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하나님의 음성 듣는 법
1940년대 텍사스 주 여러 도시를 방화하며 살던 마이라 워팅거는 자기의 운명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일찍이 부모를 잃었고, 최근에는 남편으로부터 단 한푼 받지 못하고 쫓겨나 떠돌아다니다가 겨우 나이 많은 노인을 돌보는 일을 잡았는데, 얼마 되지 않아 술주정뱅이인 그 노인의 아들에 의해 강간을 당한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강간을 당해서 임신하는 경우는 100명 중 3명밖에 없다는데, 마이라는 임신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그 당시 텍사스 주 법에 의해 그 아이를 유산시킬 수도 없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완전히 버렸다고 생각했습니다. 살아가야 할 어떠한 소망도 그리고 이유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자살함으로써 모든 것을 끝내 버리려고 했습니다. 그것만이 자기에게 있는 유일한 탈출구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그녀에게 “그 아이를 그대로 두어라, 그 아이는 세상에 기쁨을 줄 것이다”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그리고 그 음성을 듣는 순간 그녀에게는 소망이 솟아나기 시작했습니다. 하늘의 기쁨이 그녀의 영혼에 밀려들어오면서 자살이나 낙태와 같은 지옥의 음성을 쫓아내었고, 좌절과 혼동을 몰아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삶을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태어나게 된 사람이 바로 재임스 로비슨 목사이고, 그는 오늘날까지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그리스도깨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재임스 로비슨 목사가 쓴 「하나님께 감사 나는 자유하다」라는 책에 자세이 나와 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이 회복해야 할 가장 시급한 것 중 하나가 바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우리 신앙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한 하나님의 음성을 올바로 분별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지 못함으로 인하여 우리들 가운데 많은 혼란과 아픔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기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관한 전체적인 윤곽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것은 결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관한 자세한 연구가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관한 중요한 요소들을 요약해서 다루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
우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백성에게 주신 고유의 특권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참으로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은혜를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에게 주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요한복음 10장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예수님은 자신과 우리와의 관계를 목자와 양의 관계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양으로서 우리들이 가지는 특권이 바로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분을 따르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2-4절).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15-16절).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27절). 특히 예수님은 우리의 선한 목자로서 자신이 가지고 계시는 특징에 대해서는 여러가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고, 우리를 지키시고, 우리를 위해 자신을 주실 것 등. 그러면서 양된 우리들이 가지는 특징에 대해서는 단 한가지만을 반복해서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것이 바로 주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에게 주신 고유의 특권이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것은 그저 소위 신앙 좋은 소수의 성도들에게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닙니다. 목회자들에게만 주신 은혜도 아닙니다. 하루에 세 시간 이상씩 기도하고, 금식을 밥먹듯이 하는 열심파 성도들에게만 주신 은혜도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단순히 그분에 관해서 이론적으로 아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과의 교제를 통해서 그분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를 위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필수입니다. 왜냐하면, 대화가 없이 진정한 교제는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상 3장은 하나님의 음성을 드는 것과 관련해서 매우 중요한 구절인데, 거기에 보면 이러한 사실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루는 하나님께서 어린 사무엘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그 음성이 하나님의 음성인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이유에 대해서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7절). 여기를 잘 보십시오. 여기에서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했다는 말은 그가 아직 하나님에 관해서 어떠한 교육도 받지 못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는 엘리 제사장 밑에서 자라면서, 그로부터 하나님에 관한 많은 교육들을 받았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가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했다는 말은 그가 아직 하나님과 개인적인 교제를 갖지 못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것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직접적인 연관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교제요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것은 필수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오늘날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책을 가지고 있으니 더 이상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신구약을 망라해서 모든 성경 시대에 걸쳐 우리의 신앙생활은 그저 그 당시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잘 연구하여 우리의 최선을 다해 그 말씀에 나오는 규칙들을 잘 지키는 삶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우리 신앙의 선배들 중 어느 누구도 그러한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물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우리에게 매우 소중합니다. 즉, 그것은 우리의 모든 신앙과 삶의 기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로 성경을 소홀히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이 점을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하신 명령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수 1:7-8). 하나님은 특히 여호수아가 지난 40년 동안 하나님의 그 모든 능력과 역사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한 이후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명령을 내리셨다는 사실을 반드시 유념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역사를 조금만 경험해도 자기의 경험을 앞세우며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매우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의 신앙생활이 그저 모세를 통해서 주신 율법들을 잘 연구하여 그 규칙들을 최선을 다해 지키는 삶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여호수아의 신앙생활은 하나님과의 삶아있는 교제였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 필수였습니다.
특히 신약시대에 사는 우리들은 더욱더 이러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 모든 성도들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인 히브리서는 시편 95편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히 3:7).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팍케 말라 하였으니”(히 4:7). 즉, 이 구절들에 의하면, 시편 95편 등에서 말하는 “오늘날”은 바로 신약시대를 말하고, 그 신약시대는 성령의 음성을 듣는 시대이니, 오늘날 너희들이 성령의 음성을 들을 때에 마음을 강팍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시대에 걸쳐 우리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살아있고 역동적인 교제 즉,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이를 위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것은 필수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우리 신앙의 모든 면에서 필수입니다.
우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우리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있어서 필수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우리의 사역 혹은 열매맺는 삶을 위해서도 필수입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은 우리의 사역을 그저 우리들이 우리의 생각을 따라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관점에서의 사역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우리의 사역은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델인 예수님의 삶을 보든지 혹은 모세와 같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삶을 보든지 우리의 사역은 우리들이 임의로 그저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위해 수고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성령께 민감하여 그분의 인도를 따라 순종하면 그분께서 우리를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예수님의 삶에서 가장 잘 볼 수 있는데, 그러한 예수님의 삶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구절이 바로 요한복음 5장 19절과 20절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일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우리는 이 구절에서 예수님의 삶에 대한 세 가지 중요한 요소를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께서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아버지가 행하시는 것을 보고 그것만을 행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순간순간 하나님께 민감하여 그분께서 원하시는 것만 순종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병원 같은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그 날 38년된 병자 한 사람만 고치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위의 구절은 안식일에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된 병자를 고치신 사건을 설명하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셋째,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바로 우리의 삶과 사역에서 나타나야 할 특징이기도 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더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요한복음 14:12). 그런데 이러한 사역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필수입니다. (우리의 사역에 관해서 나의 책 「성령이 역사하시는 교회」 5장 열매맺는 삶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삶을 위한 전제조건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위에서 살펴본 요한복음 10장이 잘 보여주듯이, 우리의 삶은 예수님과 동행하며, 그분의 인도를 따라 순종하는 그분의 제자로서 삶입니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전제조건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그분을 따라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요한복음 10: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그렇게 해야 비로소 우리는 주님이 인도하시는 푸른 초장에 이를 수 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세.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세입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실 뿐 아니라, 모든 시대에 걸쳐 하나님의 종들에게 말씀해 오시는 등 우리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크만(Frank Buchman)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들을 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복종할 때,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도록 해야합니다. . . 오늘날 세계가 가장 절실하게 배워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우리들에게 요구되는 자세들 중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물론 그 외에도 몇 가지가 있겠지만, 사무엘상 3장을 중심으로 해서 네 가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무엘상 3장은 하나님께서 어린 사무엘에게 찾아오셔서 말씀하시기 시작하신 내용을 담고 있는 장으로써, 하나님이 음성을 듣는 것과 관련해서 우리들에게 매우 중요한 가르침들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우선 성경은 그 당시 하나님의 계시가 드문 시대였다고 말합니다.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삼상 3:1). 이처럼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실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드문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모스 선지자도 그러한 때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찌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암 8:11-12). 그럼 무엇이 문제입니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대표적인 하나는 신앙의 타락입니다. 즉, 우리의 신앙이 형식화되고 타락할 때, 하나님은 자주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사무엘이 어렸던 시대에도 그랬습니다. 그 당시 신앙은 극도로 형식적이었고, 심지어 제사장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았으며, 하나님에 대한 어떠한 두려움이 없이 온갖 악행을 자행했습니다(삼상 2:12-17 참조).
그런데 반면에 우리는 이러한 상태에서도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즉, 이토록 신앙이 타락하고, 그래서 심지어 제사장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온갖 타락 가운데 있는 그러한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신의 음성을 들을 자세를 가진 자를 발견하셨을 때 기쁨으로 그에게 찾아오셔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심지어 그가 나이 어린 소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이 형식화되어 있고,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들이 타락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우리들이 회개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올바른 자세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원할 때,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귀를 기울이는 자가 듣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라고 말씀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자세의 중요성에 대해서 강조하셨습니다. 사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일조에 대해서 말씀하신 기록은 단 한번밖에 없지만,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라는 말이나 이와 비슷한 내용을 말씀하신 기록은 무려 17번이나 됩니다. 그래서 이것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 점을 우리들에게 얼마나 강조하셨는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헌금에 대해서는 매우 강조하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별로 강조하지 않는 교회와는 정반대였습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에서도 예수님은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반복해서 말씀하심으로써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자세를 강하게 추구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있어 중요한 자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귀를 기울이는 자세입니다. 즉,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원하는 자세 혹은 듣고자 하는 자세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다고 해서 우리들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 나오는 그 당시 소아시아 지역에 있던 일곱 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편지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잘 볼 수 있습니다. 그 교회들 중 많은 교회들이 자기들이 생각하기에 매우 훌륭한 교회였습니다. 또 어떤 교회들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매우 훌륭한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교회들을 향하여 그들이 성령의 음성을 듣고 돌이키지 아니하면 심각한 결과가 초래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 한 예로 에배소 교회를 보십시오. 우리는 그 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칭찬만 보아도 그 교회가 얼마나 훌륭한 교회였나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계 2:2-3). 이 얼마나 분별력 있고, 인내하고, 열심있는 교회입니까! 사도 바울이 그 교회를 세울 때, 거기에서는 참으로 놀라운 기적들과 이적들이 일어났었습니다(행 19장 참조). 뿐만 아니라, 이 교회는 사도 요한이 나중에 여러 해 동안 담임했던 교회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만약 이 교회가 오늘날 우리 나라에 존재했다면 어떠했겠습니까? 아마 많은 교회들로부터 칭송을 받고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나라에 존재하는 어떤 교회보다 더 훌륭한 교회로 인정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교회를 향하여 그들이 미처 알고 있지도 못하던 문제점을 지적하시면서, 만약 그들이 성령의 음성을 듣고 돌이켜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들에게 촛대를 옮기시겠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만큼 우리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고 그 책임이 우리들에게서 면제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렇게 여러 차례 강조하셨듯이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자세를 가져야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우리의 삶에서 순간순간 하나님의 성령께 열려져 있는 자세가 매우 중요합니다. 수시로 하나님의 성령께 묻고,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이 에배소서 6장에서 말하고 있는 기도가 바로 이러한 기도가 아닌가 싶습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엡 6:18). 이렇게 성령께 항상 열려져 있는 자세를 가질 때,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보여주시고, 알려주시고, 말씀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세상의 잡음을 줄여야합니다.
미국에 가면 큰 스테레오를 한쪽 어깨 위에 메고,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큰 음악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며 걸어가는 젊은이들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요즈음은 우리 나라에도 그렇습니다만, 차 속에다 천 와트가 넘는 스테레오 시스템을 갖추어 놓고, 약간 과장하면 차가 흔들릴 만한 큰 소리로 음악을 들으면서 운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주위에서 사람들이 아무리 소리쳐도 그 음악소리가 너무 크기 때문에 듣지 못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이와 비슷한 상황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즉, 엄청나게 큰 세상 소리가 성도들의 마음과 영혼의 귓가에 울려 퍼지는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그들에게 들리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세상의 소리 가운데 젖어 살고 있기 때문에, 그 세상의 소리가 얼마나 큰지 그리고 심지어 그러한 세상의 소리가 있는지 조차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이 조용히 시간을 내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시도해 보면, 여러분은 자신이 얼마나 큰 세상 소리 가운데 젖어 살고 있는 지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한번 해 보십시오. 그럼, 어제 밤에 본 연속극으로부터 시작해서, 돈, 자녀의 진학, 화장품, 사업, 친구 등 온갖 세상의 생각과 소리들이 여러분의 뇌리에 가득차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세상의 소리들이 참으로 천 와트의 스테레오 소리보다 더 크게 여러분의 뇌 속에 울려 퍼지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죠. 그러므로 우리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세상의 소리를 줄여야 합니다.
세상의 소리를 줄일 수 있는 한 가지 좋은 방법은 금식과 기도입니다. 그것도 그저 30분 내지 한 시간 정도가 아니라, 이틀이건 삼일이건 혹은 일주일이건 복잡한 환경을 떠나 조용한 기도원 같은 곳에 가서 금식하며,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푹 잠기게 될 때, 세상의 소리들이 잠잠해 지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사무엘상 3장에서 사무엘이 하나님의 전에서 자면서 그곳에서 지냈다는 사실을 볼 수 있는데 같은 맥락입니다. 그리고 출애굽기 32장을 보아도 모세가 하나님과 만나는 장소인 회막을 지으면서 사람들이 거하던 처소인 진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세웠는데 이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오늘날 어떤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처럼, 날마나 집을 떠나 교회에 가서 잠을 자며 기도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기도할 목적으로, 상대방의 동의를 얻어, 짧은 기간 동안만 부부가 서로 분방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그곳이 교회든지, 골방이든지, 기도원이든지 복잡한 환경을 떠난 한적한 장소와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를 순종하고자 하는 자세로 귀를 기울여야합니다.
우리는 사무엘에게서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매우 중요한 자세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엘리 제사장이 하나님께서 사무엘에데 말씀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드디어 깨달았을 때 사무엘에게 가르쳐준 자세인데,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네 번째 사무엘에게 나타나셨을 때 엘리 제사장이 가르쳐 준대로 하나님 앞에 엎드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 3:10). 그렇습니다. 바로 이 자세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종된 것을 인식하고 주님의 주권 앞에 엎드리는 자세와 주인 되신 그분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그대로 순종하는 자세입니다. 이처럼 순종하고자 하는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먼저 말씀해 보세요. 그럼 제가 잘 생각해보고 마음에 들면 순종할게요’라는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합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결제권자인 자기에게 결제를 올리면, 자기가 잘 생각해보고 결제를 하겠다는 자세로 말입니다. 하나님은 대부분 그러한 자들에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어차피 순종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최종적인 결제권자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주님이십니다.
이러한 순종과 관련해서 우리는 선지자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들은 참으로 순종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셨던 것 같습니다. 예레미야의 예를 한번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하루는 예레미야에게 베띠를 사서 허리에 차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했습니다. 그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몇 일 후에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유브라데 강가에 가서 그 띠를 바위틈에 숨기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레미야는 그대로 했습니다(렘 13장 참조). 나는 이러한 구절들을 읽을 때마다 감동을 받습니다. 아마 나였다면 틀림없이 이렇게 물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유브라데 강에 가서 이 띠를 숨기라니요. 무엇 때문에요?” 여러분, 예루살렘에서 유브라데 강은 가까운 길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나 예레미야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별 의미도 없는 것 같은 일을 위해 몇 일을 걸어 갔다 왔습니다. 그런데 스토리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레미야가 몇 일을 걸어서 갖다 왔는데, 하나님께서 이제는 가서 그것을 다시 꺼내 오라고 하셨습니다. “아니 하나님, 이제 방금 도착했는데 그것을 다시 꺼내 오라니요! 다시 꺼내오게 하시려면 무엇 때문에 갖다 묻으라고 하셨습니까? 그것도 그 먼 길에 말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이번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무 소리 않고 다시 가서 그것을 꺼냈습니다. 그러자 그 띠는 베로된 띠였기 때문에, 벌써 썩어서 조각조각 떨어졌습니다. 바로 그 때 하나님의 놀라운 음성이 예레미야에게 임했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유다의 교만과 예루살렘의 큰 교만을 이같이 썩게 하리라 이 악한 백성이 내 말 듣기를 거절하고 그 마음의 강팍한대로 행하며 다른 신들을 좇아 그를 섬기며 그에게 절하니 그들이 이 띠의 쓸데 없음같이 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띠가 사람의 허리에 속함같이 내가 이스라엘 온 집과 유다 온 집으로 내게 속하게 하여 그들로 내 백성이 되게 하며 내 이름과 칭예와 영광이 되게 하려 하였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렘 13:9-11). 이처럼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나님께 무조건 순종하겠다고 말하면,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원치도 않는 어떤 일을 시킬까봐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 전혀 원치도 않는 아프리카 오지로 선교 나가라고 할까 혹은 집을 팔아서 헌금하라고 할까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그러한 자세로 하나님께 나오지 못합니다. 그것은 우리 하나님을 너무나 모르는데서 나오는 자세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를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내어 주실 만큼 우리를 진실로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우리에게 항상 최선만을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또한 모든 것을 아시는 전지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길은 항상 옳은 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셨든지,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열망하고 또한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한 두번 말씀하셨는데 우리들이 순종하지 않았다고 해서 더 이상 말씀하시지 않는 하나님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반복해서 불순종할 때, 다시는 말씀하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먼저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을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다시 말씀해 주시기를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다시 말씀하시기 시작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여러분이 과거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는데, 요즈음에는 더 이상 듣지 못한다면, 혹은 하나님께 불순종한 것이 없나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돌이켜 순종하겠사오니 불순종한 것이 있으면 알려주세요”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그럼 알려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 발견하셨으면 순종하십시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어느 정도 이상의 신앙수준이 요구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은 소위 신앙 좋은 집사님, 장로님, 그리고 목사님만이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이 서로 깊은 관련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따라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하나님의 손만을 구하는 자세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얼굴을 간절히 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서,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필수 중의 필수입니다. 그리고 반면에 하나님의 손을 중심으로 구할 때, 우리는 아무리 많이 기도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올바른 교제에 이르지 못합니다.
이 둘 사이의 차이를 우리는 모세와 광야 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극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같은 시대에 같은 처지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 둘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나님 자신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과의 놀라운 교제 가운데로 그를 인도하셨습니다. 반면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손만을 구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들은 경험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과의 진정한 교제가 없었습니다. 그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미혹되어 하나님을 근심케하고 시험하다가 급기야 광야에서 흩어짐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방법.
우선,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기도 합니다. 또한 성경이야말로 우리의 신앙과 삶을 위한 하나님의 기준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들은 모든 음성을 성경에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바리새인들과 같이 되기 쉽습니다.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을 보지 못하였으며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7-39). 그리고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묵상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 외에도 하나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말씀하십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말씀하십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이 완성된 오늘날은 성경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더 이상 성경에 나오는 것과 같은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들에게 말씀하실 필요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오늘날은 성경을 잘 연구하여 그것을 삶에 잘 적용하면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다루시는 방법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의 모든 삶과 신앙을 위한 기준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방법에 있어서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그 방법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성경 외에 어디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는 방법들을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실제로 성경 시대에도 하나님은 그 당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내용을 담은 성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말씀하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럼 오늘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방법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습니까? 매우 많습니다만, 저는 여기에서 그 중에서도 가장 보편적인 몇 가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감동(impression, keen sensitivity to be impressed by the lord)을 말로 표현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 외에 오늘날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하시는 방법은 바로 마음에 주신 감동(impression)을 통해서 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말로 표현함으로써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우선 어떤 사람들은 ‘감동’이라는 단어에 대해 트집을 잡으면서, ‘하나님의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인데, 그럼 오늘날도 계속해서 성경이 쓰여지고 있다는 말이냐?’라고 대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그 말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미 완성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들이 듣는 하나님의 음성이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성경에 버금가는 권위를 가진다는 말도 아닙니다. (저는 여기서 성경과 오늘날 우리들이 듣는 하나님의 음성과의 관계를 다루기 원치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 장의 분량이 너무 많아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다른 책들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 중에서 잭 디어 박사의 「놀라운 성령의 음성」, 마이크 비클 목사의 「Growing in the prophetic」그리고 웨인 그루뎀 박사의 「The Gift of prophecy」등은 매우 좋은 책들입니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감동”이라는 말은 영어로 impression을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깨닫게 해 주신 부분을 말합니다. 성경도 신약시대의 예언이 하나님의 “계시”에 기초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고전 14:30).
신약시대의 예언에 대해서 살펴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이 방법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언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웨인 그루뎀 박사는 그가 원래 캐임브리지 대학에서 박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한 그의 책 「The Gift of prophecy」(예언의 은사)에서 신약시대의 예언에 대해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신약시대의 예언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마음에 가져다 주신 것들을 나타내기 위해 인간의 말로 표현하는 것이다(Speaking merely human word to report something God brings to mind)." 나는 오늘날의 예언이 그루뎀 박사가 말한 것보다 더 광범위하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내가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그가 매우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간동 주신 것들을 우리의 말로 표현함으로써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가장 기초적인고 보편적인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반드시 이해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우리 마음속에 주신 감동을 우리말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생각이 섞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섞입니다. 특히 초보자일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그것을 그림으로 표시해 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자기 생각 하나님 생각 |
초보자 성숙자
그러니까 이 말은 하나님의 감동에 문제가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과정에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마치 수돗물과 같습니다. 그래서 수돗물이 취수지에서 아무리 깨끗하게 정수되어 보내져도, 수도관이 녹슬어 있으면 가정의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은 불순물이 섞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약성경은 반복해서 예언을 시험하여 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하나님께서 주신 감동을 말로 표현하는 데는 믿음이 요구됩니다. 그래서 신약성경도 예언하는 자는 믿음의 분량대로 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롬 12:6). 몇 년 전에 집회를 인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 저녁에는 설교를 마치고 기도사역을 하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내 마음속에 그날 밤 구원받을 사람이 있으니 예수님을 영접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일어나라고 말하라는 감동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나는 당황했습니다. 조금 기다렸더니 한 두 사람이 뒤쪽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른 사람이 있다는 감동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내가 보는 쪽에서 오른쪽 줄의 중간쯤에 있다는 감동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중간쯤에 나란히 앉아 있는 세 사람 중에 가운데 사람이 그 사람이라는 감동을 주셨습니다. 이러한 감동은 자주 자기 생각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감동을 자기 생각이라고 무시해 버리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도를 자주 놓칩니다. 그런데 어째든 나는 이번에는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 말이 틀리면 어떻게 할까, 그것이 내 생각이면 어떻게 할까, 마약 그렇게 했다가 그 사람이 당황하면 어떻게 할까 등 여러가지 생각 때문에 더 이상 말하지 못했습니다. 조금더 기다리다가, 그래도 그가 일어나지 않아 “만약 주저하는 사람이 있으면 나중에라도 담임목사님에게 찾아가서 예수님을 영접하는 기도를 하십시오”라고 권면하고 일어선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를 인도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몇 개월 후에 나는 우연히 그 사람을 그 집회로 데리고 갔던 성도로부터 그날 그 사건에 관해 그 사람 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성도에 의하면, 그 사람은 처음에 내가 “하나님께서 여기 구원받을 분이 있다고 하시는데, 예수님을 영접할 사람이 있으면 일어서세요”라고 말할 때부터 그것이 자기에게 한 말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끝내 일어서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다행인 것은 그는 지금 자기 아내와 같이 신앙생활 잘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주신 감동을 말로 표현하는 것은 믿음이 요구됩니다. 그래서 이 면에서 세계적으로 귀하게 쓰임 받다가 최근에 주님 곁으로 간 한 분은 믿음을 영어로 스펠링하면 RISK, 즉 모험이라고 늘 말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을 위해선 사도 바울이 늘 말했듯이 주님을 위해 기꺼이 바보가 되고자 하는 자세가 우리에게 요구됩니다.
끝으로 우리는 이러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에 있어서도 자라나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을 보다 선명하게 식별하고 깨달을 수 있도록 자라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다음의 세 가지가 매우 중요합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마음에 감동을 주실 때, 실수를 무릅쓰고 순종해 나가야 합니다. 처음에는 자기 생각처럼 느껴질지라도 순종하다 보면 그것이 자기 생각이었는지 혹은 하나님의 음성이었는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이 반복되어지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보다 확실하게 분별하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어린아이가 넘어질 것이 두려워서 걸음마를 시작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혹은 한 두 번 시도해 보다가 넘어지고 나서 자기는 할 수 없다고 포기해 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는 영영 걷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넘어져도 곧 바로 다시 시도합니다. 수십번 수백번 넘어져도 전혀 개의치 않고 다시 일어나 걸으려고 합니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 그는 매우 잘 걷게 되고 나중에는 뛰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둘째, 앞서간 선배들과 열린 영적인 지도자들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는 자세가 필수입니다. 방금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있어 처음 단계일수록 자기의 생각이 많이 섞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배우는 자들은 늘 자기가 받은 감동을 성경에 비추어 보고, 또 영적 지도자의 조언을 따라 조명해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아무리 예언의 기름부음이 강한 자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기가 받은 감동만을 내세우며 그것을 성경에 비추어 보거나 지도자의 조언에 따라 조명해 보기를 거부한다면, 그 사람은 필연적으로 미혹됩니다. 그리고 셋째, 상대방의 실수가 용납되는 분위기가 필수입니다. 어린아이가 걸으려고 하다가 넘어졌다고 해서 그 어린아이를 꾸짖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정신병자일 것입니다. 우리들은 어린아이들이 수백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려고 하는 것을 보면서 박수를 보냅니다. 그리고 그가 수백번의 시도 끝에 처음으로 한 발자국을 떼면, 바로 그 다음 순간 다시 넘어졌다 할지라도, 환호를 지르며 기뻐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있어서도, 어떤 사람이 감동을 받았다고 하는 말속에 그 사람의 생각이 많이 들어 있다고 해서 ‘너는 가짜야, 너는 이단이야, 다시는 그런 소리하지마’라며 꾸짖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에서 절대로 자라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배우는 자 편에서는 배우는 자세가 그리고 지도자나 다른 성도들의 편에서는 상대방의 실수를 용납하고 더 잘 하도록 격려하는 자세가 요구됩니다. 그러한 분위기를 통해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에 있어서 자라나게 될 것입니다.
추가적으로, 내적 감동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경우에 한 단어나 한 문장을 선명하게 주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경우에도 그 단어나 문장을 믿음으로 말할 때, 그 다음 말씀을 주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육성으로.
하나님은 때로는 우리들의 귀에 들리는 육성으로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에 대한 많은 예를 찾아볼 수 있는데, 우선 하나님은 예수님의 삶에서 몇 차례에 걸쳐 육성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침례(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마 3:17), 변화산에서(마 17:5),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에(요 12:27-33)… 그리고 또한 주님은 사울(바울)에게도 육성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 음성은 때로 다른 사람들도 들을 수 있는 음성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침례시에는 침례를 주던 요한도 이 음성을 들었으며, 변화산에서는 제자들도 이 음성을 듣고 그 앞에 납작 엎드렸습니다. 그러나 이 음성은 항상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2장의 경우에는 예수님 주위에 있던 사람들도 그 음성을 들었으나 그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울었다고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천사가 말했다고도 했습니다. 바울의 경우에도, 그 당시 바울과 함께 말을 타고 다메섹으로 가던 사람들도 바울과 똑같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말에서 떨어져 땅바닥에 꼬꾸라겼으나 그 음성을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참고로 나는 한 번도 이러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음성을 들은 사람을 만나본 적은 있습니다. 그런데 그에 의하면 그러한 하나님의 음성은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느꼈던 것처럼 그리고 에스겔이 느꼈던 것처럼 참으로 두려운 것이었다고 합니다.
환상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는 방법 중의 하나는 환상입니다. 우리는 이에 대한 예도 성경에서 수없이 찾아볼 수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하나는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베드로가 본 환상입니다. 베드로는 점심이 준비되고 있는 동안에 지붕에서 기도하다가 한 환상을 보았습니다. 환상 중에 그는 하늘이 열리고 거기로부터 네 귀에 줄이 달린 큰 보자기 같은 것이 내려오는 것을 보았는데, 그 안에는 구약성경에서 먹지 못하게 되어 있는 소위 부정한 생물들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늘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를 베드로에게 그 생물들을 잡아먹으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자기는 어려서부터 그러한 생물들을 입에 대본적도 없으며, 그럴 수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하나님이 깨끗케 하신 것을 감히 부정하다고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일이 세 번 반복되고 난 후 보자기는 다시 하늘로 올라갔고, 베드로는 환상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런데 이 베드로의 환상은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첫째, 이 환상을 통해서 이방인에게 복음이 처음으로 전파되는 계기가 마련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로 복음이 유대인에게만이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전파되게 되었고, 오늘날 우리들에게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둘째, 이 중대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환상을 사용하셨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온전한 말씀이 잇는데 환상은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환상을 보면 그러한 생각이 얼마나 편협한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 당시 베드로는 하나님의 말씀인 구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구약성경에는 복음이 이방인에게도 전파될 것이 이미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베드로에게 알리기 위해, 하나님은 그 당시 구약성경의 구절 중 아모스 9:11-12과 같은 구절들을 그에게 조명해 주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환상을 통해서 그에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말씀이 있다고 해서 환상이 필요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셋째, 환상은 강한 능력입니다. 환상은 자주 생생하게 시각적으로 보여지는 것으로 매우 강한 능력을 갖습니다. 베드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는 식사도 같이 하지 않았고, 심지어 이방인의 여인들이 아이를 낳다가 목숨이 위험한 지경에 이르러도 도움의 손길을 펼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기독교인들도 다 유대인의 배경을 가진 사람들로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이 환상이 베드로가 가지고 있던 그 뿌리 깊은 엄청난 편경을 깨뜨린 것입니다.
특히 성경은 하나님께서 말세에 성령을 모든 육체에 부어주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그러면 사람들이 환상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욜 2:28, 행 2:17). 그런데 예수님이 오셨을 때부터가 말세이며, 오늘날 우리는 말세지말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방법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당연히 기대하고 환영하고 사모해야 할 것입니다.
이상(trance)을 통해.
이상은 환상과 비슷합니다. 단, 환상은 앉아서 영화를 보는 것처럼 지켜보는 것이라면, 이상은 마치 자기가 영화 속에서 배우로 활동하는 것처럼 직접 그것을 경험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사무엘상 3장에서 사무엘이 그러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상 3장 10절은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가로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말하고 있고, 15절은 이 사건을 이상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사무엘이… 그 이상을 엘리에게 알게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꿈을 통해.
하나님은 꿈을 통해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요셉에게 꿈을 통해서 성령으로 잉태한 마리아를 아내로 취할 것을 말씀하실 뿐 아니라, 헤롯의 위험을 피해 애굽으로 도망할 것도, 헤롯의 죽은 사실도, 그리고 헤롯의 아들 아켈라오를 피하여 나사렛으로 가서 살 것도 말씀하셨습니다(마 1:20, 2:13, 19, 22).
빛을 통해.
하나님은 빛을 통해서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우리 교회 성도 중의 한 명에게는 하나님께서 가끔 빛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을 볼 때에나 혹은 어떤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께서 가끔 투명하고 밝은 빛이 그 사람의 일부에 혹은 전체에 가득차 있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특히 내가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신 교회를 인도할 새로운 방향을 교회 성도들에게 나눌 때, 하나님은 몇 차례에 걸쳐 그 성도에게 그러한 빛이 나를 감싸고 있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음성에 대한 확인으로 받아들이며, 그것들을 유념하여 기억합니다.
천사를 통해.
하나님은 사마리아에서 매우 성공적인 복음사역을 감당하고 있던 빌립에게 천사를 통해 사막으로 내려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 음성에 순종했을 때, 이번에는 성령께서 마침 그 옆을 지나고 있던 마차로 가까이 나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그 당시 에디오피아 여왕의 국고를 맡고 있던 내시가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또한 사가랴에게 천사를 보내 요한의 탄생을 예고해 주셨고, 마리아에게 같은 천사를 보내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해 주셨습니다. 나도 한 번 매우 절박한 상황에 처했을 때, 주위에 어느 누구도 말하지 않았지만 또렷한 음성을 들은 것이 계기가 되어서 참으로 중요한 하나님의 인도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나는 그것이 천사의 음성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양한 성령의 은사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방언과 통역, 지식의 말씀의 은사, 그리고 지혜의 말씀의 은사와 같은 성령의 은사들을 통해서도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는 목사님 중에 하나님께서 능력치유, 능력전도, 그리고 영적 전쟁과 같은 사역을 위해 귀하게 세우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분에게는 지식의 말씀의 은사를 통해서 말씀하시되, 지식의 말씀이 오는 한 방법인 상대방이 아픈 곳과 똑같은 부위에 똑같은 통증을 갖게 하심으로써 자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가 그러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러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대부분 치유받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이루고 계십니다. 한번은 그 목사님이 차를 타고 가다가 조합장 사모님을 옆에 태웠습니다. 그분은 시골에서 목회를 하기 때문에 가끔 길을 가다가 동네 분들을 태워다 드립니다. 그런데, 갑자기 오른쪽 무릎에 통증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차를 타고 가면서 그분의 오른쪽 무릎이 아프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면장님 사모님이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 목사님은 “기도해 드릴까요”라고 물었고, 그렇게 해달라는 승낙을 받고 차안에서 간단히 손을 얹고 기도해 드렸습니다. 그러자 그 순간 그 사모님 무릎의 통증이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무릎을 위해 기도하는 동안 이번에도 목사님의 배가 아파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배도 아프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사모님이 어떻게 그렇게 족집게처럼 아느냐고 말했습니다. 목사님은 결국 조합장 사모님의 배를 위해서도 기도해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사모님은 전혀 예수를 믿지 않는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날 그 사모님이 예수를 영접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방법으로 하나님은 그 목사님을 통해서 그 마을에서 놀라운 복음의 역사를 일으키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세 가지 단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중 또 하나는 하나님의 음성을 잘 분별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부르신다고 한 밤중에 집을 나갔다가 그 다음 날 변사체로 발견되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경우는 극단적인 경우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소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교회 안에서 야기되는 문제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고, 넘어지고, 눈물을 흘리고 있지 않습니까? 또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본인들은 어떻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혼동 가운데 있지 않습니까? 또한 이루어지지 않은 약속들로 인해 실망과 좌절 가운데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로부터 받은 상처로 인해 신음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소위 이러한 부작용들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 듣는 것 자체를 무시해 버리기도 합니다. 그럼 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납니까? 우리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왜 이러한 일들이 발생합니까? 그 이유는 바로 우리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자 분별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세 가지 단계를 이해하는 것이 필수입니다.
계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첫 번째 단계는 계시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계시는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성경이 오늘날도 쓰여지고 있다는 말이 아니라, 고린도전서 14:26절과 30절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해 주시거나 혹은 보여주신 그 부분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베드로가 기도하다가 본 환상이라든지 혹은 고넬료가 기도하다 들은 천사의 음성 등과 같이, 내적 감동을 통해서건 환상이나 꿈을 통해서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감동 주시거나 혹은 보여주신 바로 그 부분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계시의 단계에서 우리들이 반드시 해야 할 일은 그 계시의 근원을 분별해 내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어떠한 계시가 주어질 때, 그것은 세 가지 중의 한가지 근원으로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즉,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거나 사탄으로부터 나온 것이거나 혹은 자기의 육신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계시의 근원을 분별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은 취하고 사탄이나 자기의 육신으로부터 나온 것은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들은 엄청난 혼돈과 미혹 가운에 빠질 수 있습니다. 바울은 사탄이 그의 복음의 길을 막을 때와 성령께서 막으실 때를 분별할 줄 알았습니다(데살로니가전서 2:18과 사도행전 16:6-7을 대조하여 보시오).
첫째, 사탄이 말할 때.
(1) 사탄의 소리는 우리를 죄로 인도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우리는 이브를 죄로 미혹했던 사탄의 소리를 들 수 있습니다(창 3장). 사탄은 이브에게 하나님에 대한 의심을 불어넣었습니다. 그리고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을 정당화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는 높아지려는 욕구를 가지고 이브를 죄 가운데로 빠뜨렸습니다. 또 어떤 여인이 한 목사님에게 와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새로운 남편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상대방 남자에게도 똑같은 응답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이미 결혼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그럼 지금 있는 남편은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더니, 그 여인은 그 사람은 하나님이 처치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고 대답했습니다. 물론 이 경우 그 여인이 들은 것은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다행히 그 여인은 상담을 통해 자기가 속은 것을 깨닫고 죄를 회개하고 돌이켰으며, 지금은 남편과 잘 살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탄의 음성은 우리를 죄로 인도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죄를 짓도록 인도하는 사탄의 음성에 미혹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자기의 욕심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는 사람이 사탄의 유혹을 받는 것은 욕심에 끌려 미혹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약 1:13-14). 이 여인의 경우에도 남편으로부터 받은 심한 상처와 그로 인해 생긴 남편을 미워하는 마음과 용서치 못한 마음 그리고 남편과의 올바르지 못한 관계가 사탄의 속임수의 빌미가 되었던 것입니다.
(2) 사탄은 우리를 미혹과 유혹으로 인도합니다.
하나님의 영은 진리의 영으로서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리니”(요 16:13). 반면에 사탄은 우리를 미혹과 유혹으로 인도합니다. 그리고 사탄은 많은 경우에 부분적인 진리를 가지고 그렇게 합니다.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한 사탄의 모습을 보십시오. 사탄은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워놓고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뛰어내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동원하여 그 발을 받아줄 것이라고 하면서, 심지어 이에 대한 근거로써 성경을 인용했습니다.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셨느니라”(마 4:6). 이 얼마나 그럴듯합니까?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자세히 보면 사탄이 성경을 왜곡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사탄이 인용하고 있는 구절은 시편 91:11-12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 구절을 인용하면서 “네 모든 길에”라는 다섯 글자를 의도적으로 생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원래 우리들이 하나님을 거처로 삼고 살아가면서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의 모든 길에서 천사들을 동원해서라도 우리를 지키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발이 돌에 부딪쳐 넘어지지 않게 되리라는 말씀을, 성전 꼭대기에 올라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뛰어내리라는 말로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하나님을 시험하도록 미혹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사탄의 이러한 궤계를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기록되었으되 주 너희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마 4:7)는 말씀으로 사탄을 물리치셨습니다. 이처럼 사탄은 미혹과 유혹으로 인도하되 많은 경우에 있어서 부분적인 진리를 가지고 그렇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탄의 미혹을 분별하여 물리치기 위해서도 하나님의 진리에 굳게 서야 합니다.
(3) 사탄은 우리를 두려움으로 인도합니다.
로마서 8:15은 말합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여기서 성경은 마귀의 영을 “무서워하는 종의 영” 혹은 “너희를 두려움의 노예가 되게 하는 영”(NIV 성경)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성령의 은사에 대해 말하면서 성령의 인도와 마귀의 인도를 대조하고 있는데, 거기에서 마귀의 인도를 억압적인 인도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갔느니라”(고전 12:2). 이처럼 마귀는 사람들에게 공포를 유발시킵니다. 그래서 두려움을 가지고 사람들을 억압적으로 인도합니다. 무당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한가지 특징은 그들이 귀신의 소리에 순종하지 않으면 몸이 심하게 아프거나 집에 큰 재앙이 닥친다는 것입니다. 혹은 그렇게 하겠다고 귀신이 위협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두려움 가운데서 그렇게 하기를 원치 않는 많은 경우에도 귀신의 명령대로 순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는 사랑과 정상적인 판단을 동반합니다. 그래서 로마서 8:15-16은 말합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그리고 디모데후서 1:7도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할렐루야. 얼마나 좋으신 하나님입니까!
그리고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들에게서 두려움을 몰아내 주십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람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1서 4:18). 많은 무당들이 그 두려움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예수님 뿐이라는 것을 깨닫고 예수님께 나아와 자유함과 구원과 평강을 얻는 것도 역시 같은 맥락에서입니다. 그러한 자들을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기를!
심지어 죄를 지적하실 때에도 하나님과 마귀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책방(convict)을 하시는 반면, 마귀는 정죄(condemn)합니다. 마귀가 말할 때, 그는 죄를 들추어냅니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우리들이 이미 하나님께 회개하고 용서받은 죄까지 들추어냅니다.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우리를 정죄하고 낙심시키고 좌절시킵니다. “집사(혹은 장로, 목사)라는 자가 그런 죄를 짓고 어떻게 그렇게 뻔뻔스럽게 교회에 갈 수 있느냐? 어떻게 하나님께 찬양을 드릴 수 있느냐? 이 위선자야.” 여러분, 이러한 목소리는 하나님의 음성이 아닌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것은 사탄의 음성입니다. 그리고 사탄이 이러한 목소리로 여러분을 고소할 때, 재빨리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십시오. 그리고 그 십자가의 공로로 사탄을 대적하십시오. “그래, 나는 그러한 죄를 지었다. 그러나 나는 그 죄를 하나님께 회개했고,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그 모든 죄를 씻으시고 나를 용서해 주셨다. 그러므로 내가 이제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너 거짓말쟁이 사탄은 그 정죄함을 가지고 내게서 떠나가라.”
반면에 하나님께서 죄를 지적해 주실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해 주십니다. 그리고 죄를 깨닫게 해 주심과 동시에 우리에게 용서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심으로써 우리를 회개로 인도합니다. 그런고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해 주실 때는, 우리들이 지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서 매우 마음이 아프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4) 예언의 영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로써, 하나님의 음성은 예수님을 높이고 드러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렇지 않는 것은 마귀의 영입니다.
요한계시록 19장에 보면,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관한 놀라운 하나님의 계시를 전해준 천사에게 요한이 엎드려 절을 하려고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자 천사가 이를 말리며 하나님의 계시 혹은 말씀에 관한 매우 중요한 점을 요한에게 말해줍니다.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더러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거를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나 삼가 그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 하더라”(계 19:9-10). 즉, 예언(대언)의 목적은 오직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그 예언으로 인해 그것을 전달하는 사람이 누구든지 심지어 천사라 할지라도 그가 영광을 받아서는 안되며,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리스도만을 높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님을 높이고 증거하기 위해서 주어집니다.
반면에 어떠한 계시를 가지고 사람들의 관심을 자기에게 집중시키며, 그 결과로 자기의 이득을 취하는 것은 바로 사탄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고린도교회에 있었던 거짓 사도들에게서 이에 대한 대표적인 예를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을 지극히 큰 사도들이라고 부리고 있습니다(고후 11:5). 그런데 이 말은 그들이 진짜로 지극히 큰 사도들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들이 자기 자신들을 지칭하면서 그렇게 불렀고, 이에 대해 미혹된 많은 고린도 교인들이 그들을 그렇게 불렀기에 때문에 비꼬는 투로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에 보면, 우리 말 성경에 지극히 큰 사도들이라고 번역된 말을 슈퍼 사도들이라 번역하면서 따음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super-apostles' , NIV). 즉, 바울이 그 당시 사람들의 말을 인용하고 있는 것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바로 그 아래에서 그들의 정체가 거짓 사도들인 것을 명백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고후 11:13-15). 그럼, 그들이 어떻게 슈퍼 사도들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고린도교회에 있었던 거짓 사도들에 대해 다루고 있는 고린도후서 10장에서 13장이 반복해서 말하고 있듯이 영적인 체험과 계시에 대한 그들의 자랑으로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이 한 영적인 체험과 계시를 성도들에게 자랑함으로써 성도들의 관심을 자기들에게 집중시켰고, 그 결과 성도들을 부리며 자기들의 뱃속을 채우는 이득을 취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점을 고린도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먹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고후 11:20). 이와 대조적으로 사도 바울의 삶은 오직 예수님만을 높이는 삶이었습니다. 성도들을 예수님에게로만 중매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삶이었습니다. “원컨데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그가 거짓 사도들 때문에 부득불 말하게 되었지만, 이러한 개인적인 자랑과 같은 것을 하는 것을) 용납하라 청컨데 나를 용납하라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후 11:1-2). “내가 너희를 높이려고 나를 낮추어 하나님의 복음을 갑 없이 너희에게 전함으로 죄를 지었느냐”(고후 11:7).
그리고 예언은 그 시점에서 그 상황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계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언을 통해서 사람들을 하나님에게로 그리고 하나님의 뜻 사운데로 인도하기 원하십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1) 우리는 내적으로 그것이 주님의 음성이라는 것을 그냥 압니다.
고린도전서 2:12-13은 말합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어떤 사람은 이것을 영적 공명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계에서 파장이 같은 물체를 나란히 놔두고 한 물체를 두드리면, 그 파장에 의해 다른 물체도 울리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성령의 조명으로 그것이 주님의 음성인 것을 그냥 압니다.
(2) 우리의 영혼에 평안이 넘칩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라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도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우리는 예수님께서 특별히 보내주실 성령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이 말씀을 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실 때, 곧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실 때, 우리의 영혼에 평안이 넘칩니다.
(3) 우리에게 믿음이 생깁니다.
로마서 10:17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처럼 우리들이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될 때, 우리 속에 확고한 믿음이 생깁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아무리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되어지리라는 분명한 믿음이 생깁니다.
(4) 확신이 생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자 이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낙심하여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들과 동행하시며 구약성경을 가지고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물론 그 당시 그들은 그분이 예수님인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분이 예수님이셨다는 것을 발견하고 난 뒤 그들은 그 사건에 대해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눅 24:32). 이처럼 주님의 음성은 우리에게 확신을 줍니다.
(5) 하나님의 음성은 성경 말씀과 부합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있어 기억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그것이 성경과 부합된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이야말로 하나님의 성령에 감동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우리의 모든 삶과 신앙의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듣는 하나님의 음성과 성경과의 관계를 잘 말해주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 구절은 베드로후서 1:17-21입니다.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저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써 나옴을 들은 것이라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우선 여기에서 베드로가 언급하고 있는 경험은 변화산의 경험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포함한 세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셨을 때, 예수님의 모슴이 영광의 모습으로 변하고, 거기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으며, 하나님께서 하늘에서부터 육성으로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하셨던 그 경험입니다(마 17:1- 참조). 얼마나 놀라운 경험이었겠습니까? 오늘날 우리들이 듣는 하나님의 음성 중에서 이보다 더 확실하고 놀라운 음성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그런데 베드로는 여기에서 성경은 그것보다 더 확실한 계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로 성경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하나님의 가장 온전한 계시로서 다른 모든 것의 기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실 때 그것은 더 큰 계시인 성경말씀과 부합됩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는 우리가 들은 음성이 하나님의 것인지를 확인해 보기 위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되는지를 반드시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우리들이 듣는 하나님의 음성이 성경에 나와 있는 구절이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 음성의 의미와 내용이 성경의 가르침과 부합하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그분은 정확하게 말씀하십니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에 대한 순종으로써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가를 우리들이 분명하게 알 수 있도록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아멘’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물론 예를 들어, 우리들이 예상치 못하고 있는 어떠한 경우에 대해 경고하시기 위해 우리들 속에 불안한 마음을 불어넣으심으로써 시작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분명한 의미를 전달하시기 원하시며, 또 우리들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분명히 말씀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야 우리들이 경고를 받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 때까지 그분 앞에서 기다리며 또 그분께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의미가 그리고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가 성경의 가르침과 부합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추가적으로, 반면에 마귀가 말할 때는 우리 안에 의심, 불안, 두려움이 생기고, 평안과 안식이 없고, 안절부절하고, 죄책감, 정죄하는 마음 그리고 낙심 등이 생깁니다. 그리고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합니다. 심지어 부분적으로라도 그렇게 합니다.
(6) 하나님의 음성은 반드시 확인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구체적으로 예언을 시험해 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고전 14:29). “예언을 멸시치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살전 5:20-21). 여기에서 말하는 시험의 대상은 예언자가 아니라, 예언입니다. 물론 성경은 예언자를 시험해 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마 7:15-23). 그러나 이 구절들이 말하고 있는 바는 예언의 내용을 시험해 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들이 듣는 하나님의 음성은 반드시 시험해 보아야 합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시험은 방금 살펴본 것처럼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하는지를 시험해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에 대한 매우 좋은 예를 베드로의 경우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베드로는 환상을 통한 하나님의 음성과 성령의 음성을 듣고 이방인인 고넬료의 집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말씀을 전하는 중에 성령께서 마치 오순절날 마가의 다락방에 임하셨던 것처럼 그것에 임하셔서,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얻을 뿐 아니라 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이 있고 난 후 베드로는 예루살렘 교회 앞에 서서 이 일에 대해 보고하고, 그가 한 행동에 대해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확인을 받습니다(행 11장 참조). 이 얼마나 겸손한 행동입니까? 그런데 이러한 자세야말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자세이며, 동시에 우리들이 하나님의 진정한 보호 가운데 있기 위해서도 필수적인 자세입니다.
베드로는 사도 중의 사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많은 제자들 중에서 12명을 구별하여 사도로 세웠고, 그 중에서도 특히 세 명을 가장 가까이 하셨는데, 그 세 사람 중 한 사람이 베드로였습니다. 또한 베드로를 통해서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들이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순절날 그의 설교를 듣고 구원받은 사람의 수가 무려 3천명이나 되었고, 심지어 그의 그림자만 스쳐도 사람들의 병이 낫고 귀신들이 떠나가는 역사들이 있었습니다. 고넬료의 집 사건만 해도 그렇습니다. 그는 임의대로 그곳에 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분명한 환상과 성령의 말씀하신 바에 따라 갔습니다. 어쩌면 본인의 뜻과는 반대로 순종해서 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의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인도를 확인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베드로가 하나님의 음성과 인도에 대해 교회 앞에서 확인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소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는 자기들이 들었다고 하는 하나님의 음성에만 집착한 나머지 그것을 성경에 비추어 보고자 하는 진실함도 그것에 대한 교회 지도자들의 조언을 듣고자 하는 겸손함도 없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미혹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하나님의 진정한 보호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질서는 나치 영적인 우산과 같이 우리를 보호해 주는 보호막인데, 그들은 하나님의 질서밖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장시 베드로의 보고를 들은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이 취한 자세입니다. 즉, 그들은 자기들이 그때까지 가지고 있던 편협한 이해만을 가지고 그 범위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인도를 미혹되거나 잘못된 것으로 함부로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겸손한 자세로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합한지를 알아보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새롭게 찾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성경에 보면, 그 당시까지는 아직 복음이 이방인에게도 전파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뜻이 계시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러한 하나님의 뜻이 이미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성경은 그 당시까지는 아직 그것이 교회에 감추어져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이라”(엡 3:5-6). 그러므로 그 당시 교회의 지도자들에게는 베드로의 행동이 그들이 그 때까지 알고 있던 성경적인 지식과 이해에 어긋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함부로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그들은 겸손하게, 새롭게, 그리고 열린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과정을 통해서 에배소서 3:5-6이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예수님의 비밀’의 중요한 한 부분인 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고넬료 사건 한참 후에 있었던, 그러나 같은 주제를 다루었던 예루살렘 회의에 관한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기록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가로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저희를 권고하신 것을 시므온(베드로)이 고하였으되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기록된바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행 15:14-18).
(7)주님의 주권을 드러냅니다.
고린도후서 4:4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사탄은 신이라는 말을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이라는 단어도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도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의미하는 신과 하나님은 전혀 다른 것을 의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절대로 예수님이 주님이시라는 말은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성령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음성은 주님을 높이고, 예수님의 주 되심을 드러내고 나타냅니다.
셋째, 육신이 말할 때.
육신이 말할 때 나타나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갈등과 번민과 혼란입니다. 확신이 없습니다. 또한 온갖 종류의 욕심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리고 육신의 소리를 듣게 되는 가장 주된 요인은 우리들이 품는 두 마음 때문입니다. “각 사람이 시험(유혹)을 받은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약 1:14).
두 마음을 품게 하는 요소들은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의심이 두 마음을 품게 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 1:6-9). 우리들이 기도할 때에나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과 신실하심을 신뢰하지 아니하고 환경과 처지와 자기의 능력을 바라보고 의심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보다 자기 육신의 소리를 듣게 됩니다. 둘째, 탐심이 두 마음을 품게 합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2-24). 성경에 의하면 탐심은 우상숭배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영적인 눈을 어둡게 만들어 우리로 하여금 올바로 보지 못하게 만들고, 그 결과 우리의 삶 속에는 어두움이 가득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우리는 육신의 소리를 하나님의 음성으로 착각하기 쉽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선 우리의 삶이 오직 하나님께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야 합니다(single focus on God). 그리고 우리들이 탐심을 이기는 길은 우리의 옛사람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 위에서 죽었으므로, 우리의 삶에서 그 옛사람이 죽은 것으로 간주하고 날마다 주님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롬 6:1-4). 셋째, 개인적인 야망과 독한 시기가 우리를 육신과 사탄에게 미혹되게 만듭니다. 즉, 그러한 상태에서 받은 어떠한 계시나 말씀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기 보다 마귀나 육신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개인적인 야망)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인요 마귀적이니”(약 3:14-15).
해석과 적용.
우리는 위에서 우리가 어떠한 계시를 받았을 때, 그 근원을 분별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은 취하고, 마귀나 육신으로부터 나온 것은 버려야 할 필요성과 그것을 분별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있어 이 부분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이 부분을 잘 분별했다고 해서 다 된 것이 아닙니다. 두 가지 단계가 더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즉, 해석과 적용의 단계입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 단계에서도 구체적으로 성령의 인도를 따라야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올바로 이해하고, 또 그것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럼 성경의 예를 들면서, 해석과 적용의 단계의 중요성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예가 사도행전 21장에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우리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함에 있어 흔히 만날 수 있는 상황과 또 해석과 적용의 단계를 잘 이해하지 못하면 흔히 저지를 수 있는 실수에 대해 매우 잘 나와 있습니다. 그 당시 사도 바울은 이제 3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배가 두로에 이르렀을 때 하역을 할 필요가 있어서 그 기간 동안 바울은 그 지역에 있던 성도들을 찾아가 그들과 함께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있던 성도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지 말라고 합니다.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 하더라”(행 21:4).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그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즉 예언을 통해,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말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개인적인 생각이나 인간적인 정으로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그렇게 했습니다.
그럼 이것이 왜 중요합니까? 그 이유는 성경은 바울이 성령의 감동으로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얼듯 보기에 성령께서 이 사람에게 이렇게 그리고 저 사람에게는 저렇게 서로 상반된 말씀을 주신 것처럼 보입니다. 우선 사도행전 20:22-23에 보면 사도 바울이 성령의 강권하심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여기 우리말 성경에 “심령에 매임을 받아”라고 번역된 말은 원어 그대로 하면 “영에 매임을 받아”라는 말입니다. 헬라어 성경에는 사람의 영이건 성령이건 영이라는 똑같은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둘 다 소문자로 쓰여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학자들이 번역하는 과정에서 그 말이 성령을 가리키는 말인지 사람의 영을 가리키는 말인지를 분별하여 번역해야 합니다. 그런데 개역 성경이 이 단어를 “심령에 매임을 받아”로 번역한 이유는 위에서 살펴본 사도행전 21:4 등과 서로 상반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사도 바울이 그토록 기도하고 준비해 왔던 바가 바로 이 예루살렘 행이었고, 그 곳을 지나 로마로 가는 것이었는데, 그가 그 모든 것을 기도 응답도 받지 않고 임의대로 행한 것처럼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성령에 매임을 받아”라고 번역해야 옳을 구절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사도 바울의 삶을 알 뿐 아니라, 나중에 예루살렘에서 사도 바울이 잡혔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그가 예루살렘에 온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음을 확인해 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어성경 중에서 NIV성경은 이 구절을 “성령에 매임을 받아”로 옳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해석과 적용의 단계의 중요성입니다. 그리고 오늘날도 우리는 바로 이 단계에 대해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이나 예언이 서로 상반된 것과 같은 적지 않은 경우를 만납니다.
이 점에 대해서 설명하기 전에 한 가지 예를 더 살펴보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다음에 나오는 아가보 사건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제 두로를 떠나 가이사랴에 사는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렀을 때입니다. 그때 마침 선지자 아가보가 그곳을 방문했습니다. 아가보는 그 당시 예언자로써 잘 알려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가 그에게 선지자라는 공식적인 칭호를 주었을 뿐 아니라, 그의 예언에 대해서는 이미 검증된 상태였습니다(행 11:27-30 참조). 그런데 그 아가보가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그 띠로 자기 수족을 묶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행 21:11). 그러자 그곳에 있던 빌립과 네 딸들(그 네 따들도 다 예언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들이 울면서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들은 아가보의 예언에 기초하여 성령께서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위해서 갇히는 것뿐 아니라, 죽을 것도 각오하였다고 말하면서 그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모든 사람들은 ‘주의 뜻이 이루어 지이다’라고 말하며 그쳤습니다.
그럼 우리는 이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습니까? 다시 말하지만, 이것이 바로 계시와 해석과 적용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특히 아가보의 사건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이 세 가지 단계를, 그리고 각 단계의 중요성을 뚜렷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아가보가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의 수족을 묶는 행위가 바로 계시입니다. 이처럼 계시는 내적 감동이나 환상 뿐 아니라, 때로는 예언적인 행동으로 우리에게 주어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경우에 있어서 계사는 의심할 나위 없이 성령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둘째, 위에 기록된 11절에 나오는 아가보의 말이 바로 이 계시에 대한 해석입니다. 그리고 그 해석에 있어서도 아가보는 대체적으로 성령에 의해 인도함을 잘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두 가지 면에서 그의 해석이 틀렸습니다. 우선 그는 유대인들이 바울을 결박할 것이라고 말했는데, 나중에 보면 바울을 결박한 사람들은 이방인인 로마 군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유대인들이 바울을 이방인들에게 넘겨주리라고 말했는데, 사실은 유대인들은 바울을 죽이려 하였고, 이방인들이 바울을 구하기 위해 결박하여 하옥시켰던 것입니다. 이 점만 보아도 우리는 신약시대의 예언의 성격에 대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주신 감동을 말로 표현함에 있어 우리의 생각이 섞일 수 있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가보의 해석이 대체적으로 맞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결국 바울은 수족이 묶여 갇히게 되었고, 바울이 갇히게 된 것은 유대인들 때문이었기 때문입니다. 셋째, 사람들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울면서 만류한 부분이 바로 적용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당시 그 곳에 있던 사람들이 바로 이 부분에 있어서 잘못 인도함을 받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그들은 예언에 대한 적용에 있어서 구체적으로 성령의 인도함을 받지 않고, 그 예언의 의미가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는 뜻이라고 간주해 버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두로에 살던 성도들도 바로 이러한 오류를 범했던 것 같습니다. 이처럼 우리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있어, 세 가지 단계가 있다는 것을 기억할 뿐 아니라, 각 단계에서 구체적으로 성령의 인도함을 받지 않으면, 매우 엉뚱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심지어 예언의 의미와는 정반대의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습니다.
미국의 한 교회에서 예배시간에 사역을 인도하던 목사가 한 성도의 머리 위에 검은 구름이 달러 표시 모양으로 머물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그 목사는 그 성도를 일으켜 세우고 검은 돈에 대해서 회개하라고 질책했습니다. 질책을 받은 그 성도는 그 당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 교회의 담임목사를 찾아가서 자기는 직장에서나 교회에서나 돈 문제에 대해서만은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다고 말했습니다. 그 성도는 사업을 하는 성도였는데, 세금을 내는데 있어서나 하나님께 드리는데 있어서 매우 신실한 성도였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 성도의 회사에서 다른 사람이 돈을 횡령하고 있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이 경우에도 계시는 달러 모양의 검은 구름이 한 성도의 머리 위에 있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해석은 검은 돈이었는데, 그것도 옳았습니다. 그러나 그 적용에 있어서 그 목사는 잘못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미하셨던 바는 그 사람이 검은 돈을 횡령했다는 말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그의 회사로부터 돈을 몰래 횡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시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세 가지 단계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이 점에 대해 하나님의 지혜가 부족하기 때문에 겪는 혼란과 아픔이 얼마나 많습니까?
또한 계시는 한 사람에게 그리고 해석이나 적용은 다른 사람에게 주어질 수 있고, 또 많은 경우에 그렇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독불장군과 같은 자세는 버리고 다른 사람, 특히 영적 지도자들의 의견을 듣는 것을 소홀히 하지 않는 겸손함을 반드시 가져야 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에 대한 중요한 부분들을 요약해서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에서 필수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참으로 신나는 경험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이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때, 우리의 신앙생활은 기쁨과 환희로 가득차게 될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귀한 삶이 이 세상에는 없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들은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단순히 이론적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실제적으로 경험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이론이 아니라, 실제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위해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날도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고 또한 잘 분별하여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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