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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단원 2과 두 신앙 체계 특징들의 의미

성경공부교재/십자가의복음

by 발의무리 2007. 8. 23. 09:24

본문

 

제6단원 은혜에 의한 삶

제2과 

두 신앙 체계 특징들의 의미


아래의 빈 칸을 채우고, 잘 모르겠으면 앞 장을 참조하십시오.

참 신앙

거짓 신앙

▶십자가의 복음

▶오직 믿음

(              )

▶성령님

▶자유함

(          )

▶율법주의 신앙

(          )

▶인간의 노력

(          )

▶노예됨

▶율법을 지킴


두 신앙 체계의 특징들이 의미하는 것


우리는 앞에서 두 신앙 체계 사이에는 서로 공존할 수 없는 간격이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반면에 같은 신앙 체계에 속한 특징들 사이에는 상호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도 살펴보았습니다. 두 신앙 체계 사이의 이러한 관계를 이해할 때,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두 신앙 체계의 특징들이 시사하는 바는 매우 중요하고 또한 많습니다. 특히 오늘날 교회 안에 하나님의 진정한 은혜와 성령의 역사의 회복이 절실한 상황에서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많습니다. 그 중에 몇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⑴ 율법주의 신앙에는 어떠한 진정한 성령의 역사도 없습니다.


먼저 무엇보다 교회가 십자가의 복음 위에 굳게 서지 않으면, 거기에는 어떠한 진정한 성령의 역사도 있을 수 없습니다. 즉, 율법주의 신앙에서는 어떠한 진정한 성령의 역사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역사와 율법주의 신앙은 서로 다른 신앙 체계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 가운데 참다운 성령의 역사가 거의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교회에서 하나님의 임재는 그 단어조차 찾아보기 힘든 상태입니다. 복음의 능력이 교회에서 걷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도들은 성령의 진정한 역사가 교회에 회복되기를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작정기도를 해보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금식을 해보기도 합니다. 목회자들은 여기저기 많은 세미나에 쫓아다녀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상태는 크게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교회 가운데 율법주의 신앙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주의 신앙 아래서는 아무리 많은 종교적인 헌신과 노력을 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진정한 은혜와 성령의 역사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바리새인들의 삶을 보아도 이 점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누구보다  종교적으로 헌신된 자들이었습니다. 누구보다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인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떠한 성령의 역사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성령의 역사를 대적했을 따름입니다.


반면에 교회가 십자가의 복음 위에 믿음으로 기초하게 될 때, 거기에는 진정한 성령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 둘은 같은 신앙 체계에 속한 특징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교회가 철저하게 율법주의를 제거하고, 십자가의 복음 위에 믿음으로 굳게 서는 것입니다.


⑵ 율법주의 신앙에는 진정한 믿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모든 면에서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앞으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구원을 얻는 것도, 열매를 맺는 것도,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것도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치유를 받는 것도, 기도 응답을 받는 것도, 하나님의 능력을 얻는 것도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런데 율법주의 신앙에서는 어떠한 진정한 믿음도 있을 수 없습니다. 믿음과 율법주의 신앙은 다른 신앙 체계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율법주의 신앙에서는 참다운 복음의 특징 중 어느 것 하나도 나타날 수 없습니다.


반면에 믿음에 의한 삶을 살려면, 반드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서야 합니다.


⑶ 율법주의 신앙으로는 육신을 이길 수 없습니다.


율법주의 신앙에서는 아무리 종교적인 헌신이나 형식이 가득할지라도 절대로 육신을 이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육신과 율법주의는 같은 신앙체계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좋은 예도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신앙적으로 매우 헌신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매우 큰 열심과 정성으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오늘날 십일조를 하되, 다른 사람에게 받은 선물까지 값으로 환산하여 십일조하고, 주일이면 일을 하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아무것도 사지 않고, 헌금은 토요일에 은행에 가서 새 돈으로 바꿔 미리 준비해 놓고, 주일이면 옷을 반드시 깨끗하게 다려서 입고 교회에 가는 열심과 헌신도 그들의 헌신에 비하면 초보에 불과할 만큼 그들은 나름대로 큰 열심으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가운데는 온갖 죄악이 가득했습니다. 그들 속에는 온갖 탐심과 세상을 사랑함이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여러 차례에 걸쳐 회칠한 무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마태복음 23:23-28을 읽으십시오. 그리고 바리새인들과 비교할 때 나의 모습은 어떻게 다른지 간단하게 써 보십시오.

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24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25 화 있을진저 8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26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2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28 이와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인 우리들 안에 참으로 탐심과 세상 사랑이 가득한 것 같습니다. 하루는 제가 중보기도를 하는데, 하나님께서 오늘날 교회 안에 금송아지 우상이 가득한 것에 대해서 회개케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말씀하신 바는 이런 뜻이었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우리가 누구에게 복종하든지 우리는 그것의 종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면 하나님의 종이요, 죄에게 순종하면 죄의 종입니다(로마서 6:16).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의 성도들은 교회 안에서 직분이 무엇이든지 상관없이 돈을 버는 일과 관련해서는 세상의 방법을 따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간 곳이 없습니다. 돈의 법칙에 순종할 따름입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말로는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돈을 우리의 신으로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6: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우리나라 교회에는 어느 나라 못 않는 많은 기도와 헌신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기도와 헌신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결과가 나타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우리들이 율법주의 신앙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 신앙 체계에서는 어떠한 종교적인 헌신과 노력으로도 우리의 육신을 이길 수 없습니다.


⑷ 율법주의 신앙에는 자유함이 없습니다.


율법주의 신앙에는 억압이 있습니다. 율법주의 신앙은 노예로서의 삶입니다. 갈라디아서는 율법주의 신앙을 종의 종교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마엘이 종인 하갈의 몸에서 하나님의 약속과는 상관없이 육신을 따라 태어난 것 같이, 율법주의 신앙은 사람을 종으로 만드는 종교입니다(갈 4:22-24).

(갈라디아서 4:22-24)

22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23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율법주의 신앙에서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얻기 위하여 끝없이 더 충분한 공을 쌓으려는 노예된 삶이 있을 따름입니다. 또한 이러한 율법주의에 빠진 사람은 자기가 어떠한 종교적인 행위를 한 번이라도 안 하거나 한 번이라도 빠지면, 하나님의 형벌이 곧 자기에게 내릴 것 같고, 하나님께서 은혜를 거두어 가실 것 같은 두려움 속에 삽니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버지로서가 아니라, 무서운 주인으로 느껴집니다. 이것이 노예된 삶입니다.

(갈라디아서 4:6-7)

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반면에 그리스도의 참된 복음 안에서의 삶은 자녀로서의 삶입니다(갈 4:6-7).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와 친밀한 교제 속에서 사셨듯이, 하나님 아버지와의 친밀한 교제 속에 사는 삶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아바󰡓�라는 말은 아람어로서 우리말로 하면 아버지라는 공식적인 말 보다는 아빠라는 가족적인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의 아빠가 되시는 삶입니다. 이 삶에는 아버지의 유업이 넘칩니다.  우리들이 하늘나라에 가서 받을 유업은 말할 것도 없고, 이 세상에 살면서도 아버지의 유업인 아버지의 임재, 아버지의 보호, 아버지와의 교제,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의 인도, 아버지의 도움, 아버지의 능력 등이 우리에게 넘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미래적인 것일 뿐 아니라, 현재적인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의 삶에는 참으로 놀라운 자유함이 있습니다. 모든 율법의 멍에로부터의 자유함이 있습니다. 죄책감과 사탄의 정죄로부터의 자유함이 있습니다. 욕심과 탐심으로 인한 집착과 억압으로부터의 자유함이 있습니다. 또한 그것이 조상의 저주로 인한 것이건, 과거의 상처로 인한 것이건, 잘못된 사고로 인한 것이건, 혹은 귀신들림으로 인한 것이건, 모든 종류의 사탄의 억압과 압박으로부터의 자유함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믿음으로 의지하여 서게 될 때, 그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무력하게 되어 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자유함은 죄를 마음대로 지을 수 있는 자유함이 아닙니다. 이 자유함은 우리가 주님 안에서 자유케 되어 하나님을 마음껏 섬기기 위한 것일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사랑으로 섬기기 위한 것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갈라디아서 5:13)


⑸ 성령의 역사는 하나님의 약속이요 믿음에 의한 것입니다.


성령님의 역사와 관련해서 사모하는 자세는 매우 중요합니다. 다음의 구절들을 읽고, 성령의 역사를 위해 어떤 자세를 가지라고 성경이 권면하고 있는지 써 보십시오.


누가복음 11:5-13                                                      


요한복음 7:37-38                                                      


누가복음 11장에 보면, 자기 집에 찾아온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친구에게 떡 세 덩이를 빌리러 간 사람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구절은 문맥적으로 볼 때 성령과 관련한 기도에 대한 구절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 구절에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성령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들이 가지는 고유의 권한이다. 그 당시 이스라엘에서 어떤 사람이 한 집에 방문하면, 그 방문한 사람을 잘 대접하는 것은 그 집 주인의 의무였을 뿐 아니라, 온 마을의 의무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본문에 나오는 손님을 맞은 사람이 그 친구에게 가서 손님을 위한 떡을 구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였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께 성령을 구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성령을 구하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우리들 중에 친구가 밤중에 찾아와서 떡 세 덩이를 빌리려 하는데 아이들과 잠자리에 들었으니까 안 된다고 거절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특히 그 당시 상황에서 떡을 주어야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의무이기도 했는데 말입니다. 그런 사람은 아마 세상에 거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비유의 초점입니다. 예수님께서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바는 바로 이것 입니다.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세상에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러한 사람이 존재한다 할찌라도,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고 요청하면, 그는 친구로서는 내어주지 않는다 할찌라도, 귀찮아서라도 그 요청을 들어줄 것이다. 이렇게 세상에 보기 드문 악한 친구라도 강청하는 요청을 들어주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좋으신 너희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강청하는 자에게 주시지 않겠느냐?󰡑� 이처럼 성령의 역사와 관련해서 강청하는 기도는 매우 중요합니다.


또 요한복음 7:37-38은 성령의 역사와 관련해서 사모하는 자세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역사는 우리의 어떠한 노력의 대가로 벌어 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소위 우리의󰡐�기도가 차야󰡑�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인 것을 여러 차례 강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또한 갈라디아서 3장은 이 점을 명백히 하고 있습니다.


다음의 구절들을 읽고 성령의 역사를 무엇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또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받는다고 되어 있는지 써 보십시오.


누가복음 24:49                                                        


사도행전 1:4-5                                                        


갈라디아서 3:14                                                       


사도행전 2:37-38                                                      


갈라디아서 3:1-5                                                      


성령의 역사는 한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그것을 위해 제자들에게 주신 명령은 기다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기다리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기다리면서 기도했습니다. 당연한 자세이겠지요. 그리고 위에서 말한 것처럼, 간절히 사모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성령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오셨고, 또 하나님의 계획하신 때(오순절)에 오셨으며, 하나님의 계획하신 장소(예루살렘)에 오셨습니다.


(갈라디아서 3:1-5)

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2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4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갈라디아서 3:1-5은 이 점을 매우 강조하고 있습니다. 첫째, 여기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만을 전한 것과 그 십자가의 복음이 성령의 역사를 위해서 필수적인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둘째, 사도 바울은 여기에서 두 가지 종류의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2절에 나오는󰡒�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의󰡒�받은󰡓�이라는 단어는 단순과거형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성도들이 과거의 한 시점에서 성령을 받은 사건을 말합니다. 그리고 5절의󰡒�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의 󰡒�주시고󰡓�와 󰡒�행하시는󰡓�이라는 단어는 현재형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지속적으로 성도들 가운데 성령을 주시고, 그 가운데서 여러 가지 역사를 행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셋째, 사도 바울은 이 두 가지의 성령의 역사 모두 오직 믿음으로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두 번씩이나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라는 질문의 답은 당연히 󰡒�듣고 믿음에서다󰡓�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은 우리들이 성령의 역사를 이처럼 십자가의 복음 위에 기초하여 오직 믿음으로 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을 우리의 어떠한 종교적인 행위나 노력의 대가와 연관시킬 때, 우리의 신앙은 육체로 마치게 된다고 강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⑹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설 때,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성취됩니다.


고린도후서 1:20을 읽으십시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우리가 어디에 거할 때 이루어진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                   )

(고린도후서 1:20)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답: 예수님 안에


성경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우리들이 예수님 안에 거할 때, 우리에게 성취됩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서서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거할 때 우리에게 이루어집니다.

개인적인 예언이나 기도를 통해서 주어진 하나님의 모든 약속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보증이 아닙니다.  그것은 초청입니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조건들이 따르는데, 가장 중요한 조건은 주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서서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거할 때, 그 약속들이 이루어집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약속들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 과의 요점


♡ 율법주의 신앙에는 어떠한 성령의 진정한 역사도 없습니다.

♡ 율법주의 신앙에는 진정한 믿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 율법주의 신앙으로는 육신을 이길 수 없습니다.

♡ 율법주의 신앙에는 자유함이 없습니다.

♡ 성령의 역사는 하나님의 약속이요 믿음에 의한 것입니다.

♡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서서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거할 때,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우리 삶속에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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