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근동과 이스라엘의 주술
I. 주술이란 무엇인가?
주술(magic)을 한 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종교와 더불어 주술은 인류 역사와 함께 오랫동안 공존해 왔다. 지금도 시골에 가면 처마 밑에 생선뼈를 걸어 놓아 악귀의 근접을 막는다던가, 부적을 사용하여 장차 일어날 지도 모르는 재앙을 미리 방지해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 TV의 사극(史劇)에서 흔히 발견되는 저주행위는 어떤 행위나 조치를 취함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는 행위로서 일종의 흑주술(black magic)에 해당된다. 숙종대의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이유로 사약을 받은 사실은 주술행위가 일상행위에 끼친 영향이 적지 않았음을 보여준다(박한용 외, 319). 현대인의 시각에서 본다면 이러한 주술행위는 미신적이며 비합리적인 행위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주술의 흔적이 사라지지 않고 삶 속에 자리잡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주술은 과연 미신적 행위에 불과한 것일까? 고대인의 삶은 종교와 일상생활이 구별되어 있지 않았으며, 종교활동 가운데 주술이 큰 역할을 차지했다. 그렇다면 주술은 무엇이며, 어떤 이유로 오늘날까지 사라지지 않고 지속되고 있는가? 특별히 고대 근동(Ancient Near East)의 주술활동은 어떤 모습이었으며, 그 영향을 직·간접으로 받은 이스라엘의 주술행위가 성서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가? 필자의 일차적 관심은 여기에 있다. 필자는 특별히 구약성서에 나타난 주술과 고대근동의 주술을 비교해 봄으로써 주술이 고대사회에서 보편적으로 행해졌던 종교행위라는 사실을 밝히고자 한다. 특별히 주술의 종교적 성격과 사회적 기능을 살펴봄으로써 고대인의 삶을 추적하고자 한다. 동시에 주술이 끼친 사회 심리적 영향이 종교활동에 어떤 영향을 주고받았는지를 살핌으로써 주술행위에 대한 객관적 검토를 하고자 한다.
주술은 원인(cause)과 결과(effect) 사이의 관계성에서 출발한다. 원인과 결과의 관계는 과학적 사고의 출발점이 된다. 어떤 결과가 있기까지는 반드시 그 결과를 있게 한 원인이 존재한다는 믿음이 주술을 낳았다고 설명할 수 있다(Scurlock, 1992: 464). 예를 들면 대지의 수분이 응결하여 비나 눈이 되어 지상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공기 중에 수분이 원인이 되어 비와 눈이라는 결과가 생긴 것이다. 주술 역시 원인과 결과를 중시한다. 고대 이집트의 나일 강변은 해마다 농사일이 한 해의 큰 과제였다.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농촌에서 일손을 풍부하게 확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 나일 강변의 들에서 발견된 나무상자를 보면 그 안에 돌로 만들어진 사람 인형이 가득차 있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조그만 나무상자 안에 사람인형을 가득 채움으로써 농사철에 인력의 부족함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다. 현대인의 사고에서 본 다면 이러한 행위는 비합리적이며 비이성적인 행위로 간주된다. 그러나 고대인들은 달리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자신이 바라는 행위를 상징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실재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믿었다. 타인을 저주하거나 해를 입히기 위한 흑주술(black magic)에 반하여, 이처럼 자신이 처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행하는 주술을 백주술(white magic)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어떤 초월적인 힘이 자신의 의지를 알아차리고 주술적 행위를 한 사람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믿음에 근거한다. 이러한 원초적 신앙과 종교적 신념이 어우러져 "주술"(magic) 이라고 하는 종교행위를 창출한 것이다. 그러나 주술은 과학에서처럼 원인과 결과를 입증할 수 없으며, 어디까지나 인간의 신앙에 의한 행위이기 때문에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제임스 프레이저(James G. Frazer)에 의하면, 주술은 유사한 행위를 통해 그와 동일한 결과를 창출해 내는 행위로서 결과가 원인을 닮아간다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주술은 또한 한 때 서로 접촉한 적이 있는 두 주체가 서로 떨어져 있는 동안에도 영향을 끼친다고 믿는다(Frazer, 11). 이것은 부적(charm)이나 글씨(spell)를 새겨 저주함으로써 멀리 떨어져 있는 상대방에게 피해를 입히는 경우를 의미한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프레이저는 감응적 주술(sympathetic magic)에 대한 두 가지 원리를 제시한다. 그 하나는 모방적 주술(Homeopathic or Imitative Magic)이요, 다른 하나는 전염성 주술(Contagious Magic)이다. 두 형태 모두 서로 떨어진 곳에서 비밀스런 교감(sympathy)에 의해 영향을 주고받는 주술행위이다(12). 이런 행위는 원인과 결과 사이의 관계를 기본으로 하는 과학이나 기술(technology)의 기본 원리를 토대로 한다. 과학의 경우처럼 주술 역시 원인이 되는 어떤 행위를 통해 자신이 바라는 결과를 기대한다. 그러나 주술은 수행자의 의지와 관계없이 결과를 보장하지는 못한다. 이 점에서 프레이저는 주술을 거짓과학(pseudo-science)으로 간주한다. 과학은 자연의 원리에 따른 원인과 결과가 분명하게 드러나지만, 주술은 초자연적인 힘과 인간의 소망 사이에 이루어진 믿음과 신앙행위라는 점에서 과학과 주술은 구별된다. 주술은 진화한다는 프레이저의 견해는 그의 책, <<황금가지: 주술과 종교에 대한 연구(The Golden Bough: A Study in Magic and Religion)>>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주술적 사고를 가장 원시적인 것으로, 종교적 사고를 주술에서 발전된 사고로, 과학적 사고를 가장 발전된 기술로 간주한다(48-60).
말리노프스키(B. Malinowski) 역시 주술을 과학적 원리와 유사한 것으로 이해한다. 주술 또한 과학의 경우처럼 인간의 요구에 부응하는 구체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다. 그는 주술과 과학을 서로 다른 전통과 사회적 환경에 따라 상호간에 영향을 끼치는 인간행위라고 여긴다(Malinowski, 86-87). 그는 프레이저가 주장하는 주술의 진화에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주술과 종교, 그리고 과학은 인간의 행동양식으로 이해된다. 주술적인 모든 행위는 주술행위자가 처한 환경에서 발생하며 그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인(spontaneous) 반응에서 출발한다(78). 다고스티노(F. d'Agostino) 역시 주술과 종교를 기본적인 인간 경험의 두 가지 측면으로 이해한다. 주술은 혼돈의 상황이나 심각한 스트레스, 혹은 두려움이나 상실감 따위의 비정상적 상태에 젖어 있을 때 종교에 침투할 수 있다. 고도로 발전된 현대 사회에서도 심각한 고독은 종교적 고립행위로 나타나고, 그것은 주술행위로 이어질 수 있다. 요즘 한국사회는 입시철만 되면 무당에게 달려가 좋은 결과를 위해 각종 조치를 취하는 것과 유사하다. 주술은 초보적 단계에서는 종교적 상징행위에 참여한다. 그러나 그것이 제도권 안에서 행위로 나타나는 과정에 이르면 과학에 기반을 두는 기술(technology)을 대신하는 경향이 있다(d'Agostino, 281).
그러나 주술과 종교는 구별된다. 주술은 원시사회의 사람들에게 제도화된 의식(ritual)을 통해 발생 가능한 위험상황을 미리 제거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는 반면, 종교적 신앙은 모든 형태의 가치 있고 바람직한 태도를 조성하며 사람들에게 삶에서의 용기와 자신감을 준다(Malinowski, 89-90). 비에티 역시 주술과 종교를 크게 구별하지 않는다. 주술과 종교는 모두 실천적이며 "과학적인" 면보다는 제의와 상징적인 개념과 행위를 포함한다. 따라서 단순화된 사회일수록 주술과 종교는 서로 구별되지 않고 함께 어우러져 있다(Beattie, 212). 그러나 종교와는 달리 제도화된 주술행위는 그 자체의 삶의 자리(Sitz-im-Leben)에서 특별한 목적을 지닌다. 말리노프스키에 의하면, 주술은 종교와는 달리 우주적 힘에 대한 추상화된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상황에 적용되는 인간의 행위라는 점이다. 따라서 각 주술행위는 그것이 발생한 상황에 따라 독립적으로 형성된다. 독립적인 상황에 따라 인간의 본능적인 반응에 의해 제도권 안에서 구체화된다(Malinowski, 78).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종교에서의 신화(神話)는 우주적으로 적용되는 공동체의 선이나 기존의 체제를 옹호하는 신념으로 믿어지는 반면에, 주술에서의 신화는 부분적으로 전승되며 주로 개인적인 목적에 활용된다. 따라서 공동체의 선과 개인적인 이익이 서로 상충될 때, 그것이 종교와 주술의 대립된 양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Eliade, 90). 그러나 주술은 종교와 마찬가지로 자연 그 자체를 변화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주술은 행위자가 기대하는 자연과정이 다른 자연과정의 저항을 받지 않고 이루어지게 하려는 믿음에 기초한다. 결국 주술은 원시적 과학(primitive science)도 아니요, 원시사회의 사람들이 신봉했던 종교도 아니다. 오히려 주술은 종교와 과학과 더불어 인간의 삶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 온 삶의 양태이다(90). 하지만 주술이 개별적인 사회적 상황에 따라 달리 이해될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에반스-프리차드는 멜라네시아(Trobriand Island)의 주술과 아프리카의 아잔데 주술을 비교함으로써 주술이 사회적 구조에 따라 달리 이해되어 왔음을 보여주기도 한다(참조. Evans-Pritchard, 22).
II. 고대 근동의 주술
고대 근동 사회에서의 주술은 종교적 영역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삶의 일부로 전승되었다. 고대 근동사회에서는 주술과 종교가 현저하게 구별되지 않았다. 엑소시스트(exorcists)와 제사장이 동일한 교육을 받았으며, 같은 신을 섬기는 합법적인 종교지도자로 여겨졌다. 엑소시스트와 의사 역시 거의 동일한 방식으로 병자를 치유함으로써 사회적으로 동등하게 인정되었다(Scurlock, 1992: 465).
주술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다. 주술을 행하는 주술사(magician), 주술과 관련된 의식(rite), 그리고 주술행위가 그것이다. 주술사는 주문(words, spells) 혹은 기타의 주술도구를 이용하여 초월적 세계를 조정할 수 있다고 믿는 주술 전문가이다. 주술의식은 주술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일련의 기도 혹은 종교적 의식을 포함한다. 이처럼 주술행위는 대개 종교적 행위와의 관련성 안에서 이루어진다(Mauss, 18). 주술은 일반적으로 원시사회에서 가장 중시하는 사회적 전통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말리노프스키에 의하면, 주술은 결코 어디로부터 전해지거나, 혹은 만들어지거나 발명되지 않는다. 모든 주술은 단순히 처음부터 다양한 전통들을 이어주는 사회적 보조수단(adjunct)이다. 그 주술은 이성적인 한계를 뛰어 넘어 인간의 초월적 소망을 이루는 수단으로서 인간의 삶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Malinowski, 74-75).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마법사에 의해 행해지는 흑색주술과 합법적인 주술사에 의해 행해지는 백색주술을 분명하게 구별하였다. 흑색주술을 행하는 마법사에게 죽음의 형벌이 내려졌으나, 백색주술은 그와 반대로 신들의 선물로 여겨졌다(Scurlock, 465). 기원전 3,000-2,000 경의 초기 메소포타미아의 문헌들은 수메르인들이 남긴 다양한 전승을 보여준다. 마이칼로브스키(P. Michalowski)는 서로 다른 시대에 기록된 것으로 여겨지는 두 형태의 주술문헌을 소개한다. 그 첫 번째 문헌은 니푸르(Nippur)에서 발견된 제 3 우르 문헌(Ur III)에 나타난 수메르 주문(Sumerian incantation)이고, 다른 하나는 기원은 알 수 없지만 고대 바빌론 판으로 여겨진다. 이 두 문헌을 바탕으로 그가 재건한 주문은 다음과 같다.
황소여, 그 뿔은 (u.)나무의 뿔,
그 어깨는 포플러 나무,
가운데는 금으로 만들어져 있어 땅을 짓누르고 있네.
그 발굽은 청동으로 만들어져 있어 대지를 훨훨 나는구나.
주님은 앞으로 나아오시고,
인다그라(Indagra)와 하얀 황소, 그리고 검정 황소가 왔다.
물방울이 그 입으로부터 뚝뚝 떨어지누나(Michalowski, 220-223).
마이칼로브스키는 연구결과를 토대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이 두 형태의 주문(呪文)은 고대 바빌론의 주문과 그 이전의 문헌 사이에 있는 상호관련성을 보여주는 매우 희귀한 문헌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가 있다." 비록 더 연구해야할 부분이 있지만 주술에 관련된 문헌이 그 동안 연구한 결과보다는 훨씬 더 광범위하게 유포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224).
다른 고대사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주술은 초월적인 힘에 대한 자신감을 주는데 활용된다. 주술은 가끔 종교적 신화에 동반되어 수행되기도 한다. 드브리(de Vries)는 주술을 심리학적인 입장에서 분석한다. 그에 의하면 주술은 초월적인 힘을 이용하여 일상적인 범주 외부에 있는 것을 조종한다. 주술사의 행위는 초월적 세계를 조정하는 권위를 지닌다. 왜냐하면 주술사는 공동체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들을 정당화하는 것을 그 소임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을 안에 초월적인 힘을 조정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대체로 자신이 초월적 존재에 의해 주술행위를 하도록 선택받았다고 하는 소명의식이 있는 소수의 사람만이 그 일을 담당한다(de Vries, 221).
감응주술은 주술의 심리적 측면을 잘 보여준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아�(Apep)이라고 하는 괴물의 형상을 만들어 그것을 불에 던짐으로써, 실재로 그 괴물을 제거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것은 마치 오늘날 증오하는 대상을 허수아비로 만들어 불로 태우는 것과 같다. 이런 행위를 함으로써 저주의 대상으로부터 느끼는 증오를 해소하고 더 나아가 그것을 물리칠 수 있다는 안도감을 갖게 된다. 비슷한 경우가 앗시리아 문헌에 발견된다. 앗시리아 사람들은 자신들이 마법에 걸려있다고 생각할 때 주술사를 찾아간다. 주술사는 의뢰인을 괴롭히는 마법을 무력화시키는 대안 주술(counter charms)을 행함으로써 그를 안심시킨다(Thompson, 150-151). 다음에 예시하는 주문(呪文)은 적대자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내용이다.
내가 당신께 부르짖나이다. 오 밤의 신(神)이시여,
당신께 내가 밤이 새도록 부르짖나이다, 베일에 가려진 신부(bride)여,
내가 부르짖나이다. 황혼 무렵에도, 한 밤중에도, 그리고 새벽에도,
마법사(sorceress)가 나를 마법에 걸리게 했기 때문입니다. . . .
마법사들은 내가 마시는 것을 적게 했고,
나의 즐거움은 슬픔으로 변하였고, 나의 환희는 애곡으로 변했나이다.
일어나소서, 오 위대한 신들이여, 내가 처한 처지를 살피소서.
판단을 내리소서, 그래서 나의 길을 제시하소서.
[주문] 이들이 나를 요술에 걸리게 한 장본인들입니다.
이들이 나를 마법에 걸리게 한 장본인들입니다.
. . . 나는 그들을 모릅니다.
악한 [마법], 주문들을(Series Maqlu, Tablet I)(150-151).
이와 비슷한 유형의 감응주술(sympathetic magic)이 후기 히브리 사람에게도 발견된다.
만일 어떤 사람이 멸망하기를 원한다면,
두 강둑에서 진흙으로 그 사람의 형상을 만드시오.
형상에 그 사람의 이름을 새긴 다음,
칠일나무(seven date-trees)에서 일곱 막대기를 취하여,
말총(horsehair)에다 맹세하시오.
편리한 곳에 저주할 대상의 형상을 세우고,
당신의 활을 내밀어 그 형상의 줄기를 쏘시오.
그 다음에 모든 사람과 함께 정해진 예문을 암송하시오.
[그 예문은 야크타드스(yqthds)로 시작하여 퍼스브시(prsvsy)로 끝나고,
저주 대상의 이름과 그 아버지 이름이 파멸될 것을 기원하는 내용이 추가됨](144).
메소포타미아의 주술문헌에 마법제거 주술에 대한 내용이 전해진다. 메소포타미아의 대표적 주술문헌으로 알려진 마클루(Maqlu)는 마법에 걸린 사람이 그 마법에서 해방되기 위한 주술과 치료법을 제시하고 있다. "마클루"의 의미는 아직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마클루에 담겨있는 연속적이며 통일적인 의식(ceremony)은 어떤 구체적인 시기에 충분히 활용 가능한 형태로 구조적으로 잘 짜여져 있다(Abusch, 252-252). 주술의식을 담고 있는 토판(tablet)은 "그러므로"(arkisu) 라고 하는 정형적인 서두(序頭)로 시작한다. 마귀를 쫓는 이 의식은 중요한 행사의 결론 부분에서 주술을 전담하는 제사장에 의해 정기적으로 암송된다(253-255).
그러므로 당신(제사장)은 주문을 암송하길,
"악한 마귀여, 당신의 초원(steppe)으로,"
외부의 입구로 통하는 모든 길,
[그리고 나서] 당신은 볶은 밀가루로 그 입구들을 둘러쌉니다
당신은 집으로 돌아와서,
그곳에서 "태우는(burning)" 의식을 행하고, 성수(聖水)를 뿌립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주문을 외웁니다:
"나는 모든 신들의 집회에 주문(呪文)을 던집니다"(IX 95-98).
그러므로 [당신은 밀가루 반죽으로 침대를 둘러싸고],
다음과 같이 주문을 외웁니다:
"금지(ban), 금지(ban)."
그 주문은 "간절한 것은 집이다"(IX 148-49).
그러므로 당신은 주문을 외우길,
"나는 나의 갬루스(gamlus)를 들어올린다."
그리고 나서 당신은 그 갬루스로 물을 뿌린다(IX 191-192).
비록 이러한 주술 행위가 개인적 상황에 의해 수행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대개의 경우 종교적 전통 안에 보존된다. 왜냐하면 주술행위의 결과가 주술사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믿고 있는 공동체의 신(神)들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가나안의 주술행위에서도 나타난다. 우가릿(Ugarit)의 뱀주문(serpent charm)은 대중적인 신들에게 뱀에 물린 사람을 치유해주기를 간청하는 것을 보여준다(RS 24. 244; 24. 251). 우가릿 시에 나타난 율동적인 병렬구조는 주술적 암송을 위해 기록된 것이다(Astour, 13).
(1)종마(種馬)의 어미, 암말, 샘물의 딸, 돌(石)의 딸,
하늘과 대양의 딸이,
(2)그녀의 어머니인 수액(Saps)을 부른다, 샤프쉬(태양의 여신), Q1-b1의 어머니:
(3)강들을 합류시키는 엘(El)과 함께;
두 대양과 함께 어울려 (함께 하는 것은),
(4)뱀에게 물린 것을 치료하기 위한 주문(呪文)이라네.
(5)비늘처럼 벗겨져 있는 뱀에게 물렸을 때를 위해,
마법사(conjurer)는 그로부터 뱀을 쳐부수고,
그로부터 (6)뱀의 독을 뽑아낼 것이다.
거기서 그는 뱀을 묶고 비늘처럼 벗겨져 있는 뱀을 먹이리라.
(7)(그는) 의자를 세우고 그 위에 앉으리라(RS 24. 244 1-6줄).
RS 24. 244는 뱀으로부터 물리는 것을 방지하는 주문(conjuration)인 반면, RS 24. 251은 독액(毒液)을 모으는 주제에 대한 주문이다. 이때 태양의 여신과 그녀를 보조하는 신들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후자는 뱀에게 행해지는 일종의 외과수술을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35-36).
(7'b)샤프쉬가 독액을 뽑아내도 약화되지 않는다,
(8)대지를 덮고 있는 어두운 구름이 퍼져있지 않다.
독액을 뽑아내라 . . .
(13)독액을 뽑아내라!
엘 (그리고) 호론(Horon)이 그 독액을 뽑아내었다.
(14)바알 그리고 용(Dragon)이 그 독액을 뽑아내었다.
아낫과 아쉬탈테가 (15) 그 독액을 뽑아내었다.
샤프쉬가 독액을 뽑아내도 약화되지 않는다.
대지를 덮고 있는 어두운 구름이 (20)퍼져있지 않다.
그들은 독사의 입으로부터 독액을 무력화시켰다,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독사의 입으로부터,
그들은 독을 제거했다(RS 24. 251. 7'b-20줄).
아스투어(Astour)에 의하면 우가릿에서는 주술에 종사하는 전문적인 직업인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우가릿 제사장의 개인 도서관에서 발견된 두 가지 형태의 뱀주문은 주술이 가끔 제사장에 의해 수행된 사실을 보여준다(36).
이러한 주술적 의식은 개인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공적인 차원에서도 나타난다. 예를 들면 바빌론 사람들은 전쟁에 참여하기 전에 모형 배를 만들어 바다 속에 가라앉힘으로써 적의 배를 섬멸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때 주술적 의식은 전쟁에 참여하는 왕에 의해 수행된다(Thompson, 151-151).
제의: 적군이 왕과 영토를 공격했을 때 . . .
왕은 적의 오른쪽으로 나아가 땅을 깨끗하게 청소한 다음,
순수한 물을 뿌려라.
그리고 (세 개의) 제단을 세워라; 하나는 이쉬타(Ishtar)를 위해,
하나는 샤마쉬(Shamash)를 위해, 또 하나는 네르갈(Nergal)을 위해.
그리고 각각의 제단에 밀로 만든 빵을, . . .
그리고 나서 짐승 기름으로 적의 형상을 만들고,
밧줄로 그 형상의 얼굴을 뒤로 구부린다;
왕의 옷(?)은 . . .
준비 전에 서서 샤마쉬 앞에 이 주문을 반복하라.
(Zimmern, Ritualtafeln, 173).
그 밖에도 두통을 앓고 있는 사람을 치유하기 위한 주문도 발견된다. 두통을 제거하기 위해 제사장은 다음의 주문을 암송한다.
처녀 아이의 머리카락을 취하여,
현명한 여인으로 하여금 그 머리카락을 오른쪽에 늘어놓게 하여라.
그리고 왼쪽에 그와 같이 두 번 반복하여라.
일곱 매듭을 두 번 묶고,
에리두(Eridu)의 주문을 행하라.
그것으로 병자의 머리를 묶고,
그것으로 병자의 목을 묶고, . . .
그의 의자 둘레에 서서.
그에게 주문의 물을 부어라.
두통이 하늘로 올라가도록.
평화로운 농가의 연기처럼, . . .
두통은 대지로 내려갈 것이다.
(Devils, ii, Tablet IX, 1. 74).
III. 이스라엘의 주술
이스라엘 사람들은 고대 이집트나 바빌론의 종교에서 주술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종교는 주술을 공식적으로 부인하는 입장을 견지했다. 예언자들은 주술행위가 야훼종교를 위협하는 사술(邪術)임을 들어 주술을 금하였다(참조. 사 47:9-15; 렘 27:9; 겔 13:17-19 등). 따라서 이스라엘의 주술활동은 공식적인 종교활동 안에서 이루지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적인 삶에서 주술적 행위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성서는 증언하고 있다. 창세기 30:14-16은 주술적 도구로 합환채가 사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맥추 때에 르우벤이 나가서 들에서 합환채를 얻어 어미 레아에게 드렸더니 라헬이 레아에게 이르되 형의 아들의 합환채를 청구하노라. 레아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내 남편을 빼앗은 것이 작은 일이냐 그런데 네가 내 아들의 합환채도 빼앗고자 하느냐 라헬이 가로되 그러면 형의 아들의 합환채 대신에 오늘밤에 내 남편이 형과 동침하리라 하니라. 저물 때에 야곱이 들에서 돌아오매 레아가 나와서 그를 영접하며 이르되 내게로 들어오라 내가 내 아들의 합환채로 당신을 샀노라 그 밤에 야곱이 그와 동침하였더라.
합환채(mandrakes)를 두고 레아와 라헬이 뜨겁게 경쟁하고 있다. 르우벤이 어머니 레아를 위해 가져온 합환채를 라헬이 탐이 나서 레아에게 그 합환채를 요구한다. 그 대신 야곱이 레아와 동침하는 것을 관여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합환채가 무엇이기에 라헬이 야곱 대신에 그것을 원했을까? 자식을 간절하게 원했던 라헬은 합환채가 효험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얻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 것이 엿보인다. 합환채는 그 뿌리가 사람의 하체와 비슷하다 해서 다산(多産)에 도움이 된다고 믿어졌던 식물이었다(Westermann, 475). 합환채는 고대 사회에서 치료효과가 있는 식물로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그것이 임신에 도움이 되는 과학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민간전승에 의해 합환채가 성욕을 부추기는(aphrodisiac) 힘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졌다(Sarna, 209). 가나안 신화인 '바알과 아낫 이야기' 역시 합환채에 대한 주술적 믿음을 보여준다. 바알의 사신들이 바알의 아내인 아낫에게 합환채를 심어 사랑을 소유할 것을 전한다: "이 땅에서 전쟁을 거두고, 합환채를 땅에 심으시오. 땅의 가슴속에 평화를 쏟으며, 들판의 가슴속에 사랑을 비처럼 내리소서(장일선, 1981: 392-393). 이러한 이야기들은 임신을 원하는 민중들이 주술적 도구로 합환채를 활용하였음을 보여준다.
야곱이 라반의 집에서 일한 품삯을 획득하기 위해 양떼에게 행한 주술적 행위가 창세기 30:37-39에 또한 소개된다. 양떼가 물을 먹을 때 껍질 벗긴 가지에 무늬를 새겨 양떼에게 향하게 함으로써 그것을 보고 물을 먹은 양떼로 하여금 점이 있는 새끼를 배게 한다. 점이 있는 양들이 라반과의 약속에 의해 야곱의 소유가 된 이야기는 야곱의 주술적 행위로 이해될 수 있다. 나뭇가지에 있는 무늬를 보고 물을 먹은 양들이 모두 점이 있는 새끼를 낳았다는 것은 민간전승에서 전해진 주술행위를 반영한다(박종수, 63). 베스터만은 이러한 야곱의 행위는 주술적 사고방식에서 과학적 사고방식으로 전환되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여긴다. 양에게 가시적인 영향(visual impression)을 줌으로써 점있는 새끼를 낳도록 유도하는 것은 일종의 과학적 사고에 근거한다는 것이다(Westermann, 483).
제사장에 의해 주술적인 치료행위도 행해졌다. 문둥병에 걸린 사람이 완쾌되었다는 것을 입증 받기 위해서는 일정한 의식이 필요하다. 정결하게 구별된 새 두 마리를 가져다가 그 중 한 마리를 잡아서 생수가 담긴 오지 그릇에 담는다. 제사장은 죽은 새의 피를 살아 있는 새에 뿌려 들판에 날려보낸다(레 14:1-7). 이러한 절차는 주술적 행위가 동반된 종교의식을 반영한다. 이스라엘 제사장의 주술적 행위가 주는 의미는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제사장은 주술적 행위를 통해 환자를 치료했던 흔적을 보여준다(박종수, 109).
제사장에 의한 재판행위는 주술적 행위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준다. 남편의 의처증으로 고발당한 여인은 판결을 받기 위해 일정량의 보릿가루를 지참하고 제사장에게 가야 한다. 제사장은 토기(土器)에 성수(聖水)를 담아 성막 바닥에 있는 흙을 집어넣는다. 여인을 야훼의 제단 앞에 세우고 머리를 풀게 한 다음 두 손에 가지고 온 보릿가루를 들게 한다. 제사장이 독기가 있는 쓴 물을 가져다가 여인에게 먹인다. 만일 그 여인이 다른 남자와 동침했다면 여인의 넓적 다리가 네 배로 부풀어오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독물의 해를 면한다는 것이다(민 5:11-22). 의심받은 여인을 판결하기 위해 사용한 독물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일련의 재판과정은 합리적이라기보다는 주술적 의식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120). 여기서 발견된 것은 주술이 제도권 안에 있는 종교적 의식과 어우러져서 민중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점이다. 또한 주술은 제사장과 같은 공적인 신분을 지닌 사람에 의해 국가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일종의 사회 제도와도 같다. 공동체 일원 모두가 인정하고 받아들인 주술적 행위만이 사회적 제도로 인정받는다. 따라서 개인적인 차원이거나 사회적인 차원을 막론하고 대중에 의해 수용된 주술행위는 사회적 동의(social agreement)에 의해 창출되며 전승된다(Wilson, 61) 이 점에서 볼 때 주술 역시 공공의 성격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 역시 주술적 방식으로 병자를 치료하신 것을 보여준다. 예수께서 소경의 눈을 띄게 하기 위해 소경의 눈에 침을 뱉고 그에게 안수한 이야기가 전해진다(막 8:23). 요한복음 9장 6절은 예수께서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소경의 눈에 바르고 실로암 물에 가서 씻으라고 명한다. 이 두 사건 모두 예수의 치유행적에 주술적인 의식이 동반되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모세가 만든 놋뱀 이야기처럼 주술이 신의 직접적인 계시에 의해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행위자를 통해 간접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러한 주술적 행위는 아직도 미분화된 사회체제에서 더욱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우리의 민간 전승에도 이와 유사한 주술적인 범인 색출방식이 전해진다. 범인을 가려내기 위해 혐의자들을 화로 주변에 앉히고 계란을 화롯불에 넣어 두면, 그 계란이 파열하여 튀는 쪽에 범인이 있다는 것이다(이규태, 133). 이처럼 주술은 적어도 공동체 혹은 작은 규모의 집단에 의해 합법적이거나 필요한 행위라는 공동의 인식을 필요로 한다. 거기에는 주술의 효과를 믿는 일종의 신앙이 전제되어야 하며, 공동의 합의가 이루어질 때 그 결과는 받아들여진다.
몇몇 성서 구절들 역시 고대 가나안의 뱀주문과 유사한 주술행위가 이스라엘에서도 널리 퍼져 있음을 보여준다(렘 8:17; 시 58:5-6; 전 10:11). 이러한 증거는 주술사가 암송한 주문에 의해 뱀에게 물리는 것을 예방할 수 있으며, 뱀의 독을 제거하는 치료요법으로 주문이 활용되었음을 보여준다(16). 더욱 재미있는 것은 민수기 21:6-9에 나타난다. 뱀에게 물린 이스라엘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직접 치료하지 않고 모세에게 놋뱀을 만들게 하여 그것을 장대에 세우게 한다. 뱀에 물린 사람이 장대에 달린 놋뱀을 보고 낳았다는 이야기는 이스라엘 종교에 주술적 행위가 자연스럽게 습합된 사실을 보여준다. 동시에 모세에 의해 놋뱀이 만들어진 사실은 주술의 결과는 신(神)에 의해 좌우되지만, 주술의 수행자는 인간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결국 주술은 인간의 행위에 의해 신의 초월적 의지가 삶 속에서 구체화되는 과정을 보여준다(Levin and Tarragon, 518). 모세의 놋뱀 전설은 후대에까지 전해져서 놋쇠로 만든 불뱀이 신격화되어 숭배되기도 했다. 유다의 히스기야 왕은 이런 폐습을 없애고 종교개혁을 시도하고자 했다(왕하 18:4; 박종수, 127).
<동국세시기>는 5월 단오에 행해지는 한국인의 주술습속을 소개하고 있다. 단옷날에 대궐 안에서는 붉은 부적을 문설주에 붙여 불길한 재액을 미리 막게 하였다. 경사대부 집에서도 단오 부적을 붙인다. 그 부적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5월 5일 천중절(天中節)에 위로는 하늘의 복을 받고,
아래로는 땅의 복을 얻어 치우(蚩尤)의 신(神)의
구리 머리, 쇠 이마, 붉은 입, 붉은 혀에
404병(病)이 일시에 없어져라. 빨리 빨리 법대로 시행하라(최대림, 90-91).
이처럼 재앙이나 질병을 예방하기 위해 행해지는 주술행위는 세계 도처에서 발견된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에게도 주술행위가 발견된다. 고전 예언자(Classical Prophets)로 분류되는 엘리사는 여리고의 물이 좋지 않다는 말을 듣고 주술적 방식으로 물을 깨끗하게 한다(왕하 2:19-22). 물의 근원을 찾아 소금을 그 위에 뿌리자 물이 맑아졌다고 하는 이야기는 예언자들 역시 주술적 방식의 민간요법에 익숙해져 있었음을 보여준다(255). 그러한 주술적 행위는 제사장이나 예언자와 같은 종교지도자에 의해 수행될 때 그 결과는 권위를 지닌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행해진 주술이라고 할지라도 공동체에서 인정하는 전문가에 의해 행해질 때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는다.
IV. 결어
고대 근동에서 발견된 주술에 관한 문헌들은 주술이 종교의식과 습합되어 민중의 삶 속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었던 사실을 보여준다. 주술적 행위는 초월적인 힘으로 하여금 어떤 결과를 초래하도록 함으로써 인간의 목적을 성취하게 한다. 이것은 원인과 결과 사이의 상호관계에서 출발하지만 객관적인 검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과학과 구별된다. 주술적 사고는 인간이 위험에 처하거나 위기감을 느낄 때 신적인 존재 혹은 초월적 힘에 의지함으로써 자신의 안전을 지키려는 일종의 본능적 행위이다. 이 점에서 볼 때 주술은 자연적인 세계와 초월적인 세계를 연결해주는 수단이다. 고대인들은 이러한 주술적 행위를 통해 일상생활에서 발생하는 각종 위험을 예방하거나 피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주술은 제도화된 종교는 아니다. 일상적인 삶 속에서 때로는 비종교적 차원에서 때로는 종교적 차원에서 주술은 수행된다. 주술은 종교현상이면서도 동시에 민중의 삶의 양태이기도 하다. 초월적 존재와 초자연적인 힘이 어떤 형태로든 인간의 행위와 관련이 있다는 점에 기초하는 주술은 엄밀한 의미에서 본다면 종교행위임에 분명하다. 주술에 의해 신변의 안전을 도모할 수 있다는 믿음은 기존의 종교와 쉽게 동화하여 자연스럽게 종교의식으로 변모한다. 따라서 주술에 있어서 신관은 가변적이다. 이스라엘과 같은 유일신을 신봉하는 종교에서는 주술적 효과도 공동체가 섬기는 야훼에 의해 발생된다 모세가 만든 놋뱀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치료의 효과는 야훼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는 믿음이 바로 그것이다. 동시에 주술은 다신론적인 종교상황에서는 민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여러 신에 의해서 주술의 효과가 발생한다는 전제 아래 수행된다. 고대 바빌론이나 이집트의 주술행위는 대체로 다신론적인 사고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때로는 주술적 행위가 특정한 신 혹은 초월적 존재를 의식하지 않고 이루어지는 경우도 많다. 라헬이 임신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합환채를 구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보다는 일종의 민간신앙에 의존한 것으로써 특별한 신관(神觀)이 전제되어 있지 않다고 보아야 한다. 비록 주술적 행위 자체가 초월적 존재의 힘에 의존하는 믿음에서 출발하지만, 그 초월적 힘이 어떤 한정된 신개념은 아니다. 이것은 주술에 있어서 신관은 보다 포괄적이며 어떤 의미에서 초월적 존재의 총체적(집합적) 개념일수도 있다.
고대 근동에서는 주술을 제도화된 종교형태로 간주하지 않았지만, 주술은 종교적 이념 가운데 하나로 발전하였다. 마우스(M. Mauss)에 의하면, 주술적 의식은 조직화된 제의에서 행해지지 않은 모든 형태의 의식(rite)을 포함한다. 주술은 대체로 사적(私的)이며, 비밀스럽고 신비스러운 방식으로 수행된다. 주술은 가끔 금지된 의식의 한계에 도전하기도 한다. 따라서 의식(rite)의 구조면에서 주술을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오히려 주술은 주술적 의식이 발생한 상황과 사회적 관습의 총체적 이해에서 정의될 수 있다(Mauss, 24). 따라서 주술은 어떤 특별한 사회계층에 의해 소유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회 구성원들의 일상생활에서 공동으로 수행되는 공동체적 성격이 강하다. 주술이 때로는 공동체적 성격보다는 개인적 성격이 강할 때도 있지만, 민중들의 삶 속에 자리잡고 오랜 세월동안 전승되어 왔다는 사실은 주술이 사회적 동의에 의해 공동으로 인식된 종교행위임을 보여준다. 고대 근동 사회에서 주술은 대체로 종교 지도자 혹은 주술 전문가에 의해 수행되었지만, 성서의 경우를 살펴보면 민중들의 삶 속에서 보편적으로 행해졌던 종교행위였다.
기존의 종교체제 안에서 쉽게 동화하여 전승된 주술은 공동체에 의해 보존되면서 주술전통을 형성해 왔다. 동시에 주술은 새로운 환경에 따라 새로운 모습으로 끊임없는 변신을 추구함으로써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것이 바로 주술의 힘이다. 주술은 종교의식을 동반함으로써 공동체의 일체감을 조성하고 사회통합의 기능을 수행한다(Kuemmerlin-McLean, 1992: 471). 교회예배에서 행해지는 세례식과 성찬식은 주술의 종교적 기능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전된 면을 보여준다. 기독교인들은 세례를 통해 새로운 자아로 거듭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동시에 성찬식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함께 나눔으로서 그리스도와의 합일을 이루고 신앙인과의 연합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주술적 기능이 강하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이와 같은 거룩한 의식들이 타락한 주술행위로 보여질 것을 염려하여 지극히 제한적이며 특별한 경우에 한하여 예배의식을 거행하게 되었다(Aune, 218-219). 그러나 주술의 순기능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곤경에 빠뜨리는 흑주술은 공동체의 안전을 위협하기도 한다. 어떤 종교행위라도 개인의 이기심에서 출발한다면 그 결과는 역시 이기적이요 주변적일 수밖에 없다. 주술은 자신의 신변을 보호하고자 하는 인간의 원초적 바램에서 출발한다. 이것이 건전한 방향으로 발전한 것이 소위 백주술이다. 그러나 반사회적이고 비윤리적인 마법행위(흑주술)는 공동체의 질서를 깨트리는 원인이 된다. 따라서 우리는 주술행위 자체를 비난할 것이 아니라, 주술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토대로 주술적 행위가 바람직한 종교활동으로 승화될 수 있도록 지혜를 모아야 한다. 주술행위는 그것 자체로는 현대인에게 별 의미가 없다. 현대인이 요구하는 주술행위는 인간의 원초적 바램에 기초하기보다는 바람직한 역사의식과 공동체 의식을 바탕으로 새롭게 거듭나는 것이다. 그것은 주술을 비롯한 어떤 종교행위도 비윤리적이고 반역사적이라면 그것은 단연코 거부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출처: 고대근동의 역사와 종교. 대한기독교서회. pp. 175-1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