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 하나님의 권위 아래서 누리는 보호와 자유”
이 주제만으로도 책 한 권은 쓸 수 있다. 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종들을 영접하고 공경하지 않아서 결국은 하나님에게서 아무것도 못 받는 것을 볼 때마다 마음이 무너진다. 사역을 하는 중에 그런 일을 수없이 보았다.
사역자들이 다가가기 가장 힘든 사람은 하나님의 종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미국에 있는 많은 교회와 기독교 학교에서 그런 사람들을 자주 보았다. 그런 사람들은 끊임없이 찾아오는 사역이라는 뷔페에 질리고 배가 불렀다. 그런 사람들에게 나는 그저 한 가지 요리일 뿐이다.
아무래도 권위의 생리를 잘 아는 군인에게 설교하는 것이 가장 쉽다. 그 다음은 죄수나 개발도상국 사람이다. 그들은 절박하고 굶주려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도 에스겔에게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
“너를 방언이 다르거나 말이 어려운 백성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내는 것이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었더면 그들은 정녕 네 말을 들었으리라.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강퍅하여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겔 3:5-7).
이스라엘에게 에스겔은 또 다른 선지자에 불과했다. 게다가 다른 선지자들은 백성에게 듣기 좋은 말만 했지만, 에스겔은 엄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에스겔을 영접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어느 날 이런 선포로 나를 어리둥절하게 하셨다.
“너를 영접하지 않을 곳으로 너를 보내겠다.”
“잠깐만요, 그들이 제 말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아시면서 저를 보내시겠다니, 왜 그렇게 하십니까?”
“내가 자기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는 말을 그들이 절대 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나는 그런 곳으로 갔다. 그런 곳에 있을 때면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들은 왜 나를 불렀지? 내가 안 왔으면 좋았겠다는 식으로 행동하잖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곳에도 갔다. 공항으로 마중 나온 순간부터 다시 공항에 데려다주는 순간까지 흥분으로 맞이하며 친절과 공경으로 대접했다. 호텔에 가면 과일과 간식이 가득 담긴 예쁜 바구니가 나를 반겨 주었다. 연신 나는 “뭐 필요하신 것 있습니까?” 하는 질문을 들었다. 마치 내가 “좋습니다, 좋습니다”만 반복하는 고장난 레코드가 된 듯한 생각이 한두 번 든 게 아니었다.
되돌아보면 극진한 대접을 받거나 강사 소개 때 박수를 받는 것이 불편했다. ‘나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이러지 마십시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곧 그것이 나와 상관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조금씩 조금씩 하나님은 내게 보여주었다. “그들이 너를 공경하게 그냥 두어라.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위해서다.” 그들이 내가 아니라 내 삶에 주신 하나님의 선물을 공경한다는 것을 깨닫자 한결 쉬웠다. 예수님은 존 비비어라는 그릇을 사용하셔서 그들에게 주실 것이 있었다. 그들은 긍정적으로 반응함으로 마음이 열려 그것을 받을 수 있었다.
교만은커녕 내 안에 점차 깊은 겸손과 의존이 싹트는 것을 느꼈다. 내 사역의 근거는 내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선택임을 알았다. 나는 그 사람들이 보이는 공경을 주님에게 돌리며 즉시 그분을 의지하는 마음을 고백했다. 공경을 보인 사람들은 쉽게 받았다. 공경이 없는 사람일수록 다가가기 더 어려웠다.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바울은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딤전 5:17)고 가르쳤다. 배나 존경하라고 표현했다. 다시 말해 세상 권위의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 하는 공경의 갑절로 공경하라는 뜻이다.
이 말씀의 문맥을 보면 공경에는 사역자들에 대한 재정적인 공경방식도 들어 있다. 바울은 이어서 말한다.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딤전 5:18). 다른 번역에도 이 점은 분명하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충분한 재정 지원과 함께) 존경하고 특히 말씀과 가르치는 일에 수고하는 분들을 더욱더 존경하기 바랍니다. 성경에도 … ‘일꾼이 자기 품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습니다”(딤전 5:17-18, 현대인의 성경).
이것은 변하지 않는 원리다. 교인들이 자기들을 섬기는 목사들과 지도자들을 잘 챙기면, 사업하는 이들이며 다른 교인들이 번창하는 복을 받는다. 그들은 하늘의 경제를 누린다. 그러나 교인들이 인색한 곳에는 절도와 궁핍, 현세의 열악한 경제 환경에 대한 불평이 존재하는 것을 자주 보았다.
이 진리를 특히 미국의 사역자들이 남용했다는 것을 안다. 목사들이 쉬지 않고 돈 얘기만 하는 것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그들의 말도 일리는 있으나, 그들은 사역에서 중요한 것을 잃은 채 돈벌이의 길로 빗나갔다.
바리새인들의 삶이 그랬다. 진리를 남용하는 바리새인들을 보고 공경의 원리를 저버린 사람들이 많았다. 공경의 원리가 하나님이 바라신 삶의 길이었는데도 말이다. 교인들에게는 건전하게 진리를 제시해야 하는데, 목사들의 그런 태도는 자기 영향 아래 있는 이들에게 상처를 입힌다.
예수님을 대신하여 선 사람들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보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요 13:20). 예수님이 임명하신 사역자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버지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담임목사가 자리를 비우면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 수가 줄어드는 교회가 있다는 얘기를 들으면 슬퍼진다. 사람들이 참된 권위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얘기다. 마음이 바로 되어 있다면 교인들은 협동 목사한테든 외부 강사한테든 똑같이 잘 받을 수 있다. 그 사람들도 담임목사가 임명하여 세운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목사는 예수님을 대신하여 선 사람이다. 이것은 성품 경연대회가 아니라 그 사람이 받은 권위의 문제이며, 그 권위를 거슬러 올라가면 예수님에게 닿는다. 하나님 나라의 권위를 이해하면 얼마든지 납득할 수 있는 얘기다.
정부 지도자와 사장과 교사와 그 외 임명된 이들을 공경해야 한다. 부모와 남편을 공경해야 한다. 그럴 때 보상을 약속하셨다. 또한 사역으로 섬기는 사람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는 일로 수고하는 사람들을 배나 존경해야 한다.
순종은 권위에 대한 행동, 복종은 권위에 대한 태도
아마도 신자들 사이에 복종만큼 오해를 많이 불러일으키는 문제도 없을 것이다. 보호 아래 거하는 삶을 가르치면서 나는 이런 질문을 수없이 들었다.
-어떤 상황에서든 순종해야 하는가?
-지도자의 결정에 동의하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권위가 잘못 결정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권위가 내게 잘못된 일을 명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디에 한계를 두어야 하는가?
권위에 자신있게 복종하려면 반드시 답해야 하는 중요한 질문들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히 13:17).
여기서 저자가 분명히 권하는 일은 두 가지다. 우리를 인도하는 사람들에게 순종하는 것과 복종하는 것이다. 이 둘은 서로 다른 명령이지만 이 둘을 혼동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순종하지만 반드시 복종은 아닐 수도 있다.
거듭나기 전에 수요일 밤마다 나는 ‘바레타’(Baretta)라는 TV 프로를 제일 재미있게 보았다. 목요일은 쓰레기를 버리는 날이었는데, 쓰레기차는 새벽에 왔다. 그래서 전날인 수요일 밤이면 쓰레기를 내다놓아야 했고, 그것은 내 책임이었다.
“얘야, 쓰레기 내놓았니?”
매주 어머니는 꼭 프로가 한창 재미있을 때 들어와서는 물으시는 거 같았다. 내 대답은 늘 같았다.
“아직요.”
“지금 당장 일어나 버리고 와라.”
“예, 엄마.”
나는 이렇게 대답하며 일어났다. 누군가 내 행동을 봤다면 말 잘 듣는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속에서는 불만이 끓어올랐다.
‘도대체 엄마는 왜 항상 바레타가 한창 재미있을 때 그 일을 시키시지? 10분만 있으면 끝나는데, 조금만 기다렸다 시키시면 안 되나?’
성령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순종했지만 즐겨 순종하지는 않았다. 어머니에 대한 네 태도는 옳지 않았다. 네가 섬기는 교회에서 네게 공급이 없는 (내 나라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지 못하는) 이유는 네가 순종하긴 하지만 즐겨 하는 태도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당시 섬기던 교회에서 하나님의 것을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위험지대로 가고 있었다. 목사에 대한 잘못된 태도 때문에 그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히브리서 13장 17절은 이렇게 끝난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하나님이 권위를 위임하신 이들에게 복종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에 반항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을 세우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 위에 권위를 두시고 그 권위를 통해 우리에게 잔칫상을 차려 주신다. 우리가 그 잔치를 마음껏 누리며 유익을 얻기를 바라신다.
순종이 권위에 반응하는 행동의 문제라면 복종은 권위에 대한 태도의 문제다. 우리 대부분은 이 점을 놓친다. 하나님은 겉으로 보이는 행동과 마음에 숨은 태도를 함께 보신다. 다윗은 아들 솔로몬에게 권좌를 물려줄 때 이렇게 당부했다. “내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비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지어다. 여호와께서는 뭇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사상(의중)을 아시나니”(대상 28:9).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를 인도하는 사람들에게 순종할 뿐 아니라 복종하라고 가르친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롬 13:1)는 바울의 말에도 순종과 기쁜 태도가 함께 들어 있다.
무슨 일을 시키든 무조건 순종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명령을 다시 읽어보자.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사람들은 정말 진지하게 이렇게 묻는다. “어디에 선을 그어야 합니까? 권위 있는 사람이 무슨 일을 시키든 무조건 순종하는 것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십니까? 나한테 죄를 범하게 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경은 권위에 무조건 복종하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성경은 무조건 순종하라고 가르치지는 않는다. 복종은 태도의 문제고 순종은 명령을 수행하는 문제임을 잊지 말라.
유일하게 권위에 순종하지 말아야 하는 경우가 있다. 유일한 예외다. 바로 하나님이 말씀에 명시하신 것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일을 권위가 우리에게 시키는 경우다. 다시 말해 지도자들이 우리에게 죄를 지으라고 명하면 순종할 책임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러나 그런 경우라도 우리는 겸손히 복종하는 태도를 잃지 말아야 한다.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 왕의 명령에 불순종할 때, 다니엘과 세 친구는 전혀 굽힘 없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면서도 왕에게 예우를 갖춰 말했다(단 3:16-18). 느부갓네살을 ‘왕’이라고 불렀다. “이 한심한 양반아, 우리는 절대 당신 말대로 못해!” 하지 않았다. 그렇게 불경하게 말했다면 반역이다. 이처럼 권위의 명령에 불순종해야 할 때도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
베드로가 아내 된 이들에게 준 가르침에도 그 점이 나와 있다.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공경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벧전 3:1-2).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할 뿐 아니라(딛 2:5) 복종하는 태도로 남편을 공경해야 한다.
베드로 역시 행동과 복종을 병행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거기에 정결함과 남편의 권위를 공경하는 태도를 지키라고 가르친다. 남편이 신자가 아니라도 마찬가지다. 아내는 남편이 죄를 지으라고 시키는데도 순종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남편의 권위에 무조건 복종하고 그 권위를 공경하는 것이 아내의 소명이다.
신자인 아내가 전화를 받았는데 불신자인 남편이 상대와 통화하고 싶지 않아 “나 없다고 해요”라고 말하는 경우가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그럴 때는 “여보, 거짓말은 안 할게요. 지금은 당신이 전화를 받을 수 없다고 말해도 괜찮겠지요?” 하고 대답하면 적절할 것이다. 아내는 남편의 권위를 공경하는 태도를 지키면서도 거짓말하라는 요청에는 불순종한 것이다.
힘센 전사인 다윗도 사울이 단창을 던지자 왕궁 근처에 오지도 않았다. 왕궁에서 떠나 광야로 가서 살았다. 그러면서도 사울의 권위를 공경하는 태도는 잃지 않는다. 사울을 피해 사울이 진정으로 회개하거나 하나님이 의롭게 심판하시기를 기다리는 중에도 다윗은 변함없이 사울의 권위에 복종했다.
권위에 불복해도 되는 유일한 경우
권위의 영역이 정부든, 가정이든, 교회든, 사회든 하나님은 복종과 공경의 태도를 지니라고 명령하신다. 권위가 성경에서 명백히 죄라고 하는 일을 시키지 않는 한, 행동으로 순종해야 한다. ‘명백히’라는 말을 강조한다.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부인하라든지 사람을 죽이라든지 다른 신을 섬기라든지 하는, 예수님의 명령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명령에는 순종하지 않았다. 그런 지시는 회색 지대나 판단의 재량 문제가 아니었다.
교회 직원인 사람들에게 들은 회색 지대의 예는 이런 것이다. “우리 목사님은 근무 시간 중에 사람들과 상담하거나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지 못하게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처사가 아니며, 사랑으로 행하지 않는 죄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 생각대로 밀고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권위 아래 있는 사람들의 주관적 판단이다. 자기 해석이다.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라고 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들이 보수를 받는 것은 타이핑이나 서류 정리, 데이터 처리, 기타 이런저런 업무를 하기 때문이지, 기도를 하기 때문은 아니다.
본질상 이들은 불복종 때문에 도둑질을 면할 수 없다. 정말 남을 위해 기도하고 싶거든, 목사의 허락을 받아 업무가 끝난 후 (즉 자기 시간에) 기도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어야 한다. 목사는 그것조차 달가워하지 않을 수 있다. 목사는 교회로 전화해 도움을 청하는 교인들을 상담하는 훈련을 직원들이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목사의 그런 결정이 틀렸다면 하나님이 직접 책임을 물으실 것이다. 이 일은 그 목사의 권위 아래 있는 이들이 판단할 일이 결코 아니다. 이것은 수많은 예 중 하나일 뿐이지만 요지는 늘 같다. 명백히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날 때만 권위에 불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동의할 수 없는 일을 시키면 어떻게 하나? 누가 보기에도 어리석은 일을 내게 시킨다면? 기도 중에 하나님이 내게 보여주신 것과 반대인 일을 시키면 어떻게 하나?” 아직도 그런 의문이 있을 수 있다.
지도자의 마음은 하나님의 손에 있다
지도자에게 만족하지 않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다. 그런 이들은 지도자의 비효율적인 방법, 현명치 않은 결정, 지도자가 자기 삶에 미친 부정적 영향에 대해 하소연한다. 지도자가 뭔가를 약속해놓고 감감 무소식이라 아직도 기다리고 있다며 불평한다.
사실 상황은 점점 나빠지는 것 같다. 목사가 뭔가를 못 보고 있다고 확신하며 이제 목사의 권위와 하나님의 권위가 별개라고 생각한다. 이런 논리는 불평을 불러들이며, 불평은 결국 불복종으로 이어진다. 이제 미혹에 맞장구치다 결국 속아 넘어가 권위를 등지는 것은 시간 문제다. 하나님이 그들을 성장시키고 보호하시려고 그 권위를 그들 위에 두신 건데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런 길을 갔다. 그들은 모세의 리더십이 비효율적이며 심지어 자기들에게 해롭다고 여기기도 했다. 그들은 모세의 리더십에 반발했다. 모세의 설교와 지시 때문에 고통과 고생을 겪게 되었다. 이제 그들은 모세의 권위와 하나님의 권위를 분리하기 시작했다. 그런 태도가 모세와 아론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기를 원한다는 말로 나타났다.
다 모세 잘못이었다. 모세가 가만히 있었다면 바로가 자기들을 그렇게 혹독하게 대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에게는 (마귀나 줏대없는 지도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사건을 지휘하신다는 사실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분의 종합계획 없이, 그분 모르게 일어난 일은 하나도 없었다.
백성들은 자기들이 모세에게만 불복종하는 줄 알았지, 그 불복종이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과 관계 있는 줄은 몰랐다. 자기들이 모세와 하나님을 보기 좋게 갈라놓은 줄 알았다. 순종의 원리가 아니라 인간의 논리를 따라 살았다. 시각과 환경에서 나오는 제한적인 논리대로 사는 사람들은 이미 미련한 길에 들어선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이룰 수 없다. 반면 권위를 인정하고 순종하는 사람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결국 약속을 누리게 된다.
누가 그를 그 자리에 두었는가?
‘내가 보기에 지도자의 선택이 결코 바람직하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지도자가 불행을 자초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순종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과거 사역을 되돌아보면 나도 그런 좌절을 느낀 적이 많다. “저들은 지금 잘못된 결정을 내리고 있어!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 부정적인 영향에 끌리고 있어. 나는 복종할 수 없어!” 그러나 깨지지 않은 이런 마음은 내 마음의 독립심을 나타내는 것인 경우가 많다.
1년 간 목사의 행정 비서로 섬기던 시절 내가 이의를 느낀 결정이 많았다. 나는 목사가 내 책상을 거쳐 부서장들에게 전달한 많은 지시 사항을 보았다. 목사의 결정이 현명하지 않다는 생각에 속으로 얼마나 자주 투덜거렸는지 모른다.
어느 날 성령께서 내게 물어볼 것이 있다고 하셨다. 나는 하나님이 내게 질문을 던지실 때면 내 어줍잖은 지혜를 지적해 주시려는 것임을 여러 번 경험했다.
“예, 주님?”
“내가 목사의 자리에 둔 사람이 누구냐? 너냐 그 사람이냐?”
“목사님입니다.”
“맞다. 그러므로 나는 너한테는 보여 주지 않아도 되는 것들을 그 사람한테는 보여줄 것이다. 그리고 목사의 결정에 담긴 지혜를 너한테는 일부러 보여주지 않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 목사가 나를 따르듯 네가 그 목사를 따르는지 보기 위해서다.”
대개 몇 달이 지나면 목사의 결정에 담긴 지혜가 드러났다. 그제야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내가 순종의 원리보다 내 논리를 높여 자가당착에 빠졌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바로 그런 태도가 교회와 가정과 회사를 분열시킨다. 하나님은 지도자의 지혜가 보일 때만, 내 뜻과 맞을 때만, 지도자의 지시가 내 맘에 들때만 복종하라고 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그저 “순종하라!”고 명하신다.
나중에 주님은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존, 모든 성도가 오직 나와 교제하고 기도함으로써 모든 정보와 지혜와 지시를 얻는 것이 내 뜻이라면 나는 애당초 교회 안에 권위를 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 자녀들이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기도생활만으로는 얻을 수 없게 하려고 교회 안에 권위를 두었다. 자녀들은 내가 지도자들을 통해 목소리를 들려주기도 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귀 기울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지도자의 결정에 대해 왈가왈부하고 그 일의 결과를 판단하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니다. 그것은 그 사람을 권위 있는 자리에 두신 분이 하실 일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의 결정을 판단하라고 했다면 모세는 불리한 평가를 받았을 것이고 백성은 애굽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장차 지도자들도 판단을 받고 우리도 판단을 받는다. 지도자들은 자기가 내린 결정에 대해, 우리보다 엄중하게 판단받는다. 그래서 예수님은 경고하셨다.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눅 12:48). 야고보도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약 3:1)고 경고했다.
반면 우리는 복종과 관련하여 판단받는다. 권위는 하나님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위임하신 권위를 거역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권위를 거역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도자가 옳고 그른지 미리 분별하지 말아야 한다. 사후에도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다. 하나님만 사람의 마음을 아시며, 사람의 마음을 당신 뜻대로 바꾸실 수 있다.
주님은 내 마음에 성경 구절을 하나 새겨 주셨다. 비슷한 상황에 처할 때마다 밝은 빛을 비추며 어려울 때 방향을 제시하는 말씀이다.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보의 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잠 21:1).
여기 왕이란 내 위에 있는 권위를 가리킨다. 왕이 경건한 사람이든 잔인한 사람이든 왕의 마음은 늘 하나님 손에 있다. 이 구절은 “선한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다”고 하지 않는다. 왕의 마음이 어떤 영향을 받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왕의 마음은 그래도 하나님 손에 있다. “왕이 잘못된 영향을 입지 않는 한 하나님이 그의 마음을 임의로 인도하실 수 있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잘못된 결정이라는 것이 확실하다면?
권위가 결정을 잘못했다는 것을 그저 분별한 정도가 아니라 확신한다면 어떻게 하는가? 지도자가 악담에 영향을 받았다는 증거가 구체적으로 있을 때는? 다른 방법은 없는가? 지도자를 돕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는가? 있다! 에스더가 좋은 예다. 그녀는 하만의 음모로 아하수에로 왕이 유대인들을 멸절시키려고 할 때 눈여겨 둘 만한 두 가지 태도로 위기를 극복했다.
첫째, 분명 왕은 내막을 모른 채 끔찍한 결정을 내렸으나 에스더는 여전히 복종하는 마음을 잃지 않고 공경하는 태도로 왕에게 말했다는 것이다(에 7:3-4).
둘째, 에스더는 자기만 아니라 왕의 유익을 생각하면서 극히 겸손한 자세로 자기 지혜를 말했다는 것이다. 간청하기는 했지만 최종 결정은 왕에게 맡겼다. 이렇게 말하지는 않았다. “어리석은 남편이여, 살해자의 말에 넘어갔군요. 당신이 내린 명령 때문에 당신한테 얼마나 큰 손해가 있을지 모른단 말이에요?”
에스더는 하나님이 왕의 마음을 바꾸시리라는 것만 믿었다. 하나님은 정말 왕의 결심을 바꾸셨다. 왕은 악한 하만을 목매달았고 유다 민족은 죽음을 면했다. 에스더에게는 지도자가 진상을 모른다는 구체적 증거가 있었다. 단지 분별한 정도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에스더는 겸손히 왕에게 나아가 왕의 결정권을 존중하면서 자기 의견을 알렸다. 왕을 비하하거나 강요하거나 조종하지 않았다. 왕의 마음을 움직이실 성령의 능력을 믿었다.
충성됨과 성실함, 지도자에게 직언할 자격
모세도 권위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적이 있다. 다만 이번에는 그 권위가 하나님이었다. 그런 일이 꼭 한 번 있던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하는 죄를 범했을 때 모세는 백성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했다(출 32:11-13). 그때 그의 태도에서 배울 점이 몇 가지 있다.
첫째, 모세는 철저히 복종하는 자세로, 두렵고 떨림으로 말했다. 둘째, 모세는 하나님에게 간절히 애원하고 간청했지 하나님한테 명령하지 않았다. 셋째, 모세는 무엇보다 일차적으로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말했다. 모세의 말의 핵심은 이것이다.
“400년이나 걸려 쌓으신 하나님의 명예는 어떻게 됩니까? 지금 하나님의 이름은 온 세상에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시작한 일을 이루지 못하신다면 그 이름이 더럽혀질 것입니다.”
일차적으로 하나님을 위해 말했기 때문에 모세는 하나님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었다. 자기나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지도자에게 이견을 제시할 때 그것이 일차적으로 누구를 위한 일인지 자문해야 한다. 모세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기억하시게 한 것도 일차적으로 하나님을 위해서였다. 모세는 하나님에게 그분 말씀의 중요성을 일깨워 드렸다. 모세는 초점을 바로 맞추었다. 그 마음이 옳았기 때문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종이었다. 그래서 자기나 이스라엘 백성보다 먼저 하나님을 생각했다. 하나님은 어떻게 반응하셨는가.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출 32:14).
하나님이 마음을 바꾸셨다! 결정을 번복하셨다. 여기서 중요한 점을 하나 더 지적하고 싶다. 모세가 하나님에게 그렇게 직언할 수 있었던 것은 그때까지 계속 자기의 충성심을 보여드렸기 때문이다. 이 원리를 지금 상황에 적용해보자.
존 비비어 사역 재단 간부들 중에는 오랜 세월 우리 부부에게 신실함을 보여준 사람들이 있다. 신입 직원들보다 그들은 우리의 신임을 더 크게 얻었고, 그만큼 더 신속하게 우리에게 이견을 말할 수 있다. 지도자에게 직언할 수 있는 권한은 자기 하기 나름이다. 충성과 성실과 신실함으로 그런 권리를 얻을 수 있다. 아무나 지도자에게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점 또 하나는 모세가 하나님의 결정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고 직접 하나님에게 말씀드렸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방식에 이의를 제기하며 자기들끼리 끊임없이 쑥덕일 때마다 하나님은 노하셨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인 불평이다! 불평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하는, 아주 위험한 행동이다. 권위가 있는 사람이 내린 결정을 불평하며 끼리끼리 쑥덕인다면 불화와 반역을 심는 것이다.
나는 내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합의한 것이 하나 있다. 내가 충분한 정보 없이 결정하는 것처럼 보이면 일차로 내게 재고를 건의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혹 결정에 도움이 될 사실이 드러나면 내게 재차 재고를 건의할 수 있다. 건의할 때 중요한 것은, 사안을 신중히 검토한 후에 자신이 전달하려는 것을 내가 알 수 있도록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새로운 정보를 접한 뒤 결정을 바꾼 일이 많다. 그러나 그들이 건의했는데도 내가 본래 내린 결정을 고수하면 우리는 힘을 합쳐 일을 진행한다. 연합하여 일을 진행했는데 내 결정이 틀린 경우에도 하나님은 계속 우리를 지켜 주신다. 우리가 순전한 마음으로 행하면 하나님은 내 밑에 있는 사람들과 나를 모두 지켜 주실 것이다. 다윗은 “내가 주를 바라오니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시 25:21)라고 말했다.
마음에 꼭 새겨둬야 할 중요하고도 어려운 원리가 하나 있다. 하나님은 일단 인간에게 권위를 위임하시면 절대 그 권위를 무시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지도자가 하나님 말씀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경우만 예외다. 하나님은 친히 위임하여 세우신 권위를 짓밟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위임하신 권위를 무시한 채 하나님에게만 복종한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우리가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에 순종할 때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우리 것이 된다.
-존 비비어(John Bevere), ‘순종’(두란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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