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교회회복과 성전 된 삶
그동안 이사야 하반부에 나오는 하나님 백성의 회복에 관한 예언들을 살펴보면서 오늘날 어느 때보다도 하나님의 교회가 절실하게 회복되어야 할 필요가운에 있고 또 하나님의 부흥을 기다리는 이 시점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행하심에 동참할 수 있을까 하는 부분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저 개인적으로 설교하면서도 새로운 부분들을 많이 깨닫게 되었고, 아주 중요한 부분들이 많이 비춰졌다고 생각합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교회회복과 관련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의 회복과 관련해서 또 하나 많은 예언이 들어있는 곳이 어디냐면 두 번째 성전이 건축되는 것과 관련한 곳들입니다. 특별히 네 곳에서 다루고 있는데, 에스라하고 느헤미야는 역사서이고 학개하고 스갸랴는 선지서입니다. 거기에 보시면 제단이 회복되어지고, 나중에는 성전이 세워지고, 성벽이 세워지는데, 이 하나하나가 특별히 신약의 교회 가운데 하실 일과 많은 연관이 있고, 거기에 많은 예언들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구절들을 보면 많은 구절들이 그 당시 성전이 세워지는 일과 관련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신약에 관한 많은 예언들이 들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장에서는 두 번째 성전을 짓는 것과 관련하여 나타난 교회의 회복에 관한 부분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첫 번째 시간으로 성전 된 삶에 대하여 살펴보기 원합니다. 첫 번째 성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거기에도 많은 하나님의 진리가 들어있는데 구약에 나오는 성전이 세워지는 것과 관련해서 교회회복에 대한 많은 예언을 주신 것 중의 하나가 제가 믿기로는 그 성전을 짓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목적을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을 성전 삼고 거하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을 드러내 보이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두 번째 성전 짓는 일과 관련해서 교회회복에 대한 많은 예언들을 담고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 첫 번째로 성전 된 삶을 살펴보기 원하는데 어떤 부분인가 하면 구약의 나타난 성전에서부터 하나님은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성전 삼고 거하시기를 원하시는가?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가 어떻게 회복되기를 원하시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어떠한 것들이 필요하며 그것이 성경에 어떻게 예언되어 있는가? 하는 부분들을 같이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1.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실 때부터 그들 가운데 성전삼고 거하시기를 열망하셨습니다.
출애굽기 14장에서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너게 하신 다음에 애굽 백성들을 심판하시는 일이 있고, 15장에는 하나님께 찬양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면서 17절과 18절을 보면 이렇게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17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는 것이라 주여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18 여호와의 다스리심이 영원 무궁하시도다 하였더라” 우리가 일반적으로 성경을 이해하기로는 주의 기업에 산은 시온을 가리킵니다. 일반적으로 이해되기로는 성경에 나와 있는 성경의 원문은 읽은 대로 거의 잘 번역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이는’이 어디냐 하는 겁니다. 이는, 혹은 주의 기업의 산, 다시 말하면 시온은 하나님이 처소를 삼으시려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곳인데, 그 시온이 어디냐 하는 겁니다. 이 구절을 읽을 때 영어 성경을 보더라도, 그리고 성경학자들도 대부분 예루살렘 성전으로 이해 될 수 있도록 해석이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주의 기업의 산은 시온을 말하는 게 아니라 다른 곳으로 말하는 것으로 이 구절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는 다른 곳으로 이해하는 게 더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우선 하나는 여기 ‘주의 손으로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셨다.’는 완료형입니다. 앞으로 하실 것이다가 아니라 예비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물론 히브리 문법에 보면 예언적인 완료라는 게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아직 안 이루어졌지만 하나님이 반드시 그렇게 이루실거시기 때문에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완료형으로 쓰여진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도 그렇게 이해해서 주의 처소로 예비할 것이기 때문에 이미 예비하였다라고 말한 것으로 이해 될 수도 있습니다. 아까처럼 해석하는 것이 문법상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여기보시면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이미 예비했다.’ 이렇게 말하고 있고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그 구절을 시온을 말하는 걸로 이해하지만 저는 이것을 시온이라고 이해하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들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것을 뒷받침 할 수 있는 구절이 어디 있냐면 시편 114편 1-2절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며 야곱의 집이 방언 다른 집에서 나올 때에 2 유다는 여호와의 성소가 되고 이스라엘은 그의 영토가 되었도다. 라고 말함으로서 지금 제가 말씀드린 그러한 해석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성소와 여기에 거처는 앞으로 시온에 세워질 성전을 말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말하는 것임을 뒷받침해 주고 있습니다. 또 한 구절 더 봅니다. 민수기 12장 4-8절입니다. “4 여호와께서 갑자기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에게 이르시되 너희 삼 인은 회막으로 나아오라 하시니 그 삼 인이 나아가매 5 여호와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로서 강림하사 장막문에 서시고 아론과 미리암을 부르시는지라 그 두 사람이 나아가매 6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이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7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 8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겠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 아니하느냐” 여러분 모세가 하나님과의 가졌던 친밀한 교제는 출애굽기 33장 9절을 보면 압니다. “9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 기둥이 내려 회막문에 서며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렇게 친밀함을 허락하신 이유는 모세는 하나님의 온 집에 충성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럼 여기서 말하는 거처와 처소는 뭘 말하는가? 성전을 말하는가? 아닙니다. 모세는 제사장이 아니었습니다. 이 구절의 해석을 어디서 볼 수 있냐면 히브리서 3장 2절을 보면 명백히 볼 수 있습니다. “저가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충성하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충성한 것과 같으니” 다시 6절을 봅니다. “그리스도는 그에 집 맡은 아들로 충성 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에 집이라.”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집은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출애굽 사건을 보아도 그렇고, 민수기를 보아도 그렇고,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집이고 하나님의 처소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시대부터 하나님이 의도하신 바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처소삼고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을 삼으시고 하나님이 성전삼고 거하기를 원하셨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다른 구절들을 더 보면 선명히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신약성경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구약성경을 보더라도 명백하게 사람이 지은 그 성전에 하나님이 거하시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 예로 이사야서 66장 1절을 봅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하나님이 거하실 성소, 하나님이 거하실 집이 사람의 손으로 만든 집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열왕기상 8장 27절을 보면 예루살렘 성전을 완성해 놓고 하나님께 봉헌하면서 기도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까.”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지어놓고 하는 말이 하늘의 하늘이라도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지 못하는데 하물며 내가 지은 이 성전에 거하시겠습니까? 라는 겁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말하거나 솔로몬을 통해서 말하거나 성전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기도하는 장소입니다. 그러니까 신약의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채찍을 만들어 그들을 내어 �으시면서 “내 아버지의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다.”라고 그러셨는데 예수님이 정확하게 하나님의 의도를 말씀하고 계신 걸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로 의도된 게 아니고,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으로 하나님이 계시는 집으로 의도된 것이 아니고, 그것은 기도하는 집으로 의도되었고 성경은 명백하게 말하기를 사람이 지은 곳에 하나님이 처소삼고 거하시지 않는다라고 명백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15장만 하더라도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이 예비하신 처소, 하나님이 하나님의 손으로 지으신 성소라고 그랬는데 그것은 앞으로 지어질 예루살렘 성전을 말하는게 아니라 시편 114편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이 하나님의 손으로 애굽에서 건져내신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이 손으로 지으신 성전이라고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명백하게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아까 말씀드린 대로 해석하는 것이 성경적으로 옳은 것을 여러 경로를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볼 때에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는가하면 구약시대부터 하나님의 의도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성전삼고 거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열망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성전이 지어졌느냐? 그 성전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성전삼고 거하시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중요한 그림자였습니다. 그래서 이 성전 짓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성전삼고 거하시는 삶을 위한 중요한 진리가 거기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왜? 그 그림자로 지어졌기 때문에. 그래서 많은 예언이 그 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뿐만 아니라 그러기 때문에 모세 시대만 하더라도 성막이 어디에 지어졌냐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진 한가운데에 두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거하시며 운행하시며 두루 행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열망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2.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하나님의 성전으로 삼으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이 출애굽시대부터 있었는데, 그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을 통해서 성취되느냐?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다시 말하면 구속의 사건을 통해 그 하나님의 열망이 성취됩니다. 그래서 특별히 고린도 후서에 보면 두 가지가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 가지가. 하나는 예수를 믿는 각 성도가 그 안에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거하시는 하나의 성전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교회가 그 안에 성령을 통해 하나님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두 가지가 뭘 통해 되어졌느냐?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성취된 것입니다. 그 한 구절을 보시겠습니다. 고린도 후서 6장 14절입니다. “너희는 믿지 아니한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레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아니한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여기 하나님의 성전은 누구를 가리킵니까? 바로 그 다음 줄에 나옵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여기 우리는 고린도 후서 3장에서는 복수로 교회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고린도 후서 6장에 나오는 우리는 단수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개개인의 성도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집이 되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처소 하나님의 성소가 되었다는 겁니다. 무엇을 통해서 성소가 되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예수님이 구속을 이루시므로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예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을 뿐 아니라 성령을 우리 속에 두셔서 성령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므로 우리(개인과 교회)가 하나님의 성전이 된 겁니다.
그러면서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고후6:16) 하나님의 성전이 된다는 말이 뭐냐면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셔서 우리 가운데 두루 행하시고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이 되며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건 단순히 언약의 관계를 통해서 부자지간이 되는 그런 차원을 말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친히 그 가운데 거하시며 운행하시며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나타내시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할 때 그들 가운데 거하시며 그들의 앞서가시며 그들을 보호하시며 그들을 위해 역사하시며 그들 가운데 운행하셨던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이렇게 성경에 예언된 대로 우리가 성전이 되었다 그러면서 구약의 한 구절을 더 인용합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고후6:17-18) 이 말은 우리말 성경에는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영어성경이나 다른 성경을 보시면 이게 구약성경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인용하면서 구약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그대로 너희가 성전이 되었다. 그러므로 너희는 성전이기 때문에 이러한 삶을 살라 라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 16절을 먼저 다시 봅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영어성경에 보면 “As God has said”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이라” 그러면서 말씀하신 바를 인용합니다.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쭉 인용하는데, 이 말씀이 어디에 나옵니까? 바로 레위기 26장 12절과 예레미야 32장 38절, 그리고 에스겔 37장 27절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이 말씀을 사도 바울이 인용하면서 이렇게 하나님이 약속하신대로 우리가 성전이 되었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면서 여기 나오는 구절을 보시면 놀라운 뜻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선 레위기 26장 12절을 보겠습니다.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 하나님이 되고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니라.” 그랬습니다. 그런데 11절을 보십시오. “내가 내 장막을 너희 중에 세우리니 내 마음이 너희를 싫어하지 아니할 것이며.” 우리가 레위기를 읽을 때 11절에 내가 내 장막을 너희 중에 세우리니 이렇게 말할 때 여기에 나오는 장막을 일반적으로 모세에 의해 세워진 성막이라고 이해합니다. 그런데 신약성경 고린도 후서 6장에 보니까 사도 바울이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성경에 예언된 대로 우리가 성전이 되었다라고 말하면서 이 구절을 인용하는 것을 보면 그 당시 이해로는 성막을 의미한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의미했던 걸 볼 수 있습니다. 이것만 봐도 구약 때부터 성전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로 의도된 게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성전삼고 거하시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그것이 그 목적이 그 열망이 이루어졌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고 그 다음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에스겔서 37장을 보겠습니다. 에스겔서 37장은 말세에 관한 예언입니다. 하나님 백성의 회복에 관한 놀라운 예언입니다.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그들에게 다 한 목자가 있을 것이라 그들이 내 규례를 준행하고 내 율례를 지켜 행하며 내가 내 종 야곱에게 준 땅 곧 그 열조가 거하던 땅에 그들이 거하되 그들과 그 자자손손이 영원히 거기 거할 것이요. 내 종 다윗이 영원히 그의 왕이 되리니 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 또 그들을 견고하고 번성하게 하며 내 성소를 그 가운데 세워서 영원히 이르게 하리니 내 처소가 그들 가운데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내 성소가 영원토록 그들 가운데 있으리니 열국이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거룩히 하는 이스라엘인 줄 알리라 하셨다하라.”(겔37:24-28) 여기에 보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을 회복시키실 것을 말하면서 뭘 세우실 거라고 했냐면 성소를 세우실 거라고 합니다. 그런데 세대주의 신학자들은 제 3의 성전이 세워질 거라고 얘기합니다. 세대주의 신학자들 외에는 그것을 동의하지 않습니다. 왜 동의하지 않느냐면 제 3의 성전이 세워져야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면 구약의 성전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곳이고, 거기에서 예수님의 구속을 상징하고 예표로 보여주는 제사가 드려지게 되었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림으로서 더 이상 어떠한 제사도 필요없게 되었는데 뭣 때문에 다시 성전이 짓습니까? 성전이 다시 지어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를 보면 말세지말에 하나님 백성의 회복에 대해 말하면서 바로 거기에 하나님이 성소를 지으실 거라 그랬는데 고린도후서 6장과 대조해 보면 여기에 의도하셨던 성전도 예루살렘 성전과 같은 성전이 세워지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성전삼고 거하실 것을 말씀하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뭘 볼 수 있느냐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실 때부터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처소 하나님의 성소로 삼기 원하셨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그것을 이루신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3. 이 언약이 온전히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고린도 후서 7장을 봅니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이 하자.” 6장에서 구약성경을 쭉 나열하면서 구약의 예언된 대로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다.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에 거하시며 두루 행하시며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지는 그 일이 이루어지게 되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약속하신 바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온전히 성취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지금 이때까지 온전히 성취되었으면 약속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로 성전삼고 거하시는 그것이 아직 약속으로 남아있다는 겁니다. 1절에 보시면 그것이 온전히 성취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에베소서 2장 21절을 보면 더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님과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이미 성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아직도 우리가 이 약속을 가지고 있다라고 말하면서 에베소서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가 되기 위하여 지어져 가고 있다고 이렇게 말합니다.
베드로전서 2장 5절입니다.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찌니라.” 영어 성경에 보면 “you also, like living stones” 산돌들처럼 너희들도 “are being built into a spiritual house” 하나님의 신령한 집으로 지어져 가고 있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약에서 하나님의 열망대로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약속이 이미 성취된 것이 아니라 아직도 하나님의 성전으로 지어져 가고 있습니다.
4. 성전 된 삶의 의미는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우리 가운데서 두루 행하시며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나타내시는 그러한 삶입니다. 이 성전 된 삶을 살았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이 성전 된 삶의 가장 온전한 성취는 우리가 하늘나라에 가면 이루어질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친히 거하시며 두루 행하시며 주님은 우리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는 저의 백성이 되어지는 그 모든 언약이 새 하늘과 새 땅이 올 때 가장 온전히 성취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전에 예수님께서 성전을 깨끗이 하시는 장면이 복음서에 나옵니다. 저들이 예수님께 표적을 보이라고 했더니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2장 19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륙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어느 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을 깨끗케 하셨습니다. “18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그랬더니 사람들이 그런 겁니다. 그 당시 헤롯 성전은 두 번째 성전으로 지어지고 있었습니다. 주전 20년 전부터 그 시점까지 46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실재로 그 성전은 주후 70년에 파괴되는 그 순간까지 증축공사가 끝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엄청난 성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이 성전을 헐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세우리라’그랬더니 이 사람들이 비웃으면서 말하는 것입니다. 이 성전이 46년 동안 그 엄청난 장비와 인력과 돈을 들여서 지은 것인데 당신이 어떻게 사흘 만에 짓겠다는 말이냐. 이렇게 말할 때 21절에 뭐라고 말하고 있는가 하면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그러니까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들이라고 인식했는데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었던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성전 된 삶을 사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로 말하면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거하시며 두로 행하시며 하나님은 예수님의 하나님이 되시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그러한 성전 된 삶을 사셨습니다. 그렇게 살았던 대표적인 예가 요한복음 14장 7-11절입니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어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우리는 이 구절을 일반적으로 어떻게 이해하냐면 예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임을 증거하는 구절이라고 이해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렇게 이해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체이신 것이 맞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비어 인간의 형체로 오신 것도 맞습니다. 이 땅에 계실 동안에도 온전한 하나님이시고, 또 온전한 인간이셨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은 그것을 말하는 구절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다음에 ‘나를 믿는 자도 내가 하는 일을 할 것이다’라고 말하는데. 그러면 이 말이 안 맞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중에 어느 누구도 예수님처럼 그러한 의미의 하나님의 아들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 성전삼고 거하시며 두루 행하시며 하나님의 일을 행하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볼 때에 예수님을 통해서 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이 그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성대를 빌려서 예수님의 의지와 상관없이 말씀하신다는 얘기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민감하셔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바를 듣고 말했기 때문에 그것이 예수님께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하나님의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 성전삼고 거하시며 하나님의 일을 마음껏 하시는 그러한 삶을 사셨다는 것입니다. 성전 된 삶의 가장 표본이 누구냐면 예수님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처음부터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성전삼고 거하시기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개인과 교회가 예수님의 성전이 되었다. 그런데 아직도 이것이 약속으로 남아 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의도는 어떤 장소에 거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는 마치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성전삼고 거하시며 예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계시고 하나님이 두루 행하시는 가운데 예수님이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믿음으로 순종할 때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심으로 하나님의 목적과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일이 놀랍게 이루어지는 이러한 삶을 모든 성도와 모든 교회가 살기 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실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목적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진 한 가운데 성막을 세우신 것은 이제 그들이 임의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그 가운데 거하시고 그 백성 전체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서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믿음으로 동참함으로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그들을 통해 열방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시며, 그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서 주의 백성들을 성전삼고 거하시기를 원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 보십시오. 오늘날 우리는 이론적으로 개개인의 성도와 교회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다 압니다. 성경을 보면서 교리적으로 신학적으로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다 압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 안에서 했던 것처럼 개인뿐만 아니라 교회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하나님의 운행하심을 보고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를 보고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면서 하나님의 행하심을 따라 삶을 다해 동참함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시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며 하나님의 목적을 나타내시는 그렇게 살아가는 성도와 교회가 우리나라 가운데 얼마나 있습니까? 우리는 이론적으로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열망을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심은 바로 성도들로 하여금 이 삶을 살도록 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구속을 이루시고 그 속에 성령이 오게 하셨는데 그래서 성전되게 하셨는데 우리는 이론적으로 교회가 하나님의 성전이요 개인이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은 잘 하면서도 실재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바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게 문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먼저 성전 된 삶을 사심으로 예수님을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하실 만큼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 거하셔서 두루 행하셔서 하나님이 예수님의 아버지가 되시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시는 그 가운데 하나님이 역사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는 겁니다. 이게 왜 중요하냐 하냐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교회를 회복시키시고 말세지말에 하나님의 백성을 회복시키는데 하나님이 바로 이것을 성취시키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실 때부터 가지고 계셨던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그 열망을 하나님의 교회를 향한 그 열망을 성취시키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지금도 성전이 지어져 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의 최종적인 성취는 우리가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할 때 최종적으로 이뤄지겠지만, 그러나 그 전이라고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 사셨던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안에 성전삼고 거하시며 운행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회복의 한 중요한 모습이고, 그리고 다가오는 부흥을 준비하는 중요한 모습입니다. 그래서 교회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뜻을 분별하여 순종하는 것을 반드시 배워야 합니다. 왜? 하나님은 하나님의 교회를 성전삼고 거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5. 성전삼고 거하시는 데 있어서 중요한 요소
첫째, 겸손과 순종입니다.
제가 설교할 때 폴 케인 목사님이라고 가끔 언급하는데, 제가 처음 하나님을 따라갈 때 폴 케인 목사님의 설교 테이프를 들으면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분은 초등학교 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신학교도 가 본 적이 없습니다. 그 분은 태어날 때부터 기적으로 태어났고, 하나님의 놀라운 치유의 역사가 나타났을 때, 하나님이 사역에서 뒤로 물러서라고 해서 기다리다가 하나님이 말세에 새 부대의 일꾼으로 세우시겠다고 하면서 80년대 하나님이 다시 세우시고 여태까지 혼자 계시면서 지난번에 한국에 오려고 하다가 몸이 아파서 못 오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참으로 그 분에게 많은 일들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최근에 토미 테니의 책 다윗의 장막이 번역되었다고 들었는데, 토미 테니 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오늘날 미국 내에서 많은 분들이 직접 영향을 받지 않았더라도 그 분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참으로 귀하게 세우시는 분인데, 이 성전 된 삶만 하더라도 그 분의 설교를 제가 들으면서, 또 이러한 부분을 보면서 아! 이러한 부분이 중요하겠다.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분은 이 부분을 신학적으로 이해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감동을 따라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분에게 비추신 그 하나하나가 제가 성경을 보면 볼수록 그 모든 부분을 성경적으로 볼 때 조금도 틀림이 없이 분명하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의도를 나타내고 계신 것을 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그러한 부분들이 선명하게 확인되어지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의중이 하나님의 목표가 보여지는 겁니다.
그분이 하루는 어거스틴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우리 속에 하나님을 모셔야만 안식이 있도록 창조하셨다고 했는데, 그 말을 묵상하다가 잠이 들었는데, 자다가 뭔가에 가슴을 눌러 숨을 못 쉬겠더랍니다. 그래서 눈을 떠 보니까 믿거나 말거나 예수님이 자기 옆에 서 계시더래요. 그 분 같은 경우에는 예수님이 나타나신 적이 여러번 있다고 그러신 것 같습니다. 우리 같으면 조그만 사건도 크게 과장할 텐데 그 분은 큰 것을 아주 작게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 앞에 잘 얘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타났는데 손가락으로 이렇게 누르고 계시더래요. 그러니까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은데,. 그러면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네가 우리가 안식할 처소가 하나님 안이라고 그랬는데 내가 안식할 처소는 어디 있느냐? 아까 말한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안식할 처소를 찾으시는데. 폴 케인 목사님만 하더라도 그것을 읽고 난 다음에 너무너무 하나님 앞에서 회개했는데 자신이 하나님이 안식하고 거하실 수 있는 처소가 되지 못한 것에 대해서 회개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러면서 그 분이 하는 얘기가 이겁니다. 'dividing line'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과 쓰임 받지 못하는 사람의 분기점, 나눠지는 선이 어디가 될 거냐. 겸손과 순종이 될 거라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너무너무 중요한 말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한 예언자가 그랬다고 해서 제가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명백하게 말하는 너무너무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사야서 66장 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모슨 집을 지을꼬 나의 안식할 처소서 어디랴.” 하나님이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2절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사람의 손으로 만든 그 곳에 계시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안식할 처소는 어디인가?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 이런 자가 바로 하나님이 안식할 처소가 된다 그 말입니다. 한 구절 더 읽습니다. 이사야 57장 15절입니다. “지존 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어디에 거하시는가?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 여기 보십시오. 영원무궁하신 하나님이 어디에 거하시는가? 안식할 처소가 어딘가? ‘겸손한 자에게’입니다.
저희가 이번 주간에 포도나무교회에서 건축을 위한 특별기도회를 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이 하시기를 원하시는 것 같아서 제가 앞에서 인도하면서 하나님께 경배하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죄를 회개하라고 그러시는데 그 중에 하나가 뭐였냐면 높아진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제가 얘기하고, 또 자기 생각으로 판단하고 후욕하는 것, 상대방에 대해 서운한 마음을 가진 것을 회개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비춰 가시는데 너무너무 두려운 겁니다. 포도나무교회에 해당되는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포도나무교회에만 해당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기 있는 여러분들도 어쩌면 해당될 수 있고, 특별히 여기 오시되 오래 오신 분들도 해당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높아진 마음을 비추시는데,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행하시는 일들이 너무나 놀라운 일들입니다. 그런데 그 일들이 전혀 우리 때문이 아닙니다. 저 때문도 아니고 포도나무교회 성도들 때문도 아닙니다. 여기 화요모임에 오신 여러분들 때문도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순간도 설 수 없는 질그릇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우리 속에 어떠한 선한 것도 없는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순간도 설 수 없는 자들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전혀 보지 못한 채, 그리고 하나님이 행하신 그 모든 것들이 전혀 우리 때문이 아닌 것을 철저하게 알지 못한 채 자신을 전혀 보지 못하고 영적인 우월감과 높아진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저와 포도나무교회 성도들이 비춰지는데 너무너무 두려운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비추시냐면 하나님이 어떠한 놀라운 일을 행하시든지 그것은 전혀 우리 때문이 아니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순간도 설 수 없기에 자신의 그러한 모습을 인식하고 하나님 앞에 통회하는 심령으로 주님의 은혜를 구하여 주 앞에 절박하고 갈급한 심령으로 서서 그 분의 은혜를 구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오늘 아침에 설교를 준비하면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고 계신지를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자에게 성전삼고 거하신 줄 아세요. 그런 자들에게 성전삼고 거하시겠다고 지금 말씀하신 거예요. 그리고 그리로 돌아오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역사로 인해서 높아진 생각들을 깨뜨리고 자신을 보지 못하는 어두운 눈으로 인해서 자신의 상태를 전혀 깨닫지 못하는 어두운 눈으로 인해서 높아진 생각을 회개하고 돌이켜서 하나님의 거하실 만한 처소가 되는 올바른 자세로 돌아오라는 겁니다. 한 편으로 너무나 두려워하면서 한 편으로는 너무나 감사해서 위로가 되는 겁니다. 왜냐면 지금 그리고 초청하시는 것이니까요.
여러분을 통해서 혹은 여러분 가운데 어떠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든지 그것은 전혀 여러분 때문이 아닙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떠한 놀라운 일을 행해 오셨든지 그것은 전혀 여러분 때문이 아닙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순간도 설 수 없는, 여러분 속에는 어떠한 선한 것도 없는 진토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높아진 생각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눈이 철저하게 멀었든지 자신의 그러한 상태를 전혀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당연한 것으로 여겨 교만 가운데 빠져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비춰 가시는 것이 뭐였냐면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후욕하고 이런 것은 오래전부터 죄라는 것을 하나님이 수없이 다루었기 때문에 그런 기본적인 것은 다 내려졌습니다. 다른 일반교회 성도들이 얘기할 때 제가 그 옆에 서면 머리가 돌려고 해서 못 있겠는 겁니다. 너무너무 세속적이고 너무너무 인간적이고 너무너무 상대방을 평가하고 욕하고 후욕하는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오래 전에 깨졌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밖에 나갔다가 들어오면 살 것 같습니다. 그런데 뒤에서 후욕하고 욕하고 그런 것이 아닌 데도 최근에 어떤 것이 있었냐하면 상대방을 자기 관점에서 평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 대해서 못 마땅한 마음을 갖습니다. 그 사람에게 서운한 마음을 갖는 겁니다. 그 사람에 대해서 점점 다른 사람에게 얘기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어디에서 출발한 것인지 선명히 보이시냐면 높아진 마음에서 출발한 겁니다. 자신을 보지 못하는 마음에서 출발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원하시는 것은 마음이 겸손하며 심령에 통회하며 하나님 말씀 앞에 떠는 자 그게 그 자세가 아닐까요? 그러한 자세를 가지고 지금도 주님의 은혜가 없이는 순간도 설 수 없음을 인식하여 주님의 은혜가 절박하게 필요하고 주님의 성령이 절박하게 필요하고 주님의 회복의 은혜가 절박하게 필요하고 주님의 부흥이 절박하게 필요하오니 오 주여! 저를 돌아보소서라고 주 앞에 나와서 주님을 향해 갈급해 할 때 그것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가 가져야 할 자리이고 그러한 자들에게 거하시겠다고 하셨고, 그러한 자세를 가질 때 아까 말한 판단이나 서운한 마음이나 불평이나 이런 것은 자리도 자리 잡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제 끝나고 돌아가는데 한 분이 감동을 주셨다고 그러면서 말하는데 내용인즉 이런 겁니다. 부흥을 위해 회복을 위해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감동하시는데 절박함이 적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이사야서 66장 2절에 성전 된 삶을 위해 그렇게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 마음에서 벗어나 우리의 마음이 높아져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며 쓰실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분기점은 겸손과 순종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찬양 좋았지요.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알맹이는 없었습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그 은혜의 보좌 앞에서 그 분의 영광을 여러분의 눈으로는 보지 못하지만 여러분이 그것을 인식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함 가운데 여러분의 마음에서부터 보좌에 앉으신 그 하나님께 그렇게 찬양 드리신 분 있으면 손들어 보세요. 제가 보기에는 열 명도 안 될 것입니다. 이 가운데 소수의 무리라도 그렇게 예배 드렸더라면 오늘 오후 찬양에서는 하나님의 임재는 전혀 달랐을 것입니다. 이 곳이 떠나 갈 만하게 큰 소리로 했지요. 그러나 그 중심에는 알맹이가 없었습니다. 왜요? 그 중에 하나는 우리 마음이 높아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시는 마음, 즉 겸손하며 심령에 통회하며 하나님 앞에 떠는 그 자세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눈이 가려져 있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전혀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나 우리를 통해서 행하시는 것이 마치 우리 때문인 것처럼 마음이 높아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예배 회복을 논할 때에도 오늘날 다른 교회의 예배회복의 필요성은 인식했을지 몰라도 나와 내 가정을 위하여 예배가 절실하게 필요한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다고 믿습니다. 사실 오늘 아침에 제가 이것을 설교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어제 저녁부터 제가 오늘 무엇을 설교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처해있는 상황을 비추시며 그 삶으로 초청하고 있습니다. 감사한 것은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이 너무 너무나 한편으로 두렵고 떨리고 하나님 앞에서 너무나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웠지만 한편으로 오늘 아침에 우리의 이러한 부분을 보면서 이러한 삶으로 더 회복되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겸손과 순종이 하나님께 쓰실 사람과 그렇지 못할 사람과의 나누어지는 분기점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한복음 14장 21절입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순종하는 자에게 주님을 나타내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3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누구에게 하나님께서 성전삼고 거하시겠다고 하시냐면 순종하는 자라고 하십니다. 이 부분을 우리가 간단히 살펴볼 부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으면 하나님이 앞서 가시면서 하나님의 의도를 우리에게 보이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이실 때 우리는 갈등하게 됩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일은 우리의 자원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요. 우리가 가진 믿음은 결국 우리의 행동으로 나타나야 되는데 행동은 드러나지 않으면 말로는 아무리 강한 믿음이 있다 할지라도 전혀 믿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순종하려면 하나는 삶의 조정과 결단과 순종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으로 알게 된다고 핸리 블랙가비 목사님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책에서 말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험하기 원하면서도 삶의 조정과 순종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거기에는 대가가 따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순종은 단순히 이것해라 그랬더니 이것하고, 저것해라 그랬더니 그것하고 이런 것도 포함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우리가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살 때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행하시면서 하나님의 일을 보이실 때,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에 우리가 같이 동참하기 위해서 우리의 삶을 조정해서 순종함으로 그 분과 동행하는 것인데 여기에는 그 일을 감당하기 위해 어떠한 대가가 따를 지라도 기꺼이 그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주님의 행하심에 맞추어 삶을 조정하여 거기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이 없이 하나님을 절대로 경험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그 어떠한 사람도 그러한 삶이 없이 절대로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이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 삶의 대가가 따르기 때문에 조정과 순종은 하기 원치 않으면서 하나님을 경험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 와서 은혜 받는다고 해서 하나님을 경험할 줄 아십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여기 5년 되면 변할 것 같습니까? 10년 와도 변하지 않습니다. 화요모임을 통해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여러분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며 어떻게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이며 어떻게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동참할 수 있을 것인가? 하나님의 행하심에 동참하는 것은 무엇이 요구되는 것이고 어떻게 믿음으로 주님을 의지할 것인가? 이러한 하나님의 길을 가르쳐 주는 것이지 여러분이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그렇게 구하고 찾고 하나님의 행하심을 따라 여러분의 모든 삶을 조정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가고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순종하게 될 때에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지 몇 가지 배우고 기도 받고 찬양 몇 가지 드리고 설교 듣는 다고 절대로 변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쓰임 받으려면 겸손과 순종이 필수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거기에는 하나님의 행하심에 동참하기 위해서 치러야 할 많은 대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세요. 여러분이 치루는 대가가 무엇이든지 여러분이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얻어지는 열매에 비하면 그것은 진짜 아무것도 아닙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의 경우를 봐도 그렇습니다. 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모든 사람들의 경우에도 그렇습니다.
둘째, 거룩함과 구별된 삶입니다.
성전 된 삶을 살기 위한 표시(mark)는 거룩함(holiness)과 구별(separation)이 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6장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제가 그렇게 찬양할 때에 제가 화요일이라서 그냥 갔지만 포도나무교회 예배였다면 절대로 그냥 설교하지 않습니다. 마음도 없는 찬양, 그렇게 드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합당치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포도나무교회 강단이었으면 설교하기 전에 반드시 그것을 지적했을 것이고 다시 회개하든지 기도하든지 다시 찬양하든지 해서 마음을 올바로 바꾼 다음에 설교를 시작했을 것입니다. 제가 화요모임이니까 그냥 설교했습니다.
그럼 하나님의 성전 된 표시가 무엇이냐? 거룩함과 구별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15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고후6:14-15) 이만큼 철저하게 구별되라는 그 말입니다.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아버지가 될 것이라 너희는 내게 아들과 딸이 될 것이라 그랬습니다. 그럼 이 구절이 어디서 나온 줄 아십니까? 이 구절이 구약에 나오는 말씀을 인용하고 있는데, 철저히 분리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서 52장입니다. “8 들을찌어다 너희 파숫군들의 소리로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일제히 노래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실 때에 그들의 눈이 마주봄이로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가 교회 가운데 회복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이 임하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11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떠날지어다 떠날찌어다 거기서 나오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찌어다 그 가운데서 나올찌어다 여호와의 기구를 메는 자여 스스로 정결케 할찌어다.” 고린도후서 7장 1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사.” 제가 왔다 갔다 했는데, 지금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 된 삶을 살려면 거기에 필수적인 요소가 거룩함과 구별된 삶이 필수적인 요소 중의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거룩함과 구별된 삶에 대해서 말하면서 이사야서 52장을 인용하면서 말합니다.
사실 이사야서 52장만 하더라도 하나님의 백성의 회복에 대한 아주 중대한 의미가 있다고 이미 우리가 살펴보았습니다. 거기에 여호와의 기구를 메는 자들에게 스스로 구별되라고 그랬습니다. 이것이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여러분, 여호와의 기구를 멘다는 것은 언약궤를 메는 것을 말합니다. 언약궤 짊어지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의 백성이 회복된다는 말은 하나님이 오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언약궤를 멘다는 말은 하나님의 임재가 찾아오시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다윗의 성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들어온 것은 하나님의 임재가 그 곳에 회복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춤을 추며 기뻐했습니다. 다윗은 그 언약궤가 상징하는 하나님의 임재가 다윗의 집으로 들어오기에 그것이 기뻐서 춤을 췄습니다. 그러므로 성전 된 삶이란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두루 행하시며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 되고 우리가 주의 백성이 되는, 다시 말하면 예수님 안에 영광의 임재로 거하시며 운행하시고 통치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이 영광의 임재로 오셔서 그 가운데 통치하시며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회복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고, 하나님의 부흥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성전 된 삶을 말하면서 기구를 메는 자여, 언약궤를 메는 자여 스스로 거룩하라고 말씀합니다. 철저하게 구별된 삶, 얼마나 철저하게 구별된 삶인가 하면 빛과 어둠이 구별되는 것처럼 구별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 구별된 삶이라는 것은 예를 들면 음란비디오 끊고 사기 치는 것 끊고 다 이런 것을 포함합니다. 그러나 그뿐만이 아니라 사람들을 자기 관점에서 판단하는 것, 그 사람에 대해 서운한 마음을 갖는 것, 이러한 것들도 당연한 죄악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죄악들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 심각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오늘날 성도들인 우리들의 삶과 교회의 삶 속에 세상의 가치관이 가득합니다. 세상적인 삶의 패턴이 가득합니다. 세상의 죄가 가득하고, 세상의 방법이 가득합니다. 심지어 목회하는데 있어서도 세상의 방법이 가득합니다. 여기에 구별과 거룩함은 이러한 모든 것들로부터의 철저한 구별을 말합니다. 단순히 몇 가지 죄를 버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와 방법, 삶의 패턴과 사역의 방법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기준에서 합하지 않는 모든 것들에게서 철저하게 구별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점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들을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이사야서 52장에서 세상에서 나와라 그들의 가치관 그들이 속해있는 그 삶에서 나와라 거기에 속해있지 말라 이렇게 말하면서 여호와의 기구를 메는 자들아 스스로 성결케 하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면 그 의미가 무엇인지 여기를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그 한 가지 부분이 다윗이 언약궤를 그의 성으로 들이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역대상 13장 7-10절입니다.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웃사와 아히오는 수레를 몰며 다윗과 이스라엘 온 무리는 하나님 앞에서 힘을 다하여 뛰놀며 노래하며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제금과 나팔로 주악하니라 기돈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들었더니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듦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치시매 웃사가 거기 하나님 앞에서 죽으니라.” 여기에서 보시면 다윗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자기 집으로 들여오기 위해 대단한 정성을 들였습니다. 수레를 새로 정성들여 만들고 앞에서 성가대를 동원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며 춤을 추면서 갑니다. 그런데 가다가 기돈의 타작마당에 이르러서 소가 뛰는 바람에 수레가 흔들려 언약궤가 떨어지려고 하니까 그 옆에 따라가던 웃사라는 다윗의 신하가 그것을 붙잡았습니다. 왜냐면 언약궤가 떨어져서 구덩이에 빠지거나 아니면 깨지면 안되니까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서 그를 치셔서 죽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처음에 화가 많이 났습니다. “11 여호와께서 웃사를 충돌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하나님! 아니 그럼 떨어져서 깨지도록 놔두라는 말입니까? 시궁창에 빠지도록 놔두라는 말입니까? 아니 좋은 마음에서 붙잡았는데, 좋은 동기를 가지고 했는데, 아니 하나님 그 마음을 모르십니까? 내가 얼마나 이것을 위해서 공을 들이고 내가 얼마나 이것을 위해서 헌신하고 내가 이것을 위해서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치시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면서 화를 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깨닫게 되고, 자기 잘못을 보게 되었습니다. 15장 1절을 보십시오. “다윗이 다윗 성에서 자기를 위하여 궁궐을 세우고 또 하나님의 궤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고 위하여 장막을 치고” 13-14절입니다. “전에는 너희가 메지 아니하였으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충돌하셨나니 이는 우리가 규례대로 저에게 구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이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궤를 메고 올라가려 하여 몸을 성결케 하고” 다윗이 깨달은 것이 뭐였냐면 아무리 자기가 좋은 동기를 가지고 많은 대가를 지불해서 찬양하면서 나름대로 마음을 준비하고 자신들을 돌아보면서 정성을 쏟았을지 몰라도 언약궤를 옮기는 하나님의 방법은 수레에 얹어서 옮기는 것이 아니라 레위인들이 메고 옮기게 되어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규례를 따르지 않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길을 따라 행하지 않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자기가 동기는 좋았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길을 따르지 않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한 것을 깨닫고 회개하고 이제는 레위인들에게 메도록 했습니다.
너무너무 중요한 말씀입니다. 앞에서 철저하게 구별되라고 그랬는데 구별된다는 말은 세상의 죄에서도 구별되어야 되고, 하나님의 길이 아닌 것은 구별되어야 하지만 그 뿐만이 아니라 교회에서 사역하는 방법에서까지 하나님의 길이 아닌 것이 철저히 구별되어야 합니다. 왜냐면 성경에 보면 자기 생각, 자기 방법으로 행하는 자가 악인이요 불의한 자인데 여러분 하나님의 부흥과 하나님의 성전 된 삶을 살기 원한다고 말하면서 일반적인 방법이나 유행, 세상적인 방법을 따라서 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할 줄 아십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부흥이 올 때 죽임을 당하는 아주 중요한 구절이 또 있습니다. 레위기 10장입니다. “1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유를 가져다가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2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 아론의 두 아들이 순식간에 불태워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위로부터 두 아들이 죽었는데 하나님께서 아론에게 머리를 풀고 곡하는 것도 용납지 않으시고 성전을 떠나서 집에 돌아가는 것도 용납지 않으셨습니다. 만약에 자리를 떠나거나 머리를 풀어서 곡하면 아론 자신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에게 큰 화가 닥칠 것이라 그랬습니다. 너무너무 두려운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이해하려면 그 앞장과 연결해서 이해하셔야 됩니다. 9장입니다. “1 제 팔 일에 모세가 아론과 그 아들들과 이스라엘 장로들을 불러다가 2 아론에게 이르되 흠 없는 송아지를 속죄제를 위하여 취하고 흠 없는 숫양을 번제를 위하여 취하여 여호와 앞에 드리고 3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숫염소를 속죄제를 위하여 취하고 또 송아지와 어린 양의 일 년 되고 흠 없는 것을 번제를 위하여 취하고 4 또 화목제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드릴 수소와 숫양을 취하고 또 기름 섞은 소제물을 가져오라 하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나타나실 것임이니라 하매.... 23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백성에게 축복하매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며 24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지르며 엎드렸더라” 여기보시면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의 길과 방법을 따라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하나님께 예배하고 축복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백성에게 임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보고도 나답과 아비후가 들어가서 자기들 임의대로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즉시 불을 내려서 그들을 사르셨습니다. 그러시면서 20장에서 말씀하시기를 “3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말씀이라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중에 내가 거룩하다함을 얻겠고 내 온 백성 중에 내가 영광을 얻으리라 하셨느니라.” “8 여호와께서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내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아서 너희 사망을 면하라 이는 너희 대대로 영원한 규례라 그리하여야 너희가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고.”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행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임했을 때, 나답과 아비후가 제사장으로서 나가되 술 취함으로 나간 것 같습니다. 저들도 나름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아서 마음이 높아지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고 하나님의 길을 분별하여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정한 것과 속된 것을 분별하여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임의대로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의 영광이 저들에게 임하셔서 저들을 죽였습니다. 여러분 성전 된 삶을 위해서 분기점이 뭐가 될 거냐면 “dividing line” 겸손함과 순종이 된 반면에 그 표시가 분별과 구별됨과 거룩함이 될 것입니다. 구별되고 거룩하다는 말은 우리에게서 모든 육신과 세상과 죄와 사단의 영역을 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 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계속 말씀하신 게 뭐냐면 우리가 여기서 십자가의 복음을 배우고 목사님들이 전한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때로는 우리가 교회를 운영하는 방법에 있어서 기존에 내려오는 인본주의적인 방법 그대로 한다면 하나님을 신뢰하여 하나님이 하도록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안보이니까 우선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한다면 여러분은 전혀 십자가 복음에 선 게 아닙니다. 그게 악한 자고, 그게 불의한 자입니다. 하나님의 길에 서는 것은 단순히 몇 가지 이론적인 것을 새로 배워서 그것을 전하는 게 아니고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지 않은 삶의 패턴, 살아가는 이유, 삶의 양식과 우리가 귀하다고 생각하는 것, 천하다고 생각하는 것, 모든 인식에 이르기 까지 심지어 우리 목회하는 방법에 이르기 까지 하나님의 기준에 서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지 않은 것들은 철저히 버려지고 내려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전적으로 주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없이는 주와 동행하는 삶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경우에 그것만 몇 가지를 배워서 그것만 실행하면 될 줄 아는데 실제로 우리의 삶에서 인본주의적인 방법으로 목회하고 성도들을 대하고 성도들을 그렇게 붙잡으려고 하고, 그러한 말을 가지고 그들을 회유하려고 하고, 그러한 것들을 내리지 않으면서 십자가 복음, 신앙의 본질을 아무리 얘기해 봐야 실제로 삶에 전혀 변화가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부흥이 올 때에 그렇게 구별되지 않은 삶 가운데 절대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지 못할 것입니다. 오히려 화가 될 수 있습니다. 성전 된 삶을 위해 하나님은 강력하게 명령하시기를 나오라 나오라 나오라 는 것입니다.
이런 부분들을 우리가 보면 성경에 성전 된 삶을 위해 하나님이 친히 거하시며 운행하시는 그 삶을 위해 아주 필수적인 요소들임을 볼 수 있습니다. 레위기 10장만 하더라도 제가 여러 번 설교 했습니다. 출애굽기 24장에 보면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셔서 저들이 부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는 그래서 마음이 높아진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지난번에 아내와 함께 광주 가는데, 하나님께서 제 아내에게 레위기 9장을 읽으라고 거기에 하실 말씀이 있다고, 그래서 레위기 9장을 펴면서 같이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10장하고 연결시켜서 말씀하신 겁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 그 부분을 말씀드린 겁니다. 하나님의 교회 회복을 위해서 다가오는 부흥을 위해서 성전 된 삶을 위해서 구별됨의 중요성을 하나님이 보이신 겁니다.
셋째, wholly his 삶입니다.
앞에서 폴 케인 목사님을 언급했는데, 그 분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나님이 온전히 뒷받침하시는 사역들이 세워질 것이다.’ 지금까지는 부분적으로 밖에 뒷받침되지 않았지만 온전히 뒷받침되는 사역들이 세워질 거라고, 한편으로는 우리가 충분히 이해합니다. 여러분에게 말씀드린 대로 로마서 11장을 보십시오. “12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 초대교회 때에 그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는데, 그것은 말세지말에 일어날 하나님의 역사에 비하면 작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보다도 훨씬 큰일을 말세지말에 일으킬 것을 성경은 여러 군데서 예언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더 말할 것도 없이 알 수 있고, 하나님께서 말세지말에 하나님의 칠중 성령을 마음껏 부으셔서 그 어느 때보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무엇을 통해 이루어지느냐? 바로 성전 된 삶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고 이것을 위해 필수가 뭐냐 하면 말씀드린 대로 그 두 가지와 그리고 이 부분입니다. 그러면서 폴 케인 목사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wholly his’ 전적으로 그 분의 것이 된, 그러니까 전적으로 하나님의 것이 된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이 전적인 능력을 나타낼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동안 저에게 말씀하시고 가르치시고 또 예언사역 할 때 하나님께서 그 부분의 소중함을 여러 경로를 통해서 말씀하셨던 것이 뭐냐면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 되심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아버지의 business가 나의 business인 것을 비추셨습니다. 그게 정확하게 이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오히려 육신의 아버지 생각이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 되심을 더 방해할 수 있습니다. 육신의 아버지는 소중하고 나름대로 귀했지만 인간이기 때문에 결점도 있었고, 연약함도 있었고, 나약함도 있었고, 또 능력도 부족했고,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온전히 거룩하시며, 온전하시며, 또한 전능하시고, 사랑과 용서와 긍휼이 풍성하시고, 의로우시며,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나의 아버지 되시기에 여러분의 아버지 되시기에, 아버지의 일이 곧 나의 일이 되는 그것을 비추시면서 구멍가게를 비추셨습니다. 예를 들면 구멍가게에서 월급 받고 일하는 사람하고 아들로써 일하는 것은 다르다는 겁니다. 아들은 월급을 받지 않아도 그 일이 자기를 사랑하는 아버지의 일이기에 누가 보든지 안 보든지, 월급을 주든지 안 주든지 상관없이 합니다. 아들은 돈을 전혀 안 받아도 돈 받고 일하는 사람과 전혀 다르게 일합니다.
우리가 전국 집회할 때에 하나님께서 낮 시간에 그것을 비춰 가시는데,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하나님의 종들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께 회복시키시고 신앙의 본질 가운데 회복시키시고 하나님의 교회가 이 땅에 회복되기를 원하시고 예배가 회복되기를 원하시고 이 땅에 하나님의 부흥이 임하기를 원하시고 그래서 뭇 백성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데, 그것이 아버지의 일인데. 그 분이 저의 아버지 되시기에 제가 돈을 받건 안 받건 사람들이 알아주건 안 알아주건, 제가 앞서 있건 안 앞서 있건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일이 아버지의 일이기에 그것이 내 일로서 아버지가 기뻐하는 자리에 나도 내 삶을 다해서 있음으로 아버지의 일만 이루어지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게 ‘wholly his’ 전적으로 하나님의 것인 그 삶의 가장 필수적인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자들에게 앞에서 말한 나머지가 가능하고, 그렇게 성결한 삶을 사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말세지말에 전례 없는 능력을 부으셔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외국에서 강사들이 오면 여기 가서 은혜 받고, 저기 가서 은혜 받고 합니다. 요즘 들어서 많이 옵니다. 또 최근에도 미국에서 지금 아주 귀하게 쓰임 받는 분이 온다고 한 번 가보라고 누가 저에게 스케줄을 보냈습ㄴ니다. 여러분 기회 되면 한 번 가보십시오. 가는 것은 막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는 한 가지 확신하는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가서 설교 듣는다고 해결되지 않을 것이고, 가서 한 번 능력이 팍 임해서 덜덜 떨더니 손을 딱 갔다대서 문둥병자를 치유했다. 설령 그런 일이 일어나도 전혀 해결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을 회복시키시기를 원하시고, 침노하는 무리들을 세우시기를 원하시고,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셔서 하나님이 그 가운데 성전삼고 안식하시며 마음껏 운행하실 교회와 성도들을 세우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것은 여러분들이 가서 나름대로 은혜 받고 기도 받으면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그것으로 해결되어지지 않습니다. 해결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길을 따라 줄기차게 하나님을 찾으면서 여러분의 삶에서 모든 세상과 욕심과 마귀적인 것과 죄들을 버리고 구별된 삶을 살뿐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가 여러분의 모든 것으로서 하나님 아버지이면 족하여 모든 것으로 사랑하며 아버지의 일이 여러분의 일이기에 여러분의 삶을 조정하여 어떠한 대가를 지불하고라도 하나님의 행하심에 순종함으로 동참하고, 그리고 날마다 그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정직하게 대면하고 마음에 통회하며 겸손한 심령을 가지고 주 앞에 엎드려 주님의 명령을 따라서 순종하는 그러한 자들 가운데 하나님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전례 없는 능력을 부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고 하나님께 동행하는 삶에는 지름길이 없습니다. 성경에 나온 사람들을 보십시오. 절대로 지름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가치관이 잘못 되어 있어서 삶에서 대가는 지불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만 경험하려고 하는데, 지름길은 없습니다. 어디 가서 좀 기도하면 될까? 능력 받으면 될까? 안수 받으면 될까? 여러분 그래서 여기에 오셨다면 잘못 오셨습니다. 번지수 잘못 찾았습니다. 그것은 말짱 도루묵입니다. 절대로 지름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길을 따라 줄기차게 하나님을 구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삶을 조정하여 하나님이 계신 곳에 같이 있고 하나님이 명령하신 말씀을 따라서 순종하면서 아버지가 내 삶을 비추시고 만져 가신 대로 내가 내 삶에서 죄와 세상과 사단적인 일들을 버리고 구별되며 줄기차게 이 땅에 주님의 부흥으로 주님의 은혜로 이 땅에 임해주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줄기차게 기도하고 주님을 추구하고 또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또한 그 외에 여러 곳에서 섬기는 가운데 주와 동행하는 삶을 사는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아브라함을 비추어서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시고, 하나님께서 요셉을 그렇게 다루시고 때가 되었을 때 그를 세우신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시고, 모세를 그렇게 하시고, 다니엘을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세우시는 것이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다 내려놓고, 때로는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으면서 어디 가서 한두 번 기도 받고 한두 번 배워 가지고 한두 가지 적용하면 될 것처럼 생각하면 그것은 너무너무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절대로 지름길이 없습니다.
오늘 저는 성전 된 삶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실 때부터 성전삼고 거하시기를 열망하셨습니다. 그 표본과 본보기가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교회나 성도를 그렇게 성전 삼으시고 이제 교회와 성도가 예수님처럼 그렇게 성전 된 삶을 살도록 일으켜 세우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나님을 구하고 찾는 가운데 하나님의 성령께서 여러분 가운데 성전삼고 거하시는 말세지말을 향한 이 때에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목적이 저와 여러분이 섬기는 교회 가운데 새물결 선교회를 통해서 놀랍게 이루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12장 느헤미야를 통해 본 리더의 자세 (0) | 2007.09.05 |
---|---|
제11장 교회회복과 영적전쟁 (0) | 2007.09.05 |
제9장 하나님의 부흥과 중보기도 (0) | 2007.09.05 |
제8장 하나님의 부흥과 섬김 (0) | 2007.09.05 |
제7장 하나님의 부흥과 심판 (0) | 2007.09.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