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부흥의 긴박성
오늘날 부흥의 필요성 가운데 첫째 되는 것은 영적인 궁핍함입니다. 마가복음 9장에 예수님께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간 후 산 밑에서는 벙어리 귀신들린 아기를 데려와 제자들에게 고쳐 달라 했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때 주님이 산에서 내려 오셔서 그 아이에게서 귀신이 즉시 나가게 하셨습니다. 이 사건에서 제자들은 주님께 묻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때 주님의 대답은 “기도(와 금식) 외에는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우리는 이 사건 앞에서 우리가 확실하고 긴박하게 던져야 하는 질문은 “우리가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것입니까? 무엇이 문제입니까?
첫째 대답은 “이런 유”입니다. 이 말은 경우마다 다른 차이점을 구분하라는 것입니다. 즉 "진단의 문제로 “이런 유”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문제에 대한 정확한 본질과 성격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늘날 “이런 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영적인 것을 철저하게 모르고 있고, 심지어 영적인 것을 부인하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즉 영적인 것에 대한 개념 자체가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신념자체가 사실상 사라졌습니다. 현대인들은 영적인 것들을 철저하게 싫어하고 부정합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의 권위 또한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에 있어서도 예수님을 그저 위대한 사람 정도로만 취급하고, 신성과 동정녀 탄생, 속죄 죽음도 부인합니다. 더위기 예수님을 사회 개혁자 정도나, 정치적인 선동자나, 단순히 인생에 대한 윤리적 관점을 제시한 선생쯤으로 생각합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오늘날 사회는 초도덕, 도덕부재의 사회가 되어버렸습니다. 도덕률이라는 범주 자체가 매우 무시를 당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이런 유”우리의 능력이 충분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전함에 있어서 변증학을 주장합니다. 그래서 철학적 방식으로 기독교 신앙을 제시하고 전해 주려고 시도합니다. 뿐만 아니라 과학과 종교를 조화시키려 합니다. 또한 고고학 차원에서 고고학이 성경이 진리임을 증명해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방식의 문제에서도 그렇습니다. 새로운 번역 성경이 나온 것도 현대인이 원하는 것은 현대어로 된 성경, 현대의 속에나 현대의 관용구로 된 성경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현대인들이 성경을 읽고 기독교를 받아들일 것이라는 말입니다.
또 대충매체 라디오 텔레비전을 이용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실천에 옮기는 대중적인 복음 전도가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께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그것입니까? 문제는 사람의 마음, 사람 속에 있는 악입니다. 다시 말해 이러한 방식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습니다. 다만 “기도와 금식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습니다. 충분한 능력만이 ”이런 유“를 나가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함을 입어야 함을 인식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령 충만케 하실 수 있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람들의 영혼에 침투하여 그 영혼을 깨뜨리고, 낮추며, 새롭게 만드는 능력입니다. 그것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그 능력을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능력을 가졌음을 알면 권위 있게 나가야 합니다. 이것만이 유일한 방법입니다.
제2장 부흥의 장애물
오늘날 교회가 처한 상황은 생명이 고갈된 상태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의 직면한 문제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생명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이삭은 생명과 관련된 물의 긴박한 상황 앞에서 그는 “이삭이 자기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을 다시 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이삭의 때와 같이 생명의 고갈 상태입니다. 그러나 그 생명의 고갈 상태는 이삭 때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때에도 있었습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첫 번째 원리 - 교회사를 거슬려 올라가보면 교회사는 굴곡이 심한 역사였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생명과 활력과 능력이 충만했던 시대가 있었음을 발견합니다. 그런데 이 영광스러운 부흥의 시기, 재각성의 시기는 참으로 엄청나게 메마르고 죽어 있고 무감각하며 생명 없는 시기 뒤에 왔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원리 - 위대하고 영광스러우며 능력 있는 시대마다 모든 경우에 있어서 그 이전에 얻었던 것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즉 이삭이 했던 일을 하는 것처럼 이전에 있었던 일로 되돌아가고, 그것을 재발견하며 옛 원천을 다시 파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문제는 블레셋 사람들이 행한 악질적인 소행이 우물을 막고 물이 나오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블레셋 사람들이 한 소행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인식해야합니다. 이것을 안후에야 이삭이 보인 본을 실행에 옮길 수 있고, 잡동사니를 소제하여 하나님의 옛 물줄기를 만나고 한 성령의 능력을 다시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제3장 불신
교회사의 고통의 문제는 언제나 블레셋 사람들이 우물을 막은 일 때문인 것을 입증합니다. 그 쓰레기가 무엇인가?
첫째 -교회사에서 교회가 하향세를 취하는 시대마나 중요한 특징은 어떤 진리들을 감추거나 기독교 진리의 어떤 면들을 막아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잘못이 교정되고, 불식되며, 참된 교리를 회복했을 때 비로소 부흥이 일어난 것입니다.
둘째 - 어떤 본질적인 진리를 부인하거나 무시한 시대에는 어떠한 부흥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셋째 - 이러한 교회들은 부흥을 맞고 있는 자들을 반대하고 언제나 핍박했다는 것입니다.
넷째 - 예외 없이 이러한 중추적인 교리들을 발견한 것이 궁극적으로 부흥을 가져 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부흥은 예비적인 단계가 있는데 그 준비 단계는 어김없이 장엄하고 영광스러우며 중추적인 진리들을 재발견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면 블레셋 사람들로 인해 감추어진 진리가 무엇입니까?
첫째 - 역사하시고 간섭하시며 교회 역사를 주관하시고 개인의 삶의 과정을 주장하시는 주권적이고 초월적인 살아 계신 하나님에 관한 진리입니다.
둘째 - 성경의 권위에 대한 문제입니다.
이들은 성경의 영감을 믿지 않으며 따라서 성경의 진리를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탐구함으로써 얻고 이치적으로 따져 보며 자기들의 총명과 사변을 통해서 진리에 이르게 된다고 주장합니다.
셋째 - 무시당한 중추적 진리는 사람이 죄에 빠져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믿지 않았습니다. “진노하시는 하나님은 전혀 하나님일 수 없다. 그것은 벌주기를 잘하시는 구약의 하나님일 뿐이다”
그러나 부흥을 체험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은 전적으로 쓸모없는 죄인이라는 것과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고 놀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말을 빌리면 성난 하나님 앞에 엎드리기까지는 어떠한 부흥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블레셋 사람들이 행한 일의 증거가 있다면 제거하십시오. 그리고 기초적인 교리들로 돌아오십시오.
제4장 오염된 교리
부흥에 이르는 길은 먼저 잡동사니를 제거하는 일이 급선무입니다. 우리가 제거해야할 쓰레기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믿음의 결정적인 교리들을 의심하고 부정하는 일입니다.
성령의 사역 -성령이 행하시는 최상의 사역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방식으로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고 우리의 중심에서 몰아내고 다른 위치에 서게 하는 것이 블레셋 사람들의 소행입니다.
그리스도의 사역 - 부흥의 때마다 예외 없이 그리스도의 보혈을 엄청나게 강조했습니다. 교회는 십자가를 자랑했고, 보혈을 자랑했습니다. 그런데 블레셋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피와 십자가의 복된 사실을 덮어버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의 인격과 사역을 감추었습니다. 어떻게 감추었습니까?
1)성령을 망각하거나 아주 무시하는 것입니다.
2)성령의 잊지 않고 있으면서도 성령을 하나의 감화력 정도로만 여기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인격임을 믿지 않습니다.
3)그들은 부흥을 집단 히스테리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4)성령세례는 체험적인 것이 아니다 성령 세례는 거듭날 때 곧 중생할 때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므로 중생한 사람은 누구나 성령 세례를 받았다. 따라서 성령 세례를 받기 위해 기도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는 것입니다.
5)성령 충만에 대해서만 말합니다.
6)감상부류가 있습니다. 이들은 성령의 강림을 위해 기도하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부흥을 위해 전혀 기도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로 “우리는 말세에 살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다. 성령께서 물러 가셨다. 하나님이 성령을 거두어 가셨다면 성령이 임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거나 성령을 부어 달라고 기도할 권리가 있겠는가? 또 그리스도가 부흥이 찾아올 시간적인 여유가 없을 정도로 빨리 오실 것이기 때문에 부흥은 결코 있을 수 없으며 부흥을 위해 기도할 필요도 없다고 한다.
이 모두가 성령을 소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행13: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행15:28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 행16: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이 모두가 살아계신 성령의 강한 역사입니다. 성령께서 그들에게 임하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성령을 교회 전체에 부어주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해야합니다. 이것이 부흥이요, 성령의 임재요, 성령의 통상적이고 보편적인 사역을 넘어서 성령을 부어주시는 일입니다.
제5장 결함 있는 정통
이 장에서는 복음적이라고 주장하는 정통적인 사람들이면서도 어떤 면에서 결함이 있는 경우에 대해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첫째 - 인격 자신과 관계를 맺기 보다는 그 인격에 관해서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리가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문제는 참된 교리를 인격의 자리에 둘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참된 교리 자체를 그 인격을 생생하게 인식하는 것이라고 오인합니다.
둘째 - 균형을 잃어버린 것이며, 교리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성경적인 참된 관점이 부족하고 구원에 있어서 절대적인 교리를 나타내는 데도 부족한 것입니다.
셋째 -교회에 대한 결함 있는 교리
이들은 교회 밖에서의 모임과 집회를 동일하게 봅니다. 성도들이 함께 모이는 대신 큰 공적 집회 모임을 추구하고 성도들을 모으기보다는 어떠한 큰 운동을 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단위는 교회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도들이 모인 곳, 그 백성들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강력한 복음 전도 운동은 교회가 진정으로 부흥할 때 뿐 입니다. 이것이 부흥의 역사입니다.
넷째 - 영에 대한 문제
교리에 있어서는 정통적이면서도 영에 있어서는 잘못 될 수 있습니다. 그릇된 영의 표시가 무엇입니까?
1)교만함, 삶의 교만입니다.
2)비판하는 정신입니다.
3)논쟁(경쟁심)입니다.
4)마음과 다투는 정신과 자기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5)거룩하고 하나님께 쓰일 준비를 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기 보다는 하찮은 일에 신경을 쓰고 바쁘게 무엇인가를 하는 것입니다.
6)죄를 범하고 계속해서 알고 있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다면 우리의 정통은 아무 소용이 없을 수 있습니다. 어떠한 형태이든지 죄는 하나님의 성령이 교회에 임하는 것을 막는 주요한 장애물들 중 하나입니다.
제6장 죽은 정통
죽은 정통은 우리가 직면한 가장 큰 위험입니다. 그러면 죽은 정통은 어떻게 나타날까요?
첫째 -자만, 젠체함으로 “잘난 체하며 자만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진리를 믿는다는 것을 아는 자들의 상태가 이렇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교리나 신조를 일고 믿는 것에 있어서 흠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자만의 요소가 있습니다. 자기만족에 빠져있습니다.
결국 이들의 또 다른 방식은 온통 변명하는 데만 관심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옳은 것이 틀림없으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오로지 우리의 입장을 변호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안일한 것에만 관심을 갖습니다. 그들은 신앙자체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종교는 낙하산으로서의 종교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언제나 보편적 메시지를 좋아합니다. 보편적으로 약간 고무시켜 주는 것을 원하며 보편적으로 자기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원합니다. 교훈은 언제나 보편적이고 원근법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너무 가까이 접근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말씀에 탐사당하고 간섭당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사람들의 종교나 예배는 생명력이 전혀 없습니다. 예배를 진정 예배되게 하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게 하는 그러한 힘을 상실해 버렸습니다.
둘째 - 열심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이 말에 대해서 위대한 원리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1)고전14:40 “모든 일은 적당하게 질서대로 행해야 한다는 것”
2)살전5:19 “성령을 소멸치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두입장의 신양성경에서 발견되는데 그 각각을 특징짓는 것이 무엇인가 보아야 합니다.
1)혼돈-이 말은 그 당시 고린도 교회의 방언이나, 예언으로 인한 혼돈이 있었습니다. 이 때 사도바울이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라고 합니다.
2)흥분, 거짓된 기쁨의 의식입니다.
3)감정주의입니다. 이것은 감정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부흥을 반대한 첫 번째 이유로 부흥은 순전히 감정주의다 를 내 세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분별해 보아야합니다. 또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는 명령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러나 다음 명령도 붙잡아야 합니다. “성령을 소멸치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한다는 명목아래 성령을 소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신약교회의 중요한 특징은 자발성, 생명력, 생생함, 활력이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반대로 침체기에 빠진 교회는 예배 의식에 있어서 더 형식적이 되고, 예배 형식을 채용하여 공기도서나 의식서로 돌아가는 경향을 띤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부흥을 맞지 않을 때에 성가대에 중점을 둡니다. 또 성가대와 성가대의 독창자들을 돈 주고 사오기도 합니다. 그리고 회중들은 가만히 앉아서 듣기만 합니다. 성가대가 그들을 위해 노래를 부릅니다. 이것이 성령을 소멸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모든 일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그런 일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소멸하는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모든 항목이 미리 정해져 있고 시간이 주어져 있습니다. 예배 순서지대로 행할 것을 종용합니다. 11시에 시작하면 12시에 끝마쳐야 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성령께 기회를 드리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프로그램에 너무 매여 있어서 성령께서 역사하실 틈이 없지 않습니까?
또 인위적인 흥분이나 거짓된 기쁨을 두려워하는 나머지 성령을 소멸하는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거짓된 것을 두려워 한 나머지 참된 것을 소멸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부흥의 가장 큰 장애 요소들 가운데 하나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거짓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성령을 소멸하지 않아야 하며 너무 점잖고 지성적으로 보이려 하다가 하나님의 성령을 물러가게 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제7장 영적 무력증
블레셋 사람들이 행한 일로 인해 우물이 막혔습니다. 우리는 그 쓰레기들 가운데 결함 있는 정통과 죽은 정통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상태의 또 다른 표증들은 무엇입니까?
첫째 - 진리를 적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믿는 것과 그것을 적용하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저 피상적으로 마음에 깨우침을 받는 것으로 만족하고는 그것을 진정으로 부딪혀보거나, 상황에 진정으로 부딪혀보거나, 난제를 직면하려 하지 않습니다.
묵상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묵상과 생각을 통해서만 그 깊이와 참된 이해를 얻을 수 있습니다. 묵상은 언제나 자기 성찰을 불러옵니다.
또 하나 역으로 잘못된 자기 성찰을 행함으로 자기 자신이 무가치하고 쓸모없음에만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에 어떠한 일도 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자신을 성찰하는 데 너무 바쁘고 이렇게 함으로써 너무나 침체되어 결국은 부흥을 위한 기도나 다른 어떤 것을 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습니다. 이것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왜 오늘날 사람들은 이러한 상태에 자주 빠질까요? 그것은 성경에 비추어 자신들을 시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적인 방식을 따른다면 진리가 우리를 탐사하도록 허락할 것이고,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시킬 것이며, 자신에게 설교할 것입니다. 또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 할 것이고, 이러한 것들을 묵상하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죄의식 속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고 스스로 핑계대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머물지 않습니다.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도록 허락합니다. 또 그의 피로 씻김을 받는 데까지 인도하도록 허락합니다.
둘째 - 그리스도인의 삶의 영광스러운 가능성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흥의 역사를 읽어보면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께 압도,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는 의식으로 압도당했으며,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사랑에 대한 의식으로 충만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될 것입니다. 부흥은 하나님께서 이러한 살아 있는 방식으로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시금석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얼마나 알고 있느냐에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을 알기 위해 시간을 내어야 합니다.
셋째 - 우리는 가장 특이한 방식으로 체험을 배제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지적인 동의에 머물지 말고 하나님을 추구하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랑을 알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해지고, 하나님의 모든 충만으로 충만해 지기를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중요한 것은 체험이 체험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을 체험하고 그를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짓된 체험을 무서워한 나머지 체험을 완전히 쫓아버렸습니다. 그것은 잘못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자라나야 합니다. 푯대를 향하여 나아가되 과거는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뛰어가야 합니다.
넷째 - 죽은 정통의 또 다른 표증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참된 관심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이 부족은 교회 박에 있는 사람들의 영혼에 대한 참다운 관심이 부족하게 됩니다.
부흥에 이르기 위한 예비 단계는 하나님에 대한 갈증,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갈구하는 생생한 갈증을 느끼는 것입니다.
제8장 부흥에 대한 갈망
오늘날 교회에 속한 우리들에게 가장 큰 난제는 :부흥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부흥을 갈망해야한다는 사실“을 확신하지 못하는 점이다. 그 이유는
첫째 -우리 자신과 우리 자신의 세대에 몰두하기 때문이며, 특히 우리 자신의 활동에 몰두하기 때문일 것이다.
둘째 - 과거는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셋째 - 우리 자신의 주관주의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도 그런 자세로 접근해 성경은 우리 자신의 문제에 도움을 주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역사를 기록한 책입니다.
따라서 여호수아가 요단강에 12돌을 취한 것이 후대에 기념이 되었듯이 우리는 지난날의 부흥을 바라보면서 부흥에 대한 갈망을 가져야 합니다.
부흥은 그 생명을 깨우고 고무시켜 다시 표면에 나타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교회에서 일어나며, 신자들 속에서 일어납니다. 또 심지어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줍니다.
부흥의 보편적인 특징
1)성령께서 함께 모인 사람들 위에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즉 성령의 부어주심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영적인 것을 의식하기 시작하며, 전에 전혀 갖지 못했던 영에 대한 분명한 관점을 갖기 시작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2)하나님의 영광과 거룩을 인식합니다.
3)무섭고 깊은 죄 의식을 갖게 되고 무서운 죄책감을 느끼게 됩니다.
4)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분명한 관점과 주 예수 그리스도, 특히 십자가에 의한 그의 죽으심에 대한 분명한 관점을 갖게 됩니다.
5)자신의 그리스도 밖에 있는 가족들에게도 관심을 갖게 되며 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6)그리고 이웃이 주께로 돌아옵니다.
이것이 바로 부흥의 때에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일들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로 나가야 합니다.
제9장 부흥의 성격
이 장에서는 부흥에 대한 어떤 특별한 요점을 나누길 원합니다. 즉 부흥의 보편적 현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 모든 계층의 사람이 부흥을 통해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 부흥의 특징입니다. 이상하리만큼 부흥이 일어날 때마다 이러한 일은 규칙적으로 나타납니다.
둘째 - 부흥이란 왔다가 잠시 동안 지속되다가 가 버린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흥은 하나님의 한정된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부흥은 갑자기 또는 점진적으로 와서는 어떤 큰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 다음 그것은 갑자기 또는 점진적으로 끝납니다.
셋째 - 부흥의 결과로 회심한 사람들은 계속 남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부흥의 결과로 얻어진 사람들은 계속 지속적인 믿음을 갖게 됩니다.
넷째 -하나님과 거룩에 관한 대단한 열심히 교회의 성원들이나 이처럼 회심한 사람들 속에 명백히 드러났다는 점입니다.
다섯째 - 목회의 소명을 받은 사람들의 수가 대단히 많이 증가 했습니다.
여섯째 - 도덕적인 추세나 수준이 눈에 띄게 영향을 받아 높아집니다.
부흥의 다양성
첫째 - 부흥이 시작되는 방식에서 여러 차이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갑작스럽게 또는 점진적으로 올 수 있습니다.
둘째 - 부흥이 임하는 집회 형태로 다양 할 수 있습니다.
작은 형태의 기도모임을 통하여 부흥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또는 설교 예배를 통해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또는 복음 전도자가 일련의 정규 집회를 관장하고 있을 때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부흥이 일어날 수 있는 방식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셋째 -부흥을 일으키실 때 사용하시는 사람의 유형도 매우 다양합니다.
넷째 - 부흥이 확산되었던 지역을 살펴보면 그 부흥이 매우 지역적이어서 그 지역에만 머물러 버릴 수 도 있으며 그 지방을 벗어나 전 지역으로 파급될 수도 있습니다. 또 온 나라 전체가 부흥에 휩싸일 수도 있습니다.
다섯째 - 부흥 때에 나타난 “현상” 대단히 다양성이 있습니다.
어떤 부흥은 매우 강력하면서도 다소 조용하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제 “이 돌들이 무슨 뜻이냐?” 보편적 특성과 경우마다 다르게 나타나는 특징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한 단계 더 나아가 그 사실들의 진정한 성질이나 특성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기적”의 사건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일어났던 모든 부흥도 하나의 이적입니다. 그것은 이적 적이고 예외적인 현상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손길이요, 능하신 주님의 일입니다.
부흥의 특징
첫째 - 부흥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역사나 간섭이라고 해야만 바로 설명 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능하신 역사입니다. 또한 주권적인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부흥은 이처럼 독립적인 것입니다.
둘째 -사람들은 부흥을 산출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부흥을 설명할 수조차 없습니다. 만약 부흥이 우리의 방식으로 설명이 가능하다면 그런 일은 부흥이 아닙니다. 부흥에는 방법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부흥의 장소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부흥은 사람의 차원에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오직 “능하신 주의 손”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셋째 - 사람들은 그 부흥을 주도 할 수 없습니다.
넷째 - 부흥의 압도적인 성격입니다.
부흥은 선풍과 같이 옵니다. 밀려오는 조수나 홍수와 같습니다. 이것이 돌들의 의미입니다.
제10장 부흥의 목적
부흥의 목적과 의도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왜 때때로 이러한 일을 하십니까?
첫째 - 이 땅의 모든 백성으로 여호와의 손이 능하심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수아 2:24절에 첫 번째 이유가 나타나 있습니다. “이 땅의 모든 백성으로 여호와의 손이 능하심을 알게 하며” 이것이 첫 번째 이유입니다. 우리가 부흥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이름이 높여지고 그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을 복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부흥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 기독교에 대하여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관심을 갖게 합니다. 왜냐하면 부흥은 실로 하나의 사건이요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 너희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토록 경외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주 분명하게 나타난 몇 가지를 열거해 보기도 하겠습니다.
1)하나님의 능력의 임재에 대한 비상한 의식을 교회에 가져다준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제도요, 몸입니다. 하나님의 거처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을 오늘 교회가 인식해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교회가 왜 이렇게 되었는가?
1)학식과 학문을 의뢰하기 때문입니다.
2)조직을 의뢰합니다.
3)자기의 활동을 의뢰합니다.
이제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언제 이런 일을 행하십니까?
첫째 -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시련과 좌절의 기간이 있은 다음에 이러한 일을 행하시는 것 같습니다.
둘째 -정말 절실한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홍해 앞에서나, 요단강 앞에서와 같이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의 능하신 팔을 들어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부흥도 그렇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때 하나님은 언제나 그러한 순간에 역사하십니다.
제11장 부흥의 결과
행2:12-13
부흥은 어떤 효력이 있는가? 부흥은 세상 모든 족속들로 하여금 우리가 “능하신 주의 손”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사도행전 2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다 놀라며 의혹하여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모든 부흥의 경우 현상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이 없이도 부흥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부흥의 때에는 그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는 것도 진리입니다. 그 현상의 정도는 지역마다 나라마다 매우 다양할 수 있습니다.
그럼 이러한 현상들은 무엇입니까?
첫째 - 물리적(육체적) 현상으로 죄를 깨닫고 땅 바닥에 뒹굴고 입신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둘째 - 정신적 현상으로 마음에 영향을 주는 현상들입니다. 즉 은사가 부어짐으로 기도를 주저했던 사람들이 전에 없던 유창함과 풍부한 표현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또 예언의 은사가 주어지기도하며 지식이 주어지기도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인위적인 것이 아닙니다. 세뇌작용의 결과가 아닙니다. 또 군중의 히스테리도 아닙니다. 심리적 현상으로 생각의 전이나 마음이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는 것도 아닙니다. 또 마귀의 장난도 아닙니다.
우리는 이것을 성경으로부터 접근을 해야 합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성령에 사로잡혀 있었고 어떤 영이 그들에게 임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 삼상10:11) 신약의 행2장에 보면 “술 취한 것처럼”보였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같은 현상은 요엘서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성령의 부어주심의 결과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러한 일들을 다음과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 하나님께서 이러한 방식으로 비상한 현상들을 통해 자신과 자신의 일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둘째 - 성령님은 온 인격을 감동시킨다는 것입니다.
셋째 - 현상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현상은 부수적인 현상입니다. 본질적인 것은 아닙니다. 현상들은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서 나왔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러한 현상에 관심을 집중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지혜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제12장 부흥이 오는 방식
부흥이 오는 데는 여러 단계와 과정이 있습니다.
첫 번째 단계 - 자기의 처지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 인식은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들이 지은 죄의 심각성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떠나감을 인식해야 합니다.
두 번째 단계 - 회개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처지를 인식하는 자만이 회개의 자리로 나갈 수 있습니다. 회개의 목적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빼놓고는 그 어느 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진정한 회개는 행동을 유발합니다. 그러기에 진정한 회개는 우리의 죄악성 특히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의 죄악성이 어떠한가를 심오하게 인식하고서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하실 만한 것을 힘껏 최선을 다해 행하고 싶어 하는 열망을 갖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죄를 버리고 그의 계명을 행하는 것입니다.
제13장 기도와 부흥
부흥의 진행 과정 중에는 분명한 단계와 경로가 있습니다. 교회가 엄청난 죄나 실패에서 곧바로 갑자기 부흥으로 들어가는 일은 결코 발견하지 못합니다. 중간단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의 죄악성을 인식하기 시작했으며, 회개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출33:7에서 “진 밖의 진”을 쳤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를 다시 되찾기를 갈망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도의 처소를 세운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나 기도에 동참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진영 밖의 떨어진 곳에 세웠습니다. 역사적으로 부흥은 어떤 후원을 얻어서 공식적인 활동으로 시작된 적은 없었습니다.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께만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후원은 성령의 지원입니다.
또 한편으로 모세가 진 밖의 회막을 세우는 것은 헌신의 전체적인 개념으로 모세는 이러한 일이 진(陳) 중에서 일어날 수 없음을 느꼈습니다. 이 의도는 진중에서의 죄악 된 방식 분위기에서 떠나 하나님의 방식으로 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헌신이요, 거룩으로의 부르심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모세가 회막으로 나아갈 때에는 백성이 다 일어나 자기 장막 문에 서서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지 까지 바라보며”처럼 그들이 한 일은 고작 관심을 가지고 쳐다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같이 동참하지 않았지만 그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해 궁금해 했습니다. 그러한 일들이 교회사에 나타납니다. 이러한 모세의 행동의 결과 구름 기둥이 그전과 같이 다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표증을 주신 것입니다.
부흥의 첫 번째 조짐은 교회생활에 어떤 일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임을 의미합니다. 그 다음에는 그 모든 것이 잘될 거라는 느낌을 가지는 시점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교회 전체가 영향을 받고 그 영향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비단계요, 준비단계입니다. 그리기에 더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합니다. 오늘 우리의 부르심은 거룩과 수많은 백성들을 위한 중보기도, 그리고 하나님의 면전에서 더욱더 많은 것을 기대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제14장 부흥을 위한 기도
13장의 일은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다시 돌아와 주기를 바라는 기도였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다 많은 것을 위하여 계속 기도했습니다. 부흥이란 교회가 축복을 받고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게 되며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되는 것을 초월한 그 이상의 것입니다. 이것을 위하여 모세는 계속 기도한 것입니다. 그의 기도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개인적인 확신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둘째 - 능력을 위한 기도입니다.
셋째 - 교회와 교회의 사명에 대한 특별한 확증을 요구하며 기도했습니다.(출33:16) 이 말은 교회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모습을 취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왔음을 명백히 보여준 초자연적안 표증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진동이 있어야 합니다.
제15장 부흥을 위한 기도의 동기
모세가 1)개인적인 확신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2)능력을 위한 기도입니다. 3)교회와 교회의 사명에 대한 특별한 확증을 요구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럼 모세가 어째서 이러한 기도를 했는지 그 동기를 살펴보아야합니다.
첫째 -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관심입니다.(13절) 우리가 왜 부흥에 관심을 가지고 기도해야 하는가? 일차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이름과 영광과 영예 때문에 이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둘째 - 교회 자체의 영예에 관심이었습니다.(출32:30-32) 모세는 개인의 축복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의 축복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중보의 기도입니다.
셋째 - 이방인들에 대한 관심이었습니다.(출33:15-16)
모세의 기도방식
첫째 - 담대함과 확신입니다. 모세는 지성소로 나아갈 길을 알고 있었습니다.(히4:14)
둘째 - 논리적으로 따지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기도한 기도였습니다.
셋째 - 기도의 질서와 목표입니다. 분명한 간구를 드리는 것입니다. 모세는 한 가지 하나님의 임재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우리 또한 부흥을 위한 기도에 집중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모세와 같은 중보기도자들이 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제16장 부흥의 내용
하나님께 울부짖는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기 시작하실 때 교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첫째 - 교회가 하나님의 임재와 그 능력을 의식하게 됩니다.(행2:1-4)
이 이것이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같이 물리적일 수 있으며,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임재를 갑자기 깨닫는 것일 수 있으며, 여러 가지 현상이 따라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결과 교회는 진리에 대한 큰 확신을 갖게 됩니다.
둘째 -교회가 큰 기쁨과 찬양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행2:46-47)
셋째 - 예배의 요소, 감사의 요소, 다 같이 큰 자유로움을 누리는 요소입니다.(행2:42-47)
넷째 - 진리를 담대하게 선포할 수 있는 능력이 교회에 주어집니다.
다섯째 - 전체적인 도덕적 상태가 달라집니다.
오늘 교회가 생명력을 잃었습니다. 그 해답이 무엇입니까? 성령께서 교회에 임하시는 것이고, 하나님의 성령이 다시 부어지는 것이며, 교회가 새로운 능력과 권위의 세례를 받고, 증거와 설교의 능력을 받는 것입니다.
제17장 부흥과 하나님의 영광의 나타남
하나님의 부흥은 동시에 여러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일이 어느 때 던지 개인이게 임할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 말은 이러한 이들 중 어떤 것을 체험하기 이하여 부흥의 때까지 가다릴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첫째 - 모세의 요청입니다.
모세는 그는 하나님과 교통하며 하나님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자리에 머물지 않고 더 하나님을 알기를 원했습니다.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더 알고자 하는 열망,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대한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부흥을 진정으로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둘째 - 하나님의 응답
1)하나님이 부분적인 대답 -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를 원할 때 하나님은 “내 등을 보고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고 말씀합니다. 그 영광이 너무 크기에 그 영광을 보고 살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부흥은 바로 하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입니다. 그의 능력을 접촉하는 것이고 그분이 어떤 분인가를 지나치면서 볼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이 우리 또한 가능하며 우리를 위해서 준비된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영광이 지나가는 것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제18장 부흥과 하나님의 선하심의 나타남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것은 하나님의 가까이 계심과 임재를 직관적으로 인식하는 것만 아니라 나의 한 형상이라 부르신 것이 특별하고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영광이 주로 그의 선함을 통해서 우리에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의 나타남과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이해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하신 형상은 곧 하나님의 성품의 나타남이요, 그의 인격과 속성의 나타남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의 속성의 나타남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지식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만큼 승리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은 언제나 눈에 보이는 것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기를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우리의 궁극적 필요는 하나님 자신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하나님의 선하심 속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인해 우리에게 가능합니다. 부흥의 때에 교회에 찾아오는 최상의 축복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더 깊이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선포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
하나님 칭호 - 창조주 하나님, 능력이 충만하신 하나님을 타나내는 칭호입니다.
여호와 칭호 -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는 칭호입니다. 이 칭호는 하나님의 영원성, 영속적인 성품, 영원부터 영원까지 존재하시는 분, 불변하심을 암시합니다.
여호와의 칭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실 때 자신에 관해서 언제나 이 칭호를 사용하시며, 또 사람과 언약하실 때 언제나 사용하십니다. 또 하나 하나님은 구속주라는 것입니다.
구속주 하나님께 해당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 하나님의 거룩하심입니다.
둘째 - 하나님께서 죄를 미워하시고 우리를 심판하심입니다.
셋째 -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사랑과 구속하심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기이하게 결합되어있습니다. 이것을 서로 떼어서는 안 됩니다. 그 모든 것들이 동시에 함께 있습니다. 이것이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입니다.
주권자 칭호 - “나는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이것이 신비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지옥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분을 선택한 것이 아니고 그분이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주권의 위대한 원리입니다.
부흥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흥은 하나님의 때에 일어납니다. 부흥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 십니다. 또한 부흥이 끝나는 방식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가장 뚜렷하게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제19장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
부흥의 때는 성령께서 특별하게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에는 정확한 방식이 있습니다. 출33:21-23에서는 주요한 두 가지 원리가 있습니다.
첫째원리 - 계시하는 것과 감추는 것이 함께 결합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의 영광에 속한 것을 보여주십니다. 그럼에도 동시에 그의 영광에 속한 것은 감추십니다.
두 번째 원리 - 축복해 주시면서 또한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지만 동시에 모세를 바위틈에 숨기시고 그를 손으로 덮으심으로써 보호해 주십니다.
계시의 원리
1)역사입니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사실적으로 일어났습니다.
2)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자신의 방식으로 계시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방식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영광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내신 것입니다. 아버지의 품속에 계셨던 독생자께서 하나님을 나타내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부흥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계시와 감추임, 축복과 보호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장 큰 실재로 느껴지게 되는 기간입니다. 부흥은 이러한 것들이 성령에 의해서 분명하게 느껴져 온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을 언뜻 보는 안목으로 충만해진 때입니다.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으로 충만한 때입니다. 성령께서 특이한 권능으로 임하실 때 그리스도의 영광이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이것은 성령의 특별한 사역입니다.
제20장 부흥에 대한 부담감
이사야62장에서 이사야는 하나님의 도성의 상태를 보면서 슬퍼하며 깊은 염려에 빠져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출발점이 되어야 합니다. 즉 교회의 상태에 대한 염려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도성의 황폐를 바라보면서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 도성을 회복시키시며 번성케 하실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 교회를 바라보면 하나님께서 버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나아가 가능성을 보아야 합니다. “열방이 네 공의를 열왕이 네 영광을 볼 때까지 나는 잠잠하지 않으리라” 이사야는 이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혀있었습니다. 그 생각이 그를 사로잡고 감동시켰습니다. 그의 삶을 온전히 쏟아 바칠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그것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그것이 그의 심령을 짓누르는 짐이 되었습니다.
부흥은 언제나 그러한 방식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방식으로 어떤 사람에게 소명의 짐을 지워 주십니다. 오늘도 이사야와 같은 파수꾼들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주님을 기억하게 합니다. 우리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주님을 기억하도록 상기시켜 주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하나님께 하나님 자신의 약속을 상기시켜 드려야 합니다. 끝으로 우리는 이 일을 계속해야 합니다.
제21장 하나님의 개입
이사야63장1-6절에 더디어 하나님께서 개입하십니다. 이 개입은 계속 기도하며 깨어 있을 수 있게 하는 위안이었습니다. 동시에 그것은 궁극적인 것에 대한 안목이었습니다. 우리는 난제를 만납니다. 그런 다음 기도하라는 권면을 받습니다. 그런 다음 우리가 기도하기 시작하면서 격려가 함께 주어집니다. 좌절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기 위해 영광의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영광의 주님이 누구입니까? 그는 의의 왕이 십니다. 진리와 생명이십니다. 충신(충실) 하십니다. 그는 분노와 맹렬함입니다. 주님은 정복하셨습니다.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분이십니다. 그분의 영광의 왕이십니다. 교회사를 보면 교회가 죽어가고 끝장 난 것 같이 보였지만 갑자기 그분이 나타나자 원수들이 흩어지고 교회는 다시 소생합니다. 이것이 바로 부흥이 뜻하는 바입니다. 주님의 임재로부터 새롭게 하심을 얻는 때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흥이 뜻하는 바입니다.
제22장 부흥을 위한 이사야의 기도
기도는 분명한 질서와 순서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드려야 할 기도는 부흥을 위한 위대한 기도요,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자기 백성들을 하감하사 다시 한 번 찾아와 달라고 간청하는 기도입니다.
이사야의 기도
첫째 - 스스로 하나님의 성품을 상기한 일이었으며 또한 그것을 하나님께도 상기 시켜드리는 기도였습니다.
둘째 - 과거 이스라엘 자손들의 역사를 관조합니다.
셋째 - 자신과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루시는 처사를 생각하도록 합니다. 이스라엘의 문제는 원수들이 그들을 공격한 데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배역하고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오늘의 상태에 대한 진단도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이유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의 반역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러한 행동을 하게 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대적하는 원수를 일으키십니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이 때 교회는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교회가 어떤 존재인지를 스스로 상기합니다. 즉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백성이요 이적적인 방식으로 생성되었고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것을 상기해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하며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그분을 찾고 그분의 얼굴을 구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때 원수를 흩어 시며 주님의 영광으로 다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제23장 부흥 기도의 열정
오늘 우리의 기도는 이사야의 기도처럼 이러한 입장에 처한 것은 자신의 어리석음과 반역 때문임을 먼저 의식하고 회개와 뉘우침으로 하나님께 돌아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기도가 우리의 유일한 소망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이사야의 기도 특성
1)긴박성과 끈질김입니다.
2)강렬한 감정입니다. 참회와 탄원을 오가고 있습니다.
3)간청, 하나님과 논증하는 요소입니다. 이렇게 할 수 있음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의 실제적 간구
첫째 - “주여 굽어 살피소서”로 시작합니다. 오늘 교회의 상황이 왜 이렇습니까? 하나님의 임재가 떠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등을 돌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십니다. 그 아버지의 임재, 얼굴을 보고 싶어 울부짖는 탄원입니다. 여기에는 여러 단계가 있습니다. 여기에도 기도의 단계가 있습니다.
1단계 - 하나님을 경배하고 높이는 일입니다. 우리의 기도의 대상을 정확히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2단계 - 하나님께서 다시 돌아오셔서 긍휼과 자비와 능력을 베풀어 달라고 간청합니다.
3단계 - 하나님의 긍휼과 인애에 전적으로 우리 자신을 맡깁니다.
제24장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임재하심
이사야의 마지막 기도
첫째 - “원컨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이것은 부흥과 관련된 궁극적 기도입니다. 부흥의 때에 하나님의 성령께서 찾아오시기를 구하는 특별하고 긴박한 기도를 해야 합니다.
둘째 - 우리는 왜 이와 같이 기도해야하는가?
1) “주의 대적으로 주의 이름을 알게 하시며” 즉 하나님의 이름이 그 대적들 가운데 알려지고 인정받기 위한 것입니다.
2)이사야64장의 마지막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세계의 상태입니다.
끝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성품을 기억합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과 인휼이 하나님의 진노보다 더 깊음을 압니다. 이러한 것들을 붙잡고 이 안에 계속 거하기를 구해야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요, 만드신 자요, 토기장이요, 안내자며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 자신의 약속을 붙들고 나가며 간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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