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론(2장-20장)은 이 51절의 예수의 약속을 펼칠 것이다. 예수가 어떻게 약속을 성취하느냐? 예수가 인자로서 대속과 새 언약의 죽음을 당하시므로 그 결과로 하나님의 백성이 창조된다.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이들이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한다. 하나님 나라의 실재를 계시하고 어떻게 십자가의 죽음으로서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 이끌어서(12:32) 그가 하늘로 올라가서 그들로 자기 있는 곳에 있게 한다. (14:3, 3:13)시공의 제한성 속에 사는 인간은 위엣 세상 무한에 참여해야 만이 구원이 가능하다. 이 구원은 하늘에서 온 인자가 대속의 제사로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하나님과 연합시켜 그래서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하고 하늘로 높인다. 하나님의 보좌 위에 높인다. 그래서 하나님의 무한함과 영광 생명에 참여하게 한다. 이것을 본론에서 보여준다.
요 12:32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요 14: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요 3: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제 1부 2:1-4:42
이 부분은 두 개의 이야기와 두 개의 설교로 구성이 되어 있다.
2:1-11 물을 푸도주로 변화시킨 첫 표적에 대한 이야기
2:12-19 예수의 성전 소란
3:1-21 니고데모와의 대화와 긴 설교
4:1-42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와 예수의 설교
이 두 가지의 설교들은 두 가지 의미의 표적들의 의미를 설명한 것이다. 니고데모와의 대화는 첫 표적과 더 많이 관계가 있다. (성전소란과도 관계가 있지만)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도 첫 표적과 관계가 있으나 성전소란과 더 관계가 있다. 그런데 표적들이 나타내는 것은 예수가 새 시대 새로운 구원의 시대를 열음이다. 요한복음에 처음부터 끝까지 흐르는 성취, 예수가 구약과 유대교를 성취한다. 성취함으로서 능가해서 완전히 대치하는 주제가 흐른다. 이것이 집약적으로 있는 곳이 제 1부이다. 어떤 때는 성취가 강조되어 있고 연속성이 강조되어 있고 어떤 때는 대치가 강조되어 있다. 강조점이 어디 있느냐에 따라 섬세한 해석이 필요하다.
2:1-11 가나 혼인 찬치
“잔치”는 종말에서의 메시야 왕국에서의 하나님의 축복을 나타내기 위해서 즐겨 쓰고 있다. 잔치는 하나님이 대표요 하나님이 source이다 우리는 그의 손님이다. 잔치에 가면 풍요함이 있다. 배부르면 만족하고 기쁨이 있다. 잔치라는 것은 모든 것이 사랑의 상황에서 이루어진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구원의 실재를 잔치로 비유할 때는 인간의 실존을 결핍성으로 제약성으로 설명한다. 모든 죄가 이 결핍성에서 온다. 결핍성에서 욕구불만 채워질 수 없는 욕구불만이 있고 배고품 기쁨이 없고 사랑이 없고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있다. 이런 상황에 있는 인간에게 예수께서 구원을 약속한다. 이 구원을 어떻게 표현하는가? 풍성한 기쁨이 있다. 이유는? 무한하신 하나님이 베푸는 잔치이기 때문이다. 구약 유대교에서 종말에서 전치는 메시야 왕국의 소망 하나님 나라의 그림이었다.
이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다. 이것은 이 잔치는 풍성한 잔치가 아니다 결핍성의 잔치이다. 흥이 깨지고 기쁨이 사라지고 생명력이 깨뜨려져 버렸다. 이 잔치에 커다란 유대 정결의 예를 갖추기 위한 물동이들만 앉아 있다. 유대교의 정결의 예(레위기)를 다 갖출 수 있는 물동이가 흥이 깨진 잔치에 아주 소용이 없다. 이것은 맥빠진 유대교를 상징한다. 여기에 예수가 나타나서 아무 쓸모없는 정결의 예의 물독을 제일로 맛있는 포도주로 만들었다. 다시 생명력이 넘치는 잔치로 바꾸었다. 이것을 요한은 표적이라고 한다. 예수가 물을 포도주로 만들었다. 이것을 표적으로 더 깊은 하늘의 진리를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이다. 이 이적의 표적성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들이 진정한 본질을 영광을 깨닫고 믿게 되었다. 진정한 본질은 예수가 구약과 유대교를 성취하고 능가하고 대치하는 새로운 구원의 시대를 여는 것으로 깨달았다. 하늘에서 오는 우리에게 풍성한 잔치를 베푸심으로 결핍성으로 부터 우리를 구원해 내셔서 하늘의 기쁨과 생명력에 참여하게 할 시대를 여셨다.
2:12-19 성전 소란 사건이야기
전통적으로 이것을 성전 청결이라고 했다. 성전 뜰이 얼마나 크냐 하면 가로 300미터 세로 475미터이다. 성전 뜰 여인의 뜰 남자의 뜰 제사장 제단 지성소 등이 있다. 로마 군대가 약 5-6백 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감시하고 있었다. 중요한 순례절기에는 민족해방운동이 자주 일어나기 때문에 로마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여기에 장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여기에 와서 예수가 상을 뒤업고 소란을 피웠다. 전통적으로 이것을 성전청결이라고 한다. 성전의 거룩성을 회복해서 하나님께 헌당했다는 뜻으로 해석을 했다. 이방인의 뜰은 요즘 사람들이 만든 뜰이고 원래 없었다. 막11:16절에 근거해서 성전이 유대인의 전유물로 전락했다고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한다. 원래 성전은 모든 사람 이방인들 까지 포함한 기도의 처소였는데 이방인들이 기도하는 것 마저도 유대인들이 막아서 예수가 싹쓸이 해서 이방인들로 하여금 기도처를 되찾게 했다. 그래서 이방인들을 위한 모든 사람들을 위한 기도처로 했다는 의미로 예수의 성전에서 소란피우는 사건을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요새 와서는 정치신학 해방신학자들은 혁명적으로 당시 성전 제사장들의 부패 타락상을 말하는 것이고 가난한 유대인 디아스포라로 부터 오는 민중들을 착취하는 것을 상징했기 때문에 폭력을 사용했다고 해석을 한다. 이런 것들은 별 의미가 없다.
사실 성전 소란 사건이 큰 사건이 아니었다. 큰 사건이었다면 성전경찰에게 잡혔다. 성전소란은 혁명적인 엄청난 사건이 아니라 장사치 몇 명에게 상징적으로 상 몇 개를 뒤엎은 사건이다. 이것은 구약에서 보는 선지자적 시위 싱징적인 데모이다. 행위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상징적 행위를 통해 전달하는 메세지가 있다.
여기서 논쟁이 벌어진다. 네가 성전에서 소란을 피우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 표적을 내봐라. 메시야로서의 권세를 증명해라. 이에 대해 예수가 이 성전을 허물라 그러면 사흘 만에 내가 세우겠다고 한다. 이 말은 요한복음의 유명한 기법이 나오기 시작한다. 곧 오해(disunderstensing), 지도자들은 문자 그대로 해석을 한다. 시공의 물리적인 의미로 해석을 하고 그것의 영적인 진리 하늘의 진리 표적성을 보지 못한다. 46년 동안 걸렸는데 3일 만에 짓는다고. 그들은 에수의 표적성을 깨닫지 못했다. 요한은 이 표적성을 자기 몸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 심지어 제자들도 예수의 부활 후에야 깨달았다. 부활의 빛 아래 되돌아 보았을 때 깨달았다. 이 말은 예수의 대속과 십자가의 죽음이 새 언약의 제사이다.
3장 4장은 두개의 이야기가 나온다. 첫 이야기는 대표적인 유대인이라 할 수 있는 니고데모와의 대화이고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이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으로 유대인의 관원으로 아마 산헤드린 공회의원 이었을 것이다. 10절에 보면 이스라엘의 선생이다. 유대교의 대표적인 유대인이다. 유대교의 심오하고 성결하고 좋은 부분을 대표하는 자이다. 이 사람이 밤에 예수께 찾아 왔다. 밤은 진리와 거리가 먼 혼돈의 질서 속에서 이 세상의 혼돈과 고난을 상징해서 하나님과 진리의 세계와 반대의 세계를 말한다.
이 때 니고데모가 빛이신 예수께로 나아온다. 요한복음에서 밤은 9:4, 11:10, 13:10절 등에서 상징적인 의미로 몇 번 쓰인다. 3장 19, 21절에서 빛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예수가 세상의 빛으로서 이 세상에 하나님을 계시하고 그 계시에 부정적으로 응답하는 자들에게 심판을 내리시는데 2절의 밤은 그 빛과 대조적인 현상이다.
니고데모가 와서 랍비여 당신이 하나님께로 부터 온 그 선생임 줄 우리가 아나이다. 우리가 라고 복수로 말하는데 여기 니고데모도 2:23절에 언급된 예수의 첫 표적들을 보고 예수에 대해 열려진 태도를 보이기 시작한 자들을 대표해서 말하는 것 같다. 그래서 3절에 예수가 하나님으로 부터 보냄을 받은 자이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표적들을 행한다고 씨초적인 신앙들을 가지고 있다. 그런 태도로 거기서 더 깨우침을 받고자 밤에 찾아 온 것이다.
예수가 아멘 아멘 아노센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을 볼 수 없느니라. 여기에 재미있는 것이 많습니다. 첫째는 아멘 아멘 이라는 말은 유대교에서는 당시 하나님의 말씀선포 끝이나 기도 끝에 썼다. 그것이 진리 됨과 신실함을 천명하는 것으로 썼다. 예수는 항상 아멘을 먼저 쓰고 중요한 선언을 했다. 이것을 예수의 독특한 아멘 사용법이라 한다. 여기서 예수가 스스로 선포한 말이 아멘 됨 진리 됨을 보장하는 예수의 하나님의 계시자로서의 권위주장을 깨달을 수 있다. 가령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했다. 고 말함으로 청중들의 관심을 자기에게서 여호와께로 돌려서 자기 말의 진리 됨과 신적인 권위를 보장받으려고 했는데 예수는 정반대로 아멘 그리고 내가 말한다고 말함으로 청중들의 관심을 자기에게로 돌리고 자기가 중요한 말씀을 하는데 그것이 아멘으로 보장한다고 해서 선지자들보다 더 직접적인 하나님의 절대 계시자로서의 자기 주장을 했다. 공관복음에는 아멘이 한 번 나오는데 요한복음에서는 아멘이 두 번 나온다. 우리 말은 진실로 진실로라고 번역을 해서 이 말이 얼마나 독특한지를 알지 못한다. 그것을 번역을 하지 말고 그냥 아멘 아멘으로 두었어야 했다. 예수가 하나님의 계시자로서 선지자 보다 더 권위 있는 자라고 니고데모에게 말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아노센 거듭난다. 는 말이 중요하다. 번역을 하지 않고 그냥 쓰는 이유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위로부터 라는 의미가 있다. 둘째는 다시의 의미가 있다. 요한은 둘 다의 의미로 쓰고 있다. 위로부터는 헬라의 이원론적인 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위는 하나님의 영의 세상이고 아래는 육의 세상 물질의 시간의 세상이다. 이래 있는 사람이 위로부터 나야 한다. 아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볼 수 없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풍성한 영생에 들어갈 수 없다. 하나님 나라의 풍성한 삶 영생에 참여할 수 없다. 왜?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이 세상에 속하는 존재로서 죽음에 얽매여 있는 자들이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영생에 동참하려면 위로부터 나야 한다. 이미 난자가 나야 하니까 다시 나는 것이다. 육으로 난 자가 위로부터 나야 하니까 다시 나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중생이란 예수를 믿음과 세례를 통해 새롭게 된 것으로서 다시난다. 거듭난다는 개념이다. 1:12 11:52 요일2:29 3:9 4:7 5:1, 4, 18 등에 다시난다는 그림언어가 똑같이 나온다. 이것은 요한이 절대적으로 쓰는 그림언어이다. 믿음과 세례로 그리스도인이 됨이 다시남이다.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일 3: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요일 4: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요일 5:1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요일 5: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일 5:18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그외 벧전 1:3, 23 딛 3:5 등에도 그림언어가 비슷하게 쓰이고 있다. 바울은 더 적극적이고 포괄적인 의미로 “새창조” “새피조물(고후5:17)”로 표현한다. “거듭난다”는 것이나 “새창조”가 나타내려는 reality는 다 똑같은 것이다. 육의 상태에 있는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되었음을 나타내는 그림언어이다. 죄와 죽음에 얽매여 있던 존재가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존재로 새롭게 변화되었음을 나타내는 그림언어이다. 요한적인 그림언어가 벤전 디도서에도 사용되고 있다. 이것이 “위로부터” 난다는 의미가 첫째 의미이고 “다시” 난다는 것은 부차적인 의미이다.
벧전 1: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벧전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딛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4절 니고데모가 “어떻게 다시 날 수 있는 가?” 하고 질문한다. 여기서 유명한 오해가 발생한다.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대표이고 예수에 대해서 조금 눈이 띄인 상태이지만 영의 세계 진리의 세계에 참여하지 않는 자로 육의 세계에 속하기 때문에 윗세상의 진리를 알리가 없다. 육의 사고방식으로 밑의 세상으로 인식을 할려고 하면 예수의 말씀을 오해할 수 밖에 없다.
5절 예수가 다시 말한다. “물과 상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 5절은 3절을 되풀이 하고 있다. 병행구절이다. 5절과 3절을 똑같은 말이다. 3절의 “아노센”을 “물과 성령으로” 나야한다고 5절은 풀어서 쓰고 있다. 세례의 물은 성령의 상징어이다. 성령의 힘이 역사하는 세례는 물로 일어난다. 물로 깨끗이 씻김을 받고 육에 속한 삶을 끝맺고 위의 세상 하나님 나라에 동참하는 존재로 다시 나는 일이 없이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예수가 이 말을 유대인의 대표인 니고데모에게 말하고 있다. 여기서는 유대교도 유대인의 가장 심오한 것도 이 땅에 속한 것이다. 유대교에서 자연적으로 하나님 나라로 갈 수 없고 거기에는 과격한 단절이 있어야 한다. 이 단절은 예수께서 가져오는 성령에 의해서 새로 나야한다. 이것은 인간의 종교적인 수양과 열심과 지혜가 아무리 심오하더라도 또 고귀하더라도 인간적인 가능성의 최상에서도 하나님 나라로 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모든 종교 도덕 이런 것에 대한 강력한 평가가 이 속에 숨어 있다.
가장 고귀한 지식 종교성도 우리 인간을 하나님 나라 영생 하나님의 세상으로 인도할 수 없다. 그 구원은 “위로부터” “성령으로부터”나야한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가 가져온다. 그러니까 니고데모을 예로 들어 인간의 모든 종교성에 대한 평가를 말하고 있다. 지혜, 과학의 발달, 도덕성 함양, 교육을 잘 시키면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 19세기의 자유주의, 낙관론적인 사상, 진화론적인 사상이 그랬었다.
과격한 새로남 새창조가 있어야 한다. 이것은 위에서 오는 영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요한복음에서 두고 두고 2중 3중의 의미를 가진 말을 많이 접할 것이다.
6절 7절에 이것을 설명하고 있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일 수 밖에 없고 성령으로 난 것만이 영이다. 육적인 가능성을 아무리 개발해도 육이다. 하나님의 세계 하나님의 reality에 참여할 수 없다. 영으로 난 것만이 영이다.
7절에 위로부터 나야한다는 것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놀라지 말라.
8절은 첫째 인간으로 부터는 꿰뚫어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영의 자유함과 심오함을 말한다. 인간의 의지로서는 control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의 자유함과 심오함을 말한다. 둘째 반면에 영의 역사의 결과가 분명히 나타남을 말한다. “푸뉴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의 “영”이란 말은 “숨”이라는 말에서 나왔다. 이 말은 “영”이라는 뜻도 있고 “바람”이라는 뜻도 있다. 예수가 영의 역사함을 바람에 비유하고 있다. 예수의 그림은 바람의 주권자적인 자유로움에 비유해서 인간이 control할 수 없는 영의 자유로움을 표현하고 있다. 인간의 지혜로 헤아릴 수 없다. 그러나 그 영의 역사의 결과는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영이 역사된 곳에 거듭남의 결과는 있다. 위로부터 남의 결과는 있다.
9절 통 못 알아 듣겠습니다.
10절 예수가 핀잔을 준다. 유대교의 한계성을 말해주고 있다.
11절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계시 전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우리가 아는 것 우리가 본 것을 증거한다. 그러나 너희가 받아들이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 나라의 영생에 참여함을 체험하고 우리가 그것을 증거하는데 니고데모로 대표되는 너희들 유대인들이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왜 유대인들이 받아들이지 않고 있느냐? 그들은 이 세상에 속한 자 땅에 속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12절에 우리가 땅에 속한 일을 말해도 너희가 믿지 않는다. 그런데 하늘에 속한 일을 말하면 너희가 믿겠느냐? T. K. Barret의 설명이 옳은 것 같다. “땅에 속한 일”은 이 물리적인 세상 육신적인 세상의 사건들로서 예컨데 태어남. 바람이 분다 등의 사건들로서 그리스도와 그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비유 역활을 하는 것들을 말한다. 그러니까 니고데모에게 예수는 난다, 태어난다, 바람이 분다는 땅의 현상을 비유로 들어 하늘의 현상을 설명했다. 그런데 니고데모가 못 알아 듣고 예수를 믿지을 못했다. 그런 상황속에서 하늘의 것은 하늘의 질서는 이 땅의 비유와 연결시키지 않고 그냥 직설적으로 말하는 것들이다. 이것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 무슨 소용이 있느냐? 즉 땅의 것인 태어남 바람부는 현상으로 땅위에 속하는 물리적 현상으로 하늘에 속한 진리의 비유로 쓰이는 것들 하늘의 진리를 땅위에 있는 현상으로 비유해서 설명해도 못 알아 듣는데 비유하지 않고 하늘의 진리를 직접 말하고 선포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는 말이다.
13절 하늘에서 내려온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다.
유대교에서는 지금까지 세상에 하나님을 계시를 뜻을 계시하는 자가 쭉 있었다. 선지자들이 있었다. 그 선지자들의 계시를 유대인들이 성경으로 묶어서 연구하고 하나님을 터득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그 선지자들의 계시를 가장 잘 터득한 사람이 바로 니고데모이다. 이스라엘의 선생이고 유대관원이고 바리새인이다. 제일 열심 있는 연구가이다. 그도 한계가 있다. 하늘의 진리를 못 알아 듣는다. 심지어 비유해서 설명을 해도 못 알아 듣는다. 이것이 유대교의 한계이다. 왜 유대교에 이 한계가 있느냐? 선지자 자신들이 이 세상에 속한 자들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이 세상에 그 말씀 하나님을 계시했기 때문에 그들 자신들이 제한적이었다. 반면에 예수는 누굽니까? 예수는 어떤 사람이냐?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으로서 하늘에 올라간 사람이다. 곧 위와 아래 세상에 속해서 다리를 놓은 사람이다. 하늘의 진리를 몸체로 이 세상에 나타내 주는 분이다. 예수 인자는 하늘에서 내려온 자로서 다시 올라가는 자로서 계시의 새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유대교의 계시 방법은 간접적인 방법이다. 반면에 여기에는 성육신 하신 로고스가 하나님의 진리를 직접적으로 계시한 것이다. 이렇게 계시의 역사에 있어서 전혀 새로운 국면이 열리는 것이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선지자 시대에 속하는 대표적인 존재로서 계속 파고 파서 연구해서 하나님의 계시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전한 계시를 받아야 한다. 그것은 위에서부터 새로남의 방식이다. 여기서 암시하는 것은 인자가 위세상과 아래 세상을 다리 놓는 분이고 아래 세상에 속하는 우리가 인자인 예수를 통해 윗세상에 영생에 참여하게 하는 분이다.
14절 15절 우선 13절에서 아무도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다의 “올라간다”는 말과 14절 “높임 받는다”는 말은 동의어이다. 예수가 하늘에서 내려온 분이고 하늘로 올라간다. 따라서 “높임받음”과 “올라감”은 동의어이다. 어떻게 올라가느냐?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과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 여기서 “높인다”는 말은 이중의미가 있다. 첫째 문자 그대로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서 지상에서 들린다는 말이다. 둘째 그것은 동시에 지표에서 들림은 예수의 영광 받음이다. 영광 받음이란 예수의 본질이 드러남이다. 요한복음 13-20장 까지가 예수의 십자가에 못 박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기록이다. 영광의 책이라 한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과 같이 예수의 십자가에 들림이 비교가 되고 있다. 비교점은 무엇인가? 랍비들의 해석은 쳐다본 자는 살고 보지 않는 자는 죽는다. 구리뱀의 구원의 힘은 놋 뱀을 쳐다본 자는 위에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신뢰하고 그를 의지했다. 하나님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신뢰와 하나님을 앎 이것이 구원의 힘이 있었다고 해석을 한다. 이 예수는 눈으로 보는 사람은 거기서 바로 하나님을 발견한다. 그 하나님께 의존하게 된다. 그런 사람은 구원을 받게 된다. 예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아들을 내어주신 사건이다.
요 3: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절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사 아들을 주셨다. 이것이 내어줌의 형식(giving a formular)이다. 하나님이 주어이고 하나님의 아들이 목적어인데 목적어를 내어 주셨다. 무엇하기 위해서 내어주셨는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이다. 내어줌의 형식은 항상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 준다. 내어줌의 형식의 대표적인 구절은 요3:16절이다. 또 롬 8:32 갈2:20 요일 4장에도 나온다. 나올 때마다의 강조된 의미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요 3:16절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했다. 사랑을 한 증거는 그의 아들을 내어 주셨다. 무엇하기 위해서?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다. 자기에게 반역한 이 세상 자기의 피조물이나 계속해서 자기에게 반역하는 존재. 요한복음에서 세상은 심오하다. 세상을 쭉 찾아보고 종합해 보라.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하나님께 대항하고 반역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고 하나님과 적대하는 관계 사단의 권세아래 암흑에 속해 있고 거짓 아래 있는 것이 세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다. 어느 정도 사랑하느냐? 아들을 내어줌이다. 그의 아들을 내어줌은 그리스도 사건 전체이다. 성육신에서부터 십자가에 죽으심까지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주신 사건이다. 그러나 그것의 절정은 어디서 일어났느냐? 십자가에 죽으심이다. 예수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났다. 요한일서 4장 8절의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명제가 나타났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계시되었다. 예수는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자이다. 예수는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계시하는 자다.
계시의 첫 원칙은 하나님은 하나님만이 계시할 수 있다. 예수가 하나님의 본질을 계시하는 것은 예수가 하나님과 같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예수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본질을 나타내는 분으로서 그의 하나님 됨을 나타냄이다. 그 사건이 수난인데 그것이 예수를 하나님 됨의 본질을 나타냈다. 십자가 사건으로 비로소 예수를 하나님으로 고백한다. 예를 들면 도마의 신앙고백이다. 따라서 십자가 사건이 예수의 영광 받음 사건이다. 놋뱀 사건이 위를 쳐다봄으로 세상의 가치들의 가능성을 신뢰하지 않고 위로부터 오는 위에 계시면서 자신들을 구원하시는 언약의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고 보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세상에 속한 자들이 육의 세상에서 자기들의 구원의 가능성을 찾으려 하고 행복의 조건을 찾으려 하고 돈 지식 명예 등을 추구하는 자는 구원을 못 받는다. 들림 받은 예수를 바라봄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들이 구원받는다. 들림 받은 사건은 아들이 십자가에 못박히는 사건인데 그 사건은 하나님의 계시로서 하나님이 인류를 사랑함을 계시함으로 동시에 예수가 하나님의 계시자임을 스스로 나타내는 것이다. 예수를 보는 것은 하나님을 보는 것이고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세상에 참여하는 것이다.
안다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관계적인 의미이다.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게 되어 영원한 생명을 받게 된다. 영생은 신적인 삶이다. 종말론적인 의미이다. 이 시대의 삶이 아니고 오는 세대의 삶이다. 시간적인 이원론으로 표시했을 때 이 세대의 삶이 아니라 오는 세대의 구원의 세대의 삶이다. 헬라적인 공관적인 이원론으로 한다면 이 세대의 삶은 물질의 삶 오는 세대의 삶은 하나님의 세계의 삶 영생의 삶이다.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함에 참여하는 삶이다. 이 세대의 삶은 육신적인 제한된 자원으로서의 삶이다. 이 삶은 고난과 두려움으로 가득 찬 삶이다. 우리가 불안한 이유는 시간의 제약 때문이다. 이 세대의 삶은 결핍 가난한 삶 고난으로 가득 찬 삶이다. 이것은 죽음의 증상들이다. 우리가 죽음 병에 걸린 것이다. 죽음 병의 증상들이다. 죽음이 우리 가운데 이미 시작이 되었다. 죽음의 세력에 붙잡혀 있다. 감기가 걸리면 증상을 나타내듯이 영생은 생명이라고도 한다. 이 영생은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함에 참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지혜 질들로 만들어진 삶 신적인 삶이다. 여기에는 고난 결핍이 없다. 이것이 생명이다. 이 삶은 이 세대의 삶과 전혀 다른 것이다. 질적인 근본 차이가 있다. 우리는 이미 영생을 얻는 것이다. 아직 완성이 안 되었지만.
17절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신 것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하려 함이다. 16절에 내어줌의 형식이 있다. 17절은 보냄의 형식(sending formular)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냈다. 그리스도라는 칭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름이다 보냄의 형식에는 아들이라는 칭호가 쓰인다. 보낸다는 말은 유대의 미쉬나의 대하코트 5장 5절에 보면 보냄을 받은 자는 보낸 자와 같다. 사자는 보낸 주인의 전권대사이다. 주인의 전권을 행사하는 자이다. 이런 보냄(사자)에 대한 이야기가 이 속에 숨어 있다. 특히 지혜의 신학이 배경을 이룬다. 지혜가 하나님의 딸로서 하나님으로 보냄을 받아서 하나님을 계시하고 하나님의 agent 실행자 일꾼 노릇을 한다. 요한복음 서문에서 유대 지헤의 신학의 배경으로 로고스라는 천명이 이루어 졌다. 예수가 하나님의 지혜로 말씀으로 구약시대에는 초월하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어떻게 역사하셨느냐? 그의 말씀 지혜를 통해서 역사하셨다고 점진적인 계시의 초보단계에서 깨달았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더 확실한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 보니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활약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전권대사이다. 아들이 보냄을 받았다. 아들은 상속자라는 의미가 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상속자이다. 하나님의 모든 것에 참여하는 자, 하나님의 본질과 하나님의 전능함, 하나님의 모든 속성, 하나님의 부요함에 참여하는 자이다. 하나님의 전권을 위임받은 자라는 소리이다.
요 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목적은 즉 예수를 보낸 목적은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을 위해서이다. 하나님을 계시해서 그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함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전권대사로서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를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를 예수가 담당했다. 이 목적이 십자가에서 일어났다. 이것이 들림 받은 사건이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들림 받음을 보고 믿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구원 영생에 도달한다. 그것을 말하기 위해서 여기서 부정적으로 말하기를 예수는 심판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고 한다. 심판은 정죄 벌준다는 말이다. 그것이 아니고 구원을 받게 하려 왔다. 그런데 그 다음절에 금방 예수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않고 정죄 받지 않고 구원받고 영생에 참여한다. 그런데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아 버렸다 하고 몇 절에서 이 말을 부연한다.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예수의 십자가를 예수 당시 예수의 십자가 복음이 선포될 때 예수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쳐다보고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뜻을 헤아려서 하나님의 구원을 믿는 자가 있는가하면 예수가 죄인이라고 예수를 정죄하는 자가 있다.
로마의 관원 제사장 유대인 빌라도는 예수를 죄인이라고 정죄하고 십자가에 사형에 처한다. 이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을 이 세상에 계시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위해서 이 세상에 보낸 자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즉 예수의 계시를 안 받았다. 터득하지 못하고 도리어 예수가 죄인이라고 정죄하고 사형에 처했다. 예수가 빛으로 곧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져 다 주는 빛으로 오셨다. 그 빛이 십자가에 나타났다. 그런데 소수 몇 사람은 그 빛을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구원을 덧입었다.
이런 현상은 항상 일어난다. 예수의 십자가의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는 항상 어떤 사람은 예수가 하나님의 계시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구원을 덧입고 어떤 사람은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어리석음이다. 미련함이다. 걸림돌이다고 정죄한다. 그래서 가룟유다 같은 사람은 예수가 이 세상에 오신 것은 구원하러 오셨는데 항상 무엇이 발생하느냐면 갈라짐이다. 이 갈라짐 갈음은 심판의 의미이다. 거짓과 참을,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가른다. 두 번째 의미는 거짓과 그른 것이 잘못되었다고 정죄하고 밝히는 것이다. 이것이 심판이다. 그런데 예수가 오신 것은 사실은 구원하러 오신 것이다. 그런데 필연적으로 구원받은 무리와 그 계시를 반대해서 그 구원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거절하는 가름이 나타난다. 하나님의 백성과 세상의 백성의 가름이 나타난다. 세상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지 못할 자로 스스로를 밝힌다.
어떻게? 예수의 메세지와 십자가에 대한 자기들의 반응으로 밝힌다. 자기들이 세상의 백성으로서 세상과 함께 멸망해가는 자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런 자를 두고 여기서 심판을 이미 받았다고 말한다. 예수가 심판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자기가 스스로를 심판한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는 심판하러 오심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다. 그러나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은 일부에게는 구원이 일어나고 일부에게서는 심판이 일어난다.
추상화를 전시하는 화랑에 갔다. 우리가 그림에 대해서 잘 모른다고 합시다. 60년대에 구소련이 개방화 정책을 할 때 피카소 그림 전시회를 열었는데 후르시초프가 당나귀 꼬리를 몇 번 흔들어서 만든 그림 같다고 했다. 결국 그가 이 그림을 평가했다. 정죄했다. 그런데 실제로 피카소 그림에 대한 평가로 후르시초프 자신이 평가를 받은 것이다. 그림의 세계에 대한 무식을 폭로한 것이다. 구조가 이렇게 되어 있다.
예수가 빛의 세상에 왔다. 빛을 받는 자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한다. 빛을 정죄하고 빛을 거짓이고 죄인이라고 정죄하는 자들은 그 거부하는 행위로 내가 빛과 관계 없는 자 자신이 암흑의 세계에 속한자라고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이 심판이고 정죄이다. 이것이 19-21절 까지의 설명이다.
22-30절 까지는 예수와 요한의 세례가 비교되어 있는데 그것은 니고데모 유대교의 대표에게 예수가 무엇을 말했느냐? 유대교의 최고의 표현도 하나님의 나라의 영생으로 자동으로 발전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하늘에서 온자 하나님의 계시자 그가 주는 영으로 새롭게 남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영생에 참여 할 수 있는 것이다고 했다. 그것이 세례(물과 성령)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 세례 성령을 전달하는 예수의 세례와 물세례만을 주는 요한의 세례가 대조된다. 요한의 세례는 유대교의 최고의 가능성 니고데모와 비슷한 것이다.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 성령의 세례를 통해서이다.
요 3:22 이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주시더라 23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주니 거기 물들이 많음이라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24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25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으로 더불어 결례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26 저희가 요한에게 와서 가로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27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28 나의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31-36절 까지
앞의 3:1-21절 까지의 내용들이 다시 한 번 요약되어 나타난다. 3장의 이야기는 2장에 대한 해설이다. 2장에서의 두 가지 이야기 즉 청결의 예의 물로 포도주를 만들고, 성전을 청결케함의 사건이다. 이 두 이야기는 표적이다. 이 두 개의 표적성을 해설한 것이 3장이다. 청결의 예의 물과 성전은 유대교이다. 이 유대교의 가장 고상한 표현인 니고데모도 포도주 떨어진 잔치와 같다. 더 이상 구원의 힘이 없다. 기쁨이 없다. 타락한 성전에서의 예배 등은 하나님의 사랑이 전달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가 주신 성령 윗세상의 힘에 의해서 유대교도 가장 고상한 유대교의 대표도 새로 나야 한다. 포도주가 상징하는 기쁨 축복 새성전으로서의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새로운 예배가 이루어진다. 어떻게 예수가 이것을 가능케 하느냐? 하늘에서 온 자이기 때문에 하늘에 것을 계시할 수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계시할 수 있고 하나님의 십자가에서 내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해서 그를 통해서 이 세상의 사람이 하늘로 올라간다. 요한복음 4장도 마찬가지로 이것에 대한 해설이 계속된다. 3장은 가장 고상한 유대교 우리 인간지성의 가장 고상함, 우리 인간 종교성의 가장 고상함 등으로 인간 가능성의 최대한 발휘로는 신적인 삶 하나님의 영생에 참여할 수 없다. 인간 낙관론과 휴머니즘에 대한 주정의 표현이다.
4장 사마리아 여인.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볼 때에는 이방인과 마찬가지이다. 어쩌면 이방인들 보다 더 나쁜 부류이다. 그중에서도 여인이다. 즉 정통 유대교의 대표자와 남편이 6명이나 있는 이방여인이 대조된다. 이것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이냐 하면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종교를 이방인들의 우상종교의 혼합종교로 보았다. 이방인들은 우상을 “주”로 “남편”으로 말한다. 우상을 남편으로 주로 섬기는 종교를 말한다. 유대인들은 모세가 계시한 율법에 따라 정통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겼는데 사마리아인들은 이방인들과 섞여서 더럽혀서 이방인들의 신들을 다 섬기는 창녀와 같은 존재들이다. 혼합종교이다. 사마리아교를 혼합종교로 보았다. 그런 구조로 종교의 대표자인 사마리아 여자를 들어서 설명한다.
이들에게도 예수는 구원자이다. 4장 42절에 사마리아인들의 입에서 “이는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줄 앎이니라” 는 신앙고백이 나온다. 그래서 예수가 온 세상의 구원자인 줄을 앎이니라.
어떻게 전개하느냐면 두 가지의 그림을 통해서이다. 하나는 야곱의 우물과 하나는 성전이다. 한 구절은 예수가 생수를 주시는 분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성령을 주시는 분이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한 구절이다. 또 한 구절은 예수께서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예배를 가능케 하는 분이다는 것이 한 구절이다. 영이신 하나님을 영으로 진리로 예배케 하시는 분이라는 주제가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주제이다. 그래서 이 두 주제는 2장의 두 사건(표적)들과 연결 되고 3장과도 연결이 되어 있다. 그래서 2-4장까지가 한 단위를 이루는 예수께서 구원의 새로운 장을 여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1-9절 까지는 예수가 본론에 들어가기 위한 주변 정향을 상당히 자세하게 설명한다. 예수의 선교활동 중에 있음직한 한 에피소드를 말하기 위해서 주변 정황을 자세히 말하고 있다.
10절에서 예수께서 네가 하나님의 선물과 네게 마실 것을 달라고 한 자가 누구인줄 알았으면 너는 그에게 요구할 것이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줄 것이라고 예수가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을 한다. 그런데 여자는 이 말을 못 알아 듣는다. “생수”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샘에서 솟아나서 흐르는 활수, 흐르는 물이다는 뜻이다. 생수라는 뜻이다. 그러나 더 깊은 의미는 “영생을 주는 물”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사마리아 여인은 아래 세상에 사는 보이는 것 만족할 수 있는 것 물질의 세계에 사는 존재이기 때문에 “활수”로서의 의미 밖에 보지 못한다. 세상적인 의미로 가치판단을 하기 때문에 항상 예수가 의미하는 영의 세계 진리의 세계 높은 세상의 의미를 터득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 우물은 깊은데 당신이 어떻게 떠올 수 있느냐? 고 질문한다. 즉 오해가 일어난다. 게다가 이 여인은 12절에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샘을 우리에게 주었고 그도 이 샘으로 마시고 그 자손들도 이 샘으로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위대하냐?고 한다. 즉 야곱과 비교하는 좋은 대화의 전환점이 생겼다. 야곱은 이스라엘과 사마리아인들이 자기들의 조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으로서 야곱의 우물이 이스라엘 백성을 지금까지 목을 축인 것은 사실이나 이 물은 마셔도 다시 마셔야 하는 물이다. 영생을 주는 물이 아니다. 이 물은 토라 율법을 상징한다. 토라 율법 모세율법이 하나님의 계시체로서 그 토라를 배우면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 하나님의 구원을 힘입는다는 의미에서 우리가 그 물이라는 것은 생명에 꼭 필요한 것이다. 물의 상징성 물은 빛과 마찬가지로 보편적인 상징어로서 유대교에서는 토라가 물이다.
야곱의 물은 토라로 상징된다. 이것은 부족하다. 어떤 의미에서 부족하냐? 영원히 결핍이 없는 그런 삶을 허락하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에서 조금 도움을 주는 정도의 것이다. 반면에 예수가 주는 물은 그와 반대로 영생을 주는 물이다. 그래서 이 물을 마시면 목마름, 부족함, 결핍 등이 없다. 위에서 오는 생명의 물이다. 그러니까 이 말도 여인은 못알아 듣고 활수로서의 의미만 부여한다.
그러면 그 물을 달라고 예수께 부탁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예수가 자기가 제공하겠다는 그 물은 성령을 두고 말함을 가리키고 있다. 성령이 바라는 사람들에게 영생을 하락하는 것임을 깨우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대조를 발견한다. 토라와 예수의 계시가 대조되어 있다. 토라가 가져다 주는 축복(생명)과 성령이 가져다주는 축복(생명)이 대조되어 있다. 잠시적인 축복과 영원한 축복이 대조되어 있다. 야곱과 예수가 대조되어 있다. 요한복음 1:51절에 야곱과 예수가 대조되어 있다. 야곱이 옛 하나님의 자녀의 조상이었듯이 인자이신 예수가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의 조상으로 대조된다. 야곱으로 시작된 옛 역사가 종결되어 지고 인자이신 예수를 통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탄생하는 것을 약속하는 것으로 요한복음 1장이 결론으로 끝나고 있다. 여기서 옛 야곱이 대표되는 이스라엘의 종교나 또는 마찬가지로 야곱이 자신의 조상이라고 주장하는 사마리아 종교는 그것이 하나님의 계시를 비록 가졌다 할지라도 그것이 겨우 마시면 다시 목마르는 잠깐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불과하다. 반면에 예수는 위에서 오시는 분으로서 우리에게 성령을 가져다 주는 분으로서 영생을 주시는 분이다. 예수가 야곱의 역사를 완성하면서 능가하고 대치하셔서 전혀 새로운 구원의 시대를 여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다.
이 여인은 계속해서 말귀를 못알아 듣는다. 그래서 16-18절 까지에는 이 여자의 불결한 삶을 지칭한다. 남편이 여섯 명이나 있었다고 한다. 유대교 쪽에서 보았을 때 사마리아교를 이방우상들을 섬기는 혼합종교로 여러 남편을 섬기는 창녀와 같이 깍아 내리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예수가 여인에게 분명히 구원은 유대인들로부터 이다고 하며 이와 같이 여인이 남편이 여럿 있는 것과 같이 사마리아교가 우상을 섬기는 혼합종교 우상종교라고 은근히 나타냄으로 해서 유대교가 야곱라인의 정통임을 예수가 분명히 하고 있다. 이것은 신약성경 전체의 증언과 같다. 구원은 유대인으로부터 나는 것이고 유대인들이 그들의 모든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정통적으로 이루어 온 민족이고 유대교가 그 종교이다. 거기에 반해서 사마리아 종교는 자기들이 정통종교이고 모세율법을 따른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그러나 예수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유대교나 사마리아교나 서로 야곱라인의 정통 후계자이고 모세율법의 정통 계승자라고 주장을 하는데 둘 다 중요하지 않다. 이들의 라인은 어디에서 첨예하게 나타나느냐? 하면 예루살렘에서 예배해야 하느냐? 그리심산에서 예배해야 하느냐? 로 대표되는데 예수가 주장하는 것은 둘 다이다. 예루살렘에서의 예배도 그리심산에서의 예배도 이 세상에 속하는 물질의 세계에 속하는 것으로서 이제 예수에 의해서 완전히 능가하는 새로운 예배의 시대가 열림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대치되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 23-24절에 때가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이다. 진리에 속한 자들은 진정한 아버지를 성령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 왜? 아버지께서 이렇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고 말한다.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그리심산에서도 말고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 이것은 요한복음 2장의 성전에서의 표적에 대한 주석이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제사하는 행위를 방해하는 표적을 했다. 이 표적의 의미를 해석하는 곳이 바로 여기이다. 혼합종교는 말할 것도 없이 예루살렘 성전도 이 세상의 물질의 세계에 속하는 것으로서 거기서 드려지는 짐승의 피로 드려지는 제사도 물질적인 것으로서 그런 시대는 이미 다 지났다. 예수가 새로운 성령의 영의 시대를 가져온다. 그때가 임할 것이다. “때가 임한다”는 말이 5장에서부터 자주 나온다. 그리고 곧장 지금이 벌써 그때이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재림을 통해서 이와 같이 완전한 하나님을 진리와 영으로 예배하는 시대가 도래 할 것인데 이것이 종말론적인 미래인데 벌써 예수가 그 시대를 지금 벌써 시작했다. 미래와 현재성이 아주 강도 높은 긴장을 이루고 있는 문장이다. 예수가 물질적인 성전의 의미를 대치해서 진리와 영으로 하는 예배의 시대를 연다. 그렇게 예수께서 주장하고 있다.
도대체 그런데 “진리와 영으로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말이 무슨 의미냐? 우선 왜 진리와 영으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느냐면 24절 처음에 하나님이 영이시다. 그렇기 때문이다. 예배하는 자들은 진리와 영으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는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하나님은 영이시다는 말은 하나님에 대한 정의가 아니고 하나님의 거룩성 하나님의 초월성 하나님의 물질 시간의 세계를 초월한 이 세계와 다른 저 높은 영원의 세계의 존재임을 나타내고 있는 말이다. 하나님이 영원의 세계 영의 세계에 속하는 분이기 때문에 육신적으로 나서 물질의 세계에 속하는 자들은 변화와 죽음의 세계에 속하는 자들은 하늘의 영적인 세계에 속하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 그는 이 새로운 거듭남 위로부터 거듭남이 있어야 한다. 성령으로 거듭나서 영적 존재가 되어야 비로소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 영으로 예배한다는 말은 3장을 전제하고 있다.
진리로 라는 말은 무엇이냐? 이데아의 세계 실재의 세계를 지칭하는 말이다. 물질의 세계 육의 세계는 가짜의 세계인데 반해서. 그래서 여기서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한다는 말은 예루살렘과 그리심산에서의 물질적인 세상에 속하는 예배로는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다. 사마리아는 말할 것도 없고 유대교도 가능치가 않다. 예수가 가능케 한다. 예수가 진리를 계시하고 성령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위로부터 새로 태어나게 하셔서 이 세상에 있으나 전혀 새로운 인간이 되게 하신다. 이런 거듭난 사람이 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계시와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영에 의해서 새로 된 자로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할 수 있다는 말은 예배의식의 드라마를 상당히 물질화 시키는데 반해서 개신교는 물질화시키는 것을 그치고 마음과 내면적인 예배로 이해를 했는데 그 말이 아니다. 지금 여기서 영과 진리의 예배와 반대되는 것은 외형적인 예배의식의 문제가 아니고 세상적인 예배이다.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진리와 성령에 의해서 새로 난 자에 의한 예배이다. 새로 난 자들에게 하나님은 아버지이다. 그러니까 아버지를 예배한다. 1:12절에 보면 누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가? 로고스에 의해서 새로 난 자가 자녀들인데 이를 연상케 하고 3장의 니고데모와의 대화 즉 성령에 의해서 새롭게 난자를 연상케 한다.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말은 내면적인 갱신 예배의 의미가 아니고 예수의 자신의 계시와 성령에 의해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 자로서 하나님 아버지를 예배하는 것이다.
27-42절 까지는 아주 극적인 전개의 수단으로 앞에서는 예수의 제자들과의 대화이고 뒤에서는 여자와 여자의 동네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예수와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주제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셔서 하나님을 계시하고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하나님의 구원을 힘 있게 하는 것이 자기의 음식 자기의 삶을 지탱하는 것이라고 이렇게 말하고 있다. 반면에 여자와 동네 사람과의 대화의 주제는 예수의 메시야성 여자가 예수의 메세야 됨을 터득했는데 그것은 이 세상적인 기초적인 것에 불과하다. 유대교에서 메시야가 오면 모든 것을 밝히리라고 했는데 예수는 그런 의미에서만 메시야가 아니고 영생을 가져다주는 메시야임을 나타내고 있다.
2-42절의 큰 흐름을 보면 2장의 두 개의 표적은 3장 4장에서 이 표적들의 의미를 나타냈다. 물이라는 것으로 3장과 4장이 연결이 되어 있다. 또 예배를 예수가 가능케 한 분으로 성전청결의 표적을 주석한 것이다. 3장 4장에 동원된 인간은 대표적인 인간이다. 하나는 대표적인 고상한 이스라엘의 선생이다. 하나는 이방신들을 많이 섬기는 사마리아인 여자 이방인과 다름없는 자다. 예수는 유대교도 사마리아교도 능가하고 대치해서 새로운 시대 새생명의 시대 영생의 시대 새로운 예배의 시대를 여는 분이다. 이것은 유대인에게도 사마리아인으로 대표되는 이방인에게도 계시이고 즉 구약과 유대교의 구원사를 완성해서 하나님의 구원사에서 새로운 장을 여는 분이다. 영생 새로운 예배를 가능하게 하는 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