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발의 무리
다가오는 하나님의 군대는 또한 발의 무리(feet company)가 될 것입니다. ‘발의 무리’ 하니까 이상하게 들리죠? 발의 무리란 다름이 아니라,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예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음성을 듣고, 그 음성에 순종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마리아의 삶에서 이에 대한 대표적인 예를 볼 수 있습니다. 이 마리아는 성경에 세 번나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그가 나올 때마다 그가 있는 자리는 예수님의 발 앞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발 앞이 바로 그의 보금자리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0장에서 그는 예수님의 발아래 앉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눅 10:39). 요한복음 11장에서 그는 자기 오라비 나사로가 죽은 후에 예수님께서 그 마을에 오셨을 때, 예수님에게로 달려가자 마자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예수님께 말합니다(요 11:32). 그리고 요한복음 12장에서 그는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로 그 발을 씻습니다(요 12:1-3).
발의 무리의 법칙은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위해서도, 우리의 사역을 위해서도, 그리고 영적 전쟁을 위해서도 매우 필수적인 부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날 주님을 깊이 알고, 주님의 방법으로 사역을 감당하며, 또한 모든 악한 세력들을 제압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자유케 할 하나님의 군대를 일으켜 세우심에 있어 그들을 발의 무리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두 종류의 섬김
우리는 이 마리아의 삶에서 하나님이 세우시는 발의 무리에 관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특히 마르다와 마리아에 관한 기록은 이와 관련해서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누가복음 10:38-42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희가 길 갈 때에 예수께 한 촌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 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많은 성도들이 이 구절을 읽을 때, 부흥회를 연상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부흥회를 할 때, 강사 대접을 위해 부엌에서 수고하는 것보다 설교 말씀 듣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자기는 말씀 듣는 쪽을 택한다 라고 말합니다. 물론 그 말도 맞습니다. 그리고 부흥회 때에는 모든 일들이 말씀 듣고 은혜 받는 쪽으로 계획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휠씬 그 이상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을 섬기는 두 가지 방법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구태어 이름을 붙이자면 마르다적인 방법과 마리아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방법은 그 당시에도 존재했고, 오늘날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이 구절은 이 두가지 방법 중에서 어느 방법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인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어느 방법이 더 좋은 방법인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특히 우리들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 원할진데, 다가오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 속에 동참하기를 원할진데, 마리아적인 방법으로의 전환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마르다 적인 방법
먼저 본문의 상황을 묵상해 보십시다. 마르다, 마리아, 그리고 나사로 남매였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여러 기록들을 볼 때, 그들은 부모님이 안계셨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약 오리쯤 떨어진 베다니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친한 사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 세 남매를 참으로 사랑하셨고, 그 근처를 지나실 때면 항상 그 집에 머물곤 하셨습니다.
그 날도 예수님께서 그들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러자 마르다는 바빠졌습니다. 드디어 선생님이 자기 집에 오셨는데, 할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식사를 대접하는 것만 해도 그렇습니다. 자기들이 사랑하는 예수님이 오셨으니 얼마나 정성을 다하기를 원했겠습니까? 거기다가 그 당시 예수님은 혼자 다니시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제외하고도 같이 다니는 제자들만 하더라도 12명이나 됐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바빴겠습니까. 부엌으로 방으로 정신이 없습니다. 몸이 여러 개라도 됐으면 좋을 지경입니다. 정신적으로도 너무나 분주하고 바쁩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그러한 사정을 아랑곳 않고,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 예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만 듣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마르다가 직접 찾아가서 도와달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몇 차례 얘기했음에도 듣지 않아, 이젠 예수님에게 부탁을 합니다. 마리아에게 자기를 도우라고 말 좀 해달라고… 그런데 그 말을 듣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마르다 자신 뿐 아니라, 그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사람들은 당연히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언니를 도우라고 말씀하실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전혀 뜻밖이었습니다.
마르다 적인 섬김은 한 마디로 말해서 자기 중심적인 섬김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반드시 자기의 욕심을 위해 섬긴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구절에서도 우리는 마르다가 자기의 욕심을 위해 예수님을 섬겼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르다 적인 섬김은 자기 임의로 혹은 자기 생각대로 예수님을 섬긴다는 의미에서 자기 중심적인 섬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르다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많은 경우에 그 배경에는 자기 욕심이 놓여 있습니다.
마르다가 한 일도 한편으로 다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식사를 대접하는 것, 그것은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또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부흥회 때 강사를 대접하는 것, 그것은 절대로 작은 일이거나 소홀히 해야 할 일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가 마르다 적인 방법으로 섬기는 일들도 다 필요한 일들일 수 있습니다. 다 중요한 일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르다 적인 섬김의 한 가지 특징은 항상 바쁘고 분주한 것입니다. 설령, 육신은 덜 바쁠지라도 정신적으로 매우 분주하고 바쁩니다. 여러가지 생각이 많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혹은 목회자들이 주의 일을 하면서 육신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얼마나 바쁩니까. 해야할 일은 많지, 시간은 없지, 또 어떻게 해야 할지, 궁리해야 할 것도 많지... 마치 마르다와 같은 심정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절대로 분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매우 단순합니다. 성경 전체가 그것을 증명합니다. 설령, 하나님의 방법은 육신적으로는 매우 바쁠지 몰라도, 그 마음은 항상 차분하고 단순합니다.
마리아 적인 방법
마리아적인 방법은 예수님이 칭찬하신 방법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단순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눅 10:41-42). 우리 말 성경에는 여기서 “몇 가지만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많은 영어 성경이 이 구절을 “오직 한 가지만 족하니라.”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에게는 오직 한가지면 족합니다. 그리고 그 한 가지는 바로 마리아가 택한 방법이요. 하나님 앞에서 훨씬 좋은 방법입니다.
마리아 적인 방법은 먼저 예수님의 발 앞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의 발 앞에 엎드려 주님을 더 알기를 구하고, 주님을 더 사랑하기를 구하는 방법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입니다. 마리아적인 방법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일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그 당시 이름은 사울)을 전도한 아나니아가 주님을 섬긴 방법입니다. 그리고 제가 교회 회복 시리즈 1권 「성령이 역사하시는 교회」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방법이요, 성경에 나오는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고 섬긴 방법입니다.
이 마리아적인 방법은 매우 단순합니다. 절대로 복잡하지 않습니다. 사실, 이 특징만 올바로 이해해도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 현재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나 그렇지 않나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 지금 내 마음이 분주하고 바쁘면, 나는 절대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잇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하셔야 할 일을 내가 하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아무리 여러가지 일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요즈음 매우 바쁩니다. 한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로서, 새물결선교회의 일을 인도하는 목사로서, 또한 거의 매주 화요일마다 하루에 세 번씩 집회를 인도해야 하고, 한 달에 평균 두 차례 정도는 타 교회에 집회에 나가야 하고, 틈을 내어서 책을 써야 하고, 또 찬양을 번역해야 하는 등 매우 바쁩니다. 거기다가 저는 한 아내의 남편이고, 십대인 세 아이의 아버지입니다. 그러나 저는 할 일이 아무리 많을지라도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있으면, 절대로 분주하지 않습니다. 마음은 매우 차분하고 단순합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일들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매우 단순합니다. 내가 할 일은 그 무슨 일도, 그 무슨 사역도 아닙니다. 내가 할 일은 오직 주님 앞에 엎드려 주님의 얼굴을 구하며, 그분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의 목적이요, 목표요, 내가 할 한가지 일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행하시는 대로 그저 내 몫만 순종하면 됩니다. 그러면 나머지 일들은 모두 그분께서 하십니다. 그분께서 다 이루어 가십니다. 그런고로 나는 그 바쁜 가운데서도 안식을 누립니다. 그분의 평가 가운데 거합니다.
그러나 반면에 내가 주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있지 아니하면, 나는 마음이 매우 분주하고 복잡해집니다.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하고, 도무지 안식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신뢰가 없는 채 모든 것을 내가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한다고 해서 열매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대로 일이 진행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원하시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내 생각과 내 경험을 따라 일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마리아적인 섬김에 진정한 헌신이 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자매였습니다. 그래서 마리아에게 옥합이 있었다는 것은 마르다에게도 있었을 확률이 큽니다. 그러나 옥합을 깨뜨린 사람은 마르다가 아니라, 마리아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요 12:1-3).
마르다 적인 섬김은 대부분 경계선을 그어놓고 하나님을 섬깁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더 헌신적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십일조는 말할 것도 없고, 감사헌금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하고, 봉사도 더 많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르다 적인 섬김은 모두다 경계선을 그어 놓고 그 범위 내에서만 섬기고 봉사합니다. 절대로 그 이상은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항상 그런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많은 경우에 마르다 적인 섬김은 그 배후에 개인적인 욕심이 있습니다. 그것이 그 섬김으로 인한 하나님의 축복이든지, 혹은 사람 앞에서의 칭찬이든지, 모양은 각기 다를 수 있지만, 개인적인 욕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경우에 열심히 섬기고 봉사하다가도 목회자가 자신을 알아주지 않거나 혹은 다른 일이 생기면 금방 그것을 중단합니다.
그러나 마리아적인 섬김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않고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만큼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리아적인 섬김에서만 옥합을 깨뜨리는 헌신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나 반대급부(反對給付)로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예수님께 대한 사랑에서 말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단 한 가지 이유로 그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쏟아 붓고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었던 것처럼, 자신의 ‘옥합’을 깨뜨리기까지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에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이루시기 위해서 발의 무리를 일으켜 세우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부으실 것입니다. 그들은 바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세상이 감당치 못할 자들입니다. 그리고 온 세계가 하나님의 역사를 배우기 위해서 그들에게 나아올 것입니다.
주님의 주권을 날마다 실천하는 것
마리아적인 섬김은, 날마다 우리의 삶에서 주님의 주권을 실천하는 것과도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주님의 주권을 우리의 삶에서 날마다 실천하는 것은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을 위해서 핵심적인 일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이론이나 모양이 아니라, 실재입니다. 특히 오늘날 하나님은 주님을 깊이 아는 주님의 군대를 일으켜 세우고 계신데, 주님의 주권을 실천하는 것은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위해서도 필수적인 사항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을 더욱 알 수 있게 되고,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로 인도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주권을 실천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단순한 고백이나 말이 아니라, 우리의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날마다.
그렇다면, 주님이 우리 주가 되는 삶은 어떠한 삶을 말합니까? 물론 그것은 주님이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주인이 되시는 삶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막연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이론이 아니라 실재인데, 보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와 관련해서 우리에게 중요한 구절이 누가복음 6:46-49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리리라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히되 잘 지은 연고로 능히 요동케 못하였거니와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주초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히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하시니라”
우선 여기에 보면, 우리가 주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한다고 해서, 혹은 주님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그것이 주님이 우리의 주가 되시는 삶은 아닙니다. 예, 우리들이 주님을 주라고 고백하는 것, 그분을 주라고 부르는 것, 그리고 그분을 주로 찬양하는 것, 모두 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그것이 주님이 우리의 주가 되시는 삶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주권을 실천한다는 의미
그럼, 주님이 우리의 주가 되시는 삶은 어떠한 삶을 말합니까? 46-4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혹은 하나님이 우리의 주가 되시는 삶은 정확하게 예수님께 나아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그것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주권을 실천하는 삶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이러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 발의 무리야말로 바로 주님의 주권을 날마다 실천하는 무리인 것입니다.
내가 아는 한 목사님은 아침에 새벽 기도를 드릴 때마다 “하나님, 오늘은 어떤 일을 하기를 원하십니까?”라고 묻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순종하려고 힘씁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하나님이 가라는 마을로 가서 전도하면서 하나님의 행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보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심방하면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나는 그분을 날마다 세워가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손길을 옆에서 보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그분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님과의 친밀함, 그리고 그분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 면에서 놀라웁게, 그야말로 날마다 새롭게 자라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주님의 주관을 실천하는 삶을 사는 것은 우리들이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감당함에 있어 특히 중요합니다. 우리들이 주님의 주권을 실천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감당하면서도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7장에서 말씀하신 불법을 행하는 자들에 대해서 나는 그 동안 확실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지칭하시는 불법을 행하는 자들은 과연 어떠한 자들일까? 그들은 우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 자들인데,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아버지의 뜻을 행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그런데 위에 나오는 누가복음의 구절과 마태복음 7장의 구절을 대조해 보면, 이에 대한 대답들을 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 이 두 구절은 같은 사건에 대해서 다루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마태복음 7:21-29은 말합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너릐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노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이니라.”
먼저, 여기서도 단순히 주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주님이 주가 되시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주님의 주권을 실천하는 삶, 즉 주님 앞에 나아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대로 순종하는 삶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삶인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사실, 그렇기 때문에 마리아적인 섬김을 하나님은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임의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므로, 자기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불법을 행하는 자들은 바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삶, 즉 주님의 주권을 실천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예, 그들도 주님을 주라고 고백하고 선포한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또 수많은 기적을 행한 자들입니다. 무슨 마호매트나 석가의 이름이 아닌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러한 일들을 행한 자들입니다. 이렇게 볼 때, 여기서 말하는 불법을 행하는 자들은 무슨 이상한 이단 집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기독교계에서 매우 인기 있는 사람들일수도 있습니다. 위대한 부흥사라고 추앙 받는 사람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놀라운 예수님의 사역을 감당할지라도 주님의 주권을 실천하는 삶을 통해서 하지 아니하고, 임의로 행하는 자들을 불법을 행한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시되 철저하게 하나님의 주권을 실천하시는 삶을 통해 감당하셨던 것을 보면, 이 점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같이 행하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알들에게 보이시고…”(요 5:19-20).
추가로, 주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기 보다 임의로 주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배후에는 개인적인 야망과 욕심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성령이 역사하시는 교회」에서도 살펴보았듯이, 하나님의 은사는 돌이킴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능력을 가지고 개인적인 야망을 위해 임의로 사용할지라도 그 은사들은 여전히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사실입니까? 그러므로 오늘날 특히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다가오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반드시 주님의 주권을 실천하는 삶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한 삶이 아직 우리 가운데 있지 아니하면, 그러한 삶이 이루어질 때까지 하나님 앞에서 애통하며, 부르짖으며, 갈급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이러한 삶이 없으면, 주님을 알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이 시대에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주권을 실천하는 삶만이 우리를 든든히 세워줍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모두 주님의 주권을 실천하는 삶을 사는 자를 반석 위에 지은 집에, 그리고 그렇지 않는 자를 모래 위에 지은 집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 두 집은 보통 때는 전혀 차이가 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태풍이 불고 홍수가 나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근본적인 차이가 나타납니다. 반석 위에 지은 집은 든든히 서서 아무런 피해를 당하지 않는 반면, 모래 위에 지은 집은 순식간에 무너져 버릴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발의 무리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나 그렇지 않는 사람들 모두 보통 때는 다 서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둘 다 신앙생활 잘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환난이 닥치고 어려움이 다가오면, 그 차이는 극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오늘날 발의 무리의 삶을 사는 성도들은 어떠한 환경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아니하고 든든히 서는 반면, 그렇게 살지 않는 성도들은 환난이 올 때, 심하게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오늘날 각자가 주님의 계시를 가져야 합니다.
오늘날은 어느 때보다 각자가 ‘발의 무리’의 삶을 통해 주님의 계시를 가져야 할 때입니다. 이런 말을 하면, 사람들은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이 있는데, 무슨 또 다른 계시가 우리에게 필요하단 말이냐?’라고 대적합니다. 이 말은 전혀 그런 말이 아닙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또 다른 극단으로 치닫습니다. 그들은 소위 자기들이 받은 계시 외에는 아무 것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받은 계시를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고자 하는 겸손함도, 그리고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자 하는 배우는 자세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한 자들은 필연적으로 미혹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각자가 하나님의 계시를 가져야 한다는 말은 각자가 하나님과의 개별적인 관계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분별하고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교사로부터 아무리 놀라운 하나님의 진리를 혹은 하나님의 길을 배웠다 할지라도 그것만으로 부족합니다. 각자가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과의 개별적인 관계에서 그것을 깨닫고 분별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진정으로 자기의 것이 되지 못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선지자로부터 하나님께서 오늘날 행하고 계시는 혹은 앞으로 행하실 엄청난 일에 대해서 들었다 할지라도 그것만 가지고 안됩니다. 하나님과의 개별적인 관계에서 하나님의 조명을 통해 자신도 그것을 ‘보고’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는 그 하나님의 역사 속에 동참할 수 없습니다.
나는 우리 각자가 하나님의 계시를 가져야 이 시대를 통과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들이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지금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요엘서는 이 심판이 모든 나라와 모든 산업에 다 걸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도 하나님께서 말세지말에 세상의 흔들릴만한 모든 것을 흔들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히 12:26-27). 그리고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실 때, 성도라 할지라도, 세상과 구별이 없이, 세상의 방법대로,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세상과 함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계 18:4). 물론 나는 이 말이 그들이 지옥간 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세상에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그 심판의 기간 동안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호하시고 돌보시되, 마치 광야 생활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셨단 것처럼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 우리들이 오늘날 ‘발의 무리’의 삶을 배워야, 다가오는 하나님의 심판의 때를 통과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것은 생명 그 자체였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인도하신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그 삶 즉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라”(신 8:3). 우리는 이 구절을 읽을 때, 하나님께서 광야 생활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치시기 원하셨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잘 묵상하여 그 말씀대로 지키는 삶이었다고 단순하게 생각합니다. 물론 그 말도 전혀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을 읽어보면 알 듯이, 나는 단순히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그들에게 율법을 주시고, 그 율법대로 잘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 그들을 광야로 인도하셨다고 생각하지 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은 구태여 그들을 광야로 인도하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나는 이 구절이 그 이상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인도하신 이유는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을 배우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이야말로 그들에게는 생명 그 자체였습니다. 광야는 아무런 재원이 없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사실,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광야로 인도하신 이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한 모든 상황에서, 그들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다가오는 환난의 때에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채우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세상이 하나님의 극심한 심판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믿음으로 평안 가운데 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막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것도 그렇게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40년 동안 먹이시고 인도하셨는데, 하물며 오늘날 우리에게는 얼마나 더욱 더 채우시겠습니까? 동시에 오늘날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바로 ‘발의무리’의 삶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우리의 생명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내가 섬기는 포도나무교회에 한 성도가 있습니다. 그 성도는 IMF가 터지기 얼마 전에 직장을 그만 두게 되었습니다. 그 뒤 그는 약 1년 동안 직장이 없이 집에서 쉬었습니다. 나이는 40이 넘었고, 자녀들은 있는 데,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벌어 놓은 돈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기간 동안, 그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배우게 하셨습니다. 그의 삶은 놀라웁게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가정도 아름답게 치유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그 가정이 그렇게 원만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위기도 몇 번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은 그에게 사업의 길을 열어주셨는데,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때로는 자기에게 주신 기도 응답을 통해, 때로는 다른 성도에게 주신 기도 응답을 통해, 때로는 예언의 말씀을 통해, 그것도 여러 사람을 통한 여러 가지 예언의 말씀을 통해, 하나하나 인도해 주셨습니다. 사업의 길이 열린 후에도, 어떻게 인내할 것, 또 어떻게 대처할 것 등 구체적으로 상세하게 인도해 가셨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수입 면에서도 생활하는데 부족함이 없을 만큼 본 궤도에 오르게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이 IMF 시대에 본인을 변화시키시고, 가정을 치유하시고, 또 사업의 길을 여시고 도와주시니...
거기다가 그 기간 동안에 없던 아들까지 주셨습니다. 딸만 둘이었는데, 40이 넘어서 아들을 주신 것입니다. 그것도, 어려운 상황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먼저 꿈을 통해서 아들을 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임신한 것이 발견된 후에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두려움이나 염려 없이 기다릴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귀한 아들을 주셨습니다.
나는 이 성도의 일이 하나님께서 앞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채우실 방법과 우리들이 그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의 모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매운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이 성도의 삶에서도 볼 수 있듯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어느 교회에 다니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분별함에 있어, 그리고 그것에 순종함에 있어 개인 뿐 아니라, 교회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결국,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고, 각 성도는 그 몸의 지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몸이 정상적으로 행동하기 위해서는 각 지체가 서로 협력하여 움직여야 하듯이, 우리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고, 잘 분별하고, 그리고 그것을 잘 순종하기 위해서는 성도들 사이의 협력이 필수적입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기 위해서 주님의 주권을 실천하는 삶은 필수입니다.
이 시대에 우리들이 든든히 세워져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위해 쓰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그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발의 무리의 삶’이 필수적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기 위해선, 하나님의 행하심을 ‘볼’ 수 있어야 하는 데, 하나님은 발의 무리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행하심을 알리시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발의 무리의 삶을 살지 않고도 우리는 얼마든지 하나님의 능력을 행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사들을 얼마든지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사들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발의 무리의 삶을 살지 않고는 절대로 하나님의 행하심을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이고,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중과 의도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들이 다가오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들이 무엇보다 배워야 할 것이 바로 발의 무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특히 오늘날 예언적인 백성을 세우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에 있는 것들을 알기를 원하는 자들입니다. 그것들을 열정적으로 붙잡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행하심에 동참하기 위해 어떠한 대가도 기꺼이 지불하기를 원하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자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역사 속에 동참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러한 자들을 세우사 말세지말인 이 때에 놀라웁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발의 무리’가 되기 위한 중요한 요소
‘발의 무리’의 삶은 이토록 중요합니다. 특히 오늘날 하나님께서 행하시고 계신 일과 관련해서 매우 중요합니다. 그럼 우리들이 이러한 삶을 살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시간.
‘발의 무리’의 삶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사무엘이 그랬던 것처럼, 바울을 전도했던 아나니아가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마리아가 그랬던 것처럼, 주님 앞에서 주님의 얼굴을 바라며 기다리는 시간이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삶에서 이에 대한 가장 좋은 예를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기다리는 시간을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새벽기도 하셨고, 철야기도 하셨고, 기도원에 가셔서 기도하셨고, 금식기도 하셨고, 기타 여러 가지 모양으로 기도하셨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사역보다 하나님 앞에서 기다리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허다한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나음을 얻고자하여 모여 오되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눅 5:15-16).
이처럼, 우리도 예수님과의 교제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그분을 더욱 아는 것을 우리의 삶의 유일한 목적과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고 시간을 내어서 그분 앞에 나아가 그분의 얼굴을 구하며 그분의 음성을 듣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분의 마음을 알고, 그분이 계신 곳에 같이 있기를 열망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야 어찌하든지, 주님만을 우리의 기업으로 삼고,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실천하며, 그분이 행하시는 일에 동참하며, 그분이 관심을 가지고 계신 일을 위하여 그 분께 간구하기를 열망하는 마음으로 그분 앞에서 서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무엇보다 이러한 시간을 원하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들에게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하나님은 「성령이 역사하시는 교회」에서 살펴본 것과 같은 중보기도를 드리는 자들에게 자신을 놀라웁게 계시하시는 데,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여호수아에게서 매우 중요한 교훈 한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는 당시 하나님을 가장 깊이 아는 하나님의 종을 가장 가까이서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세계적으로 하나님을 가장 잘 아는 그리고 하나님께 가장 귀하게 쓰임 받는 어떤 목사님을 누구보다 가장 아끼어서 잘 아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도 개인적으로 그와 같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갖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과 대화하러 회막에 들어갔을 때, 다른 사람들은 다 자기 집에 있었지만, 여호수아는 바로 그 회막 문에 서 있었습니다. 모세가 그곳을 떠난 다음에도 그는 그곳을 떠나지 아니하고, 그곳에서 하나님을 기다리며 하나님과의 교제를 간절히 사모했습니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 기둥이 내려 회막문에 서며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 모든 백성이 회막문에 구름 기둥이 섰음을 보고 다 일어나 각기 장막문에 서서 경배하며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그 수종자 눈의 아들 청년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출 33:8-11).
영적인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언젠가는 자기를 변화시켜 주셔서 하나님의 역사 속에 동참하도록 하시겠지’ 라고 안일하게 생각합니다. 또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기를 하나님은 자신이 원하시는 일이면 우리의 팔을 비틀어서라도 꼭 하게 하시는 분으로 생각합니다. 예,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때로는 징계의 채찍을 통해서 우리를 부르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의 팔을 비틀어 우리에게 자신의 일을 억지로 하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마치 탕자의 아버지가 그 아들이 자신의 분깃을 요구했을 때, 그가 집을 떠나면 그 모든 것을 탕진하고 고생할 줄 알면서도 그에게 분깃을 주셨듯이, 하나님은 그러한 분입니다. 하나님은 그가 깨닫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기 위해서는 경각심이 요구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거듭거듭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도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라고 반복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경각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이는 자만이 들을 수 있습니다. 듣고자 하는 자세를 가지고, 그리고 순종하고자 하는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자만이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무엘에게서 이에 대한 매우 좋은 예를 볼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 3:10). 라고 말하며 엎드렸습니다.
나는 포도나무교회를 섬기면서 이 부분을 매우 선명하게 봅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서 놀라운 일들을 행하시고 계십니다. 새물결 선교회 집회를 통해서, 그리고 다른 시간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나타내시고 계십니다. 그 하나 하나의 일들을 보면서, 나는 참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찬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참으로 오묘하고 신기하기까지 합니다. 물론 앞으로는 더욱 놀라운 일들을 나타내시리라 믿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바로 우리 가운데서 그렇게 놀라운 일들을 나타내시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성도들 중에는, 물론 소수이지만, 그 하나님의 역사들을 전혀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치 눈이 감긴 것처럼, 전혀 보지 못할 뿐 아니라, 전혀 관심도 없습니다.
어떤 성도들은 하나님의 행하심을 듣습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을 부분적으로 봅니다. 하나님의 만지심과 역사들은 다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그들이 하나남의 역사를 부인하거나 거부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그 모든 역사들을 다 인정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인하여 좋게 생각합니다. 그들도 때로는 기도를 받기고 하고, 또 마음으로 자신들도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자 하는 사모함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의 삶을 드려 하나님의 행하심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을 따라 순종하고 동참하기 위하여 자신이 삶을 드려 뛰어들지 않습니다. 그들은 막연하게 ‘하나님이 원하시면 언젠가는 자기들도 참여시켜 주시겠지’ 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나는 매우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이 역사 하시는 방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내심은 이미 그들을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로 부르시는 초청입니다.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행하심을 주시하여 보고, 자신의 삶을 조정하여 하나님의 행하심에 맞춤으로써 그 초청에 응답하여야합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행하심에 동참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절대로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할 수 없습니다. 무작정 하나님이 어느 날 자신들의 ‘팔을 비틀어’ 하나님의 역사 속에 동참하게 해 주실 날을 기다린다면, 그 날은 평생동안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성도들이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행하심을 진실로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 그들은 많은 하나님의 역사들을 보았을지 모릅니다. 많은 하나님의 은사들을 경험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진정으로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만약 그들이 진정으로 보아야 할 것을 보았더라면,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다 드려 동참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가장 값진 진주를 발견한 상인처럼, 하나님 나라의 보화를 진정으로 발견한 자는 모든 것을 팔아서 그 보화를 살 것입니다.
그만큼 영적인 경각심이 요구됩니다. 참으로 개어 하나님의 행하심을 주시하는 자세가 필수적입니다. 그러한 자들에게 하나님은 자신의 행하심을 더욱 선명하게 나타내 보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행하심을 발견하였으면, 반드시 그것에 맞추어 자신의 삶을 조정하고 이에 동참해야 합니다.
반면에, 포도나무교회 성도들 중에는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그것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예수님 안에서 빚어지고, 만져지고, 준비되어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이 땅에 계셨을 때에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그야말로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것들을 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것들을 대적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 기적들을 인하여 기뻐했습니다. 그 기적들을 경험하고 체험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경험하기 위하여 때로는 며칠씩 굶어가면서 예수님을 좇아 다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조정하여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자신들의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른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이야말로 예수님의 사역에 적극적으로 동참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들을 통해서 예수님의 사역이 계속되게 하셨을 뿐 아니라, 온 세계를 변화시키셨습니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한 것들을 본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날 때, 그들도 떠나겠느냐고 물으시는 예수님의 질문에 그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줄 믿고 알았삽나이다”(요 6:68-69).
삶이 단순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동참하기 위해서 오늘날 우리들에게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우리의 삶이 단순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역사를 보지 못하도록 많은 성도들의 눈을 가로막는 가장 큰 요인 중의 하나가 복잡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2:1-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로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이 구절은 우리의 신앙 생활을 경기장에서 달리기 경주하는 것에 비교하고 있습니다. 단거리보다는 장거리 경주를 염두에 두면, 성경이 의미하는 바에 더 가까울 것입니다. 그 관중석에는 히브리서 11장에 언급된 믿음의 선진들을 포함한 앞서 간 모든 믿음의 선배들이 우리를 응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푯대와 목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의 경주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하나는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즉, 삶이 단순해지는 것입니다. 최근 들어서 올림픽이나 아세안 게임 등의 경기가 TV에 많이 중계되는데, 선수들의 복장을 보십시오. 얼마나 단순하고 간편합니까? 한복이 아무리 세계에서 화려하고 아름다운 의상이라 할지라도, 한복을 입고 경기장에 나서는 선수는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성도들의 삶이 너무 복잡합니다. 너무 분주합니다. 나는 자주 오늘날 성도들의 삶을 미국으로 이민 간 우리 교포들에 비유합니다. 그분들의 삶은 참으로 바쁩니다. 많은 교포들이 처음 이민 가면 밑바닥 일부터 시작합니다. 언어장벽도 있고 그 사회도 모르기 때문에, 한국에서 가지고 있는 기술을 활용할 수 있는 경우는 거의 드뭅니다. 아파트에 살면서(미국은 서민들이 아파트에 삽니다), 부부가 열심히 일합니다. 미국에는 어린아이들끼리만 둘 수 없기 때문에, 부부가 번갈아서 밤낮으로 일합니다. 가족끼리 서로 편히 쉬 실간도 거의 없이 그저 일합니다. 그러다가 3년 남짓 고생하면, 이제 집도 사고 자동차도 보다 나은 것으로 바꿉니다. 미국에서는 집값의 십분의 일만 있으면, 은행에서 30년 장기 융자를 받아 집을 살 수 있기 때문에 집사는 것이 한국보다 훨씬 쉽습니다. 그러나 이제 집과 새차를 사고 나면,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더 바쁘게 그리고 더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오늘날 성도들의 삶이 매우 바쁩니다. 그런데 그 주된 이유 중의 하나가 세상 사랑하는 것에 기초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육신적으로 보다 안락한 삶, 사람들이 보기에 보다 좋게 보이는 삶을 유지하기 위해 보다 넓은 집 그리고 보다 좋은 차를 사야하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참으로 바쁩니다. 이러한 삶을 가지고는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는 것인 데, 오늘날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역사를 보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가장 큰 요인 중의하나가 바로 이러한 복잡한 섦입니다. 예수님께서 씨뿌리는 비유에서 말씀하셨듯이 세상 사랑에 기초한 복잡하고 분주한 삶은 절대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동참할 수 없습니다. “더러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락서 기운을 막았고...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리와 일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 치 못하는 자요”(눅 8:7,14).
우리는 삶이 단순해져야 합니다. 임대 아파트면 어떻고, 작은 차면 어떻습니까? 좋은 옷이 아니면 어떻고, 메이커 없는 신발이면 어떻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훨씬 더 가볍게, 그리고 훨씬 많은 시간을 주를 위한 삶에 투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의 무거운 것을 벗어버리는 것이 어렵습니까? 주님을 위해 삶을 단순하게 하는 것이 어렵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하십시오. 부자 청년은 바로 그 앞에 계신 분이 누구인지 몰랐기에, 그의 돈이 아까와 예수님께로부터 돌아서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영생을 사모했음에도 말입니다. 우리들이 세상에서 가장 값진 진주에 비유된 하나님 나라의 보화를 발견한다면, 세상의 보화를 포기하는 일은 쉬울 것입니다.
순종이 관건입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기 위해서, 그리고 발의무리의 삶을 배우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하나는 순종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에서 반석 위에 세운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의 차이가 무엇이었습니까? 이 비유에서 둘 다 예수님 앞에 나아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두 사람의 차이는 단 하나 순종이었습니다. 그만큼 순종이 관건입니다.
순종이 없으면, 진정한 깨달음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오한복음 7:1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우리들이 아무리 놀라운 하나님의 비밀을 깨달았다 할지라도 그것을 순종하지 않으면, 즉 그것을 실천에 옮기지 않으면, 그것은 진정으로 자기의 것이 되지 못합니다. 그것을 이론적으로는 알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의 실재는 알지 못합니다. 우리 신앙은 이론이 아니고, 실재입니다.
하나님은 또한 순종하는 자에게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애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요 14:23).
따라서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환난이 올 때 설 수 없습니다. 참으로 알아야 할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 실재를 모르기 때문에 뿌리가 없습니다. 기초가 없습니다. 그들도 보통 때는 매우 그럴듯한 모양을 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많은 것들을 깨닫고,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들을 간증하고 나눈 술도 있습니다. 그러나 순종하지 않으면, 그것은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습니다. 환난이 오면, 그 모든 것들은 순식간에 무너질 것입니다.
포도나무교회나 새물결선교회에 오는 성도들 중 일부 성도들에게 나타나는 한가지 현상이 있습니다. 그들이 처음에 올 때는 참으로 갈급하고 목말라서 옵니다. 그들은 전파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길을 발견하고, 기뻐하고 감격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의 삶 속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바뀌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교제가 열리기 시작합니다. 그들의 기도의 내용이 바뀝니다. 그런데 한 두 해 지나면서 그 열정이 식어지고 느슨해지기 시작합니다. 이제 어느 정도 알았다고 그들은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나는 그 이유가 그들이 진정으로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들이 보아야 할 것을 진정으로 보았다면, 그들은 날이 갈수록 더욱 주님을 사모하고 열망하게 될 것입니다. 모세가 그랬던 것처럼, 다윗이 그랬던 것처럼,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더 큰 갈급함으로 하나님 앞에 엎드리며, 그분의 행하심을 알기를 원하고, 그 행하심에 동참하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진정으로 볼 것을 보지 못하는 이유가 순종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배운 것을 실천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 새로운 각도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조명되면서, 큰 감격과 기쁨이 있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부분적으로 삶의 변화와 하나님과의 교제를 경험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깨달아진 하나님의 길을 따라 온 마음으로 순종하지 않으면, 그것은 결국 한계가 있습니다. 참으로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 실재를 소유하지 못합니다.
포도나무교회를 세우기 전 처음 개척한 교회에서 목회할 당시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오늘의 이 길로 인도하시며, 급속도록 새로운 것들을 조명해 주셨습니다. 어떤 때는 주일 낮, 주일 저녁, 수요일 저녁, 금요일 저녁 중 한 시간만 빠져도 무슨 이야기인지 모를 만큼 빠르게 인도해 가셨습니다. 나는 배운 것들을 부지런히 전하며, 부지런히 주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약 1년쯤 지났을 때, 성도들이 도대체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며 아우성이었습니다. 나는 너무나 낙심이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부지런히 배우며 부지런히 전해왔는데, 아무것도 모르겠다니 모든 노력이 다 헛된 것 같았습니다. 나는 낙심 가운데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분의 답변을 듣기 원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나에게 내가 가르친 모든 것은 이정표에 불과하다는 것을 조명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이정표의 내용이 너무나 좋고 감격적이어서 그것을 보고 눈물을 펑펑 쏟는다고 할지라도, 그 이정표를 따라 부지런히 달려가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 당시 내 설교를 들으며 실제로 펑펑 우는 성도들도 있었습니다. 결국, 사람들이 설교를 들으며 아무리 은혜를 받는다 할지라도, 그대로 실천하지 않으면 진정으로 깨달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발의 무리’를 세우고 계십니다. 이들이야말로 하나님의 계시를 가질 자들이고, 하나님의 마음을 가질 자들입니다. 이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시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들을 이루실 것입니다. 뿐 만 아니라, 이 삶을 살지 않으면 우리는 다가오는 때에 서지도 못하고 무너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이야말로 ‘발의 무리’의 삶을 배워 하나님의 귀한 용사로 일으켜 세움을 얻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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