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차 컨퍼런스 (성령사역의 회복)
제1강 예수님의 사역과 우리의 신앙
- 여 주봉 목사 -
이번 컨퍼런스의 주제가 성령사역의 회복입니다. 새물결선교회에서 집회를 할 때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비전이 회복과 부흥이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회복되어지고 우리 개개인의 신앙이 회복되어지기 위해서 어떠한 요소들이 절실하게 필요한가?
무엇보다 우리들이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서야 합니다. 십자가의 복음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인격체이신 하나님과 살아있는 친밀한 교제인 우리가 신앙의 본질이라고 하는 부분과 오직 우리의 의는 철저하게 버리고 오직 십자가의 공로만을 믿음으로 의지하여 서서 오직 은혜 오직성령에 의한 삶을 사는 좁은 의미의 십자가의 복음, 그러한 복음의 삶을 살려면 철저하게 거짓 신앙체계가 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컨퍼런스가 있습니다. 한꺼번에는 다 못 다루고 그 부분을 두 타임으로 나눠서 주로 다룹니다. 그리고 이것이 성령의 사역과 같이 가야 되는 그래서 그 부분에 대해서 성령사역의 회복을 다루고. 또 우리 신앙에는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우리의 사역에서나 영적전쟁에서나 기도에서나 우리 신앙의 모든 면에서 필수적인 요소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부분도 우리가 다루고, 또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회복이 교회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가 회복되어지는 또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회복되어지는 필수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그 부분도 다루고 또 중보기도가 하나님의 부흥을 예비하는 길로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서 핵심이기 때문에 교회에 그 부분이 반드시 세워져야 되기 때문에 그 부분도 다룹니다.
그 외에 이런저런 주제들을 가지고 컨퍼런스를 하다보니까 똑같은 주제를 가지고 컨퍼런스를 하려면 몇 년 되어야 돌아옵니다. 그런데 2년 전인가? 얼마 되지 않아서 성령사역의 회복이라는 주제로 컨퍼런스를 우리가 했었습니다. 꼭 순서를 따진다면 아직 할 때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번에 성령사역의 회복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다시 컨퍼런스를 하게 된 이유는? 혹은 동기는? 하나님께서 이 시점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과 친밀하게 동행하는 그러한 십자가의 복음의 삶을 살 뿐만 아니라, 이제 하나님께서 그러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성령의 능력을 부으셔서 성경이 말하는 대로 전교인 사역자가 성경적인 가치관인데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의 제자로서 실제로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또 우리 이웃에서 우리 직장에서 주님이 인도하여 나아가 주님의 나라 확장과 주님의 목적의 성취를 위해 귀하게 쓰임받기를 원하시고 이 일을 위해 각 성도에게 하나님께서 더 강한 성령의 은사들과 능력과 기름부음을 붓기를 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의도와 취지를 가지고 이번에 20차 컨퍼런스를 성령사역의 회복으로 하라고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지난 주 여기에서 우리가 목회자 컨퍼런스를 하면서 이번 주제는 성령사역의 회복이었는데 하나님의 그러한 의도가 있어서 그러셨는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비전, 특별히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비전이 선명하게 보여 졌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도하셨습니다.
그래서 이길수 목사님께서 이번 훈련원에서 맡고 계신 과목 중에 하나가 비전인데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중에 지난주에 있었던 목회자 컨퍼런스 설교 내용들을 다 듣고 정리하고 그것에 대한 자기의 의견과 또한 자기의 생각하는 말을 거기에 기록해서 제출하라고 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주셔서 그렇게 숙제를 내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번 평신도 컨퍼런스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실지 모르겠지만 이번에 하나님이 20차 컨퍼런스의 성령사역의 회복을 하게하신 전반적인 이유와 의도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그러한 하나님의 의도와 방향을 이해하고 이번에 시간마다 참여하시면 하나님께서 귀한 일들을 이루실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가 2개월 동안 안식월로 미국에서 쉬면서 여러 가지로 하나님 앞에서 기다리기도 하고 육체적으로도 쉬고 그렇게 좋은 시간을 가졌는데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돌아오면서 포도나무교회는 포도나무교회 전체적으로 더 나아가서 새물결선교회 쪽으로도 이러한 하나님의 부르심과 하나님의 의도와 비전의 삶을 실제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더 살기를 원하시는 길로 인도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녁설교도 그런 부분에 맞춰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저녁은 첫 번째 시간으로 예수님의 사역입니다. 제가 오늘 저녁설교는 두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부분은 예수님의 사역을 전체적으로 살펴봄으로 우리가 감당해야할 성령사역의 모델을 볼 수 있기를 바라고. 두 번째에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이 시점에서 아주 강력하게 우리를 그쪽으로 인도하고 계시는 하나님나라 백성의 삶에 대해서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성령사역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크게 두 파트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째, 예수님의 사역.
어떠한 사람들은 성경에 나온 기적적인 성령의 역사들이 오늘날은 끝났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미리 말씀드리지만,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성경구절은 단 한 구절도 없습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성령의 은사와 능력들을 남용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의 사역을 살펴보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사역이 우리가 감당해야할 사역의 모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4복음서(마태 마가 누가 요한)를 보면 예수님의 사역을 어느 한 각도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공관복음하면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그러니까 공관이라는 것은 같은 관점에서 보았다는 말입니다. 영어로 Synoptic Gospels 라고 말하는데 같은 관점에서 기록된 공관복음도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서 강조하는 바가 각기 다릅니다. 그래서 이렇게 한 사역입니다. 마치 강대상이 하나인데 각 복음서마다 한 면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면을 당연히 강조하고 있어요. 다른 면이 다 그런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있지만 각 복음서는 그 한 면을 집중적으로 거기에 포커스를 맞춰서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그래서 이 강대상 네 부분을 합해보면 전체가 보이듯이 네 부분을 합해보면, 예수님의 사역이 어떠했는가? 라는 것이 선명히 우리에게 보이고 우리가 추구하고 나아갈 성령사역이 어떠한 사역이어야 되는가? 라는 것이 선명하게 보여 지는 것 같습니다. 마가복음부터 살펴보려고 하는데, 오늘 여러분 성경 다 가져 오셨을 것입니다 제가 그냥 이렇게 쭉 설교하면 그냥 들어가지고는 여러분들이 성경을 많이 잘 알면 괜찮은데, 그렇지 않으면 전체적인 윤곽이 덜 잡힐 수 있으니까 성경을 다 펴시고 말할 때에 하나씩하나씩 그 구절을 찾아서 직접 같이 읽어가면서 여러분의 눈으로 그것을 확인하고 검증해가면 하나님의 의도하시는 바가 여러분들에게 더 선명히 보여 질 줄로 믿습니다.
마가복음.
많은 학자들이 마가복음이 먼저 씌워졌다고 말합니다. 저는 그런 차원에서 하는 것은 아닌데 마가복음부터 살펴보면 예수님의 사역을 훨씬 쉽게 볼 수 있겠습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사역이 말씀과 성령의 조화를 이루는 사역이었던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선포와 능력 행함이 조화를 이루는 사역이었던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뒷받침되는 말씀의 사역이었던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가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공생애에 관한 첫 번째 기록부터 명백합니다. 마가복음 1장 21절부터 나오는데, 그 앞에 보면 마가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서론적인 부분들이 나오고, 1장 21절부터 보시면 예수님의 공생애에 관한 기록에 첫 번째 사건이 나옵니다. 마가복음을 보아도 이 사건이 예수님이 공생애기간 동안 행하신 첫 번째 사건이었다고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마가복음을 보아도 그게 아닌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는 이 사건을 예수님의 공생애를 본격적으로 기록하기 시작하면서 가장 첫 번째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마가는 예수님의 사역을 어떤 한 각도에서 집중적으로 강조하되 이 사건을 ‘예수님의 사역이 그렇다.‘ 라고 보여줄 수 있는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제시한 겁니다. 하나의 모델로, 하나의 본보기로 제시한 겁니다. 그러니까 가장 먼저 그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마가복음 1장 21절에서 28절에 나오는데 거기에 보시면 사람들이 놀랍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두 가지 때문에 놀랍니다. 이것은 다른 복음서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읽어보시면 알지만, 그런데 마가복음은 이 부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좀 전에 말씀드린 대로 그 두 가지가 뭔가 제가 읽을테니 살펴보십시오.
마가복음 1장
21절 저희가 가버나움에 들어 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22절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 일러라
23절 마침 저희가 회당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가로되
24절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25절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26절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으로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큰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27절 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28절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여기 보시면 사람들이 두 가지 때문에 놀랐지요?
하나는 뭣 때문에 놀랐지요? 예수님의 말씀이 서기관들과 같지 않게 권세 있는 말씀임을 보고 놀랐습니다. 또 하나는 뭣 때문에 놀랐습니까? 예수님의 말씀 앞에 귀신이 쫓겨 가는 권세, 성령의 능력의 나타남을 보고 놀랐습니다. 이처럼 마가복음은 처음부터 예수님의 사역이 말씀 선포와 능력 행함의 조화를 이루는 사역이었던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강조는 여기서만 끝나지 않습니다. 그 이후로 보아도 계속 나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실 때에도 똑같이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을 세우실 때에도 똑같은 목적으로 세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에서는 이게 중요한 게 뭐나면, 이 말씀 선포와 능력 행함이 두 개가 아니라 그 둘이 하나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만큼 이게 마가복음의 관점이고요. 사실 마태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손바닥의 양면처럼 하나만 언급해도 다른 하나는 자동적으로 따라오는 하나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디를 보면 알 수 있는가 하면? 이렇게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나오셔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서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하셨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이 끝났습니다. 안식일이 끝났다는 말은 그 당시는 금요일 해질 때부터 토요일 해질 때까지가 안식일이었습니다. 해가 저물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안심하고 많은 병자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밤새도록 그 환자들을 치유하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보면 그 다음 날 이른 아침에 예수님께서 일찍 일어나셔서 한 적한 곳으로 나아가셨습니다. 뭐하기 위해서? 기도하기 위해서, 그랬더니 아침부터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하겠지요? 사실은 마가복음이 강조하고 있는 또 하나는 예수님의 이러한 사역 때문에 가는 곳 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던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다음 날 아침에도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러자 이제 제자들이 베드로와 또한 그 동료들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지요. 그래서 한 적한 곳에서 기도하고 계시는 예수님을 만나서 “선생님, 사람들이 선생님을 찾습니다.” 이렇게 말했지요. 그랬더니 이에 대한 답변으로 하시는 말씀이 마가복음 1장 38절 39절에 나옵니다. 여기 한 번 쭉 보시면 제가 마가복음 1장 사건이후로 기록된 것을 요약해서 말씀드렸습니다. 38절에 말하기를
마가복음 1장
38절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여야 하리니 내 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우선 하나는 여기에 전도하여야 하리니 라고 했는데 우리말에 전도라고 표현된 말은 선포하다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선포하여야 하리니 그 말입니다. 영어 NIV성경에는 우리가 다른 마을로 가자 -so I can preach there also. 내가 거기에서도 설교(preach) 할 수 있도록 그러니까 전파할 수 있도록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그러니까 여기에 전도한다는 말은 말씀을 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보라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예수님은 전도하러, 다시 말하면 말씀을 선포하러 왔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것이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다. 말씀 선포가 중요한 거지 다른 것은 다 부수적인 것이라.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으니까, 그런데 우리는 항상 성경을 그 문맥에서 이해해야 됩니다. 자 그래서 이렇게 예수님께서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하시고 다른 마을들로 가자 그래서 갔는데 ... 3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다른 마을들로 가시면서 어떻게 하셨는가? 그게 나옵니다. 한 번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마가복음 1장
39절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저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어 쫓으시더라
우선 제가 설명 드리기 전에 예수님이 감당하신 성령의 사역이 귀신을 쫓아내는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문둥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고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마가복음은 이 전체를 귀신 쫓아내는 것으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성령 사역의 하나 가장 극적으로 볼 수 있는 하나의 모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해서 사단의 억압 가운데 있는 자에서 사단의 권세를 묶고 그를 자유케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은 예수님이 감당하신 성령 사역을 한 마디로 귀신 쫓아내는 것으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것만이 아닌데, 그러면서 여기 보시면 예수님께서 선포하러 왔다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예수님이 말씀하신 선포는 단순히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선포와 성령의 사역이 포함되어 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동전의 양면처럼 손바닥의 양면처럼 한 가지만 말해도 나머지는 자동적으로 따라오는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또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복음서마다 예수님의 사역이 이렇다 라고 강조한 그대로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똑같이 명령하십니다. 나중에 보시면 확실히 알겠지만 그러니까 이 말은 제자들의 사역은 예수님의 사역 그대로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엄청나게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사역 또한 예수님의 사역을 그대로 감당해야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때에는 용어까지 똑같이 그랬습니다. 조금 전에 제가 말씀드린 대로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의 사역을 말씀 선포와 능력 행함으로 둘이 하나 됨을 말하되 이것을 전도와 귀신 쫓아내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그랬잖아요. 그러면 마가복음 3장 1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열두제자 사도들을 세우신 내용이 나오는데 그들을 세우실 때 뭘 위해 세우셨는지 기록되어 있는가를 보면 .
마가복음 3장
13절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14절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15절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
무엇보다 예수님과의 교제를 위해 부르셨습니다. 그 다음에 사역을 위해서도 부르셨는데 사역을 두 가지로 요약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이렇다 라고 말한 그대로 제자들을 감당하도록 세우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맞습니까? 표현까지 똑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명령하신 마가복음 6장 7절 이하에 나오는 말씀도 똑같고 이처럼 마가복음이 강조하는 바는 예수님의 사역이 말씀 선포와 능력 행함의 조화를 이루는 사역이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고 그것이 둘이 아니라 하나인 사역이었던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럼 마태복음은 무얼 강조하고 있느냐? 마태복음도 마가복음처럼 똑같이 예수님의 사역이 말씀 선포와 능력 행함의 사역이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대로 전제하고 있습니다. 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의 포커스는 그 예수님의 사역이 다른 것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 사역이었다는 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학자들이 예수님이 감당하신 사역의 핵심이 혹은 예수님이 전파하신 메시지의 핵심이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었다. 라는 것은 다 동의하는 바입니다. 왜 성경이 명백하게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른 어느 복음서보다도 그 부분을 가장 많이 강조하고 있는 책이 바로 마태복음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처음부터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오신 왕이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계보를 보더라도 다른 어느 복음서보다 하나님 나라에 관한 가르침이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만 하더라도 마태복음 13장, 16장, 20장 등 어느 복음서보다도 집중적으로 이 부분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전파하신 메시지가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였다 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고 예수님이 감당하신 성령사역이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었다. 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실 성령사역이 균형 잡힌 사역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하나님 나라 사역인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 은사는 절대로 사람을 바꾸지 않습니다. 은사는 절대로 사람을 변화시키지 않습니다. 은사와 능력이 여러분에게 임하면 사람이 바뀔 줄 알지만 절대로 안 바뀝니다. 오히려 더 타락할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고린도 교회입니다. 여러분 사도바울이 세운 교회 중에 가장 어린교회가 고린도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육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들이 영적으로 어려서 굳은 음식을 주지 못할 정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예비하신 것을 그들이 깨닫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를 보면 사도바울이 세운 교회 중에 가장 많은 세상적인 죄악이 있었던 교회가 고린도 교회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만 하더라도 그 당시 그들이 가지고 있던 문제들을 하나씩하나씩 다루고 있습니다. ‘뭐에 관하여는’ ‘뭐에 관하여는’ 이런 문구로 시작해서, 그런데 여러분 그 고린도 교회는 1장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다른 어느 교회보다 성령의 은사가 가장 강하게 나타났던 교회입니다. 얼마만큼? 모든 하나님의 성령의 은사가 부족함이 없이 나타난다고 표현할 만큼, 성령의 은사와 능력이 우리에게 강하게 임하여 우리의 삶이 변한다면 고린도 교회는 가장 성숙하고 가장 주님의 형상을 닮는 교회가 됐어야 했겠습니다. 그런데 어느 교회보다 성령의 은사가 더 강력하게 임한 교회였지만 실제 그들의 삶과 그들의 자세는 어느 교회보다 더 어리고 죄악이 많은 교회였던 걸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보아도 명백하게 알 수 있듯이 은사는 절대로 사람을 바꾸지 않습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이 변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바뀝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우리를 바꾸는 것이지. 은사는 바꾸지 않습니다. 은사는 도구입니다.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뭐를 위해서? 하나님 나라의 연장이기 때문에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의 사역을 감당하되 하나님 나라의 사역인 것을 인식하고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와 삶이 하나님 나라의 성령사역과 같이 가야 (나중에 확실히 하겠습니다만) 하나님이 의도하신바대로 교회가 세워질 뿐만 아니라, 은사와 하나님의 능력이 하나님이 의도하신바대로 실제로 교회의 덕을 세우는데 사용됩니다. 우리나라 역사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그렇게 안 되면 은사와 능력을 통해서 교회가 세워지기보다 오히려 교회가 갈라지고 상처를 받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오히려 많은 문제점을 야기하는 그러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여러분 한국 교회에 그 동안 담임목사에게 성령의 능력이 강하게 임해서 교회가 잘 성장하고 교회가 나름대로 하나님의 일들이 잘 이루어지는 그러한 교회들은 더러 있지만 담임목사 외에 일반 성도들에게 성령의 능력이 강하게 임해서 그 교회가 잘 세워진 교회가 있습니까? 거의 없습니다.
은사와 능력이 임하면 우선, 능력은 대단합니다. 여러분 세상을 보세요. 돈 많은 사람이 가면 굽신굽신 하잖아요. 정치인들 힘 있는 사람들 가보십시오. 굽신굽신 하잖아요. 영적인 능력도 어느 능력 못지않게 능력입니다. 은사가 강하게 임하면 사람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세워지지 않은 가운데 은사가 임하면 그걸 가지고 사람들을 줄 세우려하고, 영향력을 미치려고 하고, 자기 사역 확장시키려고 하고, 자기 사람 확보하려고 하고, 자기 의를 추구하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많은 경우에 목회자가 그것을 제지합니다. 그러면 성도들은 목사님은 자기가 은사가 없다고 시기하는거야,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라고 했는데 목사님은 나를 미워해. 그래서 밖으로 튑니다. 가정 제단을 쌓느니, 기도원을 세우느니, 합니다. 그래서 담임 목회자 외에 성도들에게 성령의 능력이 강하게 임해서 교회가 하나님이 의도하신대로 아름답게 세워진 교회는 우리나라 역사에 거의 없습니다. 그것이 복음과 같이 안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담임 목회자에게만 성령의 능력이 임해야 합니까? 그래가지고 언제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각자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제가 처음에 하나님께서 이번 집회를 열게 하신 의도에 대해서 말하면서도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우리 각자는 지체로서 각자가 제 기능을 다하고 각자가 성령의 능력과 기름부음으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여 서로 연락하고 상합하게 될 때에 그리스도의 몸이 잘 세워지게 되어있습니다. 그것이 성경적인 하나님의 기준인줄 알지만 그것이 복음과 같이 안가기 때문에 하나님나라의 백성의 삶과 같이 안가기 때문에 우리의 아는 바와 우리의 실제는 전혀 다른 그런 결과를 그동안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성령 사역을 감당함에 있어서 마태복음이 강조하는 것처럼 그것이 하나님 나라 사역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삶과 하나님 나라 메시지와 같이 가게 될 때에 성령의 기름부음도 더 강하게 증가됩니다. 제가 교회에 있을 때마다 이런 이야기를 가끔 합니다. 제가 이 길수 목사님을 처음 만났을 때에 지금부터 오래됐습니다. 그 당시에 이 목사님 주위에는 같이 은혜를 받고 하나님께서 놀라운 능력으로 만져주셔서 진짜 하나님의 성령의 은사들이 강하게 나타났던 분들도 꽤 있었습니다. 저도 들은 이야기인데 어떤 분 같은 경우는 축도하고 났더니 성도들이 없어졌습니다. 깜짝 놀라 봤더니 성도들이 의자 밑에 다 쓰러져 있는 겁니다. 자기가 그렇게 한 것도 아니고 자기가 놀란 겁니다. 예배를 끝나고 복도 옆을 지나가니까 사람들이 막 쓰러져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병원 가서 기도하면 환자들도 낫고 또 그런 것은 아니더라도 비슷하게 하나님께서 놀랍게 성령의 은사들을 부으신 분들이 많이 계셨습니다. 앞으로 한 분 한 분 회복시키셔서 귀하게 하시겠지만, 여러 해가 지난 지금 그런 부분들은 거의 다 사라졌습니다.
제가 이 목사님이 여기 있는데 목사님과 관계있는 것이 아니니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한 번은 필리핀의 선교사님이 저에게 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분이 우리가 필리핀 갔을 때 같이 사역했을 때에 보고 그 뒤로 1년 후에 한국에 나오시는 길에 집회에 참석하셔서 봤는데, 1년 만에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달라질 수 있느냐? 그러니까 성경에 보면 예수님 고향사람들이 예수님 보고 놀랐습니다. 안 믿으면서“어디서 저런 능력과 지혜를 얻게 됐느냐?” 거기서도 두 가지입니다. 말씀의 지혜와 성령의 능력이 나왔느냐 라고 이야기 하는데 차이가 뭔가? 우리가 마지막 시간에 그것을 살펴 볼 것입니다만 성령의 기름부음만 하더라도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에서 나오는 신선한 기름부음으로 뒷받침되지 않으면 오래 못갑니다. 당분간은 은사가 나타나는데 오래 못갑니다. 그래서 성령의 은사와 능력만 하더라도 하나님 나라의 삶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와 같이 가야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사역인 것을 인식하고 그 가운데 행해야 성령의 능력도 점점 강하게 나타납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사역이 말씀선포와 능력 행함의 조화를 이룬 사역이었다. 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고 마태복음은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었다. 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무얼 강조하고 있는가? 누가복음은 예수님께서 바로 이 사역을 (두개다)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 사역을 감당하되 그것을 성령의 능력으로 감당하셨다.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을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감당하셨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똑같이 누가복음도 예수님의 사역이 두 파트였다. 그것이 하나였다. 똑같이 누가복음도 예수님의 사역이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었다. 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그 초점을 강조점을 어디 두느냐면 예수님은 그 사역을 감당하시되 그것을 성령의 능력으로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감당하셨다. 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처음부터 명백합니다. 여러분 누가복음에 보면 사가랴, 엘리사벳, 시몬, 마리아와 같은 사람에게 성령이 임해서 저들이 예언합니다. 여러분 이것은 다른 어느 복음에서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성령이 임해서 예언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스토리를 전개하는 것을 보아도 이 부분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세례(침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예수님 위에 임했습니다. 맞습니까? 이것은 사 복음서에 모두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세례(침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나오실 때 성령이 임한 다음에 사건을 기록하면서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말이 누가복음에는 나옵니다.
누가복음 4장
1절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 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여기에 똑같은 내용이 기록되면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라는 이 문구는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겁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안 나옵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예수님이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을 감당하신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겁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것은 다른 복음서에도 다 나옵니다. 그렇습니까? 다 나오는데 그 시험을 받은 다음에 갈릴리로 돌아오는 사건에 대해서 말하면서 누가복음 4장 14절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성경을 보시면 다른 복음서에는 그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빠져있는데 누가복음은 그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4장
14절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여기에 ‘성령의 권능으로’ 이 말은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겁니다.
지금 누가복음에서 뭘 말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침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능력으로 임했을 뿐만 아니라,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갈릴리에 오셨고 시험을 받을 때에도 마찬가지고 시험을 받고 돌아오실 때에도 성령의 권능으로 돌아오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나서 누가복음 1장부터 4장까지는 서론적인 부분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의 공생애를 본격적으로 기록하기 시작합니다. 아까 마가복음에서도 그 사건을 기록하면서 그게 가장 첫 번째 사건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마가복음만 보아도 그게 아닌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은 의도적으로 그 구절을 가장 먼저 기록했습니다. 왜냐하면 마가복음은 그런 각도에서 예수님의 사역을 보는 겁니다. 그것이 적합한 그 부분을 제일 먼저 기록하는 겁니다.
그런데 누가복음도 예수님의 공생애를 기록하면서 그것이 가장 먼저 행하신 일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게 아닌 것을 실제로 누가복음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은 그 사건을 가장 먼저 기록합니다. 마가복음과 똑같이 누가복음은 그 각도에서 거기에 포커스를 맞춰서 예수님의 사역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기록이 어디에 나옵니까? 누가복음 4장 14절부터 나옵니다. 여러분 다 찾아보시죠.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4장
14절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15절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16절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절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18절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19절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절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절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보세요. 이게 가장 먼저 기록된 내용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가장 먼저 예수님이 행하신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공생애를 기록하면서 가장 먼저 기록합니다. 왜? 이것이 누가복음이 보는 패러다임입니다. 여기에 핵심이 뭡니까? 예수님이 마가복음, 마태복음이 감당한 그 사역을 똑같이 감당하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뭘로 감당했다고 합니까? 성령의 능력으로, 주의 영이 내게 임하시니, 하나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이것이 성령의 기름부음을 말하는 겁니다.
조금 전에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전개를 보아도 알 수 있고 처음부터 사람들을 기록한 내용을 보아도 알 수 있고 예수님의 공생애를 시작한 사건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을 감당하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누가복음과 똑같은 저자에게 씌어진 성경이 사도행전입니다. 사도행전 10장 38절에 보면 예수님의 사역을 한 마디로 줄입니다. 한 마디로 줄이면서 뭐라고 요약합니까?
사도행전 10장
38절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 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하셨음이라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똑같이 뭐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가 하면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성령의 기름을 부으사 이 일을 감당하게 하셨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놀라운 사실이 제자들을 보내실 때마다 똑같이 하는데 누가복음을 보면 누가복음이 말하는 대위임령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이 뭡니까?
누가복음 24장
47절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48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49절 볼찌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 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보세요.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을 감당하신 것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명하실 때에도 성령의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기다려라. 이 능력이 임해야 그 능력으로 너희들이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데 이를 감당할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강조가 어디에 있는지 아시겠습니까? 이 처럼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사역이 성령의 능력으로 되어진 사역인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어떤 사람이든 하나님의 친밀한 교제는 핵심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구한다면서 난 성령의 능력은 필요 없어. 성령의 능력 그런 거야 그것은 잘못하는 겁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린 당연히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핵심입니다. 그것을 잃으면 다 잃은 겁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성령의 능력도 필요합니다. 그것이 연장이며, 도구입니다. 예수님이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을 감당했다면 저와 여러분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을 감당하지 않는다는 말은 저와 여러분의 지혜와 능력으로 사역을 감당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교만입니다. 우리 자원으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스가랴 4장 6절에서도 힘으로 되지 않고 능으로 되지 않고 오직 나의 힘 영으로 되느니라. 했습니다.
지금까지 세 가지를 살펴봤습니다.
요한복음이 또 있습니다. 그러니 이 네 개가 조화를 이루어야 진짜 균형 잡게 됩니다. 제가 자주 예로 드는데 피아노 의자 다리가 네 개잖아요 그런데 하나만 있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완전히 꼬꾸라지죠? 두 개만 있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세 개만 있어도? 세 개만 있어도 잘하다가 잘못하면 완전히 넘어지겠지요. 네 개가 다 있어야 든든한 것처럼 마가 마태 누가 요한복음이 말하는 예수님의 사역이 강조하는 이것이 네 가지가 다 조화를 이루어야 그때 가장 든든할 뿐만 아니라 가장 하나님이 의도하신대로 성령의 사역 또 하나님 예수님의 사역이 이뤄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요한복음으로 넘어가야 합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앞서 말씀드린 세 가지가 다 이미 전제로 되어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말씀 선포와 능력의 행함 사역, 하나님의 나라의 사역, 성령의 능력으로 감당하셨다는 것도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뭐에 포커스를 맞추면서 강조하고 있는가 하면 예수님이 성령께 민감하셔서 사역을 감당하셨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에 의해서 성령과의 친밀한 교제에 의해서 사역을 감당하셨다. 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도들의 사역에서도 나올텐데, 그들은 말씀과 성령의 조화로 하되 말씀은 예수님의 삶에는 하나님나라의 메시지였으며 성령의 사역이 같이 가되 여기에 보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이 있고 성령과의 교제가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 삶과 성령의 사역이 같이 가되 성령 쪽에는 성령의 능력과 성령과의 교제가 조화를 이뤘습니다. 여러분 이 조화가 너무 중요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이 이 성령과의 조화 교제 가운데 다시 말하면 아버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사역을 감당하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와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사역을 감당하셨다는 말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말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과 행하심을 보며 그 일에 온 삶으로 동참하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이게 제가 신앙의 본질이라고 말한, 성령과의 교제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서 예수님은 이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과 가지셨던 친밀한 교제를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예수님 안에 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그러면서 대표적인 두 구절을 읽으면 요한복음 10장 37,38절 14장 10~12절인데, 제가 요한복음 10장 37절,38절을 읽겠습니다.
요한복음 10장
37절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38절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찌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 지께서 내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신대
여기 보십시오.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예수님 안에 있는 친밀한 교제를 통해서 예수님은 예수님이 감당하신 모든 사역을 감당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0절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 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절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 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여기 보면 예수님이 역시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예수님 안에 있는 그 친밀한 교제를 통해서 예수님의 말씀도 예수님의 행하신 사역도 이것은 행하신 사역은 갈릴리를 지나가시고 나사렛 지나가시고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사역을 말합니다. 이것도 감당하셨다는 겁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예수님 안에 라는 이 표현을 예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인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예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 맞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은 그것을 나타내는 구절이 아닙니다. 어떻게 아느냐면 만약에 그것이 예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이신 것을 나타내는 구절이라면 바로 그 다음절이 안 맞습니다. 바로 그 다음절에서 뭐라고 하셨는가 하면(요14:12)
12절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우리도 똑같이 그렇게 감당할 것이라 했는데 우리 중에 어느 누구도 하나님은 없기 때문에 그러니까 여기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예수님 안에 라는 말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와의 친밀한 교제를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가셔서 똑같은 요한복음에 보면 내가 가면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리라 내가 가면 보혜사가 오시고 그가 너희에게 내가 말하는 것을 생각나게 하시고 너희를 가르치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바로 성령이 오셔서 성령을 통해서 성령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우리도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갖고 예수님이 감당하신 것처럼 이 사역을 동일하게 감당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아버지와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행하셨는데 이 친밀한 교제 가운데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하셨느냐? 예수님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고 아버지의 행하신 것을 보고 그 일에 동참함으로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일하셨고 아버지가 예수님을 사랑하셔서 아버지의 행하시는 것을 수시로 보이신다.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구절은 요한복음 5장 17절~20절에 나옵니다.
요한복음 5장
17절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18절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 이러라
19절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 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20절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가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니라
여기에 보면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일하신다.
나도 일한다.
나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는 아버지의 행하심을 본다.
그것을 나도 행한다.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셔서 아버지의 행하심을 보이신다.
여러분 이 말은 언제 한줄 아십니까? 예수님이 베데스다 연못가를 지나가시면서 거기에는 그 당시에 전설이 있었는데 연못물이 동할 때 천사가 내려오는 사인이고 그때에 무슨 병을 가진 사람이든지 제일 먼저 들어가면 낫는다는 전설이 있어서 그 전설을 믿는 수많은 환자들이 거기 모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안식일 날 거기 지나가시면서 38년 된 병자에게 가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라고 명령했더니 그가 일어나 걸어갔으니 이것을 안 종교지도자들이 안식일에 이런 일을 행했다고 그리고 자리를 들고 걸어가게 하는 것은 그 당시 안식일을 범하게 하는 것이기에 그들의 이해로 성경적인 의미가 아니라 그들의 이해로 그렇게 했다고 예수님을 핍박합니다. 그래서 그에 대한 답변으로 지금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 사역을 전체적인 사역을 감당하실 뿐만 아니라 바로 그 사건만 하더라도 이 관계에서 하셨다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 같았으면 우린 이렇게 생각합니다. 성령의 은사와 능력하면 우리가 호주머니에 담고 다니는 것인 줄 압니다. 예수님 같은 분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사도바울이나 베드로 같은 사람은 담고 다녀 가지고 필요한대로 꺼내서 막 쓸 수 있는 것처럼 ... 그리고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못 꺼내어 쓰니까 우리는 저들과 다른 겁니다. 우리 속에 능력이 없는 것처럼 그런데 예수님이 일하신 것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보세요. 거기에 환자들이 많았습니다. 꺼내서 쓸 것 같으면 다 꺼내서 주지. 그런데 예수님은 그 날 한 사람만 고치셨습니다. 그 많은 사람 중에... 그리고 그 날이 안식일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는 것을 보면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핍박 할 것을 뻔히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왜? 아버지가 행하심을 보았기 때문에... 성경 전체에 나오는 예수님의 행하신 일들 예수님의 말씀을 볼 때에 이렇게 하셨던 것 같습니다. 이건 추측이지만 그렇게 하셨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그 곳을 지나가실 때에 하나님이 38년 된 병자에게 관심을 갖게 하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에게 가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라.”고 그러셨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아버지의 행하심을 보았을 때 예수님이 믿음으로 순종했더니 아버지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38년 된 병자를 일으키신 겁니다. 너무 중요합니다.
복음서마다 예수님의 사역이 그렇다고 강조한 그대로 제자들에게 하라고 명령했다고 합니다. 요한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이 하라고 그랬습니다. 그게 어디에 나옵니까? 요한복음 15장에 나옵니다. 우리가 잘 아는 포도나무의 삶.
15장 1절부터 나오는데 제가 4절부터 읽겠습니다.
요한복음 15장
4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 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절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좀 전에 예수님께서 나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했는데 우리에게도 너희가 너희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가 너희 안에 거하는 친밀한 교제 가운데서 너희가 내가 그렇게 했던 것처럼 나의 행함을 보고 그 일에 동참하면 내가 너희들을 통해서 내 일을 이룰 것이다. 이것이 열매입니다. 똑같이 명령하십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알기를 원하시면 제가 쓴 '성령사역의 회복'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를 보십시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사역이 마가, 마태, 누가가 강조한 사역이었음을 그대로 전제하면서도 예수님은 철저하게 성령님과의 교제를 통해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서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동참했다. 자기 임의로 하지 않았다. 이것이 너무너무 중요한 조항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감당해야하는 사역입니다.
이제 사도들의 사역을 보시면 사도들도 정확하게 이렇게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사도들이 전한 메시지와 예수님이 전한 하나님의 나라 메시지가 똑같았습니다. 사도들은 십자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예수님의 구속사건을 토대로 한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사도들의 삶에도 정확하게 성령의 능력과 성령과의 교제가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이것은 사도행전뿐만 아니라, 서신서 전체가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이것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역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
조금 전에 말씀드린 대로 이 성령의 사역이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었다는 것을 성경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뭐가요? 마태복음이. 이 네 개가 다 같이 가야합니다. 그리고 특별히 새물결선교회의 집회에 그동안 여러 번 참석하시고 여러 가지 모양으로 은혜를 받아온 우리들에게(처음오신 분도 당연히 마찬가지입니다. 이 부분은 성경이 분명히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강조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삶을 살아라는 겁니다. 사실 진작부터 이렇게 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 부분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먼저, 제가 마태복음은 뭘 강조하는 거라고 했습니까? 예수님의 사역이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구조를 보아도 그 부분을 명백하게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사실 마태복음을 보면 1장~4장까지는 서론적인 부분입니다. 예수님의 족보, 탄생, 동방박사들의 방문, 애굽으로의 도피, 나사렛으로 돌아온 사건, 침례요한의 사역, 예수님이 침례 받으신 것, 예수님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것, 첫 번째 제자들을 부르신 것. 이렇게 나오지요. 그러면서 예수님의 공생애를 본격적으로 기록하기 시작하면서 조금 전에 마가복음은 뭘 제일 먼저 나왔습니까? 회당에서 사람들이 두 가지 때문에 놀란 그 사건. 말씀의 권세와 귀신이 쫓겨가는 권세에 놀란 것. 누가복음에는 제일 먼저 뭘 나왔습니까? (사61장) 주의 영이 네게 임하시니 이 구절이 성취되었다고,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을 감당하신 것을 제일 먼저 기록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예수님의 공생애를 본격적으로 기록하기 시작하면서 공생애를 요약함으로 시작합니다.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면, 마태복음 4장 23절~25절 사이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4장
23절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24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 통에 걸린 자, 귀신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 시더라.
25절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여기에 보면 예수님의 사역을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세 가지로 요약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가르치는 것, 선포하는 것, 치유하시는 것(전인적인 치유) 그런데 그 구절을 자세히 보면 세 가지로 나누고 있지 않아요. 마가복음처럼 똑같이 두 가지로 나눕니다. 가르침과 선포는 형태만 다른 것이지 말씀을 전하는 겁니다. 말씀선포와 능력 행함으로 나눕니다. 조금 있다 구조를 보면 알아요. 그런데 요약함으로 시작하는데 이 똑같은 요약이 마태복음에 똑같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9장 35절.
마태복음 9장
35절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 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36절 무리를 보시며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 리함이라
37절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을 적으니
38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 시니라
여기 보시면. 하나님 나라의 사역임을 명백하게 말씀하십니다.
똑같이 요약합니다. 그러면서 여기 보시면, 제가 오늘 저녁에 설교를 예수님의 사역과 마태복음에 나오는 하나님 나라의 삶을 전하겠습니다. 라고 말했지요? 그리고 설교 실컷 하고 끝나서 제가 오늘 예수님의 사역과 하나님 나라의 삶을 나누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처럼, 여기 보시면 예수님의 사역을 요약으로 시작해서 요약으로 끝납니다. 이게 한 단락입니다. 여러분 마태복음 학자들이 나누는 것을 보아도 이게 한 단락입니다. 그러면서 여기가 두 파트로 되어 있습니다. 너무너무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첫 번째 파트가 어디죠? 마태복음 5장부터 7장입니다. 바로 4장부터 연결되는 이 장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산상수훈이라고 말하는 장입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 파트는 8장부터 9장입니다. 이렇게 두 파트로 되어 있는데 5장부터 7장까지는 무얼 말하느냐?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말합니다. 예수님이 전파하신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입니다. 8장부터 9장까지는 예수님이 감당하신 하나님 나라의 성령사역을 대표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아주 중요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어느 날 산에 올라가셔서 그냥 한 번 가르치신 내용이 아닙니다. 당연히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 가르치셨습니다. 한 번만 가르치셨겠습니까? 수십 번 가르쳤을 겁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이 전파하신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핵심적으로 요약해 놓은 겁니다.
최근에 하나님이 이 부분을 너무나 선명하게 보이시면서 오늘만 하더라도 마태복음 11장에서 13장까지 연결부분을 보이시면서 보면 볼수록 마태는 진짜 주도면밀하게 성경을 쓴 거 같더라고요. 마태가 세리여서 그런지 몰라도 아주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던 같아요. 제가 가지고 있는 NIV성경 주석에도 그렇게 썼더라고요. 아주 주도면밀하게 나열하고 있다고요.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 나오는 이 구절이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인데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가 곧 무얼 말하느냐? 하나님 나라의 삶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그 삶을 살아야 됩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마태복음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삶을 살 것을 강력하게 촉구하고 계십니다. 그러한 자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마태복음8장과 9장에 나오는 하나님 나라의 성령사역을 각자에게 나타내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 그래서 강력하게 촉구하고 있습니다. 포도나무 교회에서도 이 부분을 주일 낮 예배 때 집중적으로 하나하나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마태복음 5장에서 7장에 나오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을 요약해서 핵심적인 부분들만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것을 좀 더 자세히 알기를 원하시면 지난 주일날 포도나무교회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인터넷으로 들어보십시오. 제가 1부 예배와 2부 예배 때 설교를 하는데 시간마다 다르더라고요. 2부 예배 때는 시간이 좀 더 많아서 인지 몰라도 하나님께서 하나하나 잘 펼쳐가게 하셨습니다. 오늘 전혀 안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찾는 자에게 발견되시는 하나님이시니까 그러면 인터넷으로 찾아서 들으세요. 그럼 우리 그렇게 하고 끝낼까요? 인터넷으로 들으세요.
그러면, 마태복음 찾으셨습니까? 5장부터 7장까지 볼 겁니다. 말씀드린 대로 마태복음 5장에서 7장은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 혹은 하나님 나라의 삶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들어가게 전에 여기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제가 뭐라 그랬냐면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 혹은 하나님 나라의 삶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냐? 삶이냐? 둘 중에 뭐냐? 이렇게 말하실 수 있는데, 이게 너무너무 중요하더라고요.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삶과 메시지가 나눠지지 않습니다. 나눠진 게 바리새인들입니다. 이것을 반드시 기억하셔야 됩니다. 우리 신앙은 삶입니다. 하나님도 그 부분을 강력하게 우리에게 촉구하고 계십니다. 우리 신앙은 삶이다.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는 하나님 나라의 삶을 말합니다. 우리가 먼저 그 삶을 살고 우리가 전해야 할 메시지를 말합니다. 여러분 동일한 마태복음 28장을 보세요. 거기 보면 마태복음 버전에 대위임령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28장
18절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절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열한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겁니다. 바로 그 위절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그러면서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 삼으라고 하신 게 명령입니다. 그런데 제자 삼을 때 두 가지를 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는 침례 줘라. 이 말은 예수 믿게 하라 그 말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침례는 단순한 의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믿음의 고백으로 받는 것이기에 이 배후에는 믿음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게 하라 말입니다 그 다음에 어떻게 하라고요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은 예수님이 열한제자들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저들에게도 가르쳐서 저들로 지키게 하라. 사실 여기에 보면 마태 5장~9장에 다 포함 된 내용입니다. 여기 보세요. 제자인데 제자 삼으라하는 이 제자가 목회자처럼 특별히 풀타임으로 복음의 사역에 자신을 헌신한 일부 기독교인을 말합니까? 아니면 모든 기독교인을 말합니까? 저는 이 제자를 다르게 해석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이 제자를 일부, 특별히 헌신된 일부 사람을 말한다면 이건 전혀 예수님의 명령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훼손시킨 거라 생각합니다. 여기에 말한 제자는 모든 기독교인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제 말을 잘 들어보세요. 심각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열한제자들에게 말하기를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서 저들을 예수 믿게 하고 내가 너희에게 예수님이 열한제자에게 부분한 모든 것을 저들에게 가르쳐서 그들로 행하게 하라. 그럼 우리 입장에서 본다면 우리가 먼저 예수님을 믿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열한제자에게 가르친 모든 것을 그대로 배워서 그대로 하는 것이 제자입니다. 그럼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모든 기독교인은 다 열한 제자처럼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하나님나라의 메시지. 이 말은 여러분들이 다 직장을 그만두고 풀타임으로 복음의 사역을 위해 섬기는 사람이 되라는 말은 아닙니다. 다 목사면 나머지는 누가 하겠습니까? 그러나 이 말은 여러분이 직장인이든지 학생이든지 교수든지 의사든지 주부든지 사무원이든지 군인이든지 누구든지 여러분이 예수 믿는 사람이면 여러분 모두는 주님과 복음의 일에 열한 제자처럼 헌신된 제자가 되어야한다는 말입니다. 명백합니다. 다른 선택이 없습니다. 다른 해석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먼저 그렇게 살아야 할 뿐만 아니라, 이제 어떻게 해요 우리도 다른 사람을 제자 삼아서 저들로 예수 믿게 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열한 제자들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저들에게 가르쳐서 저들이 지키게 해야 합니다.
여러분 이 하나만 보더라도 오늘날 교회에서 전파되는 메시지와 얼마나 다른가 볼 수 있습니다. 조금 후에 마태복음을 보면 더 말할 것 없이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도 먼저 볼 수 있는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삶과 메시지가 구별이 안 됩니다. 먼저 살아야하고 전해야 됩니다. 여기 마태복음 5장을 한 번 보실래요?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 하나님 나라의 삶인데, 이 세장은 또 명백하게 구분되어 있습니다. 5장은 하나님 나라의 기준을 말하고 있고, 6장은 하나님 나라에 우리가 헌신해야 할 의의 행실에 대해서 말하고 있고, 7장은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준, 의의 행실, 삶을 살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전체에 명백하게 나옵니다. 그러면서 5장 17절부터 보면, 우리가 이런 삶을 살되 우리의 신앙에 철저하게 하나님 말씀에 기초한 삶이 되어야 될 것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5장
17절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18절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20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보세요. 행함이 먼저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는 삶과 말씀이 나눠지지 않습니다. 행함이 가르치는 것에 먼저입니다. 바로 그 다음 절에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 구절이 한 두 부분에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의 삶을 살려면 이 이해가 아주 중요합니다. 보면 볼수록 여러 번 반복되는데 그 중에 하나가 뭔 줄 아세요? 바리새인들은 마태복음 23장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저들은 교리적으로 옳았어요. 왜냐면 예수님이 자기 제자들에게 저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저들이 말하는 바는 반드시 다 지켜 행하라고 명령할 정도였으니까 교리적으로는 다 옳았어요. 그러나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는가 하면 너희는 저들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러면서 저들은 말만하며 행치 아니하고 그랬어요. 바리새인의 의가 종교적인 의식을 말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발 벗고 따라가도 못 따라갑니다. 그들은 진짜 뛰어났습니다.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중 하나가 뭔가 하면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먼저 살고 전해야 돼요. 삶과 말씀이 구분이 안 됩니다. 가르침이 같이 갑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의 삶에서는 구분됩니다.
저와 여러분이 지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얼마만큼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는 여러분이 십자가의 복음을 몇 번 듣고 아느냐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여러분과 저의 삶을 보면 압니다. 그게 우리 신앙의 바로미터(기준,척도)입니다 포도나무교회에 내년에 일군이 스텝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일군을 찾으려고 해도 참 쉽지 않더라고요. 과거에는 얼마나 십자가의 복음을 잘 이해하고 하나님의 관점을 잘 이해하고 그 방면에 잘 세워졌는가? 이런 부분을 많이 봤습니다. 최근 들어서 하나님께서 이런 부분을 집중적으로 말씀하시면서 저 자신의 삶을 볼 때에도 제가 다른 사람을 볼 때에도 다른 각도에서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게 뭔가 하면 아무리 십자가 복음을 외우고 잘 가르쳐도 실제 삶에서 하나님 중심적인 삶이 안 되면 그 신앙은 가짜입니다. 그런데 십자가 복음을 전혀 안 들어봤어도 그 삶이 하나님 중심적인 삶이면 그것이 진짜 신앙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길은 그런 사람에게 가르치면 금방 배웁니다. 우리 신앙은 삶입니다. 하나님나라는 절대로 삶과 가르침이 나눠지지 않습니다. 삶과 가르침이 분리된 것이 바리새인들입니다.
하나님나라 백성의 삶을 살펴볼 때에 가장 먼저 우리가 이해할 것은 하나님나라의 메시지와 하나님 나라의 삶은 나눠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지금 우리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라고 촉구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말씀드린 대로 5장 1절부터 기준이 나오는데 5장 전체가 하나님나라의 기준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제일 먼저 5장에 나오는 것이 1절부터 우리가 흔히 팔복이라고 말하는 구절입니다. 팔복하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요. 이런 자는 이런 복을 받고, 이런 자는 이런 복 받고 그러니까 마치 우리는 복골 복이라 생각해, 이렇게 하면 이 복 받고 이렇게 하면 이 복 받고 이런 것처럼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조금 전에 문맥을 말씀드렸잖아요 5장부터 7까지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을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 하나님나라의 삶을 말합니다. 5장 전체가 하나님 나라의 기준을 말하는데 그러면서 뭐부터 시작하느냐 팔복을 말하는데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반드시 가져야할 올바른 마음의 자세를 말합니다. 혹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올바른 신앙 가운데 있으면 반드시 그 속에 있을 자세를 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가장 기본적인 자세는 심령이 가난한 것이고, 애통하는 것이고, 온유한 것이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이고, 긍휼이 여기는 것이고, 마음이 청결한 것 이 말은 하나님께 우리의 포커스(초점)가 하나로 맞춰져있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포커스가 여러 개 맞춰져 있어 하나님도 있고 세상도 있고 돈도 있고 명예도 있고 이런 게 아니라 초점이 하나님께 맞춰져 있는 그게 마음이 청결한 것입니다. 화평케 하는 것,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제 아내를 옆에서 보면서 하나님께서 특별히 관계의 문제에 대해서 많이 빗어 가시고 세워가세요. 하나님의 길을 보이시는 것 같습니다 저도 보면서 어떤 때 많이 참고합니다. 그런데 본인이 그렇게 했다기보다는 하나님께서 가르쳐 가십니다. 그 가르치신 것 중에 하나는 상대방을 볼 때에 긍휼의 마음으로 대하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어떤 사람의 문제가 있을 때에 옳고 그른 것을 따져서 누가 옳다 손 올려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옳은 길로 인도하되 화평케 하는 것에 목적을 두고 하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제가 나중에 보니까 하나님이 정확하게 뭘 가르쳤느냐면 하나님나라의 백성의 삶을 가르쳤습니다.
하나님나라 백성의 가장 기본적인 자세가 이거에요. 사실 하나님나라 백성의 삶을 자세히 살펴보면 알 수 있듯이 이 자세 하나하나가 없으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못 삽니다. 이 자세가 없으면 못 살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이 삶을 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보세요.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를 보세요. 과연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심령이 가난하며, 애통하며, 온유하며, 의에 주리고 목마르며, 긍휼히 여기며, 마음이 청결하며, 화평케 하며,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입니까?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사실 이 하나만 보더라도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나있는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 말고 저하고 여러분 말입니다. 얼마나 멀어져있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뭘 약속하고 계신가 하면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의 임재가 저들의 것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고, 저들이 위로를 받게 될 것이고, 땅을 기업으로 얻게 될 것이고, 저들의 목마른 것이 채워질 것이고, 긍휼히 여김을 받게 될 것이고,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자녀라 칭함을 받게 될 것이고, 천국이 저희 것이며, 그곳에서 상급이 클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게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받을 복입니다. 우리 신앙이 올바르게 되면 우리는 복이라고 소중히 여기는 이러한 것을 여기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기서도 옆으로 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복하면 그런 것을 생각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돈을 많이 버는 것이 복입니다. 스크루지처럼 배만 불러 가지고 뭐 하려고, 이 세상 떠날 때 다 지고 가시렵니까? 하나님 앞에서 너무너무 인색하고...
마태복음 6장에 의의 행실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예수님께서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세상적인 것을 추구하는 삶을 살지 말라는 그 말입니다. 돈 많이 버는 자체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목적이 돈 많은 것이면 그것은 이방사람들이 하는 것이다. 라는 겁니다. 너희는 그러하지 말아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돈 많이 버는 것이 인생의 목적된 삶을 살면 안 믿는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법도를 전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생명이 전혀 없는 이방인들이 하는 거야 그 얘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축복이라고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 만큼 시작부터 우리는 옆으로 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기본적인 자세에 대해서 말하고 난 다음에 뭐부터 말씀하셨는지 아십니까? 너무도 치밀하게 되어 있습니다. 진짜 귀합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그 다음 뭘 말하고 있습니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삶에 대해서 말하면서 가장 기본적인 자세를 말하고 난 다음에 우리 각자를 부르신 부르심의 소명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귀한 소명입니다. 세상에 빛과 소금으로 하나님이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거 아십니까? 소금이 썩으면 쓸데가 없다고 내어 버린다고 그랬죠? 초대교회 당시에는 불순물이 있어서 소금이 썩었답니다. 요즈음은 안 썩습니다. 소금이 썩으면 어떻게 했느냐 쓸데가 없어서 버렸습니다. 제가 주일날에 이야기 했지만 여러분 똥도 쓸데가 있습니다. 시골에는 똥 가지고 거름합니다. 그런데 소금은 썩으면 쓸데가 없습니다. 언제 썩는 줄 아십니까? 누가복음 14장을 읽어보시면 명백하게 나옵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삶을 살지 않을 때에 썩습니다. 하나님께서 포도나무 교회에 최근에 하나님께서 집중적으로 이 부분을 다루면서 기도시간에 말씀하시고, 설교시간에도 말씀하시고, 어떤 때는 설교하려고 섰는데 전혀 다른 부분을 설교하게 하시면서 말씀하시고, 다른 사람 감동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말씀하시는 바가 뭐였느냐면 이거였습니다.
제가 80년대에 미국에서 7년 동안 공부할 때에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집에서 도와주는 사람 없이 우리가 스스로 벌어서 먹고 사는 것도 쉽지 않은데 풀타임으로 공부하면서 애 셋까지 낳아서 살았습니다. 본업이 공부고 주의 종으로 부름을 받아서 복음의 삶에서 기꺼이 삶으로 헌신했고 저나 제 아내나 직장 계속 다니면서 벌었다면 훨씬 잘 살 수 있었겠지만 그것을 기꺼이 포기하고 주님 나라를 위해서 헌신하겠다고 헌신해서 또 주님께서 인도하신대로 그 사역을 준비하기 위해서 공부하러 갔으니까 공부하는 것이 본업이고 먹고 살아야 되니까 일을 합니다. 방학 때 같은 때에는 4시간씩 학교에서 청소하고, 남자화장실 여자화장실 저는 화장실 청소 많이 했습니다. 총장 화장실도 청소하고 3개월 동안 화장실 청소 했습니다. 방학동안 이면 바닥 까는 것 하고 그래서 제가 한국에 와서 할 일이 없으면 택시 운전사로 부업을 하든지 청소를 부업으로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어떨 때는 제 아내가 16시간 계속 일을 해서 너무너무 피곤해하기도 하고 저 같은 경우는 밤에 8시간 일하고 그 다음날 공부해야 했습니다. 저희가 신대원에 있을 때에는 일주일에 한 번씩 식료품점에 갑니다. 그런데 1시간만 지나면 싸우는데 빨리 안 끝낸다고 일주일에 한 시간 나와 가지고 그 만큼 바빴습니다. 바쁘면서 때로는 일하는 것이 미국사람들은 물론 박사과정에 있는 사람들도 다 일을 하기 때문에 전혀 아니지만 분위기가 그게 아니지만 청소하고 이 자체가 전혀 부끄럽지 않습니다. 힘들어도 힘든 것이 아닙니다. 왜요? 우리는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들이니까요 우리는 살아가야 할 목적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청소가 제 살아갈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저희는 특별히 한국 와서 목회할 생각을 했기 때문에 가구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살 돈도 없었지만 사면 뭐 합니까 어차피 놓고 갈 것인데 여러분 모두는 살아갈 이유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의 직장이 여러분의 살아갈 이유라면 여러분의 본마음이 전도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의 사업이 살아갈 이유라면 여러분은 사는 목적을 잃은 사람들입니다. 위에서 부르신 소명을 잃은 사람들입니다. 왜 사는지를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너무너무 안타까운 일입니다. 살아갈 이유를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되 보통으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부르셨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위대한 부르심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한 번 생각해보세요. 왜 본마음을 잃은 것인가 왜 살아가야 할 이유를 잃은 것이라고 제가 말하느냐구요? 왜 그 부르심의 그 놀라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잃어버렸다고 제가 말하느냐구요? 여러분들이 그걸 보셨으면 여러분의 삶이 그렇게 조정되어야 됩니다. 헨리 블랙가비 목사님이 하나님이 행하실 때 우리가 동참해야 되는 것을 행동을 두 가지로 나눴잖아요. 조정과 순종으로. 처음 듣는 분들은 잘 이해가 안돼요. 조종이 뭐고 순종이 뭐냐 그런데 그 분은 조정이 먼저 되어야 한다. 조정이 되어야 순종도 할 수 있다 조종이 안 되면 순종이 가능하지 않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잘 안 될 것인데 이 이야기입니다. 너무나 정확하게 잘 말한 겁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임하셔서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건질 계획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알렸을 때 모세가 먼저 하나님의 계획에 맞춰 자기 삶이 조정되어야 했습니다. 이렇게 하려면 자기와 자기 모든 가족들의 목숨을 담보하는 일도 포함되었고 그 동안 40년 동안 편안하게 안전하게 일해 왔던 모든 둥지를 떠나서 전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로 발을 내딛어야 했고 인간적인 관점은 전혀 불가능하지만 하나님만 의지해서 삶을 조정해야 했어요. 그리고 조정했을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느냐 구체적으로 인도하시죠. 이렇게 하고 이렇게 해라 그렇게 순종하니까 역사하셨습니다. 여러분 모세가 아무리 하나님의 놀라운 뜻을 보았을지라도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삶이 조정되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뜻은 절대로 이뤄지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체적인 인도는 있을 수가 없었을 겁니다. 왜요? 조정이 먼저 되어야 순종이 가능하니까요. 여러분이 위에서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진짜 본다면 그 부르심에 맞추어 삶이 조정되어야 합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 부르심을 위해 우리 삶이 투자되고 나머지는 그 부르심의 삶을 살기 위해 살아가는데 우리가 먹는 것도 필요하고 입는 것도 필요하기 때문에 그 부르심을 위해 우리 온 삶이 투자되고 초점이 맞추어지되 우리가 그 일을 살기 위한 수단으로서 그 일을 채우기 위해서 일을 하는데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 부르신 부르심을 잊었기에 부수적인 것이 주목적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었는가? 맛을 잃은 소금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만큼 심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저희들에게 반복적으로 포도나무 교회만 하더라도 의에 행실에 대해서 말씀하세요. 6장에 나올텐데... 그런데 왜 그게 안 되는 줄 아십니까? 삶이 조정되어 있지 않은데 어떻게 의에 행실이 가능합니까? 부르심을 향하여 삶이 조정되어 있지 않은데 어떻게 의에 행실이 가능합니까? 여러분은 목회자가 아니더라도 여러분 모든 위에 계신 그 분에 의해 이 세상에 빛과 소금으로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부르심을 가진 자들 입니다.그럼 그것에 맞춰 삶을 조정하셔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이 그렇게 조정되어지면 여러분이 임대 아파트에 살아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사는 이유는 세상의 더 많은 돈을 갖는게 아니니까 여러분은 살아가야하는 목적이 있는 사람들이니까 부끄럽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그 삶을 살기 위해 여러분의 가족의 먹을 것을 위해 아르바이트하고 수고해서 땀을 흘리며 기름 범벅 되어서 사람들이 보기에는 천하게 보일지 몰라도 그게 부끄럽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살아갈 이유가 따로 있는 사람들이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여러분의 온 삶으로 아버지의 부르심에 동참할 것이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촉구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동안 신앙의 본질, 십자가의 복음을 많이 들었는데 그래서 오늘날 우리 신앙을 어떤 사람들은 종교적인 의식 몇 가지하고 그저 살아가는 것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가면서 그러면서 하나님은 그 세상 사람들처럼 살아가는 그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은 도와주는 수단으로 전략해버린 그러면서 의식 몇 가지 하면 하나님이 도와 줄 것이라 생각하는 너무너무 타락한 기복신앙, 율법주의, 인본주의로 가득한 하나님 앞에 가짜인 그렇게 살아가는데 그게 아니고 우리 신앙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요. 우리 신앙은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온 삶으로 동참하는 것이고, 그러한 삶을 살기 위해 오직 은혜의 삶, 오직 믿음의 삶, 오직 십자가의 삶, 오직 성령에 의한 삶, 철저한 말씀에 기초해서 그러한 삶을 사는 것이 우리 신앙이라고 여러분들이 배웠으면 이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이것을 배웠을지라도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지 아니하면 그것이 율법주의입니다. 그것이 바리새인입니다. 위에서 부르신 부르심의 상급을 바라봐야합니다. 우리에게는 살아가야할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는 이 땅에서 살아가야할 이유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마태복음 5장에서 시작하신 다음에 그 다음에 집중적으로 기준을 드러내십니다. 살인에 대한 기준, 형제 욕만 해도 지옥 불 갈까 염려하라 간음에 대한 기준, 여자를 보고 남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자를 보고 음욕을 품어도 간음했다. 이혼, 이것은 간음과 같이 갑니다. 한 때는 한사람하고 살지 모르지만 번갈아 살면 간음이니까 이혼에 대해서 말하고 그 다음에 맹세에 대한 기준, 원수에 대한 기준, 그런데 여기 보십시오. 이거요 저와 우리들의 노력으로 자원으로 됩니까? 안됩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뭐가 필요하는가? 조금 전에 말씀드린 대로 심령이 가난한 것이 필요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것이 뭐에요? 사도 바울처럼 우리 속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어떠한 것도 없으며 우리 자원의 노력으로는 우리의 자원만 가지고는 우리 육신의 노력으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리에 전혀 설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철저히 인식하는게 가난한 마음입니다. 그 다음에 애통하는 것이 뭡니까? 그러니까 나는 그 하나님이 의도하신 자리에 서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오늘도 절박하게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여 하나님 앞에 애통함으로 서는 자. 그래서 하나님께서 일곱 가지 자세를 말하면서 가장 먼저 이 두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기준을 요약하면서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시는지 아시죠? 우리가 잘 아는 대로
48절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제가 이번에 안식월 맞이해서 IHOP의 마이클 비클 목사님이 섬기고 있는 play room 이라고 24시간 기도하는 곳이 있는데 거기서 약 20일간 쉬었어요. 쉬면서 매일 기도실 가서 경배하고 주님 찾고 있을 때 저는 거기 앉아서 같이 기도하기도 하고 성경 보기도 하고 그동안 십자가 복음 중보판을 다 썼습니다.책도 쓰기도 하고 그랬는데... 마이클 비클 목사님께서 이 구절을 말씀하면서 우리는 이 구절을 우리의 어떤 목표라 이렇게 하고 그냥 넘겨버린다는 겁니다. 실제로 우리의 삶에서는 어떠한 영향도 없는 그냥 목표일 뿐. 그냥 기준인. 아무런 영향도 못 미치며 그냥 넘어가버리는.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이 아는 모든 하나님의 기준에 철저히 서되 90% 95% 98% 서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서는 것처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신 것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으로 보이신 하나님의 기준에 80%, 90% ,95%, 98%가 아니라 온전히 서고자 하는 분명한 결단이 있어야 한다.”그게 있어야 가난함도 나오고 그게 있어야 애통함도 나오고 그게 있어야 주님 앞에 서게 됩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사람마다 인도해 가시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우리의 삶을 다루시고 빗으시며 우리에게 보이신 하나님의 기준과 우리를 인도하시는 바가 다 다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보이신 것을 온전히 순종하고자 하는 결단 없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그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선별적으로 환경에 따라서 자기 생각대로 그저 몇 가지만 부분적으로 순종하고 나머지는 넘어가면서 그거야 기준이죠. 그렇게 넘어가 버릴텐데 여러분의 삶은 지금 어떻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우리 신앙은 삶이라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이제는 그저 이론적으로 아는 것이 안다는 것이 전혀 아님을 실제로 깨닫고 털고 일어서서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삶과 가르침이 절대로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삶으로 서야 합니다.
그러면 6장은 뭔가? 6장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헌신해야할 의에 행실을 말합니다. 사실 6장 1절은 의에 행실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했는데. NIV성경에 보면 "Be careful not to do your 'acts of righteousness' before men,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 앞에서 너희의 의에 행실을 행하지 않도록 주의 하라. 의에 행실 'acts of righteousness' 따옴표가 붙어 있어요. 그것을 말하는 겁니다. 여러분 요한 계시록 19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 날에 어린양의 혼인 잔치가 있을텐데 어린양의 신부가 예비하였으니 어린양이 올 것이라고 말하면서 오시면 신부에게 세마포를 줄 것이라 했는데 그 세마포에 대해 말하면서 19장 8절에 성도들의 의에 행실이 세마포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드리는 의에 행실이 그 날에 입을 세마포입니다. 그러면서 여기 6장만 하더라도 4가지 종류를 말합니다. 의에 행실이 이것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을 대표적으로 말하지요. 그 4가지가 뭐지요? 기도, 금식 여기서 기도도 우리의 필요를 위해 채워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주기도문 가르쳐주신 것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는 겁니다. 중보기도를 말합니다. 그 다음에 금식, 구제 헌금을 말합니다. 하늘의 너희의 보물을 쌓아둬라. 그러면서 여기에 공통적으로 말하는 바는 사람에게 보이도록 하지 말라. NIV보면 그 당시에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외식을 했는지 볼 수 있습니다. 너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다 낫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했지요? 여기도 해당됩니다. 그들은 이랬던 것 같아요. 길가에서 구제할 때 나팔을 불었던 것 같아요. “지금부터 바리새인 누구누구 씨께서 고아원을 위해서 헌금을 하시겠습니다.” 이랬던 것 같아요. 여기 보세요. 그들이 구제할 때, 그들이 헌금할 때, 그들이 기도할 때, 그들이 금식할 때 그랬던 것 같아요. 너희는 그들보다 나아야 된다 그 말입니다. 그러면 이 말은 무명으로 헌금하라 그 말이 아니라 아버지의 행하심에 주께 하듯 하라. 그 말입니다
여러분 포도나무교회에서 여기 오게 된 게 이 방면을 하나님께서 가르치시려고 뭐 한 줄 아십니까? 좀 전에 말씀드린 대로 기도 중에도 말씀하시고 설교하다가 인도해가시고 어떤 때는 성경 보는데 보이시기도 하셨어요. 하나님께서 인도해가셨어요 그런데 인도해 가신 과정이 뭔지 아십니까? 지금 우리가 비전프로젝트라고 해서 건축헌금 앞으로 하나님께서 포도나무에 주시는 비전들을 위해서 비전 프로젝트헌금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육관을 짓는데 드려지기도 했고 나름대로 했습니다. 어떤 때는 급할 때도 있었고, 그런데 제가 미국 가서 급해서 인터넷 생방송을 보는데 깨끗하게 나오더라고요. 하다 보니까 재직들에게 먼저 마음에 품고 기도하라고 했는데 어떤 때는 광고도 안하고 어떤 때는 한 두 마디만 나가고 그 절박성을 전혀 모르는 거 같더라고요. 그러니까 어떤 때 성질이 나더라고요. 아니 재직들이 먼저 앞서서 해야지. 그래서 글을 쓰기도 하고 그러나 너무나 감정이 배여 있어 제가 그다음 날 주일날 교회 가서 예배드리는데 얼마나 회개가 되어지는지요. 그것을 지울까 하다가 그것이 또 사실이니까 남겨놓기도 하고 교회 와서 그렇게 나눴는데 여러분 전혀 헌금을 안 한 것이 아닙니다. 나름대로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기록상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데 교회 회계들의 회계하지만 보고서가 올라오니까 제가 보고서 건축헌금을 정리해놔서 포도나무 교회 건축헌금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대강 건축헌금을 어떻게 한지 알고 있거든요. 지금 포도나무 교회 성도가 몇 명인데 지금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의에 행실에 동참하는 자세로 한 사람도 일부 있지만 아주 작은 수에 불가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어떤 때는 헌금 이야기를 해도 한 쪽 귀로 듣고 한 쪽 귀로 흘러버리는 것 같아요. 그리고 어떤 때는 한 달에 7만원 나오기도 하고 어떤 때는 30만원 나오기도 하고, 어떤 때는 100만원, 200만원 나오기도 하고 그러더라고요. 그럼 어떤 분들은 뭐라고 하냐면 이렇게 생각하겠죠? 지금 우리가 얼마나 경제적으로 어려운데 성도들의 어려운 상황을 알아야지. 제가 마치 아무것도 모르고 헌금만 강조하는 사람처럼, 어떤 때는 저도 제가 그렇게 생각되니까 그런 이야기 안하려고 주일 2주전만 하더라도 1부 예배 시간에 헌금기도 하려고 눈을 감았는데 하나님께서 이 감동을 주셔서 나눠라고 어려울 때 일수록 위축 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려야지. 그런데 제가 이렇게 과정을 거쳐 오면서 이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이신 겁니다. 우리의 모습을, 저의 모습을, 포도나무의 모습을 여러분의 모습은 아니길 바랍니다. 뭘 보이셨는가 하면 좀 전에 말씀드린 대로 우리의 부르신 부르심의 비전을 우리가 잃었어요. 거기에 삶이 조정되어 있지 않아요. 그러니까 의에 행실을 드리는 것은 가능하지 않아요. 하나님께 적선하는 듯이 일부는 드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만원, 이십 만원, 조금 돈 있는 사람은 백 만원, 오백만원, 천만원 이렇게 드릴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삶이 위에서 부르신 부르심을 위하여 준비되어 있지 않으니까 드려지지 않으니까 의에 행실을 이야기 해봐야 소귀에 경 읽기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것이 다른 사람이 아니고 우리가 라오디게아 교회이더라고요. 라오디게아 교회보고 안일하다고 했는데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세상에서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안일한 겁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의중에 있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의중에 있는 열정을 가지고 추구하고 계시는데 오늘날 대부분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의중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고 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그 하나님의 의중에 있는 것들을 향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열정이 그 속에 있지 않아요. 다시 말하면 우리가 눈멀었어요. 우리가 보지 못해요.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뿐 만 아니라, 그 위에서 부르신 부르심의 비전을 향하여 우리의 삶이 조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적선하는 식의 헌금 외에는, 봉사 외에는, 기도 외에는, 금식 외에는, 중보기도 외에는, 없어서 우리에게 의에 행실이 없어요. 우리가 바로 벌거벗은 라오디게아 교회에요. 너희가 눈멀었고 너희가 벌거벗었다 그랬는데 우리가 철저하게 벌거벗었어요.
그리고 믿음만 하더라도 연단한 금을 사라고 그랬는데 예수님이 우리의 보화가 되는 삶이 바로 그 믿음인데 우리는 그 설교를 수 없이 들었을지 몰라도 실제 우리의 삶에서 예수님이 금이 아니에요. 돈이 금이고 직장이 금이고 더 좋은 집이 금이고 세상에 성공이 금이고 출세가 금이고 세상에서 안락한 삶이 금이고 그렇기 때문에 바로 우리가 너무너무 철저하게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안락함에 빠져서 눈멀고 보지 못하고 벌거벗고 가난한데도 그 사실도 깨닫지 못하는 그러니까 우리는 환경만 보지 통치하고 주권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전혀 볼 수 있는 눈이 우리에게는 없는 그것을 보게 하시더라고요 ...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이 부분을 깨닫게 하신 겁니다. 그래서 마지못해서 제가 포도나무 교회에 이렇게 하자고 했어요. 십일조 안 드리면 도둑질 하는 거니까 십일조 드리고 미니멈으로 더 할 수 있는 사람은 하되 또 다른 십일조를 비전헌금으로 드리자 매월. 마이클 비클 목사 그 팀들이 이렇게 하더라고요. 목사님이 그렇게 하면서 가르치니까 많은 분들이 이렇게 하나 봐요. 한 달에 생활비가 4천불 든다. 그러면 4천불 버는 사람 모자라도 십일조를 드려야지요. 우리가 우리의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다하고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채우실 거라 약속하셨어요.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지 않으면서 세상에 사람들이 추구하는 대로 그대로 추구하면서 자기 원하는 것 안 채운다고 떼쓰니까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6천불 버는 사람이 있다 4천불로 살면 되잖아요. 그러니까 그 사람은 십의 이조 삼조를 드릴 수 있다는 겁니다. 한 달에 만 불을 버는 사람이 있다 생활비 4천불이 필요한데 그러면 십의 육조도 드려도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드려요 보화를 하늘에 쌓아두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게 너무나 낯설게 느껴집니다. 살아가는 목적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으니까...
여러분 제가 가르치는 것이 어떻게 보면 너무나 극단적으로 느껴질지 모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읽어보시고 복음서를 읽어보세요. 성경이 말하는 우리의 신앙은 Radical한 신앙입니다. 바로 이런 시대에 근본적인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없이 이 시대를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종교적인 모양가지고 온 세상에 모든 흔들릴만한 것이 다 흔들릴 것이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실제적으로 나타나는 이 시대에 여러분이 승리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은 지금 우리를 부르시되 하나님나라 백성의 본연의 자세의 삶으로 부르시고 계십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은 매우 Radical한 삶입니다. 우리말에 뭐라고 변역해야 할지 그 삶으로 그리고 그 삶을 살면서 위에 있는 부르심을 향해 살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능력으로 뒷받침하셔서 하나님이 각 성도를 소수의 소위 말하면 안수 받은 소수의 신학교 나온 일부 스텝들이 아니라 각 성도를 하나님 목적을 위해 지금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이 시대에 그 분의 목적을 위해 여러분의 자리에서, 여러분의 직장에서, 여러분 이웃에서, 여러분의 나라에서, 이 세계에서 우리가 드리는 찬양 중에 이런 찬양이 있습니다. 주의 행하심을 듣고 놀라고 감격합니다. 주의 일을 새롭게 하소서. 이 시대에 이 나라에 이렇죠? 원래 제가 번역한 겁니다. 원래 그 가사에는 in now days, in now times 이 시대에 이 시대에 약간 다른 말로 번역 되었는데 제가 이 나라에 그랬습니다. 우리나라에 부흥 임해 달라고 그런 마음에서. 그런데 지금은 이 시대에 이 시대에 그렇게 합니다. 왜? 우리나라에만 부흥이 임해야 될 것이 아니니까 하나님이 우리나라에만 관심 있는 게 아니니까 그런데 그렇게 일꾼을 쓰기를 원하시는데 어느 때까지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세상의 부나 명예나 세상 것들을 추구하면서 하나님께서 부르신 본 소명은 잃어버린 채, 부수적이 되어야 할 것이 여러분의 목적이 된 지금 그야말로 나약한 모양뿐인 조그만한 문제 앞에서 와르륵 무너지는 신앙생활을 하며 살면서 왜 하나님이 안도와주느냐고, 왜 하나님은 어디계시느냐고, 하나님께 원망하면서 어느 때까지 살아가시겠습니까? 의의 행실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저희도 금식도 말씀하셔서 저희가 다음 달 부터인지 최소한 내년부터 1월부터는 반드시 시작하려고 하는데 12월부터는 할 계획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한 달에 3일은 전교인이 금식하려고 합니다. 직장 다니는 사람도 과일 먹으면서 금식 할 수 있고, 쥬스 먹으면서 금식 할 수 있으니까. 쫄딱 굶는 자체가 금식하는 것은 아니니까 주의 나라를 위해서, 주의 부흥을 위해서,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그것이 주님 앞에 설 때에 입고 설 성도들의 세마포입니다.
마태복음 25장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양과 염소들을 갈라놓은 사건.
마지막으로 7장은 우리 신앙은 삶이다. 라는 겁니다. 그리고 좀 전에도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께서 바리새인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 할 거라 그랬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부분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7장 전체를 보세요. 거기 보시면 진짜와 가짜는 뭘로 구분된다? 삶으로 구분된다. 그러면서 나무와 열매를 말합니다.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안다 사실 우리를 구분하는 것도 삶을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내가 내 자신을 보는 것도 삶을 보아야 합니다. 내가 지금 신앙이 올바른 가운데 있는가? 내 삶을 보아야 됩니다. 말이 아니라 이론이 아니라, 경험이나 경력이 아니라, 은사가 아니라 내 삶을 보아야 됩니다. 그 뿐만 아니라 거기 뭐라고 되어있어요? 진정한 제자 은사가 많이 나타나지만 주님께서 전혀 저들을 알지 못하는 그들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 구분 되지 않습니까? 또 어떤 자들 입니까? 거기에 보시면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 둘 다 뭡니까? 하나님 말씀은 다 들었습니다. 예수님 말씀은 다 들었습니다. 그런데 반석 위에 지은 자는 행하는 자고 모래 위에 지은 자는 행치 않는 자고 7장 내내 강조하고 있는 것은 우리 신앙은 삶이다. 진짜와 가짜는 삶으로 구분된다. 이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7장 1절에 뭘 말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진짜 주도면밀하게 씌어 졌습니다. 7장 1절부터 뭘 말하고 있는지 아시지요? 성경에 뭐가 나옵니까?
마태복음 7장
1절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절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3절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 느냐
4절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절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여러분 이것이 왜 여기 나와 있는 줄 아십니까? 이것이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을 삶의 관점에서 보면 자기의 삶을 삶의 관점에서 보면 자기가 하나님의 길에서 얼마나 멀어져있는가를 보면 그래서 애통하는 심령으로 내가 주님 앞에 서기 위해서 가면 다른 사람은 안보이게 되어있습니다. 안보입니다. 나라도 가면 되지. 주님 저 혼자라도 가겠습니다. 저에게 은혜를 부어주세요. 주님이 의도하신 그 자리에 제가 있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저 혼자라도 가면서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주위 사람들을 섬기고 주위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길을 제시하고 주님을 의지하면 주님이 저들을 만지실 줄을 믿습니다.
이렇게 주님만을 보기 시작하는데 자기가 주님 안 따라가면 누가 보이느냐? 다른 사람이 보입니다. 왜 저 사람은 율법주의, 저 사람은 기복신앙이구 저게 무슨 신앙생활 하는 거냐? 난 저 사람 예수 믿는 사람인 줄 몰라서 모양새를 보니까 여러분이 주님 안 따라가면 다른 사람을 봅니다. 그러면서 성경은 뭐라고 말하느냐면 너희가 바로 외식하는 자들이라 이렇게 말합니다. 어찌하여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상대방 속에 있는 티끌을 빼겠다고 하느냐. 이게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7장에 나온 이유가 있습니다. 올바른 자세는 말씀드린 대로 나 혼자라도 가리라 그 자세입니다. 제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으면 성도들이 다 안 따라와도 하나님 저 혼자라도 가겠습니다. 물론 저하고 제 아내라도 가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주님 안 따라가면 왜 집사님이 저래. 속으로 그런 생각이 듭니다. 금방 회개하지만 왜? 그렇게 하면 시험에 드니까 그게 죄니까 그리고 여러분 이 삶을 살려고 할 때 마지막으로 여기 뭐가 있습니까? 좁은 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마태복음 7장
13절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 어가는 자가 많고
14절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이것이 너무나 귀한 말씀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는 지혜를 구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능력을 구하는 자들에게는 거치는 것입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지혜의 능력입니다. 여러분들이 주님 안에서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의 강함을 추구하면 여러분은 절대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지 못하는가? 세상에서의 강함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기꺼이 세상의 스티그마를 지고 주님이 가신 좁은 길을 가는 겁니다. 거기에 십자가의 능력이 있습니다. 제가 말해도 여러분은 그 의미를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거기에 십자가의 능력이 있습니다. 삶을 살 때에 좁은 길을 가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오늘날 세상적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관점과 똑같은 관점으로 세상에서의 강함을 추구하는지 그것도 하나님을 빙자해서 좁은 길을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들어본 적이 너무너무 오래 되어서 그게 과연 성경에 있나 생각 될 정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하나님 나라의 삶으로 초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을 사는 자들에게 마태복음 8장과 9장에 말씀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성령의 사역이 나타나도록 그 능력을 부으시고 그 권세를 부으시고 하나님이 친히 주도권을 잡으시고 여러분의 삶에 역사하실 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기를 열망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이번 집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비전이 선명하게 보여지는 계기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을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이 보여지기를 축원합니다. 단순한 은사와 더 많은 능력이 아니라 진짜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삶이 조정되어 지고 그 하나님 나라를 위해 보다 큰 능력과 은사를 사모하는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삶과 사역이 여러분 삶 속에 놀랍게 나타나되 말씀과 성령의 조화 성령의 능력과 성령과의 교제가 조화를 이루는 그 삶 가운데 예수님의 삶이 여러분의 삶 속에 재현되어 지고 여러분을 통해 예수님의 사역이 지속되어지는 바로 이 시대에 하나님의 목적에 귀하게 쓰임 받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주님 안에서 축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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