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예수님의 삶을 통해 나타난 교회회복을 위한 리더십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온지라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니라.” (마가복음 3장 13절)
처음 계획은 교회회복에 대한 필요와 교회회복을 향한 하나님의 비전부터 시작해서 이사야 하반부에 나오는 하나님의 약속, 또 그 외에 첫 번째 성전과 관련된 하나님의 약속들, 특별히 학개서 스가랴서 에스라서 느헤미야서에 나오는 하나님의 약속들, 또 그 외에 하나님의 성전과 관련된 하나님의 약속들, 그리고 하나님이 영광으로 임하시는 것과 관련된 하나님의 약속들,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이 사역하신 사역에 대한 부분들을 좀 체계적으로 정리를 해서 살펴보려고 했었습니다. 그랬는데 체계적으로 순차적으로 전하기보다는 그런 부분들을 하나님이 그때그때 전하라고 감동하시는 대로 전해야 될 상황 같습니다.
지난주엔 이사야서 54장과 예수님의 사역을 서로 대조하면서 어떻게 이사야서 하반부에 예언된 대로 하나님의 교회가 회복되어지고 거기에 하나님의 부흥이 임하는 그 일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하나님나라의 사역을 감당하게 되셨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원래는 따로 따로 살펴보려고 했는데 연결해서 살펴보았고, 오늘은 하나님께서 이 부분을 살펴보기 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제가 지금 이 부분은 배워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고, 또 기도 사역자들을 통해서도 말씀하고 계시고, 다윗의 장막을 통해서도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게 뭐냐면 제자양육, 일군양육입니다.
오늘은 교회회복과 관련해서 예수님의 삶을 통해 나타난 교회회복을 위한 리더십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교회회복을 위한 리더십만 하더라도 앞으로 기회가 되는 대로 느헤미야에 나타난 교회회복에 대한 리더십을 살펴보게 될 것이고, 그 외에도 다른 부분들도 살펴볼 텐데 오늘은 예수님의 삶을 통해 나타난 교회회복을 위한 리더십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사실 리더십을 따로 모아서 나중에 살펴보면 좋은데 말씀드린 대로 계획과는 달리 하나님이 인도해 가시는 대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사실 이 부분은 저 개인적으로 설교하는데 상당히 부담이 됩니다. 왜냐하면 저 자신이 아직 배워가는 부분이고, 고민하고 있는 부분이고, 배워가면서 고민하면서 그야말로 조금씩 조금씩 보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필리핀이나 남아공만 하더라도 하나님의 역사는 엄청나게 함께 하십니다. 우리의 한도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은 움직이십니다. 그리고 그 일은 작은 규모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우리가 잘 섬기면 그 나라 전체에 하나님의 영향력이 미쳐질 수 있을 만큼 하나님이 만지시고 계십니다. 어떻게 보면 한국보다도 더 강하게 더 광범위하게 만지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은 이렇게 놀랍게 역사하고 계시는데 핵심이 일군입니다.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일군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그래서 지금 현 시점에서 새물결 선교회를 전체적으로 볼 때 절박하게 필요한 것이 일군에 대한 부분입니다. 사실 새물결 선교회에 속한 교회들만 하더라도 예전에 많은 수는 아니지만 일부가 비방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뭐라고 비방하냐면 새물결 선교회 나와 가지고 세워진 교회 있나 봐라. 포도나무교회는 성장할지 모르지만 다른 교회 세워지는 교회 있나 봐라 다 들러리 서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비방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교회가 세워지려면 먼저 목회자가 세워져야 되고, 그리고 목회자뿐만 아니라 교회 내에 핵심 일군들이 신앙의 본질과 십자가의 복음 가운데 세워져서 하나님을 경외함 가운데 그들의 가치관과 삶이 하나님 중심으로 변화되어야 하는데 그게 하루 이틀, 한두 달, 일 이 년에 되어지지 않거든요. 그리고 그러한 것들이 되어지지 않은 가운데서 사람들만 더해진다고 해서 교회가 세워지는 것도 아니고, 또 강단에서 전파되는 메시지 자체가 사람들이 듣기 좋은 메시지도 아니고 그야말로 신앙생활 잘 한다고 하던 사람들까지도 선득 접근하기에는 부담스러운 내용들이기 때문에 당연히 시간이 걸립니다. 또 성도 한사람 한사람이 하나님 관점에서 그 가치관을 보고 줄기차게 따라가도 전환되는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리는데, 교회가 금방 안세워 지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도 그런 식으로 비방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불과 몇 년이 지나지 않았는데도 지금 새물결 선교회에 연합하는 교회들 가운데 상당수의 교회들이 참 아름답게 세워져 가고 있습니다. 내부적으로 성도들의 삶이 변화되어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하시고, 하나님의 운행하심이 함께하는 교회는 더욱 더 많습니다. 내부적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함께 하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그것이 외부적으로 나타나서 잃은 영혼들이 구원받고 더해지고, 성도들도 그 위에 더해지면서 숫자적으로도 교회가 점점 자라나게 되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교회 내 뿐만 아니라 지역으로 확대시켜 가시는 교회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상당수의 교회들이 지금 전국적으로 세워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은 참 놀랍습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머물러만 있다면 앞으로 몇 년 뒤에는 더 말할 것 없이 규모가 확산되어질 겁니다. 그 후의 몇 년 뒤에는 더 말할 것 없이 놀랍게 확산되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선교회적으로도 각 교회적으로도 절실하게 필요한 부분이 리더십입니다. 일군을 양육해서 세우는 겁니다.
*예수님 사역의 요약
여러분들이 사모하는 마음으로 귀를 기울이고 들으시면 하나님께서 무엇을 행하고자 하시는지는 볼 수 있을 겁니다. 제가 전에 성경을 보는데 예수님의 사역이 선명하게 요약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줄기차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역이 처음엔 작게 시작했을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무리들이 더해지는 가운데 핵심 일군들이 세워지고 그 위에 성령이 능력으로 임하니까 순식간에 전 세계로 복음이 퍼지는 것을 요약해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면서 나도 그렇게 하면 되겠다 싶었습니다. 한편으로는 간단했습니다.
첫 번째,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 사역을 줄기차게 감당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줄기차게 전하고 그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 속으로 사람들을 들어오도록 촉구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나타내심으로서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 가운데 실제로 임한 걸 보여주셨습니다.
두 번째, 예수님은 줄기차게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감당하시면서 한편으로 줄기차게 제자들을 양육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수천수만의 군중을 위해서 사용하신 시간보다 어떻게 보면 제자들을 위해 사용하신 시간이 더 많았습니다. 예수님은 열두제자들을 위해서 제일 많은 시간을 투자하셨는데, 그중에서도 특별히 세 명의 제자 베드로, 요한, 야고보에게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셨습니다. 그리고 칠십 인의 제자들을 위해서 투자하셨고, 그다음엔 백이십 명의 제자들과 오백의 제자들을 위해 투자하셨습니다. 그 결과 다가올 하나님의 부흥을 담을 새 부대의 일군, 침노하는 무리로 백이십 명이 세워졌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공생애를 그들과 숙식을 같이 하시면서 집중적으로 양육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성령이 임했을 때 순식간에 전 세계로 퍼지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줄기차게 제자들을 양육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감당 하실 때, 사람들이 아무리 대적해도 예수님은 하나님이 원하시면 줄기차게 하나님나라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비유로 네 종류의 밭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네 종류의 밭 중에 하나는 와서 은혜도 받고 치유도 받고 놀라운 역사를 경험했지만, 자기 돈에 대한 집착이 내려져서 모든 소유권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진정한 하나님의 주된 삶이 요구 될 때, 탐심이나 생활에 대한 염려 때문에 돌아가는 사람들이 있고, 혹은 말씀을 듣고 은혜 받고, 치유 받고, 놀라운 능력을 경험했을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기 위해서 삶의 조정이나 대가가 요구될 때 그냥 떠나가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이 있었지만 예수님은 그것에 개의치 아니하시고 줄기차게 하나님나라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자신의 전 존재로 주님을 따르는 자들을 찾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제자삼아 집중적으로 양육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오래 전에 제자 낙심 될 때가 있었습니다. 과거에는 그런 일이 잦았는데 최근에는 그런 일이 많지 않습니다. 은혜가 떨어지니까 낙심되는 겁니다. 그래서 낙심되어 있는데 신문 광고에 큰 교회 후임자를 구하는데 후임목회자 자질 해가지고 쭉 써 놨는데 그걸 보니까 저는 도저히 그 교회는 못 갈 것 같더라고요. 왜냐면 그 중의 하나가 낙심하지 아니하고 그렇게 써 있는데 그 당시 저는 자주 낙심을 했었습니다. 세워지기 전이니까요. 그래서 낙심해 있는데 어떤 분이 기도해 주시면서 그러시기를 비전을 보고 왜 낙심하느냐고, 이사야서 11장에 예수님에 대해서 예언하면서 “저가 낙심치 아니하고” 그랬거든요. 이 말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또렷하게 앞에 나아가야 할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줄기차게 전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감당하시면서 때론 사람들이 대적하기도 하고 때론 사람들이 은혜 받으러 그렇게 좇아왔다가도 결국 하나님 앞에 대가가 요구 될 때, 저들이 돌아서고 수없이 많이 떠났지만 예수님은 그것 때문에 낙심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보았기 때문에 낙심치 않고 줄기차게 전하시면서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전 존재로 주님을 따르기 원하는 자들을 분별해서 그들을 양육하셨습니다.
세 번째, 예수님은 자신의 신앙생활을 사신 겁니다. 가장 먼저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고, 그리고 그 중의 하나가 기도생활이고, 하나님을 경외함 가운데 하나님의 질투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신앙생활을 하셨습니다.
이렇게 비춰지면서 우리도 그렇게 하면 되겠다는 게 뭐냐면 줄기차게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겁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길을 전하는 겁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반대하건 은혜 받으러 좇아왔다 다음 순간에 떠나건 줄기차게 전하는 겁니다. 어떤 때는 별 소리를 다 합니다. 생전 처음 들어 본 설교라고 칭찬하고 별소리 다 합니다. 그럼 저는 속으로 두고 보자고 합니다. 왜냐면 별소리 다 했다가도 다음 순간에 이내 돌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냐면 안보이니까요. 그럴지라도 줄기차게 예수님처럼 줄기차게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보고 따라오는 자을 양육하고, 또 나는 나대로 그 일을 하면서 줄기차게 주님을 따라가면 되는 겁니다. 신앙생활 하면 되는 겁니다. 영적전쟁은 사실 그렇게 해 가면 이깁니다. 이렇게 선명하게 가닥이 잡히는데, 목사로서 예수님처럼 그렇게 하면 되겠다 싶었습니다. 그러면 교회가 언제 얼마큼 성장할 건가는 그 분이 알아서 하실 겁니다. 일년에 몇 명이 되든 상관없이 삼년에 몇 명이 되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만 이루어진다면 말입니다. 사실 이렇게 주님을 따라가면서 배우는 게 뭐냐면 숫자가 작아도 하나님이 거기에 계시면 인간의 자원으로 할 수 없는 일들을 하나님은 하신다는 겁니다. 반대로 인본주의적인 사고에서는 숫자가 많아야 뭘 해도 합니다. 예산만 하더라도 성도가 많아야 예산을 많이 세웁니다. 예를 들면 잠실 월드컵 경기장에서 무슨 대회를 한다. 그래서 예산이 10억이 들어간다. 예, 큰 교회에서는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5만 명이 모였다고 신문에 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운행하지 않으면 영원한 가치를 가진 실질적인 열매는 조금도 없습니다.
한번은 헨리 블랙가비 목사님이 캐나다의 서스캐처원주에 있는 새스커툰 훼이스(Faith) 침례교회의 목사로 갈 것을 결정했을 때, 그 교회에는 약 10명 정도의 사람들밖에는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10명 남짓 되는 성도를 가지고 뭘 하겠느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 작은 교회를 통해서 4곳에 지교회를 세우게 하셨고, 다시 그 교회들을 통해서 수많은 교회들이 세워지게 하셨습니다. 그 당시 케나다 전 지역에 이르는 영적 대 각성이 임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 교회를 놀랍게 사용하셨습니다. 인본주의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으면 사람들이 많이 필요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하나님이 세워 가시는 겁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듯이 목회자도 그렇게 살면 되는 겁니다. 이렇게 살면 하나님이 교회를 하나님이 세우실 겁니다. 얼마만큼 크게 세울 것인지 얼마만큼 일을 하게 하실 것인지는 그 분이 택하신 대로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다 다르기 때문에 교회마다 독특하게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시니까 비교 할 상황도 아니고 비교할 필요도 없는 것이고.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이 놀랍게 하시고 영원한 가치를 가진 일도 하나님이 행하실 거니까요. 그게 예수님이 살았던 삶이고, 우리도 그렇게 살면 되겠다. 하는 것이 비춰지는 겁니다.
네 번째, 예수님의 삶에 나타난 영적 전투입니다.
지금까지는 서론 입니다. 항상 또렷하게 뭘 전해야 될지 준비가 안 되면 시간이 길어집니다. 그전부터 제가 알고 있었는데 최근에 이 부분을 하나님께서 더 인식 시키시면서 보게 하시고, 리더 양육에 대해서 제 자신이 너무나 애통해하고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포도나무 교회만 하더라도 너무 너무 절실하게 필요하고, 또 선교회는 더 말할 것도 없고, 그렇게 절실하게 필요한 상황에서 하나님이 이 부분을 더 보게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이 계신데 그 분은 지금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분이 리더십에 대해서 말하면서 교회가 세워짐에 있어서 가장 필수적인 것 중의 하나가 리더양육이라 하면서 리더십의 지속적인 7가지 요소를 말하는데, 제가 말한 부분을 그 분도 똑같이 얘기했고 잘 정리해놨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똑같은 내용입니다. 그 분 같은 경우에는 이 부분을 목회자들에게만 6-7천 번을 전했다고 합니다. 왜냐면 예수님의 사역이 그거거든요. 교회가 회복됨에 있어서도 똑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회복을 위한 리더십의 관점에서 이 일곱 가지를 이렇게 설명을 하려고 합니다.
저는 그것을 교회회복의 관점에 적용시켜서 보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그분은 “seven constant in leadership"이라고 말합니다. ‘constant’라는 말은 지속적인, 끊임없는 그런 뜻입니다. 리더십에 있어서 지속적으로 해야 할 일곱 가지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예수님의 삶을 네 가지로 요약 했는데, 영적전쟁은 그렇게 살아가면서 승리하는 것이고 영적전쟁을 살펴보는 것은 이러한 상황 가운데 이러한 영적전쟁이 있구나 하는 것을 인식할 수 있어서 어떻게 대처 할 것인가에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승리하는 비결은 처음에 말한 세 가지를 그대로 살아가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속적으로 해야 된다는 겁니다. 지속적으로 말씀을 전하고, 지속적으로 양육 하고, 지속적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되듯이 일곱 가지도 지속적으로 해야 할 부분입니다. 이 분도 정확하게 일곱 가지를 세 부분으로 나눠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팀에게 비전을 심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비전을 심느냐? 하나님의 목적을 가지고 비전을 심는 겁니다. 두 번째는 팀을 구축하는 겁니다. 질적으로 양적으로, 세 번째는 팀에게 본을 보이는 겁니다.
1. 팀에게 비전 심기
팀에게 비전 심는다는 것이란, 예수님은 지속적으로 하나님나라 사역을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 메시지를 전하고 하나님 나라 사역을 감당하신 것처럼, 팀에게 비전을 심는데 무엇으로 비전을 심느냐면 하나님의 목적으로 비전을 심습니다. 여러분 리더가 먼저 팀에게 비전 심기에 대해서 살펴보면 리더가 모든 것의 전문가는 될 수 없습니다. 어느 인간이 모든 것의 전문가가 되겠습니까?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리더는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거기에 갈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게 리더입니다. 그게 없으면 바리새인이 되는 것입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는 것처럼 하나님의 계획과는 전혀 상관없이 가는 겁니다. 사실 제가 자주 말씀드린 대로 저 개인적으로도 그랬습니다. 제가 1980-87년까지 미국에서 공부했고, 교회는 어려서부터 다녔지만, 어렸을 때 폐결핵을 심하게 앓아가지고 하나님을 찾은 이후로 남들은 저를 보면 저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너 목사 될 거냐고 그랬습니다. 그러면 저는 그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미국에 갈 때, 환경적으로 전혀 불가능한 상황인데 하나님께서 완전히 기적적인 환경을 만드셔서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에서 7년 동안 공부는 열심히 했을지 모르지만, 기도생활 충분히 못하니까 교만의 때가 많이 낀 겁니다. 그 교만의 가장 전형적인 특징은 배우고자 하는 자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저를 다루신 겁니다. 그 당시에는 너무너무 답답했습니다. 그게 다루심인 줄도 몰랐습니다. 제 표현에 의하면 사방은 꽉 막으시고 그냥 지하실에 꽉 처박아 놓으시고 팍팍 밟으셨습니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그래도 내부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가 참 함께 하셨습니다. 지금도 너무너무 희한합니다. 경제적인 필요는 하나님이 놀랍게 채우셨습니다. 너무너무 놀랍게 미리 아시고 말하지 않아도 채우셨습니다. 그런데 사역의 문은 꽉 막아 놓으시고 열어주지 않으시는 겁니다. 그래서 밤낮으로 부르짖었습니다. 새벽기도하고 저녁에는 특별기도하고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그렇게 한 3년 지나니까 제가 미국가기 전의 상황만큼 영적으로 회복된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어떤 계기를 통해서 저를 근본적으로 바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신앙의 본질을 비추시고, 제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은 것을 보이시고, 주를 위해서 나름대로 열심히 일했고 나름대로 신실하게 일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인격체이신데 그분은 전 존재로 사랑하고 그 분을 알기를 구하는 것은 하지 않은 것을 보이시고 회개케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교회 성장의 모든 노력을 내려놓고 주님만 알기를 구했습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잘 되었으면 좋겠는데, 교회가 구역이 두 개 있었는데 한 구역이 없어져 버린 겁니다. 구역예배 마치고 자기들끼리 이야기하고 그러더니 이 사람은 이렇게 교회를 떠나 버리고, 저 사람은 저렇게 떠나 버리고, 그 중에서도 그나마 교회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부부가 있었는데 자기들도 내년 초부터는 다른 교회로 가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힘이 쫙 빠져가지고 진짜 아무 의욕도 없는 겁니다. 그런데 청년 하나가 저한테 자기가 기도원에 가려고 하는데 같이 좀 가자는 겁니다. 연초에 진짜 기도하러 갈 마음 없었습니다. 그런데 교인이 기도원에 같이 가자고 하는데 제가 안 간다고 그럴 수 없어서 같이 갔습니다. 제가 거기서 금식하고 싶어서가 아니고 먹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 금식했습니다. 저는 그때 금식하면 이를 안 닦아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사실 금식하면 이 닦아도 냄새납니다. 그래서 평상시보다 훨씬 더 많이 닦아야합니다. 저는 그런 사실도 잘 모르고 있었더니 같이 갔던 전도사가 “목사님 이 좀 닦으세요.” 그러는 겁니다. 그 정도로 제가 정신을 쓸 겨를이 없었습니다. 따라는 갔지만 다른 것에 정신을 쓸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제가 설교를 두 번 들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1991년 12월 31일 날 저녁설교 들은 것 같고, 1992년 1월 1일 오전설교 들은 것 같습니다. 그때 강사 목사님은 너무나 유명한 분이라 제가 그분의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그 목사님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는데, 그날 설교를 직접 들으니까 뭐가 딱 보이냐면 그분은 만약 예수님이 그에게 찾아오셔서 묻기를 “야! 아무개목사야, 내가 너의 교회를 어떻게 되게 해 주랴.” 이렇게 면 그 분은 “예, 주님 이렇게 이렇게 해 주세요.” 하는 게 딱 있는 것이 제게 보이는 겁니다. 그 목사님이 설교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그게 딱 있는 겁니다. 옆구리만 찔러도 그 얘기가 나올 것 같고, 책을 써도 그 얘기가 나오고, 설교해도 그 얘기가 나오고, 이게 딱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성경적이고 아니고는 놔두고라도 그게 오늘날 많은 성도들에게 아주 잘 어필되겠더라고요. 그러니까 실제로 그 교회에 많은 비즈니스맨들이 가는 게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저를 돌아보았더니 저에게는 그게 없는 겁니다. 이 말은 목회자가 목회비전이 없었다는 그 얘기는 아닙니다. 저도 나름대로 비전을 세우고, 교회목표 세우되, 5개년 계획, 10개년 계획 다 세워봤습니다. 쓸데없는 거지만, 그런데 만약에 하나님이 저에게 오셔서 말하기를 “야! 여주봉 목사야, 내가 네 교회를 어떻게 해 주랴.” 그러면 저는 몇 마디로 딱 줄여서 예, 주님! “이렇게 이렇게 해 주세요”라고 말할 게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오늘은 창세기 설교하고, 내일은 마태복음 설교하고, 모레는 사도행전 설교하고, 그 다음날은 시편을 설교하고, 다 성경 가지고 설교하고 성경에 있는 내용을 설교하고 성경적으로 설교하지만 교회를 어디로 인도하는지 방향이 없는 겁니다.
두 번 설교 들었는데, 그게 딱 보이니까 기도가 저절로 나오는데, 뭐라고 나오느냐면 ‘하나님 저는 그러면 교회를 어떻게 인도할까요?’ 그런데 저는 솔직하게 하나님께서 대답하시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게 보이니까 그냥 푸념 식으로 얘기한 겁니다. 그리고 전혀 예상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저에게 또렷하게 “너는 내 신부를 준비시켜라” 그러시는 겁니다. 그런데 저는 처음에 그 말씀을 들을 때 별로 안 좋았습니다. 왜냐면 신부를 준비시키라는 말씀을 이해할 때, 지하실에서 한 100명 데리고 목회 하더라도 주님 오실 때 들림 받게 잘 해라. 그 얘기로 인식했으니까요. 그 당시에는 야망이 다 안 내려진 때라 싫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무엇을 얘기 하려고 하느냐면. 저도 과거에 그랬었다고 하는 겁니다. 방향이 없었습니다. 리더로서 다 잘못한 것은 아니더라도 리더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리더는 어디로 가는지를 알아야 되고, 어떻게 거기에 가는지를 아는 것이 리더인데 저는 없었습니다. 오늘 설교는 사실 목회자들에게 해당되는 설교인데, 여러분도 대부분 평신도 리더들이니까 해당됩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이런 설교를 들으면 돌아가서 자기 목사님 앞에 들이대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 된 겁니다. 자기에게 들이대야 합니다.
죤 맥스웰 목사님은 리더십에 대해서 네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방랑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부지런히 가긴 가는데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겁니다. 무엇과 똑같으냐면 태평양에서 부지런히 배를 저어 가다가 풍랑을 만나면 피해 갈려고 싸우고 앞에 암초가 있으면 돌아가고 다른 배들이 지나가면 안 부딪치려고 돌아가고 부지런히 문제들을 해결하고 가는데,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겁니다. 이것이 방랑자입니다. 둘째는 ‘겁쟁이’입니다. 비전은 보이는데 치러야 할 대가가 요구되기 때문에 못가는 겁니다. 지금 교회회복에 대해서 살펴보지만 오늘날 목회자들 대부분은 교회가 회복되어야 할 필요성은 다 압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목회자들이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 많아서 안가는 거 아세요. 갈려면 자기 목회를 걸어야 되고, 자기 인생을 걸어야 되고, 자기 생애를 걸어야 하는데, 그래서 못갑니다. 셋째는 ‘성취자’입니다. 비전을 보고 거기에 어떠한 대가를 치루더라도 거기에 도달하는 자입니다. 넷째는 자기가 갈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그리로 인도하는 자입니다.
성경적인 의미의 비전은 자기가 세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심을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모든 대가를 지불하고 갈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그리로 인도하는 자가 진정한 리더입니다. 그래서 리더에게 있어서 무엇이 중요하냐면, 지금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아야 되고, 또 어떻게 거기에 도달하는지를 알아야 됩니다. 교회회복이라면 우리가 지금 무엇을 향해서 나아가는지를 알아야 되고, 어떻게 그 자리에 도달할 수 있는가, 그래서 교회가 어떻게 그 자리에 갈 수 있으며 한사람 한사람이 어떻게 그 자리에 갈 수 있는 가를 알아야 됩니다. 이게 리더가 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니까 줄기차게 하나님나라에 대해서 전하는 것입니다.
존 맥스웰 목사님은 세 가지로 요약해 놓았습니다. 이 비전을 심는데 있어서 제가 처음에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께서 줄기차게 하나님나라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 나라 사역을 감당하셨다고 그랬습니다. 요한복음 17장에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해서 또는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 본대로 그러한 특징들을 가진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부터 그들이 그러한 교회로 세워지기 위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가감 없이 줄기차게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어디로 가시는지를 아셨고, 그리고 어떻게 거기에 가야 될 줄도 아셨습니다.
첫째, 리더는 지속적으로 자기 얘기를 해야 합니다.
리더가 자기 얘기를 해야 됩니다. 사담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강단에서, 성스러운 강단에서 개인적인 사담을 애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것은 안 되는 일입니다. 모든 일의 핵심은 하나님입니다. 자기 얘기를 하라는 말은 하나님이 자기를 만지신 얘기를 하라는 겁니다. 예를 들면 바울의 경우를 보면, 심지어 자기를 대적하는 사람들 앞에서도 자기도 전에는 저들과 똑같이 교회를 핍박하는 자이었는데 어떻게 주님이 자기에게 나타나셔서 자기를 구원하시고 어떻게 자기가 주님의 종이 되었으며 어떻게 자기가 주를 위해 섬기고 있는가를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리더는 하나님이 자기를 만지신 일을 지속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헨리 블랙가비 목사님도 말하기를 리더는 비전을 저들에게 나누는 것인데, 그 중에 하나가 뭐냐면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과거의 이야기를 해야 되고, 현재의 이야기를 해야 되고 미래의 이야기를 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과거의 이야기는 무엇이고, 현재의 이야기는 무엇이고, 미래의 이야기는 무엇이냐? 그것은 다른 게 아니고 하나님이 자기 자신과 자기가 속해 있는 단체에 행해오신 일이 무엇이고, 지금 행하고 계신 일이 무엇이고, 앞으로 행하실 일이 무엇인가를 전해야 한다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시면 목적을 가지고 세우십니다. 여러분, 포도나무교회를 세우신 것은 여주봉 목사 밥벌이하기 위해서 세우지 않으셨습니다. 아니면 우리나라 교회수가 부족하니까 교회수를 늘리기 위해서 세우지 않으셨고, 아니면 침례교단의 교회가 부족하니까 세우신 것이 아닙니다. 제가 이해하는 바로는 하나님은 교파에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왜냐면 하나 되라고 하셨으니까요. 교단과 교파가 각자의 특징이 있을 수 있지만 주님 안에서는 하나입니다.
그러면 왜 교회를 세우셨는가? 하나님이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이 구체적인 목적을 위해 주도권을 가지고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인 목적을 가지고 주도권을 가지고 세우시고 하나님이 하신 일이 뭐냐면 하나님을 나타내십니다. 그러니까 리더에게 하나님의 일을 맡기시고 교회 가운데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행하십니다. 이것이 영적인 표징들입니다. 헨리 블랙가비 목사님에 의하면, 영적인 표징이란 말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특별히 경험할 때마다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렸는데, 그 단을 쌓은 것을 쭉 연결해 보면, 하나님이 왜 그를 부르셨으며 지금 무슨 일을 하고 계시며, 지금 그를 어디로 인도하고 계신가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각 교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젠가 하나님께서 저에게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 되심을 선명하게 보이시고, 바로 얼마 되지 않아서 ‘아버지의 일이 곧 내 일인 것을 보이셨다’고 제가 여러분에게 여러 차례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초기에는 어떻게 생각했냐면 ‘아!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은혜를 주시는 구나’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전혀 그런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나중에 무엇을 알게 되었냐면 하나님이 지금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고 계신 것이고, 구체적인 목적을 가지고 인도하고 계신 것이고, 그 목적과 연관된 뜻을 하나님이 계시하고 계시고, 그리고 그 뜻은 저를 위해서만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연히 저를 위해 주신 것이지만 이것은 모든 성도와 더 나아가 선교회 전체를 위해 하나님께서 그 뜻과 목적을 계시하고 계신하신 겁니다. 그래서 그것을 연결해 보면 하나님이 무엇을 위해 이 땅에 새물결 선교회를 세우셨고, 지금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고 계시고, 지금 무슨 일을 하고 계시고, 앞으로 어디로 인도하고 계실 것인가가 선명히 보입니다.
그러면 줄기차게 자기 얘기를 하라는 말은 리더가 자기 개인의 의견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에게 만지신 그 사건들을 나누라는 것입니다. 왜냐면 거기에 하나님의 운행하심이 있으니까요. 아까 저에게 하나님께서 ‘너는 내 신부를 준비시키라’고 하셨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저는 그때 그 말씀을 듣고 제가 이해하는 관점에서 이해하니까 처음에는 싫었습니다. 그런데 점점 깨닫게 된 것이지요.
제가 오금동에 있을 때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제가 서울 시내에 나갔다가 돌아왔는데, 서울 시내에 나갔다면 매연 때문에 피곤하잖아요. 그때 교회가 지하인데 중간에 계단이 있고, 본당과 교육관이 양쪽으로 40평씩 나눠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본당에서는 ‘특별작정기도회’가 계속 되고 있었습니다. 저는 피곤해서 교육관 내부에 있는 사무실에 쉴 수 있는 공간이 있어서 옷을 편안히 갈아입고 쉬려고 누워 불을 딱 껐는데 하나님이 제 마음 속에서 “너 일어나서 불을 켤 수 없니?” 그래서 제가 일어나서 불 켰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또 그러신 것 같아요. “너 본당에 가서 기도해” 그러시는 겁니다. 이 때부터 내 생각이 들어와서 ‘아니 기도하려면 여기서 하면 되지, 아니 지금 성도들이 기도하고 있는데, 본당에 갈려면 다시 옷을 갈아입고 가야하는데 무엇 때문에 본당에 가서 기도해야 합니까? 지금 성도들을 방해 할 필요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이제 이것이 내 생각인지, 하나님 생각인지 혼동되고 헷갈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에이, 괜히 헛된 생각 한 모양이다. 잠이나 자자” 그리고 다시 불 끄고 누웠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다시 또렷하게 “너 본당에 가서 기도해” 이제 그쯤 되니까 제가 순종 안할 수 없잖아요. 솔직히 기쁜 마음도 아니었고, 투덜대지도 않았지만. 다시 옷을 갈아입고 가서 성도들은 앞에서 기도하니까 뒤에 앉았습니다. 본당에 가서 기도하라고만 그랬지. 무엇을 위해 기도하라고, 어떻게 기도할 것인지 전혀 말씀 안하셨거든요. 그래서 뒤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겁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본당에 가라고 했나? 그러고 앉아있는데 그때 어떤 사람이 문을 쑥 열고 들어 와서 봤더니 술이 이만큼 취한 남자가 들어오더니 내 맞은편에 딱 앉는 겁니다. 그래서 속으로 ‘야, 저 사람이 행패 부릴까봐 나에게 성도들을 보호하라고 그랬나,’ 그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때 제 몸무게가 53kg 이었는데 보호는커녕 안 맞으면 다행이지요. 그런데 그분이 한참을 기도하더라고요. 술이 이렇게 취해서 엎드려서 기도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때 저는 전혀 예상치 않았는데 하나님이 저에게 또렷하게 말씀하시기를 “인자야 이 뼈들이 살겠느냐” 그러면서 에스겔 37장에 나온 그 부분을 쭉 생각나게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하나님, 뼈들이 누구예요” 라고 물었습니다. 왜냐면 뼈들이 살게 된다고 했으니까요. 그랬더니 그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을 향해 “저런 자들이 뼈들이니라.” 라고 그러시는 겁니다. 그러고 나서 그분이 나갔고, 저도 그냥 들어 왔습니다.
제가 나중에 그 구절을 찾아 봤습니다. 에스겔서 37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떠나고 우상숭배하고 온갖 죄 가운데 있으므로 하나님이 심판하셔서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간..... 그러니까 거기에 마른 뼈가 누구냐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사람이 죽으면 뼈만 남잖아요. 그런데 그 뼈가 마를 정도면 얼마나 생명이 없는 겁니까? 그리고 마른 뼈가 흩어져 있으면 얼마나 생명이 고갈되어 있는 상태냐고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그 취지를 알겠더라고요. 술 취한 그 분이 예수님 믿는 사람이니까 기도하고 가지요. 그런데 예수를 믿지만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승리하는 삶을 못사는 것입니다. 보면 알잖아요. 그 자체를, 직장 생활하랴 사업하랴 얘기를 안 해봤으니까 그 내막은 몰라도 신앙생활하면서 전혀 성경이 말하는 승리하는 삶을 살지 못하니까 오늘도 술에 취했는데 마음에 양심의 가책이 있으니까 자기 교회는 아니더라도 문이 열려 있고 기도하는 소리가 들리니까 들어와서 지금 기도하고 가는 것 아닙니까?
오늘날의 하나님 백성들이 바로 그러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들을 회복시키실 것을 약속하신 것이 에스겔서 37장인데, 거기에서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저들에게 대언하라고 했고, 그러니까 뼈들이 합해졌고, 그 다음에는 생기가 들어가라고 했는데, 이것이 십자가의 복음과 성령의 사역이 아닙니까? 그러면서 하나님이 큰 군대로 세우시겠다는 겁니다. 여러분, 신부를 준비시키라는 것과 이것이 연결되는 것을 아세요? 제가 지금 그것을 예로 들려고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고 계신가가 보이시지요. 하나님이 실제로 그 일을 우리 가운데 지금 하고 계시잖아요.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이 전혀 세상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실재와 임재가 걷히고, 철저하게 생명이 고갈된, 그래서 뼈가 말라서 흩어진 것처럼, 그런데 그들이 십자가의 복음과 성령의 사역이 토대한 그 가운데 세워지게 될 때에 회복되어지는 것을 봅니다. 지금 하나님은 주를 위한 큰 군대를 세우고 계십니다.
자! 그럼 보세요. 그 두 사건을 제가 말씀드렸는데 이게 저는 처음에는 하나님이 은혜 주시려나보다 그랬는데 그런 차원이 아니고 하나님이 앞으로 행해 가실 일을 보이신 사건들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줄기차게 내 얘기를 하라는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행하신 일을 줄기차게 전하라는 것입니다. 왜냐면 그래야 사람들이 하나님이 행하심을 볼 수 있으니까요. 자기뿐만 아니라 교회 가운데 행하신 일을 줄기차게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행해 오신 일을 과거에 하신 일을 현재에 하신 일을 그리고 그 토대 위에서 앞으로 하실 일을 줄기차게 전해야 합니다. 추측이 아니고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하나님이 감동을 주시고 보이시는 대로 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리더는 모든 것의 전문가는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리더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아야 되고, 어떻게 거기에 도달하는지를 알아야 되는데, 그것이 리더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의 이야기를 하려면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어야 됩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먼저 주님을 따라가지 않으면, 리더는 못합니다. 자기 나름대로 어떤 의식 있는 설교, 자기 개인이 세운 비전을 전할 수는 있을지는 몰라도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가 없으면 하나님이 인도하신 곳으로는 못 인도합니다. 그래서 비전 심는 것에 있어서 줄기차게 자기 얘기를 해야 됩니다. 사도바울의 서신 내용에도 보면 그런 내용들이 많고, 예수님의 삶에도 보면 그러한 부분을 볼 수 있습니다. 줄기차게 자기 얘기를 했습니다. 자기 얘기를 하라는 말은 그런 뜻입니다.
둘째, 줄기차게 예수님 이야기해야 됩니다.
주인공은 예수님이시지 우리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줄기차게 예수님 이야기를 해야 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줄기차게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예수님은 창세전부터 스스로 계셨고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모든 우주가 예수님에 의해 창조되었고 교회의 머리이시고 모든 죽은 자들의 첫 열매시며 부활의 첫 열매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아버지를 계시하신 형상이십니다. 아버지의 영광의 광채이십니다. 우리는 줄기차게 주님을 전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가를 줄기차게 전해야 합니다. 어떻게 우리를 구속하셨고, 어떻게 우리를 아버지께 인도하셨고, 어떻게 죄인 된 우리를 의롭게 하셨으며, 어떻게 죄인 된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 삼으셨고, 어떻게 우리의 옛 사람을 십자가와 함께 죽으시고 새로운 피조물 삼으셨고, 죄와 죽음의 노예 되었던 우리를 어떻게 자유케 하셨고, 어떻게 구속하셨고, 빚진 자였던 우리들을 어떻게 용서하셨으며, 죽었던 우리를 어떻게 살리셨는지, 흑암의 권세아래 있던 우리를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에 들이셨는지,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를 어떻게 하나님과 화목케 하시고 억압된 우리를 어떻게 구속하셨는가 하는 것과 주님께서 행하신 일을 줄기차게 전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 사역의 핵심은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누구신가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셨는가를 전할뿐만 아니라 또한 줄기차게 예수님이 지금 무슨 일을 하고 계신가 하는 것을 전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분의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의 초점은 그 분이 되어야 합니다. 침례(세례) 요한이 참 귀합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400년 동안 메시지(선지자)가 없다가 침례 요한이 나타나서 메시지를 전하기 시작하니까 사람들이 그 앞에 나와서 회개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전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진짜 그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이제 드디어 메시야가 왔나 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드디어 들려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요한에게 침례를 받는데 그 사람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은 이가 혹시 메시야가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종교지도자들은 사람들을 보내서 그가 메시야인지 정탐하라고 그랬습니다. 사실 그들은 메시야이시면 와서 경배하기 위해서 정탐꾼을 보낸 것이 아니라 그를 비방하고 꼬투리잡기 위해서 사람들을 보냈습니다. 어찌됐던지 간에 침례요한을 보십시오. 그는 사람들이 그에게 묻건 묻지 않건 줄기차게 자기가 메시야가 아닌 것을 말하고, 메시야가 자기 뒤에 오시고 계신 것을 말하고, 자기는 그 메시야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치 합당치 못할 자라고 말하면서 기회 있는 대로 메시지의 초점을 예수님에게 맞췄습니다. 모든 것의 초점을 예수님에게 맞췄습니다. 우리는 그 분을 전해야 합니다. 이 일은 그 분의 일입니다. 그 분이 교회의 머리되시며 그분이 주인공이십니다. 그 분 자신이 메시지이십니다. 줄기차게 예수님을 전해야 합니다. 사실 내 얘기도 주님을 증거 하는 차원에서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가 드러납니다.
셋째, 지속적으로 나의 이야기를 해야 됩니다.
“constantly apply the truth of scripture to the mystery of life" ‘지속적으로 성경의 진리를 삶의 신비에 적용시켜야 한다.’ 그러니까 삶의 여러 가지 부분들의 지속적으로 성경의 진리를 적용시켜야 한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이 말을 저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지속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전한다.’ 무슨 말인가? 지속적으로 십자가 복음을 전해야 된다는 그 말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우리는 줄기차게 하나님께서 나에게 행하신 일을 전해야 합니다. 줄기차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또 무엇을 해야 하냐면 오늘날의 상태가 어떠하며 하나님의 기준은 어떠한 것인가를 줄기차게 전해서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기준에 합하도록 돌아가야 할 것인가를 줄기차게 밤낮으로 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떠나있는가. 종교적인 의식은 많을지 몰라도 그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며, 입술로는 예수님을 주라고 부를지 몰라도 우리의 삶의 영역에서는 실제로 주님이 주인이 아니고 우리가 주인이며 우리속의 탐심이 얼마나 가득 한가? 우리가 얼마나 영적으로 눈이 멀고 얼마나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는가? 우리의 현실을 보고 이 현실에 합한 하나님의 기준을 집중적으로 전해야 합니다. 이게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이게 신앙의 본질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줄기차게 전하고 예수님께서 바로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줄기차게 감당 하셨듯이 오늘날의 상태에 비춰진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줄기차게 전해야 합니다. 이게 리더가 해야 할 일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서 팀에게 비전을 심는 겁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을 저들에게 보게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신가를 저들에게 보게 하는 겁니다. 그래야 그들이 전 존재로 주님의 행하심에 동참할 거니까요. 이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해야 합니다. 이것을 보면 줄기차게 전할 수밖에 없게 되어 있습니다.
2. 팀을 구축하기
첫째, 제자훈련 입니다. 제가 표현하는 예수님이 줄기차게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전하고 사역을 감당하셨다는 이 부분에 해당된다면, 팀을 구축하는 이 부분은 제자를 양육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줄기차게 팀을 구축해야 합니다. 질적으로 양적으로 구축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또 하나의 부분이 제자를 양육하는 것이 고, 팀을 구축하신 것입니다. 이 부분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물론 다른 부분도 중요하지만 이 부분이 참 중요합니다. 왜 이 부분이 중요하냐면 이 부분이 건물의 골조와 같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이 튼튼할수록 그 건물이 튼튼하고 크게 설 수 있습니다. 분당 E.마트 앞에 예수소망교회 있는데, 크게 잘 지었습니다. 그 건물 지을 때 철골로 골조를 튼튼하게 했기 때문에 건물이 크게 튼튼하게 지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골조가 없이 벽돌만 아무리 쌓아놓아도 절대로 저런 건물이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벽돌 더미가 많이 쌓여 있다고 해서 집은 되지 않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물결선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골조가 리더입니다. 리더십입니다. 제자들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팀입니다. 이 골조가 되어져야 그 단체가 섭니다. 사람이 아무리 많이 모여도 이 골조가 되어지지 않으면 절대로 건물은 세워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무엇과 똑같으냐면 벽돌을 아무리 많이 쌓아 놓는다 하더라도 집이 되지 않는 것과 똑같습니다. 안세워집니다.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께서 삼년 반을 걸쳐서 줄기차게 하나님 나라 사역을 감당하실 뿐 아니라, 제자들을 양육하셔서 마가의 다락방에 있었던 120명의 제자들이 준비되지 않았더라면 오순절 날 아무리 성령이 임하셨다할지라도 그것은 다 쏟아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왜냐면 담을 그릇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한편으로 다급한 것은 필리핀, 남아공, C국에 하나님이 너무 너무 놀랍게 함께 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추세를 우리가 잘 감당할 수만 있다면 그 불이 확산되어지면 우리나라보다 훨씬 더 급속도로 퍼져갈 수 있습니다. 실제로 필리핀이나 남아공을 가보면 우리나라처럼 이렇게 마음이 강퍅하지 않습니다. 영혼들을 그냥 주워 담을 수 있을 만큼 사람들의 마음이 참 옥토와 같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와 전혀 다릅니다. 우리나라의 60년대의 상황과 똑같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방해받지 않고 자유롭게 흐를 수만 있다면 우리나라보다도 훨씬 더 놀랍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관건은 일꾼입니다. 일꾼이 준비되지 않으면 그것을 담을 그릇이 없기 때문에 그것이 절박합니다. 그것이 교회이면 교회, 선교회면 선교회, 어느 단체이든지 마찬가지입니다. 팀이 구축되어야 합니다. 팀이 세워져야 합니다. 일꾼이 세워져야 합니다.
제가 과거 목회 초기에 많이 힘들 때 어디 집회에 하나님이 가라고 해서 거기에 갔습니다. 저는 그때까지만 해도 대단히 교만해서 국내에서 뭐 배울 게 있나 싶어 가지고 국내 집회는 안 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거기 가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셔서 갔는데, 이것도 하나님이 만나시게 한 부분입니다. 제가 가만히 있는데 하나님께서 “너 거기 가” 저는 솔직히 말해서 그런 음성을 거의 못 들었습니다. 제가 섬기는 포도나무교회 성도들 중에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저보다 훨씬 더 자주 듣습니다. 제가 한 얘기들은 가뭄에 콩 나듯이 이따금씩 한 번씩 제 자신의 영적인 상태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말씀하신 내용들입니다. 그것들을 모아 놓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그렇게 하신 이유는 특별한 이유 즉,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이시기 위해서 그러신 겁니다. 그래서 거기 갔었는데 그때도 하나님께서도 우리나라의 부흥과 관련된 놀라운 일을 보이시더라고요. 약속을 상기시키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하실 일을 보이신 겁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저한테 모든 사람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하지 말래요. 네 주위에 있는 소수의 남자들이 있는데 그들을 섬기래요. 제가 이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왜냐면 여기 나와 있는 많은 목사님들이 그 당시에 저와 같은 상황에 있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아까 낙심한 이야기를 길게 얘기한 게 여러분에게 이해가 되실 것 같아서, 격려가 되라고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주님 따라 가려고 그러면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신앙의 이해와 관점을 지난주에 살펴보았습니다. 완전히 율법주의 기복주의 인본주의가 그야 말로 판을 치고 있는 그 시점에서 예수님이 하나님 중심적인 하나님나라의 메시기를 전하니까 당연히 잘 안보이지요. 오죽했으면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하기를 ‘내 말이 너희에게 이해가 안 되느냐.’ 영어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더라고요. “is my language not clear to you" 내 언어가 명백하지 않냐? 말귀를 못 알아들으니까. 와서 얘기 들을 때는 진짜 은혜 받고 그럴 듯한데 다시 돌아가서 회당장 얘기 듣고, 종교지도자들 얘기 들으면 금방 또 혼동되니까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는 것 같고 도대체 무엇인지 모르는 것 같으니까 예수님이 오죽 답답했으면 그들에게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느냐”라고 했겠어요. 제가 주님 따라가면서 십자가복음 전하면 성도들이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대요. 은혜 받은 거 같아요. 얘기해 주면 금방 이해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순식간에 돌아갑니다. 너무너무 답답하고 너무너무 낙심되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예수님도 그랬더라고요.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요8:43) 요한복음에 여러 번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길을 제시 할 때, 교회가 율법주의 인본주의 기복주의로 타락되어 있을수록 신앙이 왜곡되어 있을수록 하나님의 길이 어두워서 전하는 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겁니다. 안 따라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저들을 변화 시키려고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실망하고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가르쳐도 와서 딴소리 하고, 금방 은혜를 받는 것 같은데 다른 사람과 얘기하고 나면 순식간에 돌아와서 별소리를 다 하기도 하고 그러니까 답답하지요. 그러니까 그 감동 주신 겁니다. 모든 사람 변화시키려고 노력하지 말라고. 왜냐면 해보아야 안 되니까요. 그러면서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잘 돌보라는 겁니다. 이 얘기는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낙심하지 말고 줄기차게 전하라는 겁니다. 앞이 보이면 낙심하지 말아야지요. 그런데 저는 낙심했습니다. 갈 장소가 보이면 낙심하지 말아야 하는데, 어디를 가는지 알면 낙심하지 말고 줄기차게 전해야지요. 그리고 모든 사람을 다 변화 시키려고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따라오는 자들을 보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양육해야 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히딩크 감독이 왜 훌륭한 감독인지 아세요? 그는 누가 어떤 포지션에 적합한지 알기 때문에 유명한 감독인 겁니다. 그게 리더입니다. 그런데 저는 훌륭한 리더가 못되는 게 누가 리더인지 잘 안 보입니다. 아닌 것은 잘 보이는데, 그런데 요즘 조금씩 나아져 갑니다. 조금씩 보입니다. 성경적 차원에서도 보이고, 지역적인 차원에서도 보이고, 조금씩 보입니다. 아직 멀었는데 진짜 답답합니다. 어떤 땐 안보이니까 힘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따라오는 자들을 분별해서 세우라고 하는데 그게 쉽지 않습니다. 그 안목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지속적으로 해야 할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지속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양육해야 되는데, 지식, 성품, 실천, 이 세 가지 면에서 양육해야 됩니다. 새물결 훈련원도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지속적으로 지식에 대해서 양육해야 됩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뭐다, 거짓신앙체계가 뭐다, 율법주의가 뭐다, 신앙의 본질은 뭐다 그 의미는 뭐다. 무엇이 십자가 복음의 삶이고, 무엇이 믿음의 의한 삶이고, 무엇이 은혜에 의한 삶이고, 무엇이 성령의 의한 삶이고, 무엇이 십자가의 삶인지, 그 의미들은 각각 무엇인지, 어떻게 말씀과 성령이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지? 어떻게 십자가 복음과 성령의 사역이 토대가 되어야 하는지? 십자가 복음은 뭘 의미하고, 성령의 사역은 뭘 의미하고, 성령의 은사는 무엇이고, 은사의 기름부음은 무엇이고, 은사에 대한 이해는 무엇이고, 예배는 어떻게 회복 되어야 되고, 회복되려면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되고,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는 뭐고, 그 의미가 무엇이고 어떻게 드릴 것인가? 이렇게 하나님의 길에 대해 집중적으로 양육해야 됩니다. 왜냐면 컵이 있어야 물을 담을 수 있듯이 집중적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서 훈련원에서 맨 날 기도 사역만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훈련원에서 교제별로 공부도 시키고 시험도 보게 합니다. 왜냐면 그걸 갖추어야 되니까요. 그래서 교회에서 가르쳐야 합니다. 교회회복 얘기하면서 이런 교육 없이는 회복 안됩니다. 내가 기도해서 놀랍게 은혜를 받았어. 그러니까 교회에서 기도사역해서 은혜를 받게 해야지. 기도 사역하는데 성령께서 임하시면 그들을 만질 수도 있고, 그다음에 죄가 생각나서 회개할 수 있고, 성령이 임하셔서 병을 치유 할 수도 있고, 은사가 탁 터져서 방언이 터질 수도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신나서 사람들이 호기심을 갖게 할 수 있고, 잠시 잠깐 동안 모이게 할 수 있어도 교육이 같이 가지 않으면 절대로 회복된 교회는 안 세워집니다. 왜냐면 담을 그릇이 없기 때문입니다. 궁극적으로 사람이 변하지 않습니다. 어디로 가는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집중적으로 훈련을 시켜야 됩니다. 그 중에 하나가 뭐냐면 ‘Belief', 즉 믿음, 지식에 대해서 훈련시켜야 됩니다. 밤낮으로 훈련시켜야 됩니다. 매일 밤 매일 낮은 아니더라도 줄기차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성품입니다. 아무리 지식이 되어져도 실제로 본인이 주님을 따라가지 않으면 성품이 받쳐주지 않습니다. 우리 신앙은 이론이 아니고 실재입니다. 각자가 주님을 개인적으로 따라가지 않으면 성품이 바뀌지 않습니다. 아무리 지식이 뛰어나고, 아무리 은사가 강해도 성품이 같이 가지 않으면 괴물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줍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잘못 인도합니다. 차라리 그것들이 없었더라면, 안주어졌더라면 괜찮을 텐데, 지식과 능력이 있으니까 많은 사람들이 호감을 가질 수 있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올바르게 되어 있지 않으면 수많은 사람들을 구덩이에 빠지게 합니다. 그래서 성품이 같이 가야 합니다. 삶이 같이 가야 합니다. 그 분을 전 존재로 사랑하는 삶으로 전환해야 됩니다. 그렇게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이 뭔가를 가르쳐야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이 뭐다’라는 것을 이론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한사람 한사람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이 될 수 있도록 가르쳐야 됩니다. 당연히 자기가 먼저 그렇게 살아야 되고, 안되면 백 번 아니라 천 번을 해서라도 한사람 한사람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이 되도록 가르쳐야 됩니다. 안되면 의미가 없습니다. 예를 들면 예배 회복에 대해서 가르쳐도 또 가르칩니다. 왜냐면 교회가 자라면 대부분의 성도들이 잘 모르니까 때가 되면 또 가르칩니다. 그러면 처음 듣는 사람도 있고, 두 번 세 번 듣는 사람도 있고, 그래서 여러 번 들을 수도 있지만 또 가르칩니다. 아무리 많이 알아도 그날 예배를 드리면서 예배가 안되면, 그 날 설교는 원고대로 못합니다. 우리의 예배는 이게 아니다. 우리의 예배는 이거다. 이렇게 주님을 찾아야 한다고, 그렇게 찬양을 드려야 한다고, 그게 안되면 예배회복이 뭔가 알아서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아무런 의미가 없지요. 그러니까 양육하되 지식을 양육할 뿐 만 아니라 삶을 양육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을 실제로 살도록 가르쳐야 됩니다. 실제로 그게 안 되면 일꾼은 전혀 세워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전 존재로 사랑하지 않는데 일꾼 세워 보세요. 개인적인 야망 전혀 안내려질 텐데 자기의 전혀 안 내려질 텐데 바리새인처럼 될 텐데. 안됩니다.
셋째는 실천을 가르쳐야 됩니다. 예를 들면 ‘능력 전도가 뭐다’ 그러면 실제로 능력전도를 어떻게 하는 것을 가르쳐야 됩니다. 이런 부분에서 더 많은 훈련이 필요 합니다. 실제로 치유사역 같은 경우만 하더라도 훈련원에서 사역자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치유사역자 훈련하기 전에 먼저 이런 부분의 다뤄진 부분들을 봅니다. 전체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가능성을 다루고 그 다음에 지식을 가르칩니다. 은사와 능력이 나타남을 물론 봅니다. 그리고 삶이 주님을 따라가는가를 봅니다. 그뿐 아니라 어떻게 치유사역 혹은 기도사역을 할 것인가를 실제로 가르쳐야합니다. 실천이 같이 가야 됩니다. 이 세 방면에서 집중적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한 사람 한 사람을 권하여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도록 주님의 부르심에 합당하도록 그렇게 권면했다고 했듯이 이 세 가지 면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이 세워 질 수 있도록 줄기차게 훈련해야 합니다.
팀을 구축하기 위해 할 게 뭐냐면 지속적으로 인프라를 구축하고 확장시켜야 합니다. 이게 제자를 양육하는 겁니다. 여기에 지속적인 훈련과 배치와 감독하는 것이 들어갑니다. 이게 앞에서 말한 건물의 철골입니다. 예수님의 경우라면 세 명의 제자, 열 두 명의 제자, 칠십 명의 제자, 백 이십 명의 제자가 있었듯이 그들을 뽑아서 그들을 양육해서 그들을 배치하고 그들을 감독하는 것을 말합니다. 계속적으로 해야 됩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에도 1차전도 여행을 갈 때 함께 했던 사람보다 2차전도 여행을 갈 때 사도 바울과 함께 했던 사람들이 훨씬 많습니다. 그 중에는 1차전도 여행 때도 같이 갔던 사람도 있지만 일부는 새로운 사람들입니다. 3차전도 여행 때에는 더 많은 사람이 사도 바울과 함께 합니다. 이렇게 인프라를 구축해야 합니다. 제자들을 양육해야 합니다. 이게 저의 관건입니다. 이게 지금 우리의 관건입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에 한때 고린도 교회가 사도 바울을 배척했을 때, 사도 바울은 대신 디모데를 보냈습니다. 어떤 교회는 디도를 보냈습니다. 여기에 보면 사도 바울이 그들을 양육해서 자기가 가는 대신에 자기 제자들을 보내서 자기가 가는 것만큼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제자들을 양육시킨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의 경우에도 일꾼이 양육 되는 게 그렇게 쉽진 않습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에도 자기를 대신해서 보낼 사람은 아주 적었던 걸 볼 수 있습니다. 디모데, 디도 그 외에 한두 명이 있을까 말까 아주 적었던 걸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그 능력과 그 말씀의 권세를 가지고 3년 반 동안 120명을 키우셨는데, 일꾼이 하루 이틀에 세워지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의 삶의 한 가지 영역만 다뤄지는데도 수 없이 많은 시간이 걸리는데, 예를 들면 돈이면 돈에 대한 완전한 소유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만 하더라도 때로는 평생해도 안될 수 있는데, 이 하나만 하더라도 일꾼이 세워진다는 게 쉽지 않습니다. 제가 참고하는 책의 저자도 말하기를 자기 대신에 한 사람을 어떤 나라에 보내서 60일 동안 사역을 하게 했더니 하나님이 놀랍게 함께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분이 자기가 27년 동안 양육한 사람이래요. 27년 동안 자기와 같이 있으면서 계속 주님 따라 가면서 그렇게 자라니까 자기 대신 한 나라를 카버 할 수 있는 겁니다. 리더의 리더십만 하더라도 여러 가지 층의 리더십이 있는데, 한 교회를 감당 할 수 있는 리더십이 있고, 한 지역을 담당할 수 있는 리더십이 있고, 한 나라를 담당할 수 있는 리더십이 있고, 세계를 담당할 수 있는 리더십이 있고, 한 대륙을 담당할 수 있는 리더십이 있습니다. 다 다릅니다. 그런데 위로 올라 갈수록 너무 너무 귀하고 많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더 훨씬 많은 대가들이 요구됩니다. 그러기에 리더는 누가 하나님이 세우신 일꾼인가를 끝임 없이 찾는다는 겁니다.
헨리 블랙가비 목사님이 쓴 영적 리더십이라는 책에 보면 조지 마샬 장군은 기회 있을 때마다 훌륭한 장교들을 눈여겨보고 그 이름을 적어 놓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일꾼의 자리가 필요할 때 그들 중에 골라서 임명하는 겁니다. 여기의 핵심은 누가 하나님이 세우신 일꾼인가 하는 것을 분별하는 눈이 필요한데 진짜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지금 이길수 목사님에게 하나님이 이것을 다루시고 계십니다. 요사이 사건들이 덩달아 터지면서 일꾼 세우는 것이 얼마나 절실하게 필요한 가를 뼈 절이게 느끼게 하시고, 그것이 쉽게 세운다고 절대 안되는 것임을 뼈 절이게 느끼게 하시고, 하나님 앞에 합당한 일꾼이 세워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임을 뼈 절이게 느끼고 계십니다. 전체적으로 지금 다루고 계십니다. 지속적으로 인프라를 구축하고 지속적으로 확장시키고 모집하고 훈련하고 배치해서 감독하는 겁니다. 각 종류의 리더십이 다 그렇습니다. 기도 사역자면 기도 사역자 오이코스 리더, 셀 리더, 교회 목회자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리더십에도 다양한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혼자만 따라가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혼자도 못 따라가는 사람도 있고, 자기 혼자 따라 갈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양육시킬 사람도 있습니다. 다 다릅니다. 그래서 지속적으로 인프라를 구축하고 확장해야 합니다.
3. 지속적으로 팀에게 본을 보인다.
이게 뭐냐면 제가 표현한 바에 의하면 예수님이 자신의 신앙생활을 하신 것처럼 지속적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자신이 살아야 합니다. 자신이 신앙생활을 해야 됩니다. 한편으로는 간단합니다. 지속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In vision ning" 지속적으로 팀을 구축하는 지속적으로 자신의 신앙생활을 하는 겁니다.
죤 맥스웰 목사님은 이 부분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constantly” 지속적으로 “living brokenness” 그러니까 애통함 가운데 산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알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절박하게 필요하기에 지속적으로 애통함 가운데 주님의 은혜를 구하고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을 산다는 얘기입니다.
저는 예수님의 삶을 말하면서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물론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생각되는 게 첫 번째는 무엇보다도 아버지와의 친밀함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예수님 안에,’ 그러기 때문에 그것을 위해서 예수님의 기도가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 당시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은혜받기 위해서 몰려왔을 때에도 그들을 놔두고 한적한 곳에 가셔서 아버지께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 저 개인적으로도 더 그것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제 아내가 옆에 올 때마다 가끔 저한테 손을 얹고 기도해 줍니다. 하나님이 뭐라고 그러는가 음성을 듣는 겁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주님 더 구하고 주님 더 찾으라고 그러십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구할 때 주님이 무엇을 하시는지, 주님을 찾을 때 리더는 어떻게 세울 것인지 더 비쳐지게 하십니다. 어떠한 자들이 리더인지 어떠한 자들을 양육시켜야 하는지 누가 리더십 자질을 가진 자들인지 어떻게 그들을 분별할 것인지 어디 가서 그들을 찾을 것인지 이러한 부분을 주님을 찾을 때 보이십니다. 이론으로 아는 것은 내 것이 되지 않습니다. 주님이 비춰지지 않으면. 이론적으로 아는 것은 하나님이 비춰주신 것의 도움은 줄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것은 내 것이 되지 못합니다. 그분에게는 계시로 왔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내게로 올 때는 정보로 옵니다. 그러나 이 정보가 계시가 되려면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어야 됩니다. 주님이 비추셔야 됩니다. 그런데 그것은 주님을 찾을 때 비쳐집니다. 그러니까 집중적으로 주님과의 친밀함을 구해야 주님의 의도와 의중은 무엇이고, 주님의 행하고 계신 일은 무엇이고, 주님의 뜻은 무엇이고, 주님은 우리가 어디에 있기를 원하시고, 어디로 가기를 원하시는지 보이십니다.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서 집중적으로 서야 합니다.
그 다음에 주님 앞에서 주님께 배워야 할 것은 주님은 그 속에 하나님의 질투가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가셔서 성전을 깨끗케 하십니다. 그러니까 성전을 향하신 하나님의 질투, 하나님의 열심이 그 속에 있었습니다. 저는 우리에게 이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리더로서 무엇을 해야 되느냐? 오늘날 제일 먼저 저를 포함해서 진짜 하나님을 향한 질투, 열심을 가지고 섬기는 사람은 드뭅니다. 열심이 식은 세대입니다. 진짜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일을 해도 하는 둥 마는 둥하고, 하나님의 일임에도 그냥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안 하는 것 같기도 하고 거기에 대한 집중력이 없고 관심이 없습니다. 거기에 무엇이 요구되고 무엇이 필요한지를 미리 알아서 어떻게 그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 그 것 때문에 고민하고 주님을 찾는 경우가 너무 너무 드뭅니다. 신학생들 가운데 드물고, 전도사들 가운데 드물고, 목회자인 우리들의 삶도 드물고, 너무 드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질투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게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에게 그걸 넣어줄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제가 그걸 못 넣어줍니다. 이르면 제가 우리 교회 전도사님들에게 이거하라 저거하라 지시할 수는 있습니다. 그분들이 저의 지시를 따라 그걸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주를 향한 그 질투는 제가 그렇게 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지시는 따를 수 있어도 주를 향한 질투는 주님이 부어 주셔야 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느냐! 다른 사람은 하나님이 그 분 안에 넣어 주시기를 바라고 저는 제 속에 하나님의 질투가 부어지기를 추구해야 됩니다. 그리고 질투를 불어 넣으려고 힘쓸게 아니라, 불어 넣으신 자를 찾아서 양육해야 됩니다. 불어 넣으려고 노력해 보세요. 실망밖에 안됩니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할 수 있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 속에 주를 향한 질투가 타오르도록 주님을 구하는 것뿐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구멍가게 하나도 열심이 없으면 안됩니다. 안타까우리만큼 우리는 많이 라오디게아교회 같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질투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질투가 있는 자들을 찾아야 되고, 리더로서는 자기 속에 그러한 질투가 있기를 위해서 구해야 됩니다.
세 번째는 아버지의 일에 동참하는 헌신과 열심입니다. 여러분 여기에 많은 목사님들이 오시는데 하나님이 은혜 주시고 만져주시고 하나님의 길을 발견하시고 돌아가셔서 각 교회에서 섬기고 성도들이 변화되기를 원하고 교회가 세워지기를 원하고 희생하지요. 귀한 일입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그것이 가장 소중한 일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한 가지 덧붙여서 말씀드린다면 자기 개교회의 범위를 벗어나서 이 나라에서의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서 헌신된 분은 많지 않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일이고 아버지의 일이 내 일인데. 예수님은 아버지의 일을 마치려함에는 그것이 자기 양식이라고 하실 만큼 그렇게 아버지의 일에 헌신된 삶을 사셨는데, 오늘날 자기 개교회의 범위를 벗어나서 우리나라면 우리나라, 한 지역이면 지역에서 아버지의 일을 위해 자기에게 돌아오는 것 아무것 없어도 자기의 이름이나 그 대가로 교회가 성장하거나 그런 것이 아무것도 없어도 그 일이 아버지의 일이기에 아버지의 일에 대한 예수님이 가지셨던 그 열정을 가지고 아버지의 일이 곧 내 일이라는 열정을 가지고 관심을 가지며 집중력을 가지고 헌신하고 그것을 양식으로 하실 만큼 섬기는 분이 많지 않습니다. 저부터도 모자라니까요. 많지 않습니다. 제가 배워가는 게 그겁니다. 한 가지 그 마음이 없으면 지역의 리더는 절대 되지 못합니다. 개 교회 리더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그 마음이 없으면 한 지역이나 개 교회 범위를 벗어난 리더는 되지 못합니다. 왜냐면 그 마음이 없기 때문에 못 섬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 마음이 없으면 모든 것을 자기 개 교회, 자기 개인의 사역과 연결시켜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인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마찰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한 지역이건 뭐건 못 섬기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아버지의 일이 자신의 일이었고 그 일을 위해 양식으로 삼고 헌신하셨습니다.
이 얘기는 평신도 가운데 자기가 섬기는 교회는 소홀히 하면서 선교회 일에 열심히 한다 전혀 그 얘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그건 옳지 않습니다. 우리는 제일 먼저 주님께 헌신되어 있어야 하고, 그 다음은 교회에 헌신되어야 하고, 그 다음에 사회에서의 주의 목적에 헌신 되어 있어야 합니다. 목회자가 하나님이 맡겨 주신 사역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그렇게 섬기는 것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대신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섬기면서 동시에 나라면 나라, 지역이면 지역에서의 아버지의 일을 위해 하나님 나라의 일에 대한 열정과 헌신을 가지고 집중력을 가지고 관심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투자하는 그러한 열심을 말하는 겁니다. 그러한 자세를 말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습니다. 아버지와의 친밀함, 하나님의 질투, 그래서 아버지의 친밀함을 위해서 또한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기 위해서 아버지 일에 동참하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철저하게 아버지만을 신뢰하셨고 어느 누구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버려두고 목숨을 아끼지 않은 제자들도 신뢰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신뢰의 대상은 오직 아버지 뿐이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면서 예수님의 삶에서 예수님을 잘 보살펴 주던 여인들도 있었고 또 때로는 부요한 사람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의 필요를 채우기도 했지만 예수님은 어느 누구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만 신뢰하셨습니다. 이것은 리더로서 너무 너무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 삶을 살면서 하나님만 신뢰하지 않으면 절대로 주의 길을 갈 수 없습니다. 이렇게 “living brokenness."애통함 가운데 살아야 되는데, 그 말은 잘 표현 한 겁니다. 그 말의 의미를 여러분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제가 주님을 닮은 삶을 살라고 말하는 겁니다. 저의 삶 속에 여러분의 삶 속에 이게 부족합니다. 나는 됐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애통함 가운데 사는 겁니다. 더 주님을 닮은 삶을 살기 위해서 내가 신앙생활하기 위해서 주님 저를 도와 달라고 은혜를 부어달라고 주님의 은혜로 예수님 닮은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그렇게 바라는 겁니다. 이게 여섯 번째입니다. 끊임없이 애통함 가운데 살아가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지속적으로 내가 하는 일을 재평가하고 유연한 자세를 가진다. 무슨 말이냐면 하나님의 행하심을 본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더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끝났습니다. 거기에 지속적으로 매달리는 것은 어리석은 거라는 겁니다. 자기가 하고 있는 일 가운데 하나님의 운행하심을 보고 그 하나님의 운행하심을 따라서 유연한 자세를 가진다는 겁니다. 우리는 프로그램에 메어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어느 시점에서 이 프로그램을 통해서 놀라운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그렇게 하지 않기를 택하시고 다른 것을 통해서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계속 그 프로그램에만 매달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움직이고 계신데 그렇게 하면 하나님을 놓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프로그램에 얼마든지 유연한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에 같이 있어야 합니다. 프로그램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프로그램은 옷과 같습니다. 본질은 안 바뀌지만 옷은 계절에 따라 바꿔 입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회복을 위한 예수님의 삶에서 배울 수 있는 리더십입니다. 이렇게 리더가 지속적으로 하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실 겁니다. 여기에 중요한 게 뭐냐면 ‘비전심기’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행하심을 알리고 현 시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집중적으로 전하면 어떤 분은 저한테 마치 교회를 비판하는 것처럼 자꾸 그렇게 하지 말라고 그러는데 저는 교회를 비판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제가 왜 그렇게 말하느냐면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을 보아야 하나님의 길로 전환하는 것이 얼마나 절실한가를 볼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처해 있는 상황을 보는 것도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길로 바로 돌이키기 위함입니다. 비판 하는 게 아닙니다. 제가 누구인데 하나님의 교회를 감히 비판을 합니까? 제 자신 속에 더 많은 부족함이 있는데, 이처럼 지속적으로 우리의 현실에 비춰 하나님의 기준을 전해야 됩니다.
이처럼 비전을 심는 일을 해야 되는데 이것이 없이 팀을 구축하고 2번과 3번의 때에 이 비전을 심는 것이 없으면 방향 없는 리더십이 되는 겁니다. 줄기차게 가기는 갑니다. 구조적으로 사람들이 세워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게 됩니다. 그럼 교회회복을 위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반면에 비전을 집중적으로 심고, 그 다음은 자신이 주님을 따라가는 삶을 살고, 그리고 지속적으로 어떤 것을 평가합니다.
그 다음 두 번째, 1번과 3번이 있는데 2번이 없다. 지속적으로 팀을 구축함이 없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정체된 리더십이 됩니다. 우리 새물결 선교회에서도 한편으로는 기도 사역자를 계속 훈련시켜서 세워야 합니다. 그게 안 되었기 때문에 정체된 것을 봅니다. 제가 할 일이 너무 많다 보니까 어떤 때는 생각이 복잡하다 보니까 하나도 못하는 거지요. 할 수 있는 시간이 있는데도 어떤 때는 생각을 가다듬어야 됩니다. 그래서 일꾼들, 기도 사역자만 하더라고 지속적으로 새로운 기도 사역자들이 분별되어지고 훈련되어지고 양육되어져서 배치되고 감독 되어지도록 해야 되는데 그게 안 되면 정체 되는 겁니다. 이건 모든 면에서 리더십이 다 똑같습니다.
그 다음 세 번째, 1번과 2번, 팀에게 비전을 심는 것도 있고 팀을 구축하는 것도 있는데 리더가 팀에게 본을 보이는 모습이 없으면 동떨어진 리더십이 되는 거지요. 다시 말하면 사람들이 더 이상 리더에게서 영향을 받지 않는 겁니다. 리더를 본받지 않는 겁니다. 말은 들어도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그럼 사람들로부터 동떨어진 리더십이 되고, 일곱 번째가 없으면 현실로부터 동떨어진 리더십입니다. 하나님이 다른 곳에 계신데, 전혀 움직임이 없는데, 거기에 머물러 있는 현실과 동떨어진 리더십이 됩니다.
교회가 회복되도록 섬기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못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이 부분을 선명하게 계속 더 보여주시고 하나님의 길을 선명히 비춰주셔서 우리가 지속적으로 예수님의 삶 속에 나타난 교회회복의 대한 이 부분을 깨달아 리더면 리더로서 지속적으로 주님을 닮아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말씀드린 대로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이 세우실 겁니다. 어차피 교회는 하나님이 세우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운행하실 때 우리가 따라가면 하나님의 운행하심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됩니다. 그렇게 되어질 때 우리나라뿐 아니라 더 나아가 열방 가운데 하나님의 교회들이 회복되어지고 주님의 일이 놀랍게 이루어지는 축복이 있을 줄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간절히 소망하기를 하나님께서 저에게도 은혜를 더 부어 주셔서 하나님의 행하심을 더 잘 깨닫고 잘 따라가도록 도와주실 뿐만 아니라 많은 분들에게 하나님의 행하심을 선명히 보이셔서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일꾼들을 많이 보내주시기를 소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추수할 것은 많되 추수할 일군들이 부족하니까 일군을 보내달라고 기도하라고 그랬는데 저는 그 기도가 어느 때보다 절박하게 시급한 기도라고 확신합니다. 너무너무 필요한 시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응답해 주시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세워주시기를 소원합니다.
제6장 숨겨진 기간 2부 (0) | 2007.09.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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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숨겨진 기간 1부 (0) | 2007.09.05 |
제3장 이사야서를 통해 본 하나님의 약속 (0) | 2007.09.05 |
제2장 다가오는 승리의 교회 (0) | 2007.09.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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