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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차 3강 성령님과 교제

강의자료/컨퍼런스 정리

by 발의무리 2009. 7. 9.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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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강 성령님과의 교제

 

- 이길수 목사 -

 

성령의 사역을 말할 때 두 가지를 염두 해야 합니다. 하나는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가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라면 다른 하나의 측면은 하나님과의 교제가운데서 그 사역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의 삶에 승리와 생명을 누리는 삶을 성령님과의 교제가운데 우리가 누릴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성령님과의 교제에 관련해서 4가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1. 성령님과의 교제는 신앙의 본질인 친밀한 관계 속에서 시작됨을 우리가 기억해 야합니다.

2. 성령님과의 교제는 성령을 쫓아 행하는 것입니다.

3. 성령님의 교제와 사역의 문제

4. 성령님과의 더 깊은 교제를 위한 필요한 요소

 

1. 성령님과의 친밀한 교제는 관계 속에서 시작된다.

 

우리의 신앙은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성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어떤 방법이나 공식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성이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자리에서 어떤 분들은 신앙을 이해하되 자기 목적을 위해 자기가 목적이 되어서 하나님을 찾되 자기 방식으로 자기의 필요를 위하여 수단으로 찾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사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이 수단이 되고 우리의 목적을 위한 어떤 필요를 위해 하나님을 찾는 자로 전락해버립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문제 해결을 위해 하나님을 찾기도 하고 물질적인 축복을 위해 하나님을 찾기도 하고 건강을 위해 찾기도 하고 자녀들을 위해 찾기도 하는데 이렇게 되면 하나님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전락해버립니다. 이런 가치관, 신앙적인 이해를 가진 사람들에게 성령님과의 교제를 이야기하면 성령의 능력, 성령의 사역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이런 성령님에 대하여 나누는 것을 어떤 관점으로 접근하기 쉽냐면 자기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접근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사역, 성령의 은사, 성령의 능력, 성령님을 이야기하는 가운데 많은 분들은 자꾸 능력이나 우리의 사역을 돕는 힘 우리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기 위한 방법 등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성령님은 교회성장을 위한 수단이나 우리의 사역을 위한 방법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인격체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친밀함에 대하여 말할 때도 신앙의 본질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 친밀한 교제가 중요하다. 그런데 이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의 실제는 성령님과 교제가운데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친밀한 교제가운데 있기를 원하십니다. 구약에서부터 우리가 그런 예를 쭉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관계성을 원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실 때도 그들과의 관계성을 원하십니다. 출애굽 하는 과정에서도 그 관계성가운데 있기를 줄기차게 하나님 원하십니다. 그리고 때가 차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막힌 담을 허무시고 화목제물이 되셔서 우리와 하나님사이의 관계를 회복하게 하셨습니다. 친히 제자들을 인도하시고 지도하시고 가르치시고 깨닫게 하시고 그러면서 친밀한 관계가 무엇인지 잘 가르쳐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8장 19-20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 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친밀한 교제가운데 사셨던 주님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막힌 담을 허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화목제물이 되신 주님이 부활하신 이후에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승천하시면서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겠다.” 이건 아이러니입니다. 역설입니다. 올라가시면서 언제나 함께 있겠다 말씀하신 것은 맞지 않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함께 있는지 다 압니다

요한복음 14장 16-18절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 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주님이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 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진리의 성령님께서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시겠다. 저는 진리의 영이고 너희 속에 거하시겠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시대에 성령님이 함께 하신 역사가 많이 있습니다. 기드온에게 함께 하시고 브살렐과 오홀리압에게도 함께하시고 다윗에게도 함께하시고 그런데 한번도 “속에 계시겠다.” 이런 표현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이기 때문에 그때는 함께하셨습니다. 영어로 with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우리 속에 함께 계시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여기에 뭐라고 하시냐면 18절에 보면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예수님께서 영으로 보혜사로 성령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왜 오신다고요? 고아처럼 버려두시지 아니하시려고 사실 이 말은 굉장히 중요한 말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성령님이 없으면 고아와 같이 살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고 예수님이 제자들과 동행하시고 제자들을 친히 가르치시고 돌보시고 인도하셨습니다. 격려하시고 사실 여기에 또 다른 보혜사라고 말이 있는데 원래 보혜사는 예수님이시죠. 또 다른 보혜사는 성령님을 가리키는데 원래 보혜사는 예수님이셨죠. 보혜사라는 말 자체가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아주 다양한 번역으로 영어성경으로 되어있는데 격려하는 사람, 돕는 사람, 선생님, 안내하는 사람, 다양한 의미로 번역하고 있어요. 그게 다 보혜사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시면서 제자들을 격려하고 인도해주시고 가르쳐주시고 깨닫게 하시고 도와주시고 이런 일들을 이 땅에서 부지런히 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가시고 영으로 또 오셔서 우리 안에서 그 일을 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육신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들 입장에서는 예수님이 가시는 것이 매우 불안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이 훨씬 유익하겠죠. 그런데 요한복음 16장 7절에 보면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16장 7절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 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 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왜요? 주님이 가셔야 영으로 오셔서 모든 사람에게 내주 하셔서 실제로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님 없이는 우리는 무엇처럼 산다? 고아처럼 산다. 기억하십시오.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이 되지 않으면 우리는 무엇처럼? 고아처럼 산다는 겁니다. 사실 여러분들 기억하세요. 성령님이 우리를 모든 진리로 이끄십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예수님이 가르치신 모든 것을 생각나고 깨닫게 하십니다. 성령님이 우리를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시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얼마 전에 주일날 설교준비가 그렇게 안 되더라고요. 아니 토요일저녁에 주일 설교를 준비하고 있는데 설교준비하고 하고 하다가 지쳐서 어떨 때는 설교준비를 순식간에 하는데 어떨 때는 잘 안될 때가 있습니다. 볼펜을 집어던지고 앉아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눈을 감자마자 하나님 뭐가 문제입니까? 하나님 제게 빛을 비춰주십시오. 기도하자마자 성령님이 순식간에 제게 깨닫게 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하면 제가 설교를 어떻게 사람들에게 감동있게 사람들에게 찐한 감동을 주는 사람들에게 어필하는 그런 설교를 잘해볼까 여기에 제 초점이 가 있는 것이 보여 졌습니다. 순식간에 비춰주셨습니다. 사실 오늘 나오면서도 그런 기도를 하나님 앞에 절박하게 했는데 ‘하나님 저는 감추어져도 저는 다 잊어져도 제가 실수해서 죽을 쑤더라도 주님이 하실 말씀은 하시옵소서. 그게 잊어버리면 제가 나타나길 원하는 겁니다. 그 자리에 가있는 그래서 그것을 회개하고 돌이키는 순간 즉시 하나님께서 어떤 부분을 설교해야 하는지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주 편안하게 금방 순식간에 준비했습니다. 어떻게 그 것을 깨달을 수 있나요? 성령님이 우리를 깨닫게 하셔야 알게 하셔야 가르쳐주셔야 우리가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없이는 우리가 진정한 승리와 능력을 누리는 삶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이 되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바로 예수님이 영으로 우리 가운데 오신 그래서 성경에 예수의 영,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하고 있고 또 아들의 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4장 13절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 는 줄을 아느니라.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성령님이 우리 안에 오시게 된 사건이 뭐와 연관이 있느냐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는 삶,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삶 친밀한 교제의 실제적인 삶을 누리는 일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누리기 원하십니까? 그러면 성령에 의한 삶으로 그 일이 구체화 되는 것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보혜사로써 제자들을 친히 돌보시고 격려하시고 인도하신 것처럼 이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성령님이 그래서 인격체이심을 기억해야 됩니다. 성령님이 인격체십니다. 그분 자신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존중 받아야 되고 능히 주권자시며 능히 당신의 뜻을 가지고 일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사실 인격이라고 말할 때 세 가지를 많이 말합니다. 지성, 감성, 의지 성령님은 지식을 가지신분이십니다. 로마서 8장 26절을 보면

 

로마서 8장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성령님은 아십니다. 우리가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모를 때 성령님은 아십니다. 지식이 있으십니다. 성령님은 감정도 있으십니다. 여러 구절이 많이 나오지만 대표적으로 에베소서 4장 30절 한절만 보면

 

에베소서 4장 30절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성령님이 근심하실 수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성령님을 근심케 하면 안 됩니다. 성령님은 인격체이시기 때문에 근심하실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 뿐만 아니라 성령님은 의지도 가지신 분이십니다. 고린도전서 12장 11절에 보면

 

고린도전서 12장 11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성령님이 그 뜻대로 당신의 뜻대로 나누어 주신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건 무엇을 나누어 주시느냐? 8절 이하에서부터 10절까지 보면 성령의 아홉까지 은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은사를 성령님이 주권을 가지고 나누어 주신다는 겁니다. 그 뜻대로 그러니까 주권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의지를 가지신 분 이것을 볼 때 선명하세 볼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성령님은 방법이나 능력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인격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며 우리에게 실제로 우리에게서 삶을 주관하시는 능력이 있는 우리의 찬양과 경배를 받으셔야 될 우리가 그분의 주권 앞에 기꺼이 순복해야 될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라고요. 이걸 기억할 때 성령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필수적인 두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전 이게 아주 중요하다고 봅니다. 우리가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에 이 부분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첫 번째로는 하나님만 기쁘시게 하려는 마음이 있어야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이, 교제하는 삶이 가능합니다. 하나님만 기쁘시게 하려는 마음 요한복음 8장 29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합니다.

 

요한복음 8장 29절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 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요한복음을 보면 특별히 어제 밤에 보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에 있어서 이 강대상에 네 면처럼 복음서가 표현하고 있는데 요한복음서가 강조하는 바는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예수님께서 사역을 감당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에 있어서 예수님이 어떠한 근거로 그런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가운데 있었는가를 제가 그 관점에서 요한복음을 읽으면서 선명하게 두 개가 보여 졌습니다. 무엇이냐면 우선 예수님에게는 어떤 확신이 있었는가 하면 ‘하나님이 나를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신다.’ 이 확신이 있었습니다. 친밀한 교제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아는 겁니다. 신앙의 본질에 있어서도 관계성에 있어서 기억해야 할 것이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는 것을 아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요한복음 5장 20절에서도 그렇고요 요한복음 17장 26절에서도 그렇고요 예수님은 ‘아버지가 나를 아들을 사랑하신다.’ 라는 표현을 자주 쓰고 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무엇이냐?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는 것을 확신했던 예수님께서 아들로서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기 원했다는 그런 표현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버지만 기쁘시게 하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금방 읽은 요한복음 8장 29절에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그의 기뻐하신 일을 행한다. 그 결과가 뭐냐 ‘아버지가 나를 혼자 두지 않는다는 겁니다. 아버지가 나와 동행하신다. 아버지가 나와 함께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만 기쁘시게 하기를 열망하십시오. 이 관계가 사랑의 관계입니다. 참 중요한 것이 이 관계성이 우리가운데 있어야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이 문제를 우리가 참 기억하되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을 우리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제가 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가 성경에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그랬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많이 갈등하고 고민하면서 어느 날 그게 선명하게 보여 졌습니다. 우리 인간은 사랑해본 경험이 없으면 사랑을 받아본 경험이 없으면 뭐가 사랑인지 잘 모릅니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매우 추상적입니다. 그래서 자기 식으로 사랑하기 쉽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내가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되어지면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먼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을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표현이 잘 나온 부분이 신명기 7장 6-8절입니다. 제가 그 부분을 자세히 설명하진 않겠고 간단하게 언급만 하고 지나가겠습니다.

거기를 보면 세 가지 특징이 나옵니다. 신명기 7장 6절을 보면 우리를 보배로운 소유물로 택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택하시되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했다". 여기 '기업'이라는 말이 보배로운 소유, 보배로운 재산 이런 의미입니다.

 

신명기 7장 6-8절

6.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 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8.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무거나 짓지 않았습니다. 특별한 소유물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43장 1절을 보면 “그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야 43장 1절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 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 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그래서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불꽃이 너를 사르지 못할 것이다.” 보배로운 소유는 함부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기억하세요. 하나님이 여러분을 함부로 취급하지 않으십니다. 여러분 혹시 이렇게 그런 경험 하시나요? 강가에서 모래를 한 웅큼 쥐면 빠져나가는 모래알처럼 이게 꼭 내 신세같이 느껴지는 여기에 빠져나간 모래 한 알갱이 이게 바로 나 같아 주님이 나 하나 잊어버려도 모르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환경적으로 어려우면 그런데 주님은 그러지 않으십니다. 보배로운 소유를 함부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두 번째 하나님의 사랑은 감정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열렬히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7장 7절에 보면 ‘하나님이 그가 너희를 기뻐하시다.’

 

신명기 7장 7절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기 기뻐하신다는 말은 “하샤크”라는 말로 “열렬히 사랑한다.”라는 말입니다. 영어 NIV에 보면 “affection”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열렬히 사랑하신다. 열렬한 사랑 여기에는 감정의 요소가 있습니다. 스바냐 3장 17절에도 이런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스바냐 3장 17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얼마나 신나는 표현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에는 감정의 표현이 있습니다. 저는 이 하나님의 사랑의 감정을 가장 잘 표현해 놓은 것이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이름이라 표현하는 것 중에 무엇이죠? ‘나 여호와 하나님은 질투라 이름 하는 질투의 하나님이라’ 하나님의 질투라는 말 자체가 뭡니까? 신명기 4장 24절이나 출애굽기 34장 14절에 보면 하나님을 이렇게 말합니다.

출애굽기 34장 14절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질투랍니다. 그런데 그 질투라는 말이 무엇이냐 열심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열정입니다. 하나님의 질투는 하나님의 열정입니다. 이 열정의 감정이 어디서부터 나왔을까요? 사랑에서부터 나왔습니다. 하나님이 왜 징계하시는지 아십니까? 사랑에서 옵니다. 이 열정, 이 질투에서 여러분 이 사랑의 감정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지십니다.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우리를 얼마나 뜨겁게 사랑하시는지 그게 하나님의 사랑의 감정입니다. 이사야 63장 15절을 보면 또 호세아 11장을 보면 이사야나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의 열정이 식어버린 것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부부간의 관계에서도 최고로 무서운 것이 무관심 아닙니까? 관심이 일단 있으면 미워라도 합니다. 미움은 사랑의 또 다른 표현 중의 하나입니다. 질투는 사랑의 표현 중 하나라고요. 근데 무관심한건 내버려 두는 겁니다. 사랑의 감정이 있습니다. 열정 세 번째 하나님의 감정에는 희생하시는 사랑이 있습니다. 7장 8절을 보면 그렇게 말합니다. “너희를 애굽땅 종 되었던 집에서 속량하였다.” 종 되었던 상태로 그냥 버려두지 않으신다는 겁니다. 어떻게요? 건져내신다는 겁니다. 근데 우리를 건져내시기 위해서 구원하기 위해서 주님이 어떤 일을 이루셨습니까? 십자가에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놓으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로마서 5장 8절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우리에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로마서 5장 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 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보배로운 소유물로 선택하셨고 우리를 열렬히 사랑하셔서 열정을 가지고 사랑하시고 감정으로 그리고 우리를 위해 입술의 고백만이 아니고 감정의 느낌만이 아니고 우리를 위해 행동하는 사랑, 희생하는 사랑, 헌신하는 사랑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도 똑같으면 되겠습니다. 아, 수준이 똑같은 것이 아니고 그러한 패턴으로 우리가 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양 같아서 제 갈 길로 돌아가는지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사랑해야 합니까? 먼저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보배로운 분으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나의 보배로 선택하기로 결단하는 겁니다. 마태복음 13장에 값진 진주, 값진 보화의 비유에서 나오는 것처럼 주님 안에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모든 삶의 결정이 바로 그 보배 되시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주님을 따라 선택하는 자리로 가는 아직 주님께 모든 것이 다 안보이면 ‘누가 그렇게 살아’ 라고 말 할 것이 아니고 여러분 고민하고 갈등하면서 하나님을 찾으셔야 됩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값진 진주되신 예수님이 값진 진주되신 보배 되신 주님 되심을 저에게 알게 해주세요. 그러면 우리가 그분의 말씀에 우리의 삶 전체를 걸 수 있을 겁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합리화 합니다. ‘누가 그렇게 살아’ 그러면 누가 살아 그 말은 성경이 잘못된 겁니다. 그리고 성경을 쓰신 하나님이 잘못됐다는 표현입니다. 자기를 합리화시키는 겁니다. 이것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보배로운 소유물로 택하는 것이 첫 번째라면 두 번째로는 우리의 감정을 가지고 주님을 사랑하는 자리로 가는 겁니다. 하나님을 열렬히 사랑하는 사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열렬히 사랑하는 것 이것이 무엇으로 발전합니까? 열정으로 나타납니다. 열심히 나타나게 됩니다. 배고픔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더 알기 원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더 알기 원하고 더 만나기 원하고 더 교제하기 원하고 ‘나 그 사람 참 사랑해 근데 그 사람 일년 전에 만났더니 너무너무 좋더라.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는 첫사랑의 감격 첫사랑의 만남의 감격 이후에 내내 식어버립니다. ‘나 사랑해 근데 15년 전에 만났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만큼도 그 주님을 알기 원하는 열망과 배고픔이 없다면 아니 이런 설교 들을 때만 조금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인 체 하는 겁니다. 사랑에는 감정의 요소가 있습니다. 배고픔이 있습니다. 어제만나도 오늘 또 만나고 싶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알기 원하는 열망이 그처럼 부어집니다. 그런 배고픔을 가지고 주님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게 갈급한 것처럼 내 영혼이 주님을 찾기에 갈급합니다.” 라고 고백했던 시편기자처럼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리는 것보다 내 영혼이 주님을 갈망함이 더 큽니다.” 라고 고백했던 시편기자들처럼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갈망이 우리 속에 부어지게 됩니다. 그 분을 향한 열망과 열정, 배고픔 여기서 무엇이 나옵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원하는 마음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 것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원하는 열망 사랑하면 사랑하는 사람이 기뻐하는 모습을 볼 때 신나잖아요. 안그러던가요? 그렇죠? 사랑하는 사람이 기뻐하는 모습을 볼 때 나도 기쁩니다.

우리가 진짜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우리의 기쁨을 거는 우리의 전부를 거는 우리의 열망을 드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원하는.. 사실 이 열망이 우리의 삶을 바꿔요. 열망이 없으면 신앙은 우리의 신앙은 이 열망이 없으면 종교생활로 전락하게 됩니다. 다만 규례와 율법을 몇 가지 정도를 잘 지키는 여부로 전락해 버리면 열정이 없다면 열정이 없는 부부간의 관계 그저 돈 벌어다가 집에 가져다주고 그저 아빠노릇하기 위해서 한 번씩 나가서 놀아주고 그냥 좋은 부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의무감을 다하기 위한 행동을 몇 가지 하고 이것은 비정상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성에서도 당연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 것이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참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이 부분 입니다. 오늘날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중요한 부분이 열정입니다. 우리 속에 그 열정이 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는 감정의 요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감정을 열등한 것으로 저급한 것으로 취급해서 감정의 요소를 무시하고 우리의 신앙생활을 무미건조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여기 제가 ‘놀라운 성령의 능력’이라고 하는 책 잭 디어가 쓴 책 230 페이지를 보니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근본적으로 순종과 감정을 분리하는 형태의 기독교를 신봉했다. 감정이 없는 순종은 규율이나 의지력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이 아니다.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열정이 없는데도 여전히 사랑한다고 말 할 수 있다. 진정한 사랑은 행동으로뿐만 아니라 감정으로도 나타난다. 감정과 열정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분리할 수 없는 양상들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는 단지 기록된 하나님의 명령들에 대한 외적인 순종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는 마음으로부터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나는 실제 하나님과 그분의 자녀들을 향한 미지근한 감정을 옳다고 주장하는 신학체계를 지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내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덥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이분이 조나단 에드워드의 글을 인용합니다. ‘종교적인 감정’ 우리나라에도 책이 번역되어 있는데요. 거기서 이렇게 말합니다. “감동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곳에 진정한 종교가 없는 것처럼 종교적인 감동이 없는 곳에는 진정한 종교가 없다. 만약 종교에 관한 훌륭한 것들이 올바르게 이해된다면 그것들은 마음을 감동시킬 것이다. 모든 종교적인 감동을 무시하는 이러한 태도는 사람의 마음을 몹시 굳어지게 하고 그들에게 그들의 어리석음과 무감각함을 권하게 하고 그들이 살아있는 한 영적인 사망의 상태에 머물게 하고 마침내 영원한 죽음을 그들에게 가져다주는 방법이다.” 감정을 무시하면. 생기 있는, 살아 있는, 활기 있는 그러한 신앙이 안 된다는 겁니다. 다만 몇 가지 법칙을 정해 그것을 잘 정의해놓고 그것을 지키는 그런 신앙으로 전락해버릴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가 세계관의 영향을 말미암아 계몽주의적인 세계관에서 지성주의를 매우 강조합니다. 지식을 강조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말씀, 말씀을 강조하되 감정은 약한 자들이 들어내는 요소인 것처럼 생각하기가 얼마나 쉬운지 모릅니다. 마음이 약해서 울고 뭔가 약하기 때문에 감정의 요소를 가지고 나아간다. 지적인 사람들은 ‘말씀에 기초한 사람들은 감정에 쉽게 흔들리는 사람이 아니다. 감정은 저급한 것이다.’라고 취급합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명쾌하게, 명백하게 감정의 요소가 있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관계성이라고 할 때 이 관계를 우리가 무시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그래서 궁극적으로 어디로 갑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실 때 자신의 몸을 내어 주신 것처럼, 아들을 독생자를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궁극적인 헌신의 삶이 여기서 나올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헌신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가 주님께 우리의 삶을 드리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원하는 열정과 열망가운데 아버지가 원하시는 일이 자신의 일이 되기 원하여 그 아버지의 일에 기꺼이 자신의 삶 전체를 드려 옥합을 깨뜨려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그분의 일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물질을 드리며 시간을 드리며 인생 전체를 드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사는 것 이것이 진정한 사랑하는 삶의 마지막 단계가 아닌가.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헌신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면에 헌신에 다른 의도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진정한 열정이 어디서 오는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정에서 와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 말 할 때 감정의 요소를 무시한 채 순종과 열매만을 강조한다면 율법주의로 전락할 가능성이 얼마나 쉽게 가버리는지 모릅니다.

 

신앙의 본질에 전제하고 그 기준에 설 때에 그 열매를 우리가 말할 때 진실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에 그 길을 선택하고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선택할 때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 어떤 손해가 오더라도 나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이 길을 선택하리라. 우리가 그럴 때 우리의 삶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런 자들을 통해 주님이 놀라운 일을 일으키실 것입니다. 저는 열심에 대하여 생각해보면서 우리의 열심의 뿌리에는 네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축복받기 위해서 열심히 합니다. 복 받으려면 헌신해라. 복 받으려면 순종해라. 그러나 이것은 거짓된 성경적인 것이 아닙니다. 두 번째로는 죄책감에서 오는 불안, 뭔가 2%가 부족한 것 같으니까 주님 앞에 나아갈 때 부족하니까 무엇인가 해야 될 것 같은 열심히 해야 될 것 같은 혹시 여러분들 가운데 주님 앞에 나아갈 때 ‘나는 2%로가 부족해요.’ 이런 걸 자주 느끼는 분 손들어보세요. 괜찮아요. 우리끼리니까 한번 손들어 보십시오. 제가 정답을 가르쳐드리려고 하는데 손들어보세요. 더 있어요. 손들어 보세요. 손든 분들은 이렇게 말하세요. 저를 따라서 하세요. ‘2%가 아니라 100% 부족한 것이다.’ 여러분은 2%가 부족한 사람이 아닙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100%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보혈이 있습니다. 2%부족하다고 느끼는 분들이 남은 2%를 채우기 위해 무언가를 열심히 해야 되는 열심히 이것은 율법주의입니다. 우리는 그 은혜로 서는 겁니다.

 

세 번째 열심은 자기 영광과 성취감 때문에 자기 영광을 얻기 위하여 하는 헌신입니다. 자기 야망을 이루기 위해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해 제가 목회자니까 목회자의 예를 드는데 교회성장을 위하여 교회성장하면 돌아올 영광과 명성과 이런 부분을 위하여 밤낮 안가리고 일할 수 있습니다. 다 명목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검사하면 다 나옵니다. 조사가 필요합니다. 진짜 사랑인지 아니면 자기 야망인지 자기 인정받기를 원함인지 “너의 의를 사람에게 보이려 하지 말라” 이 말의 의미가 뭐에요? 자기의 선한 행실, 옳은 행실 사람에게 보여서 인정받고 뭔가 드러나고 여기에 초점이 있다면 이것도 거짓된 열심입니다. 그럼 참된 열심이 뭡니까? 하나님의 사랑함에서 오는 열정입니다. 우리가 진짜 열정을 가져야할 유일한 이유가 하나님을 사랑함 이여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절에 보면

 

고린도후서 11장 2절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바울사도가 고린도교회에 중매하는 중매자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그런 자로 섰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냐? 복 받을려고도 아니고 죄책감 때문도 아니고 자기 영광 때문도 아니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심으로 열정으로 이게 너무 너무 중요합니다.

요한계시록 19장 7절과 8절을 보면 저는 우리 신앙 어떻게 되어야하는가 이게 참 중요하더라고요.

 

요한계시록 19장 7-8

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여기 뭐라고요? 성도들의 옳은 행실 그게 뭐냐? 어린양의 신부가 입을 예복입니다. 준비된, 그런데 여기 보니까 어린양의 신부가 준비되었다고 말하고 있지 않고. 어린양의 신부가 ‘준비하였다. 예비하였다’ 그랬어요. 신부가 예비하는 겁니다. 훗날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신부가 예비하는 세마포를 그러면 신부가 예비한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어요? 신부는 신랑을 사모하고 열망하잖아요. 그 기다림, 그 만나기 원함 사실 사랑하는 사람이 멀리 떠났다가 돌아올 때 여러분 어떻게 합니까? 준비하지 않습니까? 뭔가 집안도 정리해놓고 그렇죠? 편히 쉴 수 있는 공간과 맛있게 먹을 음식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열정이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하고 그 열정이 주님의 임재를 갈망하고 사모하고 그래서 우리가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기꺼이 선택하는 누가 하라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그분을 사랑하기에 주님과 동행하는 삶, 사랑의 관계성에서 이 부분이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그 열정이 저와 여러분에게 더 부어지길 소망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그 열정을 성령님께 더 부어달라고 기도합니다. 알게 해달라고 하나님이 저를 사랑하는 열정 근데 그러면서 더 많이 자라가는 것 같더라고요. 그 사랑의 열정을

 

두 번째 성령님께 주도권을 드리는 삶이 되어야합니다. 성령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두 가지 필수적인 요소라고 했는데 그 중의 두 번째 성령님께 주도권을 드리는 삶 아모스 3장 3절을 보면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기 원할 때 반드시 함께 가야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게 뭐냐 주도권을 드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은 자기를 기쁘게 하는 것이 내려져야 됩니다. 하나님 기쁘시게 하기 원하면 요한복음 5장 30절에 예수님께서 그러시죠.

 

요한복음 5장 30절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 려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사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한다면 자기를 기쁘게 하는 것이 내려져야 됩니다. 그분만 기쁘시게 하는 그렇게 해야 진짜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럴 때 우리가 뭐냐 그분께 우리 삶의 주도권을 완전히 내어드림이 필요합니다. 성령님의 교제는 성령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행하려면 뜻이 같아야 합니다. 그런데 내 뜻대로 성령님을 바꿀 수 있을거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됐습니다. 전적으로 성령님이 주도권을 가지고 일해가시도록 그리고 인도해 가시도록 내가 그분 앞에 엎드려 순복하는 자리에 서야 됩니다. 완전히 순복하는 가운데 주도권을 드려야 됩니다. 여기 주도권을 드린다는 말의 의미가 뭔가 성령님이 곧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가운데 성령님의 인도하심 받기를 적극적으로 사모하고 열망하며. 그분의 인도하심에 민감하여 또 민감하게 반응하여 적극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에 순종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게 주도권을 드리는 겁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면 제가 언제든지 가길 원합니다. 사모하고 열망하는 마음 가운데 성령님이 깨닫게 하시거나 성령님께서 저를 인도해가시거나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뭔가를 알게 하시거나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순복하겠다고 하는 마음자세 이게 주도권을 드리는 삶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보면 성령님이 주권자이심을 명백하게 우리에게 많이 보입니다. 특히 사역과 관련하여서도 그렇고, 삶도 그렇고요. 예수님도 그렇고 사도들도 그런 삶을 살았어요. 누가복음 4장 1절에 보면 예수님이 물에서 세례를 받고 올라오신 이후에 성령님께 이끌리시며 광야에 시험을 받으러 가셨다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4장 1절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성 령에게 이끌리시며.

 

성령님께 이끌리셨습니다. 이렇게 성령님이 주도권을 잡고 가셨습니다. 사도행전 11장을 보니까 베드로를 고넬료의 집에 보내신 분이 누구냐 성령님이십니다. 11장 12절에 보니까

사도행전 11장 12절

성령이 내게 명하사 아무 의심 말고 함께 가라 하시매 이 여섯 형제도 나와 함께 가서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성령이 베드로에게 명령하셨다. 사역에 대한 주도권입니다. 이방인 전도를 위하여 기틀을 마련하는 그리고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하신 분이 누구냐 바로 성령님이세요. 사도행전 13장 1절 이하를 보면 안디옥교회에 바나바가 담임목사였고 바울이 수석 부목사라고 말할 수 있는데 성령님께서 사람들 가운데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셨겠죠. ‘바울과 바나바를 따로 세우라’ 라고 말하는, 그래서 13장 4절을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행전 13장 4절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성령님의 보내심을 받았다. 성령님이 주권자이십니다. 그 외에도 무진장 많이 나와요. 성령님이 우리 삶에서도 바로 주도권을 잡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진짜 기억해야 될 너무 중요한 한부분이 뭐냐 성령님과 실제적으로 동행한다면 철저하게 주님께 주도권을 드려야한다. 인격적인 주님과의 만남 이후에 우리 삶에서 주도권을 주님이 실제로 찾으십니다. 사실 여러분 우리가 제 개인적으로도 이런 경험이 있습니다. 95년도에 교회가운데 어려움이 오면서 어떤 상황이 되면서 절실하게 주님을 찾고 구하고 열망하는 가운데 어떤 모임을 통해서 성령님의 강력한 기름부으심의 임재를 경험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교회 가운데 놀라운 치유도 나타나고 놀라운 역사들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치유되는 초기에는 더더욱 많이 그랬던 것 같습니다. 임재도 강하고 그래서 저는 ‘게임 끝이다. 목회 끝이다.’라고 제가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보세요. 기도하면 많은 사람들이 치유되고 기도하면 놀라운 역사들이 나타나는데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끝이 아니고 시작이었습니다. 무릎을 꿇고 앉으면 주님이 앞에 서계시는 것처럼 그렇게 임재를 강하게 부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것 중의 하나가 선명하게 하나님을 인식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인식합니다. 그렇게 느껴지기도 하고 너무 신이 납니다. 기도하면 치유가 일어나고 얼마나 신이 났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얼마 시간이 지난 다음에 하나님의 임재가 걷혔어요. 제 삶에 엎드려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옆에 안계신거 같고 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앞이 안보입니다. 하나님이 어디 계신지 정말 어떤 때는 그전에는 기도하면 주님의 임재가 있고 너무너무 기도시간도 신났고 말씀을 읽어도 얼마나 집중되어 들어오고, 감격과 기쁨이 있는지 제가 ‘성령님 임재 하셔서 만져 주시고 치유해주세요.’ 그러면 순식간에 치유가 일어납니다. 제가 어떤 날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령님은 내가 오라고 하면 오시고 가라고 하면 가시고’ 정말 신났습니다. 그런데 얼마정도 지나고 나서는 오시라고 해도 안 오시고 기도해서 찾아도 불러도 대답이 없고 그렇게 되니까 이제 그다음부터는 씨름이 되어졌습니다. 하나님 뭐가 문제입니까? 이때쯤 저랑 같이 함께 은혜 받고 했던 분들이 저에게 와서 그러더라고요. 제가 그분은 어떤지 물어봤습니다. 그분은 저보다 훨씬 일찍 더 이상 성령님께서 운행하시지 않고 임재가 걷혔다고 그래서 이분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운동 이였던 것 같다고 또 다른 한분은 난 벌써 예전으로 돌아갔다고 이게 뭘까? 왜 그럴까? 사실 개인적으로 저는 달리 대책이 없었습니다. 대안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제가 뭐가 문제입니까? 이거 왜 그렇습니까? 도대체 뭐가 문제입니까? 이렇게 씨름하고 찾는 가운데 한 달쯤 지난 어느 날 토요일에 주보를 만들려고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데 제일 어려운 것이 설교준비입니다. 주님의 임재가 함께하고 친밀함이 있으면 설교준비 순식간입니다. 잘 안됩니다. 그래서 고민하고 갈망하는 가운데 갑자기 성령님께서 또렷하게 그러셨습니다. 너와 너의 교회가 정직하지 못하다. 그러면서 앉아있는 가운데 순식간에 제가 부정직한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예를 들어 설교시간에 요만한 걸 크다고 한 것, 과장, 또 차 운전하러 가다가 80키로 인데 가다가 100키로 쯤 잡히면 80키로 조금 넘었는데 봐달라고 이러면서 했던 것, 부정직함 사실 별거 아니었다고 생각했던 부분들 하나님께서 들춰내시는데 절박하게 하나님 앞에서 회개했습니다. 그 순간 눈물을 흘리면서 회개했습니다. 용서해 달라고 비추심은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런데 그러고 나서 하나님의 임재가 다시 회복됐습니다. 참 재미있었던 것은 그날 밤에 기도사역 할 때도 전혀 ‘성령님 오시옵소서.’ 그래도 전혀 그러시더니 다음날 주일 밤에 누군가를 기도사역 하는데 목에 혹이 있던 분이었는데 혹이 톡톡톡 튀더니 눈앞에서 들어가 버리는 것입니다. 눈앞에서 들어 가버리는데 얼마나 신이 나던지 그다음에 계속 ‘성령님 오십시오.’ 하면 오시고 ‘가십시오.’ 하면 가시고 하면 얼마나 좋겠지만 안 하시더라고요. 그때부터는 몇 번 하는 것 같은데 그 다음에는 임재를 또 거둬요. 그러면 또 뭐가 문제입니까? 씨름하면 어떨 때는 한 달도 걸리고 어떤 때는 2주, 3주 걸리고 어떤 때는 순식간에 보이시기도 하고 제 모습을 들춰내시기도 하고 제가 온전치 못한 자리에 있는 모습을 깨닫게 하시고 그리고 돌이키고 회개하면 임재를 회복시키십니다. 그때부터 거꾸로 됐습니다. 그분이 제 삶의 주도권을 잡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뭘 모르면 성령님이 능력으로 임하시면 그 다음부터는 게임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게임 시작입니다. 그 때부터 시작됩니다. 그때부터 우리를 빚어 가시기 시작합니다. 다루시기 시작합니다. 다루심의 과정의 끝에 가면 무엇이냐 성령님이 우리 삶에서 주도권을 가지신 분임을 철저하게 인정하여 주권아래 순복하여 서도록 합니다. 혹시 여러분 개인적으로 은혜를 받았는데 어떤 순간 불러도 대답 없었고 그런 과거의 경험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어쩌면 그런 일을 하고 계셨는데 제 갈 길로 가다가 그 자리에 있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그랬을 겁니다. 많은 분들이 그러거든요. 제가 볼 때 성령님은 주권자십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그 분은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이 주도권을 가지고 일해가십니다. 그 주권 앞에 온전히 순복하길 축복합니다.

 

2. 성령님과의 교제는 삶 가운데 실제로 성령님을 쫓아 동행하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5장 25절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찌니.

 

성령님과의 교제는 삶 가운데서 성령님을 쫓아 동행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5절 을 보면 이 말은 표준새번역을 보면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삶을 얻었으니, 우리는 성령이 인도해 주심을 따라 살아갑시다.’ 우리가 성령으로 삶을 얻었다는 말은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적용하여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발견할 뿐 아니라 우리가 현재 성령에 의한 삶을 살아야 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현재적으로 동행하는 삶을 산다면 성령님께 주도권을 드려 인도하심을 우리가 받는 삶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여기 몇 가지를 우리가 살펴봐야 합니다.

 

첫 번째로는 성령님은 모든 진리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요한복음 16장 13절에 여기 ‘모든 이’라는 말에 동그라미를 치십시오. 모든 진리로 이끄시는 성령님 이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요한복음 15장 13절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분을 의지해야 한다는 겁니다. 모든 진리로 이끄시는 성령님. 성령님은 우리를 모든 진리로 이끄십니다.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는다. 아까 이런 표현을 봤죠.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돌보심을 받아야 할 때 우리를 돌보실 수 있는 분이 성령님이시고, 우리가 깨달아야 되는 순간에 깨닫게 해주시는 분이 성령님이시고, 우리가 가야 될 길, 안가야 될 길을 선택할 때 우리로 인도해 주시는 분이 성령님이시라는 겁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그런 고백을 무진장 많이 합니다. 최근에도 머리가 많이 혼돈스러워서 집중이 안돼서 ‘뭐가 문제인가, 뭐가 문제입니까?’ 라고 묻는 기도를 하나님 참 빨리 응답하세요. ‘하나님, 제가 뭐가 문제지요?’ 라고 묻는 엎드려 그것을 기도하는데 ‘네가 교만해서 그렇다.’ 그러면서 제가 교만한 것을 보이셨습니다. 우리의 삶의 어떤 영역이 됐다고 생각하면 그 부분에서 우리가 교만한 자리에 가 있습니다. 자기는 그 영역에서 되어있는 것처럼 근데 우리가 그 자리에 가 있으면 더 이상 안자랍니다. 성숙이 안 됩니다. 그 영역에서 철저하게 뒤집어 져야 됩니다. 그걸 깨닫자마자 돌이켜 하나님 앞에 회개할 때 다시 임재를 회복시키시는 역사를 경험합니다. 진리로 이끄시는 성령님을 모든 진리로 인도하시는 성령님을 염두 할 필요가 있다.

두 번째, 성령을 쫓아 행할 때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절 이하를 보십시오.

 

갈라디아서 5장 16절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 하리라.

 

성령님과 동행하는 것과 관련해서 친밀한 교제와 관련해서 아주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뭐냐? 삶인데요. 삶 속에서 내가 성령을 쫓아 행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쫓아 행하면 어떻게 된다고요?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 아홉 가지 열매를 맺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인격이 변화되는 사실 이것은 우리가 선천적으로 온 성품이 아닙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사실 때 우리가 성령님께 주도권을 드리며 나아갈 때 맺혀지는 열매로써 이것은 이것이 곧 하나님이 성품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 가운데 나타나는 열매로 들어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삶이 전환되는 거죠. 실제로 삶이 변화되는 것은 여기서 가능합니다. 성령님을 쫓을 때 반대로 육체를 쫓을 때는 육체의 열매를 맺게 되죠. 17절을 보면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은 서로 거스른다. 그러면서 육체의 소욕은 현저하니 19절부터 21절까지 나옵니다.

 

갈라디아서 5장 19-21절

19.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 리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것 같 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성령님을 쫓을 때 삶이 변화 됩니다. 여러분 너무나 중요함이 여기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것이 진리가 아닌데도 진리처럼 생각하잖아요. 예수 믿으면 삶이 변하더라? 안변하더라? 변해야 정상입니까 안변해야 정상입니까? 그런데 왜 안 변하더라가 진리가 되었습니까? 사실 우리가 인격적인 하나님의 실재적인 관계성에 있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올바른 관계성에 있으면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원하는 열망이 있다면 우리는 적극적으로 성령님께 우리 삶의 주도권을 드리게 되고, 드리게 된다면 모든 진리로 이끄시는 성령님이 우리 가운데 어떤 상황 어떤 환경에서 깨닫게 하실 때마다 우리는 즉시 그분에게 반응하여 나갈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성질날 수 있습니다. 어떤 순간 어떤 상황에서 순식간에 성질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을 쫓아 행하는 사람은 성질까지 그 상황에 안 날 수 있으면 너무너무 좋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나도 모르게 성질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그 가능성을 이야기합니다. 분을 품어도 하루해를 넘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성질이 날 수 있다고 봅니다. 순식간에 자기도 모르게 가스가 폭발하듯이 근데 성령을 쫓아 행하는 사람은 수습을 빨리하는 사람입니다. 그 다음 순간에 내가 육체를 따를 것인가 성령을 쫓을 것인가 결정하는 겁니다. 육체의 소욕을 따를 것인가 성령을 쫓을 것인가 이때 우리가 염두 해두어야 할 너무나도 중요한 한 가지는 고집을 내리는 겁니다. 영적으로 성숙된 사람은 고집이 없습니다. 고집이 없다는 말입니다. 무슨 고집이 맞으면 가는 겁니다. 왜요?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원하니까 내가 주님 안에만 해답이 있음을 알고 오직 주님의 길에만 진정한 승리가 있음을 알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원하는 열망이 있기에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기꺼이 그 자리에 서기를 원하며 자존심이 상할지라도 너무너무 열 받고 화가 날지라도 주님이 말씀하시면 그게 진리이기에 우리가 믿음의 원스텝하며 나아가는 겁니다. 그러면 고집이 내려집니다. 그러면 주변사람들이 틀림없이 이렇게 말할 겁니다. ‘야, 너 많이 변했다.’ 안변하는 것이 기적입니다. 반드시 바뀌게 되어있습니다. 동의하세요?

 

세 번째, 진리로 이끄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복하기

지금 우리가 성령님과 교제하는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교제하는 과정을 설명하고 싶었습니다. 그 과정 중에 중요함이 이 부분은 제가 쓴 ‘십자가의 능력으로 사는 삶’ 12장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그 부분을 참조하셔서 나중에 자세하게 보시면 좋겠는데 어떤 환경이나 관계 속에서 성령님은 모든 진리로 이끄시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 순간 성령님의 지혜를 구할 때 우리를 알게 하십니다. 성령님이 진리로 인도하시는 어떤 상황이나 어떤 환경에 또는 어떤 인간관계에서 내가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이 진리인가 그리고 진짜 놀라운 승리인가 이걸 우리가 알기 원하는 열망을 가질 때 성령님이 우리를 알게 해주십니다. 이때 참으로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지체입니다. 좋은 지체. 자기 것은 안보여도 남의 것은 잘 보입니다. 그러니까 자기상황을 나누면 진리를 가르쳐 줄 수 있는 진리를 말해줄 줄 아는 동역자가 참 중요합니다. 믿음의 동역자. 저는 그래서 그런 분을 꼭 두라고 말씀합니다. 현재 상황을 나누는데 이 상황에 뭐가 진리인지 알지 못할 때 옆에서 누군가가 진리를 이야기 해주면 쉽습니다. 그런데 어떤 문제는 잘 모르겠으면 더 영적인 리더에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걸 통해서 진리를 우리가 아는 것이 참 중요해합니다. 어떤 친구는 이야기 했더니 나쁜 쪽으로만 자꾸 이야기 해줘 사실 자기 마음에 맞는 이야기는 나쁜 친구가 하는 이야기가 훨씬 맞을 수가 있습니다. 내 기분과 감정을 긁어주니까요. 동조해 주니까요. 내 편이 되어주는 것 같으니까요. 그래서 좋은 동역자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런 진리를 깨닫게 될 때에 우리는 그 진리에 의지를 들여 그게 지성적인 부분입니다 성령님이 지성적인 부분에 우리의 진리가 무엇인지 알게 하실 때 우리의 의지를 거기에 드려 순복하는 것이 여기 성령님의 인도, 성령님을 쫓아가는 삶입니다. 그런데 안되는 게 있습니다. 그게 뭐냐 부정적인 감정, 욕심, 옛 본성에서 나오는 이 옛 본성은 자기중심적이라 자기 것을 움켜쥐려고 하고 자기를 변호하려는 경향이 잇습니다. 특별히 상처가 많으면 많을수록 과거에 아픔이 많으면 많을수록 이게 더 강해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저 같은 경우는 어렸을 때 먹는 것에 마음껏 먹지 못하고 자란 사람 중의 한사람입니다. 그래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식탐이 있습니다. 보면 먹습니다. 그러니까 저 같은 타입은 이런 사람입니다. 앞에 먹을 것이 있으면 배불러도 먹을 것에 손이 갑니다. 손이 안가는 사람을 보면 제가 신기합니다. 그래서 제가 지금 이렇습니다. 은혜가 필요합니다. 저를 아는 사람은 제 앞에 먹을 것을 안 놓습니다. 왜냐하면 이게 타락된 옛 본성에서 나오는 욕심과 연관 있습니다. 감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상처받으면 안 받으려고 피합니다. 상처받은 비슷한 상황만 와도 도망갑니다. 그래서 어떤 진리를 안다 할지라도 이 진리에 동의하여 우리가 의지를 들여 행동으로 옮겨져야 하는데 안가요. 피해요. 도망가고 싶어요. 그래서 안해요. 그래서 많은 분들에게 무엇이 진리인가 말하면 이렇게 말해요. “알긴 알지만 안돼요.” 이러던지 또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목사님은 정답만 말해.” 그러면서 아주 싫어합니다. 고름이 살 되지 않습니다. 왜 성령을 쫓아 진리에 동의하기 어려울까? 여러분 진리에 동의하여 승리하기를 축복합니다.

 

성령님과의 실제적인 교제 왜 어려울까? 제가 보니까 그중의 하나는 권위의 문제입니다. 로마서 6장 16절에 보면 ‘우리가 무엇에 순종하던지 순종하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랬거든요. 영적인 법칙이 있습니다. 내가 뭔가에 자꾸 순종해 주면 내가 순종해준 그것이 내 삶에서 권위를 갖게 된다는 겁니다. 두려움의 문제에 내가 자꾸 두려움의 감정에 순종해줬더니 어느 날 두려움이 내 삶을 사로잡았습니다. 일어나지 않을 일에도 생각해보면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음에도 불구하고 감정이 내 삶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죄에 대하여 자꾸 넘어져서 죄에 반응하고 어느 날 자기가 의지를 들여 죄에 자꾸 넘어가면 어떤 순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죄를 범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서 안 된다고 그럽니다. 왜요? 그 죄가 혹은 그 감정이, 그 욕심이 우리의 삶에 권위를 행사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오래전부터 권위를 두었습니다. 이 권위가 아주 무섭습니다. 제가 군대 생활할 때 3개월 고참을 몇 년 전에 만났습니다. 저보다 나이도 많지 않습니다. 저랑 똑같고 생일은 제가 빠른지도 몰라요. 어느 날 만났습니다. 저기서 제 이름을 부르면서 “야, 반갑다.” 그러면서 왔어요. 저도 “야, 예 반갑습니다.” 이러면서 제가.. 만났더니 저한테 “야, 너하고 나하고 친구인데 말 낮춰. 우리 서로 친하게 지내자. 이제” “어, 그래야죠.” 제가 악수하면서. 권위가 뭔가 제가 절박하게 깨달았습니다. 이게 참 그렇구나. 우리가 그것에 권위를 주면 육체가 우리의 삶에 권위를 가지고행사합니다. 그래서 순종이 쉽지 않습니다. 근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조금 있다가 보시면 알겠지만 그것을 주님이 처리해놓으셨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을 봅시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여러분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 교제하는 삶, 성령을 쫓아 행하는 삶에 있어서 너무나도 핵심적인 한 가지 요소는 십자가에서 주님이 이루어 놓으신 일을 믿음으로 신뢰하여 나아가야 됩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의한 삶입니다. 십자가에서 주님이 어떤 일을 이루셨습니까? 그 육체와 함께 죄 된 본성(sinful nature)과 함께 거기서부터 나오는 감정 그리고 욕심 이미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으셨다. 이미 끝장 내셨습니다. 이미 끝났습니다. 우리가 그 권위아래 있는 것은 속은 겁니다. 사실 우리가 그 권위아래 자유하지 못한다고 아직 안된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렇게 말하십시오. 주님이 이미 끝장내셨다. 사실 이것이 십자가에서 이루실 일이 아니고 이루어진 일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염두 해둘 때 성령에 의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거기 5장 16절부터 18절까지는 성령을 쫓아 행하라고 가르치고 있고 19절부터 21절까지는 육체를 쫓을 때 육체의 열매를 말하고 23절, 24절은 성령의 열매에 대하여 말하면서 24절에 바로 그걸 말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 수 있는 그렇게 25절에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을 인도하심을 받는 삶이 가능한 이유는 ‘십자가에 주님이 처리해 놓으셨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미 주님이 감당하셨습니다. 끝장내셨습니다. 안된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속고있다.’이렇게 생각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또 다른 문제는 무지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사실을 잘 모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 그랬잖아요. 근데 진리를 알아 이론으로는 압니다. 그래서 어떤 자매 같은 경우는 제가 기도해주면서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서 그래서 죄책감에 대해 설명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피식 웃더니 뭐라고 그러는가 하면 “목사님, 다 알아요.” 그런데 죄책감에 여전히 눌리는 겁니다. 안다는 말은 어디서 알아요? 지성에서 알아요. 그러나 안 된다는 것은? 감정이 안 된다는 겁니다. 그거 왜 안 되는 겁니까?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음을 선명하게 깨달을 뿐 아니라 그 권위로 권위아래 우리가 있음을 우리가 이해하고 사실 그 뒤에 제가 살펴볼 우리가 주님에 대해 살았고 주님의 능력의 하나님이심을 아는 것이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순종할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다섯 번째, 주님이 이미 우리의 문제를 처리하셨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 말씀에 감정과 욕심의 문제를 그래서 로마서 6장 14절에 보면 우리는 더 이상 죄가 우리 삶에서 왕 노릇 할 수 없다. 죄의 왕 노릇은 끝났다.

 

로마서 6장 14절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 음이니라.

 

죄의 왕 노릇은 끝났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의 권세아래 있지 않습니다. 권위를 주님이 깨뜨리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못 박아 버렸습니다. 이미 사형선고를 내리셨습니다. 끝장났습니다. 그래서 끝장난 것으로 간주해야 됩니다. 로마서 6장 11절부터 14절까지 읽어보면 거기에 명백하게 나옵니다. 주님이 이미 처리해놓으셨습니다. 그걸 간주하고 서셔야 됩니다. 이미 이겨놓으심을 이해하고 가셔야 됩니다. 순종할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6장 11절을 보면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고 하나님에 대하여 산자로 여길지어다.’그랬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있습니다. 한번 따라 합시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이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대하여 우리가 살았습니다. 이 말은 엄청난 의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성령님 없이는 고아처럼 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아셨기에 또 다른 영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히브리서 4장 16절에 보면 우리에게 은혜가 없이는 살수 없음을 아셨기에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오라.'

 

히브리서 4장 16절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그러면서 에베소서 1장 7절, 2장 7절에 반복적으로 여러 곳에서 하나님이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심을 베드로전서 5장 10절에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심을 반복적으로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이란 말은 ‘슈카이론’이라는 말인데 ‘시기적절한 은혜’입니다. '그때그때 필요한 은혜' 사실 우리 힘으로 안 됩니다. 손 한 번 들어보세요. '내 힘으로 안 되는 영역이 있다.' '내 힘으로 이 부분 절대로 안 되는 것을 나는 안다' 손들어 보세요. 손들고 이렇게 말하세요. '바로 그 부분에 때를 따라 돕는 은혜가 필요하다' 그 은혜를 구하시고 구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절박하게 이 부분이 내 자원으로 안 됩니다. 주님 그 부분에 주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 부분만 아니라 모든 부분에 필요한데 특별히 어떤 때는 필요 없는 영역이 있습니다. 저는 잠자는데 은혜가 필요 없었던 사람입니다. 저는 누우면 5분 안에 자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엄청 사랑하심을 제가 압니다. 왜냐면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셔서, 그런데 언제는 3주간에 걸쳐서 잠을 못 잤습니다. 집회만 나가면, 집에만 오면 곯아떨어지는데 그래서 왜 그런가 어느 날 마지막 3주째는 몸이 아팠습니다. 잠을 계속 못자니까 새벽5시에 새벽 기도하는데 새벽2시까지 잠을 못자기도 했습니다. 몸이 아파버렸습니다. 마지막 날 무엇이 문제인지 하나님 앞에 계속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자는데도 은혜가 필요하다' 그동안 은혜로 잘 잤음을 깨닫게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여러분이 웃거나 말거나 하지만 깨닫는 순간에 그 다음부터 집회가면 숙소에 들어가자마자 제일 먼저 하나님 잘 수 있는 은혜를 부어주시옵소서 기도합니다. 그다음부터 또 잘 잡니다. 그것을 전 개인적으로 배웠습니다. 전 그 영역에 은혜가 필요 없었습니다. 그런데 은혜임을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심을 모든 삶의 영역에서 은혜가 얼마나 절실히 필요한가를 보는 왜요?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있기 때문에 우리가 누구인지 하나님은 아세요. 그러니까 내가 주님 앞에 은혜를 구하며 믿음으로 나아갈 때 주님이 우리를 도우십니다.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으신다 말입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하나님께 살아있음을 더더욱 알면 어떻게 합니까? 기쁘시게 하기 원하는 열망과 열정이 부어지기 때문에 죄를 미워하는 마음이 우리 가운데 자라갑니다. 그뿐만 아니라 또 한 가지 우리가 순종할수록 우리가 점점 성숙하게 됩니다. 히브리서 5장 14절에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히브리서 5장 14절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 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하루아침에 우리가 성령님을 쫓아가는 일이 잘 안됩니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우리가 육체에 우리의 권한을 주었기 때문에 육체를 쫓아가는데 익숙했기 때문에 하루아침에 안 됩니다. 그래서 여기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데 NIV성경을 보니까 많은 사용을 통해, 경험을 통해 영적으로 성숙되어져 감을 말합니다. 경험을 통해 훈련된다. 연단을 받으라는 말이 그런 의미입니다. 넘어졌다가 실패했다 또 진리에 동의했다 근데 아까 우리가 육체에 순종하면 육체가 우리 삶에 뭘 행사한다고요? 권위를 행사합니다. 근데 우리가 성령을 쫓아 행하면 점점 성령님께서 우리 삶에 뭘 행사합니까? 권위를 행사합니다. 이게 영적 성숙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는 어렵지 않게 됩니다. 점점 진리를 따라 사는 삶이 별로 어렵지 않게 되는 겁니다. 아, 모든 부분에서가 아니라 많은 경우에 그러니까 영적으로 성숙되는 겁니다. 점점 쉽습니다. 점점 편안합니다.

 

여섯 번째, 성령을 쫓는 것은 생각에서부터입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쫓아 행하는 삶에 아주 중요한 요소 성령을 쫓는 것은 생각에서부터입니다. 로마서 8장 5절부터 8절까지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로마서 8장 5-8절

5.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여러분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가 성령님을 쫓는 건 생각 속에서부터 있는 것이라는 겁니다. 진짜 이 생각이 중요합니다. 영적전쟁의 95%는 생각 속에 있습니다. 생각으로 올라올 때 처리해 버려야 됩니다. 이 생각을 통해 무엇으로 발전합니까? 행동으로 갑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사실 성령님을 쫓는 것은 머릿속에서 대부분 일어납니다. 내가 성령을 쫓을 것인가 육체를 쫓을 것인가 머릿속에서 일어납니다. 어떤 경우에는 성령님을 근심케 하는 것이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경우가 되게 많습니다. 죄를 예를 들면 시기질투의 생각 그렇죠? 누구를 미워하는 생각 이게 다 생각의 영역입니다. 생각 속에서부터 빨리 빨리 정리해야 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은 생각은 빨리 빨리 청소해야 됩니다. 저는 아침마다 일어나든지 저녁마다 혹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배자로 설 때 생각 속에 뭐가 있는지를 자꾸 살핍니다. 생각 속에 뭐가 있는지 그래서 끊습니다. 어떤 때는 사람에게 섭섭한 생각이 있잖아요. 절대로 그냥 두고 가지 않습니다. 그게 발견되면 어떻게 해서든지 해결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그 문제를 봅니다. 여러분 생각을 통해서 정리가 참 필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도 생각을 통해 정리합니다.

 

우리가 죄책감의 문제. ‘왜 죄책감을 가지고 있어야하는가. 주님이 담당하시지 않은가. 그럼 내가 죄책감을 갖는 것이 옳은가, 안 옳다. 그러면 죄책감의 원인이 뭔가. 죄구나.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회개하라고 그랬지. 회개하면 주님이 용서하신다고 그랬는데. 그리고 내가 원래 그런 자이니까 이 영에게 주님의 은혜가 필요하지 않은가. 나를 나보다 더 잘 아시는 주님께서 붙드시지 않을까.’ 생각을 통해서 정리하는 겁니다. 여러분 생각이 복잡한 사람이 있습니다. 겉모습은 멀쩡한데 머릿속이 전쟁터이신 분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자기혼자 생각이 정리 잘 안 되면 꺼내 놓으세요. 친구, 동역자 불러놓고 거기다가 다 꺼내놓으세요. 생각에 있는 것. 그래서 옆에 친구, 동역자가 들으면서 이건 쓸 만한 것, 이건 쓰레기 골라주시면 쓰레기들은 다 버리십시오. 그리고 진리에만, 쓸 만한 것에만 아니, 쓸 만한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에는 동의하십시오. 그것만 주워놓고 다른 것은 다 버리세요. 참, 눈에 보인다면 너무나도 좋겠지만. 생각을 지켜야 합니다. 생각을 뛰어넘지 마십시오.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에 95%는 생각 속에 있습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믿음으로 생각하고 믿음으로 말하고 믿음으로 행동했습니다. 믿음의 생각이 믿음의 말을 내뱉습니다. 믿음의 생각이 믿음의 선택을 하게 됩니다. 생각이 중요합니다. 사고의 영역을 그냥 무주공산으로 내버려두지 마십시오. 생각의 영역에 철저하게 성령님께 주도권을 드리기로 결단하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자리에 여러분 서십시오.

 

3. 성령님과의 교제와 사역

우리의 신앙은 성령님과의 친밀함 가운데 그분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삶입니다.

첫 번째로, 예수님의 삶에 나타난 친밀한교제와 사역을 볼 수 있습니다. 성령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우리가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그 음성에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사역과 관련해서 그 부분을 우리가 더 분명히 볼 수 있는데요. 요한복음 5장 17절에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요한복음 5장 17절, 19절, 20절

1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 시매

19.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 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20.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이 부분은 어제 밤에도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서 살펴볼 때 잠깐 봤습니다. 여기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 된 병자를 치유하신 그 이후에 안식일 날 침상을 들고 걸어가라 한 것 때문에 바리새인들과 시비가 붙어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버지가 일하신다. 안식일 날 아버지가 일하셨다. 그래서 나도 일한 것이다.” 유대인들이 그런 논쟁을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안식일에 일을 하시나 안하시나 논쟁할 여지도 없이 안하신다고 결론을 내릴 뻔 했는데 안식일 날도 사람이 태어나고, 안식일에도 죽습니다. 그러니까 일을 안 하시는 것은 아닌 것 같고 그래서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고 합니다. 안식일에는 두 가지 일만 하신다. 태어나고 죽는 일만. 근데 사실 진정한 안식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에 그러한 일을 주님이 일을 하시죠.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도 일하신다. 그러면서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이 말이 정말 중요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스스로 안한다가 아니라 스스로 할 수 없다. 이 말씀을 반복적으로 요한복음에 말씀합니다. 주도권이 내게 있지 않다 이 말씀입니다. 동역자의 삶입니다. 하나님이 주도권을 잡으시고 하나님의 의중을 보이실 때에 예수님께서 그 일에 삶을 드리는 그러면서 네 번째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가 행하시는 그것을 나도 행한다.” 친밀한 교제가운데 하나님이 행하심을 보고 그 일에 자신의 삶을 드려 순종하여 하나님 사이즈의 일을 이루신다. 이걸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날 베데스다 연못가에 38년 된 병자를 치유한 배경에 뭐가 있느냐? 친밀한 교제가운데 수많은 환자들 가운데 38년 된 병자를 치유하시기 원하는 아버지의 뜻을 의중을 예수님께서 아신 겁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으로 원스텝하여 38년 된 병자에게 침상을 들고 걸어가라고 명하셨고 그러므로 치유된 것입니다. 모두가 치유된 것은 아닙니다. 이게 바로 그 예수님의 사역이며 친밀한 교제로 우리가 해야 될 우리의 사역의 모델이십니다. 그러면서 거기에 다섯 번째로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셔서 아들에게 아버지의 일을 다 보이신다.” 친밀한 사랑의 관계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삶을 조정하여 순종했더니 열매를 맺었더라. 그렇죠? 우리가 바로 이런 사역을 감당해야 됩니다. 예수님께서 반복적으로 “나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렇게 쭉 이야기 하시다가 요한복음14장 10절 이하에 동일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한 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아버지가 내 안에 그 일을 이루신 것이다.” 라고 하면서 “너희가 나를 믿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인하여 나를 믿으라.” 이러면서 12절에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며 이보다 더 큰일도 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그래서 어제 예수님의 사역과 관련해서 요한복음에서 집중적으로 말하는 복음은 포도나무의 삶이다. 이 부분을 어제 들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사역입니다. 우리의 사역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것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가운데 성령님과 교제하며 동행하는 가운데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우리가 믿음으로 원스텝하고 순종할 때 하나님 크기의 열매기 맺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초대교회의 사역도 그랬습니다. 사도행전 8장에 보면 빌립이 에디오피아 내시 간다게를 전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근데 그가 광야로 가게 된 것도 성령의 이끌림을 받았다면 거기 가서 에디오피아 내시 간다게는 국고를 맡은 사람으로서 오늘날로 말하면 재무부 장관쯤 되는 그런 사람으로서 그가 마차를 타고 가는데 거기 주변에 틀림없이 군인들이 호위하며 갔을 거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쉽게 다가가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때 성령께서 “가라!” 말씀하셨죠. 그래서 29절에 보면

 

사도행전 8장 29절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주도권을 누가 가져요? 성령님이 가지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실 때 빌립이 나아가 순종했더니 하나님 사이즈의 열매가 맺힌 겁니다. 이게 우리의 사역이라는 겁니다. 좀 전에 삶을 앞에서 말했다면 이제 사역입니다. 동행하는 삶,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는 삶. 사도행전 10장 19절에도 보면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인도하심을 받은 배경이 나옵니다. 근데 거기에서도 보면 베드로가 여섯시에 일어나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그때 사도행전 10장 19절에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서 환상을 보이십니다. 각종 부정한 짐승이 보자기에 담겨서 내려오면서 “잡아먹으라.” 두 번이나 “먹을 수 없나이다.” 하니까 두 번이나 내려왔습니다. 그 환상이 뭘 의미할까 생각할 때 ‘성령께서 저더러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내가 저희를 보내었느니라.’

 

그러니까 고넬료의 집에서 사람을 보내신 분도 누구냐? 성령님이십니다. 베드로에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보내신 분도 누구냐? 성령님이십니다. 환상을 보게 하시고 사실 이 환상은 매우 의미 있는 환상입니다. 왜냐하면 이방인 전도의 시작, 태문이 열리는 배경이 사도행전 10장입니다. 베드로는 이방인을 위한 사도는 아니었습니다. 근데 예루살렘 교회의 리더로서 또 예수님의 수제자로서 그가 이방인 전도가 하나님의 뜻임을 알지 못하게 되었다면 이방인 교회와 예루살렘 교회는 연합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보이시기 위해서 성령님께서 일하신 겁니다. 성령님이 주도권을 가지고 인도하시는 과정에 우리가 이 민감함을 가지고 순종하며 따라가는 삶이 되는 이것이 우리의 삶에 아주 중요합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감동을 주시는가 하면. 감동을 받을 때 대게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 감동은 대게 닭이 알을 낳듯이 나온다고 표현합니다. 우리에게 없던 생각이 쑥 들어옵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과정은 다양합니다. 환상을 통해서, 꿈을 통해서, 지체를 통해서, 상황을 통해서, 또 감동을 통해서, 여러 가지 다양합니다. 그런데 가장 일반적으로 보는 것이 감동을 통해서 많이 봅니다. 그런데 감동은 어떻게 오느냐 하면 닭이 알을 낳듯이 옵니다. 왜 그런 표현을 하느냐 없다가 갑자기 생기거든요. 없다가 어떤 생각이 쑥 들어와요. 어떤 때는 세미한 음성으로 들어오기도 하고 어떤 때는 문장으로, 어떤 때는 단어로, 어떤 때는 그림처럼 오기도 하고 생각처럼, 느낌처럼 오기도 하고 쑥 들어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믿음으로 순종하여 나아갈 때 이제 그걸 많은 경우에 본인은 확신합니다. 사도행전 19장 22절에 보면 바울사도 같은 경우는 ‘성령의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간다.’ 그러거든요. ‘성령님이 강권하여 간다.’ 라는 표현입니다. NIV 성경에 보면 뒤에 보겠지만 우리말 성경에는 그게 성령이라고 번역하는데. 그러니까 이게 바로 초대교회의 사역입니다.

 

주신 감동을 따라 우리가 믿음을 원스텝하는 제가 이번 집회 전에 갑자기 이런 감동을 성령님께서 주시더라고요. 지난주 월요일이었습니다. 설교준비를 하다가 약간 피곤하고 주일날 밤에 늦게까지 준비하고 그러다가 월요일 낮에 낮잠을 살짝 누웠는데 피곤해서 쉬려고 누웠는데 잠이 살짝 들었는데 갑자기 또렷하게 제 안에서 예향교회 어느 지체에게 전화하라고 그러는 것 같았습니다. 전화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제가 어제 만났습니다. 식사자리에서 같이 보면서 이야기 나눴습니다. 근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것 같은데 전화하라는 감동이 전화하라는 빨리하라고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근데 이건 내 생각일꺼야. 근데 많은 경우에 제가 경험해볼 때 전화를 해야 됩니다. 근데 잠이 살짝 들었을 때라 이거 전화를 해야 되는데 그러고는 자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딱 한 시간쯤 뒤에 전화가 왔는데. 전화를 보니까 그 형제였습니다. 그래서 전화를 켜서 받아보니까 아주 급박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전화하라고 그랬을까? 그때 기도가 필요했던 것 같았습니다. 아주 급박한 상황에 그래서 제가 일어나자마자 하나님께 그 전화 받고 회개했습니다. 감동에 순종하지 못한 것을 용서해달라고. 많은 경우에 그렇게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과정을 되게 많이 경험합니다.

 

주신 감동에 우리가 민감하여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놀라운 하나님 사이즈의 열매를 우리를 통하여 이루길 원하고 또 만들어 가시는 역사를 경험할 수 있는데 우리가 잘 안합니다. 성령님께 어린아이처럼 ‘내가 순종하며 따라가겠습니다.’ 하는 그 자세를 가지고 서는 것이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처음에 두 자세를 일부러 살핀 것이 그거라니까요. 하나님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원하는 열망과 주도권을 드리는 삶. 주님의 뜻이라면 전부가 되기 원하는 이런 자세가 있을 때 주님이 말씀하실 때 우리가 기꺼이 서기를 원합니다.

 

세 번째 우리가 순종할 때 하나님 크기의 열매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2절에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며.” 이렇게 말합니다.

 

요한복음 14장 12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우리가 순종할 때 하나님 사이즈의 열매가 열립니다. 여기 사도행전에 보면 예수님의 사역을 보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갔던 사역에는 전부다 하나님 사이즈의 열매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16장 6절 이하를 보면 바울사도가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기를 힘씁니다.

 

사도행전 16장 6절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그런데 성령님께서 아시아에 복음을 전하는 것을 허락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환상 가운데 마게도냐로 오라고 손짓합니다. 마게도냐 사람이 손짓. 그래서 마게도냐로 갑니다. 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있습니까? 빌립보에 가서 자주장사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성령님께서 말씀을 청종케 함으로 그곳에 교회가 시작되는 토대가 시작되고 그리고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이 오고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런데 그 감옥에서 문이 열릴 때 도망갑니다. 진짜 바울사도는 성령님께 민감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 같으면 문 열리면 이게 웬 떡인가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러고 뛰쳐나왔을 겁니다. 우리는 참 그렇습니다. 어디까지는 성령님의 인도를 받고 환경이 열리면 육신대로 가고. 그게 우리입니다. 그러니까 계속 묻는 겁니다. 이게 참 필요합니다. 기도사역하면서 참 중요합니다. 여기 성령님 오시옵소서. 어떤 감동을 주시면 초청하고 기도사역 합니다. 저희 그냥 하는 것 같잖아요. 그냥하지 않습니다. 계속 묻습니다. 성령님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어떻게 하길 원하십니까? 성령님 지금 누구를 기도하기 원합니까? 저 같은 경우도 이렇게 서서 기도할 때 아무나 안합니다. 누구를 할까요? 자꾸 묻고 돌아다닙니다. 주신 감동이 있으면 합니다. 물론 다 해드려야 하는데 합니다. 그런데 우선순위로 하나님이 만지기 원하는 이렇게 따라갑니다. 자꾸 묻는 것이 필요합니다. 주도권을 드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하기를 원하는지, 무엇을 하기 원하시는지, 뭐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리인지, 어디로 가야할지 이런 부분을 자꾸 묻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할 때 하나님 사이즈의 열매가 맺힙니다.

 

바울사도는 그렇게 따라가다가 엄청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합니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을 빌립보 간수를 전도하게 되는 경향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아나니아가 환상 중에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할 때 무슨 일이 벌어집니까?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가운데 기도할 때 예수님께서 환상 가운데 나타나 훗날 바울이 되는 사울을 전도하는 통로가 됩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았다면 그 선입견에 그 자리에 갔을까요? 절대로 안 갔을 것입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을 핍박하는데 내가 어떻게 가. 잡히면 나부터 죽게? 근데 성령님께 민감하여 주님이 하시고자 하는 의도를 따라 순종하고 나아갈 때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자꾸 물어야 됩니다. 주도권을 드리고 동행하는 삶.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다.” 우리가 이런 찬양을 합니다. 그때 제가 사람들의 입을 잘 봅니다. 이런 거 있잖아요. “순교자의 삶을 사는 이에게” 입을 쳐다봅니다. 진짜 순교하려고 작정하고 가시는지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계산해 봐서 내 뜻에 맞으면 가고 아니면 안가겠습니다. 우리가 전적으로 순종하여 서는 삶.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진짜 그런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 기쁘시게 하기 원하는 열망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 임재를 따라

 

네 번째 순종에는 항상 대가가 따라갑니다. 그리고 위험 부담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요소를 감안해야 됩니다. 골로새서 1장 24절을 보면

 

골로새서 1장 24절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바울사도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운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주님의 뜻을 따라 순복하고 따라가는 삶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릅니다. 바울은 시내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도적의 위험과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는 죽을 뻔한 위기를 무수히 많이 넘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자신의 삶 전체를 드려 주님의 그 고난에 동참하기를 원했던 역사들을 볼 수 있습니다. 한 예를 볼까요? 사도행전 20장 22절부터 24절까지를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행전 20장 22-24절

22.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 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여기 심령이라는 단어는 “푸뉴마티”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심령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고 성령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 정황을 볼 때 문맥을 볼 때 성령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옳습니다. 실제로 많은 영어 번역은 성령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 을 마치려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사도가 어떻게요? 성령의 매임을 받았다. 영어 성경을 보니까 강권적인 성령의 역사인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23절에 보니까 뭐라고 그랬어요? 결박이 기다린다고 성령님이 증거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우리는 성령님이 “너 저기가면 결박이 기다린다.” 그러면 가요? 안가요? 주님 뜻인지 묻습니까? 안 묻습니까? 우리는 안 묻습니다. “아이고, 주님의 뜻이 명백한데 뭘 묻긴 물어.” 안 가는 거지. 근데 바울사도는 그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실제로 사도행전 23장에 보면 또 뒷부분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합니다. “네가 예수살렘에 선 것처럼 가이사 앞에 서야 하리라.”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그 일을 순종하고 갑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성령님께 주도권을 드려 사역을 감당할 때도 동행하는 삶에 있어서도 진짜 중요한 것이 대가를 지불하려는 자세입니다. 근데 그 대가가 뭡니까? 24절에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랬습니다. 그게 자기의 사명이고 부르심의 목적이고 그 부르심의 목적을 따라 주님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심에 기꺼이 동조하여 기꺼이 순종하여 나아가는 생명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여러분 우리가 성령님께 민감하기 원한다면, 성령님과 교제하기 원한다면, 성령님과 더 깊이 동행하기 원한다면 창피를 받을 수도 있고, 어떤 때는 위험 부담을 감수할 수도 있고, 어떤 상황일지라도 기꺼이 주님의 길에 서셔야 됩니다.

 

제가 지금 섬기는 예향교회에 오고 얼마 안돼서 새벽에 기도하는데 계속 앞에 있는 아파트 몇 호로 가라는 감동이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세요. 진짜 죽겠더라고요. 제가 노방전도에 익숙하지 않거든요. 특별하게 대면하지만 어느 집에 문 두드리고 들어가서 갑자기 전도하는 것에 훈련이 되어있지 않아서 가라고 하는데 참 쉽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가야 되는데 주님, 가야 되는데 그랬더니 어느 날은 세 번이나 똑같은 감동이 있다가 어느 날은 그만두라는 감동이 있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이제 가야 된다고 제 아내에게 가자고 했더니 혼자가지 그래서 여자만 있는데 어떻게 혼자 가느냐고 같이 가자고 그래서 제 아내와 같이 갔습니다. 감동은 첫 번째에 순종해야 하는데 첫 번째 순종 안하면 호수가 헷갈립니다. 그래서 제일 위에서부터 가자 그래서 위에서부터 한집 갔더니 없습니다. 두 번째 갔더니 그 집에 초인종을 누르니까 문을 딱 여는데 족자에 불자가 한문으로 크게 써있었습니다. 아이고, 아닌가 싶다. 가기 전에 두 가지 감동을 주셨거든요. 그 집에 무릎이 많이 아프고 그 집에 누가 아픈 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감동하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가서 봤는데 “어디서 왔느냐” 해서 “목사인데” 라고 하니까 누가 급하게 뛰어나오며 언니래요. 내 동생 전도하라고. 그래서 전도했습니다. 하는데 이분은 받아드릴 준비가 안 되어 있는 그런데 하나님께서 감동하셔서 왔다고 종교성 있는 분들에게는 그대로 말하는 것이 통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혹시 무릎 아프세요?” 그랬더니 그분의 자세가 순식간에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가정에 아픔이 있는데 남편이 아픈 그런 부분을 성령님께서 감동하셔서 그 이야기를 나누는데 훨씬 더 받아드리는 여러분 사실 우리가 감동을 따라 순종하는 일에 아무 일도 없으면 어떻게 합니까.

 

제가 과거에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어떤 때는 노이로제처럼 성령님이 무슨 감동을 주시나 처음에 배울 때는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을 따라갈 때는 많이 그러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가다가 “정읍휴게소 여자화장실 몇 번째 칸에 들어가라” 그러시는 것 같아가지고 남자화장실이면 제가 혼자 가서 열어보면 아무도 모르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여자화장실이라 제가 들어갈 수도 없고 함께 간 사모님께 여쭤봤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모님은 조심스럽게 가서 보니 누가 안에 있어 두드리니까 안 나와 근데 안에 물어보니 아무 일도 없는 겁니다. 얼마나 창피하던지. 나중에 제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하나님께서 그러시는 것 같았습니다. “네가 순종하는지 보려고 그랬다.” 어제 같은 경우에도 제가 누워서 쉬는 시간을 잠깐 갖는데 일어나라고 하시더니 나오라고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나와서 여기 앉아있는데 기도하라고 예배를 위해, 집회를 위해 기도하라고 근데 기도를 별로 못했습니다. 이분저분 오셔서 만나고 인사하고 어제 밤에 여목사님이 시작하면서 기도해 드리자마자 안일함, 어제의 기름부음이 오늘을 보장하지 못한다고 우리가 깨어 있어야 되는데 깨어있지 못했다고 그 말을 딱 감동을 받는 순간 좀 전에 하나님께서 왜 여기에 오라고 하셨는가를 제가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민감하여 인도하심을 받아가는 일 어떤 때는 쉽지 않습니다. 편안하게 쉬고 싶은 것을 포기하고 어떤 때는 우리의 삶 전체를 걸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더 민감하여 주님을 따라가는 삶. 그때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하나님 사이즈의 열매를 이루십니다.

 

4. 성령님과 더 깊은 교제가운데 있기 위한 우리의 자세

 

사실 여러분 오늘날 교회 가운데 진짜 성령님을 우리가 어떤 의식이나 방법으로 여긴다면 우리가 진짜 올바르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우리가 성령님께 우리의 삶의 주도권을 드리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예수님이 그렇게 사역하셨다면 우리가 그렇게 사역해야 됩니다. 마태복음에 보셨잖아요.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치고 그대로 살게 하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그대로 가야 됩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성령님에 대한 주도권을 완전히 빼앗긴 상태로 있다면 너무나도 심각한 상태입니다.

 

성령님과 더 깊은 친밀한 교제가운데 있기 위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세 가지 중 첫 번째로는 성령님을 근심케 해서는 안 됩니다. 에베소서 4장 30절에 성령을 근심케 하지 말라. 성령님을 근심케 하는 것이 뭘까요? 성령님을 의식하지 않는 겁니다. 무시하는 겁니다.

 

에베소서 4장 30절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사실 성령님을 근심케 하는 것 중에 한 부분이 성령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무시하는 것은 성령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 에베소서 6장 18절에 보면 그렇게 말하고 있는데. 우리가 성령님을 무시하는 것은 뭐죠? 철저하게 진리를 따라가려고 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가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으려고 오셨고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진정한 승리와 능력의 삶을 살게 하려고 우리를 이끄시는데 우리가 성령님을 의식하지 않고 산다면 자기 방법으로 나아가며 자기의 자원으로 사는 자리로 돌아가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시는데 우리가 성령님을 무시한다면 우리 그런 그림이 있잖아요. 우리 마음을 가리키고 의자가 하나 있고 그 곳에 성령님이 앉아 계시고 내가 그 앞에 무릎 꿇고 있는가? 아니면 내가 앉아있고 성령님이 그 밑에 있는가? 아니면 성령님은 밖에 계시고 내가 왕 노릇 하는가? 여러분의 그림은 어디입니까? 성령님이 의자에 앉아 계시고 내가 그 앞에 무릎 꿇고 있는 이런 설교를 들으면 그렇게 합니다. 그 다음 순간 우리가 성령님을 무시하고 엉덩이로 밀어버리고 우리가 그 자리에 앉는 사실 우리가 존중하는 부모님 또 어른이 집에 오셨다면 우리는 어른을 철저히 인정하고 그러잖아요. 내가 자녀 집에 갔더니 자녀가 안방에 모셔놓고 오셨냐고 환영하더니 그 다음순간 먹을 것도 자기들끼리 먹고 좋은 일하러 갈 때도 자기들끼리만 가고 그러면 얼마나 화가 나겠어요. 사실 성령님을 우리가 의식하지 않는 것, 무시하는 것 이게 바로 성령님을 근심케 하는 가장 주된 요인 중의 하나인 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성령님을 존중히 여기십시오. 존중히 여기셔야 합니다. 성령님은 주권자이십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무시하는 것 가운데 한 가지가 뭐죠? 성령님을 단순한 능력이나 우리를 깨닫게 하시는 감화력 정도로 생각하는 이런 것이 성령님을 근심케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의식하지 않은 뿌리 속에는 또 뭐가 있냐면 거짓 신앙체계가 거기 있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자리에 가 있는 것이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철저하게 자기 자원에 빠져서 자기중심적인 자리에 머물러 있는, 자기의 힘과 자기의 능력을 의존하는, 자기의 방법을 의존하는 이런 것이 너무나도 심각합니다. 사실 자기중심적인 자리에 가있으면 좀 전에 우리가 봤지만 성령님을 자기의 목적을 위해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수단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성령님께 주도권을 드리기 보다는 필요할 때만 성령님을 찾습니다. 깨닫게 해달라고, 은사를 부어달라고, 능력을 나타내 달라고 그리고 평상시에는 성령님을 안 찾습니다. 그 분은 주권자이십니다. 여러분이 그런 구조가운데 있다면 전환되어야 합니다. 사실 성령님이 과거에 여러분에게 능력으로 임하셨고 인격적인 성령님과 개인적인 친밀한 교제가운데 있다가 또는 은사가 여러분 가운데 부어졌는데 그 다음순간 그런 것이 다 그치고 임재가 끊어졌다면 성령님께 여러분이 주도권을 드리는 삶 보다는 여러분 자신이 왕 노릇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분께 주도권을 드리기 보다는 내가 나 스스로 그 일을 하려고 하는 그것이 주된 요인 중의 하나였을 거라고 저는 분명히 봅니다. 그 자리에 있지 않은지 잘 살펴보셔야 됩니다. 성령님을 근심케 하지 않는다는 것 거짓 신앙체계에 빠지면 철저하게 성령님께 주도권을 드리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자기자원으로 사려는 형태입니다. 율법주의가 자기자원, 기복주의는 자기 목적을 위해, 인본주의는 자기 길로 결정해서 가는 것입니다. 전혀 성령님이 없는 삶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 3절에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3장 3절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율법주의입니다. 성령님이 없는 삶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자기자원의 삶을 살기 때문에, 그 다음에 육체 일에 우리가 빠지는 것이 성령님을 근심시키는 일입니다. 육체의 쾌락을 쫓아갈 때 육체적인 한 가지 예를 들면 텔레비전 같은 것, 신문 같은 것에 우리가 심취하고 시간을 잘 쓰지 않는 것 거기에 우리의 초점이 빼앗깁니다. 저는 국민일보 신문을 보는데 동아일보가 덤으로 옵니다. 어떤 때는 잘 못 보지만 보기 시작하면 두 개를 펴 놓고 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두 개 다 가십난까지 다 보려면 두 세 시간 걸립니다. 끝나고 나면 내가 뭐하는 거지? 이런 생각이 듭니다. 또 컴퓨터 같은 것 얼마나 쉽게 두 세 시간 순식간에 갑니다. 보고나면 그 생각에 머릿속이 사로잡힙니다. 보지 말라는 말이 아니지만 집중하게 되면 그게 쉽지 않다는 겁니다. 텔레비전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님이 기뻐하시는 길이 무엇인지를 찾고 그 자리에 서는 것 그다음에 또 뭐가 있냐면 성령님을 근심케 하는 것이 다양한 죄들입니다. 윤리적인 죄. 성령님은 죄를 미워하십니다. 성령은 거룩한 영입니다. 그런데 거룩함의 반대가 뭐죠? 죄잖아요. 불결함. 죄는 우리로 하여금 정결한 자리에 서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특별한 머릿속에 있는 윤리적인 실제 행동에 죄를 짓는 사람도 있지만 그 죄로 가기 전에 머릿속에 생각 속에 죄의 유혹이 있을 때 얼른 정리함이 필요합니다. 행동으로 나오기 전에 머릿속에 있는 것, 생각 속에 있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생각 속의 시기 질투나 경쟁심이나 미움이나 어떤 분열의 마음이나 섭섭함이나 관계의 문제나 이런 죄들이 머릿속에 있을 때 해결하셔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가 우리 속에 사실 원마귀가 하는 주된 무기가 거짓말입니다. 거짓말을 우리에게 던집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따먹도록 손을 끌어다 한 것이 아니고 거짓말을 던졌습니다. 생각 속에 거짓말을 던질 때 우리가 그 거짓말에 반응하면 죄가 됩니다. 유혹에 반응하여 어떤 일을 원스텝하면 죄가 되는 겁니다. 우리가 그런 유혹이 올 때 끊어버리는 것이 가장 좋지만 그렇지 못할 때 그것이 생각으로 반응하여 죄로 발전했다면 거기서 해결해야 됩니다. 한번 따라 해보세요. “죄를 짓는 것과 회개하는 사이가 짧을수록 좋다.” 깨달은 즉시 돌이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 부분에서 신앙의 본질이 중요합니다. 하나님만 기쁘시게 하는 열망 가운데 있어야 이게 가능합니다. 그런데 저 같은 경우도 무진장 많이 경험해 봤지만 여러분 이런 경험 많으시죠? “이러면 안 되는데.” 그러고 안하잖아요. 그렇죠? “내가 이러면 안 되는데, 이거 하나님이 싫어하시는데.” 그러면서 또 한쪽에서 생각이 옵니다. 무슨 생각? 내 생각. 변호사의 음성이 막나옵니다. “나만 그런 것 아니야. 이번만 넘어가고.” 얼마든지 합리화적인 생각이 옵니다. 그러나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그 자리에서 무릎 꿇어야 합니다. 지금 들어야 될 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고름이 살이 되지 않습니다. 딱 끊고 돌이켜야 됩니다. 성령님께서 명백하게 깨닫게 하시는 즉시 돌이켜야 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나눠지면 신명기 30장 17절에 하나님을 떠나면 마음이 나눠집니다. 그러면 나타나는 가장 주된 특징 중의 하나가 뭐냐 듣지 않습니다. 하나님 음성을 듣지 않습니다. 듣지 않는다는 말은 반응 안한다는 말입니다. 순종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지금 성령님께서 죄를 깨닫게 하시는데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이런저런 합리적인 사고로 반응하는 사람 절대로 안변합니다. 제가 최근에 방문한 어떤 한분을 기도해 드리는데 그분 기도해 드릴 때마다 여러 번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자기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는 음성 듣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자기 것은 안 내리고 범위 밖에 것만 고치겠다는 겁니다. 삶이 실제로 굉장한 억압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볼 때에는 딱 이문제가 뒤집어져야 됩니다. 그런데 이 문제는 건드리지 마시오. 이겁니다. 그게 뭐냐면 내 체면일 수도 있고, 인간관계일 수도 있고, 변호사 때문일 수도 있고, 물질 일수도 있고, 자기 유익 때문에 이것 때문에 이런 사람 성령님이 백날 이야기해도 안 듣습니다. 이것이 뒤집어져야 되는데 중심이 하나님 앞에 하나님이 진짜 전능하신 분, 전지하신 분,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 주신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 그분 안에 모든 것이 다 있음을 안다면 기꺼이 손을 펴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백이 되셔야 됩니다. 하나님 앞에 완전히 주도권을 드리셔야 됩니다. 이야기를 해도 듣지 않습니다. 기도사역 할 때 이야기 나눠도 그다음에 기도하면 똑같습니다. 절대 안 폅니다. 주님이 하셔야 됩니다. 이게 뭐에요? 변호사의 음성이 끊임없이 올라오니까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겁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하면 해당되는 분들은 무슨 말인지 알 것입니다. 가야 되는데 하나님 편에서는 명백한데 내 스스로 안하려고 해. 그래서 올라와. 합리화의 이유를 찾아서. “이번 한번만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러는데 꼭 그래야 되나? 내가 그러면 손해날텐데 주님 이번만 봐주십시오.” 이렇게 넘어가. 되게 많습니다. 그런 분 아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깨닫는 즉시 돌이켜야 됩니다. 그게 성령님께 주도권을 드리는 겁니다. 성령님을 근심시키지 않는 겁니다. 성령님이 우리로 돌이키게 하기위해 깨닫게 하시는 것이지 전환시키려고, 바꿔가려고 그게 최선의 길이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안 폅니다. 어떤 때는 배우고자 하는 자세, 진짜 어린아이처럼 자존심을 다 내리라고 합니다. 나는 나름대로 자존심이 있는데 다 내리라고 그래요. 네가 가서 잘못했다고 그래. 난 잘못 하나도 안한 것 같은데.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올라옵니다. 내가 그랬나? 그 인간이 그랬지. 그러다가 이분 저분이랑 이야기해. 그럼 세상 적으로 이야기 해줘. 그거 맞지! 그러면 성령님을 무시해. 세상 적으로 옳아도 성경의 기준과 다를 수 있습니다. 성령님께 주도권을 드려야 됩니다.

 

그 다음에 관계의 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에 대하여 미워하는 마음을 품는 것. 이것이 아주 심각합니다. 누군가에게 섭섭한 마음을 품는 문제. 저 개인적으로는 치유와 관련해서 다루는데 가장 먼저 다루는 것 중의 하나가 영의 치유입니다. 그런데 관계의 문제가 전인 치유와 관련하여 영의 치유, 육신의 치유, 내적 치유, 귀신들림의 문제 이 네 가지가 전인 치유인데 함께 가는데 이 치유와 관계의 문제가 안 걸리는 게 없습니다. 관계로 인한 문제로 인하여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깨집니다. 사람을 용서 못하면 깨집니다. 왜 깨지는 줄 아세요? 하나님이 이렇게 가르쳤잖아요. 우리가 우리의 죄를 용서한 것처럼 하나님 우리의 죄를 용서 해주십시오. 주기도문에서 우리가 우리 형제의 죄를 용서할테니까 하나님 우리 죄를 용서 해주십시오. 용서가 원스텝입니다. 그러니까 미움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거라는 기대하지 마세요. 용서는 반드시 해야 됩니다. 이것이 육신의 질병 미움의 문제가 육신의 질병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신물이 넘어와 위장의 통증, 관절염 많은 경험입니다. 관절염 환자를 위해 기도할 때 관계문제와 관련돼서 여러 가지 귀신 들림의 문제, 내적인 상처 다 연결됩니다. 관계의 문제 반드시 해결해야 됩니다. 여러분, 용서는 선택해야 됩니다. 용서는 필수입니다. 필수적인 선택입니다. 내가 감정이 진리가 아니라 말씀이 진리라고 그랬습니다. 그렇죠? 느낌이 진리가 아니라 말씀이 진리입니다. 그 말씀에 따라 용서하는 것을 선택해야 됩니다.

 

용서의 느낌이 치유되는 것과 관련해서 아주 중요한 것이 두 가지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회개해야 됩니다. 미움의 감정이 하나님이 보실 때 얼마나 죄인가를 깨달아 애통함을 가지고 회개해야 됩니다. 미움의 감정을 하나님이 아주 싫어하십니다. 기뻐하지 않는 겁니다. 그건 죄입니다. 형제 미워하는 것이 죄인 것 아시죠? 그래서 절실하게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그분을 절실하게 하나님의 관점으로 축복해야 합니다. 원수까지도 축복하라고 했습니다. 그 상황을 아시는 하나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아버지. 그분에게 주도권을 드려 전적으로 축복하며 나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끊어야 됩니다. 불순종의 죄도 있습니다. 순종해야 하는데 순종하지 못할 때 우리는 얼른 그 부분에 대해서 깨닫게 하는 즉시 돌이켜 하나님 앞에 설 필요가 있습니다.

 

두 번째는 주님을 높이는 일이 필요합니다. 주님을 높여야 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높이세요. 성령 충만 하기 위해서 성령님과 더 깊은 교제가운데 있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을 높여야 합니다. 요한복음 15장 26절에

 

요한복음 15장 26절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 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성령님이 하시는 일이 뭐냐 예수님을 증거 합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에 성령님과 더 깊은 교제 가운데 있을 때 철저하게 예수님을 높입니다. 주님이 영광 받으십시오. 주님 홀로 높임을 받으시옵소서. 주님의 뜻을 이루시옵소서. 제가 온누리교회의 예수제자학교라는 곳에 갔었는데 거기서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강의했습니다. 강의하고 사역하고 그런데 가서 앉자마자 성령님께서 이것을 깨닫게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성령님은 그리스도를 높입니다. 예수님을 높입니다. 성령님을 이야기 하면 그리스도로 끝납니다. 그런데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은사를 이야기 하면서 성령님을 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들어낸다는 겁니다. 저에게 이 부분을 딱 깨닫게 하셔서 제가 절박하게 엎드려서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사실 은사 나누다 보면 경험한 이야기 하다보면 자기가 많이 들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강사가 들어나기 아주 쉽습니다. 그래서 주님만 들어나게 해달라고 절박하게 기도가 되어졌습니다. 우리가 성령에 의한 삶에 관련해서 너무나도 중요한 것이 예수님을 높이는데 우리의 온 열정을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높이려고. 예수님을 증거 하려고. 그러니까 우리가 주님을 높입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능력이 우리의 삶에 나타난다 할지라도 성령님과 동행하여 내가 순종할 때 하나님 사이즈의 열매가 나타났다 할지라도 그것은 내가 아니요 주님이라고 말하셔야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높여야 됩니다. 주님을 송축해야 됩니다. 에이든 토저가 쓴 “이것이 성령님이다.”라는 책을 보니까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라. 그렇게 함으로써 성령님과 깊이 교제하라. 우리가 그리스도를 높일 때 성령님은 우리 안에서 기뻐하실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높일 때 성령님이 우리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오시고 부드럽게 대하시고 우리와 대화를 나누신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이 되실 때 태양은 떠오르고 천국은 다가온다.” 주님이 우리 전부되실 때 주님을 높여야 됩니다. 주님께 영광 돌리는 삶. 그래서 요한복음 12장 26절에 우리가 존재를 다하여 주님을 찬양할 때 적극적으로 주님이 홀로 영광 받으시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며 주님의 통치와 능력의 역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요한복음 12장 26절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 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주님과 더 깊은 동행하기를 축복합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 뭔지 전반적으로 윤곽을 살펴보고 싶었습니다. 그것은 인격적인 성령님과의 실제적인 관계성이라고 그랬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열망 가운데 시작되고 주도권을 드리는 삶에서 우리는 그 일을 시작할 수 있다면 그 삶이 우리의 실제 그러한 성령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우리의 삶에서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가, 사역에서 우리가 어떻게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의 자리에 나아갈 수 있는가 하는 부분들을 살폈습니다. 저는 이 시대에 주님께서 주님의 교회를 세우실 때에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우리가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 한 층면이라면 다른 한 층면에서 성령님과 친밀한 교제가운데 주님의 음성을 듣고 삶을 조정할 뿐만 아니라 사역을 감당하며 하나님만 기쁘시게 하기 원하는 열망을 가지고 우리 삶 존재를 다해 주님께 동참하는 우리의 삶 전체를 다해 주님께 동참하는 그런 무리들이 우리들 가운데 더 많이 세워지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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