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촌교회 구역연합예배(2006. 7. 21)
신앙의 본질
우리 신앙생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하나님의 다림줄입니다. 하나님의 다림줄은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구원을 얻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만을 개인적이고 실재적으로 믿음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그런데 구원을 위해 1년 동안 철야기도를 하고, 재산을 다 팔아 헌금을 드렸다고 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나요? 없지요
왜? 하나님의 기준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도 신앙의 전반적인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의 기준에 맞아야 의미가 있지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과의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예배를 드림에 있어서, 십일조, 헌금, 헌신, 충성, 기도(금식기도) 하나님의 기준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의도는 하나님의 다림줄에 똑바로 맞추어 세워진 교회다. 이때 그곳에 하나님의 모든 생명이 넘치며, 하나님과의 친밀함, 보호, 인도, 도우심,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 나라의 확장 등 모든 하나님의 생명이 넘치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의 다림줄에 꼭 맞추어 세워지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노아방주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도
노아방주 - 하나님의 기준 ->동력이 없고, 키가 없지만 하나님이 친히 동력이 되시고, 키가 되어주셨어요.
성막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도
이 하나님 아버지의 의도는 성막에도 잘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세의 성막이나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것은 하나님이 거하는 처소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막이나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처소로서 의도된 것이 아닙니다.
왕상8:27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
사66:1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하나님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성전삼고 거하시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막을 이스라엘 진 한 가운데 짓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또한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영광으로 임하시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그들 가운데 거하시며 운행하시기 원하십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의도를 보여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성막이건 성전이건 그것이 완성되었을 때 그곳에 영광으로 임하셨습니다.
출40:34-35 “34-그 후에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35-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왕상8:10-11 “10-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구름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하매 11-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인하여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
하나님께서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영광으로 임하셔서 거처 삼고 거하시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철저하게 하나님의 다림줄에 맞추어 세워져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성막이나 성전을 지을 때,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식양과 기준에 맞추어 짓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점을 지겨울 만큼 강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도 하나님의 백성들인 우리들 가운데 영광으로 임하시기 원하십니다. 우리들 가운데 거하시며 우리 가운데 행하시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인 것을 나타내시기 원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을 위해 필수적인 요소는 우리가 철저하게 하나님의 다림줄 위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다림줄이 가리어질 수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 신앙이 타락하면 영적 분별력이 어두워지고 하나님의 다림줄이 가리어집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관점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신앙을 인간적인 관점에서 왜곡되게 이해하게 됩니다. 그 결과 나타나는 것이 신앙에 대한 그릇된 이해인 거짓 신앙체계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 믿는 것, 사랑하는 것)
이런 자들을 향하여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마7:21-23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다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불법 - 하나님의 기준에 맞지 않아다는 것입니다.
정리를 하고 지나가면
우리의 신앙의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기준에 맞추어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맞추어 세워질 때 그곳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으로 임하셔서 하나님의 모든 생명이 넘치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 보호, 인도, 도우심,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 나라의 확장 등 모든 하나님의 생명이 넘치게 됩니다.
우리 신앙의 가장 중요한 신앙의 A.B.C인 신앙의 핵심에 대하여 살펴보자합니다.
먼저 신앙생활이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1.신앙생활이 아닌 것
많은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종교생활을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주일성수, 십일조, 새벽기도, 성경 읽고, 전도, 기관에서 봉사하는 것, 즉 무엇을 하는가, 일에 집중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잘하면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바리새인들은 우리보다 훨씬 신앙생활을 잘했을 것입니다. 왜 그들은 철저하게 안식일을 지켰고,(침을 뱉고 발로 비비지도 않았음) 1주일에 하루는 금식하였으면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것을 직업으로 알았고, 십일조는 선물 받은 것에서도 했음, 구제...) 그런데 예수님의 평가는 무엇이었습니까? 요5장을 보면 ‘하나님을 알지도, 사랑하지도, 믿지도 않는다’ 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이사야 1장에서 선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든 절기를 철저하게 지켰습니다.(13-14절)
안식일은 말할 것도 없고, 월삭(매달 첫날) 모든 대회와 절기를 지켰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맥추감사절, 대강절, 사순절, 오순절 등과 같이 우리게 별로 알려지지 않는 절기까지 그들은 빼놓지 않고 철저하게 지켰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희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11절
무수한 제물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수양, 수송아지, 어린양, 숫염소 등 그들이 하나님께 드린 제물은 셀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또한 많은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이사야 58장이 의하면 그들은 정기적으로 온 백성이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예배(절기)와 헌금(희생)과 기도에 대해 하나님의 반응은 부정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모든 예배와 헌금에 신물이 났다고 말씀하셨으며, 그들이 기도하지만 듣지 않으시며, 그만은 의식을 행하였지만 하나님의 임재, 은혜, 보호하심은 거두어졌습니다. 심지어 그 모둔 의식들을 증오한다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그 모든 모임들과 예배들은 하나님의 마당만 밟고 돌아가는 것과 같은 헛된 예배에 불과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입니까? 그들에게는 의식은 가득했을지 모르지만 참 신앙생활인 신앙의 본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 반지
2.그럼 성경이 말하는 신앙생활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 신앙생활은 내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합니다.
우리가 결혼생활을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것을 결혼생활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결혼생활은 사랑하는 사람과 친밀한 교제가 결혼생활이듯 신앙생활 또한 하나님과 바른 관계, 즉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는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호세아 선지자는 호6:6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호6:6 “나는 인애(사랑)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또 요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우리가 부부가 ‘친밀하다’ 라고 할 때 서로를 알고, 사랑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과 친밀함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사랑하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을 아는 것
우리는 하나님에 관하여 알면 하나님을 안다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관하여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관하여 아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예) 피자 선전지
우리는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개인적이고, 실제적으로 경험적으로 알 때 하나님을 안다라고 하는 겁니다.
시편18:1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우리는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심을 압니다. (예:지갑의 돈)
나의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 - 부도위기에서 하나님의 필요를 채우기를 기다리느냐?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
엡1: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성령)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2)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면 주일성수하고, 십일조하고, 기도하고......그렇게 대답합니다. 여러분 만약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면 이사야 시대(사1장), 예레미야시대(렘6;20:시바에서 유향을 원방에서 향품을) 바리새인들은 우리보다 훨씬 하나님을 사랑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평가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사1:11-15
11.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15.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렘6:20 “시바에서 유향과 원방에서 향품을 내게로 가져옴은 어찜이뇨 나는 그들의 번제를 받지 아니하며 그들의 희생을 달게 여기지 않노라 ”
요5:42
42.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왜 이렇게 안식일과 모든 절기를 철저하게 지키고, 월삭, 대회를 지키고, 무수한 제물을 드리고, 온 백성이 금식기도를 하였으며, 한국에서 필리핀 까지 가는 먼 거리를 가서 유향과 향품을 구해서 하나님께 드리고, 구제, 십일조, 성경을 연구하고 암송하고...이렇게 철저하게 하였는데 하나님의 평가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 하였을까요?
그들 가운데 기복신앙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목적을 위한 수단이됨.
그러면 성경이 말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가?
한마디로 하나님이 나의 유일한 모든 것 되심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이 나의 유일한 목표요, 목적이요, 주님만이 나의 힘, 나의 반석, 나의 능력,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나의 자랑, 나의 의지, 내사는 이유, 내 항해의 바람,
예, 남편이 있는데 90%는 아내에게서 기쁨을 10%는 다른 여자에게서 기쁨을.. 허락하시겠어요?
이것을 모세에게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출33장에서 볼 수 있음. 모세는 하나님의 평가를 소중히 여김
출32장에 보면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더디 내려옴을 보고 금송아지를 만들고 섬김을 하나님께서 보시고 그들에게 진노하사 그들을 진멸하시고 모세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말씀하심 -> 모세의 기도로 뜻을 돌이켜 화를 내리지 않으심 -> 모세가 산에서 내려와 그 모습을 보고 돌판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림 -> 그리고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 레위 자손이 다 모세에게로 나아옴 ->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문에서 저 문으로 왕래하며 형제를, 친구를 이웃을 도륙하라 -> 그날에 삼천 명이 죽인바 됨 ->이튿날 모세가 여호와 앞에 서서 백성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으면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주옵소서하고 하나님 앞에 섬 -> 이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심 ->33장 1-
내가 너희에게 주마 약속한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라 내가 내사자를 앞서 보내어 가나안 사람, 아모리 사람, 헷 사람, 브리스 사람, 히위 사람,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고 너희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겠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않겠다 하심.
이 때 모세의 대답 33:15 “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세요.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한지 2년째 입니다. 그들이 먹는 것 만나(씨리얼), 목욕을 한번 못했어요, 옷, 신발을 갈아입지 못했어요, 이 광야에 비하면 가나안은 어떤 곳입니까? 두 사람이 포도송이를 막대기에 매고 올 정도로 풍요한 곳, 천국과 같은 곳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지금 뭐라고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친히 가시지 않으면 모세도 가지 않겠다는 겁니다.
모세에게는 목숨보다, 평안함 보다, 사역보다, 사람들의 평가보다, 많은 돈보다, 안락한 삶보다, 잘 먹고 사는 보다, 심지어 사역의 확장보다 하나님 자신을 더 소중히 여긴 겁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더 소중히 여긴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나의 모든 것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가운데 이러한 모세와 같은 자세를 몇 사람이나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소중하다고 말로는 다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가나안 땅이 더 소중하고, 사역의 성공이 더 소중하고, 사람의 평가가 더 소중하고, 평안한 삶이 더 소중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신앙생활은?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개인적이고, 실제적이며, 경험적으로 아는 것(예: 긍휼의 하나님)
그 하나님을 나의 모든 것 되심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에 들어갈 때 요14;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말씀과 같이 이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의중과, 뜻과, 길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2.주님의 행하심을 보고 온 삶으로 동참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에 있을 때 하나님의 앞서 가심을 우리게 보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과 의중, 의도, 마음, 길을 우리에게 보이십니다.
이때 우리가 믿음으로 그 일에 동참하는 것, 이것이 신앙생활이요,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요, 이것이 곧 헌신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신앙의 본질 가운데 머물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우리에게 보이시며 그때 우리가 믿음으로 그 일에 동참하게 될 때, 믿음으로 완스탭할 때 하나님은 하나님의 크기의 일을 이루시며, 이 일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일이기에 하나님께서 이루십니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하나님과 친밀함에 거하면 개인의 길을 보이시고, 우리 한 기관이 하나님과 친밀한 가운데 거하면 그 기관에 하나님의 길을 보이시고, 교회가 하나님과 친밀함을 열망하여 그 길로 나아갈 때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길을 보이십니다. 이것을 가리켜 비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우리의 힘, 노력, 생각, 계획으로 하려고 하며, 또한 그렇게 하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계획을 세우고 열심히 합니다.
여러분 성경의 믿음장을 보세요
어느 한사람이라도 자기가 스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다 생각하고 계획을 세우고 무슨 일을 했던 사람이 있는지..
노아가 내가 방주를 만들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지 하고 했나요?
만약 노아가 홍수심판을 알고 열심이 목이 터져라 외치고 다녔다고 합시다. 하나님이 기뻐하셨을까요?
아브라함이 내가 이삭을 번제로 바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지 했나요? 아닙니다.
모세가 내가 홍해를 갈라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지 하고 그렇게 했나요?
여호수아가 내가 여리고성을 무너뜨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지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니에요, 모두가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그 일에 믿음으로 동참할 때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셨으며,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 것입니다.
여러분 출애굽이 모세의 일입니까? 하나님의 일입니까?
홍해를 가르는 것이 모세의 일입니까? 하나님의 일입니까?
요단강을 가르고 여리고성을 무너뜨린 것이 여호수아의 일입니까? 하나님의 일입니까? 하나님의 일입니다. 모세와 여호수아가 한일을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그 일에 믿음으로 동참할 때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이기에 하나님께서 이루신 것입니다. 이것이 곧 동역자의 삶입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또 히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도 믿음이라 성경은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믿음이 뭐냐는 겁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에는 믿음이라는 말의 의미조차도 가리워져있습니다.
그럼 먼저 믿음이 아닌 것부터 살펴보겠습니다. 그래야 믿음을 더 선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열심이 곧 믿음’이라는 오해가 우리가운데 팽배해 있습니다. 그러나 열심은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는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 주변의 선배신앙인들로부터 이런 말을 듣기 쉽습니다. “열심히 다녀. 예배도 빠지지말고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도 열심히 읽어야 돼. 그래야 신앙이 자라는 법이야.” 열심 그 자체는 매우 귀한 것입니다. 실제로 믿음이 제대로 자라기 위해서는 성경을 읽은 일이나,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는 일이나, 기도를 열심히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것이 곧 믿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열심히 곧 믿음이라면 바리새인들의 믿음은 정말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하여 “믿지 않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열심히 있었습니다. 헌금, 봉사, 헌신 등 어느 면에서도 그들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만큼 열심당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실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보아도 열심이 곧 믿음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경우, 소위 말하는 ‘열심이 특심’인 성도들로 인하여 많은 아픔이 교회 내에 있었습니다. 그들이 많은 봉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상처를 남기고 목회자와 갈등을 빚으며 아픔을 남겼던 일들이 많습니다. 아마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처럼 ‘열심이 곧 믿음’이라는 오해는 불교에서 말하는 공사상 즉 공을 많이 들이면 복을 받고 형통할 것이라는 잘못된 신앙관을 낳았습니다. 물론, 믿음이 있으면 열심히 있게 마련이지만 열심히 곧 다 믿음은 아닌 것입니다.
둘째, 성경에 나온 내용을 그대로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겁니다.
요5:46,47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하나님을 안 믿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말을 들으면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안 믿었구나 생각합니다. 그러나 당시 바리새인들은 보수중의 보수 신앙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성경의 기적을 믿으세요? 그런데 요즘 자유주의자들은 이것을 신화라고 하고 안 믿었어요. 바리새인들은 이 사실을 의심하지 않고 중심으로 믿었어요. 그런데 주님은 믿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유가 뭔가요?
그들은 성경에 나와 있는 내용을 믿으면 그것을 믿음으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믿음을 어디에 두고있느냐하면, 주님에 관한 지식에 믿음을 두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는 성경에 나와 있는 내용을 그대로 믿는 것이 중요하지만 성경이 말한 믿음은 그것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약2:19 “네가 하나님 한 분이신줄 믿느냐 잘 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히11:31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수2:8-11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데 그럼 라합만 들었느냐? 아니에요. 여러고 모든 사람들이 다 들고 믿었어요. 간담이 녹고, 정신을 잃을 정도로 믿었어요.
하나님이 죄인을 심판하신데요. 이것을 확실하게 믿고 기절한 사람 있어요. 없어요.
그런데 여리고 사람들은 그렇게 믿었어요. 그런데 그들이 구원 받았어요? 아닙니다.
라합만 구원받았습니다.
그럼 말씀을 듣고 그 사실을 믿는 것이 성경이 말한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라합의 믿음과 다른 사람들의 믿음의 차이가 보이시나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성경이 말한 믿음은 아니라는 겁니다.
셋째 마음의 확신이 믿음이 아닙니다.
마음의 확신이 믿음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마음의 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자체가 믿음이 아닙니다.
예) 무슨 독을 마시든지...
믿음은 11미터 높이에서 뛰어내리라 -> 그런데 물이 없어요. 뛰어 내리면 내가 채우겠다. 우리는 채우면 뛰어내리겠습니다. 이것은 이미 믿음이 아니지요. 믿음은 보이지 않은 것의 증거라 하였으니....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 채워 주실 줄 믿습니다, 하고 뛰어 내리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겁니다.
왜? 하나님은 말씀하신 것 왜에는 뒷받침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채우실 계획이 없는데 우리 생각에 채워 주실 줄 믿습니다. 하고 뛰어 내리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믿음을 이렇게 생각해요.
특히 사업하시는 분들 하나님 제가 이번에 사업을 시작하는데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면 십일조를 잘 드리고, 또 십의 일조는 선교헌금을 드리겠습니다, 도와주실 줄 믿습니다. 이것은요, 전혀 믿음이 아닐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 외에는 뒷받침하지 않습니다.
보세요. 히11장을 보면 그 누구도 ‘하나님 제가 방주를 지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원합니다. 방주를 잘 짖도록 도와 주실 줄 믿습니다. 하고 시작했나요? 아닙니다.
여호수아 요단강 앞에서 하나님 우리가 언약궤를 매고 건너가겠습니다. 그때 물이 갈라질 줄 믿습니다. 하고 들어갔나요?
여리고성도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실 줄 믿습니다. 하고 돌격했나요? 아닙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와 있는 사람들 보십시오. 단 한 사람도 자기들이 계획해서 한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실 줄 믿습니다. 하고 시작한 사람은 단 함 사람도 없어요,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모두가 자기들이 계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도하셨다는 겁니다.
히11장 집에 가서 읽어보세요, 그중에 누가 단 한사람이라도 자기들이 계획을 세워놓고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거야 하고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고 나아갔는지.. 단 한명도 없습니다. 그것이 믿음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이 한국식 믿음입니다. 밀어붙이기식 믿음.. 사람은 밀어 붙임을 당할 줄 모르나 하나님은 절대로 밀어 붙임을 당하지 않습니다.
그럼 성경이 말한 참된 믿음은 어떤 것인가, 믿음의 성격
1.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인격체이신 하나님께 두는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어떤 사실에 두는 것이 아니라 인격체이신 주님께 두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참다운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믿음이 없었던 이유는 그들이 열심은 있었을지 모르지만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많았을지 모르지만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는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믿음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아는만큼 가지는 게 아니라,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아는만큼 가지는 것입니다.
2.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자기의 모든 것을 거는 것)
믿음은 성령의 조명으로 발견된 인격체 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인데 여기에서 중요한 한 가지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히11장 믿음의 사람들 ->공통점 ->하나님께 자신을 다 걸었던 사람들입니다.
노아 ->운동장보다 더 큰 방주를 만들어라, 그 당시 전기톱, 전기대패도 없었어요, 나무한그루 자르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겠습니까?
또 비가 올 기미도 안보여요, 만약 비가 안오면 인생 종치는 겁니다. 그가 가진것이라고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한가지입니다. 노아는 말씀하신 그 하나님께 자기의 모든을 걸었던 겁니다.
엘리야 ->아합왕 앞에서서 아합의 죄로인하여 이슬도 내리지 않을것이라고 말하라 당시 아합의 어떤존재인가? 5공의 전두환, 그 앞에서 이야기하는 것 쉽지 않음,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더 설명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과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을 경험으로 아는 것은 다릅니다. 우리는 성경을 공부하면서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분이라고 배웁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믿습니다. 이것이 귀신들도 가지고 있는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아닙니다. 반면, 참 믿음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좋은 예가 있습니다.
여러분들, 조지 뮐러를 다 아십니다. 그는 고아들을 한꺼번에 2천명씩 돌보아야 하는 상황에 있었습니다. 그는 고아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사람들에게 손 한 번 벌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만 의지했습니다. 조지 뮐러는 하나님께서는 고아들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조지 뮐러는 하나님을 전능하신 분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믿었던 것이 아니라, 전능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조지 뮐러는 고아들의 필요를 하나님께서 당연히 채워주실 것을 신뢰했던 것입니다.
조지 뮐러의 예
조지 뮐러의 자서전에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약 1,500명의 고아들을 돌보고 있을 때였습니다. 하루는 먹을 것이 전혀 없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총무가 조지 뮐러에게 보고합니다. “목사님, 오늘 점심 때 아이들에게 줄 빵이 없습니다. 지금 시간은 11시입니다. 점심 시간 전까지는 한 시간 남았습니다.” 이야기를 전해들은 조지 뮐러는 조용히 기도실에 갔다고 합니다. 30분이 지난 후 총무가 기도실로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30분밖에 안남았는데요.” 조지 뮐러는 대답하기를 “지금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잖아요. 여러분도 기도하십시오.” 이윽고 점심시간이 되었습니다. 조지 뮐러는 기도실에서 나와 총무에게 이렇게 일렀습니다. “종을 치세요. 점심 시간이니 아이들을 모으세요.” 총무는 하는 수 없이 조지 뮐러의 명을 따라 종을 쳤습니다. 그런데 종을 치자마자 고아원 문 쪽에서 차소리가 났습니다. 모두들 그쪽을 보니까 트럭 한 대가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트럭은 어느 빵공장에서 온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트럭 기사에게 자초지종을 듣게 되었습니다. 아침에 빵공장에서 빵을 굽다가 실수로 빵을 조금 태웠다고 합니다. 먹는데에는 지장이 없지만 상품으로서의 가치는 떨어졌습니다. 빵공장 사장은 하는 수 없이 가까운 고아원에 가져갔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빵이었기에 그 고아원에서 다 수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소개받은 곳이 조지 뮐러의 고아원이었다고 합니다. 그 때가 오전 11시. 조지 뮐러가 기도하러 기도실에 들어갔던 시간이었습니다.
아마 우리같았으면 이랬을 겁니다. “아니, 총무가 되어가지고 오늘 점심때 아이들에게 줄 빵이 없다는 이야기를 지금 하면 어떻게 해! 시간이 없잖아 시간말이야. 아이들 불러모아가지고 통성기도해요! 아, 어디 전화할 데 없나. 아,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조지 뮐러는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에 관한 사실을 확실히 믿은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고아들의 아버지라는 진리와 하나님은 자기 자녀들의 필요를 기쁨으로 채워주시는 분이심을 성령의 은혜로 알고 그 분만을 신뢰했던 것입니다.
중국 전도의 영웅 허드슨 테일러의 삶은 기도와 응답의 연속이었다. 사람들이 "테일러가 일어나기 전에 태양빛은 한 번도 중국 대륙을 비추지 않았다." 라고 말할 정도로 그는 기도에 열심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범선을 타고 항해 중일 때 일이다. 바람이 없자 배는 난폭한 토인들이 사는 어떤 섬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배는 점점 물가에 접근하고 바닷가에서는 토인들이 무기를 들고 배가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자 배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사색이 되었다.
선장은 서둘러 기도의 사람 테일러에게 가서 하나님께 기도하여 바람을 보내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 말을 들은 테일러는 선장에게 배에 있는 모든 돛을 올리라고 말한 다음 선실에 들어가 테일러가 기도를 드리자 갑자기 바람이 강하게 불어 배는 토인들이 있는 섬을 떠나 안전한 항해를 계속하게 되었다.
잠시 후 선장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바람이 너무 강합니다. 이제 그만 기도해도 되겠습니다.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려 주십시오."
참된 믿음은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분께 나의 모든 것을 거는 것입니다. 그분을 알 때 가능
3.하나님님께만 반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반응하기보다는 환경에 반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은 환경에 반응하세요, 아니면 하나님께 반응하세요?
문제가 없을땐 다 하나님께 반응해요, 그런데 문제를 닥처보면 알아요 누구에게 반응하는지
예) 여호수아 요단강 건널때 하나님과 친밀함 가운데 하나님의 의도를 여호수아에게 보여줍니다. 그것은 바로 제사장들이 벱궤를 메고 발을 내 딛는 것이였습니다. 이런일을 과거에 한번도 없었던 일입니다. 들어보지도 못한 일이죠
이때 여호수아가 어떻게 합니까? 환경을 바라보지 않고 나에게 말씀하시고 말씀하신대로 반드시 이루실 하나님이심을 신뢰하고 환경에 반응하지 않고 하나님께만 반응하여 한 발을 믿음으로 내 딛을때 하나님 크기의 일을 경험하게 됩니다.
성도들이여!
오늘의 문제가 뭔줄 아시요, 내가 못하면 하나님도 못한다 생각해요
누구와 같이 마르디와 같이(요11장)
하나님 그렇습니다, 내가 믿음이 있는 줄 알았는데 믿음이 하나도 없음을 고백합니다. 그렇기에 난 주님이 필요해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라고 그 은혜를 부어달라고 기도해야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하나님의 다림줄을 보는 것은 너무 중요합니다. 보아도 되고 안보면 그만이고가 아닙니다. 반드시 보아야합니다. 그래서 그 기준에 맞추어 신앙생활을 할때 생명의 풍성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임하셔서 하나님 크기의 일을 이루실것이여 이것을 믿지 않는 자들이 보고 주께로 돌아올 것입니다.
신앙의 본질은
1.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1)하나님을 아는 것(음성, 형용, 말씀이 거함)
2)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하나님만이 나의 모든 것, 즉 나의 구세주, 주인, 나의 생명되시 는 것.
핵심-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
2.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온 삶의로 동참하는 것
1)전적 신뢰
2)전적 순종
핵심-동역자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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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촌교회연합구역예배] 하나님의 다림줄 (0) | 2006.11.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