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성 파수
느7:1-7
교회성장학자들이 하는 말 중에 “ 교회 부흥 후의 고갈현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큰일을 행하고 난 뒤에 긴장을 풀고 있으면 쓰러질 위험이 아주 크다는 말 아닙니까?
교회에서도 큰 행사를 치르고 나면 방심하기가 쉽고, 개인도 나름 은혜를 받고 난 후 시험에 빠지는 경우가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 대표적인 예가 성경 열왕기상18장에 나오는 선지자 엘리야입니다.
엘리야는 바알 숭배가 극심하던 아합 왕 때 활동하던 선지자로 3년 동안 극심한 가뭄가운데 450명의 바알선지자, 400명의 아세라 선지자과 누가 참 신인가의 대결에서 하늘에서 불을 내려 하나님이 참 신이심을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알게 하였고, 또 3년 동안 비가 오지 않던 이스라엘 땅에 비를 내리게 한 사람입니다.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랬던 엘리야가 그 다음 장에서 이세벨이 “저거 안 되겠다 죽여 버려야 겠다”는 그 한 마디에 여지없이 무너지진 것이 또한 엘리야입니다.
왕상19:4을 보세요.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나님 앞에서 죽고 싶다는 겁니다. 하나님 나 좀 죽여 달라는 겁니다.
여러분은 이 말이 이해가 되시나요?
열왕기상 18장에서 그 어마어마한 일을 이루었던 엘리야가 그 다음 장인 19장에서 여지없이 무너지는 이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은 아닌가요?
그래서 우리는 다른 넘어진 사람들을 보면서 비판, 판단 후욕할 필요가 없어요.
우리도 언제 던지 넘어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은 다 넘어져도 난 안 넘어져~~ 이거 대단히 위험한 것입니다.
나도 넘어질 수 있고, 배신할 수 있다는 사실, 이것을 인정하고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나는 다되었다. 이만 하면 괜찮지.. 나는 잘 안다. 이런 분들이 항상 교회 안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런 분에게 성경은 권면합니다.
고전10:12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여러분! 느헤미야가 바벨론에서 돌아와 예루살렘 거민과 함께 이루어 놓은 것이 무엇입니까? 무너진 성벽을 다시 재건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거민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외부와 내부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드디어 52일 만에 예루살렘 성벽이 다시 재건됩니다.
그러나 이제 더 중요한 일이 남았습니다. 그 성을 지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벽을 쌓는 것 중요하지만 쌓은 성을 잘 지키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당 건물을 잘 지었습니다. 조직도 있고, 프로그램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 모든 것들을 활용하고 운용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없으면 이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진짜 깨어있는 교회는 사람이게 모든 관심을 쏟기 마렵입니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건물에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느 도시 어느 지역을 가도 예배당 건물이 잘 지어져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 안을 들여다보면 어떻습니까? 교회는 텅텅 비어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건물만 잘 지어 놓으면 사람들이 몰려오리라 생각합니다. 한 때 그러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 교회는 사람을 세우는데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의 어디에 관심이 있습니까? 자동차, 외제차, 옷, 먹을 것, 이 땅에 것에 관심을 두고 있다면 우리는 아직 영직으로 어리다는 것을 인정해야합니다.
포도나무교회도 200명이 넘는 리더들이 있습니다.
리더는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까? 보고만 받는 것이 리더 인가요?
리더는 성도를 만드는 사람이다.
오이코스리더는 단순히 예배를 인도하는 정도로 제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공부를 가르치는 정도로 리더의 하는 일을 제안하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리더는 성도를 만드는 사람입니다.
성도를 만드는 사람이 진정한 리더입니다.
중요한 애기 아닙니까?
만약 제가 설교만 하는 목사라면 엉터리 목사, 삯꾼 목사입니다.
목사는 설교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목사는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한 영혼, 한 영혼을 붙들고 씨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해산의 고통이 있어야 합니다. (옥한흠 목사 한 영혼 사랑)
오늘 느헤미야 7장은 성경의 초점이 성벽에서 사람으로 옮겨갑니다.
성벽을 다 재건했으니 이제 되었다고 안일함에 빠지지 않고 그 성을 어떻게 지켜 나가고 있는가를 느헤미야 7장에서 보여줍니다.
느헤미야 7장을 통하여 느헤미야가 성벽을 재건하고 어떻게 파수 하였는가를 살펴보고자합니다.
1. 느헤미야가 성벽 재건을 마치고 난 다음에 제일 먼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 사람들을 세웁니다.
사람들을 세우는데 어떤 사람들을 세우는가?
느7:1 “성벽이 건축되매 문짝을 달고 문지기와 노래하는 자들과 레위 사람들을 세운 후에”
여러분 문지기와 노래하는 자들과 레위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성전 봉자들입니다.
느헤미야는 성벽이 완공되기가 무섭게 이 사람들부터 세웠습니다.
느헤미야는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할 때에도 어디서부터 세우기 시작했습니까?
북쪽에 있는 양문부터 세웠습니다.
양문이란?
무슨 말입니까? 느헤미야의 개혁이 예배의 회복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말입니다.
이제 성벽재건을 모두 마치고 난 뒤에 일꾼을 세울 때도 누구부터 세웁니까?
하나님의 성전에서 봉사할 문지기와 노래하는 이와 레위인 부터 세웁니다.
오늘 우리 한사람 한 사람이 주님의 피 값으로 세운 성전 된 자신을 잘 파수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교회를 잘 파수해야 합니다.
어떻게 파수 합니까?
교회가 하나님 중심적 삶의 성도들이 더 많이 세워져야 합니다.
그럴 때 교회가 든든히 세워져 갑니다.
하나님 중심적 삶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중심적 삶의 예
엘리사 적군 아람이 전쟁만 하면 엘리사 때문에 패하는 겁니다. 그러다 어느 날 아람 왕이 이거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엘리사를 잡으려고 대군을 이끌고 공격함 이러한 상황인데 아침에 엘리사의 사환 거하시가 아침에 우연히 주변을 살펴보니 기절할 일이 벌어진 겁니다. 아람 군대가 엘리사 집 주위를 빼곡하게 에워싸고 있는 겁니다.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혼비백산해가지고 엘리사 선지자에게 달려갑니다. 그런데 엘리사의 모습은 환경과 상관없이 너무나 태연한 겁니다. 이게 어떻게 된 것인가? 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열왕기하6:15
왕하6:15 하나님의 사람의 사환이 일찍이 일어나서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읍을 에워쌌는지라 그의 사환이 엘리사에게 말하되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하니 -> 탄식이 묻어남
여기에 대한 엘리사의 대답
6:16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6:17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 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여러분 지금 어떤 상황인가 이해가 되시죠?
저는 이 본문을 보면서 이게 바로 지도자다는 생각을 합니다.
지도자는 자기를 따르는 평범한 사람들이 못 보는 그 무엇을 볼 줄 아는 눈을 가진 사람 이게 지도자라고 생각합니다. 영적인 지도자는 더 말할 것이 없어요.
목사의 역할이 뭡니까?
우리 성도들을 보면 가슴이 아파요.
성도들의 모습을 보면 마치 게하시가 본 것처럼 온 사방에 대군이 자기를 에워싸고 있는 온 사방에 적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에워싸고 있는 이런 난감한 상황을 날마다 경험하는 게 우리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아닙니까?
목사님 이혼 도장을 찍었습니다.
자녀가 가출을 했습니다.
직장을 내려놨습니다.
병원에서 조직 검사를 했습니다.
어떠하면 좋습니까? 하루가 멀다 하고 이러한 말들이 들립니다.
이럴 때 목사인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떤 분이 사업에 어려움이 있다고 하면 이리로 오세요. 하고 금고문 열고 10억 정도 주면서 이거면 될까요? 목사가 이런 일을 하는 겁니까? 아니에요. 아무것도 해 드릴께 없는 게 저에요.
이럴 때 목회자가 하는 일이 뭡니까?
게하시처럼 영적인 눈이 열리지 않아서 눈에 보이는 현실만 보고 마음이 무너져 절망하는 그들에게 영적인 눈을 열어 하나님을 보게 하는 것이 목사가 해야 할 일이에요.
자기가 먼저 그 은혜를 경험하고 자기가 먼저 영안이 열려서 하나님이 일하신 그것을 선포하고 가르쳐 주는 역할이 목사에요.
이것을 하지 않는 것이 바로 목사가 타락한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 중심적 삶이 무엇입니까?
게하시처럼 영적인 눈이 열리지 않아서 눈에 보이는 현실만 보고 마음이 무너져 절망하는 현실에서 우리의 눈을 열어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는 것 아닌가요?
교회가 어떻게 이 세속화에서부터 파수할 수 있습니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중심적 삶으로 게하시처럼 영적인 눈이 열리지 않아서 눈에 보이는 현실만 보고 마음이 무너져 절망하는 현실에서 우리의 눈을 열어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이렇게 하나님 중심적 삶에서 가장 먼저 예배가 회복되기를 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을 열어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기 위해 중요한 것 -> 예배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이, 자녀들이 왜 무너지는 줄 아세요?
가장 중요한 예배가 무너져서 그래요.
삼상2:17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
우리는 자녀들을 세우는 것 -> 공부 더하는 것이 아님, 학원 한군데 더 보내는 것이 아님
우리 자녀들을 예배자로 세워야 합니다.
왜 일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 가운데 강림하시기 때문입니다.
(출20:24)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
복: 바라크
복의 핵심 -> 함께하는 복
동물의 세계 -> 사자가 사냥할 때 -> 어미에게서 떨어지게 만듬
도가니 영화 -> 부모가 없는 아이를 건드림
부모가 없으니 수치를 당함.
그런데 예배가 회복될 때 하나님께서 그 곳에 강림하셔서 복을 주시겠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겠다는 겁니다.
삿6:34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시니
“임하시니”
헬, '라바쉬'는 '옷을 입히다'라는 뜻을 지닌다.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의 영이 기드온을 옷을 입히시니
“임하시니”를 헬라어 70인경에서 어떻게 번역했는가하면 엔 두나무로 번역
기도온처럼 나약한 사람에게 엔 두나무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니까 그 임한 사건 자체로서 기드온이 다이나마이트와 같은 강력한 강함이 부어지더라는 겁니다.
그럼 언제 하나님의 영이 부어질까요? 바로 우리의 예배 가운데 임하셔서 하나님께서 옷 입혀 주신다는 겁니다.
여러분 오늘 세상이 어떤가요?
창6: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이것이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아닌가요?
이런 죄악의 폭우가 쏟아지는 세상에 우리 성도들이 살고 우리 자녀들이 사는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달랑 비닐우산 하나 손에 들려 보내는 것이 전부인데 어찌 그 죄악의 물들이 옷에 젖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들이 매 주일 교회에 나와서 예배의 기쁨을 누리고 하나님께서 입혀주시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기드온에게 임한 하나님의 영광이 임할 때 다시 싸워서 이길 힘을 예배 중에 얻게 되는 것입니다.
겁쟁이 기도온에게 임한 하나님의 영이 오늘 우리의 예배가운데 임할 줄 믿습니다.
예배가 능력입니다.
예배자를 세움
2.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세움
이제 수산 궁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되자 느헤미야는 자신을 대신해서 예루살렘을 다스릴 두 명의 지도자를 세웁니다.
느7:2 내 아우 하나니와 영문의 관원 하나냐가 함께 예루살렘을 다스리게 하였는데 하나냐는 충성스러운 사람이요 하나님을 경외함이 무리 중에서 뛰어난 자라
많은 경우 사람을 세울 때 무엇을 보고 세웁니까?
그 사람의 경력, 이력, 스펙에 뛰어난 것을 보고 세우지 않습니까?
그런데 느헤미야는 그렇게 세우지 않았습니다.
두 명의 지도자 중 하나는 느헤미야의 동생이고 또 하나는 하나냐라는 관원이었습니다. 하나니에 대해서는 동생이라서 그런지 특별한 설명이 없는 반면 하나냐에 대해서는 “충성스러운 사람이요 하나님을 경외함이 무리 중에서 뛰어난 자라”고 그 인물의 됨됨이를 요약적으로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 경외함, 뛰어난 자
경외 [동사] 공경하면서 두려워하다.
히) 야레: 두려워하다,
헬) 프호보스
경외함(하나님을 두려워 함)
경외함에 뛰어난 자
3. 비전을 따라 움직임
그 다음에 한 명 더 살펴볼 인물이 있습니다. 느헤미야입니다.
느7:4 그 성읍은 광대하고 그 주민은 적으며 가옥은 미처 건축하지 못하였음이니라
이 말씀은 약간 설명이 필요합니다.
느헤미야가 성벽을 재건할 때 예루살렘은 황무지였습니다. 인구가 많지 않았다는 애기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성을 굳이 성을 이렇게 크게 지을 필요가거 없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을 크게 지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느헤미야보다 앞서 일한 선지자가 스가랴인데 스가랴 8:3-5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대해 약속을 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머지않아 예루살렘 성이 융성해질 것이라는 약속이었습니다.
스8:3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시온에 돌아와 예루살렘 가운데에 거하리니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 만군의 여호와의 산은 성산이라 일컫게 되리라 8:4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예루살렘 길거리에 늙은 남자들과 늙은 여자들이 다시 앉을 것이라 다 나이가 많으므로 저마다 손에 지팡이를 잡을 것이요 8:5 그 성읍 거리에 소년과 소녀들이 가득하여 거기에서 뛰놀리라
“그 성읍 거리에 소년과 소녀들이 가득하여 거기에서 뛰놀리라”
다시 말해 예루살렘에 큰 부흥이 있을 것이며 그 곳이 사람들로 꽉 차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느헤미야는 이 약속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성벽을 크게 건설했던 것입니다.
현실 상황에 맞게 적당한 크기로 재건할 수도 있었지만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이 융성해질 그 날을 위해 훨씬 더 큰 성벽을 준비했습니다. 이 사실이 중요합니다. 거듭 말하지만 느헤미야가 지은 성벽은 현실을 근거로 재건한 성벽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과 비전을 근거로 세운 성벽이었습니다.
결론
오늘의 교회 건물은 화려하게 잘 지어져 있음. 그런데 교회가 무너져 가고 있음
이단의 침투
비전을 보지 못한 이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배자들로 세워져야 함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 회복 (하나님을 경외함에 뛰어나야함)
하나님의 비전을 보고 믿음으로 순종
1.문지기를 세웠다.
여러분 문은 역할이 무엇입니까?
들어와서는 안 될 사람을 막고 들어와야 할 사람을 영접하는 것이 문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를 보면 이것이 거꾸로 되어서 들어와야 할 사람은 문턱을 높여서 못 들어 오게 하고 들어와서는 안 될 사람들이 많이 들어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교회가 문지기 역할을 잘못해서 책망을 많이 받음
계2:12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2:13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2:14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2:15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버가모교회 문지기가 잘못함으로 니골라당을 넣어줌 -> 예수님께서 책망하심
뭐라고 책망하시는가? 쫓아내지 않으면 촛대를 옮기겠다.
일반적으로 니골라당의 기원에 대해서는 두 가지 차원에서 이해된다.
(1)역사적으로 이는 사도행전에 언급된(행6:5) 일곱 집사 가운데 한 사람인 니골라가 타락하여 만든 이단이라고 추측한다(Irenaeus, Tertullian, Alford).
(2)언어적으로 '니골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니콜라이톤'은 '백성'을 뜻하는 '라오스'와 ‘지배하다’ '없애다' 혹은 '정복하다'를 의미하는 '니카오'의 합성어로 하나님의 백성을 파괴하는 거짓 무리들로 추측한다.
발람은 히브리 역사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불륜과 죄악으로 이끄는 악한 사람의 상징이 되었다. 발람도 두 히브리어 단어인 bela(지배하다)와 ha'am(백성)에서 유래될 수 있다. 그러므로 니골라와 발람은 같은 이름의 헬라어와 히브리어로써 어느 편이나 백성들에게 영향을 주어 그들을 이단의 노예가 되게 하는 악한 교사를 묘사하는 말이다.
니골라당의 사상: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자유를 얻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제제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함.
술을 먹어도, 담배를 피워도, 주일도, 십일조도 안 해도 괜찮다는 겁니다.
어차피 육신은 죄악 덩어리이기 때문에 영혼만 깨끗하면 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죄씻음 받고 자유를 얻었기 때문에 육신은 어차피 죄 덩어리이기 때문에 어떻게 하던 상관이 없다는 극단의 자유주의입니다.
여기서 반율법주의가 나오는데 이러한 반율법주의가 오늘날 교회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았기 때문에 어떻게 살아가든, 어떤 행동을 하든 상관이 없다는 주장합니다. 성경을 자기 생각대로 믿음
성경을 내 생각대로 믿으려는 것
자기 식으로 해석함
자기 편리대로 갔다 붙임
니골라당: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려는 마음 니골라당이 살며시 우리 속에 들어와서 그래요
설교를 들으면 아니 어떻게 그렇게 살아 -> 니골라당의 마음이 들어와서 그래요.
사업을 해도 적당히 타협
오늘 여러분을 지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버가모 교회에 보낸 편지는 특별히 그들은 백성들을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도록 하며, 음란한 행위를 하도록 유혹한다고 책망했다.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정은(행 15:28; 행 15:29) 이방인들이 기독교 공동체에 들어오는 두가지 조건을 정했는데 그것은 우상의 제물과 음행을 삼가는 것이었다. 이런 규칙을 바로 니골라당이 범하였던 것이다.|그들은 바울이 경고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육신을 위한 기회로 삼는 자들이었다(갈 5:13). 이런 잘못된 행위의 유혹
이 그리스도인들이 살고 있었던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이 일반화된 이교도 사회에 많이 있었다. 그리고 이방사회에서는 결혼 외의 성관계자가 완전히 받아들여졌다. 니골라당은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그리이스의 영향을 받은 로마의 이교도 사회와 타협을 시도했다. 의심할 나위없이 이러한 교훈을 가장 잘 용납한 사람들은 개심하기 전에 자기들이 속해있던 문화로부터 격리함으로서 최상의 위치를 상실할만한 형세에 있었던 상류계급이었다.|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와 이세벨을 따르는 자(20절)는 매우 같은 종류의 사람들이다. 이는 니골라당도 이와 유사한 종류의 사람들임을 나타낸다. 이는 확증할 수는 없지만, 동일하지는 않으나 이 세 무리가 서로 관련된 사실을 살펴볼 때에 가장 합리적 해석으로 고려되기 때문이다. 니골라당은 믿음을 파괴하려고 하는 공개적인 외부의 적은 아니다. 이 거짓된 교사들의 '그들은 기독교를 파괴하려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가 진보적, 현대적으로 발전된 양상으로 보인다'고 주장하였다(바클레이). 니골라당은 내부에서 파괴를 시도하는 방심할 수 없는 무리였다.|니골라당의 교리는 이원론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아마 인간의 몸은 어쨌든 악하고, 영혼은 선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그의 육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행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육신은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영혼은 그가 행한 것에 관계없는 은혜와 용서를 선물로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와 같이 그들은 세상과 타협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이었다. 계시록 저자는 그들을 가장 위험한 존재라고 비판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교훈의 귀결은 기독교가 세상을 변화시킨다기 보다는, 기독교가 세상을 본받아 가는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 유세비우스는 이 종파가 오래가지 못했다는 것과 그들에 대한 우리들의 지식은 계시록에 나타난 언급 외에는 찾아볼 수 없음을 지적했다.|(참조: Leon Morris; pictorial Encyclopedia of the Bible).
2.두아디라교회
계2: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오늘 신학생이 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고 한 교회를 개척하고 어느 정도 자립하는 교회를 세워가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수년 또는 수십 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목회자와 성도들의 눈물의 기도와 땀과 헌신을 통하여 교회가 세워져 갑니다. 그런데 이러한 교회가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것을 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바로 이단의 침투입니다.
통계청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인구 중 860만 명이 개신교인데 그 중 200만 명이 이단 사이비에 빠져 있다고 합니다. 요즘도 한 달에 만 명이 이단에 넘어간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목회자들이 그 심각성을 피부로 느끼지 못한다는 겁니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단교주들은 자기들은 정통교회 교인들을 빼내기 위해 ‘전시체재’라고 하는데, 정통교회는 ‘수면체제’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교회를 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교회를 지키고 파수하는 것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15강 초막절의 회복 (0) | 2013.1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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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강 말씀 부흥 운동 (0) | 2013.12.21 |
12강 시험과 극복 (0) | 2013.12.21 |
11강 경외함 (느5:14-18) (0) | 2013.12.21 |
10강 원망(2)(느5:1) (0) | 2013.12.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