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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찾는 것(5) 하나님을 찾는다는 의미(2)

시리즈설교/하나님을찾는것

by 발의무리 2018. 1. 24.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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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찾는 것(5)-하나님을 찾는다는 의미(2)

 

시편 27:4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1.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우리 인생의 유일한 목표와 목적이 되는 삶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다윗의 본보기에서 첫 번째와 두 번째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과거, 현재, 미래까지 그의 인생의 모든 날동안 하나님을 찾는 것이 그의 유일한 단 하나의 열망이었고 그가 추구하는 바 이었습니다. 바울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고린도전서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바울이 고린도에 있을때에는 전 세계가 바울앞에 열려져 가고 있었던 때입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표적과 기사가 일어났구요. 수많은 영혼들이 구원받았고 놀랍게 교회들이 세워지고 있었고요. 때로는 도시전체 운명이 사도바울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로 바뀌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상황에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라는 번역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헬라어로 남성이기 때문에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이렇게 번역해야 옳습니다.

 

여기의 중요한 것은 사도바울의 초점은 사역에 있지 않았습니다. 사역을 소홀히 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누구보다 더 많이 수고한 사람입니다.(고전 15:10) 만약 우리의 초점이 사역에 있다면 우리는 타락한 것입니다.자세로는우리가 하나님 중심적인 사역을 감당할수 없습니다.

 

우리의 초점이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아는데 그것이 유일한 목표와 목적이 되어야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가능합니다. 그리고 사역만 하더라도 하나님 중심적인 사역이 가능합니다.

내 계획과 목표를 따르는 사역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며 앞서가시는 일에 동참할수 있고 내 유익과 목적을 위해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아버지 일이 내 일된 자세로 섬길수 있고 내 자원과 노력으로 일궈내는 사역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 사역을 감당할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의 유일한 목표는 예수님을 아는 것이었다고 그랬는데요. 그의 사역의 후기까지도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빌립보서는 옥중서신으로 로마 옥중에 1차로 갇혔을때 그곳에서 쓰여진 4개의 서신서중의 하나입니다. 빌립보서 3장에 보면 그때까지도 오직 예수님을 알기위해 달려갔던 것을 볼수가 있습니다.

 

*빌립보서 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우리 인생의 유일한 목표와 목적이 되는 삶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저는 이 부분이 되어야 비로소 우리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가능하다고 그것이 시작될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 부분이 되어야 비로소 하나님과 진정으로 동행하는 삶도 시작된다고 믿습니다. 이 부분이 되야 하나님의 손에 실제적으로 빚어지는 것도 시작된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유일한 목적과 목표가 된삶이 되지 않으면 아무리 은사가 나타나고 무엇을 본다고 하더라도 삶이 바뀌지 않습니다. 자기 중심적이고 세상적인 사고와 삶의 목표가 바뀌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그들을 다루셔도 그들이 다뤄지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자기가 자기 임의로 원하는 것은 받아들이고 원치 않는것은 버려버릴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것(3)-광야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들 참조.)

하나님을 아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목표와 목적이 되는 것은 과한것도 아니고 높은 단계의 신앙도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신앙에 가장 기초적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감추인 보화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인데 하나님의 통치가 감추인 보화고 더 나아가 하나님, 예수님이 감추인 보화입니다.

 

*마태복음 13:45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46.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두 비유는 같은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가장 값지고 소중하다는 겁니다. 실로 하나님은 우리의 값으로 따질수 있는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비유가 말하는 또 한가지는 그 보화를 취하는 길은 우리의 모든 것으로 취하는 것이라. 이건 믿음의 성격을 말합니다. 우리 신앙의 시작은 하나님 안에 있는, 예수님 안에 있는 그 보화를 발견하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그랬더니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베드로의 이 고백은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에 관한 진리를 지적으로 동의하는 구절이 아닙니다. 신약성경이 아직 않쓰여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의 마음눈을 열으셔서 예수님안에서 그리스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을 보게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것을 너에게 알게 한분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게 교회의 기초, 신앙의 기초가 될거라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다음에 회당에서 자신이 하늘로부터온 생명의 떡인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마다 영생을 가졌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수 많은 사람들이 어려운 가르침이라고 예수님을 떠나고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이렇게 물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베드로는 예수님 안에서 영생의 말씀,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를 보았습니다.

 

*고린도후서 4:3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5.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6.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우리의 구원은 복음되신 예수그리스도를 전할 때 그것을 듣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그 마음눈을 밝히셔서 예수그리스도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그들에게 비추셔야 구원받습니다.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전할 때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그 마음눈을 열으셔서 예수님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메시야를 보게 하셔야 구원받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예수님 안에 있는 보화를 발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그들이 주님을 다시는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누군지 아십니까?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그들이 그것을 보고 메시야가 오신들 이보다 더 놀라운 능력을 베풀겠느냐 이분이야 말로 메시야다.” 그래서 왕 삼으려고 했습니다. 왕 삼으려 했다는 말은 메시야로 인정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이해하는 그러한 메시야가 아니었습니다. 즉 다윗의 후손으로 오셔서 다윗과 같은 정치적인 왕국을 회복할 그러한 메시야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피하셨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더 듣기 원해서 다음날도 일찍 그곳으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밤에 물위로 걸어서 갈릴리 건너로 가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안계시니까 배를 타고 물을 건너서 여기저기 찾다가 예수님이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거기에서 만났습니다. 그때 그 말씀을 가르치신겁니다.

그들을 보세요. 그토록 사모하고 메시야라고 확신해서 왕 삼으려했던 그들이 설교말씀 하나 어렵다고 떠났겠습니까?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바알세불 집혔다고 공격했습니다. 그들의 전통과 그들의 신학적인 이해에 않들어 왔습니다.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은 안식일을 범했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한게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안식일의 이해를 범한겁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서 박스하나 옮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것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전통을 범한것과 말씀을 범한것은 다릅니다. 그들은 전통을 범한게 말씀을 범한 것으로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능력이 나타나는 것은 부인할수 없는데 하나님에게서 온 자면 어떻게 말씀을 범하겠느냐 그러면서 사탄에게서 온거다. 귀신들린자요 바알세불 집힌자요 이단의 괴수라고 가르친겁니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에게 와서 들으면 그런것 같았어요. 예수님에게 와서 들으면 달랐어요. 혼돈이 온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누구든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하니까, 성경에서는 짐승의 피도 못먹게 되었는데 어떻게 사람의 피를 먹는단 말이냐 이 사람 잘못됐구나 그래서 떠난겁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말씀을 전할 때 감동도 받았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베드로처럼 예수님 안에서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을 못봤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안에서 영생의 말씀, 하나님의 거룩한 자를 못봤습니다. 그래서 떠나간겁니다.

우리의 신앙은 예수님안에서 보화를 보는것부터 시작합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게 구원의 출발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오직 성령으로만 가능한 겁니다.

요한11:3에 영생은 하나님과의 사귐이라고 말했는데 예수님도 영생은 한마디로 말해서 예수님과 하나님을 아는거라고 말했는데 그 하나님과의 사귐을 올바로 이해한다면 하나님을 아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목표와 목적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목표와 목적되지 않으면 그것이 우상숭배입니다. 그것이 타락한 삶입니다. 왜냐면 결국 하나님은 그의 삶속에서 그의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할 뿐이니까요. 하나님을 수단으로 여기는 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는 불가능합니다.

 

2.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서 머물기를 열망하는 삶.

성경에서 보면 하나님의 얼굴과 임재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찾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임재를 구한다는 말임을 여러번 보았습니다.

베이커 출판사에서 나온 베이커사전에서 하나님의 임재에 대해서 찾아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소제목에 하나님의 얼굴, 하나님의 성령,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로 나옵니다.

[하나님의 얼굴 ; 구약에서 임재는 히브리 단어 얼굴을 대변하기위해 사용되었고, 그 단어가 전치사와 결합될때 그것은 임재안에서를 의미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얼굴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이다. (실제로 신명기 4:37절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셨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곳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 즉 그분의 개인적인 임재를 구하는 것이었다. (시편 24:6 예배의 핵심은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는 것입니다.) 실로 이것이 이스라엘 성전예배와 개인적인 기도를 요약한다. 하나님의 축복은 그분의 얼굴을 그들에게 비추는 것으로 구성되었다.]

[하나님의 성령 ; 성령안에서 초월적인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들에게 가까이 임하셨다. 성령은 그분을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가 그분의 백성들 가운데 실제가 되시는 매체이고 그분에 의해 하나님의 은사들과 능력이 그들 가운데 역사하는 매체이다. 성령은 그분의 백성들과 함께 하는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 즉 하나님의 본질적인 성품에 따라 행동하는 하나님 그분 자신이었다. 죄인은 하나님의 성령의 도움이 없이 하나님의 임재가운데 있을수 없다. 성령을 빼앗긴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빼앗긴다는 말이다. (다윗이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말라고 시편 51편에서 기도하고 있는데 그 말은 주의 임재를 거두지 말라고 기도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성령이 없이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대화는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 ;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매우 강한 강조와 아울러 하나님의 임재가 특정한 장소에 자리잡을수 있다는 확신이 매우 두드러진다. 구약의 지성소, 하나님의 임재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었다면 그것이 없이 그들은 그렇게 되기를 중단했을 것이다.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중단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성막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들과 만나는 회막이었다. 하나님의 언약궤는 하나님께서 스랍들위에 좌정해 계시는 곳이었다. 언약궤가 하나님의 임재를 보증했다. 신약성경에 새로운 형태의 임재가 계시되었다. 성육신한 말씀인 예수그리스도 안에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들안에 임재하셨다. 그분께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계시하셨다. 그분께서 말씀을 통해서뿐 아니라 그분의 전 생애의 사역을 통해 일하셨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교회가 이제 하나님의 성전을 구성한다.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과의 대화의 종교이다. 그리스도의 몸, 산돌들로 이루어진 영적인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의 창고이고 구약시대 성전보다 무한정 더 위대하다.]

 

*시편 27:8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9.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마시고 떠나지 마소서

하나님의 임재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출애굽기 32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그것이 자기들을 애굽에서 인도한 신이라고 숭배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멸하실려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그들을 위해 기도했고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으시고 그 분노를 돌이키셨지만 331~3절에 보면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땅에 올라가라고 그러나 천사를 보내서 몰아내어 차지하게 하시고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한 땅을 주시되 하나님은 올라가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모세가 올라가서 기도한 내용이 출애굽기 3312~13절에 있습니다. 그전에 하나님이 않가신다고 했는데 모세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기도합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14절에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친히 가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친히 간다는 말은 하나님의 얼굴이 함께 하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말합니다. 그래서 많은 영어성경은 하나님의 임재가 너희와 함께 가리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 출애굽기 33:15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 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지금 그들은 사막에 있습니다. 그들이 날마다 만나와 물만 먹고 있습니다. 과일한번 채소한번 못먹었습니다. 신발과 의복이 닳지 않아서 그렇지 반석에서 물이 터져서 그렇지 그들 샤워한번 제대로 못했구요.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그들을 지쳐줘서 그랬지만 사막은 사람살곳이 못됐습니다. 그곳에 살고 있는데 하나님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을 주시겠다는 겁니다. 포도한송이를 장정 두명이 메고 올 정도로 안락함과 성공, 천사를 통해서 원수를 다 멸하시겠다는 겁니다. 부를 주시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모세를 보세요. 주님의 임재가 함께 하지않는 그 어떠한 세상의 성공도 그는 원치않고 있습니다. 차라리 주님의 임재가 함께하는 이곳에 자기들을 놓아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합니다. 이만큼 모세도 무엇보다 주님의 임재가운데 머물기를 추구했습니다.

 

*출애굽기 33:16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모세도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 백성 만드는게 하나님의 임재라는 것입니다. 천하 만민과 하나님의 백성을 구별하는 유일한 표식은 하나님의 임재가 그들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실제적인 것입니다. 단순한 교리적인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실제적으로 인식할수 있는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도 하나님의 부흥이 임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는 일이 있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진실로 첫 번째 요점은 교회가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게 되고 자기들 가운데 그 능력을 의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능력과 임재를 의식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들이 언제나 의식하는 것은 자기들 가운데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임재를 갑작스럽게 인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문제의 가장 핵심되는 부분입니다. 사람들이 진정으로 각성을 하면 하나님의 임재를 잃어버리는 것처럼 심각한 것이 없다는 것을 인식하게 됩니다. 여러분 제가 하는 이 말씀의 강도를 아시겠습니까]

 

끝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할 때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합니다.

출애굽기 333절에서 하나님이 함께 안가시겠다고 했습니다. 그말은 임재가 함께 안가시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올라가서 기도했더니 가시겠다고 했습니다. 그럼 그의 기도가 어떤기도인지 나옵니다.

*33:12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내게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 13.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여기의 길은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전체적인 뜻, 의도, 의중을 말합니다.

지금 모세는 하나님의 길, 하나님의 의중, 하나님의 뜻을 구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 필요와 목적을 위해 하나님을 줄기차게 구했습니다. 이들은 지금 모세가 구한 하나님의 길, 의중, 뜻에는 관심조차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기필요만 채워지기를 구했습니다. 자기 문제만 해결했으면 됐습니다. 그걸두고 하나님은 저들이 나를 원치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그것이 우선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길, 의중, 뜻을 구했습니다. 지금 어떤일을 하고 계신지 알게해 주십시오. 내가 그 길을 따라 행함으로 하나님이 목적하신 자리에 내가 함께 있으므로 나로 하나님을 더욱더 알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지속적으로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시는 그 자리에 나를 머물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모세는 구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얼굴을 구했더니 아까 하나님의 임재가 않가시겠다고 했던 하나님이 내가 친히 가리라, 내 임재가 너희들과 함께 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신약에 나온 교회인데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함이 없다고 자부할만큼 세상적으로 잘나갔지만 예수님이 문밖에서 두드리고 계셨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임재가 걷혀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철저하게 영적인 분별력이 어두워져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가난하다고 하는데 그들은 부자라고 자부할만큼 어두워질뿐만 아니라 그렇게 후한눈을 가지신 예수님께서 아무리 칭찬할것을 찾으셔도 단 한가지를 찾을수 없는 그런 교회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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