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우리를 구속하신 복
우리를 구속하신 복 즉, 죄사함의 복이 있습니다
에베소서 1장 7절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들을 다시 정리해 드립니다. 사람들은 ‘복’하면 세상적인 복을 가장 먼저 떠올리지만, 하나님께서는 ‘복’하면 영적인 복을 먼저 떠올리십니다. 하나님은 만복의 근원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복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면 모든 복을 소유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이미 주신 복들을 우리들의 삶 속에서 얼마나 누릴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삶의 영역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얼마만큼 소유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할수록 우리들은 하나님의 모든 복을 우리 삶에서 더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길은 우리의 모든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사는 길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모든 것으로 산다는 말은 우리들의 모든 생애 가운데 예수님을 개인적인 주인으로 인정하고 그분의 주권 아래 들어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이미 주신 복은 만세전에 우리를 예정 하시고 택하신 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목적은 우리를 하나님의 목적아래 두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를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살게하심으로 구체화 됩니다. 우리를 예정하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을 삼고자 하심이며,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누리게 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목적은 우리를 하나님의 목적아래 두시기 위함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하시기 위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이 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이미 주신 복 중에서 7절의 말씀처럼 「우리를 구속하신 복」에 대해 알아 보겠습니다. 우선 구속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옛날 노예제도 문화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구속이란 값을 치른 후, 억압에서 자유롭게 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초대교회의 시절에는 노예제도가 성행하고 있었습니다. 이 제도 하에서 노예는 자기 스스로를 자유케할 수 없습니다. 주인의 처분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상황입니다. 이렇게 억압 가운데 있는 신분이 노예입니다. 그런데 노예가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사람이 노예를 돈을 주고 사서 자유롭게 풀어주면 되는 방법입니다. 이렇게 되기만 하면 그 노예는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돈을 주고 노예를 사서 풀어주는 방법을 ‘구속’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구속이란 단어의 뜻은 값을 치루고 억압에서 자유롭게 해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 죄의 노예였습니다. 에베소서 2장 1절부터 2절입니다.
①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②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靈)이라
죄의 노예로 살면서 죄와 허물 가운데에서 죽었던 우리들을 하나님께서는 살려 주셨습니다. 죄와 허물 가운데 살던 삶은 이 세상의 풍속을 좇던 삶이었습니다. 보십시오. 세상 사람들은 지금도 여전히 유행따라 삽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유행따라 사는 삶이 좀 심한 편입니다. 이 구절들은 유행따라 사는 삶을 사탄을 좇아 사는 삶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 삶의 배후에는 사탄에게서 나온 가치관이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3절입니다.
③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④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불신자들에게 전도하면 이런 말을 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전 구속받기 싫어요. 누가 날 간섭하는 게 딱 질색이예요.” 그들 말인즉은, 예수믿는 것이 곧 억압이라는 말입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불신자들의 삶이란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마음과 생각이 원하는대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법이라고 하는 테두리 안에서 자신이 원하는 바대로 살면 그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으면 제약이 따를 것처럼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또 실제로 교회를 다니려면 시간을 투자해야 하니까 구속받는 것처럼 여깁니다. 주일날 예배라도 갈라치면 늦잠을 자지못하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이렇게 마음과 생각이 원하는 바대로 살아가는 삶을 노예된 삶이라고 말입니다. 성경은 그 삶을 죄의 노예된 삶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뒤에는 사탄이 있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마음과 생각이 원하는대로 살아가는 삶을 성경은 ‘노예된 삶’이라고 합니다 |
어떤 분이 있었습니다. 이 분은 부모님에게 대한 미움이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의 잘못으로 역경을 거치는 가운데, 부모에 대한 상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상처들은 잘 치유되지 않은 채로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기도사역을 받은 후 그 미움들이 깨끗이 치유되었다고 합니다. 그분의 말은, 그날 이후로 놀라운 자유가 자기에게 찾아왔다고 합니다. 그분은 부모에 대한 미움에 노예된 상태로 살아온 셈입니다. 이처럼 노예된 삶이란 무언가에 눌려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우리들은 우리의 육신이 원하는대로, 자기 생각대로, 자기 소신대로 살아가면 그것이 곧 자유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그런 삶이야말로 죄 가운데에서 본질상 진노 아래 머물며 사는 삶입니다. 요한복음은 이미 심판이 그 위에 임했노라고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3장 18절입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여러분, 알다시피 사건이 대법원까지 올라가서 형이 확정되면 더 이상의 구제책이 없게됩니다. 형만 집행이 안된 상태이지 형을 이미 살기 시작한 셈입니다. 이처럼 죄 가운데 사는 삶이란 형이 확정된 것과도 같은 삶입니다. 집행만 남아 있을뿐입니다. 예를 들어, 사형이 확정된 사형수는 법무부 장관의 인증만 있으면 바로 사형이 집행됩니다. 그런데 형이 집행되기 전에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대통령의 특별사면의 길밖에 없습니다.
죄가 우리에게 얼마나 커다란 속박인지는 죄 가운데 살 때에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죄를 벗어나려고 몸부림쳐 보면 그 억압이 얼마나 컸었는지를 알게됩니다. |
성경이 “이미 심판이 우리에게 임했다” 라고 말하는 것은 욕망과 생각이 원하는 바대로 살면서, 하나님의 법도 밖에서 살아갈 때 죄가운데 있기에, 집행만 되지 않았을뿐이지, 이미 심판을 받은 것과 다름없다는 의미입니다. 언제든지 하나님의 사인만 있으면 형은 집행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죄 가운데에서의 삶을 가리켜 “이미 심판이 임한 삶”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자유하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이미 심판이 임한 상태에 놓여있는 겁니다. 스스로 자유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죄를 먹고 마시니까 하는 이야기입니다. 실제를 모릅니다. 성경은 죄 가운데에서의 삶을 가리켜 이미 심판이 임한 삶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자유하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이미 심판이 임한 상태에 놓여있는 겁니다.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특별사면뿐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통한 죄사함의 방법입니다.
죄가 우리에게 얼마나 커다란 속박인지는 죄 가운데 살 때에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죄를 벗어나려고 몸부림쳐 보면 그 억압이 얼마나 컸었는지를 알게됩니다. 죄로부터 돌이켜볼려고 하면 그 속박이 참으로 컸었다고 알게 됩니다. 아까 말씀드린 어떤 분의 부모에 미움만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잘 끊어지지가 않습니다. 솔직히 말해봅시다. 한 연속극을 두세번만 보아도 스토리가 어떻게 진해되고 있는지 궁금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연속극을 보지 않으려고 노력해 보면 그 속박이 얼마나 큰지를 알게 됩니다. 잘 안됩니다. 하찮은 연속극이라도 끊을라치면 잘 끊어지지 않는 법입니다. 성경은 죄 가운데에서의 삶을 가리켜 이미 심판이 임한 삶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자유하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이미 심판이 임한 상태에 놓여있는 겁니다. 죄의 속박이 이렇습니다.
죄의 속박이 얼마나 큰가하는 것은 죄 가운데 먹고 살 때에는 모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임하여 있음에도 모릅니다. 자유롭게만 여겨집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진노를 이야기해도 실감나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죄를 이길려고 해보면 그것이 정말 속박이었으며, 그뒤에 사탄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이길 수도 없고 깨달을 수도 없었다는 것을 알게됩니다. 주님의 도움으로 돌이켜볼 때에만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속박이었는가를 깨닫게 됩니다.
이처럼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구원하지 못할 억압 가운데 있습니다. 죄와 사망, 그리고 사탄의 억압 가운데 있습니다. 이것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인간의 방법으로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을 찾지 못합니다. 어떤 왕도, 통치자도, 권력가도 이길 수 없을뿐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서야만 합니다. 언젠가 죄와 사망의 속박에서 벗어나보고자 몸부림쳐 보면서 그 억압이 얼마나 큰지를 보게 됩니다. 자신이 자신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됩니다. 이렇게 스스로 구원하지 못하는 노예된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속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노예시장에서 노예를 사서 자유케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구속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속하심으로 구속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구속을 위해서 오시되 대속물로 오셨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입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구속은 영어로 Ransume 입니다. 우리를 사시기 위하여 자신이 값을 치루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자신의 생명으로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이것이 대속의 뜻입니다. 대속이란 구속의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즉 주님께서는 구속을 대속으로 이루셨습니다. 우리를 구속하시되 자신의 목숨을 주면서 대속하셨습니다. 단순한 구속이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은 우리 모두의 죄의 값을 지시고 대속물로 자기의 생명을 치루기 위함이었습니다. 대속물로 주님을 주신 것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며 생명은 생명으로만 대속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생명으로 대속하기 위해 주님께서는 자기 목숨을 십자가에서 내어 놓으셔야만 했습니다. 이 대속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입니다. 말씀드린대로 이 복은 세상의 어떤 물질적인 복과 비교할 수 없는 복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자신을 대속물로주심으로 우리를 사셔서 좌와 사탄의 노예 가운데 살면서 본질상 진노아래 있었던 우리들을 값없이 십자가의 보혈로 용서하시고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 사건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우리의 삶 속에 그분을 주인으로 모시며 믿음으로 우리의 삶을 그분에게 의탁하면 이루어집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복입니까.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의 은혜를 너무나 당연히 여기는 데 있습니다 |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너무나 많은 경우 값없이 여길 때가 많습니다. 내일 당장 먹을 것이 없어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속의 은혜, 죄사함의 은혜만 생각하더라도 붕붕 뛰면서 감사하며 기뻐해야 합니다. 이래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 은혜를 조금이라도 깨닫는다면 그래야 합니다. 이 구속은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에베소서 1장 7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우리가 구원받는 길은 이 말씀에 의한 방법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종교적인 노력으로 되지 않습니다. 그 방법은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의 방법에 따라 되어졌습니다. 구속은 노력으로 되질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경우,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자기의 종교적인 노력으로 살려고 하는 일이 많습니다. 노력을 하면 할수록 그것은 타락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그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들을 받을 수 있노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놀라운 은혜를 값없이 받지만 그 은혜는 값싼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사실이 있습니다. 이 놀라운 은혜들을 값없이 받되, 이 은혜가 값싼 것들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 은혜들은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은혜의 풍성함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이 은혜들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하여 자기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들이 우리에게 값없이 주어지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종의 형체를 가져 인간으로 오셔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셔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대속은 절대로 값싼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되어진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5절입니다.
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⑥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⑦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⑧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⑨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⑩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⑪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보십시오. 우리들을 구속하시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값비싼 대가가 지불되어야만 했습니다. 구약에서 죄를 사하는 제사를 지낼 때 짐승을 잡아 반드시 피를 흘리게 한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죄사함은 생명을 대속물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생명으로 대속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값없이 구속을 받되 절대로 값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크신 은혜의 선물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은혜의 풍성함을 안다면 우리들은 진실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나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 때문에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확신을 가지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로마서 5장 8절에서 11절입니다.
⑧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⑨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⑩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⑪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우리를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사건만큼,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우리의 지혜로는 다 깨달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선명하게 나타나는 사건은 없습니다. 십자가야말로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사랑을 오늘도 우리에게 증거해 주고 있는 겁니다. 십자가야말로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보여주고 있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사건만큼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선명하게 나타내는 사건은 더 이상 없습니다
우리는 자주 하나님의 이 큰 은혜를 잊어버리고 너무나도 눈에 보이는 환경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판단할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기도했던 것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생각하기를 “야, 하나님이 나를 엄청나게 사랑하시는구나. 하나님 정말정말 감사합니다”합니다. 그러다가 무언가가 꼬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아, 하나님이 날 사랑하지 않으시는가 보다.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신걸까. 왜 나만 차별 대우하시는걸까?” 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긍휼과 은혜의 풍성함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증명되었습니다. 환경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소홀히 여기거나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판단하는 것은 너무나 하나님을 몰라서 하는 행위입니다. 이는 불신입니다.
헨리 블랙가비 목사님의 경험담을 소개합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에 수록된 내용입니다.
캐리의 암
제 아이들 중 한 녀석은 자기 맘대로 해주지 않으면, “아빠는 나를 사랑하지 않지요?” 라고 말하지만 제 사랑엔 변함이 없었습니다. 단지 그 아이에 대한 저의 사랑이 그 아이가 원하는 방법과는 다르게 표현되었을 뿐입니다. 우리의 외동딸 캐리가 열여섯살 때, 암에 걸려 화학요법과 방사선치료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캐리가 고통받는 것을 보면서 함께 고통을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와 같은 경험을 할 때 왜 하나님이 더 이상 사랑해 주시지 않느냐고 불평을 합니다. 캐리의 투병은 우리에게 절망적인 경험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의 사랑이 변했습니까? 아니지요.
이런 상황에 처했을 때, 하나님께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여달라고 부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여쭈어 보아야 했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모슨 종류의 질문을 했지만, “주님, 당신은 아마 저를 사랑하지 않으시는가 보군요” 라고 말한 적은 없었습니다.
때때로 저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딸 아이 뒤에 있는 십자가를 보았습니다. “아버지, 환경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저를 향한 당신의 사랑은 십자가에서 이미 다 해결되었습니다. 저에게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고 또한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와의 사랑의 관계가 어려울 때 고비를 넘기도록 우리를 지켜주었습니다.
환경이 어떻든지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캐리가 암에 걸리기 훨씬 전부터 제가 결심한 게 있는데, 그것은 어떤 환경이 닥치든지 십자가의 공로를 생각지 않고는 그 환경을 보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은 저에 대한 그 분의 사랑을 영원토록 확신시켜 주셨습니다. 십자가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야말로 하나님 사랑의 전체적이고, 완전하며, 최종적인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결단코 의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경험하고 알고 싶어하기 전에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우선 확실하게 해놓으십시오. 하나님은 사랑의 관계를 위해서 당신을 창조하셨습니다. 그 분은 당신을 그 관계로 불러들이려고 노력하십니다. 하나님과 당신의 모든 교제는 그 분의 당신에 대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완전한 사랑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자신을 표현하신다면, 하나님은 하나님이기를 멈추셔야 할 것입니다.
헨리 블랙가비 목사님은 하나님께 나아가되 하나님이 성경이 말하는 그대로의 하나님임을 신뢰하고 나아갔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근거로 환경을 보고 있습니다. 말은 하기가 쉽지만 환경이 어려움에 처하면 우리들은 너무나도 쉽게 십자가의 사랑을 잊어버립니다. 믿음으로 주님의 크신 사랑을 신뢰하지 않는 것입니다. 헨리 블랙가비 목사님은 자식의 암을 보지 않고 주님의 십자가를 먼저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결국에 가서는 아이를 치유하실뿐만 아니라 놀라운 일들을 이루셨다고 합니다. 기도의 불길이 지펴지는 계기가 마련되었다고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 외에 신뢰할 것이 없을 때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믿음은 하나님 외에 신뢰할 것이 없을 때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에게 주신 구속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은혜의 풍성함은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이미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은혜를 토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의 그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2절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만일, 여러분 중에 누가 자녀가 결혼할 때 50평짜리 아파트를 사주었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50평 아파트를 사준 사람이 자녀에게 양말 몇 켤레 사주는 것은 정말 아무 것도 아닐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예수님을 주시고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50평 아파트를 사주는 것에 비유한다면,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것에 비유할 수 있는 양말 몇 켤레 사주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주신 분이 무엇을 아끼시겠습니까? 로마서 8장 32절은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우리를 위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은혜를 바라보며 나아가야 합니다. 성경은 계속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라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합니다만 환경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지 못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예수를 소유하는 만큼 구속의 복을 더 누릴 수 있습니다
아까 모든 하늘의 신령한 복은 예수 안에 있다고 했습니다. 구속 즉 죄사함 역시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영적인 복입니다. 그리고 이 복은 예수님을 소유할수록 더욱 누려질 것입니다. 물론 우리 모두는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죄사함을 받아가고 있으며, 죄사함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성경은 구원에 대해 언급할 때 세 가지 시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았노라. 구원을 받아가고 있다. 구원을 받을 것이다” 가 그것입니다.
구원파라는 이단이 있습니다. 「대한예수교 침례회」라는 교단명을 가지고 있기에 침례교회와 구분이 잘 되지 않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할 때 이미 죄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의 죄가 이미 다 용서받은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더 이상 회개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이미 다 용서를 받았기 때문이다.”
물론 부분적으로는 맞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이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죄들을 다 용서하십니다. 이것은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드리는 말씀부터 다릅니다. 예를 들어, 예수를 믿은 후에 죄를 지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죄는 예수님과 나와의 관계를 단절시킵니다. 관계의 단절은 하나님의 은혜가 흐르지 못하게 만듭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생명이 흐르는 관계라는 통로가 있습니다. 관계의 통로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수시로 흘러야만 우리가 살 수 있습니다. 이런 관계 안에서 은혜가 흘러야만 우리 삶 속에 승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죄를 지었을 때에는 회개해야만 용서를 받습니다. 회개하는 근거나 용서받는 근거는 예수님의 십자가뿐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 모두의 죄에 해당합니다. 이 교리는 구원파의 그것과 비슷한 것같지만 핵심적인 부분이 다릅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을 인하여 대속함을 받았을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소유할수록 구속의 은혜를 더욱 누릴 수 있습니다. 대속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더욱 알고 십자가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주님을 더욱 사랑하고 알기를 사모하면 죄를 이기는 승리를 더욱 경험합니다. 대속의 은혜를 깨닫는 가운데 주님과 더욱 친밀한 가운데 있고, 믿음으로 주님을 더욱 의지할수록 삶 속에서 죄를 이기는 승리를 더욱 많이 경험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할 때 주어진 복입니다.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으면서, 주님을 더욱 사모하면 죄와 세상을 이기는 경험을 더 많이 하게됩니다. 죄의 노예로 살던 우리들이 죄와 세상을 이기게 되는 삶을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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