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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하나님의 질투와 중보기도

시리즈설교/중보기도

by 발의무리 2008. 7. 7.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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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장. 하나님의 질투와 중보기도


하나님의 질투와 중보기도에 대하여 살펴보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질투에 대한 부분은 중보기도의 자세 중에 가장 중요한 자세입니다. 사실 저는 그 부분을 이번 컨퍼런스 때에 살펴볼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컨퍼런스 전에 포도나무교회 지체 중 한분이 유럽 출장을 가는데 비행기 안에서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가지고 내게 부르짖을 자 누구냐?” 그렇게 말씀하셨답니다. 그러면서 그 먼 길을 비행기 타고 가는 동안 계속 울었답니다. 그래서 저는 속으로 ‘은혜를 많이 받으셨구나.’ 그렇게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제 저녁 집회를 마치고 이길수 목사님과 잠깐 얘기를 나누는 중에 이 컨퍼런스를 위해서 처음 기도할 때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질투에 대한 부분을 말씀하셨는데 잊어버렸었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볼 때 그 두 부분이 서로 연결이 되었습니다. 중보기도의 자세 중에 가장 중요한 부분이 하나님의 질투입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질투가 우리에게 너무나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기대치가 낮아서 거기까지 할 것은 생각지 못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부분을 살펴보기를 원하시는 것 같고 그런 은혜를 우리에게 붓기를 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부분만 살펴보려고 하다가 한편으로는 중보기도를 잘 독려하는 차원에서 여러분도 다 들을 겸 해서 중보기도의 유익을 먼저 살펴보고 그리고 하나님의 질투를 살펴보고 기도사역 하도록 하겠습니다.

1. 중보기도의 유익

중보기도의 유익이 무엇이 있을까요? 그동안 하나님을 따라 오면서 또 하나님이 비추시고 또 우리의 삶 가운데 함께 하시는 부분을 정리하면서 다섯 가지로 주된 것을 요약할 수 있었습니다.

1]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친밀함 입니다
어제도 말씀 드린 대로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가는 것입니다. 찬양과 경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에게 가까이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거기 하나님을 가까이 한다는 말은 하나님 얼굴을 구하여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가는 기도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오십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그래서 중보기도의 가장 큰 유익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것을 바라서 나간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나오는 자들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이란 것은 하나님의 회의라는 말입니다. 영어로 counsel 입니다. 하나님의 회의에 참여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부부간에도 사이가 좋을 때라야 속 이야기 합니다. 아무리 부부간이라도 오래 살아도 사이가 안 좋을 때는 절대 속 얘기를 안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자기를 사랑하는 자에게 자기를 계시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모스 3장 7절을 보아도 여호와께서는 자기 비밀을 그 종 선지들에게 알리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중보기도 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비밀을 알리십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속 이야기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속 이야기를 하시는 장소로 초대 받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을 선지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창세기 20장 7절에 보면 하나님은 가나안을 떠나라고 말씀 안하셨는데 가나안에 흉년이 들자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피합니다. 그때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라를 취하고자 합니다. 사라가 예쁘기는 엄청 예뻤던 것 같습니다. 그때가 벌써 나이가 70이 훨씬 넘었음에도 왕이 취할 여자가 없어서 70이 넘은 여자를 취하려고 할 정도면 굉장히 예뻤나 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목숨이 두려워서 자기 누이라고 속입니다. 한편으로는 자기 누이라는 말이 전혀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 날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나타나셔서 하시는 말씀이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 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않으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정녕 죽을지니라.” 그래서 겁이 나서 사라를 돌려보낼 뿐 아니라 선물까지 몽땅 싸가지고 돌려보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면 선지자라 불렀습니다.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선지자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이해하듯이 아브라함이 하나님 말씀을 받아서 사람들에게 전한 내용은 없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중보 기도한 내용은 나옵니다. 소돔을 위해서 중보 기도한 내용입니다. 아브라함이 중보기도자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중보기도는 선지자적 소명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소돔을 멸망하는 것만 하더라도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계획을 알리십니다. 저는 이것이 하나님의 어떤 겸손하심이라고 생각 합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이신데도 우리 인간보다 더 겸손하십니다. 천사들이 실제적으로 정탐해서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그리로 떠난 후에 하나님이 소돔을 멸하실 것을 아브라함에게 알리십니다. 그때에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구합니다. “성중에 의인 50명이 있을지라도 멸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라고 질문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의인 50명을 찾으면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아브라함은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구합니다.”라고 고하면서 “45명만 있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은 45명만 찾아도 멸하지 않겠다고 말하십니다. 아브라함이 더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면서 “40명이 있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30명이 있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러면서 어디까지 내려갔냐 하면 10명까지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내가 10명의 의인만 찾아도 그 땅을 멸하지 않겠노라고 말씀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더 이상 하나님 앞에 말할 수 없어서 하나님의 계획에 동의하는 단계에 이릅니다. 그리고 잘 아는 대로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이 이릅니다. 그런데 그 부분을 보시면 (여러분이 저를 성경을 이상하게 해석한다고 보지 마십시오.) 한편으로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동의를 얻을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직접 증거 하시길 “아브라함은 내 친구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내 친구입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하나님이 우리에 대하여 “누구누구는 내 친구다.”라고 하시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고백하기를 “그는 내 친구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에 보시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뜻에 동의 할 때까지 하나님이 기다리신 것을 보면 이것이 바로 친밀함입니다. 하나님은 주권자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아무에게도 동의를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권자 하나님이라는 의미자체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행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게 주권자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통치자, 주권자, 온 세상의 창조자이시므로 어느 피조물에게도 협조나 동의를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그렇게 까지 하시는 그것이 친밀함의 자리로 그를 초청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친구라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중보기도자에게 그러한 친밀함을 허락하십니다. 이와 비슷한 예를 시므온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중보기도자였습니다. “성령이 그 위에 임하셨다.”고 하셨는데 이것은 기름 부음을 말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네가 죽기 전에 메시야를 보게 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날로 보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네가 살아서 다시 오실 주님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하신 것과 똑 같습니다. 너무나 놀라운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에 대한 좋은 예가 누구냐 하면 모세입니다. 제가 수 년 전에 필리핀에 있는 바기오 지역에 현지 목회자를 위한 집회를 하러 갔습니다. 당시 통역이 없어서 저 혼자 집회를 인도했기에 집회를 인도하고 나니까 녹초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인교회와 선교사님들을 위한 집회에는 첫 시간에 김영식 목사님이 수고해 주셨습니다. 김영식 목사님이 설교할 때, 제가 앉아서 성경 출애굽기 32장을 보는데 하나님께서 그 부분을 보이셨습니다. 32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만든 사건이 나옵니다. 이 사건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멸하시려고 하시며 “그들은 목이 곧은 백성이라 내가 저들을 멸하고 모세 너로부터 새롭게 시작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모세의 간구로 하나님께서 그 뜻을 돌이키십니다. 그런데 그곳을 읽는 중에 하나님이 보이신 것이 32장9절과 10절입니다. 9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그러면서 30절에 보여 지는 것이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여기에 보시면 하나님이 행하시기 전에  모세의 동의를 구하십니다.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은 누구에게도 동의를 구하실 필요가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주권자이시며 통치자요 왕이십니다. 아무에게 상의도 상담도 아무에게도 허락도 조언도 구하지 않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럼에도 그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대로 하게 하라.”라고 동의를 구하시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하나님이 중보기도자들의 허락을 받아서 일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만큼 중보기도자들에게 하나님의 친밀함을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그 자리로 초청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습니다. 사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목적과 하나님의 길이 우리에게 보여지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러한 하나님의 길을 우리에게 보이신다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자리로 초청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중보기도의 유익 중에 가장 큰 유익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입니다. 사실 그것보다 더 귀한 선물은 없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우리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위해서 중보기도하지 않습니다. 그것 역시 수단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중에 있는 것을 붙들고 그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그 앞에 서서 하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뜻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으로 족하는 것입니다. 다윗처럼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기 원하며, 하나님을 알기를 추구하여 주 앞에 설 뿐만 아니라 그렇게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주님의 의중에 있는 것을 가지고 주 앞에 아뢰기 위해서 서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중보기도로 나아가는 자세입니다. 그래서 나아가는 것이고 그런 목적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갈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가장 큰 것이 하나님과의 친밀함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모세에게 허락하셨던 것과 같은 친밀함으로, 즉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실행하시기에 앞서서 그들의 동의를 얻으시는 것처럼 보이는 그러한 정도의 친밀함 가운데로 우리를 이끄시기를 원하고 계신다고 믿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얼마만큼 주님 앞에 나아가느냐에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자리로,  우리를 실질적인 자리로 초대한다고 믿습니다.

2] 중보기도를 통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중보기도를 통해 주어지기 때문에 친밀함이 주어진다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신 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과 목적과 길들을 계시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인도라는 것을 많은 경우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합니다. “내가 사업을 할 때 무슨 사업을 할까요? 빵집을 할까요? 아구찜 집을 해야 합니까?” 우리는 그러한 것을 구하는 것들을 인도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너무 자기중심적입니다. 하나님의 인도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과 목적, 길들을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목적을 보고 우리의 삶을 조정해서 하나님 목적 가운데 나가고 하나님의 길을 발견하여 우리가 그 일에 순종하여 설 때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그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우리에게 허락하신다는 것은 다른 말로 중보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신 다는 것입니다.

사실 포도나무 교회가 여기까지 온 것은 중보기도가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핵심적인 하나님의 인도가 중보기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새물결 선교회 역시 중보기도가 없었다면 태동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새물결 선교회가 생기게 된 과정을 보면 제가 분당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개척 첫해에 45명이 모였습니다. 2년째 되는 해에 교회에 큰 아픔이 있어서 핵심적인 멤버 20명이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 교회가 없어질 뻔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개 교회뿐만 아니라 다른 교회의 목회자와 성도를 위한 모임을 갖는다는 자체가 우스운 일이지요. 그리고 그러한 것을 꿈꿀 배포와 용기가 제게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중보기도 중에 하나님께서 하루는 저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때 주된 기도제목은 “이 나라에 하나님의 부흥이 빗겨가지 않게 해주세요.”라는 제목이었습니다. 역사를 보면 하나님의 부흥이 임하더라도 어떤 나라는 빗겨가고 어떤 지역은 빗겨가는 일들을 많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부흥은 태풍이 지나가며 자국을 남기는 것처럼 지나가는데 똑같은 길을 가면서도 어떤 지역은 빗겨갈 수 있다는 것을 책과 기사를 통해 보면서, “성경에 말세지말에 놀라운 부흥이 임할 것을 분명히 예언하고 있는데 하나님, 그 부흥이 우리나라를 빗겨가지 말게 해주세요.”라고 집중적으로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 저를 통해서 부흥이 일어나게 해주세요.” 그런 기도는 교만한 것이지요. 그런 기도는 생각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단지 이 나라에 부흥이 빗겨가지 말게 해 달라고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중에 하루는 중보기도 중에 하나님께서 “이 나라에 부흥을 위한 담을 수 있는 전초적인 역사가 이미 시작되었으니 너는 기도만 하지 말고 찾아 나서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디로 찾아 나섭니까? 그냥 ‘불로, 불로’ 한다고 부흥이 오는 것은 분명 아니고 근본적으로 신앙적인 가치관부터 새롭게 정립되어야 하는데, 다시 말하면 거짓신앙체계가 철저히 버려지고 오직 십자가의 복음과 신앙의 본질 위에 교회가 세워져야 되고, 하나님 중심적인 가치관에 세워져야 하는데요. 그래서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가보기도 하고 어느 지역에 하나님이 귀하게 쓰신다는 분이 있다고 해서 먼 길을 가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 제가 출장을 많이 갈 것 같다고,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찾아보아야 할 것 같다고 말씀드렸지만 어디로 갈지는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어느 지역에 요즘 모임이 있는데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고 하면 거기 나도 가보겠으니까 장소를 한 번 알아보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그 때는 국민일보를 구독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누가 국민일보를 훔쳐가 버렸습니다. 제가 국민일보를 본 이유는 거기에 나오는 집회 광고를 보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없었는데 하루는 누가 신문을 훔쳐가 버렸습니다. 그것이 금요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제가 주보사에 갔더니 그 전날 국민일보가 있었습니다. 주보를 인쇄하는 동안에 제가 신문을 훑어보고 있는데 어느 집회광고를 보는 순간 성령님께서 “여기니까 거기를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그런 집회는 한국에서는 처음 갔습니다. 외국으로는 몇 년 전부터 은혜 받으러 다녔지만 국내에서는 그런 종류의 집회를 한군데도 안 갔습니다. 그 집회는 캐나다의 어떤 팀들이 하는 집회였습니다. 거기 갔는데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많은 것을 말씀하셨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 모임에 참석하라고 하셨고 그곳에서 제가 이길수 목사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 숫자가 그렇게 적지 않은 상황에서 그 모임의 서울 경기 지역 정기집회로 포도나무교회에서 모이게 되었습니다. 정기집회가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생긴 지 얼마 안 되어서 그 모임의 책임자가 자신의 모임의 이름으로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모임만 시작해놓고 동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몇 달만 참아주십시오.”했더니 그 다음날 새벽기도 시간에 하나님께서 그 이름으로 그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날 새벽기도 끝나고 바로 전화해서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로서는 모임을 시작할 상황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역사하셔서 모임을 딱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 때는 화요일 날 모이면 찬양 인도자가 따로 없었기에 제가 찬양인도를 직접 했는데 찬양인도하려고 서면 딱 두 명 앉아 있습니다. 제가 어느 신학교에서 강의를 했더니 그 신학교 학생 한 명과 다른 분 두 명이 앉아 있습니다. 찬양하다보면 중간에 몇 분이 더 오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렇게 화요모임이 시작되었습니다. 광고한다고 사람들이 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때부터 하나님이 사람들을 보내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화요모임이 계속 되게 하셨고 1년 뒤부터 공식적으로 선교회를 시작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인도해 오신 것입니다. 어떤 분은 새물결 선교회 정도면 지금 무슨 일을 해도 하겠다고 말합니다. 지금의 규모와 자원을 보고 말씀하시는데 원래 처음부터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중보기도가 없었다면 절대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중요한 요소요소 시간들 마다 하나님께서 중보기도 시간을 통해서 보이신 것입니다. 다음 주 화요일 날 오후3시에 우리가 모인다고 했는데 그런 모임도 하나님의 뜻을 같이 분별하려고 모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난번 중보기도를 통하여 되어져 가는 일련의 사건들을 통하여 어떤 중대한 일들을 하시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뜻을 같이 분별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중보기도의 유익중 하나는 하나님이 중보기도를 통해서 개인과 교회를 인도하십니다.

3] 하나님의 보호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중보기도를 드리기 때문에 우리를 보호해 주시는 것인가는 영적인 세계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의 영안을 열어주셔서 엘리사 시대에 게하시에게 하신 것처럼 어떤 영적인 세계에서 일어난 일을 제 눈에 보게 하셨다면 제가 더 확증적으로 말씀드리겠지만 저는 그렇게 영적인 사람도 못되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주신 적도 없기 때문에 제가 확증적으로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점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지금 새물결 선교회 정기집회가 전국에서 네 곳에서 열리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광주지역에서는 이길수 목사님이 섬기는 예향교회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임에 참석한 어떤 분이 이런 말씀을 하더랍니다. “교회에서 이런 정기적인 집회를 하면서 세워진 교회가 없다. 어떻게 그 일을 감당하려고 하느냐?” 그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화요모임만 하더라도 외부에서 오신 분들은 와서 은혜를 받고 갈지 모르지만 그 분들이 왔다 가면 모든 영적인 쓰레기는 다 놓고 가는 것입니다. 영적인 쓰레기, 육신적인 쓰레기들을. 본인들은 왔다가 갈지 모르지만 우리들은 거기 남아서 목회를 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사실 제가 스티그마 이야기 할 때 가끔 이야기하지요. 초기 분당에 있을 때, 3층에 있을 때는 우리가 찬양을 시작하면 창문이 방음이 된 것이 아니라서 아파트 단지 전체가 쩡쩡 울렸습니다. 우리가 3층에 있었고 중간에 복도가 있었는데 복도도 경량 칸막이로 막아져서 방음이 안 되고 소리가 그대로 통과하는 정도였습니다. 옆에는 음악학원, 세예학원이 있었습니다. 찬양을 드리면 마당까지 쩡쩡 들릴 정도니까 옆에도 다 들립니다. 기도사역, 설교하는 것도 다 들렸습니다. 그 당시에는 사람들이 상처가 많아서 그런지 그런 일들이 특별히 많았습니다. 기도시간이 되면 우는 사람, 소리를 지르는 사람, 어떤 사람은 소리 지르며 떼굴떼굴 구르는 사람, 어떤 사람은 웃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리 권종욱 전도사님이 저기 계신데 그분이 간이 안 좋아서 간 수치가 너무 높아서 힘드실 때인데 그분이 아는 친구 소개로 교회에 처음 왔습니다. 제가 “성령님 오시옵소서”했더니 ‘아아악’ 소리를 지르기에 “또 그런 사람 나타났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그분은 전혀 그런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 다음날이 병원에 검진을 받으러 가는 날이었는데 간염은 그대로 있는데 이항원이 독소인데 이항원이 다 죽어버렸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신음소리를 내는 사람, 어떤 사람은 웃는 사람, 떼굴떼굴 구르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중 어떤 사람은 분명히 다른 사람의 흉내를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별 사람들이 다 있거든요. 그런데 제가 그것을 구별할 능력이 없습니다. 가라지 뽑으려다 곡식을 뽑을까 두려우니 놔두라고 성경에서 하신 말씀처럼 내게 그런 권한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은 하나님이 만지셔서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와서 은혜 받고 가면 됩니다. 자기 교회도 아니고 자기가 여기 왔는지 아는 사람도 없고, 그냥 은혜 받고 가면 됩니다. 치유 받아 마음이 시원하면 좋고, 육신적으로 치유 받으면 좋고, 영적으로 회복되면 다 좋은데, 문제는 제가 앞에서 인도하다 보면 무슨 생각이 나냐 하면 이런 생각이 납니다. “나는 내일도 남아서 목회를 해야 하는데 이 소리를 듣고 건너편의 음악학원 원장은 이 교회를 무어라고 생각할까? 서예학원 원장님은 이 소리를 들으면 지금 뭐라고 생각할까? 단지 내에서는 뭐라고 할까?” 여러분 은혜 받으러 온 사람은 모르지만 우리가 교회 성장을 위하여 했더라면 벌써 그만 두었을 것입니다. 저희는 절대 교회성장을 위해 하지 않았고 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길에 서서 주님의 길을 가는데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섬기겠다는 자세로 한 것입니다. 초기에 성도가 없을 때 외부에서 도와주는 분도 없이 몇 분 안 되는 성도들이 좁은 부엌에서 오시는 분들 점심해 먹이느라고 땀을 줄줄 흘리며 고생했습니다. 온 분들이야 은혜 받고 실컷 먹고 쓰레기 다 던져놓고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다 정리해야 합니다. 교회 성장을 위해서가 전혀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5년 이상 지나도록 화요모임 때문에 교회에 더해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이런 모임이 있으면 모든 성도들은 모든 목회자에게 다 노출됩니다. 오늘날 교회의 목회자들이 개별적으로 친해가지고 개별적으로 잘해주고 때로는 기도해주고 상담도 해주고 이런 부분도 너무나 많은데 모든 성도들이 모든 목회자에게 다 노출됩니다. 사실 그런 부분들이 있기 때문에 아까 정기집회하면서 교회가 세워지는 것이 힘들다는 것이 그런 내용들입니다. 때로는 할 때 장소는 빌려줄지 모르지만 자기가 속해 있는 교회성도들은 적극적으로 안하는 그런 경향도 많습니다. 그러한 상황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새로운 것을 들으셨죠. 실제 여기 담임목사가 아니라서 이런 생각은 못해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전혀 아무 문제도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제가 기억하기로 어떤 근본적인 이야기도 없었고 진짜 하나님의 보호와 은혜 가운데 오늘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화요모임 하나만 보더라도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이 절대 작은 일이 아닙니다. 진짜 하나님의 놀라운 보호가 함께 하셨습니다. 그건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것은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중보기도와 관련되는 것인가 하는 것은  아까도 말씀드린 대로 영적인 세계를 우리가 보아서 말씀드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그러나 제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하나님의 보호가 함께 하는데 아주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중보기도였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특별히 개인적으로 제가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 드릴 수 있는 부분은 이번에 우리가 회복과 부흥에 대해서 언급했고 회복과 부흥을 위한 중보기도를 언급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교회가 회복되어지고 교회가 십자가의 복음위에 신앙의 본질 가운데에 세워져 나가려고 하면 엄청난 영적 공격이 있습니다. 사단이 절대로 그것을 안 기뻐합니다. 한 번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의 한 교회가 철저하게 십자가의 복음에 기초해서 신앙의 본질과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서 십자가의 복음과 성령의 사역이 조화를 이루어서 각 분야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예배가 회복되어지고 기도가 회복되어지고 양육과 리더십이 회복되어지고 사랑의 교제와 전도와 섬김이 회복되어지는 이러한 교회가 세워진다면 한 교회만 그렇게 세워져도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루실 일들은 너무나 놀라운 것이기 때문에 사탄에게 치명타를 날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신앙생활해도 명목적인 신앙생활하면 사단이 별로 안 건든다고 합니다. 괜히 건들었다 깨어나서 주님 앞에 달려오면 더 힘들게 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진짜 주님 뜻대로 살려고 하면 방해가 더 많습니다. 한 개인도 그러한데 하나의 교회가 그렇게 세워지는 것은 사단에게 완전히 치명타를 날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개인이 은혜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교회가 세워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관심은 교회에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개인이 와서 은혜 받고 돌아가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와서 은혜 받고 돌아가는 것도 쉽지 않지만 실제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지게 섬기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입니다. 거기에 치러져야할 대가도 완전히 다르고, 거기에 쏟아 져야할 에너지도 완전히 다릅니다. 거기 있는 영적인 대적도 완전히 다릅니다. 영적인 방해와 공격이 주로 무엇을 통해서 오느냐 하면 가치관을 통해서 있습니다.

제가 여기서 설교하면서 지금까지 영적전쟁에 대해서 한 번도 시리즈로 설교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영적전쟁에 대해서 한두 번 설교는 해도 시리즈로 설교하지 않았습니다. 지역컨퍼런스나 전국 컨퍼런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전쟁에 대하여 그 동안 많이 연구하거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없었기 때문에 제가 많이 안하는 것입니다. 또 영적인 문제를 함부로 생각을 해서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한 번은 오래전에 미국 어느 곳에 세미나를 갔습니다. 제가 초기에는 한두 번씩 미국에 세미나를 다니고 했습니다. 저는 가도 한 두 군데 밖에 안 갔는데 그때는 가서 다른 단체의 집회에 참석을 했습니다. 제가 가고 싶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그분들이 쭉 돌아서 제가 가고자 하는 곳에 간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일찍 가서 통역을  좀 해주면 자기들이 그 경비를 대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번은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는지 보고 싶었기 때문에 따라 갔습니다. 그래서 동시통역으로 도와주면서 몇 군데 참석을 하게 되었습니다. 거기 갔더니 집회기간에 간 것이 아니라 주일 낮에 갔는데도 한국에서 목회자가 왔다고 해서 담임목사님이 앞에서 설교를 하고 있는데 기도사역자들이 다 나오더니 우리를 둘 씩 둘 씩 짝지어서 방에 들여다 놓고 두 명씩 붙어가지고 기도해주고 녹음해 주었습니다. 저는 그 팀의 인도자 즉 리더와 같은 조가 되어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 분에게 기도해주면서 하나님이 이 분을 이 나라를 위해서 귀하게 사용하신다고 말씀 하시기에 “나에게도 저런 말씀을 주시면 좋겠다. 하나님이 귀하게 사용하시고 사역을 넓혀주시고 앞에 세워주셔서 영향력 있는 자리에 오르게 하신다고 말씀해주시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기도 사역을 받으면서 느끼겠지만 하나님은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말씀하지 않고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녹음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닌 다른 말이 오면 우리는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이 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녹음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말씀하시지 원하는 것을 말씀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기도해준 분은 부부인데 제 차례가 되었습니다. 저는 말씀드린 대로 사역을 넓혀주시고 교회를 키워주시고 이제 본격적으로 하나님께서 일하시겠다는 말이 나오기를 기대하고 있는데 그런 말은 한 마디도 없고 처음부터 끝까지 영적전쟁만 이야기 했습니다.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영적전쟁에 대하여 별로 연구도 해보지 않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영적전쟁에 대한 책을 한 권 번역을 했지만 그 책을 한 권 번역한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 외에는 책을 조금 보았지만 다른 것에 비하면 많이 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영적전쟁을 이야기하는데 사탄이 온 지옥을 동원해서 저를 죽이려고 했다는 둥, 사람들이 칼을 가지고 제 가슴을 난도질하는 것이 보인다는 둥, 그런데 그 말을 할 때 한편으로는 이해가 갔습니다. “그래 사람들이 말을 가지고 나를 많이 상처를 주었지.” 사탄이 온 지옥을 동원해서 저를 죽이려고 했다고 하고 그 다음에 또 하나님이 온 하늘을 동원해서 나를 보호하셨다고 하시니까 감격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것이 이해가 안 되었지만 지금 보면 그 말이 정확하게 맞습니다. 포도나무 교회가 세워진지 2년이 되었을 때 교회가 없어질 뻔 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교회가 없어졌다면 그 뒤로 일어난 이 모든 일들이 없어졌겠지요. 저는 영적전쟁에 대하여 생각해보거나 교회에서 설교한 적도 별로 없기 때문에 그 말이 너무나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제가 나중에 알게 된 것은 진짜 큰 영적전쟁은 성경에 의하면 복음의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제일 큰 영적전쟁이 복음의 전쟁입니다. 이삭과 이스마엘의 싸움입니다. 창세 이후 지금까지 역대로 가장 큰 영적전쟁이 이삭과 이스마엘의 싸움입니다. 그 말이 정확하게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복음이 증거될 때 갈라디아서 4장에 나오는 것처럼 집중적으로 이스마엘, 거짓신앙체계가 공격합니다. 그러면 누구를 통하여 공격하는가하면 그러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성도들을 통해서 공격합니다. 그들의 가치관을 가지고 판단하고 후욕하고 대적합니다.

이 영적전쟁이 너무 너무 치열합니다. 그런데 언제 특별히 치열한가 하면 초기에 제일 치열합니다. 제가 경험해보고 주위에 선교회에 연합한 교회들을 보아도 그것은 명백합니다. 왜 그때 치열한가 하면 그때 하나님의 가치관에 서있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길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단이 조금만 공격하면 우르르 무너지는 것입니다. 아무도 그것을 막아설 자가 없습니다. 그때 집중적으로 공격합니다.

그런데 제가 왜 아까 이 부분을 했는가 하면 그렇게 집중적으로 공격할 때에도 제가 이길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저를 인도하신 이 길에 한 나라를 구원하고도 남을 하나님의 소중한 은혜가 있음을 보았습니다. 값진 진주를 보았습니다. 우리의 인생 전체를 투자해도 조금도 손색이 없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성격타입이 의미를 중요시 여기는 형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물량적인 것이 많아도 가치나 있어야할 이유가 없으면 그것이 의미가 없다고 보는 성격입니다. 그 당시 포도나무 교회를 세운 때가 미국에서 온지 10년 가까이 된 때인데 교회라고 해봐야 사람들 보기에 교회의 모습도 갖추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겉으로 내세울 것은 아무것도 없고 그런 엄청난 공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인도하신 그 길에 저나 제 아내나 우리의 모든 것을 드려도 조금도 손색이 없는 소중한 가치를 보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치가 무엇을 통해 보인 줄 아십니까? 중보기도를 통해 보여지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 조금 있다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하나만 보아도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보호에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 가치를 보면 됩니다. 목회자들과 리더가 신앙의 본질 가운데, 그 다음에 오직은혜, 오직 믿음, 오직 십자가, 오직 성령으로 대변되어지는 그 십자가의 복음위에서 예수님의 보화, 진주를 보고 우리의 모든 것으로 사는, 다시 말하면 거기에 우리 인생을 다 걸어도 조금도 손색이 없는 가치를 본다면, 그러기 때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을 보고,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그 하나님의 소중함을 보기 때문에 그 주님께 자기 자신 전체를 드려 따라가면 교회는 반드시 세워집니다. 시간이 걸릴지 모르지만, 어떠한 반발이 있을지 몰라도 반드시 세워집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교회는 세워집니다. 그래서 목회자에게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것이 보여야 합니다. 보이면 자신을 걸게 됩니다. 부흥이 올 때 항상 그렇게 왔습니다. 그들은 보이기 때문에 자기의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전적인 헌신이 요구되는데 보여야 걸 수 있습니다.

제가 지난번에도 이야기 했었는데 제가 미국에서 돌아와서 여기 저기 강의도 나가고 했었습니다. 그때 강의 나갈 때 그 반에 있던 학생들, 지금 목사님인 분들이 방문했습니다. 세 명이 내 사무실에 앉아 하는 말이 그 당시 강의 온 분들 중에 나하고 어떤 목사님 두 분만 잘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가 무슨 뜻인가 하면 그때는 봉고타고 다니고 얼굴도 빠짝 마르고 초라한 양복을 입고 다니고 상가에서 성도 몇 명 안 되더니 요즘은 교회가 커가지고 큰 건물도 짓고 주차장도 넓고 집회하는데 사람도 많이 오고 성공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너무나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당시에도 그것이 보였습니다. 교회가 크게 될 것이 보였다는 것이 아니라 그 씨앗 안에 이런 열매가 맺힐 것이 보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농부면 옥수수를 해가지고 제일 좋은 것을 해서 걸어놓으면 하나의 옥수수에 불과하고 조그만 씨앗이지만 농부 눈에는 이 옥수수 씨앗 안에 열릴 열매가 보입니다. 심었더니 아무것도 없어졌어도 농부의 눈에는 보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때는 아무 것도 없는 것 같더니 이만한 옥수수가 많이 생겼네.”라고 말합니다. 그런걸 보면 농부는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자기는 그때 이미 그 씨앗 속에서 그 열매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에게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이것은 시간이 흘러야 할지 모르고, 과정이 필요할지 모르지만 이렇게 되는 것은 당연히 되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리더에게 있어 중요한 비전입니다. 다시 말하면 저에게는 그것이 보였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분들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분들은 왜 그렇게 느꼈는가 하면 그것이 안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은 겉으로 나타나는 열매만 보기 때문입니다. 제가 왜 이 부분을 나누었는가 하면 여러분이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가려면 그것이 보여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만이 여러분에게 보이실 수 있습니다. 그것이 보이면 됩니다. 왜냐하면 씨 뿌리는 비유만 해도 좋은 밭이란 바로 그 가치를 보고 자기의 모든 것으로 보화를 산 자들입니다. 그것이 좋은 밭입니다. 그것이 보이면 걸게 되어있고 그 열매는 나오게 되어있습니다.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하지 않아도 됩니다. 여러분은 알아요. 그런데 이것이 왜 중보기도의 유익과도 연결되는가 하면 이것이 여러분에게 보이는 가장 주된 통로가 중보기도입니다.  

4] 중보기도의 유익은 참여하는 자에게 우리가 배운 것이 실제가 됩니다.  
포도나무 교회 지체들이 교회 오면 신앙의 본질적인 부분들, 십자가의 복음에 대한 부분들, 거짓신앙체계가 어떻게 버려져야 하는지에 대해서 많이 듣습니다. 처음 들을 때에는 너무나 신선하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조금 지나면 하던 이야기를 또 하고 또 하고 하니까 점점 뒤로 갑니다. 그러다가 졸기도 하고 하품하기도 하고 교회를 떠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듣는 것만 가지고는 이론적으로 이해될지 몰라도 실제가 절대로 되지 않습니다. 이론적인 면에 머물기 때문에 처음에는 새로운 정보를 들으니까 새롭다가 이제 그것이 반복되어지면서 하나의 습관처럼 진부해져서 아까 말했던 그런 현상이 나타납니다. 이것은 포도나무 교회만이 아니라 화요모임이나 선교회 오신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중에는 어떻게 되는가 하면 자주 들어서 익숙하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잘 알기 때문에 이제는 그것을 자기가 실제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론이 실제를 대체하는 율법주의에 빠집니다. 삶의 변화, 실제 하나님과의 관계는 안 되면서 이론적인 지식이 있기 때문에 안다고 생각하는,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바리새인의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배운 것들이 실제가 되어야 하는데 실제가 되려면 당연히 순종해야합니다. 즉 실천하고 따라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만 해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가 많이 다릅니다. 오늘날 목회자들만 해도 설교의 초점이 성도들에게 감동을 주는데 있습니다. 은혜 받았다는 말이 감동받았다는 말입니다. 새로운 감동을 주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전하신 설교를 읽어보십시오. 특별히 감동되는 것이 있습니까? 별로 없습니다. 설교는 감동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길을 제시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길을 제시함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길을 따라 행함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 설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앙이 타락해서 하나님과 실제적인 관계보다 이론적인 새로운 지식을 쌓는데 초점이 맞추어지고 그 새로운 지식으로 감동을 주는데 초점이 맞추어지니까 설교의 초점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들으러 오는 사람도 초점이 다르고 전하는 사람도 초점이 다릅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길을 제시하여 거기에 서게 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이번에 배운 것만 하더라도 그대로 실천하기 위하여 배운 것입니다. 배우더라도 그대로 실천하여 주님을 알고자 하는 그러한 자세가 있어야 실천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 앞에 떠는 자세, 즉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 뜻을 깨달아 그대로 순종함으로 주님과 동행하고자 하는 자세가 필수입니다. 그런데 그 반대자세가 바리새인들처럼 가르치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자세, 이론에만 집착하는 자세입니다. 그 바리새인의 자세가 오늘날 우리 가운데 너무나 팽배한 바리새인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실천해야 하는데 그 실천의 가장 첫 단계가 중보기도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성도들이 다윗의 장막을 나와서 실질적으로 배운 대로 주님을 알기를 구하고 실질적으로 주님의 길을 구하고 주님의 목적을 구하고 하나님 앞에 비추어진 자신의 모습을 알기를 구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길을 따라 자기 삶을 조정하여 순종하기를 구하고 또 하나님의 의중에 있는 것들을 가지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구하고 이렇게 나아가면서 그 배운 것들이 실제적으로 우리의 삶에 경험되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에서도 보면 그렇게 다윗의 장막을 통해서 하나님을 찾는 자리로 나가야 변화의 조짐이 있지 거기 나가지 않으면 머리만 커집니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다윗의 장막을 통해서 주님을 간절히 찾고 구하고 주님을 더 알기 위해서 어떤 때는 몸부림치는 분들을 보면 불과 몇 개월 되지 않아서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교제가 열려져 가는 것을 많이 봅니다. 그래서 중보기도가 참 중요한 것이 우리 배운 것들이 우리 삶에 실제화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열매들을 많이 봅니다.

중보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 부분을 말하면 ‘큰 바위 얼굴’이 생각납니다. 우리 어릴 때 교과서에 나왔습니다. 어느 소년이 큰 바위 얼굴을 보고 저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자기가 그런 사람이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제가 느낀 것은 아까 말씀드린 대로 우리나라에 부흥이 빗겨가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할 때 솔직히 말해서 “저를 통해서 부흥을 보내주세요.”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생각을 한다는 자체가 교만입니다. 그렇게 나간다는 자체가 자기를 써달라고 나가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수단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구하여 나간다는 것은 하나님 얼굴을 구하여 나가는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 그분만이 유일한 목적되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의 의제를 가지고,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쓰시겠지.”라는 생각은 벌써 하나님이 수단된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바꾸실 때 열심히 나름대로 교회를 위해 섬기고 봉사했을지는 모르지만 내가 전한다고 하는 하나님이 인격체이신데 그 분을 알고 사랑하는 일은 완전히 소홀히 한 것을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했음을 깨닫고 회개하고 그때부터 하나님 그분만 알기를 집중적으로 구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구하여 나가던 어느 날, 제가 시내에 나가면서 라디오를 듣는 데 “내가 이렇게 하나님만을 구하면 그래도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이상적으로 세워주시겠지?”라고 생각하고 있는 제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아직까지도 하나님을 구한다는 것이 내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된 제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그때 제가 진짜 하나님 앞에서 “오! 하나님 지금까지도 제가 하나님을 구한다는 것이 제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된 것을 봅니다. 하나님 용서해주세요. 진짜 하나님만이 제 목적되시고, 제 소망되시고, 제 만족되시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사실 우리는 아주 미묘하게 이런 생각이 틈탈 수 있는데 하나님 얼굴을 구한다는 것은 진짜 하나님 그분만이 우리의 유일한 목적되는 자리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의 핵심입니다. 그렇게 나가니까 “내가 이렇게 중보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하여 일하시겠지”라고 생각하는 자체가 교만입니다. 벌써 하나님이 수단된 것이고 전혀 목적되지 않은 것을 말합니다. 사실 그렇게 기도하면서도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저를 또는 우리교회를 어떻게 하시겠지”라는 것은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그런 생각을 한다는 자체가 타락한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한다면 “이 나라에 부흥이 빗겨가지 않게 해주세요. 이 나라에 부흥을 보내주세요. 그것이 누구를 통해서 오던 하나님의 부흥이 올 수 있다면 하나님의 부흥을 보내주세요.”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까 정확하게 큰 바위 얼굴처럼 하나님이 저를 사용하시고 계셨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이 저를 사용하실 것을 예상하여 제가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라면 절대로 그 자리에 못설 것입니다.

제가 섬기면서도 하나님께서 때로는 감동을 통해 주신 정확한 해답은 “얻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를 잃는 자는 얻으리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너무나 정답입니다. 우리가 주님 얼굴을 구하여 나온다고 하면서도 아까도 말한 대로 여전히 미묘한 형태로 포장되어 “이렇게 하면 교회가 성장하겠지, 교회가 이상적인 형태로 세워지겠지”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여전히 다른 목적을 위해 구하면 그것은 ‘얻고자 하는 자’입니다. 그러면 실질적인 주님과의 친밀함은 안 열립니다. 하나님이 목적된 삶이 안됩니다. 왜냐하면 자기 의제가 내려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렇게 되면 중보기도도 다 수단에 불과합니다. 교회가 영적으로 보호되고 잘 세워지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프로그램이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제까지 설교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되는 것 입니다. 똑같은 모양이 될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이번 주간에 나눈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 됩니다. 제가 여기서 전혀 그런 것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아니고 “나를 위하여 자기를 잃는 자는 얻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진짜 그렇게 하나님만이 우리의 목적되고 목표되고 그분이면 만족하는 그래서 그분을 구할 뿐 아니라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그분의 의중에 있는 것을 가지고 그것이 나를 통하여 이루어지지 않아도 하나님의 그 뜻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으로 족하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뜻을 구하여 그렇게 밤낮으로 기도하면 바로 뭐가 되는가 하면 큰 바위 얼굴처럼 하나님이 그 실제를 우리에게 알리기 시작하십니다. “얻고자 하는 자는 잃겠고 나를 위하여 자기를 잃는 자는 얻으리라.”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목적되는 가운데 주님 목적을 구하다 보니까 기도하다 보면 어떤 때는 하나님의 의중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내가 텔레비전 두 시간만 보면 싹 사라져 버립니다. 누구하고 얘기하다보면 싹없어져 버립니다. 어떤 때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기도할 때는 하나님의 의중이 보이는데,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지는데 하나님, 보통 때도 그렇게 해주세요.” 이렇게 기도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어떤 때는 그것이 좀 더 지속되기도 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아까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의 의중과 길과 하나님 안에 있는 그 가치와 그 보화가 보이는 것이지요. 그것이 보이기 때문에 그러한 엄청난 대적과 핍박과 열악한 환경 가운데서도 보화가 보이니까 보화를 붙잡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보기도가 아까 말씀드린 대로 보호와도 관련해서 필수적이라는 것이 특별히 리더들에게 더욱 그러합니다. 이처럼 중보기도의 한 가지 유익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배운 것들이 실제가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여전히 제가 말씀드린 대로 “얻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를 잃는 자는 얻으리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적용되는 것을 전제하고 말씀드립니다.

5]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시므온의 기도를 응답하시고, 안나의 기도를 응답하셔서 때가 되었을 때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저도 신학교 다닐 때만 해도 이런 부분을 잘 몰랐습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시므온이 기도했다고 하나님의 응답이 왔는가? 안나가 기도했다고 왔느냐?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때가 되어 왔다.” 그런데 그분들은 한 가지는 못 본 것입니다. 무엇을 못 보았는가? 이번 주간에도 우리가 명백하게 본 것처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를 말씀하시고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가지고 계셔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 필수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나님의 때가 되었을 때 중보 기도자를 세우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움직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바를 이루시는 것, 사실 이것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때가 되었을 때 시므온과 안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소수의 무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예수님을 보내셨을 뿐 아니라, 또 다니엘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70년이 되었을 때 회복시키시고 또 엘리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때가 되었을 때 비를 내리십니다.

성경에 보면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무엇을 구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 연약함중 하나가 무엇을 구할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님은 하나님의 깊은 곳까지 아시니까 성령을 따라 구하라고 하십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구하는 모든 기도를 들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중보기도야 말로 어느 기도보다 성령의 인도가 더 강한 기도입니다. 사실 중보기도자를 세우시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때가 된 것을 의미합니다.

에반 로버츠를 보십시오. 1904-5년 웨일즈에 큰 부흥이 임해서 그 여파로 평양까지 오게 되었는데 그 부흥을 일으키시기 전에 에반 로버츠라는 탄광에서 일하는, 별로 많이 배우지도 못한 한 청년을 13살 때부터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기도하게 하실 때부터 하나님은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때가 되면 중보기도자를 세우십니다. 중보기도자를 세우신다는 자체가 하나님의 때가 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모를 때 하나님은 에반 로버츠에게 웨일즈를 위해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기록에 보면 어떤 때는 밤중에  잠을 못자고 웨일즈에 하나님의 부흥이 임하도록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가 26살이 되었을 때 13년 후에 하나님께서 별로 배우지도 못한 그를 통하여 역사하셔서 그 엄청난 하나님의 부흥을 웨일즈 뿐 아니라 여러 나라에 그리고 우리나라에까지 오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중보기도의 유익은 당연히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부흥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중보기도의 유익을 살펴보았습니다. 제가 이것을 살펴본 것은 여러분이 기도하도록 독려하기 위함이었습니다.

2. 중보기도와 하나님의 질투

이 부분은 말씀드린 대로 제가 예상치 않았던 부분입니다. 사실 중보기도의 자세와 관련해서 아니 우리 신앙 전체와 관련해서 이 부분은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세지말인 이때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장 부어주시기 원하시는 은혜 중 하나가 이 부분입니다. 제가 중요성을 알았지만 일곱 시간 안에 넣을 상황이 안 되었고 제 자신의 모습을 볼 때나 우리들의 모습을 볼 때 우리가 너무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에 자격 없는 모습으로 인해 제가 사실 이 부분까지는 생각이 못 미쳤습니다. 이번에 모이면서 우리끼리라도 주님을 찾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왔고 그래서 제가 이런 부분은 엄두도 못 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갑자기 바꾸셨습니다. 사실 너무나 중요한 부분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붓기 원하시는 가장 큰 은혜 중 하나이고 소중한 부분입니다. 하나님이 이번 기간 안에 참 귀한 일을 많이 하신 것 같습니다. 조용하면서도 하나님이 한 분 한분을 만나주시고 참 귀한 일들을 많이 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이 부분을 말씀하신 것 같아서 제가 오후에 이 부분을 추가하게 되었고 이 부분을 나누고 하나님께서 그런 은혜를 부어주시도록 기도하고자 합니다. 이 부분은 제가 쓴 십자가의 복음이라는 책의 11단원 2과에 있는데 사실 이 부분만 가지고 해도 한 session에 살펴볼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부분인데 제가 남은 시간 요약해서 핵심적인 부분들만 같이 살펴보기 원합니다. 중보기도와 하나님의 질투라는 제목인데요. 시간적인 제약 때문에 중보기도의 자세에 대해서는 못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중보기도와 관련해서 우리에게 있어야할 아주 중요한 요소가 하나님의 질투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부르짖을 자를 찾고 계신다고 했는데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질투를 가지고 주 앞에 부르짖을 자들을 찾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질투는 참으로 소중한 하나님의 은혜이고 다가오는 하나님의 부흥을 위하여, 이 시대에 하나님의 교회 회복을 위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가장 소중한 은혜가 하나님의 질투입니다.

1] 하나님은 질투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이름 중 하나가 질투이고 하나님의 성품 중 하나가 질투하시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4장 14절에 보면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라고 하십니다. 여기에 보면 이름이 질투이십니다. 그래서 NIV성경에 보면 질투라는 단어를 영어로 Jealous인데 J를 대문자로 썼습니다. 이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 이레, 여호와 샬롬, 여호와 닛시 등이 있는데 그 이름 중 하나가 질투입니다. 그 다음에 성품은 ‘질투하시는’ 분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이시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은혜의 하나님이시고,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그런데 어느 성품 못지않게 중요한 성품이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십계명 중에서 제일 앞에 오는 일계명과 이계명이 하나님의 질투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질투는 하나님의 성품 중에서도 우선적인 성품입니다.

2] 하나님의 질투가 무엇인가?
우선 하나님의 질투는 인간적인 질투와는 다릅니다. 인간적인 질투에는 시기와 질투가 연결됩니다. 이것은 죄입니다. 사실 어떤 죄 못지않게 심각한 죄입니다. 자기 개인적인 야망에서 나온 것이고 이기적인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3장 14-15절입니다.
“14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15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여기서 다툼은 NIV성경에 보면 이기적인 야망(selfish ambition)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날 연합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시기와 질투 때문인데 그 시기와 질투 뒤에 개인적인 야망, 자기중심적인 사고가 있고 그 배후에 사탄이 있습니다. 결국 아무리 하나님을 섬긴다고 할지 몰라도 실제로는 사탄의 종노릇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아브라함이 너희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하셨습니다. 그만큼 시기와 질투가 큰 죄입니다. 그리고 그 배후에 사탄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질투라면 무슨 뜻인가? 하나님께서 죄의 그림자도 없으십니다. 하나님의 질투는 그런 인간적인 또는 사단적인 시기와 질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질투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질투는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것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그것을 성취하시고 이루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에게 속한 소중한 것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이루시고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가르킵니다. 그래서 우리 말 성경에도 그렇고 영어 성경에도 그렇고 원래 원어에는 질투라고 된 단어를 ‘열심’이라고 번역한 경우가 많습니다. 영어는 zeal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하나님의 질투가 그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이 질투하시는 것들
이런 부분을 살펴보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은 하나님께 소중한 것들을 질투하십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열심으로 그것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이루시고 성취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이 질투하시는 것들을 우리도 하나님의 질투로 질투할 때 거기에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십니다. 그것이 오늘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질투하시는 것을 아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질투하시는 것들이 여럿이 있는데 제가 지금은 대표적인 일곱 가지를 간단히 나열하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① 하나님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해 질투하십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질투를 가지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보존하신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심판도 포함됩니다. 이 질투 속에는 심판도 포함됩니다. 합당치 않은 것들을 살라 버리는 것이 포함됩니다. 그러니까 질투하는 여호와라는 말씀은 항상 심판과 같이 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레위기 10장 1-10절입니다. 거기에 보면 나답과 아비후가 아론의 두 아들이고 제사장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제사장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제사를 드렸는데  ‘다른 불을 드렸다’고 되어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길을 따라 드리지 않고 임의로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성전에서 불이 나와 그들을 즉시 살라 죽였습니다. 아론을 생각하면 지금 졸지에 두 아들을 잃었으니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그런데 그러한 아론에서 성전을 떠나는 것도, 머리를 푸는 것도, 곡을 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하면 아론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에게 하나님께서 화를 내리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직무를 행하라고 하십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나 두려운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말씀하시기를 레위기 10:3절에 보면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중에 내가 거룩하다함을 얻겠고 온 백성 앞에 내가 영광을 얻으리라 하셨느니라.”하셨습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의 거룩함을 향한 하나님의 질투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사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중요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이해하려면 그 당시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임재해 있을 때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출애굽기 4장에서 하나님이 영광으로 임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로 레위기 9장에 보면 아론과 모세가 성전에 들어갔다 나와서 백성들을 축복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여 그들이 감히 서 있지 못할 정도로 임하신 그 상황입니다. 그 상황에서 그들이 이렇게 함부로 행함으로 하나님의 질투로 인해 심판을 받았습니다. 히브리서 12장 26-29절입니다.
“26 그 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가라사대 내가 또 한 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 27 이 또 한 번이라 하심은 진동치 아니하는 것을 영존케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든 것들의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니라 28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여기 보면 하나님이 영광으로 임하실 때 일수록 하나님의 기준이 요구됩니다. 아까 오후에 집회를 마치고 이길수 목사님이 제게 오셔서 제 아내와 어떤 이야기를 나누면서 하나님께서 사역시간에 우리를 완전히 압도하시면서 어떤 부분에서 보이시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라고 하셔서 나눈다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아무 일도 아니고 또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조금 경험해본 바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조금만 세우셔도 여러분에게 향한 공격은 절대 작지 않습니다. 제가 이렇게 겉으로 드러나기 전에, 교회도 조그마하고 사역도 작을 때 그때와 지금하고는 사단의 공격의 수위가 다릅니다. 사람들을 통해 공격하는 것도 있지만 어떤 때는 직접적으로 공격하는 것도 수위가 다릅니다. 어떤 때는 사단의 공격인지 뻔히 아는 생각과 같은 것이 몰려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전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조그마한 틈 같은 것도 지금은 조금만 틈이 있으면 공격이 물밀듯이 들어옵니다. 완전히 차원이 다릅니다. 제가 다른 분들이 그런 이야기를 할 때 대강은 이해를 했었는데 제가 작은 범위에서 경험해 보아도 절대 쉽지 않습니다. 기도가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갈수록 하나님의 기준이 높아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부흥이 임할 때일수록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제 저녁에도 질서의 문제를 조금 언급했는데 우리 생각에서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고 교회에서는 비일비재한 일이고 “그런 일을 교회에서 다룬다면 교회가 다 없어져야지. 그런 문제가 없는 교회가 어디있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이 영광의 통치로 임하기 원한다면 절대 그것이 용납이 안됩니다. 하나님의 부흥을 이야기 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이야기 하면서, 하나님의 성령의 통치를 이야기하면서,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이야기하면서 그것이 용납이 안됩니다. 그것이 보편적이고 너무나 당연한 삶의 한 부분인 것처럼 이야기 하면서 “옳지 않은 것은 이해하지만 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닌데.” 그렇게 말할지 모르지만 그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심각한 부분입니다. 한 예를 제가 들은 것입니다. 그 만큼 하나님은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한 질투가 있는데 두려운 것은 아무도 예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모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이 없다고 난리를 칩니다. 사실 그들의 입장을 이해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입장가지고 되지 않습니다. 성도들이 때로는 저에 대해서도 제가 성도들에 대해서도 그렇게 하기 쉬운데 “내 입장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내 입장이 그런데 당신이 몰라주어서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광야생활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이 한 행동이 당연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절대 당연하지 않았습니다. 민수기 20장 5절만 보아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악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이 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그들이 광야생활 할 때에 날마다 먹고 산 것이 만나뿐이었고 물도 제대로 없었습니다. “아니 우리가 나오자고 했느냐? 거기서는 우리가 노예살이 했을지는 모르지만  포도를 먹고 싶으면 포도를 먹고 무화과를 먹고 싶으면 무화과를 먹고 고기도 먹고 했는데 날마다 이게 뭐냐?” 그들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는 전혀 당연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너무나 많이 넘어지는 것이 자기 입장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관점에서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당연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분들이 넘어지면서도 그것을 모릅니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이 불평하니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지팡이를 들고 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 반석 앞에 모으고 반석에게 물을 내라고 명하라고 하셨습니다. 민수기 20장 10절입니다.
“10 모세와 아론이 총회를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11 그 손을 들어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매 물이 많이 솟아 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여기에 모세가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라고 하는 것을 보면 모세가 지금 은혜가 떨어져 있습니다. 그가 은혜 가운데 있었으면 절대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지금 은혜가 떨어져 있기에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지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지팡이를 들고 내리쳐서 물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내 앞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에 이 총회를 이끌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라고 하십니다. 이 만큼 하나님은 자기 거룩함을 질투하십니다. 모세가 어떤 사람입니까? 그가 얼마나 많이 희생하였는데요? 물론 그가 지옥 갔다는 말은 아닙니다. 어떤 분은 때가 되어서 그렇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물론 가나안땅에 데리고 들어가야 복된 것은 아닙니다. 그 일은 차세대를 통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한 가지는 하나님의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해서 가나안 땅에 같이 들어가는 특권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예외가 안된다면 아무도 예외가 안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는 이렇게 해도 괜찮겠지” 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도 예외가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해서 질투하십니다.

사실 나답과 아비후의 문제가 이런 것 같습니다. 그 때는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러 있는 시대였다고 했는데 한편으로는 그들이 영적인 우월감 가운데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출애굽기 24장 9-11절에 보면 어떤 일이 있었는가 하면 하나님이 시내산에 영광으로 임하실 때 경계선을 그어놓고 이스라엘 백성 아무도 건너오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 일부가 즉 70인의 장로들이 넘어갔습니다. 그 중에 나답과 아비후가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24장 9-11절입니다.
“9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인이 올라가서 10 이스라엘 하나님을 보니 그 발 아래에는 청옥을 편 듯하고 하늘같이 청명하더라 11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더라.”

나답과 아비후의 이름이 모세와 아론 다음으로 곧바로 나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분적으로 하나님을 경험한 것으로 인하여 마음이 높아져 있었습니다. 또 하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내게 올 때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아서 속된 것과 거룩한 것을 분별하여야 할지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보면 그들이 술 취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길과 세상의 길을 구분하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조금 체험했다고 교만해서, 우월감가운데 빠져있고, 안일함 가운데 빠져 있습니다. 세상이 안 다루어져 있었습니다. 세상적인 방탕이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나갔을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용납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부흥을 기다리면서 이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하나님이 강력한 감동을 주셨다고 적어왔습니다. 제가 오늘 저녁에 사역하려고 했는데 여러분이 교회에 가서 각자 하십시오. 뭐라고 했냐하면 “처소교회가 되게 하라. 각자 자기 죄를 서로에게 고백하고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죄를 회개하고, 성적 범죄를 회개하고, 혼숙한 것 고하고 사죄하고 자백하라. 교회에 가서도 하라. 우리의 죄, 우리 믿는 사람들의 죄로 인하여 이 나라가 성적 타락에 빠졌다. 특별히 남편이나 아내보다 다른 사람을 마음에 둔 것을 고백하라.”

이런 것들이 우리 가운데 이 시대에 너무나 보편적인 삶의 부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나름대로 하나님의 영적인 것들을 부분적으로 경험했다고 해서 우월감 가운데 빠질 수 있는데 하나님이 영광중에 통치하실 때에는 그것이 절대로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해 질투하시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우리는 십자가를 의지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공로만을 의지하여 회개하고 돌이키고 버려야 합니다. 그것을 인하여 우리의 죄책감 가운데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것은 옳지 않지만 그러나 근본적으로 회개하고 돌이키고 버리고 십자가를 의지하여 서는 것이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렸으니까 여러분들이 각자 알아서 하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해서 질투하십니다.

②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 질투하십니다.
에스겔서39장 25절에 보면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이제 내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열심을 내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열심을 내어’란 말은 질투한다는 말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향하여 질투하십니다. 그러면서 39장 그 이하를 쭉 읽어보시면 제가 시간이 없으므로 그 구절들만 쭉 말하겠습니다. 에스겔서 36장 26-29절 혹은 그 전에 16-18절을 쭉 읽어보시면 하나님이 얼마나 하나님의 이름을 향한 질투를 가지고 계신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이 타락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하나님의 백성들 때문에 세상에서 멸시와 조롱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바로 오늘날처럼 그렇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때마다 하나님의 교회를 회복시키시는데 왜 회복시키십니까? 에스겔서에서 명백하게 말씀하신 것처럼 “너희를 위해서도 아니고 너희 때문도 아니다. 너희로 인하여 더럽혀진 내 거룩한 이름을 내가 아꼈노라. 너희를 인하여 더럽혀진 내 거룩한 이름을 인하여 너희를 회복시킬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회복시켜서 다시 우리를 거룩한 백성으로 세우실 것이고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낼 것이라는 말입니다. 제가 이 구절을 읽고 넘어가야겠습니다. 에스겔서 36장 16-27절입니다.
“16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17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이 그 고토에 거할 때에 그 행위로 그 땅을 더럽혔나니 나 보기에 그 소위가 월경 중에 있는 여인의 부정함과 같았느니라 18 그들이 땅 위에 피를 쏟았으며 그 우상들로 더럽혔으므로 내가 분노를 그들의 위에 쏟아 19 그들을 그 행위대로 심판하여 각국에 흩으며 열방에 헤쳤더니 20 그들의 이른 바 그 열국에서 내 거룩한 이름이 그들로 인하여 더러워졌나니 곧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이르기를 이들은 여호와의 백성이라도 여호와의 땅에서 떠난 자라 하였음이니라 21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이 들어간 그 열국에서 더럽힌 내 거룩한 이름을 내가 아꼈노라 22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열국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 23 열국 가운데서 더럽힘을 받은 이름 곧 너희가 그들 중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지라 내가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로 인하여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열국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24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 25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여기 보시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향한 질투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을 회복시키시되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을 회복시키셔서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다시 나타내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회복시키시되 이것이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제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이 약속하셨지만 그대로 되기 위해서는 기도와 아울러 하나님의 길에 우리가 서게 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은혜를 부으시되 우리가 하나님께 반응하고 주님을 찾는 것이 포함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가 절대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이렇게 세우시기 원하십니다. 사실 우리가 중보기도 할 때도 하나님께 호소하는 가장 큰 호소가 하나님의 이름 때문에 회복시켜 달라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그릇행하여 다 제 길로 갔습니다. 우리의 의는 걸레와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우리는 주의 백성이오니 우리에게 주의 얼굴빛을 비추어 주세요.”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께 중보기도로 나갈 때 가장 호소할 중요한 요소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하나님의 질투입니다. “그 이름을 인하여 혹은 위하여 우리를 돌아보세요. 우리를 회복시켜 주세요.” 사실 우리 때문이라면 누가 하나님 앞에 제대로 서기나 하겠습니까? 아무도 없지요. 누가 회복을 바라겠습니까?  

③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질투하십니다.
여기에는 이사야서 55장 8-11절과 마태복음 5장 18절을 들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18절에는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에 아주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의도와 의미와 목적 그대로의 말씀이 우리의 생명이 되는 자세가 될 때 하나님께서 강력한 뒷받침으로 함께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질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레미야 시대, 에스겔 시대, 이사야 시대의 거짓 선지자를 보십시오. 우리가 이미 살펴본 대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의미와 의도와 목적 그대로의 말씀이 자기의 생명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목적을 위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자기 임의대로 좋은 말만 갖다 전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에 대해 거짓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이 말씀하신 의미와 의도와 목적 그대로의 말씀이 생명이 되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그러하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는 그런 자세로 주의 말씀 앞에 서는 자들에게 주님 은혜가 함께 하십니다. 그 자세가 없으면 절대로 안 세워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질투를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열심히 그것을 지키시고 이루시고 보호하십니다. 그래서 그렇습니다.

④ 하나님의 교회에 대해 질투하십니다.
스가랴서 8장 1-3절에 보면 예루살렘을 향한 말씀인데 교회는 새 예루살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되 2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그를 위하여 크게 분노함으로 질투하노라 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시온에 돌아왔은즉 예루살렘 가운데 거하리니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 만군의 여호와의 산은 성산이라 일컫게 되리라.”

고린도전서 3장 16-17절도 보십시오.
“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여기서 하나님의 성전을 멸하면 하나님께서 그도 멸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6절에 보면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하셨는데 그 하나님의 성전은 교회를 가리킵니다. 진짜 오늘날 우리 목회자들에게 하나님의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질투를 아는 것이 너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질투를 알았다면 교회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너무 달라질 것입니다. 바울은 그것이 있었습니다. 진짜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⑤ 하나님께 드려진 예배에 대해 질투하십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거짓된 예배를 그렇게 강력하게 대적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드려진 예배에 대해 질투를 가지고 계십니다. 여러분, 이사야 1장을 보십시오. 그렇게 안식일, 모든 대회, 월삭, 절기를 다 지키고, 그 많은 살찐 짐승과 그 많은 기도와 금식이 있음에도 하나님께서 얼마나 강력하게 말씀하시는지 보십시오. 소돔의 백성이고 고모라의 백성이라고 하시고, 패역한 자식들이라고 하시고 “누가 이것을 요구하였느냐? 내가 이것을 증오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강력하게 말씀하십니까? 하나님께 드려진 예배에 대해 하나님께서 질투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⑥ 예수님에 대해 질투를 가지고 계십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자기 영광을 구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사셨습니다. 그러면서 자기 영광을 구하는 분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도 예수님의 영광을 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높이 들리시면 많은 사람을 자기에게로 이끄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찬양 중에 예수님만 마음껏 높여 보십시오. 주님이 거기에 놀랍게 함께 하십니다.

최근에 하나님께서 포도나무 교회를 강력하게 책망하신 것이 하나님 자랑보다 목사를 자랑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사실 많이 이야기 했습니다. 그래도 잘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인본주의가 너무나 뿌리박혀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러분이 저를 아시냐?”고 그랬습니다. 모르지 않습니까? 포도나무 교회 성도들 가운데 저를 아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저의 겉모습을 아는 것이지요. 저를 아는 사람 별로 없습니다. 하나님이 일을 이루시고, 설교, 사역 시간에 하시는 것은 제가 한 것이 아닙니다. 말씀드린 대로 기름부음이 하시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영광을 받으실 분이 있다면 당연히 하나님뿐입니다. 그분의 기름부음이 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겸손한 체 하려고 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제가 취할 것이 없습니다. 제가 취할 것은 얼마나 신실하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섬겼는가 하는 부분만큼 하나님 앞에 상급을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 엘리야가 과부집에 피해 있을 때나 하늘에서 불을 내렸을 때나 상급은 똑같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명령에 겸손하게 순종한 만큼만 상급을 받습니다. 불을 내린 것은 엘리야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과부집에 숨어있는 것이나 불을 내린 것이나 상급은 똑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신실하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섬긴 만큼만 상급을 받을 텐데 섬길 때 사랑으로 하지 않으면 유익이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제 자신을 아는데 저는 사실 암담합니다. 저를 알지도 못하면서 겉모습만 보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보지만 그것은 제가 아니라 기름부음인데 저를 자랑한다는 것은 너무나 무지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교회에 해를 입히는 것만이 아니라 저에게도 해를 입히는 것입니다. 자랑하려면 저를 통하여 하나님이 하신 것은 자랑해야죠. 그것은 하나님이 하신 것이니까요. 하나님을 자랑해야지요. 우리는 예수님을 자랑해야 합니다. 우리를 통해 하신 것도 예수님이, 성령님이 하신 것입니다. 그분이 하심을 자랑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베드로도 보십시오. 하나님이 자기를 통해 하신 것을 자랑했습니다. 자기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것을 자랑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도 자기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하신 것을 자랑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것이니까 자랑해야지요. 예수님의 이름을 높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예수님의 이름에 대해 질투를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높이시는데 질투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분의 이름을 보호하시는데 질투를 가지고 계십니다. 어떤 분들은 교회에 와서 또 화요모임에 와서도 진짜 하나님만 바라보면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얼마든지 기도해줄 수 있거든요. 그러면 하나님이 참 함께 하세요. 그런데 어떤 분은 꼭 저한테 와서 기도해달라고 합니다. “그래도 강사님인데....” 어리석은 것이지요. 굉장히 부담스럽습니다. 사람 중심적이기에 하나님의 역사를 가로막는 것입니다. 주님만 바라보면 주님이 하실 것입니다.

⑦ 성령님에 대해 질투하십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뒷받침하십니다. 아론은 모세의 형이고 미리암은 어렸을 때 모세의 기저귀를 갈아주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미리암도 예언적인 기름부음이 있었습니다. 선지자라고 나옵니다. 그런데 모세가 구스사람을 취하니까 “너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느냐? 왜 우리 허락도 없이 하느냐?”라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절대로 그냥두지 않습니다. 왜?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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