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2:17 그리스도 병든 자들의 의사. 하나님 나라의 비유(13) - 김세윤 교수
오늘 우리가 묵상할 비유는 막 2:17절에 있는 아주 짧은 비유입니다. 막 2:17절 “건강한 자에게는 의인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 이 말씀인데 이 말씀의 배경을 위해서 2:13-17절 까지 읽읍시다. “막 2:13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무리가 다 나아왔거늘 예수께서 저희를 가르치시니라 14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15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저희가 많이 있어서 예수를 좇음이러라 16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17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모든 사람을 위해서 전파하셨어요. 모든 사람들이라는 말은 우리 인간들은 자꾸 편 가르기를 좋아해요. 그래서 경건하고 편안하게 사는 중산층인 우리 교회의 성도들 같은 분들은 예수께서 우리들을 위하시고 우리가 좀 도덕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하다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예수의 복음이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그렇게 생각할 수 있고 반면에 최근에 지난 이제는 좀 많이 줄었습니다만 70년대 80년대에 유행하던 해방신학 민중신학 하던 사람들은 예{수를 가난한 자들 죄인들 무식한 자들 이런 자들을 위한 분이지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복음을 선포한 분이셨지 뭐 좀 가지고 머리 속에 이른바 먹물들도 들어갔고 스스로 경건한 채 하고 이런 사람들에게 도리어 예수께서 꾸짖기만 하고 혼낸다고 했다고 이렇게 자꾸 편을 가를려고 그러는데 옳지 않아요. 예수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했어요. 그러니까 부자들 가난한 자들 지식인들 무식한 자도 이른바 경제적인 종교생활로 경건한 자도 아니고 그 사람들에 의해서 죄인들로 비난을 받은 그 사람들 모두를 위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했어요.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는 우리 마가가 막1:15절에서 요약한바와 같이 거기 막1:15절에 예수의 복음전체를 요약해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셨는데 그것이 뭐냐면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하나님 나라가 임박했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이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다 ····. 뭐가 전제되었어요? 모든 사람들이 죄인들임. 우리가 이른바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죄인들만 죄인들이 아니고 심지어 경건한 바리새인들도 신학자들인 서기관들도 다 죄인들임. 이 말이 전제되어 있어요. 오늘 우리의 상황으로 말한다면 우리 교회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요구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똑같은 이야기여요. 그러니까 이 말은 또 무슨 말로 부터 해요? 경건하고 도덕적인 사람만 구원 대상인 것이 아니고 진짜 사회에서 죄인이고 낙인찍힌 사람들에게도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고 구원을 받을 수 있음. 그것이 전제되어 있어요. 이렇게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의 복음을 선포했던 거여요. 그러니까 이렇게 말할 수가 있어요. 예수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복음을 믿으라. 그리하여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얻으라는 이 선포는 당시 유대사회에서 유대종교적인 지도자들로 부터 죄인들로 낙인찍혀서 오는 세상에 하나님 나라의 구원에 동참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하고 스스로 종교적인 행위로 율법을 잘 지키는 의의 행위로 나는 종말에 오는 세상에 축복을 확인해 놓은 셈이라고 스스로 자만했던 사람에게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큰 도전으로 왔지요. 그 사람에게는 너도 죄인이다. 너도 너의 종교적인 행위와 율법지킴. 뭐 이런 선행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새롭게 듣고 그 복음에 비추어서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닫고 자신의 죄를 철저히 회개하고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에게도 결국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복음이지만 기쁜소식이지만 먼저 그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도전으로 자기자신들을 죄인들로 깨닫게 하는 하나의 도전으로 예수의 말씀이 왔던 것이어요. 그러니까 예수의 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누구에게 먼저 인기가 있었어요? 경건한자들 바리새인들 서기관들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복음으로 알아 차리기 위해서는 그 속에 담겨 있는 도전을 먼저 아주 정직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아픔이 있었어요. 너도 죄인이다. 회개하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믿으라는 도전을 먼저 받아 들여야 했어요. 그래서 진실로 자성하고 자기의 죄인 됨을 인정해야 하는 그런 단계가 있어요. 어떤 사람들은 그런 단계를 잘해서 예수에게 겸손히 나아와서 예수께서 제공하는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받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많은 서기관들 바리새인들이 그 단계를 뛰어 넘지 못해서 예수에게 도리어 적대하고 예수를 도리어 잡아 죽이게 되지요. 반면에 당시 신학자들 또는 경건한 바리새인들로 부터 구권에서 제외되었던 죄인들 세리들 창기들 또는 무식대중들 그런 사람들은 오는 세상에 구원에 참여 못하리라고 당시 경건한 사람들 신학자들이 이렇게 가르쳤어요. 그 사람들에게는 예수께서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어서 구원을 얻는다고 하니까 여러분들 그 입장에서 한 번 서 보세요. 얼마나 이것이 큰 기쁨의 소식입니까? 자기들에게. 그래서 이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이어요. 여기 지금 알패오의 아들 이야기가 나오지요.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다가 예수의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이 선포에 감동을 받아 가지고 세관을 박차고 그 사람이 회개함이 무엇으로 나타나 있어요? 세관을 박참으로 표현이 되어 있어요. 세관이란 무엇이냐면 관세 징수하는 사람이어요. 진짜 로마 사람들이 세를 징수하는데 유대사람들이 어느 관할구역에서 물건을 유통하는데 세금을 붙이는 통관세 이런 것을 징수할 권리를 돈을 많이 줘서 사요. 그래 가지고 여리고 같이 상당히 중요한 무역로가 위치한 곳에 사람을 사 가지고 거기서 로마정부에 할당된 만큼만 바치고 나머지는 자기가 먹고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어요. 이 사람들은 그러니까 돈을 많이 벌었지요. 그러나 로마제국에 충성하는 민족반역자라는 의미로 또 이웃을 착취하는 자라는 의미로 종교적으로 신학적으로는 가장 천대를 받아서 유대교에서는 종말에 구원의 소망이 없는 사람들이었어요. 그런데 이 알패오의 아들이 세리인 레위가 세관을 박찼다고 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돈으로 자기안전과 행복을 사는 맘몬이즘 우상숭배를 버리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으로 부터 구원을 얻으리라고 예수의 복음을 제대로 알아듣고 그러니까 죄를 회개한 것이지요. 복음을 믿고 나온 것이지요. 이 사람들이 예수에게 많이 몰려들었어요. 예수께서 그들과 먹고 마시는 식탁의 교제를 했다는 말이어요. 식탁교제란 유대인들이나 근동의 고대 사람들에게는 단순한 그냥 먹고 마시는 문제가 아니고 서로를 인정하고 서로를 받아들임의 표징으로서 아주 의미가 있었어요. 그래서 예수께서 이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셨다는 것은 예수께서 그들을 다 받아들이고 그들을 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을 했다. 그런 말이어요.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이 거룩한 도덕적으로 순결한 종교적 지도자가 아주 악명 높은 세리들 죄인들 창기들 이런 사람들과 먹고 마시는 잔치를 예사로 벌림. 한번 여러분들 상상해 보세요. 우리 박은조 목사님이 저기 먹자 골목에 가셔서 거기서 죄인들을 몽땅 모아놓고 한 달에 댓 번식 주말마다 가서 잔치를 한번 벌렸다고 합시다. 여러분들 어떻게 하십니까? 제가 그랬다고 합시다. 그러면 학교에서 가만 두겠어요? 지금 그런 상황이어요. 예수의 종교적인 지도자가 유대교의 상식으로는 좀 힘들어요.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 속하지 못하고 종말에 구원에서 배제된 그런 악명 높은 사람들 하고 함께 먹고 마신다. 그래서 여기도 나오지만 여기 죄인들과 세리들의 친구다. 여기 신학자들이 예수를 뭐라고 비난합니까?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먹는 것을 보고 어째서 죄인들과 함께 먹느냐? 이렇게 지금 비난하지요. 제가 가끔 인용합니다만 눅 7:34절에 마찬가지로 비난했지요. 눅 7:36절 부터 읽어 봅시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 가셨을 때에 바리새인들과 먹고 마시는 것도 꺼리지 않았어요. 바리새인들을 적으로만 생각하고 배척한 것도 아니고 그들과도 먹고 마시고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은 것을 보고 옥합을 가지고 와서 머리털로 씻는 것을 보고 예수께서는 또 그것도 허락하시고 그래서 34절에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는 자여 포도주를 즐기는 자여 세리들과 죄인들의 친구로라 한다고요. 이렇게 예수께서 죄인과 세리의 친구로 먹고 마시는 일을 이렇게 많이 하니까 이 신학자들 종교적인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뭐가 된 거여요? 예수가 세리들과 더러운 사람들과 어울림으로 예수가 더러워진 것이어요. 전에도 제가 말씀을 드렸지만 이것이 모든 종교의 원칙이어요. 거룩한 것과 가룩하지 않은 것을 가르는 모든 종교의 원칙이 더러운 것과 어울리면 더러워짐. 그러니까 문둥병자를 만지면 만진 사람이 더러워져요. 송장을 만지면 만진 사람이 더러워져요.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면 함께 죄인이 되는 것이어요. 그들의 거룩치 못하고 더러워짐에 동참하여 어울림으로 같이 더러워짐. 그러니까 더러운 것과 연결이 됨으로서 더러워짐. 그것이 모든 종교의 원칙이어요. 그러니까 당연히 종교적인 바리새인들은 서기관들은 예수를 비난하지요. 너도 죄인이고 더러운 사람이다. 그런데 예수는 왜 죄인들과 먹고 마시는 일을 즐겼느냐?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는 하나님의 주권자적인 사랑이 구원하는 힘이라는 것을 전제하지요. 둘째 그 속에는 모든 사람들이 죄인들임.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에 의한 구원이 필요함. 다시 말하면 구원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누구도 자기의 의를 내 세울수 없음. 이것은 스스로 자기가 의롭다 하는 사람에게는 도전이 되는 것이고 스스로 자기 의가 하나도 없다고 하는 사람에게는 복음이 되는 것이고 스스로 자기 의가 있다고 하는 사람에게도 복음인 것이어요. 왜냐하면 스스로도 자기 의가 좀 있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그 도전을 잘 받아 들여서 자기의 의가 가짜의 의이고 아무것도 아님을 깨달아야 자신이 죄인 됨을 깨달아야 비로소 오로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구원한 것임을 이 복음을 옳게 깨닫고 그 복음을 덧입어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어요.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만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모든 죄를 덮고도 남음.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죄보다 더 크다는 것. 인간의 모든 죄를 덮고도 남음. 전에도 제가 한번 지적했지만 그것을 바울은 이렇게 표현을 해요. 롬5:15-21절까지에서 이렇게 표현을 해요. 첫 아담과 마지막 아담. 우리를 죄와 죽음에로 몰아넣은 첫 아담과 우리를 구원하신 마지막 아담의 순종을 대조하면서 그러나 이 은사는 그러니까 마지막 아담의 은혜의 선물은 첫 아담의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을 넘쳤으리라. 여기의 지금 더욱이라는 말과 넘쳤다는 말에 유의하세요. 첫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그의 후손 전체가 죄와 죽음에 빠뜨려졌는데 둘째 아담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는 그 죄의 힘보다 크고 그 죄가 가져온 죽음을 극ㅈ복하고도 남게 넘친다. 그 말이어요.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사람으로 말미암은 것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입었느니라.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사망이 있고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의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리라.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함을 받아 생명에 이르느니라.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었느니라.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어하게 하려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죄보다 더 커서 죄를 덮고도 남아요. 예수는 지금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의 모든 죄를 다 덮어 버리고도 남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현하는 분이셔요. 그러니까 예수께 있어서는 더러운 것과 연결이 됨으로 스스로 더러워짐의 일반적인 종교적인 원칙이 적용이 되는 것이 아니고 더러운 자들이 예수와 연결이 됨으로 그들의 더러움이 깨끗해지는 원칙. 예수가 재현하는 하나님 나라의 사랑이 인간의 모든 죄를 덮고도 남아요. 그러기 때문에 이런 큰 하나님의 사랑을 재현하는 예수는 더러운 자들과 연결됨으로 예수가 더러워지는 것이 아니고 더러운 자들이 예수와 연결이 됨으로 그들이 거룩해짐. 그러니까 보통 종교의 원칙은 연결됨이든지 어울림이든지 이것이 모든 종교의 원칙이어요. 더러운 것과 연결이 됨으로서 어울림으로서 더럽혀짐. 그런데 예수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작용을 하는 것이 아니고 더러운 자들이 예수와 연결이 되니까 예수와 어울림으로 거룩해짐. 왜 그러느냐?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모든 죄들을 덮으니까. 그래서 지금 예수께서 죄인들과 먹고 마심으로서 그들을 깨끗케 하는 거여요. 썩은 그들의 부패를 치유하고 그들의 병을 치유하는 거여요. 예수께서 죄인들과 먹고 마심으로 그 진리를 가르쳐 주고 있는 거여요. 우리가 인간들이 자기들의 의의행위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주권자적인 사랑. 그 은혜에 의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는데 그 복음을 선포하는 예수께서 자기 죄를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그래서 그 하나님의 큰 사랑을 덧입으라고 모두를 초청했어요. 여기 바리새인들도 초청을 하고 죄인들도 초청을 하고 죄인들은 자기들이 워낙 죄인임을 알기 때문에 금방 그것이 복음인 것을 깨닫고 자기 죄를 회개하고 여기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을 때려치우고 예수를 따르듯이 쫓아와요. 그러나 서기관들은 이런 사람들은 그 복음을 깨닫지 못해요. 왜? 그 복음의 복음 됨.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왜 깨닫지 못해요? 자기들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들에게 무슨 의가 있다고 보는 거여요. 그래서 자기들의 그 의에 대해서 하나님께 종말에 반대급부로 구원을 주시리라고 믿는 거여요. 그러니까 이 경건한 사람들은 무엇을 믿는 것입니까?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으라.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라는데 이 사람은 자기 의를 믿은 거여요. 자기의 종교적인 능력 또는 도덕적이 성취 지적인 성취, 자기를 믿는 거여요. 죄인들은 자기 속에 믿을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니까 예수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나아오라. 그러니까 그 사람들 쉽게 복음을 알아들어요. 그런데 이른바 의인들은 자기들 속에 뭐 믿을만한 것이 있어요. 믿을만한 것이 있다고 보는 거여요. 자기들의 종교적 경건성 도덕적으로 깨끗함. 지적인 성취. 이런 것에 하나님께서 보상하지 않겠느냐? 주의 심판 때 상급을 주시지 않겠느냐? 곰곰히 생각해 보세요. 부자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에만 의존한 것입니까?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아니고 이 사람은 자신의 성취를 의존한 거여요. 예수께서는 이것이 안 된다는 말이어요. 자신의 성취라는 것이 종교적이거나 지적이거나 도덕적이거나 하여간 어떤 것이어도 결국 피조물적인 불완전한 것이어서 우리를 구원할 힘이 없어요. 그것을 제일로 먼저 깨달아야 되어요. 경건한 사람들은 그것이 바로 죄를 회개함이어요. 우상숭배의 죄를 회개함이어요. 자기 자신을 신뢰하려는 자기 의를 신뢰하려는 것이 우상숭배여요. 그것을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서 구원을 얻으라. 그런데 아까 말씀 드린 대로 그 복음을 깨달은 사람들이 바리새인들 중에서도 꽤 있었고 때로는 신학자들에게도 꽤있었고 그 사람들 다 예수를 환영하고 그러나 주로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은 그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예수에게 적대함. 대체로 했는가 하면 자기 속에 신뢰할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죄인들 세리들은 예수의 복음을 곧 깨닫고 예수에게 나아왔어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사람들에게 예수가 회개를 요구하지 않았나? 민중신학자들은 회개를 요구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천만의 말씀. 아까 막 1:15절에서 본 바와 같이 모든 사람들에게 회개를 요구한 것이지요. 여기 알패오의 아들 레위에서 회개를 보지 않습니까. 주 예수께서는 그들이 죄가 용서되었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음. 그래서 종말에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잔치에 그들이 참여하게 될 것임. 이런 것들을 시위하기 위해서 그들과 먹고 마시는 잔치를 베풀었다. 우리가 전에 하나님 나라 공부할 때에 여러 번 보았지요. 그래서 예수가 죄인들과 먹고 마심은 두 가지 의미가 있지요. 하나는 종말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구원에 그들이 참여할 것이라는 보증의 뜻이어요. 예수께서 하나님 대신에 죄를 용서해주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여주심. 그래서 그들이 종말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잔치에 참여할 것임을 보증해주는 뜻이 있어요. 또 하나는 종말에 완성이 될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지금 현재 실현 받는 뜻이 있어요. 두 번째 것은 아주 중요해요. 물론 종말에 완성될 것이지만 지금 벌써 그 구원의 덕을 봄. 그래서 이들이 이제 하나님을 다시 한 번 하나님으로 아빠로 인정하고 그에게 나아가 기도할 수 있으며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되며 이웃과의 관계가 올바라지며 레위가 세관에서 하나님도 믿을 수 없고 누구도 의지할 수 없으니까 세금을 많이 거두어 가지고 돈으로 자기의 행복을 살려고 지금까지 했는데 박차 버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함으로 다행히 이웃과도 더 이상 이웃을 착취 않고 그래서 이웃과의 관계가 평화롭게 이루어져요. 그래서 자기가 착취하는 이웃으로 부터 원망을 덜 받고 그들로 부터 유혹도 덜 느끼고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삭개오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이 사람의 삶에 어떤 일이 벌어져요? 평화가 그만큼 증진되지요. 자유가 그만큼 확대되지요. 이것이 뭡니까? 이렇게 되면 스트레스를 덜 받게 되어요. 건강해지고 자기 부인에게도 덜 짜증을 내고 자식들도 덜 패고 집안에 평화도 기쁨이 더 커지고 이것이 다 뭡니까? 이것이 종말에 완성이 될 구원. 샬롬의 현재적인 실현이지요. 그것이 현재 벌써 부족하나마 임시적으로나마 부분적으로나마 체험하게 되는 거여요. 그래서 예수의 잔치상에는 기쁨 평화가 있고 형제애가 있고 그래서 예수는 무엇을 선포했어요? 종말에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약속한 복음을 선포했어요. 그 구원은 회개함으로 그 복음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믿음으로 얻는다고 가르쳤어요. 믿는 자들에게 예수는 그것이 빈말이 아님. 종말에 완성될 구원에 들어갈 것을 보증해주는 의미로 말로만 보증하고 먹고 마시는 정도로만 이루어진다면 그것이 무슨 실감이 나겠어요? 그런데 그것은 구체적인 실현. 우리의 삶속에서의 자유와 평화의 확대로 우리 건강의 확대로 구체적으로 실현이 됨. 그러기 때문에 예수의 말씀대로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그의 사랑에 의지하고 그의 선한 뜻에 순종해서 살면 지금 우리가 그렇게 해서 얻는 이 기쁨과 이 자유와 이 평화가 이 건강이 이 생명력이 완전히 무한대로 영원히 이루어짐. 그것이 종말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어요.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어요.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 무엇인가? 어떻게? 지금 우리가 그것을 임시적으로나마 아까 이야기한대로 자유와 평화 기쁨 건강 이런 것으로 확대됨을 체험하니까 종말에 완성될 구원은 뭐냐면 지금 우리가 누리는 그것의 무한한 확대 우리가 체험할 수 있어요. 늘 강조했지요. 종말에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관념화하고 추상화해서 생각하지 말라구요. 구체적으로 생각하시라고요. 그래서 예수가 죄인들과 먹고 마심을 늘 하셨는데 이것을 다른 말로하면 여기 17절의 비유 이것이 바로 병든 자를 치유하는 의원의 일임. 죄로 말미암은 고난 가운데 있는 우리들을 병든 자들로 비유한 거여요.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치유로 비유한 것이어요. 그러니까 종말에 구원을 가져오시는 예수 자신을 의사로 비유한 것이어요. 그런데 이것은 기껏해야 그림 정도가 아니고 그림을 넘어서 아주 사실적으로도 병들어 있고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병들어 있고 우리가 예수의 복음 예수께서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를 회개하고 오로지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하고 그의 뜻에 순종해서 사는 이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라지고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고 전전으로 하나님께 순종함. 이렇게 되면 자연히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표현이 된다고요. 이웃에 대한 사랑을 하면 이웃과의 관계가 원만하고 올바르게 되고 이웃에 대해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자유가 그만큼 확대되어요. 평화가 정의가 그만큼 확대되어요. 두루 두루 육신적으로 건강해져요.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 육신적인 건강으로도 나타나는 거여요. 사회적인 건강으로도 나타나고. 이 구원이라는 것이 우리 실존의 어느 한 단면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어요. 모든 영역에서 포괄적으로 구체화되어서 나타나요. 추상적으로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고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을 온전케 하는 이런 형태로 나타난다고요. 이것이 치유다. 이 말이어요. 우리가 여기서 두 가지를 생각해 보아야겠어요. 하나는 지금 강조한대로 이 복음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병이 치유되고 우리가 종말에 있을 구원의 구체적인 실현을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체험하게 된다는 것. 어떤 사람들은 신앙의 영역이 있고 지난번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요. 지난 번에 성령론에 대한 올바르지 않는 이해 때문에 혼돈이 우리 성도들에게 많다고 그래서 그런 이야기를 했지요. 성령은 그리스도의 구원을 우리에게 실현되게 하시는 분이셔요.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계시를 우리에게 계시되게 하는 분이셔요.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구원을 우리에게 실제로 실현되게 하시는 분이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성령의 역사를 육신의 병 고침 그런데 만으로 나타난 것으로 생각을 해서 그쪽을 굉장히 강조한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특히 우리 개혁교회전통을 가진 사람들은 그런 것 관계없고 그냥 우리가 말씀 듣고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게 한 것. 이것에만 관계 있다. 이렇게 하는데 둘 다 옳지 않다고요. 그리스도의 구원이라는 것이 우리의 삶 전체에 대한 포괄적인 것이어서 그 구원이 지금 누차 되풀이 하지만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와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 그리고 자연과 하나님과 피조세계 전체와의 올바른 관계에의 회복에서 오는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것을 온전케 하는 그 축복 그것이 구원이어요. 그러니까 그 구원이 아까 말씀 드린 대로 사회적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로 말미암아 자유가 확대되고 정의가 평화가 확대되고 자연과의 관계도 올바라져서 우리의 육신적인 건강도 회복이 되고 그러니까 성령의 역사가 우리 육신적인 건강의 회복으로도 나타나고 이웃과의 관계의 회복으로도 나타나고 자연과의 관계의 회복으로도 나타나고 우리 삶의 모든 관계에서의 온전케함으로 나타나요. 둘째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그 구원이 종말에 예수의 재림 때에 또는 죽음 이후에 비로서 우리가 받는 것이 아니고 그때 완성될 구원이 지금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우리 죄를 화개하고 그의 복음을 믿으면 우리에게 부분적으로나마 임시적으로나마 실현이 되어요. 그래서 예수가 정말 우리에게 의사이심을 우리가 알게 되어요. 자 이와 같은 이해를 가지고 오늘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오늘 크리스마스 날이니까 이 본문에 비추어서 우리는 교회생활을 오래해서 스스로 상당히 경건한 사람들로 종교적이고 도덕적이고 상당히 경건하고 의로운 사람들로 자처를 하는데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가운데 오심을 한번 생각해 보시오. 그것이 무엇과 같습니까? 예수께서 육신으로 계실 때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으로 계실 때 죄인들에게 다가가서 그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그들과 먹고 마심. 두 그림을 생각해 보세요.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 영광의 하나님의 아들이 오늘 크리스마스에 우리 죄와 고난의 세상에 오심과 존경받은 종교지도자 예수가 이 죄로 누더기진 더러운 죄인들에게로 오심. 그들에게 잔치를 베푸심. 똑같은 그림 아닙니까? 우리가 아무리 경건한 척 해도 우리는 부족하고 더럽고 추악하고 우리 생각이 얼마나 추악이 많이 들어있고 우리 행동이 얼마나 죄스럽고 그렇습니까? 예수께서 만약에 의인들만 부르시고 의인들만 상대하신분이라면 우리가 예수의 그 무리에 어떻게 들겠어요? 크리스마스 얼마나 감사합니까? 예수께서 어떤 분이지요? 하늘의 고고한 곳에 혼자 앉으셔 가지고 의인들을 그리로 불러들이는 그런 분이 아니고 그 거룩한 곳에서 그 엄청난 거룩의 힘으로 여기 내려 오셔서 우리 같은 더러운 자들을 거룩하게 하신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감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죄인들인 우리가 감히 하나님께 아빠라 부르며 낭갈 수 있도록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여기 죄인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서기관 바리새인들로 부터 비난을 받고 너희들은 내세에 아무 소망 없다고 비난을 받고 매도당했던 사람들이 갑자기 이 거룩한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와서 죄를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나님이 사랑이셔서 너희들을 그의 백성으로 자녀들로 맞아주신다. 그들이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다시 말하면 그와 같은 감격이 오늘 우리 크리스마스 때 우리의 감격이 되어야 되지요. 아 거룩한 이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로 하여금 율법을 이루고 무슨 종교적인 업을 쌓아서 자기에게 오도록 하는 것이 아니고 그가 우리에게 오셔요. 우리 같은 추악하고 더러운 한심스러운 우리의 행동을 가만히 보면 얼마나 어리석고 한심스럽고 유치하고 더럽고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가운데 오셔요. 우리를 그의 거룩함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그의 완전함으로 우리를 온전케 하심. 여러분들 그 감격 있습니까? 내가 말로 다 잘 표현한지 모르겠어요. 그 다음에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자 그러면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아들의 은혜로 우리가 거룩한 자가 되었어요. 그리고 죄인들을 용서 하는 복음, 더러운 것들을 거룩하게 하는 이 하나님의 힘을 우리가 알고 그 힘을 지닌 자들이 되었어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리스도인의 사회에서의 자세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지금 우리가 경건을 추구하고 거룩을 추구하고 도덕적인 순결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들로서 다 훌륭하지요. 좋지요. 예수와 같은 자세를 가지고 삽니까? 아니면 예수의 자세를 비난한 서기관들의 자세를 취하고 삽니까? 한번 좀 생각해 봅시다. 어떤 자세를 취하고 살지요? 놀랍게도 우리가 보통 서기관들의 자세를 취하고 살지요. 아까 제가 예를 들었습니다. 아 박 목사님이 방배동 먹자골목에 토요일 마다 가서 판을 벌린다고 생각해 봅시다. 우리 당회에서 어떻게 할 꺼여요? 우리 제직회에서 어떻게 할 거여요? 제가 압구정동 어디 먹자골목에서 토요일 마다 판을 벌렸다고 합시다. 어떻게 하지요? 당장에 아까 이 교회 텅텅 빌 거여요. 왜 그럽니까? 한번 생각해 봅시다. 왜 그것을 우리가 두려워합니까? 아 여기 서기관들 자세가 참 이해가 되잖아요. 우리가 사실 그런 자세잖아요. 그것을 왜 그러는가를 분석해 보아야지요. 제일 먼저 박 목사님 먹자골목에 갔다. 그러면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더러운 자들과 어울림으로 박 목사님의 도덕적인 높은 수준이 내려가고 더러워지고 그러니까 함께 더러워지니까. 제가 그런 짓을 하고 다녔다면 당장에 타락했다고. 그런데 예수는 죄인들과 먹고 마심으로 타락해진 겁니까? 그것이 아니고 예수로 말미암아 죄인들이 거룩해짐. 그러니까 우리 성도들이 이 세상의 죄인들과 더러운 것과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자꾸 피해서 우리끼리만 거룩한 도성을 쌓고 살아야겠습니까? 그렇게 하라고 그럽니까? 이 본문의 가르침이. 더러운 세상 속으로 적극적으로 들어가서 더러운 자들과 적극적으로 어울려서 그 더러운 자들을 깨끗이 해야 된다.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말라는 것을 가르칩니까? 지금 이 곳은 까마귀 싸우는 곳에 백로야 더 열심이 가라는 말이어요. 그래서 너도 더러워질까 하노라가 아니고 까마귀들을 깨끗이 하라는 말이어요. 여기서 전제되는 것이 뭐라고 했지요? 유교는 까마귀 사우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말라고 가르쳐요, 불교도 마찬가지로 수양하는 사람이 산속의 고고한 곳에서 혼자 고고하게 거룩을 유지하라. 그것이 모든 종교의 원칙이어요. 그리스도의 복음은 뭐라고요? 그것이 아니고 암흑의 세상에 들어가서 빛이 되고 썩은 세상에 들어가서 소금이 되고 병든 세상에 의사로 들어가라. 그래서 치유하라고.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에 있어서 모든 종교들과 세상의 이상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어요. 그것을 우리가 실천하기가 어려워요. 왜? 두려움이 앞서서. 왜 두려움이 생겨요? 아까 이 원칙이 작용하는데 있어서 전제가 뭐라고요?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의 죄보다 크다. 그 확신 하나님의 힘이 사단의 힘보다 크다는 확신이 없어서 그래요. 제일 첫째가 성령의 힘이 세상의 영보다 크다. 그런 확신이 없어서 한마디로 믿음이 부족해서 여기서 하나 주의할 점은 거룩한 자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자로 성령의 성결케 하는 힘을 지닌 자로 더러운 세상에 들어감. 그것이 치유하는 의사의 자세로 들어가야 되는데 의사가 함께 가서 이 세상에 들어가서 병들어 버리면 안 되지요. 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는 하나님의 복음 하나님의 말씀 진리 이것을 타협하고 세상의 것을 인정하고 이런 자세로 들어가면 같이 썩지요. 어떤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은 죄인들의 사이에 같이 들어감은 예수가 죄인들과 함께 스스로를 동일시해서 그들을 인정했다. 그들을 있는 그대로 좋다고 예수께서 선언했다고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 아까 그것이 아니라고 그랬지요. 그들에게 예수께서 무엇을 요구했어요? 회개하라고. 그러니까 우리가 더러운 세상에 의사로서 들어가야 한다. 의사로서 들어가서 병든 자를 치유해야 된다고. 그런데 어떤 자세로 들어가야 되어요? 하나님의 진리를 견지해야지요. 그들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인정하고 스스로의 죄를 인정하고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도록 설득하는 자세로 들어가야지. 그런 것이 없이 죄를 회개하는 요구 없이 그냥 그들과 먹고 마시고 들어가면 이렇게 되어요. 그러니까 여기서 두 가지를 조심해야지요. 하나는 보수적이고 경건적인 그리스도인일수록 자꾸 육이 무서워 가지고 세상으로 부터 분리의 원칙을 강조하면서 세상으로 부터 도피할려고 하는 서기관적 자세를 취하는 것. 이것도 참 안되지요. 우리가 우리의 삶의 구체적인 장에서 하나님의 치유가 필요하고 하나님의 거룩하게 함. 순결케 함이 필요한 곳에 적극적으로 들어가서 선교적인 자세 암흑에 가서 빛을 비추는 썩은 곳에 가서 소금 노릇하는 적극적인 삶의 자세가 필요하다.
둘째 어떤 자유주의적인 신학자가 말하듯이 이 세상에 들어감은 그냥 세상속에 기독교적인 정체성을 무시해 버리고 그들 중의 하나 그래서 그들의 썩은 가치관 우상숭배 썩은 도덕 이런 것을 그것도 옳다. 하나님께서 다 받아준다. 이런 자세로 들어가서는 자유주의 신학에서는 후자에 약점이 있어요. 그러나 보수 신앙인들은 전자에 약점이 있어요. 아예 세상에 안 들어갈려는 오늘 우리가 묵상한 말씀에서 특히 크리스마스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같은 죄인들 병자들에게 오셔서 구원의 잔치를 베푸심.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가를 느끼고 둘째로 우리의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 그것이 자꾸 이 세상에서 철수할려는 우리의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세상의 더러움 보다 더 세다. 하나님의 은혜가 세상의 죄보다 더 크다. 하나님의 영 성령이 세상의 영보다 더 강하다. 그 믿음을 가지고 이 세상 썩은 곳에 의사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고 하나님의 올바른 도를 가르쳐서 치유를 가져오는 의사노릇을 하러 적극적으로 들어가야 된다는 것을 오늘 같이 묵상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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