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5:14-30 달란트 비유 하나님 나라의 비유(11) - 김세윤 교수
오늘 공부할 비유는 달란트 비유입니다. 우선 본문을 먼저 교독하겠습니다. “마 25:14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15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16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17 두 달란트를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18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새 20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2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4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27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 이 비유는 지난시간 몇 주 동안 우리가 살펴온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돌아 가셔서 우리를 떠나 계시는 동안 그가 이제 종말에 재림하실텐데 그 재림하기 전에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이 그의 제자들이 어떠한 태도로 재림하는 그 분을 맞을 준비를 해야 되는가. 어떠한 태도로 주께서 지상에서 우리로 부터 부재기간 동안에 삶을 영위해야 되고 봉사를 해야 되는가 하는 일련의 비유들의 마지막 비유를 오늘 살펴보게 되어요. 그런데 이 이야기는 이미 익히 잘 아는 이야기여서 다시 되풀이 하지는 않겠어요. 그런데 조금 생생한 감을 갖기 위해서 한 달란트가 어느 정도의 돈이냐면 한 달란트는 성인의 10년분의 노임에 해당이 되어요. 그러니까 오늘날의 돈으로 환산을 하면 가령 월급을 100만원을 받는다고 합시다. 그러면 1년에 1200만원 연봉, 10년분이면 1억 2천만 원이지요. 상당한 자본을 이 주인이 세 종들에게 주면서 그것으로 사업을 하라고 한 거여요. 그러니까 한 달른트 받은 사람도 1억 2천만 원의 상당한 밑천을 받았지요. 그런데 여기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은 6억을 받은 사람이고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2억 5천을 받은 사람이고 상당한 돈을 가지고 장사를 하라. 그렇게 이야기를 했어요. 우리가 앞서 공부했던 비유들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는 동안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비유들과 공통됨이 무엇입니까? 주께서 우리로 부터 부재하시는 동안 그러니까 그의 재림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서 성실한 자들이 있고 성실하지 못하는 자들이 있음을 말하면서 성실하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기쁨에 당도하지 못하리라는 경고가 주어져 있고 이런 것들이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일련의 비유들의 공통점이어요. 그런데 다른 비유들은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보았던 비유들은 대개 주께서 예기치 않은 중에 오리라 그러니까 늘 준비하는 마음으로 있어야 한다. 청지기의 비유도 그런 것이었고 거기에 초점이 있었고 열처녀의 비유에서도 거기에 초점이 있었지요. 그런데 오늘 비유는 기다리는 것 보다는 기다리는 동안에 우리가 성실히 제자도의 삶을 살아야 한다. 거기에 초점이 있어요. 그러니까 마5:15절에 예수께서 등을 말 아래 두어서는 안 된다고 한 말과 일맥상통하는 비유라고 볼 수 있어요. 여기 한 달란트를 받아 가지고 그것으로 열심히 사업을 해서 이익을 남겼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땅을 파고 거기에다 숨겨 가지고 사업을 못한 이 종은 마치 예수의 산상수훈에 나오는 등불을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하나님의 진리를 아는 자로서 하나님의 계시와 하나님의 진리를 세상 암흑세상에 널리 선포해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게 하는 의무를 가진 자가 그 계시의 불을 등불을 말 아래 둠으로 해서 전혀 제자도의 의무를 다하지 못함. 선교를 다하지 못함. 그런 자와 똑같은 자가 된 것이지요. 이런 자는 예수께서 또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씨를 뿌려서 좋은 밭에 뿌려서 많이 생산하면 생산할수록 그 사람에게는 더 많이 주어지고 그렇게 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산을 하지 못하는 자에게는 가진 것도 빼앗아 간다고 막4:24-25절에 경고를 하셨는데 그것과 비슷한 이런 가르침을 하고 있는 비유여요. 여기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 주인이 종들에게 그들의 능력대로 능력에 따라 이렇게 달란트를 나누어 주었다는 것 아닙니까? 15절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었다. 이렇게 말하고 있잖아요. 이것은 우리에게 가령 바울의 로마서 12장에서 설명하는 주께서 우리 각자에게 성령의 은사들을 나누어주심을 상기시켜요.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들에게 이 은사들을 나누어 주셨어요. 엡 4:7-8절을 읽어 보실까요? 엡 4:7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8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승천하셨을 때에 그의 백성들에게 성령의 은사들을 나누어 주셨다. 그것을 잘 활용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풍성한 열매를 맺도록 주셨다. 각자에게 그러니까 은사들이 다르고 그 은사들을 어떤 사람에게는 현저한 은사를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좀 덜 현저한 은사를 주시고 이렇게 주셨어요. 우리에게 이와 같은 바울사도나 벧전 4장에 있는 가르침을 연상케 하는 비유여요. 그런데 이 비유를 보면 처음 두 성실한 종들 다섯 달란트를 받아서 사업을 해서 다섯 달란트의 이익을 남긴 사람 또 두 달란트를 받아서 두 달란트의 이익을 남긴 사람 이 사람들에게 하는 주인의 칭찬이 똑 같아요.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 할지어다. 그러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다양한 은사들을 받고 또 다양한 재능 다양한 크기의 재능들을 받았는데 어떤 사람들은 더 많은 재능을 받고 어떤 사람들은 덜 받고 그런 것이 큰 문제가 아니고 우리 각자 받은 재능을 최대한 성실하게 주를 위해서 쓰고 이웃을 위해서 활용함으로서 열매를 맺으면 결국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서 누리는 축복을 것이다. 재림하시는 주로 부터 칭찬이 같음을 우리가 여기서 알게 되어요. 우리는 이 세상에 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더 큰 재능을 받은 것에 대해서 자랑하고 어떤 사람은 덜 받은 것에 대해서 열등감을 가진 다든가 시기한다든가 이럴 수가 있고 그런데 그런 것이 그렇게 중요하지 많음을 우리가 알게 되어요. 그리고 중요한 것은 위로부터 받은 달란트를 최대한 활용해서 주를 위한 성실한 삶으로 말미암아 재림하셔서 우리의 심판과 구원을 이루실 주로부터 하나님 나라의 완전한 구원에 참여하도록 부름을 받은 그것이 중요한 것임을 우리가 알게 되어요. 그런데 지금 하나의 문제가 발생이 되어요. 왜냐하면 이 비유의 누가복음 판은 달아요. 아려러분들 제가 괜한 것 가르쳐 주지요. 그냥 그런가 보다 생각하시면 되는데 눅 19:11-27절까지 거기도 또 같은 비유가 나오는데 문제는 좀 다르게 나와요. 누가복음 19:11-27절을 교독합시다. “눅 19:11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저희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러라 12 가라사대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13 그 종 열을 불러 은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14 그런데 그 백성이 저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가로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노이다 하였더라 15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와서 은 준 종들의 각각 어떻게 장사한 것을 알고자 하여 저희를 부르니 16 그 첫째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17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18 그 둘째가 와서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19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 20 또 한 사람이 와서 가로되 주여 보소서 주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21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22 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판단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을 알았느냐 23 그러면 어찌하여 내 은을 은행에 두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변리까지 찾았으리라 하고 24 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 25 저희가 가로되 주여 저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 26 주인이 가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27 그리고 나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 여러분들 이 비유와 앞의 마태복음 25장의 비유가 아주 유사하지요. 멀리 가는 주인이 종들에게 장사자금을 주어서 장사를 했는데 두 종들은 신실하게 해서 이익을 많이 남겼고 한 종은 신실하지 못해서 장사를 하지 않고 게으름을 부려서 아무 것도 남기지 못했고 그래서 주인이 돌아와서 성실한 종들에게는 많은 상급을 내렸고 성실하지 못한 종에게는 있는 것도 빼앗아 버리는 엄한 심판을 내림. 이것이 똑같지요. 그런데 무어가 다릅니까? 자세한 것에서는 다른 것이 많지요. 우선 달란트가 어느 정도 돈이라고요? 10년분의 노임 요새 월급을 100만원한다면 1억 2천 쯤 되지요. 므나는 그보다 훨씬 작은 100일분의 노임에 해당이 된다고요. 석 달 반의 노임이니까 한 달에 100만원이면 350만 원쯤의 노임 하여간 그 다음에 한 사람이 열 므나 받았고 한 사람이 다섯 므나 받았고 한 사람이 한 므나받았고 이런 상세한 점에서 다르지요. 누가는 멀리 가게 된 주인을 귀인이라고 부르고 그 사람이 멀리 가게 된 이유도 왕위를 받으러 갔다고 상세히 적고 있어요. 그런데 그 영토의 백성들이 그 사람이 왕이 되는 것이 싫어 가지고 그 사람 뒤에 대표단을 보내 가지고 그 귀인보다 더 높은 사람에게 황제에게 우리는 이 사람이 왕이 되는 것을 반대합니다. 이 사람을 왕으로 만들어 주지 마소서. 이렇게 청원을 했다는 거여요. 그래서 이 귀인은 결국 왕위를 받아 가지고 와서 마태복음에 없는 일 그러니까 한 므나 받았는데 그것으로 장사하지 않은 자를 심판한 것은 마태복음의 비유와 같은데 여기 또 하나 누가복음에만 있는 것 자기의 왕권에 반대한 그 동네 백성들 그 도읍의 사람들을 다 죽였다. 이렇게 심판을 했다. 그것이 지금 마태복음하고 누가복음에 큰 차이점들이지요. 왜 이런 틀림없이 같은 비유인데 왜 마태와 누가가 달리 보고하느냐? 아마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는 제안들이 있는데 둘 중에 하나겠지요. 하나는 예수께서 같은 가르침을 정황에 따라 조금씩 달리 가르쳤을 것이어요. 그래서 근본적으로는 비슷한 비유를 정황에 따라 어떤 때는 조금 덧붙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생략하기도 하고 이렇게 해서 가르쳤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마태는 좀 단순한 비유를 적고 있고 누가는 예수께서 어떤 다른 정황에서 같은 비유를 좀 더 확대해서 초점을 한 두 개 더 갖는 그런 비유로 확대를 해서 가르쳤는데 그 판을 누가는 적고 있고 그럴 가능성이 하나 있고 또 하나는 누가가 원래 두개의 비유들을 종합해서 지금 오늘 누가판 같은 모습이 되지 않았겠나? 원래 그러니까 근본적으로 달란트의 비유 마태와 근본적으로 같은 비유에다가 두 번째 요소 누가판에 있어서 마태판에 전혀 없는 부분 왕권을 받으러 갔는데 뒤로 그 도읍의 사람들이 그 분이 와이 되는 것이 싫다고 가서 청원하고 그러나 결국 왕권을 받은 귀인이 와서 왕이 되어 가지고 자기를 반대한 시민들을 죽였다. 그런 또 다른 비유였는데 누가가 두 비유를 섞었을 가능성이 있고 둘 중에 하나겠지요. 그러나 그 중에 어느 것이라고 해도 괜찮아요.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예수 당시의 예수의 청중들이 누가가 말하는 대로 그 비유를 들으면 아주 실감나게 비유를 들었을 거여요. 왜 그러냐면 그것이 바로 헤롯왕의 사건이어요. 예수가 말하는 비유가 헤롯왕의 사건이어요. 우리 성경시대의 유대역사를 보면 헤롯이라는 이름이 참 많이 나와요. 여러 사람의 해롯이 있었어요. 그런데 우리가 아는 헤롯은 크게 두 사람, 하나는 헤롯대왕이라는 사람인데 마태복음 1-2장에 나오는 헤롯이어요. 예수의 탄생 때에 동방박사들로 하여금 예수의 탄생지를 알려 달라고 해서 예수를 없애 버릴려고 했던 왕 그 사람이 헤롯대왕이어요. 그 사람은 주전 4년에 죽었어요. 그 사람이 죽자 그 사람은 원래 반 유대인이었어요. 아버지는 에돔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유대인이었어요. 이 사람이 로마 황제에 의해서 유대인의 왕으로 임명이 되었는데 유대인들이 굉장히 반대를 했었어요. 그래서 헤롯이 자기 왕권을 행사하기 위해서 용병을 사가지고 예루살렘에 대해서 전쟁을 3년간이나 했어요. 그래서 겨우 왕권을 차지한 뒤로 오랜 동안 37년간이나 통치를 하면서 무단하게 통치를 했어요. 물론 로마사람에 의해서 임명된 왕이었어요. 그런데 이 사람이 주전 4년에 죽었어요. 예수의 탄생과 함께 그 무렵에 죽었어요. 그러자 이 헤롯대왕이 자기 영토를 자기 아들 세 명에게 나누어 주었어요. (유언으로) 유대 땅과 사마리아 땅과 이두매야 땅은 아켈라오의 아들에게 주었고 그리고 그에게 왕의 칭호까지도 넘겨주었어요. 그리고 저기 갈릴리 땅은 헤롯 안티파스에게 넘겨주었어요. 그런데 이 헤롯 안티파스는 우리가 알아요. 성경에 세례요한의 목을 베고 예수를 핍박하고 예수로 부터 그 여우같은 놈이라고 욕을 먹고 나중에 예수를 재판하고 한 헤롯은 이 지금 헤롯안티파스여요. 갈릴리의 통지자. 그 다음에 세째 아들 빌립은 갈릴리 호수의 동부 북부 그 영토를 주었어요. 이렇게 헤롯의 왕국을 셋으로 나누어 가지고 나누어졌어요.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로마사람들의 추인을 받아야 해요. 그래서 유대와 사마리아와 이두매와 그러니까 헤롯 왕국의 중심부를 다스리게 되었으며 헤롯으로 부터 왕의 칭호까지도 승계 받게 된 아르켈라오가 실제로 로마에 갔어요. 그래서 로마의 황제로 부터 왕이라는 그리고 왕으로서 그 영토를 다스릴 수 있는 권리를 받을려고. 그러니까 여기 예수의 이야기 귀인같이 했다. 그 말이어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아르켈라오를 좋아 할리가 없어요. 헤롯대왕도 싫어하던 참인데 아르켈라오는 또 어머니가 사마리아인이었어요. 헤롯대왕 자신도 반유대인이었는데 그의 아들 아르켈라오는 4분의 1 유대인도 아니어요. 그러니까 좋아할 리가 없어요. 사마리아 그 원수 같은 사마리아 사람들 그래서 유대인들이 로마 황제에 우리는 아르켈라오가 우리를 다스리는 왕이 되는 것을 반대한다는 청원을 하도록 대표단을 파견 했어요. 로마황제가 헤롯대왕의 유언을 결국 추인을 했어요. 그렇게 해서 헤롯의 왕국을 삼구분해서 세 아들들에게 나누어 주고 아르켈라오가 유대와 사마리아와 이두매아를 통치하게 되었어요. 다만 아르켈라오에게 왕이라는 칭호는 쓰지 못하게 만들었어요. 왕이라는 칭호는 쓰지 못하고 한 종족의 통치자라는 말로 에르스나고스(?)라는 칭호만 들었어요. 그것을 받아 가지고 와서 아르켈라오가 10년을 통치했는데 그 통치가 아주 좋지 못했어요. 자꾸 문제가 발생하니까 나중에 로마황제가 아르켈라오를 쳐서 그의 통치를 종식시키고 총독을 직접 보내서 총독정치아래 들어간 것이어요. 그 총독들이 여럿이 있었어요. 다 못되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우리가 잘 아는 충독 빌라도 그런데 갈릴리는 계속 헤롯 안티파스가 통치를 했어요. 그래서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활동을 했을 때 핍박을 받게 되고 그의 재판도 받고 그런 것이지요. 그러니까 예수의 비유를 듣는 사람들에게는 엊그제 아르켈라오 이야기를 지금 예수가 비유로 들은 것이어요. 자신이 십자가에 죽음과 부활로 하나님께 가서 하나님 아버지로 부터 만유의 주권자로 만유에 군림하는 왕권을 받으러 가는 것으로 그리고 있어요. 그리고 결국 그 왕권을 받아 다시 이 땅에 오신 분으로 자기를 그리고 있어요. 참으로 놀랍지요. 아 그 유대 사람들 귀에는 유대인들에게는 아르켈라오 하면 치가 떨릴텐데 아주 좋아하지 않을텐데 사람들이 그 아르켈라오의 이야기를 자기에 대한 비유로 예수께서 썼다. 상당히 재미있지요. 예수께서 앞으로 자기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하나님께 가서 하나님으로 부터 만유에 군림하는 왕권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하나님께 끝까지 등을 돌리고 반대하는 원수들을 벌주시는 심판자로 오실 것을 하필이면 아르켈라오의 예를 들어 가지고 설명을 했다는 것이 참 재미있잖아요. 하여간 다시 한 번 보지만 예수께서 그 삶의 정황에서 그것이 씨 뿌리는 자의 농부의 이야기든지 어부의 이야기든지 또는 예수의 재료들 중에 그런 것이 많지요. 그러나 가끔은 장사하는 달란트나 므나 장사하는 비유 삶의 정황에서 사람들이 쉽게 또는 목수일 하는데 있어서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 비법이 전수되는 이런 것들을 재료로 했어요. 사람들이 쉽게 즉각적으로 이해할 그런 자료들을 비유로 해서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가르쳤어요. 그래서 여기 지금 아르켈라오를 재료로 삼아서 예수께서 자신이 하나님 나라에 가서 하나님으로부터 천지의 창조주이심, 역사의 지배자이신 하나님으로 부터 왕권을 받아서 다시 오신다. 그것을 지금 말하고 있는데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시편 110:1절을 말하는 거여요. 시 110:1절“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다윗이 여호와께서 내 주 메시야에게 이르시기를 내 우편에 앉았으라 우편에 앉은 것은 왕의 대권을 위임받는 것 그래서 여호와가 주여요. 그런데 여호와 우편에 메시야가 등극을 해요. 메시야가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으로 부터 그의 왕권을 위임을 받는다고요. 그러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주권 주되심 만유의 주로 군림하심을 위임받아요. 이 시 110:1절은 우리 신약성경에 가장 많이 인용이 되는 구약의 말씀이지요.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 하나님의 왕권을 위임받으심 그래서 아들로서 아들은 상속자라는 뜻이다. 아버지의 대권을 위임받아서 만유위에 군림하심. 이것이 예수의 십자가에 죽음과 부활 그리고 지금 현재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심을 미리 예언한 말씀으로 우리 신약성경에 가장 많이 인용된 구약이어요. 그런데 그 중에 대표적으로 한 곳만 보면 빌 2:6-11절이다. 이것이 지금 시편 110편 1절을 풀어서 말하는 거여요. “빌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그런데 우리가 막 12:35절 이하를 보면 예수께서 스스로 시편을 인용해서 다윗이 메시야인 자신을 이미 주라고 불렀음을 말씀하지요. 지금 이 비유에도 그와 같은 예수의 자기이해가 담겨 있는 것이어요. 곧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시편 110편에 예언된 대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거여요. 그래서 하나님으로 부터 그의 주권 왕권을 위임받아서 만유의 주로서 우리에게 오실 것이어요. 그 진리를 지금 아르켈라오 이야기를 비유하고 있어요. 막 12:35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새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뇨 36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37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더라 백성이 즐겁게 듣더라 그래서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지금 가셔서 하나님의 왕권 주권을 위임받아서 이 땅에 다시 올 때까지 이 땅위의 시민들 가운데는 백성들 가운데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있어요. 여기에 보면 누가복음 비유로 말하면 예수의 종들이 있고 예수의 종 되기를 거부하는 그의 왕 됨을 거부하는 자들이 있고 그런데 예수의 종들 중에서도 또 두 갈래로 갈라져요. 그러니까 사실은 세 종류여요. 크게는 두 종류. 예수의 종들이 있고 또 그가 왕 됨을 거부하는 불신자들 예수의 주되심을 거부하는 불신자들 그의 주권을 불순종하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겠다. 이런 자들을 말하지요. 그런 자들에게는 그의 주가 돌아와서 있을 심판이 하나님 나라의 구원에 들어가지 못함. 영생에 들어가지 못함. 죽임을 당함. 엄중한 경고가 있고 그리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는 종들 가운데에 우리가 거기 속하는데 거기에 두 종류가 있어요. 이것은 마태복음의 비유와 같은 것이지요. 주께서 주신 은사들을 잘 활용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많은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 이 사람들에게는 상급이 있고 주로부터 은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은사여요. 그것이 한 달란트면 1억이 넘는다고요. 한 므나여도 350만원이 되요. 적지 않은 은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땅에 묻는다든지 무슨 수건으로 싸놓는다든지 후자를 심판하는 주께서는 뭐라고 불러요? 악하고 게으르고 무익한 종이라고 불어요. 게으르고 무익한 것은 알겠는데 왜 그것이 악합니까? 주의 뜻을 주를 제대로 믿지 못하고 주를 독한 사람 남에게 못된 사람 씨 뿌리지 않고 거두고 헤치지 않고 거두는 남을 착취해서 남의 것 뺏는 사람 이렇게 주에 대해서 이해를 못하고 이해를 하려고도 하지 않고 그의 뜻에 순종하려고 하지 않고 이런 사람 우리가 성경공부도 게을러서 하나님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고 주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고 주의 뜻을 살피고 그의 뜻대로 살려는 그런 노력도 없고 게으르고 이런 사람 이런 사람은 가진 것 까지도 뺏기는 거여요. 가진 것이 무엇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 나라에 받아들여졌지요. 우리가 구원의 첫열매를 얻었지요. 그런데 이 비유대로 말하면 그것 까지도 뺏긴다. 이렇게 말하면 전에도 우리가 누차 이야기했지만 이 비유대로 이렇게 생각하면 금방 우리는 아니 한번 구원받은 사람은 영원히 그 구원이 견지된다고 성경이 가르치지 않느냐? 예 그렇지요. 성경이 그것도 가르친다. 그러나 바울의 말대로 한다면 선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선자가 넘어질 수 있음. 그것을 어떻게 두 가르침이 서로 적당히 합리적으로 타협을 이룰까 그렇게 헤아릴려고 하지 말라고 그랬지요. 둘 다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되어요. 하나님 편에서 철저히 우리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 진 것이므로 신실한 하나님 설령 우리의 미련함에도 불구하고 불성실에도 불구하고 은혜로 우리 구원을 끝까지 지키시리라는 그 진리도 우리가 견지해서 그것이 그럼으로 해서 우리 신앙이 안도함이 있어야 된다고요. 안도함의 반대되는 말은 안절부절함. 반면에 성경은 우리가 제자도에서 성실하지 않으면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구원의 첫 열매도 놓칠 수 있다. 히브리서 6장 10장에 엄중한 언어로 경고하지요. 한번 빛의 쬐임을 얻은 사람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서 진리를 알고 구원의 첫 열매를 얻은 사람이 신앙을 버리면 두 번째 회개는 없음.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에 뒷걸음질 치면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가운데 더 이상 돌아올 수 없는 낭떠러지가 있을 수 있음. 그것도 우리가 성경의 가르침을 중요시해야 된다고요. 그러면 두렵고 떨림의 자세가 있어야 되어요. 그래서 신앙의 안도함과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신실함에 전적으로 맡기는 안도함과 그러나 날마다 나의 제자도의 삶을 재점검하는 두렵고 떨림의 이 자세가 건전한 긴장을 이루었을 때 우리 신앙이 건전한 시낭이라고 여러 번 가르쳤는데 여러분들 기억나십니까? 여기 지금 이 비유는 후자 쪽으로 우리에게 다시 한 번 마태는 아까 달란트 10, 5, 1달란트 이렇게 배분되었는데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를 남긴 사람에게 같은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은혜 같은 종류의 축복이 선언되는 것을 볼 수가 있어요. 그런데 누가에 있어서는 그 반대여요. 누가판의 이야기는 이 사람들에게 므나를 나누어 주었지요. 한 므나씩 똑같이 나누어 주었어요. 그런데 한 사람은 열 므나를 남기고 한 사람은 다섯 므나를 남기었어요. 그 사람들에게 상급도 다르게 남겨졌어요. 열 므나 남긴 사람에게는 열 고을을 다스리라. 다섯 므나를 남긴 사람에게는 다섯 고을을 다스리라. 전에 우리가 고전 3장을 공부하면서 상급에 대해서 공부했지요.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있어서의 가치관을 이 세상의 관점에서 이 세상의 경험을 비유로 한다면 지금 분명히 열 고을 차지한 사람이 더 큰 상급을 받고 더 좋은 것이지요. 다섯 고을 받은 사람은 덜 좋은 것이고 그런데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예수의 가르침 하나님 나라에서는 이 세상의 가치관이 뒤집어져요. 완전히 뒤집어져요. 그래서 이 세상의 큰 자가 작은 자가 되고 하나님 나라에서는 통치자가 섬기는 자이고 그러니까 여기 열 고을 다스린다는 말은 이 세상에서와 같이 열 고을 위에 군림해서 그 백성들로 부터 대우를 받고 그런 것이 아니고 열 고을을 섬기는 거여요. 막 10장 42-45절을 읽어 볼까요? “막 10:42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4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는 하나님 나라가 마치 이 세상의 질서와 똑같은 것인 줄 알고 세베대의 아들들이 거기 수상 부수상을 하게 해 달라고 예수께 부탁을 하니까 다른 제자들도 분해가지고 우리도 저 제자보다도 조금도 못하지 않는데 가장 좋은 자리는 다 저자들이 차지하고 우리도 좀 차지하게 해달라고 서로 경쟁이 붙었어요.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질서는 이 세상의 질서와는 완전히 뒤집어져요. 하나님 나라에서는 지도자가 섬기는 자여요. 이 세상의 지배자는 군림하는 자여요. 하나님 나라에서는 종노릇하는 거여요. 이런 정신으로 우리가 비유를 이해를 해야지요. 예수가 열 고을을 맡기신다니까 상급이라는 것이 뭐냐? 바울이 고전 9장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섬김 자체가 상급이어요. 바울은 뭐라고 그래요? 전에 우리가 고전을 공부할 때 배웠지요. 자기가 그런 엄청난 고난 가운데에 주께서 주신 사도의 권리 회중들로부터 생계를 얻어 살면서 복음을 선포할 권리가지 포기 하면서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바울은 상급을 위해서라고 그러지요. 그런데 그 상급은 무엇이냐? 복음을 효과 있게 선포하는 그 자체 그것이 상급이어요. 그래요. 섬기는 것 그러니까 우리가 너무 추상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상급을 아파트 로얄층으로 생각을 해요. 냄새나는 1층은 게을렀던 성도들이 가는 데고 로얄층은 애써서 새벽기도도 열심히 했던 성도들 전도를 열심히 했던 성도들이 가는 곳이라고 너무 그렇게 생각할 것은 아니어요. 중요한 것은 더 열심히 섬기는 것 더 많은 책임을 지는 것 이것이 상급이라는 거여요. 그러니까 우리의 가치관이 그렇게 변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지금 여기서 벌써 그렇게 변하면. 그러면 우리의 한국의 정치도 많이 정화될 것입니다. 인간관계도 많이 정화되고 거기에 정말 하나님 나라의 샬롬이 일어날 것이어요. 정의가 일어날 것이어요. 자유가 확대되고 하여간 여기 우리에게 경고와 권면이 있어요. 여기서 두 가지만 조금 더 관찰하고 넘어 가려고 합니다. 하나는 이 종들이 어떻게 주인 또는 왕 되는 분의 종들이 되었는가를 설명하지 않아요. 그들의 재능으로 너 다섯 달란트 이익을 남겼으니 내 종이 되라. 너 두 달란트 남겼으니 내 종이 되라. 이렇게 말하지 않아요. 종이 되었어요.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어떻게 돕니까? 우리의 공적으로 우리의 달란트로 됩니까? 우리의 능력으로 됩니까? 그것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요. 하나님이 그의 은혜로 우리를 자기 백성 삼았고 주 예수께서 우리를 그의 은혜로 그의 종 삼았어요. 하나님 나라 속에 있어요.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첫열매를 누리는 사람들이어요. 우리에게 그러니까 지금 중요한 것은 은혜로만이지요. 그런데 그 구원의 상태에 있는 우리에게 지금 중요한 것은 예수의 주권에 충실히 순종하는 제자도의 삶을 성실히 하는 것 그것을 위해서는 권면과 경고가 주어져요. 여기서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은 어떤 분으로 나타납니까?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실 분이지만 동시에 그의 뜻을 어긋나고 그에게 반대하는 그를 끝까지 그에게 등을 돌린 사람에게는 엄한 심판자로 나타나요. 그 다음 마지막으로 예수의 재림 때 있을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상태는 어떤 상태입니까 그냥 더 이상 아무 것도 없는 다 잠자는 아니면 그냥 모여서 예수께 찬양예배만 드리는 그런 것이 아니고 열 고을을 맡아 다스리고 다섯 고을을 맡아 다스리고 이런 것이 뭐어요? 계속해서 섬김 서로에 대한 섬김의 장 서로에 때한 더 많은 섬김을 하는 그런 관계가 계속되는 곳. 그래서 서로에 대한 더 많은 섬김의 관계가 계속되기 때문에 그 곳에 진정한 샬롬이 있고 진정한 기쁨이 있고 생명력이 가득찬 곳. 그렇게 우리가 생각하도록 이 비유는 가르치고 있어요. 자 우리가 이 비유로 아까 서두에 말씀을 드린 대로 주께서 부활승천으로 말미암아 그가 다시 우리의 구원과 심판을 완성하여 재림하실 때까지 우리로 부터 부재기간 동안 우리가 어떤 자세로 남아야 되는가에 대한 가르침을 주는 비유들에 대한 공부들을 일단 마쳐요. 이 다음에는 다른 종류의 비유들을 우리가 살펴보겠어요. 두 가지로 요점을 간략이 하면 늘 언제 오실지 모르는 깨어서 늘 기도하는 자세로 살아야 한다는 그런 일련의 비유들을 보았지요. 그 날과 그 때는 모르니 항상 종말에 비추어 오늘을 살아 한다. 그것은 항상 주를 맞을 주를 영접할 그런 자세로 살아야 한다는 말도 되지만 오늘을 너무 절대화하지 말고 오늘 여기에서의 가치들에 너무 혼을 빼주지 말고 종말에 완성의 빛에 비추어서 오늘의 가치들을 상대화시켜서 오늘의 가치들로 부터 자유로운 사람들로 살아야 된다는 것. 다른 하나는 오늘 주로 살핀 것 그 동안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들을 최대한 성실하게 써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많은 열매를 맺으면서 살아야 한다. 그런 말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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