. 여기에서의 다윗의 장막은 다윗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들여온 후로 언약궤를 위하여 친 장막을 말합니다. 아까 다윗의 장막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해 세운 집 또는 가문 혹은 왕권을 말한다면 이 경우에는 다윗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위해 세운 천막, 혹은 장막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새로운 질서의 예배가 드려졌습니다. 그리고 이 다윗의 장막에서는 제사장으로의 다윗의 역할이 강조됩니다.

그러면 사도행전 15장에서 야고보 사도가 아모스 9장을 인용하면서 말세에 그 퇴락한 다윗의 장막이 다시 세워질 것이라고 말했는데 여기에서 다윗의 장막은 그 둘 중에 어느 것을 말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해하려면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그 구절이 인용된 문맥입니다. 어떠한 문맥과 상황과 정황에서 야고보 사도가 이 구절을 인용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사도행전 15장의 문맥은 예루살렘 회의입니다. 초대교회 당시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파되면서 중요한 이슈로 떠올랐던 것이 할례와 율법의 의식을 준수하는 문제였습니다. 예루살렘 중심으로는 유대인이었던 배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들 중에는 바리새인이나 제사장이었다가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를 통해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놀랍게 전파되었을 때 이들의 한 일이 무엇이었는가 하면 안디옥 교회같이 이방인 중심으로 세워진 교회를 다니면서 이방인 성도들이 유대인들처럼 할례를 받고 유대인에게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의식과 율례를 지킬 것을 강요했습니다. 그것이 문제가 되어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도들이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그것은 기독교 역사에 획을 긋는 그리고 복음의 성격을 올바로 규정하는 아주 중요한 회의였습니다. 그래서 모여서 그 문제를 토론하면서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먼저 베드로가 일어나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도하신 일을 증거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을 이방인인 고넬료의 집에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방인에게 복음을 제일 먼저 전한 것은 바울이 아닌 베드로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행하심을 나누었습니다.

참고로 이것은 지나가는 이야기인데, 우리 각 개인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지만 각 개인 못지않게 교회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주신 음성을 분별해서 하나님의 인도를 깨닫고 나아가야 합니다. 안디옥 교회 같은 경우는 그렇게 해서 바울과 바나바를 따로 세우게 되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전 세계의 복음화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중요한데 이렇게 교회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우리는 많은 경우 우리의 의견을 제시합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각자의 의견을 낸 다음에 토론하거나 표결에 붙여 실행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세상 안 믿는 단체에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로타리 클럽이나 학교에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도 잘 나와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행하심을 나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모여서 자기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목회자 컨퍼런스이기에 지나가는 말로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여기 베드로만 해도 “내가 보기에는”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여 고넬료의 집에 보내셨는데 내가 가서 그들에게 할례를 전한 것도 아니고 내가 가서 그들에게 유대인의 규례를 전한 것도 아니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고 저들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할 때 오순절 날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셨던 것처럼 저들에게 임하심으로 하나님이 저들을 받으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증거 하셨다. 그런데 왜 우리와 우리 조상도 지지 못한 짐을 저들에게 지게 하느냐?”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행하심을 나눈 것입니다. 그랬더니 성경에 보면 바울과 바나바도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이방지역으로 보내시며 어떻게 자기들을 통해 일하셨고, 어떻게 이방인들을 구원하셨고 어떻게 교회들을 세워가셨고 어떻게 일하셨는가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니까 잠잠해 졌습니다. 자기들 개인의 의견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성경에 보면 야고보 사도가 일어나서 아까 읽은 그 구절을 읽으며 말씀으로 하나님의 뜻을 뒷받침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보시면 사도행전 15장의 이슈가 무엇인가 하면 이방인들에게도 율법을 지키게 하고 할례를 받게 하느냐 하는 문제였습니다. 그것은 바꾸어 말하면 모세가 세운 의식적인 법도가 기독교인들에 의해서도 지켜져야 하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이에 대해 말씀드린 대로 베드로가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도하신 것을 나누고 또한 바울과 바나바도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인도하신 것을 나누고 그리고 이 모든 것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로서 야고보 사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였는데 여기에서 관련된 문제에 대해 영원한 해답을 이 성경구절을 통해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까 말씀드린 관련된 문제에 대한 답변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나라에서는 모세의 나라의 부활이나 지속이 아니라 다윗의 장막의 회복이다.”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다윗의 장막에서는 모세의 의식이 아무런 자리가 없다. 다윗의 예배 질서가 세워진다.” 라는 것이 최종적인 결론입니다. 사실 그 당시에는 아직까지 예루살렘 성전이 존재하고 있을 때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여전히 구약의 모세의 질서를 따른 짐승의 제사가 드려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율법에 따른 의식과 제사가 놀라운 규모로 드려지고 있을 때에 이 사건의 결론에 의해서 초대교회는 그 당시 드려지는 그 모든 모세 율법에 따른 의식과 제사를 물리치고 다윗의 장막의 예배를 기독교 예배의 실천모델로 채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할례가 없어졌고 할례와 함께 짐승의 제사도 없어졌고 또한 모세의 행위에 속한 모든 제사행위가 없어지고 레위지파에 속한 제사장직도 없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볼 때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다윗의 장막이 회복될 것이라는 말은 당연히 그 속에 다윗의 왕국이 회복될 것을 의미하는 것이 포함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메시야를 통해 바로 그 다윗의 왕국이 회복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 그 문맥에 의하면 여기에서의 다윗의 장막은 새로운 예배 질서로서의 다윗의 장막이 회복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2. 새로운 예배질서로서의 다윗의 장막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가?

어떠한 새로운 질서의 다윗의 장막의 예배가 회복된다는 것인가? 그것을 알려면 구약의 다윗의 장막에서 어떤 예배가 드려졌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다윗은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온 후에 그것을 그 당시에 여전히 세워져 있던 모세의 장막에 두지 않고 언약궤를 위하여 친 새로운 장막에 두었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의 통치기간부터 솔로몬 성전이 지어지기까지 장막이 두 개 있습니다. 모세의 질서를 따른 장막이 있었고 또 다윗이 언약궤를 위해 친 장막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것은 우리가 성경 몇 구절을 보면 나옵니다. 사무엘하 6장 17절입니다.
“여호와의 궤를 메고 들어가서 다윗이 위하여 친 장막 가운데 그 예비한 자리에 두매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니라.”
“다윗이 다윗 성에서 자기를 위하여 궁궐을 세우고 또 하나님의 궤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고 장막을 치고.”(대상 15:1절)
“하나님의 궤를 메고 들어가서 다윗이 위하여 친 장막 가운데 두고 번제와 화목제를 하나님 앞에 드리니라.”(대상 16:1절)
“다윗이 전에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궤를 위하여 장막을 쳤었으므로 그 궤에는 다윗이 이미 기럇여아림에서부터 위하여 예비한 곳으로 메어 올렸고.”(대하 1:4절)

이렇게 여러 구절들을 보면 말씀드린 대로 다윗이 언약궤를 위하여 장막을 치고 그곳에 언약궤를 들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언약궤를 들이고 다윗은 찬양하는 무리를 세워 하루 24시간 하나님의 언약궤 앞에서 찬양의 제사를 드리게 하였습니다. 그것이 역대상 16장 4-6절 사이에 나옵니다.
“4 또 레위 사람을 세워 여호와의 궤 앞에서 섬기며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칭송하며 감사하며 찬양하게 하였으니 5 그 두목은 아삽이요 다음은 스가랴와 여이엘과 스미라못과 여히엘과 맛디디아와 엘리압과 브나야와 오벧에돔과 여이엘이라 비파와 수금을 타고 아삽은 제금을 힘있게 치고 6 제사장 브나야와 야하시엘은 항상 하나님의 언약궤 앞에서 나팔을 부니라”

이것을 보면 이처럼 많은 찬양할 자들을 세워 하루 24시간 일 년 365일 하나님의 언약궤 앞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게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아까도 말씀드린 대로 두 종류의 장막이 있었는데 모세의 장막과 다윗의 장막이 있었습니다. 그 차이가 무엇인가 하면 모세의 장막에는 바깥뜰과 기구들이 있었습니다. 물두멍과 제단 등이 있었습니다. 다윗의 장막에는 그것들이 없었습니다. 모세의 장막에는 성소도 있었고 기구들도 있었습니다. 촛대와 진설병 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장막에는 그것들이 없었습니다. 모세의 장막에는 지성소가 있었는데 지성소가 비어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장막에는 지성소가 개방되어 있었습니다. 모세의 장막에는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휘장이 있었는데 다윗의 장막에는 그 휘장이 없었고 모세의 장막에는 언약궤가 없었던 반면 다윗의 장막에는 언약궤가 있었습니다. 모세의 장막에서는 매일 짐승의 제사가 드려졌는데 다윗의 장막에서는 매일 영적인 예배가, 찬양의 제사가 드려졌습니다. 짐승의 제사는 다윗이 언약궤를 다윗이 친 장막에 들여놓을 때 드린 것 외에는 그곳에서는 어떠한 짐승의 제사도 드려지지 않았습니다. 그곳에서는 찬양을 통한 영적인 제사가 드려졌습니다. 모세의 장막에서는 제사장의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다윗의 장막에서는 새로운 차원의 제사장의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찬양하는 자들이고 예언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모세의 장막에서는 예배에 대한 모세의 질서를 따르고 있었고 다윗의 장막에서는 새로운 다윗의 질서의 예배가 드려지고 있었습니다. 모세의 장막에서는 오직 적은 수의 악기와 찬양 팀만이 있었고 다윗의 장막에서는 많은 수의 악기와 찬양 팀이 있었습니다. 다윗의 장막에서 이렇게 하나님께 예배가 드려지기 시작했습니다.

3. 오늘날 세우기 원하시는 다윗의 장막은 어떠한 장막인가?

우리가 다윗의 장막을 이야기하면서 어떠한 예배를 추구하고 어떠한 것을 기대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1] 다윗의 장막의 예배는 신약의 예배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린바와 같이 신약의 예배에 대해 말하면서 모세의 질서에 따른 예배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교회로서 다윗의 질서에 따르는 새로운 예배가 될 것을 말하면서 무너진 다윗의 장막을 하나님이 다시 세울 것을 인용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다윗의 장막의 예배는 신약의 예배를 가리킵니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오늘날 우리의 예배가 결국 다윗의 장막의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24시간 기도 프로그램으로의 예배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예배가 다윗의 장막의 예배가 되는 것이 성경적입니다. 신약의 질서의 예배가 바로 다윗의 장막의 예배가 될 것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참 놀라운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윗은 예수님이 오시기 천 년 전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오시기 천 년 전에 벌써 하늘나라의 예배를 계시하셨습니다. 무엇을 보면 이것을 볼 수 있는가 하면 예수님이 오시고 신약이 쓰여지게 되면서 요한 계시록도 쓰여지게 되었는데 요한계시록 4-5장에 보면 하늘나라에서 어떻게 예배가 드려지고 있는가 하는 부분이 거기에 쓰여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이란 말의 ‘계시하다’란 말은 헬라어로 ‘아포칼립토’, ‘계시’란 말은 ‘아포칼립시스’입니다. 그런데 ‘아포칼립토’라는 말은 ‘뚜껑을 연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요한계시록을 통해 하늘나라의 뚜껑을 열고 하늘나라의 예배가 어떻게 드려지는지 들여다보게 한 것은 요한계시록 4-5장에 나옵니다. 요한계시록 4-5장을 통해 하늘에서 어떻게 예배가 드려지는가를 뚜껑을 열고 들어다보면 너무나 놀라운 사실이 하늘에서 드려지는 예배와 다윗의 장막에서 드려지는 예배가 똑같은 것을 보게 됩니다. 너무나 놀랍게 똑같습니다. 참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최소한 세 가지 면에서 똑같습니다.

① 하늘나라의 예배와 같이 다윗의 장막의 예배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가 사람들에게 개방되어 있었습니다. 모세의 장막에서는 구약시대에는 언약궤가 사람들에게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솔로몬을 통해 세운 성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언약궤는 지성소 안에 있고 지성소 앞에 휘장이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아무도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대제사장만 일 년에 한 차례 그것도 자신을 위하여 먼저 제사를 드리고 자신을 먼저 정결하게 유지하고 들어가지 않으면 죽임을 당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전통에 의하면 제사장들은 발에 끈을 묶고 방울을 달고 들어갔답니다. 왜냐하면 들어가서 제사를 지낼 때 방울소리가 계속 나야 살아있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방울소리가 한참동안 나지 않으면 흔들어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 거룩함으로 나가지 못하면 죽임을 당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죽임을 당하면 거기에는 아무도 못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못 꺼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방울소리가 나지 않으면 끈을 당겨 보았다가 아무런 반응이 없으면 그 끈을 잡아끌어서 제사장을 꺼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들어갈 때는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차례만 그곳에 들어갔습니다. 그 외에는 어느 누구도 그곳에 접근이 금지되었습니다.

이것은 이해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구속을 이루시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시대를 수건으로 덮혀져 있는 가려져 있는 시대로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바로 그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갈라짐으로써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새롭고 산길이 열리게 되었고 그래서 예수님의 몸이야말로 길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언약궤가 가려져 있었는데 다윗의 장막에서 40년 가까운 시간동안은 언약궤가 사람들에게 개방되어 있었습니다. 아주 예외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나라를 보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 개방되어 있습니다.

② 예배자들이 그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예배했습니다. 찬양과 경배 시간에도 이 부분을 나누겠지만 하나님 보좌주위의 스랍들을 보면 온 몸이 눈이고 그들이 쉴 새 없이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장로들은 그 앞에 앉아 있다가 경배를 시작하면 일어나서 면류관을 집어던지고 엎드려 경배하다가 또 끝나면 앉아 있다가 또 시작하면 일어나서 면류관을 집어던지고 경배합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성경을 읽다보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경배를 받기위해 창조한 로봇과 같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도 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꼭 그렇게 하시면서 까지 경배를 받으셔야 하는가?”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특별히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못박히고 부활하신 후에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3장 18절에 보면 우리가 “수건을 벗은 얼굴로” 주의 영광을 봅니다. 신약시대에는 가려진 것이 벗겨지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가는 것이 열리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 신약시대에 사는 우리는 주의 영광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울을 보는 것같이”라는 말은 요즘 우리 거울은 또렷하지만 옛날에는 구리 같은 것을 잘 닦아서 쓰는 것이라 어렴풋하게 형태만 보이지 오늘날처럼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되 희미하게 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안다는 것 중 하나가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는 것인데 여러분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부분적으로만 깨달아도 여러분은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눈물 콧물 다 쏟으며 진실로 하나님 한분만을 사랑하기 원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자비하심,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 이러한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을 우리가 부분적으로만 보아도 진짜 그 앞에서 경배하고 찬양하고 높이고 하나님만 사랑하고 하나님만 알기 열망하는, 하나님처럼 거룩해지기를 열망하는 그러한 열망이 우리에게 샘솟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그 스랍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하나님을 경배하기 원하겠습니다. 경배함이 그들의 특권입니다. 그런데 그런 예배가 어디에서 드려졌는가 하면 바로 다윗의 장막에서 드려졌습니다. 거기에서 그런 예배가 드려졌습니다.

③ 하늘나라에서 하루 24시간 일 년 365일 그렇게 예배가 드려지는데 바로 다윗의 장막에서 그렇게 예배가 드려졌습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께서 하늘나라의 예배를 예수님이 오시기 천 년 전인 다윗 시대에 계시하셨고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통하여 신약의 예배가 바로 그런 예배가 되어야 할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실 우리 예배가 그런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신약시대에 사는 우리들인데도 오늘날 너무나 많은 경우에 그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몇 가지 순서를 지키면 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예배가 알맹이가 빠진 몇 가지 규례와 규칙을 지키는 것으로 전락해 버린 것은 너무나 심각합니다. 예배가 하나님과 실제적인 만남이 없이 하나의 전통적인 의식으로 전락해 버린 것에서 얼마나 심각하게 우리가 하나님이 의도하신 바에서 떠나있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다윗의 장막의 예배는 신약의 예배이고 오늘날 우리의 모든 예배가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세지말인 이때에 다윗의 장막의 예배를 보다 온전하게 회복시키기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놀라운 교회회복과 말세지말에 전 세계에 미칠 하나님의 부흥을 위해 하나님께서 이 다윗의 장막의 예배가 더 회복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다윗의 장막에서 일 년 365일 하나님 앞에 경배와 신령한 예배가 드려졌듯이 하늘에서 그렇게 오늘날도 그 이전에도 하루 24시간 일 년 365일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 앞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만 높이고 찬양하고 하나님만 열망하고 사모하고 하나님께 찬사를 드리고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기도하는 그러한 예배가 드려지는 것처럼 오늘날 하나님은 다윗의 장막을 회복시키기 원하신다는 말입니다. 사실 그래서 우리 가운데서도 이렇게 더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만 높이고 하나님으로만 인하여 기뻐하는 그러한 다윗의 장막이 더 실현될 수 있도록 추구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의 IHOP같은 곳에서 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러한 부분입니다.    

2] 다윗의 장막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곳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구약시대에 있었던 다윗의 장막은 다른 시대의 성막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언약궤가 사람들에게 개방되어 있었습니다. 예외적인 경우였습니다. 하늘의 예배를 계시하시기 위함이었던 것 같습니다. 신약의 예배를 다윗을 통해 미리 계시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언약궤 위에 머물러있던 하나님의 영광 또한 사람들에게 개방되어 있었습니다. 요즘 토미테니가 쓴 다윗의 장막이란 책도 바로 이런 부분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다윗만 하더라도 다윗의 장막에 들어가서 그 언약궤 위에 머물러 있는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 앞에서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것이 그의 기쁨이었고 그것이 그의 소망이었습니다. 시편 26편 8절에 보면 그러한 내용이 나옵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의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거하는 곳을 사랑하오니.” 여기 주의 계신 집은 그저 하나님의 이름으로 지어진 성전이기 때문에 주님이 계실 것이라는 막연한 차원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머물러 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찾는 것이 그의 유일한 기쁨이요 열망이었습니다. 주님의 영광이 거하는 곳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윗의 장막을 통해 집중적으로 하는 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이고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고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임재가 참 함께 하십니다.

지난주에 카자흐스탄에서 선교사님 한분이 카자흐스탄 여성리더 23분을 인솔해서 한국의 어느 단체에서 초청을 받아 오셨습니다. 포도나무교회를 방문해서 식사하자고 왔는데 사무실로 안 들어오십니다. 시간이 지나도 안 오셔서 전화했더니 이분이 다윗의 장막에 들어가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때 주일날 오후 주님을 찾고 기도하는 소수의 무리가 있었는데 이 분이 다윗의 장막에 앉아 있다가 끝나고 나서 말씀하시기를 그 짧은 시간인데도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자신의 영혼이 소생되는 것같이 안식을 얻는 너무나 좋은 시간이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가고 하나님을 찾아 나가는 그래서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가 머무는 그것이 다윗의 장막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다윗의 장막이 되기를 추구해야합니다. 우리 예배가 그렇게 되기를 추구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은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 앞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얼굴만을 구했습니다. 그것이 그의 유일한 소망이었습니다. 시편27편 4절에 나오는데 “내가 청하였던 한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여기서 한 가지 일이라는 것은 많은 것 가운데 첫 번째 일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 추구하는 단 한가지라는 것입니다. 그 한 가지가 무엇입니까?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 앞에서 하나님을 기뻐하며 하나님의 아름다움으로 인하여 감격하며 그곳에서 하나님을 찾는 것이 그의 유일한 소망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 신약의 예배도 마찬가지이고 다윗의 장막의 예배도 마찬가지로 더 나아가 우리 신앙의 핵심도 바로 이 부분입니다. 다윗처럼 하나님을 아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 되는,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 앞에서 그것으로 인하여 기뻐하며 주님을 찾는 것이 인생의 단 하나의 유일한 목표인 그것이 올바른 신앙입니다. 그것이 정확하게 올바른 신앙입니다. 그것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신앙의 본질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예배가 그렇게 되어야할 뿐 아니라 다윗은 다윗의 장막에서 그렇게 하나님을 찾는 것이 그의 유일한 단 하나의 목표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장막은 하나님을 찾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오는 곳입니다. 이처럼 다윗의 장막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이 가장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제가 마지막 시간에는 중보기도로 어떻게 나갈 것인가를 종합해서 말씀드릴 것입니다. 그때도 나누겠지만 저는 자주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중보기도를 하러 오지 말라.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오라.” 이것은 다릅니다. 우리가 이번 컨퍼런스를 앞두고도 각자 기도했지만 매주 월요일 날 모여서 중보기도 했습니다. 이때 나올 때 우리 지체들이 컨퍼런스를 위해 기도하고, 오신 분들을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은혜로 함께 하시도록 기도하는 것이 다 필요합니다. 그런데 제가 뭐라고 자주 강조하는가 하면 중보기도 하러 오지 말라고 합니다. 아니 지금 중보기도 하러 왔는데 중보기도 하러 오지 말라는 말이 무슨 말인가? 그것은 아주 미묘한 차이 같지만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중보기도 하러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구하여 나와야 합니다. 중보기도 자체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오는 것입니다. 다윗의 장막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을 구하여 나오면 당연히 하나님을 알기를 구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의중에 있는 의도가 이루어지도록 우리는 중심에서부터 간절히 기도하고 찾고 하나님께 약속을 아뢰고 하나님의 보좌를 두드리는 그런 일들을 당연히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기도하러 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구하여 온다는 것입니다. 이 차이는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그래서 아까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말세에 무너진 다윗의 장막을 다시 세울 것이라고 말하면서 15장 17절에 보면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이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주를 찾는 다는 말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모든 우리 신약의 예배의, 또 우리 신앙의 가장 핵심이 주님을 이렇게 찾는 것입니다.

3] 찬양과 경배와 다윗의 장막
다윗의 장막에서는 봉헌할 때 외에는 어떠한 짐승의 제사도 드려지지 않았습니다. 대신 다윗의 장막에서는 찬양 사역자들을 세워 그들로 하여금 하루 24시간씩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경배하게 했습니다. 이 다윗의 장막을 통해 우리가 추구하는 가장 핵심적인 것 중 하나가 이렇게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오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오는 방법 중 하나가 찬양과 경배를 통해 하나님을 마음껏 높이는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하여 그리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그 놀라운 일들을 인하여 그분께 마음껏 찬사를 드리고, 그분으로 인하여 기뻐하며, 그분께 마음껏 영광을 돌리는 그 찬양과 경배를 통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가장 필수적인 요소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아까 읽은 성경구절 역대상 16장 4-6절을 살펴보았고 또 역대상 16장 37절에도 “37 다윗이 아삽과 그 형제를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 머물러 항상 그 궤 앞에서 섬기게 하되 날마다 그 일대로 하게 하였고”라고 했는데 이것은 바로 경배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포도나무 교회 같은 경우에 좀 더 보충하기 원하고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기를 원하는 부분이 찬양과 경배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모여서 경배하고 찬양합니다. 많은 찬양과 경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매 시간마다 찬양팀들을 세워주시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오래 전부터 바라고 있던 바램이지만 제가 아직 적극적으로 신경쓰지 못했고 우리의 자원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보충해주시기를 사모합니다.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다윗의 장막의 예배는 하늘의 모형을 따라 드려진 예배였다고 말씀드렸는데 요한계시록 4장과 5장에 보면 하나님 보좌 앞에서 스랍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하루 24시간 일 년 365일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그러면 장로들도 천천만만의 천사들도 그들의 인도를 따라 모두가 하나님께 경배하는 데 요한계시록 5장 8절에 보면 바로 장로들의 손에 한쪽에는 거문고가 한쪽에는 금대접이 들려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금대접 안에는 향이 가득했는데 그 향은 성도들의 기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24장로들이 어린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들의 기도들이라.” 여기에 보면 거문고는 경배를 의미하고 금대접은 기도를 의미합니다. 이 두개가 어우러져서 지속적인 찬양과 경배가 드려지고 또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하나님 앞에 지속적인 간구와 기도가 드려지는 것이 다윗의 장막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세에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세우기 원하시는 다윗의 장막입니다.

4] 다윗의 장막과 예언
사실 중보기도와 예언은 아주 중요한 주제이기에 이길수 목사님께서 살펴볼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장막에서는 하나님께 경배가 마음껏 드려지되 거기에서는 예언과 경배가 어우러졌습니다. 어제도 말씀드린 바같이 중보기도는 선지자적 소명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중보기도 하도록 도우시는 것 중 하나가 많은 예언적인 꿈과 환상 등 예언의 기름부음을 부으시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가 하면 하나님의 의중과 의도를 알리심으로 우리가 기도하되 하나님의 의중과 의도를 따라 기도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십니다. 어제 말씀드린 대로 이런 집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중보기도의 기름부음을 부으시거나 또한 교회에서 그렇게 기름부음을 부으시면 많은 것들이 보여지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들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많은 사람들은 보여지면 나누려고 하고 그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사역하려고 하는 이러한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하다보니까 아직 성숙하지도 않고 자라지도 않고 분별할 능력도 없는데 그저 보여진다고 막 이야기함으로 덕을 세우기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교회에 유익을 가져오기보다 아픔을 가져오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보여주신 것은 말하라고 보여주신 것이 아니라 기도하라고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중보기도의 영을 붓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함 쿡이라고 영국과 미국에서 사역하는 하나님께서 참으로 귀하게 세우신 예언사역자가 있는데 그분의 책에 보면 예언의 기름부음이 강하게 임한 사람이 다듬어져서 교회를 섬기고 또 그 예언을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을 섬길 정도가 되려면 25년 동안은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중보기도 하도록 도우시는 것 중 하나가 예언의 기름부음을 부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보기도에는 다른 어떠한 신앙의 부분에 못지않은 성령의 기름부음이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중보기도의 한 부분에서 예언이 핵심입니다.

이것은 구약의 다윗의 장막에서도 그랬습니다. 성경에 보면 다윗이 일꾼들을 세워 하나님을 24시간 경배하고 찬양하게 했는데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예언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잘 안 나와 있는데 영어성경에는 다 그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역대상 25장 1-3절입니다.
“1 다윗이 군대장관들로 더불어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의 자손들 중에서 구별하여 섬기게 하되 수금과 비파와 제금을 잡아 신령한 노래를 하게 하였으니 2 아삽의 아들 중 삭굴과 요셉과 느다냐와 아사렐라니 이 아삽의 아들들이 아삽의 수하에 속하여 왕의 명령을 좇아 신령한 노래를 하며 3 여두둔에게 이르러는 그 아들 그달리야와 스리와 여사야와 하사뱌와 맛디디야 여섯 사람이니 그 아비 여두둔의 수하에 속하여 수금을 잡아 신령한 노래를 하며 여호와께 감사하며 찬양하며”

여기에 신령한 노래라고 표현한 이 말이 영어성경에서는 "prophesy"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신령한 노래를 하며’라는 말이 세 번 반복되는데 이것이 다 ‘예언하며’라는 말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마음껏 경배하되 거기에 놀라운 예언이 주어졌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앞으로 이길수 목사님께서 좀 더 나누겠지만 다윗의 장막의 기도이든지 또는 일반적인 중보기도이든지 모든 중보기도에서 가장 핵심 중 하나는 하나님의 성령께 민감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윗의 장막을 통해 성령께 민감하기를 추구합니다. 성령께 민감하기를 추구한다는 말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그 날 하나님께 드려질 예배만 해도 우리가 어떠한 찬양으로 어떻게 경배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당연히 성령께 민감해야 합니다. 찬양팀이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께 민감하여 해야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기도하는데 있어서도 성령께 민감해야 하는데 크게 두 가지 면에서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① 하나는 이렇게 주님의 얼굴을 구하여 주님을 추구하여 또한 찬양과 경배를 통하여 마음껏 주님을 높이고 주님만을 사모하고 주님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나아가면 하나님의 성령께서 인도하십니다. 제가 중보기도하러 나오지 말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오라고 말했는데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와서 그렇게 주님만을 높이고 주님만을 추구하고 주님만으로 만족하면 당연히 성령께서 인도해 가십니다.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것 중 하나가 무엇을 위해 기도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제가 사석에서 어떤 분에게 들었는데 그분이 얼마 전에 캔자스의 IHOP에 다녀왔는데 가서 보니까 기도하다가 어떤 분이 “하나님께서 한국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신다.”고 하니까 거기 모인 사람들이 한국을 위해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납니다. 우리가 드리는 중보기도, 다윗의 장막 가운데서도 그런 일들이 수없이 많이 일어납니다. 어떤 부분들은 나중에 보면 그 기도가 절실하게 필요했던 경우를 보게 됩니다. 우리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성령께 민감해야 되는 중요한 것 중 하나가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에게 인도하시는 대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 구체적인 절차는 제가 마지막 시간에 말씀드릴 것입니다.

② 그 다음에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중보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말씀하시는데 성령께 민감하여 그것을 분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기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록해서 당연히 그것을 담임목회자가 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최근의 한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작년부터 우리들을 대만에 보내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저는 한번만 다녀왔고 이길수 목사님이 여러 차례 다녀오셨는데 하나님께서 귀한 일들을 대만에서 하시는 것 같습니다. 또 선교사님들도 인터넷을 통해 하나님께서 놀라운 은혜를 주시고 또 지난번에 집회에 참석하여 놀랍게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시고 그러면서 교회 가운데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행하시며 교회를 세워가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기도해 주실 것은 내년에 대만 선교사 연합회에서 주최하여 대만교민, 한국교민, 대만 목회자 일부가 참석하는 대규모의 십자가와 성령 컨퍼런스를 하려고 합니다. 대만 같은 경우는 위성 채널을 통해서도 설교가 나가게 되어서 하나님께서 대만 가운데 귀하게 역사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난번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부으시고 하나님께서 행하시면서 이길수 목사님이 다녀오신 후부터도 훈련원을 했으면 좋겠다고 선교사님들이 여러 차례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당장 훈련원을 하겠다고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그 일을 감당하는 것이 쉽지 않아서 하겠다고 쉽게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좀 더 지켜보자고 넘어갔습니다.

또 제가 몇 주 전에 카자흐스탄에 다녀왔는데 하나님께서 아주 놀랍게 함께하셨습니다. 카자흐스탄은 이슬람 국가는 아니지만 70%가 무슬림이고 80년대 까지만 하더라도 카자흐스탄 민족가운데는 공식적으로 기독교인이 한명도 없었던 지역입니다. 그런데 지난번에 가서 집회를 인도하는 중에 낮 시간에는 카자흐스탄 내에 연합하는 교회 리더, 선교사님 일부, 셀 리더들, 현지 목회자들 이렇게 해서 250명이 모였습니다. 저녁에는 일반 평신도들이 같이 연합으로 모여 집회했는데 700명쯤 모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엄청나게 함께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사석에서 자꾸 “자주 왔으면 좋겠다. 훈련원도 했으면 좋겠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쉽게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그냥 듣고만 있었습니다. 그리고 “때가되면 하나님께서 하시겠지” 하고 내려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다윗의 장막에서 하나님께서 감동 주신 것을 보는 과정에서 모든 나라에서 새물결 훈련원이 세워지도록 간절히 기도하게 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제가 그것을 보고 아침에 일어나 잠시 묵상하는데 그것을 생각나게 하시면서 하나님의 의도를 또렷하게 보이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즉시 컴퓨터로 가서 대만 선교사님, 카자흐스탄 선교사님에게 문자를 보내고 메신저를 띄웠습니다.

카자흐스탄 선교사님만 해도 오셔서 주일날 저녁에 같이 나누었는데 참 하나님께서 놀랍게 함께 하시고 훈련받은 팀들이 그 나라뿐만 아니라 중국 신장성까지 들어가 있습니다. 선교사로 나가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교회에서 조금만 영적인 면에서 협력해 주면 너무나 잘 서겠다고 늘 고민해 왔는데 어떤 분들은 왔다가면서 또 오겠다고 하고는 오지 않고 그래서 상처가 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얘기도 못했다고 했습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듣고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보면서 하마터면 그냥 지나갈 뻔 했는데 또 우리의 여건상 쉽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 지나갈 뻔 했는데 다윗의 장막에서 하나님께서 기도하게 하신 그 하나가 중요한 일을 이룬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의 예이고 그런 일들은 자주 있습니다. 이렇게 다윗의 장막의 한 중요한 부분이 예언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장막을 통해서, 중보기도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우리를 인도해 가시는 그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교회에 말씀하시고 개인들에게 말씀하셔서 인도해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께 민감한 것이 필수인데 그러한 면에서 성령께 민감함을 볼 수 있습니다.

5] 다윗의 장막과 전도
다윗의 장막의 중보기도는 온 세계에 미치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사는 지역과 나라의 영적인 분위기를 바꾸게 될 것이며 복음을 위해 마음들이 준비되게 할 것입니다. 이사야서 56장 7-8절입니다.
“7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8 이스라엘의 쫓겨난 자를 모으는 주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이미 모은 백성 외에 또 모아 그에게 속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만민이 기도하는 하나님의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라고 하셨는데 이 다윗의 장막에는 기쁨의 요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하나님을 바라고 하나님만이 목적된 자세로 주님을 구하는 중에 주님의 사랑과 우리를 향하신 그 크신 은혜를 깨닫고 그 앞에 서는 것, 그것보다 더 진정한 기쁨은 없습니다. 다윗의 장막의 기도가 의무감에서 나온 때우는 기도가 아니라 진실로 하나님을 구하는 가운데 바울처럼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 앞에서 주님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감격하는 그 요소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역대상 16장 27절에서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존귀와 위엄이 그 앞에 있으며 능력과 즐거움이 그 처소에 있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역대상 16장 8-10절에 보면 “8 너희는 여호와께 감사하며 그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 행사를 만민 중에 알게 할지어다 9 그에게 노래하며 그를 찬양하며 그 모든 기사를 말할지어다 10 그 성호를 자랑하라 무릇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마음이 즐거울지로다”

우리가 하나님을 구하여 주님만을 경배하는 자리에 있을 때 진정한 기쁨의 요소가 있습니다. 이사야 56장 7-8절입니다.
“7 내가 그를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8 이스라엘의 쫓겨난 자를 모으는 주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이미 모은 본 백성 외에 또 모아 그에게 속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불러 모으시는 것과 만민이 기도하는 집에서 하나님을 마음껏 찬양하며 기뻐하며 주님을 구하는 기도가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5장에서 인용한 아모스9장 11-12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11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 그것들의 틈을 막으며 그 허물어진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12 그들이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이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렇게 말씀하심으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회복시키시고 잃은 영혼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일과 관련해서 하나님께 지속적으로 드려지는 예배, 하나님을 기뻐함으로 주 앞에 간구하는 기도가 매우 중요한 관련이 있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신약의 예배질서로서 다윗의 장막의 예배는 사실 우리가 이미 이러한 예배를 드리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성경이 명백하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그 예배가 바로 하늘의 예배로서 우리 예배의 모델이기 때문에 당연히 우리는 그러한 예배를 드리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거기서 너무나 멀어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예배가 그것이 주일예배이든, 낮 예배이든, 집회 예배이든 다윗의 장막의 예배가 되기를 당연히 추구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드릴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말세지말을 당한 이때에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위하여 다윗의 장막을 더 세우시기를 원하시는데 그러한 다윗의 장막이 우리들 가운데 세워질 수 있도록 또 우리 가운데서 활성화되고 더 많은 예배와 경배와 하나님을 찾는 일이 될 수 있도록 우리들이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추구하고 나아가는 가운데 그 다윗의 장막을 통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의 임재가 더욱 임하고 하나님의 부흥이 예비되고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쓰임 받는 그러한 축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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