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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강 - 마태복음과 하나님 나라

강의자료/하나님나라

by 발의무리 2007. 10. 6.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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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 나라 9


마태복음과 하나님 나라


  예수님의 사역은 침노하는 무리를 세우시는 사역이었습니다. 침노하는 무리란 예수님의 행하심을 보고 자신의 전존재로 하나님의 행하심에 참여하는 무리를 가리킵니다. 무엇보다 교회가 침노하는 무리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모든 교회들이 침노하는 무리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침노하는 무리를 세우시되,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선포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행하심으로 이 일을 감당하셨습니다. 복음서에는 이 부분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특히 마태복음에 잘 나와 있습니다. 이 시간은 1장부터 13장까지를 주욱 �어가면서 마태복음이 강조하고 있는 예수님의 사역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예수님이 침노하는 무리를 세우시되 어떻게 세워셨으며, 예수님께서 침노하는 무리를 세우실 때 어떤 일들이 연관되었는지 보기를 원합니다. 이 시간은 나무보다는 숲을 보는 시간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사역을 설명할 때 앞서 언급한 침노하는 무리를 세우시되,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선포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행하심으로 감당하셨던 부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이 부분을 강조하고 있다는 의미는 우리의 사역 역시 그러해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장과 2장은 예수님 탄생과 족보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3장 1절부터 12절까지는 세례 요한의 사역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13절부터 4장 11절까지는 예수님의 침례와 시험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4장 12절부터는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17절은 마태복음의 제목이라고 할 수 있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마태복음은 특별히 예수님의 사역이 하나님 나라의 사역임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흔히 신학자들은 마태복음은 왕으로 오신 메시야로서의 주님을 강조한다고 말을 합니다. 또한 마태복음에는 다른 복음서보다도 하나님 나라에 관한 비유들이 많이 나옵니다. 이는 예수님의 사역이 하나님 나라의 사역임을 강조하는 측면임을 마태복음이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17절은 마태복음의 제목과도 같은 구절입니다.


  18절부터 21절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이 나와있습니다. 이때부터 예수님의 공생애가 본격적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항상 우리가 유념할 부분은 모든 복음서의 처음 사건기록은 각복음서가 강조하고자 하는 바를 잘 나타내주는 사건이라는 점입니다. 즉 예수님의 사역을 각복음서가 어떤 관점에서 강조해 나갈 것인가 하는 부분이 처음 사건기록에 나타나 있다는 말입니다. 비슷한 관점에서 쓰여진 공관복음서들 마저도 처음 사건이 각각 다 다릅니다. 이유는 각 복음서의 처음 사건기록들이 예수님이 겪은 첫사건이 아니라 복음서마다 예수님의 사역을 강조하는 부분이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네 개의 복음서를 다 읽고나면 예수님의 사역이 전체적으로 선명하게 비쳐올 것입니다.


  자, 이제 마태복음의 처음 사건기록을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4장 23절부터 25절입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 ○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건너 편에서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사역을 두 가지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선포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행함심으로 사역을 하셨습니다. 9장 35절과 36절입니다.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마태복음의 저자 마태는 4장에 이어 9장에서 다시 한 번 예수님의 사역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4장과 9장 사이는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5장부터 7장까지는 하나님 나라의 말씀이 나와 있으며, 8장부터 9장까지는 하나님 나라의 능력사역이 나와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태는 양괄식 문장형태를 통해 독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설명한 셈입니다. 메시지와 능력행함이 하나님 나라의 사역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메시지 부분과 능력 행함의 부분은 매우 중요한 사역의 두 요소였습니다. 먼저 메시지 부분을 보겠습니다. 5장부터 7장까지는 메시지 부분입니다. 흔히 산상수훈이라고 불리웁니다. 어릴 적 가장 많이 암송했던 성경구절들입니다. 우리는 흔히 산상수훈은 예수님이 하루 산에 올라가셔서 설교하신 내용을 요약해 놓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산에 올라가셔서 가르친 내용이기도 하지만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동안에 전하셨던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한 자리에 요약해 놓은 구절입니다. 즉 예수님이 이 메시지를 여러번 전하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성경은 성령의 감동을 입어 쓰여졌습니다. 여기서 기억할 사실은 제자들이 성령께서 불러주시는 것을 그대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설교를 기억하면서 기록하였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다니는 가운데 주님이 말씀하신 바를 수도 없이 들었다가 훗날 성령께서 오신 다음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들을 생각나게 하심으로 기록하였던 것입니다. 성령님이 오신 다음 “마태야, 받아 적어라. 예수께서 산에 올가 앉으시니 …”하시면서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할 대목이 있습니다. 분명 제자들은 성령님의 도움으로 예수님으로부터 들었던 설교를 기억해 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기억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제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같은 설교에 대해 한두번 들은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한두번 듣고는 기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 기억나게하실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제자들이 자주 듣고 반복해서 듣고 그래서 익히 알고 있었던 전제가 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시면서 3년 반 동안 반복하여 말씀하심으로서 제자들이 숙지하도록 만드셨던 것같습니다. 속된 말로 예수님은 입이 닳도록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언급하셨던 것같습니다. 그러지 않고는 성령님이 오셨을 때 기억나게 하실 말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종종 산에 올라가 앉으신 다음 설교를 하셨던 같습니다. 또한 종종 바닷가에 앉아 제자들을 가르치셨던 같습니다. 그런 결과, 제자들은 성경을 쓰면서 “예수께서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또는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니” 라는 언급을 자주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수도 없이 가르치셨던 내용임에 틀림 없습니다. 여기서 마태복음 5장에서 7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설교 내용은 예수님께서 3년 반동안의 공생애 기간을 통해 들려주셨던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의 핵심적 요약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산상수훈은 침노하는 무리가 되려는 갈망을 가진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산상수훈을 읽으면서 오늘날의 교회가 어떤 메시지를 전해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교회가 얼마나 엉뚱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지도 알게 됩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자신이 전한 메시지를 제자들에게도 똑같이 전하라고 당부하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산상수훈의 내용을 그대로 숙지하고 전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탈북자들이 자유 대한민국에 와서 정착할 때 무척 어려움이 많다고 합니다. 어떤 탈북자는 정부로부터 받은 정착지원금을 다 써버린 다음 다시 북한으로 돌아간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원인은 북한과 남한의 생활양식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생겨나는 문화적 차이라고들 말들 합니다. 사실 생활양식뿐만 아니라 사고방식, 행동양식 등등 모든게 다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입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기 전 죄의 노예로 살았다는 점입니다. 마치 예수님을 믿기 전 삶을 복한생활에 비유한다면 예수님을 믿은 후의 삶을 남한의 삶에 비유할 수 있겠습니다. 너무나 다릅니다. 생활양식, 사고방식. 행동양식, 가치관, 세계관 등등 모든게 달라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이런 문제점을 극복하는 일도 사실 쉽지 않은데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상당수의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고 나서 구원받고 죽으면 천국갈 수 있는 자격을 얻는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조금 나은 사람들은 성도로서 지켜야할 계명을 잘 지키고 주일성수, 십일조 등과 같은 규칙들을 잘 지키면 그것이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자신이 하나님의 다스림과 통치를 가져 왔다고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이 왕되시는 삶을 가져왔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이 세상에 두 나라가 있다”고 하면서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가 그것이다” 라고 합니다. 이는 성도란 비록 이 세상에 살긴 하지만 신분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세상 나라의 백성에서 구별되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는 근본적으로 다른 가치관과 생활양식, 사고방식, 행동양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과 생활양식, 사고방식이 세상 나라의 그것과 얼마나 다른가 하는 점을 밝히고 있는 것이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집중적으로 가르치신 내용 중 하나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가치관, 사고방식, 생활양식, 행동양식 등을 집중적으로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기억할 수 있도록 반복해서 틈만 나면 가르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종교생활이 신앙생활이 아님을 분명히 하신 일입니다. 즉 이 세상의 가치관 그대로 살면서 주일이면 교회에 와서 예배 참석하는 일이 신앙생활이 아님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종교생활과 신앙생활을 정확하게 그리고 극명하게 구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통해 당시 일반적으로 신앙생활을 잘한다는 사람들의 기도하는 자세나 헌금하는 자세 등을 예로 들면서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기도와 헌금임을 보여주셨습니다. 심지어 금식하는 자세에 대해서도 언급하시면서 “그렇게 금식하는게 아냐” 식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의식은 그것이 어떤 모양이라 할지라도 의미가 없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이와같은 가르침은 당시로는 획기적이었습니다. 마태복음 5장 41절의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라는 구절을 예로 설명드리자면 이렇습니다. 당시 유대나라는 로마의 압제 하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로마인들은 유대인들을 아무렇게나 붙잡고 5리를 데리고 다니면서 억지로 일을 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당시의 법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로마인들을 만나 붙잡혀 5리를 억지로 끌려 다니며 일을 하면서 얼마나 불평을 쏟아놓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여기다가 예수님은 10리를 같이 가라고 하셨습니다. 즉 로마인이 유대인 중 두 사람을 붙잡고 자기 일을 억지로 시키면서 5리를 동행하자고 했다고 합시다. 한 사람은 불평불만을 쏟아내며 억지로 5리를 갑니다. 그런데 옆 사람은 휘파람을 불면서 5리를 동행합니다. 이윽고 5리를 다 왔습니다. 그런데 어, 이게 왠 일입니까? 휘파람을 불던 유대인은 로마군인에게 다시 5리를 함께 가겠노라고 합니다. 로마군인은 어이가 없어 그 사람을 유심히 봅니다. 예수님은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라는 말씀을 통해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가치관은 세상 나라의 그것과 판이하게 다르다는 사실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가치관과 생활양식은 세상 나라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은 하나님이시고, 세상 나라의 왕은 사탄이기에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도 마찬가지였지만 오늘날 성도들 중에도 예수를 믿긴 하지만 세상 나라의 가치관과 사고방식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볼 때에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한 번도 그와같은 삶이 신앙생활이라고 가르치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한 번도 교회생활이 곧 신앙생활이라고 가르치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근본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과 세상 나라의 가치관이 서로 다르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산상수훈은 소위 말하는 ‘팔복’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팔복’의 단어 배열에 잠간 주의해야 합니다. ‘팔복’은 「○○○ 하면 ○○○ 복을 받으리라」의 단어 배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마치 복걸복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뭐뭐 하면 이러이러한 복을 받으리라고 하니 말입니다. 그러나 이같은 생각은 잘못입니다. ‘팔복’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핵심적으로 요약해 놓은 것과 진배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자 이제부터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 3절부터 10절입니다.


③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④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⑥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⑦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⑧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⑨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⑩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다시 말씀드립니다. 심령이 가난하면 천국이 내 것되는 복을 받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애통하면 위로받는 복을 받게될 것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단어 배열로 이해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핵심적으로 요약해 놓은 말씀이라는 점에 주의하셔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위의 말씀은 이렇게 이해해야 옳은 해석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심령이 가난한 자이며, 애통하는 자, 온유하며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입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근휼히 여길뿐만 아니라 마음이 청결하며, 화평케 하는 자입니다. 나아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입니다.


  이렇게 해석해야 옳은 해석인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경우 교회들은 하나님을 믿되 하나님을 세상에서 얻고자 하는 바를 얻어내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복신앙이 그것입니다. 기복신앙이란 하나님이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 되어버린 거짓신앙입니다. 예수님은 한 번도 하나님을 수단삼으라고 가르치시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기복신앙에서는 헌금을 하더라도 복을 받기 위해서 합니다. 흔히 말하는 씨앗을 뿌리면 후에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게될 것이라는 말씀을 근거하여 그렇게 합니다. 내가 헌금을 하면 하나님은 더 많이 축복해 주실 것이야 라는 신앙입니다. 내가 이렇게 헌신했으니 하나님은 반드시 내게 복을 주셔야만 돼.  기복신앙에 물들면 이런 가치관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 밖에 없게됩니다. 사실 위의 말씀을 기복신앙관을 가지고 접근하면 매력이 없는 말씀뿐입니다. 복의 내용이 물질적이거나 세상에서 성취하고자 하는 성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은 내 스스로는 내 안에 선한 것이 없기에 하나님 앞에 스스로 설 수 없음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구하는 자세를 가르킵니다. 오 하나님 저를 도와주세요. 주님의 은혜가 없이는 순간도 설 수가 없어요. 이런 마음으로 주님 앞에 서는 심령을 가리켜 심령이 가난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애통하는 자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무엇 때문에 애통해 할까요? 이유는 하나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의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온유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른 자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긍휼히 여기는 자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마음이 청결한 자입니다. 마음이 청결하다는 말의 의미는 마음이 나누어지지 않았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돈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나누어진 마음이 우상숭배입니다.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의 자세가 마음이 청결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화평케 하는 자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입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교회를 다니며 종교생활을 잘하면 그것을 인해 복을 받는다고 쓰고 있지 않습니다. 복의 내용을 보아도 흔히 사람들이 세상에서 얻고자 하는 바가 아닙니다. 더 잘 살고, 더 많이 가지는 데에 복이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 어디에서도 세상적 가치관에서의 복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참된 삶이 무엇인지 보여주시려고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우리는 마태복음을 통해 예수님이 전한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의 핵심이 무엇인지 만납니다. 예수님이 들려주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받게되는 복은 하나님을 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들려주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받게되는 복은 하나님의 위로를 받게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들려주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받게되는 복은 하나님의 긍휼히 여김을 받게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들려주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받게되는 복은 천국이었습니다.


  마태복음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의 삶을 언급하면서 팔복에 이어, 5리를 같이 가고자 하는 사람에게 10리를 같이 하라, 속 옷을 달라거든 겉 옷까지 주어라, 원수를 사랑하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며 빛이로다 등과 같은 말씀을 소개합니다. 십자가의 복음에 세워진 사람들이 살게될 삶을 소개하고 있는 겁니다. 즉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든 것 되시는 삶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모든 것되시는 자만이 이 삶을 살 수 있기에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이란 십자가에 못박히신 인격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또한 십자가의 복음에 토대하여 세워진다 는 말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모든 것 되시는 삶을 산다 는 의미입니다.


  마태복음은 5장부터 7장까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의 삶의 모습을 소개한 다음 8장과 9장에서 예수님이 행하셨던 사역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크게 다섯 가지로 소개합니다. 첫째 병든 자를 강력하게 고치신 사역이 있습니다. 병 중에 가장 난치병인 문둥병을 고치신 장면이 여기에 등장합니다. 또한 군대귀신들린 자를 고치신 장면 역시 여기에 나옵니다. 귀신들림이 얼마나 컸던지 쫓겨난 귀신들이 돼지떼에 들어가 물에서 몰사할 정도 였습니다. 또 쇠고랑을 끊을 정도로 귀신들린 자를 고치신 장면이 나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신 장면과 억압에 묶인 사람을 자유케하시는 모습 등이 나옵니다.


  여러분, 우리는 모두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는 의미는 하나님 나라의 영역 가운데 들어왔다는 뜻입니다. 이는 세상 나라 사람들과 전혀 다른 가치관으로 살아야 함을 뜻합니다. 만약 세상 나라의 가치관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교회생활을 한다면 이는 또 하나의 비극입니다. 내가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내가 원하는 복을 주시겠지 하는 생각을 버리셔야만 합니다. 또 복을 받기 위해서 교회생활을 하고 있다면 이는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성경 어디에서도 그것이 신앙생활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마태복음에는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을 주님께서 꾸짖는 장면이 다른 어떤 성경보다도 많이 나옵니다.


○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 (없음) ○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 화 있을진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 우맹이요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금이냐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예물이냐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 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 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 또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 ○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 이와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예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 ○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 ○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게 돌아가리라 ○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은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보다도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주님께서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꾸짖고 계십니다. 여러분 왜 마태복음이 다른 성경보다 더 꾸짖고 계시는지 이해가 되시니요? 마태복음의 강조점이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삶을 강조하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즉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강조하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마태복음 10장부터는 1장부터 9장까지의 결과 즉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된 결과로 인해 하나님이 왕이 되시기 때문에 일어나는 놀라운 역사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는 일이 무척 어렵게 느껴지고 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뭔가 특별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역사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면 그 가운데 수시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을 체험하는 일은 특별한 일이 아니라 보편적인 일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역사들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유는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을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믿을지 모르지만 삶은 여전히 세상적 가치관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목회자들은 성도들 편안하게 위해서 메시지를 희석시켜 놓았습니다. 성도들은 자신을 기쁘게 하는 목회자에게서 평안을 전해 듣습니다. 이런 상황하에서는 진정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수도 없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갈 때 당연히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전하신 다음 자연스럽게 능력 사역을 행했듯이 말입니다. 마태복음 10장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행했던 사역을 그대로 행하라고 명령하시는 장면을 싣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태복음은 5장부터 9장까지 예수님의 메시지와 사역을 요약한 다음 10장에서 제자들을 똑같이 살라고 보내시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자기의 사역과 동일한 사역을 명령하셨습니다. 10장 1절과 5절부터 8절입니다.


예수께서 그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 ○ 예수께서 이 열 둘을 내어 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왔다 하고 ○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이 장면은 모든 복음서마다 다루고 있는 부분입니다. 누가복음은 이 장면을 똑같이 기록하면서 성령의 능력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이 사역을 말씀을 선포하신 후 귀신을 쫓아내는 장면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비해 마태복음 예수님의 사역을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와 사역으로 묘사합니다. 그러기에 표현하기를 “하나님를 전파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치라”고 한 것입니다.


  각복음서는 똑같은 예수님의 사역을 서로 다른 강조점을 가지고 묘사하는 가운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기와 똑같은 사역을 명령하신 바를 그 강조점에 입각하여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제자들의 사역은 예수님의 사역과 정확하게 똑같아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신앙생활을 종교생활이라고 언급하시는 가운데 하나님을 믿는게 아니라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사람들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를 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바리새인들의 신앙생활은 성경에 기초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사람의 가르침을 따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전통에 기초하여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이 그러하기 쉽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나름대로는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역은 예수님의 사역 그대로 해야 합니다. 메시지 역시 예수님이 전한 그대로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행한 사역 그대로 사역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전통해 따르는 사람들의 가르침을 따를 뿐입니다. 그런데 10장은 이렇게 예수님의 사역과 메시지 그대로 따르면 핍박이 있을 것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10장 24절입니다.


○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 그런즉 저희를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으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 ○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나니 ○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보십시오. 예수님은 24절과 25절을 통해 핍박이 있을 것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28절을 통해 핍박이 있더라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34절부터 36절의 말씀을 하십니다. 여기같은 경우는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분명 예수님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오신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화평케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불화하게 하신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항상 문맥에서 해석해야 합니다. 여기 구절은 하나님의 말씀이 정직하게 전하면 가정에서부터 핍박하는 자가 생겨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니까 핍박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37절부터는 핍박이 일어날 때 핍박이 두려워 주님 좇는 것을 포기하면 주님께 합당치 않다는 말씀입니다.


○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예수님은 이렇게 어려움 속에서도 주님을 끝까지 좇는 자들에게는 상급이 있음을 말하시고 있습니다. 41절입니다.


○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11장부터 12장은 예수님이 당하신 핍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핍박은 불신 세계로부터의 핍박이 아닙니다. 오히려 환영해야할 종교사회로부터의 핍박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을 받으시는 장면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부자가 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없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핍박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을 여러번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정직하게 전하면 핍박이 있게 마련입니다. 혹 여러분 가운데 핍박이 없는 이유는 주님 말씀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은 아닌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 웨슬리 목사님은 어느날 생각하기를, 자기에게 돌이 날아오지 않으니까 기도했습니다.  만약 자기가 하나님 말씀을 정직하게 전했으면 사람들이 변화되거나 대적할텐데 그언제부터인가 돌이 날아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혹 내가 하나님 말씀을 정직하게 안전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순간 돌이 날아 왔다고 합니다. 이 때 요한 웨슬리 목사님은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정직하게 전하고 하나님 뜻대로 살아가면 핍박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자기가 잘못해서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것을 핍박받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건 아닙니다.


  11장과 12장은 핍박과 동시에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일에 동참하기 위한 마음 자세가 함께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1장부터는 예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이 그 강도를 높여 집중적으로 주님을 핍박합니다. 우선 예수님을 대적하게 된 배경에는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진 자들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역사에 동참하도록 만드시는 은혜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인 메시야가 왔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대적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짚고 넘어거야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도대체 왜 그들은 예수님을 대적할 밖에 없었는가? 즉 왜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제외 당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 이유를 11장과 12장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이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지도층의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신앙관의 잣대를 가지고 예수님을 재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졌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던 성경지식대로 메시야가 올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대로 임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은 주권자이시기에 그리 하십니다. 내가 아무리 성경을 많이 알고 있어도 하나님은 내 관점에 맞도록 오시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성경과 무관하게 오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제 얘기는 내가 아는 성경 지식이라는 굴레 안에 드러오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들어오시지 않는 이유는 우리에게서 올바른 마음의 자세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안다는 것을 가지고 주님의 역사를 펑가하면 반드시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 어떤 자세가 필요할까요? 11장은 요한과 바리새인들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둘 다 주님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굴레 안에 들어오지 않았던 부류였습니다. 두 부류를 비교하고 있는 겁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관점에 비추어 예수님의 행동이 맞지 않자 곧바로 대적하기에 으르렀습니다. 반면 요한은 자기관점과 예수님의 삶과 사역이 다르게 비춰오자 말씀 앞에 엎드리는 자세를 가졌습니다. 이것이 두 부류의 차이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려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정직하게 엎드리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 자세가 없이는 절대로 하나님의 행하심에 동참할 수 없습니다. 11장 2절과 3절입니다.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


  보십시오. 요한의 자세를. 혹자는 말하기를 요한이 옥에 갇힌 뒤 신앙심이 떨어져서 예수님을 잘 알아보지 못했노라고 말합니다. 이는 어불성설입니다. 지금 요한은 왕을 향하여 바른 말을 한 결과, 즉 하나님의 사역을 하다가 옥에 갇혀있었습니다. 요한의 신앙이 떨어져서 그렇게 했노라는 주장은 말도 되지 않습니다. 요한에 대해 예언된 말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장 13절부터 17절입니다.


○ 천사가 일러 가로되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남을 기뻐하리니 ○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요한은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고 성령께서 순간순간 할 말을 그의 입에 주었을 것입니다. 신앙이 떨어졌기에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지는 않았을 겁니다. 또한 요한과 예수님은 친척관계에 있었습니다. 요한은 침례를 줄 때 하나님의 음성이 분명이 들려와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라는 말씀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한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음에도 예수에게 사람을 보내 당신이 메시야라고 묻고 있는 겁니다. 여기에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우선 요한이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낸 이유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절을 다시 읽습니다.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요한은 예수님의 하신 일을 들었을 때 자기가 생각한 메시야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요한은 예수님의 행동이 자기가 생각하는 메시야가 아니었다고 생각했을까요? 그것은 요한이 전한 메시야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3장 7절부터 12절입니다.


⑦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 ⑧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⑨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⑩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⑪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⑫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여기서 우리는 요한이 말세에 오실 심판의 주로서의 메시야를 전하였음을 봅니다. 요한은 성령의 계시에 의해 심판주로 오실 메시야를 전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부분적으로는 성경에 기초하였지만 대부분 전통에 기초한 메시야상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 요한은 성령의 감동에 의해 알게된 메시야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억할 점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성령의 게시에 의해서였다고 할지라도 모든 계시는 부분적입니다. 예수님이 심판주로 오실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심판주로 오셨기도 하지만 초림 때에는 섬기는 종으로 오셨습니다. 요한은 메시야가 와서 심판하실 것으로 알았는데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섬기는 모습이었고 마치 종처럼 사시는 것이었습니다. 요한은 이상히 여겼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요한에게서 볼 수 있는 자세가 있습니다. 요한은 메시야의 모습이 달랐을 때 대적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자신이 아무리 성령의 감동을 통해 받았더라도 대적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경험하지 못하는 부류가운데에는 과거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과거에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현재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지 못하는 이유는 과거의 경험들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계속 활동하시고 움지기잇는 분인데도 그들은 과거의 경험에다 하나님을 가두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보면 으례 “나도 옛날에 다 경험해 봤어”라고 말합니다.


  요한은 달랐습니다. 그는 성령의 감동을 통해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알았고 하나님의 성령이 예수님에게 내려오는 것을 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자기의 생각과 예수님의 일이 다르자 예수님네게 제자들을 보냈습니다. 즉 하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마태복음 11장 4절과 5절입니다.


④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⑤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에게 듣고 본 것을 가서 요한에게 전하라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전파되고 있는지를 듣고 본대로 가서 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해, 예수님은 이사야서 42장부터 66장에 나타나는 고난의 종이 행할 사역을 자신이 하고 있음을 요한에게 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에 요한은 자신이 지금가지는 심판의 주로서의 메시야만 알았는데 제자들의 말을 듣고 메시야가 고난의 종으로도 오실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요한은 올바른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엎드린 결과 메시야의 또 다른 모습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일이 있은 후 요한에 대해 언급하시면서 그를 “큰 자”라고 하셨습니다. 그 후 바리새인들은 사사건건 예수님을 노골적으로 대적하기에 이르릅니다. 12장에는 안식일에 이삭을 비벼 먹은 일로 대적하는 일과 회당에서 손마른 자 고친 사건을 인해 대적하는 장면을 그려놓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왜 그리도 예수님을 대적했을까요? 그들은 그들이 갖고 있던 사고관의 상자에 메시야를 넣어두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3장 14절입니다.


⑭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⑮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⑯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여기서도 우리는 바리새인들이 전통적인 신앙관으로 무장하고 있음을 봅니다. 그들은 볼 수 없었습니다. 자기들의 틀을 가지고 메시야에게 접근하니 메시야가 정확하게 보일리 만무했습니다. 인간이 만든 고정관념, 신앙인식을 가지고는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이런 태도를 보시면서 반응없음을 통탄해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갈급해 함이 없으면 그 사람은 병들어 있는 것입니다. 11장 16절과 17절입니다.

  

⑯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⑰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자기 신앙관을 고수하는 자들은 배우려는 자세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결국은 주님의 역사를 대적하기에 이를 것입니다. 자기 신앙관이 아무리 옳다 여겨질지라도 배우려는 자세마저 놓아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이 일은 예수님 시대뿐만 아니라 교회사 모든 시대에 걸쳐 일어난 일들입니다. 특히 부흥이 임할 때마다 일어났습니다. 오늘날도 똑같습니다. 우리들은 오늘 말씀을 통해 오늘날 교회가 전해야할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봅니다. 그리고 그런 메시지가 증거되면 어떻게 핍박이 일어날 것인지에 대해서도 보게 됩니다. 왜 사람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대적하는지에 대해서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핍박이 일어나면 어떻게 대처해야 되는 지에 대해서도 볼 수 있습니다. 나아가 사람들은 왜 예수님의 역사에 동참하지 못하는 가에 대해서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자세를 가져야 주님의 역사에 동참할 수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11장 28절부터 30절은 참된 안식에 데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소위 종교생활한다고해서 안식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지만 참된 안식을 얻지 못했습니다. 종교생활이었기 때문입니다. 25절입니다.


○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보십시오. 예수님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가 아니면 참된 안식을 얻을 수 없노라고 합니다. 아버지를 모르는데 참된 안식이 있을리 만무하니까요. 참된 안식은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께 나아와 예수님의 주권 가운데 즉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들어가게 될 때 거기에 참된 안식이 주어집니다. 11장 25절부터 30절은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바리새인들과 종교지도자들은 율법주의 신앙관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들이 드리는 예배는 전통을 따르는 것에 불과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교훈을 따르기 보다는 사람이 교훈을 따르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형식에 불과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대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가장 기본적인 신앙의 본질도 몰랐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대적하면서 가장 많이 외쳤던 말은 예수님이 바알세불이 지폈다는 얘기입니다. 즉 이단이라는 것입니다. 나증에는 가족들까지 미혹을 받아 예수님을 대적하기에 이르릅니다. 12장 46절부터 50절입니다.


○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 한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섰나이다' 하니 ○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 하시고 ○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예수님이 대적을 당하고 이단이라고 말을 들었으면 제자들은 어떠했을까요? 여기에 대해 예수님은 12장 33절에서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실과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실과로 나무를 아느니라


  마태복음 13장은 바로 이런 배경을 안고 쓰여집니다. 먼저 씨뿌리는 비유가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말씀을 전할 때 나타나는 네 가지 반응을 소개하시고 계시는 겁니다. 씨는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씀을 뽑아서 전하는 말씀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말씀이 정직하게 전해지면 나타나는 반응을 크게 네 가지로 보여주시고 계십니다. 길가에 뿌려지는 밭은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마음이 강팍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가시밭과 돌밭은 예수님의 기적행하심을 보고 말씀을 받아들인 자들입니다. 기적을 경험하고 은혜를 받은 자들입니다. 굶으면서도 예수님을 따라다닌 자들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초청 즉 모든 것으로 주님을 사라는 말씀 앞에 그들이 치루어야할 댓가가 많았기에 나중에 다들 돌아간 자들입니다. 좋은 밭은 보는 자들입니다. 즉 예수님의 행하심을 보고 자신의 전존재로 따라가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침노하는 무리들입니다. 이들을 통해서 열매를 맺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자들을 세우셨습니다. 교회도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장말 교회가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회 내에 일부를 이러한 무리로 세우는 걸 원치 않으시고 교회가 그렇게 되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성경 어디에도 일부는 트별하게 주님을 좇고 나머지는 대충살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자기를 따르는 모든 제자들에게 마태복음의 명령즉 대위임령을 주시고 계십니다. 교회가 침노하는 무리가 되어야 합니다.


  다음에 나오는 비유가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대해서 말씀을 하면서 왜 이 비유를 하셨을까요? 이유는 이것입니다. 사탄은 이땅에 이단을 뿌려놓습니다. 왜?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감당하면 유사한 것을 심어 사람들이 못따라 오도록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사탄의 계략입니다.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겁니다. 그러나 이것을 인해 중심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처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나중에 지옥갈 것이니까.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천국에 갈 것이니까.


  다음의 비유가 겨자씨의 비유입니다. 겨자씨의 비유의 특징은 가장 작은 씨앗이란 점입니다. 정말 작은 씨앗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겨자씨를 가지고 비유를 드셨을까요? 그것은 씨앗이 가장 작기 때문입니다. 작지만 크면 새들이 와서 깃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즉 하나님 나라는 작게 시작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따라다녔지만 맨 나중에 남은 사람은 120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자신의 전존재로 동참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작으니까요. 적당히 교회를 다니며 하나님은 수단에 불과한 곳에는 사람들이 몰릴지 모르지만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가 정직하게 전해지면 전존재로 주님을 사랑하는 그리고 주님의 주권 가운데로 들어가라 그곳에 진정한 안식이 있고 진정한 삶의 기쁨이 있다고 하면 좁은 길로 가라 하면 인기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정직하게 전하면 시작은 작습니다. 그러나 겨자씨에 비유하신 이유는 반드시 클 것이라고 하시는 겁니다.


  남편없는 여인의 자녀 수가 나중에는 남편있는 여인의 자녀수보다도 더 많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오시니까요. 나중에는 열방을 얻으리라고 하십니다. 왜 겨자씨에 비유한지 알겠지요?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을 전존재로 사랑하는 가운데 들어가면 하나님이 오셔서 역사하실 것이기 때문에 좌우로 퍼질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이사야 54장이 이루어질 것이니까. 그래서 겨자씨에 비유하신 것입니다.


  다음 비유는 누룩의 비유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퍼지는 길은 캠페인처럼 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퍼지는 길은 누룩처럼입니다. 누룩은 반죽을 크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확산되는 길이 이것입니다. 입에서 입으로 하는 것. 대규모적인 캠페인으로 영혼이 많이 돌아오지 않는 것같습니다. 어느 통계 자료에 의하면 대규모 전도집회를 통해 그리스도인으로 정착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고 합니다. 가까운 사람끼리, 아는 사람끼리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것이 누룩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미리 다 말씀하셨습니다.


  다음은 감추인 보화와 진주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들은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는 방법들입니다. 그러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모든 것으로 사는 길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우리의 모든 것으로 산다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것 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복신앙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하나님을 통해 다 채우려고 듭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짓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면 하나님 안에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다 들어있습니다. 진정한 안식뿐만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비밀들이 다 들어있습니다.


  소중한 것의 값을 알면 하나님 나라를 사려고 할 것입니다.


  다음이 그물의 비유입니다. 이 고기 저 고기 다 잡혔지만 골라서 뽑을 것이라는 비유. 이 사람 저 사람다 믿는다고 하지만 마지막 날에는 진실로 믿은 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이처럼 마태복음 13장까지에는 모든 것이 다들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와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 무엇인지 다 들어 있습니다. 당시는 율법주의 신앙이 판을 치고 있었던 때입니다. 전통적인 규례를 따른 신앙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복신앙과 인본주의적 관점에서의 신앙관이 판을 치고 있었던 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자신의 모든 것으로 동참하여 하나님 나라를 위해 씀임받은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 토대위에 성령을 부으셔서 세계를 변화시키는 도구로 쓰셨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방법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이 일을 하시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자세로 주님을 따라가야 할까요? 무엇보다 지금 하나님이 행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동참하여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무엇보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에서 어떤 일을 하시고 계시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 행하심에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를 보셔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주님을 따라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마태복음을 통해 강조하시고 계신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보시기 바랍니다.


  끝까지 읽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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