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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중심적 삶(6) 율법주의(2)

시리즈설교/자기중심적삶

by 발의무리 2006. 11. 26.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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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중심적인 삶(6) 율법주의(2)


참 신앙은 하나님 중심의 삶입니다. 그런데 신앙이 타락할수록 자기중심적인 신앙으로 나가게 됩니다.

          하나님 중심적인 신앙

           자기중심적인 신앙

하나님 자원

1)은혜에 의한 삶

2)믿음에 의한 삶

3)십자가에 의한 삶

자기자원

율법주의

하나님 목적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

자기목적

기복신앙

하나님 방법

성령에 의한 삶

자기방법

인본주의


여기서 율법주의 신앙의 특징은 참을 거짓으로 대처해 버리는 특징이 있습니다. 즉 참 시낭의 본질적인 요소들을 비본질적인 수단으로 대체해 버립니다.


1.주님을 알고 사랑하는 신앙의 본질을 종교적 의식으로 대체해 버립니다.

 예) 이사야9유대인) 예레미야(유대인) 예수님(바리새인)


2.십자가의 공로를 믿음으로 의지하는 삶을 자기행위로 대체합니다.

 1)십자가는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자원으로 살아야 할 것을 선포합니다.

 2)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보좌 앞에 나아갈 때에도 오직 예수 그리스     도의 공로로만 갈 수 있습니다.

 3)우리는 자기 자원으로 보좌 앞에 나아가려고 합니다. 그때 자신의 ‘해위’를 의지     하게 됩니다. 그리고 죄책감, 혹은 자기 의에 빠지게 됩니다.

 4)행위를 의지함으로 나타나는 신앙의 결과들

   첫째, 십자가의 공로를 놓치게 됩니다.

   둘째, 하나님의 은혜를 모릅니다.

   셋째, 하나님의 사랑을 잘 모릅니다.

   넷째, 구원의 확신이 흔들립니다.


3.실재를 이론으로 대체합니다.


4.육체를 자랑합니다.

 1)육체의 자랑은 육체의 신뢰로 연결되며, 결국 그리스도를 잃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원수 된 삶입니다.

   - 우리는 매순간 주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2)율법주의에서 나오는 잘못된 편견중의 하나는 영적성숙에 대한 이해입니다.

   -영적 성숙을 단계로 보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5.이러한 신앙의 가치관에서는 어떤 열매도 없습니다.

안식도, 평강도, 승리도 없습니다. 십자가는 무력화 됩니다.


오늘 본문 눅18장은 자기중심적 신앙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우리에게 선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앞부분(1-8절)에서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 비유’를 통해 믿음으로 강청하는 기도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믿음으로 구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말씀합니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후반 절에 의미 있는 말씀을 하십니다.


8절하반절에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무슨 말입니까?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이 말세 없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신뢰함으로 기도하는 사람이 없다는 말입니다. 왜? 믿음이 없을까요? 자기를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뭔가 내놓을 만한 것이 있으면 주님을 신뢰하기 보다는 자기를 신뢰합니다. 자기 자원, 자기 방법, 자기 관점에 머무르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중심적 신앙에 빠지게 됨으로 자기를 신뢰하게 될 것을 본 예수님은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신 구절 뒤에 나오는 내용들을 살펴보면 그 아유를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18장의 내용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은 도포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자기중심적 신앙

하나님 중심적 신앙

바리새인

의식으로 본질을 대체 자기 의를 의지함

세리

하나님의 긍휼에 호소

부자관원

행위로 믿음을 대체(구원에 이르는 길)

어린애기

수용성

제자들

자기관점에서 편견(배우려는 자세가 없음)

소경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


여기에 여섯 부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그들은 각기 자기중심적 신앙과 하나님 중심적 신앙으로 대조되어 설명되어 집니다. 우리가 이것을 다루면서 염두해 두어야 할 것은 지금 다루는 것이 신앙에 대한 이해와 태도의 문제라는 겁니다.


1.바리새인과 세리(10-14절)

바래신인과 세리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갔습니다. 바리새인은 경건한 사람입니다. 말씀대로 살려는 사람입니다. 반면 세리는 그 당시 죄인을 대표할 만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기도 가운데 세리의 기도가 주님께 합당한 기도였습니다. 왜? 바리새인의 기도는 합당치 못하고 세리의 기도가 합당한 기도였습니까? 바리새인은 자기 의를 가지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자원을 의지합니다.


12절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반면 세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의지합니다.

13절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한 행위, 소득의 십일조를 드린 행위가 문제입니까? 아닙니다. 행위가 문제가 아니라 그가 그것을 의지한 것이 문제입니다. 바리새인은 바로 그 행위를 의지한 것입니다. 그 결과 그는 영적 우월의식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11절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반면 세리의 행동은 내놓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 무엇을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하나님의 긍휼만을 구합니다. 주님의 긍휼이 없으면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여기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입니다. 이 말은 주님의 은혜 없이는 소망이 없는 자라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의 행위를 열심히 자랑합니다. 그리고 뭔가 내 놓을 만한 자기 의가 있으면 그것을 붙잡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하면 할수록 내놓을 만한 것이 있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이 오래될수록 더욱 자기 의가 많아집니다. 그러므로 이런 자기중심적인 신앙생활은 하면 할수록 주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도 잘 모르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것이 자기중심성입니다. 우리의 옛 본성이 이러한 일들을 합니다. 이 자기중심성은 사단으로부터 시작되었고 그 배후에는 사단이 있습니다.


십자가가 필요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 앞에 설 때에 우리의 자원이 아무것도 아님을 증거 합니다. 내 자원이 아닙니다. 내 방법도 아닙니다. 오직 주님의 은혜요, 주님의 능력이며 주님의 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주님의 자원으로 주님의 지혜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한 삶을 위해 하나님의 관점이 필요합니다.


2.부자관원과 어린아이

부자관원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부자에 관원이었습니다. 그는 영생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데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는 한편으로 대단한 열심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18절 “어떤 관원이 물어 가로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는 영생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물었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질문한 것은 ‘행위로 영생을 얻으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행위로 구원 얻을 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오늘날도 이 사람처럼 행위를 가지고 주님 앞으로 나아가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20절)


왜 계명을 지키라고 하셨을까요? 계명의 목적은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행위로 구원 얻으려는 부자관원에게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심으로 스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가르치시기 원하신 것입니다. “계명 앞에 서 보라 계명은 너의 자원이 아님을 보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부자 관원은 이 모든 계명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말합니다. 오늘날도 비슷한 사람을 봅니다. 자기들의 열심을 가지고 모든 의식들을 지켜냅니다. 그리고는 자신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뿌리에 자기 의와 자부심, 그리고 우월의식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 행위를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부자관원은 예수님에게서 어떤 대답을 기대했을까요? 아마 칭찬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가 지키기 어려운 요구를 하심으로 그가 행위로 영생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22-23절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사람이 큰 부자인고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우리는 행위로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는 것, 그 자체가 십자가의 공로를 믿음으로 의지하는 참 신앙을 자기 행위로 대체해 버리는 것입니다.


반면에 어린아이를 보십시오. 예수님께 나아오려는 어린아이들을 주님은 안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17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어린아이 같이 받아들여야 천국에 합당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받아들인다는 말은 “receive'입니다. 이 말씀은 ‘수용성’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구원에 있어서 어린아이 같은 수용성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자기 이론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모든 이론을 내리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헬라인에게는 미련해보입니다. 유대인에게는 거치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을 수용하는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오늘날 부자 관원과 같은 사람이 교회에 있다면 사람들에게 금방 인정받을 것입니다. 믿음이 좋은 것으로 소문날 것입니다. 누가 부자관원을 평가하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신앙을 문제 삼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의 행위입니까? 아닙니다. 그의 신앙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문제입니다. 그는 자기 행위로 믿음을 대체 해 버린 것입니다.


3.제자들과 소경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좇으려고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배도 버렸습니다. 직업도 버렸으며 심지어 가족도 두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헌신된 사람들입니다. 그뿐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선생님으로부터 24시간 동행하며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많은 지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편견이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편견이 있습니다. 그 편견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게 하고 주님을 따르지 못하게도 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십자가의 고난을 말씀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묻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메시야에 대한 이해가 달랐습니다. 그들이 기다린 메시야는 왕으로서의 메시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섬기는 종으로서 십자가를 말씀하시고 계시니 어찌 그들이 이해할 수 있었겠습니까?


32-24절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희롱을 받고 능욕을 받고 침 뱉음을 받겠으며 저희는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추였으므로 저희가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편견은 모두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배우고자 하는 자세는 중요합니다. 지금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배우고자 하는 자세가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가장 잘 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배우고자 하는 자세를 가져야 할 때 갖지 못 한 것은 자기중심성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님 중심적이었지만 어떤 순간 자기중심적으로 돌아갔습니다. 우리는 순식간에 자기중심적인 자리에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중심적인 자리에 있다가 어떤 순간 자기중심적인 자리로 돌아가 버립니다. 순식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어떤 이는 거기서 내내 거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신앙으로 삽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깨닫게 되고 겸손하게 엎드리며 하나님 중심적인 신앙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또다시 그 자리로 돌아가 버립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매 순간마다 은혜가 필요합니다.


비슷한 상황에 있었던 세례요한이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알았습니다. 물에서 세례를 베풀 때 그 위에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였고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어린양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역과 이후의 행보는 세례요한이 가지고 있었던 생각과 달랐습니다. 이때 그는 제자들을 보내어 묻습니다.


마11:2-6절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반면에 소경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 예수여” 라고 부름으로 예수님의 메시야 됨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소경은 자기의 지식을 신뢰하는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그는 적극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묻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길 원하느냐?”

“주여 내가 보기를 원하나이다”

이것이 제자들이 가져야 할 자세요,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입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은 이론이 아니라 실재가 중요함을 아는 사람이며, 배우고자 하는 자세를 갖습니다. 이론으로 아는 것이 능력이 아님을 압니다. 그래서 실재가 되기까지 배고픔을 가지고 주님을 구하게 됩니다. 그때 편견이 깨집니다. 주님의 길을 알게 됩니다. 순종하는 삶이 가능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눅18장에 아노는 자기중심에 있는 3부류의 사람들(바리새인, 부자관원, 제자들)은 왜 자기중심에 있을까요? 그들이 지킨 의식이나, 행위, 지식은 굉장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부러워 할 만합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어떠한 열매도, 능력도 없습니다. 믿음으로 영광을 돌리는 삶도 불가능합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이들은 자신들의 의식, 행위, 지식을 자랑하며 그것들을 의지했던 것입니다.


반면 세리, 어린아이, 소경은 하나님 중심적이었고 하나님께 합당한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실 아무것도 내놓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자기 자원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오직 주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가 어떤 존재인자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기가 0점인지 알지 못하면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선함이 없음을 이론으로 알지만 질재가 되지 않으면 하나님을 열망하고 구하지 않게 됩니다. 왜 일까요? 내놓을 만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신앙적 행위들, 가문, 출신등 바울이 말한 육체에 속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신앙생활을 오래한 것이 죄입니까? 열심히 한 것이 잘못입니까? 많이 아는 것이 잘못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은 매우 소중합니다. 문제는 “대체하는 것”입니다. 대체한 그것을 “의지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것을 자랑스러워하며 그것으로 주님 앞에 가려는 것, 율법주의가 문제입니다. 자기중심적일 때 바로 그 자리로 가는 것이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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