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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하나님의 부흥과 심판

시리즈설교/교회회복

by 발의무리 2007. 9. 5.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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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7장  하나님의 부흥과 심판


                                                    
신명기 30장 19절입니다.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지금까지 이사야 하반부에 나오는 하나님 백성의 회복에 관한 예언들을 살펴보면서 오늘날 주님의 교회가 회복되어야 할 절실한 필요 가운데 있고, 또 하나님의 부흥이 우리 가운데 임해야 할 절실한 필요 가운데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길을 따라 행할 수 있을까? 라는 부분을 살펴보고 보았습니다. 이번 장에서는 역시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의 부흥과 심판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특별히 오늘은 심판에 대한 부분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신명기 30장 19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 앞에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를 두었다 그러니까 너희는 생명을 택하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성경을 전체적으로 볼 때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 즉 하나님이 오시면 복과 심판이 같이 옵니다. 하나님이 임하시면 이 두 개가 자동적으로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떠한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의 운행하심에 동참하느냐에 따라서 그 결과가 복이 될 수고 있고, 그 결과가 심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신명기서에 그렇게 말하고 있고 말라기서도 말하고 있습니다. 말라기서 4장 5절입니다.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여기 크고 두려운 날이라는 말을 NIV성경에 보면 “great and dreadful day of the Lord” 크다는 말은 “great day” 위대한 날입니다. 큰 날 참으로 좋은 날을 말합니다. 반면에 우리말에 번역된 두려운 날이라는 말은 “dreadful day”는 ‘끔직한 날’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의 날을 표현하면서 큰 날인 동시에 끔찍한 날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말하고 있느냐면 주님의 오심 자체가 그 두 가지를 동반하기 때문입니다. 복을 동반하기 때문에 그것이 참으로 놀랍고 위대한 날이 될 수 있는 반면에 거기에는 심판이 동반되어 있기 때문에 끔찍하고 두려운 날이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똑같은 주의 날을 설명하면서 “great and dreadful day.” ‘크고 두려운 날’ 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서 하반부 전체 주제가 하나님의 회복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들이 집에서 이사야서 40-66장까지 읽어 보시면, 이번 시리즈 설교를 듣는 데도 많이 이해가 될 것이고, 또 여러분들이 읽다보면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부분이 있을 줄 믿습니다. 여러분들이 이사야서 하반부를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40장부터 회복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66장 새 하늘과 새 땅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회복에 대한 전반적인 부분을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하나님께서 반복적으로 말씀하시는 주제가 또 있는데 그게 뭐냐면 심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오심은 그 자체 속에 복과 저주가 같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주의 날’ 자체가 “great day” 위대하고 좋은 날인 반면에 끔찍하고 두려운 날입니다. 우리는 다 그 날이 좋은 날만 되기 원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 전체에 그렇지 않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심판에 대한 부분들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사실 이런 부분은 안 살펴보면 좋을 텐데, 우리는 좋은 말만 말하면 좋을 것 같은데, 그런데 말씀드린 대로 성경이 회복에 대해서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반면에 또한 반복적으로 심판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우리가 들을 부분이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부분들을 더 보게 되면서 제 마음속에 두려운 마음도 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하반부에 보면 반복적으로 하나님께서 심판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크게 세 종류의 심판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첫째는 안 믿는 자들, 즉 우상숭배자들에 대한 심판을 반복적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둘째는 타락한 지도자들에 대한 심판이고, 셋째는 하나님의 초청을 거부한 자들에 대한 심판입니다. 이처럼 세 종류의 사람들에게 심판이 임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오늘은 이 세 부분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1. 안 믿는 자들 혹은 우상숭배자들에 대한 심판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시고 그 공평이 없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사람이 없음을 보시며 중재자 없음을 이상히 여기셨으므로 자기 팔로 스스로 구원을 베푸시며 자기 의를 스스로 의지하사 의로 호심경을 삼으시며 구원을 그 머리에 써서 투구를 삼으시며 보수로 속옷을 삼으시며 열심을 입어 겉옷을 삼으시고 그 행위대로 갚으시되 그 대적에게 분노하시며 그 원수에게 보응하시며 섬들에게 보복하실 것이라.”(사59:15-18)

여기 섬들은 민족들, 나라들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믿지 않은 자들에게 그 행위대로 갚으시며 분노하시되 하나님이 보수로 속옷을 삼으시며, 여기 보수라는 말은 “vengeance 복수심”으로 하나님이 친히 일어나셔서 심판하실 것이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기도할 부분도 더 선명히 보여 지는 것 같았습니다. 에스겔서에 22장 30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한 가지 기이히 여기셨다고 그랬는데 그게 뭐냐면 멸망하는 저들을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 설 중재자들이 없음을 기이히 여기시고 이제 저들에게 심판하시되 저들이 행한 행위대로 심판을 쏟아 부으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중재자’란 예를 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범죄하여 하나님의 분노가 그들 가운데 임할 수밖에 없었을 때에 모세가 그들을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과 자비하심을 구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 분노를 돌이키시고 저들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시고 은혜와 긍휼을 베푸셨는데, 지금 하나님 앞에서 그러한 중재자가 없음을 이상히 여기시고 하나님이 친히 일어나셔서 자기 명예를 위하여 하나님의 의와 열심을 가지고 악인들에게 우상숭배자들에게 그들이 행한 그대로 갚으실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저는 개인적으로 그동안 중보기도 할 때, 하나님의 교회를 회복시켜달라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해달라고 계속 기도해 왔지만,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을 향하여 치닫고 있는 안 믿는 자들을 위해서는 기도를 못한 것 같습니다. 아니 안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중재자가 없음을 인하여 이상히 여기셨다. 라는 말씀을 보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기도해야 할 중요한 한 가지가 불신자들을 위한 기도, 멸망을 향하여 치닫는 안 믿는 세상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부분을 새롭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미국의 영적 대 각성운동 중에 제2차 대각성 운동이 임한 적이 있습니다. 제1차 운동 때는 조나단 에드워드와 무디 같은 분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실 때에 수많은 어떤 현상들도 나타났고 사람들이 울며불며 가슴을 찢고 회개하고 또 쓰러져서 기절하기도 하고 머리를 땅에 쳐 박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는 이러한 현상들이 나타나면서 놀라운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2차 대각성 운동 때에는 제1차 대각성 운동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그 때에는 무디나 조나단 에드워드처럼 세계적으로 알려진 유명한 목회자들을 사용하신 것이 아니고 각 지역교회들의 평범한 리더들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런데 2차 각성운동은 특별히 뉴욕에서 일련의 무리들이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기도하는 가운데 그 기도의 모임이 온 나라 전체에 퍼지기 시작하면서 잃은 영혼들이 대규모로 주 앞에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때 많은 경배와 찬양을 드려졌고, 그리고 특별히 누가 말씀을 잘 전하기보다는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행하신 일들을 서로 나누고 그리고 주님 앞에서 기다리는 중에 주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놀랍게 임하시고, 그래서 삶이 놀랍게 변하고 특별히 많은 영혼들이 주께 돌아오는 역사가 미국 전역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2차 대각성 운동을 있고 난 후에 1차 때보다 더 많은 신학교가 세워졌고, 더 많은 선교사가 파송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하나의 특징이 기도인데, 그 기도 중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 뭐냐면 불신자를 위한 기도였습니다. 그들이 모여서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나눌 뿐만 아니라 그들이 모여서 기도할 때, 기도의 주된 target이 잃은 영혼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들으셔서 제2차 각성운동을 통해서 100만 명이 넘는 놀라운 수의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올 수 있도록 역사하셨습니다. 이렇게 보시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부흥으로 임하시고 하나님의 교회를 회복시키실 텐데, 회복과 부흥의 역사와 아울러 동일하게 같이 오는 것이 뭐냐면 심판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어떠한 자세를 가지고 그것을 맞이하느냐에 따라서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게 되는 결과가 되는데, 하나님의 부흥이 올 때, 심판중의 하나가 불신자를 향한 심판이 임합니다. 성경에서 명백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중재하는 자가 없음을 이상히 여겼다고 그러시는데 우리가 이러한 관점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간절히 부르짖되 잃은 영혼들을 위해서 간절히 부르짖는 기도를 절대로 잊지 말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임하셔서 역사하시는 그 날 이 나라 이 백성 가운데 잃은 영혼들을 위하여 중재하는 자가 없음을 인하여 내가 이상히 여긴다고 말씀하신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부끄럽고 그 책임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또한 무엇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인가를 더 또렷하게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2. 타락한 지도자들을 위한 심판이 있습니다.
“들의 짐승들아 삼림 중의 짐승들아 다 와서 삼키라 10 그 파수꾼들은 소경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라 능히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요 누운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니 11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요 그들은 몰각한 목자들이라 다 자기 길로 돌이키며 어디 있는 자이든지 자기 이만 도모하며 12 피차 이르기를 오라 내가 포도주를 가져오리라 우리가 독주를 잔뜩 먹자 내일도 오늘같이 또 크게 넘치리라 하느니라”(사59:9-12)

여기에 보면 타락한 지도자들에 대한 심판이 있을 것을 말씀하시면서 들의 들짐승들과 산의 산짐승들에게 와서 그들의 다 삼키라고 합니다. 저는 이 내용 하나하나를 읽으면서 무서웠습니다. 그리고 10절에 보면 “watchmen are blind” 이스라엘의 파수꾼들이 눈이 멀었다. 즉, 영적인 분별력이 가려졌다는 겁니다. 파수꾼들이란 성벽위의 망루에서 누가 오는지를 보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눈이 멀면 적군이 오는지, 전령이 오는지를 모릅니다. 전령이 온다는 것은 하나님의 움직이심을 보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적군이 오는 것을 본다는 것은 사단이 움직임을 보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로 치면 교회 지도자들이 영적인 분별력이 가려져서 보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심판이 있을 것을 말합니다. 제가 읽으면서 더 두려운 것이 이사야 하반부는 회복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 회복이 가장 먼저는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인데, 그 말씀이 예수님 안에서 완성되었고, 그 다음은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인 교회를 말씀하는 것이라고 살펴보았는데, 그래서 여기 심판만 하더라도 정확하게 예수님 시대에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바리새인에 대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눈먼 소경이라’ 그래서 너희는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한다고 하시면서 그들에게 다가오는 심판에 대해서 말씀하셨고 그 심판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오셨는데 당시에 파수꾼들은 눈이 멀어 보지 못했습니다.

마가복음 6장 34절입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어느 날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는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백성들이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민망히 여기사 그들을 여러 가지로 가르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수많은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대제사장들 회당장들 등 종교지도자들이 수없이 많았는데, 왜 예수님께서는 그 시대를 목자가 없다고 하셨을까요?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구약성경 민수기 27장 17절 보면 선명히 보입니다. “그로 그들 앞에 출입하며 그들을 인도하여 출입하게 하사 여호와의 회중으로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이 말씀의 배경은 모세가 하나님께서 자기를 가나안에 들이시지 않겠다고 하셨을 때, 하나님께 기도한 내용입니다. 그럼 자기 뒤에 후계자를 세우셔서 하나님 앞에 들어가고 나가며 행하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목자 없는 양같이 방황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것을 보면 우선 모세가 목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 다음에 모세의 후계자로 세운 여호수아가 목자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럼 거기서 말하는 목자는 하나님 앞에서 들어가고 나가고 라고 표현된 것처럼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서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와 하나님의 행하시는 그 일을 보고 그 하나님의 행하심 가운데로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는 자가 목자입니다. 모세가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해 왔고, 여호수아가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여 가나안 땅을 점령하게 됩니다.

예수님 시대에 성경을 잘 알고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종교적 전통을 따라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나름대로 큰 무리 작은 무리를 섬기는 그 많은 종교지도자들이 있었지만, 그들 중에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의중과 의도를 깨달아 그리로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는 자들이 없었다는 겁니다. 왜냐면 영적으로 눈이 멀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생각하기를 자기들은 성경을 이론적으로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자기들은 백성들의 빛이라고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롬2:17-20) 당시에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인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반복적으로 말씀하시기를 ‘소경된 인도자여, 소경된 인도자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하반부에 보면 주님이 오실 때, 소경된 리더들에게 심판이 있을 것을 말씀하시는데, 예수님 시대에 그대로 일어났습니다. 저 개인적으로 엄청 무서운 게 ‘나는 여기에 안 속해 있어’라고 말할 자신이 없어서 두려웠습니다. 보십시오. 지도자들에 말하면서 “watchmen are blind” 파수꾼들이 눈이 멀었다는 겁니다. 파수꾼은 적이 오는 것을 보아야 하고, 전령이 오는 것을 보고 분별할 줄 알아야 할 자들입니다. 그래서 나팔을 불어야 할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눈이 멀었습니다.

그 다음에 보십시오. “they all lack knowledge” 그들 모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부족하다. 이것이 연결됩니다. 영적인 분별력이 있어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습니다. “they are all mute dogs, they cannot back” 그들은 모두 벙어리 개라서 짖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짖지 아니하는 지도자들에게 심판이 있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지도자들을 개로 비교하고 있습니다. 개들이 해야 할 일은 짖어야 하는 것인데 하나님이 짖지 못하는 벙어리 개를 지도자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심판이 있을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짖는 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우리말에 ‘벙어리 개라 능히 짖지 못하며’ 이 말을 이해하려면 이사야서 58장을 보면 좀 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개들로 비유하는 것을 그 당시에 타락한 지도자들과는 다르게 이사야는 올바른 지도자였고, 이사야는 짖는 개였습니다. 그래서 이사야서 58장 1절에 “크게 외치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같이 날려 내 백성에게 허물을, 야곱 집에 그 죄를 고하라”고 하셨다.

그러면 짖는 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사1:10-15)

지금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서 주신 이 말씀을 여러분들이 그대로 받지 마시고, 반대로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해 있는 상황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종교적인 열심이 대단했습니다. 안식일은 기본이고 매월 첫 날을 하나님 앞에 시작한다는 의미에서 월삭을 드렸고 모든 대회와 절기를 지켰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나올 때 그냥 빈손으로 나오지 않고 수송아지 수염소 어린양 등 무수한 제물을 드렸고, 하나님 앞에 많이 기도했습니다. 그러니까 본인들은 신앙생활 잘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사야서 58장 2절을 봅니다.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이사야서 58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 간 상황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앞뒤로 연결해보면 영적으로 다 똑같은 상황입니다. 그때 백성들과 연결시켜도 전혀 문제가 없을 내용입니다.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겨함이” 이들은 날마다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하나님을 찾았다는 말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했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날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모세가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의 길을 알기를 즐거워했다고 그랬습니다. 이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즐거워함이 마치 의를 행하여 그 하나님 규례를 폐하지 아니한 나라 같으니” 또한 의로운 판단을 하나님께 구하며, 하나님께 옳은 판단이 무엇인가를 구했고, 하나님께 가까이 하기를 즐겨했습니다. 그러면서 금식했습니다. 이들은 안식일은 기본이고 월삭, 대회 모든 절기를 지키되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철저하게 잘 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은 기껏 해봐야 주일날 딱 한번 예배드리러 오는데 이것에 비하면 저들은 훨씬 신앙생활 잘 했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은 헌금을 해도 때론 천 원짜리 쓱 넣기도 하는데 저들은 수송아지, 수염소, 무수한 제물, 살찐 짐승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리고 저들은 많이 기도했고 왕부터 어린아이까지 금식했습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의 길을 알기를 즐겨했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을 즐거워했다고 그랬고, 하나님의 옳은 판단을 구하되 의로운 나라처럼 옳은 판단알기를 구했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면 그 나라가 제대로 되겠습니까? 안 되겠습니까? 우리는 답을 다 압니다. 성경의 역사가 증명하니까요.

이사야서 59장 2-5절을 봅니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3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웠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발함이라 4 공의대로 소송하는 자도 없고 진리대로 판결하는 자도 없으며 허망한 것을 의뢰하며 거짓을 말하며 잔해를 잉태하여 죄악을 생산하며 5 독사의 알을 품으며 거미줄을 짜나니 그 알을 먹는 자는 죽을 것이요 그 알이 밟힌즉 터져서 독사가 나올 것이니라”

저들이 하나님을 찾으면서 금식하는데 왜 듣지 않으시냐고 따졌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너희처럼 먹지 않고 갈대처럼 고개를 숙이고 베옷을 입고 재 가운데 앉아있는 게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은 전혀 모르고 금식하면서 입술로는 하나님을 찾는다고 말하고, 하나님의 옳은 판단을 구한다고 말하고, 날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간다고 말하면서 다른 이웃을 압제하고, 억압하고, 친척 중에 어려운 사람을 자기 집에 들이지 않고, 착취하고, 자기 욕심을 따라 행했습니다. 오늘날도 금식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이해가 이들과 거의 비슷합니다. 그러니까 겉보기에는 매우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를 구하고, 하나님 알기를 구하는 것 같은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실제로 주님을 사랑하는가 안 사랑하는가를 판단하실 때, 우리의 하는 말과 이해를 보시는 게 아니고, 우리의 행동을 보십니다. 그래서 믿음은 행동을 옷 입고 나옵니다(약2:17). 여러분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날도 진짜 그 시대 사람들 못지않습니다. 이들은 적어도 그들의 가치관에 있어서나 예배의 모양에 있어서나 종교적인 면에서는 우리보다 백 배 낫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앙의 열매뿐만 아니라 의식마저도 저들보다 훨씬 못합니다(마5:20).

다시 성경을 보십시오. 그런 저들에게 하나님이 선지자를 보내서 하신 말씀이 저들의 죄를 고하라는 겁니다. 저들이 중심에서 하나님을 떠나 있음을 말하라는 겁니다. 그들의 신앙이 올바른 신앙이 아님을 말하라는 겁니다. “크게 외치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같이 날려 내 백성에게 허물을, 야곱 집에 그 죄를 고하라”(사58:1) 1장 10절에서도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이렇게 하나님의 관점에서 저들이 죄를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말하라는 겁니다. 이것이 짖는 겁니다. 왜냐면 그렇게 돌아와야 저들이 회복될 거니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전 존재로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삶을 통해 드러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얼굴을 구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살지 않고 그렇게 보였을 뿐입니다

그러면 짖지 못했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사람들이 이때나 그 때나 탐심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의식적인 면에서 열심히 추구합니다. 나름대로 신앙적인 지식을 찾아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을 구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속에 탐심이 가득하여 살아갈 때는 그 탐심이 원하는 대로 행합니다. 그리고 자기 삶에 불이익이 닥치는 것은 절대 안하고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을 압제하고 억압하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게 죄책감도 없이 행합니다. 강단의 메시지도 그들 속에 있는 탐심을 부추길 소리를 하고 그들은 그것을 듣기 원합니다. 전하는 자와 듣는 자가 둘 다 그 중심에 탐심이 가득한 증거입니다. 다시 말하면 축복의 메시지만을 전하고 사람들은 그것을 원합니다. 예레미야 6장에 13절에 보면 “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남하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이처럼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이 다 타락하여 그 중심에 탐심이 가득하여 실재로는 평화가 없는데 거짓말로 평화를 외쳤다고 말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을 붙잡아 놓을 수 있으니까요. 그것을 두고 하나님이 짖지 못하는 개요 벙어리 개라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거기에 심판이 올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무서운 내용 입니다. 여러분 주님이 오실 때는 심판도 같이 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부지런히 외쳤습니다. 그 결과 그는 핍박을 받았고, 최후에는 톱으로 켜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사야서 56장은 리더들을 개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와 같은 선지자를 짖는 개로 거짓 선지자들을 못 짖는 벙어리 개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짖지 않는 개들에게 심판이 있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짖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탐심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they lie around and dream” 여기 저기 누워 꿈을 꾸고 “they love sleep” 자기를 기뻐하고 “they are dogs with mighty appetites” 큰 식욕을 가진 개들이다. “they never have enough” 아무리 먹어도 더 이상 만족치 않고 “they are shepherds who lack understanding” 깨달음이 부족한 목자들이다. “they seeks his own gain” 그들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자들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리더들이 타락하면 탐심 가운데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일하게 됩니다. 리더는 섬기기 위해서 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목사는 교회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 교회가 목사를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목사는 섬기는 자들입니다. 목자장인 예수님이 제일 먼저 섬기는 분으로 오셨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도 말하기를 “내가 너희의 종이 되었고 그리스도를 인하여 내가 복음뿐만 아니라 내 목숨도 너희를 위하여 기꺼이 허비하기를 즐겨했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올바른 리더들은 섬기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신앙이 타락하면 자기의 이득을 추구하기 시작합니다. 오늘날 목회자로 말하면 목회자는 섬기는 자로 교회를 위해 존재하는데 타락하게 되면 교회가 목회자를 위해 존재하기 시작합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 13 그 제사장들이 백성에게 행하는 습관은 이러하니 곧 아무 사람이 제사를 드리고 그 고기를 삶을 때에 제사장의 사환이 손에 세살 갈고리를 가지고 와서 14 그것으로 남비에나 솥에나 큰 솥에나 가마에 찔러 넣어서 갈고리에 걸려 나오는 것은 제사장이 자기 것으로 취하되 실로에서 무릇 그 곳에 온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같이 할 뿐 아니라 15 기름을 태우기 전에도 제사장의 사환이 와서 제사드리는 사람에게 이르기를 제사장에게 구워 드릴 고기를 내라 그가 네게 삶은 고기를 원치 아니하고 날 것을 원하신다 하다가 16 그 사람이 이르기를 반드시 먼저 기름을 태운 후에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취하라 하면 그가 말하기를 아니라 지금 내게 내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였으니 17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삼상2:12-17]

엘리 제사장 시대에 엘리의 아들들도 제사장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저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lack understanding” 이 말은 하나님의 길, 마음, 의도, 방법을 알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 한 가지 특징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제사장이 필요한데, 제사가 자기들을 위해서 존재하는 겁니다.

초대 교회 때도 그랬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3장 2절에 성도들에게 말하기를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고 경고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자랑하고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구호에 불구하고 중심 깊은 곳에선 예수님이 자신의 자부심의 근원도 아니고, 예수님만이 자기가 자랑의 대상도 아니고, 실재로는 자기의 종교적인 배경이나 자기의 어떤 빽이나, 자기의 어떤 세상적인 것들을 자랑하고 그것으로 인하여 자부심을 갖는 것을 말합니다. 이들을 사도 바울은 개들이라고 행악하는 자들이라고 말하면서 19절에서 결론을 말하기를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자기의 이득만을 구하는 자들이라는 겁니다. 심판이 있을 거라는 겁니다. 이것을 똑같은 말로 이사야서에는 큰 식욕을 가진 개라고 말하면서 아무리 먹어도 그 배가 차지 않는 개들이라고 자기 이득을 구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서운 얘기 아닙니까? 뿐만 아니라 이사야 56장 11절 하반 절에 보면 “they all  turn to their own way” 하나님의 길을 따라 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길을 따라 행했다는 겁니다. 즉 인본주의입니다. 또 12절에 보면 그들은 세상에 취한 자들입니다. “피차 이르기를 오라 내가 포도주를 가져오리라 우리가 독주를 잔뜩 먹자 내일도 오늘같이 또 크게 넘치리라 하느니라” 이런 하나님의 기준 하나하나 자세히 보면서 제가 두려웠던 게 제 자신이 여기서 멀지 않더라는 거였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이 절대로 여기서 멀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기독교인의 삶이 여기서 멀지 않습니다. 성경은 주님이 오실 때 타락한 지도자들을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이 말씀을 하시는데 우리가 거기서 멀지 않으니 너무너무 두려운 일입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정확하게 이렇게 타락했습니다. 임의대로 행했습니다, 영적으로 눈이 멀어 짖지 않은 자들이었습니다,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고, 자기의 이득을 위하여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성전으로 맹세하면 안 지켜도 되지만 제단으로 맹세하면 지켜야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또한 제단으로 맹세하면 안 지켜도 되지만 제물로 맹세하면 지켜야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왜내면 돈과 관련되어 있으니까요.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화 있을진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17 우맹이요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금이냐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18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19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예물이냐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마23:16-19) 리더의 섬김이 돈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 속에 탐심과 탐욕이 가득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정확하게 심판이 왔습니다.

하나님의 오심과 아울러 이렇게 심판이 있는데 하나는 안 믿는 자들에 대한 심판이요, 또 하나는 타락한 지도자들에 대한 심판이고, 성경이 말하는 또 하나의 심판은 하나님의 초청을 거부한 자들에 대한 심판입니다. 여러분 거짓 지도자들 거짓 성도들의 특징이 뭐냐면 안일함입니다. 내일도 오늘 같으리라. 그래서 안일한 자에게 화가 있을 거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정확하게 그 안일함 가운데 살아갑니다. 주님이 방문하시면, 하나님의 부흥이 임하면 그러한 자들에게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초청을 거부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초청을 거부하는 자들에 대한 심판은 이사야서 65장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1절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여기 ‘물음을 받았으며’ 라는 말을 NIV 성경은 “I revealed myself to those who did not ask for me”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 내 자신을 계시했으며 “I was found by those who did not seek me” 나를 찾지 아니한 자들에 의해 내가 발견되었다. “to a nation that did not call on my name” 내 이름을 부르지 않는 나라에게 “I said” 내가 말하기를 “here am I, here am I” 내가 여기 있다 내가 여기 있다. 내가 종일 손을 펴서 2절, “자기 생각을 좇아 임의대로 불선, 불의한 일에 선하지 않는 길을 행하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 여러분 회복이 절실하게 필요할 때가 어느 시점인가 하면 영적으로 지극히 타락한 때입니다. 하나님의 부흥이 임할 때 마다 어느 시대건 신앙적으로 가장 타락한 다음에 부흥이 왔습니다. 예수님의 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이 타락했다는 말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없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구하는 자가 없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길을 깨달아 그 가운데 주님을 추구하는 자가 없는 것을 말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그 한 예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라오디게아 교회가 말세지말의 교회의 예라고 그러는데 라오디게아 교회가 얼마나 인본주의적인 교회인가 하면 예수님이 문 밖에 계십니다. 교회의 주인이 교회 문 밖에 계십니다. 주님의 임재가 완전히 걷힌 겁니다. 하나님의 길을 따라 행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통치와 실제적인 하나님의 주권이 교회 가운데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산업이 발달된 지역에서 부유하게 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복으로 잘 산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선한 게 단 하나가 없습니다. 왜냐면 주님이 그 가운데 안 계시니까요. 그래서 영적으로 가난하고 벌거벗고 눈멀고 굶주려서 너무도 가련한데 그들은 그 사실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예수 믿고 사업 잘 되어서 부자 되었다고 자랑할지 모르지만, 교회가 외형적으로 급성장해서 사람들이 부러워할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 소중한 영적인 분별력이라든가, 참된 의라든가, 의의 행실이라든가, 주를 향한 열정이라든가, 구별된 삶이라든가, 그야말로 주님이 보시기에 단 하나 소중한 것이 있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의 교회처럼 라오디게아교회가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에 예수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아무도 예수님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예수님을 찾지도 않았습니다. 아무도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교회에 오셨습니다. 여러분 기독교의 역사를 보아도 그랬습니다. 예수님의 시대만 하더라도 신앙이 지극히 타락한 시대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에스겔 36장과 37장을 보면 선명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열국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 23 열국 가운데서 더럽힘을 받은 이름 곧 너희가 그들 중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지라 내가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로 인하여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열국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겔36:22-23]

여기에 보면 하나님이 임하시는 것이 저들을 위해서가 것이 아니라 저들로 인하여 열방 가운데서 더럽혀진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해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오실 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이 찾아오십니다. 그런데 여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주님이 찾아오시되 그 찾아오심에 대해서 초청을 거부하는 자들에게 심판이 있습니다. 왜냐면 주님이 오시면 왕으로 오시기 때문입니다. 초림으로 예수님이 오시건, 부흥으로 오시건, 재림으로 오시건, 하나님이 임하시면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 오시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그것이 ‘sovereign call’ 주권적인 하나님의 부르심이기 때문에 심판이 있습니다 이사야서 65장 이하에 보면 하나님을 찾지 않은 자에게, 구하지 않은 자에게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시고, 저들에게 발견되게 하시고, 저들에게 내가 여기 있다 내가 여기 있다 말했다고 하셨는데, 그 다음 줄에 읽어 보시면 그 초청을 거부한 자들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아까도 말씀드린 대로 이사야서 하반부에 나오는 심판에 대한 부분만 하더라도 가장 먼저 예수님 시대에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시대만 하더라도 하나님을 찾는 자가 없는 시대에 하나님이 때가되매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이것은 그들을 향한 부르심 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부르심을 그들이 거부 했을 때 주님이 그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복음서에 보면 반복해서 나옵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교 할꼬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함과 같도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함에 저희가 말하기를 귀신들렸다 하더니 인자가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마11:15-19)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때 책망하시되 화가 있을찐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찐저 벧세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니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 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니라 하시니라.”[마11:20-24]

똑같은 내용입니다. 주님이 오셨을 때 그 세대는 주님께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한 부르심에 저들이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심판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은 1-4장까지는 서론적인 부분입니다. 요한이 태어나고, 예수님이 태어나고, 예수님이 시험을 받으시고, 열두제자들을 뽑고, 5-9장까지는 마태복음이 말하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입니다. 5-7장까지 말씀의 내용은 산상수훈으로 되어진 하나님 나라 메시지의 핵심적인 내용이고, 8-9장 까지는 예수님이 감당하신 성령사역의 핵심적인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10장에는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예수님이 행하신 것과 똑같은 일을 위하여 보내십니다. 그리고 보내면서 하신 말씀이 핍박이 있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 사역을 그대로 감당하면,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면 핍박이 있을 것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11장부터 지금 말씀드린 내용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오셨는데 그 시대가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고 말씀하면서 그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은 크게 3가지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첫째, 나팔을 불어도 춤을 추지 아니하고, 둘째, 피리를 불어도 곡을 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고 조금 더 나아가면 셋째, 정신이 번쩍 드는 게 있습니다. 12장을 읽어 가시면 사모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냐면 솔로몬 시대에 솔로몬의 지혜를 보기 위하여 에디오피아의 시바 여왕이 많은 보물을 쌓아가지고 그 멀리서 솔로몬의 지혜를 사모해서 찾아왔는데, 지금 솔로몬하고는 비교가 안 되는 하나님의 아들이 와있는데 너희는 사모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게 죄라는 겁니다. 돌이킬 수 없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거부라는 겁니다. 그러면 문제는 이겁니다. 그 당시 바리새인들(종교지도자들)이 왜 반응을 안 보였습니까? 왜 회개하지 않았습니까? 왜 사모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그들의 관점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가 아니니까 그런 겁니다.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돌이 되었다고 말한 것처럼(시118:22; 마21:42), 그 건축가들, 그 성경 전문가들의 눈에 보기에는 예수님은 메시야가 아니니까요. 이사야 시대에도 하나님이 이사야를 통해서 그 시대를 향하여 메시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회개하지도 아니하고 반응을 보이지도 아니하고 사모하지도 아니하므로 심판이 임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사야를 세우신 것은 하나님의 초청입니다. 하나님의 방문입니다. 예레미야 시대에도 그랬습니다. 그럼 왜 그들이 안 받아 드렸는가? 자기들의 관점에서 이사야는 선지자가 아니니까요. 자기들은 잘하고 있는데, 그렇게 열심히 안식일 날 제사를 드리고, 그렇게 열심히 월삭과 모든 대회를 지키고, 모든 절기를 지키고,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고, 그렇게 열심히 금식하고, 그렇게 열심히 하나님의 판단을 구하고, 그렇게 열심히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를 기뻐하는데, 이사야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셔도 그들은 들을 귀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모하지 않은 겁니다. 그러니까 회개하지 않은 겁니다. 그러니까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절대로 묵과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이사야를 통해서 말씀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니까요. 그리고 그분의 부르심은 주권적인 왕의 부르심 이였으니까요. 그래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심판이 있었습니다. 성경전체가 그걸 보여줍니다. 회복 때마다 심판이 있는데, 하나님의 부르심에 거부한 자들에게 심판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하는 얘기가 여러분이 예수님 시대에 살았다면 그리고 그 당시 가장 신앙이 좋다고 생각한 바리새인이었다면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었겠냐는 겁니다.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오늘날도 똑같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시대에 저들을 판단하면서 우리 자신을 비춰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느 시대이건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려면 마음의 자세가 필수인데, 하나님의 말씀 앞에 떠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 떤다는 말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각, 안다고 하는 지식, 당시에 팽배한 신앙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신앙관, 사람들의 평가, 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정직하게 엎드려 하나님의 말씀이 그러하면 그대로 살고자 하는 자세를 가지고 주님의 말씀 앞에 서는 것입니다. 그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그 자세가 바리새인 가운데 있었더라면 예수님을 통해 행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그들은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반응을 보이고 회개하고 돌이켜 사모함으로 주 앞에 나왔을 겁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려면 하나님 앞에 올바른 자세가 없으면 절대로 볼 수가 없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님이 오셨는데, 그 반응을 어떻게 행하느냐가 그들에게 복이 될지 심판이 될지를 판가름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중요한 게 뭐냐면 이러한 올바른 자세를 가지고 서있지 아니하면 마음이 더 강퍅해 진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눈이 더 어두워집니다. 그게 요한복음 9장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되었다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9:39)

여기에 보면 예수님이 심판하러 오셨다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3장에서는 예수님이 나는 심판하러 온 게 아니고 세상을 구원하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해가 잘 안되는 게 언제는 구원하러 왔다고 그러시고, 언제는 심판하러 왔다고 그러시고, 그럼 예수님이 일구이언(一口二言)하시느냐? 아닙니다. 이 둘은 경우가 다릅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분명히 세상을 심판하러 오신 게 목적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그럼 9장에 심판하러 오셨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예수님이 오신 그 자체가 구원뿐만 아니라 심판이 동반되게 되어 있습니다. 양면성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어떠한 자세를 취하느냐에 따라서 구원과 심판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일곱 가지 기적만 나옵니다. 그리고 그 일곱 가지를 영적인 의미로 설명합니다. 그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것은 예수님이 생명의 떡인 것을 보여주는 거라고 말하면서 그 기적 다음에 생명의 떡으로 오신 예수님을 가르치시고, 그 다음에 나사로를 살리신 것은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인 것을 말씀하신 다음에 그 징표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고, 9장에 보면 예수님이 우리의 영적인 눈을 뜨게 하러 오신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보이시면서 날 때부터 눈먼 자를 고치신 사건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날이 안식일 날이라고 해서 그 당시 전통적인 가치관에 기초해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대적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40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4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여기 보는 자들은 보지 못하게 만든다는 말은 실제로 보는 자들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는 게 아닙니다. 여기에 나와 있는 것처럼 실제로는 보지 못하면서 자기가 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마음속에 사모하는 마음도 갈급한 마음도 하나님 말씀 앞에 떠는 자세가 없는 그러한 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러한 자들은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게 될 때 오히려 더 마음이 강퍅해져서 더 눈이 어두워져서 영영 주의 길을 보지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심판으로 임할 거라 그 말입니다.

이사야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서 외쳤습니다. 그 당시 자기들은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영적인 눈이 가려지니까 이사야의 메시지가 거북스러웠습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3년 반 동안 벌거벗고 다니면서 외치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그러면 그렇지 저놈이 미쳤으니까 그렇게 말했지 생각했을 겁니다. 그 당시에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는 선지자들이 많았는데 그게 그들의 눈이 더 어두워진 계기였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말씀하시기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사6:9-10) 왜냐면 하나님은 말씀을 전해도 저들이 돌이키지 않으니까, 3년 반 동안 벌거벗고 다니게 함으로서 실물로 보여주는 겁니다. 저희가 회개하고 돌이키지 아니하면 이처럼 너희의 수치를 들어내고 이방인의 포로로 잡혀갈 것을, 그런데 문제는 아까 말한 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배우고자 하는 자세가 없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떠는 자세가 없으니까 그들의 마음이 더 닫히는 겁니다. 그들이 생각하기엔 심판을 받고 있는 사람은 이사야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심판받고 있는 것은 자기들입니다. 그들은 심판이 올 때가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사야 선지자가 참다운 선지자인 것을 알았습니다. 왜냐면 역사가 증명했고 성경에 써있으니까요. 그런데 바리새인들도 영적인 눈이 가리워져 있으니까 자기 시대에 오신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이게 무서운 겁니다. 하나님이 임하실 때 하나님의 초청에 거부하는 자들에게 반드시 심판이 있습니다. 여기의 핵심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떠는 자세입니다. 그게 없으면 절대로 하나님의 행하심을 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운행하시는데 그게 없으면 그 자세가 없으면 더 마음이 강퍅해집니다. 안들은 것만 못합니다.

넷째, 하나님의 행하심에서 제외됩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에서 제외된다는 말은 그 시대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에서 제외되는 겁니다. 이러한 자들에게 심판으로서 오는 결과가 영적인 분별력이 어두워지는 겁니다. 핵심은 분별력입니다. 바리새인들 보세요? 자기들은 나름대로 신앙생활 잘 한다고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그 시대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에서 완전히 끊어진 자들입니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규례와 규칙을 따라 자기들은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자부했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전혀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지 못했습니다. 자기 삶의 열매를 보면 자기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없는 걸 알 수 있는데 안 비춰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심판이 오면 눈이 어두워져서 그 시대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에서 제외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히브리서 3장에 나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14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히3:12-14)

저는 이 말씀이 저들이 지옥 갔다는 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행7:38). 그러나 그 시대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에서는 완전히 제외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이 그들을 비껴갔습니다. 이제 그들을 향해서 하나님이 가지고 계셨던 것은 38년 동안 그들이 죽기를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에 새로운 믿음의 세대를 세우고 계셨고, 결국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 가셨습니다. 이것이 가장 큰 심판중의 하나입니다. 두려운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금방 모를 수 있습니다. 왜 금방 모를 수 있냐면 사울 왕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울 왕은 두 번의 결정적 불신앙 때문에 하나님의 신임이 완전히 그를 떠났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획을 그에게서 이미 다윗에게로 옮기셨습니다. 그런대도 사울은 22년 동안 여전히 왕으로 다스렸습니다. 그리고 당분간은 예언도 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기간까지는 하나님이 자기를 떠나셨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아니 받아드릴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알게 되었고 나중에는 하나님이 어떠한 모양으로도 말씀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러나 많은 시간이 흐를 때까지 몰랐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길을 따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당분간은 내가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는 것 같고 득의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고 보십시오. 하나님의 심판은 반드시 옵니다. 그 중에 하나가 하나님의 행하심에서 제외됩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광야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저희를 흩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들을 하나님이 더 이상 안 쓰실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보십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그 뒤로도 죽는 그 날까지 그 많은 기적을 보았고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앞에 가고 날마다 여전히 만나는 먹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이미 그들을 비껴갔습니다. 그러니까 심판 중에 하나가 뭐냐면 이처럼 하나님의 행하심에서 제외되는 것입니다.

다섯째, 더 큰 심판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이사야서 하반부에 보면 회복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심판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오시면 항상 두 개는 같이 가니까요. 그러면서 심판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안 믿는 자들과 타락한 지도자들과 그 다음에 하나님의 초청에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심판이 임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이 뭐냐면 회복의 가장 전형적인 특징이 예수님을 통한 회복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서 40장을 보면 시작하자마자 회복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3절부터 하나님의 길을 예비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회복에 있을 때마다 그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서에서 제일 먼저 이사야서 40장 3절을 인용하면서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러 온 침례(세례)요한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심판에 대해서도 예수님 시대에 그대로 이루어 졌습니다. 그런데 무서웠던 것이 그 심판이 단순히 그들의 영적인 눈이 가리워지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심판은 서기 70년에 그 나라가 패망하는 것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이 심판은 이사야서에 예언된 심판입니다. 이 법칙을 보시면 이것은 단순히 그때에 온 게 아닌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회복과 심판이 같이 오는데 돌이키지 않으니까 심판이 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심판은 단순히 하나님의 행하심에 제외되는 정도로 끝나지 않고, 그 민족에 심판이 임했습니다.

여러분 누가복음 19장 44절을 보십시오.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권고받는 날이란 하나님의 방문의 날입니다. “because you did not recognize the time of God's coming to you” 하나님이 너희에게 오시는 그 때를 너희가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심판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곧 하나님이 오셨는데 저들이 그것을 분별하지 못하여 회개함으로 돌이키지 않아 그 결과로 심판이 오되 자식을 땅에 메어치며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아니하는 패망하는 그 심판이 올 거라고 말씀하시고 그리고 그 예언대로 서기 70년에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은 구약 이사야서에 이미 예언된 패턴입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하나님의 행하심에서 제외된 정도 그 훨씬 이상을 포함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두려운 일입니다. 이것은 여태까지 성경을 읽고 하는 저의 추측입니다. “급하고 강한 바람처럼”이라는 책을 보면, 20세기 들어서 인도네시아에 큰 부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큰 부흥이 있은 그 다음에 인도네시아가 공산화되었습니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공산주의 핍박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준비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부흥을 보내셨다.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오셨는데 그 민족이 돌이키지 아니함으로 심판이 왔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흥을 기대합니다. 회복을 기대합니다. 그런데 그게 좋은 날일뿐만 아니라 한편으로는 끔찍한 날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날에 대해서 말하면서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great and dreadful day of the Lord”(욜2:31)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가 보면, 절대 안일하게 있을 자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신앙생활을 안일하게 합니다. 내일도 오늘처럼 괜찮겠지. 나도 내 나름대로 하려고 하는데 하나님도 내 마음을 아실 것이고, 그런데 전혀 하나님을 경외함도, 하나님의 길에 서는 것도, 하나님과 실제로 동행한 삶도 없는, 눈이 멀었기 때문에 무엇이 하나님의 길인지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지 안 기뻐하시는지도 모르는 그러한 자리에 있으면서 나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러한 관점을 올바로 이해하면 절대로 안일함의 자리는 없을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항상 초긴장 가운데 살아간다 하는 그 얘기는 아니더라도 진짜 마음속에서부터 깨어 하나님의 긍휼을 간절히 구하는 자리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회복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입니다. 그리고 가장 핵심인 십자가의 복음위에 서는 것이라고 우리가 처음부터 살펴보았습니다. 앞으로 다른 요소들도 살펴볼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하나님의 부흥으로 임하시기 때문에 회복하실 것인데. 지난주 설교도 저는 너무너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설교준비 하면서 많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여태까지 해 오신 일들, 말씀하신 내용들을 더 선명히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이런저런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렇게 예언하고 저렇게 예언하고 또 기도하다가 이렇게 말씀하시고 저렇게 말씀하신 내용들을 이제는 성경을 갖다 놓고 이게 이거다. 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에 대해서 저 개인적으로 오늘 부분만 하더라도 너무너무 새롭게 더 보게 됩니다. 여러분 이 시대에는 참으로 하나님께서 놀랍게 움직이고 계신 시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제시하고 계시는 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큽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반드시 심판이 같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 심판의 부분을 살펴보았습니다. 참으로 우리가 깨어 진실로 경성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하여 하나님의 길에 행함으로 주와 같이 가기를, 주님의 은혜 가운데 함께 있기를, 이 시대에 하나님의 목적으로 귀하게 쓰임 받는 자리에 같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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