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나라의 비유(1) 막2장18-22 새 술은 새 부대에 - 김세윤
이번 주 부터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의 비유들을 생각할려고 합니다. 오늘은 첫째로 마가복음 2:18-22절 까지의 비유들을 묶어서 생각을 할려고 합니다.
“막 2:18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혹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19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나니 20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21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22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
여기 지금 예수의 3개의 비유들이 있어요. 혼인잔치에서 금식할 수 없음. 그 다음에 생베조각을 낡은 옷에 기워서는 안 됨. 그 다음에 새 포도주는 헌 가죽 부대에 부으면 안 됨 등.
예수께서 이 비유들을 말씀하게 된 동기가 18절에 있지요.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왜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을 안 합니까? 어떤 사람들이 와서 예수와 예수의 제자들에게 비난조로 문제를 제기한 것을 볼 수 있어요.
이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금식이란 상당이 중요하지요. 금식은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의 표현. 그래서 하나님께 의지함을 표현하는 하나의 신앙의 표현이기도 했고 특히 죄를 지으면 죄에 대해서 철저히 회개하는 의미로 금식을 했어요. 그래서 금식을 하면 하나님으로 부터 용서를 받는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금식이 중요했는데 특히 완전한 의를 얻으려고 했던 바리새인들은 아예 일주일에 이틀은 금식을 해야 하는 것으로 그냥 법으로 정했어요. 물론 구약성경에 이틀 금식해야 된다. 꼭 그렇게 해야 한다는 말은 없지만 바리새인들은 구약성경을 해석해서 일주일에 이틀은 꼬박 하루 종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금식을 해야 된다고 법으로 정했어요.
그래서 여기 지금 보시는 바와 같이 바리새인들은 금식을 한다는 말이어요. 그런데 이 바리새인들은 전에도 제가 여러 번 말씀을 드렸지만 원래 이 사람들은 중산층 평신도들이었는데 이들은 출애굽기 19장 5. 6절에 있는 말씀. 이스라엘이 제사장들의 민족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제사장들의 민족으로 삼았다. 제사장들의 나라다. 출애굽기 19:5-6절을 한 번 읽어 봅시다. “이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그러니까 이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선택하여 자기 언약의 백성으로 삼음에 있어서 그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넝약의 백성이 되었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면 그들이 거룩한 백성. 하나님께 소유된 백성. 하나님께 속한 백성인데 그것은 또 무슨 뜻이냐면 이 제사장들의 나라여야 된다. 이것이 그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으로서의 이상이어요.
그래서 이 바리새인들은 이 이상을 성취할려고 하나의 경건운동을 벌이는 사람들이었어요. 그래서 이 사람들은 자기들이 제사장들이 아니고 성전에서 제사들 드리는 제사장들이 아니고 평신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 출애굽기 19장 5절에 근거해서 구약의 레위기에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들을 위해서 주어진 여러 청결의 법이 있지요. 손을 씻어야 되고 목욕을 해야 되고 죄를 지었으면 어떻게 제사를 해야 되고 이런 여러 청결의 법들이 있잖아요. 그것을 자기들에게 적용을 했어요.
자기들도 꼭 레위기법에 제정된 제사장들이 청결하고 의롭게 몸가짐을 할려고 했고 자기들만 그렇게 할려고 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의 전체. 이스라엘 민족의 구성원이 모두 다 그렇게 해야 된다. 그래야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의 제사장들의 왕국의 이상을 성취한다. 그렇게 본 것이어요. 그래서 아주 이 성별원칙을 강조했고 그리고 이 바리새인들이란 말이 성별된 사람들이란 말이어요. 원칙을 강조했고 청결의식을 강조했고 의를 강조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이렇게 금식을 철저히 하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세례요한의 제자들도 또 마찬가지로 금식을 철저히 한 사람들이었어요. 우리가 복음서들에 그려진 요한의 운동을 보면 요한은 종말에 하나님의 심판에 대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회개하고 자기들의 거룩성과 순결성을 회복하도록 하는 부흥운동. 요새 말로하면 부흥운동을 벌린 사람이어요. 그래서 그 회개의 표로서 목욕. 과거의 죄를 회개하고 그 죄를 씻는 것을 이제 극적으로 표현하는 목욕운동을 했지요. 그것을 우리는 세례라고 그러는데 그 목욕운동을 했는데 이 요한이 어디서 그런 운동을 했어요? 사막에서. 어떤 옷을 입고? 낙타의 가죽 옷을 입고. 무엇을 먹고 살면서? 자연식을 하면서. 이런 여러가지의 우리 복음서들의 기록에서 우리가 무엇을 발견해요? 요한운동이 굉장히 금욕적인 운동이었음을 우리가 알게 되요. 그래서 이들의 요한의 금욕주의적인 회개운동. 부흥운동 최후의 심판에 대한 준비운동에 중요한 일부가 금식이어요.
아까 이야기한대로 금식은 하나님에 대한 겸손한 의지함의 표현이기도 하고 죄에 대한 철저한 회개의 표현이기도 해서 요한의 전체적인 회개운동과 잘 맞아 들어가서 요한의 제자들도 바리새인들 못지 않게 철저하게 일주일에 이틀 정도는 금식을 했었던가 봐요.
여러분들 일주일에 이틀 금식하라면 하겠어요? 조권사님 고개를 흔드시는데 저는 조권사님 나이쯤 되면 할 수 있을 것 같은데(하하) 지금 막 커가는 사람들 왕성하게 활동할 사람들 이틀 금식하라면 큰일 날 것이어요. 그런데 이 사람들은 금식을 철저히 했던가 봐요.
그런데 예수가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함에 있어서 그 당시 그러니까 유대사회에서 회개운동을 하고 종말에 하나님의 통치에 대비한 운동을 한 사람들은 다 금식을 열심이 했어요. 이 저기 쿰란의 공동체도 열심히 했어요. 많이 했는데 그런 운동들과 외견상 비슷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여러 점에서 아주 달랐단 말이어요. 아주 달았어요.
예수도 회개하고 믿음으로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라는 운동을 함에 있어 아 예수는 금식을 권장하는 것은 아니고 도리어 먹고 마시는 것을 많이 했어요. 금식을 안 하는 것만이 아니고 도리어 정반대로 즐겁게 먹고 마심을 많이 했어요. 우리가 지난 번에 예수의 하나님 나라 가르침을 보면서 몇 번이나 관찰을 한 바지요.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이렇게 잔치로 주로 비유하면서 지금 여기도 금방 예수의 이들에 대한 답에 자기가 지금 시작한 하나님 나라 운동은 혼인잔치와 같은 것인데 거기서 즐겁게 먹고 마심이 있을 수 있지 금식할 수 있느냐 하고 답하지 않아요. 왜 예수께서 이 하나님 나라를 즐겨 잔치로 비유하면서 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라는 자기의 초대에 회개와 믿음으로 응하는 죄인들과 세리들과 또는 일반 사람들을 데리고 즐겁게 먹고 마시는 일만 했어요. 그래서 종말에 하나님 나라에서 주어질 하나님의 구원을 잔치로. 그리고 그 구원의 하나의 상징으로 그 구원을 미리 맛보게 하는 의미로 그 구원을 보장해 주는 의미로 아 그들과 잔치를 베풀고 먹고 마시는 일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여러분들 마태복음 11장 19절 한 번 보시겠습니까? 18절 부터 읽읍시다. “요한은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금욕주의적인 금식을 많이 강조하는 회개운동을 하매 저희가 말하기를 귀신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이렇게 즐거운 잔치를 많이 베푸니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여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그러니까 요한의 운동을 무엇으로 대표적으로 상징이 지어져요. 금욕주의적인 금식. 거기에 반해서 예수의 운동은 무엇으로 특징이 지어져요. 즐겁게 먹고 마심. 그것도 누구와? 바리새인들이나 경건한 유대인들이 불결한 사람들이라고 상대하지 않았던 주민들과 상대하였다. 그래서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예수 운동에 아주 별명을 붙여 가지고 여기 별명 3개가 있잖아요. 탐식가이고 먹기를 탐하는 자이고 포도주를 즐기고 죄인들과 세리들의 친구다. 이러한 별명을 붙여 줄 정도로 예수께서는 즐겨 먹고 마셨다.
그러니까 여기 지금 도대체 당신도 회개와 종말의 심판에 대비하고 하나님 나라에 대비하는 운동을 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하는 시비가 붙었어요. 거기에 예수께서 뭐라고 답을 해요? 여기 세 가지로 답을 해요.
첫째가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을 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때는 금식할 수 없나니 그러나 신랑을 빼앗기는 날이 이르리니 그 날은 금식할 것이니라. 이 혼인잔치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오늘 날 서양에서도 그렇지만 한국에서도 혼인예식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손님들과 더불어 식사가 있지요. 피로연이라는 것. 그런데 당시의 유대관습은 그렇게 결혼예식이 있고 그 다음에 식사가 있고 이런 것이 아니고 식사가 결혼식이어요. 이제 신랑이 신부 집에 가서 신부를 데리고 자기 집에 당도하면 거기에 모여서 대기하고 있던 모든 손님들이 그 신랑 신부를 중심으로 함께 잔치를 하는 것으로 결혼식이 이루어 졌어요.
그러니까 결혼식의 중심은 무엇입니까? 식사여요. 함께 즐겁게 먹고 식사를 함. 그 식사가 때로는 밤 깊숙이 까지 진행이 되었습니다. 여러 코스로. 그러니가 결혼식에서는 굉장히 먹고 마심. 노래하고 춤추고 함이 굉장히 중요했다고 그래요. 그런데 오늘날 비교적 풍요롭게 된 우리 가운데서는 어디 결혼식에 가서 식사에 참여하는 것이 크게 기다리고 기대되는 그런 것은 아니지요. 왜냐하면 다 집에 먹을 것이 있으니까. 그러나 한 몇 십년 전에 우리 한국에서만 해도 아주 가난하고 고기 먹기도 어렵고 할 때는 우리 동네에 친척 간에 결혼식이 있으면 굉장히 기대하고 했지요. 왜? 거기 가서 한 번 잘 먹을 기회가 있으니까 굉장히 기대했잖아요. 그런 상황을 우리가 생각을 해 보아야 해요.
예수의 상황 유대 당시 1세기에 유대인들 간에도 굉장히 가난한 지금 우리가 누리는 이런 풍요를 누리게 된 것은 인류 역사상 최근의 일이어요. 그 당시는 상당히 가난한 지경이었어요. 그러기 때문에 온 동네 사람들이 어느 집에서 결혼식이 열리면 오래 동안 기대하다가 드디어 그 날 당도하면 거기 가서 한 판 이제 잘 먹고 잔치를 벌리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그런 때에 혹 결혼식이라고 받은 날이 바리새인들이 정한 금식의 날과 겹치면 그러면 오늘 금식해야 되는 날이니까 잔치하지 말고 금식합시다. 누가 그렇게 할 수 있어요? 그렇게 할 수 없어요. 그래서 그렇게 금식을 강조했던 바리새인도 아예 예외를 만들어 놓았어요. 금식의 날이 결혼식 날하고 겹치면 금식을 안 해도 된다. 그래서 그 날은 금식 안 한다고요.
그러니까 예수께서 지금 유대인들의 그러한 관행을 들어서 이렇게 말해요. 혼인집 신랑과 함께 있을 때 신랑이 신부를 데리고 지금 왔어요. 그런데 어떻게 금식을 하느냐? 너희들 관행으로도 안하지 않느냐? 그런 말이지요. 자 이 그림은 우리가 이해를 했어요.
이 그림을 이해함에 있어서 우리가 놀란 사실 하나는 예수가 자신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무엇으로 지금 말한 것이어요? 이 혼인잔치가 벌어지는 상황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다른 바리새 운동이라든지 쿰란의 에센파 운동이라든지 또는 심지어 요한운동까지도 그 종말에 있을 메시야가 오면 구약에서 부터 메시야 시대에 시온에 하나님의 큰 잔치가 벌어지리라고 메시야 시대의 구원을 그렇게 비유로 그렸는데 그 종말에 메시야가 오면 시온에서 벌어질 하나님의 큰 잔치를 대비하기 우해서 하나님께 의지하고 지은 죄를 회개하고 이런 의미로 금식을 한 것이어요. 그런데 예수는 그들과는 전혀 다르게 자기와 더불어 바로 구약에서 부터 기대해 왔던 그리고 지금 바리새운동에 참여하는 여러분들 그리고 심지어 예수의 어쩌면 선생이었던 세례요한까지라도 기대하고 준비했던 그 잔치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되었음을 지금 예수께서 말하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여기 19절 말씀은 1장 15절 말씀의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임박했다. 이 구약에 예언된 하나님의 구원의 때가 당도했다. 시온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 지고 이것이 그 때의 구원이 큰 잔치로 구약에서 부터 그려져 있는데 구약에서 부터 그 구원이 약속이 되어 있는데 그 구원이 이루어질 때가 지금 당도했어요. 그래서 하나님 나라가 지금 막 도착한 것이어요. 그러니까 지금까지의 기대하고 준비했던 시대는 이미 끝나고 또 잔치가 벌어지는 상황이 되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주장입니까? 여러분들. 여러분들이 예수의 청중이라고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그때까지는 유대인들이 항상 종말에 있을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해서 금식하고 경건하게 준비해야 된다고 그렇게 생각을 해왔는데 그래서 운동을 벌이는 사람들이 바리새인들도 있고 쿰란공동체도 있고 요한의 공동체도 있고 다 그러는데 엊그제 까지 요한의 공동체에 동참했던 예수가 드디어 바로 그 기다리고 기다리던 때가 임했다. 구약에서 부터 예고된 시온에서의 그 잔치의 때가 임했다. 그렇게 지금 주장을 하는 것이어요.
더 나아가서 자신이 바로 이러한 잔치가 있게 하는 신랑이라고 비유를 하고 있는 것이어요. 아까 신랑이 자기 집에 당도하면 잔치가 벌어진다고 그랬지요? 지금 예수 자신이 그 잔치가 벌어지게 하는 신랑으로 비유를 하고 있는 것이어요. 그래서 실제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구원을 펴지요. 지난번에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가르침에서 우리가 본바와 같이 바로 앞에 2장 10절에서도 인자가 땅위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에게 알게 하려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셨다. 그리고 5절에 소자야 네 죄사한을 받았느니라. 이렇게 하나님의 죄의 용서를 선언하고 그래서 구원을 약속하고 지난번에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가르침에서 본바와 같이 성령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는 것을 지금 하나님의 종말에 구원이 실현이 되고 있음을 증거하는 것으로 내세우고 회개하는 삭개오에게 오늘 이 집에 하나님의 구원이 임했다고 선언하기도 하고 그래서 그 모든 죄와 죽음의 세력에 짓눌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즐기도록 하나님의 구원의 잔치를 하도록 하는 모습을 우리가 지난번에 하나님 나라 공부에서 쭉 보았잖아요.
그와 같은 것을 지금 염두에 두고 자기가 신랑으로서 지금 임해서 구약에서 부터 예고되고 기대되었던 그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잔치가 지금 벌어지고 있음을 이런 상황에서 금식할 수 없는 것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어요.
그러나 20절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은 금식을 할 것이니라. 이 말씀은 예수의 수난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의 시점을 두고 말하지요. 그 신랑 자신이 유대인들의 손에 붙잡혀서 로마인의 손에 넘겨져서 십자가에 죽음을 당할 그 시간이 있는데 그 기간에는 물론 잔치를 베풀 수 있는 기간이 아니고 금식을 하는 기간이다. 그 외에는 지금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지금 예수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통치를 선포하고 그 구원의 통치의 힘을 구원의 힘을 구체적으로 병자를 치유하고 삭개오같은 사람을 온전하게 하고 죄인들을 온전케 회복을 시키고 이렇게 하는 그 기간 동안에는 금식할 것이 아니라 잔치를 베풀어야 된다. 그렇게 말하고 있어요.
자 그래서 여기서 우선 우리가 무엇을 보아야 하냐면 예수의 엄청난 주장. 자기와 더불어 하나님의 구원의 시대가 도래 했음. 잔치로 그려지는 구원의 시대가 도래 했음을 주장함을 우리가 볼 수 있지요. 여기서 한 가지 실제적으로 이 본문에서 이런 질문들을 가끔 사람들이 제기하는 것을 보아요.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십자가에 못박히는 잠깐의 순간에 금식을 하고 그 다음은 어떠냐? 예수께서 부활하셔서 다시 만유의 주로 높임을 받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의 덕을 입게 되는 이 상황이 되었지요. 그 뒤에는 또 금식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 예수의 가르침대로 한다면 그 말이 맞지요.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에 한 기본요소가 기쁨의 요소여야 되어요. 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그 구원에 대한 즐김. 구원에 대한 기쁨.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가장 기본요소들 중에 하나여야 되지요. 심지어 고난 가운데서도 주 안에서 기뻐해야 되지요.
우리가 전에 빌립보서를 공부할 때에 편지를 쓰는 바울도 고난 가운데서도 이 편지를 받는 빌립보 인들도 고난 가운데 있었는데 그 편지에 계속해서 되풀이되는 권면이 뭐라고요? 주안에서 기뻐하라고 그래서 그 되풀이 되는 권면을 두고 우리가 뭐라고 그랬어요? 그리스도인의 삶에 가장 기본적인 특징들 중에 하나가 뭐야 한다고요? 기쁨이어야 된다고요. 심지어 고난 가운데서도 우리 고난의 상황에서 인간적으로는 기뻐할 수가 없지요. 주안에서 기뻐하라 바로 우리에게 고난을 주는 사단의 세력을 부활하심으로 극복하고 지금 만유에 군림하셔서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곧 우리 구원을 완성시킬 그 주에 힘입어서 기뻐하라고 권면한다고 우리가 배웠지요. 이것이 참으로 중요해요.
우리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그리스도인들이기에 우리 그리스도인이 아닌 우리 이웃보다 우리에게 기쁨이 좀 더 많다고 할 수 있습니까? 아니면 심지어 비 그리스도인들 보다 더 안절부절하고 불안하고 답답해하고 이렇습니까?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이 후자의 형을 보기가 참 쉬어요. 그것은 신앙이 잘못된 것이지요. 우리 가운데 그런 상황이 있으면 한 번 더 다시 생각을 해 보아야지요.
자 그 다음에 21절 22절에 이어서 또 예수께서 비유들을 더 들었는데 하나는 생베조각을 낡은 옷에 붙인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것이 낡은 그것을 당겨 헤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그것은 쉽게 이해가 되는 거여요. 생베조각은 무엇이라고요? 신축성이 많지요. 낡은 베 조각은 신축성이 없고 낡은 옷이 헤어져서 그것을 기워야 겠는데 거기다가 생베조각을 낡은 옷 헤어진 옷에 붙이면 어떻게 되는 것이어요. 그랬다가 한 번 빨면 그 생베조각 신축성이 큰 것이 오그라 들어 가지고 낡은 천 기웠던 데를 당겨 가지고 다 찢어 버릴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이 생베조각을 낡은 옷에 붙일 수가 없다.
이것도 지금 앞에 신랑의 혼인잔치 비유와 어떤 점에서 같아요? 예수의 하나님 나라운동이 전혀 과거 바리새운동과 요한운동과는 다른 하나님의 구원사에서 새로운 장을 여는 사건이다. 하나님의 구원사에서 전혀 새로운 장을 여는 사건임을 말한 점에서는 위의 비유와 같지요.
그런데 여기서 하나의 사고의 진전이 있지요. 이 두 번째 비유에서는 아예 유대교 바리새운동의 형식이든 요한의 운동의 형식이든지 그 유대교는 헌 옷에 해당하는 것. 그것을 더 명백히 하지요. 이것은 예수께서 요한과도 자기와도 거리를 분명히 두는 그런 사건이지요. 그런 말씀이지요. 예수께서 율법과 선지자들의 시대는 요한으로 끝났다. 그렇게 말씀하시고 자기와 더불어 전혀 새로운 시대가 도래 했음을 여기에서는 지금 비유로 말하는데 명백히 말하는 곳이 있지요.
즉 마태복음 11장 11-14절 까지 봅시다. “마 11: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13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14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
여기 13절 모든 선지자들과 요한까지 계속되었던 선지자들과 율법의 예언이 성취되는 시대가 시작이 되었어요.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여요. 약속과 예언의 마지막이 요한이어요. 그러니까 이 구약의 약속과 예언의 시대를 총 결산하는 분이 요한이어요. 그러므로 그런 의미에서 요한이 가장 위대한 선지자여요. 그런 의미에서 여기 11절에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이 가장 큰 자여요.
그런데 요한의 운동에 동참했다가 세례 때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어 예수는 하나님 나라 운동을 시작했어요. 천국운동. 마태복음의 언어로는 하늘의 나라. 그것을 한문식으로 표현을 해서 천국이라고 했는데 하나님 나라나 마찬가지여요. 이 천국운동은 성취의 시대에 속한 것이지요. 요한은 약속과 예언의 시대의 종결인데 예수와 더불어 성취의 시대가 열린 것이어요. 구원사의 새로운 시대. 전혀 새로운 시대. 성취의 시대. 그러니까 이 성취의 시대에 사는 사람은 이 성취의 시대에 가장 작은 자라도 예비의 시대 약속과 예언의 시대의 가장 큰 요한 보다 더 큰 자여요.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그만큼 더 많이 체험하는 자이기 때문에. 그래서 여기 요한의 모든 선지자와 율법의 예언의 시대가 요한까지다고 하는 것과 그래서 요한이 약속의 시대에 가장 위대한 자. 여자의 몸에서 난 자 중에서 가장 위대한 자이다.
그러나 예수와 더불어 하나님 나라의 성취의 시대가 도래 했음. 그래서 그 시대에 속하는 자는 가장 작은 자라도 요한 보다 크다고 말해요. 이 말씀에서 예수는 요한과 자기와의 경계가 다름. 요한과 자기와의 사이에 하나님의 구속사에 새로운 장이 열렸음. 약속의 시대가 종결이 되고 성취의 시대가 도래 했다는 아주 엄청난 선언을 하고 있지요. 이것을 생베와 낡은 옷의 비유로 설명을 한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 지금 마태복음 11장 기왕에 여기 구절을 폈으니까 여러분들 질문하고 싶은 말이 있을 거여요.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세례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이것이 도대체 무슨 말이지요? 아마 여러분들 질문하고 싶을 거여요? 오늘 시간이 많이 갔으니까 내가 이 다음에 그 말씀을 설명을 드릴께요. 그것이 아주 어려운 말씀이어요. 그 말씀은 따로 설명을 하겠어요.
자 그 다음에 이 똑같은 진리를 예수와 더불어 새로운 구원사의 새로운 장이 열렸어요. 그래서 요한으로 종결이 되는 유대교는 헌 옷이고 헌 시대여서 유대교에서의 행동의 관행을 예수의 성취의 시대의 사람들에게 적용을 해서는 안 됨을 지금 말했어요.
그런데 똑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 세 번째 비유여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어서는 안 된다. 그 당시는 유리병 보다는 가죽부대에 포도주를 넣어서 발효를 시키지요. 그런데 새 가죽부대는 신축성이 있어서 포도주를 넣으면 포도주가 발효를 하면서 괜찮다고 그래요. 그러면 새 가죽부대는 신축성이 있으니까 함께 팽창해서 괜찮은데 낡은 가죽부대는 신축성을 잃어 버려요. 그런데 거기다가 새 포도주를 넣으면 새 포도주가 어떻게 되요? 발효되면서 팽창을 하면 낡은 가죽부대가 신축성이 없으니까 터져 버린다는 말이어요. 그래서 새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고 하셨다. 여기서도 아까 베조각의 비유와도 똑같은 말씀이지요.
예수는 요한까지를 지금 요한의 제자들까지도 금식하는데 왜 당신은 안 하느냐? 요한까지의 유대교를 약속과 예언의 시대로 보아서 이것은 헌 옷에 해당하는 부분 헌 가죽부대에 해당하는 부분 예수자신과 더불어 새 시대가 임해서 성취의 시대. 하나님의 구원사에 새 시대가 열렸어요. 그것은 무엇으로 표현이 되어요? 생베조각과 신랑의 오심. 새 포도주로 표현을 했어요. 그래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운동에 동참하는 자들에게 과거 유대교의 관행이 적용이 되지 않음을 여기서 지금 예수가 말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여기 세 가지의 비유로 예수는 자기와 더불어 유대교의 성취가 일어났는데 그 성취는 약속과 예언보다 훨씬 더 큰 것이기 때문에 약속과 예언의 관점에서 성취를 이해하려고 하고 성취의 새로운 면에 대한 비판을 하면 안 된다. 그런 말이어요. 이 비유들은 다 공관복음 마다 세 복음서에 다 있어요. 마태복음에도 있고 누가복음에도 있어요.
그런데 요한복음에도 비슷한 비우가 하나 있어요. 요한복음 2장 1-10절 까지 가나의 혼인잔치여요. 가나의 혼인잔치는 비유가 아니어요. 예수의 이적이지요. 그런데 사실은 가나의 혼인잔치의 이적은 보통 주석가들은 행동으로 표현한 비유라고 말해요. 지금 여기 세 개의 비유 공관복음들에 나오는 세 개의 비유와 똑같은 진리를 행동으로 표현을 한 거여요. 요한복음을 어떻게 해석을 할 줄을 모르는 분들은 요한복음 2장1-10절 까지 유명한 가나의 혼인잔치의 이작에서 예수께서 혼인잔치를 추궁했다 하는 것을 그 생각만 많이 읽어내는데 그것이 주안점이 아니고 그것이 주요점이 아니고 예수께서 유대교를 성취하고 능가하고 대치함을 보여주는 하나의 비유적 사건이어요. 요한복음 2장에서 4장까지는 요한복음 전체에서 예수가 유대교를 성취하고 능가하고 대치한다는 주제가 아주 장해요.
그런데 특히 2장에서 4장까지 그 주제가 집중해서 나타나요. 그런데 보기에 첫 사건은 2장1-10절 까지는 이 주제를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제기하는 사건이어요. 여기 지금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두세 통 드는 돌 항아리 여섯 개가 놓여 있지요. 그런데 지금 이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뭐가 문제여요. 혼인잔치에서 모든 기쁨을 유발시켜야 할 포도주가 다 떨어진 것이어요. 지금 예수는 유대교를 뭘로 가나의 혼인잔치는 유대교를 뭘로 지금 비유한 거여요? 포도주가 다 떨어진 그래서 흥이 다 깨지고 생명력이 다 나가버린 파산된 잔치와 같은 거여요. 유대교가 이 사건에서 그렇게 그려진 것이어요.
거기 지금 유대교는 성전에서 제사를 중심한 종교지요. 지금 여기 결례를 위한 돌 항아리가 뭐하러 놓여 있는 거여요? 몸씨는 결례가 뭐라고 표현되어요. 성전에서 제사함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죄사함을 받고 구원에 참여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성전에서 예배중심의 유대교가 무엇으로 여기 상징이 되었어요? 결례의 예를 위한 돌 항아리로 상징이 되었어요. 그것이 술이 다 떨어져 가지고 흥이 다 깨져버리고 생명력이 나간 잔치에 무슨 도움이 됩니까? 아무 도움이 안 되는 것이어요. 다시 말하면 예수는 뭐라고 말하는 거여요? 지금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가 행해지고 하지마는 아무 소용이 없음. 그 하나님 백성에게 무슨 하나님의 구원이 전달되고 그래서 거기 기쁨이 있고 생명이 있고 그런 것이 아님. 유대교는 포도주가 떨어진 잔치와 같음. 그래서 흥이 다 깨지고 생명이 다 나갔어요. 유대교의 중심인 성전결례의 예. 거기서 제사드리는 것 등이 뭘 돕느냐?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해요. 그 상황에 예수가 와서 무엇을 하는 거여요. 가장 좋은 포도주를 만들어서 모두에게 충분히 마시게 해서 다시 그것이 전보다 더 큰 기쁨이 흥이 넘치게 하고 생명력이 넘치게 함. 그래서 잔치를 가져옴. 그것이 구약에서 부터 예고된 종말에 시온에서의 큰 메시야적 잔치가 성취됨. 그래서 유대교를 예수가 능가함. 능가하니까 유대교는 준비에 불과했던 것. 그러나 그것도 제대로 준비가 아니고 흥이 다 깨져버리고 생명력이 나간 그런 잔치와 같은 것을 예수에 의해서 대치되는 것이지요.
그리고는 2장 후반부부터 그것을 하나하나 보여주어요. 그래서 예수가 성전은 곧 부서지고 예수의 몸이 새 성전이 됨. 2장13-19절까지 22절 까지 계속되는 예수의 성전사건이다. 왜 공관복음에서는 예수가 성전을 깨끗이 성전에서 장사치를 몰아내고 성전이 파괴되리라는 예언을 하시고 하는 것이 예수의 공생애의 저 끝에 나타나지요 그런데 요한복음 일찌감치 이 사건을 앞에 갖다 놓았어요. 무엇을 강조하기 위해서? 예수께서 바로 유대교를 성취하고 능가하고 대치함을 그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서 이다.
그러니까 바리새인이요 유대의 관원이요 유대인들의 선생인 니고데모. 니고데모가 뭐라고 그려져 있어요? 바리새인. 관원. 이스라엘의 선생. 이 세 가지로 니고데모가 그려져 있어요. 게다가 니고데모가 돈 푼께나 있는 사람. 이렇게 니고데모가 그려졌지요. 그러니까 니고데모가 어떤 사람이어요? 유대인들 중에 가장 고상한 부류의 하나라는 말이어요. 그러니까 가장 고상한 유대인도 유대교의 틀 내에서는 구원이 없어요. 그 사람에게 예수께서 무엇을 요구해요? 네가 어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어? 물과 성령으로. 위로부터 오는 힘에 의해서 다시 나야함. 누가 위로부터 오는 힘을 가져오는데요? 예수 자신이. 그러니까 예수께서 유대교를 이와 같이 성취하고 능가하고 대치하기 때문에 유대교에 남아 있는 한 그중에 가장 고상한 사람. 바리새인들 아까 유대교에서의 가장 고상한 의를 성취 할려는 사람이지요. 거기다가 신학자. 선생. 거기다가 관원인 니고데모도 그 유대교내에서는 구원이 없어요. 유대교는 아까 포도주가 다 떨어진 파산된 잔치 같은 거여요. 거기에는 구원의 기쁨이나 생명이 없어요.
어떻게 해야 그 사람에게 구원이 주어져요?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가 위에서 가져오는 계시와 성령의 능력으로 이 하나님 나라에 예수가 가져오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감으로 구원을 얻는데 그것이 전혀 새로운 시작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예수가 무슨 그림을 썼어요? 난다는 그림. 우리말로는 다시 난다고요. 5절에 다시난다는 말. 원래는 이중의미여요. 위에서부터 오는 힘으로 난다는 말이 첫째의 뜻이고 둘째로 그러므로 두 번째 뜻은 난다는 말이고 그런데 니고데모는 두 번째 뜻으로만 이해를 하지요.
그 다음에 4장에 가면 3장 니고데모의 대화에서 그러면 어떻게 예수가 유대교를 성취하고 능가하고 대치해서 하나님 나라의 구원 생명 영생을 가져오는 가를 쭉 설명을 해요. 그 다음에 4장에 가면 아까 니고데모는 누구였어요? 유대교의 가장 고상한 대표자. 4장에는 누가 소개되어요? 큰 유대교의 틀 안에서 가장 천박한 자 사마리아 여인. 우선 사마리아교는 유대교의 이단교. 유대교 쪽에서는 사마리아교를 이단으로 봤지요.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자기들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여기 사마리아 여인이 무엇을 주장해요? 자기들도 야곱의 자손이라고. 야곱 우리 조상 우리 아빠 우리 아버지 야곱이 준 이 우물로 우리가 생명을 얻었다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사마리아인들도 유대인들 못지 않게 아브라함과 야곱과 이삭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구원을 얻는다고 본 것이어요. 그러니까 예수는 사마리아인들도 유대교에 속하는 것이어요. 그런데 예수께서 바로 유대교를 구약과 유대교를 성취하고 능가하고 대치하시기 때문에 유대교의 가장 고상한 자도 유대교에 힘입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에 의해서 구원받아야 될 것이며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유대교에 있어서 가장 천박한 대표 사마리아 여인 사마리아교 자체가 이방신들과 혼합종교에서 마치 이 여인이 남편이 여러 명인 것과 같은 상황이다. 그것도 하나의 비유여요.
그런데 바로 그 여인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생명의 물이 주어져서 구원을 얻게 된다. 그 말이어요. 요한복음 4장에 뭐라고 그래요?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예루살렘에서 예배하는 것이나 그리심 산에서 예배하는 것이나 다 헛것이다. 유대교와 그 유대교와 적대관계에 있었던 사마리아교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하느냐 그리심 산에서 예배하느냐?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해야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을 얻느냐? 그리심 산에서 예배를 해야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을 얻느냐? 서로 논쟁했는데 다 쓸데없는 소리다. 뭐라고요? 예수께서 성령과 진리로 우리말 있지요. 여러분들 자꾸 쓰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됨. 그 말은 성령과 진리 안에서의 예배 그래서 우리는 예수께서 가져오는 성령의 시대에 성령에 힘입어서 이 예 유대교의 예배가 기껏해야 그림자로서 그려 낼려고 했던 진짜 실제의 관계. 하나님과의 실제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는 말이어요.
그러므로 유대교에 머무는 한 예수 그리스도에 힘입어서 그가 가져오는 완성된 계시와 성령에 힘입어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며 그러기 때문에 유대교의 틀 안에서의 또 하나의 가장 천박한 표현인 사마리아인들도 그 중에서도 더 천박한 사마리아 여인도 예수 그리스도에 힘입어 구원을 얻음. 이런 이야기여요.
자 오늘은 우리가 예수의 세 개의 비유와 하나의 비유적 이적을 통해서 예수께서 자기와 함께 자기와 더불어 하나님의 구원이 시대가 도래 했음. 그것은 곧 유대교를 구약과 유대교의 예언과 약속을 성취함이니까 성취는 성취되는 것을 능가하는 것이지요. 그러기 때문에 그것은 대치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잔치하는 기쁨이 충만함. 이 구원의 잔치의 시대가 도래 했음을 예고하는 것을 볼 수 있어요. 우리는 이것에 익숙해서 이것이 얼마나 감격적인 사건인가를 잘 모르는데 여러분들이 예수의 청중의 입장에서 서 보도록 조금 노력해 보세요. 얼마나 놀라운 주장이며 얼마나 감격적인 주장인가. 자 이 다음에 계속 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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