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4:21-32 확장되는 하나님 나라의 비유들 하나님 나라의 비유(4) - 김세윤교수 십자가 마을에서 가져옴 - 손무성 목사 오늘은 막4:21-32절입니다. “막 4:21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나 평상 아래나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22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23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24 또 가라사대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 또 더 받으리니 25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26 또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27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28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29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 30 또 가라사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꼬 31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32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나물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 자 오늘은 여러 개의 비유들을 읽었어요. 마가복음 순서를 따르면 곡식을 되는 됫박의 비유 하나하고 그 다음에 등경의 비유 하나하고 세 개의 씨의 비유 그 중에 첫째는 스스로 자라나는 씨의 비유, 이 비유는 마가복음에만 나와요. 마태와 누구에는 안 나오고 . 그 다음에 겨자씨의 비유가 나와요. 겨자씨 비유와 함께 마태복음에는 13장 31-33절 겨자씨의 비유 33절은 누룩의 비유이고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가 짝을 이루어요. 그런데 마가복음에는 스스로 자라는 씨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그 앞에 됫박의 비유와 등경의 비유가 있고 스스로 자라는 씨의 비유가 있고 겨자씨의 비유가 있어요. 그 앞에는 무엇이 있어요? 씨와 밭의 비유가 있었고 그것의 해석이 있었고 마태와 누가복음에는 스스로 자라는 씨의 비유는 없고 겨자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가 짝을 이루어서 나타나고 그 대신에 여기에는 누룩의 비유가 없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 주로 우리가 마가복음 순서를 따라가되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는 다음에 보겠지만 하나의 짝을 이루는 비유여요. 같이 다루기 위해서 잠깐 마태로 가는 거여요. 그런데 이 됫박과 등경의 비유는 앞의 씨와 밭의 비유와 그것의 해석과 아주 직결되어 있어요. 물론 이 비유들도 다 막 4:1-10절 까지의 씨와 밭의 비유와 직결이 되어 있어요. 그런데 마가복음 겨자씨의 비유 다음에 마가복음 순서로 하면 34절은 이제 비유가 끝나고 해석하고 다시 예수께서 떠나가는 그런 모습이 있는데 이 뒤에 우리가 다룰려고 하는 비유가 밀과 가라지 비유를 다룰 거여요. 마태복음 13장을 보시렵니까? 39절에 가라지의 비유 이런 것들이 또 나타나요. 그런데 됫박의 비유와 등경의 비유는 앞의 예수의 씨와 밭의 비유와 연결이 되면서 또 밀과 가라지의 비유와도 연결이 되어 있어요. 내용상 예수의 가르침 하나님 나라 가르침 복음을 듣고 알아듣는 사람들과 그것을 알아듣지 못하고 배격하는 사람들의 갈림에 대한 그래서 죄의 심판 때의 갈라짐에 관한 내용이어요. 됫박과 등경의 비유는 마가의 순서로는 지금 오늘 이 시간에 다루어야할 것이나 조금 바꾸어서 나중에 밀과 가라지의 비유로 다음에 다루기로 하고 오늘은 이 세 개를 다루기로 해요. 자 그러면 오늘은 막 4:26-29절 까지의 겨자씨를 보면 이 비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가 임박했다고 가르치시고 아니 자기의 선포와 자기의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고 사람들을 회개시키고 믿음을 유발시켜서 그들을 온전케 함을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한 증거로 나타내는데 아 그러니까 예수의 말을 들으면 예수의 가르침대로 한다면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다는데 그리고 그 하나님 나라가 임한 증거를 이렇게 병자가 병고라는 악으로 부터 해방이 됨, 삭개오 같은 사람이 온전해짐, 이런 것을 증거로 내세우면서 이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가 여기 지금 나타나고 있지 않느냐 이렇게 증거로 내세우는데 다른 한편 이 세상의 악이 기승을 부리고 고난이 지금도 여전해요. 그러니까 자연히 아니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가져왔다고 지금 주장을 하는데 하나님 나라가 어디 있느냐?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지요? 지난번에 씨의 비유 처음 시작할 때 그 배경으로 당시 묵시문학가들에 의하면 하나나님 나라가 마치 천지개벽을 통해서 새창조 타락한 옛창조가 완전히 파멸되고 모든 것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일시에 변할 줄로 생각을 했는데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가 왔다고 그러는데 뭐 그렇게 세상은 그대로 있다. 모든 것이 천지개벽을 해서 새 하늘과 새 땅이 일어난 것 같지도 않고 또는 당시 열혈당원들은 정치적인 혁명으로 생각해서 하나님 나라를 이상적인 다윗왕조의 재건으로 생각을 해서 이 로마의 악독한 통치자들을 몰아내고 그들과 결탁한 사두개인 제사장 착취자들을 다 몰아내고 사회정의가 다시 일어나며 정치적인 자유가 확대되며 물질적인 풍요가 일어날 줄 알았는데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가 왔다고 그러는데 그런 것 같지가 않아요. 우선 로마제국의 세력은 지금도 엄연한 제국주의 세력으로 유지되고 있고 저 못된 사두개 제사장들은 계속해서 백성을 억누르고 뭐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자연히 하나님 나라가 어디 있는가? 예수께서 가져온 하나님 나라가 어디 있는가? 이런 질문이 나올 수 있지요. 그런 질문에 대한 답이어요. 이 저절로 자란 씨의 비유가 답이어요. 겨자씨의비유도 누룩의 비유도 그것에 대한 답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 답을 자세히 봄으로서 우리는 예수께서 가져온 하나님 나라 또는 역사속에 침투한 하나님의 통치의 영역이 무엇인가를 우리가 좀 더 정확하게 알게 되요. 우리 가운데도 그런 질문이 얼마든지 있지요? 아니 메시야가 오셨다는데 메시야가 오신지 2000년이나 지났는데 그 메시야가 오셔서 하나님 나라의 하나님의 통치 죄악과 죽음을 다스리는 사단의 통치를 꺽고 의와 생명으로 다스리는 하나님의 통치를 선언한지가 2천년이나 지났는데 하나님 나라가 어디 있는가? 세상은 옛날과 똑같고 끔찍한 고난은 옛날과 똑같은데 도대체 하나님 나라가 어디 있는가?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이 다 헛것인가? 이런 질문을 할 수가 있어요. 오늘 같은 날 특히 더할 수가 있어요. 그런 질문이 우리에게 나올 수가 있어요. 그것에 대한 답이어요. 이 세 개의 비유 저절로 자라는 씨의 비유와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가 답이어요. 자 여기 보면 저절로 자라는 씨의 비유를 한 번 보시겠습니다. 4장 26-29절 “막 4:26 또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27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28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29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가져온 하나님 나라가 마치 농부가 씨를 뿌리는 것과 같은 것으로 지금 설명을 하고 있는 거여요. 농부가 시를 뿌린 뒤에 여기 지금 비교적 활동을 안 하지요.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일 밖에 하는 일이 없지요. 농부는 뭐하는 거여요? 기다리는 거여요. 언제까지? 곡식이 다 익어서 추수할 때까지 기다리는 거여요. 이 농부가 그 과정을 좀 더 빨리 하기 위해서 뭐 거기 개입하고 서두르고 그래 보았자 소용이 없어요. 그것이 자라나는 것 그리고 자라나서 열매를 맺는 그 기간이 지나가야 되어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씨가 자라서 어쩐다고요? 자라는 과정이 여기 정확히 기술되어 있지요. 씨가 나서 터서 자라서 28절에 처음에는 싹이 나고 이삭이 패고 그 다음에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 맺고 익는다. 이런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이 농부는 아주 인내력을 가지고 기다릴 수 밖에 없어요. 다 익으면 추수를 하게 되는데 추수에 낫을 댄다. 그러는데 이 말은 요엘 3:12절 말씀을 예수께서 인용을 하는 말이어요. 요엘 3:12절은 무슨 말이냐면 최후의 심판 때를 두고 하는 소리여요. 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될 시점 그 때에 알곡들은 다 거두어들이고 쭉정이는 다 불에 태워버리는데 그 때가 분명히 임한다는 것을 지금 말하고 있어요. 요엘 3:12 열국은 동하여 여호사밧 골짜기로 올라올지어다 내가 거기 앉아서 사면의 열국을 다 심판하리로다 13 너희는 낫을 쓰라 곡식이 익었도다 와서 밟을지어다 포도주 틀이 가득히 차고 포도주 독이 넘치니 그들의 악이 큼이로다 그래서 이 비유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중요한 함축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첫째는 예수께서 씨를 뿌리는 농부요 씨를 뿌리는 자요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를 역사속으로 가져오신 분이어요. 곡식을 거두는 추수하는 분이어요. 추수는 아까 무엇을 상징한다고요? 최후의 심판을 상징해요. 하나님 나라의 완성. 그러니까 최후의 심판은 구원과 정죄를 둘 다 말하지요.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믿음으로 응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온 자들에게는 구원의 완성을 의미하는 시점이며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사단의 나라에 머무르는 자들에게는 정죄를 의미하는 시점 그것이 추수라는 비유로 말을 하는데 예수께서 씨를 뿌릴 뿐만 아니라 추수도 하는 분이어요. 그러니까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가져올 뿐아니라 최후의 심판관으로 나서셔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응한 자들에게는 구원의 완성을 주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응하지 않은 자들에게는 정죄를 가져다주는 심판자 노릇도 하심. 그 뜻이어요. 막 13:24-27절을 읽어 봅시다. 대표적으로 예수께서 바로 그런 것을 거기서 말하고 있지요. “막 13:24 그 때에 그 환난 후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25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에 있는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26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27 또 그 때에 저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여기 종말에 예수께서 인자로서 다시 오셔서 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응한 자를 자기 택하신 자들을 세상 사방에서 모아서 그들에게는 구원을 주고 그러지 않은 자들에게는 정죄를 주는 심판을 하신다. 그러니까 이 저절로 자라는 씨의 비유에서 첫째로 하나 배운 것이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시작하신 분이며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완성 때에 심판하시는 분이시다. 둘째로 그런데 그 사이에 예수께서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함으로 사람들을 회개하고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므로 선포한 사역을 마친 그 때에서 종말에 완성 재림 때에 오셔서 우리에게 구원과 정죄를 하실 최후의 심판 사이에 이 하나님 나라의 성장과정에는 예수께서 역활을 안 한 것으로 무슨 통치를 하지 못함. 여기 무엇으로 비유했어요? 농부가 하는 일이 뭐여요? 자고 일어나는 것 밖에 안 해요. 그 사이에 씨는 저절로 자라는 거여요. 농부가 씨가 자라도록 어떻게 통제하지 못해요. 이 사이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성장과정에 예수께서 통제하지 않은 것으로 이 비유에서 그렇게 되어 있어요. 이것은 아마 막 13장 32절을 한 번 읽어 보실까요?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심지어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이 하나님 나라의 완성의 순간에 대해서는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인 자신도 알지 못해요. 통제하지 못해요.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성장과 그것의 완성은 하나님 아버지의 소관이다. 그러니까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하나님 나라를 가져 왔지만 그 하나님 나라의 성장은 누가 역할해요? 하나님 아버지가 하신다. 그것이 어떻게 성장하고 언제 그 성장이 완성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들인 자신도 컨트롤하지 못한다. 아들도 모른다고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달려 있어요.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온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께 의지하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의지할 것이지 종말이 언제 오나 숫자 날짜 헤아리고 이렇게 조마조마 하라 그런 말이 아니어요.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 복음에 전적으로 신뢰하라 그런 말이어요. 그런데 하여간 여기에 심지어 아들도 컨트롤할 수 없음.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에께 달려 있음. 그 다음에 세째로 이 비유는 무엇을 가르쳐요? 그 다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는 성장함, 성장해감. 그런데 이 성장이 여기 강조되었지요. 28절을 보십시오.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 나고 다음에는 이삭이 패고 다음에는 이삭의 충실한 곡식이 채워지고 그리고 열매가 익는다.” 이 성장의 과정이 아주 단계적으로 쓰여져서 이 성장의 과정이 강조되었어요. 자 그러면 역사속에서 예수의 초림으로 말미암은 하나님 나라의 시작과 예수의 재림으로 말미암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 사이에 하나님 나라가 성장해 간다는 말이어요. 그러면 이 말이 세상이 점점 더 좋아진다. 는 말이냐? 점진적으로 세상이 더 좋아지냐? 사단의 통치가 점점 더 줄어들고 하나님의 통치가 점점 더 성장한다. 하나님의 통치가 하나님 나라가 성장한다는 말은 거꾸로 말하면 무슨 말이어요? 사단의 나라가 점점 더 줄어든다는 말 아닙니까? 사단의 악과 죽음의 통치가 점점 더 줄어들고 하나님의 의와 생명의 통치가 점점 더 성장한다면 그러면 세상이 어떠해야 되겠어요? 점점 더 좋아져야 될 것이 아닙니까? 점점 더 자유와 정의와 평화가 확대되고 건강이 증진되고 풍요가 더 증진되고 점점 더 좋아져야 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렇습니까? 그래요? 우리 경험으로 비추어 보면 그렇지 않아요. 전에도 제가 강조했지만 세상이 점점 더 좋아지는 일면이 있어요. 그러나 다른 한편 세상이 점점 더 악독해 지는 일면도 있지요. 그래서 그냥 단순하게 세상이 점점 더 좋아진다고 문명 낙관론적으로 말할 수가 없어요. 지난 19세기 때는 엄청난 과학지식을 폭발의 테크놀로지로 선업혁명 이런 것으로 해서 풍요가 이루어지고 교육의 일반화로 소수의 특권이 아니라 교육의 힘에 대한 신뢰가 커졌을 때 19세기에 자유주의 문명 낙관론이 역사는 점진적으로 개선방향으로 좋은 방향으로 발전한다. 그래서 악과 고난이 점점 사라지고 점점 더 좋은 방향으로 나간다. 이런 19세기에 자유주의가 팽배하였는데 20세기에 들어오자마자 처음 50년 동안에 엄청난 전쟁 세계 양차 대전을 겪고 나서 아 그것이 아니구나. 역사가 점점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퇴보하고 있어요. 엄청난 과학과 기술의 발전의 결과가 무엇이냐? 엄청난 큰 살상무기로 해서 더 엄청난 고난을 가져오는구나. 그래서 양차 대전을 겪고 나서는 단순하게 문명 낙관론으로 생각을 할 수 없구나. 그것을 알게 되었어요. 우리 경험에 비추어 보아서도 지금 역사가 점진적으로 좋은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렇게 말해요.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에도 종말에 심판 때에 악인들과 신자들을 구분하신다는 말이어요. 그러니까 무엇을 알 수 있어요? 악인들이 그때까지 있다. 있을 뿐만 아니라 악인들이 더 기승을 부려서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더 핍박한다고요. 지금 시간이 없어서 읽지 않겠습니다만 마태복음 24장 37-39절, 눅 17:26-29절까지 한 번 읽어 보세요. 더 악인들이 기승을 부린다. 이 말이어요. 왜요? 그러니까 예수의 가르침에도 한편 하나님 나라의 성장을 가르치면서 동시에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의 완성단계에 가면 저절로 하나의 진화론적인 과정과 같이 점점 더 악이 소멸되어 지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어떤 면에서 악이 더 기승을 부려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을 더 핍박하고 어렵게 하는 그런 면이 있음. 오로지 하나님의 아들로서 다시 오셔서 사단의 세력을 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구원의 완성을 주어야만 거기에 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된다. 그렇게 예수도 가르쳐요.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가 성장한다는 저절로 자라는 씨의 비유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성장의 과정을 무슨 진화론적인 내재의 법칙같이 자동적으로 성장하는 것으로 그렇게 이해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막 13:24 그 때에 그 환난 후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25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에 있는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26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27 또 그 때에 저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마 24:37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38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39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눅 17:26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27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28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29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 오듯 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두 가지를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어요.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성장의 과정이 진화론적인 과정으로 자동적으로 점점 악을 소멸시키면서 하나님 나라가 성장한다는 그런 말이 아니고 두 가지를 말하려고 한다. 첫째는 추수가 분명히 있다는 것.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된다는 것. 그때에 우리의 구원이 완성이 되며 또한 그때에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응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정죄 심판이 있을 것임. 추수가 있을 것임. 다른 한편 그때까지 성장이 있는데 선교와 제자도로 성장이 이루어져요. 여기 막 13:10절.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 종말이 임하기 전에 먼저 복음이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서 모든 민족들로 하여금 사단을 순종하는 대신에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를 믿고 순종하도록 하는 선전이 있어야 된다. 그래서 모든 민족들에게 하나님 나라로 들어오도록 하는 초청이 이루어져야 되요.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이 사단의 통치에 순종했던 것을 회개하고 그러니까 사단의 통치에 대해서 등을 돌리고 하나님의 통치로 들어오면 하나님 나라가 성장해야 되어요. 그런데 사단의 통치로 부터 회개하고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온다는 말은 하나님의 통치에 의지하고 순종해야 된다는 말이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통치에 의지하고 순종하면 어떻게 나타나요? 이것이 제자도여요. 하나님의 통치에 의지하고 순종함이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 예수의 제자노릇을 하는 거여요. 그래서 예수께서 마태복음 28:18-20절에 보면 예수께서 나와서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하시니라. 아까 막 13장 10절 모든 민족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한다는 말은 사단의 통치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그 통치에서 회개함으로 벗어나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통치의 영역으로 들어오라는 말인데 그래서 그 곳에서 구원을 얻으라는 기쁜소식의 선포요 초대인데 그 말은 다시 말하면 마태복음 28장의 말로하면 예수의 제자가 되어 예수의 가르친 것을 지켜 행하게 하라 그런 말이지요. 예수께서 가르치신 것이 무엇인데요? 많은 것을 가르치셨어요. 그런데 예수는 그 많은 것을 두 마디로 요약을 했다고 그랬지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과 이웃에 대한 내 몸과 같이 사랑함. 이것 두 가지로 요약했다고 그랬지요. 예수의 모든 가르침이 두 마디로 요약이 된 것이다. 이것을 지키면 하나님 나라의 헌신은 무엇에 대한 반대말이라 했지요? 우상숭배의 반대말. 우상숭배는 본질적으로 자신에 대한 신뢰와 자신의 주장이 우상숭배의 본질이어요. 이것이 돌조각이나 나무조각을 신으로 만들어 놓고 그 앞에 절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돌부처상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 가서 절하는 것도 사실은 자기주장이어요. 이렇게 우상을 하나 만들어 놓고 그 우상에게 절하는 것은 사실은 뭐여요? 이 피조물이 하나님으로 부터 지음을 받아서 바울이 롬1:18절로 부터 우리에게 가르친 바에 같이 이 세상을 하나님께서 지으셔서 이 세상에 하나님을 알 만한 증거가 있어요. 그리고 인간의 양심 속에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다고요. 하나님의 법이 새겨져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어요. 그래서 이 자연에 그런 것을 우리는 자연계시라 하기도 하고 일반계시라 하기도 하는데 이런 자연에 있는 증거로 말미암아 하나님에 대한 지식 내면에 양심이 새겨진 하나님의 법에 대한 하나님의 지식 이런 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피조물성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예배해야 된다는 당위성을 가르침다고요. 그것을 칼빈은 종교의 씨라고 그랬어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자연계시 또는 일반계시로 말미암아 있어서 그 자연계시 일반계시에 의한 하나님의 지식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는 당위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을 순종하고 의지해야 된다는 당위를 깨닫게 한다고요.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자기주장하려는 최후의 본질 자기자신을 의지하고 자기자신의 자원으로 자기의 삶을 자기의 안전과 행복을 도모하려는 자기 뜻대로 살려고 하는 자기를 주장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어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어요. 그것은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는 당위를 불러 일으켜요. 동시에 인간은 자기주장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요. 그래서 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가져오는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는 당위와 자기중심으로 자기 힘으로 살려는 인간의 자기주장 의지가 합쳐져서 좀 어려운 말로 변증법적인 합의를 이루어서 만들어낸 것이 우상숭배 그것이 종교여요. 그래서 나무조각 돌조각을 신으로 만들어 놓고 예배함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하나님을 예배해야 된다는 당위도 만족시키면서 동시에 나무조각에 대고 돌조각에 대고 인간이 그 신이 나의 뜻을 성취해 주도록 그 신이 나를 섬기도록 그 신은 뭐하는 신이어요? 나를 섬기는 신이어요. 그래서 동시에 자기주장하려는 의지도 만족시켜요. 그러니까 결국 우상숭배의 본질은 인간의 자기주장이다. 자기의 힘으로 자기의 자원으로 자기의 생명과 안전과 행복을 도모하려는 거여요. 그것이 여러가지로 나타나요. 우리가 아는 불교나 이런 종교들로도 나타나기도 하고 또는 과학적인 지식에 대한 전적인 신뢰로도 나타나기도 하고 인간의 지식을 개발하면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다는 인본주의적인 사상으로도 나타나기도 하고 가장 보편적으로는 예수께서 가장 경계한 바 맘몬이즘으로도 나타나기도 하고 돈으로 부터 자기의 삶의 의미를 확보하고 자기 안전과 행복을 확보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이것이 다 우상숭배여요. 이런 것들은 다 결국 피해를 가져와요. 그러니까 이런 것들을 다 버리고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헌신하라. 지난 번에 내가 맘몬에 대한 우상숭배가 어떻게 폐해를 가져오는가를 설명했지요. 맘몬에 대한 우상숭배 돈으로 우리의 인생의 의미와 안전과 행복과 의미를 확보하려고 하면 우리는 더 이상 나무조각 돌조각에 절하지 않아요. 그러나 돈에는 절을 한다고요. 그러면 돈이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안전과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하면 삶의 원칙이 어떠해야 하겠어요? 착취. 어떤 사람은 부드럽게 자기주장 이웃에 대한 자기주장으로 그래서 삶의 원칙이 착취가 되는 것이어요. 그러면 갈등이 발생하고 불의와 고난이 발생하고 공포가 발생하고 당하는 자는 착취하는 자의 공포 착취하는 자는 착취당하는 자의 공포 이런 것들이 고난들이지요. 반면에 전적으로 하나님께 헌신하면 하나님께 우리 삼의 안전과 행복을 헌신하면 삶의 원칙이 사랑이 되는 것이어요. 너그럽게 나누어줌, 이웃 사랑으로 나타나지요. 그러면 여기에 화해, 의로움, 올바른 관계가 일어나고 공포 대신에 자유가 있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 그리고 인간과 자연 사이에 그래서 삶이 온전해짐. 모든 면에서 온전해짐. 우리의 심리적으로 정서적으로 온전해지고 사회적인 관계도 온전해지고 우리와 자연과의 관계에서도 온전해 지고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구체적인 표현이라고 그랬지요. 지금 현재. 그러니까 이 하나님 나라가 교회가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열심히 선포해서 선교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도록 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 온 사람들에게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그의 제자 되도록. 예수의 가르침이 뭐여요? 하나님 나라에 들어온 사람들의 삶의 원칙이 뭐여요? 두 가지다.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이웃사랑. 우상숭배를 버리고 하나님에 대한 헌신과 이웃을 사랑하도록 열심히 가르쳐서 교회가 선교를 널리 하면 할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일단 하나님 나라의 테두리에 들어오지요. 신앙고백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그들의 삶에 모든 영역에서 예수의 제자노릇을 하도록 그들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에 대한 헌신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하도록 하면 자연히 온존해짐. 구원이 확대되고 고난이 줄겠지요. 이 가능성을 저절로 자라는 씨의 비유가 예수가 말하는 거여요. 그런데 교회로 하여금 선교하게 하고 교회로 하여금 사람들에게 우상숭배 대신에 하나님을 예배하고 이웃을 착취하는 대신에 이웃을 사랑하도록 하게 하는 힘은 지금 그 말이어요. 씨가 자라는 것은 누구의 역할이라고요? 하나님의 역활. 하나님이 자라게 해요. 바울도 고전 3:7절에서 자기는 씨를 뿌렸고 아볼로는 그 씨가 자라도록 물을 부었는데 고린도 교회에 와서 처음으로 바울은 복음을 선포했고 아볼로가 와서 또 가르쳤어요. 아볼로가 더 가르침, 양육한 가르침을 준 것을 바울은 물을 준 것으로 비유해요. 그러나 성장을 준 것은 누구냐? 하나님이어요. 그러니까 우리교회가 복음을 선포하고 제자 여러분들에게 지금 가르치고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의 방식 제자도를 가르치고 하지만 여러분들에게 이 가르침의 진리 됨을 확신하게 하고 그런 이 가르침대로 살도록 해야 되겠다. 우리 삶의 구체적인 현장에서 가치판단 윤리적인 선택의 구체적인 장에서 이대로 살아야겠다고 결단하게 하는 것은 어느 인간일 수가 없어요. 성령이 해요. 그 성령이 지금 작동을 하고 있는 거여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얼마만큼 선교를 열심히 하고 얼마만큼 제자도를 실천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나라가 성장한다고 말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여기에 사단의 반대의 힘도 막강히 작용을 해요. 그래서 하나님 나라가 이렇게 진화론적으로 직선적으로 발전한다고는 보기가 어렵다. 예수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더 좋은 것을 향해서 선을 향해서 직선적으로 진화론적으로 발전한다고는 보기는 어렵고 굴곡이 있어요.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통치에 성령의 역사하심에 순종으로 반응을 잘하면 선교가 제자도의 실천이 잘되며 그만큼 역사속에서 이 세상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 구체적으로 더 많은 진정한 의미의 건강 진정한 의미의 자유 진정한 의미의 정의 평화로 확대되고 교회가 성령의 역사에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려는 성령의 역사에 믿음으로 응답을 못해서 선교가 약화된다든지 하나님에 대한 헌신 대신에 우상숭배 맘몬이즘에 빠진다든지 이러면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 확대되기 보다는 사단의 나라의 악이 확대되고 또 교회가 회개하고 새롭게 선교와 제자도에 열심히 성령의 역사에 진정으로 믿음으로 잘 반응하면 하나님 나라가 확대되고 이렇게 해서 도리어 이렇게 굴곡의 방향으로 진전이 된다고 보아야 해요. 그래서 종말에는 심지어 예수께서 그때는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의 불신앙이 더 퍼져 가지고 예수의 재림 때에 인자가 왔을 때에 신앙을 볼 수 있겠느냐 하는 경고 그래서 예수의 재림 때에 도리어 악이 더 기승을 부릴 수 있음을 경고했지요. 그러니까 여기 지금 저들이 바라는 씨의 비유는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가 예수를 통해서 왔는데 그것이 묵시문학가들 같이 천지개벽하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도 아니고 열혈당원식으로 무슨 정치적인 대 변혁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도 아니고 그러면 여기 아주 현재 절실하게 있어요. 절실하게 그 구원의 힘을 나타내요. 어떻게 나타내요? 병자들을 치유함으로 나타내고 삭개오를 올바르게 함으로 나타내고 그 영역에서 자유와 정의와 평화가 확대되는 것으로 나타내기도 해서 이렇게 나타나요. 죄인들을 새롭게 함으로 나타나요. 그것을 보라 이 말이어요. 그러나 하나님 나라이기 때문에 사단의 훼방과 하나님의 백성들의 믿음이 약하기 때문에 이렇게 패배도 있을망정 궁극적으로는 성장해 간다. 직선적으로 발전 성장한다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문명 낙관론 이렇게 굴곡이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장해 가고 필연적으로는 추수가 있음. 구원의 완성과 심판이 있음. 그것을 말하는 것이어요.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는 전에도 제가 가르쳤고 또 이것과 직결되었으니까 그래도 몇 마디하고 조금만 참으세요. 누룩의 비유는 저절로 자라는 씨의 비유를 좀 더 부연한 것이어요. 이 비유들도 왜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들여왔다는데 지금 하나님 나라가 어디 있느냐? 이 질문은 어느 쪽에서 계속 나오는 거여요. 하나님 나라하면 새하늘과 새땅을 연상하는 사람들 하나님 나라하면 모든 악의 구조가 일시에 제거되고 자유와 정의의 통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열혈당적인 사고 이런 사람들에게서 제기된다. 이 말이어요. 우리에게서도 특히 이 세상에서예수의 가르침대로 살려다가 손해를 보는 것 같고 결과가 무기력 하는 것 같고 자기 자신의 무기력함, 교회의 무기력함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도 이런 질문을 하지요. 하나님께서 2000년 전에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가 임했는데 도대체 하나님의 통치가 어디 있느냐? 죄악과 죽음이 이렇게 기승을 부리는데 하나님의 통치가 어디 있다고 보아야 되느냐? 이런 질문에 답을 한다는 말이어요. 바로 이 씨의 비유들이. 겨자씨의 비유도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를 무엇으로 비유하는 거여요? 겨자씨같이 조그마한 보일랑 말랑한 은닉성 하나님 나락 무슨 천지개벽하는 것으로 보지 않고 이 로마제국을 일시에 뒤집어엎고 이상적인 다윗왕조를 재건하는 정치적인 혁명으로 보지 않고 말씀으로, 하나님 나라가 새하늘과 새땅으로 오지 않고 칼로도 오지 않고 무력이나 혁명으로도 오지 않고 말씀으로 와요. 말씀으로 온다는 말은 설득으로 온다는 말이어요. 설득으로 온다는 것은 한 사람 한 사람 설득함으로서. 그러기 때문에 그것이 대변혁이라든지 전세계에 걸친 창조적 변혁이라든지 또는 정치적 변혁이 아니기 때문에 믿음으로 사람의 눈에만 보여요. 진짜 한 사람이 우상숭배 대신에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고 순종함이 무엇임을 아는 그것이 정말 구원을 가져옴. 그 진리에 대해서 설득이 되어 가지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함, 그때에 거기에 샬롬이 일어나요. 자유와 정의가 확대되고 평화가 확대되고 진정한 신체적인 건강이 증진되고 그렇지 않고 맘몬이즘 때문에 환경이 오염이 되어서 지금 우리 건강이 좋지 않아요. 맘몬이즘이 우리에게 안전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으로 말미암아 그 곳에서 안전과 행복이 온다. 그래서 착취의 원칙으로 사는 게 아니고 사랑의 원칙으로 살아야 한다. 그것을 경제학자들이 그 원칙을 사람들이 경제활동에 적용하는 새로운 경제적인 모델, 맘몬이즘에 기초하는 공산주의나 자본주의나 다 폐해를 가져오는데 맘몬이즘을 조장하는 경제 모델이 아니고 어떻게 하나님에 대한 더 큰 마음의 헌신 이웃에 대한 사랑을 더 조장하는 그런 경제모델 그런 원칙을 가진 경제모델을 어떻게 만들어 낼 수 없을까? 그래서 기독교 경제학자들이 그런 것을 열심히 생각을 해서 창조적으로 그런 것을 해내야 될 것 같고 기독교 정치가들은 법을 만들 때 맘몬이즘을 자꾸 조장하는 법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헌신과 하나님으로 부터 우리의 안전과 행복이 온다고 하는 것, 이웃에 대한 사랑만이 나의 진정한 건강과 나의 진정한 행복을 가져온다. 그것을 어떻게 증진시키는 법제도를 만들어 내려고 애를 쓰면 그러면 하나님의 통치가 성장을 하는 거여요. 점진적으로 성장함. 그러나 필연적으로. 왜?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는 짝을 이루어요. 예수께서 비유들을 많이 짝으로 가르치셨어요. 마태복음13:44-46절 까지 보화와 진주의 비유는 짝을 이루는 거여요. 눅15:1-10절 까지 잃어버린 양과 잃어버린 동전도 짝을 이루는 거여요. 여기 지금 마태 누가복음에 나오는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도 짝을 이루는 비유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짝이 전부 남녀의 짝이어요. 양은 누구의 활동이어요? 남자. 누가 동전을 잃어버렸어요? 여자. 겨자씨의 비유는 농부는 남자. 씨 뿌리는 자는 남자. 누룩은 어디에 속한 것인가? 부엌에 속하는 여자. 음식 만드는 것에 속하는. 그래서 남녀의 짝을 이루어요. 재미있는 것은 예수께서 그 당시 유대사회라는 것이 모든 고대 사회는 전부 그랬지만 완전히 남성의 사회였어요. 그런데 예수께서 그렇게 민감하게 짝을 이루어서 이것도 간접적으로 예수께서 여자들도 인간들로 취급을 했다고 가르쳐요. 그래서 예수가 마태복음 14장 40절 이하에 종말에 예수 재림 때에 심판에 대한 가르침도 남자 여자를 다루어요. 24:40-42절 예수께서 오실 때에 들에서 일하는 두 남자 중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남겨 놓고 맷돌 가는 두 여자 중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남겨 놓고 짝을 이루어서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모든 인간들에게 남자이고 여자이고의 창조의 구분이 중요하지 않고 모든 인간에게 적용이 됨. 그래서 바울이 그와 똑같은 정신으로 갈라디아서에서 3:28절에서 그리스도안에는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고 다 한 가지 그리스도인은 새피조물이라고 하는 거여요. 그런데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가 이렇게 짝을 이루는 비유여요. 그런데 거기서 둘 다 한꺼번에 말하는 바가 겨자씨의 비유는 선교 쪽을 강조하는 것으로 겨자씨가 자라서 마태복음 누가복음에는 큰 나무를 이룬다고 그러는데 겨자씨는 나무는 안 된다고 그럽니다. 커보았자 관목정도 된다고 그래요. 그런데 마가복음에는 그 점이 정확해요. 그 위에 가지가 굉장히 무성해져서 새들이 진짜 깃든데요. 그런데 에스겔 17장 31장 단4장 같은데 보면 하나님께서 종말에 자신의 나라 자신이 세울 나라를 나무로 비유를 해요. 그래서 나무의 가지들에 새들이 그래서 모든 민족들이 안식처를 얻도록 한다는 말을 해요. 예수께서 바로 그것을 염두에 두시고 일부러 나무라는 좀 과장법을 쓴 거여요. 자기의 하나님 나라운동이 이렇게 미미하게 시작을 하지만 결국 나무를 이루어 많은 민족들로 하여금 구원의 안식처를 얻게 한다. 그것이 교회의 선교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누룩의 비유는 선교도 선교이지만 제자도를 더 강조해요. 복음선포로 말미암아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믿음과 세례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온 사람들이 사단의 통치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을 하면 할수록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 더 실현이 되는 거여요. 요새말로하면 사회가 그만큼 더 변화되는 거여요. 누룩이 큰 반죽덩이를 변화시키듯이 이 사회를 변화시키고 문화를 변화시키고 지금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는 거여요.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는 은닉성, 점진성, 필연성 성장을 해요. 세 개의 비유가 다 성장을 한다는 거여요. 어떻게? 점진적으로 필연적으로. 무엇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백성의 선교와 제자도에 따라서.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의 선교와 복음선포에 확신하는 힘을 주고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의 자기 주장하는 도가 아니고 하나님에 대한 의지와 순종 하나님에 대한 헌신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방법대로 살도록 하는 그것을 할수 있도록 하는 것은 성령의 힘이다. 그러니까 누가 성장을 주어요? 하나님이 준다는 말이어요. 그런 것을 에수께서 세 개의 비유들로 설명을 한 것이어요. 자 그러니까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은 질문 하나님 나라는 어디 있느냐? 지금 여기 절실해요. 그런데 왜 하나님 나라가 어디 있느냐는 질문이 나와요?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진정한 의미의 선교 진정한 의미의 제자도를 잘못하면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 잘 안 나타난다고요. 희미해요. 그러니까 이 세 개의 비유들은 우리들에게 큰 도전을 주어요. 우리의 선교와 제자도의 실천이 어디에 있느냐? 성령은 우리에게 지금 막강히 역사하고 있어요. 우리가 거기에 순응하고 있느냐? 그렇게 지금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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