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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장 교회회복과 영적전쟁

시리즈설교/교회회복

by 발의무리 2007. 9. 5.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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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1장 교회회복과 영적전쟁


                                                       

교회회복을 위한 영적 전쟁에 대해서 살펴보기 원합니다. 제가 처음 서울에서 개척하면서 하나님께서 신앙의 본질을 보이시고 주님을 따라가는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왜 이렇게 어려운지 왜 이런 일이 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단순히 제가 부족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했지만 전반적인 부분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기간 동안에 미국에서 있는 세미나를 다른 팀들과 같이 가게 되었습니다. 사실 제가 가려고 했던 세미나가 있었는데, 미리 가서 통역을 해주면 그 쪽 부분의 경비는 그 분들이 대겠다고 그래서 좀 일찍 떠나서 몇 군데를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어떤 한 군데는 오는 분들을 다 예언기도 해주는 곳인데, 한국에서 왔다고 그러니까 두 명씩 짝을 지어 여럿 팀이 나와서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었습니다. 저도 어떤 목사님하고 둘이 한 홀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먼저 그 분이 기도를 받는데, 많은 좋은 말씀들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그 목사님을 앞으로 이렇게 이렇게 사용하실 거라고 하는데, 제가 옆에서 듣고 있다가 저도 그런 말씀들을 듣기 원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제 차례가 왔는데, 예언 사역자들이 제가 기대하는 부분은 전혀 얘기 안하고 영적 전쟁 얘기만 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제 손에 큰 칼이 들려 있는데, 제가 오른쪽으로 칼을 휘두르면 귀신의 세력들이 와르르 무너지고, 또 왼쪽으로 칼을 휘두르면 귀신의 세력들이 와르르 무너진대요. 그래서 사단이 온 지역을 다 동원해서 저를 죽이려 했다고, 그러면서 그림이 보이는데 사람들이 칼을 가지고 제 가슴을 난도질하는 그림이 보인다고, 그런데 하나님이 온 하늘을 동원해서 저를 지키셨다고 하길래 그래서 그때는 글쎄 그런가보다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말씀을 주시고 끝났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제 가슴을 난도질하는 그림이 보인 것처럼 그런 일이 많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 교회가 재정적으로 자립하고 막 성장하려고 하는 그 시점에서 하나님이 의도하신 어떤 부분이 정착되지 않으니까 저더러 새로 시작하라고 그러셔서 사임하고 새로 시작하게 된 게 지금의 포도나무교회입니다.

최근에 다른 나라에서 한인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한 목사님이 인터넷을 통해서 하나님이 많은 은혜를 주셔서 하나님의 길을 보게 하시고 그래서 주보도 보내왔는데 보니까 정확하게 이해하시고 그 관점에서 교회가 세워지기를 열망하셨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그분이 전화를 하셨습니다. 성도들이 두 차례에 걸쳐서 반반씩 일차 이차가 나갔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하나님의 교회가 회복되어지고 거기에 하나님의 부흥이 임하길 원하는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왜 이런 아픔이 있느냐 하는 겁니다. 이런 부분을 우리가 영적인 차원에서 이해하지 못하면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회복되기 위해서 거기에는 엄청난 영적 전쟁이 있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교회가 회복되어져서 성경이 말씀하시는 모습대로 전례 없이 주를 깊이 알고, 전례 없이 주를 사랑하고, 전례 없이 거룩하고, 전례 없이 하나 되고, 전례 없이 강한 능력의 교회로 회복되고 세워져 보십시오. 그것은 사단의 왕국에 그야말로 치명타를 날리게 될 겁니다. 그 지역뿐만 아니라 그 나라 통해서 행하실 하나님의 역사는 너무너무 놀라울 겁니다. 그러니까 사단은 온 지역을 동원해서 대적합니다.

우리가 이 영적전쟁을 느헤미야서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느헤미야서를 영적전쟁의 교과서라고 할 만큼 잘 볼 수 있고, 특별히 느헤미야서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큰 것이 교회회복에 대한 놀라운 예언들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느헤미야서를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교회가 회복됨에 있어서 우리가 만나는 사단의 방해, 우리가 치루는 영적전쟁에 대해서 살펴보기를 원하고 다음 주에는 느헤미야의 삶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가 회복되는데 있어서 특별히 리더로서 어떻게 그 일을 감당할 것인가? 우리에게 리더십의 어떠한 부분들이 필요한가? 라는 부분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왜냐면 영적전쟁을 보면 그 토대 위에서 어떠한 리더십이 필요한 것인가를 더 선명히 보게 될 것이고, 리더십의 태도와 자세에 대해서 절실하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서를 통해서 교회회복과 관련해서 영전전쟁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하는데 느헤미야서가 우리에게 주는 또 하나의 교훈은 이런 부분입니다.

서기전 580년경에 바벨론 왕인 느브갓네살 왕이 예레미야를 통해 하나님이 예언하신 대로 유대나라를 완전히 패망시키시고 예루살렘 성전을 완전히 불태워버리고 모든 집기를 다 빼앗아 가버리고 그리고 예루살렘에 있던 수많은 유대나라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가 버리고, 바벨론 지역에 있던 메소포타미아인과 아랍 사람들을 중심으로 다섯 민족들을 유대 나라에 풀어 정착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나라가 완전히 패망하게 되었는데, 그로부터 약 50년이 지났을 때에 고레스 왕이 칙령을 내려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아가게 만듭니다. 그래서 돌아와서 성전을 건축하는데 거기에 있던 사마리아 사람들의 방해로 인해 성전 재건이 20년 동안 중단됩니다. 그러다가 서기전 520년쯤에 하나님이 학개와 스가랴를 세우십니다.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메시지를 강력하게 전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시고, 영적으로 회복되게 하시고, 성전을 수축하는 일을 다시 하게 하셔서 성전 수축일이 시작되었고 그래서 약 2년 만에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 된지 거의 정확하게 70년 만에 예루살렘 성전이 다시 세워집니다. 그런데 이제 성전이 세워졌는데 그 당시 모양은 아주 보잘 것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성은 아직도 폐허로 남아 있습니다. 그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을 지배하고 있던 이방 나라 사람들에게 지배를 당하고 온갖 고통을 당하고, 수욕을 당하고, 멸시를 당하고, 예루살렘 성벽은 완전히 무너져 성문은 불탄 채로 남아 있고 성전은 세워져 있으되 완전히 도성 자체가 폐허 가운데 남아 있는 그러한 시점 이였습니다. 그러한 시점에서 그로부터 약70년 가까이 지난 450년경에 하나님께서 느헤미야를 쓰십니다. 느헤미야는 그 당시 아닥사스다왕의 술 맡은 관원장이였는데 하나님이 그를 보내어서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게 하시고 예루살렘 도성을 회복시키실 일을 합니다. 한편으로 이것이 우리에게 많은 의미가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오늘날 교회 안에 하나님의 성벽이 회복되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성벽이 회복되어야 할 것에 대해서는 ‘성령이 역사하는 교회’에서 제가 언급한 세 가지 면에서 성벽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첫째는 분별의 벽이 회복되어야하고, 둘째는 구별의 벽이 회복되어야 하고, 셋째는 방어의 벽이 회복되어야 됩니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자 자기들의 향로에 불을 담아 그 위에 향을 피웠다. 그러나 그 불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않은 다른 불이었기 때문에 2 여호와 앞에서 불이 나와 그들을 삼켜 버렸다. 그래서 그들은 여호와 앞에서 죽고 말았다. 3 그때 모세가 아론에게 말하였다.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입니다. 나는 나를 가까이하는 자들 중에 나의 거룩함을 보이고 모든 백성 앞에서 영광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아론은 아무 말이 없었다. 4 그러자 모세는 아론의 삼촌인 웃시엘의 아들 미사엘과 엘사반을 불러 '너희는 가서 너희 조카들의 시체를 성소 앞에서 끌어내어 야영지 밖으로 메고 가거라' 하였다. 5 그래서 그들은 모세의 지시대로 가서 제사장복을 입은 채 죽은 그 시체들을 야영지 밖으로 끌어내었다. 6 그때 모세는 아론과 그의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죽은 자를 애도하는 뜻으로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지 말아라. 너희가 만일 그렇게 하면 너희도 죽을 것이며 여호와께서 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분노하실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모든 백성은 이들이 여호와께서 치신 불로 죽었다는 사실을 슬퍼해야 할 것이다. 7 그리고 너희는 여호와의 거룩한 기름으로 성별함을 받은 자들이니 성막 입구를 떠나지 말아라. 떠나면 죽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8 여호와께서 아론에게 말씀하셨다. 9 '너와 너의 아들들은 성막에 들어갈 때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아라. 만일 너희가 마시고 들어가면 죽을 것이다. 이것은 너희 자손 대대로 지켜야 할 규정이다. 10 그렇게 해야 너희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고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을 분간하며”(레10:1-10)

하나님의 교회가 회복되어지려면 우리 가운데 반드시 분별의 벽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가장 심각한 것 중의 하나가 교회 안에 분별의 벽이 무너져 있습니다. 신앙이 타락 할수록 나타나는 증상이 영적인 분별력이 무너지는 겁니다. 성경에 있는 그대로를 다 믿고, 똑같이 성경을 인용하지만 성경이 말씀하시는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겁니다. 바리새인들 같은 경우에도 자기들은 그렇게 철저하게 안식일과 절기를 지키고 매일 기도하고 금식하고 구제하고 십일조하고, 그리고 나름대로 누구보다 철저하게 율법을 지켰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했지만 주님은 바로 그들을 향해서, 너희는 하나님을 전혀 알지도 못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말씀도 믿지 않는다고 했습니다.(요5:37-38) 그 말은 우리 신앙의 가장 기본적인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하나님을 믿는 것에서부터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의미가 무엇인가가 가려진 것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분별력이 없는 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가 회복되어지려면 분별의 벽이 세워져야 됩니다. 무엇이 참된 믿음인지 무엇이 믿음이 아닌지, 무엇이 하나님께 속한 것인지, 무엇이 세상에 속한 것인지, 무엇이 성경이 말하는 의(義)인지, 무엇이 성경이 말하는 사역이고, 성경이 말하는 사역은 어떻게 감당하는 것인지, 믿음에 의한 삶은 어떻게 살 수 있는 것인지, 모든 면에서 분별력이 필수 입니다.

사실 믿음만 하더라도 우리 신앙은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라는 사실을 우리가 머리로는 다 알지만 그 믿음에 의한 삶이 무엇인가는 분별이 안 되니까 너무나 많은 경우에 믿음에 의한 삶을 못삽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인 개인이나 교회가 회복되어 지려면 교회 가운데 반드시 이 분별의 벽이 세워져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다림줄이 세워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준 가운데 세워져야 합니다. 구약에 모세의 성막이나 솔로몬이 성전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식양대로 완성되었을 때,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했습니다. 얼마만큼 강하게 임했는가 하면 제사장들이 서서 제사를 드리지 못할 만큼 임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무엇을 보여주시냐 하면 하나님의 교회가 철저하게 하나님의 다림줄에 맞추어 세워져야 할 것을 말씀하고 계시고, 그렇게 될 때에 거기에 하나님이 영광으로 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신약시대만큼 강조하고 계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첫째는 분별의 벽이 서야 되고, 두 번째는 구별의 벽이 세워져야 됩니다.

그런데 구별의 벽이 세워지려면 먼저 분별의 벽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무엇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고, 무엇이 세상으로부터 나온 것인지가 구별이 되어야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을 취하고 세상으로부터 나온 것을 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이 버린다는 것은 죄와 육신과 사단과 세상을 버려야 한다고 했는데, 구별은 무엇까지 포함되느냐면, 예를 들면 사역을 하더라도 인본주의적인 방법과 인본주의적인 수단을 통해서 하는 그 모든 것도 버려져야 됩니다. 왜냐면 그게 악한 길이니까)사55:7-9). 그러니까 이 구별이라는 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것을 받아들이고 세상에 속한 것, 사단에 속한 것, 육신에 속한 것을 구별하여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그렇지 않습니다. 분별이 무너져 있기 때문에 교회 가운데 시기, 질투, 다툼, 싸움은 말할 것도 없고, 너무나 세상적인 죄가 가득할 뿐만 아니라 세상적인 가치관이 그대로 있고, 인본주의 가치관이 그대로 있고, 율법주의 가치관이 그대로 있고, 그야말로 철저하게 구별의 벽이 무너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분당에 있는 한 교회는 급성장했다고 주위에 알려지고 신문에까지 났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성장시키는 방법이 너무나 세상적일 뿐만 아니고 세상 사람도 하지 않는 방법을 통해서 하니까 오죽 했으면 그 교회에 있는 부목사님들이 회의해서 우리 담임목사님에게 정직하게 말씀드리자, 그래서 대표로 한 부목사님이 찾아가서 “목사님, 이건 아니잖아요.” 그랬더니 담임 목사님이 하는 말이 “당신 말이 다 옳고 당신 똑똑하고 존경하는데 물이 너무 맑으면 물고기가 안살아.” 그래가지고 결국 그 부목사님은 사임하고 그 교회를 떠났다고 합니다. 그게 사실은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처럼 교회가 분별의 벽이 세워지고 구별의 벽이 세워질 때, 하나님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해 주셔서 그것이 보호의 벽이 되어 세상과 사단의 세력들이 틈타지 못하도록 지키시고 보호하실 텐데 그 성벽이 지금은 사실 완전히 무너져 있는 상태입니다. 교회회복을 위해서 우리가 추구하며 나아갈 때에 느헤미야 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엄청난 사단의 방해가 있습니다. 느헤미야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실 때, 산발랏을 중심으로 모인 무리들이 하나님의 일을 집중적으로 방해했는데 이 산발랏 무리들은 사단을 대변하는 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에서 하나님의 교회가 회복되어지기를 구하고 추구하며 따라 갈 때, 느헤미야를 통해서 우리가 부분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을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영적전쟁은 느헤미야서 2장 10절에서부터 시작되는데, 10절에 보면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 되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가 이스라엘 자손을 흥왕케 하려는 사람이 왔다 함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사실 하나님의 교회가 회복되어질 때, 사단에게 치명적인이 될 것이기 때문에 사단은 본격적으로 방해하기 시작합니다. 그럼 사단이 어떻게 방해하는가?

1. 조롱과 멸시와 모함을 통해서 방해합니다.

“또 저희에게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시는 일과 왕이 내게 이른 말씀을 고하였더니 일어나 건축하자 하고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려 하매 호른 사람 산발랏과 종이 되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이 이 말을 듣고 우리를 업신여기고 비웃어 가로되 너희 하는 일이 무엇이냐 왕을 배반코자 하느냐 하기로 내가 대답하여 가로되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로 형통케 하시리니 그의 종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려니와 오직 너희는 예루살렘에서 아무 기업도 없고 권리고 없고 명록도 없다 하였느니라.”(느2:18-20)

여기 보면 업신여기고 비웃습니다. 그러면서 너희가 속국으로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너희가 독립해서 왕을 배반하려 하느냐? 그럴듯한 명목을 내세워서 방해 합니다. 여러분 이것을 기억하세요. 사단의 목적은 한가지입니다. 느헤미야를 낙심시키거나 느헤미야를 두렵게 만들어서 일을 중단시키기 위한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교회가 회복되기 위해 주님을 따라가면서 이 한가지만을 꼭 기억하십시오. 사단이 어떠한 모양으로 방해하든지 사단이 방해하는 목적은 한가지입니다. 여러분을 낙심시키거나 두렵게 만들어서 그 일을 중단시키기 위한 겁니다. 이게 사단의 목적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교회를 회복하기 위해서 나아감에 있어서 해야 할 일이 뭐냐?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질투를 가지고 하나님의 교회를 회복시키실 것이기 때문에 사단은 온갖 종류의 노력과 방법을 통해서 우리를 낙심시키고 우리를 두렵게 하고 겁먹게 만들어서 이 일을 중단시키려 하는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자원과 능력으로 이루실 것을 신뢰하고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느헤미야 4장 1-3절입니다. “산발랏이 우리가 성을 건축한다 함을 듣고 크게 분노하여 유다사람을 비웃으며 자기 형제들과 사마리아 군대 앞에서 말하여 가로되 이 비약한 유다 사람들의 하는 일이 무엇인가, 스스로 견고케 하려는가. 제사를 드리려는가 하루에 필역 하려는가 소화된 돌을 흙더미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 하고 암몬 사람 도비야는 곁에 섰다가 가로되 저들이 건축하려는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 하더라” 여러분 완전히 폐허 가운데 있는 예루살렘 성벽을 소수의 무리들이 올라가서 그것을 수축한다는 자체가 나라를 다시 세운다는 얘기인데 말도 안 된다는 말이지요. 그렇게 세워봐야 여우가 올라가도 무너질 것이다. 라고 조롱하는 겁니다. 여러분 사단이 때로는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가 하는 일을 조롱합니다. 하나님의 교회회복과 부흥 운운하는데 몇 명이나 모이는데 그러면 할 말이 없습니다. 교회회복, 좋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네 주제를 보라는 거지요. 그거 가지고 뭘 하겠냐는 얘기입니다. 이 나라의 교회가 회복되어지고……. 그 말은 맞는데 가당치도 않은 얘기 하지 말라는 겁니다. 여러분을 낙심시켜서 중단시키고자 하는 사단의 공격이 있음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사단의 목적은 여러분을 낙심시켜서 중단시키려 합니다.

사단은 이렇게 조롱하고 멸시하고 문제를 부각시키고 우리들의 연약함을 드러내고 때로는 비교하면서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부흥이나 교회회복을 추구하지 않아도 교회가 잘 성장하고 숫자가 모이고, 이번에 얼마짜리 교회를 지었다고 하고, 선교사를 몇 명 파송했다고 그러는데 그런 얘기를 듣고 나면 너무나 낙심되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사역초기에는 지방회 모임 같은데 가기를 싫어했습니다. 다른 목회자들하고 만나기를 싫어했습니다. 왜 가기 싫고, 만나기를 싫어했냐면 만나면 요즘 몇 명이나 모이냐고 물어보면 그 말 한마디면 제가 낙심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추구한다고, 하나님의 부흥이 어떻고 중보기도가 어떻고 이 나라 민족의 죄악이 어떻고 이 나라에 부흥이 비껴가지 말라고 중보기도하고,.... 그런데 몇 명이나 모이는데? 그러면 할 말이 없습니다. 이게 사단의 방해입니다. 제가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따르는 것을 중단했더라면 오늘이 있지 않을 겁니다. 그것 때문에 다시 낙심해서 세상적인 방법을 추구 했더라면 절대 오늘이 있지 않습니다. 그 당시에는 앞이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왜? 아직 보이는 게 없으니까. 진짜 안 될 것 같아요. 문제는 하나님을 제외하고 환경만 보고 하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다시 하나님을 봅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오셔야 가능하고 하나님이 오시면 달라질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만 의지 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여태까지 이게 사단의 시험인 줄 몰랐을 수 있습니다. 이게 사단의 방해입니다.

2. 일의 광대함을 들춰내서 낙심케 하고 실망케 합니다.

사단이 처음에는 무시하고 조롱하다가 안되니까 이제는 일의 광대함을 들춰내서 낙심케 하고 실망케 합니다. 그래도 느헤미야가 포기하지 않고, 그 말을 듣지 않고 하나님만을 의지해서 줄기차게 나아갑니다. 그래서 계속 성전이 세워져 가니까 사단이 그대로 가만히 있지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계속 방해하는 것 중에 하나가 뭐냐면 공격에 대한 얘기가 나옵니다. “이에 우리가 성을 건축하여 전부가 연락되고 고가 절반에 미쳤으니 이는 백성이 마음들여 역사 하였음이니라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아스돗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이 중수되어 그 퇴락한 곳이 수보되어 간다 함을 듣고 심히 분하여 다 함께 꾀하기를 예루살렘으로 가서 쳐서 요란하게 하자 하기로”(느4:6-7)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지는 일은 ‘It's great work' 위대한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 눈에는 작게 보일지 몰라도 그 결과는 너무나 놀라운 것이기 때문에 위대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는 큰 대가가 따릅니다. 뿐만 아니라 거기에는 큰 전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적이 공격한다고 그러니까 느헤미야가 유다 백성을 세우는데 반씩 나누어 가지고 한쪽은 보초를 서고 한쪽은 일하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열심히 하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거니까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농사라도 잘되어야 할 텐데 이상하게 흉년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행하시는 일에 동참하는 것, 대가가 없이는 안 됩니다. 그저 다른 사람들이 사는 것처럼 편히 먹고, 놀 거 다 놀고 그리고 남은 시간 투자해 가지고는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가치를 가진 일들은 절대 일어나지 않습니다. 성경의 역사를 보아도, 기독교 역사를 보아도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위대한 일이 일어난 적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일은 우리가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존재를 다해 따라갈 때 경험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당연히 대가가 따릅니다. 여러분 노아가 하나님의 행하심에 동참할 때, 그 당시 사람들과 똑같이 놀고먹고 자기와 자기 가족들의 안락을 위해서 살면서 방주를 지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가당치도 않은 일입니다. 나무 한그루 자르는데도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겠습니까? 그 당시 전기톱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그 큰 나무로 판자를 만드는 것은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이 걸렸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것은 큰 대가가 따릅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그 일을 통해서 이루시는 일의 결과는 그것을 위한 대가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큽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일을 위해 그렇게 수고하니까 하나님께서 내 삶에 복을 주셔서 다 잘되게 하나요?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느라 농사일을 보살필 시간이 줄어드니까 흉년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 가운데서도 성전을 수축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삶입니다.

미국의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도착한 해, 그들은 혹한의 겨울을 나면서 많은 사람들이 동사해 죽었습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갔는데, 우리 생각에는 신앙의 자유를 찾아 갔으면 하나님이 특별하게 날씨를 따뜻하게 해서 겨울에 안 얼어 죽게 해야지요. 그런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천신만고 끝에 신대륙에 도착했는데, 첫해 굶어서 죽고, 추워서 죽고, 그러면서도 씨앗을 아꼈고, 봄이 되었을 때 씨앗을 뿌렸고, 봄이 되어서 그들은 제일 먼저 교회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학교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집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수확하기까지 야생 칠면조만 먹고 살았고, 그리고 드디어 곡식을 거두었을 때, 그들은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며 감사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가 지키는 추수 감사절의 유래입니다. 그래서 미국 사람들은 지금도 추수 감사절에는 모든 사람들이 다 칠면조 고기를 먹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의 일에 동참한다는 것은 세상의 돈 많이 벌기 위해서 주님의 일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나에게 복 주셔서 5배로 벌게 해 주시겠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소중하고 중요하기에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고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겁니다. 대가 지불이 없이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마틴 루터를 통해서 종교개혁이 일어날 때 그의 삶을 보면 대가가 지불되었습니다. 그 주위에 있는 무리들에게도 당연한 대가가 따랐습니다.

그래서 산발랏은 공격하려고 하고 느헤미야는 거기에 대비하고 방어하는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볼 것이 뭐냐면 하나님을 따라감에 있어서 사단이 조롱과 멸시를 통해서 또는 모함을 통해서 낙심시키고 좌절시켜서 하나님의 일을 중단하게 하려고 하는데, 그래도 안 되면 공격하기도 합니다. 대적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이 대적하는 것에 대해서 몇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사단은 엄포를 놓습니다.
많은 경우에 사단의 공격은 엄포입니다. 목적은 하나입니다. 여러분을 두렵게 해서 중단시키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때 우리가 이길 수 있는 자세는 요한계시록 12장 11절에 나오는 말씀처럼 우리의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세가 필수입니다.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성경은 사단에 대해서 참소하는 자라고 나와 있고, 미혹하는 자, 온 천하를 꾀는 자, 삼키는 큰 영으로 나와 있습니다. 참소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여 이길 수 있고, 꾀는 것에 대해서는 진리의 말씀을 통해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삼키는 영을 이기는 길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11절 말씀이 그 답변입니다.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니까 주의 일을 위해 죽으면 죽으리라는 그 자세를 가지고 나아가야 이길 수 있습니다.

지금은 새물결선교회가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기독교 TV에도 나가고 광고도 많이 나가고 해서 포도나무 교회도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항상 사람들은 좋은 쪽과 나쁜 쪽으로 나눠집니다. 우리나라처럼 이단시비가 강한 나라가 없습니다. 한번은 제가 어느 교회 집회를 인도하러 갔는데, 그 교회에서 그 당시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이단 연구소에 전화해서 새물결선교회의 여주봉 목사가 이단인지 아닌지 좀 연구해 달라고 전화했다는 얘기가 들려왔습니다. 이런 얘기들이 여기저기서 한두 번 들려온 게 아닙니다. 그러면 그때마다 말은 안 해도 어떤 때는 두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저는 붙드는데 딱 한 가지 있는데 그게 이사야서 54장 말씀입니다. “14 너는 의로 설 것이며 학대가 네게서 멀어질 것인즉 네가 두려워 아니할 것이며 공포 그것도 너를 가까이 못할 것이라 15 그들이 모일지라도 나로 말미암지 아니한 것이니 누구든지 모여 너를 치는 자는 너를 인하여 패망하리라” 그러니까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만 볼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사단은 실제로 공격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엡6:16) 로마시대는 불화살이 가장 위험한 무기중의 하나였습니다. 이처럼 사단이 집중적으로 공격합니다. 한두 가지가 아니고 눈코 뜰 수 없을 만큼 사방에서 공격할 수 있습니다. 이 때 이기는 방법은 믿음의 방패입니다. 하나님만 의지하고 주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 자세로 주님만을 의지하여 나아가는 믿음의 방패, 그것이 사단의 공격을 이기는 길입니다. 사단은 머리가 좋아서 여러분들을 공격할 때 여러분의 약한 곳을 알고 집중적으로 공격합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돌이켜보면 제일 많이 공격당하는 것이 인간관계였습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친구들과 잘 어울리고 활달했는데, 시골에서 서울 친척집에 올라와 있으면서 1년 늦게 중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어려서부터 저는 병을 심하게 앓고, 거기다가 또 폐결핵 때문에 또 1년을 휴학했습니다. 바로 밑에 동생이 저하고 2살 차이인데 1년은 재수하고, 또 1년은 폐결핵 때문에 휴학하는 바람에 결국 동생하고 같은 학년이 되었습니다. 동생하고 같은 학교는 아니었지만, 내가 다니는 학교에는 동생초등학교 친구가 나하고 같은 학년인 겁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고등학교 때에는 1년 선후배가 강한데, 그래서 나도 걔네들한테 얘기하기가 머쓱하고 걔네들도 나한테 얘기하기가 머쓱하고 해서 인간관계가 닫히니까 제가 주로 혼자 있기를 좋아했습니다. 소풍을 가도 혼자 놀고, 그런 성격이다 보니까 오랜만에 길을 가다 누구를 봐도 막 쫓아가서 반가워해야 하는데 저는 또 만나겠지 하며 그냥 지나가도록 놔두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목회하는 것은 사람 상대하는 것인데, 이런 인간관계에서 원활하지 못한 부분이 있으니까 사단이 집중적으로 그 방면을 공격하는 겁니다. 저는 혼자 공부하는 것은 하겠는데, 그래서 저 같은 경우에는 설교준비 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것도 별로 어렵지 않은데, 다른 사람들은 전혀 노력 안 들여도 되는 일을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도저히 견디지 못할 만큼 사단이 집중적으로 공격하니까 명예로운 은퇴를 시켜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만큼 그렇게 사단은 약한 부분을 틈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오히려 저를 다듬으시고 빚으시고 아직도 많이 부족하지만 지금은 과거와는 비교도 안 되게 좋아지도록 다루셨습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사단의 공격은 여러분을 낙심시키고 겁을 주어서 중단시키려고 하는 것이기에 우리가 여기서 해야 할 일은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주님이 주님의 교회를 세우시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세로 때로는 자기 전체를 드려 주님만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인도를 따라 줄기차게 가야 합니다. 저도 그것 때문에 많이 고민했었습니다. 처음 개척한 교회에서 영어 성경공부 반을 할 때, 큰 교회에서 목사님의 오른팔 왼팔 한다는 분들이 한 학기 공부를 마치고나서 하는 말이 ‘목사님이 조금만 쉽게 가르쳤다면 우리가 벌써 이 교회로 옮겨왔을 텐데’ 그러는 겁니다. 그 때 제가 속으로 아니 이런 분들이 메시지가 강해서 못 올 정도면 누가 우리 교회에 올까 싶었습니다. 교회가 전혀 안 세워지는 것 같고, 눈앞이 깜깜했습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다시 일어났던 것은 제가 아무리 성경을 보아도 다른 종류의 가르침은 없는 것 같고, 그 때마다 가졌던 것은 ‘하나님이 오셔야 되는데, 하나님이 오시면 달라져’ 그 한마디였습니다. 그러니까 줄기차게 주님만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주님을 신뢰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셋째, 내부로부터의 공격입니다.
이게 무섭습니다. 외부의 공격보다 더 무서운 것이 교회 내부의 공격입니다. 느헤미야 4장 8-9절입니다. “다 함께 꾀하기를 예루살렘으로 가서 쳐서 요란하게 하자 하기로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기도하며 저희를 인하여 파숫군을 두어 주야로 방비하는데” 그러면서 10-12절을 보시면 내부에서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유다 사람들은 이르기를 흙무더기가 아직도 많거늘 담부하는 자의 힘이 쇠하였으니 우리가 성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하고 우리의 대적은 이르기를 저희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가 저희 중에 달려 들어가서 살육하여 역사를 그치게 하리라 하고 그 대적의 근처에 거하는 유다 사람들도 그 각처에서 와서 열 번이나 우리에게 고하기를 너희가 우리에게로 와야 하리라 하기로.” 이게 공격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공격인지를 잘 모릅니다. 어떤 사람들이 원수의 말을 그대로 받아다가 내부에 퍼뜨림으로서 사람들의 마음을 낙심시키고 좌절시키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의 교회가 회복되는데 가장 큰 대적중의 하나입니다. 원수의 말을 그대로 받아다가 사람들에게 퍼뜨림으로서 사람들을 낙심키시고 좌절시키는 겁니다. 그런데 사단이 어떤 사람들을 통해서 역사 하냐면 변두리에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역사합니다.

그 한 예로 제 아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서울에서 개척할 당시에 하나님이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을 아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이 율법주의인지, 자기 의에 기초한 율법주의가 어떻게 사단에게서 나온 가치관인지, 이런 부분들을 비춰 가실 때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 그러하니까 분명히 보겠는데 성도들은 아직 안 보이는 것입니다. 그때는 사람들이 무슨 말로 저를 공격하면 앞에서 아무도 막아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왜냐면 그 가치관을 이해하고 서 있는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그래도 제 아내는 잘 따라오다가 어떤 때는 저와 큰 말다툼을 합니다. 그 때가 언제냐면 제 아내가 어떤 경로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과 얘기하면 그들이 말했던 내용을 그대로 저한테 전달합니다. 안 보이니까 혹시 이러다 교회가 잘 안되면 어떨까하는 마음이 있으니까요. 그러면 저는 막 싸우다시피 하면서 봐라 성경에 이렇게 되어 있지 않느냐? 하면서 한 시간쯤 막 얘기하다보면 제 아내가 성경이 그렇게 되어 있으니까 또 안심합니다. 그리고 잘 따라오다가 또 어떤 경로를 통해 다른 사람과 또 얘기하면 또 넘어집니다. 왜냐하면 아직 하나님의 관점이 안보이니까요. 하나님의 진리 가운데 십자가의 복음과 신앙의 본질 가운데 세워져서 하나님의 길 가운데 세워져서 오늘날 팽배해 있는 인본주의 기복주의 율법주의적인 가치관이 왜 하나님 앞에 잘못되었고 얼마나 우리의 신앙이 왜곡되어 있는가를 볼 수 있는 안목이 안열려있으니까요. 영적분별력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따라가는 만큼 알게 되는데, 아직 안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그 말을 그대로 전합니다. 얘기를 들어보면 금방압니다. 자기 얘기가 아니고 다른 사람한테 들은 얘기를 그대로 전하는 것을, 저는 왜 그렇게 싸우다시피 하냐면 저는 또박 또박 말을 잘 못합니다. 설교할 때는 안 그래도 집에서는 우선 감정이 앞서가지고 막 그럽니다. 여러분 기억하실 것은 오늘날 교회에서 하나님의 길을 갈 때에 바로 이 문제 때문에 너무너무 많은 교회들이 어려움을 당합니다.

사람들이 원수의 소리를 듣고 그대로 전달해서 사람들을 낙심시키고 좌절시켜서 봉사하지 못하게 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사단의 수법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기억하실 것이 있습니다. 외부의 외적인 공격보다 내부의 공격이 훨씬 더 힘들 때가 많습니다. 신앙생활 하더라도 주님의 행하심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사람이 되어야지 변두리에 있는 사람들은 사단에게 더 잘 쓰임 받습니다. 여기에 보면 적들에게 가까이 있던 사람들에게서 이 말이 옮겨 옵니다.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모든 성도들은 사람들에게 어떤 얘기를 들을 때에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들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 말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인지 사단에게서 나온 것인지 개인의 의견인지를 분별할 줄을 알아야 됩니다. 분별력이 없으면 무엇이 옳은 길인지 무엇이 참된 길인지를 모르니까 그 사람이 좋은 동기를 가지고 했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사단에게서 나온 것인데 그것을 그대로 받아가지고 그대로 옮기니까 낙심시키는 겁니다. 민수기에 13장에 보면 12명 중에 10명의 정탐꾼들의 판단은 대단히 합리적이었고 상황판단이 빨랐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배후에 사단이 있었습니다. 그 말을 통해서 이백만명이 순식간에 오염됩니다. 왜? 그들도 똑같이 믿음이 없으니까요. 이것이 무섭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든든히 세워지면 그 다음에는 덜 흔들립니다. 왜냐면 그릇된 가치관의 소리가 들려와도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수 있기 때문에 그 영향을 안 받습니다. 그런데 초기에는 그것이 아직 안 보이는 상태이니까 그 말을 그대로 받아 200만 명이 저들의 소리에 순식간에 오염된 것처럼 오염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좋은 동기만 가지고 충분하지 않다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 때문에 속습니다. 얘기해 주는 사람이 나름대로 순순하게 좋은 동기를 가지고 위해서 얘기해 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좋은 동기만 가지고 절대로 옳지 않습니다. 분별력이 있어야 됩니다. 예수님을 보세요.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그것을 너에게 깨닫게 해준 분은 하나님이야, 하고 너무너무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십자가를 지실 것을 말씀하셨더니, 베드로가 하는 말이 주님 절대로 그렇게 하실 수 없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말할 때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을 생각해서 한 얘기입니다. 그 당시에 랍비와 제자의 관계는 주인과 노예와의 관계는 아니라고 노예들이 주인에게 하듯 섬기면서 배우는 것입니다. 그 당시 랍비라고 하면 대단히 존경 받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자기의 존경하는 선생님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잡혀서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고 그러니까 그것을 받아드릴 수 없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돌아서서 베드로를 향해 ‘사단아 물러가라’고 하십니다. 베드로는 진실로 예수님을 위하는 마음에서 그렇게 말했을지 모르지만 그 생각은 결국 하나님의 일을 생각해서 나온 게 아니고 사람의 일을 생각해서 나온 말이기 때문에 그 배후에는 사단이 있다는 겁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왜 그 소리를 그대로 전달하느냐면 상대방이 악한 의도를 가지고 해하고자 하는 모습이 보여 지면 당연히 틀린 것을 아니까 안 받아들일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보기에 매우 좋은 동기를 가지고 하고, 또 위하는 마음에서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배후에는 사단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관점에서 못 보니까 안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넘어가는 겁니다. 이게 너무 많습니다. 한 예로 포도나무교회가 분당 3층에 있을 때입니다. 한번은 남전도 회원들이 교회에서 철야기도를 한다고 해서 하라고 했습니다. 보통 남자들은 지구력이 약해서 기도를 하더라도 30분이나 1시간하면 모여서 얘기는 그 배로 합니다. 그런데 포도나무교회 남전도 회원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때 그분들이 왜 모였냐면 교회를 위해서 모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될까? 우리가 어떻게 섬길까? 그런 의도로 모였습니다. 다 좋은 동기로 모인 겁니다. 그리고 교회가 전체적으로 기도회를 월요일부터 시작해서 금요일이 되었는데 갑자기 하나님의 임재가 걷히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 뭐가 문제입니까? 하나님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그리고 찾는데 어떤 분에게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시기를 말에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말들이 결집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얘기를 했더니 그 자리에 참여했던 사람 중의 한 분이 남전도 회원이었는데, 우리 얘기를 하는 것 같다고 하는 겁니다. 그때 남전도 회원들이 모여서 한 시간 동안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고, 그런 다음에 모여서 좋은 의미, 좋은 동기에서 어떻게 하면 교회가 빨리 성장하고 자라고 할까? 얘기를 했다는 거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관점이 아직 하나님의 관점에서 못 보기 때문에 그 모아진 생각들이 지극히 인본주의적이고 오늘날 일반적으로 교회에 팽배해 있는 그러한 가치관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게 모아지니까 하나님을 따라가는데 방해가 되니까 하나님이 임재를 거두시면서 다루시는 겁니다. 그래서 그 즉시 제가 남전도회 기도회를 중단시켰습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여러분들이 좋은 동기를 가지고 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말씀 앞에 떠는 자세를 가지고 엎드려, 하나님의 관점과 하나님의 기준에서 생각하는 게 아니라 주위에 팽배한 신앙관이나 자기의 관점이나 자기생각을 따라서 얘기하는데 그게 사단에게서 나온 소리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모아지기 시작하면 성도들을 낙심시키고 좌절 시키고, 하나님을 떠나게 만들고, 분리시키고, 이간질 시킵니다. 그러면 교회는 박살납니다. 그래서 개척 초기에는 특별히 힘듭니다. 사람들이 아직 안보이니까요. 그리고 그들이 생각하기에는 좋은 동기만 가지고 하면 옳을 거라고 생각하니까요. 베드로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릭 조이너가 쓴 ‘빛과 어둠의 전쟁’이라는 책을 보시면 사단이 말을 타고 다니면서 성도들을 향해서 불화살을 쏘는데, 자세히 보니까 사단이 탄 말들이 성도들이고, 사단이 쏴대는 불화살이 성도들의 말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자기 관점에서 보고 말을 퍼트리기 시작하면 교회는 너무너무 심각한 도전을 받습니다. 이게 오늘날 제일 큰 공격중의 하나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처음 개척한 교회가 한참 자리를 잡으려하는 시점에서 하나님께서 옮기셨는데, 그 당시 하나님이 중보기도를 하기 원하셨습니다. 이시대의 하나님의 행하심을 바라보면서 나라와 민족의 죄악을 회개하면서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기도하는데, 저는 그렇게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기도하면 너무너무 좋은데 성도들이 처음에는 잘 따라오다가 차츰 안 오기 시작하는 겁니다. 알고 보니까 성도들이 지금 내 코가 석자인데 그래서 지금 이것을 위해서 같이 집중적으로 기도해도 될까 말까한데 이것은 놔두고 나라와 민족의 죄악이 어떻고, 하나님의 부흥이 어떻고, 너무나 가슴에 안와 닿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만 안 따라오면 되는데 서로 전화를 하면서 얘기를 하는 겁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사람은 얘기할 때, 자기 관점에서밖에 얘기하지 못하는 것인데, 만약 그 관점이 틀렸으면 심각한 것인데, 서로 전화하면서 다른 교회에서는 다 이렇게 하는데 왜 우리 목사님은 안 하는가? 우리가 같이 모여서 이 문제를 가지고 합심해서 기도해도 될까 말까 한데,... 큰 교회 목사님은 모여서 문제를 위해서 기도하고 그래서 성도들의 문제가 해결됐다고 그런다는데 그러면서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기도하고 있으면 저들이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것을 보이십니다. 그러면 제가 성도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용서해달라고 가로막고 서야 되는데, 그 때만 해도 제가 그것을 잘 몰랐습니다. 그것이 영적전쟁인지도 잘 몰랐고 그렇게 해야 할 줄도 몰랐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주일날 설교하면서 여러분이 주님을 안 따라오는 것도 옳지 않지만 따라오지 않으면서 여러분의 관점에서 전화로 이렇고 저렇고 얘기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성도들이 그 말을 들으면 속에서 더 화가 나는 겁니다. 누가 또 고자질했구나. 그러니까 목사가 강단에서 자기를 친다. 이렇게 나가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절대로 물러서지 않으십니다. 그때 한 가지 깨달은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대적해서 절대로 이기지 못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께 사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교회 가운데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려고 하시는데 성도들은 자기의 관점에서 그것을 이해하면서 안 따라가니까 결국 수평을 긋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느 시점에서 하나님이 교회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통해서 처음 개척한 교회인데, 그대로 두고 사임하고 다시 분당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 당시에 제가 성도들에게 하는 주된 얘기가 이것이었습니다. 왜 나를 통 안 믿느냐? 그러면 그 분들은 아니 우리가 목사님 믿지 왜 안 믿는다고 그러세요. 말은 그렇게 하지 않았지만 그런 취지였습니다. 예를 들어 여기에 선이 있으면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 이상은 절대로 못 보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나 그렇게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저를 지금 이렇게 인도한다고 그러면 이 분들이 저를 따라 오려면 자기가 여태까지 안다고 생각하는 것, 자기가 안다고 하는 지식, 자기의 경험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 말씀 앞에서 떠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그것이 겸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러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자세를 가지고 자기가 아는 것을 넘어서 순종함으로 따라와야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기는 다 순종한다고 신뢰한다고 하는데,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관점과 이해에서만 순종하기 때문에 그것만 가지고 자기들의 판단에 안 맞으면 안 따라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기는 좋은 동기를 가지고 하지만, 문제는 자기 관점이 하나님의 관점이 아닌데 자기 관점을 가지고 얘기가 되기 시작하면 그 때는 걷잡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겸손함이 없는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인 것 같지만 오늘날 너무나도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 말씀 앞에서 떠는 겸손함이 없습니다. 다 목사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 자기들이 경험하고 아는 범위를 가지고 목회자가 설교하면 설교하는 것을 자기들이 주관적으로 판단하고 평가해서 거기에다가 다른 사람의 의견을 붙여가지고 하려고 하니까 올바로 보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고 이해하지 못해서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 좋은 동기고 저를 신뢰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목회자를 존중하고 귀하게 여기고 다 좋다고 하는데 안 따라나서고 평행선을 긋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사단이 교회가 회복되는 것을 방해하는 가장 주된 무기중의 하나입니다. 너무나 많은 성도들이 이러한 사단의 궤계에 자기도 모르게 넘어갑니다. 특별히 교회가 초기에 세워지는 단계에서 심한 것 같습니다.

사실 이 때가 힘듭니다. 외부적인 것보다 내부적인 것이 더 힘듭니다. 그러면 이 때 리더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때 중요한 게 뭐냐면 절대로 사람의 말을 옮겨서는 안 됩니다. 말이 옮겨 다니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습니다. 다 자기의 관점에서 보는 말들입니다. 거기에 주위 사람들의 평가가 같이 들어가서 하는 말입니다. 이때에 목회자부터 시작해서 그 말을 차단해야 됩니다. 자신이 한 말을 변호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말하거나 말이 도는 것을 반드시 중단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입에서 나가는 말이 돌아서 여러분에게 다시 돌아올 때는 여러분이 말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왜곡되어 돌아옵니다. 그럼 또 그것을 변호하려고 얘기하면, 계속 더 악순환이 될 뿐입니다. 이렇게 돌아가면 돌아다니는 화살 수만 많아져서 진짜 잘못하면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게 됩니다. 교회를 닫고 새로 시작할 만큼 그렇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함된 소리가 돌아와도 자기부터 딱 차단해야 합니다. 입을 다물어야 합니다. 입을 다물수록 그 화살수가 줄어듭니다. 그리고 하나님만 보아야 합니다. 자기 변호할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이 때가 되면 다 해결해 주십니다. 우리가 우리를 변호하려고 해봐야 사실 그것은 꼬이기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의 머리를 드실 때는 사람이 다 알게 됩니다. 그래서 입을 딱 다물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아주 중요한 것 한 가지가 있는데, 절대적으로 상대방에 대해서 좋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서운한 마음이 들기 시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들기 시작하면 사단에게 놀아나는 것입니다. 사단이 그 마음을 이용합니다. 그것을 틈타서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화살이 돌아다닐 때 하나님께서 하시도록 하나님만을 신뢰해서 하나님만 의지할 뿐만 아니라 상대방에 대해서는 최대한 좋은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이 변화될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제가 첫 번째 교회를 섬기고, 두 번째 포도나무 교회를 섬기면서 배운 것 하나가 있는데, 하나님은 교회에 대해서 서운한 마음을 갖는 것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습니다. 제가 만약 교회에 대해서 성도들에 대해서 서운한 마음을 가지면 즉시 하나님이 임재를 거두십니다. 그래서 그럴 때도 있지만 회개하고 돌이킵니다. 어떤 때는 성도들에게 고백합니다. 그래서 한 가지 배운 것은 목회자가 교회(성도)에 대해서 서운한 마음을 갖는 자체를 하나님이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보존되게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영적인 전쟁에서도 중요합니다. 그래야 사단이 틈탈 그 발판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상대방에게도 변화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집니다.

넷째, 회유, 궤계, 계략, 간계, 모략을 합니다.
“산발락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과 그 나머지 그 퇴락한 곳을 남기지 아니하였다 함을 들었는데 내가 아직 성문에 문짝을 달지 못한 때라 산발락과 게셈이 내게 보내어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오노 평지 한 촌에서 서로 만나자 하니 실상은 나를 해코자 함이라 내가 곧 저희에게 사자들을 보내어 이르기를 내가 이제 큰 역사를 하니 내려가지 못하겠노라 어찌하여 역사를 떠나 정지하게 하고 너희에게로 내려가겠느냐 하매 저희가 네 번이나 이같이 내게 보내되 나는 여전히 대답하였더니 산발랏이 다섯 번째는 그 종자의 손에 봉하지 않은 편지를 들려 내게 보내었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이방 중에도 소문이 있고 가스무도 말하기를 네가 유다 사람들로 더불어 모반하려 하여 성을 건축한다 하나니 네가 그 말과 같이 왕이 되레 하는구나. 또 네가 선지자를 세워 예루살렘에서 너를 들어 선전하기를 유다에 왕이 있다 하게 하였으니 이 말이 왕에게 들릴찌라 그런즉 너는 이제 오라 함께 의논하자 하였기로……. 이는 저희가 다 우리를 두렵게 하고자 하여 말하기를 저희 손이 피곤하여 역사를 정지하고 이루지 못하리라 함이라 이제 내 손을 힘 있게 하옵소서. 하였노라”(느 6:1-7,9).

사단이 회유와 계략과 간계를 하고 나중에는 거짓으로 모략하기를 왕이 되려고 한다고 모략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단이 이렇게 함으로써 초점을 하나님의 일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자기를 변호해 주는 자기 방어에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주를 위해 기꺼이 자기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세로 그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맡겼습니다. 사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 당시에 왕을 모반하는 것은 완전히 역적 되는 것이고, 나라 전체가 몰살당하는 것인데 그런 소문이 퍼지니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사단이 두려워서 하나님의 역사를 멈추게 하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에게 나와서 자기를 변호하라는 겁니다. 그러나 이기는 길은 자기변호나 방어에 힘쓰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을 한편으로는 우리도 잘 알아야 될 것 같습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기 약 100년 전에 존 후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분이 정확하게 복음적인 메시지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때 가톨릭교회에서 우리와 변론하자 우리가 너의 목숨은 해치지 않겠다. 그러면서 초청을 했습니다. 그래서 존 후스가 올라갔는데 올라가자마자 이단하고는 약속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해서 곧바로 잡아다가 산채로 화형에 처해 죽였습니다. 사단이 하는 짓입니다. 존 후스는 느헤미야와는 달리 자기를 변호하려고 갔다가 죽음을 당했습니다. 나중에 마틴 루터에게도 오라 변론하자 그래서 올라갔는데, 그 때 바르트 바그 프레데릭 성주의 도움이 없었으면 마틴 루터는 죽었습니다. 분명히 이러한 부분에 사단의 역사가 있습니다. 간계가 있습니다. 궤계가 있습니다. 모함이 있습니다. 방법은 우리들로 하여금 두렵게 만들어서 하나님의 일을 중단하게 하거나 혹은 사단의 요구에 응하게 함으로서 그들의 목적을 이루려 하는데 있습니다.
  
다섯째, 거짓 선지자를 통한 궤계입니다.
“이후에 므헤다벨의 손자 들라야의 아들 스마야가 두문불출하기로 내가 그 집에 가니 저가 이르기를 저희가 너를 죽이러 올 터이니 우리가 하나님의 전으로 가서 외소 안에 있고 그 문을 닫자 저희가 필연 밤에 와서 너를 죽이리라 하기로 내가 이르기를 나 같은 자가 어찌 도망하며 나 같은 몸이면 누가 외소에 들어가서 생명을 보존하겠느냐 나는 들어가지 않겠노라 하고 깨달은즉  저는 하나님의 보내신 바가 아니라 도비야와 산발랏에게 뇌물을 받고 내게 이런 예언을 함이라 저희가 뇌물을 준 까닭은 나를 두렵게 하고 이렇게 함으로 죄를 범하게 하고 악한 말을 지어 나를 비방하려 함이었느니라. 내 하나님이여 도비야와 산발랏과 여 선지 노아댜와 그 남은 선지자들 무릇 나를 두렵게 하고자 한 자의 소위를 기억하옵소서 하였노라.”(느6:10-14)

사발랏이 그래도 안 되니까 이제는 선지자를 내세웁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뇌물을 받고 하는 거짓 선지자였습니다. 여기서도 느헤미야가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는 그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만을 의지하지 않았더라면 넘어갔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몇 가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 번째, 암살의 위협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도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 암살의 위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의 역사니 기독교 역사를 보면 그러한 부분을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사단이 우리를 낙심시키거나 겁을 주어서 일을 중단하게 할 뿐 아니라 여기에 보면 또 하나의 중요한 목적이 있습니다. 13절에 “He had been hired to intimidate me” 그는 나를 두렵게 하려고 고용된 자라 “so that I would commit a sin by doing this” 그래서 이것을 행함으로 내가 죄를 짓고. 자기 목숨 구하려고 죄를 짓게 해서 “and then they would give me a bad name” 그들이 나의 명성에 먹칠하는 일을 나에게 함으로서 “to discredit me” 목숨이 두려워 피하는 과정에서 죄를 짓게 함으로서 그의 명성에 먹칠을 하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가 겁쟁이라고 소문을 내서 느헤미야를 겁쟁이로 매도함으로서 느헤미야를 사람들 앞에서 지도자로서 자격이 없도록 하는 겁니다. 이것이 거짓 선지자를 통한 사단의 모함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통해서 교회를 회복시키려 하는데, 누가 심방을 좀 와달라고 해서 갔더니 여자가 잠옷을 입고 방에 있는 겁니다. 그래서 문을 닫고 바로 나왔습니다. 그랬더니 그 여자가 소문을 내기를 목사님이 우리 집에 와가지고 나를 덮치려고 했다고 매도함으로서 여러분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신 일 전체를 매도하려는 것입니다. 사단의 수법 중의 하나가 그겁니다. 아주 무서운 수법입니다. 때로는 목숨을 두렵게 하거나 위협을 하거나 어떤 경로를 통해서 죄를 짓게 함으로서 그 사람을 모함해서 하는 그일 전체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립니다. 사단은 오늘 날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 주님을 따라 가는, 교회회복을 위해 힘쓰는 리더들이 조심해야 할 부분들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하는 것에서도 분별력을 가지고 따라가야 되고, 자기 목숨 두려워서 변호하기 위해서 하는 일들은 하지 말아야 되고, 또 어떤 일에 있어서도 상대방이 우리를 모함해서 우리의 진실성이나 우리의 명예 자체를 매도시킴으로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행하시는 일 자체를 그야말로 쓰레기통에 집어던지도록 하는 그런 일을 하지 못하도록 분별력을 가지고 행해야 됩니다. 사단은 지금 그렇게 대적하고 있습니다.

스가라 3장에 보시면 하나님께서 두 번째 예루살렘 성전을 수축하시려고 할 때, 총독 스룹바벨과 함께 귀하게 쓰임 받았던 사람이 대제사장 여호수아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가 더해져서 쓰임 받았는데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사단이 계속 하나님 앞에서 고소하는 겁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고 사단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2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3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 4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5 내가 말하되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사자는 곁에 섰더라”(슥3:1-5)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대한 하나님의 질투를 가지고 예루살렘을 회복시키시고 하나님의 백성을 회복시키려고 하나님이 그 질투를 가지고 사단이 고소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여호수아에게 특별한 은혜를 주셔서 더러운 옷을 벗기고 새 옷을 입히고 정한 관을 쓰게 하십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주님을 따라감에 있어서 교회회복의 일을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보다 훨씬 더 강한 열망과 열정을 가지고 예수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를 위해서 하나님의 종들에게 때로는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를 부으십니다. 우리가 도저히 우리의 행함으로 그것을 받을 자격도 없는 은혜를 부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느헤미야의 경우처럼 영적인 분별력과 지혜를 가지고 우리가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단에게 넘어져서 우리가 하는 사역 자체에 대해서 왜곡시키고 우리 자체를 무너뜨림으로 하나님이 우리들을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일, 그 전체를 매도시키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게 사단의 궤계고, 이게 사단의 방법입니다.

지금까지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을 수축할 때, 산발랏의 무리들이 대적한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교회가 회복되어짐에 있어서 나타나는 사단의 대적들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사실 이러한 부분들이 오늘날 너무너무 팽배한 것 같습니다. 저 자신도 수 없이 많이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이러한 부분에서 영적인 눈이 열려 하나님의 길을 안다면 우리가 회개하고 돌이키고 회복되어질 겁니다. 그리고 오늘날 교회 안에 말 문제만 하더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길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사단의 도구로 쓰임 받아서 교회가 분열되고, 만신창이가 되는데도 자기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는다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하고 있는 경우가 너무너무 많습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회복되어지는데 원수의 궤계들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길을 따라 행함으로 놀라운 승리가 여러분이 섬기는 모든 교회 가운데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성도들도 하나님의 길을 알아서 여러분의 교회가 회복되는 과정에서 사단의 도구로 쓰임 받지 않았으면 좋겠고,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해서 다 귀하게 쓰이는 도구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참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겸손한 심령을 주시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떠는 자세를 주셔서 영적인 눈을 열어주심으로 분별력이 생겨져서 하나님의 길에 행할 수 있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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