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차 십자가 성령 컨퍼런스
첫 번째(부흥의 필수성)
- 여주봉 목사 -
이번 19차 십자가 성령 컨퍼런스 주제는 "회복과 부흥"입니다. 예전 같은 경우에는 거의 같은 내용으로 다뤘는데, 이번에는 목회자 컨퍼런스 주제는 "회복"이었고, 평신도 컨퍼런스 주제는"부흥"입니다. 지난주에 목회자 컨퍼런스를 했었는데, 하나님께서 참 묘하게 함께 하셨습니다. 저는 목회자 컨퍼런스를 마치면서 ‘이 컨퍼런스만 해도 하나님의 뜻은 충분히 이루어졌다’라고 생각할 만큼 하나님께서 크게 함께 하셨습니다.
제가 수년 전에 필리핀에 사역을 갔는데, 주로 필리핀 현지 목회자 사역을 했습니다. 그때 필리핀 한국교회, 선교사님들, 그리고 성도님을 섬기게 되었는데 멀기 때문에 자주 가서 할 수가 없어 1박 2일 네 타임에 걸쳐 현지에 계신 분들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짧은 기간에도 하나님께서 크게 함께 하셨습니다. 제가 집회를 마치고 나서 ‘이번 집회만 해도 이 필리핀에 온 목적은 충분히 마친 것 같다.’ 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지난주에 있었던 컨퍼런스 역시 그랬습니다. 우리 포도나무교회 한 지체가 평신도 컨퍼런스를 위해 기도하는데, 평신도 컨퍼런스 때에는 하나님께서 더 함께 하시겠다고. 그리고 이길수 목사님 사모님이, 아마 하나님께서 그런 감동을 주신 것 같은데, 두 번째 무리들이 모여 있고 물이 쏟아지는데, 두 번째 무리들이 받을 준비가 안 되어 있더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저 더러 하시는 말씀이신 것 같았습니다. 지난주에 하나님께서 참 놀랍게 함께 하셨는데, 그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이번 주간에 이루실 그리고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실 놀라운 은혜를 사모하라 하시는 말씀 같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계획하시고 의도하신 바를 다 이루시고 우리에게 놀라운 은혜를 쏟아 부어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아멘.
오늘 첫 번째 시간으로 부흥의 필수성에 대해서 설명하기 원합니다. 오늘날 어떠한 때 보다 더 부흥이 절실하게 필요한 때입니다. 이 시기에 하나님의 교회의 회복과 부흥에 대해서 매우 중요한 성경 구절이 저는 이사야 하반부라고 생각합니다. 이사야 40장부터 66장까지. 이사야 하반부 대부분이 회복과 부흥입니다. 이사야 하반부에는 세 가지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서로 얽혀있는데, 이사야 하반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사항을 염두 해 두고 쓰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첫째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에서 회복될 것을 얘기하고 있고, 구약의 대부분 예언서들이 그런 것처럼 회복과 더불어두 번째 회복의 약속이 추가로 더 들어 있습니다. 두 번째 종류의 약속은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백성의 구속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이사야 하반부에 보면, 어느 구약성경 보다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예언이 많습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이사야사를 제 5복음서다 또는 구약의 복음서라 합니다. 약속은 이미 성취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하반부에 보면, 또 하나의 약속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의 회복과 부흥의 약속입니다.
특별히 오늘날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하나님의 교회의 회복과 부흥에 대한 필수적인 요소들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지난 2천년 동안 하나님께서 부흥을 많이 보내셨는데 참 놀라운 것은 부흥에 대한 책을 보면, 그 부흥을 보내실 때 마다 예외 없이 그러한 부흥이 이사야 하반부에 나온 그 조건을 충족해 오셨고 그리고 그 토대 위에서 성경대로 이루어 가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조건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십자가의 복음에 서는 것. 이사야서 54장 같이 갈라디아 4장 27절 31절 보면, 이사야서 54장 1절을 인용하시면서 그 유업이 이삭에게 주어질 것이다. 이스마엘에게 절대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이삭은 십자가의 복음을 대변하고, 반면에 이스마엘은 거짓 신앙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철저하게 십자가의 복음 위에 유업이 주어질 것을 말씀합니다.
두 번째는 신앙의 본질에 서는 것
세 번째는 중보기도
네 번째는 말씀과 성령의 조화
다섯 번째는 얼굴 없는 섬김
여섯 번째는 구별된 삶
일곱 번째는 금식하는 삶. 또한 이사야 후반부에는 하나님의 다루시는 숨겨진 삶에 대해 다루기도 합니다.
이 시점에서 저는 이사야 하반부에 약속과 관련해서 두 가지를 간단히 언급하고 넘어가려고 합니다.
첫째는 교회회복과 부흥에 대한 약속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 드린 것 같이 이사야 하반부에는 세 가지 약속이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같이 섞어있는 거죠. 거기서 볼 수 있는 것은 첫 번째 회복이 이루어지는 것이 두 번째 회복에 대한 증표이기도 했습니다. 즉, 이사야 하반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 있는 것을 염두 해 두고 쓰여 진 것입니다. 나라가 완전히 패망하고 예루살렘은 잿더미가 되어 초토화가 되고 대부분의 백성들 특히 쓸 만한 사람들은 포로가 되고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쓸모없는 사람들만 남겨져 있고 잡혀온 사람들은 그 당시 바벨론 이라는 강대국 사람들의 노예가 되어 그들의 만족과 필요에 의해 종살이 되어 있는 사항. 여기에서 벗어나리라는 것은 감히 생각할 수 없는 사항이었습니다. 이런 사항 속에서 회복되리라고는,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시켜 준다 한들 인간적인 상황에선 전혀 불가능한 사항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바벨론이 메데 바사 군에게 멸망하게 되었고. 그래서 초대 왕인 고레스 왕이 바벨론을 멸망시킨 후에 고레스 왕 원년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유다 땅으로 돌아가서 예루살렘을 중건하도록 칙령을 내려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계 역사를 이끌어 가시면서 전혀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일을 이루신 것입니다. 이 약속은 이제 이사야 하반부에 고난의 종으로 메시아를 보내셔서 인류의 구속에 대한 일이 이루어질 것에 대한 물리적 증표, 싸인 이기도 합니다. 이사야서 9장에서는 영존하신 하나님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당연히 이사야도 그 말이 무엇인지 몰랐겠고, 학자들도 예수님이 오시기전까지 그 말을 알 수 없었죠. 우리가 알진대, 영존하신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이사야 에서는 그 일을 "하나님의 열심" 이 그 일을 이루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하나님의 본체 되신 분이 동정녀의 몸을 통해 오셔서 십자가 못 박혀 죽으심으로 이사야 말씀을 이루셨습니다. 첫 번째 약속이 이루어짐은 두 번째 약속의 성취에 대한 증표로 나타나는데, 하나님께서 그토록 열심히 그 뜻을 이루신 것입니다. 이 두 사건이 하나님께서 교회를 회복시키실 것에 대한 중요한 역사적인 증표가 되는 것입니다.
2000년 기독교 역사만 보더라도, 오순절에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서 초대교회 당시 이루신 것처럼 그러한 능력이 그 시대에 다시 나타난다는 일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처음 두 약속을 권능으로 이루신 것처럼 2000년 역사를 거쳐서 우리 인간으로 보기에는 가능할 것 같지 않은 하나님의 교회의 놀라운 회복과 부흥을 시대마다 나타내셨습니다. 특별히 말세지 말에 그 어느 때보다 하나님께서 그 일들을 더 놀랍게 이루실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사야 하반부에 말씀하신 회복과 부흥에 대한 이 세가지 약속이 깊이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처음 두 약속이 성취되었듯이 교회의 회복이 이루어질 것이고 하나님의 부흥이 전 세계에 걸쳐 일어나게 될 것이라는 것이 이사야 하반부에 나타나는데 그 약속이 이루어질 것에 대한 물리적인 증표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 여기에서 제가 언급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은 바로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이사야 하반부에 나타나는 회복과 부흥의 약속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교회의 회복과 부흥에 대한 약속을 이루시기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궁극적으로 말세지 말에 이루실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질 때가 이 시대라는 것은 아닐지라도, 이사야 하반부에 나온 회복과 부흥의 관한 하나님의 유업을 바로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제시하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저는 매우 깊은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개인적으로 하나님께서 저에게 기도나 성경을 통해서 많은 약속들이 이사야 하반부를 통해서 주셨던 것을 많이 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일을 이루어 가시는 것을 보겠더라고요. 한 예를 들면, 포도나무 교회가 개척된 지 약 5년 되었을 때 한 단지 내 아파트 상가 3층에서 조그맣게 시작되었다가 상가 지하전체를 교회로 세울 일을 추진하려는 중에 생긴 일이었는데, 항상 그렇듯이 저희는 돈이 전혀 없는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에 따라 가는 상황가운데 있었죠. 그때 하루는 제가 성경을 읽는데, 하나님께서 저에게 이사야서 54장 1절에서 3절 말씀을 또렷하게 주셨습니다. 그 이사야서 54장 1절에서 3절 말씀이 이러했습니다. "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구로 치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네 장막 터를 넓히며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되 너의 줄을 길게 하며 너의 말뚝을 견고히 할지어다. 이는 네가 좌우로 퍼지며 네 자손은 열방을 얻으며 황폐한 성읍들로 사람 살 곳이 되게 할 것 임이니라." 저는 그 당시에 어떻게 생각했냐 하면, 그 당시 3층 좁은 곳에서 지하 넓은 곳으로 구입하기 위해 가는데 돈은 전혀 없는 상황에서 옮기려는 때였습니다. 선교회 예산만 해도 쓰고 100만원이 안 남는 때였고, 매월 100만원이 안 남는다는 것이 아니라, 매월 쓰고 남아도 잔고가 100만원이 안 되는 상황이었고, 교회 예산도 필요대로 지출하고 남은 잔고가 100만원이 안 될 때, 두 개 합쳐서 200만원이 안 될 때인데,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실 평수 만해도 150평이 넘는, 분양평수는 200평이 되는 그러한 분당의 상가를 구입한다는 것은 전혀 가능하지 않은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장막 터를 넓히며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라고 하셨기에, 저는 ‘하나님께서 채우실 그런 약속을 주신다.’ 라고 이 구절을 이해했습니다. 당연히 하나님께서 그 모든 필요를 채우셔서 하나님의 일을 다 이루시고 구입하게 하셨는데, 제가 그 이후로 그게 단순히 새로운 처소에 대한 구입을 약속하신 것이 아님을 발견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이후로 새물결선교회 사역만 보더라도 열방 가운데 확장시켜 가셨죠. 갈라디아 4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하나는 정실부인 사라에게 난 이삭과 하갈에게서 난 이스마엘을 거짓신앙을 대유 하면서 이사야서 54장 말씀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유업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회복과 부흥이 십자가의 복음에 대한 것을 말씀하십니다. 십자가 복음의 유업은 열방을 커버하실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열방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김주림 선교사님께서 일본사역 차 오셨다가 들르셨습니다. 우리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갔을 때 선교사님께서 2번 참석하셨는데, 그분이 보내신 메일에 의하며 그분이 그곳에서 십자가의 복음에 대한 책을 가지고 한 과씩 목회자들과 나누시면서, 본인이 더 놀라시고, 그 현지 목회자들이 그 십자가의 복음을 성도들과 나눌 때 서로 울며 회개하는 역사가 있었고, 흑백 분리 주위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흑인 목사님 공부하시는 곳에 백인 목사님들과 선교사님들이 찾아오시는 등 십자가 복음의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고, 100km 떨어진 곳에서 다른 목사님들도 그 십자가의 복음을 배우고자 요청해 오고 있다고 합니다. 닫쳐진 목사님들이 십자가의 복음의 메시지로 삶의 회복이 온 것을 말합니다. 제가 한 예를 드리면, 지금 대만에서 오셨는데, 대만과 필리핀에서 하실 하나님의 큰일들을 기대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말씀을 하셨는데, 저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복음에 선 자들에게 주실 유업이십니다. 이것은 단순히 저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복음에 선 자들에게 약속하신 유업이십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시대에 그 유업을 offer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참 귀합니다. 아멘.
부흥과 관련해서 이번 주간에는 그에 관한 필수조건을 다루게 될 것인데, 이와 관련하여 중요한 것이 출애굽기 32장에서 34장입니다. 하나님의 부흥에 관련해서 출애굽기 32장에서 34장은 아주 중요한 장입니다. 이곳에는 이사야 하반부에서 나온 것과 똑같은 하나님의 부흥이 우리에게 주어지기 위해서 필수적인 요소가 무엇인지 말하고 있거든요. 로이드 존슨 목사님의 "부흥" 책을 보더라도, 제임스 패커 라는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크게 사용하시는 분이 이 시대에 하나님의 부흥이라는 것을 이 책만큼 체계적으로 쓴 분이 없다. 라고 하실 만큼 참 귀한 책입니다. 거기에 그 책의 일부에서도 출애굽기 32장에서 34장을 하나님의 부흥을 말하면서 함께 다루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32장에서 34장에는 하나님의 부흥과 관련해서 부흥의 중요한 요소들이 함께 나타납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금송아지 사건 즉 배교행위가 나타납니다. 사실 기독교 역사적으로 부흥이 일어나기 직전에 기독교 역사는 가장 침체적인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의 거짓된 예배와 배교행위가 팽배한 그러한 시대였습니다. 그로부터 하나님께서 34장에 하나님의 영광으로 나타나십니다. 부흥은 무엇이냐, 하나님이 영광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32장에서 34장에만 해도 하나님의 부흥과 관련해서 핵심적인 내용이 나오는 것입니다. 거기에 나온 하나님의 부흥의 요소로 "반석 위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반석은 예수님을 나타내는 것이고, 그 다음에 신앙의 반석 위에 서는 것이 핵심이고, 중보기도에 서는 것이고 그 다음에 철저한 구별의 핵심, 하나님의 경외함의 핵심입니다. 그 다음에 부흥은 하나님의 선하심이 임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필수적인 요소들입니다.
구원의 필수성에 대한 전체적인 개요를 설명해 드렸고, 오늘 저녁은 출애굽기에 나온 금송아지 사건으로 오늘날의 예배와 신앙에 대해서 살펴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사실, 제가 이런 구절들을 살펴볼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 중 어느 누구에게도 그러한 자격이 없습니다. 아마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셔서 이곳에 서게 하셔야 그러한 자격이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 중 누구에게도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저 자신은 이런 말씀을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여러분 중에 "네가 뭔데" 라고 말씀하지 마십시오. 저도 여러분과 똑같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냉철하게 분별력을 갖고 우리가 어떠한 상황 속에 있는지 봐야 할 것이며, 우리에게 얼마나 하나님의 부흥이 필요한지를 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출애굽기 32장 1절부터 13절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아론에게 이르러 가로되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 아내와 자녀의 귀의 금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오라 모든 백성이 그 귀에서 금고리를 빼어 아론에게로 가져오매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는지라. 아론이 보고 그 앞에 단을 쌓고 이에 공포하여 가로되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 하니 이튿날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숭배하며 그것에게 희생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모세가 그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애굽 사람으로 이르기를 여호와가 화를 내려 그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고 인도하여 내었다하게 하려 하시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주를 가리켜 그들에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나의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영 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출애굽기 32장에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과 너무 흡사한 상황이 오늘날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첫 번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이끌어 오실 때 놀라운 일들을 행하심으로 그들을 이끌고 나오셨습니다. 이스라엘과 애굽 사람의 장자를 구별하여 애굽의 장자를 죽이심으로 아무리 바로라 하더라도 어찌할 수 없이 이스라엘을 이끌어 나오셨습니다. 또한, 만나를 아침마다 공급하심으로 먹이시고, 안식일 날은 만나를 주시지 않으셨고, 반석에서 물을 내시는 놀라운 사건을 보이심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백성이 모세가 더디 내려옴에 그렇게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으면서도, 여전히 모세만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다투시면서,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말씀하시고, 또 모세는,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라고 말합니다. 어찌 보면, 서로 책임을 전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죠? 왜 이런 일이 생겼습니까? 여기 이스라엘 백성들은 엄청난 하나님의 권능의 손을 보고서도, 사람인 모세 밖에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으면 그렇게 말씀하셨겠습니까?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오늘날은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이 진짜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저희 집으로 교회 주보가 하나 왔습니다. 그 주보에 금년도 표어가 영어로 쓰여 있었습니다. "Be Joyful in 교회이름" 원래 성경에는 "Be Joyful in Jesus" 즉, 예수님 안에서 너희가 기뻐하라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예수님 대신에 교회의 이름이 담겨 있습니다. 어느 교회에 있다고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하나님 안에 있을 때 그 안에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그 교회의 설교말씀이 "하나님이 쓰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성령의 사역만하더라도 우리는 너무나 많이 사람중심의 것을 합니다. 성경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에게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일어나 걸어라" 하며 손을 잡고 일으켰을 때 그가 일어나 뛰며 기뻐하였습니다. 그때 그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에게 찾아와 그들을 주목할 때 베드로가 그들에게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하며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기적을 행하신 하나님을 본 것이 아니라, 일을 행한 베드로와 요한에게 주목했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왜 이 일이 우리의 능력에서 난 것처럼 또 우리의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하느냐" 이 말은 그들이 특별히 경건한 삶을 살아서 그런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런 일을 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조상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광스럽게 하시기 위해서 그 일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에 계실 때에도 있었던 앉은뱅이였고, 베드로가 처음 만났던 앉은뱅이도 아닙니다. 성경에, "One day" 그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날 베드로를 통해 그 일을 이루심으로 5,000천명을 주님께로 인도하게 하셨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의 주도권을 잡으시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시기 위해 하신 일이십니다. 성령의 역사만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본인의 연약함에 의해 하나님의 놀라운 사역을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반면에, 어떠한 놀라운 일에 사용된 경우에 자신의 것 인양 으스대기도 합니다.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심각한 것은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아론부터 70인의 장로들 모두가 다 그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사람만 보는 이런 문제는 평신도들에게만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성경적이 지식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없는 경우를 봅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을 때 다른 모든 것은 껍데기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호세아서에서는 "내 백성이 지식이 없음으로 망한다." 라고 합니다.
두 번째,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습니다.
출애굽기 32장 8절을 보면,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속히 떠나" 그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버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아는 지식이 없으면, 하나님을 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호세아서 4장 6절 "내 백성이 지식이 없음으로 망하노라,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호세아 시대에 하신 말씀이지요. 맞습니까? 바리새인들은 구약에 나온 선지자들을 잘 알았을 것입니다. 호세아서도 잘 알았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어떠한 사람인지 잘 안 나왔지만, 로마서 2장 17절에서 20절에 보면 그들이 그 당시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자신들을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대해 말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세계인을 두 가지 종류로 분류했습니다. 하나는 유대인 그리고 이방인. 제가 군대에서 한번은 중대장님이 소대장님 앞에서 여대생들이 2번째 결혼하고 싶은 대상자가 "직업 군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소대장이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첫 번째 대상자는 누구입니까? "민간인" 이처럼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세상의 빛이요, 선생인 랍비라 여겼습니다. 이러한 바리새인들이 이 호세아서를 봤을 때, 자신들이 지식이 없어 망한 그러한 사람들 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상상도 못했죠. 자기 조상들이 율법을 버렸기 때문에 심판을 받은 것은 당연하지만, 자기들은 말씀을 잘 지켰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가 너희에 대해 잘 말하였도다" 그 시대는 이사야가 말한 시대와 똑같았던 것입니다. 너희는 성경에 영생이 있다 하여 그 말씀을 상고하고 다니나, 그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율법을 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본인들은 전혀 깨닫지 못하더라도. 그래서 호세아 시대에 그랬고 예수님 시대 바리새인들도 그랬던 것입니다. 예레미야 시대에서도 그랬습니다.
예레미야 6장 19절-20절, "땅이여 들으라 내가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이것이 그들의 생각의 결과라 그들이 내 말을 듣지 아니하며 내 법을 버렸음이니라. 시바에서 유황과 원방에서 향품을 내게 가져옴은 어찜이뇨 나는 그들의 번제를 받지 아니하며 그들의 희생을 달게 여기지 않노라." 시방은 오늘날의 남예멘이나 에디오피아 입니다. 오늘날 인도는 원방입니다. 인도로 가려면 대륙을 횡단해야 하는데, 그 정도의 대단한 열심으로 번제를 준비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의 법을 버렸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법을 버렸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요? 사람들은 법을 버렸다는 것이 율법을 연구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이 율법을 연구한다고 자부했기에 자기들은 그들과 다르다고 여겼습니다. 예레미야 8:8 "너희는 어찌 우리는 지혜가 있고 우리에게는 여호와의 율법이 있다 말하겠느뇨." 이것을 보면, 예레미야 시대에도 사람들은 우리에게 여호와의 율법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혜가 있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무엇을 갖고 율법을 버렸다고 하셨나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동의 소리를 들으십니다.
우리의 삶이, 우리의 행동이,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믿는가를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명령 중에 하나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길에 서려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려면 반드시 대가가 필요합니다. 신앙이 타락하면 자기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많은 제물을 드리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기 목적에 부합되는 좋은 말씀을 취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손해를 받더라도 하나님의 길에 서는 일은 절대로 못 합니다. 교회를 성장시키는 것과 교회가 하나님의 길에 합하도록 세우는 것 어떤 것이 중요합니까? 만약 교회 성장이 더 중요하다고 말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법에서 떠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러했습니다. 여러분에게 사업해서 돈 10,000원을 더 버는 것이 중요합니까? 여러분의 사업이 하나님의 기준대로 사업이 세워지는 것이 중요합니까? 여러분의 실생활에서 돈 10,000원 버는 것이 더 중요하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시대를 보면, 이 시대는 진짜 하나님의 법을 버렸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말씀을 취하지 하나님의 말씀을 위해 대가를 지불하는 것은 거부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말씀, 말씀합니다. 그것은 입술뿐인 고백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사야서 말씀을 인용해서 바리새인들에게, "네 마음은 내게서 멀다." 다른 사람도 아닌 바리새인들에게. 그들은 구제하고 금식하며 안식일을 철저히 지킨 그들에게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세 번째, 특징이 혼합주의 신앙입니다.
혼합주의 신앙. 여러분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아론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금 은 보석을 가져오라. 그랬더니, 아론이 그걸 받아서 송아지를 만들었어요. 그랬더니,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한 신이도다" 라고 말하며, 그 앞에 단을 쌓고 공포하며 이르기를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라 하더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는 전형적인 우상숭배는 혼합주의 신앙입니다. 믿는 사람들에게 있는 혼합주의는 하나님도 믿고 우상도 믿는 것입니다. 아론부터 70인의 장로들까지 다 혼합주의에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6장에 보면, 그들이 시바와 원방에서 향품을 가져와 하나님께 가져와 예배 드렸다는 것입니다. 시바는 남예멘이나 에디오피아를 말하는데, 남예멘만 해도 그 거리가 우리나라에서 마닐라까지의 거리입니다. 그 당시에는 비행기와 차도 없는 시대입니다. 거기까지 가서 향품을 가져와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면 얼마나 헌신적이었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원방은 학자들이 모두 인도라 동의합니다. 인도는 시바보다 훨씬 멉니다. 대륙을 횡단해야 하는 아주 먼 곳입니다. 그것만 보더라도,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께 헌신적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레미야 7장을 보면, 그들은 하나님께 많은 희생과 제사를 드렸어요. 그리고 안식일이면 하나님이 친히 자기 이름을 두시겠다고 한 예루살렘성에서 성대한 제사를 드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레미야 23장 35절에서 37절을 보면, 그들은 친구와 친척을 만나면, 하나님의 응답이 무엇이냐 물었다고 합니다. 예레미야 12장에 보면,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불평할 때 "하나님, 저들은 입만 벌리면 하나님 얘기를 합니다. 그러나 마음은 멉니다." 그들은 이렇게 물을 정도로 하나님을 사모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우상숭배를 했습니다.
제가 왜 그렇게 얘기하는가 하면, 예레미야 19장 3절에서 6절까지 보면, "이르기를 너희 유다 왕들과 예루살렘 거민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이곳에서 재앙을 내릴 것이라 무릇 그것을 듣는 자의 귀가 진동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를 버리고 이곳을 불결케 하며 이곳에서 자기와 자기 열조와 유다 왕들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무죄한 자의 피로 이곳에 채웠음이며 또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산당을 건축하고 자기 아들들을 바알에게 번제로 불사라 드렸나니 이는 내가 명하거나 말하거나 뜻한 바가 아니니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다시는 이곳을 도벳이나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라 칭하지 아니하고 살륙의 골짜기라 칭하는 날이 이를 것이라." 이들은 바알과 아세라를 섬겼습니다. 여러분 요시아 왕의 개혁이 나오잖아요. 열왕기하 23장에 요시아 왕이 성전을 정결케 하는데, 거기에서 무엇이 나오는가 하면, 아세라 신상과 바알, 미동이 나옵니다. 그들은 감히 누가 따라 할 수 없을 만큼 하나님을 헌신적으로 섬기면서 동시에 우상을 두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 조상들이 우상을 섬김으로 망한 것을 알고 굉장히 조심했습니다. 그들은 형상이 있는 돈으로 제사하지 않기 위해서 돈을 바꿀 정도로 열심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우상은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우상은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체하는 것이 우상입니다.
마태복음23장 보세요, 예수님께서 "이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하고 행치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뿐만 아니라, 누가 복음 16장 13절, 14절에 이렇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이 둘을 사랑하면, 어떤 일이 생기는가 하면, 하나님의 길에 서는 것과 돈을 버는 일이 대치하는 상황이 생기면, 돈을 많이 버는 쪽을 택합니다. 실제로는 돈을 귀히 여기고 하나님을 경히 여기는 것이지요. 이 경우에는 말씀을 버리게 돼 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바리새인들에게는 눈에 보이는 현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예레미야 시대 못지않게 우상이 가득했습니다. 사람에게 어떻게 보이는 것이 중요했고, 물질이 중요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우상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전형적인 우상숭배는 혼합주의입니다. 오늘날이 바리새인들보다 우상이 가득합니다.
포도나무 교회 초기에 하나님께서 일정 기간 동안 우리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죄악들을 살펴보고 회개하고 끊으라고 하셨습니다. 하루는 하나님께서 저에게"너희 가운데 가득한 금송아지를 회개하라" 라고 말씀 하시면서 하나님께서 비춰주시는 것이 무언가 하면, 우리가 주일날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인도한 신이십니다.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라고 고백하면서 예배드리죠? 근데 월요일부터 돈 버는 문제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법도는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부분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무슨 법도만 남아 있느냐? 돈의 법도만 남아 있을 따름이지요. 하나님의 법도를 따르지 않습니다. 돈의 법도를 따르는 것이지. 그런데 로마서 6장에 보면, 우리가 무엇에든지 우리 자신을 드려 복종하는 그것에 종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보세요, 우리가 말로는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실제로 돈 버는 일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법도를 따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입으로는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라고 고백하면서, 우리는 돈 신 앞에 무릎 꿇고 엎드려서 "우리를 인도하는 신이시여, 우리에게 삶의 기쁨과 인생에서의 만족과 세상에서의 성공과 세상에서 사람들 앞에 당당하게 하는 금신이시여" 라고 고백하는 것과 이만큼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 금송아지요,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에게서 요만큼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사실, 돈에 실제적인 주권이 하나님께 명백히 드려서 성경은 이렇게 말하죠, 우리가 하나님의 청지기라고. 하나님의 주권이 세워져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대로 원하시는 대로 우리의 물질을 사용할 자세를 갖고 사는 것이 물질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드리며 사는 자의 자세요, 오늘날 이런 크리스천이 우리 가운데 몇 %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게 되어 있지 않으면, 그 사람의 삶 속에는 돈이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돈이 우상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왜 믿느냐? 돈 많이 벌기 위해서 믿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돈 많이 벌고 사업 잘 되고 소원성취 되고 기도 응답되는 이러한 수단인 것이지요. 그런 사람들은 예레미야 시대처럼 그거 해 달라고 하나님께 많이 헌신하고 금식하고 많은 헌금 내면서 하나님께 많은 봉사 할 수 있습니다. 왜? 그거 해달라고. 예레미야 시대는 그렇게 헌신했다니까요. 그러나 그렇게 자기 목적을 위해 하나님을 사용한 사람들은 절대로 자기희생을 각오하면서 하나님의 길에 서지 않습니다. 자기 목적을 이뤄 달라고 많은 헌신과 봉사는 했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길에 서기 위해 절대로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못하게 되어 있는 거죠. 그러니까, 실제는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는 것입니다. 이 이스라엘 백성처럼, 호세아 시대처럼, 이사야 시대처럼, 예레미야 시대처럼, 예수님의 시대처럼 그런 거죠. 종교적인 삶을 말할지 모르지만, 실제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 거죠. 누구보다 말씀을 강조할지 몰라도 실제 삶에서 말씀을 버립니다. 바리새인처럼. 저희가 말씀을 가르치기는 하나 실천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심각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오늘날 교회가 우상숭배를 부추깁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신앙관에서 하나님을 자신의 목적과 소원을 위해서 그것 채우기 위해서 많은 희생과 헌신을 강조하는 반면에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위해 희생과 헌신과 전혀 거리가 멀죠. 실제로 우상숭배를 부추기는 것입니다. 그 당시 아론이 그랬던 것처럼. 70인의 장로가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의 이름으로 혼합주의 신앙을 부추깁니다. 그래서 탐심이 우상 숭배라고 말하는데,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우상숭배가 너무나 많습니다. 예레미야 시대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우상의 모양만 달라졌을 뿐입니다.
네 번째, 육신과 세상이 가득합니다.
좀 전에 본문 32장 6절 보면, "이튿날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며" 지금 하나님께 한다고 하면서 금송아지에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혼합주의 신앙이 되면 이렇게 됩니다. "앉아서 웃고 마시며, 일어나 뛰 놀더라" 그랬죠. 그 말이 무엇이냐 하면, 우상숭배의 특징이 뭐죠? ‘저희들이 술 취하고 방탕한 축제’를 벌인 것입니다. 혼합주의 신앙에 빠지면, 결과는 육신과 세상이 가득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만 우리의 유일한 신이요, 힘이시며, 유일한 목적이요, 우리의 유일한 목표인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면, 반드시 육신과 세상은 그 열매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그렇게 되게 되어 있습니다.
사무엘상에 보면, 2장 12절에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 여러분 여호와를 알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에 관해서 어떠한 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같으면,‘신학교도 가지 않았다’라는 말이 아니지요. 여호와를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성경에서 하나님에 관한 성경적이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면, 사역이 자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제사 드리기 전에 먼저 취하고, 드리고 난 후에 자기 것이 됨을 알고도 생고기로 취하기 위해 먼저 먹고, 뿐만 아니라 거기 있는 여자 사제들과 음란을 행합니다. 탐심과 탐욕과 음란을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혼합주의 신앙은 당연히 그 열매를 맺게 돼 있습니다.
신약이든 구약이든 거짓 리더들의 잘못된 모습들이 어떤 줄 아십니까? 사역이 자기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어떤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목회하려고 하면 절대 못하게 합니다. 그 동기부터가 타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이 타락하거나 거짓 리더들의 전형적인 특징이 무엇이냐, 사역이 자기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엘리 제사장 때도 그랬고, 이사야서 56장 10절 보십시오. 타락한 거짓 리더들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그 파수꾼들은 소경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라 능히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요 누운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니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요 그들은 몰각한 자들이라 다 자기 길로 돌이키며 어디 있는 자이든지 자기 이만 도모하며 피차 이르기를 오라 내가 포도주를 가져오리라 우리가 독주를 잔뜩 먹자 내일도 오늘같이 또 크게 넘치리라 하느니라" 보십시오. 고린도후서 11장에 보면, 거짓 선지자와 사도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13절에 보면, "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구휼의 역군이니" 보세요, 그 아랫줄을 보면 자신들의 영적인 체험을 자랑했습니다. 왜 그렇게 자랑했느냐 하면, 사람들 앞에 슈퍼 사도들로, 위대한 사도로 인정받기 위해서. 그래서 사도 바울이 뭐라고 했는지 아시나요? 바울이 "나는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조금도 못하지 않다" 지극히 큰 사도들이라는 것은, 영어 NIV 성경에는 "Super" 사도들이라고 나왔어요. 그것은 거짓 사도를 말해요. 그러면 왜 그들이 영적 체험을 잘 하느냐? 자기들의 영적인 것들을 자랑했어요. 왜 그러느냐? 자기들이 사람들 앞에서 "Super"사도로 인정받기 위해서.
어떤 사람이 아까 제가 말씀 드렸잖아요, 따로 보따리 싸는 거 미혹되지 말라고. 분당에 있을 때 우리 집회 왔다가 끝나면 다른 교회 가서 따로 모여서 1,000만원 주고 예언 받고 그랬다고 하는데, 따라 가는 사람들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나중에 들은 말인데, 그 사람 뭐라 하나면, 자기가 여주봉 목사를 세웠다고. 그렇게 해서 하는 사람이나 쫓아가는 사람은 똑같다는 것이죠. 그 당시 거짓 사도들이 영적이 체험을 자랑했는데, 왜 그렇게 했냐, 그렇게"Super"사도들로 인정받기 위해서, 그 인정받는 결과가 무엇이냐며, 여기 보십시오. 20절,"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 하다 하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 도다." 뭐 하기 위해서. 자기 뱃속 채우기 위해서. 신약이건 구약이건, 거짓 사도들의 전형적인 특징이 사역을 자기 목적을 위해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짓 성도들의 전형적인 특징은 신앙을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복신앙입니다. 가짜 신앙. 하나님이 자기 목적을 위한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혼합주의 신앙에 빠지면, 곧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면 세상과 육신이 가득한 삶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한 것이 로마서 1장 1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이 진노는 마지막 때의 진노가 아니라, 현 시대 우리에게 나타난 진노인데, 어떤 이들에게 나타나는 진노이냐 하면, 19절,"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을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여기서 말하는 진노는‘마음이 어두워 졌다.’이 뜻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내어 버려두셨다. 24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 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28절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역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그냥 내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면 간섭하십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다윗이 자신의 권세로 밧세바를 취했는데, 이것은 권력남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권력을 자기 멋대로 사용한 지권남용, 간음을 행했습니다. 그리고 그 죄를 숨기기 위해서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아를 죽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아와 함께 다른 사람들도 죽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만약 여기서 끝났더라면,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고 다윗을 찾으신 것처럼 하나님은 또 다시 누군가를 찾으셔야 했으며, 하나님이 다윗을 향한 약속도 다 끝이 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끝을 내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직면하시고 그 죄를 드러내십니다. 그래서 나단을 통해서 예를 들어 다윗에게 말씀하십니다. 다윗의 한 모든 일이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모든 자들 앞에서 드러나게 되었을 때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보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내가 하나님께만 범죄하였습니다.." 라고 죄를 고백하게 되었고,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없었다면, 다윗은 거기서 끝이 났을 겁니다.
그런데, 로마서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냥 내어 버리시므로 진노하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 가운데, 로마서 1장 29절부터 31절의 죄가 얼마나 가득한지 모릅니다. 우리나라 수많은 교회 중에 과연 몇%가 이 죄를 범하지 않고 있을까요? 그런데, 하나님의 간섭이 없으십니다. 두려운 일입니다. 그게 축복이 아니라 두려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거기에 함께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을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혼합주의 신앙에 빠지게 되면, 육신과 세상이 그 열매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축복이 아닙니다. 이런 일이 생김은 눈이 가려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관점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다 가져가시더라도 "하나님의 신" 만은 떠나지 말라고 해야 할 것인데, 눈이 가려졌기에 세상에서 원하는 것만 이루어지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떠나심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못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갖 육신과 세상의 열매가 가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심각한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1-5절에 보면,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이러한 것이 교회에 가득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것은 기본이요 더한 것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무엇이라고 하는가 하면,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하나님 믿는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경건의 모양이 있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혼합주의 신앙입니다. 보십시오, 여러분 이런 관점에서 보면, 금송아지 섬기던 자들은 오늘날 우리 교회보다 상전입니다. 이러한 우리들의 모습을 보면, 우리들이 절대 그들보다 낫지 못합니다. 저를 포함해서.
다섯 번째, 하나님의 임재가 걷히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3장 1절부터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백성과 함께 여기서 떠나서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기를 네 자손에게 주마 한 그 땅으로 올라가라 내가 사자를 앞서 보내어 가나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고 너희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라니" 여기 보면, 이스라엘의 배교, 그런 혼합주의 때문에 하나님 임재를 거두시겠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나중에 모세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 내 임재가 너와 함께 하겠다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것은 주님의 임재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말하기를 주의 임재가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 외에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을 무엇으로 알겠나이까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임재가 걷히죠. 여러분 오늘날 교회가 어떤 상태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임재가 걷히면, 우리의 어떠한 종교적인 모습도 의미가 없습니다. 그 대표적인 교회가‘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부자교회 잘 사는 교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가 철저히 걷힌 교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문 밖에 계십니다."문 밖에서 내가 문을 두드리노니" 이 말은 불신자를 가리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신자를 전도할 때 쓸 수 있습니다. 좋은 구절이죠. 그러나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말씀하신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실 정도로 하나님의 임재가 걷힌 곳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보세요, 하나님의 생명이 없고, 칭찬 한 마디가 없는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두려운 것이 이것입니다.
예레미야 시대에도 이랬습니다. 예레미야 12장 1절, " 여호와여 내가 주와 쟁변할 때에는 주는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패역한 자가 다 안락함은 무슨 연고니이까 주께서 그들을 심으시므로 그들이 뿌리가 박히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었거늘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 마음은 머니이다" 예레미야 시대는 하나님의 심판이 실제로 임한 시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셨다" 말한 시대, 심판이 코앞까지 다가온 시대, 혼합주의 시대. 그때에도 저들은 어떠했습니까? 세상에서 잘 되었습니다. 문제는 그들의 초점이 어디에 있느냐, 세상의 것들에게만 있었습니다. 세상의 많은 목적에만 있었습니다. 시바와 원방에서 향품을 사와 예배했기에 그들이 원하던 세상의 것들을 취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 평화, 축복받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렇게 말합니다. "젖과 꿀이 나오는 가나안 땅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이 함께 계시지 아니하면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닙니다."이게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걷혀있는데도 그것을 모릅니다.
제가, 마틴 로이드 존슨 목사님이 쓰신 "부흥" 책을 가져왔어요. 거기에 보면, 하나님의 부흥이 오기 직전에 하나님의 임재 걷힘을 인식하는 상태에 이릅니다. 그러면, 다른 모든 것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 임재가 없는 심각성을 인식하게 됩니다. 이것이 영적 총명의 진수입니다. 여기 각자의 각성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아니하시면 그 모든 소유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부흥이 올 때 하나님의 백성이 갖게 되는 자세인 것입니다. 아무리 신문에서 성공한교회로 나오더라도, 하나님의 임재가 없으면 그 모든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인식하고 주님을 구하는 교회가 오늘날의 교회입니까? 아니면, 결국 자기가 원하는 것만 대면 하나님의 임재가 걷힌 것도 인식하지 못하고 세상에서 잘 되고 성공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여깁니까? 여러분은 어디에 속해 있습니까? 신앙이 타락하니까, 하나님의 임재가 철저히 걷혀도 어떠한 자각도 없이 부흥에 대한 어떠한 소망도 없는 것입니다. 부흥이 있으려면, 사람들이 이것을 각성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다른 종류들의 축복이 함께 온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아니하면, 아무 의미가 없음을 알고, 마치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갈급하듯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여 오직 주님만을 찾기 위해 주 앞에 서는 그 인식 없이 부흥은 없습니다.
여섯 번째, 하나님의 생명이 철저하게 고갈되게 됩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하나님의 실제입니다. 신명기 30장에 "내가 너희 앞에 복과 사망, 생명과 화를 놓았노라, 복과 생명이 같고 사망과 화가 똑같은 것입니다. 너희와 너희 자손을 위해 생명을 선택하라" 그러면서, 하나님 그분은 생명이시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할 때, 하나님 존재만을 사랑할 때, 하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삶의 목적이 된 때, 또 하나님 중심 된 삶, 하나님의 온전한 주권적인 통치하에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 된 삶,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이 그 분의 발 앞에 내려져 있는 그분이 우리 삶에 주인 된 실질적인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삶인 것입니다.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삶 속에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혼합주의에 빠진 삶, 하나님의 길, 말씀을 버린 삶. 하나님의 지식을 버린 삶은 하나님께서도 버리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생명이 고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걷히니까 하나님의 모든 것이 고갈됩니다. 마치 라오디게아 교회에 칭찬할 것이 하나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다스리실 때에만 우리가 거룩하게 됩니다. 그분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거룩하게 됩니다. 만약에 그분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바리새인들과 같이 회 칠한 무덤처럼 거룩에 모양만 갖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속의 죄는 하나도 다뤄지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바리새인들처럼 미움, 시기, 질투, 당 짓는 것, 자기자랑, 자기 사랑하는 것 돈을 사랑하는 마음. 이런 것들은 절대로 다뤄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스리실 때에만 가능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걷히니까, 하나님의 생명이 걷힙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하나님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을 보세요, 아브라함은 하나님은 막연히 계셔서 열심히 전통을 따라 섬기면 복 주실 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인정하며 열심히 봉사하면 하나님 복 주실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어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실제적인 분이시며, 교제하며 그의 길을 지도 인도하시며, 그에게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보이시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 동참할 때 하나님께서 친히 그를 통해 하나님의 목적을 이뤄 가시고, 아브라함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롯을 구원하셨습니다.
모세에게도 하나님은 실제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보십시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면 어떻게 되나? 이론은 그대로 인데, 하나님 임재의 실제가 우리가운데 없습니다. 기도응답을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도 응답하실 것을 믿습니까? 라고 질문하면 아멘 이라고 대답할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이론적으로는 다 알지만, 실제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다 아시며 머리카락도 세심 바 된 만큼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에게 응답하실 것을 믿고 때로는 어떠한 환경 가운데서도 하나님만을 믿음으로 의지하고 간구함으로 주님이 주님의 방법대로 주님의 뜻을 기다리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어떻게 하냐, 우리가 열심히 해야 한다고 하면서 온갖 세상적인 방법대로 다 하고, 그렇게 해 놓고서 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다고 하고, 안 되면 하나님 원망합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말고 무조건 하나님을 기다리라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가 해야 할 부분은 해야죠. 이 말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지하여 주님의 길을 따르기보다, 우리의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어느 나라의 선교사님들 집회 인도하러 갔었습니다. 설교 마친 후에 기도사역 시간에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시기를 ‘많은 선교사님들이 목이 탄다.’ 라고 하셨습니다. 마치 시골의 펌프에 물을 붓고 하면 물이 나와야 되잖아요. 근데, 물은 안 나오고 계속 하면 어떻게 돼요? 타 버리게 되잖아요.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우리를 도우십니다. 인도하십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비유들을 줄기차게 외치는데, 실제 그 사람은 전혀 아닌 겁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느냐, 이 목이 타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근데, 오늘날 교회가 그렇습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떠나계시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고갈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충주에 가면 가로수가 사과나무잖아요. 그 사과나무 열린 것이 아주 멋있잖아요. 충주의 좋은 사과나무가 있죠. 그곳에서 좋은 사과나무를 가져와서 집에 심으면, 사과 열매를 얻게 될까요? 아닐까요? 열매를 맺게 되지요. 이것이 당연한 것 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 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친밀한 하나님과의 교제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길을 지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 길과 목적을 보이시고 여러분이 믿음으로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자신의 길과 능력으로 여러분을 통해서 이루시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목적을 보이셔서, 여러분을 기도하게 하시고, 여러분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 하나님이 친히 여러분의 삶을 보호하시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의 생각을 아셔서 여러분의 필요를 채우시는 이러한 모든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야 합니다. 이런 일이 안 일어나면, 기적입니다. 여러분 웃으시죠. 그만큼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떠나 있는 겁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함께 하셨던 것처럼, 모세, 다윗, 예수님, 베드로, 그리고 바울의 삶에 함께 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실제적인 인도하심과 지키시는 것과 보호하시는 것과 여러분의 기도를 응답하시는 것과 하나님의 친밀한 교제와 하나님의 행하심과 뜻을 보이시고 여러분을 동참시키시고 하나님의 뜻과 나라를 이루시는 이 일들이 실제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가운데 있는데, 그 열매가 맺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이 이상한 것입니다. 그러한 일이 안 일어나면 그것이 기적입니다. 근데, 우리는 반대로 여러분이 이 이야기에 웃는 것처럼 그런 일이 전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처럼 우리 가운데 혼합주의가 가득하여 육신의 것이 가득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살펴보고 마치겠습니다.
일곱 번째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고 하나님의 백성이 멸시와 조롱을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 혼합주의에 빠지면 하나님의 임재가 걷히며, 하나님의 임재가 걷히면 하나님의 생명이 고갈되게 됩니다. 하나님의 실제가 그곳에 계시지 않게 됩니다. 즉, 종교적인 모양은 있지만, 하나님의 생명이 그곳에 함께 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들을 조롱하게 되며, 그리고 그 결과 하나님의 이름이 멸시와 조롱을 당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이름은 뗄래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제 아들이 잘못하면 그로 인해 제 이름에 욕을 보이듯, 호적에서 제한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그를 제 아들로 보기 때문에 그로 인하여 제 이름이 땅에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면 하나님의 생명이 걷히면서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조롱하게 되는데, 그럼 그 결과 어떻게 되느냐? 하나님의 이름이 멸시와 조롱을 당하게 됩니다. 항상 그러한 일이 나타났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나라와 사화 속에서 교회를 동네의 하수 처리장처럼 여깁니다. 하수 처리장 들어오면, 부동산 값이 떨어져서 쌍 불을 켜며 반대 하듯이 오늘날 안 믿는 사람들은 교회가 동네에 들어오면 그렇게 반대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 때문에 그 만큼 세상의 조롱거리가 됩니다. 반면에 부흥이 오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사도행전을 읽어 보세요. 부흥이 오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께 오기를 두려워합니다. 왜냐면, 속에 있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날마다 믿는 자의 수가 더해 가며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그들 가운데의 모든 것이 드러나므로 그 앞에 엎드려 경배하며, 말하기를 "과연, 너희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다." 라고 고백한다고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부흥의 역사가 나타날 때 안 믿는 사람들이 대거로 주님께로 돌아옵니다. 왜? 교회 가운데 하나님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앙이 타락하면 종교적인 모양은 가득하게 될지라도 하나님의 생명이 떠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 조롱과 멸시를 당하게 되고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어려운 설교, 내용은 어렵지 않지만, 우리가 현실을 보는 게 쉽지 않죠. 오늘 광야 생활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을 보면서 우리의 현실이 하나님의 부흥이 얼마나 절박한 상황가운데 있는지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 설교를 듣기 전만 해도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 금송아지가 자기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했다고 고백하며 그 앞에서 절했던 그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우리와는 전혀 상관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 이 설교를 같이 살펴보면서, 어떻게 보면 그들은 우리보다 양반이고, 진짜 우리들의 모습은 그들보다 더 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특징 하나 하나도 우리 가운데 그들 가운데 있었던 그 특징 하나 하나가 없는 것이 없음을 보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게 우리 모습입니다.
제가 나오기 전에 이길수 목사님께서 기도해 주시면서, 죄의 사슬이 끊어지라고 명령하라고 하나님 그런 감동을 주신다고, 음란의 사슬이 끊어지라고 명령하라는 그런 감동을 주신다고. 제가 같이"주 나의 왕"을 같이 찬양하면서 ‘주님만이 우리의유일한 왕이 되어야 우리 삶에 하나님과 경쟁하는 다른 왕의 사슬들이 깨집니다. 그 중에 하나가 음란의 사슬이죠. 이사야 시대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성한 곳이 없이 다 터진 상처뿐이라 했습니다. 예레미야 시대는 심판이 임한 시대인데, 얼마나 더 상처가 심했겠습니까? 그러한 시대에 제사장, 선지자, 예언자 다 할 것 없이 그 백성들의 상처를 대수롭지 않게 다 "평안 하라", "평안 하라" "축복하라" "축복하라" 라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음란의 사슬을 포함해서, 왜 하나님의 백성들 삶 속에서 그렇게 많은 영적인 억압들이 있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주님만이 오직 그들의 주가 안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혼합주의 신앙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혼합주의 신앙의 열매가 사슬이지요. 성경적인 언어로 말하면 상처뿐인 것이죠. 여러분 이번 집회에 치유, 자유케 됨, 문제해결을 얻기 위해 오셨습니까? 그렇다면 주님만이 여러분의 온전한 주가 되는 삶으로 돌이키어야 합니다. 그것만이 소망입니다. 그리로는 돌이키지 않으면서 주님은 여전히 내 삶의 수단에 불과하면서 치유와 자유함을 얻은 듯 그것이 오래 가지 못할 것입니다. 치유와 자유함을 얻은 듯 하나님 없는 종교적인 억압뿐일 텐데 이런 억압이 깨어진들 다른 수 없이 많은 억압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진정한 승리는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만이 온전히 우리의 주되시는 삶으로 돌이키셔야 합니다.
두 번째(신앙의 본질과 부흥)
- 이길수 목사 -
어제 밤에 첫 시간이었는데,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그런 시간이 아니었나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놀라운 은혜로 함께 하시길 소원하고, 오늘 이 시간에 저는 신앙의 본질과 부흥에 대해서 나누겠습니다. 지난주에 하나님께서 참 은혜로 함께 하셨고, 이번 주간에도 하나님께서 귀한 은혜로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어제 밤에도 하나님께서 은혜로 함께 하셨습니다. 무엇보다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주님의 군대로 인도하신다고 말씀하신 것 같아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부어 주시기를 소원합니다.
우선 첫째, 하나님을 떠나면 억압이 가득합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부흥"이라는 책에 의하면, 영적으로 가장 어두울 때 하나님의 부흥이 임하였고, 모든 일이 잘되고 평안할 때에 보다 가장 어두울 때 임하였다고 하는데요, 어제 시대가 어두울 때의 특징 7가지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을 떠났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다.
세 번째 혼합주의 신앙이었다.
네 번째 육신과 세상의 것들이 가득했다.
다섯 번째 하나님의 임재가 걷혔다
여섯 번째 하나님의 생명이 고갈됐다.
일곱 번째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고 하나님의 백성이 조롱을 받는다.
출애굽기 32장을 통해서 이 부분을 보았는데, 성경 여러 곳에서 이와 같은 것을 볼 수 있는데, 특히 이사야 30장에 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날 때 동일한 모습들이 나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부흥 책에 보면, 하나님의 부흥이 찾아오시기 전에 "부흥을 가로막는 쓰레기들이 제거되어야 한다." 이렇게 나오는데, 그 중에 하나가 죽은 정통주의에 대해 나오는데. 그래서 이 시대의 우리 교회가, 우리의 현실이 얼마나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있는 것인가 보게 됩니다. 이사야 30장 1절에서 17절을 보면, 하나님을 떠나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소경인 상황에 대해 나와 있습니다.
제가 오늘 이사야서를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하는데, 이사야 30장 1절에서 17절을 보면 이런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A, B, C 그리고 A, B’A와 A’를 대조하고 있고 B와 B’를 대조하면서 C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6장 8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보내신 목적에 대하여 말하되,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할 것이요,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할 것이라" 라고 말하고 있고, 이사야 29:14경을 보면 "내가 이 백성에게 기이한 일을 행할 것이니, 지혜자의 지혜가 가려질 것이고 명철자의 명철이 가려질 것이라" 또 이사야 42:18절에 "누가 소경이겠느냐? 누가 보지 못하는 자들이겠느냐?" 이렇게 말하면서 "저희가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할 것이요,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할 것이라" 그러면서 이사야 42장 21절 이하를 보면, 영적 소경의 결과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나 피폐를 당하며 고난을 당하고 있느냐를 말하고 있죠. 하나님의 진리가 선포되어 진리가 그들을 자유케 하기 위해서 말씀이 선포되어도 그들이 다 빼앗기고 탈취를 당해도 그러한 일들 가운데서도 "도로 주라 할 자가 없다 하더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진리를 알지만, 그 진리가 자유케 하는 삶이 불가능하게 되어 있는 그런 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얼마나 이사야 시대가 잘못되어 가는지 볼 수 있으며, 이사야 시대뿐만 아니라 예레미야 시대도 그러했습니다. 예레미야 시대나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에게도 그러한 동일한 모습들이 나타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시는데, 왜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물었더니, 이사야 6장 8절 이하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저희가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할 것이요,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하게 함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은 결국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유대인들, 바리새인들이 본다고 말했었습니다, 그들이 성경을 많이 알았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보는 눈을 주지 아니하시므로 그들이 영적으로 소경 된 자리에 머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어떠한가? 그것은 이사야 시대와 매우 동일합니다.
우선 첫 번째로 1-7절에 보면, 인본주의와 불신앙이 가득합니다. 남 유다가 북쪽으로부터 위협을 느꼈을 때 정치적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을 구하기보다 남쪽 애굽 나라에 사신을 보내 도움을 받으려고 합니다. 이것을 두고 하나님은 불신앙이라고 봅니다. "저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말과 병거를 더 의지했다." 이사야 31장 31절에 보면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저를 심판했다라고 합니다. 사실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신뢰할 때 진정한 승리가 있었지만,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사람을 의지하거나 말과 병거를 의뢰하는 자리에 섰을 때 실패하였습니다, 사실 문제가 있을 때 어려움이 있을 때 그 믿음이 정작 필요한 것이 아닙니까? 좋을 때도 믿음이 필요하지만, 사실 어려울 때 그 믿음이 더욱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려움이 오니까, 그들의 초점이 주님으로부터 돌아가서 환경을 바라보며 결국은 인간적인 방법으로 그 문제를 풀려는 인본주의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론적인 하나님만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리에 서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죽은 정통주의에 대해서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께서 말씀하시면서, 교회가 하나님으로부터 떠나면 나타나는 특징이 죽은 정통주의가 나타나게 되는데, 교회가 정통주의에 빠지게 되면 나타나는 특징이 이론으로 실제를 대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격체 자신을 개인적으로 알고 인격체와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어야 하는 신앙이 인격체를 아는 것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하나님을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모르면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지 못하게 됩니다. 어떤 상황가운데서 어려움이 오거나 문제가 오면, 하나님을 신뢰하여 그 눈을 하나님을 향하여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 이 문제를 처리할 능력이 있으신 하나님, 진실하신 하나님께서 그 문제를 처리하실 것"이라는 생각으로 그 문제를 담대하게 처리해야 하는데, 그러기 보다는 인간적인 방법으로 인간적인 수단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모습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안 보이기 때문에 그렇게 됩니다. 사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문제입니다. 17절이 보면, b’ 그리고 a’이지요. 영적 권세를 상실하게 될 뿐아니라, 영적 무기력에 빠지게 됩니다. 이사야 30장 17절을 제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한 사람이 꾸짖은즉 천 사람이 도망하겠고 다섯이 꾸짖은즉 너희가 다 도망하고 너희 남은 자는 겨우 산꼭대기의 깃대 같겠고 영 위의 기호 같으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적군 하나만 나타나도 천 사람이 도망가고 다섯이 꾸짖은즉 다 도망가게 되는 것입니다. 레위기 26장 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교회에 주신 권세에 대해 이렇게 나타나게 되는데, "너희 다섯이 백을 쫓고 너희 백이 만을 쫓으리니 너희 대적들이 너희 앞에서 칼에 엎드러질 것이며." 신명기 28장 7절에 보면, "네 대적들이 일어나 너를 치리 하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니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 이게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신 권세입니다. 근데, 하나님을 떠나게 되면, 영적 완전 무력감에 빠지게 되는 것인데. 작은 문제에 대해서도 해결책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망가게 되는 것입니다. 피하고 숨게 됩니다.
제가 가만히 사람들을 보니, 문제 앞에서 문제를 대하는 세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한 부류의 사람은 문제에 침몰당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문제 때문에 낙심하고 좌절해서 불신의 증후군까지 나타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원망하고 불평하고 불신하다가 마음속에 뜻대로 되지 않자,‘죽었으면 좋겠다’,‘하나님 저를 데려가 주십시오’ 라고 하면서 인본주의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방법이 나오게 됩니다. 이런 방법을 여러 번 해 본 사람들이 두 번째 부류의 모습을 보이게 되는데, 문제만 나타나면 도망가게 되고 피하고 숨게 됩니다. 파도만 보면 도망하게 되지요. 세 번째 부류는 파도를 타고 문제를 즐기는 사람입니다. 즐긴다는 표현은 좀 과하고, 문제가 와도 도망가거나 피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어디에 있습니까? 오늘날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많습니까? 파도를 즐깁니까? 아니면 파도에 쳐 박혀서 짠물을 너무 많이 먹어서 도망갑니까? 도망가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으로 충만하십니까?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충만합니까? 아니면, 해 봐도 잘 안 되더라는 의식이 가득합니까? 머릿속에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충만하여 열정과 소망을 갖고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지금 눈앞에 태문이 안 열리더라도,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기 때문에 그래도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라고 큰 소리 치며 잠잠히 하나님을 기다리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 것 같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면서 아니면 한편으론, 숨고 피하는 자리에 더 익숙합니다. 어디가 더 익숙합니까? 어제 밤에도 하나님께서 ‘안일함에 빠지지 말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왜 우리가 안일합니까? 육신을 신뢰하기 때문에 안일하고, 또 다른 하나는 해 봐도 안 되더라는 생각에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체질이 됐습니다. 불신 체질. 해 봐도 잘 안돼. 그래서 영적이 무력감에 빠진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 앞에서 인본주의 방법을 찾다가 안 되니까 도망가게 됩니다. 여기 그런 영적 무력감에 빠진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모든 권세를 다 상실해 버리고, 능력이 없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이 어디에 있습니까? 세상을 이기고 죄를 이기는 권세를 다 잊어버리고, 세상에 수치를 당하고 그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고 조금만 어려워도 좌절과 낙심에 떨어지고 진짜 놀라운 능력이 교회 가운데 상실되는, 하나님의 대한 기대감이 없는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세 번째는 말씀에 정직하게 직면하지 않습니다. 이사야 30장 8절로 11절에 보면, 특별히 9절 이하를 보면, "대저 이는 패역한 백성이요, 거짓말하는 자식이요,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자식이라. 그들이 선견자에게 이르기를 선견하지 말라, 선지자에게 이르기를 우리에게 정직한 것을 보이지 말라 부드러운 말을 하라 거짓된 것을 보이라. 너희는 정로를 버리며 첩경에서 돌이키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로 우리 앞에서 떠나시게 하라 하는 도다. 그들은 말씀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죄를 지적하는 설교도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왜 싫어합니까? 하나님과 친밀함이 없기 때문에 말씀대로 살 능력도 없고, 세상 사랑이 내려지지도 않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말씀 앞에 삶을 조정하고 내려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하나님이 안 보이거든요,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걸 수 없거든요. 그러니까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 앞에서 돌아갑니다. 하나님이 안 보이거든요, 더 이상 하나님 앞에 소망이 없어 보이거든요. 사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제로 이렇게 얘기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대 놓고?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행동 속에 그게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 속에 ‘우리가 말씀을 사랑합니다, 우리가 말씀 듣길 사모한다고 합니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말씀의 기준에서 강력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면,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 자신의 모습이 비춰지면, 은혜 받았다고 하지만, 두 번, 세 번 똑같은 말씀의 설교에 다른 관점의 설교를 들으면 나중에 이럽니다. "좀 균형 잡힌 설교를 하시지요." "왜 말씀으로 우리를 칩니까?" 여러분 왜 이렇습니까? 사실, 하나님과 개인적인 친밀함에 있지 않으면, 우리가 그 말씀대로 살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없습니다. 우리의 능력과 힘으로 살아지나요? 안 됩니다. 지속적인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을 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우리 삶을 조정하고 인격체 되신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앎으로 그 하나님을 의지할 때 우리 삶에 놀라운 승리가 있는데, 그리고 그 살아계신 하나님께 우리 삶을 조정하는 것인데. 말씀에 우리를 조정한다. 이런 표현을 하지만, 사실, 말씀의 기초 앞에 인격적으로 살아계신 하나님과 우리가 눈 맞춤이 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말씀 앞에 삶을 조정할 능력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중심성이, 우리의 자기중심성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얼마나 쾌락을 좋아하고, 얼마나 자기가 중심에 서기를 익숙한지, 우리 자신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속적인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있지 아니하면, 우리의 신앙이 실제적인 자리에서 우리가 서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나면, 우리가 방법론으로 신앙생활 하게 됩니다 ‘신앙은 이런 거야 A, B, C, D.’ 방법론은 그러한데, 실제로 우리가 그렇게 살게 되나요? 안 됩니다. 인격적인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알고, 그 하나님과의 사랑의 교제 가운데 있을 때 살게 됩니다. 그렇지 않을 때 이론에 불과합니다. 시대가 타락하면, 정직한 말씀을 듣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예레미야에서도 똑같이 나옵니다. 예레미야 7장 14절 이하에 그리고 에스겔서 22장에도 똑같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지도자가 타락하기 싶습니다. 왜요? 사람들이 자기 기호에 맞는 설교, 위로 받는 설교, 복 받는다는 설교들을 대개 좋아합니다. 사실, 복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서,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 생명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할 때 복은 따라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 때문에 한다면, 하나님은 한 가지 수단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시대에는 지도자가 타락해 있습니다. 타락하기가 아주 쉬습니다. 지도자들이 이러한 시대에 올바른 설교를 전하면, 핍박 받습니다. 신앙의 본질에 서지 않으면, 실제로 말씀을 아무리 강력하게 퍼 부어도 변화될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먼저, 하나님과 개인적인 친밀감이 되어야 그 다음에 삶이 전환됩니다. 그래야 삶이 바뀝니다. 여기 목사님들께서 계시지만,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과의 신앙의 개인적인 친밀감, 교제로 초청하는 것이 우선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앙을 방법론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방법을 갖다 대입시킵니다. 그러면 삶이 전혀 안 바뀌게 됩니다. 우리의 삶의 조정은 인격체 되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인식되지 않는데, 우리의 삶을 말씀 앞에 조정한다. 누구의 노력으로, 자기 열심으로, 자기의 힘으로 되지도 않을뿐더러, ‘이러면 안 되는데’ 그러면서 갑니다. 그런 경우 아시나요? 하나님을 떠나면 꼭 그렇게 나옵니다. "이러면 안 되는데, 돌이켜야 되는데" 언제? 내일. 오늘은 안 합니다. 절대로 그렇게 못합니다. 할 능력이 없습니다. 내일 내일하고 미룹니다. 그러니까, 죄책감과 억압만 가득합니다.
네 번째, 믿음의 처방에 불신앙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벌써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정직하게 대면하지 않으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앞에 생명이 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2장 49절 50절의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는 아버지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또한, 예수님의 제자들도 "영생이 여기 있으시매 우리가 어디로 가오리까?" 라고 했습니다. 사실, 말씀이 우리 생명이잖아요. 시편 107편 20절에 보면, "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시는도다." 하나님께서 위기에 말씀을 보내시잖아요. 그리고 그 말씀을 따라 우리를 조정케 하시고 때로는 회개케 하시고 전환케 하시고, 때로는 하나님의 길을 우리에게 보이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말씀 앞에 정직하게 대면하지 않게 되면, 정작 위기의 시기에 말씀을 보내주셔도 말씀을 못 잡습니다. 그게 처방인줄 안 보이는 겁니다. 말씀을 들어도 그것이 하나님의 길이라는 사실이 안 깨달아집니다. 사실, 오늘날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그 자리에 있습니다. 꽤 오래 전에 "치유"에 대해 설교가 나갔습니다. 선교회에서 나간 설교 중에 제 설교가 나가면서, 전화가 적어도 100통 이상이 온 거 같습니다. 그런데, 그분들과 개인적으로 통화하거나 만나서 기도하면서 제가 느끼기에는 이분들의 대다수를 하나님께서 신앙의 본질로 초청하시는 걸 제가 느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하나님께서 신앙의 본질로 초청하셨습니다.’ 라고 하면서 ‘신앙의 본질은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신앙의 관계성으로 초청하셨습니다.’ 라고 말씀 드리면, 이분들 중에 99%는 뭐라고 그러냐 하면, "알지요", "그렇게 해야지요" 그런데, "지금 내가 뭐 해야 돼요? 헌금할까요? 작정기도 할까요?" 그래서 제가 작정기도 하면서 하나님 찾으라고 그러면, "하나님 찾는 게 뭐에요?" 가려져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그게 무슨 말씀인지 못 알아들을 뿐만이 아니라, 그것이 유일한 처방이라는 사실을 못 알아듣습니다. 그러니까, 방법론으로 배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시간 때우듯이 20일 금식 기도하면은 또는 작정 기도하면은 뭔가 문제가 해결될까? 이런 것에만 초점을 두고 있는 겁니다. 처방이 와도 들을 귀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 다섯 번째 하나님의 심판과 억압만 가득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 12절부터 14절에 하나님의 임재가 걷히며, 억압과 심판에 결국은 초토화됩니다. 웅덩이에서 물을 뜰 그릇도 없을 만큼 아궁이에서 재를 담을 조각도 없을 만큼 그렇게 박살난다는 것입니다. 온갖 죄악이 다 와 있습니다. 오늘날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우리 교회에 모든 죄가 다 와 있습니다. 음란함, 가정이 깨어지는 문제. 교회 안에 음란과 사술이 판을 치고 있는 현실. 이 모든 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현실이 되어버린 너무나도 심각한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상담하겠다고 전화가 오는 경우가 꽤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없을 때, 전에 계신 전도사님이 자주 전화를 받았는데 말씀하시기를, "목사님, 생각보다 문제가 심각합니다, 상담하자고 전화 오는 상당히 많은 수는 남편이 바람났다고 합니다." 이런 전화를 합니다. 목사도, 장로도, 집사도 예외가 아니고 교회의 모든 중직자를 포함해서 가정 가운데 엄청난 위기가 있습니다. 죄를 이길 능력이 없고, 세상을 이길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진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대만에서 오신 선교사님께서 전에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설교 시간에 대만에 가서 그런 설교를 하실 때에, 특별하게 봐서 그렇지 정말 오늘날 그런가? 하셨답니다. 두 주간 동안 한국에 계시면서, 어느 교회에 일어난 일들을 경험하면서 교회가운데 문제없는 교회가 전혀 없더라고 하셨습니다. 갈등과 분열이 너무나도 심각한 상황. 사실, 오늘날 그런 문들이 열려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궁극적으로 무엇이 문제입니까? 하나님을 떠난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떠날 때 이런 억압이 있습니다. 이사야 시대나 어제 출애굽기 시대에 우리가 이런 상황을 봤습니다. 또 예레미야 시대나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의 신앙이 바로 똑같습니다. 억압이 가득한 시대. 사실, 하나님 자신이 우리 가운데 근본적인 생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으면 우리 삶에 진정한 생명과 능력이 없습니다. 미국에서 오신 목사님께서 그러시더라고요. 아마 외국에서 오신 분들이 더 그걸 많이 느끼실 겁니다. 몇 년 전 보다 오늘날 우리나라 신문이 크게 달라진 것이 두 개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점, 사주팔자 보는 내용이 많아지고, 또 하나는 ‘남성의 문제해결’ 이런 광고가 그렇게 많이 나오더라고. 쾌락일변도에 빠지고, 음란과 사술이 가득한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고대 이세벨의 영이 있다." 라고 하기도 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하나님의 권위와 권세가 상실해 가니까 음란과 사술이 판을 치고 세상적인 그러한 사단의 권세가 득세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각성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그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한편으로, 소망이 있는 것은 영적으로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하나님께서 교회를 회복시키시는 부흥이 우리에게 가까이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속히 그 부흥이 임하기를 소원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사실, 하나님을 떠나 있는 것이 그런 문제의 현실임을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 1장 2절부터 4절 까지 제가 읽어 보겠습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 도다 하셨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더라." 너무나도 심각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엄청난 의식이 있었습니다. 이사야 1장 11절 에서부터 15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중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에게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이 구절은 아마 여기에 오신 대부분의 분들이 많이 접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무수히 많은 제물을 갖다 바쳤고, 모든 절기를 다 지키고, 그리고 열심히 모여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받지 않으십니다.
왜요? 그들이 하나님을 떠났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문제는 그거죠. 그들이 하나님을 떠났으면서도 불구하고, 그렇게 열심히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떠났다고 스스로 여기겠는가? 하나님을 떠났다고 생각하면서 이렇게 많은 헌신과 봉사를 할 수 있었겠는가? 절대로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이들이 하나님을 떠났다고 표현하는가? 이사야 29장 13절에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주님께서도 그들의 ‘의식’을 인정하셨어요. "입술로는 나를 가까이하고, 입술로는 나를 존경했다" 이렇게 나왔습니다. 그들이 입술뿐만 아니라, 행동으로 그들의 열심을 갖고 하나님께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무수히 많은 재물을 갖다 바치고, 헌신하고 봉사하고 기도하고 또 모든 절기를 다 지키고, 그뿐만 아니라, 그들이 모여서 하나님을 찬양했던 것 같습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그래서 입술로는,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존경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있습니다. 우리의 전부가 하나님입니다." 라고 고백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뭐라고 하셨어요? "마음이 내게서 멀리 떠나 버렸다." 라고 표현하십니다. 여기서 보면, 하나님을 떠났다는 것을 뭐라고 할 수 있느냐,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떠난 것이 하나님을 떠난 것이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아주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마음에서부터 사랑하는 것이고, 떠나는 것도 마음에서부터 떠나는 겁니다. 마음이 떠나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마든지 많은 의식을 지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러한 관점으로 우리 자신을 볼 필요성이 있다는 겁니다. 사실 우리가 입술로 하나님을 존경한다, 사랑한다고 말하며 입술로 하나님을 찾고 구하며 또 우리가 열심히 의식을 지키고 하나님 앞에 헌신하고 봉사하며 많은 제물을 갖다가 하나님 앞에 드린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마음이 떠나면 하나님을 떠난 것이고, 그것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징계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 입니까? 의식과 본질의 관계입니다. 오래 전 어느 부부가 저에게 상담을 하겠다고 왔어요. 왜 오셨냐고 했더니, 남편이 아내와 이혼하려고 왔다고 하면서 마지막으로 상담을 한번 받으려고 왔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유가 뭐냐고 물었더니, 본인의 아내는 ‘친밀한 사랑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하더라고요. 본인은 외롭게 자랐고, 부부간에 친밀한 사랑가운데 있기를 원했는데, 친밀한 사랑을 아내는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고치려고 7년을 노력했는데, 안 되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 남편이 엔지니어인데, 기계도 7년 동안 다루다가 못 고치면 버려야 합니다. 엄청나게 무서운 사고지요. 그래서 이혼해야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옆에서 듣고 있던 아내가 얘기합니다. "목사님, 저희는 아무 문제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남편이 하라고 하는 대로 다 해요. 밥도 해주고, 빨래도 해 주고, 죽는 시늉까지 다 해요." 그랬더니, 남편이 그럽니다. "밥 해주고 빨래 해 주는 것이 사랑입니까? 친밀함입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입술로 가까이 가고 경배하고 십일조 하고, 헌금하고, 모여서 기도하고, 전도하고, 봉사하고 그리고 뭔가를 열심히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어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밥하고 빨래 해주는 것이 사랑이냐?’ 너희가 모여서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제물 바치고, 헌신하고, 봉사한다고 그것이 사랑이냐? 물론, 당연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이 모든 것을 하게 돼 있습니다.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의식도 지키지 못하는 것은 "사랑"의 "사"자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잘못된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입술로만 그렇게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런 삶의 자리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능력이 되는 모습으로 가야 되는 것입니다. 사실, 행위뿐만이 아니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초청하시는 그 자리로 실제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야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자리에 있지 못했다는 겁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리에 있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친밀함의 사랑은 그 이상의 자리를 말하는 것인데, 그 자리에 있지 못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입술로는 나를 사랑한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나를 사랑하는 자리에 있지 못하다." 라고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실제로는 그 자리에 그들이 서 있지 못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그들이 나를 떠났다"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29장 14절에 보세요.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의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 자의 총명이 가리워지리라." 곧, 영적 소경을 만들어 놓으시겠다는 얘기 입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런 심각한 상황 가운데 놓이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이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 돌이킬 것인가? 사실, 오늘날도 우리가 이 시대에서 입술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 "존경한다" 라고 말하면서,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있는 것을 알게 되거든요. 우선, 나타나는 열매를 보면, 하나님을 떠났을 때 나타나는 증표가 오늘날 우리 교회 가운데 그대로 나타나 있고, 그것이 우리의 현실임을 우리가 본 다면, 이사야 30장 후반 절을 보면, 어떻게 우리가 회복할 것인가를 우리가 하나, 하나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18절에 보면,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온에 거하며 예루살렘에 거하는 백성아 너는 다시 통곡하지 않을 것이라 그가 너의 부르짖는 소리를 인하여 네게 은혜를 베푸시되 들으실 때에 네게 응답하시리라." 사실, 하나님은 우리를 징계하는 자리에서 끝을 내시는 것이 아니라, 다시 회복시키시는 것입니다. 이게 오늘 우리가 모인 이유 중에 하나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흥을 보내셔서, 당신의 교회를 반드시 회복시키시는 일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뭐라고 했나요? 18절에 보면,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무엇을 기다리시나요? 목적은 무엇이냐? 목적은 긍휼을 베푸시기 위해 기다리십니다. 그런데, 그 긍휼을 얻는 그 수단은 무엇이냐? 거기 보니까,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부르짖으라" 즉, 기도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기도한다는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이것이 다른 말로 ‘하나님을 찾는다." 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호세야 5장을 보십시오. 왜 호세아서를 봐야 하느냐면, 이사야 시대와 호세아 시대는 동시대입니다. 호세아 1장 1절과 이사야 1장 1절을 보면, 동시대 입니다. 이사야는 남 왕궁 유다에서 그리고 호세아는 북 왕궁 이스라엘에서 활동했습니다. 그런데, 똑같습니다. 호세아 5장 13절을 보십시오. "에브라임이 자기의 병을 깨달으며, 유다가 자기의 상처를 깨달았고 에브라임은 앗수르로 가서 야렙 왕에게 사람을 보내었으나 저가 능히 너희를 고치지 못하겠고 너희 상처를 낫게 하지 못하리라." 여러분 보십시오. 아까 남 왕궁 유다는 자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애굽에 사신을 보내었잖아요. 그런데, 북 왕궁은 어떻습니까? 나라를 구하기 위해 앗수르에 사신을 보내 도움을 청하러 간다는 겁니다. 문제의 상황에 똑 같은 자세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 없는 불신앙의 자세를 똑같이 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14절 보면, "내가 에브라임에게는 사자 같고 유다 족속에게는 젊은 사자 같으니 내가 움켜갈지라 내가 탈취하여 갈지라도 건져낼 자가 없으리라" 무슨 말인가요? 하나님을 동물의 왕 사자로 비유하면서, 사자가 음식을 지키고 있는데 누가 빼앗아 가겠느냐? 징계와 어려움은 하나님께로 왔는데, 누가 그 앞에서 그 문제를 해결 할 수 있겠느냐? 사실, 오늘 이곳에 와 계신 여러분, 어제 밤에도 하나님께서 동일한 감동을 주셨는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 자리에 있습니다. 그 초점이 문제에만 있습니다. 근데,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왜 그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나요? 아들을 아끼지 않고 주신 분이신데, 하나님은 전지하신데, 왜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나요? 능력이 없어서요? 아니요,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과정을 통해서 우리를 하나님의 어떠한 길로 인도해 가시는데 우리가 그것을 못 보는 것입니다. 관점이 어디에 있느냐? 문제해결에만 있습니다. 이 문제에만 초점이 가 있습니다. 사실, 문제 뒤에 있는 주님을 봐야 하는데, 문제 뒤에 계신 주님을 보는 축복이 있길 바랍니다.
여기에 문제 해결을 위해 오신 분들이 있는 줄도 모릅니다. 어제 밤에 하나님께서 주신 감동에 의하면, 그런 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로 가면, 그런 문제들이 아무것도 아닙니다. 문제 해결 위해 사람에게 기도 받고, 기도원 가고 하나님은 문제 해결의 수단이에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목적이 되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문제에 눈이 멀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자리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여기 이렇게 말하잖아요. 15절을 보세요,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서 저희가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기다리리라. 저희가 고난을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여 이르기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주권자임을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은 우리가 바로, 그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겁니다. 두 가지를 말하죠. 하나는 "죄를 뉘우치고", 두 번째는 "내 얼굴을 구할 때까지 기다리리라" 라고 말씀하고 계세요. 그리로 돌아와야, 근본적으로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왜? 이 문제가 어디에서부터 시작이 되었는데? 문제가 하나님을 떠난 것에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으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기다리신다고 했잖아요.
아까 이사야서 30장 18절에,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무엇을 기다리시나요? 부르짖기를 기다리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부르짖음의 내용이 무엇이냐? 하나님께 회개하고 죄를 뉘우치고, 그 다음에 뭐라고요? 얼굴을 구하는 자리에 서는 겁니다. 이것이 회복입니다. 이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지금 가야 하는 자리가 그 자리인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목적이 되는, 근본적인 목적이 하나님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속에 있기를 원하셨는데,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서 떠나게 되면서 그런 문제 가운데 있게 되었습니다. 그 자리로 돌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돌아가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돌아가느냐? 이 순서에 의하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을 살펴봐야 하는데, 제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을 살펴보기보다, 어디서부터 떠나 있는 것을 보기 위해서 ‘하나님 사랑’에 대해 살펴보기 원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 즉 성경에서 말하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엇이냐? 이것은 친밀한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관계 가운데 있기를 원하십니다. 헨리 블랙가비 목사님이 쓴 "하나님과의 신선한 만남" 은 부흥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라는 부분을 담고 있는데, 그 책에서 그분은 이렇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그 메시지는 제도권 안으로 돌아오라는 메시지가 아니었다. 그러면 무엇이냐? 인격적이고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관계성으로 돌아오라는 말이었다." 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것은 하나님을 목적된 삶의 자리로 돌아오라는 겁니다.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음을 인정하고 하나님 없이 진정한 생명도 능력이 없음을 인식하고 근본적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이 자신의 유일한 목적이 되는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의 본질인 것을 깨달아,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알기를 구하고, 교제 가운데 있기를 열망하는 그 자리 가운데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호세아 5장과 이사야 30장이 이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삶을 즉, 친밀한 관계성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경에 다섯 가지 사건을 보면,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분명한 목적을 알 수 있겠더라고요. 첫 번째는 창조의 목적,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 즉, 친밀한 관계성을 목적으로 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아담과 하와와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도록 초청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창조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인격을 닮게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땅을 다스릴 권세를 주시며 완전히 위임하십니다. 그러시면서 동물들을 아담 앞으로 지나게 하셔서 아담으로 하여금 명명하게 하시고, 그 뿐만이 아니라, 서늘한 곳으로 함께 거닐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을 보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두 번째, 출애굽기 19장에 출애굽 하는 목적을 볼 수 있습니다, 근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끄셔서 출애굽기 19장 3절에서 6절까지를 보면,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이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저는 우리의 사역의 목적이 무엇인지 분명히 볼 수 있겠더라고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사를 주시면, 은사를 사용하는 우리의 근본적인 목적이 무엇이냐? 한 사람, 한 사람을 우리가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겁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섬기는 것은 이 사람을 하나님과의 관계성으로 이끄는 겁니다. 개인적인 복락. 그것은 하나님과의 근본적인 관계 속에서 그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이 하나님이라고 출애굽에서는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사건은 십자가 사건입니다. 에베소서 2장 12절에서 19절에 보면, 하나님의 목적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십자가의 사건에서 가장 핵심적인 목적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막힌 담을 허는 것에 있습니다. 사실, 여러분 십자가의 사건의 가장 큰 목적은 무엇입니까?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면서 나타났던 결핍이 해결되기 위해 주님께서 오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떨어지면서, 원인이 뭔가요? 죄 때문입니다. 누가 인간을 죄에 빠지게 했느냐? 이것은 사단이 인간을 유혹하면서 죄에 빠지게 되어, 그 결과, 인간이 결핍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죄와 사망과 사단은 인류의 영원한 적입니다. 그런데, 그 죄와 사단과 사망의 권세를 깨드리신 분이 누구시냐?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중에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이냐?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 화목함을 이루게 하시려고 그리고 막힌 담을 헐어 우리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으며 나아갈 수 있도록 하신 사건입니다.
네 번째 사건은,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신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내가 가면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8장 18절 이하에 보면, "너희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떻게 가시면서 이 말씀을 하실 수 있으신가? 요한복음 14장 18절에 보면,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어떻게 오십니까? 또 다른 보혜사로. 그래서 성령님이 우리 가운데 오신 사건, 그것이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우리 안에 오신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동행하셨다면, 때가 됨에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승천하사 다시 우리 가운데 오심으로 영으로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는 사건. 이것이 무엇입니까? 친밀함을 의미합니다.
다섯 번째 사건은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신 사건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3장 14절과 15절에 나오는데, 그 열두 제자를 부르시는 것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 목적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첫 번째 목적은 무엇이냐?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려고" 친밀한 교제가 있어야 우리가 사역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세 번째 목적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전도도 하고 귀신을 내어좇는 역사도 있게 하려 하심이라" 하셨습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어야 승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친밀한 교제에 있지 않으면, 우리의 자원으로 사역을 하게 되고, 우리의 자원으로 하여 나타나는 주된 특징이 무엇입니까? 탈진입니다. 탈진. 지쳐버린 다는 것입니다. 사역자에게 필수적인 요소가 무엇이냐?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으로 사람을 섬겨야 상처를 안 주지, 헌데, 아버지의 마음이 걷히면 무엇이 나옵니까? 내가 나옵니다. 내 본성은 무엇입니까? 나에게 잘 대해주는 사람에게 잘 하는 것이고 못하는 사람에게 못 대해주는 것이 우리의 본성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어떻습니까? 사람이 싫다. 지겹다. 그만두고 싶다. 그러면서 사람이 탈진된 현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실, 자기가 공급받지 않으면,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가운데 지속적인 눈 맞춤,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인식하고 그 주님의 보좌 앞에 매일 나아가 주님 자신을 사랑하고, 주님의 통치와 주권아래 있기를 열망하는, 또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하는, 이런 친밀한 교제 가운데 우리 삶이 되어야 놀라운 승리가 있는데, 실제로 그러한 자리 가운데 있지 않으면, 우리가 그 자리 가운데 탈진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넘어져요. 실패해요. 이처럼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가 우리의 신앙의 핵심입니다. 이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지 않으면,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친밀한 교제를 위해 필수적인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무엇이냐? 내가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인격체 되신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인격체 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격체이십니다. 그런데, 그 인격체 되신 하나님을 실제로 아는 것이 우리의 실제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과 관련해서, 두 가지 관계를 아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하나는, 우리가 피조물이며, 하나님은 창조주시라는 관계를 아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셨고, 나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 관계성을 아는 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러나 제가 시간이 없어서 양해를 구하고, 앞부분은 좀 생략해야 될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먼저 사랑하셨다는 것을 아는 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관계에 있어서 사랑은 일방적인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상호간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성경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는 삶에서 아주 중요한 것이 하나님이 나를 먼저 사랑하셨고,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자리에 있는 이 관계가 먼저 돼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사랑이 무엇인가? 왜 제가 이것을 살펴보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알아야 우리가 하나님을 그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사랑을 잘 모릅니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추상적이어서요, 사랑을 자기식대로 합니다. 의부증이나 의처증이 있으신 분들이 자기식대로 상대를 사랑합니다. 사실, 우리도 똑같아요.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떠나면 떠난 것인데.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 그 사랑을 먼저 알기 원합니다.
신명기 7장 6절, 7절, 8절 같이 보시죠.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저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신 표현이 여기에 잘 나타나 있다고 봅니다. 세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보배로운 소유물로 택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보배로운 소유물로 택하신 것을 아시나요? 정말 아신다면, 절대로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러나 상황이 어렵고 뭔가 태문이 열리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정말 나를 사랑하시는지 알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보면, "너를 사랑하사, 너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십자가의 죽음이 나를 위한 죽음이라고 되어 있는데, 상황이 어려우면 그것이 잘 안보입니다. 마치, 바닷가에서 모래를 집으면, 모래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듯, 빠져나간 모래가 나인듯 한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나만 사랑하지 않으시는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사실, 이사야서 43장에 보면,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다" 이런 말이 그렇죠. 내가 하나님의 특별한 보배로운 소유물로 우리를 선택하신 것이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인 것입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이 성민이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원래 거룩해서 성도, 성민이 된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셨기에 우리가 성민이 된 것입니다.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닙니다. 옆에 사람 축복해 주십시오. "당신이 잘 나서가 아니라, 거룩하신 주님이 선택하셔서" 이것만 알더라도 우리가 교만함이나 실패 감에 빠지지 않을 것 입니다. 그분이 거룩하셔서 우리가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면서 왕족의 집에 태어난 아이가 왕족의 특권을 누립니다. 왜 그럴까요? 그가 태어난 집안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였기에 우리가 의인됨을 깨달았다면, 행위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가족 된 자로서 어제는 의인이었다가 오늘은 의인이 아닌 그런 모습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주안에서 거듭난 백성이라면, 우리가 대소변을 못 가리는 어린아이처럼 미숙할지라도 우리는 이미 거룩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보배로운 소유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보배로운 소유가 있습니까? 얼마나 보배를 자주 꺼내 보십니까?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자주 꺼내 보실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관심이 있으실 것 같습니까 없으실 것 같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관심이 있으십니다.
두 번째로 신명기 7장 7절에 보면, 감정이 있습니다. 열렬히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기 "너희를 기뻐하시고" 라는 뜻은 원어로 열렬히 사랑하시고 라는 단어를 씁니다. 영어로는 "Affection"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열렬히 사랑하십니다. 와 닿으십니까? 우주를 창조하신 만왕의 왕 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열렬히 사랑하신다는 그 사랑의 고백에 그 감정이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질투하시도록 자기 백성을 사랑하신다고 합니다, 그 질투가 바로 여기 이 열정에서 나왔다고 봅니다. 출애굽기 34장 1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금송아지를 만들고 번제를 드린 이 이스라엘 백성과 다시 재 언약을 세우시면서, "나 여호와는 네 하나님이니, 질투하는 질투의 하나님이라" 질투는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 사랑의 열정으로 우리를 이끄시고, 회복시키시고, 도우시고, 우리를 붙드십니다.
이사야 63장 15절을 보면, 이사야 선지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열정이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열정에서 나오는 그 질투가 우리 가운데 걷히면, 그것이 심판이요, 징계임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여호와께서 ‘내버려 두신다’. 라는 표현을 많이 하잖아요. ‘내 버려둔다’ 무슨 뜻입니까? 무관심하다는 것이지요. 사람이 최고 심각한 것이 무엇입니까? 무관심입니다. 시기하고 질투한다면 그건 아직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너 따로 나 따로 라면 이건 무관심입니다. 이건 끝입니다. 상담하면서 보면, 전혀 관심이 없다고 하는 것은 마음이 떠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면, 우리를 열렬히 사랑하시는 그 관점으로 우리를 간섭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사실, 제가 기도를 해 드릴 때, 이런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다지 사랑 받을 만한 것 같지 않은데도. 우리가 그렇잖아요. 우리가 자식이 사랑 받을 만하기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지요. 그냥 예쁘고, 그냥 사랑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가만두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여기 7절에 보면, "외모로 취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외모로 보면 형편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은 자들이지만, 하나님께서 너희를 사랑하시고 기뻐하셔 열렬히 사랑하셨다"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세 번째 하나님의 사랑은 희생적인 사랑인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은 행동하는 사랑입니다. 대속의 사랑입니다. 8절에 보시면,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하나님께서 당신의 능력으로 일하십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죠? 우리를 건져내시고 회복시키시고 그리고 인도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로마서 5장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 하셨느니라.". 요한일서 4장 9절, 10절에, "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우리는 십자가를 보면 하나님의 사랑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주신 사랑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사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염두 하신 것은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죽으러 온 것이야’ 라는 이 말씀을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 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신 본인의 목적을 분명히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것에 대해 말씀하시며, 예수님을 향해 대적하는 무리들을 긍휼히 여기시며 오래 참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얼마나 그 하나님의 사랑을 자주 오해하고 떠나 살아갑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0년 전 우리를 아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그 사랑을 통해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우선, 신명기 7장 9절에 보면,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 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그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당장에 보응하여 멸하시나니 여호와는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당장에 그에게 보응하시느리라. 그런즉 너는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할지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초청하십니다.
마가복음 12장 29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신명기 6장 4절에서 6절에 보면,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기에서 두 가지 말하고 있죠. 하나님께서 유일하신 것과 하나님을 전적으로 사랑해야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사랑할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유업이 있다.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언약을 누리는 유업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안에 모든 것이 있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런 패턴으로 가야 합니다.
첫 번째로는 우리가 하나님을 보배로운 소유물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배로운 소유물로 삼으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 44절에서 46절을 보면,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는 무엇과 같으냐 라고 말씀하시면서, 값진 보화와 진주를 비유로 설명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값진 보석되신 주님을 전 존재로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신 것처럼 내가 보배로운 소유물로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제가 한동대에 학기마다 강의를 가게 되는데, 어떤 교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한동대에서 한 명이 하버드 대학의 총학생회로 선출되었는데요, 한국에서 동문회에서 술자리를 마련해서 술을 따라 주더랍니다. 이 친구가 본인은 크리스천이라서 먹지 않겠다고 했더니, 선배가 주는데 먹지 않겠냐고 세 번, 네 번 권했는데, 넥타이를 푸르며, "선배님은 입으로 마시지만, 저는 가슴으로 마시겠습니다." 라고 하더랍니다. 그러니까, 다시는 술을 권하지 않더랍니다.
우리가 어떠한 상황과 환경에 닥치면, 위기를 모면하거나 또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타협하는 자리로 쉽게 돌아갑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값진 진주 되신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100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길에 설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유일한 목적이 되신다면, 우리가 하나님만 기쁘시게 하길 원하는 길로 우리가 선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주님을 따르는 길을 성경은 "좁은 길"이라고 말합니다. 핍박이 따르는 길이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어도 융통성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상황과 환경에 따라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적당하게 타협하고 처세에 따라서 하려는 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일반적인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보배로운 진주로 여기고 선택하기로 결단하고 어떠한 환경 속에서든지 우리가 주님을 인정하고 선택하는 자리에 설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청년들이 사회 속에서 직장에 들어가 가장 크게 겪는 문제 중에 하나가 "술"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저희 교회 자매 중에 교생 실습 가서 술 건배가 돌 때, 그리스도인이라 마시지 않는다고 했더니, "너희들만 그리스도인이냐? 저기 교감 선생님도 장로님이시다 그리고 누구는 안수집사" 라고 했다고 합니다. 오늘날 그것이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하나님을 선택한다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을 전 존재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2장 29절에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여기 보면, 하나님은 유일하신 분이라는 것 입니다. 그래서 그 유일한 하나님만 전 존재로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나누어 지지 않은 한 마음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 전 존재로 사랑한다는 말을 기억하십시오. 이것은 하나님만 사랑하고 하나님만 우리의 100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도 사랑하고 다른 것도 사랑하는 것은 전 존재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에,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누어진 마음은 우리가 좇는 그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아내 이외에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외박을 하고 바람을 피운다면, 대부분의 경우 집에서 잡니다. 그런데, 어쩌다 한 번씩 외박하고 돌아와 알고 보니 다른 여인과 있었습니다. 그 남자의 본래 마음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1. 아내에게 있다. 2. 한 번씩 만나는 여자에게 있다. 그 마음이 아내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내를 사랑한다고 말할 순 있지만, 익숙하니까, 지금까지 살아왔으니까, 왜 가정을 깨면 안 될 것 같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다른 곳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100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사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리에서 돌아설 때 우리 마음에 우상이 있습니다. 이 우상이 출애굽기 32장 8절에 보면, 우상의 특징 네 가지가 나오는데. 첫 번째, 하나님을 떠나면 만들고, 두 번째,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고, 세 번째, 그 우상이 우리 관심사가 되어 그것에 헌신과 정성을 다하게 됩니다. 네 번째 우상은 우리의 삶에 영향력을 갖게 됩니다. 그것을 우리의 "신"이라고 여깁니다.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을 떠나면, 다른 곳에 눈이 돌아갑니다.
제가 17차? 18차인가요? 집회를 마치고 저희 교회에서 그 이후에 기도를 드리는데, "나 주님만을 섬기리, 헛된 마음 버리고" 라는 찬양을 드리고 있는데, 무슨 일이 있어나면, 앞에 제사 드릴 때 놓는 돼지머리 즉 제사상이 보이는 거 있죠. 그래서 제가 ‘무슨 쓸데없는 생각이 나오나’ 하면서, 하나님께로부터 온 생각이 아니라고 무시하고 지나가는데,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저에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너는 교회에 헌신했냐? 나에게 헌신했냐?" 여러분 하나님께 헌신하면, 교회에 헌신하게 돼 있습니다, 목사로서. 그런데, 목사의 우상이 교회가 되고 사역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헌신하지 않아도 교회에 헌신할 수 있어요. 그 다음 순간 보여 주신 것이, 교회가 저의 우상인, 그래서 돼지머리 차려 놓고 그 앞에서 절하는 것과 같은, 그 모습을 저에게 순식간에 보여 주시더라고요. 얼마나 절박하게 하나님 앞에서 회개 했는지 모릅니다. 그것이 ‘내 우상이었노라’ 하면서 하나님 앞에 절박하게 회개했습니다. 너무 마음이 낙심되고 한편으론, 그 자리에 내가 또 돌아가지 말아야 할 텐데 하는 맘이었습니다. 그 다음날 제 아내가 꿈을 꾸었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멍하게 있었습니다. 그날이 주일날 아침인데, 주일날 밤이 되어서 말하기를 꿈에 자기 남편이 바람을 피우더래요. 제 아내가. 그러는데, 꿈속에서는 그 남편이 제가 아니더래요. 꿈에서 그렇게 잘해주더니, 요만큼 떨어진 다른 집에 가서 그 정원에서 다른 여자와 재미있게 놀더랍니다. 그러더니, 그 여자를 들고 방으로 이렇게 들어가더랍니다. 그걸 자기가 보면서 죽을 것 같더래요. 그래서 아침에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깼는데 멍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과 나와의 우리와의 관계를 말하시면서 그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이셨던 것 같다." 라는 얘기를 하더라고. 그러니까 딱 연결이 되는 겁니다. 제가 그 전날 있었던 얘기를 깊이 안 나누었는데, 그러니까 제가 얼마나 절박하게 회개가 되는 지요. 그렇게 간음하는 자리에 있었고, 여러분 하나님을 마음에서 떠나게 되면, 사랑하는 마음에서 떠나면, 나누어진 마음이 됩니다. 여전히 하나님을 찾고, 구하고, 예배드리고,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 불구하고 다른 곳에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관심이 어디에 있느냐? 그것에 반응합니다. 교회가 잘 되면 "할렐루야" 했다가 교회가 잘 안되면, 우리는 낙심하고 좌절합니다. 교회가 잘 되는 것 같아 보이지 않으면, 거기에 우리는 민감하게 반응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마음을 자극합니다. 원수 마귀가 우리를 공격하는 주된 통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의 우상을 건드리면, 그게 될 것처럼 안 보이면, 우리는 낙심하고 좌절합니다. 이것이 영적인 공격입니다. 우리의 초점이 거기를 떠나서 하나님만 바라보면, 원수 마귀가 하나님을 건드리지 못하여 속수무책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우상이 건드려지면, 우리는 뒤집어집니다. 나누어지는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알려면, 입술로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가 무엇에 반응하는가 알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무엇에 반응하십니까? 무엇이 여러분의 삶을 실망하고 낙심하게 합니까? 무엇이 여러분의 삶의 원동력이 됩니까? 무엇 때문에 여러분이 좌절하고 낙심하고 또는 기쁨의 자리에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까? 그것이 여러분 안에 있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위한 수단인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목회자에게는 그래서 그것이 사역일 수도 있습니다. 그게 물질, 명예, 그리고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자녀일 수도 있습니다. 남편이나 아내일 수도 인간관계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 주면 기분 좋고 그렇지 않으면 기분이 나빠진다면, 명예가 여러분의 우상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만약 그 자리에 있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리에서 떠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은 하나님께 주도권을 맡겨 드리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4장 26절에 보면,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삶의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주님을 쫓아가는 삶이 무엇인지 가르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정을 소중히 여기십니다. 그런데, 가정보다 우선순위가 하나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풍요케 하시기 위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가운데 보내셨습니다. 물질적으로도 풍요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물질보다 우선순위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우상이라면 버리고 주님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버리라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그 말은 주도권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말씀을 들으면, 많은 성도들이 부담스러워 합니다. 왜요? 하나님을 떠나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부담스럽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 있다는 신앙의 본질에 있다면, 우리가 절대 부담스럽게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전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가족, 자기 소유, 자기 명예 아닙니까? 그런데, 이렇게 자신에게 소중한 것들이 하나님 앞에 주도권을 드려 실질적으로 하나님 말씀 앞에 드려지지 않는다면, 그런 신앙은 우리에게 이론에 불과합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별 말을 다 할지 몰라도, 실제로 그 주도권을 하나님께 드리는 자리에 있지 않다면, 우리의 신앙은 이론에 불과하게 됩니다. 자기의 삶에 있어서 자기가 왕입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도 어떨 때 부담스러운 음성을 들으면, ‘주님,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또는 그런 음성을 들을까봐, 아예 기도도 하지 않습니다.
저도 과거에 그런 경우가 참 많습니다. 제가 전에 있던 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있을 때, 도시의 교회로 부교역자로 가려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네 뜻대로 말고 내 뜻대로 하라’ 라고 말씀하시는 거 같더라고요. 그래서 그 뜻대로 하겠다고 하는 것도 쉽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그 다음 해에 하나님께서 ‘여수 앞 바다에 있는 성도 3명 있는 곳에 가겠느냐’고 물으시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얼른 일어났습니다. 그 다음날 새벽예배 때에도 얼른 제가 할 말씀만 드리고 일어나 갔습니다. 왜요? 하나님이 가라고 하실 까봐 고민하고 씨름하다가 나중에 그랬죠. "주님 말씀하시면, 제가 뜻대로 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왕이라고 하지만, 평탄하고 아무런 문제가 없을 때에는 기꺼이 하나님 왕 되십시오. 그러다가 내가 원하는 방법대로 되지 않으면, 대가를 지불하고 사는 것이 쉽지가 않거든요, 그러니까 뭐 합니까?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왕입니까? 자기가 왕이죠. 그전까지는 직장 생활해서 대학원에 가려고 돈을 모았거든요, 적지 않은 돈이었습니다. 근데, 하나님께서 그 돈을 남을 주라고 그러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별 생각이 다 났는데, 어느 날 주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 같아요. ‘너 그 돈 갖고 평생 살아보든지’ 그래서 그냥 보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제가 돈이 없어서 무엇을 하지 못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사실, 주님이 물질의 주인이시라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헌금하라고 감동 주시면, 못 들은 척하는 것입니다. 누가 주인이에요? 내가 주인인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의 왕 노릇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하는 것입니까? 안 사랑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보배로운 소유물로 택한다는 것은 이론인 것입니다. 입술뿐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위해 여러분의 삶이 얼마나 대가를 지불하며 삶을 조정해 본 경험이 있습니까? 우리는 유익한 메시지, 도움이 되는 메시지만 들으려 합니다. 근본적인 전환이 필요합니다.
세 번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는 전 존재로 의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힘이 되십니다. 시편 18절에 보면,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힘이 되신다는 말은 우리가 사람이나 환경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만 반응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이 죽이려는 상황 속에서도 사람이나, 군사나, 친척이나 친구 그 어느 누구도 자기의 도움이 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사무엘하 22장에 나오는 것과 동일하거든요, 그의 말년에 자기가 살아 보니까, 하나님 외에 그 어떤 것도 도움이 될 수 없음을 알고 이 시를 쓰게 됩니다. 그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반응하기로 결단하고 하나님 자신이 유일한 소망이 되는 그 자리로 돌아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만 유일한 소망이라고 말하면서, 문제가 닥치면 얼마나 많이 인간적인 방법으로 자기의 길로 돌아가는 사람이 많은 줄 모릅니다. 실제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성경적인 근거로 보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리에서 정말로 멀리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중심에서부터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나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크게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데, 그것이 하나님을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배와 찬송과 기도 하는 모습을 보면, 하나님에 대한 열정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구를 사랑하면 열정이 있고 그 열정이 우리 발을 그리로 옮기게 돼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빼앗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길 갈망하십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안 되는 열정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더 알기 원하고 찾는 열정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무엇이 문제 입니까? 하나님을 향한 배고픔과 열망입니다. 잠언 8장 17절에,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시편 42편 1절,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시편 27편에 다윗이 고백하기를, "나의 유일한 열망은 주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는 것이요, 주의 전에 거하는 것이라" 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서 나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이런 갈망을 갖습니다. "너희가 입술로는 나를 사랑한다. 존경한다 말하나 마음은 내게 멀었도다"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열정이 사라졌습니다. 저는 하나님에 대한 이 열정을 실제로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자라가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세 번째로는,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우리를 위해 희생하고 속량하신 것처럼 우리가 주님의 것을 우리의 것으로 여겨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5장 14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한다." 라고 합니다. 바울의 헌신의 원동력은 주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돌아올 대가 때문에 그렇다면, 그것은 기복신앙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것을 율법이라서 하게 된다면, 우리는 율법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정말로 사랑하게 된다면, 아버지의 일을 자신의 일로 여겨 그 일에 동참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그 열정이 자라게 되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그 마음을 계시하십니다. 중보기도, 경배찬양, 그리고 사역에 있어서 그 아버지의 마음이 부어질 때 그 일이 가능합니다. 아버지의 마음에 반응하는 삶이 사실, 예배입니다. 그 반응하는 것 중에 하나가 중보기도 즉, 열방을 품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11장 2절에,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보하노라." 바울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어 하나님의 일에 자신의 삶을 드려 헌신하며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보니까,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은 궁극적으로 열매 맺는 삶을 말하는 것을 봅니다. 요한복음 15장 8절에 보면,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로마서 7장 4절에 보면,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들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열매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의의 열매"가 있어요. 우리의 인격이 변화되어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의 열매가 우리 가운데 맺혀지게 됩니다. 빌립보서 1장 11절에,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이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면, 우리 가운데 성령의 열매가 가득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격이 변화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변화되지 않기 때문에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문제를 주게 됩니다. 우리의 인격이 변화되면, 우리의 삶이 바뀌게 됩니다. 초대 교회를 보면, 가까운 곳에 전도 했다는 말이 거의 없습니다, 이것은 그렇게 전도할 필요가 없이 그들의 변화된 모습 속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안디옥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함을 받았다는 것이 그 말이거든요. 주의 손이 함께 있기 때문에.
또 한 가지 열매가 있습니다. 뭐냐? 하나님의 일이 성취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십니다. 그것이 열매입니다. 요한복음 17장 4절에 보면,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에 관심이 있었고 그것을 헌신하여 그 일에 동참하게 되어 그 일을 이루심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2장 23절에 보면,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만일,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지면 많은 열매를 맺고 그렇지 않으면 그대로 있느니라." 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을 십자가에 죽으시는 사건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십자가 사건 뒤에 얻어지는 결과로서 "영광"을 말하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님이 아버지께서 일하시는 그 대속의 사건에 자신의 목숨을 바쳐 아버지께 순종하는 것을 자신의 영광으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아버지의 일에 동참하는 것을 자신의 영광으로 여기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기까지 동참하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 5절 이하를 보면,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여길 것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우리가 우리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의 일에 동참할 때 하나님께서 그 종들을 높이십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보면, "너희는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이루시리라" 라고 말씀하실 때에 우리의 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의 관심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데" 있지 아니하고 "모든 것을 더하신다."는 말씀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나님께 헌신하셨을 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높이셨습니다. 우리가 진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이런 예수님의 모습의 자리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유일한 삶의 목적이 되신 그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그런 자리에 있지 못함을 이사야 5장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 5장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심판하시겠다는 선포입니다. 거기 1절 이하를 보면, 거기 하나님의 기대가 있으셨음을 봅니다. 좋은 밥에다 극상품 포도를 심었는데, 그들이 들포도를 맺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8절 이하에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겠다는 이유에 대해 나와 있는데, 그 이유에는 1. 탐욕, 2. 쾌락, 3. 부정직, 4. 자기 지혜 입니다. "가옥에 가옥을 연하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틈이 없게 하고 이 땅 가운데서 홀로 거하려 하는 자들에게는 화 있을진저" 이것이 탐심입니다. 9절에 "가옥이 황폐하리니 크고 아름다울 찌라도 거할 자가 없을 것이며"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11절에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독주를 따라가며 밤이 깊도록 머물러 포도주에 취하는 그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이 연회에는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저와 포도주를 갖추었어도 여호와의 행하심을 관심치 아니하며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생각지 아니하는 도다." 오늘날 사람들이 자기 재산을 늘리는 데에는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무엇을 좇습니까? 자기 대가, 자기 부, 자기 건강, 명예, 명성 등을 좇습니다. 자기 쾌락과 유익과 만족을 위해 자기 모든 것을 좇아갑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모습이 아닙니다. 호세아 5장 후반부에서부터 6장을 보면,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서 저희가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기다리리라 저희가 고난을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여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 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이것이 회개의 모습인 것 같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를 잘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6장 4절과 5절에 보면,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저희를 치고 내 입의 말로 저희를 죽였노니 내 심판은 발하는 빛과 같으니라" 그들이 회개하기는 했습니다. 회개의 내용이 잘못되었다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우선 그들의 회개의 내용을 보면, 여호와께 돌아가는 것이 회개임을 알았습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반드시 회복시켜 주실 것을 알았습니다.
세 번째, 여호와를 알기를 간구하고 그리고 간구한 것에 대해 주님께서 들으실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회개의 내용은 전혀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자세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4절에 보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쉬 없어지는 이슬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반짝 회개입니다. 우리 중심에 전환하는 것이 얼마 못 갑니다. 중심이 하나님께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정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리에 있는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실제로 우리가 그렇게 살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사야의 결국은 부흥이 옵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찾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만나주시고 회복해 주시는 부흥이 오는 것입니다.
세 번째(예배의 회복)
- 여주봉 목사 -
오늘 오후 시간에는 "예배의 회복" 입니다. 하나님의 부흥과 예배 회복은 필수적인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개인의 회복에도 그리고 교회의 회복에도 예배가 회복되는 것은 필수적인 연관을 갖고 있습니다. 부흥이 오면 예배가 회복되고, 부흥이오기 위해서도 예배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예배와 관련해서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가 되려면 4가지 차원이 되어야 합니다.
1. 본질이 추구되는 예배
2. 성령이 주관하시는 예배
3. 찬양과 경배가 중요시 되는 예배
4. 삶이 예배로 드려지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이 네 가지 부분을 같이 살펴보기 바랍니다. 저는 개인의 예배가 회복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교회의 예배가 회복되어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리고 예배를 통해서 성령께서 우리를 마음껏 만지시고 회복시키는 일이 이루어지려면 이 4가지가 되는 것이 필수적인 것 같습니다.
첫째, 본질이 추구되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출애굽기 20장 8절, "안식일을 지켜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 즉," 이라고 나옵니다. 민수기 10장 10절 "또 너희 희락의 날과 너희 정한 절기와 월삭에는 번제물의 위에와 화목제물의 위에 나팔을 불라. 그로 말미암아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를 기억하리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레위기 23장에 여러 절기들을 말합니다. 그러면서,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칠칠절, 나팔절, 초막절, 등의 절기를 말합니다. 레위기 22장 18절 "아론과 그 자손들과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고하여 이르라. 이스라엘 자손이나 그 중에 우거하는 자가 서원제나 낙헌제로 번제를 여호와께 예물로 드리려거든 열납되도록 소나 양이나 염소의 흠 없는 수컷으로 들릴 찌니 무릇 흠 있는 것을 너희는 드리지 말 것은 그것이 열납되지 못함이니라. 무릇 서원한 것을 갚으려든지 자의로 예물을 드리려든지 하여 소나 양을 화목제 희생을 여호와께 드리는 자는 열납되도록 아무 흠이 없는 온전한 것으로 할지니. 눈먼 것이나, 상한 것이나 지체에 베임을 당한 것이나 종기 있는 것이나 괴혈병 있는 것이나 비루먹은 것을 너희는 여호와께 드리지 말며 단 위에 화제로 여호와께 드리지 말라" 이사야서 1장을 읽기 위해 읽었습니다.
이사야서 1장에 보면,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어떻게 예배를 드렸는지 나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당시 사람들을 어떻게 보셨는지 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서 1장 11절에서 14절 말씀,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들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들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내게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이사야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경 말씀대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안식일과 월삭일, 성경에 나온 모든 절기를 다 드렸을 뿐만 아니라. 말라기 시대에는 흠 있는 것으로 제물 드렸지만, 이 시대에는 제물도 성경이 말 한대로 흠 없는 것을, 살진 것을 하나님께 드리되, 무수히 많이 드렸습니다. 이 사람들은 본인들의 예배가 상달되었다고 생각했을까요? 아닐까요? 이들은 그 당시 자신들이 갖고 있는 성경대로 드렸습니다. 자신들이 얼마나 예배를 잘 드렸다고 생각했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마당만 밟을 뿐이라" 이들은 자신들의 예배가 헛된 예배라고 생각했겠습니까?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드렸고, 철저하게 드렸는데. 그렇기 때문에 이사야의 말씀을 그 당시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사실,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께 상달되는 예배가 되기 위해선, 우리도 본질을 추구하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사실, 그 당시에는 이사야가 틀렸다고 사람들이 말했지만, 역사를 통해서 이사야가 옳은 것이 밝혀졌고, 오늘날도 이사야서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졌기 때문에 이사야가 옳은 것이라 받아들이게 된 것이죠. 그래서 본질과 예배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1. 본질과 예배
1) 본질과 의식과의 관계
① 우리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와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을 알고 우리 삶에 주님과 동참하는 것입니다.
호세아 6장 6절,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하나님 무엇을 원하신다고요? 인애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또 무엇을 원하신다고요?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지 않으신가요? 제사와 번제. 원래 제사와 번제를 누가 드리라고 했죠? 하나님. 그런데, 왜 지금은 원하시지 않으신다고 하셨나요? 우리가 이런 성경을 자세히 보아야 합니다. 호세아가 신약 시대라면 괜찮죠. 신약시대에는 예수님께서 제사와 번제를 완성하셨죠. 호세아서는 구약서 입니까? 신약서입니까? 구약인데, 지금 하나님께서는 번제와 제사를 원하시지 않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무엇을 볼 수 있을까요?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번제와 제사를 원치 않으신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나중 시대에 번제와 제사를 제대로 드리지 않을 때에 하나님을 멸시한다고 말씀하셨죠. 성경은 전체를 보면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 말은 번제와 제사를 원치 않으신다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신 것은 번제와 제사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원하는 가장 핵심적인 것은 나를 알고 사랑하는 것이야’ 라고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그래서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죠?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 3절에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그랬죠. 그래서 여기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성경 전체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또 한 구절 보겠습니다. 예레미야 7장 21절,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희생에 번제물을 아울러 그 고기를 먹으라. 대저, 내가 너희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에 번제나 희생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며 명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애굽 땅에서 인도하신 이스라엘 백성에게 번제와 희생에 대해 말씀하지 않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레위기 민수기를 보십시오. 그렇다면, 말씀 해 놓고 입 싹 닦으시고 말씀하지 않으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 말씀은 아까 말씀과 같이, ‘내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그날에게 애굽에서 너희를 건져 낸 날부터 너희에게 내가 명한 가장 주된 것이, 핵심적인 것이, 본질적인 것이 번제와 희생이 아니야’ 라는 말씀입니다. 이 이야기 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본질적인 말씀입니까? ‘너희가 내 목소리를 청종하고 내 모든 길로 행하라’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오직 이것으로 너희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나의 명한 모든 길로 행하라. 그리하면, 복을 얻으리라 하였으나" 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출애굽기 19장 3절 이하, 신명기 30장을 보면, 너무나 선명합니다. "내가 너희 앞에 생명과 복을 두었다 그리고 다른 쪽에 사망과 저주를 두었다. 너희와 너희 자손을 위하여 생명과 복을 택하라" 그러시면서,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라고 하시면서 "명령과 규례를 지켜라" 라고 하셨습니다. 거기에서 번제와 제사에 대해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말은 무엇이냐?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께서 번제와 제사를 말씀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한 가장 본질적인 내용이 핵심적인 가르침이 번제나 제사가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하나님의 행하심을 알고 우리의 온 삶으로 동참하는 것. 온 삶으로 동참하는 것은 전적인 순종과 온전한 신뢰가 필수적입니다. 이 삶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입니다, 하나님 행하심에 온 삶으로 동참하는 것이다. 이것을 성경 전체에서 볼 수 있습니다.
본질과 의식과의 두 번째, 의식도 하나님께서 명하신 중요한 것들입니다. 호세아서 6장 6절 말씀을 통해 본질과 의식과의 관계를 알 수 있습니다. 본질은 하나님을 알고 그분과의 친밀한 교제와 그 분의 행하심에 온 삶으로 동참하는 것입니다. 반면, 번제와 제사는 의식입니다. 오늘로 말하면 예배, 찬양, 금식, 기도, 그리고 심지어 성경공부도 의식입니다. 의식도 그 당시로 말하면, 번제와 제사 이 의식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중요한 것입니다.
말라기서 1장 6절을 보면, 이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말라기 시대 제사장들이 우리가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어떻게 기도합니까? "주여! 아버지!" 라고 하죠. 말라기 시대의 제사장들이 우리와 똑같이 하나님을 그렇게 불렀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 속에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으면, 하나님을 멸시하게 됩니다. 그들은 그들이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8절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무엇을 알 수 있죠? 그 당시 하나님께 병든 것, 저는 것으로 드렸습니다. 원래 성경에서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라고 했나요? 못 드리게 했나요? 못 드리게 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요. ‘아 타락한 사람들 성경에 못 드리게 돼 있는데, 저렇게 성경을 어기면서도 자기가 하나님을 멸시했는지 안 했는지도 모르냐? 어떻게 저럴 수가 있을까?’라고 우리는 생각하죠? 그런데, 무서운 것이 뭔지 아세요? 우리 눈을 가리우는 것 중에 하나가 무엇이냐면? 그 당시 팽배한 신앙관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살면, 성경에 명백히 그것이 아니라고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죄 인줄 모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이렇습니다.
하루는 제 아내를 통해 하나님께서 저에게 헌금기도 하는 것을 살펴보라고 하셨더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헌금 기도할 때, "하나님 복 주사 저들의 소산이 잘 되게 하시고, 사업이 잘 되게 하소서" 라고 기도하지 않거든요. 제가 하는 헌금 기도는 이렇습니다. 하나는 "저들의 쓸 것을 채우시되, 모든 선한 일에까지 부족함이 없도록 모든 은혜로 채워주세요, 또 다른 하나는, 저들의 쓸 것을 채우시되, 그리스도 안에서 저들의 쓸 것을 채워주세요" 라고 고린도후서 8장 9절과 빌립보서 4장에 나와 있는 대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저는 그 아내의 얘기를 귀 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한참 후에 하나님께서 ‘헌금 기도하는 것을 살펴 보라’는 감동을 저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도 중에 감동이 되었다 하더라도, 저는 성경대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경이 우선이라는 생각에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냥 지나 갔습니다. 어느 날, 제가 헌금을 마치고 기도 사역을 하려고 눈을 딱 감았는데, 하나님께서 비춰주시는 가운데 하나님 말씀하신 의도를 알겠더라고요.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 성경에 우리의 소유가 누구의 것이죠? 하나님의 것이죠. 진짜로요? 어떤 장로님께서 그러시더라고요, "우리는 청지기죠". 오늘날 성도들 중에 우리의 소유가 하나님의 것임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와 있는 대로 진짜 우리의 소유가 하나님의 것임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것을 사용하고자 하는 자세로 주 앞에 선 사람 거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복 받아서 잘 사는데, 그럼 너도 복 받아서 살면 되잖아’ 라고 생각하는 거 같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성도들에게 성경에 나와 있는 약속이라고 무조건 그렇게 기도하는 것을 살펴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성경에 나와 있지 않아서 우리가 모릅니까? 성경에 탐심이 우상 숭배라고 그러셨는데, 십계명 중에서 가장 먼저 말씀하신 것이 우상숭배를 미워하신다고 그러셨는데, 그 만큼 탐심이 심각한 죄이기 범죄인데, 오늘날 성도들이 성경에 뻔히 나와 있는데. 만약에 다음 세대들의 사람들이 오늘날 우리들을 보면, 마치 말라기 시대처럼 ‘아이고, 성경에 뻔히 나와 있는데, 그런 제물을 드리지 말고 그러는데 그것을 모르나? 그렇게 하나님을 멸시하면서 하나님을 멸시하고 있는 줄 모르느냐"라고 여러분들이 생각했듯이 그들이 우리를 보면서 생각할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는 줄 아시나요? 당시의 그릇된 신앙관이 팽배해지면 그런 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루터 시대에 온 세계가 면죄부를 통해 구원받는다고 가르치고 그렇게 살면서 다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만큼 무섭습니다. 그러니까 너무나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가치관을 따라서 사는 것이 아니라, 유행을 따라 삽니다. 왜?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심각하죠. 그래서 여러분 이런 구절 읽을 때, ‘그것도 모르냐’ 라고 손가락질 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더 심각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심각한 우상숭배 가운데 빠져 있는지 모르잖아요. 그 당시는 이랬던 것 같습니다. 성경에는 안 나왔지만. 번제를 드릴 때는 어떻게 드리죠? 번제를 드릴 때는 각을 떠서 태워 드리잖아요. 그래서 ‘어차피 태워 드리는 데, 병든 것 드리면 어떻고 저는 것을 드리면 어떠냐’ 배후의 탐심 때문에 정당화 시키는 것입니다. 자기 목적을 합리화 시키는 것입니다. 제사를 드릴 때 무엇을 드리죠? 피를 드리죠. ‘어차피 피를 드리는데, 병든 것은 어떻고 저는 것은 어떠냐’ 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배후의 중심은 어떠하냐? 탐심 때문에 쓸모없는 것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아버지이시고 주인이신데, 경외함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물질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떻게 돼 있는지 우리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 다음으로 ‘돈에 대한 설교를 많이 하셨습니다. 사람의 신앙생활을 돈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아버지, 내 소유는 주의 것입니다. 저는 청지기입니다." 라고 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거지가 오면, 먹는 것을 나누어 준다고 합니다. 그러나 부자에게 거지가 오면, 먹던 것을 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 헌금할 때, 부잣집에 거지가 가듯이 하나님 앞에 자기가 쓰다 남은 것을 드립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내 소유의 주인이십니다." 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의식이 중요하다고 말씀 드렸죠? 왜 그러하냐? 의식이 본질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의식으로 본질이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말라기 시대에, 하나님을 ‘주’라 ‘아버지’라 부르지만, 의식을 통해 표현된 그들의 신앙은 하나님을 멸시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거지 취급한 것입니다.
제가 어느 교회 갔는데, 선교헌금 회원 모집하면서, 한 구좌에 1,000원인가? 5,000원 인가? 하더라고요. 제가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거지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신의 아이를 위해선, 수억 수천억 원을 쓰면서 헌금을 1,000원 5,000원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합니다. 의식이 중요합니다. 갑자기 분위기가 "싸" 해졌는데요. 여러분 제가 ‘아시아 선교센터 천사’해잖아요. 여러분 중에 ‘아시아 선교센터 천사’에 대해 못 들어 보신 분? ‘아시아 선교센터 천사’에서 한 구좌도 안 하신 분 손 들어 주세요? 나머지는 다 하셨나요? 필리핀에 하나님께서 ‘아시아 선교센터’를 짓게 인도하셨습니다. 현지 목자들을 위한 훈련원, 한국처럼 목회자 컨퍼런스를 일 년에 한 두 차례 하게 되고요, 아동부, 중고등부 연합 수련회, 선교사님들을 파송 할 때에 훈련하는 전초기지로 사용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마 대륙 별로 하실 것 같습니다. 건축비만 해도 10 억원이 훨씬 넘습니다.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100만원 한 구좌 천사들을 모집하라고 하시더라고요. 왜 100만원을 하게 되었냐 면, 아시아 선교센터는 선교회에서 추진하는 것이라, 개 교회에 속해 있지 않아요. 개 교회는 건축헌금 등이 있을텐데, 선교회 부지의 일이라고 큰 헌금을 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 같더라고요. 어떤 분은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생각해서 1억원 또는 5,000만원을 헌금하신 분도 있고, 1,000만원 하신 분도 있고 그런데요. 또 어떤 분들은 전세금을 줄여서 주신 분도 있고요. 그런 분들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감동을 주셔서 그렇게 했지만, 일반적으로는 쉽지가 않을 것 같더라고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떤 감동을 주시냐면, 일인당 100만원 한 구좌 하는 것은 어려운 사람들도 있겠지만, 오늘날 우리나라 경제 상황을 생각해서 그것은 마음 문제지, 아무리 교회에서 건축헌금이나 별 개 다 있어도 거기에 추가로 100만원을 아시아 선교센터를 위해 하는 것은 자세의 문제지 경제적인 어려움은 아닐 것에 대해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왜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 그것도 안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충분히 할 수 있으면서 그러면서 하나님을 ‘아버지, 주여’ 라고 합니다. 제가 그것을 하면서도, 관심을 갖고 조심스럽게 하는 것은 그 100만원했기 때문에 헌금 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절대로 못하게 하려고 합니다. 왜 무슨 얘기냐 하면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것 해 놓고 ‘난 헌금 다 했어’ 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의식은 본질을 담는 그릇이기에 중요합니다. 그래서 말라기 시대에 보면, 하나님을 ‘주여’, ‘아버지’ 라고 하면서 쓰다 남은 찌꺼기 식의 헌금, 예배드리는 것을 보고 하나님을 멸시한다고 말씀했습니다.
셋째, 의식은 본질을 위한 수단입니다. 의식은 중요함에도 의식 그 자체가 본질은 아닙니다. 본질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우리의 온 삶을 동참하여 하나님의 행하신 일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온 삶을 동참할 때, 당연히 헌신도 포함됩니다. 여러분 주님 따라 가려면, 대가없이 못 갑니다. 모세가 산에 가만히 있으면서 옛날 하던 대로 직업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자기 식구들 오붓하게 모여서 아름다운 시간을 보내면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 땅에서 건져 내시려고 사용하시려고 할 때 그일 감당할 수 있을 꺼 라고 생각하십니다. 그대로 산에 머물러 있으면서? 절대 못 하죠. 하나님의 행하심에 전 삶으로 동참하는 것이죠. 근데, 이사야 시대는 무엇이 문제냐? 의식은 많았습니다. 그런데, 본질이 없었습니다. 제가 결혼반지를 예로 많이 드는데. 예를 들어 신랑이 부자입니다. 신랑이 결혼 한다면서 폐물을 사는 데, 물방울 다이아몬드 반지와 목걸이에, 구두는 수재 악어 구두에, 양복은 최고로 잘 하는 곳에서 2벌을 맞추고, 스포츠까지 해서 5억을 샀습니다. 그러면서 신부에게 14k 반지 하나 해 주었습니다. 그것을 하면서 "자기 사랑해" 라고 한다면, 그것이 사랑입니까? 그것이 말라기 시대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오늘날 너무나 많은 성도들이 이렇게 합니다. 이사야 시대는 이렇습니다. 이 신랑은 신부에게 물 바울 반지에 렉서스 자동차에 1,000만원짜리 드레스를 사 줍니다. 그런데, 이 신랑이 신혼여행 다녀와서 바람을 피웁니다. 그것이 사랑입니까? 의식은 많았습니다. 헌신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자기 목적을 이루는 수단이었습니다. 이것을 기복신앙이라고 합니다. 기복신앙에서는 아무리 헌신을 많이 해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즘에는 휴대폰이 오는 곳이 더 많아졌습니다. "오늘 목요일 좋은 하루 보내십시오." 또는 "오늘은 날씨가 화창합니다." 어디에서 오느냐면, 보험회사입니다. 어떨 때는 외국에 나와 있는 대도 보냅니
다. 여러분 그분들이 저를 사랑해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웃으셨잖아요. 교회 자동차가 많으니까, 잘 되면 보험 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을 하느냐면, 남들에게 희생과 헌신을 잘 한다 해도 자기 목적을 위해서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이사야 시대와 예레미야 시대에 그랬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발 벗고 쫓아가도 따라 갈 수 없을 만큼 그들은 하나님께 헌신했습니다. 그들의 인생에서, 중심에서 하나님은 그들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자기 목적과 소원을 성취해 달라고 밤낮으로 기도하고, 철야하고, 헌금을 했습니다. 남들에게는 잘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모든 것이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는 요만큼의 의미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러시죠, "누가 네게 요구하였느냐, 내게 무거운 짐이라." 여러분 누가 나에게 식사 한 번 사 주고 나서, 숟가락 떼기도 전에 "사실, 제 아이를 위해 기도해주라고." 그러면 언칩니다. 식사 한번을 사 주고도 자기 목적을 위해 그러면 되게 부담스럽습니다. "이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라고 하신 말씀이 그런 의미입니다. 자기의 목적을 위해 드립니다. 왜 그렇게 많은 희생 드리느냐, 성경에 나와 있어서도 그렇지만, 자기 원한을 들어달라고 드립니다. 그러니까, 의식은 많을는지 모르지만, 뭐가 없어요? 본질 곧,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그럴 때에는 자기 목적을 위해 성경 말씀을 선별 할는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말씀과 동행하기 위해 하나님의 길에 서기 위해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면서 하나님의 길에 서는 일엔 절대로 동참하지 않습니다. 그 삶에서 실제로,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사야 시대에 하나님께서 안 받으신 겁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그렇게 많은 예물을 드렸는데, 왜 소돔과 고모라 라고 하신 건지, 왜 하나님께서 받으시지 않으시냐? 왜 마당만 밟을 뿐이라고 말씀하시느냐? 그러는데요, 이처럼 본질과 의식의 관계에 대해 이해하면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꾸짖고 계신지 보실 수 있습니다. 보이세요?
여러분의 예배는 어떻습니까? 오늘날 새벽기도, 철야 기도도 한 번도 안 빠질지 몰라도 그들의 기도 내용을 한번 들어보세요. 이들보다 절대로 낫지 않잖아요. 우리의 헌신이요, 이들보다 훨씬 못해요. 다는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러면서 자세는 이들보다 절대 낫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이 우리들의 예배가 잘못 되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면서, 소돔과 고모라에 대해 ‘아, 그 시대는 뭔가 잘못 됐으니까’ 라고 하면서 절대 우리들의 문제인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에 하신 일에 대해 알았지만, 그것이 자신들의 모습인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죠. "이사야가 너희에 대해 잘 말하였도다." 그들의 예배도 똑같았다는 겁니다. 여기에 ‘마당만 밟는 예배’ 다른 말로는 ‘입술뿐인 예배’ 하나님께서 안 받으시는 예배입니다. 이 예배는 본질이 없는 예배입니다. 삶의 본질이 없이 우리의 목적을 위해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받으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마당만 밟는 예배’라 하면 정성이 부족한 예배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런데, 이렇게 많은 희생을 드렸는데, 정성이 없었겠어요? 아닙니다. 그들은 성경대로 다 바쳤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리새인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정말 최선을 다 했습니다. 그들은 알갱이를 세어서 십일조를 드릴 정도였습니다. 안식일 날은 요리도 하지 않을 정도로 지켰습니다. 이들에게 정성이 부족했겠습니까? 그런데, 그 후에 보면, 똑같이 예수님께서 "입술뿐인 예배"라고 말씀하십니다. 정성이 부족한 것이 ‘입술뿐 만인 예배’가 아니고 본질이 없는 예배가 ‘입술뿐인 예배’ 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주님을 사랑하고 헌신하는 예배가 아니라, 우리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드리는 것은 하나님 안 받으시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에 보면, 무엇이 문제냐면, 본질이 없는 예배가 어땠다고요? 본질이 빠진 예배. 예레미야 2장 13절에 "이 백성이 2가지 악을 내게 범했는데, 하나는 생수의 근원인 나를 떠났고" 이것은 본질 대신 주님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신앙의 본질을 떠나서 하나님께 희생의 예물을 왜 드리냐? 자기의 목적을 위해, 자기 사업, 자기 아들의 대학을 위해 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전 존재로 사랑하고 주님의 의중이 있는 곳에 우리의 삶을 다 드려 내 목적이 아니라, 주님의 목적을 이루는 것이 행복인줄 알아 사는 대신 주님을 내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드린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똑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네 번째, 본질에서 떠난 것이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도 잘 안 나오고, 십일조 드리지 않는 것이 하나님을 떠났다고 생각합니다. 또는, 이단에 빠지거나 하면 하나님을 떠났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것이죠. 그러나 우리는 의식에서 떠나면 하나님을 떠난 거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선 본질에서 떠나면 아무리 많은 의식을 드려도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그런 성경적인 관점에서 성경을 봐야 합니다. 사실, 이렇게 보면 오늘날 한국교회가 심각합니다. 이해하십니까? 본질에서 떠난 것이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돌아가는 것도 하나님의 본질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호세아 시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 돌아가자." 그리고 또, "하나님을 알자."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야 우리 삶의 생명이 넘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이 본질에서 떠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신다고 하셨죠? 그렇다면, 생명이신 하나님을 떠나게 됩니다. 그러면, 종교적인 이론과 의식은 많지만, 생명을 떠난 말뿐인 신앙이 됩니다. 여러분이 신앙생활 잘 하고 계신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모세와 같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인도하시고 기적을 베푸신 일이 일어나지 않는 다면 그것이 기적이라고 말씀 드릴 때 여러분께서 웃으셨잖아요. 그만큼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떠나 있는 겁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다면, 그것이 당연히 이루어지게 돼 있습니다.
반면에 우리의 열매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없다면, 하나님을 떠나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신앙은 실제이다. 제가 신앙의 본질을 두 가지 말씀 드렸잖아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그리고 하나님의 행하신 일에 전적으로 동참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것을 정확하게 성경적으로 잘 뒷받침해서 정확히 쪼개서 잘 가르치는 것이 올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 신앙은 실제입니다. 이것은 실제로 그 삶을 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여러분이 제가 설 이 자리에 서서 신앙의 본질에 대한 설교를 하면서 성경에 대해 정확히 제시하면서 감동적인 예화로 사람들의 마음을 쥐었다가 폈다가 한다고 하더라도, 여러분이 그 삶을 살지 않으면, 여러분은 신앙생활에서 꽝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실제이기 때문입니다. 이론적인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지만, 실제로 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여러분이 새벽예배 드린다고 해도 생명이 없다면, 하나님께로부터 떠나 있는 것입니다. 무엇에서? 실제적인 삶에서. 그만큼 간단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의 신앙을 비춰볼 수 있습니다.
네 번째가 뭐였죠? 본질에서 떠난 것이 하나님을 떠난 것이다. 본질에서 떠나면 하나님의 생명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이 거두어집니다. 약속은 보증이 아니라, 초청이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19장 3절 이후에 보면, "내가 너희를 내게로 인도했다. 너희가 내 목소리를 청종하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가 내게 대해서 제사장 나라가 될 것이다"라고 하셨거든요, 그런데 호세아에서 뭐라고 했나 면요, "너희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희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본질에서 떠난 것이 하나님을 떠난 것이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걷히는 것입니다. 약속이 성취되는 거요, 그건 보증이 아니에요. 우리가 신앙의 본질 가운데 있어야 약속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이해하셔야 합니다. 아멘?
다섯 번째, 제가 설교를 하니까, 많은 분들이 분위기가 무거워져서 영적으로 힘들어 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현실을 무시하는 것도 옳지 않지만, 눌려가지고 아무것도 못하지 마시고, 사실은 현실을 인식하고 그러니까, 여기에서 멈출 것이 아니라 진짜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찾는 것에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을 의지해야 하고, 그러면서 설교를 더 들으셔야합니다. 다섯 번째, 의식이 본질을 대체해 버린 것이 율법주의 신앙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의식과 본질이 다릅니다. 의식도 중요하지만, 의식은 본질을 담는 그릇이고 동시에, 표현하는 수단입니다. 그래서 의식이 아무리 있다 하더라도 본질이 없다면, 그것이 하나님 앞에 의미 없습니다. 그런데, 신앙이 타락하면 의식 잘하는 것이 본질이 되어 버립니다. 의식이 본질을 대체해 버립니다. 의식 잘하는 것이 신앙 잘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오늘날 신앙 잘하는 사람을 어떤 사람이라고 합니까? 기도 잘하고, 봉사 잘하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바리새인들이 교회를 찾아오면 어떨 것 같습니까? 최고로 대우를 받을 거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누구보다 잘하는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책망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의식이 아무리 많아도 본질이 없으면 의식이 의미가 없는데, 신앙이 타락하면 눈이 가리워져서 영적인 분별력이 없어져서 의식 잘하는 그 자체가 본질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본질이 없이. 하나님 앞에선 아무런 의미가 없는 삶인데, 본인들은 신앙생활 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이사야 시대이고 예레미야 시대이고 그게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저들이 나를 버렸으니 나도 저희를 버려” 그러시면서 심판을 말씀하시잖아요. 그리고 실제로 예레미야 시대에 심판이 왔습니다, 실제로 예수님 시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한 세대가 못 지나가 하나님의 심판이 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에게 왜 심판이 오는지도 모릅니다. 왜? 신앙에 대한 이해가 달라져 있기 때문입니다. 분별력이 가리워져서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관점에서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이렇게 의식이 본질을 대체해 버리게 되는데, 율법주의 신앙에서의 예배는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습니다. 이 얘기는, 율법주의 신앙에 빠져 있는 모든 교회의 예배를 하나님께서 안 받으신다는 얘기가 아니고, 제 얘기 잘 들으십시오. 우리가 율법주의 신앙의 그런 이해 속에 예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 앞에 절대로 상달되지 않습니다. 제가 무슨 말인지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아까 본질이 없는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으시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같은 얘기입니다. 이사야 시대에 보면, "마당만 밟는 예배"라고 하시죠, 예레미야 12장에는 "저희가 입술로만 나를 존경하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다." 예수님 시대 바리새인들 보세요. "이사야가 너희에게 잘 말하였으니" 마태복음 15장 7절에서 9절, "너희가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네 마음은 내게서 멀다. 사람의 교훈으로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 도다." 아무리 정성이 많아도 본질이 떠나 있으면 의식뿐인 예배입니다. 예레미야 7장을 보시죠. 여러분 자신이 예레미야 시대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친히 자기 이름을 두시겠다고 성경 여러 곳에 나와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성대한 예배를 드리고 나옵니다. 그리고 그날 선지자의 설교가 아주 감동적이었습니다. 시바와 원방에서 온 특별한 향 품을 사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고, ‘우리에게 축복을 내리실 것이라, 나라를 지키실 것이라, 평강을 내리실 것이라’ 라는 설교를 들을 때에, 그렇지 않아도 국제 정세가 안 좋은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신다는 그 다윗에게 그 왕위와 그 나라와 그 가문에 영원한 평강을 약속하시고, 영원히 지키시겠다고 하셨는데, 그 나라는 다윗의 자손이 왕으로 다스리고 있었고, 그 가문은 다윗의 가문이었잖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약속대로 이 나라를 지키실 것이라는 설교를 들을 때에 마음이 찡했어요. 그리고 나옵니다.
그런데, 웬 예레미야라는 놈이 자기가 선지자라고 하는데, 아무리 봐도 선지자 같지 않습니다. 그 놈이 뭐라 하느냐면, "이 곳이 여호와의 전이라, 이곳이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너희가 믿지 말라. 너희에게 평강을 전하는 저 선지자들의 거짓말을 믿지 말라" 선지자 한 두 명이 그런 것도 아니고 그 당시 모든 선지자, 제사장, 서기관, 율법사들이 다 그렇게 말했는데, 그리고 분명히 나름대로 성경에 근거하여 말했는데, 그 말이 다 거짓말이래요. "너희는 무익한 거짓말을 신뢰하는 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의 권력으로 다스리며 백성들은 그것을 좋아하니 그 결국은 어찌하려느냐" 거기에 7장 11절,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는 눈에는 도적의 굴혈로 보였느냐 보라, 내가 그것을 보았느니라. 너희는 내가 처음으로 내 이름으로 둔 처소 실로에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악을 인하여 내가 어떻게 행한 것을 보라." 이것은 사무엘 어릴 적 엘리 시대에 실로가 블레셋에 의해 점령당하고 몇천명이 죽고 엘리의 두 아들이 죽고 엘리가 목이 부러져서 죽고 언약궤가 빼앗긴 그 사건을 말합니다.
"보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제 너희가 그 모든 것을 행하였으며, 내가 너희에게 말하되 새벽부터 부지런히 말하였지만,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고 너희를 불러도 대답하지 아니하였노다. 그러므로 내가 실로에서 행한 것 같이 너희가 의뢰하는바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 곧 너희와 너희 열조에게 준 이곳에 행하겠고 내가 너희 모든 형제 곧 에브라임 자손을 쫓아냄 같이 내 앞에서 너희를 쫓아내리라 하셨다 할 찌니라" 보세요. 하나님께서 그 전을 멸망시키겠다고 하시면서, "너희가 믿는 이 집" 너희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성전을 믿기 때문에 이 성전을 파멸시키겠다. 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지 성전에 예배드립니까? 여러분 교회에 예배드리러 올 때, 교회에 예배드리러 오십니까?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오십니까? 여러분이 그 시대의 사람들이라면 예레미야 말 알아들었겠습니까? 그 당시 선지자들의 말을 더 알아들었겠습니까? 예레미야 말을 들었겠습니까? 그들이 이해하지 못해 돌이키지 못했습니다. 제가 예레미야서를 교회에서 가르치면서, 두 가지 때문에 그 당시 사람들이 돌아오는 것이 가능하지 않았을 것 같더라고요. 하나는, 안 보이니까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내가 너희를 새벽부터 불러도 대답지 아니하였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생각엔 ‘어떻게 새벽부터 불렀는데 대답지 않는가? 그러니 심판이 오지’ 그럽니다. 아니요.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냐 면요, 친구나 친척들을 만나면 첫 말이 "하나님의 응답이 무엇이냐" 라고 하면서 그렇게 하나님을 사모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안식일에 하나님의 선지자들의 메시지를 듣고 나오는 것입니다. 사모했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안 들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죠.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새벽부터 외쳐도. 예레미야 말이 이해조차 안 됩니다.그러니까 안 듣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관점에선 정확하게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시고 보냈는데, 안 듣는 겁니다. 이들은 그렇게 생각조차 못하고 있습니다. 이해조차가 안 됩니다.
그들이 돌이킬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들이 돌이키려면 삶이 전면적으로 바뀌어야 하는데, 그럴러면 엄청난 대가가 지불되어야 하는데, 사업을 하는 사람은 사업을 완전히 접고 엄청 손해 봐야 하고 다른 사업을 시작해야 할 수도 있었을 것이고, 교회로 따지면, 완전히 교회 성장은 말아 먹을 수도 있었을 것이고. 그렇게 돌이켜야 하는데, 그런 대가를 지불할 마음의 자세가 안 되어 있는 겁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어차피 신앙생활 하기 때문에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채워준다면 더 많은 십일조를 드리고 헌신을 할는지는 몰라도 자기 삶의 대가를 내면서 자기 삶을 조정하면서 살라는 것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뀔 수 없는 겁니다. 아무리 외쳐도. 먼저, 그들이 성전을 믿었다고요? 하나님을 믿었다고요? 그들은 성전을 믿었어요. 여러분은 교회에 예배드리러 나올 때 성전을 믿고 나옵니까? 하나님을 믿고 나오십니까? 주일날 예배드릴 때 교회에 예배드립니까? 하나님께 예배드립니까? 우리는 설교를 들을 때, ‘야~ 이스라엘 백성들 타락했구나, 하나님을 믿어야지 성전을 믿으니까 심판이 오지. 하나님을 믿어야지 왜 성전을 믿냐’ 그러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니까 그들과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자 보세요. 하나님께서 저들을 실로에서 행한 것처럼 하신 다고 하셨습니다. 실로에 어떤 일을 하셨나요? 제사장들로부터 그들은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이 타락해서 본질을 떠나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차피 제사장들이 자기 직무를 감당해도 사역을 자기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 있었습니다. 하나님도 그들을 버립니다. 하나님 그 분의 이름이 여호와 닛시 인데, 곧 하나님 본인께서 승리이신데, 그들이 승리를 하겠어요? 못 하겠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저들이 하나님 백성으로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친밀한 관계 가운데 있으며 하나님의 길에 순종하며 믿음으로 따라 갈 때에, 아무리 원수가 많아도 하나님께서 원수와 맞서 싸워 이기셨습니다. 그분께서 승리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니까 하나님도 저들을 버리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저들의 원수가 되시기에 아무리 작은 적이라도 그들은 패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 하나님 그분께서 승리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본질이 된 하나님을 떠날 때 여호와 닛시, 샬롬의 하나님의 역사가 그들 가운데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이겼겠어요? 졌겠어요? 지는 것이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런데, 졌을 때에 그들의 해결책이 무엇이었냐면, 진짜 하나님이 목적된 자리로 그래서 하나님의 길로 행하는 자리로 돌이켜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 하고, 율법주의죠. 의식이 본질을 대체하게 돼 버린. 그래서 그들이 어떻게 했죠? 그래서 그들이 꾀를 내었는데, 언약궤를 가지고 나왔어요. 그래서 자기들이 이길 것을 확신하여 얼마나 소리를 쳤는지 불레셋 진영의 땅이 흔들렸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성경의 역사를 알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여호수아 시대에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흘러넘치는 강에 섰을 때, 그 언약궤 앞에서 강이 넘쳤습니다. 언약궤를 메고 여리고 성을 돌았을 때에 그 엄청난 여리고 성이 언약궤 앞에서 무너져 버렸습니다. 그들은 성경 역사를 알고 있었기에, 그 언약궤가 나왔을 때에 자신들이 이겼음을 자신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 시대에 언약궤를 메고 갔기 때문에 강이 갈라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수아를 포함해서 그들이 하나님을 알고 존재를 다하여 사랑하며,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 가운데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온 삶을 통해 동참하되 하나님의 지시와 인도를 따라 믿음으로 언약궤를 메고 나아갔더니 언약궤 앞에서 강이 갈라졌습니다. 이해하시죠? 언약궤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 제사장 시대에 그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아와야 하는데, 그리로는 돌아오지 않고 언약궤를 메고 나가니까, 갈라질 것이라 생각했어요. 그들은 하나님을 믿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그들은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언약궤를 믿었습니다. 이것이 율법주의 신앙입니다. 의식이 본질을 대체해서 율법주의는 의식을 믿는 것입니다. 무엇을 믿었나요? 언약궤를 믿었어요, 그래서 그날, 언약궤까지 빼앗겼습니다.
자 보십시오. 예레미야 시대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두신다고 한 그 예루살렘 성에서 예배를 드리고 나왔습니다. 의식은 많았지만, 본질이 떠나 있는 삶 가운데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었습니까? 성전을 믿었습니까? 본인들은 자신들이 당연히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그들이 하나님을 예배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은 인격적인 하나님을 알고 온 삶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데, 그것에서 떠나서 교회에 와서 예배 드렸으니 하나님께서 지켜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까? 교회를 믿는 것입니까? 그것은 정확하게 교회를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것은 의식을 믿는 것에 불과한 것이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적인 행위를 믿을 뿐입니다. 오늘날 그런 예배가 우리 가운데 진짜 팽배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우리의 예배가 얼마나 타락 되었는지 모릅니다. "이곳이 여호와의 전이라가 거짓말이니라" 가 무슨 말이냐고요? 성전에 보면 예루살렘 성전에 하나님께서 거하시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어 놓고 첫 마디가 무엇이었습니까? "하늘이 하나님 보좌요 땅이 하나님 발등상인데, 내가 지은 이 집에 어떻게 거하시겠습니까? 라고 했으며, 구약성경 이사야서 66장에 "하늘이 하나님 보좌요 땅이 하나님 발등상인데, 내가 지은 이 집에 어떻게 거하시겠는가?"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시면서 말씀하시길, "내 아버지의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다." 라고 하셨죠. 여러분 하나님께서 거처 삼고 거하시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거처 삼고 싶으신 하나님의 거처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래서 구약 시대에 진 한 가운데 성전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십자가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시어 개개인의 성도가 모인 곳이 하나님의 성전이 된 것이죠. 그런데 보십시오.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길로 행하며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살 때에 그들의 진에 함께 계셨어요. 그런데, 저들이 하나님을 떠나면, 하나님께서 저들을 떠나십니다. 에스겔에서 보면, 저들이 하나님을 떠나매, 하나님의 영광이 지성소에서 성전 뜰로 예루살렘 어귀로 해서 떠나잖아요.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면, 그곳 성전은 건물에 불과합니다.
"이곳이 여호와의 전이라 라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는 말은 곧 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하나님이 자기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해서 하나님의 임재가 걷히고 하나님의 심판이 임해서 다가오는데, 그들은 종교적인 의식에만 집착해서 이곳이 여호와의 집이니 주께서 지켜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이해됩니까? 문제는 그 당시 사람들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돌이키지 못한 것입니다. 의식이 본질을 대체한 율법주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예배 드리고 가니까, 복 주실 것이라는 관점에서 살기 때문에 이런 구절을 봐도 그것이 자기 모습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가 실로에 행한 것을 보라"라고 하시잖아요. 그들이 왜 하나님께서 실로 그렇게 행하셨는지 알았다면 그들이 돌이킬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하나님의 관점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들이 똑같이 하면서도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똑같이 심판이 온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실로도 있었고, 예레미야 시대도 있었습니다. 근데, 그들이 똑같이 타락한 예배를 드렸습니다. 오늘날은 실로도 있고, 예레미야 시대도 있고, 예수님 시대도 있지만, 오늘날 우리도 똑같이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올바로 이해되지 않는다면, 절대로 예배가 회복될 수 없습니다. 외부적으로 성대한 예배는 드릴 수 있지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수 없습니다. 제가 무엇을 말씀 드렸냐면, 우리 예배는 본질이 추구되는 예배를 드려야 된다. 본질을 우선시해야 된다. 의식은 본질을 담는 그릇인 동시에 본질을 추구하는 수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우리의 본질을 표현해야 될 뿐만이 아니라 본질을 추구해야 합니다. 사실, 성경 시편 24편에 보면, "여호와의 거룩한 성에 설 자가 누군고" 라고 합니다. 이것은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하나님의 얼굴의 구하는 족속이다"라고 했습니다. 예배로 나온다는 것은 하나님을 구하러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 그분 자신을 구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성대한 예배가 있어도 하나님을 자기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모여 봤자 그것은 참다운 예배가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되면, 하나님께서 왜 그 필요를 채우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에 보면, "너희가 먹을 것 입을 것을 구하지 말라 너희가 구하지 아니하여도 너희의 필요를 내가 아느니라. 그것은 이방인들이나 구하는 것이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외쳐 대야 하나님께서 할 수없이 들어 주실 줄 압니다. 그래서 본질을 추구하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본질을 추구하는 예배는 이런 예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1. 형식적인 예배
2. 습관적인 예배
3. 의식뿐인 예배
네 번째(십자가의 복음과 부흥)
-이 길수 목사-
오늘 밤 시간에는 십자가 복음과 부흥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부흥은 십자가의 복음이 회복됨으로 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께서 부흥에 관련하시어 탁월함으로 그 책을 잘 정리해 놓았다고 학자들이 말합니다. "부흥"이라는 책 p52-53에서 보면, 예외 없이 이러한 중추적인 교리들을 발견한 것이 궁극적으로 부흥을 가져오게 된 계기가 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의식하지 못한 부흥의 전초단계가 언제든지 부흥이 오기 전에 있었습니다. 프로테스탄트 부흥이 임한 것은 마틴 루터가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다." 라는 진리를 깨달은 후에야 일어났습니다. P82에 나온 이야기 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라는 교리가 크게 부각되지 않은 채 부흥이 일어난 적은 없습니다. 이 교리는 우리 자신의 선행, 도덕성 등을 종식시키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의가 전혀 쓸모없는 것을 인식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음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경건치 못한 자들을 의롭다 하십니다. 이것이 부흥의 시기마다 돌출되는 위대한 메시지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부흥"이라는 책을 보면, 부흥은 십자가의 복음을 깨달음 이후에 나타났다. 라고 말합니다. 곧,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것이 재발견 된 이후에 부흥이 찾아 왔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됨이 재발견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요? 하나님의 관점으로 자신을 보는 것은 하나님의 다림줄에 비추어 자신을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도 선한 것이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3장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더니" 라고 말씀하고 있고, 에베소서 2장 1절에 보면,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또 로마서 7장 18절에 보면, "우리에게 선한 것이 없으되 하나도 없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선함이 없음을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안에 선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성경의 관점대로 우리 스스로를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기를 바라보되, 자기 관점에 비추어 자기 의에 빠지기도 하고, 죄책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심각한 문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과 자기 자신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르면 십자가는 우리 삶의 이론에 불과합니다. 내가 달려야 할 그 자리에 예수님께서 달리시고 내 속의 모든 죄가 못 박혔다는 것을 모른다면 십자가의 복음이 이론에 불과하게 됩니다. 두 번째, 믿음으로 의롭게 됨이 재발견 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성경의 관점으로 바라보고, 십자가만이 구원에 대한 유일한 처방전임을 알고 오직 십자가만이 내 삶의 진정한 소망임을 아는 것입니다. 자신을 올바로 본 상태 가운데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돌아가셔야만 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없이는 내 삶의 진정한 소망도, 생명도, 능력도,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님을 알고 그런 나를 위해 예수님께서 오셔서 구원하신 사실이 놀라운 감격과 은혜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4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 바 되었다 하심이라."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심이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재발견했다는 것은 이 두 가지를 깨달은 것입니다. 사실, 부흥이 오기 전에 부흥이 오는 단계적인 것으로 성경적인 관점으로 자신이 누구인가를 깨닫게 되어 나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유일한 처방이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부흥의 시대마다 "보혈" 찬송이 널리 불러지고 작곡되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이렇게 부흥을 경험한 사람들이 그 부흥의 감격에 찬송하며 기뻐하다가 주변에 믿지 않는 자들에게 그 복음을 전하게 되어 또 다시 그 복음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임재 앞에 회복되고 돌아오는 사건이 하나님의 부흥입니다. 그래서 부흥 때에 떼어 놓으려고 해도 떼어 놓을 수 없는 사건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는 사실에 대한 재발견입니다.
두 번째, 오늘날 십자가의 복음의 토대 위에 우리가 서 있는 가 살펴보기 원합니다.
첫 번째로 베드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베드로 이야기를 보면, 오늘날 우리의 현실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께 부름을 받았고,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따르게 됩니다. 그리고 비전을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너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베드로가 자기 자원을 의지하게 됨으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게 됩니다. 누가복음 22장 31절로 3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가라사대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사실, 베드로는 자기 육신을 신뢰합니다. 자기를 과신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시는데 불구하고, 자기 생각을 바꾸지 않습니다. 여기 베드로는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하여 엎드려 기도하는 자리에 가지 못하게 됩니다.
사실, 마태복음에 보면, 이 때 즈음 베드로의 마음이 얼마나 높아 졌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33절, "베드로가 가로되,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얼마나 자기 과신으로 충만합니까? 35절,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이것이 참 심각합니다. 베드로는 지금 자기의 지나 온 날 살아온 경험과 주님께로부터 인정받은 것과 수제자로서의 자부심과 자기 과신의 그 자리에 있음으로 정말 필요한 그 자리에 있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땀방울이 피 방울이 되기까지 기도하셨다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사건이 주님께도 쉬운 일이 아니었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40절 41절을 보면,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주님의 은혜가 필요한 그 시간에 왜 베드로는 잠이 들었을까요? 그가 피곤해서? 밤이 너무 늦어서? 그것이 아니고, 그는 자기의 육신이 약하다는 것을 전혀 몰랐습니다. 타락한 육신은 자기 자신을 과신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함을 정말 아는 자는 기도하게 돼 있습니다.
왜 기도 안 하는지 아십니까? 아직 잘 몰라서 그럽니다. 낙심하는 대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자리에 섭니다. 75절,"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베드로가 왜 울었을까요? 제가 볼 때는 자기를 과신하는 것이 크면 클수록 자기 자신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건지 이것을 보면 알 수 있어요. 베드로는 자기를 과신했습니다. 자신에 대한 실망이 그로 하여금 너무나도 힘들고 지치게 했습니다. 자기 육신의 약함을 보는 것은 엄청난 아픔이 있습니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완벽주의 자들이 실패한 자기 자신을 봤을 때 죄책감이 심하게 듭니다. 요한복음 13장 10절을 한번 보실까요?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라." 여기 최후의 만찬 석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여기 예수님께서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에서 깨끗하지 않은 사람은 누구인가요? 가룟 유다이죠.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닭 울기 전에 나를 3번 부인할 거야" 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가 3번 주님을 부인 할 것을 주님은 아셨으면서도, 베드로에게 "네가 깨끗하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베드로가 깨끗하다고 말씀하셨나요?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중심에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아셨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베드로의 육신이 약한 것을 주님은 아셨고 그리고 중보 하셨고 은혜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자신의 약함을 모르고 자신의 힘으로 주님을 죽는 그 자리까지 따라 가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시간에 기도하는 대신 잠 잤습니다. 그리고 결국 실패했습니다. 여기 Good News 가 있어요. 주님은 저와 여러분이 육신의 약함이 있는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로 하나님과의 막힌 길을 회복시키시고 오늘도 우리를 위해 하나님 우편에서 중보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이렇게 얘기해도 우리 육신이 약하다는 것을 아는 이가 별로 없습니다. 우리 중에 누가 우리의 공로와 행위로 주님을 기쁘시게 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오늘날 이 시대는 어떻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말하며 믿음으로 산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자신을 과신합니다. 그래서 그 증거 중의 하나가 무엇이죠? 죄책감과 실패 감 또는 영적인 자기 우월의식입니다. 죄책감과 실패감에 심하게 눌립니다. 오늘 이 시대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말합니다. 그러나 은혜를 구하지 않습니다. 자기 삶에 일어난 축복이 은혜인줄 모르고 자기 자신을 자랑하는데 얼마나 바쁜지 모릅니다. 사실, 우리의 신앙은 은혜로 살고, 은혜를 구하는 삶 속에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처음 예수님을 만나면, 많은 경우에 은혜를 확 부어 주십니다. 그래서 내가 죄인 됨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유일한 구세주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경을 읽으면 재미가 있고, 기도하면 신이 나고, 찬양을 하면 감격이 있고, 교회에 오면 신이 납니다. 우리가 똑똑하고 잘 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은혜를 거두십니다. 우리를 겸손케 하시려고. 내가 뭐 잘 되고 기쁨이 넘치면 자기가 잘 나서 그런 줄 알고 자랑하게 됩니다. 입술로는 은혜라고 하면서 정작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를 들어냄으로 겸손함의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성령을 말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말하면서, 성령을 인도하시는 삶에 적극적이지 않습니다. 본인이 성령의 인도하심에 살지 못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그렇게 삽니다. 자신을 과신하는 것입니다. 이론으로는 알지만, 실제로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두 번째, 믿음에 관련해서 우리의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8장을 보겠습니다. 자기를 과신하는 한, 우리는 진정한 믿음의 자리에 있을 수 없습니다. 자기를 과신하는 한 은혜의 삶을 살 수 없고, 성령에 의한 삶이 불가능합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를 통해 믿음의 기도에 대해 말합니다. 이 불의한 재판관을 예로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더라."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께서 오실 때에, 세상에서 이러한 믿음을 보겠느냐 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믿음이 희소성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이죠. 여기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는 항상 기도하되 낙망치 않는 믿음입니다. 항상 기도도 않고 낙망도 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믿음이 좋아 보이지만, 운명론자들 입니다. 항상 기도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항상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반응하는 것입니다. 낙망치 않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반응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자기가 과부와 같은 존재임을 알고 하나님은 어떤 문제에서도 해결책이 있으신 유일한 해결책임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는 성경의 관점으로 자기가 누구인 줄 아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모든 것에 처방을 갖고 계신 능력의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이럴 때 어떤 환경과 상황 속에서도 낙망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사방으로 쌓여도 쌓이지 않고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런 믿음을 사는 사람들은 극소수 입니다. 마태복음 14장에 보면, 베드로가 물 위를 걷습니다. 그러다가 빠졌습니다. 성경 근거로 두 가지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그가 바람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바람의 현상 즉 파도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예수님께서 그를 건지시면서, "믿음이 적은 자여 어찌하여 의심하는고" 그의 믿음이 적었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적은 사람은 환경에 적응하여 실패하게 됩니다. 고린도후서 5장 9절에 보면, "그리스도인은 보이는 대로 사는 자가 아니라 믿음대로 사는 자"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적은 믿음"에 대해 6번이 나오고, 큰 믿음은 3곳에 나옵니다. 믿음이 적으면 어떻게 되느냐? 환경에 적응하여 넘어지게 됩니다. 베드로는 믿음이 적었습니다. 베드로가 믿음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캄캄한 밤중에 주이신 것을 알고, 배에서 뛰어 내립니다. 이것은 적은 믿음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믿음이 있어서 뛰어 내렸어요. 왜? 말씀에 동의하여. 적은 믿음의 특징은 의심이 그리고 환경이 내 믿음을 덮어씌우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믿음으로 출발한다고 했지만, 파도를 보면, 빠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빚어 가십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셔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을 약속하신 것도 하나님인데, 그들을 홍해 앞으로 인도하신 분도 하나님입니다. 또한 마실 물이 없는 환경 가운데로도 인도하신 것이 하나님이셨습니다. 불기둥, 구름기둥이 인도하는 곳으로 따라 갔거든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만사형통한 삶을 허락하지 않으신다고요, 우리를 믿음의 세대로 세워 가시기 위해 우리에게 어려운 일을 또는 문제를 주시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문제의 해결을, 그 처방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 어려움이나 문제가 오면 어떻게 하죠? 파도에 휩쓸려 가는 겁니다. 그래서 파도에 반응하고 문제에 반응하면서 문제를 보고 낙심하고 좌절합니다. 그리고 불신에 빠지고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이 사람은 적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두 번째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파도에 하도 많이 빠져서 파도만 봐도 도망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육신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냥 이제 가만히 내가 여기서 당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으로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어려움이 오면 어떻게 합니까? 도망가고 피하고 숨습니다. 이런 분들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루실 때에는 사람을 통하여 다루십니다. 그래서 앗 뜨거워라 하고 그 사람을 도망가면 그런 사람 다른 곳에 또 있습니다. 기도를 해 봐도 안돼, 그래서 자꾸 쌓여서 문제! 그러면 안 되더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기도! 응답이 없더라 이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겐 불신이 가득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기대도 열정도 이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이 사람 속에 하나님을 근본적으로 찾고자 하는 열정이 있는가? 그렇다면, 절대로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습니다. 어제 밤에도 그렇고 계속 하나님께서 그런 마음을 주십니다. 영적 안일함을 버리라. 안일함은 무엇인가요?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이 안일함입니다. 그냥 자기에 푹 파묻혀 있어서 일이 잘되어 가기 때문에 푹 파묻혀서 하나님을 찾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일이 잘되지 않는 데도 하나님을 찾지 않고 인간적인 사단과 방법을 더 빨리 찾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찾으라고 때때로 문제들을 주시지만, 머릿속에 불신의 견고한 진이 있어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라는 기대감이 없이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제 아내는 혼자 이런 말을 합니다. "나 변경화는 지금 현재 내가 전부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빚어 가시고 쓰시는 그날, 내가 그날을 기대하고 있다. 자기 혼자 거울보고 그럽니다. 그러면서 저한테 그럽니다. "내가 사역에 있어서나, 아내, 엄마의 역할에서도 현재의 내가 전부가 아니라고 주님께서 나를 빚어 가실 것이라고 그날에 내가 훨씬 더 잘 해 나아갈 것이라는 것을 안다." 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기대감이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80세까지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기대감이 없는 것은 불신의 견고한 진입니다. 고린도후서 10장 5절의 불신의 견고한 진이 깨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기대감으로 주님을 찾을 때 우리 삶에 획기적인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세 번째, 부류의 사람은 파도를 타는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16장의 바울과 실라와 같은 사람입니다 이들은 빌립보에서 귀신들린 여자를 고치다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감옥에서 이들은 기도하고 찬양했습니다. 하나님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일이 가능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대우하시나’ 하면서 ‘내일은 좋아질거야’ 라고 하면서 항상 기도하고 항상 낙망합니다. 파도를 타는 사람은 환경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반응하여 기도하며 주님을 찾고 하나님께 순종합니다. 그래서 감옥 문이 열렸는데도 그들은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감옥에 갇히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 감옥을 지키는 간수의 온 일 가족을 주님께로 인도함으로 하나님께 놀랍게 쓰임 받는 그 자리에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께 반응함으로 파도를 타는 삶을 산다면, 하나님께서 정말 놀랍게 하나님 사이즈의 일을 이루실 것을 믿습니다. 오늘날 사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생각합니다. 이 부류의 사람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께 반응합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이 아주 중요한 구절이라고 보는데요,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 하나님께서 주신 일이 없나니 하나님은 미쁘사 신실하사 감당치 못한 시험 당함을 허락 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주사 저희로 능히 이기게 하시리라." 그래서 믿음의 사람은 세 가지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1. 감당할 시험을 하나님께서 주신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문제를 다 아신다.
2.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시험 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내어주신다.
3. 이 문제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길 원하실까? 를 생각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바울과 실라처럼 사역을 하게 하심인가? 나의 성품을 다루기 위하심인가? 나의 죄성을 돌이키시기 원하심인가? 하나님께 구체적으로 여쭈고 찾아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과 육신의 사람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아까 문제가 오면 피하는 육체적인 사람과는 현저한 차이를 보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문제가운데서 성품이 다듬어지고 아름다워집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 안에서 환경을 통해 리더로 세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신의 사람들은 망가져 갑니다. 하나님께 대해 쓴 뿌리가 납니다. 불평과 원망의 쓴 뿌리가 깊어져 가서 망가지게 됩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말하면서 상황과 환경을 따라 넘어지는 자리에 있지 않습니까? 믿음으로 의롭게 됨이 재발견되어야 부흥이 다가옴을 보았고. 베드로를 통해 자기 자원이 충만할 때 그리고 자기 자원을 의지할 때 하나님의 자원을 의존할 수 없다는 것을 보았고, 오늘 우리가 이와 같은 모습에 가까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세 번째, 누가복음 18장의 예를 통해서 더 이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8절 "인자가 올 때,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그러셨습니다. 그러면서 이 부분에 6부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자기중심적인 신앙이 3부류 그리고 하나님 중심의 신앙이 3부류가 나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기 자원을 의지하는 사람과 하나님의 자원을 의지하는 사람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자원을 의지하면 하나님의 자원을 의지할 수 없음을 우리가 베드로를 통해 보았습니다. 왜 "인자가 올 때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라고 말씀하셨냐면, 오늘날 우리는 자기 자원이 충만한 사람들에 매력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바리새인과 세리들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이야기가 나오지요. 바리새인들이 성전 앞에 당당하게 나아갑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 제가 세리와 같지 않은 것에 감사합니다." 라고 자기가 세리와 다른 자신의 의를 갖고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나아갑니다. 자기 행위를 의로 여겨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그 기도가 하나님 앞에 응답 받지 못한 것을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압니다. 반면에 세리는 저 뒤쪽에 앉아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한 채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내 놓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긍휼을 의지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여기 세리와 바리새인의 기도에 차이가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자기 행위를 곧 자기 자원을 의지하고, 세리는 하나님의 긍휼의 자원에 의지합니다. 세리는 오늘날로 말하면, 사기꾼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내 놓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로, 부자와 어린아이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17절에 "내가 너희에게 진실로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 천국을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린아이는 부모가 주는 모든 것을 받아들입니다. 어린아이는 단순하게 주님께서 이뤄 놓으신 처방을 단순하게 받아들입니다. 반면에, 18절에 부자 관원이 나옵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까" 그의 관심은 무엇을 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는 질문부터가 잘못된 것입니다. 어떠한 행위로 구원 받을까 생각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죠. "네가 계명을 지키라." 이 말은 성경의 전체적인 맥락으로 볼 때 ‘계명 앞에 서 보라’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네가 계명의 목적 앞에, 의도 앞에 서 보라, 네가 계명을 다 지킬 수 있는지 서 보라’ 라는 말입니다. 계명은 무엇이죠? 율법인데, 율법은 행위뿐만 아니라 동기까지 다룹니다. 그 법 앞에 서보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가 "어릴 적부터 다 지켰다" 고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율법을 잘 지켰다면, 실제로 그렇게 살라 라는 모습으로 이웃 사랑의 모습으로 "네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 고 말씀하시자, 그가 근심하며 돌아갑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가는 것 보다 어렵다" 그래서 제자들이 묻습니다. "그럼, 누가 갈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다 하시느니라." 이것을 받아들이는 자가 어린아이처럼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원을 받아들이는 자. 그런데, 부자 관원은 자기의 자원을 과시 하고 의지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구원을 행위로 받으려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의식으로 본질을 대체 했습니다.
그 다음은 소경들과 제자들이 나옵니다. 제자들이 이 당시 자기 자원을 의존하는 자리에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32절,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기어 희롱을 받고 능욕을 받고 침 뱉음을 받겠으며 저희는 책 질질 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저희가 하나도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추었으므로 저희가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도다." 사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다고 할 때, 제자들은 항상 다른 말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뒤에 소경을 치료하시는 것이 나옵니다. 실제로 제자들이 소경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 앞에 2년 반이나 배웠으면서도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고, 배우려는 자세도 없었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자기들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고 생각 했을 수도 있습니다. 자기들의 자원을 의지했습니다. 반면에, 소경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35절에, "여리고에 가까이 오실 때에 한 소경이 구걸하다가 무리의 지남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 묻데, 저희가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신다 하니, 소경이 외쳐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앞서가는 자들이 저를 꾸짖어 잠잠 하라 하되, 저가 더욱 심히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니라.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하여 저를 데려오라 하셨더니, 제가 가까이 오매 물어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그가 가로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저가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쫓으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 하니라" 우선, 여기 소경은요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알았어요. 그가 사람들에게 누구시냐고 물었을 때 사람들이 "나사렛 예수"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주님을 부를 때 "다윗의 자손 예수여" 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자기 속에서 예수님의 대한 소문을 듣고, 이 분이 틀림없이 메시아일 것이라 생각하고 확인하고 싶었던 겁니다. 그래서 소리를 질려 예수님을 부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몰랐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잠잠하라고 야단했습니다. 주님께서 그 소경에서 물으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 원하느냐?" 사실 예수님께서 몰라서 물으셨겠어요? 그런데 그가 대답하기를 "보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제가 이 구절을 가만히 생각하면서 저라면 뭐라고 했을까? 물론, 제가 예수님께서 메시아라는 것을 발견했다면 상황이 달랐겠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님께 우리의 소원을 가지고 나오지 않습니다. 평생지고 있는 열등의식, 수치감 등을 갖고 주님께 나오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소경이라면,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했겠습니까? 오히려 "한 푼 줍쇼" 라고 하는 것이 훨씬 쉬웠을 것 같습니다. 그는 나면서부터 소경이었습니다. 소경임을 운명으로 받아들였을 수도 있었으나 그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 소경에게 특별한 은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주님이 누구이신 줄 알았을 뿐만 아니라, 주님께 배우고자 하는 자세가 있었습니다.
저는 자기 자원을 의지했던 세 부류의 사람들과 하나님의 자원으로 살던 세 부류의 사람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자기 자원을 의지하는 사람의 부류를 "A" 라고 하고, 하나님의 자원을 의지하는 사람을 "B" 라고 하고, 제가 목사님들께 묻습니다. 목사님께서는 목사님께서 섬기시는 교회에"A" 와"B"중에서 어느 부류의 사람이 더 많으면 좋겠습니까? 자기자원을 의지하는 사람은 바리새인들입니다. 그 당시에 엄청나게 헌신되어 있었고요, 모든 의식을 다 지켰습니다. 부자 관원은 아주 부자였고 그는 모든 율법을 다 지킨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요 최고의 신학교에서 최고의 선생님으로부터 훌륭하게 잘 교육 받은 제자 훈련은 확실히 된 사람입니다. 반면에 B 부류의 사람은 사기꾼들입니다. 어린 아기 입니다. 영적으로 소경에 거지입니다. A와 B 어느 부류의 사람이 더 많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 같으면 어떻겠습니까? 오늘날 이 시대는 어떠합니까? 오늘 우리는 A? B? 무엇을 추구합니까? "A" 입니다. 자기 자원이 인기가 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실 때 "인자가 믿음을 보겠느냐" 라고 말씀하셨겠습니까? 이것은 굉장히 극단적인 예입니다. A의 사람이 B의 가치관을 갖고 살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자이면서도 하나님 자원을 의지하는 사람 많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성경에 나와 있는 극단적인 예를 봅시다. 오늘날 우리가 추구하는 바가 아닙니까? 그런데, 결론적으로 진정한 하나님 자원의 삶은 여기에 있지 않습니다. 제가 목사님께 여쭈어 보니까, 목사님께서 저에게 "어떤 사람들을 원하느냐" 고 물어 보시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A의 사람들을 데려다가 B의 가치관으로 바꾸겠다. 저는 제 사명 중의 하나가 그것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A의 가치관 에서 B의 가치관으로 바뀐 사람이 있습니다.
바울, 요한 웨슬레, 그리고 마틴 루터가 그랬고요,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렇게 전환된 사람입니다. 자기의 자원을 의지하려고 했다가 하나님의 자원으로 살도록 전환 된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최고의 학문을 배운 사람입니다. 율법의 의로는 자기가 흠이 없다고 빌립보서 3장 6절에는 말하고 있는 전형적인 A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B로 전환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자신됨은 전적으로 은혜라고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 말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19절에,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재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라고 말합니다. 그는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살기 위해 힘썼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자원으로 살기 원했습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재발견한 이후에 그는 전환되었습니다.
바울이 로마서 7장 9절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라고 고백합니다. 여기 "계명"이라는 말은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난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인격적인 주님을 만나면서 하나님의 관점이 열리면서 하나님의 관점에서 자기 자신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뜻대로 살려는 거룩한 열정으로 살다 보면, 하나님의 관점에서 우리를 볼 수 있습니다. 그 전에는 행위만 봤었는데, 이제는 하나님께서 동기까지 비추시지요. 우리의 숨겨진 욕심과 야망의 모습을 보게 하십니다. 그래서 죄가 살아나고 나는 죽게 되는 것을 맛봅니다. 그래서 15절에 그는 갈등합니다. 이것이 일회적인 단회적인 사건이 아님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과정이 있습니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라고 고백하면서 갈등합니다. 그리고 18절 그가 깨달았다고 고백합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 도다." 이 말은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고백이 바울을 절망하게 하는 고백입니다. 24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요한 웨슬레는 이런 과정 속에서 "나는 구원 받지 못한 것 같다." 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추구함" 이라는 책에서 "누구든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선한 것이 없음을 발견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그 과정이 잇몸에서 생 이빨이 빠져 나가는 고통으로 그것을 보는 것. 거기에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통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끝까지 내 놓지 않으려는 것이 있습니다. 자신의 의로움. 자기 스스로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잘 안되면 낙심하고 좌절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할 수 있도록 힘을 달라고 기도하면서 결국은 자신의 힘으로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또 반복적으로 그 일을 하게 되고 나중엔 타협의 자리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이 25절을 말합니다. "우리 중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런데, 바울이 감사드리는 것이 이상합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는데 이것이 어떻게 감사합니까? 그는 여기에서 십자가를 발견합니다. ‘내가 내 모습을 보니까, 정말 주님의 은혜 없인 난 정말 끝장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오셨구나.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이런 나를 위해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 놓으심으로 내가 율법의 정죄함에 있지 않고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살게 하셨구나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절,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좌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3절,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결구, 바울이 여기에서 자기 자원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하시는 구나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바울이 자기 한계를 넘어선 세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하시는구나’를 발견하게 됐습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런 것을 발견한 사람은 어떠한 환경과 상황가운데서도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그런 환경 속에서 내가 절망하는 자리에 있을 때 소망이 없을 때에 그런 나에게 주님께서 그 아들을 나를 위해 보내셔서 나를 능력으로 생명으로 인도 하셨는데, 하나님께서 당신의 놀라운 능력과 처방으로 나를 건지시고 내 삶에 가장 선하고 완전한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느니라’ 그래서 바울은 육신으로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심을 알고 그 후에 성령에 의한 삶을 이야기 합니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말합니다. "인간들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식은 그들을 광야로 인도한 후 다정하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정한 순서는 그들이 고뇌에 빠져 그들 자신의 무력과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에 대한 절대적으로 의지하게 한 다음 하나님께서 베푸신 위대한 구원을 보게 하신다." 라고 말합니다. "A.W 토저"는 이런 말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일꾼 중에 자기 자신에 대해 크게 절망해 본 경험 없이 쓰시는 사람이 내가 찾기에는 하나도 없는 것 같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빚어 가시는 과정 중에 있는 일입니다. 베드로가 실패했잖아요. 그래서 고기를 잡으러 갑니다. 여섯 명의 다른 사람들도 따라갑니다. 예수님께서 거기까지 오십니다. 그래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면서 "내 양을 치라, 먹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5장에 베드로가 처음 예수님을 따라 나섰을 때"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셨는데, 이것은 미래형이거든요, 그리고 "내 양을 치라, 먹이라"는 현재형입니다. 그러면, 사역을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실패한 베드로를 치유하시며, 양을 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실패의 경험 즉, 자신을 과시하는 것이 아무것도 아님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자원을 의지할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드디어 일꾼으로 세우십니다.
하나님께서 영적 리더를 세우실 때 본인의 자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원을 의지할 때 이런 자들을 세우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빈 배’였습니다. 인생의 위기에 주님을 만나고 주님께서 "나를 따르라" 라는 말씀을 듣고 주님을 따르고 중간에 자기중심 하나님 중심으로 왔다 갔다 합니다. 한번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 이다." 라고 해서 주님 앞에 칭찬 받다가 "주여 그리하지 마옵소서." 라고 해서 "사단아 물러가라" 라고 예수님께 말씀을 듣고, 물에서 뛰어 내렸다가 또 물이 쳐 박히자 예수님께서 "믿음이 적은 자야" 라는 말씀하십니다. 그는 인간중심 하나님 중심으로 왔다 갔다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러시잖아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 라고 하시잖아요. 자기중심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이죠. 자기중심이 깨어져야 하는데, 그 것이 베드로에게는 주님을 부인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을 3년간 쫓았던 모든 것이 실패로 끝난 것 같이 보이는 베드로가 다시 그물을 들고 바닷가에 가서 고기를 잡으려는데, 그는 여전히 "빈 배"입니다. 3년 전에도 빈 배였습니다. 그런데, 3년 동안 훈련 받고 났는데도 빈 배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른 쪽에 그물을 던지라고 하십니다. 그 밤에 베드로가 오른 쪽에는 그물을 던지지 않았었을까요? 아니요, 사방에 그물을 던졌을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에 너무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훈련받으면 다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셔야 됩니다. 주님께서 오시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여전히 빈 배입니다. 훈련을 통해 무엇을 배웁니까? 우리 속에 선한 것이 없음을, 우리의 능력이 아닌 것을, 우리 자원으로는 안 되는 것을 절박하게 깨닫게 됩니다. 주님이 아니시면 안 되는 것을 절박하게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오셔야 빈 배가 채워집니다. 자신의 한계와 선함이 없음을 보고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데,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의 동기를 드러내시고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 우리가 노출된다니까요. 많은 사람들이 이 체험의 단계까지 이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타협하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여 하나님이 이론인 것 입니다. 방법론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런 신앙에서는 계명이 임하고 빛이 임하는 것이 안 됩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본질을 알고 싶어 하는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빛을 비추시고 그 과정을 갖게 하십니다.
타협의 모습
1. 교회를 떠남. 예수님 곁에 죽은 강도처럼 죽기 전에 예수님 믿어야지.
2. 말씀을 선택적으로만 듣습니다. 목사님께서 사회생활 하지 않아서 그런 말씀한다고 자기 자신을 보호합니다.
3. 육신이 약해서 그렇게 살 수 없다고 합니다.
4. 말씀대로 살지 못한 자기 자신 때문에 너무 힘들어 합니다. 그러다가 ‘이 정도만 하면 잘 하는 거’ 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잘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타협하는 것이 전형적인 율법주의 신앙입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십시오. 내가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람은"0"점인데, 자기 스스로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스스로를 "70점" "80점"으로 보면서 주님께서 "20점"만 도와주시면 100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가 하나님의 관점으로 "0점"임을 깨어짐으로 알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재발견하는 것이 이 말입니다. 마틴 루터와 요한 웨슬레가 그랬습니다. 요한 웨슬레의 예를 보면, 1739년 1월 1일 하나님을 전심으로 구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사람들과 하나님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 오시고 그 때 이후로 50년간 영국에 부흥이 임합니다. 우리는 "잘 된다", "괜찮다"고 말하는 것에 익숙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말하십시오. "제가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께서 쓰신 "부흥"이라는 책 마지막에 쓰여 진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필연적으로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부흥을 일으키시기 위해 이런 식으로 사용하셨던 어떤 시대나, 그룹, 집단의 사람들은 언제나 철저한 절망과 완전한 좌절의 상태를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조지휘트필드 와 웨슬리의 일기를 읽어 보십시오. 이 모든 사람들의 일기를 읽어 보십시오. 그들은 언제나 전적인 무능함을 인식하는 그 자리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은 결국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됩니다. 홍해가 가로 막혀 있습니다. 원수들이 있습니다. 산들이 겹겹이 둘려 쌓여 있습니다. 그들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이것은 언제나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요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제나 그러한 순간에 역사하십니다. 교회는 여전히 건장하고 자신 만만하며 교회에 필요한 것은 다만 조직화하고 더 활발하게 노력하고 활동하는 것뿐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아직 홍해 앞에 이르지 않았습니다. 아직 그 체험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에 이르기 까지 신앙 부흥과 하나님의 성령의 부으심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분의 기도를 읽겠습니다. "하나님, 주님의 영광과 거룩을 우리에게 나타나 보여주시옵소서. 우리의 전적인 무력함과 절망감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로 하여금 모든 일을 알게 하셔서 사람들로부터 시선을 돌려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옵소서. 그러면 의심의 여지없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영광과 능력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 있길 원합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알지 못하고 단 한차례의 부흥을 가져오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우리 자신을 바라봄으로 우리가 전적인 소망 없음과 무능함, 의로움이 없음을 발견하여 오직 성령의 기름 부으심, 은혜가 없으면 안 됨을 아는 은혜가 우리 가운데 있길 바랍니다.
다섯 번째(부흥을 위한 중보기도)
- 여주봉 목사 -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참 감사하고 하나님의 임재가운데서 예배드리고 주님 찾을 수 있는 것에 감사드립니다. 오늘 아침에는 중보기도에 대해서 살펴보기 바랍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부흥을 위한 중보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부흥이 이 땅에 오기 위해서 아주 중요한 요소가 중보기도입니다. 이사야서 62장만 보더라도, 하나님의 유업이 주어지기 위해서 중보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말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62장 1절, "나는 시온의 의가 빛 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 같이 나타나도록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인즉 이방 나라들이 네 공의를, 뭇 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 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관,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 다시는 너를 버림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며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임이라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 올 것을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그 안에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 백성의 구속 그리고 그로 인한 교회의 회복과 부흥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신앙이 타락할 때일수록, 첫 시간에 살펴 본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에서 조롱과 멸시를 당하고 하나님의 생명이 끊겨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교회를 혐오시설, 쓰레기 하치장 정도로 생각합니다. 이러한 시기에 하나님께서 회복하실 것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그 다음 절을 보면, "예루살렘이여 내가 너의 성벽 위에 파수꾼을 세우고 그들로 하여금 주야로 계속 잠잠하지 않게 하였느니라 너희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아 너희는 쉬지 말며 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중보기도 자들을 세우시고,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일행하실 것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것에도 하나님께서 중보기도를 사용하셨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다니엘입니다. 다니엘이 하루는 예레미야서를 읽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판의 기간이 70년이고 그 70년 후에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회복하실 것을 보고 그때부터 창문을 예루살렘 쪽으로 열고 기도합니다. 인간적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을 하나님께서 이루십니다.
이사야 하반부에 보면, 하나님 백성의 구속에 대해 나와 있습니다.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중보기도 자들을 세우십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난지 8일 되었을 때 예루살렘에 갔을 때 시몬이라는 사람이 중보기도 자였는데. 그가 죽기 전에 메시아를 볼 것이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 일이 이루어졌을 때, 제일 먼저 그 일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안나’라는 여 선지자가 있었는데. 일반적으로 선지자라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서 백성에게 외치는데, 그 선지자에게서는 그런 기록이 없습니다. 83년 또는 84년까지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지 않고 밤낮으로 기도합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위로 즉, 하나님의 메시아를 기다립니다. 여기 이사야를 보면, 하나님께서 파수꾼을 세우신다고 하시는데, 구약성서에서 파수꾼은 선지자를 말합니다. 이 파수꾼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사람들에게 전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 중보기도 자들 입니다. 중보기도 자들을 파수꾼이라 부르는 것은 중보기도가 선지자적 소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중보기도 자들을 세우셔서 밤낮으로 부르짖게 하시고 그 기도를 들으시고 그 일을 이루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2000년 기독교 역사를 보면, 단 한 번의 예외 없이 하나님께서 중보기도 자들을 세우시고 그 기도를 듣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셨습니다. 작년에 평양 부흥 100주년을 기념해서 우리나라 교회와 교단들이 "Again1907" 이라고 해서 많은 행사와 기도회를 했습니다. 그러나 부흥은 행사로 오지 않습니다. 부흥은 행사로 모이는 기도회로 절대로 오지 않습니다. 2000년 역사를 읽어 보면 부흥은 절대로 그렇게 오지 않습니다.
부흥은 이사야 하반부에서 말씀하시듯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돌이켜 십자가의 복음이 신앙의 본질로 세워지고 말씀과 성령의 조화 가운데 서고 그 토대 위에서 중보기도로 나아가며 아버지 일을 자기 일로 섬기는 이 토대 위에서 성경에 말하는 그런 무리들을 준비시키시고 돌이키시고 그 위에서 부흥을 일으키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중보기도만 해도 몇 천명이 모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돌이켜서, 하나님만이 목적된 자리로 돌이켜서, 오직 십자가의 공로만을 믿음으로 의지하는 자리로 돌이켜서 자기의 의는 걸레처럼 내어 던지고 예수님만이 자기의 유일한 의 되신 삶 가운데서 그분을 아는 것이 인생의 유일한 목적이 되어 그 분만을 추구할 뿐만 아니라, 그 분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밤낮으로 붙잡고 기도하는 그 무리들을 세우셔서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항상 역사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무리의 수가 항상 많을 필요는 없습니다. 어떨 때는 소수를 사용하셨습니다. 그 평양 대 부흥회 근원지가 1904년 "웨일즈 부흥입니다. "웨일즈 부흥은 6개월 만에 전혀 예수님 믿지 않던 10만 명의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 "웨일즈 부흥"에 하나님께서 "에반 로버츠" 라는 사람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는 광부 출신이었습니다. 근데 하나님께서 그가 13살 때부터 부흥을 보내달라고 기도하게 하셨고 밤중에도 하나님께 부르짖게 하셨고 그가 26세가 될 때 그 곳에 부흥이 일어나게 됐습니다. 미국전체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던 2차 영적 대 각성 운동, 한 사람이 뉴욕 시에서 점심시간에 기도하면서 일이 일어났습니다. 부흥을 위해서 이처럼 중보기도가 필수입니다,
오늘은 부흥을 위한 중보기도를 살펴보겠습니다. 저 개인적으로 하나님께서 중보기도를 가르치셨고, 첫 번째 섬기던 교회에서는 그것이 정착되지 않으니까 새롭게 시작한 교회가 포도나무 교회입니다. 포도나무 교회가 세워진 이후로 하나님께서 약속을 주셨는데, 그것은 교회를 처음 세울 때에 주신 약속들입니다. 그것을 다시 확인 시켜주시고 행하고 계신 것을 봅니다.
처음 교회를 세울 때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중보기도인데, 저의 미숙함과 교인들의 미숙함으로 잘 되지 않자 하나님께서 포도나무 교회를 세우시게 하셨고, 포도나무 교회 처음에도 중보기도를 하게 하셨습니다. 남아공에서 오신 선교사님께서 하나님께서 저와 이길수 목사님 두 분을 사용하신다" 하면서 어떻게 저희 둘이 만났냐고 물으시더라고요. 저는 개인적으로 이길수 목사님을 전혀 몰랐습니다. 처음 포도나무 교회에서 부흥을 위한 중보기도를 하는데, 하루는 하나님께서 그러시더라고요, 이 나라에 하나님의 부흥을 담을 전초적인 일이 이미 시작되었으니, 기도만 하지 말고 찾아 나서라 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어디를 찾아 가야 할는지 몰라서 몇 달이 지났는데, 하루는 국민일보를 보는데, 한 광고를 보는 순간 "여기니까 이곳을 가라" 라고 하시더라고요. 전에는 한국에서 하는 집회를 하나도 안 갔습니다. 제가 교만한 거죠. 캐나다에서 벤쿠버에 있는 팀들이 목사님과 함께 왔던 집회였는데요, 그게 계기로 화요 모임이 시작되었고. 이길수 목사님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포도나무 교회 교인 수 30명도 안 되는 상황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인도하셨습니다. 캐나다 팀과 통역도 도와 드리면서 친하게 되었습니다. 여자 두 분이 오셨는데, 한 분은 미국 분처럼 부드러웠고, 다른 한 분은 독일 분처럼 딱딱해 보였습니다. 그분은 인사해도 한 마디 하면 끝이었습니다. 마지막 날인가? 이분이 어제 밤에 한국의 부흥에 대해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것이 있어서 함께 나누어야 할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얘기하는 그 순간에 저는 땅바닥에 쓰려졌습니다. 몸이 딱 굳어버렸습니다. 마음은 하나님의 품에 딱 안겨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 분이 한 말씀하실 때마다 제 속에서 "아멘" 하는 겁니다. 그래서 같이 온 팀 중에서 한 분이 저한테 지금 뭐하고 있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기도해주셨습니다. 그 분의 말씀에 기도 굴이 있는 산에 용암이 그 기도 굴을 통해서 확 터져 나오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한국에 오산리 기도원에 기도 굴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 팀들이 집회 한 다음에 홍콩의 "재키 프린저"를 만나기로 했던 팀이 비행기를 연장해서 그곳을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말씀을 들을 때 알겠더라고요, 오산리 기도원이 그렇게 환상처럼 생기지도 않았고, 우리나라 부흥이 중보기도를 통해 올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중보기도의 영을 부으셔서 하나님의 의중과 의도를 주도적으로 보이시면서 인도하시고 그들로 그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기도하게 하시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급속도로 성장시키시고 또 그 교회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들을 보이시는 그러한 것만으로도 꽤 여러 교회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은 전초적인 역사에 불과하고요 하나님의 부흥은 중보 기도하는 그것으로 통해서 그 불길이 품어져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각 교회들 가운데 중보기도가 반드시 세워져야 한다. 라고 생각합니다. 중보기도로 나아가되, 포도나무 교회에서는 "다윗의 장막"이라고 해서 집회기간 동안이나 화요 모임은 빠져있지만, 나머지 시간은 하루 24시간 2시간 간격으로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품고 기도하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부흥을 위한 중보기도가 모든 기도의 바탕에 깔려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부흥을 위한 중보기도가 그 기도의 기초 가운데 깔려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부흥을 위한 중보기도를 살펴보기 원합니다.
부흥을 위한 중보기도는 현실에 대한 인식에서부터 시작된다. 느헤미야 1장 1절,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이라 아닥사스다 왕 제 이십 년 기슬르월에 내가 수산 궁에 있는데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인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내게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의 형편을 물은즉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 야훼 크고 두려우시니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하면서 기도의 내용이 나옵니다. 여기 보면, 부흥을 위한 중보기도의 어떤 본보기 중에 하나가 느헤미야 입니다.
느헤미야가 중보기도를 하게 된 계기가 뭡니까? 자기 형제들로부터 소식을 듣습니다. 이때는 고레스 왕의 칙령으로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라고 칙령이 내려 사람들 일부가 돌아간 상태입니다. 지금까지도 성문은 불 탄 채로 남아있고 하나님의 백성은 조롱과 멸시와 능욕을 당하고 하나님의 성읍이 폐허 가운데 있는 것을 고할 때 그 사실을 듣고 이렇게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이방 나라에 포로로 잡혀가고 온갖 조롱과 멸시와 수모를 당하는 상황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이 현실이 인식되었을 때, 그는 하나님 앞에 중보하며 나아갑니다.
현실에 대한 인식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관점으로 현실을 보는 것입니다. 첫날, 출애굽기의 금송아지 사건을 통해 부흥의 필요성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 그 전에도 그 구절 많이 읽으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구절을 볼 때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놀라운 일을 행하심으로 그들을 인도하시고 구름 기둥과 불기둥을 통해 그렇게 인도하시는 데 어떻게 그 금송아지에게 번제를 드리며 술 취하며 방탕하면서 세상가운데 향락에 빠져 그럴 수 있을까? 아론이 지도자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하면서 우리는 저들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더 했으면 더 했지 저들보다 덜 하지 않다는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보다 더한 하나님의 역사를 보았음에도 하나님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 사람만 보이는 그래서 자기들이 자기들을 인도한 사람이 모세라고 생각하는데, 모세가 40일 동안 눈에 보이지 않자, 금송아지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우리가 교회에서 입이 닳도록 하나님의 이야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 사람만 보이는 그래서 교회가 우상이 되어 있는 그들보다 절대로 낫지 않은 상태. 영적인 분별력은 철저하게 가려져 있으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철저하게 고갈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들의 가장 전형적인 우상 숭배가 혼합주의데 하나님 섬기면서 다른 것도 섬기는 바리새인처럼 우리 앞에 다른 신상은 두지 않을지 몰라도 우리에게는 예레미야 시대만큼 우상이 많은 돈이 우상이고 가정, 남편, 직장, 명예, 세상의 안락, 남자 친구, 여자 친구, 오락이 우상인 상태. 그 시대에 못지않은 많은 우상이 우리 가운데 있으면서 그 사실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임재가 철저하게 걷혀 있는 것. 하나님의 임재가 걷히면 다른 어떤 부나 명예, 세상의 성공이 있어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데, 교회의 예배에서 조차 하나님의 임재가 철저히 걷힌 상태.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부족한 것이 전혀 없다 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 소중한 것은 단 하나도 없는 하나님의 생명이 철저하게 고갈된 상태.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의 사인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하나님의 보호막이 걷히는 것과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영적인 눈이 가려져 있는 것 하나님의 징계입니다. 어제 저녁 "관계의 문제"에 대해 다루셨다고요. 기도 사역하실 때에 조금만 나오실 줄 알았는데, 반 이상이 나오셔서 이 목사님께서 후회하셨다고, 여러분 그 만큼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관계에 있어서 무너져 있지 않은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서로 안력과 다툼과 편 가르기와 미움과 시기가 없는 교회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시면, 우리 가운데 그런 죄악들을 하나님께서 다루시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진노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보호막이 철저히 걷혀 있고 생명이 고갈된 것도 하나님의 징계며 심판입니다. 그래서 우리 가운데 상처만 가득합니다. 그래서 이사야 시대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성한 곳이 없을 만큼 상처뿐이라" 라고 합니다. 이 말은 지도자부터 모든 사람에 이르기까지 전체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인격적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나면 남는 것은 상처뿐입니다. 오늘날 목회자의 가정에 엄청난 상처가 있습니다. 교회 중직자의 가정에 엄청난 상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하나를 우리가 살펴볼 때, 우리가 그토록 그들에 대해 이해할 수 없노라 말했던 오늘날의 교회가 그들보다 더하면 더 했지, 덜 하지 않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인식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 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기준과 관점을 보여주셔야 가능합니다. 중보기도는 이 인식부터 시작됩니다. 사실, 부흥 자체가 이 인식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부흥" 책을 보면, 그 첫 번째가 "인식"이라고 표현합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하나님의 관점으로 우리 처지를 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눈을 열어 주셔야 진정한 중보기도도 시작될 뿐만 아니라, 그 눈을 여셔야 우리의 중심에서의 진정한 전환이 있고, 그 눈을 여셔야 부흥을 위한 우리의 전적인 헌신이 가능합니다. 우리가 배운 몇 가지를 교회에 가르친다고 교회가 회복되진 않습니다. 교회가 회복되려면 하나님의 길이 선명히 보여 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비전이 보여 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비전 앞에 우리 자신의 모습이 선명히 보여 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 자기 자신의 전적인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전체를 드림이 없이 몇 가지 새로운 정보나 지식을 가르친다고 해서 교회가 바뀌지 않습니다. 자기 전체를 걸려면 인식 즉 보여 짐이 없이는 불가능 합니다. 그래서 인식이 가장 첫 번째 단계라 말씀 드렸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부흥"의 책에서, "우리에게 그처럼 대단히 흥미가 있는 요점은 모세와 교회의 이러한 일에 나타나는 반응입니다. 첫 번째 단계입니다. 여러분께서는 그들이 처했던 입장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그들의 죄와 (금송아지 사건) 하나님의 선언과 (함께 가시지 않겠다)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입니다. 부흥의 첫 번째 단계는 우리가 여기에서 보는 것처럼 자기의 처지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인식을 떠나서는 인식이 없인 부흥의 어떠한 소망도 없습니다. 왜 여러분들 가운데 왜 반응이 미지근한지 아세요? 우리 눈에 그게 보이지 않기 때문이죠. 이건 여러분뿐만 아니라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말씀을 그날그날 전할 때는 현명하게 보였습니다.
처음 교회를 개척했을 때 하나님께서 저를 중보기도로 인도할 때, 그때 저희가 그날따라 "하나님 저희들의 원수를 갚아 주세요" 라고 기도했어요. 그때 DTS 마친 분께서 오셔서 함께 기도하시다가 아마 저희가 기도하는 것을 들으시고 떠나신 것 같았습니다. 우리가 의미했던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는 우리들이 신앙의 본질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에서 철저하게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의 임재가 걷히고 그래서 세상에서 조롱과 멸시를 당하고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저희를 회복시켜주세요 라는 의미로 원수를 갚아 달라고 기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 이유를 잘 모르고 무슨 목사가 원수를 갚아 달라하느냐 라고 생각하시고 떠나신 것 같습니다.
또 어떤 분은 "목사님,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도 우리나라에 있고 각 교단마다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가 있는 교단도 꽤 많은데" 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러나 그분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봤더라면 그 말씀 못 하셨을 것입니다. 불과 10년 남짓 지나는 오늘날은 아무도 그런 말을 하지 않는데 말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인식을 떠나서는 어떠한 부흥의 소망도 없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우리의 처지를 인식하는 단계가 있어야 부흥은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 시대에도요, 아마 모르긴 몰라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랬듯이 노예로 끌려가서 하루 종일 종 노릇하고 섬기면서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들이 자기들이 섬기는 신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 유대인들에게 심부름을 시키면서 뭐라 했겠습니까? "너희들이 섬기는 신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라며? 너희들의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여호와라면, 지금 너희들이 이 모양 이 꼴이겠냐?" 그들이 하루 종살이를 끝내고 모여서, ‘우리 민족이 문제야. 우리 조상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았으니까 오늘 우리가 이렇잖아.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어.’라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제가 기록을 찾을 수는 없지만, 당연히 그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서 느헤미야처럼 이 문제를 갖고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이 있었겠지만, 최소한우리가 아는 바로는 거의 없습니다. 이것이 인식과 표면적인 지식의 문제입니다.
오늘날 ‘목회자가 문제야, 지도자들이 문제야, 교회 안에 성도들이 많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없어.’ 라는 말을 안 하는 사람이 오늘날 거의 없습니다. 그런 얘기를 안 하는 성도들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느헤미야처럼 이렇게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현실을 인식하면 달라집니다. 예수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에 대해 그렇게 얘기하지 않을 텐데.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눈을 열어 주셔서 우리 처지에 대한 하나님의 인식을 갖는다면, 그 입이 완전히 다물어지고 주님 앞에 설 텐데 느헤미야, 다윗, 다니엘, 예수님, 사무엘처럼. 그리고 주님 앞에서 피 값 주고 사신 하나님의 백성과 교회를 위해 기도할 텐데.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이지 않으니까, 말만하고 기도하게 되지 않습니다. 이사야서 29장 30장에 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타락하는 과정이 29장에 나오고, 회복되는 과정이 30장에 나오는데, 그 회복의 첫 과정이 무엇인 줄 아세요? 하나님의 기준을 회복시키십니다. 다시 말하면 분별력이 열리게 되는 것이죠. 이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습니다. 하나님께서 눈을 열어 주셔서 인식을 회복시켜주시기 때문에 가능하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해 땅에 떨어진 하나님의 이름을 향한 하나님의 질투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에스겔서 36장의 말씀처럼. 그리고 그들로 하나님의 관점에서 현실을 보게 하십니다. 여기에서 중보기도가 나옵니다, 이게 보이기 때문에 자기 삶을 드리는 전적인 헌신이 가능해집니다. 그래서 아무리 교회들이 연합해서 모여서 부흥! 부흥! 한다고 해서 부흥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랬다면, 작년에 부흥이 왔어야합니다. 그래서 로이드 존스 목사님께서 쓰신 "부흥"이라는 책을 읽겠습니다. "인식이 없이는 절대 부흥이 오지 않는다.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몇 줄 띄고 저는 여러분에게 어떤 부흥의 역사든지 교회사에 나온 어떤 위대한 일에 대한 역사이든지 다 읽어 보라고 촉구하는 바 입니다. 그러나 한 번도 예외 없이 이러한 일이 일어날 것임을 즉시 발견할 것입니다." 저는 부흥만 하더라도 인식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중보기도요, 현실에 대한 인식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사실, 현실에 대해 인식할수록 중보기도가 깊어집니다.
모세가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었어요. 그때 하나님 분노하시죠, "저들을 멸할 것이다." 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서, "그런즉 나더러 하게 하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주권자 하나님이시기에 어떤 피조물에게도 허락을 받지 않으십니다. 주권자이시기에 하나님께서는 임의로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물으시죠. 마치 허락을 받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친밀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중보기도 자들에게 주시는 상이 바로 ‘친밀함’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드립니다. 하나님 그러지 마시라고. 애굽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겠느냐고 말하면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약속을 기억하시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분노를 돌이키십니다. 그리고 산에서 내려와서 "주의 편에 선 자들은 내게로 나아오라" 라고 합니다. 첫날, 저녁에 기도사역을 할 때, ‘주의 편에 선 자들을 하나님께서 모으고 계신다 ’라는 감동을 주셨습니다. 부흥의 또 다른 중요한 요소가 무엇이냐? 주의 편에 선 자들의 구별된 삶입니다. 개인의 구별된 삶뿐만이 아니라, 단체가 구별될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날 3,000명이 목숨을 잃죠. 그래서 모세가 산에 올라가서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 보십시오. 현실을 인식할수록 기도는 깊어지고 절박해집니다. 저 같은 경우에도 외부에 나가서 설교를 하러 가거나 해서 오늘날 교회가 처한 현실을 보게 되면 중보기도가 훨씬 절박해 집니다.
1. 부흥에 대한 중보기도는 현실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말미암아 옵니다.
2. 부흥에 대한 중보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과 교회와 나라의 죄를 회개합니다.
그러니까 천지를 창조하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 그렇게 이방신을 섬기는 이방 나라에 패망하고 예루살렘이 폐허와 황 무화 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길을 마음에서 떠난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본질에서 떠난 것입니다. 종교적인 의식은 예레미야 때까지 많았습니다. 나라를 살려달라고 금식하고 기도하는 종교적인 의식은 많았었지만, 하나님을 중심에서 떠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철저하게 고갈되었으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자기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적인 의식은 많았지만, 삶은 세상의 방법을 따라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그 사실을 깨닫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들이 그러한 처지를 인식하게 됐을 때, 그러한 처지에 이르게 됐을 때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 제 길로 간 것을 인식했죠. 그래서 그들이 자기와 자기 민족의 죄를 하나님 앞에 회개했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를 보면, 제가 1장 3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이르되 야훼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이제 종이 주의 종들인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우리 이스라엘 자손이 주께 범죄한 죄들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우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하여 주를 향하여 크게 악을 행하여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나님의 길을 떠나 심판이 임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의 술 맡은 관원장 곧 연회장이었습니다. 그 당시 강대국의 술 관원장은 미래가 보장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예루살렘 중건을 위해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갑니다.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에 향한 진노를 알고 왕 앞에 나갔을 때에 수심이 가득하게 됐고, 왕이 묻고 대답하는 과정 중에 예루살렘으로 가게 됩니다. 자신의 보장된 삶을 기꺼이 내려놓고 폐허가 된 자기 고향의 중건과 하나님의 백성의 회복을 위해 자기 자신을 헌신할 정도라면 이 사람은 귀한 사람입니까? 귀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의 기도를 보십시오. 자기 자신과 자기 가족과 자기가 속한 교회와 모든 하나님의 종들을 위하여 주 앞에 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식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하게 됩니다. 제가 중보기도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것만 보더라도, 오늘날 백성이 얼마나 타락하게 된지 알 수 있습니다.
처음 교회에서 중보기도 세우기를 원하셨다고 했잖아요. 주님 얼굴을 구하여 나오는 자리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마음을 부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처해진 상황이 인식되고 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떠나 있는지 종교적인 의식은 많고 영적인 분별력이 가려져 있고 혼합주의 신앙과 우상숭배 신앙이 얼마나 가득한지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가 걷히고 실제가 걷혀 진노의 사인들이 얼마나 우리 가운데 가득한지 모릅니다. 그게 보여지니까,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되죠. 그런데, 성도들이 안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누가 말한 것은 특별히 아니었는데, 제가 기도하는 중에 ‘중보기도로 나갔더니, 지금 내 코가 석자인데, 내 문제가 산더미인데 민족의 문제가 어쩌고 저쩌고 너무나 거리가 멀다’ 하는 성도들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그 마음을 하나님께서 안 기뻐하시는 것이죠. 그때만 해도 영적으로 어려서 그런 백성을 위해 모세처럼 품고 기도했어야 하는데, 그때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주일날 "여러분들이 기도회 나오지 않으면서 여러분들이 만나거나 전화로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라고 하면 그분들은 누가 고자질한 줄 압니다. 그런데, 본인이 그랬다면, 정직하게 돌이키고 하나님 앞에 나오면 되는데, 정당화 시키고 오히려 그 일로 마음이 더 굳어지면 하나님께서 더 안 기뻐하십니다. 그러면 제가 또 말합니다. "돌이켜야 된다" 이것은 누가 말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기도 중에 하나님께서 그런 마음을 주신 것이라고 말하면 그들이 더 안 받아들입니다. 제가 그것을 통해 우리가 인본주의적인 가치관으로 살기 때문에 우리 맘대로 하나님을 해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절대 하나님은 안 물러서십니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기 문제, 자기 자식, 자기 교회의 문제 아니면 기도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만큼 철저하게 이기적입니다. 그만큼 타락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겠다고 말씀하시면서 너희의 먹는 것 입는 것 염려하지 말라 그런 것은 이방인이나 구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너희 아버지는 너희 있어야 할 것을 다 아신다고 하시면서 너희의 머리카락 까지 세심 바 되었다고 말씀하시고 너희 마음의 생각을 아신다고 하셨는데, 우리는 우리의 문제를 밤낮으로 다 고하여야 그래야 하나님께서 그나마 잊어버리지 않고 어쩌다 기회 되시면 조금 들어줄 소망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불신, 자기중심적 생각, 타락이 가득한 줄 모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그렇게 신앙이 타락했기 때문에 오늘날 성도들 중에 끈 달리지 않은 헌신이 없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예레미야 시대는 시바 원방에 가서 향품을 사와서 예배 드렸는데, 그것이 모두 자기 목적을 위한 헌신이었습니다. 끈 달린 헌신. 하나님이 자기 목적을 위한 수단인 것이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셔서 아버지 일에 동참하여 아버지 뜻에 헌신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하면 내 사업, 사역, 목적이 이루어 질 거야’ 라는 생각으로 일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를 사랑하셔서 아버지 뜻에 순종하고 아버지께 전적으로 헌신하는 것이 그분의 목적, 기쁨, 특권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우리를 보십시오. 교회에서 하는 모든 헌신과 봉사와 헌금을 보십시오. 다 끈 달렸습니다. 끈 달려 있지 않으면, 근본적인 헌신을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얼마나 타락해 있습니까. 하나님을 아버지, 주인이라고 부르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말라기 시대처럼. 이처럼 기도만 보더라도, 하나님의 백성이 너무나도 이기적입니다. 그러니, 그 기도가 응답되는 경우가 거의 없죠.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도해서 하나님께서 그것을 이루시고 채우시는 경험을 하지 못하죠. 이처럼 중보기도는 하나님 앞에 자신과 교회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다니엘도 그랬습니다. 다니엘서 9장 3절 이하입니다.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덮어 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내 하나님 야훼께 기도하며 자복하여 이르기를 크시고 두려워할 주 하나님,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위하여 언약을 지키시고 그에게 이자를 베푸시는 이시여 우리는 이미 범죄하여 패역하며 행악하며 반역하여 주의 법도와 규례를 떠났사오며 우리가 또 주의 종 선지자들이 주의 이름으로 우리의 왕들과 우리의 고관과 조상들과 온 국민에게 말씀한 것을 듣지 아니하였나이다. 주여 공의는 주께로 돌아가고 수치는 우리 얼굴로 돌아옴이 오늘과 같아서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거민들과 이스라엘이 가까운 곳에 있는 자들이나 먼 곳에 있는 자들이 다 주께서 쫓아내신 각국에서 수치를 당하였사오니 이는 그들이 주께 죄를 범하였음이니 이다 주여 수치가 우리에게 돌아오고 우리의 왕들과 우리의 고관과 조상들에게 돌아 온 것은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음이오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회개기도 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심판과 진노를 내리실 수밖에 없으되, 모세처럼, 사무엘처럼, 다니엘처럼, 에스라처럼, 느헤미야처럼, 예수님처럼 그렇게 하나님 앞에 그 백성의 죄를 자백하며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구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성 막아 서는 자를 찾으신다고 하셨잖아요. 그렇게 찾으십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중보기도에 대해 설교하면서 죄책감이 있어요. 제가 과거에 바쁘지 않을 때에는 중보기도 꼬박꼬박 참여 했거든요, 그러면 너무 좋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마음을 부어 주시고, 그 의도를 말씀하시고. 제가 깊이 기도에 참여하지 못했던 시점이 하나님께서 "부흥의 전초가 이미 시작되었다. 찾아 나서라" 라고 말씀하실 때 기도만 하고 있을 수 없잖아요. 찾아 나서야죠. 그래서 그렇게 하다 보니까 제가 지속적으로 시간을 내어서 하나님 앞에 서기가 쉽지가 않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중보기도 자들을 세우십니다.
중보기도의 세 번째 요소는 하나님의 긍휼을 의지하여 주 앞에 서는 것입니다. 자신과 자신이 속해 있는 교회와 전체주의 종들과 백성의 죄를 회개하며 기도해야 하는데요, 우리의 초점이 그 자리에만 있으면 그것은 파괴적인 자성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떠나 있는가 애통하고 통회하면서 회개하지만, 우리의 눈이 거기에 계속 머물러 있으면 파괴적인 자성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긍휼을 의지해야 합니다. 아까 다니엘서만 보더라도, 17절 "그러 하온즉 우리 하나님이여 지금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주를 위하여 주의 얼굴 빛을 주의 황폐한 성소에 비추시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눈을 떠서 우리의 황폐한 상황과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옵소서 우리가 주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공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니 이다.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지체하지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 이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에 의지해야 합니다. 주 자신을 위하여 주의 교회를 회복시켜 달라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중보기도의 네 번째 요소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아까 이사야서 62장만해도" 밤낮으로 주의 약속을 상기시키는 자"라고 하셨죠.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모세도 하나님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약속을 기억하십시오" 라고 기도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참 중요한 것이 엘리야의 기도입니다. 중보기도의 자세에 있어서 엘리야의 기도가 아주 중요합니다. 엘리야의 기도가 그 자세의 모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엘리야를 보십시오. 주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엘리야가 온다. 세례 요한도 엘리야의 영과 능력으로 왔습니다. 엘리야의 자세와 가치를 가진 중보기도가 아주 중요한 것을 볼 수 있죠. 3년 반 동안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아합 왕에게 가라고 명하십니다. 왜? 비를 내리시겠다고 열왕기상 18절 1절, "많은 날이 지나고 제 삼 년에 야훼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비를 내리는 것이 누구의 뜻입니까? 하나님의 뜻이죠. 그래서 850명의 바알의 선지자들과 엘리아의 대결이 붙어서 그 승리의 결과로 850명의 이방신의 선지자들이 다 죽임을 당합니다. 그런 후에 40절에, "엘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그들 중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 지라 엘리야가 그들을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 엘리야가 아합에게 이르되 올라가서 먹고 미시소서 큰 비 소리가 있나이다." 이 비 소리는 무슨 소리에요? 엘리야가 들은 소리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듣지 못하였지만,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듣게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우리 생각엔 아까 하나님께서 비를 내리시겠다고 하셨고 지금 비 소리가 들리고 있으니, 엘리야가 가면 될 텐데, 그때부터 엘리야는 양 다리 사이에 머리를 넣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 당시 여인들이 아이를 낳는 자세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서 종에게 산 너머로 지중해를 보라고 했습니다. 아무 일도 없다고 해서 다시 기도합니다. 몇 번이나 기도했죠? 7번입니다. 7이 완전 수 입니다. 그랬더니, 손바닥만한 구름이 떠올랐습니다. 그랬더니, 아합에게 내려가라고 하면서 자기가 뛰는데,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사 말보다 더 빨리 뜁니다. 그 손바닥만한 구름이 커져서 큰 비가 내리는데, 신약성경 야고보서 5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엘리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비를 내렸다고 되어 있습니다. 비를 보내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고 그 비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그때부터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그 비를 위해 중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중보기도를 들으시고 실제로 비를 보내십니다. 하나님의 때가 될 때 일을 이루실 때에 중보기도 자들을 세우시고 그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그들을 밤낮으로 부르짖게 하시고 그 기도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일을 하십니다. 만약에 비를 보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지만, 엘리야가 손바닥만한 구름이 떠오르기까지 기도하지 않았다면, 추측이지만 비가 왔을까요? 비가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기에 중보기도 자들의 자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 의지가 같이 갑니다. 비를 보내는 것이 누구의 뜻이었어요? 하나님의 뜻이었고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계획과 뜻을 엘리야에게 알리셨고 엘리야가 그 하나님의 뜻을 붙잡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나란히 같이 갑니다.
특별히 우리나라를 위해 기도할 때 두 번째 유업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새물결선교회 창립 일 때에 정규모임이 있었는데, 두 번째 날인가? 설교를 마치고 기도사역 중에 성령님께서 강하게 역사하시면서 저에게 "우리나라에 유업을 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한 세대에 가난에서 부로 이렇게 된 나라는 세계에 한국 밖에 없습니다. 60년대 초에 국민총생산이 지금의 케냐와 같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케냐"의 국민 총 생산이 15배 넘습니다. 뿐만 아니라 짧은 기독교 역사에 이렇게 많은 교회가 세워졌죠. 숫자적으로는 선교사 파송 숫자가 미국 다음으로 우리나라가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나라에 엄청난 표적과 기사 그리고 기도를 주셨는데, 탕자가 아버지 유산을 갖고 자기 목적을 위한 것으로 사용했듯 그렇게 다 탕진했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러면서 우리나라에 마치 요나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시듯 우리나라에 두 번째 유업을 주시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러면서 그 증표로 새물결선교회를 세우셨다고 하시더라고요. 새물결선교회는 지금 보이시는 것처럼 십자가의 복음과 신앙의 본질이 세워져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두 번째 유업에는 경제회복이 포함된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사업하는 사람들도 철저한 하나님의 주권아래 하되, 하나님의 기준에 서라고 하시면서 그럴 때 하나님의 유업에 동참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저희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보이시며. 우리는 그 두 번째 하나님의 유업을 위해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밤낮으로 중보기도 해야 첫 번째 유업 보다 두 번째 유업이 더 크게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 하나님의 무리들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그 유업이 주어지기 까지 엘리야가 머리를 양 무릎 사이에 넣고 기도했듯이 기도해야 합니다. 밤낮으로 하나님의 뜻을 위해 기도하는 무리들을 하나님께서는 찾으십니다.
여섯 번째(성령과 부흥)
- 이길수 목사-
집회 여섯 번째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시간 시간 함께 하시고 은혜로 함께 하시고 어느 때 보다 더 하나님께서 제 마음에 거룩한 갈망을 부어 주시는 것 같습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오늘날 영광으로 우리 가운데 임하시고 능력으로 우리가운데 간섭하시며 모든 한 분 한 분이 선명하게 하나님을 인식하고 하나님 앞에 삶이 조정되길 소원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제가 어제도 그제도 여러분 가운데 기도사역하면서 하나님을 선명하게 인식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을 인식하게 된다면 우리 삶의 놀라운 자유함과 회복과 승리를 경험하게 될 텐데 실제로 하나님의 관점에서 자신이 보여 지고 우리에게 일어난 놀라운 진리를 보게 되면 얼마나 놀라운 승리의 역사를 경험하게 될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나중에 기도사역 마치고 숙소에서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절박하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인식을 주의 이름으로 일컬으시는 주의 백성에게 임하셔서 하나님의 영광의 역사를 인식하길 기도하게 되더라고요. 참, 하나님께서 그런 은혜를 우리가운데 더 임하시길 소원합니다. 오늘 저는 성령과 부흥이라는 주제를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두 종류의 성령 충만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부흥" 이라는 책에서 이 분은 "성령이 부어 주신 성령 세례가 필요 없다고 말하므로 성령을 소멸하는 죄를 범하고 있고 그것이 바로 오늘날 부흥을 가로 막고 있는 주된 요인 중의 하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믿고 세례를 받았으니 교회에 성령을 부어 달라는 기도는 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비 체험적인 것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모두 주어졌기 때문에 우리에게 부어 달라고 말 할 필요가 없다. 어떤 사람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얘기한다." 라고 쓰셨습니다. 그리고 부흥이 일어나는 현상을 보면서, 대부분의 경우 현상이 나타납니다. 성령님의 강력한 임재와 능력이 있을 때 그러한 임재와 능력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이 현상을 경험하고 부흥을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히스테리라고 여겼다는 것이죠. 그래서 잘 배운 지식인들에게는 그런 현상이 나타나지 않고 잘 못 배운 사람들에게서 나타나기에 이것이 히스테리가 아니냐 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께서 이것을 반박하시면서 히스테리는 원래 남자에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여자에게만 나타나는 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는 남녀노소, 잘 배우건 못 배우건, 지성인이든 사람과 연령을 안 가리고 수준을 안 가리고 그러한 현상들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히스테리라고 몰아 붙여서는 올바르지 않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하나님의 부흥을 가로 막는다고 표현하면서 이러한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성령 충만에 대해서만 설교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령 충만은 에베소서 5장 18절에 나오는 "성령 충만을 받으라 술에 취하지 말고" 에 해당합니다. 속사람을 강건케 하는 능력 성령의 열매를 맺는 능력을 말합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을 강조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성령 충만을 강조하되 성령이 능력으로 임하는 것에는 자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는 부흥에 닫혀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부흥은 성령이 능력으로 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성령을 소멸하는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를 잘못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글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성령 충만"을 외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성령 충만은 내적인 성령 충만 즉, 성령님께 주도권을 드리고 9가지 열매를 맺는 속사람이 강건케 되는 삶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렇게만 설교하게 되면 성령님의 부어주심의 역사가 설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 부흥을 가로막는 역할을 하고 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 가운데 성령 또는 영성을 추구한다. 라고 하는데, 제가 신학 대학교를 다닐 때 "영성 신학회" 라는 곳에서 같이 일했는데, 그때는 성령님과의 동행과 같은 부분에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제가 목회에 나와서 보니 그런 것과는 좀 다르게 영성이라는 말이 "성령의 기름 부으심"만을 강조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영성"이라는 말이 양쪽 극단적인 모습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한 쪽으로만 취하면 특별히 내적인 성령의 역사 에베소서 5장 18절에 나오는 성령님과의 동행의 역사만을 추구하게 되면 능력으로 나타나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의 역사는 설 자리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이런 모습으로 되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반면에 어떤 곳에서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에만 초점을 갖고 있어서 성령님과의 동행에 대해서는 오히려 관심을 갖지 못하게 되는 그런 왜곡된 관점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명백하게 두 종류의 성령 충만에 대해서 우리에게 가르치고 계시는 것을 우리가 이해해야 합니다. 특별히 성령의 기름 부으심에 대해서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다면 부흥에 대해서 우리가 올바른 기도를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올바른 관점에서 하나님의 부흥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1) 후속적인 성령의 역사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 믿을 때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한 논란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부분에 대한 더 알고 싶으시면, 여주봉 목사님이 쓰신 "성령 사역의 회복" 이라는 책을 사서 꼭 읽어 보십시오. 보수 복음주의에서 말하는 것은 예수님 믿을 때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고 말하고 있고, 저희도 그 견해를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후속적인 성령의 역사가 또 있다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과거에 우리가 성령을 받았다면 되지 무슨 또 후속적인 성령을 말하느냐 합니다. 성경은 명백하게 후속적인 성령 충만의 역사가 있다고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은 우리가 나름대로 우리의 논리를 갖고 접근하기보다 성경에서 무엇을 말씀하시느냐 라는 관점에서 이 부분을 접근해 갈 때에 하나하나가 실제가 되고 실제적인 능력 안에 살게 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절에서부터 5절을 보겠습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이 장면은 갈라디아 교회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이후에도 율법주의로 살아가고 있는 그들의 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거기 3절에 보면, "너희가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 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그들이 이미 성령을 받았으나 육체로 돌아가 버려 있는 그런 현실을 강력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보면 성령의 역사에 대해 두 가지로 나누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2절에서 보면,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 같이 어리석으냐" 라고 묻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성령을 선물로 받은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성령의 받은 것은" 헬라어로 단순 과거형 입니다. 과거 어느 시점에 우리가 받은 성령을 말합니다.
어느 시점은 바로 우리가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에 성령님을 받은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너희가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도 그렇고 로마서 8장에 보면, "생명의 성령의 법" 이라고 말하는데, 이 말은 곧 생명을 얻는 것이 성령의 법으로 말미암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계획을 세우시고, 그리고 성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생명이 우리 가운데 실제가 되는 데는 성령님께서 우리 가운데 비추셔서 무엇을? 우리가 죄인인 것과 죄인 된 우리에게 유일하게 예수 그리스도만이 처방이 되심을 성령님께서 이것을 비추셔서 우리가 이것을 적용하여 그런 삶을 살게 하십니다. 그래서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생명의 성령의 법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 믿을 때에 내주하시는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5절에 보면, 과거의 성령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후속적인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여기에서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라는 말이 있는데, 헬라어로 현재형 입니다. 이것은 지속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에게 있어 "해가 뜬다" 의 의미입니다. 지속적으로 우리가 성령 충만을 받는 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 충만을 지속적으로 계속해서 주신다는 것입니다. 신나지 않으십니까? 계속해서 우리에게 성령의 충만이 필요합니다. 그 다음에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 이것은 하나님의 일이 지속적으로 성령님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었을 때 우리에게 성령님을 주시고 하나님의 교회와 백성가운데 지속적으로 성령님을 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날 기도할 때 "성령님 오시옵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내가 이미 예수님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는데, 왜 또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하는 것일까?’ 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성령님은 우리 삶 가운데 지속적, 반복적으로 능력가운데 오셔서 우리를 이끄시는 성령을 말합니다. 우리가 성령님으로 충만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지속적으로 성령님께서 우리 가운데 임재 하시길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성령을 지속적으로 주셔서 그런 능력으로 주님의 일을, 주님의 사역을 감당하게 하는 그러한 일을 하시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것은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 받는 한 번으로 전부가 아닙니다. 지속적으로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곧 후속적인 성령의 역사가 우리 안에 있어야 함을 말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3절로부터 8절,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고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거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 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여기에서 "성령을 주신" 이라는 말은 헬라어 현재어로 우리에게 반복적 지속적인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는 이라는 의미입니다.
요한복음 16장 7절을 보면, "진리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니 그가 너희 속에 계심이니라" 라고 말합니다. 예수님 믿어서 성령님께서 계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지속적으로 성령님을 부어 주십니다. 어떤 분은 말이죠, ‘우리 안에 성령님이 계시는데 왜 또 우리에게 부어주시느냐’ 라고 하시는데, 그것이 참 신비한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처럼 우리가 정확히 이해할 순 없지만, 우리 안에 계속해서 성령님을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성령의 충만케 하심의 역사입니다. 특별히 여러분 오늘날 음란과 사술이 판을 치는 시대입니다. 메일을 확인하기 위해 컴퓨터를 켜면 음란과 사술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이런 시기에 주님과 교통하고 승리하면서 살려면 성령님께서 계속적으로 부어 주시는 역사 가운데 살지 않으면 사실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기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속적으로 성령님을 부어 주심으로 우리 가운데 거룩한 삶을 살도록 우리를 도우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안에 지속적으로 거룩한 삶을 살 그 능력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자원으로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제 밤에 살펴 본 베드로를 보면 스스로의 자원을 의지하다가 실패하고 넘어졌듯이 우리가 우리의 자원, 힘을 의지한 그 다음 순간 우리가 넘어집니다.
제가 전국 집회를 가서 제 삶에 우상이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나타내셨다고 지난번에 말씀 드렸잖아요. 제 안에 교회가 우상이었던 것을 보이셨을 때, 제가 절박하게 울며 회개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힘들었던 것은 무엇이었냐 하면, 제가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저를 용서해 주실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깨닫게 하신 것도 주님의 은혜이고, 저를 돌이키게 하신 것도 주님의 은혜였던 것을 제가 압니다. 그런데 그 다음 순간 힘들었던 것은 또 다시 그런 자리로 돌아갈 것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스스로 하나님과 교제 가운데 있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나도 모르는 그 자리로 가 있는 것을 보면서, ‘아~ 이거 어떡하냐’ 라는 생각이 들더라는 겁니다. 마음에 너무나도 절박하게 애통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있는데, 그때 하나님께서 또렷하게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네가 나를 의지해" 라고 말씀하실 때에 제가 무릎을 쳤습니다. 저를 하나님 앞에 떠나지 않게 보호하시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오직 주님께만 모든 열망과 소망을 두게 하실 그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순간 제 초점이 어디로 갔느냐? 제 자신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제 스스로 무언가를 해보려고. 사실 ‘섰다고 생각하면 넘어질까 두려워하라’ 라는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기대하고 신뢰하는 그 다음에 우리가 실패감에 빠집니다.
우리가 사람 앞에 칭찬 받고 인정받으면 사실, 제가 설교 잘하고 내려오면 사람들이 은혜 받았다고 말하면 제 마음에 벌써 색깔이 달라집니다. 교만의 색깔로 싹 바뀝니다. 그런 다음에 제가 그것을 즐기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확 넘어집니다. 내 속에 나를 의지하면 바로 넘어갑니다. 그것이 우리의 체질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거룩한 삶? 잊어버리십시오. 주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능력으로 매일같이 부어 주시지 않으면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바로 넘어집니다. 그래서 계속적으로 부으시는 주님의 성령의 역사가 우리 안에 필요합니다. 주님께서 그것을 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우리 가운데 지속적으로 보내심으로 우리로 동행하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우리가 성령에 충만하여도 금방 성령님을 근심시키고 소멸케 하고 성령님을 코너에 가두어 놓습니다. 그런 그림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의 방에 의자가 있습니다. 그 곳에 누가 앉아 있나요? 우리는 대부분의 자리에 우리 자신이 앉아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앉아 계시는 것 같지만, 어느 순간 그분을 밀고 우리가 그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자기 힘과 자기능력으로 하다가 넘어져서 실패감과 죄책감 속에 며칠을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주님을 찾고 또 다시 주님을 밀어 놓고 우리가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우리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알고 계십니다. 어제 밤에도 봤지만, 베드로는 자기의 육신의 약함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넘어질 것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아시고 그래서 우리를 위해 오셨고 우리에게 은혜를 구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을 모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성령의 역사를 지속적으로 부어 주시기를 원하시는데 우리는 기대도, 사모함도 없습니다. 왜? 아직 살 만하거든요. 아직 괜찮은 사람이라는 얘기를 많이 듣거든요. 내가 잘 나가는 것 같거든요. 교회에서 인정받고 칭찬받거든요. 왜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지속적으로 부어 주시길 원하시는가 하면, 주님께서 우리가 성령님 없인 살 수 없음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3장 34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여기에서 "주심"이라는 단어는 현재형입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되셨고 삼위일체의 한 분이십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을 통해 세례 받으실 때에 성령을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이때에 성령을 받으심은 많은 사람들이 사역을 위한 성령을 받으셨다고 표현하는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께 지속적인 성령님의 부으심이 임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성령을 한량없이 곧 한계가 없이 쏟아 부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께서 성령을 지속적으로 부으시는 경험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설교하시는 것도 성령님의 부어주심으로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외의 다른 구절을 보더라도, 에베소서 3장 16절부터 17절도 그렇고, 에베소서 1장 17절도 그렇습니다. 이렇게 지속적으로 성령의 부어 주심을 "성령 충만"이라고 표현합니다. 후속적인 성령의 역사, 이것을 성령 충만이라고 합니다. 이런 지속적으로 성령을 부어주시는 성령 충만에도 두 종류가 있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께서는 이 두 종류의 성령 충만 중에서 한 가지를 무시하게 될 때에 하나님의 부흥이 임하는 것을 즉, 성령을 소멸하는 죄를 범한다고 표현하면서, 그 분이 말하는 성령의 충만에 한 부분을 성령의 부어주심 "성령 세례"라 표현합니다. 능력으로 임하시는 성령 충만입니다. 그리고 나머지를 성령 충만이라고 하십니다. 로이드 존스목사님의 말씀은 오늘날 우리가 동행하시며 내주하시며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만을 강조하기 때문에 우리가 부흥을 가져오는 성령의 역사를 막는 상황 가운데 있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2) 내적인 성령 충만
성령의 온전한 통치 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 20절 말씀 보겠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여기에 보면 내적인 성령의 충만에 대해서 우리에게 잘 가르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25절에 보면,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사는 것을 말합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에 그렇게 말하잖아요.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이것은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하나는 "술 취한 상태"를 말합니다. 술은 흥분제가 있고 각성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양리학적으로 술은 억제제라고 합니다. 술은 고등 중추기관을 억제 시킨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성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능이 나옵니다. 술이 사람을 지배하게 됩니다. 이런 상태처럼 성령 충만의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성령님으로 충만하면 이것은 각성제입니다. 우리 고등 중추기관을 각성시키고 영적으로 민감해집니다. 그래서 술에 취하면 방탕하게 되어 있는 반면, 성령에 취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게 돼 있습니다. 내적으로 임하는 성령 충만이 될 때에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이 성령 충만의 모습은 형용사 형태요 명령어, 수동태, 현재어 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부어주셔야 하는 것이고 우리도 받으려고 해야 하는 것이고 계속적으로 받아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할 일이 있음을 말하는 구절입니다.
에베소서5장 19절 이하를 보면 성령 충만이 되면 어떤 형태가 나오느냐 크게 세 가지로 나옵니다. 1) 참된 예배 자가 됩니다. 19절,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성령에 충만하면 왠지 마음이 기쁘고 찬송이 나오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기쁨이 됩니다. 2) 20절,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여러분 이 삶을 누가 살 수 있어요? 믿음의 사람들이 살 수 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감사하게 됩니다. 어떻게 이렇게 됩니까? 초점이 환경이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선명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나를 사랑하신 그 좋으신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에 범사에 그리고 항상 감사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겁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께 반응하는 사람입니다.
어제 제가 나눴잖아요. 파도에 빠지는 사람, 파도에 하도 많이 빠져서 도망가는 육신의 사람, 그리고 마지막으로 파도를 타는 사람입니다. 3) 세 번째 특징이 있어요. 인간관계가 바뀝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성경에 남편과 아내의 관계, 부모와 자녀의 관계, 종과 상전과의 관계. 그런데 이 모든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기준을 갖고 보게 되는 것입니다. 내적으로 성령 충만하면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놀라운 승리를 누리게 됩니다. 이 부분이 아주 중요합니다. 로마서 5장 1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넘치게 부어주셔서 의의 선물을 받게 하셔서 은혜의 왕 노릇 하게 하신다." 라고 합니다. 은혜의 왕 노릇하는 삶이 무엇이냐? 은혜가 충만한 삶 곧 자기 자원으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은혜로 사는 사람은 벌써 내면의 갈등이 해결된 사람입니다. 은혜로 사는 사람은 내면의 갈등 때문에 매일 쳐 박혀 살거나 낙심하거나 좌절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은혜가 이미 내 안에서 일하셔서 처리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을 보면 내면의 갈등 때문에 다른 일을 못 합니다. 왜? 갈등하느라 이미 탈진했습니다. 에너지를 다 빼앗겼습니다. 본인 생존하기도 어렵습니다. 왜요? 안에서 싸우느라고. 죄책감과 쓴 뿌리, 사람들의 이목에 신경 쓰느라 하나님을 섬기지 못합니다. 왜냐면? 내 코가 석자입니다. 여러분 내면의 상처나 갈등이 해결되지 못한다면, 여러분 왜 그렇습니까? 은혜의 왕 노릇 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쓴 뿌리의 상처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대하기 때문에 상처를 주고 변화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앞부분을 보면, 초대 교회에서 가까운데 사람을 전도했다는 얘기는 전혀 없습니다. 멀리 선교는 했는데. 그런데도 숫자가 막 늘었습니다. 성령에 충만하였기에 삶이 막 변했습니다. 한 사람이 변하면, 그 주변 사람의 관계가 회복되게 돼 있습니다.
내적인 성령 충만이 있는 사람 사실, 이 시대에 너무 필요합니다. 이 말은 이 사람이 항상 성령님의 통치와 지배 가운데 사는 사람으로서 성숙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6장 3절에 보면, 일곱 집사를 택할 때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일곱 집사를 택할 때에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을 택했습니다. 지속적으로 부어 주시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성숙한 삶을 살고, 빚어지는 삶을 살고, 성령의 열매가 맺어지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성령 충만이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이라 하면, 성령의 충만을 받아 육신을 쫓지 않는 삶을 많이 말합니다. 이 삶이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쫓을 때에 인격이 변화되고 삶에 있어서 막대한 영향력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다른 종류의 성령 충만함을 우리가 놓쳐 버리면 부흥을 막게 되는 일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3) 능력으로 임하시는 성령입니다.
이 두 번째 성령 충만을 무시하면서 교회가 부흥의 역사를 가로막는 것 곧 성령의 소멸의 죄를 범하고 있다. 라고 로이드 존스 목사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능력으로 임하시는 성령 충만은 주로 사도행전에 나오며 문법적으로 동사에 해당합니다. 그러니까, 행동에 관련된 것입니다. 그리고 단순 과거형, 일회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이때에 나타나는 성령 충만은 능력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능력으로 나타나는 성령 충만이라고 합니다. 이 성령 충만이 나타나면 어떤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 직분을 감당 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2장 28절에,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여기에서 나오는 성령이 능력으로 임하는 성령 충만을 말하고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에 사도행전 11장에 보면, "주의 손이 함께 했더라" 이 말은 무슨 말이냐? 이 말은 하나님의 성령이 강력하게 함께 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바울의 표현이고, 바나바는 이것을 주의 은혜로 표현합니다. 주님의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역사가 값없이 주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능력은 언제 임하는가?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직분이나 직위를 하나님께서 맡기시고 그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성령의 능력으로 무장시켜 주십니다. 그래서 디모데가 말하기를 "너희가 장로회에서 받은 그 안수를 기억하라 은사가 너희에게 불 같이 이르기를 구하노라" 라고 했죠. 누가복음 1장 15절을 보실래요,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여기 누구를 가리켜 하는 말이냐? 세례 요한을 말합니다. 세례 요한이 배 속에서부터 성령에 충만했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이것은 배 속에서부터 성령님께서 충만하게 임재 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세례 요한의 사역 곧 그 직분을 감당하기 위한 기름 부으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역을 감당케 하시려고 성령을 부어주십니다. 사도행전 9장 17절에 보면, 바울이 아나니아에 의하여 안수 받고 그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며 세례 받을 때에 성령이 그 안에 충만하게 임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이방인의 사도로서 사역을 하기 위해 성령이 부어졌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비전을 주시고 그 비전을 이루도록 우리를 다루시는데, 어떤 이들에게는 성령을 미리 주시고 비전을 이루도록 다루시고, 또 어떤 이들에게는 다루신 이후에 성령을 부어 주십니다.
사무엘상 16장 다윗이 사무엘 선지자를 통하여 기름 부으심을 받고 그가 성령에 충만하게 됩니다. 16장 하반부에 보면, 사울에게 악신이 들렸을 때에 다윗이 수금을 탔더니 악신이 물러갔습니다. 17장에 보면, 골리앗을 때려잡는 일이 다윗을 통하여 일어납니다. 너무나 강력한 성령의 부으심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다윗을 광야로 인도하십니다. 바울도 같습니다. 바울이 사도행전 9장에 성령으로 충만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아라비아 광야로 인도하시고 10년이 지난 후에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사용하셨습니다. 이처럼 직분이나 사역이나 직위를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령으로 무장시켜 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긴급한 필요를 채우거나 영적으로 긴급한 일을 해결하기 위해 성령을 부어주십니다. 사도행전 13장 8절부터 12절, "이 박수 엘루마는 (이 이름을 번역하면 박수라)저희를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 바울이 그를 주목하고 가로되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이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소경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두움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 여기에서 바울에게 나타난 성령은 단순 과거형으로 그 때를 위해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부어 주신 것입니다. 바울에게 능력으로 나타나는 성령 충만이 경험되었을 때 두 가지 은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는 능력 행함의 은사가 나타납니다. 또 하나는 믿음의 은사가 나타납니다.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소경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두움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 이것이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목적하시고 의도하신 그 복음을 전하는 일에 바울이 통로로 쓰여 질 때에 그 역사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이처럼 우리에게 사역하면서 능력이 나타나지 않으면 사역을 감당하기 쉽지가 않습니다. 전도하면서 이런 경험을 한 번 즈음 생각해 보셨나요? ‘이런 일이 내게 나타나면 좋을 텐데’ 기대감을 갖고 있지 않나요? 그런데 어떨 때 하나님께서 절대하지 않으십니다. 사실, 어떤 때에 성령의 능력과 권능이 임하여서 그 사람의 환경과 상태를 나타내면, 순간적으로 달라집니다. 저희 교회의 성도님 중에 한 분은 우상을 참 많이 숭배했습니다. 점 보러 다니는 것을 취미로 여겼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분이 몸이 좋지 않아서 수술 받고 병원에 있는 중에 어떤 목사님께로부터 전도를 받았습니다. 이 분이 광주에 사셔서 목사님께서 전도하시면서 광주에 있는 "예향 교회"를 다니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도 이 목사님이 누구신 줄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 분이 "예향교회" 처음 오시면서 하나님께서 그 분의 상태를 고대로 드러내시니까 어디 가서 보는 점쟁이 보다 더 용하더랍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오게 됐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다른 생각만 싹 품으면 공격이 다가옵니다. 그런데, 이 부분을 기도하는 중에 나누고 회개시키면 이 부분이 치유됩니다. 하나님의 만져주심을 경험합니다. 본인이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해 가면서 대부분의 사람이 이렇게 전환합니다. 사실, 이런 성령의 능력이 나타남은 어떨 때에 가능합니까? 우리 가운데 능력 행하시는 성령의 충만함이 올 때에만 가능합니다. 이 부분은 사도행전 4장 8절에도 나옵니다,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 앉아있는 앉은뱅이를 성령의 능력으로 고칩니다. 사람들이 주목하고. 그때에 복음을 전했더니 그곳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옵니다. 이것 때문에 어떻게 됩니까? 대제사장과 대제사장의 문중에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베드로를 잡아 갑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살기 등등 합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했던 법정인데. 그 법정에 서서 베드로가 담대히 증거했다고 합니다, 왜냐? 바로 그 순간에 성령이 기름 부으셨습니다. 이것이 능력으로 임하는 성령의 충만입니다.
우리 가운데 능력으로 임하시는 성령 충만이 나타날 때에 우리 삶에 놀라운 일이 나타납니다. 이것을 구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부흥을 가로막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능력으로 임하는 성령 충만에 우리가 적극적으로 갈망하는 자리에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오늘날 교회 가운데 이 부분을 소홀히 하는 한 부분은 은사의 남용 때문에 그렇습니다. 은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안 되어 있어서 은사가 나타나면 대개 교만해지거나, 권위 아래 순복 하지 않거나 합니다. 왜냐? 은사가 나타나면, 영적으로 성숙했다고 생각합니다. 근데,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 고요. 여러분 지금 은사 없다가, 성령님께서 강력하게 여러분에게 임하셔서 여러분을 만지시면 나갈 때에는 은사가 부어져서 나갈 수 있습니다. 은사를 사모하십니까? 예 축복합니다. 은사는 엄청난 섬김이 필요합니다. 고린도후서 12장과 13장 사이에 무엇이 있습니까? "사랑" 이죠. 저는 그 부분을 보면, 은사가 무엇이냐?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세우기 위한 너무나도 중요한 부분임을 볼 수 있겠더라고요. 거기 보면, 우리가 은사를 갖고 사랑으로 섬기되 오래 참고 온유하고 성내지 아니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이런 것이 다 무엇입니까? 섬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나에게 돌아오는 대가가 있겠지 사람들이 나를 보겠지’ 라고 생각하면 처음부터 그만 두어야 합니다. 시험 들기 딱 좋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주님의 일을 하다가 세상 속에서 대가를 바라면 반드시 시험 당합니다. 우리의 상급은 세상에 있지 않습니다. 세상에서의 우리의 상급은 주님과의 동행입니다. 이 주님과 동행하는 개인적인 친밀한 교제가 우리의 상급입니다. 그래서 참 중요한 것이 우리가 성령님의 완전하신 통치하에 들어가는 성령 충만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의 필수입니다.
우리가 성령님과 동행해야 우리 삶에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성령님과 동행하면 육체의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맺습니다. 인격이 변화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능력으로 임하는 성령을 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성령을 소멸하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 성경은 성령님에 대해서 두 가지를 말하는데, 에베소서 4장 30절에,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또 하나는 데살로니가전서5장 19절에 보면, "성령을 소멸치 말며" 라고 표현합니다. 이 두 가지 의미는 다릅니다. 먼저, 성령을 근심케 하지 말라는 것은 성령께 민감하여 늘 성령에 충만한 삶을 살게 되어 성령님께서 싫어하는 일을 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성령님을 근심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죄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를 지었다면, 얼른 회개해야 합니다. 얼른 돌이켜야 합니다. 성령님 무시하면 안 됩니다. 성령의 인도를 구해야 합니다. 그 다음으로,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 라는 말은 ‘성령의 불을 끄지 말라’ 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능력으로 임하시는 성령 충만과 관련이 있습니다. ‘성령의 불을 끄지 말라’ 라는 말은 성령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역사하시는 그런 일들 가운데 우리가 그것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따라가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우리 가운데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능력으로 임하는 성령 충만에 대해 우리가 사모하고 열망해야 될 것을 믿습니다.
2. 부흥과 성령 충만
1) 부흥은 능력으로 임하시는 성령 충만 입니다.
성령 사역이나 하나님의 부흥은 능력으로 임하시는 성령 충만과 관련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부흥은 능력으로 임하시는 성령 충만이 대규모로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로이드 존슨 목사님의 부흥이라는 책을 제가 읽어 보면, "부흥의 진수는 성령님께서 함께 모인 사람들 위에 임하신다는 사실 입니다. 교회 전체에 또는 어느 지역이나 어떤 나라의 한 부류에게 임하신다는 것입니다. 부흥이란 성령의 임하심 또는 흔히 사용되는 다른 단어를 빌어서 말한다면, 성령의 부어주심 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그들 가운데 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임하사 그들 가운데 계십니다. 세례(능력으로 임하는 성령 충만), 부어주심, 찾아오심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께서는 부흥을 준비함에 있어 능력 행하는 성령 충만에 대해서 교회가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사모하고 배울 필요가 있고 열망하는 자세를 갖고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부흥은 오순절의 재림이라는 표현을 하는데. 헨리 블랙가비 목사님이 쓴 "하나님의 신선한 만남" 이라는 책에 그분이 이런 표현을 씁니다. "오순절이야 말로 부흥의 모델이다." 오순절 날 성령이 강력하게 임하셔서 교회만 회복시킬 뿐만 아니라 사회의 윤리적, 정치적, 사회적으로 변화시키는 놀라운 역사가 있습니다. 최근에 피지에 나타난 부흥에 관해 제가 비디오를 보았는데, 피지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 나타난 부흥에 대한 비디오를 보니까 감옥에 사람들이 없어지고, 사람들이 모여서 기도하는 것에 그렇게 열정을 갖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농사를 해도 예전보다 훨씬 큰 바나나, 당근 등을 수확할 수 있고, 바닷가에서도 예전 보다 훨씬 많이 잡을 수 있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부흥이 올 때에 이런 놀라운 역사들이 나타납니다. 지역과 나라 전체에 성령께서 강력하게 역사하셔서 세계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오순절이 부흥의 좋은 모델이다 라고 말하면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갖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오순절은 일회적인 구속사적인 사건인데, 다른 말로 말하면 예수님의 죽음, 부활, 승천, 성령님의 임재인데, 하나님의 부흥이 오순절처럼 온 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라고 생각합니다. 오순절은 구속사적인 사건입니다. 십자가를 통한 부활, 승천 곧, 이것은 반복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성령님이 교회 가운데 거하는 사건은 구속사적인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반복되지 않습니다. 부흥이 오순절의 반복이라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오순절 날 일어났던 그런 동일한 패턴의 일이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오순절 날 임한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파편이 떨어지듯 다시 임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볼까요? 거기 보면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님께서 강력하게 임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4장 8을 보니, 베드로가 성령의 충만을 받아 담대하게 말씀을 나눴습니다. 그리고 돌아 와서 무리들과 함께 기도합니다. 31절,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사도행전 2장에서 나타난 오순절의 사건과 동일한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다시 나타납니다. 부흥을 위해서 우리는 능력으로 나타나시는 성령의 역사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것이 성경적입니다. 보세요 사도행전 2장에서 나왔기 때문에 4장에서 안 해도 되느냐? 아닙니다. 또 있습니다. 능력으로 임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을 부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로 담대히 입을 열어 전하게 하시고,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고 표적과 이적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타나도록 그들이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놀라운 능력으로 성령님께서 임하시고 놀라운 회복의 역사가 나타났던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났던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사도행전 4장에 다시 나타나잖아요. 사도행전 13장 9절만 해도 바울에게 성령이 강력하게 임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9장 17절에 보면 아나니아가 바울에게 안수할 때에 성령께서 충만하게 그에게 임하셨거든요. 또 사도행전 10장에 보니, 고넬료의 집에 성령께서 동일하게 임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반복적으로 성령님께서 능력으로 임하셨습니다. 베드로가 고백하기를 우리에게 임했던 동일한 성령이 고넬료의 가정에 임하셨다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임하셨던 성령은 무엇을 두고 말한 것일까요? 오순절에 임하셨던 성령입니다. 이러한 성령의 강력한 기름 부으심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2) 부흥과 현상
부흥이 일어날 때마다 언제든지 부흥을 반대하는 무리들이 들고 나온 것이 바로 "현상"이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부흥이 임할 때마다 언제든지 여러 가지 현상들이 나타났습니다. 현상이 없었던 부흥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오히려 극소수에 불과한 예외적인 경우였습니다. 대부분의 부흥 때마다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 현상들 때문에 부흥에 사용되었던 사람들이 대부분 사람들에게 조롱을 받고 심지어 이단이라는 소리까지 들었습니다. 심지어 동역하던 사람들까지도 나뉘어지게 되었습니다. 요한 웨슬레 시대에 그러한 성령의 현상들이 나타나자, 정신과 의사가 조사해 보겠다고 왔답니다. 의자 뒤에 앉아서 딱 조사하려고 앉았는데, 그날 하나님의 성령께서 제일 먼저 넘어뜨린 사람이 그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가 나중에 신문에 기사를 쓰면서 한 말이 "이것은 성령님께서 하신 일이다." 라고 했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께서 쓰신 부흥이라는 책에 보면, "부흥의 현상이 일어난 모든 곳에서 예외 없이 반작용 곧 부흥의 현상에 대해 반대하는 무리들이 일어났습니다. 부흥의 전체 개념을 인정하려고 들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다는 아닙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기독교 내의 사람들에게서도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곧, 부흥이 일어나는 곳에서 현상이 일어났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반대했다는 것입니다. 아까 "술 취한 것은 방탕한 것이니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라는 말을 했습니다. 성령의 동행을 말하는 성령 충만에는 현상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것이 잘못 되었다고 말하지 않지만, 능력으로 나타나는 성령 충만에는 강력한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어떨 때에는 성령님께서 능력으로 우리 가운데 나타나실 때에 거룩한 임재를 나타내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끔찍하고 얼마나 추악한 죄인임을 보면서 많은 경우에 땅을 치고 눈물을 흘리며 회개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어떤 사람은 기절까지 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부흥" 이라는 책에 나옵니다. 때로는 사람들이 여러 날 동안 밥도 먹지 않으면서 끙끙대며 회개하면서 하나님께 애통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강력하게 나타날 때에 능력으로 임하는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강력하게 나타납니다. 사도행전 2장 1절만 봐도 성령님의 강력한 역사가 나타나니까, "불이 혀같이 갈라지는 역사" 가 나타났다고 하잖아요. 사람들이 그러니까 많이 모였어요. 마가의 다락방에 그들이 조용히 모여서 기도에 전무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무슨 문제가 일어났다라고 생각해서 구경 와서 "새 술에 취하였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이 단지 방언으로 말하였기에 "새 술에 취하였다." 라고 했을까요? 그들이 했던 방언은 애굽어였는데. 그렇다면 무언가 술 취한 행동을 했다는 것입니다. 옆에서 볼 때 뭔가 제 정신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요한 웨슬레의 일기를 보면, 1739년 1월 1일 그들이 하나님의 성령을 구하며 찬송하며 기도하는데, 어떤 사람은 땅 바닥에 엎드리고, 어떤 사람은 손을 발발 떨고, 어떤 사람은 일어나서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등의 다양한 형태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성령님의 역사가 나타나면 어떨 때는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쓰러지기도 하고 그럽니다. 왜냐, 육체가 감당할 수 없는 능력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그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겸손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그것을 분별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드가 쓴 "하나님의 부흥을 원하면 고정관념을 내려야 한다." 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이 현상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현상의 문제가 부흥 때마다 나타나서 조나단 에드워드도 이 현상 때문에 많은 공격을 받아서 그것에 대해 썼습니다. 현상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넘어지고 시험 드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이렇게 생각할는지도 모릅니다. ‘현상이 나타나면 성령님께서 오신 것이구나’ 아니요, 전혀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따라합니다. 현상이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임하시는 것이 중요하고요, 임하실 때에 그런 현상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물을 만지고 전기 줄을 만지면 가만히 있습니까? 죽잖아요. 온 몸을 비뚤면서. 사실, 성령께서 강력하게 임하는 것이 그렇게 나타납니다. 능력으로 임하시는 성령 충만을 사모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현상을 여러분 마음대로 생각하거나 판단하지 마십시오.
3) 부흥이 임하면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부흥이 임하시면, 첫 번째로 능력과 임재를 인식하게 됩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께서 쓰신 부흥이라는 책을 읽어 보겠습니다. "급하고 강한 소리 같은 것이라는 물리적인 현상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부흥이 일어날 때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나긴 합니다. 부흥의 이야기와 사례들의 기록을 통해서 그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들을 누가 기록하는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두 이러한 일을 증거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언제나 인식하는 것은 영광스런 하나님의 임재를 갑작스럽게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능력과 영광을 인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 일이 언제나 일어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흥이 오면 하나님의 임재를 깨닫게 되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3장 18절,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성령님께서 우리 가운데 임하실 때에 하나님의 영광을 본 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 사람들이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자 광채가 나서 수건으로 가렸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오늘날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 우리가 서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임재를 말합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부흥" 이라는 책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부흥은 무엇입니까? 부흥은 교회 역사에서 제가 지금까지 상기 시켜드렸던 일들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가장 큰 실제로 느껴지는 기간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것을 지금까지 믿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능력으로 느낍니까? 그것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벅찹니까? 그것들로 인해서 감동을 받습니까? 그것들을 자랑스럽게 여깁니까? 부흥은 이러한 것들이 성령을 통해서 분명하게 느껴져 온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을 언뜻 보는 안목으로 충만해진 때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모든 이들이 선명하게 인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관한 이론이 아니라, 실제이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전지하신 하나님, 영광 받으시기에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 홀로 왕이신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선명하게 인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부흥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으로 충만한 때입니다. "성령께서 오시면 그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성령의 특별한 사역입니다. 그러므로 부흥이 일어날 때마다 교회는 주님의 영광, 십자가에 대한 감사와 찬양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십자가의 영광, 보혈의 능력이 교회의 주제가 됩니다. 성령께서 비상한 능력으로 임하셔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특별한 안목을 주십니다. 그것을 보고 여러분께서는 갈망하십니까?" 부흥은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영광으로 나타나시는 역사입니다, 그 가장 강력한 특징은 하나님의 임재를 아는 것입니다. 부흥을 경험한 많은 사람들이 바로 그 부분을 얘기 하고 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드의 글을 제가 좀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부흥에 대해 경험한 이전과 이후에는 하나님에 대한 근본적인 지식이 변화됩니다. 이론이었다면 실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인식하게 될 때에 상대적으로 죄인인 우리 자신도 같이 보게 됩니다.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부흥의 때마다 나타나는 공통적인 특징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하면서 엎어지기 시작합니다. ‘내가 어찌하면 구원을 받을까’ 하면서 사람들이 뒹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부흥이 임하면 십자가의 복음이 그 보혈이 높이 찬양되고 높이 들려집니다. 왜요? 지금까지 자기가 살아 왔던 종교적인 헌신과 신앙적인 자기 열심이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자기를 보니까 아무것도 아님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능력 외에는 자기를 구원할 다른 방법이 없는 사람들의 애통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제가 17차 집회인가요? 목회자컨퍼런스를 마치고 평신도 컨퍼런스를 준비하는 그 중간에요 아침에 제 느낌으로는 하나님의 임재 때문에 아침에 눈을 뜬 것 같았습니다. 제가 아침에 침대에서 이렇게 일어났다가 바로 앞으로 엎드렸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선명하게 인식되니까, 그 앞에 있는 제 모습을 보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 주님 저를 긍휼히 여겨 주십시오. 아버지 제게 은혜를 거두지 마시옵소서." 이 두 마디 외에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제 자신이 노출되니까, 너무 두렵고 떨리더라는 겁니다. 그리고 나서 좀 정신이 차려져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이런 나를 위해 주님의 은혜 베풀어 주신 것에 감사합니다. 정말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 앞에 우리가 나가면, 분명하게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얼마나 죄인이지 깨닫게 됩니다.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 분의 전지하심과 전능하심을 깨닫게 됩니다. 사실,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이 우리 삶의 관건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노출되면 담대함이 있게 됩니다. 즉, 신앙에 확신이 생기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확신을 보십시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마가 다락방에 성령님께서 임하실 때에 그가 요엘서를 갖고 얼마나 확신하는 가운데 말씀을 선포합니까? 사도행전 3장 13절부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저를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안 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부인하였으니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또한 4장 5절부터 보면, "이튿날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예하여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만일 명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많나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섰는 것을 보고 힐난할 말이 없는지라" 라고 담대하게 얘기 합니다. 곧,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기를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저희를 위협함에 베드로가 더 담대하게 이르기를,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 할 수 없다 하니"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님의 영광을 봤습니다.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 때문에 그들이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부흥의 시기에 성도들이 확신에 넘치는 간증이 그들의 삶 가운데 있습니다. 제가 지금 이 부분을 나누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자는 말씀입니다.
또 다른 결과가 있었습니다. 큰 기쁨과 찬양이 있었고 하나님에 대한 예배와 감사의 요소가 넘쳤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 42절부터 47절에 보면 그렇고요, "부흥" 이라는 책 302p 부흥에 관련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부흥을 보내실 때에는 사람들에게 예배하자 감사하자 말씀을 숙고하자고 권면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열심으로 그러한 일을 행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밤마다 와서 여러 시간을 머물고 심지어는 이른 아침에 그렇게 있을 수 있습니다. 처음에 그 일이 일어났을 때와 똑같이 몇 개월 동안 밤마다 그런 일을 계속 할 것입니다. 그들은 날마다 모였습니다. 그들은 서로 떨어져 있을 수 없었습니다. 물론, 기이한 일이 일어났고, 하나님을 기뻐하게 되었으며, 함께 기뻐하고 함께 기도하길 원했으며,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며 확산시키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구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런 말을 합니다. 부흥이 오기 전에는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모이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지만, 부흥이 온 후에는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가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된다고 합니다. 어제도 제가 들으니까, 8시부터 줄 서셨다고요? 자리 잡으시려고. 마지막 한 가지만 더 말씀 드리면, 사람들이 교회에 대거 모이기 시작합니다. 교회가 홍보할 필요가 없는 거죠. 사람들이 교회에 오게 될 때 성령께서 그들에게 역사하셔서 스스로를 바라보고 돌이키게 되는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게 된 다는 것입니다. 부흥이 일어나고 성령님께서 임하실 때에 전체적인 도덕적인 상태가 달라집니다. 주님의 부흥을 갈망합시다.
일곱 번째(부흥과 거룩함)
- 여주봉 목사-
부흥과 거룩함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부흥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가 거룩함입니다. 이사야 하반부에 있는 회복과 부흥의 요소들을 말하면서 이사야 52장 7절부터 보면,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들을지어다 너의 파수꾼들의 소리로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일제히 노래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온을 돌아오실 때에 그들의 눈이 마주 봄이로다."하나님의 회복의 역사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회복시키실 때에 파수꾼들이 제일 먼저 보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것이 중보기도 자들의 상급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그 아래 보시면, 11절 "너희는 떠날지어다 떠날지어다 거기서 나오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지어다 그 가운데서 나올지어다 여호와의 기구를 메는 자여 스스로 정결케 할지어다."부흥의 길을 예비하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떠날지어다, 스스로 정결케 할지어다." 라고 말하면서 부흥과 거룩함이 떨어질 수 없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32장과 34장 사이에서도 부흥에 대한 핵심적인 요소들이 나와 있다고 했는데, 거기를 보더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금송아지를 자기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신이라고 섬길 때에 모세가 산에서 내려와서 그들에게 말하기를 "여호와 편에 선 자들은 다 나아오라" 이렇게 말합니다. 철저히 구별되어 여호와 편에 선 자들이 서게 되는 구별의 문제입니다.
오늘 저녁에는 부흥과 거룩함에 대해 살펴보기 원합니다. 구별된 삶 거룩한 삶은 하나님의 부흥을 맞이함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히브리서 12장 14절에 보면,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또 26절에서 29절을 보면, "그 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가라사대 내가 또 한 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 이 또 한 번이라 하심은 진동치 아니하는 것을 영존케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든 것들의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오늘날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동행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서만 보더라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을 경외함을 부어주시겠다고 합니다. 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야 회복의 역사를 맞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 중에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라는 말씀은 심판 요소가 담겨 있습니다.
구약적인 배경을 보면. 특별히 말세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부흥을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시는데 모두에게 하나님을 경외함 가운데 하나님께 감사하며 경배하며 예배할 뿐만 아니라, 구별된 가운데 사는 것이 필수적이다. 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구약적인 예가 레위기 10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 지라"사람들은 구약의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이런 일이 가능하지만, 오늘날은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 신약시대는 은혜의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께서는 같은 동일한 하나님이십니다. 구약에서도 은혜와 심판의 하나님, 사랑과 공의 하나님이셨고 신약에서 그러합니다. 그렇다면 이 구절을 이해하려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 배경이 레위기 9장에 있습니다. 23절,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백성에게 축복하매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며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 지르며 엎드렸더라." 그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 가운데 머물러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부흥은 하나님의 영광이 머무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부흥이 임하는 것과 관련해서 우리 가운데 중요한 것은 거룩함입니다. 이처럼 신약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는데,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일입니다. 사도행전 5장에 보면, 그들은 자기 재산을 팔아서 하나님께 헌신했는데, 일부를 드리면서 그것이 자기들에게 있는 전부라고 말함으로 그들이 죽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 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다면 우리 중에 살 자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보다 죄가 적어서 살아 있나요? 그렇다면 이 사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 사건의 앞장에 그 배경이 임합니다. 사도행전 2장에 하나님의 성령이 강력하게 나타났고 4장에도 또 다시 성령이 강력하게 나타나십니다. 사람들이 서로 함께 하며 기도하고 자기의 재산을 다 팔아서 교회에 드려 교회기 그것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핍절하는 일이 없도록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4장 마지막 부분에 요셉이라는 사람이 자기의 것을 팔아서 많은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던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요셉이라는 사람의 이름이 이곳에 기록될 정도라면 그것이 대단히 많은 사람에게 알려진 중요한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배경으로 이 사건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요셉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알려져서 칭송 받기를 원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요셉처럼 순수한 동기에서 한 것이 아니고,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한 것이었기에 전체를 드리지 않고 일부를 드리면서 하나님께 전부를 드린다. 라고 거짓을 말했습니다. 그들이 안 드려서도 문제가 없었고 일부만 드렸다 하더라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사람들 앞에서 추앙 받고자 그런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런 죄로 죽은 이 사건을 볼 때에 우리 중에 과연 살아남아 있을 사람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시기에는 말씀 드린 대로 하나님의 영광이 교회 가운데 계신 시기였습니다. 하나님의 부흥이 거기에 임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짐에 있어서 시기와 질투 등의 잘못된 것으로 헌신하는 이런 죄를 가로 막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일찍 데려가신 것이죠. 이처럼 신약이건 구약이건 하나님의 부흥이 임하실 때에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구별된 삶, 거룩한 삶인 것입니다. 거룩한 삶을 대해서 세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1. 우리의 영적인 눈을 가리는 우리의 모든 것들로부터의 구별입니다.
부흥에 관련해서 거룩이 우리에게 필수적인 요소는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주님의 오심에 관련해서 마태복음 24장, 마가복은 13장, 누가복음 21장이 말세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그 외에 많은 베드로와 바울 요한의 서신서 뿐만 아니라 요한계시록이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말하시면서 반복적으로 강조하시는 것이 "준비하라, 깨어 있어라" 입니다. 거룩함이 중요한 이유는 영적으로 깨어있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행하실 때에 분별할 수 있고 동역하고 동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놀라운 부흥을 일 하셨는데 영적으로 깨어 있지 않다면 하나님의 일에 동참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일에 대적하게 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셨잖아요, 다른 분도 아닌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누구보다 성경을 잘 알고, 전통적인 규례를 잘 알고, 신앙의 역사들을 잘 알았지만, 그들은 누구보다 철저하게 눈이 멀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소경 된 인도자"."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구덩이에 빠진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통로를 통해 알리시는데 그 주된 통로가 무엇이냐? 한 가지 통로는 성경이고요, 또 다른 통로는 하나님의 선지자입니다. 예레미야 시대만 하더라도 6장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6절,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고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 내가 또 너희 위에 파수꾼을 세웠으니 나팔 소리를 들으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듣지 않겠노라 하였도다 내가 또 너희 위에 파수꾼을 세웠으니 나팔 소리를 들으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듣지 않겠노라 하였도다" 여기에서 말하는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 당시 그들에게 이미 주신 성경 말씀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행동의 소리를 들으십니다. 왜 원방과 시바에서까지 향품을 가져와서 예배했던 자들이 왜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행치 않겠노라" 했겠습니까? 이 얘기는 이들이 말로 그랬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이 하나님을 청종치 않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들의 눈이 가려져서 영적인 분별력을 상실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호세아서를 읽을 때에 그것이 자기들의 이야기인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왜? 영적 분별력이 가려졌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성경을 연구하고 공부하는 것을 예수님께서도 인정하셨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성경이 나에 대해 말씀한 것이라" 바리새인들이 그 많은 공부를 하였음에도 성경에서 말씀하고 계신 예수님에 대해 깨닫지 못한 것은 그들의 눈이 가려져 영적 분별력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래서 한 통로를 더 열어 두셨습니다. 곧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성경을 다시 보면, "내가 또 너희 위에 파수꾼을 세웠으니 나팔 소리를 들으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듣지 않겠노라 하였도다 내가 또 너희 위에 파수꾼을 세웠으니 나팔 소리를 들으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듣지 않겠노라 하였도다" 아니 그렇게 사모하는 자들이 선지자가 말할 때에 안 듣겠다고 했겠냐고요? 아니죠. 그들의 삶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은 제사장, 선지자, 율법사의 말은 잘 들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보면 그들은 "거짓 선지자들이라, 평화의 선지자들이라, 사람이 좋아하는 소리만 전한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시대에 하나님께서 누굴 통해서 말씀하셨나요?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예레미야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 땅에 선지자 없는 시대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보내고 또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저들의 눈이 가리워져서 하나님의 선지자를 볼 수 도 그리고 그 이야기를 이해할 수 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대강 읽으니까, 우리는 저들과 다른 것 같았죠 예레미야서를 보십시오. 안식일에 그 거대한 예배를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의 이름을 두시겠다고 말씀하신 예루살렘에서 그 성전에서 예배드리고 나온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서 하시는 말씀이,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소리를 듣지 말라 너희는 무익한 거짓말을 의뢰하는 도다." 라고 말씀하시는데, 그 당시 유다 백성들이 그것을 어떻게 들었겠습니까? 눈이 가려져 있는데요, 그래서 똑같이 그들에게 "너희는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것처럼. 그들은 못 들었기 때문에 안 돌이킨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동의 소리를 들으시기 때문에 어떻게 말씀하시냐면, "내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날까지 선지자들을 보내고 보내고 보내었으되 너희는 내 목소리를 청종치도 않고 귀도 기울이지도 아니하였으며 내가 내 종 선지자들을 너희에게 보내 새벽부터 너희에게 일렀으되 너희는 우리는 듣지 않겠노라 말하는도다" 이 말의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바리새인들이 똑 같았어요.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 말씀하고 계셨고 또 하나님의 아들이 왔는데, 설령 저들이 예수님께서 그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가운데 있었더라면 그 예수님의 행하시는 일을 보고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일이 하나님의 일임을 그들이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눈이 가려져 있었기 때문에 알 수 없었죠. 그 당시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하는 세례 요한이 있었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나의 행한 것을 보면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임을 알 것이다 말하셨죠. 그러나 그들의 눈이 가려져 볼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초림이건 재림이건 하나님의 부흥이 오건 아니건 중요한 것은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눈이 가려져 있다면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더라도 성경이나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전혀 보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리에 서게 됩니다. 마태복음 11장부터 보면, 집중적으로 예수님과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충돌하는 것이 나와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이 지금 땅에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옛날 시골에도 왕이 그 마을을 방문하면 누가 오라고 했나요? 그냥 갔습니다. "임금님 행차시다 나와서 맞으라" 그랬는데, 그 임금을 맞이하지 않으면 어떻겠습니까? 임금님께서 행차하신다는 소리를 듣고 바로 나와서 그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되는 것이 당연한데. 하물며 이 땅의 왕이요 우주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오셨는데.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반응이 없는 것, 돌이키지 않은 것, 사모함이 없는 것이 죄입니다. 왜냐? 오신 분께서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2장 40절,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또한 예수님께서 11장 15절에 말씀하시길,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20절,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회개하지 않은 자 반응하지 않은 자 심지어 사모하지 않은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책임을 물으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왜 그들이 반응하지 않았나요? 눈이 가려져 있어서 그럽니다. 누구보다 하나님에 대해서 열정적이라고 자부하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거기에 오신 줄 알았더라면 그렇게 행동했겠습니까? 절대로 그러하지 않았죠. 그런데 그들이 눈이 가리워져서 볼 수가 없기에 깨닫지 못해서 예수님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구약시대 선지자 시대에 그랬고 예수님 시대에도 그랬고 오늘날도 그럽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 때도 그렇고 부흥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에 항상 빼 놓지 않고 말씀하시는 것이 "준비하고 깨어 있으라"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거룩한 삶이 부흥과 관련해서 첫 번째인 것입니다. 레위기 10장을 잠깐만 보세요,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을 가지고 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다가 죽었잖아요. 아론의 입장에서 이것은 굉장히 두려운 것입니다. 아들이 골골하다가 죽게 되어도 가슴이 아픈 일인데, 멀쩡하던 자녀가 갑자기 죽으면 부모로서 마음의 준비도 안 되었을 터인데,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습니까? 그리고 두 아들이 한 번에 목숨을 잃었는데 얼마나 충격이 컸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머리를 풀고 자녀를 위해서 애도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장례식도 못 지내게 하셨고, 지낼지 몰라도 너는 못 들어간다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런 충격을 당하면 좀 쉬고 쉽잖아요. 그런데 쉬는 것뿐만 아니라 제사장의 직무를 충실하게 행하지 않으면 그 자신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정말 두려운 일이잖아요.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왜 두 사람을 치셨는지 설명하십니다.
레위기 10장 3절에,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이르시기를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 내가 거룩하다 함을 얻겠고 온 백성 앞에 내가 영광을 얻으리라 하셨느니라. 아론이 잠잠하니" 또 9절에 하나님께서 아론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나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아서 너희 사망을 면하라 이는 너희 대대로 영영 한 규례라" 이것만 보더라도 우리의 영적인 눈을 가리는 모든 것에서부터의 구별이 필수적인 것이죠. 고린도후서 7장 1절,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게 하자"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약속을 가졌나요? 고린도후서 6장 후반부에 이렇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구약에서부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성전 삼고 그 곳에 계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사 승천하신 다음에 성령으로 우리에게 부어 주셔서 신약 성경에 의하면 각 개개인 안에 하나님께서 성전 삼고 거하시면서 우리 가운데 친밀한 교제를 이룰 뿐만 아니라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는 주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 속에 두루 행하심으로 하나님의 일이 우리 삶에 이루어지는 그 일을 하나님께서 하시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우리가 이 약속을 가진 자로 예수님께서 이미 오셨는데도 불구하고 이것이 아직도 약속으로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는 그의 전이 되었어요. 그 기틀이 마련된 것이지요. 그런데 친히 그분께서 거하시고 두루 행하시는 약속이 온전히 성취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장에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산돌로서 하나님께서 거하실 성전이 되어간다고 하잖아요. 이 약속을 가졌기 때문에 우리의 영과 육을 오염시키는 모든 것들로부터 자신을 정결케 하라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거룩함이 우리의 열망이 되어야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이러한 계획과 의도와 목적을 위해 우리의 영과 혼과 육을 오염시키는 모든 것들로부터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우리가 우리를 구별하며 살 수 있을까요? 히브리서 12장,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여기에 보면, 우리의 신앙 생황을 마라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푯대 되신 예수님을 바라봐야 하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1. 모든 무거운 것을 벗어 버리라 2.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라 를 말합니다. 여기에서 "모든 무거운 것을 벗어 버리라"는 운동선수로 따지면 최선을 다하는데 방해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모라" 같은 학자가 말하기를 그리스도인에게는 부를 사랑하고 세상 관심사, 세상에 애착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라 가려면 아주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단순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단순한 삶을 살지 않고 주님 못 따라 갑니다. 성경에서 보면 부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부를 주시기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6장 17절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놓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두는 것에는 두 가지 방법 밖에 없어요. 하나는 하나님 나라 헌금하는 것과 구제하는 것입니다. 부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그런데, 부자가 되고자 함이 심각한 죄를 낳습니다. 눈이 철저하게 가리게 됩니다.
동일하게 디모데전서 6장 9절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부를 사랑하면 심각한 탐심과 우상숭배 입니다. 눈이 가려집니다. 눈이 가려졌기에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없고, 눈이 가려져 있기에 주님 오심을 예비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씨 뿌리는 비유 아시죠? 네 가지의 밭이 나옵니다. 가시밭은 기쁨으로 말씀을 받고 싹이 나다가 가시가 찔려서 자라지 못하고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을 두고 그런 밭의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시죠?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서 결심치 못하는 자 입니다. 부하고 자 하는 욕심 때문에 하나님의 길에 서지 못하고 자기 삶의 부를 좇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버리는 자들입니다. 그렇기에 절대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좋은 밭에 뿌리어 진 자들은 말씀을 받고 깨달은 자들입니다. 이들이 보는 자들입니다. 베드로처럼 눈이 띄어져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를 보고 자기의 모든 삶을 바친 자들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말씀하고 계시다고 했죠 그러면서 "깨어있으라" 라고 하십니다. 누가복음 21장을 보면,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여러분 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 말하면서 "깨어 있으라" 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의 일에 동참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방탕함과 술 취함 속에서 그리고 염려로 살다 보면, 주님께서 오시는 그날까지 눈이 어두어져서 모르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려면 단순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요구하고 원하는 모든 것을 다 따르면서 어떻게 주님을 따르겠습니까? 그러한 욕심 때문에 주님 따라 갈 시간도 없고 아버지께서 하신 일을 볼 수도 없습니다. 단순한 삶을 살지 못하면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절대 순종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의 삶이 단순해 지지 않는다면, 아무리 주님 말씀대로 순종하겠다고 한다고 하더라도 여러분은 순종할 자리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들이 여러분의 눈을 가리게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 세상에서 돈 많이 벌려고 예수님 믿습니다. 돈 많이 버는 것이 목적입니다. 교회는 그러한 사람들을 불러 모아서 마치 예수님을 마술 방망이처럼 묘사해서 예수님만 믿으면 문제 해결되고, 사업 잘 되고, 병 고침 받고, 자녀 좋은 학교 가고 등을 가르치니까, 예수님 때문에 단순한 삶을 살라고 하면 거리가 먼 것과 같이 느끼게 됩니다. 성경은 명백하게 그렇게 말하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무거운 것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이 말은 직장 생활하는 것을 그만두고 사업을 그만 두라는 것이 아닙니다. 제 얘기는 우리의 삶의 목적을 단순하게 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또 하나는 무엇인가요? 얽매이기 쉬운 죄에서 벗어나라! 제가 어느 신문에서 게임 중독에 대한 것을 가져왔습니다. 여러분 게임이 죄입니까? 오락이 죄입니까? 스포츠가 죄입니까? 아닙니다. 나쁜 오락은 죄이지만, 좋은 오락은 죄가 아닙니다. 죄가 아닌 것이라도 중독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이것에 얽매이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이렇게 얽매이게 되면, 영적인 분별력이 가려지면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 그분의 목적이 보이지 않고 그것에 동참 할 수 없습니다.
2. 철저히 하나님의 기준에 서야 합니다.
레위기 10장 3절에 하나님께서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들에게 거룩하다 함을 얻겠고", 9절에 "너나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아서 너희 사망을 면하라 이는 너희 대대로 영영 한 규례라 그리하여야 너희가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고"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까 출애굽기 32장에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금송아지를 자기들을 애굽에서 인도한 신이라고 할 때에 모세가 산에서 내려와서 "여호와께 선 자는 나아오라" 라고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보고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부흥을 예비하는데, 반드시 나타나는 "구별"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성경적인 백그라운드로, 히브리서 13장 11절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니라" 여러분 영문은 이스라엘의 진 밖을 의미합니다. 이 배경을 두고 우리 신앙에 대해서 말하기를,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무슨 이야기냐면, 여러분 기독교 역사에서 부흥이 일어날 때 반드시 "구별"의 일이 나타났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부흥"이라는 책의 200p 를 읽겠습니다. "오늘날도 구분하라는 일종의 요청이 있습니다. 제가 인식한 바로는 교회 내 한 가지 구분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고 그 계시와 그 가르침에 복종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사이의 구분입니다. 저는 교파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오직 한 가지 관심은 주의 편에 선 사람들과 자기들의 신과 관념과 사상들을 섬기는 자들 사이의 구분입니다." 216p "모세는 전에 진영 안에 있던 장막을 옮겨서 진영 밖에 쳤습니다. 그 진영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말입니다. 여기에 주목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부흥의 역사 속에서 필연적으로 발견되는 여러 요점들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 요점도 오해될 수 있습니다. 거의 모든 진리가 오해될 수 있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어떤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것이 오해된다는 사실로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든지 강조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여기에서 모세는 기도의 처소와 중보기도의 처소를 세우는 행동을 취합니다. 그는 백성들이 회개하는 것을 보고 기뻤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사라졌습니다. 구름기둥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 앞에 함께 가지 않으시겠다고 진술하셨습니다. 물론,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회개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집회에서 우리의 모습을 보고 회개하는 것 중요합니다. 문제는 거기서 끝나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 삶에, 교회 가운데 회복될 때까지 중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하나님의 임재가 교회 가운데 회복되지 않으면 다른 어떤 종류의 부나 어떤 종류의 성공이나 사역의 확장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임을 인식하고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시기 위해서 어떠한 대가를 지불한다고 하더라도 주님을 찾는 어떤 극단적인 행동이 필수적입니다.
제가 파주시에 있는 어떤 교회에서 출애굽기 32장과 33장의 말씀을 갖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에 대해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기도 사역 중에 깨달았는데, "오늘날 어떠한 하나님의 임재가 전혀 없는 교회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 하지 않는다면, 세상의 어떠한 부나 명예나 사역의 확장도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임재가 그 교회 가운데서 있기 위해서는 그 어떠한 자세나 태도를 취한다 하더라도 주님께서 오시기를 열망하면 하나님께서 그곳에 함께 하시겠다." 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부흥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런 자들을 세우셨습니다. 인식다음에 전적인 헌신이 필요합니다. 인식이 전적인 헌신을 가능케 합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회개만으로 만족하면 안 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임재를 되찾기에 갈망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기도 처소를 세웠습니다. 그것은 어떠한 섬세한 조직으로도 보이지 않습니다. 또 그가 어떠한 진술을 한 것도 아니고, 그것에 대해 한 마디 말을 한 것도 아니하였으며 백성들에게 연설하지도 않았습니다."다시 말하면 사람들을 설득해서 모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편에 선 자들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하나의 필연감을 느끼고 그가 전과 같이 진영 안에서는 중보 기도할 수 없음을 알고 진영 밖으로 옮겼고 역시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어느 사람에게나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은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강조되었는지 보십시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다 진 밖 회막으로 나아가며" 218p "그 다음 요점은 모세가 회막을 진 밖에 진에서 떨어진 곳에 세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제가 가장 오해 받을 만한 소지를 담고 있는 요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교훈입니다. 모든 부흥의 역사 속에서 필연적으로 이러한 떨어짐의 구별됨의 요소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진이 그 당시 하나님의 전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이스라엘이 그 당시 광야에 있던 교회였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교회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그는 회막을 말하자면 교회 중에서 다른 곳에 옮깁니다. 진영 밖에 세웁니다. 오랜 교회 역사 속에서 체험되는 어떤 부흥도 교회 내 어떤 형식적인 경우가 없습니다." 여러분 예수님 시대에 회복이 오려면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사람들을 동원했었고 예산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사렛 예수님을 통해 일으키셨습니다. 루터 시대에 하나님께서 새로운 일을 일으키시려면, 그 당시 세계를 다 통치한다. 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그러한 조직과 인물과 일꾼들과 예산을 가진 가톨릭을 사용하셨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일개 수사인 루터를 사용하셨습니다. 그것은 강한 진술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저는 그것을 반복합니다. 교회가 알았던 그 어떠한 부흥도 어떤 공식적인 운동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종교 개혁이 위대한 선구자들에 대한 기록을 읽어 보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주의 깊게 주목 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그렇다면 새로운 교단을 세우라는 것입니까?" 그것은 여기에서 주는 교훈을 암시하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것은 이 교훈을 하나의 공식화 하는 것이고 운동화 하는 것이고 조직을 구성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제가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교회 안에서 운행하시기 시작하실 때에 부흥을 위한 길을 마련하고 계실 때에 언제나 하나님께서 그런 식으로 역사 하시는 것 같다. 라는 점입니다.
제가 강조하는 또 다른 요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진 밖에 회막을 세우는데 모세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는데 이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헌신에 전체의 개념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이러한 일이 진중에서는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진은 부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모세는 진 밖에서 회막을 세운 것입니다. 그것은 의도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사실상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방식으로 일을 해야 한다. 우리는 부정에서 벗어나야 하고 죄악 된 분위기에서 떠나야 한다. 우리는 대신 여기에 함께 모여야 한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헌신입니다. 여러분이 좋아하는 방식으로 표현한다면 그것이 바로 거룩으로의 부르심입니다. 그들의 첫 번째 관심은 교회의 상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영혼의 상태였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거룩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일종의 구별이 필연적으로 생깁니다. 어떤 사람은 그럼 기독교를 분리하려 합니까? 라고 말할 것입니다. 저는 기독교를 분리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씀 드리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 중 어떤 사람을 다리로 하실 때에 구별시키시는 일이 있을 것임을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한 일을 떠벌리고 하지 않을 것이고 또한 바리새인들처럼 나는 너 보다 거룩하다는 자세를 취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일단 한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 상태에 대한 소명의 짐이 느껴지기 시작할 때에 이러한 일에 대한 헌신의 짐을 느끼게 됩니다. 말하자면 밖으로 나갑니다. 우리는 물리적인 국면을 지나치게 강조해서는 안 됩니다. 물리적인 국면이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원리입니다. 제가 말씀 드리려는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이와 같이 심각한 부도덕성과 불 경건과 불신앙이 팽배한 이 시대에 우리를 향해서 악이 소리치며 거만하게 굴며 떠들썩하며 자랑하는 시대에 어느 지역에 살던지 사람들에게 악이 파급되는 시대 속에서 제가 묻고 있는 것은 우리가 그러한 것에서 분리되라는 부르심에 대해서 알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평범한 기독교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그 보다 더한 것이 요구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항을 다룰 수 없습니다.
참된 삶과 거룩한 생활 말하자면 하나님 아래 있는 그러한 삶을 나타내는 것 밖에 그런 상황을 다룰 수 없다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제가 요약하고 마치겠습니다. 진이 오염되었습니다. 혼합주의 신앙이 팽배합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금신을 섬깁니다.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지도자들로부터 모든 이들이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가 떠났고 생명이 떠났고 진노가 가득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고갈 되었습니다. 사람만 가득합니다. 이때에 이 상태로는 소망이 없음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편에 선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오며 가며 죽이라고 합니다. 누구를 죽이라고 하는 줄 압니까? 형제, 친구, 이웃, 그리고 자녀입니다. 그만큼 철저한 구별을 의미합니다. 예수님 보십시오. 마리아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왔을 때에 "누가 나의 어미며 형제인가?" 나의 버릇없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이시더라도.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은 그 앞에 보시면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대적합니다. 그러니까 마리아와 동생들이 그들의 의견을 받아 들여 예수님을 데려 가려 하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런 것입니다."나의 말을 듣고 행하는 자들이 내 어미요 형제이니라" 그만큼 철저한 구별을 의미했습니다. 우리가 오염된 진속에서 행해지고 있는 혼합주의 신앙과 형태들을 하면서 부흥을 기다리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합니다. 새로운 조직이나 교단을 만들라는 것이 아니라, 조직이 문제가 아니라 가치관입니다. 하나님의 무리들을, 교회가 세워지되 철저하게 속된 것과 정한 것을 구별해야 합니다. 거룩한 것과 부정한 것을 분별력 있게 구별하여 하나님의 길에 서야 합니다. 혼합주의 신앙에서 철저하게 구별되어 그러한 가치관과 태도에서 철저하게 구별되는 특단의 조치가 부흥을 예비하는 데 필수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흥이 임할 때에 항상 그러한 일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진 밖의 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흥을 위해서 필수적인 것은 우리의 영적인 눈을 가리는 모든 것에서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하며, 두 번째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기준에 선 삶과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세 번째로는 주를 향한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3. 주를 향한 열정이 있어야 한다.
거룩함과 주를 향한 열정은 뗄래야 뗄 수가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절에서 3절에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케 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여러분 부부간에 보십시오. 부부간에 아내가 다른 남자에게 바람은 피우지 않더라도 남편을 진실함과 열정을 갖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룩함이 아닙니다. 우리가 술 안 먹고 담배 안 피우고 도박 안 할지라도 주님을 향한 깨끗함과 정결한 그 열정에서 떠나면 그것은 타락한 삶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을 중매쟁이로 비유하면서 내가 너희를 진실함과 깨끗한 마음으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만 사랑하도록 그분께 중매한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뱀이 하와를 미혹함 같이 사단이 우리를 그리스도를 향한 진실하고 깨끗한 사랑에서 떠나게 하고 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거룩함은 그리스도를 향한 진실함과 깨끗한 열정 있는 사랑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별을 요구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길에 서길 열망하고 그렇게 하나님과 동행하길 열망하고 그렇게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길에 있기를 갈망함으로 하나님께서 목적하시고 의도하신 일이 하나도 남김없이 여러분의 삶에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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