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숨겨진 기간 1부
“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한 너는 노래할 지어다. 구로치 못한 너는 외쳐 노래 할 찌어다 홀로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네 장막터를 넓히며 내 처소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되 너의 줄을 길게 하며 너의 말뚝을 견고히 할 찌어다 이는 내가 좌우로 펴지며 네 자손은 열방을 얻으며 황폐한 성읍들로 사람 살 곳이 되게 할 것임이니라 두려워 말라 네가 수치를 당치 아니 하리라 놀라지 말라 네가 부끄러움을 보지 아니하리라 네가 네 청년 때의 치욕을 다시 기억함이 없으리니 이는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시라 온 세상의 하나님이라 칭함을 받으실 것이며” (사 54:1-5)
우리가 교회회복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는데, 말씀드린 대로 차례보다는 그때 그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3장에서는 이사야서 54장에 나오는 특별히 1절의 약속과 갈라디아서를 살펴보면서 그것을 예수님의 사역에 연결해서 어떻게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감당하시되 특별히 예수님은 거기 나와 있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 중심적인 그러한 교회를 세우기 원하셨다 라는 부분을 살펴보고 지난주에는 예수님의 리더십을 통해서 살펴본 교회회복을 위한 리더십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사실 그 둘을 같이 연결해서 살펴보면 훨씬 좋은 부분입니다.
오늘은 숨겨진 기간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위해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시기 전에 반드시 숨겨진 기간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사야서 54장에 있는 말씀처럼 말입니다. “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한 너는 노래하라 이는 너의 자손이 남편 있는 자손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장막터를 넓히며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라 좌우로 퍼지게 될 것이고 네 자손들이 열방을 얻을 것이고 황폐한 성읍들로 사람 살 곳이 되게 할 것이라.” 이 말씀이 얼마나 좋은 말씀입니까? 너무 너무 신나는 얘기지요. 할렐루야 아멘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남편 없는 자, 잉태치 못한 자가 누구냐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4장에서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사라로 대변되어지는 십자가의 복음과 하갈로 대변되어지는 율법주의 신앙을 예로 들면서 남편 없는 자를 십자가의 복음에 비유합니다. 여기에 남편 있는 자는 하갈로 대변되어지는데, 그럼 왜 사라를 남편 없는 자라고 비유하고 있느냐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셨는데, 하나님의 약속이 빨리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기 보다는 인간의 수단과 방법으로 그 일을 이루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왜 남편 없는 자가 더 자식이 많아질 것이라고 하느냐면 하나님이 그리로 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경우에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가 인간적으로는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생산이 중단된 시점에서도 하나님이 능력으로 임하심으로 사라의 태를 열어서 이삭을 주셨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이삭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져서 실제로 그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놀라운 축복이 거기에 주어졌기 때문에 남편 없는 자의 자녀가 더 많을 거라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하나님의 약속이 금방 성취되어서 이러한 놀라운 역사가 우리 가운데 나타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아브라함의 경우에도 하나님이 그를 부르신 나이가 75세였는데 이삭이 태어날 때가 100세였습니다. 25년이라는 기간이 있었습니다. 이게 숨겨진 기간입니다. 사실 우리 목회자들만 하더라도 주님을 부지런히 따라가면서 주님이 역사해 주시기를 기다리는데, 오늘 내가 주님을 부지런히 찾고 주님의 역사하시길 기다리면 내일 주님이 딱 임하셔서 교회의 태를 팍 여시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교회 가운데 나타나고 예비 된 영혼이 줄줄이 구원받고 그러면 얼마나 신나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을 줄기차게 바라고 찾는데도 도무지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것 같은 이런 기간이 있습니다. 이것이 숨겨진 기간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이 세우시는 모든 사람들에게 다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에 25년이 있었고, 요셉의 경우에도 13년이라는 기간이 있었습니다. 다윗도 보십시오. 하루는 사무엘이 와서 하나님이 보내셨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이 자기를 왕으로 세우셨다고 기름 부었더니 성령이 강하게 임하셨는데 실제로 그가 왕이 되기까지는 약 15년 가까이 도망 다니면서 때로는 자기 목숨이 두려워 침을 질질 흘리며 미친 척하기도 했습니다.(삼상21:10-13) 이것이 숨겨진 기간 입니다.
사실 선교회에 오신 많은 목회자 중에서도 이 기간에 있는 분들이 계실 것 같고, 많은 성도들 가운데서도 이 기간 중에 계신 분들이 많이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특별히 이 숨겨진 기간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 숨겨진 기간은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다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에게도 있었습니다. 이사야서 49장을 보세요. 오늘날 보수적인 대부분의 학자들이 이사야서 49장은 메시야에 관한 예언이라고 다 받아들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말하기를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면 무익하게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 하였도다.” 여기에 보시면 오실 메시야의 삶에도 숨겨진 기간이 있을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세우시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숨겨진 기간이 있습니다.
1. 이 숨겨진 기간은 수치의 기간이기도 합니다.
부끄러움의 기간입니다. 이사야서 54장. “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한 너는 노래할 찌어다 구로치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시기를 말하는 겁니다. 이 기간이 수치가 있습니다. 4절입니다. “두려워 말라 네가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라 놀라지 말라 네가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여태까지 수치를 당했다는 그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 다음에 “네 청년 때의 수치를 잊겠고 네 과부 때의 치욕을 다시 기억함이 없으리라” 이때가 되기까지 수치와 치욕의 기간입니다. 그러면 왜 그 기간이 수치와 치욕의 기간인가? 그것은 겉으로 드러내 보일 열매가 없기 때문에 수치와 치욕의 기간입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75세에 부르셨습니다. 그러면서 그의 본토 아비 집을 떠나라고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말하면서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 앞에 가서 하나님이 나를 큰 민족의 아비로 삼으셨다고 얘기해보세요. 미친 놈! 그럼 아들이 하나라도 있어야지. 하나님은 자기를 큰 민족의 아비라고 그랬는데 사람들에게 보여 줄 자식이 한명도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수치의 기간입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사무엘을 보내서 자기를 왕으로 기름 부으셨는데, 사람들 앞에 가서 그 말을 했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에게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다 알았습니다. 사무엘을 하나님이 세우신 하나님의 종으로 다 인정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지금 너의 모습이 뭐냐고 했을 겁니다. 왕이라고 하면서 그 당시 사람들 보기에 거지같은 부랑자들과 폭력배 같은 자들 떼거리로 데리고 다니면서 자기 부하라고 하는 상황인데 그게 무슨 왕이냐는 겁니다. 그 뿐만 아니라 왕이라고 하면 뭔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열매라도 보여야 될 텐데, 맨 날 죽을까봐 도망만 다니고, 왕이라고 그러면서 자기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것도 적에게 도망갔다가 그 쪽 장수가 죽이려고 하니까 그 앞에서 미친 척하는 그게 무슨 왕이냐는 겁니다. 아무리 얘기해도 내 세울게 없습니다. 그게 수치의 기간입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하루는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셔서 앞으로 행하실 놀라운 일을 꿈을 통해 보이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방나라에 노예로 끌려와 있는 상황입니다. 사람들 앞에 가서 그런 얘기를 해 보세요. 그래서 수치의 기간입니다. 왜 수치의 기간인가 하면 지금 내보일 열매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침례(세례)요한을 향해서 여인이 난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그랬습니다. 구약의 선지자 중에서 그가 감당한 사역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에 가장 큰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그 침례(세례)요한은 아주 어려서부터 30세까지 광야에서 혼자 살았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기 전까지 그는 낙타 가죽으로 옷을 대신하고 석청(바위 꿀)과 메뚜기만 먹고 산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이 사람이 선지자 중에 가장 위대한 선지자라고 얘기해 보십시오. 그러면 조롱과 비웃음의 대상 밖에 되지 않지요. 그래서 수치의 기간입니다. 제가 오금동에서 개척할 때입니다. 한번은 지방회모임에 갔는데 그 가운데 한분이 저보고 유학 갔다 왔다면서 뭐 도움이 좀 되느냐고 했습니다. 그때는 그 말의 의미를 몰랐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까 아주 괘심한 말이더라고요. 왜냐면 자기는 유학 갔다 오지 않았어도 교회가 잘 성장하고 있다는 거지요. 그때 저는 목회자 모임에 나가서 누가 묻기를 요즘 몇 명이나 모여? 그러면 할 말이 별로 없는 겁니다. 내세울게 없으니까요. 수치의 기간입니다. 이처럼 기다리는 기간은 수치의 기간입니다.
그런데 이 수치의 기간에도 내부적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함께하십니다. 사람들 앞에 드러내 보일 열매가 없을 뿐이지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안 하시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을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들 앞에 하나님이 나를 만 민족의 조상으로 삼으신데, 그러면 겉으로는 안 그래도 뒤에 가서 웃겠지요. 저 사람이 자식이 없이 늙더니 정신이 나갔구먼, 아니 큰 민족은커녕 한 족속을 이룰 자식새끼 하나 없으면서 무슨 놈의 큰 민족의 아버지야, 그러면서 비웃었겠지요. 겉으로 나타내 보일게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기억하실 것은 75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 속에는 이미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그를 지도하고 계셨고 그를 인도해 가고 계셨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있습니다. 그것이 단지 열매가 드러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이게 수치의 기간이지만 드러나는 열매가 없지만 그러나 거기에 하나님이 지금 함께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함께하고 계십니다.
다윗도 보세요. 사무엘상 16장 13절에 보면 이제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 붓는 사건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다윗에게) 부었더니 그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 되니라.” 영어 NIV 성경에 보면 “from that day on the spirit of the Lord came upon David in power.” '그날 이후로 하나님의 성령이 능력으로 다윗위에 임하셨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이후로 15년 가까이 사울 왕을 피해 다니면서 사람들 앞에 하나님이 그 당시 유명한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자기를 왕으로 부르셨다고 말할 때, 사람들은 조롱하고 비웃었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기간에도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강력한 기름부음으로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아직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열매가 없는 것이지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자기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미친 척한 그 시점에서도 하나님은 함께하고 계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사야 49장에 메시아의 관한 예언에서도 말하기를, “무익히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도다.” 헛되이 수고 하였다. 내가 수고해 봤지만 아무것도 이루어진 게 없다 나의 수고가 헛되고 헛되다. 되어지는 게 없다. 라고 낙심했다는 겁니다. 사실 다윗만 하더라도 자기가 왕은 나두고 라도 하나님이 자기를 그렇게 세우셨다면, 이 모양이 뭐냐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아무 일도 자기에게 안 이뤄지는 거라고 느껴졌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그 때도 함께 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사실 그가 도망 다니면서 쓴 시가 그가 왕이 되어서 쓴 시보다 훨씬 많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시들이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들 가운데 그리스도의 고난이 너무나 놀랍게 예언되었습니다.
다루심의 기간에는 아직 드러내 보일 열매가 없어서 수치의 기간이지 하나님의 은혜는 놀랍게 함께하시는 기간입니다. 요셉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행전 7장 9절입니다.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하나님이 저와 함께 계셔.” 종으로 팔려간 요셉이 사람들의 눈에 보기에는 하나님이 주신 약속과는 정반대로 되어져 가는데 하나님은 거기에 함께 계셨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아까 말씀드린 대로 그 수치의 기간 동안에 저와 저의 가정의 필요를 하나님은 너무 너무 놀랍게 채우셨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역은 열리지 않습니다. 수치의 기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함께 하십니다.
2. 숨겨진 기간은 자신의 무능함을 발견하는 시간입니다.
앞에 메시야에 관한 예언을 보세요. 이사야 49장 1절입니다. “섬들아 나를 들으라 원방 백성들아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내가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를 부르셨고.” 보세요. 기름부음이 이미 거기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벌써 함께 하고 계십니다. 뱃속에서부터 하나님의 함께하고 계십니다. 아까 침례(세례)요한의 경우도 성경에 보면 그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성령에 충만했습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이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겉으로 나타나는 열매는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사람들에게 드러내기 위한 사역의 열매가 없는 것입니다. 기름부음도 있고, 너무너무 놀랍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 아직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수치의 기간입니다. 그런데 사실 침례(세례)요한의 경우는 30년을 기다렸다가 6개월 사역했습니다. 그런데 그 6개월 동안에 한 사역이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보다 가장 소중한 일을 감당했습니다. 물론 그에게 긴 기다림과 연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 앞에 갔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은 우리의 관점과는 매우 다른 것을 봅니다. 그래서 “섬들아 나를 들으라 원방 백성들아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내가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가 어미 복중에서 나옴으로부터 내 이름을 말씀하셨으며 내 입을 날카로운 칼같이 만드시고 나를 그 손 그늘에 숨기시며 나로 마광한 살에 만드사 그 전통에 감추시고 너는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나의 종이요 내 영광을 나타낼 이스라엘이라 하셨느니라.” 이처럼 기름 부으심이 이미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런데 4절은 “그러나 나는 말하기를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히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 다 했도다” 이 기간동안 하나님께서 드러내시지를 않으시니까 눈에 보이는 사역적인 열매가 없습니다. 그래서 수치의 기간인데, 이 기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냐면 자신의 연약함을 발견하게 하십니다. 자신의 무능을 발견하게 하십니다.
제가 몇 년 전에 미국에 켄사스 주의 세미나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릭 와일리’라는 분이 저한테 와서 기도해 주었습니다. 기도해 주면서 이름이 뭐냐고 그래서 이름을 댔습니다. 그랬더니 그때부터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예언을 주시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사야 49장 1-2절 말씀과 하나님이 그 전에 저에게 깨닫게 해주셨던 부분을 그대로 얘기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 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저를 그 교회의 리더들에게 자꾸 소개해 줄려고 나를 데려가려고 하는 겁니다. 기회가 되지 않아서 그렇게 되지는 않았지만, 그런데 제가 돌아와서 이 구절을 읽어 봤습니다. 그게 이사야서 54장 1-5절입니다.
“1 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구로치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2 네 장막터를 넓히며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되 너의 줄을 길게 하며 너의 말뚝을 견고히 할지어다 3 이는 네가 좌우로 퍼지며 네 자손은 열방을 얻으며 황폐한 성읍들로 사람 살 곳이 되게 할 것임이니라 4 두려워 말라 네가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라 놀라지 말라 네가 부끄러움을 보지 아니하리라 네가 네 청년 때의 수치를 잊겠고 과부 때의 치욕을 다시 기억함이 없으리니 5 이는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시라 온 세상의 하나님이라 칭함을 받으실 것이며”
우리는 이 수치의 기간동안에 한편으로 철저하게 자신의 무능력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아직 거기에 안 가봤으면 모릅니다. 그런데 대부분이 가보셨을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생활도 한편으로는 이 숨겨진 기간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이 과정을 통해서 그들을 가나안에 들이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8장에 왜 그들을 광야로 인도하셨는자 말하면서 그들을 겸손케 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무능력을 철저하게 발견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신명기 8장 2-3절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로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이 기간동안에 하나님이 하신 일이 저들을 겸손케 하신 것입니다. 자신의 무능을 발견하는 시간입니다.
3. 숨겨진 기간 동안은 하나님의 자원으로 사는 것을 배우는 시간입니다.
이 두 개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철저하게 자신의 무능을 보게 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이 태를 막으십니다. 그런데 동시에 은혜로 함께 하십니다.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함께 하십니다. 기름부음이라고 하니까 반드시 외부적으로 나타나는 사역의 능력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윗 같은 경우에도 하나님의 성령이 강력하게 그에게 임하셨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 오히려 도망 다니고, 미친 척해야 되고, 그러나 실재로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 많은 시를 썼는데, “하나님이여, 어느 때 까지니이까” “원수가 나를 둘러싸고 에워싸고 진치고 있나이다.” 주로 이런 시입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주님을 바라보는 가운데 주님이 주신 힘으로 어떤 때는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시3:6] 그때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그와 함께 한 것을 아마 몰랐을 겁니다. 그런데 그게 기름부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에 대한 예언이 그때 가장 많이 성령의 감동으로 씌여졌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기름부음이 함께 한다는 것은 반드시 외부적으로 능력이 팍팍 나타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한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지금 거기에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태를 막으시느냐하면, 자신의 무능함을 철저히 발견하게 하기 위함이고, 그 다음은 하나님의 자원으로만 사는 것을 배우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름부음이라는 것이 참 알다가도 모를 것 같습니다. 제가 또 다른 기회에 켄사스 시티에 갔었는데, 어떤 미국 분하고 같이 모텔에서 잤습니다. 같이 차를 타고 왔다 갔다 하면서 얘기를 나누는데, 고개를 흔드는 겁니다. 그래서 왜 그러냐고 했더니 자기는 그 집회에 안 오려고 했답니다. 초청장을 몇 번 쓰레기통에 버렸는데 하나님이 가라고 그러신 것 같아서 왔다는 겁니다. 그래서 집회에 참석했는데 자기를 전혀 알지 못하는 세 사람이 그것도 각각 다른 곳에서 서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자기에게 와 가지고 하나님이 감동을 주신다고 하면서 자기에 대한 가장 핵심적인 내용을 탁! 탁! 탁! 말하고 가더랍니다. 그래서 완전히 정신을 가다듬지 못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인도해 가시는 것을 느끼니까. 그래서 고개를 ‘학’, ‘학’ 그러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그 양반이 이제는 제 옆에 오더니 저한테 “성령의 기름부음이 그렇게 강하게 함께 한다는 겁니다.” 그 분이 하는 얘기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성령이 함께 하는 사람한테는 자꾸 만져서라도 성령의 기름부음이 옮아야 된다.”고 그러면서 제가 서 있는데 와 가지고 문지르고 그러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속으로 “성령의 기름부음이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이 모양 이 꼴이겠냐.” 제 사역을 볼 때 성령의 기름부음의 함께 하는 사역이 아닙니다. 꽉 막아 놓으셨는데, 하나님의 은혜는 놀랍게 함께 하시는 것은 보이지만 완전히 막혀 있어서 사람들이 교인이 몇 명이나 모이냐고 하면 더 이상 할 말이 없는데, 그런데 무슨 성령의 기름부음이 그렇게 함께 해서 문질러서 가져갈 게 있다고 하는지, 그래서 속으로 제가 그랬습니다.
여러분, 다윗이 어떻게 생각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돌이켜보면 실제로 하나님의 강력한 성령의 기름부음이 그 어느 때보다도 다윗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사방을 막으시는 겁니다. 뭐하기 위해서요. 자기의 무능함을 철저하게 발견하고 하나님의 자원으로만 사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입니다. 그래서 신명기 8장 3절에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라” 여러분, 광야는 하나님의 자원이 아니면 살 수 없는 곳입니다. 아무것도 의지할 데가 없는 곳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탄에게 시험받으실 때도 이 구절을 인용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을 일반적으로 이해하기를 ‘사람이 육신적인 떡만 가지고 되느냐 영혼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지.’ 이렇게 이 구절을 이해합니다. 그런데 그게 맞아요?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이 구절은 그 이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의도적으로 먹을 것이 없는 광야로 인도하셔서 주리게 하셨습니다. 거기는 먹을 것이 없는 곳입니다. 거기는 돌밖에 없고, 물 한 방울, 풀 한포기 없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차라리 애굽에서 죽는 것이 훨씬 낫다. 그랬다면 떡 반죽 옆에서라도 죽었지, 이렇게 얘기할 수밖에 없는 것을 봐도 거기는 자원이 전혀 없는 곳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광야로 인도하신 것은 저들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가르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저들이 사는 길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마실 물이 떨어져서 다 죽게 생겼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팡이를 들어 반석을 치라고 말씀하시면 그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반석을 치면 거기에서 물이 나와서 먹고 살았고, 먹을 것이 떨어졌을 때,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시면서 새아침에 가서 거두어들이되 하루치만 가둬서 먹으라고 말씀하실 때, 더 많이 거둬온 사람은 그 다음 날 썩어 구더기가 생겨 버렸고, 또 안식일 전날에는 이틀 치를 거두라고 그랬는데 또 버러지 생길까봐 하루치만 가져온 사람은 그 다음날 쫄딱 굶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저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기 원하셨는가하면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하나님의 입에서부터 나오는 말씀을 순종할 때, 하나님의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것을 가르치려고 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종들이 숨겨진 기간 동안에 철저하게 하나님의 자원으로 사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게 P,L,O의 삶을 반드시 배워야 한다는 겁니다. P,L,O의 삶이란, P는 ‘pray’ 기도하다, L은 ‘listen’ 하나님의 음성 듣고, O는 ‘obey’ 순종하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그 일에 내 온 삶을 다해 믿음으로 동참하고 순종함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시는 것을 우리가 숨겨진 기간에 반드시 배워야 합니다. 바울을 전도한 다메섹의 아나니아처럼 주를 기다리는 중에(하나님 앞에 경배하며 하나님을 기다리며 하나님 얼굴을 구할 때) 주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서 눈이 멀어 금식하고 있는 바울에게 갈 것을 말씀하시고 그가 있는 장소와 위치를 알려 주시고, 가서 믿음으로 순종했을 때,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통해 바울이 구원받게 되고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도 중의 한 사람으로 구원받게 되는 그러한 일을 경험했던 것처럼 우리가 반드시 P.L.O의 삶을 배우고 그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바꿔 말하면 이것이 하나님의 자원으로 사는 삶인데, 이 삶을 반드시 배워야 됩니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서 반드시 배워야 할 것이 ‘믿음으로 사는 삶입니다.’ 맨 처음에 살펴본 대로 남편 있는 자가 오히려 하갈로 대변되어지는 거짓신앙체계라고 했는데, 왜 그를 남편 있는 자라고 말하느냐면 사라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이 오셔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셔야 되는데 그것이 빨리 안 되니까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라의 종 하갈을 첩으로 집어넣은 것처럼, 그런데 이것은 올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이 가운데 있으면 하나님과의 동행하는 삶이 되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P.L.O의 삶을 통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행하심을 보고 우리가 믿음으로 순종할 때, 하나님이 역사하는 것인데, 이 때 하나님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셔야 되기 때문에 이 숨겨진 기간 가운데 하나님이 집중적으로 훈련시키는 것 중에 하나가 반드시 오직 믿음으로 주님을 신뢰함으로 주님의 역사를 경험하는 것을 가르칩니다. 왜냐면 이 거짓신앙체계에서 올바른 신앙체계로 옮겨져야 되니까요. 그러니까 바로 그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는 아브라함을 보세요. 25년 동안 하나님이 무엇을 집중적으로 가르치셨습니까? 바로 믿음에 의한 삶을 가르치셨습니다. 한편으로는 아브라함은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75세가 되었는데 본토 아비 집을 떠나서 하나님이 지시 할 땅으로 가라 그러면 쉽게 갈 수 있겠어요? 삶의 터전을 옮겨야 되는 건데,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순종했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하고는 차원이 좀 다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아브라함도 처음엔 하나님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그랬는데 조카 롯을 데리고 갑니다. 그것 때문에 많은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또 약속대로 자식을 하나님만 의지해서 기다려야하는데, 중간에 하갈을 집어넣어서 인간적 방법으로 자식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눈물의 씨앗이 되어 지금까지도 어렵습니다. 또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떨어졌을 때, 하나님이 어려워도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고 하셨는데 거기에 양식이 풍부하다는 소식을 듣고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내려갑니다. 그래서 내려갔다가 바로 왕이 자기를 죽이고 아내를 뺏어 갈까봐 아내를 누이라고 그것도 두 번 씩이나 거짓말을 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때론 실수하고 때론 넘어졌을지 몰라도 하나님이 반복적으로 그를 훈련시킨 것이 뭐냐면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므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 것을 경험하는 그 자리로 훈련시켜 가십니다. 그리고 로마서 4장에서 그 결과를 말해줍니다.
“19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반드시 P.L.O의 삶을 배워야 되고, 반드시 믿음에 의한 삶을 배우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 무엇보다 해야 할게 뭐냐면 하나님의 얼굴을 집중적으로 구하는 것입니다. 이 시기에 하나님 그 분을 구해야 합니다.
4. 숨겨진 기간은 성령을 근심케 하지 않는 것을 배우는 시기입니다.
이 부분은 알트 킨델 목사님이 성령의 기름 부으심에 대해 말하면서 내일의 기름 부음에 대해 말하는 부분입니다. 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기 때문에 인용합니다. 그 분이 말하는 내일의 사람이 누구냐면 다윗처럼 하나님의 성령의 기름부음이 이미 함께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를 아직 안 세우셨는데, 기름부음은 있습니다. 그러나 강단은 아직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아직 그의 태를 열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함께 하시고 하나님의 약속과 계획은 있는데 하나님의 약속 하신 것을 아직 안 이루셨습니다. 지금 숨겨진 기간 가운데 있는 사람, 그 사람이 내일의 사람입니다. 이러한 자들에게 집중적으로 가르칠 ‘listen’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 한 가지가 뭐냐면 성령을 근심케 하지 않는 것을 배우는 시기입니다. 특별히 다윗의 예를 들어서 많이 얘기 합니다. 그런데 이 부분은 아까 말씀드린 하나님의 자원으로 사는 것을 배우는 시기하고 연결됩니다. 철저하게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그분의 행하심을 보고 그분의 음성을 듣고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을 배우는 그 시기인데 그것을 구태여 분리하자면 이 시기동안 반드시 배워야할 것 중의 하나가 뭐냐면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케 하지 않은 것을 배워야 합니다. 아까 하나님의 자원으로 배우는 것만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그 예로 이길수 목사님도 하나님께서 점점 많은 일들을 하고 계시고 하나님이 귀하게 세워가고 계시고 앞으로도 더 놀랍게 세우실 줄로 믿는데 그 분은 죽정 감리교회에 있을 때가 숨겨진 기간이었습니다. 그 기간 동안에 집중적으로 하나님이 그 분을 만지시고 세워 가시는 기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간에 하나님이 그분에게 무엇을 가장 많이 훈련 시켰는지 아세요? 바로 하나님의 자원으로 사는 삶인 P.L.O 의 삶을 가르쳤습니다. 집중적으로 주님의 얼굴을 구하며 주님을 찾고 주 앞에 기다리는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그 삶. 그래서 그와 관련해서 말씀드린 대로 한 가지 배워야 할 것이 뭐냐면 성령을 근심케 하지 않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 말입니다.
고린도 후서 1장에 보면 알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예수님의 형상으로 변화시키시고 또 하나님의 행하신 일 가운데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를 통해서 역사하시고 우리 주님 앞에서 영화롭게 되는 그 날까지 우리를 인도하시도록 하나님께서 성령을 우리 속에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성령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성화시키시고, 우리를 승리케 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성령을 통해서 하십니다. 그러면서 에베소서 4장에 보면 그러기 때문에 ‘성령을 근심케 하지 말라’고 그럽니다. (영어 성경: ‘감히 성령을 근심케 하지 말라.’ )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이루실 텐데 우리가 성령을 반복적으로 근심케 하면 우리에게 남아있는 거라고는 우리 스스로의 노력과 자신의 결단력과 자신의 헌신 밖에 없는데 그걸 가지고는 절대로 주와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걸 가지고는 어떠한 승리도 경험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을 근심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는 아주 쉽게 성령을 근심케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와 관련해서 아주 두려운 얘기이긴 한데 그 중에 하나가 삼손의 예입니다. 영화에 보면 삼손이 큰 거인으로 나와서 한번 힘쓰면 저 같은 사람은 50m 밖으로 날아갑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보면 삼손은 그렇게 키가 큰 거인이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그의 힘은 그의 근육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이 그에게 걷히는 순간 그도 일반 사람과 똑같이 되었기 때문에 그의 힘은 그의 근육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의 힘은 그와 함께한 성령에게서 나왔습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이 그와 함께 하실 때 그를 통해서 엄청난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나귀의 턱뼈를 가지고 그 많은 블레셋 군사를 쳐 부셨습니다. 그렇게 강력한 능력이 나타났지만 성령의 기름부음이 떠났을 때, 그는 보통 사람처럼 된 것을 보면 그의 힘은 근육에서 나온 게 아니고 성령의 기름부음에서 나왔습니다. 삼손의 약점은 여자에게 약했는데, 그래서 사탄이 들릴라를 통해 유혹합니다. 처음에는 거짓말로 둘러 데다가 계속 반복적으로 묻고 그 앞에서 아양을 떨기도 하고 엄포를 놓기도 하고 그러니까 나중에는 비밀을 가르쳐 줍니다. 사사기 16장입니다. “15 .... 당신이 이 세 번 나를 희롱하고 당신 큰 힘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있는 것을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도다 하며 16 날마다 그 말로 그를 재촉하여 조르매 삼손의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라 17 삼손이 진정을 토하여 그에게 이르되 내 머리에는 삭도를 대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내가 모태에서 하나님의 나실인이 되었음이라 만일 내 머리가 밀리우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나는 약하여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19 들릴라가 삼손으로 자기 무릎을 베고 자게 하고 사람을 불러 그 머리털 일곱 가닥을 밀고 괴롭게 하여 본즉 그 힘이 없어졌더라” 그가 일어났을 때는 성령의 기름부음이 그에게 여전히 남아 있는 줄로 알았습니다. 예전과 똑같이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기름부음이 자기를 떠난 것입니다. 성령의 기름부음, 혹은 성령님의 임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걷혀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을 근심케 하지 않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성령을 근심케 하는 것 중에 가장 주된 것 중의 하나는 쓴 마음입니다. 쓴 마음이라는 것은 남을 미워하는 것, 용서하지 못하는 것, 혹은 남에게 서운하게 생각하는 것, 상대방에게 마음을 닫는 것, 이러한 것들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이런 부분을 개인적으로 몇 차례에 걸쳐서 반복적으로 가르치신 것 같습니다. 제가 이 부분을 알게 된 게 6년 전인데, 갑자기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예전과 같이 안 되는 겁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그 때 여기서 이길수 목사님, 김정길 목사님과 같이 집회를 하면서 그 분들이 저의 집에 오셔서 잠시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기도를 해달라고 해서 기도를 받았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신다고 그러면서 서운한 마음을 품지 말라고, 회개하라고, 용서하라고, 그렇게 말하는 겁니다. 제가 그 분에게 개인적인 감정이 있었던 건 아닌데 그분이 제가 보기에는 지금 쯤 신앙생활을 잘 해야 할 텐데, 그리고 지금쯤은 당연히 성숙한 사람으로서 이렇게 행동하고 저렇게 행동해야 될 텐데, 내가 보기에 너무나 신앙적인 관점에 서지 못하고 혹은 리더로서 하나님 관점에 행하지 못하고, 그렇지 못한 걸로 인하여 마음이 서운하다고 그럴까? 속상하다고 그럴까? 그런 마음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말씀하실 때 제가 그것을 깨닫게 되고 그것을 회개했습니다. 그랬더니 친밀함이 금방 회복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로 하나님께서 반복적으로 저에게 가르치신 것 중의 하나가 뭐냐면 성도들 중에 신앙생활을 잘 못하고 그 가치관과 관점이 인본주의고 합당치 않고 그런다 할지라도 상대방에 대해서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임재가 금방 걷힙니다. 성령을 근심케 하는 가장 주된 요인 중의 하나가 이 쓴 마음입니다. 이 쓴 마음은 상대방을 용서하지 않는 이런 차원뿐만 아니고 심지어 상대방에 대해서 서운한 마음을 품는 것도 죄입니다. 아모스에 보면 그게 성령을 근심케 하는 주된 죄 중의 하나입니다. 제가 어떻게 하기를 원하시는지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저를 가르치신 겁니다. 실제로 그들의 신앙이 그럴 수 있습니다. 그 열매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다 할지라도 상대방은 하나님의 자녀고 하나님의 종이고 하나님이 그를 능히 세우실 능력이 있기 때문에 로마서 11장에 말씀하신 것처럼 상대방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고 나는 하나님의 종으로 저분을 섬기도록 보냄을 받은 자에 불과하니까 저분은 하나님께 맡기고 나는 저분에 대해서 저분이 어떠한 상황에 있든지 상관없이 나는 저분에 대해 최대한 좋은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이 나에게 저분에 대해서 하라고 명령하신 부분을 성실하게 섬기는 것이 내가 할 일입니다. 그렇게 마음을 돌이켜야 하나님의 임재가 회복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금방 임재가 걷힙니다. 이건 저만 그런 게 아닙니다. 성령을 근심케 하는 가장 주된 원인 중의 하나는 쓴 마음입니다.
그럼 어떻게 성령을 근심케 하지 않을까? 완벽한 인간은 아무도 없는데 알트 킨델 목사님은 이렇게 방법을 제시하십니다. 당연히 이해 할 수 있는 겁니다. 제가 말씀드리면 성령을 근심케 하지 않으려면 혹은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려면 우리가 죄를 짓는 것과 그 죄에 대해서 회개하는 시간적인 갭을 가능하면 줄이면 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합당치 못하게 행한 것을 인하여 하나님을 근심케 한 것을 발견한 즉시 하나님께로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배워야 한다는 겁니다. 죄와 회개 사이의 간격을 줄이면 줄일수록 하나님과 계속적인 친밀함 가운데 사는 것을 배웁니다. 어떤 사람이 상대방을 미워합니다. 그게 죄인 것도 압니다. 그런데 용서하지 않습니다. 그 놈의 인간을 내가 어떻게 용서해! 그러면서 몇 년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몇 년 동안은 하나님과 완전히 상관없는 삶을 사는 겁니다. 아무리 자기가 100% 옳아도 그러한 마음 가운데 있는 것은 하나님 앞에 절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죄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더 수많은 죄를 용서하시면서 용서하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마음을 닫고 있으면 그건 절대 하나님 앞에 옳지 않습니다.(마18:23-35) 그것을 몇 년 끌면 몇 년 동안 하나님을 떠나 있는 겁니다. 그래서 발견하는 즉시 회개하고 돌아와야 합니다. 회개하려면 자기 자존심 다 내려져야 되고, 자기 생각 내려져야 됩니다.
다윗 같은 경우도 그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24장에 보면,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엔게디 광야에 이르렀을 때에 다윗이 굴속에 숨어 있는데 사울이 용변을 보러 그 굴속으로 들어왔습니다. 사람이 제일 약 할 때가 쪼그리고 앉아서 볼일 볼 때가 아닙니까? 그때는 경호원도 없고 그야말로 완전 무방비 상태입니다. 그때 다윗의 부하들이 하나님이 주신 기회니까 사울을 죽이자고 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고 겉옷자락만 조금 벱니다. 나중에 사울이 나간 다음에 그것을 보여 주면서 자신이 왕을 죽일 수도 있었는데 안 그랬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그래서 옷깃만 잘랐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시면 다윗이 사울의 옷깃을 자르자마자 곧바로 하나님 앞에 회개합니다.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왕에게 자기가 손을 대었음을 인하여,.... 그만큼 죄를 짓는 것과 회개하는 그 gap(간격)이 가까울수록 지속적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겁니다. 그래서 이 기간 동안에 반드시 배워야 할 게 뭐냐? 성령을 근심케 하지 않는 것을 배워야합니다.
5. 숨겨진 기간은 스스로 세우는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훈련시키시는 것 중에 주된 것 중의 하나가 스스로 세우기를 포기하는 겁니다. 스스로 세우기를 포기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요셉의 삶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그가 17살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놀라운 비전을 보여주셨습니다. 꿈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알리셨습니다. 그런데 되어져 가는 일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계획과는 정반대로 애굽의 노예로 팔려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도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셨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수치의 기간이고 숨겨진 기간이지만 하나님이 그를 지금 빚어 가고 계십니다. 다듬어가고 계십니다. 그를 시험하고 계십니다. 그를 훈련시켜 가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앞으로 그에게 하나님의 일을 맡길 그 때에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그를 지금 빚어가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마지막 단계인 감옥으로 보냅니다. 감옥에 들어갔는데 감옥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까 간수장의 총애를 받아서 리더로서의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거기에 왕의 떡 맡은 관원장과 술 맡은 관원장이 들어왔는데, 어느 날 각기 꿈을 꾸었습니다. 그리고 그 꿈을 요셉이 해석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요셉이 술 맡은 관원장에게 당신이 복직 되거든 바로에게 내 얘기 좀 잘해서 감옥에서 나가게 해달라고 청탁을 했습니다. 그리고 사흘 후에 바로의 생일 날 떡 맡은 관원장은 해석대로 처형을 당하고 술 맡은 관원장은 복직되었습니다. 그런데 술 맡은 관원장은 자기가 요셉에게 한 약속을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야속하고 배은망덕한 일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겁니다. 그리고 2년이 더 지납니다.
알트 켄델 목사님이 요셉의 생애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다루심에 관한 책에서 말하기를 왜 하나님이 요셉을 2년 더 감옥에서 기다리게 하셨는가? 그 이유는 스스로 세우는 것을 포기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다루어 가시는 것 중의 하나가 뭐냐면 스스로 세우는 것을 포기하게 하시는 겁니다. 쉽지 않습니다. 요셉의 경우에는 그 동안 하나님의 많은 만지심을 받았고 많은 시험을 통과했습니다. 그런데도 술 맡은 관원장에게 당신이 나가거든 바로에게 내 얘기를 해달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아직도 자기를 하나님이 하나님의 방법으로 세우실 때를 기다리는 것보다 자기 스스로 자기가 세워지기를 노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을 다루시기 위해서 2년을 더 다루셨다는 겁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다윗은 사울을 자기 손으로 두 번 씩이나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핑계 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도 왕으로 기름 부으신 것을 자기도 압니다. 자기가 원해서도 아니고, 그 당시 당대의 대 선지자인 사무엘이 직접 찾아와서 자기에게 기름 부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도 왕입니다. 그럼 사울이 자기 손에 들어왔으면 아 - 하나님이 드디어 나에게 왕위를 주시는구나. 드디어 때가 되어서 사울을 내 손에 붙이셨구나. 그리고 죽일 수 있습니다. 아니 부하들이 명령만 내려달라고 옆에서 부추깁니다. 그럼 말할 필요도 없이 눈 한번만 깜박하면 됩니다. 그리고 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스스로 자기를 세우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이길수 목사님 예가 재미있습니다. 그분은 죽청 교회에 있을 때가 숨겨진 기간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 분이 처음 그 시골교회에 가게 된 게 동기가 목사안수를 받으러 갔습니다. 그 당시 감리교는 3년 단독 목회를 해야 안수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3년 뒤 목사안수 받고 바로 나오면 속 보이니까 1년 더 있다가 4년 뒤 나오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하나님이 만져 가시니까 4년이 지나고 5년이 지나고 계속 시간은 가는 겁니다. 그리고 형제나 친척들이 대부분이 예수 믿는 사람들인데 명절 때 만나면 실력 없는 목사니까 그런 시골 교회에 쳐 박혀 있는 것처럼 은근히 비약하면서 도시로 나오라고 자꾸 쑤시는 겁니다. 참고로 그 지역은 완전히 시골 마을입니다. 애들 유치원도 없고 변변한 가계 하나 없습니다. 시장에 한번 가려면 15분가량 걸어 나와서 버스를 타야 시장을 갈 수 있는 곳입니다. 사택이 교회에 붙어있는데 산 중턱에 있어서 지네도 나오고 가끔 뱀도 나옵니다. 그런 상황 가운데 어느 날 서울에 있는 큰 교회에서 전화가 오기를 우리 교회 부목사로 오지 않겠느냐고 초청이 옵니다. 그럼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겁니다. 옛날에는 그냥 자기 생각대로 했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는 것이 하나님의 길임을 배웠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려고 이제는 묻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무 답변이 없으신 겁니다. 그분 표현에 의하면 하나님은 곤란하시면 대답을 안 하신다고 합니다. 그러면 가지 말라는 뜻입니다. 마음은 아프지만 그래도 순종하는 겁니다. 돌이켜 보면 쉽지 않습니다. 앞은 보이지 않고, 언제까지 여기서 썩어야 되는가. 자기의 젊음의 때가 다 지나가겠어요. 그리고 또 어디서 전화가 오면, 또 하나님께 묻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십니다. 그럼 또 고민하는 가운데 또 내려놓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대학로에 있는 교회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대학생 사역을 위해서 부목사로 섬기라고, 그분이 원래 대학생 사역하기를 그렇게 원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물어보면 대답 안하실까봐 이번에는 안 물어보고 간다고 답변을 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에 전화가 오기를 죄송하다고 일이 좀 잘못되어 가지고 다음에 모셔야 될 것 같다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마음을 돌이키고 났더니 며칠 후에 다시 전화가 오기를 다시 오라고, 이렇게 해서 하나님이 스스로 세우는 것을 버리게 하시는 겁니다. 나중에 사모님이 기도하기를 하나님 저 여기 평생 있으라고 그러면 있을게요. 그런데 지금 평생 있으라는 말은 하지 마세요. 무슨 얘기냐 하면 스스로 세우는 것을 내려놓게 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만 바라본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세우시기를 기다림보다 ‘그렇게 한다고’ ‘그러지만’ 그러면서 순간 생각이 돌아가서 이렇게 좀 해볼까? 저렇게 좀 해볼까? 금방 옛날로 돌아갑니다. 이 자세를 내려놓지 않으면 이 과정 절대로 통과하지 못합니다. 왜요? 그거 내려지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동행하는 삶은 실제적으로 되지 않으니까요. 이 말은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무작정 기다리는 게 아닙니다. 스스로 세우는 것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이것이 반드시 다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때가 되었는지는 어떻게 아나요? 하나님의 때가 되면 여러분이 노력하지 않아도, 여러분이 힘쓰지 않아도, 하나님이 환경을 움직이셔서 운행해 가시기 시작하십니다. 요셉의 경우를 보세요. 그가 그 시험을 다 통과했으나 아직도 자기 스스로 세우고자 하는 것이 남아 있으니까 하나님이 2년 동안을 더 기다립니다. 그리고 때가 되었을 때, 이제 하나님이 움직이십니다. 요셉의 원함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은 움직이십니다. 어떻게 움직이시는가? 바로가 하루는 꿈을 꾸었습니다. 이것도 하나님이 하신 겁니다. 하나님이 하신 겁니다. 그 당시 바로의 궁에 술객들, 박수들이 한두 명이 아니고 전국에 수백 수천 명이 있었을 겁니다. 그럼 바로가 그들에게 안 물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럼 그들이 대답을 못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다 나름대로 바로가 꾼 꿈을 해석 했을 겁니다. 문제는 아무리 들어도 바로의 마음에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을 겁니다. 하나님이 하신 겁니다. 하나님은 그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그 때 마침 2년 전 일을 까맣게 잊어버린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합니다. 하나님이 하신 겁니다. 그래서 바로가 요셉을 부르고 드디어 요셉이 감옥에서 불려 나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감동들을 얘기합니다. 그랬더니 바로가 그것을 듣고 바로 그것이 자기 꿈에 올바른 해석인 것을 확신하고, 그 꿈의 내용을 실현할 사람으로 그 자리에 요셉을 앉힙니다. 다 누가 했습니까?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십니다. 그 사람의 노력과 상관없이 세우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날 교회와 목회자의 이름을 선전해서 교회를 세우려고 합니다. 이건 전혀 안 다루어 진겁니다. 스스로 세우고자 하는 자세를 가지고는 절대로 하나님 앞에 세워질 수 없습니다. 숨겨진 기간에 있다면 그 기간 동안에 반드시 배워야 될 것이 스스로 세우는 것을 포기하는 겁니다. 하나님만이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경우를 보면 너무 선명히 볼 수 있습니다.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하는데, 그 시험의 주된 내용 중에 하나가 스스로 자신을 세우라는 겁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면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도록 발을 붙들어 준다고 하지 않았느냐?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지 않느냐? 사람들 앞에 하나님의 능력을 과시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당신을 따르게 하라 그 얘기입니다. 다시 말해서 빨리 스스로 세우라는 겁니다. 그때 예수님이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고 말씀으로 사단을 물리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안 움직이시면 절대로 안 움직였습니다.“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5:19).
예수님에게 그 똑같은 시험이 요한복음 7장 1-6절에 나옵니다. “이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2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3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4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5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NIV 영어성경에는 “a public figure” 공인이 되고자 하는 자마다 자기를 사람들 앞에 드러내지 않느냐? 그러니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자신을 드러내라는 겁니다. 능력도 행하고 기적도 베풀고 사람들에게 관심도 받고, 그래서 어차피 공적인 사역을 하려면 사람들 앞에 드러내서 사람들을 불러 모으라 그 말입니다. 그게 사단의 시험입니다. 그 뒤에 사단이 있었습니다. 똑같은 시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가 스스로 세우는 노력을 완전히 내려놓고 계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안 움직이시면 한 발짝도 안 움직이셨습니다.
6. 숨겨진 기간은 기다림의 시간입니다.
쉽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여러분 생각보다 더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25년을 기다렸습니다. 침례(세례)요한은 30년을 기다렸습니다. 그는 30년 가까이 기다렸다가 6개월 사역하고 하나님 앞에 갔는데, 예수님은 그를 여인이 난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그가 선지자 중에 가장 큰 선지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숨겨진 기간은 기다림의 순간인데, 사실 내일의 사람에게 스티그마는 기다림입니다. 기다림은 쉽지 않습니다. 기억할 것은 이 기다림은 막연한 기다림이 절대로 아닙니다. 어떤 때 이런 분들도 더러 있는 것 같습니다. 시간만 지나면 될 줄로 압니다. 지금 어렵고 이렇게 힘들지만 시간이 지나면 하나님이 어느 날 나를 세우시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막연한 기다림이 절대로 숨겨진 기간이 아닙니다. 여태까지 말씀드린 대로 이 숨겨진 기간에 하나님이 그러한 부분들을 우리에게 훈련시키십니다. 아직 수치의 기간이라는 얘기는 사람들에게 드러나는 열매가 없어서 수치의 기간이지, 하나님이 지금 그곳에 강력하게 함께 하고 계신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 안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함께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기다린다는 것이 그저 시간만 지나면 될 것처럼 막연하게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여태까지 살펴본 대로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으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명령하신 바를 신실하게 순종하면서 기다리는 겁니다. 여기에 스스로 세우기를 포기한다는 말 속에는 철저하게 자기 자신이 부인되고 하나님 그분만이 목적과 목표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기다려도 인격체이신 하나님만이 유일한 목적이 안 되면 우리 눈이 금방 사역에 가고 우리는 금방 우리 스스로를 세우려고 노력합니다. 이 말은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그저 하나님이 세우실 때를 기다려서 하늘만 쳐다보고 있다는 얘기가 아니라 사역에 있어서도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 그 분을 적극적으로 추구하고, 구하고, 하나님 알기를 구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움직이시고 행하시고 말씀하신 바를 따라 내가 신실하고 성실하게 하나님의 행하심에 순종함으로 나아가는 가운데 하나님의 행하심을 기다리는 겁니다. 이렇게 기다리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때에 움직이십니다. 지난번에 왔던 쟌폴 잭슨 목사님이 돌아간 뒤 일주일 후에 스코틀랜드에 집회를 인도하러 가셔서 알트 켄델 목사님과 같이 사역하신다고 그러셨는데 며칠 전에 제게 메일이 왔는데, 알트 켄델 목사님과 우리에 대해서 얘기를 했는데, 그 분도 한국에 관심을 가지고 오기를 원하는 것 같다고 그러면서 앞으로 좀 더 자세히 얘기하고 그러면서 기회가 되면 같이 오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한번은 제가 켄사스에 갔을 때, 그 당시 쟌폴 잭슨 목사님이 사역할 때인데 한번은 기도사역 시간에 쫓아가서 날 좀 위해 기도해 달라고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셔서 부지런히 쫓아가고 있는데 도대체 앞이 안 보인다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그랬더니 그 분이 알았다고 기도해 주겠다고 그러더니 지금은 아닌 것 같다고 그러는 겁니다. 하나님의 감동이 없다는 얘깁니다. 그러고 지나갔는데. 그 세미나 기간 동안에 한 시간이 목회자들을 위해서 호텔에서 점심식사를 같이 하면서 기도사역을 해주는 시간 있었는데 목회자 부부만 200명 정도 되었습니다. 한국에서 간 사람은 저 혼자였고 미국 내에서 온 한인들이 서너 분 되었습니다. 나머지는 다 외국 사람이었는데 두 분이 사역을 나란히 서서 이 분이 먼저 하면 이분이 하고 번갈아서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누구를 감동을 주시면 그 사람을 일으켜 세워놓고 하나님이 주신 감동을 쭉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리고 끝나면 또 한 분이 앉아 있는 어떤 분에게 감동을 주신다. 그러면 또 세워놓고 쭉 감동을 얘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쭉 사역을 하다가 쟌 폴 잭슨 목사님이 저를 일어서라고 그래서 제가 일어섰습니다. 그랬더니 날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성령께서 이미 기도하고 계셨다면서 쭉 얘기하는데 뭐라고 그러냐면 지금은 커튼 뒤에 숨겨진 기간이고 기다림의 기간이라는 겁니다. 제가 오금동에 있을 때입니다. 그러면서 얼마 안돼서 장소를 옮기니까 기다리라고, 지역적인 이동이 있을 텐데 하나님께서 사람들 앞에 “many, many times” 수많은 시간에 걸쳐서 앞에 세우실 거라고, 그러면서 예언을 쫙 주셨습니다. 기다림의 기간, 커튼 뒤의 기간, 지금은 하나님이 그 일을 하고 계십니다.
그럼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느냐? 전혀 제가 노력해서 온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때가 되면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가지가 뭐였냐면 저 같은 경우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이 나라에 하나님의 부흥을 담을 수 있는 전초적인 역사가 시작되었으니 너는 기도만 하지 말고 찾아 나서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에 주보사에 가서 그 전날 신문에 나온 집회 광고를 보는 순간 하나님이 저한테 ‘여기니까 가라’ 그래서 그 집회를 가게 되었고, 그러면서 그 집회를 가는 바람에 이길수 목사님을 알게 되었고, 김정길 목사님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하나님이 그 집회를 인도한 단체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라고 그래서 그분들을 제가 가까이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게 계기가 되어가지고 바로 화요모임이 시작된 겁니다. 그때 포도나무교회 성도가 불과 30명 남짓 될 때 입니다. 큰 교회가 되어야 무슨 집회에 사람들이 오고 그러지 누가 거기 뭣 때문에 옵니까? 또 저도 앞으로 이런 일들이 되어질 것을 알았지만 차후에 되어질 일이라고 생각했지, 지금 교회 형편으로 보나 뭐로 보나 될게 뭡니까? 전혀 안 될 상황이죠. 그런데 집회를 시작한 겁니다. 그런데 바로 얼마 안 있어서 그 단체에서 그 단체 이름으로 집회를 하지 말라고 해서 제가 시간을 좀 달라고 그러고 바로 그 다음 날 새벽기도 시간에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그냥 그렇게 그만두라는 겁니다. 그래서 새로 집회는 시작 되었는데 불과 성도 몇 명이고, 그 때는 찬양리더가 없어서 제가 찬양을 인도 하는데, 2시 집회 시작하려고 하면 2명 앉아 있었습니다. 한명은 제가 신학교 강의 나가는데 그 신학교 강의에 나오는 학생이고, 그리고 성도 한 명 정도 앉아 있습니다. 찬양을 한참 하다보면 이사람 저 사람 오지만 와 봐야 몇 명옵니까?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제가 시작한 것도 아니고, 제가 계획 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런 과정을 통해서 시작해 놓으시곤 떨어뜨려 놓으신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움직이시기 시작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신문 광고도 내지 않고, 전단지를 가지고 알리지도 않았는데도 그 때부터 한 사람 한 사람 모아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역사하시면서 오늘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일하시는데 우리의 계획을 가지고 일하시는 게 아니고 하나님은 하나님이 하시겠다고 말씀하신 다음에 하나님의 때가 되니까 우리가 원하건 원치 않건 상관없이 그 분이 그 분의 일을 운행해 가십니다. 그 분이 운행해 가시면서 실제로 그 일을 이루십니다. 지금은 하나님께서 새물결선교회를 놀랍게 확산시키셔서 정기 집회만 하더라도 전국에 4곳에서 열리고 있고, 훈련원은 훈련원대로 광주하고 점점 더 모이고 있고, 또 전국 집회는 전국 집회대로 그러고 해외는 해외대로 확장시키시고 있고, 지금은 새물결선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함께하니까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할지 몰라도 하나님이 처음에 이렇게 시작할 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전혀 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려면 사람의 생각하고는 상관없이 일을 이루어가십니다. 그런데 그 일이 우리의 노력으로 우리의 계산된 생각으로 이루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주권적으로 이루어가십니다. 때가 되면 어떻게 아느냐? 우리의 노력과 상관없이 그 분이 운행해 가십니다. 그 분이 세우십니다.
- 다음 장에서 2부로 이어집니다. -
제7장 하나님의 부흥과 심판 (0) | 2007.09.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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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숨겨진 기간 2부 (0) | 2007.09.05 |
제4장 예수님의 삶을 통해 나타난 교회회복을 위한 리더십 (0) | 2007.09.05 |
제3장 이사야서를 통해 본 하나님의 약속 (0) | 2007.09.05 |
제2장 다가오는 승리의 교회 (0) | 2007.09.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