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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다(갈1:11-24)

성경권별설교/갈라디아서

by 발의무리 2007. 9. 5.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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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장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다
                                                                            갈라디아서 1장 11-24절



“1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13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14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15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16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17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18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저와 함께 십오 일을 유할새 19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20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라 21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22 유대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 알지 못하고 23 다만 우리를 핍박하던 자가 전에 잔해하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24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니라”

갈라디아서 1장 11-24절을 보면, 바울은 무엇보다도 자기가 전한 복음이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니고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강조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은 사실 계시의 종교입니다. 우선 복음 그 자체가 그리스도의 계시에 의해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또한 아울러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감에 있어서도 하나님이 계시가 아니고서는 우리 신앙의 모든 면에서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계시의 종교인 기독교에 대해서 살펴보기 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전한 복음은 예수님의 계시에 의한 것이라고 했는데, 그럼 우리에게 하나님의 계시는 어떻게 주어지느냐는 겁니다. 참고로 우선 우리에게 하나님의 계시는 세 단계를 통해서 옵니다.

계시의 1단계: 역사적인 사건(하나님께서 역사에 관여하심)
역사적인 사건이란 뭔가? 예를 들면,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셨습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그때 놀라운 역사들이 많은 있었습니다. 또한 마지막 열 번째 재앙 때는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 문설주에 바르게 하였고, 장자의 죽임의 재앙이 애굽에 임할 때에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에는 죽음의 재앙이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실재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이게 계시입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인류 역사 가운데 놀라운 일을 행해오셨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계시입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한 가지는 우리의 신앙이 사람들의 철학이나 혹은 윤리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역사 가운데서 계시하신 사건들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역사적인 사실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다릅니다.

계시의 2단계: 역사적 의미가 하나님 관점에서 해석됨(기록된 성경)
두 번째 계시는 예를 들어 애굽에 재앙이 있어서 장자들이 다 죽었는데, 이스라엘 집에는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름으로 재앙이 넘어갔다. 이것이 역사적인 사건인데, 그 사건에 하나님의 계시(조명)가 필요합니다. 무슨 말이냐면, 그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가가 계시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계시되지 않으면 그것은 사람들마다 다른 해석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역사적인 사건이 첫 번째 계시고, 두 번째 계시는 그 역사적인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우리에게 비춰주신 게 계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해서 또는 사도들을 통해서 그 역사적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 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게 기록된 성경입니다.

우리가 믿는 복음을 예로 들자면, 지금부터 이천년 전에 베들레헴에 한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갈릴리 나사렛이란 마을에서 그 아이가 자랐고 그가 30세쯤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놀라운 일들을 나타내셨습니다. 많은 기적들이 일어났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을 중심으로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그분을 시기하여 로마 법정에 고소하게 되었고, 끝내는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십자가에 처형시켰습니다.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계시입니다. 그런데 그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셔야 압니다. 그 예수님의 사건이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속죄의 제사였다는,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고,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죄의 세력이 우리에게서 끊어졌으며 죽음의 세력이 파해짐을 당했다는 것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비춰주시고 기록한 말씀이 바로 두 번째 계시인 성경입니다.

이처럼 계시는 3단계로 오는데, 첫 번째 단계는 역사 속에 있고, 두 번째 단계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지자들, 혹은 사도들을 통해서 그 사건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가를 성령의 조명으로 비춰주시고 그것을 기록하게 하셨는데, 그게 두 번째 계시인 성경입니다. 우리가 조금 있으면 알파코스를 준비해서 시작하려고 합니다. 알파코스는 안믿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하는 아주 좋은 프로그램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도 보면 안믿는 사람들에게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얼마나 역사적인 사실인가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인 증거들에 의해서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복음은 역사 속에 일어난 사건에 기초하고 있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머물면 안되고 한 단계 더 나가야 됩니다.

계시의 3단계: 기록된 말씀이 각자에게 비춰짐(성령의 조명)
세 번째 단계는 그 역사적인 사건과 그 역사적인 사건이 의미하는 바가 우리에게 비춰져야 됩니다. 특히 우리 각자에게 비춰져야 합니다. 이것 또한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죄인들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것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 가를 성령의 계시로 사도들과 하나님의 종들을 통해 기록되어 우리에게 성경으로 계시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진리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성령께서 계시해 주셔야만 하나님의 의도를 깨닫게 되고,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드릴 때 이 말씀이 효력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야 구원받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계시는 이렇게 세 단계를 통해서 옵니다.

예수님 자신이 먼저 복음의 시작이십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은 자기가 전한 복음이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계시로 된 것이다. 그랬는데 그 말속에도 이러한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선 하나는 예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부르시기 이전에 이미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사건은 한편으로는 예수님 때부터 전파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살아계실 때 자신이 오신 목적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마가복음 10장 45절에 직접 말씀하시기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기를 자신을 많은 사람의 죄를 위해 대속물로 주시기 위해 오신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학자들 중에 일부는 우리가 믿는 복음이 사도 바울 때부터 시작되었다. 이렇게 얘기하는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복음은 예수님께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2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4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5 게바에게 보이시고” 여기 보시면, ‘내가 받은 것을 전하였다.’ 이 두 단어를 보면 유전(遺傳:앞에서 전해 받은 것을 전달하는)의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뭐를 알 수가 있느냐면, 복음이 예수님께로부터 시작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미 자신을 대속물로 주시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셨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예언)에 기초해서 그 의미가 계시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승천 하시고 성령님이 오셔서 그들에게 알려주신 것 중에 하나가 이사야서 53장에 예언된 대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종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속죄의 제물로 돌아가실, 대속의 종으로 메시야가 오실 것이 조명되었고, 그래서 예수님이 성경대로 오신 것이 밝혀지게 되었고, 예수님이 성경대로 부활하신 것이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복음의 비밀들이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이와 같이 증거 되면서 그것이 또한 전달되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받은 부분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받은 것도 아니요’ 그 말은 하나님의 계시가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되어 전해온 부분이 있고, 동시에 이 복음에 대해서 사도 바울도 그 당시 사도 중에 한 사람으로써 특별히 예수님의 복음, 하나님의 비밀을 더 깨달음에 있어서 성령의 조명으로 그가 하나님 말씀에 기초해서 하나님의 비밀을 훨씬 더 많이 깨닫게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복음은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어떤 천사에게서 나온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 근원이 예수님인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계시의 기독교와 율법주의 차이점
오늘은 계시의 종교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5절을 봅니다.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16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사도 바울 같은 경우에도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사도 바울 속에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가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특별히 그 당시 사도로써 복음을 더 깨닫고 우리에게 전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은 계시의 종교로써 우리 신앙의 모든 면에 있어서 하나님의 계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계시의 종교와 율법주의 신앙과의 극명한 차이를 바울의 삶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14절에는 바울에게 예수님이 계시되기 전의 삶을 말합니다.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바울에게는 매우 열심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열심은 인간적인 종교적인 열심입니다.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조상대대로 내려오는 종교적인 전통을 인간적인 열심으로 섬기는 것인데, 그게 율법주의 신앙입니다. 그래서 율법주의 신앙에서는 전통이 매우 중요시 여겨집니다.(모든 전통이 다 나쁜 것은 아님) 한 가지 예로 마태복음 15장 1-8절을 봅니다. “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2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그들은 전통을 자기들의 열심으로 잘 지키는 것을 신앙의 본질로 이해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음식을 먹을 때는 손을 씻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손을 씻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3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4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 5 너희는 가로되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6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그들은 자기들의 전통을 중요시한 나머지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습니다. 십계명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셨는데, 그들은 전통을 중요시한 나머지 계명을 범했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고, 성경 박사들인데 전통 때문에 안보이는 겁니다. 그리고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 속에는 부모를 존경하고 부모의 필요를 체우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효를 매우 중요시 여기고 많이 강조하는데, 성경적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전통은 어떻게 가르쳤냐면, 현대인의 성경이 잘 번역해 놨습니다. “5 그런데 너희는 누구든지 부모에게 드려야 할 것을 하나님께 드렸다고만 하면 6 부모를 공경하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런 전통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헛되게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자들에게 “7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8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9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이처럼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종교적인 형식과 습관과 절차를 잘 지키는 것에는 절대로 그 중심으로부터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습니다. 전통에 초점이 맞춰지면 입술로는 하나님을 존경하지만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습니다. 이 구절을 N.I.V 성경에는 “9 They worship me in vain; 그들이 나를 헛되이 예배한다. their teachings are but rules taught by men.'" 그들의 가르침은 인간에 의해 가르쳐진 규칙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적인 노력으로 지키는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들의 종교적인 열심은 하나님의 대한 사랑은 없이 그저 입술에 불과하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도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그랬습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했느냐면,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유전들을 인간적인 노력으로 열심히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는 없이 오히려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그런 바울에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계시해 주심으로 그 의가 박살났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이처럼 종교적인 전통을 열심히 지키는 율법주의 신앙이 아니라 계시에 의한 종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우리의 신앙은 계시의 의한 신앙인가? 신학자들도 또 혹은 교회에서 가르칠 때도,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라고 그러는데, 어떻게 해서 우리의 신앙은 계시의 종교인가?

하나님을 아는 것도 계시에 의해서만 알게 됩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우리의 모든 면에서 계시의 종교입니다. 예를 들면 여러 번 말씀드린 대로 우리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데, 이들은 신앙의 본질을 어떻게 이해했느냐면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종교적인 행실을 인간의 노력으로 잘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이 우리 신앙의 본질인데, 그 차이를 보려면 하나님에 관해서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은 다르다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관해서 아는 것은 교육을 통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이것은 이론으로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전능하신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은 계시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우리의 신앙의 본질인데 성령의 계시가 없이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어도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을 계시해 주셔야 하나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성화도 계시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저들에게 ‘너희가 입술로만 나를 사랑하고, 마음은 내게서 멀고, 너희의 예배는 헛된 예배다’라고 그러셨는데, 예를 들면 우리가 드리는 예배도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규례와 규칙을 따라서 우리의 노력으로 잘 지키는데 잊지 않습니다. 그래가지고는 우리의 삶에 전혀 변화가 없습니다. 변화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 그 수단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인데,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성령의 조명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고,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의 그 신실하심을 깨닫게 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될 때, 우리는 그 하나님을 향해서 우리의 마음이 열려지게 되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생기게 됩니다. 그리고 그 주님의 영광을 바라볼 때, 우리가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중심에서부터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로 인도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우리의 신앙은 이와 같이 계시에 의한 종교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위해서도 하나님의 계시가 필요하고,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만큼 우리가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되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것도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믿음의 의한 삶도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이길수 목사님에게서 전화가 왔었습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얘기를 쭉 하다가 그분이 저한테 이런 얘기를 하는 겁니다. 우리가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성숙한 삶을 살기 위해서 모델을 찾는다면 그것은 허드슨 테일러를 들을 수 있다. 그게 믿음의 의한 삶입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자기의 노력으로 주님을 한시도 잊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해 봤지만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더 잊어버리는 자신을 보았습니다. 그는 거룩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더 넘어지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령께서 조명해 주심을 따라서 자기 스스로 노력하는 것을 포기하고 자기가 도와주시는 예수님을 신뢰했더니 예수님께서 도와주셔서 그 삶을 살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면서 또 뭐라고 그러냐면 사역에 있어서의 모델은 죠지 뮬러 목사님을 들 수 있다. 죠지 뮬러 목사님은 고아가 많을 때는 2,000명이 넘는 상황에서도 그 모든 필요를 위해서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을 구한 적이 없습니다. 그는 필요가 있을 때마다 다만 하나님께 그 필요를 가지고 나가 고아들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 하나님이 채워주시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모든 필요를 채우셨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그 가운데 살아가야 하는데, 이것에 대해서는 요한 웨슬레가 모델이더라. 깊은 얘기를 안나눴지만 요한 웨슬레는 공부를 많이 한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고, 규칙적으로 기도하고, 경건한 삶을 살았습니다. 얼마만큼이나 규칙적이었던지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Methodist 들이라고 별명을 불렀는데, 그게 나중에 감리교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성경을 많이 읽고, 사제가 되고, 미국에 인디언 선교를 갔지만 실패했습니다. 도망하듯이 그가 영국으로 다시 돌아오는 중에 풍랑을 만나 죽음이 두려워서 떨고 있는데, 어디선가 찬송소리가 들려서 가봤더니 모라비안 교도들이 전혀 두려움이 없이 기쁨으로 찬송하는 것을 보고, 저들 속에는 자기에게 없는 무엇인가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돌아온 뒤에 어느 날 친구의 도움으로 모라비아 교도들의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사회자가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듣는 중에 성령님께서 주님을 비춰주시니까 자기의 모든 죄 용서를 위해 주님을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감리교에서는 그 요한 웨슬레의 회심 사건을 기념하여 회심주간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하나님의 부흥을 보내시고 전 영국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제가 지금 세 사람의 예를 말했는데 이 세 가지 다 성령님의 비추심, 즉 계시가 필요합니다.

제가 이런 예를 들어서 어떨지 모르겠는데, 그분이 한 얘기니까 괜찮을 것 같습니다. 기흥중앙교회 이승준 목사님이 선교회 오기 전에도 가정 사역을 했습니다. 참고로 가정 사역만 가지고 안됩니다. 방법가지고 안되니까요. 그런데 그분이 선교회 집회에 오시면서 하나님이 만져 가시면서 변화되는데, 변화되는 하나의 획을 긋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게 뭐였냐면 그때까지만 해도 아내가 자기가 보기에는 너무 부족한 겁니다. 왜 하나님이 자기에게 저런 아내를 주셨는지 모르겠다고 늘 불만이 가득했습니다. 아내는 그야말로 뼈가 빠지게 수고하는데도 불구하고 자기는 전혀 그게 감사하지 않은 겁니다. 아내로써 그런 수고는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고, 아내가 피아노도 좀 잘치고, 노래도 좀 잘하고, 아내가 이것도 잘하고 저것도 좀 잘했으면 좋을 텐데 하면서, 자기는 아내 잘못 만나서 목회를 못한다고 늘 불만이었습니다. 목사님 생각에는 아내가 나에게는 너무 모자라고 반대로 나는 아내에게 너무 과분하다고 여겼습니다. 아내가 그토록 수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수고를 전혀 알지 못하는 겁니다. 그런 상황인데 목사님에게 어느 날 하나님께서 자신의 그런 모습을 비춰주시는데,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더래요. 자기가 너무나 이기적으로 판단했고, 자기 야망 가운데 눈이 가려져서 상대방을 전혀 귀한 줄을 모르고 전혀 배려가 없는, 자기가 얼마나 잘못 되었는가를, 자기에게 아내가 얼마나 하나님의 축복인지를 하나님이 어느 날 보여주시는데,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더래요. 지금은 아주 사이가 좋습니다. 이게 성령의 조명입니다. 이게 성경이 말하는 계시입니다. 우리가 교훈으로 가르친다고 안됩니다. 그러니까 방법론가지고 사역이 안되잖아요. 성령님께서 비춰주셔야 우리 자신을 볼 수 있고, 성령님께서 하나님을 비춰주셔야 우리가 그분을 신뢰할 수 있고, 우리의 어둠이 성령의 조명으로 비춰져야 우리가 그 어둠을 발견해서 버리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의 신앙인 하나님을 아는 것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것도,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것도, 믿음의 의한 삶을 살 수 있는 것도, 모두가 성령의 조명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신앙은 계시의 종교입니다.

한 부분만 더 살펴보고 마치겠습니다. 오늘은 설교가 1.2.3으로 하기보다는 우리의 신앙이 얼마나 계시의 종교인가 하는 부분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계시는 세 단계를 통해서 온다고 그랬는데, 첫째는 역사적인 사건을 통해서 두 번째는 그것이 우리에게 성경을 통해서 해석되어짐으로, 세 번째는 이것이 우리에게 각자 비춰져야 되는데,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이미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가 우리에게 비춰지지 않으면 첫 번째와 두 번째를 우리가 아무리 잘 알아도 우리에게 아무런 효과가 없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은 이 첫 번째와 두 번째 것을 잘 아는 것이 신앙인줄 압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 세 번째 부분이 우리에게 반드시 비춰져야 됩니다.

두 번째 부분까지는 잘했는데 세 번째 계시가 비춰지지 않은 대표적인 예가 요한복음 5장에 보면 나옵니다. “37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을 보지 못하였으며 38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 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41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42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45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 46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47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종교지도자들에게 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가 인정하는 성경박사들입니다. 예수님은 성경을 그렇게 많이 아는 그들에게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날마다 상고하는데, 그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형용을 한 번도 본적이 없고, 그 하나님의 음성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고, 그 하나님 말씀도 지금 너희 속에 거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세 번째 계시가 그들에게 비춰지지 않은 겁니다. 여러분들도 성경이 하나님 말씀인 줄 믿습니까? 그러면 다 ‘아멘’ 할 겁니다. 그 당시 바리새인들에게 구약성경을 갔다가주고 이게 하나님의 말씀인 줄로 믿느냐고 물었다면 그들은 입에서 침이 튀기도록 믿는다고 했을 겁니다. 그들은 점하나까지 빼놓지 않고 다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는 모세의 글도 믿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의 뜻은 그들은 두 번째까지는 잘 믿는데 세 번째는 경험해 본적이 없다는 겁니다. 성경 말씀이 자기에게 깨달아지기 위해서는 성령의 조명으로 비춰져야 됩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전혀 비춰지지 않았기 때문에 믿음이 없는 겁니다. 예수님은 그 말씀을 하고 계신 겁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모든 면에서 계시의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중요한 게 마음의 자세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론적인 지식도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역사에 대해서도 잘 알고, 성경의 진리를 잘 아는 게 중요합니다. 왜냐면 이것이 토대가 되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두 번째 단계까지밖에 안간 겁니다. 세 번째 단계가 없으면 두 번째 단계까지는 죽은 지식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세 번째 계시가 없으면 두 번째 단계까지는 죽은 지식입니다. 우리에게 어떠한 효과도 발휘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두 번째 단계에서 많이 안다고 해서 자기가 다른 사람보다 신앙이 좋다고 생각하면, 이것은 엄청난 가운데서 죽어있는 겁니다. 세 번째 단계까지 가야합니다. 세 번째 단계까지 가는 것이 우리 신앙입니다. 그런데 세 번째 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비춰주셔야만 됩니다.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원해서 뺏을 수 있는 게 아니고, 공부 많이 한다고 되는 게 아니고, 머리 좋다고 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에게 비춰주셔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마음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자들에게 세 번째 계시를 비춰 주시냐면, 겸손한 자, 마음이 청결한 자, 심령이 가난한 자, 하나님 말씀 앞에 떠는 자, 심령에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에게 비춰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마음의 자세입니다. 그리고 이런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내 스스로는 설 수 없음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하나님을 알기를 사모하고, 열망함으로 주님 앞에 겸손함으로 나와 주님의 도움과 은혜를 구하며 그분을 향하여 갈급할 때에, 또한 무엇보다 그분이 말씀하신 바를 따라 순종하기를 원할 때,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과거의 경험과 지식과 생각과 판단과 내 주관과 관점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조용히 엎드려 그 말씀이 인도하시는 대로 내가 순종하고자하는 자세를 같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와 같이 마음이 중요함과 동시에 매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을 통해서는 절대로 이 계시가 우리에게 비춰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겸손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나가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그분의 실재를 우리에게 보이시는 겁니다. 우리가 예배도 마찬가지고, 경배도 마찬가지고, 하나님 말씀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고, 기도도 마찬가지고,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심으로 우리가 그만큼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시고, 믿을 수 있도록 도우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그 놀라운 능력과 은혜와 치유와 권능을 경험하게 되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우리 삶속에 경험하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 신앙은 처음부터 끝까지 계시의 종교입니다. 계시가 없이는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세 번째 계시가 없는 2단계까지의 지식은 죽은 지식입니다. 거기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 하셨는데 여기서 교만하게 지식이 두 번째를 말한 겁니다.

우리의 신앙은 계시의 종교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세 번째 계시가 주어지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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