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4:1-9 씨뿌리는 자의 비유 하나님 나라의 비유(2) - 김세윤교수 십자가마을 - 손무성
오늘 우리가 살펴 보려고 하는 비유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로서 우리들이 비유들 중에 가장 익숙한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막 4:1-9절을 교독합시다. “막 1:4 세례 요한이 이르러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5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6 요한은 약대털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7 그가 전파하여 가로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 9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 지금 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이것이 지금 어떠한 상황에서 예수께서 말씀을 하셨는가? 마가는 쭉 지금까지 써 온 가운데서 무엇을 강조를 하느냐면 예수님의 말씀은 놀라운 권세 그리고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시위의 놀라움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르고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몰려드는 것을 굉장히 강조했어요. 1장부터 굉장히 강조했는데 몇 곳만을 보면 막 2장 12절을 보면 예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고 죄의 용서를 선언하고 또 그 당시의 신학자들 서기관들을 신학적으로 논쟁을 해서 압도를 하자 여기 무리들이 뭐라고 놀라와 합니까? 2장 12절에 다 놀라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이렇게 이 사람들이 놀라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어요. 그래서 이제 쭉 예수의 가르침에 사람들이 놀란다는 것을 많이 보여준 뒤에 3장 마지막에 오면 3장 31절을 보면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르는데 그렇게 되니까 동시에 예수를 반대하는 당시의 신학자들 제사장들 그리고 바리새인들의 반대운동이 시작이 되어요. 그래서 반대운동자들은 아마 예수를 거짓 선지자로서 백성을 오도하는 사람이 아니냐 해서 선지자가 나서 백성을 오도하는 일이 있으면 먼저 그 가족이 책임을 지고 그런 못된 사람들 제지를 하던가 심지어 심한 경우는 없애 버리기도 해야 되어요. 그래서 3장 31절을 보면 예수의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를 붙들러 나선 것이어요. 이들이 이제 하도 옆에서 예수운동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아 예수가 미쳤다 말이여. 제 정신이 아니다. 예수가 무슨 악령이 들어 가지고 이 거짓 선지자 노릇을 한다. 그러니까 가족이 제일 먼저 나서서 예수를 붙들어서 어떻게 집에 가두든지 아니면 하나님 나라 운동을 못하게 하려고 하는 것이어요. 3장 31-35절도 한 번 읽읍시다. “막 3:31 때에 예수의 모친과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32 무리가 예수를 둘러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33 대답하시되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34 둘러앉은 자들을 둘러보시며 가라사대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35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자 예수께서 이렇게 권세 있는 권으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선포하고 그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사람들을 온전케함으로 치유함으로 우리가 지난번에 하나님 나라를 연구할 때 자세히 보았지만 사람들은 예수를 바알세불을 힘입어서 사단의 힘을 빌려서 예수가 그런 일을 한다 하고 시비를 걸었지요. 그것이 막 3장에 15절 부터 쭉 이야기가 나왔어요. 그래서 예수께서는 자기가 바알세불을 힘입어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영을 힘입어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시위한다고 그 적대자들의 비난이 논리적으로 옳지 않음을 잘 보여 주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3장 30절에 많은 사람들이 뭐라고 그래요. 예수 속에 더러운 귀신이 들어갔다 또 바알세불에 힘입어서 저런 일을 하고 다닌다 하는 말과 똑같은 말이지요. 예수가 사단 또는 사단의 졸개인 귀신의 영향아래 저런 짓을 한다고 하는 것이어요. 그러니까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그림은 한편 예수의 하나님 말씀의 선포와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시위로 많은 무리가 지금 예수를 따라요. 그러자 동시에 무엇이 많이 일어나요? 무엇도 아주 힘 있게 일어나요? 예수를 반대하는 운동도 아주 힘 있게 일어나는 것어요. 그래서 심지어 이 사람들이 예수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신학자들이 또는 종교적으로 경건하다고 하는 종교적 관심이 보통 사람들 보다 많은 바리새인들이 주로 예수운동을 반대하는데 이 사람들이 뭐라고 하냐면 예수가 하나님 나라 운운하지만 하나님의 권세로 저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바알 사단의 권세로 그러는 것이고 그러니까 그 사람들 속에 사단의 졸개인 귀신이 들어서 저런다. 그러니까 심지어 누구까지 걱정이 되었어요? 아까 말씀을 드린 대로 예수의 가족들이 제일로 걱정이 된 것이어요. 왜냐하면 아까 말씀드린 대로 신명기법에 따라 가정에 그런 자가 나타나면 가족이 제일로 먼저 책임을 져야 되어요. 그래서 예수의 가족이 지금 예수를 체포하러 나선 것이어요. 그런데 예수가 지금 누구에게 둘러 쌓여 있어요? 예수의 말씀을 조금이라도 더 듣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둘러 쌓여 있어서 이 가족이 접근을 못하는 것이어요. 그래서 밖에서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불러 내려고 하니까 예수께서 뭐라고 그래요? 둘러앉은 사람들을 보고는 도대체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이 누구냐? 예수는 어느 관점에서 가족과 가족이 아닌 사람, 가족은 자기 둘레에 있는 사람, 그러니까 자기와 같이하는 사람들과 자기와 같이 하지 않은 사람들을 구분해요. 어느 관점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가? 안하는가? 이 관점에서 구분을 했어요. 그러니까 지금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르지만 예수는 자기 운동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물론이지만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구분을 하는 거여요. 자기를 형식적으로는 따르는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구분을 하는 거여요. 어떻게 구분을 해요? 하나님의 말씀, 자기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과 행하지 않은 사람들을 구분하는 것이어요. 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이런 맥락에서 주어진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의 다양함을 설명하려고 하면서 사람들에게 자기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올바른 반응을 촉구하기 위한 그런 비유여요. 여기 4장 1절의 그림을 한 번 봅시다. 예수께서 게네사렛 갈릴리 바다에서 이제 가르치는데 아주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니까 자꾸 예수에게 더 가까이 와서 위험에 빠지는 것이어요. 이 군중들이 자꾸 예수에게 달려들면 예수가 바다속으로 들어가 버릴 빠져버린 위험이 있는 것이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는 거여요? 배를 띄어서 군중들과 떨어져서 배에 예수가 앉고 뭍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 비유를 말하는 거여요. 그런데 이 비유는 무엇입니까? 씨 뿌리는 자의 비유지요. 씨는 말씀,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비유한 것이어요. 그러니까 지금 예수가 무엇을 합니까? 땅에다가 밭에다가 밭, 땅, 뭍, 육지. 땅 밭에다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어요? 말씀의 씨를 뿌리고 있어요. 그런데 이 많은 군중들이 형식적으로는 전부 예수의 말씀을 듣겠다고요. 지금 여기에서 밖에 서 있는 예수의 부모들 형제들 상당히 예수가 하는 일에 회의적인 회의를 가지고 있고 두려움을 가지고 있고 이 사람들이 왜 그런다고요? 예수에 반대하는 무리들, 예수에 반대하는 반대자들이 예수가 지금 거짓선지자 악령의 신의 영향으로 거짓선지자 노릇을 한다니까 거기에 영향을 받아 가지고 걱정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는데 겉으로는 예수의 권세 있는 말씀과 그 구원의 권세에 압도되어서 조금이라도 더 말을 많이 들을려고 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일부러도 예수께서 지금 씨를 뿌리는 거여요. 그런데 이 씨가 네 가지 다른 반응들을 일으킴을 지금 이 비유는 말하는 거여요. 이 맥락을 하나 생각을 해 두시고 또 하나의 맥락은 이 씨 뿌림. 하나님 나라를 씨 뿌리는 자의 비유로 설명을 하는데 여기 지금 이 비유가 이어서 몇 개가 나오지요. 여기 처음에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나오고 또 26절 부터 저절로 자라는 씨의 비유 이야기가 나오고 그 다음 30절 부터 겨자씨 비유가 나오고 이렇게 씨의 비유들이 3개가 연달아 나오잖아요. 그런데 이 씨의 비유들이 전부 어떤 공통성을 갖고 있느냐면 겨자씨의 비유에서 가장 환하게 드러나지만 씨의 비유 전체에서 어떤 공통성이 드러나느냐면 씨라는 것은 나중에 큰 수확에 비하면 얼마나 미미한 시작이어요. 연약하게 보이기도 하고 미미하게 보이기도 하고 그런 것 아닙니까? 예수께서 지금 하나님 나라를 씨로 비유해요. 하나님의 말씀을 씨로 비유해요. 또 씨라는 것은 그 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자라서 큰 수확을 가져오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그런 모든 것이 겨자씨의 비유에서 드러나지만 이 씨의 비유에 이 생각이 다 들어 있어요. 미미하게 시작함. 점진적으로 자람, 그러나 그 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자라서 큰 수확을 가져옴, 이 요소가 다 들어 있어요. 은닉성, 지난번에 감추어진 성격 아주 미미하게 보일랑 말랑, 믿음이 있는 자에게만 보이는 그 다음에 점차 자람, 점진성. 그 다음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자라게 되어 있음. 이 하나님 나라를 예수는 서너 가지의 씨의 비유 나중에 마태와 누가복음을 보면 또 하나 있습니다. 밀과 가라지의 비유도 같은 씨의 비유의 맥락 속에 있는데 마가복음에 보면 이런 것들이 다 하나님 나라의 은닉성과 점진성과 필연성을 표현하는 공통성을 가지고 있어요. 이런 것에 유념한 신학자들은 예수의 이 씨의 비유가 당시 또 하나의 맥락을 가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뭐냐면 당시 유대교에 있어서 메시야 사상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사상. 그것은 하나님께서 천지개벽을 이루는 대변화가 한 순간에 옛 타락의 창조를 다 심판하시고 전혀 새로운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실 것으로 생각하기도 하고 묵시 문학가들이 주로 그렇게 많이 생각을 했어요. 또는 당시 열혈당의 신학에 거대한 무슨 가룩한 전쟁 혁명을 통해서 하루아침에 로마군대를 몰아내고 그들과 결탁한 타락한 유대인들, 사두개인들, 제사장들, 그들을 다 쓸어버리고 이 땅에 자유와 정의와 풍요가 아주 가득찬 새 질서가 오리라. 메시야가 바로 그런 하나님의 통치를 가져오리라고 생각한 것에 비추어서 예수가 가르친 하나님 나라는 그런 천지개벽을 통한 하루아침에 새 하늘과 새 땅을 가진 것도 아니고 또는 열혈당원들이 말하는 그런 무슨 거룩한 전쟁을 통해서 새정부 새 사회구조 새 질서 뭐 이런 것을 가져온 것도 아니고 하기 때문에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에 처음에 솔깃해 가지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했을 때는 자기들이 생각하는 그런 새 하늘과 새 땅이든지 아니면 이 땅에 다윗왕조를 재건해서 로마의 압제자를 몰아내서 모든 착취자들을 다 몰아내고 자유와 정의와 평화가 가득한 질서를 예수께서 가져올 줄로 알고 예수를 따라왔던 사람들이 점점 예수에 대해서 실망하게 되었단 말이어요. 그 예수에 대해서 실망한 사람들에 누구까지 포함이 되어요? 심지어 세례요한 까지도 그런 것 같아요. 우리 마태복음 11장 절에서 요한이 감옥에서 예수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서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에가 당신이오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요한이 자기 뒤에 올 메시야가 불로서 악한 세상을 심판하고 전혀 새로운 구원의 질서를 가져 오리라고 기대를 했는데 또 예수가 바로 그런 메시야라고 선포까지 했는데 예수가 세상에 무슨 불로 다 타락의 죄의 구조를 태워버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을 가져온 것 같지도 않고 이 악한 로마의 통치나 헤롯의 통치나 사두개 제사장들의 통치를 뒤집어엎는 것 같지도 않단 말이어요. 그러니까 회의가 생긴 모양이지요. 그래서 과연 당신이 그 오시도록 되어 있는 메시야냐?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되느냐? 요한까지라도 예수의 하나님 나라운동에 대해서 조금 고개를 갸우뚱 해지는 거여요. 그래서 예수는 이사야서의 후반부와 여러 예언들을 지금 염두에 두고 자기가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소경과 앉은뱅이를 낫게 하고 문둥병자를 낫게 하고 어떻게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선포되는가의 이사야서에서 예언이 된 메시야 시대에 일어날 축복이 어떻게 자기를 통해서 일어나는지를 증거로 자기가 메시야임을 요한에게 확인시키는 그 말씀을 해요.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렇게 예수의 하나님 나라운동이 바로 이런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에 대해서 회의를 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요한가지도 회의한 상황이 되었다. 그 말이어요. 이런 상황에서 예수께서 아마 이런 일련의 씨의 비유들을 했을 것이다. 무엇을 하기 위해서? 하나님 나라의 올바른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서. 그러니까 당시의 유대교나 요한까지도 상상하고 있었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생각을 교정해 준 것이지요. 물론 지난 시간에 우리가 본 바와 같이 예수의 제자들이 이런 가르침을 받았음에도 끝까지 유대교의 메세야 사상, 다윗왕조의 재건을 통해서 이 땅에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구원의 체제가 올 것에 대해서 포기하지 않고 그것을 예수에게서 구하는 모습을 지난 시간에 보았지 않습니까? 예수는 그들에게 교육을 시킨 것이지요. 자기가 지금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는 그런 것이 아니고 이 땅에 씨 뿌리는 것과 같다. 그래서 우리가 씨의 비유들의 두 가지 배경을 생각할 수 있어요. 하나는 지금 다시 정리하면 예수의 설교는 주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과 사람들을 하나 하나 온전케함, 병자들을 고치고 삭개오 같은 사람을 올바르게 하고 죄인들을 회개시키고 이렇게 하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운동에 대해서 좀 회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아 하나님 나라가 왜 천지개벽하는 것 같은 단번에 이 세상을 좌악과 죽음의 요소를 물리치러 오지 않느냐고 하는 사람들. 그것이 하나의 맥락이고 또 다른 하나의 맥락은 아까 이야기한 대로 예수의 말씀에 아예 처음부터 예수가 마치 사단에 바알세불의 앞잡이인 것으로 매도하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예수의 하나님 나라 말씀에 상당한 매력을 느끼고 많이 오는 사람도 있지만 예수께서는 그들이 다 자기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 올바르게 반응을 하지 않는 거여요. 그래서 올바르게 반응하는 것을 촉구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하셨다. 그렇게 우리가 일단 배경을 정하면 좋겠어요. 자 그래서 이제 비유 자체를 보십시다. 예수께서 여러가지를 비유로 가르치시니 그 가르침 뒤에 이르되 들으라 들으라 하는 것은 주의를 환기시키는 말이지요. 아주 그리고 권세가 잔뜩 들어가 있는 말씀이지요. 들으라. 예수께서 왜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어요? 예수의 말씀을 듣고 안 듣고에 우리의 생명의 갈림길 생명과 죽음의 갈림길이 있기 때문에 그렇지요.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 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지금 우리 번역에 더러는 그렇게 되어 있지요. 그 다음 또 두 번째는 더러는 흙이 얇은 돌 밭에 떨어지매 흙이 갚지 아니함으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으매 타져서 뿌리가 없어서 말랐고 또 세 번째는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매 결실을 못했고 그 다음 네 번째는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이렇게 우리 말에 지금 더러는 해서 우리 성경을 읽는 분들 영어성경도 마찬가지여요. 어떤 영어번역은 이런 식으로 읽으면 어떤 인상을 받냐면 씨 뿌리는 자가 씨를 마구 뿌리는데 씨 일부는 길에 떨어졌고 또 하나는 바위에 떨어졌고 또 얼마는 가시덤불에 떨어졌고 일부는 좋은 땅에 떨어졌다. 사람들이 어떤 씨 뿌리는 자가 밭에 씨를 뿌렸을 때 어떻게 씨의 상당부분은 길에 떨어졌고 어떻게 상당 부분은 바위위에 살짝 흙이 있는 그런 곳에 떨어졌고 어떻게 씨의 상당부분은 아예 가시덤불에 씨 뿌리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에 있어요. 이렇게 하는 농부가 세상에 어디 있어요. 그래서 예수가 이 예를 잘못 들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데 지금 여러 개의 씨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고 하나는 길 위에 떨어지고 하나는 바위에 덜어지고 하나는 가시덤불에 떨어지고, 몇 개가 올바르지 않은 곳에 떨어졌습니까? 3개가 그랬어요. 나머지 3개는 좋은 곳에 떨어진 것이어요. 좋은 밭에. 그 나머지 좋은 밭에 떨어진 3개가 하나는 30배 하나는 60배 하나는 100배를 결실한 거여요. 지금 하나하나를 말한 것이어요. 그러면 아주 현실적으로 생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씨 뿌리는 자가 밭에 나가서 씨를 뿌리는 거여요. 대개는 좋은 땅에 떨어지죠. 그런데 지금 예수가 말 할려고 하는 것은 어쩌다가 하나를 길 위에 떨어질 수도 있고 어쩌다가 하나는 가시덤불에 떨어질 수도 있고 어쩌다가 하나는 바위에 떨어질 수 있고 그래서 아주 팔레스티나의 농장의 현실에서 여기저기 그냥 막 터뜨려서 일부는 상당히 많은 씨는 길 위에 떨어지고 상당히 많은 씨는 무슨 가시덤불에 떨어지고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하나를 두고 이야기하는 거여요. 그래서 이 이야기가 별로 현실성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지 않아요. 자 그래서 네 개의 다른 땅에 이렇게 떨어졌다. 그런데 이 씨를 가지고 무엇을 이야기 하느냐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씨로 비유를 하지요. 그런데 이 정통이 우리 사도들이 이어받아 가지고 여러 곳에서 복음을 씨로 비유를 해요. 여러분들 약 1:21절을 한 번 보시겠습니까?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리고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 지금 복음을 마음에 심긴 마음에 뿌려진 씨로 설명을 하고 있어요. 벧전 1:23절도 그렇게 말해요.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이 썩지 아니할 씨가 뭐냐면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 이 하나님의 말씀. 바울도 마찬가지여요. 골로새서 1:5-6절에서 복음을 또는 하나님의 말씀을 씨로 말하는데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둔 소망을 인함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이 복음이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로부터 너희에게서와 같이 또 온 천하에서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 이 복음이 우리 마음 가운데 떨어진 씨로서 열매를 맺어 자란다. 이렇게 말해요. 그래서 예수의 사도들이 예수의 비유의 말씀의 가르침을 잘 받아 가지고 복음이라는 것을 씨로 비유를 해서 이 복음이 각 사람의 심장에 떨어져서 그 심장에서 이 말씀이 점점 싹터서 자라서 사람들을 변화시켜 가지고 그 변화시킴으로 수확을 가진다는 말이어요. 열매는 무엇이냐면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힘. 지난번에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우리가 어떻게 생각을 해야 된다고 그랬어요? 포괄적으로 생각을 해야 된다고 그랬지요.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우리를 온전케 하는 것 그렇게 구원을 생각해야 된다고 그랬지요. 그래서 이 복음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에 올바로 떨어져서 싹이 트면 여기 이 비유대로 하면 좋은 땅에 떨어져서 30배 60배 100배로 결실을 하는데 이 결실이 뭐냐면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구체적인 표현들이어요. 그래서 그것이 지난번에 실제적인 건강으로도 표현이 되고 정치적 자유로도 표현이 되고 관계의 온전함, 올바른 관계 사랑으로도 표현이 되고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온전케 함으로 표현이 된다는 말이어요. 그렇게 해서 죄악과 죽음의 세력 고난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구원이 구체적으로 실현이 되게 한다. 이 말이어요. 지금 유대인들이 어떻게 천지개벽하는 그런 갑작스런 한 번에 천지개벽하는 변화를 요구하고 또는 열혈당의 성전 같은 전쟁을 통해서 혁명을 통해서 정권이 바꾸고 제도가 개선이 되고 하면 자유와 정의와 평화가 완전해 지는 그런 하나님 나라가 올 것으로 생각하는데 예수는 그것이 아니고 자기가 가져오는 하나님 나라는 우리 마음속에 뿌려진 씨 같다. 또 아까 이야기한대로 예수의 사도들도 처음에는 유대인들 같이 하나님 나라를 생각했으나 내가 예를 든바와 같이 예수의 가르침을 받아서 과연 예수가 가져오는 하나님 나라의 구원은 우리 마음속에 떨어진 씨 같다. 그래서 그것이 우리 마음속에서 점점 싹이 터서 자라서 열매를 맺어야 된다. 그러니까 우리의 마음속에서 부터 우리의 동기와 감정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태도를 결정 짓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신앙과 불신앙의 태도가 어디서 결국 결정지어져요? 우리 마음속에서 우리 심장에서. 이웃에 대한 사랑과 증오가 우리 마음속에서 결정지어져요. 우리 마음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주권이 작용을 해서 우리로 하여금 우상을 숭배하고 자기를 신뢰하고 암몬을 숭배하는 대신에 하나님을 받고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을 순종케 하고 이런 힘으로 바로 이런 일이 결정되는 우리 마음 속에서의 하나님의 주권이 작용을 해서 열매를 맺어요. 그래서 가져오는 열매가 무엇이냐면 진정한 의미의 혁명, 진정한 의미의 변화, 사람들 간에 정의가 더 확대되고 사람들 간에 평화가 더 확대되고 자유가 확대되고 지난번에 제가 여러 번 설명을 했지요.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이와 같은 자유와 정의와 평화가 확대될 뿐 아니라 인간과 물질 사이에도 올바른 관계가 성립이 되어서 돈 때문에 죽이고 죽고 죽는 일도 없으려니와 돈 때문에 건강을 헤쳐가지고 죽는 일도 없으려니와 돈 때문에 환경을 훼손하고 오염을 일으켜서 우리 건강을 훼손한 일도 없으려니와 그래서 우리와 물질과의 관계에서도 올바른 관계로 회복이 되어서 우리 삶 전체가 온전해짐. 그것이 예수가 가져오는 하나님 나라의 구체적인 구원의 실현이어요. 그것이 어떻게 커진다고요? 30배 60배 100배로 커진다. 이 말이어요. 아마 예수는 이 말씀 이 씨의 비유를 할 때 예레미야서 31:33절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예레미야는 첫 언약의 실패로 말미암아 첫 언약에 대한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곧 다윗왕조가 완전히 파괴될 것이며 유대민족 전체가 바벨로니아에 포로로 잡혀 가서 노예생활을 할 것을 지금 목전에 두고 무엇을 예언합니까? 새언약을 예언하지요. 하나님께서 새언약을 세운다. 그런데 새언약은 하나님께서 어디에 쓴다고요? 사람들의 심장속에 쓴다고요. 그래서 사람들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내면에서 부터 온 것이며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 내면에서 부터 드러나게 한다. 그렇게 예언을 했잖아요. 그러니까 아마 예수께서는 제대로 바꾸고 무슨 물리적으로 다윗왕조를 재건하고 또는 로마의 착취자들을 다 몰아내고 이렇게 한다고 해서 이 땅에 진정한 자유와 평화 그리고 우리 삶을 온존케 하는 구원이 이른다고 보지 않은 것 같아요. 그 진정한 구원은 어디서 오느냐? 우리 심장의 변화에서 온다. 그러니까 자기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주로 무엇을 하느냐? 말씀으로 해요. 칼로 군대를 동원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으로 한다. 말씀으로 하니까 설득하는 것이지요. 그것을 그림으로 말하면 말씀을 우리 심장 속에 심는 것이어요. 왜 심장 속에 심어요? 아까 이야기한 대로 심장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불신앙이 결판 지어지는 곳이고 이웃에 대한 사랑과 증오가 결판이 지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바로 그 심장에 하나님이 주이심을 하나님이 왕이심을 인식시켜주어요. 그림으로 말하면 거기다가 새겨요. 예레미야 선지자가 31장의 말로 하면 곧 심장에 하나님이 왕이심을 새겨요. 그래서 오로지 하나님께만 의지하고 하나님만 순종하도록 그렇게 새긴다. 그것만이 결국 한 사람을 변화시키고 그랬을 때에 그 사람을 통해서 그 사람과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구원. 총체적인 의미로 우리 삶을 온존케 하는 그 구원이 실현이 되어요. 자유가 더 발생하고 정의가 더 성립이 되고 평화가 더 확대되고 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그 말이어요. 그래서 이 씨의 비유들이 복음의 말씀을 씨로 비유하는 것과 이 씨가 우리 심장에 떨어진다고 하는 말씀의 중요성이 여기 있고 예수께서 자기 하나님 나라운동을 당시 사람들이 기대했던 무슨 천지개벽이나 정치적 총칼로 이루는 것으로 보지 않고 이렇게 미미한 그 씨의 말씀으로 사람들을 설득하는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먼저 염두에 두어야겠어요. 이 씨의 비유를 말할 때는 우선 사람들이 맨 먼저 네 가지 종류의 씨가 있는데 우리가 어디에 속하느냐? 이것에만 자꾸 관심을 가지게 되어 가지고 제가 씨의 의미 전체에 대해서 좀 더 길게 서론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께서 씨의 비유를 그렇게 하는 이유를 이제 설명했다면 그러면 그 다음 중요한 것은 물론 씨가ㅡ떨어지는 밭의 네 종류 예수의 복음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반응하는 네 가지의 다양한 반응들 이것이 그 다음으로 중요하지요. 자 그것은 우리가 익히 알아요. 하나는 길 위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사단이 그 씨를 나꿔채 버렸고 그 복음의 씨가 그 사람의 심장에 침투하기 전에 나꿔 채버렸어요. 그래서 사람에게 전혀 영향을 못 미쳐요. 또 하나는 더러는 흙이 엷은 돌 밭에 떨어지매 이는 자갈밭이란 말이 아니고 조그마한 자갈들이 많은 그런 말이 아니고 바위위에 얇은 층이 있는데 거기에 떨어져서 싹이 곧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어져서 말랐고 깊이 뿌리박지 못한 말씀 그래서 우리 심장의 내면에 우리의 감정과 의지와 사고의 원천까지 파고들지 못함을 말한다.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기운을 막으매 결실치 못하고 다른 많은 세상의 관심들 또는 세상의 매력들 은 많은 세상의 사상들 이런 것들이 이 씨가 깊이 우리의 인격전체를 복음이 우리인격 전체에 영향을 주는 것은 많은데 그러면 시간은 갔습니다만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아까 이 말씀을 말할 때에는 예수의 말씀에 매력을 느꼈어요. 말씀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말씀에 매력을 느껴서 많이 몰려드는 사람들에게 한 비유라고요. 그러니까 우리에게 했다고 보아야 되요. 여러분들 각자가 지금 이 비유에 의하면 어느 밭에 해당 되는 어떠한 밭 지금 교회에서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요.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말씀이 복음이 교회에서 주일마다 선포가 되요. 우리 각자는 어떻게 우리가 반응을 하고 있습니까?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아마 이렇게 될 수가 있어요. 우리 중에 어떤 사람은 자기가 꼭 여기 지금 길 위에 떨어진 씨 하나님 말씀이 자기에게 선포되어도 한 번도 그 말씀을 깊이 받아들이지 않고 말씀을 깊이 이해 할려고 하지 않고 정말 자기의 심장에서 하나님에 대한 의지와 순종을 결단하고 이웃에 대한 사랑을 하겠다는 결단을 하고 자기의 삶의 구체적인 현장에서 의식적으로 내가 이 길을 선택하는 것은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길이고 저 길을 선택하는 것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아주 비판적으로 의식하고 그 순간에 내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해야 되겠다고 결단하는 것이 한 번도 없는 사람. 그것이 길 위에 떨어진 것. 한 번도 자기의 사고와 의지 감정이 결단되는 그 내면에서 이 하나님이 주권자이심을 의식하고 자기 삶의 구체적인 현장에서 가치판단하고 윤리적 선택을 해야 할 때에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그 방향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내 힘으로 나의 이익을 위해서 살겠다고 하는 이 방향으로 갈 것인가 한 번도 생각을 안 했음. 자기 삶에 하나님이 주이시다는 사실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지요. 아무 영향을 주지 않아요. 생각을 안 해요. 교회에 와서 찬송을 부르지만 설교는 듣지만 자기 사업에서 자기 이웃과의 관계에서 직장의 동료와의 관계에서 하나님이 주이시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지금 무엇을 요구한다고 하는 것이 한 번도 자기 마음속에 들어와 있지 않은 것이어요. 이런 것이 길 위에 떨어진 것입니다. 또 여기 지금 둘째는 돌 위에 떨어져 있는 것, 이런 것 아마 여러분들이 이런 방향으로 설교를 많이 들었을 거여요. 이 하나님의 복음이 처음에 선포되었을 때에 그 복음에 아주 정열적으로 반응을 하다가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해 가지고 이 성경의 말씀의 진리가 그 사람의 가치관과 인생관 세계관 이런 것에 대한 총체적인 변화를 못 가져오고 아주 피상적인 것 예수 믿고 구원을 받았다. 좋다. 예수 믿으면 이 세상적으로 건강하고 저기 술 담배 안하니까 정신이 올바르고 이웃과도 관계가 좋아지고 부부관계에도 관계가 좋아지고 그러니까 축복을 받는다. 이런 정도로만 생각을 한다. 그러나 예수 믿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이심 하나님이 왕 되심을 믿기 때문에 아까 이야기한대로 구체적인 선택의 갈림길에서 하나님 또는 예수를 주로 의지하고 순종하면 이 세상적으로 어떻게 되어요? 많은 손해를 볼 수밖에 없을 수가 있다고요. 그런 상황에서는 아니 예수 믿는 것과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고 예수 믿는 것과 지금 나의 윤리적인 선택에서 예수 믿는 대로 하나님을 왕으로 믿는 대로 살면 많은 손해를 가져올 수 있는 것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그렇게 깊이 생각을 안 하는 거여요. 그래서 조금 더 깊이 그 쪽으로 들어가라고 누가 자극을 주고 목사가 설교를 해서 당신들이 일관되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에 일관되게 순종하고 의지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됩니다. 그래서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가 주이시고 하나님이 주이시다는 것을 가치판단으로 윤리적인 선택으로 고백하십시오 하면 말씀이 자꾸 깊이 들어달려고 하면 자꾸 손해를 보는 것이 두려워져요. 그래서 예수믿음을 그 신앙이 성장을 하지 않던가 아니면 아예 신앙에 등을 돌리든가 하는 경우이지요. 세 번쩨 이야기는 시간이 없으니까 안하겠습니다만 우리가 어떤 사람은 첫 번째 같은 경우가 많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두 번째 경우가 많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세 번째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때는 세 번째 같고 어떤 때는 네 번째 일수도 있고 이렇게 신앙이 왔다 갔다 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예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신앙가 불신앙 이웃에 대한 사랑과 증오가 결판이 나는 그 곳에서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가 굳건히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어요. 우리가 각자 우리의 삶을 한 번 되돌아 봅시다. 우리가 첫 번째 씨 같이 행동을 하든가 두 번째 씨같이 세 번쩨 씨같이 행동을 하든가 그래서 우리가 진정으로 우리 심장에서 말씀을 받아들여서 하나님의 왕되심을 고백하고 그에 의존해서 그에 순종하면 우리를 통해서 많은 자유와 더 많은 정의와 더 많은 평화 그리고 더 많은 건강 더 많은 풍요 종말에 완성이 될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현재적인 표현이 더 구체화 될 것이고 우리가 아예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 선포되지만 전혀 그 말씀이 우리의 그 느끼고 사고하고 의지하는 심장의 영역에서 하나님이 주이시다는 말이 전혀 의미가 없으면 구체적으로 이웃을 대하는데 있어서 이웃에 대한 태도의 결정에 있어서 상거래의 관행에 있어서 자기 직업 생업을 어떻게 함에 있어서 그 구체적인 삶의 장에서 예수가 주이시다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으면 길 위에 떨어진 씨 같아요. 또는 예수가 주이시다는 것이 깊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가 주이시다는 것 그에게만 의지하고 순종해야 된다는 것이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깊이 있게 영향을 주지 않으면 바위위에 떨어짐 또는 세상에 대한 걱정 근심에 많고 그래서 예수가 주이시다는 것과 경쟁을 하는 것에 관심이 팔려가지고 진짜 예수가 주이시냐? 진짜 그에게 의지하고 순종하면 정말 혹시 남에게는 잘될지 몰라도 나는 굉장히 손해를 보지 않나. 이런 걱정 속에서 예수가 주되심에 대해서 의지하고 순종을 잘 못하면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 같아요. 그러지 말고 우리 심장에 하나님 나라의 씨를 받아 가지고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항상 가치판단하고 윤리적인 선택을 할 때마다 아주 의식적으로 의식을 해야 되어요. 우리 심장의 내면에서 부터 그래서 예수의 주권에 순종하겠다는 결단을 하고 순종을 하면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다는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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