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하나님 나라(13) 하나님 나라와 중보기도(1) 중보기도의 필요성

시리즈설교/하나님 나라의 삶

by 발의무리 2008. 8. 31. 14:19

본문

하나님 나라(13) 하나님 나라와 중보기도(1) 중보기도의 필요성

겔36:37

 

지난 주일에 우리는 포로시대에 타나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유형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범죄로 인하여 두 나라로 나누어지게 되었고 북이스라엘은 BC722년에 앗수르에 의해 멸망을 당하고, 남유다는 BC587년에 바벨론에 의해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나라에 멸망을 당하여 유형국가의 주권이 없어졌습니다. 유형적 하나님 나라가 없어진 것입니다. 이 땅에 더 이상 하나님이 나라가 다시 세워질 것 같이 않은 상황입니다. 이러한 상황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질투를 가지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시키시겠다는 약속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겔36:37)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말씀처럼 하나님의 약속은 주어졌지만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그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사야 하반부 전체가 회복과 부흥을 위한 예언을 담고 있는데, 그런데 거기에 보면 세 종류의 회복에 대한 예언이 들어 있습니다. 첫째,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올 것에 대한 회복, 둘째는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 백성의 구속,  셋째는 교회회복과 하나님의 부흥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일을 성취하시는데 바벨론 포로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돌아오는 회복은 바사 왕 고레스를 통해서 하셨고,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백성의 구속은 당연히 하나님의 아들, 고난의 종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셨고, 그 다음에 교회회복과 부흥을 위한 하나님의 일은 예수님 안에 있는 예언적인 백성을 통해서 하실 것을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 예언적 백성의 특징이 중보기도입니다.

 

특히 사62:1-5에서 회복의 역사를 말씀하시면서 하나님께서 그 일을 위하여 하시는 일이 7절의 중보 기도자를 세우실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회복과 부흥은 하나님께로 부터 옵니다. 그러나 그 부흥을 불 당기는 것은 중보기도입니다.

2000년 기독교 역사의 회복과 부흥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 - 중보기도임.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번째는 왜 기도가 필요한가? 이러한 부분들을 살펴보기 원합니다.왜 기도가 필요한가?  

 

1. 하나님은 이 땅에서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부터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목적을 위한 동역자로 창조하셨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아담을 창조하신 것을 보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아담이라는 말은 사람이라는 말인데,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 이름을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은 뭐냐면 아담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보면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알 수 있다는 겁니다. 왜냐면 아담은 사람을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고 어떻게 하셨냐면,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피조물을 하나님을 대신하여 혹은 대표하여 다스리고 통치할 자로 삼으셨습니다. 그것을 창세기 1장 26절, 그 다음에 시편 8편 3-8을 보면 나옵니다.“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시편 8편 3-8절입니다.“3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4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5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6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7 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8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여기 말씀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혹은 대표하여 다스릴 경영자, 청지기, 통치자, 혹은 하나님의 대표자로 삼으셨다는 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세상을 다스릴 권한을 부여해 주셨는데, 이 권한을 부여해 주신 것이 얼마나 최종적이었든지 이 세상을 다스릴 권한을 하나님이 아니라 아담이 다른 이에게 넘겨줄 수 있었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제가 큰 회사의 회장인데 이제 한분을 경영자로 초청해서 제가 세운 회사의 사장으로 임명했습니다. 이  사장은 나로부터 회사를 경영할 그 권리를 부여받아서 나를 대신하고 대표해서 회사를 다스리고 경영합니다. 그런데 이분이 회사를 경영하는데 실적이 매우 좋지 않습니다. 큰 손해를 끼쳐서 더 이상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자! 그러면 이제 새로운 사람에게 회사 경영권을 넘겨주려면 내가 줘야 합니까? 이분이 줘야 합니까? 당연히 이 사람에게 사표를 받고 내가 다른 사람에게 줍니다. 왜냐면 이 회사가 내 회사니까요. 이처럼 하나님이 아담에게 하나님의 피조물을 다스리고 통치하고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펼칠 통치자로 경영자로 삼았는데 아담이 잘못하면 하나님이 다른 이에게 넘겨주어야 되잖아요. 그런데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넘겨준 것이 아니라 아담이 넘겨 주었습니다. 아담이 누구에게 넘겨 주었냐면 사단에게 넘겨 주었습니다. 어디를 보면 알 수 있냐면 누가복음 4장 5-8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5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이며 6 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7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8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사단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준 그 권한을 자기에게 넘겨 줬다고 말했을 때, 예수님이 그것을 전혀 반박하지 않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권세를 다시 찾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두 번째 아담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아담에게 주어진 권세를 하나님이 아니라 아담이 다른 이에게 넘겨주었다는 말은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고 통치할 권한을 그만큼 아담에게 최종적으로 넘겨준 것을 말합니다. 온전히 넘겨준 것을 말합니다. 이 말은 다시 바꿔 말하면 하나님이 이 땅에서는 누구를 통해서 일하시기로 작정한 것을 말하느냐면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을 말합니다. 너무 중요한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중보기도만 하더라도 엘리야의 기도가 오늘날 드려야 할 중보기도와 관련해서 아주 중요한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엘리야 시대에 아합 왕이 이방 여인 이세벨과 결혼하면서 이방신도 같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세벨이 참다운 선지자는 다 죽이고 혼합주의 신앙을 가진 자들만 남겨두게 되었습니다. 오죽했으면 엘리야가 나만 남았다고 했겠습니까?“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오십 인이로다”[왕상18:22]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왕상19:10]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왕상19:14]물론 하나님은 엘리야가 알지 못하는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을 남겨 두셨습니다.[왕상19:18] 그때가 그만큼 영적으로 침체된 시대임을 볼 수 있을 겁니다. 그 시대에 이제 하나님께서 아합에게 엘리야를 보내서 그 아합의 죄로 인해서 그 땅에는 3년 반 동안 비도 이슬도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러고 난 뒤 3년이 지났을 때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아합에게 나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비를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게 열왕기상 18장 1절에 나옵니다. “1 많은 날이 지나고 제삼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여기에 보시면 비를 지면에 내리는 것이 누구의 뜻입니까?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제 때가 되어서 하나님이 비를 지면에 내리려고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했고, 그리고 이어서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선지자 850명과 갈멜산에서 영적 대결을 벌입니다. 엘리야의 기도에 응답해서 하늘에서 불을 내려 응답하심으로 이방 선지자 850명을 처단합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 열왕기상 18장 41절에 보면 “엘리야가 아합에게 이르되 올라가서 먹고 마시소서 큰 비 소리가 있나이다” 이 빗소리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듣는 소리가 아니고 엘리야만 들은 겁니다. 하나님이 지금 비를 보내고 계신 것을 알려주신 겁니다. 자 그럼 보세요. 1절에 하나님께서 비를 내리시겠다고 했고, 또 지금 빗소리가 들립니다. 그럼 우리 생각에는 하나님께서 비를 내리시겠다고 했고, 지금 비가 다가오고 있으니까 다 됐지 하지 않습니까? 어차피 비를 내리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고,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이니까요. 그런데 성경에 보면 그때부터 엘리야가 갈멜산에 올라가서 머리를 무릎사이에 끼우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 자세가 팔레스타인 여자들이 아이를 낳는 자세라고 합니다. 한번 간절히 기도하고 종을 보내면서 갈멜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그 너머 지중해를 보라고 합니다. 종이 돌아와서 아무 일도 없다고 합니다. 이렇게 기도하기를 여섯 번까지 하고 일곱 번째 보냈더니 이번에는 손바닥만한 작은 구름이 지중해에 떠올랐다고 말합니다. 그랬더니 엘리야가 이제 되었다고 뛰어 내려갑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손바닥만한 구름이 큰 구름을 이루고 약속했던 비가 오게 되었습니다.그런데 야고보서에 보면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기도의 본보기로써 엘리야의 기도를 말합니다. 5장 17-18절입니다. “17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18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 여기에 보시면 하나님이 누구의 기도의 응답으로 비를 주셨다고 합니까? 엘리야의 기도 응답으로 비를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열왕기상 18장 1절에 하나님께서 비를 내리시겠다고 그랬고, 지금 빗소리가 들려오고 있습니다. 만약에 엘리야가 손바닥만한 구름이 떠오르기까지 기도하지 않았다면 비가 왔을까요? 안왔을까요? 지금 신약이나 구약이나 전체적으로 볼 때에 우리가 어떻게 결론을 내릴 수가 있느냐면 비가 안왔을 것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은 비를 보내시는 거고, 그리고 지금 비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려 주셨는데, 그런데도 만약에 엘리야가 기도를 안했더라면 비는 안왔을 거라는 겁니다. 엘리야가 만약에 여섯 번째까지 기도를 했는데도 아무런 징조가 없으니까 아닌가보다 해서 기도하기를 멈추고 하나님이 하시겠지 그러고 그만 뒀더라면 비가 왔을까요? 안왔을까요? 안왔을 거라는 겁니다. 그럼 왜 이런 일이 있느냐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이 땅에서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것이 오늘날 이 시대와 관련해서도 너무나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 땅에 부흥을 보내시기로 계획하셨다. 지금 부흥을 보내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부흥을 보내시기로 여러 사람에게 말씀하셨고, 하나님이 부흥을 보내신다는 것을 여러 차례에 걸쳐서 우리에게 보이셨다. 그럴지라도 부흥의 손바닥만한 구름이 떠오르기까지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부흥을 보내기 원하셔도 부흥이 안올 수도 있다는 겁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이 땅에서는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2. 왜 기도해야 되는가?

기도는 하나님의 공의에 호소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무엇보다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누구보다도 자신에게 공의로우십니다. 그리고 모든 피조물에게 공의로우십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사단에게도 공의로우십니다. 예수님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려 하고 자신을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그랬는데, 그게 뭐냐면 이런 겁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어떤 사람이 노예로 팔려 있으면 그 값을 지불하기 전까지는 자유롭게 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노예는 다른 사람의 소유물인데 자기 스스로 어떻게 값을 지불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 스스로는 할 수 없지요. 그렇지만 다른 사람이 값을 주고 그 주인에게서 사서 그를 자유케 해준 것처럼 예수님이 대속물로 우리를 위해 값을 치러 자유케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필요했습니다.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이러한 공의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으로 하여금 역사하실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를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6.25때 북한이 우리나라를 쳐들어 왔습니다. 남한은 전혀 전쟁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는데, 북한이 엄청난 군사력을 앞세워서 쳐들어 왔습니다.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졌습니다. 그때 우리가 어떻게 했습니까? 미국과 UN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우리가 미국에게 도움을 요청함으로써 미국이 우리나라의 전쟁에 개입할 수 있는 정당한 근거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우리가 드리는 중보기도 중에 그렇게 하나님의 공의에 호소함으로써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으로 하여금 역사하실 수 있는 그 발판을 마련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실 때를 한 번 보십시오. 사도행전 7장 17절을 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무슨 때가 가까운 거예요? 아브라함에게 이미 약속한 이방나라를 400년 동안 섬길 것이고, 거기에서 하나님이 건지실 거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번성하여 많아졌더니” 출애굽기를 보면 요셉을 알지 못하는 바로가 왕이 되고 난 후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많은 핍박이 왔습니다. 성경에 보시면 하나님의 때가 되었을 때 그랬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에도 하나님의 개입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밤낮으로 부르짖게 되었습니다. 출애굽기 2장 23-25절입니다. “23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24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25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 여기에 보시면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 환경을 움직이십니다. 환경을 움직이신 것이 하나님의 주도권이 직접적으로 그렇게 하셨다고 말할 수 없다 할지라도 그것을 허락하셨다고 볼 수 있는 하나님의 분명한 주권이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일하신 것이지요. 그들이 어려움을 당하니까 하나님께 부르짖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그렇게 그들이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이 그들의 기도를 들으셔서 역사하기 시작하십니다. 출애굽기 3장 7-8절입니다. “7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8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여기에 보시면 때가 되었을 때, 환경이 어려워지게 되고, 환경이 어려워진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 백성들이 기도하게 되고, 하나님이 그 백성의 기도를 들으시고 약속하신 그 약속대로 이제 역사하셨습니다. 이처럼 기도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역사하실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드리는 겁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 대로 이사야 하반부에 나오는 세 가지 약속에 회복에 대한 약속이 섞여 있다고 그랬는데, 그 첫 번째가 뭐냐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보아도 중보기도가 얼마나 필수였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서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칠십 년 후에 회복시킬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게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예레미야 29장 10-11절입니다. “10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1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우리는 오늘날 이런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면 당연히 이루어지지, 칠십 년 후에 하나님께서 회복시킨다고 했으니까 칠십 년이 지나면 당연히 회복될 것 아니냐. 그래서 우리는 시간만 지나면 될 줄 압니다. 하나님이 칠십 년 후에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으까요. 그런데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바로 그 다음절 12-14절입니다.“12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13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14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만나지겠고 너희를 포로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 내가 쫓아 보내었던 열방과 모든 곳에서 모아 사로잡혀 떠나게 하던 본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느니라.” 여기 보면 아주 중요한 게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칠십 년 후에 저들을 회복시키시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그렇다 할지라도 하나님 백성들이 기도하는 것이 요구되고 하나님 백성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이 요구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하나님이 약속하셨으면 기도 없이도 그냥 이루실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가 여태까지 본 것만 해도 그렇듯이 그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지실 때가 되었을 때에도 때로는 저들의 환경을 움직이셔서 저들이 기도하게 하셨고, 하나님이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셔서 그 일을 이루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32장 37-38절에 보면 똑같은 이스라엘 회복에 대해서 말하는 구절인데 참 중요한 부분들을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37 보라 내가 노와 분과 큰 분노로 그들을 쫓아 보내었던 모든 지방에서 그들을 모아내어 이 곳으로 다시 인도하여 안전히 거하게 할 것이라 38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며” 이 말은 뭐냐면 하나님이 친히 그들 가운데 거하시며 운행하시며 그들을 앞서가시며 그들을 통해서 역사하신 이러한 삶을 말합니다. 그러면서 32장 39-42절을 보십시오. “39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과 한 도를 주어 자기들과 자기 후손의 복을 위하여 항상 나를 경외하게 하고 40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영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 41 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되 정녕히 나의 마음과 정신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 42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이 백성에게 이 큰 재앙을 내린 것같이 허락한 모든 복을 그들에게 내리리라” 여기 보시면 저는 이런 게 너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약속하시되 하나님이 년도까지 말씀하시고 또 회복시키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래도 기도해야 될 것과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주님을 찾아야 할 것을 말할 뿐만 아니라 우리 속에 한 마음, 나누어지지 않는 마음이 절실하게 필요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길을 따라 행하는 것, 우리 속에 하나님을 경외함을 가지고 주님을 찾는 이것이 반드시 있어야 이 약속이 주어질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약속하셔서 이 시대에 하나님이 부흥을 보내신다고 말씀하셔도 이러한 요소들이 우리 가운데 되어지지 않으면 안된다는 겁니다. 그 중에 하나가 뭐냐면 기도입니다. 이것을 더 명백하게 말해주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게 에스겔서 36장입니다. 여러분 아까 말씀드린 예레미야서에 회복의 약속들과 에스겔 36장은 다 연결된 겁니다. 에스겔이 약간 후이지만 겹치는 시대입니다. 예레미야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결국 예레미야가 보는 앞에서 포로로 잡혀갔는데 세 차례에 걸쳐서 잡혀 갑니다. 그 두 번째 잡혀간 것이 서기 전 597년입니다. 최종적으로 망하기 11년 전에, 그때 대규모로 잡혀갑니다. 그때 잡혀간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에스겔입니다. 그래서 에스겔은 바벨론에서 예언한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똑같은 것을 예언합니다. 에스겔서 36장에 보시면 하나님께서 하나님 백성들을 회복시키실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왜 회복시키냐면 그들 때문이 아닌 심지어 그들을 위해서도 아니고 그들로 인하여 땅에 떨어진 하나님의 이름을 향한 하나님의 질투 때문에 하나님이 하실 거라고 말씀하십니다. 35-37절입니다. “35 사람이 이르기를 이 땅이 황무하더니 이제는 에덴 동산같이 되었고 황량하고 적막하고 무너진 성읍들에 성벽과 거민이 있다 하리니 36 너희 사면에 남은 이방 사람이 나 여호와가 무너진 곳을 건축하며 황무한 자리에 심은 줄 알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으니 이루리라 37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35-36절에는 하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루시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37절에서는 그래도 너희가 구하여야 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다니엘서 9장에 보면 그가 성경을 읽다가 예레미야를 통해서 주신 칠십 년 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복될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게 다니엘서 9장 1-4절에 나옵니다. 그랬더니 다니엘이 그때부터 하나님 앞에서 21일 동안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1 메대 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가 갈대아 나라 왕으로 세움을 입던 원년 2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서책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고하신 그 년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칠십 년 만에 마치리라 하신 것이니라 3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4 내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며 자복하여 이르기를 크시고 두려워할 주 하나님,” 쭉 보시면 이번 주에 살펴볼 부흥을 위한 중보기도가 여기 나옵니다. 이번 주에 살펴볼 겁니다. 어떻게 그가 기도했는지, 우리가 어떻게 기도할 것인지, 그 기도가 나옵니다. 이렇게 기도하였을 때, 다니엘서 9장 20절 이하에 보면 천사가 21일 만에 그에게 임합니다. 원래 기도응답은 첫날 왔는데 오는 과정에서 영적인 전쟁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임하셔서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보이시고 하나님이 그 이상과 예언이 응하여 이루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연대까지 말씀하셔서 약속하신 것이라도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반드시 있어야 되고,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되 단순히 기도만이 아니라 아까 말한 것처럼 하나님을 경외함 가운데 서야 되고, 한 마음과 한 도로 하나님을 섬기는 그것이 반드시 같이 가야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만큼 기도는 하나님의 공의에 호소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도는 필수적입니다.

 

3. 왜 기도가 필요한가?

기도는 실제적인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동역자들이라면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에 호소하는 것이 중보기도라면 그냥 한 번만 기도하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에 하나님이 하나님의 때가 안되어서 아직 기도응답 안하신거라면 우리가 한 번 기도하고 기다리면 될 겁니다. 그런데 왜 안나는 84세가 되기까지 혹은 84년까지 기도했냐는 겁니다. 왜 엘리야는 일곱 번씩이나 손바닥만한 구름이 떠오를 때까지 그렇게 기도했어야 했냐는 겁니다. 왜 다니엘은 하나님의 응답이 그에게 오기까지 21일 동안 기도했어야 하는 겁니다. 여러분 다니엘이 만약에 20일만 기도하고 말았다면 응답 받았을까요? 못받았을 겁니다.  왜 이런 일이 있냐면 기도가 실제적인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요한계시록 5장 8절을 보아도 하나님 보좌 앞에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엎드렸는데 거기 보면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대접이 있는데 그 향이 뭐냐면 성도들의 기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8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그리고 8장 3-5절에 보면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들의 기도와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보시면 성도들의 기도가 쌓여져서 하나님 앞에 올라가고 그릇에 담겨져서 하나님의 심판이 부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보좌 앞 금 제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4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5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제단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우뢰와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 그래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되 하나님의 백성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루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일부에서 말하는 것처럼 기도양이 채워져야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말이냐?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어떤 기도의 양이 채워져야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말이냐? 그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럼 그게 뭐냐? 저도 한편으로 이 부분에 대해서 아직 깊이 잘 모르지만, 하늘과 땅을 움직이는 중보기도 책에서 더치 쉬츠 목사님은 이 부분을 이렇게 말합니다. 한편으로는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이 부분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저는 개인적으로 기도는 실제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이해합니다. 그리고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가 절실하게 필요 합니다.더치 쉬츠 목사님 같은 경우에는 ‘하나님의 능력은 측정이 가능하다.’ 이렇게 말하는데, 이 말은 하나님 능력의 측정이 가능하다는 말이 아니라 어떤 한 개인들에게 함께 하시는 하나님 능력의 측정이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언을 주시되 믿음의 분량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각자가 믿음의 분량이 다르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믿음의 분량대로 예언하라는 겁니다. 또 창세기 15장 6절에 보면 아모리 사람들의 죄가 아직 관영하지 않아서, 완전히 채워지지 않아서 심판을 유보하십니다. 또한 성경에 보면 은혜라는 말이 나오고, 큰 은혜라는 말이 나오고, 모든 은혜라는 말이 나옵니다. 한 예를 들면 마가복음 6장 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셨을 때, 그들의 불신으로 인하여 기적을 행하실 수 없었다고 하셨습니다. 행하시지 않는다. 혹은 행하지 않기로 선택했다는 말이 아니라 기적을 행하실 수 없었다라고 표현합니다. 또한 성경에 보면 병을 고치는 능력이 예수님과 함께 함이라 이렇게 말하면서 어떤 때는 더 큰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님과 함께 하고 있었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들에게 함께 하시는 능력이 각기 다릅니다. 또 은혜가 각기 다릅니다. 믿음도 그 분량이 각기 다를 수 있다면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271p -“이런 능력의 일정 분량이 어떤 일을 성취하려면 영의 영역에서 흘러나와야 한다. 성취하는데 서로 다른 분량이 요구된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셨을 때 제자들이 가서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그리고 와서 기뻐하면서 귀신들도 우리에게 복종하더이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세 제자가 변화산에 올라가 계신 동안에 아래서 아홉 명의 제자들에게 어떤 아버지가 귀신들린 자기 아들을 데려왔을 때 못쫓아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신 다음에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다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제자들이 왜 우리들은 못쫓아냈냐고 물었더니 ‘이런 유’는 이렇게 말함으로써 어떤 종류의 귀신의 세력들은 더 큰 믿음이 필요한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서로 다른 일을 성취하는데 서로 다른 분량이 요구됩니다. “육신의 영역에서 여러 가지 다른 일을 이루는 데 여러 가지 다른 능력의 수준이 필요한 것처럼 영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마치 손전등의 불을 켤 때와 건물의 불을 켤 때에 필요한 전력량이 다른 것과 같으며, 건물의 불을 켤 때와 도시 전체의 불을 켤 때에 필요한 전력량이 다른 것과 같다. 영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일들을 성취하는 데에는 서로 다른 양의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까지 지속적인 기도가 필수적이라는 겁니다. 아까 말씀드린 책에 보면 자기 아내의 자궁 속에 혹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 달 동안 기도했는데, 기도하는 과정에서 그 혹의 통증도 심했었습니다. 하나님이 점점 줄어드는 환상을 보여주시는데 꼭 쥐어짜는 것 같은 환상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한 달 후에는 혹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초기에는 완전히 식물인간이 되어서 산소 호흡기로 연명하고 있던 한 소녀를 매주 한번씩 1년을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소녀가 회생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1년이 필요했냐는 거고, 왜 한 달의 기도가 필요했냐는 겁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무시한다. 라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일에는 기도가 실제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일을 위한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의 기도를 통해 흘러들어갈 때까지 그 일을 이루시도록 집중적인 기도를 드릴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어떤 목사님이 남미의 집회를 가셨답니다. 설교를 마치고 난 다음에 하나님이 ‘눈먼 사람 나와서 기도 받으라고 해라’ 그렇게 말씀하셔서 사람들을 초청했더니 아무도 안나오고 장님인 할머니 한분이 나와서 기도해 주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들어갔습니다. 그 다음 시간에 또 눈먼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셔서 초청했더니 아무도 안나오고 그 할머니만 또 나오는 겁니다. 안나왔으면 좋을텐데 여전히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또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여섯 번이나 했는데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일곱 번째 그 할머니가 또 나옵니다. 참 쉽지 않았을 겁니다. 사람들이 쳐다보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일곱 번째 기도했는데, 눈이 떠졌습니다. 난리가 났습니다. 그런데 그때서야 그 할머니가 자기가 기도 받으러 나오는데 문어 같은 게 자기의 머리를 감싸고 있더랍니다. 하나님이 환상을 보이신 겁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한번 기도할 때 다리 하나가 딱 잘려 나가더랍니다. 그런데 또 그 다음 시간에 나가서 기도 받으면 또 다리 하나가 딱 잘라지고, 그래서 일곱 번째 기도를 받는데 그 모든 게 잘라지면서 눈이 떠진 겁니다. 그러니까 문어 귀신이 그에게 붙어있었다 그 얘기는 아닙니다. 여기서 볼 수 있는 한 가지가 뭐냐면 기도는 실제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그래서 사실 이 시대에 우리에게 기도의 필요성과 절박성이 있는데, 이 시대에 엘리야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엘리야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알리소서’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저는 진짜 이 시대에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알리셔야 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은 이제 하나님의 존재조차도 안받아들입니다. 여러 가지 과학적인 얘기를 대면서, 여러 가지 이런저런 것들을 믿습니다. 사실 하나님을 위해서 변호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스스로를 변호하십니다. 그런데 이사야서 64장의 기도처럼, 이런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인데, 엘리야 시대처럼 하나님이 친히 하늘을 가르시고 임하셔서 하나님이신 것을 알려주시는 그게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게 필요한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돌이키시는 분임을, 우리가 하나님의 종된 것을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이 일을 행하는 것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그런데 특별히 기도하되, 하나님 부흥의 손바닥만한 그 구름이 떠오르기까지 머리를 양 무릎사이에 집어넣고 간절히 간구했던 엘리야처럼 우리가 실제적으로 그렇게 기도해야 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하나님은 여러 경로를 통해서 다가오는 하나님 부흥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또 여러 많은 사람들에게 환상으로 마음의 그림으로 여러 가지를 통해서 하나님의 부흥이 임박했다는 사실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엘리야처럼 그렇게 하나님이 비를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시고, 빗소리가 들렸을 때, 그 비가 오기 위해 실제적으로 구름이 떠오르기까지 그 일이 실제적으로 일어나기까지 쉬지 아니하고 그렇게 간절하게 기도했던 그 기도는 우리가 하고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기 때문에 그리고 기도야말로 하나님의 공의에 호소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기도는 실제적인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기도는 필수적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때까지 정하셔서 약속하신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것을 붙들고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나기까지 간절히 기도하지 않으면 그것은 얼마든지 일어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더 기도하는 자리로 회복되어질 뿐만 아니라 기도할 수 있는 성령의 기름부음과 은혜가 우리에게 부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