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강 경배의 가치
계4:11
“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우리가 예배로 나올 때 이런 가치관을 따라서 예배하는 것입니다. 매주 이런 내용을 나누지는 않지만 이런 가치관을 알고 이 가치를 따라서 예배해야 합니다. 찬양을 인도할 때도 이런 가치관을 배후에 깔고 합니다. 그럼 가치관들은 무엇입니까?
1.찬양과 경배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모든 찬양과 경배를 받기에 홀로 합당하신 분입니다. 본문도 그렇고.
계5장 12절입니다.
“12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우리의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찬양과 경배가 우리의 예배가 오직 하나님이 영광을 위한 것이라는 것에 대해 반박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문제는 이론적으로는 말하는데 실제로는 안그러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드려지기 위해서는 다음에 살펴볼 것과 같이 가야 합니다.
1)찬양과 경배는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으로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13장 15절입니다.
“15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여기보면 하나님께 예배중에 하나가 찬송의 제사라고 합니다. 찬송이 예배의 핵심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찬송의 제사를 사람에게 목사에게 장로에게 아닙니다. 찬양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고 합니다. 그리고 그 제사를 항상 드리자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로 말미암아 드릴 수 있다고 합니다. 예수의 십자가의 공로를 통해서 드릴 수 있습니다. 찬양과 경배는 그 자체로 최상의 예배이고 그 예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찬양과 경배를 드릴 때 우리 마음에 기쁨이 넘치고 감격이 넘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그분만을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찬양과 경배를 소위 사람에게 은혜를 끼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면 절대로 올바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찬양과 경배는 설교를 위해 준비시키는 도구로 사용하면 그것은 올바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드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알티킨들 목사님입니다. 히브리서 3장 15절에 대해서 말하면서 찬양의 제사라는 단어는 희생을 의미한다 즉 자기 부인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자기 자신을 내려지는 것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잊어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하러 모일 때 우리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한 것인지 하나님만을 기쁘게 하기 위한 것인지를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찬양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노력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사람들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것은 예배가 아니라 엔터테이먼트 즉 오락입니다. 가수들이 와서 우리 앞에서 노래 부르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이렇게 찬양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려는 자세는 오락의 영입니다. 오늘날 교회 예배에 오락의 영이 너무나 가득합니다. 그런 오락의 영이가득하기 때문에 리더들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려고 실력자를 돈을 주고 사오기도 하고 음악적인 실력이나 경력을 자랑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습니다.
우리가 선물을 하나 사더라도 상대방이 무엇을 기뻐할 것인지를 고민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는지 고민하지 않는다면 선물하는 것보다도 못하는 것입니다.
2)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인도자가 먼저 경배해야 합니다.
찬양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이기 때문에 인도자가 먼저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의 모델은 하늘나라의 예배입니다. 그런데 스랍들이 오늘날로 말하면 찬양 인도자들입니다. 그런데 스랍들이 어떻게 예배하던가요? 자신들은 예배하지 않고 인도만 하던 가요. 하나님께는 관심도 없고 청중들에게만 관심을 가지고 있던가요? 자 여러분 우리 박수 치면서 신나게 한번 해봅시다 그러던가요? 그렇게 드렸다면 그들은 예배한 것이 아닙니다. 스랍들이 먼저 보좌에 앉으신 신실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영광 앞에 감격하여 모든 초점을 그분에게 맞추고 중심에서 찬양하며 높입니다. 그들이 날개로 자기들의 몸을 버렸다는 말은 우리가 십자가의 공로를 믿음으로 의지하여 서는 것과 똑같습니다. 천사들은 죄를 지은 적이 없습니다. 죄를 짓고 용서받은 것은 인간들에게만 주신 은혜입니다. 천사들은 스랍들은 자기들이 죄를 지은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의 공로로는 주 앞에 도저히 설 수 있는 자임을 알고 날개를 가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똑같은 자세로 우리의 부족함을 보고 우리 의로는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기 때문에 십자가의 공로만 의지함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스랍들은 자기들의 부족함을 날개로 가리고 영광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찬사와 경배와 찬양을 드립니다.
이들이 그렇게 드리면 이들의 예배에 맞추어 24장로들이 천천만만의 천사들이 오직 하나님께만 초점을 맞추고 그분께 찬사와 경배를 드립니다. 이것이 하늘의 예배입니다. 그들은 초점이 사람들을 즐겁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이 원하는대로 사람들을 조정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저기 찬양사역하러 다닙니다. 찬양 인도하러 다닙니다. 찬양인도자가 먼저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으면 회중들이 하나님을 예배에로 나갈 수 없습니다. 찬양인도자가 예배의 초점을 사람에게 맞추고 있는데 회중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그분만을 경배하는 자리로 나갈 수 있겠어요. 우리의 초점이 사람에게 맞추어지면 그것은 찬양이 아니고 오락이며 연주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공연입니다. 이것은 타락한 것입니다.
하나님도 지금도 세계적으로 귀하게 사용하시는 엔디팍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강의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데 어떨 때 수천명의 사람들과 같이 찬양을 할 때 자기가 자기도 모르는 중에 연주를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답니다. 그러면 자기는 루시퍼가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되면 곧바로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하나님께 다시 집중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찬양과 경배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예배가 되려면 인도자가 먼저 경배해야 합니다. 찬양과 경배는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저는 이런 공적인 예배에서 어느 누구도 초점이 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만 초점이 되게 하는데 주의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모든 초점을 하나님께만 맞추기 원합니다.
3)하나님만이 우리의 예배를 합당하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을 다해서 찬양합니다.
이 부분은 앞에서 살펴보았습니다. 마음을 다한다는 말은 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중심에서 내 마음을 모아서 싫어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는 예만 한 가지 들겠습니다.
피자집 이야기입니다. 아는 목사님이 집회를 맞추어 시간이 늦었는데 생일파티를 하는데 직원들이 빙 둘러서 생일축하 노래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직원들이 오늘 하루도 수백번 노래를 불렀어요. 지금 퇴근할 시간입니다. 그런데 생일축하 노래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는데 성령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내 백성이 나를 예배하는 것이 저 모습과 같다고 하더럽니다. 피자집에서 그 시간에 직원들이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는 모습처럼. 그러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려면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새 노래로 찬양하는 것입니다.
시96:1절입니다.
“1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
시33:3 40:3 96:1 98:1 144:9 149:1 사42:10 계5:9 계 14:3절 등에 보면 동일하게 새노래로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말이 나옵니다. 물론 새 노래하는 말은 다른 의미가 있을 수 있으나 근본적으로 새 노래는 새로운 노래를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새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할 때 새 노래로 찬양하는 것입니다. 출15장을 보면 홍해 사건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찬양합니다. 그 당시 그 노래는 새로운 노래였습니다. 다윗의 시편들은 하나 하나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였습니다. 출15장의 노래가 당시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당연히 찬양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시편들은 당시에 하나님이 새롭게 주신 찬양들이었습니다. 새 노래였습니다.
우리는 아이젝 왓슨을 잘 압니다. 주 달려 죽은 십자가 등 많은 주옥같은 찬양들을 주셨습니다. 아이젝 왓슨 시대에 하나님이 주신 시편과 찬양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시편들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통해서 새로운 찬양들을 주셨습니다.
챨스 웨슬리 시대에도 시편들이 잇었고 아이젝 왓슨의 노래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만족했다면 찰스 웨슬리를 통해서 새로운 노래들이 주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 노래로 찬양하라고 하십니다. 과거에 주어진 귀한 찬양들이 소중합니다. 당연히 우리들은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경배하지만 우리가 거기에만 머물러 있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은 많이 제한될 것입니다. 어느 전통에 집착하는 것을 성경이 말하지 않습니다. 새 노래를 가지고 하나님을 경배해야 되는데 성경 여러 구절에서 말합니다. 새 노래를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해야할 주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음을 다하기 위해서입니다.
‘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라는 찬양을 아시지요. 처음 이 찬양을 알게 되었을 때 포도나무 교회에 오신 분들은 알겠지만 문자 그대로 몇 백번 불렀습니다. 기회만 되면. 그런데 이 찬양이 좋은 찬양이고 그렇게 귀하지만 우리가 부를 때마다 하나님의 사랑이 샘솟았을지 몰라도 몇 백번 부르고 나니까 그 다음부터는 또 다른 찬양이 필요했어요. 그래야 우리의 마음을 담아서 드릴 수 있어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 예배는 습관적이고 형식적이 될 수 있어요. 우리의 예배가 정체되지 않기 위해서 새로운 찬양을 늘 배우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니까 예배하기를 선택해야 합니다. 지난 주일에 살펴보았지요. 저절로 찬양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기로 의지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합니다. 선택해야 합니다.
시66:1-2절입니다.
“1 온 땅이여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발할지어다 2 그 이름의 영광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찬송할지어다”
82:1절입니다.
“1 하나님이 하나님의 회 가운데 서시며 재판장들 중에서 판단하시되”
99:4절입니다.
“4 왕의 능력은 공의를 사랑하는 것이라 주께서 공평을 견고히 세우시고 야곱 중에서 공과 의를 행하시나이다”
위 구절들은 공통적으로 너희가 소리를 내어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말합니다. 어떤 분들은 찬양만 시작하면 눈 감고 묵상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리고 속으로만 우물우물하는데 아닙니다. 성경은 소리를 내어 경배하라고 합니다. 예배를 드리기로 적극적으로 선택할 뿐만아니라 소리를 내어 경배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매번 소리를 내어 찬양하지 않고 묵상만 하고 있다면 하나님께 대한 합당한 예배를 드리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 자세로는 절대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되지 못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살펴보아야할 것은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방해하는 것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합니다. 루시퍼는 하나님께 돌아가야할 영광을 가로챘습니다. 오늘도 사단은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께 합당하게 드려지는 것을 제일로 싫어합니다. 방해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예배를 사단이 방해할 때 우리는 방해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하나님께 합당하게 드리기로 선택해야 합니다. 제 경우 어떨 때 복잡한 생각들이 떠올라서 방해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어떨 때는 분위기가 산만해서 안될 때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 지금 하나님께 드려져야할 예배가 방해받고 있다는 것이 인식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집중하고 제 의지를 다해서 그분께 집중합니다. 그렇게 방해를 물리치고 결단과 의지를 가지고 예배를 시작할 때 예배가 되어집니다.
2.모든 회중이 다 참여합니다.
이 부분도 우리의 모델은 하늘나라의 예배입니다. 하늘나라의 예배는 스랍들만 예배하고 나머지는 앉아서 구경하지 않습니다. 스랍들의 인도를 따라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께 고정하고 큰 물소리와 같은 한 목소리로 하나님께 높이고 기뻐하며 노래를 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을 예배할 때 모든 회중이 다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성가대가 없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분들은 그럽니다. 성가대가 없는 주된 이유는 일부만 찬양하고 나머지는 감상하는 그릇된 예배를 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찬양은 오직 하나님께만 하는 것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일부 사람들만 찬양하고 나머지는 감상하면 초점이 사람들에게 맞추어져서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느냐에 맞추어집니다. 그러면 타락합니다.
그래서 마틴로이드 존스는 부흥이라는 책에서 말합니다.
‘하나님의 부흥의 시기가 아닐 때는 성가대를 강조하고 성가대에 있는 독창자들을 돈을 주고 사오기도 합니다. 그리고 회중들은 가만히 않아 듣기만 합니다. 성가대는 그들을 위해 노래를 부릅니다. 이것은 성령을 소멸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성가대에 대해 나오지 않느냐? 다윗시대의 아삽의 무리들이 성가대의 원조가 아니냐? 그런데 왜 그렇게 말하느냐냐? 여호사밧도 전쟁에 나갈 때 찬양하는 자들을 앞세워서 나갔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이렇게 반문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성경에 나옵니다. 그런데 공통적인 것은 그들이 사람들을 위해 노래하고 사람들은 그저 듣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삽의 무리들도 다윗이 세웠는데 그들도 다윗의 장막 언약궤가 들어있는 장막에서 노래했는데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 밤낮으로 365일 동안 하나님께 찬사를 드렸지. 아삽의 무리들이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고 사람들이 감상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사밧 왕때 전쟁에 출전할 때 백성 앞서 나가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나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전쟁에 승리했지 그들이 돌아서서 회중들을 위해서 찬양을 드리고 회중들은 감상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의 성가대와 이해가 다릅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아삽의 무리들, 여호사밧 시대의 찬양하는 무리들은 오늘날로 하면 찬양인도자와 같습니다. 하늘나라에서 스랍들과 같지요. 그들이 먼저 하나님께 찬양을 하자 모든 회중이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은 예수의 공로를 힘입어 각자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모든 성도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가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개발해야 합니다. 그래서 공적인 예배에서 우리가 예배인도자를 따라서 하나님께 한 목소리로 예배를 드리되 우리 각자는 십자가의 공로만을 의지해서 하나님 앞에서 서서 하나님 그분의 영광을 보며 하나님의 하나님되심과 그 행하신 일로 인하여 찬사와 기쁨을 드릴 뿐만아니라 개인적인 친밀함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예배입니다.
그래서 찬양과 경배는 데이트와 같습니다. 개인적인 예배뿐 아니라 공적인 예배도 데이트와 같습니다. 따라서 찬양인도자들은 각자가 하나님과 같은 이 교제를 방해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우리 리더들은 중간에 멘트를 넣지 않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이 주어질 때는 예외이겠지만요. 그런데 중매쟁이가 자꾸 각자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방해하면 안되지요. 찬양과 경배는 하나님과 데이트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예배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과 개인적인 교제를 추구하시기를 바랍니다.
3.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추구합니다.
찬양과 경배의 핵심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입니다. 하나님과 교제는 우리 신앙의 모든 것에서 핵심입니다. 우리 신앙의 핵심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친밀한 교제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기를 구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고백하고 그럽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가는 것이고 예배입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경배와 찬양의 중요성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전통적인 방식으로 하나님께 의식을 행하는 것으로 예배를 이해하면 찬양과 경배를 견디지 못합니다. 일분만 늦어져도 금방 불평합니다. 텔레비전 앞에서는 3시간동안도 침을 질질 흘리면서 보면서도요. 하나님이 텔리비 연속극보다 못합니까? 그러면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뭐 하나님의 백성입니까?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하겠어요.
찬양과 경배는 데이트와 같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추구합니다. 찬양과 경배는 오직 두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여러분과 하나님. 이 말은 찬양과 경배가 여러분을 위한 것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두 사람만을 위한 것이라는 말은 여러분과 하나님 단 둘을 생각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부부가 안방에서 은밀한 사랑을 나눌 때 누구도 끼어들어서는 안되는 것처럼. 이것이 예배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할 것은 찬양과 경배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과 은밀한 교제를 열망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더 열망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교제를 위해서 우리를 창조하셨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아가서에서 솔로몬 왕이 술람미 여인을 보기를 열망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열망하시고 갈망하십니다. 우리가 이것을 안다면 예배하기를 열망할 것입니다.
1)우리의 마음을 열고 어린아이처럼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가야 합니다.
우선 어린아이와 같은 자세가 중요합니다. 다윗은 한 나라의 왕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 앞에서는 어린아이처럼 뛰었고 춤을 추었습니다. 마19:14절에서는 천국은 어린아이와 같은 자의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아버지 앞에 나갈 때 어린아이처럼 나가야 합니다. 체면을 차리고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정장을 차려입고 마음은 열지 않고 그저 앉아있다면 예배가 아닙니다. 유교적인 가치관 아래서 외적인 체면을 가지고 아버지 앞에 나가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나가고 있는데, 이런 예배는 친밀함이 열리지 않고 예배를 방해합니다. 어린아이처럼 나가야 합니다.
뿐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올 때 마음을 토로하고 나와야 합니다. 친밀한 관계 가운데 포함된 내용이 마음을 토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친한 사람들에게 마음의 토로합니다. 부부 사이에도 친하지 않으면 속마음을 토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추구한다는 말은 어린아이처럼 나와서 마음을 열고 속 마음을 열고 하나님을 찬양할 때입니다.
다윗의 시편들을 보세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는 그의 마음 속에 있는 상처 좌절 환희 기쁨 분노 아픔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토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나가야 합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 예배할 때 예배를 감시하고 있지 않습니다. 아들로 서서 하나님 앞에 예배하며 섭니다. 저는 목사로 서지 않고 자녀로 서서 아버지 앞에 나갑니다.
4.우리는 하나님이나 사람을 조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 신앙의 모든 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자발적인 참여입니다. 우리는 시키는 것을 따라하는 것에 익숙합니다. 우리나라는 그동안 군사정권이나 여러 영향 때문에 너 이것 해 하면 따라하는 것에 익숙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민주화하는 명분 아래서 이것 해 하면 반발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런데도 문제는 그러면서도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일에는 너무나 서툽니다. 신앙안에서도 하나님의 어떤 일을 보고 그 일에 자발적으로 선택해서 참여하는 일을 잘 못합니다. 그만큼 우리는 수동적으로 끌려가는데 익숙합니다. 예를 들면 방송선교위원을 구한다고 하면, 기다리면 초기에는 하나님의 목적을 보고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것을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할 때부터 자유의지를 가지고 진행하셨습니다. 그래서 최근에 우리 포도나무 교회에 등록하신 분들 중에 누가 와서 여러분을 끌어주시기를 바랄지 모르는데, 아마 몇 년 있어도 그런 사람 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과 관계에서 주님을 추구하며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자발적인 선택이 중요하고 참여가 핵심인데 예배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조정하려고도 하지 않고 사람들을 조정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이런 말을 잘 오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조정할 수 없습니다.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찬양을 통해서 다른 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조정하려고 합니다.
성경에 보면 왕상 18장에 보면 바알의 선지자들 850명이 나옵니다.
26-29절을 읽습니다.
“26 저희가 그 받은 송아지를 취하여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가로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저희가 그 쌓은 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27 오정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저희를 조롱하여 가로되 큰 소리로 부르라 저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 잠깐 나갔는지 혹 길을 행하는지 혹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 28 이에 저희가 큰 소리로 부르고 그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 몸을 상하게 하더라 29 이같이 하여 오정이 지났으나 저희가 오히려 진언을 하여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이를지라도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고 아무 돌아보는 자도 없더라”
처음에 시작할 때 좋게 시작했습니다. 사간이 지나도 아무 응답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단 주위를 뜁니다. 그래도 응답이 없자 몸을 상하면서 뜁니다. 또 미친 듯이 떠들었습니다. 그들의 신을 조정하려고 하는 행위입니다. 물론 바알의 선지자들이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들도 기도를 가지고 찬양을 가지고 성령의 은사를 가지고 우리의 노력으로 하나님을 조정하려고 합니다. 그래도 안되면 더 높은 강도로 하나님을 조정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조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조정할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주권을 내리고 그분 발 앞에 엎드려 그분의 의중대로 순종해야 할 분입니다. 우리의 뜻에 맞도록 그분을 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찬양과 경배를 드릴 때 우리가 참다운 예배를 드릴 때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 나가면 하나님이 오십니다. 그런데 그분이 오시도록 찬양과 경배를 사용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말씀드린대로 이것은 찬양과 경배 뿐아니라 성령을 우리 가운데 초정할 때도 주의해야 합니다. 성령을 우리가 부리는 식으로 하면 됩니다.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렌트카처럼 부리는 줄 아십니까? 내 목적을 위해 빌리 사용하지요.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 나갈 때도 이런 태도로 할 때가 많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타락한 하나님을 조정하려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도 하나님을 조정하려고 하지 않고 우리는 단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순종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말씀하시면 우리 삶을 다해 순종하고자 합니다.
뿐만아니라 우리는 사람을 조정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조정하려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찬양과 경배를 통해서 사람들의 감정에 호소함으로 의도적으로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말씀드린대로 찬양과 경배를 통해서 예배분위기를 맞추려고 할 때입니다. 그렇게 되면 예배의 초점이 하나님께 있지 않습니다. 그저 예배 순서를 인도하고 자기가 원하는 목적대로 사람을 인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육신적인 행위이고 육신적인 열매입니다. 우리기 세상의 가요나 동요를 불러도 눈물이 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령의 열매와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을 조정하지 않기 때문에 중요한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찬양과 경배를 통해서 분위기를 엎 시키려고 합니다. 이렇게 하는 주된 이유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타락한 것입니다. 예배는 사람들의 분위기를 엎 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그분을 우리 중심에서 기뻐하며 예배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분의 기쁨이 우리 속에 넘쳐서 춤을 출 수도 있고 분위기도 고조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핵심은 마음을 가라앉혀서 하나님께 집중하게 하는 것입니다. 인위적인 방법으로 사람을 조정하면 안됩니다. 가사 하나하나를 온 마음으로 고백하며 하나님께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 예배가 진정한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노래가 흥겹다고 방방 뛸지는 몰라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되지 않습니다.
5.우리는 정직성과 진실성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모든 신앙에서 핵심입니다.
요1:47절입니다.
“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우리는 우리가 배운대로 왜 하나하나 노력하느냐? 진실성 정직성 때문입니다. 이 모든 하나 하나에 정직성과 진실성이 핵심입니다. 춤을 추면 어떤 분은 뒤로 가서 하라고 합니다. 앞에서는 하면서 뒤에서는 안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결국 사람들에게 보이지고자 했던 것이지요.
6.우리는 현대적인 경향의 예배를 추구합니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우리가 살펴본 예배에 대한 본질은 바뀔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본질을 담는 그릇은 시대와 모양에 따라 바뀌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의중에서 실패할 수 있습니다. 호주에 있는 교회는 지금도 옛날방식처럼 향을 피우는 교회가 있는데 한결같이 침체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모양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치관에 있습니다. 중심에 있습니다.
알티킨델 목사는 말합니다.
“오늘날 아주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향을 피우는데 관심이 있다. 그런데 엄격한 전통들을 가지고 있는 복음주의교회들도 사람들을 하나님께 인도하는데 실패할 수 있다. 그들은 매우 자주 순서의 지엽적인 일들에 논쟁하느라 바쁜 나머지 복음전도의 일로 나가지 않는다.”
우리들도 성경적인 배경을 전혀 따져보지 않으면서 전통과 다르다고 순서가 다르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안나오는 분들도 있어요. 전통과 다르다고. “파이프 오르간을 좋아하는 것처럼 한 종류의 문화적인 그룹을 선호하고 다른 문화적인 그룹을 배제하는 것을 그릇된 예배의 한 형태인 엘리트주의라고 한다. 하나님이 부흥이 한 나라 전 세계에 임할 때마다 예배에서 강조된 다섯 가지 형태가 있다. 기도에 대한 강조, 예배에 대한 강조, 제자훈련에 대한 강조, 교회연합에 대한 강조, 현대적인 의미가 있는 예배에 대한 강조다고 말한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는 우리가 드리는 형식의 예배를 열린예배라고 하면 열린예배가 하나님께 드리는 경건을 떨어뜨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 이야기 잘 들으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경건을 떨어뜨리는 것은 예배의형태가 아닙니다. 어떤 형태가 우리를 경건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어떤 형태가 우리를 경건하게 만든다는 것은 너무나 타락한 율법주의입니다. 경건은 하나님과 관계에 있습니다. 우리 삶에 있습니다. 형태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특정한 순서를 지킨다고 더 경건해지지 않습니다. 가치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런 예배 형태를 취하는 이유는 하늘의 예배의 가치를 가장 잘 담을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본질을 추구하며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하나님과 친밀함을 구하는 데 있어서. 우리의 온 마음으로 주님을 추구하는 것 등등에서. 예배의 핵심 중 가치관 중 하나가 현대적경향의 예배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7.경배를 드리면서 성령의 역사는 어떤 모양으로도 환영합니다.
우리가 경배하면 하나님의 성령이 임재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성령이 오시도록 하기 위해서 경배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오시기를 열망하십니다. 그것을 우리는 환영합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기대해야할 것 중 하나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기대를 가지고 나와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만 경배하고 예배하고 나오되 하나님을 만날 기대와 바람을 가지고 주 앞에 나와야 합니다.
오늘 경배의 가치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이 잘 기억하셨다가 예배로 나올 때 이런 토대에서 나오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더욱 함께하는 예배가 될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