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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자기를 보는 것의 중요성

시리즈설교/십자가복음의삶

by 발의무리 2016. 9. 19.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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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자기를 보는 것의 중요성

롬7:18


 

성경은 십자가의 능력을 말하는데 왜 우리는 그 십자가의 능력이 실제가 되지 않는 것일까?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음 (민21의 놋뱀)

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

 

히10: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10: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 하나님 앞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을 여셨음

 

예루살렘의 성전의 휘장

높이 - 20m, 넓이 - 15m, 두께 - 20cm

히4: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1.우리가 왜 능력의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을까요?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으니 교회 가운데, 성도들의 삶 가운데 실재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핵심적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자신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내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알지 못하니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습니다.

내 자신이 십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아니 알지만 십자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론으로 알기에 실제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바로 알지 못하면 십자가에 관한 지식은 이론에 불과합니다.

 

그렇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진리에 대해 설교도 듣고, 그 진리에 대해 말하기도 하지만 십자가를 바라보지 못하고 그 결과 십자가의 능력이 실재가 되지 않는 이유는 자신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결코 십자가에 관한 지식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 대하여 막연하게 죄인이라는 생각은 가지고 있지만 얼마나 심각한 죄인인줄을 잘 모르며 설령 안다 하여도 이론일 뿐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의 감격을 누리기를 원하고 또한 그 능력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신을 올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자신을 올바로 이해한다는 것은 자신을 성경적인 관점으로 보아야 가능합니다. 자기관점에서 보는 자기 이해가 자신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게 합니다.

 

2.성경적 관점과 자기관점 에서 본 인간이해

 

우리는 남의 자식, 남은 잘 보는데 자신은 보지 못함

 

눅6:41. 어찌하여 너는 형제의 눈에 있는 작은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큰 통나무는 보지 못하느냐? 42. 네가 자신의 눈 속에 있는 큰 통나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형제여, 네 눈 속의 티를 빼어 주마’라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여, 우선 네 눈 속에 있는 통나무나 빼내라. 그런 다음에야 네 눈이 잘 보여서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뺄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선함이 없는 자라고 고백합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로마서 7장 18절)

[쉬운성경] 나는 내 안에, 다시 말해서 나의 죄악된 본성 안에 선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압니다. 선을 행하려는 바람은 내게 있지만, 선을 행할 수는 없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가 모태에서부터라고 고백합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시51편 5절)

[쉬운성경] 그렇습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죄투성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나를 임신했을 때부터 나는 죄인이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자신을 어떻게 이해합니까?

자기 육체에 “선함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손들어 보라고 말하면 대부분 손을 듭니다. 그러나 실재로는 자기가 ‘선함이 없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실재로 선함이 없음을 안다면 우리의 삶의 모습이 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선함 없음’을 인식하지 못한 채로 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1) 영적인 우월의식을 갖는 것은 ‘선함 없음’을 분명히 인식한 자의 삶이 아닙니다.

 

성경은 자기 자원으로 구원을 받을 사람이 없음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입으로는 ‘선함이 없음’을 고백하는 많은 사람들이 사실은 자기의(self-rightous)에 빠지기도 하고,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보면서 남보다 자신을 낫게 여기는 영적인 우월의식에 빠지기도 합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빌립보서 2장 3절)

 

자신에게 ‘선함이 없음’을 분명하게 깨닫고 구원이 오직 주님의 은혜임을 선명히 인식한 사람은 사도 바울처럼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게 됩니다.

우리는 자기보다 훌륭한 사람을 보면 자기와 비교해서 자기보다 높게 생각하며 칭찬합니다. 반대로 그렇지 못한 사람을 만나면 우월의식에 빠져 판단하기도하고 가르치려고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죄인이었고, 그분의 은혜 없이 구원받을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아주 조금은 “괜찮은 데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래도 내가 누구보다는 낫지!”라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이러한 자세는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우월의식을 갖는 것입니다. 물론 부분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월의식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십자가의 복음에 기초하지 않고 있습니다.

 

2) 회개에 대한 이해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 속에 선함이 없음을 선명하게 인식하지 못할 때 ‘자기를 변호하는 회개’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회개하면서 자기를 변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분명 언어는 회개의 언어인데 가만히 보면 자기를 변호하는 경우입니다. 이것을 저는 ‘자기를 변호하는 회개’라고 부릅니다.

 

참된 회개의 모습을 다윗의 기도에서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시편 51편 5절)

 

다윗은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죄 중에 태어났기 때문에 죄를 범했다고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며 회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른 회개의 자세입니다. 바울 역시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롬 7:18)”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바꾸어 고백합니다. 즉 자신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인이라는 고백입니다. “하나님,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제가 잘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러나 이런 고백은 참된 회개가 아닙니다. 죄에 접근하는 관점이 잘못되어있습니다. 이런 고백뒤에는 ‘자신은 죄를 짓지 않을 수도 있는 사람이며 실수로 죄를 지은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미안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올바른 회개가 아닙니다. 우리는 원래 죄인이었고, 실패자였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며 겸손히 은혜를 구하는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잘못한 한두 가지의 잘못만 고치면 되는 줄로 생각합니다. 이것들만 고치면 자신은 괜찮은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드러난 잘못들을 고쳐보려고 합니다. 그 실수한 것을 회개하고 고치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이해는 성경적 이해와 다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선함이 없음을 분명히 합니다. 선함이 없기에 우리는 주님의 은혜가 필요한 자들입니다. 결코 한 두가지의 문제가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자신을 비추시면 빛 앞에서 자신의 죄인 됨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에게는 어떤 선함도 없습니다. 이 점을 기억하고 또 기억해야 합니다. 대다수 사람들은 자신을 잘못한 것 몇 가지만 고치면 될 줄 생각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안식을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 믿기가 어렵게만 느껴지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에게서 나쁜 몇 가지만 오려내면 자신은 완전해질 줄 압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요한일서 1장 9절)

 

여기서 “자백하면”은 동의하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죄에 대해서 주님의 관점에 동의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제가 바로 이런 인간입니다. 제 속에 선함이 없습니다. 이 사실에 동의합니다. 제가 죄인인 사실에 동의합니다.” 이렇게 자백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올바른 회개입니다. 자기 관점에서 하는 회개가 아닙니다.

 

동의하지 않으면 대개 자신을 변호하기 마련입니다. “난 그렇게까지 나쁜 인간은 아닌데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넘어졌지”하면서 자신을 변호합니다. 부인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자아가 자신을 변호한다 하더라도 속은 썩어있습니다. 인간의 속에는 온갖 죄악만 가득할 뿐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우리들의 유일한 변호사는 예수님뿐이십니다. 자기 자신이 자기의 변호사가 되면 안 됩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삶은 죄에 대해 주님의 관점에 동의하는 곳에 있습니다. 이렇게 죄에 대해 동의하는 과정을 통해 은혜의 개념을 이해하게 됩니다. 자신이 자기를 내세울 것이 없어서, 오직 은혜로만 가능하기에 십자가를 붙드는 삶이 여기서 가능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은 점수를 평가하라고 하면 0점입니다. 인간의 부패정도를 표현하자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질문하면 겸손하게 50점쯤이라고 말합니다. 어떤이는 30점쯤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이 0점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은 생각하기를 내가 50점쯤이니까 주님이 50점만 도와주면 잘 될 거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한 절대로 주님을 온전히 구하고 의지하는 자리에 서지 않게 됩니다. 단지 부분적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부분적으로만 도움을 입어도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의 자원을 의지하지 않는 교만한 자리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감격이 없으며, 진정한 감사도 없습니다. 하나님께 순복하며 경배하는 예배자로 서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열망하는 자리에 있어야 되는데 주님의 은혜만을 열망하는 그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적인 관점으로 자신을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로 그때 십자가의 놀라운 능력을 경험할 수 있으며, 참된 예배자로 설수 있습니다.

 

 

3. 율법의 기능과 오늘날의 신앙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자원으로 살수 없는 자임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의 기능입니다. 우리가 율법 앞에 서면 자신의 본래 점수를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율법에 도전하지만 마침내 타협의 자리로 가버립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치 못하게 됩니다.

 

1) 율법의 기능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로마서 7장 7절)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갈라디아서 3장 24절)

율법이 우리에게 주어진 목적이 무엇입니까? 가장 주된 것은 죄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율법 앞에서 우리는 자신을 봅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한계를 보게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율법의 기능중 하나는 바로 우리 자신을 보게 하는 일입니다. 거울 앞에 서면 거기 비추인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외모의 잘못된 부분을 고치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율법 앞에 서면 우리의 죄 된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율법을 지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자원으로 살수 없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자기 자원이 아니고 오직 주님의 자원임을 철저히 발견케 합니다. 이것이 바로 몽학선생의 역할입니다. 몽학선생은 노예로서 가정교사입니다. 주인의 아들이 성장하기까지 가정교사 노릇을 하다가 그 아들이 성장하면 주인에게 인도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율법은 우리가 우리 자원으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고 그리스도께로 인도’합니다.

율법은 우리의 점수를 알게 해줍니다. 또한 우리의 자원으로 살수 없음을 깨닫게 해 줍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자신의 점수를 모를까요? 그것은 우리가 자신을 보는 일, 특히 자신의 올바르지 못한 모습을 보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담에 ‘제 잘난 맛에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처럼 자신이 잘난 것이 없음을 보는 것은 무척 힘든 일입니다. 내 놓을 것이 없는 자신의 모습을 보는 일은 비참합니다.

 

2) 오늘날의 우리의 신앙

 

저는 오늘날 우리의 신앙이 바울의 책망을 듣고 있는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의 모습과 아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성령으로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육체로 마치려 함으로 책망을 받게 됩니다.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갈라디아서 3장 2-3절)

 

오늘날의 신앙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감격과 기쁨을 갖게 됩니다.

둘째, 그 후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말씀대로 살려고 합니다.

셋째, 타협의 자리로 갑니다.

타협은 보통 4가지로 나타납니다.

(1) 다른 사람의 평가에 귀를 기울이고 상대적인 의에 만족해 버립니다.

(2) 교회를 떠납니다.

(3) 들을 말만 듣습니다.

(4) 철모를 쓰고 교회에 옵니다.

이런 삶을 반복하다 보면, 나중에 회개는 습관처럼 됩니다. 진정한 회개가 되지 않습니다. 모양만 있습니다. 삶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갈라디아교회의 신앙이었습니다.

이들은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이제 육체로 나아갑니다. 거기에 주님의 은혜가 없습니다. 오직 자신의 행위와 실패한 모습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기에 “예수 믿기가 어렵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참 신앙이 아닙니다. 참 신앙은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4.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실상을 올바로 이해하고 십자가의 공로를 붙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에 도전하여 실패할 때 우리가 선택 할 수 있는 또 다른 하나는 바로 자신의 실상을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실패할 때 자신을 변호합니다. 그래서 타협합니다. 그러나 정직하게 직면하게 될 때 우리가 바로 실패한 자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율법이 우리 자신을 보게 하는 그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0점인 것을 발견합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필요한 진정한 이유를 발견케 됩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적입니다. 우리가 말씀에 도전하지만 실패합니다. 왜 실패합니까? 우리 능력으로 살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때 많은 이들은 타협으로 갑니다. 그러나 타협으로 가서는 안 됩니다. 우리 능력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수 없음을 인정하고, 지기의 모습 그대로 애통해 하며 십자가의 공로를 붙들어야 합니다.

 

갈보리 언덕 예수님 십자가 한편의 강도의 예

 

갈보리 언덕에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한편의 강도는 십자가의 위로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41)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43)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23장 39-43절)

 

한편의 강도는 예수님을 조롱했지만 다른 한편의 강도는 자신의 처지를 인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다”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합니다. 십자가에 달릴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인정합니다. 그리고는 주님의 나라를 구합니다. 예수님의 공로를 의지합니다. 그는 자기를 변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부인합니다. 그래서 정직하게 인정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우리는 이 강도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자원을 의지하는데 아주 익숙합니다.그런데 자신의 자원을 의지하면 십자가를 의지하지 않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의 자원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자주 실패합니까? 얼마나 자주 하나님을 근심시킵니까? 자기 자원으로는 주님을 기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때 죄책감에 빠져 있어야 합니까? 아닙니다. 바로 그때 강도처럼 “내가 바로 십자가에 달려야 할 자입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가 필요한 자”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때 주님을 의지한 강도에게 주신 약속이 우리의 것이 됩니다.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주님과 동행하는 삶과 안식하는 삶을 즉각적으로 이루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갈 때 실패한 자신을 봅니다. 그때에 내가 바로 그런 자라고 고백하며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고 나아가면 하나님은 놀라운 위로와 안식을 경험케 하십니다.

 

우리가 실패했을 때마다, 우리가 범죄 했을 때마다 우리가 주 앞에 엎드릴 때마다 그처럼 말해야 합니다. “주님 우리는 실패한 자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달려야 할 자입니다! 십자가에 내가 달려야 할 인생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그 은혜를 부어주소서!” “나는 주님이 필요합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때 주님은 놀라운 안식을 주십니다. 그때 주님과 동행함을 경험케 됩니다. 용서의 기쁨과 오직 주님의 그 은혜를 구하게 됩니다. 주님으로 인하여 겸손케 됩니다. 이러한 일들이 즉시 일어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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