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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부흥의 단계와 중보기도

시리즈설교/중보기도

by 발의무리 2008. 7. 7.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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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장. 부흥의 단계와 중보기도


이 시간에는 부흥의 단계와 중보기도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원래 중보기도에 대해서만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를 원했었는데, 하나님께서는 부흥의 단계와 함께 살펴보기를 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 시간 하나님께서 제 마음에 감동을 주시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부흥이 매우 가깝게 다가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에게 확신을 주시고, 여러분들이 소망을 품으라고 하시는 의도에서 부흥의 단계와 중보기도를 함께 말씀하게 하시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시간 부흥의 단계를 먼저 말씀드린 다음, 거기에 맞추어 중보기도에 대해서 살펴볼 예정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쓴 "부흥" 책은 하나님의 부흥에 대해서 참 잘 정리하고 있는 책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이 책을 자주 인용하고 있습니다. 참 놀라운 사실은 이 책에 쓰여진 내용들을 보면 우리 가운데 이루어진 일들이 하나도 책의 내용과 다르지 않고 또한 빠짐없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면을 보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우리 가운데에서 해오셨구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부흥"이라는 책은 지금부터 약 50년 전에 쓰여졌음에도 참 잘 쓰여졌습니다. 이 책을 읽다보면 우리 가운데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해 오신 하나님의 역사가 다시 한 번 확인되어집니다. 저는 이 시간 이 책의 12장과 13장을 인용하며 부흥이 오는 단계를 먼저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1. 하나님의 부흥은 예비되는 단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흥은 어떻게 보면 항상 갑자기 오는 것 같지만 반드시 부흥의 길이 예비 되는 단계가 있습니다. 또한 각 단계마다 일어나는 일들이 있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하나님의 부흥이 다가오되, 세 단계의 과정을 거치며 온다고 합니다. 각 단계에는 각 단계를 특징하는 일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는 세 단계의 과정 속에 일어나는 일들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 단계에서 일어나는 일들 가운데 마지막 단계에서 일어나는 일이 중보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참으로 엄청나게 함께 하시고 계십니다. 매번 집회 때마다 계속 놀랍게 함께 하시고 계십니다. 이번 집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참석하신 여러분 한분 한분을 참으로 놀랍게 만지시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한분 한분을 만지시는 모습을 보면서 여러분 앞에 이렇게 말씀을 드린 기억이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밤에도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역사 하시면 어쩔 수없이 집회를 연장해야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내일 하루 연장해보고 그래도 강력하게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다음 주 월요일 저녁에 다시 모이고, 다음 날인 화요일은 화요모임이니까 또 모이고, 그때까지도 하나님께서 계속 강하게 역사하시면 수요일부터 밤마다 모여야 합니다.”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면 “터진다.” 싶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터지면 우리는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합니다. 사실 이번 집회 동안에 되어졌던 일만 지속되어져도 거의 터진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을 보더라도 하나님의 부흥은 분명 예비되고 있고 우리들은 그것을 잘 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1] 첫 번째 단계는 ‘인식’입니다.
하나님의 부흥이 예비되는 첫 단계에서 일어나는 일은 ‘자기의 처지를 인식함’입니다. 즉 ‘자기의 처지를 인식하는 일들이 일어난다.’ 는 것입니다.

부흥의 첫 번째 단계는 우리가 보는 것처럼 “자기의 처지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떠나서는 어떠한 부흥의 소망도 없습니다. 그것은 “상황에 대한 각성”입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자신의 삶에 적용하여 자기들의 처지가 어떠한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 중에서 떠나가시고 또 떠나가셨다는 것을 압니다. 구름이 사라집니다. 불기둥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서 떠나가시겠다고 말씀하셨고 떠나가셨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표징와 상징들이 우리 눈앞에서 사라졌습니다.

이같이 자기의 처지를 인식하는 일이 언급하는 상황은 하나님의 임재가 교회 가운데에서 걷힌 것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떠나시겠다고 말씀하셨고 떠나가셨습니다. 자 그러면서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어떤 부흥에 대한 역사든지, 교회사에 일어난 어떤 위대한 영적 운동에 대해서 기록한 것이든지 다 읽어보라고 촉구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한 번의 예외도 없이 언제나 이러한 일들이 일어날 것임을 즉시 발견할 것입니다.”

“한 번의 예외도 없이” 이 말은 대단히 강력한 표현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그 모든 영적 운동과 각성 운동에 대해서 읽어보면,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언제나 그러한 일이 일어날 것임을 즉시 발견할 것이라고 하는데 도대체 무엇을 발견한다는 말일까요? 그것은 “현실을 깨닫는 일” 즉, “현재의 처지를 인식하는 일”이 먼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 일이 반드시 있어야 그 다음에 부흥이 온다는 얘기입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님은 실례로 마틴 루터의 예를 말하고 있고 또 그 외에도 여러 예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러한 현실인식이 잘 이루어지고 있지 않고 있음을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 당시에도 복음적인 교파에서 마저 이것에 대한 것을 많이 보지 못하고 있다고 제가 감히 말씀드려도 될까요? 우리는 어떤 것이 잘못되어 있는가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상태를 시험하는 방식은 분명히 잘못된 것과 교회를 비교하고 대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상태를 시험하는 시금석은 교회를 신약이 말하는 교회상에 비추어 보는 것입니다. 아니면 개혁이나 부흥이 일어났던 위대한 시기나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이 위대한 표징, 영적인 표징으로 나타났고 하나님의 임재가 교회 가운데 있었던 시기에 교회가 어떠한 모습을 취했던가를 살펴보면서 거기에 현재의 교회 상태를 비추어 시험해 보는 길입니다. 복음적인 교회가 그러한 교회와 자기들의 모습을 비추어 볼 때 어떠한 모습으로 보일지 의아합니다. 영성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차원에서 교회를 평가할 때 어떠한 모습으로 보입니까?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체험, 하나님의 임재와 우리가 이 연구를 통해서 계속 숙고해 나갈 것들을 직접 체험한 그러한 차원에서 교회를 가늠해 보아야 합니다.” 이처럼 부흥이 예비되는 첫 단계에서 일어나는 일은 현실을 인식하는 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자 그러면 성경을 찾아 읽겠습니다. 느헤미야서입니다. 느헤미야서는 중보기도 하고도 관련된 중요한 성경입니다. 느헤미야 1장 1-4절입니다.
“1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이라 아닥사스다 왕 제 이십 년 기슬르월에 내가 수산 궁에 있더니 2 나의 한 형제 중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 사람과 예루살렘 형편을 물은즉 3 저희가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은 자가 그 도에서 큰 환난을 만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훼파되고 성문들은 소화되었다 하는지라 4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본문은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성경말씀입니다. 알다시피 느헤미야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 중의 한사람입니다. 그는 왕의 총애를 받아서 노예의 신분으로 술 맡은 관원장에까지 관직이 이르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루살렘에서 사람이 찾아 왔습니다. 아마 자기 동생이 온 것 같습니다. 느헤미야는 그에게서 예루살렘 소식을 듣습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이 때가 아마도 어쩌면 예루살렘 성전이 중건되어가다가 중단된 상태에 있었던 때일 수도 있다”라고 합니다. 바벨론왕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 오면서 바벨론의 사람들을 예루살렘에 살게 하였습니다. 예루살렘성은 그들로부터 능욕을 당합니다. 성벽은 훼파되어 불에 그을린 상태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성벽은 다 무너져 여우들이 하나님의 성소에 들락날락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얘기를 전해들은 느헤미야는 하나님 앞에 금식하고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수일 동안을 앉아서 울며 하나님께 간구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현실을 인식하는 겁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당시의 모든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패망한 사실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건 분명한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다 아는 사실입니다. 모르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정신나간 사람 외에는 다 알아요.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이 폐허 상태에 있다는 것을 유대인이라면 다 알았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있는 것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도 생각하기를 “우리가 문제야. 우리는 역시 안돼.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서 오늘날 이렇게 된거야. 우리는 역시 안돼” 하면서 불평불만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제가 지금 말하고 있는 "현실을 인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현실을 보는 것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느헤미야는 어떤 시각에서 현실을 보았던 것일까요? 그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현실을 보았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의 형편은 이러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방 백성들에게 능욕을 당하고 있는 모습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서와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의 구름이 떠난 지가 오래된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성 예루살렘이 훼파 되었으며 여우가 하나님의 성을 마음대로 드나들고 있는 모습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하나님의 백성들로 인해 땅에 떨어진 것을 본 것입니다. 자 보십시오. 그는 이러한 현실을 하나님의 안목에서 보았습니다. 이게 현실을 인식하는 겁니다.

현실을 인식하되 표면적으로 현실을 바라본다는 말은 이런 것입니다. 당시의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서로 말들 하기를 오늘 날의 우리나라에서처럼 “한국 사람은 역시 안돼! 안돼!” 이랬을 겁니다. 그 비판하는 자세는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의미로도 쓸모가 없습니다. 현실을 인식한다는 말은 그걸 말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오늘날을 보십시오. 오늘날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우리가 처한 상황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다 압니다. 말들 하기를 “한국 교회는 문제야. 교회 내에만 성도가 있지 교회 밖에는 성도가 없어. 성도 수가 천만 명이라도 지금 되는 게 뭐가 있어? 죄만 가득해. 문제야” 이렇게 비판합니다. 이걸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다 압니다. 그래서 우리는 비방하며 손가락질을 합니다. 쉽게 비판합니다. 이것은 현실에 대한 인식이 아닙니다.

현실을 인식하는 것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현실을 보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교회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걷힌 것을 보는 겁니다. 하나님의 교회가운데에서 분별의 벽이 무너져 버려 어떤 것이 참된 믿음인지, 어디가 하나님의 길인지 혼돈되어 있음을 보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이유는 영광스럽고 거룩한 교회를 세우시기 위함이십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회 가운데에는 분별의 벽이 무너져버렸습니다.  그래서 무엇이 참된 믿음인지, 어떤 길이 참된 하나님의 길인지 분별을 못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길인지, 무엇이 참된 신앙인지, 무엇이 참된 믿음인지, 무엇이 주님을 아는 것인지, 가장 기본적인 것에서부터 성경적인 인식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 주실 때에는 점 없고, 흠 없고, 영광스럽고, 거룩한 교회를 세우시기 위함인데, 오늘날의 교회는 분별력을 상실해 세상에서 오염 될 대로 오염되어 있는 실정입니다.

세상과 하나님의 교회가 전혀 구별이 안되는 가운데, 세상의 목표와 세상의 방법이 교회 안에 그대로 있습니다. 교회가 추구하는 목적도 세상의 그것과 별다르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심지어 사역을 감당하는 방법까지도 세상의 그것과 전혀 구별이 되어지지 않는 상황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의 보호막이 걷혀 있습니다. 로마서 1장 18절부터 32절입니다.
“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25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 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26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27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듯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28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32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여기 말씀에 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아는 것을 소중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여 하나님 자신을 알기를 구하지 아니하고 열망하지 아니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셨다. 라고 합니다. 그 결과, 시기, 질투, 싸움, 후욕, 다툼, 미움 이러한 것들이 사람들 사이에 가득하게 되었다. 라고 합니다. 미움, 다툼, 시기, 질투, 후욕, 판단, 평가, 비판, 간음, 도적질, 사기 이러한 죄악들이 교회 가운데 그대로 있음에도 우리는 그 사실을 보지 못합니다. 물론, 우리는 이런 말을 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정말 문제야”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교회가 타락했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까지도 잘 압니다. 신문에서도 언급하는 바인데 “마지막 구조 조정 대상은 교회”라고들 합니다. 이 말은 세상 사람들이 하는 얘기입니다. 예, 우리도 그런 얘기 다 들어서 압니다. 그 비판 다 압니다. 그러나 저는 이 시간 그걸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느헤미야 당시에도 성문은 파괴된 상태로 있었고,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은 다시 건축되다가 중단되었습니다. 또한 예루살렘성 자체가 무너져서 이방사람들에게 능욕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포로로 잡혀와 있으며, 과거 하나님의 성전에서 제사드릴 때 쓰여진 제사기구들이 바벨론의 신전 제사 드리는데 사용되는 이러한 상황을 다 알았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느헤미야는 일반 사람들의 그것과 달리 하나님의 관점에서 현실을 보았습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시나요? 즉, 자신들이 처한 처지를 하나님의 안목으로 인식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부흥을 이루시기 전에 반드시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이 일이 없으면 절대로 부흥의 소망이 없다”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마틴 루터 시대로 돌아가 봅시다. 그 시대의 신앙이 잘못되었다. 라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여느 사람들과 달랐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 당시의 교회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서 떨어져 있는가를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차이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신앙이 잘못되었다.” 라고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아 교회가 성경에서 멀어졌다.” 라고 깨닫는 것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둘 사이에는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모세 시대를 예로 들면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숭배 때문에 하나님의 임재가 그들 가운데에서 떠난 것을 알았다. 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이 하나님의 교회 가운데,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에서 걷힌 것을 발견했다 그 말입니다. 부흥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부흥은 현실을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비판하는 자세가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깨닫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제 중보기도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지만 제가 쓴 "성령이 역사 하시는 교회"에 보면, 마지막 장에서 중보기도에 대해서 언급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곳에서도 앞부분에 강조하였지만 중보기도는 현실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지 못하면 절대로 진정한 중보기도는 없습니다. 절대로 없습니다. 느헤미야를 보십시오. 예루살렘의 형편을 듣고 나서 그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무릎 꿇고 금식하며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느헤미야 1장 5-7절입니다.
“5 가로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6 이제 종이 주의 종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니 이스라엘 자손의 주 앞에 범죄 함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나의 아비 집이 범죄하여 7 주를 향하여 심히 악을 행하며 주의 종 모세에게 주께서 명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보십시오. 현실을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부흥은 옵니다. 부흥의 첫 단계는 현실을 인식하는 일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성경에 보면 어느 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날 누구라 하느냐?” 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랬더니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내용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예수가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이론적으로 고백하는 게 아닙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같이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 당시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역사를 보며 기적을 경험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사모했으며 주님을 부지런히 쫓아다녔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만이 그 예수님 안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를 본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것이었습니다.

성령께서는 놀라울 정도로 여러분들을 많이 만져주시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역사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많은 부분을 감동하시고 계십니다. 또한 성령께서 많은 분들을 만지고 계십니다. 그런데 제 개인적으로 확신하기는 여러분에게 진정한 부흥이 있으려면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있어야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처한 상황을 표면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아까 사역 시간에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입니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질투, 자기교회, 개교회주의 이러한 것들을 회개하라. 너희 가운데 분파를 회개하라. 너희가 회개하면 내가 너희들에게 능력을 부어 사용하리라”.

오늘날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는 목회가 개인 사업이 되어 버렸습니다. 물론 말들은 그렇게 하질 않습니다. 누가 감히 목회가 개인 사업이 되었노라고 말하겠습니까. 그러나 목회가 개인 사업, 자기 사업이 되어 버린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들 곧 목회자들은 참으로 성도들에게 친절하게 대합니다. 그런데 왜 잘 대하느냐 하는 게 문제입니다. 자기 교회에 그 성도를 잡아두기 위해서 친절하게 잘 대하고, 교회에 묶어두기 위해서 잘 대합니다. 부정할 수 있나요? 이처럼 목회가 개인 사업, 자기 사업이 되어버렸습니다. 자기의 개인재산을 드려 교회건물을 세우는 일이 우리나라에서는 흔합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서구사회 목회자에게서는 드문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일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참으로 헌신적인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자기 사업이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물론 모든 목회자가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저는 지금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어쩌면 우리 얘기를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자기 사역이 맡겨질 때까지는 즉, 전도사나 부교역자, 신학생 때에는 열심을 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사역이 맡겨져야 그때부터 사역을 시작하는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목회를 자기 사업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러는 것은 아닌지요. 이런 일을 생각하면서 참 많이 회개하였습니다. 우리들은 이러한 참담한 현실을 두고 손가락질하기가 쉽습니다. 어떻게 보면 공공연히 다 아는 일들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들마저도 심지어 교회에 와주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다들 어디서부터 잘못이 시작되었는지 찾아야 한다고들 합니다. 무언가 잘못되었노라고 이구동성으로 말들 합니다. 요사인 성도가 먼저인지, 목회자가 먼저인지 모르지만 하여튼 악순환이 교회 안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말씀을 잘 들으십시오. 저는 지금 인식하는 것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표면적으로는 다 압니다. 그래서 이런 설교를 들으면 “맞아, 그렇지”하면서 비판 할 수도 있습니다. “맞아, 그래, 우리나라는 이게 문제야. 우리 한국 사람은 정말 안돼”라며 비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비판하는 자세는 절대로 옳지 않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현실을 보자는 것이지 그렇게 비판하는 자세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함부로 비판하는 자세를 가지고는 절대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쉽게 비판할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안돼”라고 말입니다. 제 얘기는 그 얘기가 아닙니다.  

이를테면, 우리는 그 하나의 사실을 들으면 그 사실을 통해서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가 얼마나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있는가를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얼마나 사유화 되어 있는가를 보고, 그 결과 하나님의 영광이 교회 안에서 얼마나 걷히고 있는가를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가 수 만 갈래로 쪼개져 있음을 보며, 하나가 될 수 없는 현실을 보는 겁니다. 서로 비교하고, 우월의식을 가지는 현실을 보는 겁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전혀 죄가 없다.’ 라고 말 할 수 없습니다.  

2] 두 번째 단계는 ‘회개’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상황 가운데 하나님이 우리나라에 찾아오실 것 같으시나요? 전 세계적으로 놀랍게 쓰임 받는 하나님의 종들도 한국에만 오면 어떠한 역사도 잘 안나타납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역사가 안나타나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유명하다더니 별 볼일 없네.” 라고 말합니다. 사실 문제는 우리에게 있다는 걸 전혀 인식하지 못합니다. 전혀 인식하지 못해요. 자 보십시오. 표면적으로 보는 것과 그 현실을 인식하는 것은 다릅니다. 만약에 현실을 인식하게 되면 그때는 전혀 태도가 달라집니다. 현실을 인식하게 되면 느헤미야처럼 됩니다. 가슴을 찢게 됩니다. 가슴을 찢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말하는 부흥이 예비 되는 두 번째 단계입니다. 부흥이 오는 두 번째 단계는 회개입니다.

하나님의 부흥이 오려면 반드시 예비 단계가 있습니다. 그 예비 과정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냥 어느 날 갑자기 오는 것 같지만 예수님의 길을 세례 요한이 예비했듯이 반드시 하나님의 부흥은 예비 됩니다. 그런데 그 예비 되는 과정에서 단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그 예비 단계들을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회개는 현실을 인식했기 때문에 마음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애통함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걷힌 것을 발견하기 때문에 통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사유화되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애통해 합니다. 내 속에 그러한 죄가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에 그것이 가득한 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애통하며 회개합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이 부분에서 “회개와 후회는 다르다”라고 구별합니다. 참으로 정확한 지적입니다. 아까 우리는 이 나라의 영적인 현실을 바라보며 30분 동안 회개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느헤미야처럼 가슴을 치고 문짝에다 가슴을 쳤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물론 어떤 분 가운데에는 그런 분도 있었을지 모르지만 우리 모두 안타까운 심정으로 회개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진정한 회개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후속조치가 따라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후회에 불과합니다. 실제로 후회로 끝날 분도 많을 겁니다. 그렇게 안되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후회로 끝날 분도 많을 겁니다.

그렇다면, ‘후회’와 ‘회개’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이에 대해 고린도 후서 7장 8-11절을 인용합니다.
“8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9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11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자 보십시오. 회개는 단순히 후회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돌이키는 것을 말합니다. 돌이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후회로 끝나지 않고 돌이키기 위해서는 회개가 인식으로부터 나와야 합니다. 부흥이 예비 되기 위해서는 첫 번째로 ‘인식하는 것’이 먼저 있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인식은 회개로 연결됩니다. 인식이 되어지지 않으면 후회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회개로 연결되지는 않습니다. 매우 중요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저녁에 이 말씀을 전하게 하신 이유를 점점 알 것 같습니다. 전혀 예상을 못했던 일입니다. 그냥 중보기도에 대해서 설교하려고 했었는데 이번 기간 동안에 부어주신 많은 은혜가 여러분에게 인식되어져서 회개로 나타나길 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진실로 회개함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그것은 후회함으로 끝날 것이고 별 열매를 못 맺을 겁니다.

회개가 없다면, 아무리 이 자리에서 기름부음 내지는 어떤 환상을 보았다 할지라도 부흥을 경험하지는 못할 겁니다. 성령의 은사들은 여러분에게 나타날지 몰라도 하나님의 부흥을 경험하는 일은 없을 것이며, 개인적인 부흥을 경험하는 일도 없을 것이며, 그리고 다가오는 하나님의 부흥을 위해 예비 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말한 내용을 좀 더 언급한 다음 이 부분을 자세히 설명 드리겠습니다. "부흥"책 207쪽입니다. “가셔서 다시 부흥에 대한 역사를 읽어보십시오. 처음에 그 사람들이 어떻게 하는가를 주목하십시오. 그런 일이 그들에게 필연적으로 먼저 일어납니다. 그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죄가 얼마나 무섭고 섬찍한 것인지를 알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잠시나마 교회의 상태를 잊고 자신의 고뇌를 망각합니다.” 여기서 “자신의 고뇌”라는 것은 삶의 여러 가지 고통이나 어려움을 망각한다 그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에 대해 생각하느라고 말입니다. 그 죄가 얼마나 가공한 것일까요? 특별히 처음 그러한 사람들 중 어떠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거룩에 대한 그러한 시각을 가지고 죄의 죄 됨을 알아 자신들에 대해서 어떻게 할 줄을 모르는 그런 상태가 오지 않으면 결코 부흥은 없습니다.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너무 날카롭게 느낀 나머지 육체적으로 견딜 수 없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의 죄 됨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보다 더 나아가 이 사람들이 갑자기 자기들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죄를 보시는 방식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기들로부터 떠나셨다는 것을 인식한 것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이 대목에서 하나님이 교회를 떠나셨다는 것을 깨닫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이것이 바로 문제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입니다. 사람들이 진정으로 각성을 하면 하나님의 임재를 잃어버리는 것처럼 심각한 것이 없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제가 하는 말의 강도를 아시겠습니까?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이 대목을 언급한 다음, 계속해서 모세의 경우를 얘기합니다. 우선 성경을 읽겠습니다. 출애굽기 33장 1-17절입니다.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백성과 함께 여기를 떠나서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네 자손에게 주기로 한 그 땅으로 올라 가라 2 내가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어 가나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고 3 너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길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 4 백성이 이 준엄한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한 사람도 자기의 몸을 단장하지 아니하니 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라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한 순간이라도 너희 가운데에 이르면 너희를 진멸하리니 너희는 장신구를 떼어 내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 어떻게 할 것인지 정하겠노라 하셨음이라 6 이스라엘 자손이 호렙 산에서부터 그들의 장신구를 떼어 내니라  7 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 8 모세가 회막으로 나아갈 때에는 백성이 다 일어나 자기 장막 문에 서서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기까지 바라보며 9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 기둥이 내려 회막 문에 서며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 10 모든 백성이 회막 문에 구름 기둥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다 일어나 각기 장막 문에 서서 예배하며 11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눈의 아들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12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내게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 13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1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15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 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16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1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가나안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조상들에게 했던 약속을 “지키겠다.” 하시면서 가나안으로 “올라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맹세를 반드시 지키십니다. 반면 하나님의 약속은 초청입니다. 약속은 절대 보증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에 서게 되면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맹세는 약속과는 달리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맹세한대로 주겠으니 올라가라”고 하시는 겁니다. 심지어 “내가 천사들을 앞세워 보내어 그들을 위해 싸우게 함으로 그 땅을 차지하게 할 것이다.” 라고 하신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 임재는 너희와 함께 안가겠다” 라고 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모세는 “하나님, 하나님의 임재가 같이 안 가시려거든 우리를 여기서 올려 보내지 마소서” 라고 답변합니다. 지금 모세가 서 있는 곳은 사막 가운데인데도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데에도 말입니다. 그렇게 답변할 수 있었던 것은 모세에게는 그 어떠한 것도 하나님의 임재 없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에게 있어 하나님의 임재가 떠나는 것은 그에게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항상 기도하기를 “하나님이여 나에게 주의 길을, 주의 의도를, 주의 마음을, 주의 계획을, 주의 하시는 일을 알려 주옵소서” 라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면서 모세는 “내가 주의 길을 앎으로, 내가 계속해서 주님의 은총 가운데, 주님이 기뻐하시는 가운데, 주님의 신임 가운데 있게 하옵소서.” 라고 간구하였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우리들이 여태까지 강조해온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사람"에 대해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와 같은 모세의 자세를 말하면서 부흥이 왔다하면 사람들이 자기들의 죄를 인식하면서, 하나님의 임재가 하나님의 교회 가운데 걷힌 것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임재가 없으면 죽음보다 못한 것을 보게 된다고 합니다. 나아가 사람들은 모든 것을 하나님 편으로 돌이키고, 모세가 취했던 태도처럼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게 된다는 겁니다.

부흥이 예비되는 요소 중의 하나가 신앙의 본질입니다. 즉,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손만을 구하며, 하나님이 수단이 되어져서 하나님의 도움만을 구하면 하나님께서는 구한대로 주실지는 모르지만 구한 사람의 영혼은 파리하여져서 마침내 죽게 될 것입니다. 영혼이 죽으면 하나님의 임재는 걷히고 하나님의 음성은 끊어지게 됩니다. 이 때, 부흥이 예비되는 단계에서 이처럼 하나님을 다시 구하고 회개로 연결되어 하나님의 얼굴을 다시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틴 로이도 존스 목사님은 이 대목에서 회개와 후회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후회는 그때그때 뉘우치고 가슴을 치고 그러지만 돌아가면 끝날 수도 있어요. 그러나 회개는 모세의 경우처럼 거기서 멈추지 않고 이대로는 견딜 수가 없어 회막을 만들었던 것과 같다는 겁니다. 이 부분은 좀 더 있다가 자세히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모세는 단순히 가슴을 치고 애통하는 정도로는 견딜 수가 없어 회막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를 구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렇게 하나님을 떠난 것을 발견하게 되면 그들은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 자신의 삶을 회개하고 돌이켜 다른 것을 다 제쳐놓고 하나님 앞에서 그 죄를 회개하고 애통하면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부흥이 오는 단계에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번 기회를 통해 여러분이 이 점을 인식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즉,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있음을 알고, 오늘날 교회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가 걷혀 있음을 깨닫고, 교회 가운데 하나님의 신임의 장벽이 무너져 있음을 말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언제부터인가 사유화가 되어버렸습니다. 교회 안에 내 사역, 내 사업의 풍토가 들어 왔으며, 헌신을 하되 내 사업이기 때문에 열심히 일하고 헌신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목회자들은 성도들을 사랑하되 ‘내 사람 만들기’ 위해서 사랑합니다. 또 내 교회에 붙여놓기 위해서 사랑합니다. 성경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성도들을 그리스도께 중매하는 사람이라고 했는데 우리들은 이 점에서 멀리 떠나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또한 이런 이유로 하나님 임재가 우리 가운데 걷혀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여러분, 이 자리에서 가슴을 치면서 “이제는 안 그래야지” 하며 집으로 돌아갈지 모르지만 모르긴 몰라도 며칠 지나고 나면 여전히 똑같은 가운데로 돌아갈 분도 계실 겁니다. 그러면 그것은 후회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말씀드린 부분을 통해 현 상황을 분명히 인식했다면 이제는 여러분이 그 무엇보다도 그것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하나님의 임재가 하나님의 교회 가운데 회복되기를 구할 것입니다. 모세가 그랬던 것처럼 구할 것이며, 또 부흥을 예비하는 하나님의 모든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한 번도 예외 없이 그랬던 것처럼, 여러분들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기뻐하심과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님의 교회 가운데 다시 오기를 위하여 구할 겁니다. 다른 모든 것을 돌이키며 버리며 그것을 구할 겁니다. 그것이 회개와 후회의 차이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라오디게아 교회와도 같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생각합니다. “우린 부자야. 부요하며 부족함이 없어. 목회도 이정도면 됐고, 교회 건물도 지었고, 성도도 이만큼 모이니 좋고, 예산도 이 정도면 됐고, 집도 이만하면 됐고, 차도 샀고, 교회가 어느 정도 이름도 내었고, 이제 집회도 나가고, 부흥회도 나가니 됐어” 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스스로를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눈이 먼 까닭입니다. 너무나 소경된 까닭입니다. 분명 라오디게아 교회임에 틀림없습니다. 이 상태론 소망이 없습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돌아볼 때, 다른 교회와 비교할 게 아니라 성경으로 돌아가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교회는 이러해야 하리라는 그 말씀에 우리를 비교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교회 가운데 머물 때의 교회, 하나님의 부흥이 임했을 때의 교회, 하나님의 임재로 통치하실 때의 교회와 오늘날의 교회를 비교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날의 교회를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 그분을 아는 지식의 차원에서 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보면, 바른 인식을 하게 될 것입니다. 즉, 자기가 바로 라오게디아 교회의 교인이요, 눈멀고, 벌거벗고, 헐벗었음에도 그 사실조차도 깨닫지 못하는 자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바른 안목에서 보기 시작하면 주님을 알기까지는 모든 것을 돌이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는 사역의 확장이 문제가 안될 겁니다. 사람들의 인기가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사람들의 평가가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 모든 것이 있다한들 하나님의 임재가 걷혔는데 이 상태로는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없다면 목회를 그만 두는 게 낫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임재가 없는 신앙생활을 그만 두려고 할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자백하며, 통회하며, 돌이키며, 하나님의 임재가 내가 섬기는 교회와 내 가정 가운데, 내 삶 가운데 회복되기를 구할 겁니다.

보십시오. 이것이 회개와 후회의 차이입니다. 부흥은 항상 이렇게 왔습니다. 이러한 인식이 없었으면 부흥의 시작도 없었습니다. 철저한 현실에 대한 인식이 없었다면 부흥의 소망도 없었습니다. 나아가 인식에 이어 이러한 회개가 없었으면 절대로 어떠한 부흥도 오지 않았습니다. 어떠한 부흥도 절대로 오지 않았을 겁니다.

3] 세 번째 단계는 ‘중보기도’입니다.
자, 이제 세 번째 단계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바로 중보기도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그의 책 "부흥"에서 부흥이 오는 단계로 인식과 회개를 든 다음, 중보기도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부흥"책 13장에서 다루고 있는데 13장은 시작하면서부터 이런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부흥이 진행되는 과정 중에는 분명한 단계와 경로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어떠한 역사책을 읽는다 하더라도 교회가 엄청난 죄와 실패로부터 갑자기 굉장한 부흥으로 들어가는 길은 결코 발견되지 못할 것입니다. 중간 단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우리를 다시 소생시키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운 뜻이라면 그러한 중간 단계가 올 때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루어야 하는 다음 단계는 기도와 중보의 단계입니다.... 이제 저는 여러분에게 이 대목들과 이러한 특별한 단계들을 연구할 때 조심스럽게 하라고 권고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생각하기에는 여기서 부흥의 전체문제를 좌우하는 중추신경적인 가장 중요한 요점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많은 사람들의 생각 속에 일어나는 혼돈은 자주 그들이 이러한 세 단계의 가능성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양상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생각과 성령의 교리에서 부흥을 전혀 배제시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이 말에 이어 중보기도의 첫 단계에 대해 언급합니다. 우선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글을 읽고 설명 드리겠습니다. “기독교의 오랜 이야기 속에 나타난 성령의 이러한 움직임에 대한 역사를 읽어 볼 때 보편적으로 위대한 부흥을 가져오는 첫 번째 일은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나 갑자기 이러한 짐을 느끼고 자기 짐이 너무 무거워 그것에 대해 무엇인가를 해야겠다고 느끼는 것을 언제나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이에 대한 예로, 종교개혁 당시의 마틴 루터, 위클리프(Wycliffe)나 죤 후스(John Huss)와 같은 사람들의 예를 듭니다.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때론 하나님은 딱 한사람 딱 한사람을 통해서도 역사 속에 능한 하나님의 부흥을 보내신 기록이 많습니다.” 라고 합니다.

제가 이 부분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아까 느헤미야의 경우를 예로 말씀드렸습니다. 느헤미야는 현실을 인식했었습니다. 그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의 목숨을 걸었던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고요? 잘 들어 보십시오. 느헤미야는 인식했습니다. 당시의 대부분의 사람은 모두 표면적인 것을 보았을 따름입니다.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 압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 교회가 문제 있다는 건 다 알 듯이 말입니다. 교회가 문제가 많다는 것. 세상 사람도 다 압니다. 목회자들끼리 만나면 입에서 나오는 말이 그것입니다. 즉, 목회자이건 성도이건 “다 문제투성이다.” 라고 말합니다. 물론 자기만 빼놓고 말입니다. 자기만 빼면 다 문제 있는 것처럼 말들을 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다 압니다. 잘못된 문제를 보고 손가락질합니다. 비판합니다. 판단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는 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다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처한 상황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성소가 어떠한 상황에 있는지를 보았습니다. 그것을 본 느헤미야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다음에 그는 목숨을 걸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그는 목숨을 걸고 아닥사스다 왕에게 나아갔습니다. 만약에 왕이 느헤미야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모든 게 다 끝장이 나는 상황입니다. 무슨 말인지 더 자세히 설명 드리면 이와 같습니다. 여러분들이 우리가 처한 현재 상태를 인식하면 하나님 앞에서 철저한 회개가 있게 될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후회가 아닌 회개가 있을 것입니다. 그 다음, 여러분들이 무언가를 하기 위해 부담을 느끼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 말은 여러분들이 나서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제 말은 그렇게 되어지면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임재가 교회 가운데 회복되기까지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와 우리의 삶 가운데 다시 하나님의 임재가 회복되고, 하나님의 신임이 회복되기까지 목숨을 걸게 된다는 말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기뻐하신 바가 회복되고 하나님의 교회가 회복되기까지 거기에 목숨을 걸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될 때에야 비로소 여러분은 새 부대의 교회를 세울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교회에 가서 지금까지 말씀드린 그대로 한 번 목회를 해 보십시오. 교인들이 떠날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수단이 되어져 버린 성도들은 그저 목회자가 “평화, 평화”를 외쳐주기를 원합니다. 그러한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목적이 되어져야 된다고 설교하면서 전 존재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 신앙의 본질이라고 설교하면 거부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으로 예수님을 사는 것이 우리 신앙이라고 말하면 듣는 성도들은 거부감을 느낄 겁니다. 처음엔 그냥 들을지 모르나 계속 신앙의 본질을 강조하면 떠날지 모릅니다.

참된 신앙이 자리를 잡으려면 먼저 흔들리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 얘기를 잘 들어보십시오. 현 상황을 인식하는 사람은 그리고 회개한 사람에게는 성도들이 흔들려서 떠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교인이 떠나는 게 중요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임재가 하나님의 교회 가운데서 걷혀있는데, 하나님의 백성들 삶 속에 하나님의 신임이 뒷받침되어지지 않는데, 교인이 남아있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들에겐 그 무엇도 그들을 가로막지 못합니다. 그 무엇도 그들의 갈망을 가로막지 못합니다. 사람들의 협박이나 교단의 협박이 가로막을 것 같나요? 아닙니다. 절대로. 그 무엇도 그들을 가로막지 못합니다. 어떠한 사람들의 대적도 그들을 가로막지 못합니다. 그게 느헤미야가 가졌던 마음입니다.

참 놀라운 점은 제가 지금까지 화요모임이나 훈련원 등에서 가르쳤던 내용들을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님도 그의 책에서 똑같이 다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역사는 동일하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모세가 회막을 진 밖에 쳤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먼저 이 부분을 읽고 설명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금 우리가 해야 할 부분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에 주목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시 부흥의 역사 속에서 필연적으로 발견하게 되는 여러 요점들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자,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행해졌는지 그 방식을 주목합시다. 그것은 어떠한 섬세한 조직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또한 그가 어떤 진술을 하지도 않았고 그것에 대해서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으며, 백성들에게 연설하지도 않았습니다.” 모세는 진 밖에 회막을 세워놓고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들은 나오라”고 외쳤습니다. 그랬더니 백성들이 모이기 시작하였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이어서 1859년 부흥이 있을 때도 제임스 맥�퀸과 다른 두 사람이 작은 학교 교실 등과 같은 곳에 함께 모여서 기도하기 시작한 게 부흥으로 연결되었었노라고 언급합니다. 위원회나 사람의 인간적인 노력들로 조직을 만든 게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고 애통하며 무엇인가 이 나라에 부흥이 일어나야 된다는 자들이 모인 것이 부흥의 요인이라고 말합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모세가 진 밖에 회막을 세웠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회막을 진 밖에 세우되 진에서 떨어진 곳에 세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분명한 교훈입니다. 모든 부흥의 역사 속에서 필연적으로 이러한 "떨어짐"의 요소가 있습니다. 우리는 출애굽 당시의 이스라엘 진이 그 당시 하나님의 교회 였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오랜 교회의 역사 속에서 체험되는 어떠한 부흥도 교회 내에서 어떠한 공식적인 활동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진이 오염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진이 타락했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았던, 그리고 교회가 알았던 그 어떠한 부흥도 어떤 공식적인 운동이 아니었습니다. 요한 웨슬리의 홀리 클럽도 마찬가지이고 그 외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연히 회막은 진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진이 오염되어서 진안에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서 진이란 교회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다른 교단을 만들어야 된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도 그 부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얘기가 아닌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나누고 있는 이 이야기는 외부적인 어떤 모양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또 하나의 교단을 만든다고 문제들이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부흥에 있어서 제도화된 종교를 통해서 역사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진이 오염되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오해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나는 올바르고 다른 사람은 틀리고 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저와 다른 이를 비교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전혀 그런 차원에서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처해있는 현실을 같이 고민하자는 의도에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조심스럽게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 목회자들은 각자 섬기는 교회가 있기 때문에 다른 교회의 예배에 참석하기가 어렵습니다. 다른 교회에서 열리는 안수식이나 세미나 등 어떤 특별한 예배들이 있어서 참석하는 게 고작입니다. 그런데, 안수식 등이 있어 다른 교회에 가보게 되면 오늘날 우리의 언어, 우리가 나가는 방향, 우리가 추구하는바, 우리가 선호하는 것, 우리가 마음에 두는 것들이 지극히 타락하였음을 볼 때가 있습니다. 어떨 때에는 앉아 있기가 힘들만큼 지극히 타락한 경우를 볼 때도 있습니다. 조심스러운 얘기입니다마는 그야말로 세상으로 가득한 것이 사실입니다. 저는 지금 우리 모두의 상황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 어느 누구를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보십시오. 목회자들은 교회를 부흥시키기 위해서 땅에 대해서는 훤히 잘 압니다. 어느 지역 어디가 어떻게 개발될지 훤히 알고 있습니다. 땅값이 얼마인지 훤해요.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겠지요. “그게 뭐 어떠냐?” 성경에 비춰보십시오. 그것이 우리 사역의 자세인지, 삶의 태도인지, 성경에서 찾아보십시오. 그래서 성경은 회막을 진 밖에 세웠노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간단히 설명을 더 드리겠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 예배를 통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들은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오늘처럼 찬양과 경배, 설교, 성령의 사역의 순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배의 본질은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이 처한 상황은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가 걷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배가 하나의 의식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보편적인 메시지를 듣기 원하게 되었고, 오늘날 성도들에게 있어 예배는 하나의 형식이 되어버렸습니다. 목회자는 예배를 통해서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 급급합니다. 분위기 맞추기에 급급합니다. 솔로리스트를 돈으로 사다가 아름다운 목소리로 예배시간에 노래하게 함으로써 앉아서 듣는 청중들의 마음을 흐뭇케 함으로써 그들을 교회 안에 붙잡아 두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함도 두려움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남’이란 것은 생각지도 않습니다. 목회자들은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하지만, 하나님을 언급하지만, 목회자나 성도가 하나님이 실제로 그 앞에 계시며, 그분이 모든 인류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께 경외함으로 서는 자세는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분, 이런 자세로는 절대로 어떠한 하나님의 부흥도 맞이할 수 없습니다. 부흥을 예비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 곧 포도나무교회나 새물결선교회는 지금처럼 찬양과 경배, 말씀선포, 기도사역 시간으로 왜 예배를 드리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대답은 간단합니다. 예배의 본질을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추구하기 위해서입니다. 찬양과 경배는 우리 신앙과 같이 가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임재가 걷힌 것을 깨닫고, 모든 것을 돌이켜 하나님의 임재가 회복되기를 열망한다면, 그것을 위해서는 그 무엇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가 회복되기를 원하고, 인격체 되신 하나님을 알기 원하고, 그래서 그분을 더 사모하고, 그분께 찬사를 드리기 원하며, 그분이 와서 우리를 통치하시기를 원해야 합니다.

저희 교회의 경우에는 많은 분들이 교회에 방문 왔다가 “참, 이 교회 이상하네.” 하고 나간 일들이 있습니다. 개척초기에는 많은 분들이 방문하셨는데 어떤 때에는 찬양과 경배를 드리는 중에 나가 버리기도 했습니다. 우리들이 왜 이렇게 예배하는가 하는 것은 새로운 유행을 따라서 예배드리기 위함이 아닙니다. 요즈음에는 이래야 새로운 교회가 되기 때문도 아닙니다. 이래야 현대인들에 맞는 부흥회가 되기 때문도 아닙니다. 만약 그렇게 했더라면 벌써 그만 두었을 겁니다. 전혀 그런 의도로 하지 않습니다.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함입니다. 사람들이 원하던지 원하지 않던지, 사람들이 받아들이건 안 받아들이건, 교회가 성장하건 안 성장하건, 그건 타협 할 요소가 아닙니다.

왜 하나님의 임재가 오늘날 교회 가운데서 떠나 있을까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형식화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순서에 따른 형식에 불과합니다. 제 개인적인 경우, 그렇게 예배를 드리면 마음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예배를 드리고 오면 “차라리 예배에 가지 않았더면 좋았을텐데” 하면서 마음이 아픕니다. 예배 시간에 심지어 하나님께 찬양한다고 하면서 입으로만 하고, 자기들끼리 장난하고 있는 일들도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세나 태도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게 무슨 예배입니까? 그렇다면 그렇게 예배하는 것은 정상이고, 예배순서 하나하나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원하며 그분의 뜻을 따라 순종하기 원하기 위해 짜여진 예배는 정상이 아닌가요? 다만 일반적인 예배의 그것과 순서가 다르기 때문에 정죄하는 것은 정상인가요? 모양이 다르기 때문에 정죄하는 것은 분명 율법주의에서 나온 것입니다. 자기들의 것과 다르기 때문에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이런 연유로 “진 밖”이 강조됩니다. 부흥의 시대에는 항상 그랬듯이 이렇게 진 밖에 나가야 하는데 이것은 분명히 성경에 기초한 신앙의 본질이 회복되기 위한 곧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기 위한 행동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처한 상황을 인식하고 우리가 돌이키기 위해서 나온 행동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람들에게 얼마든지 배척을 받을 수 있는 요소입니다. 요즈음에는 어찌된 일인지 ‘예배 순서’ 하나만 가지고도 사람들은 이단이라고 손가락질을 합니다. 더 우스운 것은 예배 순서에 ‘사도신경’ 하나 안 들어간다고 이단이라고도 말을 합니다. 저희들은 예배시간에 물론 사도신경을 외우지 않습니다. 저는 사도신경을 외우는 것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외워도 되고 안 외워도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도신경의 내용을 부인하면 이단입니다. 그러나 사도신경을 예배시간에 안 외웠다고 이단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예배시간에 사도신경을 외워야 된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진짜 문제입니다. 왜요? 예배가 예배되기 위해서는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오직 예배가 예배되는 통로입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 본대로, 교회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 입니다. 어떤 순서나 행위가 예배를 예배되게 한다면 이것은 율법주의입니다. 그것이 바로 갈라디아서에서 언급하는 “할례”입니다. 이게 바로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끊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효화하는 율법주의이기 때문에 반드시 버려져야 합니다. 그러니까 해도 되고 안해도 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예배시간에 양복을 입지 않고 강단에 설 때가 많습니다. 물론, 양복을 입을 때도 있고 입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어떨 땐 양복을 안 입어서 고민할 때가 있습니다. 아직도 좀 덜 돼서 그런가 봅니다. 그렇다면 고민할 필요도 없이 차라리 양복을 입고 강단에 서면 신경쓰지 않아도 될텐데 뭘 고민하느냐 묻는 분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입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왜요? 오늘날의 신앙은 의식화되어 있기 때문에 외부적인 것을 꾸미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즉, 양복뿐만 아니라, 가운을 입습니다. 심지어 때로는 예배 시간에도 박사 가운을 입습니다. 그것이 마치 거룩한 모양을 하는 것으로, 어떤 그 품위를 가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과 반대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권세는 옷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뒷받침하십니다. 그러니까 예배시간에 목회자가 난잡하게 옷을 입어도 된다는 말은 전혀 아닙니다. 당연히 깔끔한 차림이어야죠. 그러나 제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떠한 옷을 입느냐에 따라서, 경건하고 경건하지가 않느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경건의 능력은 예수님이 우리 삶에 있어서 유일한 구세주요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의 삶 속에서 하나하나의 구세주요 주인으로 통치하실 때 생겨납니다. 즉, 내 생명으로 그 인격체이신 예수님이 내 속에 거하시며 내 삶을 통치하실 때 그 때만이 우리가 거룩합니다. 그것이 거룩함입니다. 그것이 경건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우리가 아무리 옷으로 치장해도 우리는 바리새인에 불과합니다. 저는 양복 입는 분에 대해서 아무런 하자가 없습니다. 저도 양복을 입습니다. 또한, 입기도 하고, 안 입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떠한 종류의 옷을 입어야 하느냐 하는 것은 분명히 비성서적인 요소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거둡니다. 율법주의 신앙이니까 그렇습니다. 그래서 안입습니다.

제가 양복을 입지 않는 이유 중 또 하나의 이유는 제가 양복을 입고 옷을 깨끗하게 입으면 성도들이 옷을 잘 차려 입기 때문입니다. 저희 성도들 가운데에도 어려운 분들이 계십니다. 저희 교회가 위치한 곳이 비록 분당이라 할지라도 여러 지역에서 성도들이 오십니다. 임대 아파트에 사시는 분도 계시고, 가난한 분들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예배 시간에 옷을 잘 빼 입고 오셔 보십시오. 그러면 가난한 분들은 즉시 시험에 빠집니다. 자칫하면 교회는 패션쇼장이 될 것입니다. 제가 이해하기를, 교회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그래서 안 입습니다. 제 얘기를 잘 들으십시오. 저는 지금 의복얘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가 회복되어 지려면 하나님의 역사가 “진 밖”에 세워져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이와 같이 이 하나 하나의 요소들에서 우리는 분명한 성경적인 이해와 가치와 근거를 가지고 또한 분명한 이유를 가지고 예배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진으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고 있습니다. 금새, 이단이니 삼단이니 얘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기에는 ‘전적인 헌신’이 필요합니다. ‘전적인 헌신’이 요구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여러분들이 부흥의 역사를 들으셔서 알겠지만 이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부흥은 절대로 오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지극히 세속으로 완전히 물들어버린 곳에서는 부흥은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여러 경로를 통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겉모습은 화려할지 모르지만 생명은 죽어버립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살아계신 역사가 없어 성도들 삶 속에 변화가 일어나지가 않습니다. 큰 교회나 작은 교회나 통 털어서 하나님 능력으로 치유되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살아있는 실제가 경험되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 보호가 말로만 있을 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능력은 성경에 써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의 삶에서 경험되어지지가 않습니다.

우리 주변을 보십시오. 성도들의 추구하는바 즉, 성도들이 세상과 신앙생활에서 원하는 것을 보십시오. 성도들이 신앙생활에서 이루고자 하는 것을 보십시오. 얼마나 세상 사랑으로 가득 차 있는지요. 목회자들에게 있어서 사역은 사업화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수단으로 여깁니다. 신앙생활하는 목적은 이 세상에서 잘 되기 위함입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평화를 외치는 설교를 듣기 원하고 목회자들은 평화를 외치는 것이 더 편하게 느낍니다. 그래야 교회가 부흥한다고 믿습니다.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하시더군요. 어떤 성도가 식당 하면서 술파는 게 죄짓는 것 같아서, 술을 안 팔았는데 그랬더니 수입이 줄었습니다. 수입이 줄어드니까 이 성도는 목사님한테 화를 내면서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술을 팔아야지 왜 못 팔게 하느냐?” 라고 말입니다. “당신이 먹을 것도 아닌데 뭘그러느냐?” 고 말입니다. 오늘날 장로님들 가운데 러브호텔 영업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집사님 중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집사님이나 장로님 중에 술집을 경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호프집을 경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가 그분들을 손가락질할 게 아닙니다. 사실은 우리 속에도 세상 사랑이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들의 예배는 지극히 형식적이 되어 버렸습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형식적인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요즈음은 사람 마음 편하게 하는 교회가 인기입니다. 다음 주에 또 오게 하는 교회가 인기입니다. 설교는 성도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해주는 설교가 잘하는 설교가 되었습니다. 제 말이 틀린가요? 사실이 아닌가요? 물론 모든 교회가 다 그렇다는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솔직하게 말해 봅시다. 오늘날 우리 목회자들이 살아계신 인격체이신 예수그리스도 그분만을 전하는지요? 목회자들은 진실로 성도들이 자신들의 모든 것으로 그분을 발견하고, 그분을 사서, 그분을 자신들의 모든 것으로 신뢰하여, 그분과 동행하는 삶을 살도록 그렇게 가르치는지요?

형식적인 예배와 형식적인 신앙이 가득찬 곳에 하나님의 부흥이 올 것 같으십니까? 절대로 오지 않습니다. 안 오게 되어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온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흥이 올 때 무슨 일이 먼저 일어나는가 하면 먼저 "인식"이 있었습니다. 그게 없으면 소망이 없다니까요. 인식이 있으니까 자기 자신에서부터 철저한 "회개"가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뿐만 아니라 느헤미야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나라의 죄를 위하여 통회하며, 애통하며, 회개하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이게 중보기도입니다. 이렇게 진행되어지면서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진 밖에 회막을 치는 일이 생깁니다. 이 말은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어떤 의도를 가지고 교단을 가른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제 얘기는 전혀 그것이 아닙니다.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저 역시도 교단에 속해있는 목사입니다. 또한, 새물결 훈련원을 신학교로 만들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나아가 새물결 선교회가 절대로 교단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강하게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단지, 모든 교회가 회복되기를 원합니다. 부흥을 담을 수 있는 새 부대의 교회로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래야 한다고 확신합니다.

여기서 ‘진 밖으로’의 의미는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의 제도화된 종교 안에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구별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사역하는 방법에서도 그렇고, 예배에 있어서도 그렇고, 예배를 드리는 방법도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서 해야 하며, 삶의 방법도 구별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다루시기 시작하시면 얼마나 다루시는지 모릅니다. 어떨 때에는 아주 대수롭지 않은 것까지 다루십니다. 우리 삶 가운데 미미한 작은 부분에까지 다루십니다. 다루시기 시작하시면 90 가지고는 안됩니다. 100이 될 때까지 세미하게 다루십니다. 철저하게 다루십니다. 새 부대의 교회를 세우시려면, 하나님 임재가 회복되려면, 그렇게 다루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전적인 헌신입니다.

부흥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첫 번째 조짐은 언제나 교회의 생명력에 무엇인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새롭게 소생하는 일이 있는 것처럼 소생하는 일이 교회 내에 일어납니다. 교회 예배가 뜨거워집니다. 전에는 없었던 어떤 것이 되살아납니다. 따스함과 부드러움이 찾아오게 됩니다. 용기를 북돋아 주는 그러니까 뒷받침해주는 일이 있습니다. 사람들 속에서 새로운 동경심과 새로운 기대감과 새로운 자유함이 나타납니다. 그것이 바로 구름기둥이 돌아온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정확하게 오늘날 우리 가운데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새 부대의 교회를 세워오기 시작한 지 벌써 오래 되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하나님께서 1991년 11월에 보여 주셨습니다. 그때부터 현실을 직시하게 하시고, 그러는 중에 줄기차게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게 하셨습니다. 다른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았습니다. 왜 모든 걸 다 내려놓았는지 궁금하십니까? 당시에 제가 처한 상황을 바라보니 하나님 임재가 걷혀 있었습니다. 그러니 무엇이 더 필요했겠습니까? 내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울기 시작한 것입니다. 줄기차게 신앙의 본질을 구하는 가운데 2년이 지나니까 우리의 신앙 전체가 옆으로 가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거의 모든 신앙적 이해가 옆으로 가있다는 사실을 안 것입니다. 그 이후로 하나님이 저를 지속적으로 다루어 오셨습니다. 요즘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고 계신지 보이시나요? 하나님이 뒷받침하고 계신다는 사인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안 보이십니까? 여러분 이번 주간 집회를 통해 안 보셨나요? 지금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의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과 이번 주간 집회 때에 일어난 일을 비교하면 이건 엄청난 일입니다. 여러분 이번 집회를 통해서 성령님께서 한 분 한 분 만지시는 것 보셨나요? 엄청난 일이 일어났습니다. 겉으로 보기만 해도 그렇고요, 한 사람 한 사람이 경험한 얘기를 들어보면 더 많을 것 같습니다. 집회뿐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무엇을 행하고 계신지 보이시나요? 하나님이 뒷받침하시기 시작한 것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부흥이 오려면 반드시 거치는 과정이 있는데, 우리에게 바로 그 과정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만 나타나고 있는 게 아닙니다. 현실을 보고 결단하고, 통회하고, 회개하고, 돌이키며,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나아가는 교회들 가운데 지금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준비되어지기 시작하면 하나님께서는 그곳에 하나님의 성령을 부으셔서 이제는 전 교회를 만지십니다. 이것이 부흥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기대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쓴 "부흥"의 이 부분을 읽으면서 너무너무 감격하였습니다. 한 구절 한 구절 읽으며 감격해야 했습니다. 부흥의 과정에서 필연적인 일이 있습니다. 모든 부흥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한동안 고뇌의 기간을 거쳤습니다. 회개하고 돌이키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주님을 찾으면서 기다렸습니다. 그 모든 것이 잘 되어 간다는 느낌을 가지는 어느 시점에 이르게 되면 하나님께서 뒷받침하시기 시작합니다. 이사야서 54장에 나오는 내용처럼 과부의 수치를 잊게 하실 때가 반드시 있습니다. 저도 수치를 당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당신 유학 갔다 왔다고 하던데 무슨 도움이 되느냐?” 이 말을 지금 생각하니까 아주 괘씸한 말입니다. 그러나 그때에는 순진했던지 아무 것도 몰랐습니다. 한 번이 아닙니다. 어느 때에는 사람들이 이렇게 질문을 해옵니다. “사람들이 몇 명이나 모이냐?” 그러면 할 말이 없습니다. “개척한지 몇 년 됐냐?” 그래도 할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지하실에 가둬놓으시고 빚으시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맞아요. 수치입니다. 목회자는 이것이 왜 수치인 줄을 압니다. 그런데 여러분, 제가 목사님들에게 이 시간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수치를 잊게 하실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저에게는 그 수치가 잊혀졌습니다. 하나님의 구름 기둥이 돌아 왔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사야서 54장에 정확하게 예언하고 있는 바입니다.

부흥의 길을 줄기차게 좇아가다 보면 어떤 느낌을 가진 시점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셨으며 어떠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구름 기둥을 볼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전체 교회들이 영향을 받고 그 영향에 사로잡히기 시작합니다. 물론, 오랜 동안의 시간이 걸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저는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부흥"을 읽다가 226쪽에 이렇게 써놓았습니다. 어제 이 메모를 다시 읽으면서 기도하였습니다. “오, 하나님 도와주세요.” 하나님이 하나님의 은혜를 부어 주신 게 너무나 감격스러웠습니다. “나 같은 자에게 하나님 은혜를 부어주셔서 오늘까지 이르게 하셨구나.” 생각하니까 어찌나 하나님 은혜가 감사하던지. “오, 하나님 도와주세요.” 기도하면서 그 옆에 이렇게 또 썼습니다. “가슴이 벅차며 흥분이 된다. 마음이 설레어서 안정이 되지 않는다.” 이 책을 읽는 가운데 알게 된 것은 제가 책에 쓰여진 그대로 되어 있었다는 점입니다. 제가 지금 드리고 싶은 말씀은 우리는 지금 부흥이 오는 과정 속에 있습니다. 나 개인뿐만 아니라 내가 섬기고 있는 교회, 더 나아가서 지금까지 말씀드린 토대 위에서 교회와 나라 전체적으로 부흥이 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해오신 것이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이 책에 적혀있는 것과 정확하게 똑같습니다.

자, 그럼 보십시오. 제가 왜 오늘 이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우선 하나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소망을 주시기 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부흥이 오는 단계와 중보기도에 대한 부분을 설교하라고 하시면서 부흥이 곧 온다고 소망을 주시는 것 같습니다. 지금 벌써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부분적으로는 이번 기회에 하나님이 만져주신 목사님들만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참으로 많이 만지시는 목사님부부들이 계십니다. 어떤 목사님은 너무 좋아서 그러셨는지 어제 오셨다가 오늘은 사모님을 모시고 오셨더군요. 하나님께서 오늘 그분 엄청나게 만지셨습니다. 아마 분명히 그분은 어제와 오늘이 이제 다를 겁니다. 분명히 다를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번 주간에 놀랍게 함께 하셨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오늘 말씀처럼 하나님의 도움으로 현실을 인식하시길 바랍니다. 이것부터 부흥의 단계가 시작됩니다. 아시겠죠? 표면적인 것을 보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안목으로 깨닫는 걸 말합니다. 그 다음, 인식은 회개로 연결됩니다. 그리고 이제는 결단으로 연결 되게 되어 있습니다. 결단으로 연결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에게서 걷힌 것을 알면 그럴 수밖에 없으니까요.

선교회에 참여하는 교회 가운데 영광교회라고 있습니다. 요즈음 영광교회 가운데 하나님께서 놀랍게 함께 하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영광교회 목사님께서 이 길로 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분은 동기 목사님들 중에서 가장 선두를 달렸던 분입니다. 모든 것이 잘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교회당도 지었습니다. 교회도 꾸준히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통치가 즉, 하나님의 역사가 교회 안에 없는 거예요.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가 없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목사님에게 현실을 보여주기 시작하셨습니다. 목사님은 현실을 직시하자 회개하기 시작하였고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교회 안에 돌아와야 하기 때문에 이 길을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단하신 겁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이제는 뒷받침하시기 시작하십니다. 너무나 놀랍게 역사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 분에게도 고뇌의 기간이 있었습니다.

예, 맞습니다. 이 고뇌의 기간은 다른 모든 목사님들에게도 있었으며, 저에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 같아요. 저에게 고뇌의 기간이 5년 이었다고 한다면 여기에 계신 분들은 6개월이나 1년이면 되는 것 같더군요. 왜 그럴까요? 지금은 다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언젠가 미국의 한 세미나에 갔었습니다. 어느 분이 기도해 주시면서 그림이 보인다고 하셨습니다. 그림의 내용은 하얀 눈이 쫙 깔려있는데 제가 맨발로 걸어가는 그림이 보인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제가 눈 위에서 한 발을 디딜려고 하면서 징징 울면서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하나님, 저는 할 수 없어요. 저는 할 수 없어요.” 그러면서 한 발을 땅에 디디면 발이 닫는 부위의 눈이 녹더랍니다. 그 다음에 또 “하나님, 저는 할 수 없어요.” 하면서 발을 내딛더랍니다. 그러면 눈이 또 싹 녹아있고 그렇게 하여 산에 올라갔는데 뒤를 보니까 내가 올라온 자국에는 눈이 녹아서 길이 나 있더라는 겁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때 그 당시 제가 그랬습니다. 그 고뇌의 기간이 5년입니다. 지금은 길이 나 있기 때문에 짧아졌습니다. 그래도 여러분! 고뇌의 기간은 거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실제가 되어지려면 여러분도 분명히 개인이 인식해야 하고 그러니까 회개하고 돌이키는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마음을 치고 돌아가는 것과 그냥 돌아가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래서 반드시 고뇌의 기간을 거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여러분 삶 속에 돌아와야 합니다. 그래서 잘못된 길을 버리고 회개하고 돌이키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옛날 방법 다 버리고, 전통적으로 하는 것 다 버리고, 돌아서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길이 닦여 있기 때문에 쉽습니다. 제가 5년이 걸렸다면 여러분은 1년이면 될 겁니다. 사실 영광교회에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역사하시기 시작한 것은 사실 제가 보기에는 1년 남짓 된 것 같습니다.

고뇌의 기간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 기간 동안 포기하지 마시고 나아가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뒷받침하실 날이 옵니다. 그렇게 되면 과부의 수치를 잊는 날이 반드시 옵니다. 그 날이 반드시 있습니다. 여기 오신 목사님들과 성도들에게 다시 간곡하게 말씀드립니다. 그냥 여기 앉아서 “아, 좋은 시간이었다.” 하면서 끝난 후 가지 마십시오. 그러면 후회 밖에 안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깨닫고, 회개하고, 애통하며, 결단하고, 주 앞에서 고뇌의 기간을 거치면서 주님을 구하면 하나님의 회복하심이 있을 줄 믿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무엇을 해야 되는가 하면 아까 말씀드린 느헤미야처럼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리고 다니엘처럼, 모세처럼, 하나님 앞에 나아가 중보기도를 하는 겁니다. “하나님, 우리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우리의 사유화된 목회를 용서해 주옵소서.” 기도하는 겁니다. “아버지여, 내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이 백성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그리고 우리를 회복시켜 주옵소서. 우리들 가운데 다시 임해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되 하나님의 긍휼을 의지해서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우리가 임의로 행하여 죄의 길에 빠져 범죄하였나이다. 하나님의 임재가 걷혔을지라도 우리는 주의 백성이며 주의 교회이오니 예수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주의 교회이오니 주의 이름을 인하여 주의 얼굴을 우리에게로 돌리소서.” 다니엘이 기도했던 것처럼 기도하십시오. “주의 이름을 인하여 주의 얼굴빛을 주의 황폐한 성소에 비추시옵소서. 여호와여 응답하소서. 여호와여 응답하소서.” 또 엘리야처럼 주의 긍휼을 의지하여 밤낮으로 하나님께 애통하며 부르짖으십시오. 그렇게 기도하는 것이 중보기도입니다. 이렇게 기도하기 시작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표적을 보여 주시기 시작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흥으로 인도하실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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