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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기도로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일 수가 있다
기도는 긴 팔을 갖고 있다. 기도는 하늘까지 직접 닿을 수가 있다. 성경은 이 진리를 아름다운 상징, 즉 기도할 때 손을 드는 모습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애3:41).
기도할 때 손을 든 구약의 첫 번째 실례는 이스라엘과 아말렉의 전쟁 기사 가운데서 볼 수 있다.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자신이 손을 들고 간청하는 동안 백성들을 끌고 전투에 임하라고 명령하였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로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하나는 이편에서 하나는 저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파하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출17:11-14). 이 대승의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며, 이것을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라고 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에 대한 모세의 대답이 16절에 나타나 있다. “여호와의 보좌를 향해 손이 들렸으니”(한글판 개역 성경에는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이라고 되어 있고 난 외 주에는 “여호와의 보좌를 치려고 손이 들렸으니”라고 되어 있음-역자 주).
가시적으로는 우리의 손은 위로 들려져 있으나 영적으로는 여호와의 보좌를 건드리고 있다. 우리는 자칫 잘못하면 우리의 머리 이상을 넘어가지 못하는 기도, 우리의 방을 벗어나지 못하는 기도를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성령의 힘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우리의 기도는 하늘에까지 상달될 수가 있다.
그런데 모세가 바로 이 진리를 간파할 것이다. 자신의 손이 바로 여호와의 보좌를 건드렸다고 믿은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기도의 원칙들을 따르기만 한다면 우리들의 기도도 하나님의 보좌를 건드릴 수가 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2:8에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고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문자 그대로 우리의 손을 들어야만 하는 것을 의미하는가? 물론 그것은 분명코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주께 올려 드리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계신다. “주여, 내 영혼이 주를 우러러 보나이다”(시 25:1, 86:4, 143:8). 우리가 손을 문자 그대로 들어 올리든지 그렇지 않든지간에, 우리의 영안과 영혼을 하나님께 들어 올리는 것이 기도의 참된 정신이요 본질인 것이다. 진정으로 중보 기도를 드릴 때나 격렬한 영적 전투를 벌일 때는 은밀한 기도 처소에서든 공중 앞에서이든간에(거의 공중 앞이라는 의식을 하지 못하겠지만)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의 육신의 손을 들 수도 있다. “내가 주의 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시28:2).
우리는 기도를 통해 다른 이들에게 나아갈 수가 있다.
우리의 기도는 하늘에 닿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세계 어느 곳에라도 접근할 수가 있다. 우리는 중보 기도를 하는 순간 우리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수천만리 밖에 떨어져 있다 하더라도 그들에게 나아갈 수가 있다. 이것은 단순한 겉치장이 아니다. 이것은 영적인 실재이다.
나는 수년 전 인도에서 내 아들을 위해 계속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두 주간 동안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아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던 나는 열심히 기도했고, 어느 주일 오후에 그 절정에 이르렀다. 나는 그때 집에 혼자 있었고 아들을 위해 기도 가운데 깊숙이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한동안 시간 가는 줄도 몰랐고 내가 어디 있는지조차도 알지 못하였다. 내가 계속해서 기도를 하고 있을 때에 갑자기 나는 내 아들 죤의 어깨에 손을 얹고 죤 옆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나는 얼마나 오랫동안 기도했는지 또 어떤 기도를 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나의 기도의 팔이 바다와 육지를 넘어 수천 마일을 지나서 죤의 어깨에까지 분명히 닿았던 사실만큼은 알고 있다. 그것은 마치 내가 그의 옆에 앉아 있었던 것처럼 실제적인 것이었다. 그때 확신이 생겼고 일어나서 나중에 주일 저녁 메시지로 전했다.
선교 일로 바빴기 때문에 나는 그 다음날 점심 식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죤에게 편지를 쓸 수 있었다. 나는 내 사무실로 가서 타자기 앞에 앉아 타자를 치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죤아! 나는 이것이 너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지 못하나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것만큼은 확신한다. 나는 여러 날동안 너를 위해 특별히 기도를 드렸다. 그러던 중 어제 오후에 침실에서 무릎을 꿇고 있을 때에 나는 갑자기 내 손을 네 어깨 위에 얹고 네 옆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내가 막 두 번째 단락을 타자치려고 할 때 문에서 초인종 소리가 났다. 문으로 나가 보니 우체국 직원이 와 있는 것이었다. 그는 내게 전보를 건네 주었다.
나는 안으로 들어와서 문을 닫고 전보를 뜯어 보았다. 그런데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하나님은 나의 대장이심. 조용하나 분명한 결정을 내렸음. 유산과 사랑과 기도에 대해 감사를 드림. 죤.” 내가 이것을 읽고 무릎을 꿇었을 때 눈물이 내 뺨을 타고 흘렀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한 손으로는 하늘의 보좌를, 다른 한 손으로는 아들의 어깨를 만질 수 있도록 허락하셨던 것이다. 며칠이 지나 죤의 편지가 도착했다. 내가 인도의 앨라하뱃(Allahbad)에서 기도하고 있던바로 그 순간, 죤은 미국에서 홀로 어두운 가운데 무릎을 꿇고 여호와께 그의 마음을 드리고 있었다고 것이다.
우리는 다른 이들의 기도에 의해 접촉되어질 수 있다
1962년 6월에 나는 동양 선교 협회 이사회의(OMS BOARD of Directors)중요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로스앤젤레스로 가던 때의 일을 지금도 기억한다. 히말라야 산맥의 6천 피트 고지에 있는 란두르(Landour)에서 마지막 날을 보내는 동안 나는 몸이 불현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목은 뜨끔뜨끔 쑤시고 전신이 아팠으녀 온몸이 펄펄 꿇었다. 나는 사무실에서 책상 위의 편지들을 정리하는 동안 식구들이 내가 아픈 것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해 달라고 기도했다. 왜냐하면 내가 아픈 것을 식구들이 알면, 그날 저녁에 델리를 거쳐 미국으로 j여행하지 못하도록 가로막을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와 함께 산 중턱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오면서도 내가 아픈 것을 눈치채지 못하였다.
버스가 떠나자 나는 식구들에게 손을 흔들어 작별 인사를 고했다. 그러나 버스가 모퉁이를 돌자마자 나는 앞의 의자 뒤에 이마를 댔다. 그리고는 너무 아파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온몸에서 열이 났기 때문에 데라 둔(Dehra Dun)에 이르는 울퉁불퉁한 18마일의 곡선 도로를 여행하는 것은 매우 힘들었다. 나는 데라 둔에서 델리행 기차를 탔다.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그날 밤 기차에 휴즈가 나가 버렸고 따라서 선풍기와 전등불은 작동하지 않았다. 내가 두통과 구역질로 고통스러워하는 동안 열은 계속 올라갔다. 그때 나는 오직 그리스도인 한 사람을 만나 기도 부탁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기차가 어둠 속에서 속도를 내고 있을 때 나는 갑자기 차가운 손이 젖은 수건으로 나의 이마를 닦아 주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순간 나의 열과 두통과 구역질과 목의 통증이 사라져 버렸고 나는 완전히 병이 나았다. 그 즉시 나는 “누가 나를 위해 기도했을까?”하고 생각했다.
홍콩과 도꼬에서 중국인과 일본인 동역자들과의 기도 모임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두 도시를 들렀다. 그때 나는 메시지를 전하기 전에 최근에 겪었던 나의 체험을 이야기 하였다. “오늘 제가 여기 오게 된 것은 누군가가 저를 위해 기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가 누군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그 사람의 손길을 느꼈습니다”.
동양 선교 협회의 회의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수일 동안 계속되었다. 그런데 어느날 우편물이 내게 배달되었는데 그 중에 한 서신이 들어 있었다. 나는 그 편지를 개봉하여 읽어 보았다. 그 편지에는 그 편지를 보낸 사람이 내가 란두르를 떠난 바로 그날 오후 9시 15분에 나를 위해 기도해야겠다는 강한 부담감을 느꼈다고 적혀 있었다. 그렇다 그때가 바로 그날 그 시간이었다. 내가 느낀 것이 그 기도자의 실제적인 손길이었는지, 그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보내진 천사의 손길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기도가 수만 마일을 넘어 어느 더운 6월의 밤 속을 달리는 기차 안의 한 환자를 치료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우리 모두 그러한 기도의 접촉을 더욱 자주 체험하도록 하자. 성령님의 조용하고도 세밀한 음성을 들을 줄 아는 귀를 개발한 사람은 너무나 적은 것같다. 우리는 주님의 인도를 민감하게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자주 우리 마음을 닫고 있다. 그러나 기도가 긴 팔을 갖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변함이 없다. 기도는 하늘에도 닿을 수 있으며 그 어느 때라도 이 세상 그 어느 곳까지도 나아갈 수가 있다. 정말로 놀라운 의미에서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축복의 매개자가 되게 한다.
하나님의 중보의 삼위일체성
예수님은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도록 허락하시는 축복의 중재 역할은 그 어떤 것이라 하더라도 갈보리에서의 그리스도의 중재와 오늘날 하늘 보좌 위에서의 그리스도의 중재에 기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다. 디모데전서 2:5에서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쓴 바로 그 바울이 3절 뒤에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고 쓰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정해 놓으신 중보의 삼위일체성에 우리가 동참하기를 원하신다. 성자 하나님은 살아서 항상 우리를 위해 중보하신다(히7:25). 그는 지금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 기도를 드리고 계신다(롬8:34). 성령 하나님께서도 이루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신다(롬8:26). 비록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이 계속적으로 중보 기도를 드리신다 하더라도, 우리가 중보 기도로 그에 동참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중보의 삼위일체성은 불완전하게 되고 만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 보좌에서 성부 하나님과 얼굴을 맞대고 기도를 드리신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나약하고 유한하기 짝이 없는 존재인 우리에게 하늘과 하나님의 보좌를 기도로 건드릴 수 있는 믿기 어렵도록 놀라운 특권이 주어져 있다! 우리의 중보 기도가 있어야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도팀이 완전해지는 것이다. 거룩한 의미에 있어서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중재하는 일을 그리스도와 공동으로 감당하고 있다. 거룩한 의미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통해 세계를 축복하신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한손으로는 하나님의 보좌를, 다른 한 손으로는 궁핍에 처해 있는 세계를 접촉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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