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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차 5강 성령의 은사

강의자료/컨퍼런스 정리

by 발의무리 2009. 7. 9.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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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차 컨퍼런스 <성령사역의 회복>

제5강 성령의 은사

 

- 김계현 목사 -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전체적인 그림을 그려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성령의 은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4가지의 퍼즐을 맞춘다고 마음에 염두 해 두시고 말씀 하나하나를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첫 번째 퍼즐은 성령의 은사에 관한 성경의 전반적인 이해(가치관)를 볼 것입니다. 여러 가지 가치관이 나옵니다만 12가지정도로 보면 평신도들이 이해하기 쉽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 번째 퍼즐은 성령의 은사의 종류입니다

세 번째 퍼즐은 은사의 단계입니다 교회에서 은사가 나타날 때 은사의 목적을 가장 극대화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어떤 조치들이 필요한가를 짜 맞출 것입니다

네 번째 퍼즐은 은사의 길입니다 어떻게 은사를 활용할 것인가에 대하여 볼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에 관한 4가지 퍼즐을 맞추면서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성경이 말하는 전체적인 이해들을 우리가 함께 취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성령의 은사에 관한 성경의 전반적인 이해(성경적 가치관)

(1) 성령의 은사란 하나님의 일을 효과적으로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수단이자 연 장(도구)이다.

사도행전 10장 38절 은사의 중요성을 간략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 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예수의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감당하실 때 성경은 무엇을 기술하였는가 하면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셔서 그 일을 했다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면서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셨는데 하나님이 함께 하신 그 모양이 성령의 은사라는 것입니다.

은사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하실 때 하나님의 역사를 펼치실 때 그 일을 효과적으로 하라고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연장(도구), 수단입니다.

예를 들면 냉이를 캘 때는 연필 깎는 칼이 필요하고 밭을 갈 때는 곡괭이, 호미가 필요하며 벼, 이삭을 벨 때는 낫이 필요합니다. 연장은 그때그때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우리보고 하라고 하실 때 예수님의 사역을 사도들이 그대로 감당했고 사도들의 사역을 오늘 우리가 그대로 감당해야 하는데 아무런 연장도 주시지 않으시면서 일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을 하라고 하실 때 반드시 연장을 주시면서 일을 하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밭을 갈라고 하시면 곡괭이라도 주시면서 호미라도 주시면서 밭을 갈라고 하지 맨손으로 갈아 이빨로 갈아 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벼, 이삭을 베면서 ‘보라 벌써 들판이 휘어져서 추수할 곡식이 많도다.’ 하시면서 그냥 가서 일해 하지 않으시고 낫이라도 주시면서 ‘이것을 가지고 열심히 일해’ 라고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은사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효과적으로 하라고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도구(연장)이자 수단이라는 것을 꼭 기억하십시오.

(2) 은사가 주어지는 목적은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함이다. ‘교회에 덕을 세운다’라고 말할 때 성경에 덕을 세운다는 말이 자주 등장합니다. 이 말은 덕담한다는 말이 아니고 잘 살아야 해 행복하게 살아야 해 부모님 오래 사십시오 건강하십시오 와 같은 말이 덕담을 나누는 것이 성경에서 나오는 덕을 세운다는 말이 아니라 성경에서 덕을 세운다는 말은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앞에 덕을 세운다는 말이나 하나님의 사람들을 세운다는 그 말은 저 사람을 저 영혼을 하나님 앞에 온전한 자로 세운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온전한 교회로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것이 은사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7절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사람으로 세우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은사를 부어주신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교회를 덕을 세운다는 말의 두 번째 의미는 교회나 하나님의 백성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지시한다는 내용이 포함되기도 합니다.

사도행전 13장,15장을 보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예언의 은사가 부어지면서 안디옥 교회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결정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안디옥 교회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하면서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었다는 말은 교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표하는 것이고 선지자는 은사를 대표하는 것이니까 십자가의 복음과 성령의 사역이 온전히 조화를 이루고 있나니 그 뜻이 되겠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은사를 가진 자들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말씀하시면서 안디옥 교회가 이제 세계선교를 향해서 한 걸음을 내디딜 수 있는 그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은사를 통해서 안디옥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지시했다는 사실입니다.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해서 은사가 부어집니다. 덕을 세운다는 말은 크게 두 가지의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 앞에 개인이나 교회가 온전한 자로 세움을 입는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개인이나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지시 받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사를 부어주시는 목적은 온전케 하기 위함입니다. 덕을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3) 성령의 은사는 소유의 개념보다는 나타남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꼭 옳다는 것은 아닙니다. 소유의 개념도 성경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나름대로 이해가 됩니다. 성령의 은사는 내가 주머니 속에 이런 은사 저런 은사를 가지고 있다가 내가 필요할 때마다 꺼내서 쓰는 것이 은사가 아니라, 은사를 갖고 다녀야 된다면 불편할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코트를 입고 다녀야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을 가지고 다니다가 필요할 때 쓰면 소유의 개념은 상당히 거북스러운 면이 있습니다. 그때그때 하나님께서 하실 일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때그때 부어주시는 그 기름부음 즉 성령의 나타남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소유의 개념보다는 나타남의 개념으로 이해할 때 몇 가지 유익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성도에게 모든 은사가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이 땅을 살아가면서 그때그때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일들을 가지실 때마다, 목적을 가지실 때마다, 모든 종류의 은사를 나타나시게 하실 수만 있다면 하나님의 일은 더욱 극대화될 수 있다고 믿으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은사를 성령의 나타남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성령의 나타남으로 은사를 이해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은사란 하나님께서 친히 하나님의 일을 이루실 때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사역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도록 그때그때 부어주시는 연장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사는 소유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나타남의 개념으로 이해할 때 훨씬 더 성령의 은사가 더 개발되고 더 많이 우리 가운데서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나라는 소유의 개념으로 많이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박미선 목사님이 계신데 지금은 목사님으로 교회를 하고 계시지만 전에는 전라남도 광양에서 축복기도원을 하셨습니다. 기도원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1주년 기념집회 때 강사를 섭외하기 위해 인터넷에서 찾다가 새물결선교회에 들어오셨습니다. 순서가 돼서 제가 강사가 되었습니다. 기도원 집회를 하면서 전단지를 찍어서 배포했는데 그 전단지 한 장을 저에게 보내주셨습니다. 전단지에 강사 김계현이라 되어있고 사진이 붙어 있었는데 밑에는 각종 질병, 각종 문제, 문제해결, 각종 상담, 앞날 예언,, 등 제가 전능자더라고요

대게 은사를 소유의 개념으로 이해하면 각종 문제, 각종문제, 문제해결, 앞날 예언 등..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이해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소유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나타남의 개념으로 이해하면 성령의 은사가 가지는 목적을 극대화시킬 수 있습니다,

(4) 성령의 은사는 사모하는 자들에게 주어집니다. 단순히 은사에 대하여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거나 은사가 나타나는 것에 대하여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지 않는 것 그 자세만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은사에 대하여 마음이 열려있습니다. 은사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개방적입니다. ‘은사가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거지’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것만 가지고는 은사가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은사는 철저하게 사모하는 자에게 부어집니다. 은사 그 자체의 말 그대로가 영적인 선물(spiritual gift), 신령한 선물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 1절을 보면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에서 신령한 것이 영어성경에는 spiritual gift 다시 말해서 영적인 은사, 성령의 은사라고 기록되고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신령한 것으로 번역되어 있지만 영어성경에는 성령의 은사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개방적인 열려있는 마음 가지고는 은사가 나타나는 것을 인정하고 환영하는 자세만을 가지고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은사가 좀 더 적극적으로 나타날 수 있도록 사모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사실 모든 하나님의 은혜가 사모하는 자에게 부어집니다. 모든 은사는 위로부터 빛 되신 아버지께로부터 부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은사에 대하여 사모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사실 은사에 대하여 개방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고 은사에 대하여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지 않는다 하더라도 은사를 사모하지 않는 일이 가끔 있습니다. 왜냐하면 은사를 잘 못 사용하는 예들을 주변에서 많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 같은 경우 은사로 인한 아픔이 참 많습니다. 소위 은사 자들이 남겼던 생활의 모습이나 행동이 바르지 못할 때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든 은사 자들이 그런 것이 아니었지만 일부의 은사 자들이 잘못된 생활습관과 행동이 바르지 못한 규율로 인하여 교회에 많은 문제를 야기시키고 한국교회의 아픔들을 남겼던 것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사에 대해서 개방적인 마음을 갖거나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지 않는다고 해도 은사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은사는 적극적으로 사모하는 자에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여러분들 기억하실 것은 은사를 사모하실 것을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5) 은사는 상급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상급 다시 말해서 대가나 훈장이나 공로, 의의 결과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은사는 상급으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은사는 내가 하나님을 향해서 노력했고 헌신했던 공로나 훈장으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보통 전쟁터에 나가면 공을 세운 자에게는 대가로 국가에서 훈장이나 노고를 취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공로사상들이 가끔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공로사상과 기독교가 접목하면서 이런 경향이 많이 생깁니다. 은사를 상급으로 받으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열심히 봉사하고 충성한 대가로 하나님께 은사로 받으려는 것입니다. 기도 많이 하고 헌금 많이 하고 오랫동안 헌신했던 하나님 앞에 쌓았던 공로들 그 대가로 은사들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시려니 생각하고 은사를 사모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아닙니다. 은사는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교회에 덕을 세우고 개인의 유익을 위해서 내 앞에 서있는 영혼들과 내 앞에 서있는 교회들을 유익하게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내게 부어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나 때문에 부어지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저는 이번에 컨퍼런스 참여하면서 위로되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성전에 들어갔는데 40년 동안 날 때부터 앉은뱅이인 사람을 보았는데 고쳤는데 사람들이 베드로를 보면서 대단한 사람처럼 보았을 때 베드로가 약간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고 제 눈에는 신경질이 보이지 않았었는데... 신경질적으로 대답하면서 너희가 어찌하여 내 경건으로 이 사람을 고쳤던 것처럼 생각하는가? 당연히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하지만 내가 경건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내가 기도를 오래하고 오랫동안 헌신하고 주를 위해 충성하고 이렇게 살았던 경건한 삶의 결과로 내게 은사가 부어지고 이 사람을 고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같이 게으른 사람들은 이런 말씀을 들으면 위로가 될 때가 많습니다. 맞아 경건의 결과로 일어난 일이 아니야 경건한 삶을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건의 결과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상급으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다만 베드로가 가면서 그날 바로 그 앉은뱅이를 하나님께서 고치기를 원하시는 것을 하나님의 행하심을 또렷하게 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을 베드로가 정확하게 읽고 동참한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될 일은 주님과의 친밀한 사랑의 관계 속에 있으면서 하나님이 무엇을 하시는지 주시하여 보다가 그걸 정확하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을 보고 읽으면 동참하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마음껏 그 일들을 하실 줄을 믿습니다.

해외에서 오신 동포 목사님이 여러분 계십니다. 그 중에 장문철 목사님이라는 분이 해외에서 오셨습니다. 제가 그 나라에 가서 집회를 인도하면서 그 지역에 훈련원이나 새물결선교회 교두보가 만들어지기를 소망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께서 바쁘셔서 집회참석을 잘 못하셨습니다. 제 마음에는 저 분이 잡혀야만 이 지역에 그 나라에 교두보가 만들어 질 것 같았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마지막 날 전날 밤에 사역하는데 연지라는 느낌이 지나갔습니다. 연지를 아십니까? 사람이름 같았습니다. 사모님이 나오셔서 사모님 딸 이름이 연자라고 하셨습니다. 연자가 아니고 연지라고 그 다음 날 목사님이 오셔서 자기 딸 이름이 호적상 이름은 연지라고 집에서는 연자라고 부른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더니 자세와 태도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그 지역에, 그 나라에, 그 도시에 훈련원이 개설되기 시작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 볼 때 목사님들 보면 훌륭하십니다. 저보다 기도 많이 하시고 저보다 성경 많이 읽으시고 평신도를 요즈음 보더라도 참 귀합니다. 우리는 부족하고 솔직히 우리는 기도 많이 하고 경건하게 지내도 빛 되신 하나님 앞에서 볼 때 비슷합니다. 똑 같습니다 조금 앞서 갈 뿐입니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거나 하나님께 선한 일을 하거나 하는 근거나 선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어쩌다가 우리가 기도를 많이 했다든가, 어쩌다가 선했다든가, 주를 위해 살았다든가, 어쩌다가 충성했다든가, 잘 살았다, 의로운 삶을 살았다 그것 하나님의 은혜로 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짓는 것은 죄밖에 없습니다, 어쩌다가 주를 위해 살기 시작했고, 어쩌다가 내가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주의 길을 잘 따라 갔다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바울처럼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아니라고, 은사를 상급이나 대가 희생에 지불되는 보상으로 생각되면 몇 가지 문제점들을 갖기 시작합니다.

 

첫째 은사를 상급으로 여기면서 많은 분들이 은사 받는 것을 어려워한다는 것이다. 산기도 가서 은사를 받았다 그런 분들이 간증을 하기 시작하면 산 기도를 가서 소나무를 뽑았고 돌을 들었다 놨다고 그래서 은사가 부어졌다고 하니까 대부분 사람들이 난 틀렸구나,, 난 안되겠구나 합니다. 난 이제 초신자인데, 새신자인데, 난 기도를 많이 못하니까 많은 분들이 은사 받는 일을 어렵게 생각하고 마음의 문을 닫기 시작합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은사가 주어지는 것이 대가로 주어진다, 상급으로 주어진다 하는 이런 인식이 오면 은사 받는 것을 어려워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은사를 대가를 지불하여 받으려는 인식은 은사에 계급장을 하나 달아놓는 것이다. 방언의 은사는 1등병 계급장, 예언의 은사는 소위 계급장, 능력 행하면 대위 계급장,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고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고 강력한 은사가 나타나면 소령 계급장 은사에 계급장을 달아 놓는 일이 일어납니다. 성경 어디에도 은사는 계급이라고는 말이 없습니다. 은사에 급이 있어서 낮은 급의 은사가 있고 높은 급의 은사가 있다고 성경은 전혀 우리에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모든 은사는 하나님으로부터 부어지는 신령한 것들이고 소중한 것들입니다. 내 앞에 있는 영혼들을 세우고, 교회를 세우는, 내가 지체로 있는 교회를 세우는 유익을 위해 덕을 세우는 하나님 앞에서 온전함을 위해 부어지는 하나의 거룩한 선물임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소홀한 것이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 눈에는 혹시 하찮게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너무나도 소중한 것들이 부어진다는 것을 아십니까?

은사를 대가로 받으려는 인식은 세 번째의 문제점을 낳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율법적인 사고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내게 지금 은사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내가 무엇을 무엇을 명령이나 규례나 규칙들을 성경이 말하고 있는 바들을 내가 잘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은사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하는 이런 인식을 많이 갖게 만들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주의를 팽창시키는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초신자들은 아예 받을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전도사님이나 목사님이나 장로님들에게 나타나는 것들이지 나는 아직 기도의 양이 쌓이지 않았기 때문에 더 기도해야 되고 더 봉사해야 되고 더 충성해야 되고 더 성경을 봐야 되는 인식을 낳았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들 기억하십시오 지금은 성령의 시대입니다. 신약이 갖는 특징이 무엇이냐 하면 성령입니다. 말세가 되면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성령을 물 붓듯이 부어준다.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늙은이들은 꿈을 꾸고 ,또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이상을 볼 것이라고. 지금 성령의 시간인 것을 꼭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모든 이들에게 성령이 부어져서 성령이 부어진다는 말은 은사에 대한 가능성에 모두에게 열려있다는 것입니다. 제 아이를 보면 그것을 더 볼 수 있습니다. 제 아이는 저를 뿔나게 하는 스타일입니다. 이렇게 살고 이렇게 예수를 잘 믿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하는 스타일입니다 그래도 이 아이가 어디집회 가서 앉으면 그림들을 잘 봅니다. 해석을 할 줄을 모르잖습니까? 그러니 저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림이 보인다고 제가 부산집회를 섬기고 있을 때 한번 부산에 내려왔는데 앉자마자 그림들이 지나가고 있다고 그래서 제게 이야기를 했을 때 정확하게 하나님께서 그 날 하실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럼 이 아이가 기도를 했나? 그것도 아닙니다. 그럼 아이가 봉사하고, 충성 했나? 전혀 아닙니다. 제가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제가 그 아이를 보면서 은혜로 부어지는 것이구나, 자신감을 가지시길 축복합니다. 많은 분들이 이틀 동안 집회를 참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나에게 그래도 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도 나에게 이게 올까? 옵니다. 오니까 꼭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6) 성령의 은사를 영적인 성숙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자주 듣는 이야기입니다. 아니 저 인간도 예수 믿는 사람이야? 저렇게 고집 세고 자기만 알고 전혀 남을 위해 살줄도 모르는 저 인간 근데 무슨 기도사역을 한답시고 저 야단이야 야단이, 은사는 나타나지만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하는 일들로 인해서 많은 분들이 은사에 대해서 마음의 문을 닫는 경우가 있습니다. 은사에 대해서만 마음의 문을 닫는 것이 아니라 결국 은사를 주시는 하나님께도 마음의 문을 닫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시고 정말 똑똑하시다면 왜 저런 인간에게 은사를 부어주시냐’ 는 겁니다. 왜 그렇게 오해를 하는가 하면 은사와 영적 성숙도를 동일시해서 생기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영적인 성숙과 은사가 부어지는 것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고린도교회가 바로 그런 교회입니다. 은사가 너무 강력하게 많이 부어져서 예배시간에 여기서 예언이 나오고 저기서 예언이 나오고 방언 터지고 통변이 터지고 너무나 은사가 많이 부어지니까 바울에게 자문을 구했습니다. ‘바울선생님 어떻게 해야 질서 있게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까?’ 그랬더니 바울이 ‘먼저 예언하는 사람이 예언하다가 다른 사람이 예언을 하면 그 사람을 잠깐 잠잠하게 하고 다음 예언을 들어라’ 이렇게 하면서 예배하는 순서를 성령의 사역을 하는 순서를 정해주고 있는 장면을 봅니다. 얼마나 강력하게 은사가 부어졌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1절을 보면 이렇게 바울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1절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너희들을 대할 때 은사는 강력하게 나타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육신에 속해있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는 전혀 어린아이구나 영적으로 어린아이를 대하는 것 같이 너희를 대할 수밖에 없다.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걸 보고 우리가 기억할 것은 은사가 강력하게 부어지는 것과 영적인 성숙과는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은사가 강력하게 나타나면 우리는 그 앞에 속된말로 쫄기 쉽습니다. 부담을 가집니다. 은사가 강력하게 나타나도 이렇게 담대하게 말씀해보시기를 축복합니다. '요즘 주님의 얼굴을 잘 구하십니까?' 우리가 배운 것이 주의 얼굴 구하는 것인데. 고린도교회는 영적으로 대단히 은사가 많이 나타났던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상태는 바울의 눈에 보기에 너무나도 어린아이였습니다.

(7) 하나님께서 은사를 부어주신 것에 대해 하나님의 후회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후회하지 않습니다. 은사를 부어주신 것에 대해서 하나님은 후회가 없으신 것을 기억하십시오. 로마서 11장 29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됩니다.

로마서 11장 29절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그러면 하나님의 얼굴을 제대로 구하지 않고 율법주의적인 사고체계를 가지고 있고 거짓신앙체계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왜 은사를 나타나게 하셨을까요? 여러분 가끔 우리가 여기에 오셔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주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을 인생의 유일한 열망삼고, 하나님 그분만 삶의 목적이 되어야 되고, 하나님께 내가 얻고자 하는 것 이 땅에서 얻고자 하는 것을 위해서 하나님을 수단 삼으면 안 되고, 하나님을 알고자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함이 전 존재로 사랑하고자 함이 인격체이신 그분만을 구하는 그것이 인생의 유일한 열망이 되라 그게 십자가 복음이다 신앙의 본질이다 그것이 하나님 얼굴을 구하는 삶이다 이렇게 배우잖아요 배우면 많은 분들이 처음에 고민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기도할 것이 없잖아 이 기도를 하면 율법주의이고 저 기도를 하면 기복신앙이고 저 기도하면 인본주의에 걸리고 저 기도하면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것이 되고 그래서 기도를 잘 못하시는 분들이 더러 있습니다. 대게 그 과정을 거치는 것 같습니다 근데 내가 과거에 율법주의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을 때에도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을 주셨습니다. 맞습니까? 두 가지의 이유 때문에 응답해주시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찾게끔 하십니다. 비록 저 사람이 하나님의 손을 구할 지라도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이 배고프다고, 물 없다고, 고기 먹고 싶다고. 이래도 원망 저래도 원망하면서 계속 불평하고 원망하면서 하나님께 구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때그때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유는 하나님을 찾으라고 그런데 많은 분들이 내가 지금 잘못된 가치관을 가지고 기도하는데 응답하시면 하나님이 나에게 잘못된 가치관을 가졌음에도 들어주신 이유는 내가 하나님을 찾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이해해야 하는데 대게 어떻게 합니까? 만세! 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기도에 응답하셨다 너도 나처럼 기도하라고 잘못된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이 응답하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이 너무 지금 아파하니까 잠깐 싸매어주시려고 그럴 때가 있습니다. 우리 가끔 애들 데리고 치과나 병원 데려가려고 하면 아이들이 어떻게 합니까? 안가!! 합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절대 안 간다고 지금 치과나 병원을 가야 낫는 길인데도 불구하고 안 간다고 발버둥 치면 어떻게? 그래 내일 가자고 합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럼 그 아이는 응답받았다 응답받았다고 하지만 응답 받은 것이 아니에요 내일 다시 데려갈 겁니다. 우리가 너무 마음이 굳고 목이 곧아서 하나님께서 가끔 우리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 마음이 할례를 행하는 거잖아요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그것을 원하시는데 다시 말해서 그걸 줄이면 내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내 마음을 주님 앞에 찢으며 나아가는 거잖아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는 하나님의 백성 된 표적이 할례였습니다. 육체의 할례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할례를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약간 우리가 너무 마음이 완악하고 목이 곧아서 약간 찢으시는 것이 있습니다. 물질을 잠깐 가져가보시기도 하고 찢어 시기도 하고 전대를 찢어보시는 겁니다. 건강도 약간 찢어보시고 할례는 다 찢는 것이 아니라 조금만 찢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무 마음이 좋으셔서 우리가 약간만 찢은 것도 다 찢은 것으로 간주하십니다. 문제는 약간도 안 찢는 것입니다. 조금 찢으면 발버둥 칩니다. 왜 찢냐고, 왜 가져가시냐고 내 건강, 내 물질, 내 자신, 내 자존심, 왜 하나님이 가져가시냐고 그리고 또 20일 금식기도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주여, 주여 하면서 굶어가면서 하나님이 아버지인데 그래도 저 자식이 약간 가져가신 것인데 약간 찢는 것인데 그거 돌려달라고 발버둥 칩니다. 하나님 앞에 다시 내어 놓으라고 그러면 하나님 어떻게 하십니까? 다시 약간 돌려주십니다, 그럼 응답 받았네 그러면서 간증하고 다닙니다. 아니에요 하나님이 다시 찢으셔야 됩니다. 우리가 찢는 연습을 잘하실 수 있길 축복합니다.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는 나의 말에 인하여 떠는 자 여호와의 구하시는 제사는 너의 상한 심령이다. 상한 것을 빨리 찢고 빨리 들어낼 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영웅들이 가진 특징이 하나 있는데 다윗이나 히스기야등 믿음의 영웅들의 특징은 하나님이 그 시대가 너무 악하여서 징계하시려고 심판하시려 강림하시면 임하십니다. 그러면 믿음의 영웅들은 빨리 알아차려 재 위에 앉아서 티끌을 무릅쓰고 옷을 찢고 머리를 풀어헤치고 주님을 찾습니다. 하나님 오시다가 보니 찢었네. 기억하십시오. 그 나라에 내릴 재앙인데도 왕 한 사람만 찢어도 다 찢은 것으로 간주하십니다. 요시아 왕 때 하나님께서 그 나라를 심판하시려고 결정하셨는데도 요시아 왕이 찢으니까 온 백성이 다 찢은 것으로 간주하시고 네 때에는 내가 이 재앙을 내리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정말 선하시고 인자하십니다. 우리가 조금만 찢으면 됩니다. 1cm만, 그런데 우리는 약간만 찢어도 '악' 그럽니다. 그게 문제입니다.

(8) 은사를 주시는 대에는 성령의 주권이 개입됩니다. 언제 누구를 통해서 어떤 은사를 나타내실 것인가 하는 것은 전체적으로 전적으로 성령의 주권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9) 은사는 하나님의 신임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은혜라는 단어와 은총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은혜란 능력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어떤 능력인가 하면 나하고 함께하시면서 내가 주를 따라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능력이 은혜입니다. 은혜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면 성경에서 겸손하라 말씀하시면 주님 내가 ‘겸손해야지’ 라고 아무리 겸손을 되뇌어 보십시오. 겸손해집니까? 우리는 더욱 교만해 집니다. 원래 죄의 속성이 그렇습니다. 아무리 성경에서 거룩하라 거룩하라 해도 내가 거룩해져야지, 거룩해져야지 해도 조금도 거룩해지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바 주께서 내게 하나님의 길을 보여주셨을 때 내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따라가려면 은혜가 필요합니다. 은혜는 능력입니다. 나를 도와주시는 내가 주의 길을 바르게 쫓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능력입니다. 능력이 필요합니다. 은혜라고 하는 것은 능력을 뜻하는 단어로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바 보여주신 길을 내가 제대로 따라갈 수 있도록 나와 함께하시면서 도와주시는 그분의 임재의 능력입니다. 은총이 있습니다. 은총은 나를 믿어주시는 것입니다. 나를 믿을 만한 사람으로 신뢰해 주는 것이 은총입니다. 은혜가 있고 은총이 있습니다. 은혜는 능력을 뜻하는 단어이고, 은총은 하나님의 신임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모세에게 하나님의 은총, 신임은 너무나 소중했습니다. 자신의 목숨과도 바꾸지 않았던 것이 신임이었습니다.

 

출애굽기 32장 33장을 읽어가면서 우리가 무엇을 볼 수 있냐 하면 신임이 무엇인가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모세야 이 백성들을 데리고 가라 이 백성이 내가 그렇게 인도했건만 결국 만든 것은 금송아지가 아니냐 가라 내가 이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맹세했기 때문에 가나안 땅을 주겠다 가라 그러나 나는 같이 가지 않겠다. 너희의 목이 워낙 곧아서 내가 가다 오히려 너희를 진멸할까 두렵도다’ 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이렇게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요 하나님 저희가 먼저 올라갈 테니 나중에 천천히 오세요’ 하고 해도 됩니까? 안됩니까? 그런데 모세는 깊이 생각하고 나서 기도하기를 ‘내가 전에 주께서 내게 말씀하기를 주께서 나를 이름으로도 알고 내게 은총을 입혔다 하셨사온데 즉, 나를 신임한다고 나를 믿어준다고 하셨는데 정말 나를 믿어주신다고 한다면 정말로 지금도 나를 신임하고 있다고 한다면 내게 주의 길을 보여 달라고 왜 올라가라고 말씀하셨는지 당신의 의도를 당신의 마음을 보여 달라고 그리고 만약 주께서 같이 가지 않으시려거든 나도 가지 않겠습니다.’ 여기서 모세는 하나님께 무엇을 질문했냐 하면 ‘혹시 하나님 전에는 나를 신임하신다고 하셨건만 이제는 그 신임을 저버리신 것입니까 내가 전에는 내가 은총을 받았다고 소리를 들었는데 이제는 은총을 저버리시는 것입니까 내가 만일 신임을 잃었다든가 은총을 버렸다고 하신다면 나를 차라리 이곳에서 그냥 살게 내버려달라고’ 했습니다. 모세에게 신임은 자기의 목숨보다도 귀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인정하시고 믿어주시다가 어느 날부터 더 이상 나를 인정하지 않는 것 더 이상 나를 믿어주지 않는 것 그것은 모세로서는 대단히 두려웠고 힘든 일이었습니다. 자기의 목숨보다도 죽음보다도 귀했던 것이 신임이었던 것입니다. 부디 바라건대 하나님의 신임이 우리가운데 많이 회복되길 축복합니다. 은총이 입혀졌으면 좋겠습니다. 은혜만 입는 것이 아니라 은총의 자리까지 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은혜를 입고 또 은혜를 입고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원으로 산다는 말씀이잖아요 하나님의 자원으로 살고 하나님의 신임을 얻는 자리까지 은총을 입는 자리까지 갔으면 좋겠습니다. 근데 은사는 이 하나님의 신임과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우리가 잘 아는 구절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22-23절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 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신임이 없었습니다.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에게 이름으로 알고 너는 내게 은총을 입었다 내 앞에서’ 이 사람들에게 하는 말은 마태복음 7장에서 나오는 많은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이름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도무지 모르나니 그 사람들은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내었고 진짜 능력이 많았던 사람들입니다. 선지자 노릇했습니다. 사람들이 그들을 향하여 선지자라고 부를 만큼 예언이 강력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각종능력을 행했던 것 같습니다. 그 당대에 유명한 예언자로, 유명한 선지자로, 유명한 능력자로 쓰임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하나님의 신임과 은총이 그들에게 없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를 통해서 진짜 강력한 예언이나 강력한 은사들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왜? 내 앞에 있는 교회와 내 앞에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세우게 하기 위해서, 잠깐 우리를 통해서 그 사람에게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귀신을 쫓아내고 능력을 행하고 병을 고치고 너무나 귀한데 그런데 나 때문이 아니라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세우기 위해서 부어지는 건데 이것은 연장인데 이것을 가지고 자랑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무엇과 같은가 하면 ‘나는 충청도에 가서 주로 축농증을 고쳤다’ 뭐 이렇게 합니다. 경상도에 가서는 뭐 고쳤다 합니다. 뭐와 같은가 하면 도구니까 무엇을 자랑하는가 하면 호미를 달고 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곡괭이와 망치 달고 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쫘 하면서 망치 끄집어내고 자랑합니다. OO사람 아닙니까? 경찰이 잡아 가야합니다. 많은 분들이 그렇게 자랑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런 능력, 저런 능력,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이런 많은 능력들을 행했다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 분의 삶을 통해서 하신 일은 참 귀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연장(도구)라는 사실입니다.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나를 신임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날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나더러 이르되 말세가 되면 은사가 강력하게 부어질 것을 이야기 하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길을 따라 하나님의 기준을 따라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은사가 강력하게 나타나니까 하나님의 신임이 있는 줄로 착각했습니다. 절대로 연기하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실 히브리서 3장 9절 이하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3장 9절

9.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10.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에게 노하여 이르기를 그들이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그래서 기억해야 할 것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사를 체험했습니다. 능력을 경험하고도 전혀 하나님의 길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신임이 그들 가운데 없었던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광야에서 모두 다 죽습니다.

(10) 은사가 나타나고 있는 은사자의 신앙이나 신학이 옳다는 것을 뒷받침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은사가 강력하게 나타난다고 해서 그 사람의 가치관과 세계관과 신앙관이 옳다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사무엘상 19장에서 우리는 사울 왕이 그 속에 다툼과 시기와 미움, 다윗을 향한 분노와 원망이 불타오름에도 불구하고 예언의 은사가 강력하게 부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울 왕의 영혼 속에는 다윗을 향한 분노와 시기, 질투심이 가득 차있었습니다. 시기가 있고 질투가 있습니다. 시기는 무엇인가 하면 우리나라 국어사전을 보면 간단하게 나와 있습니다. 시기를 보면 질투와 비슷한 말, 질투를 찾으면 시기와 비슷한 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시기는 상대방이 잘되는 일로 인하여 내가 아파하는 마음의 쓴 뿌리입니다. 마음에 아픈 감정을 가리켜 시기라고 합니다. 이 시기가 몸집을 불리고 뚱뚱해 지면 질투가 됩니다. 물론 하나님의 질투는 하나님의 열정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근데 이 사울 왕이 속에 시기와 질투가 가득 있었습니다. 다윗이 자기의 사위임에도 불구하고 죽이려고 분노가 얼마나 들끓었는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언의 은사가 부어지고 있었습니다. 이걸 볼 때 그 사람의 가치관 은사가 강력하게 나타났다고 해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나 세계관 그 사람의 신앙관이 옳다는 것을 뒷받침 하지는 않습니다.

(11) 성령의 은사는 사람의 인격을 통해서 흐르는 법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곧 길이요 예수님이 통로였습니다. 하나님께로 이르는 새롭고 산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의도가 예수를 통해서 이 땅에 펼쳐지고 성취되었습니다. 우리도 이 땅을 향한 하나님의 길임을 아십니까? 아브라함을 택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로 인하여 열방이 복을 얻게 하고 복의 근원을 삼기 원한다. 은사는 인격을 통해서 흐릅니다. 만약에 내 속에 갖은 상처들이 가득 있는데 아픔들이 있는데 내가 기도사역을 한다든가 할 때 내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가 내 속에서 흐르면서 다듬어지지 아니하고 남을 아프게 하는 상처와 같이 흐르기 쉽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수원지에서 맑은 물을 정수해서 가정에 보낸다 할지라도 가정에 있는 수도관이 낡아있고 녹슬어 있으면 수도꼭지를 틀면 무슨 물이 나올까요? 녹물이 나옵니다. 수원지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스스로 내적인 모든 상처를 주님 앞에 못 박지 아니하고 상처를 치유 받지 못했던 바로 이 책임인 겁니다. 인격을 통해서 흐릅니다. 그래서 이런 공식이 하나 성립될 수 있습니다. 사역의 열매는 어떻게 되느냐 은사의 정도 × 사람의 인격 = 사역의 열매입니다. 예를 들면 은사가 완벽하게 10정도 완벽하게 많이 부어지는데 은사가 잘 나타나는데 인격이 개차반이면 -2이면 열매로는 -20입니다. 열매가 아주 힘들게 나타납니다. 속에 상처가 많으면 무엇을 해도 부정적인 언어가 많이 나오기 쉽습니다. 인격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다루어야만 개발되는 것이 인격입니다. 인격이 어떻게 개발된다고요? 내가 아무리 도를 닦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다루어야 합니다. 개발되는 것이 인격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개발시킬 때 인격을 성숙시키기 위해 나를 다루실 때 집중적으로 다루시는 것이 야망, 시기, 질투 이 모든 것들을 내려놓게 하십니다. 두 번째는 무엇입니까? 상대방을 보는 눈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게 만듭니다. 세 번째는 내가 인간의 말로 설명할 때 그것을 따뜻한 언어 부드러운 언어로 만들어 가게하십니다. 어떤 분은 기도도 잘하고 은사도 잘 나타나고 음성도 잘 듣는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입에서 나오는 것이 나올 때마다 부정적입니다. 안 되는 것들만 보입니다. 아직 아닙니다. 은사의 정도 × 사람의 인격 = 열매입니다. 인격을 보면서 그 사람이 하나님에게 얼마나 다루어졌는가를 봐야 합니다. 새물결선교회에 오시면 첫 번째로 기도사역이 주로 어떤 것이 나갑니까? 첫 번째는 ‘잘 왔다’ 이럽니다. 그러면 내가 잘 왔나 보다 하는데 두 번째로는 ‘내려놓아라’ 그게 좀 오래갑니다. ‘잘 왔다’가 6개월 정도 간다면 ‘내려놓아라’는 2년 정도 갑니다. 비율이 4:1입니다. ‘내려놓아라’가 끝났을 때 나오는 말이 ‘기다려라’입니다. 19차 목회자컨퍼런스 때 목사님들 나오셔서 기도 받는데 어떤 여자 목사님 기도사역을 해드리면서 좀 더 내려 놓으셔야겠습니다. 그랬더니 그 분이 갑자기 '또 내려놓아요 내가 2년간 내려놓았는데 또 내려놓아요' 하셔서 기도 사역하다가 놀랬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혜롭게 말하기를 올려놓으십시오. 줄기차게 내려놓아야 합니다. 여전히 서슬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 야망, 내 생각, 편견들, 또렷하게 두 눈 부릅뜨고 나를 쳐다보고 있는 내 상처들 철저하게 내려놓아야 합니다. 올려놓으십시오 하면 내려놓으라는 말씀이구나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은사는 인격을 통해 흐르기 때문에 나를 통해서 흐르기 때문에 속에 있는 내면의 상처들 치유 받아야 합니다. 오셔서 많이 우셔야 합니다. 눈물, 콧물을 뽑아야 합니다. 그래야 독기가 뽑아집니다.

(12) 은사는 다듬어지고 개발된 상태로 오지 않습니다. 은사를 개발한다는 말은 개발하는 일을 통해서 은사를 만들어 낸다는 말이 아닙니다. 없는 은사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 아닙니다. 은사를 개발한다는 말은 은혜로 우리에게 부어지는 그 은사가 온전한 상태나 정리된 상태로 오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내가 더 온전하게 그리고 나를 통해서 그 은사가 흐르기 때문에 성품이나 인격을 개발하는 가운데 은사가 목적을 더욱 극대화 시키고 효율적으로 활용될 수 있도록 바로 그 점을 개발한다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처음부터 은사가 강력하거나 귀하게 부어지지는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게 부어진 것들을 이제 내가 더욱 온전하게 은사가 가지는 그 목적들을 극대화시키기 위해서 내 인격을 하나님께 맡겨가는 가운데 개발해야 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첫 번째 퍼즐을 맞췄습니다. 첫 번째 퍼즐은 무엇인가 하면 성령의 은사에 관한 전반적인 이해 즉, 성경이 은사에 대해서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가를 한 퍼즐을 맞췄습니다.

2. 은사의 종류

성경에는 성령의 은사에 대하여 네 군데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고린도전서 12- 14장, 에베소서 4장, 베드로 전서 4장이 그것입니다.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네 군데에서 집중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 네 군데에 나타나는 은사들을 종합해서 분류해보면 약 아홉 가지의 은사가 있음을 우리가 염두 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아홉 가지의 은사들을 다시 종류별로 묶으면 세 가지 정도로 분류를 나눌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의 눈에 해당하는 은사들이 있고 하나님의 손에 해당하는 은사들이 있고 하나님의 입에 해당하는 은사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입도 없고 코도 없고 눈도 없으십니다. 그런데 성경은 가끔 하나님을 우리에게 더욱 친근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의인화시킵니다. 그래서 영이신 하나님을 손, 등, 눈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눈에 해당하는 은사가 있고 손에 해당하는 은사가 있고 입에 해당하는 은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에 해당하는 은사는 크게 세 가지 은사가 있겠습니다. 흔히 하나님의 눈에 해당하는 은사를 가리킬 때 분별의 은사라고 합니다. 이 말은 무엇인가 하면 분별의 은사란 사람이나 사물, 상황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은사를 가리킵니다. 세 가지가 있겠습니다. 첫 번째 지식의 말씀의 은사입니다. 지식의 말씀의 은사란 사람이나 상황, 상태에 대해 사전 정보나 지식이 없는데 성령의 계시로 알아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식의 말씀의 은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삭개오를 만나신 적이 없었습니다. 여리고 성을 입성하실 때 수많은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뽕나무에 이 삭개오가 올라가게 됐던 겁니다. 삭개오를 보선 적이 없었습니다. 그 사람에 대한 사전 정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삭개오야 내려오라’ 하셨습니다. 지식의 말씀의 은사가 통한 겁니다. 요한복음 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를 처음 만납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야기기 진전이 별로 없을 때 예수님께서 너의 남편을 남편이 없다 했을 때 옳도다 다섯이 있었는데 지금은 동거하고 있지 라고 하셨습니다. 이때부터 이야기가 새로운 전환점을 갖기 시작합니다. 지식의 말씀의 은사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겠습니다.

두 번째 분별의 은사에는 지혜의 말씀의 은사가 있습니다. 지식의 말씀의 은사가 사전정보나 지식을 상대방에 대해서 상황에 대해서 사람에 대해서 상태에 대해서 갖고 있지 않다가 성령의 계시로 알게 된 것이라고 한다면 지혜의 말씀의 은사란 어떤 특정한 상황이나 상태에 대해서 하나님의 지혜와 통찰력을 지니게 하는 은사입니다. 어떤 상황이나 사물이나 상태에 대해서 하나님의 통찰력을 갖게 하는 것이 지혜의 말씀의 은사입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위협과 함정에 항상 노출되어있었습니다. 한번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책잡기 위해 동전을 가져와서 그 동전은 가이사 시저의 화상이 그려져 있는 것이었는데 ‘하나님께 바쳐야합니까 안 바쳐야합니까’ 하고 따졌습니다. 바치라고 하면 로마를 따른다 해서 책잡을 수 있고 바치지 말라고 하면 그것도 로마에 책잡히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가 막히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상황에 대한 통찰력을 읽으시고 하나님의 지혜를 가지고 슬기를 갖고 이야기를 하시는 것입니다. 슬기롭게 이야기를 하니까 꼼짝을 못하는 것을 봅니다. 솔로몬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솔로몬에게도 지혜의 말씀의 은사가 참 많았던 같아요. 그래서 두 여인이 한 아이를 가지고 서로 자신의 아이라고 우겼습니다. 그럴 때 칼을 가져와서 이 아이를 반으로 가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친 어머니가 그러지 말라고 말을 합니다. 이런 것을 보면 지혜의 말씀의 은사가 참으로 필요한 것 같습니다. 지식의 말씀의 은사만 부어지면 안됩니다. 그냥 상대방에 대해서 알아갑니다. 알아가는 것만 계속 이야기 하면 안됩니다. 알면서도 말하지 않아야 되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지혜의 말씀의 은사가 많이 필요합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지혜의 말씀의 은사가 많이 부어졌으면 좋겠습니다. 그 상황에 대한 통찰력을 내가 가지면서 하나님의 슬기를 갖고 지혜롭게 말을 할 수 있다면 참 많은 사람들을 유익하게 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특별히 리더가 되어갈 때 리더들에게는 지혜의 말씀의 은사가 필요합니다. 심방을 갔을 때 예를 들면 이 사람이 하나님을 안 찾아서 어떤 어려움이 있다. ‘하나님 안 찾아서 그래’, ‘기도 안 해서 그래 얼굴 안 구했지? 손 구했지? 율법주의지?’ 자기 의지? 제발 이러지 마세요. 품어주고 안아주고 지혜롭게 말을 해야 합니다 어떤 집에 가서 기도를 하는데 뱀이 보여 '뱀이 보인다.' 이러지 말고 하나님 보호막을 더 드리워주세요 원수로부터 이 가정을 지켜주세요 원수의 억압을 끊어주세요. 이렇게 내가 대산 이 가정을 끌어안고 하나님 앞에서 설 수 있는 이런 자세가 필요합니다. 뭔가 보이니까 그때그때 얘기하며 맞추는 재미로 살아가는 사람 있습니다. 그러지 말고 지혜의 말씀의 은사를 적극적으로 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 번째로는 영분별의 은사입니다. 영분별의 은사란 어떤 사람에게 동기를 부여해주는 요인이 성령인지 악한 영인지 그 사람의 생각인지를 분별할 수 있게 해주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영분별의 은사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어떤 동기가 부어졌습니다. 무언가를 열심히 하는데 그 동기를 부여해주는 것이 하나님의 질투인지 하나님이 주신 마음인지 아니면 원수가 그렇게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 사람의 생각인지를 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사람이 계시나 은사가 부어질 때 능력이 나타날 때 그 배후에 역사하는 영의 종류를 살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분별의 은사입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했잖아요 그때 예수님께서는 너무 흐뭇하셔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내게 네게 천국열쇠를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메면 하늘에서도 메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라고 칭찬하십니다. 베드로가 어떤 계시를 말했을 때 배후에 역사하시는 영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령이심을 예수님이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칭찬을 받고 보니 너무나 좋았습니다. 예수님이 너무나도 기쁜 나머지 드디어 예수의 사역의 클라이막스라고 말할 수 있는 십자가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베드로가 어떻게 합니까? ‘그리하지 마옵소서’하니까 예수님께서 그 말을 하게하는 배후의 영이 베드로에게 동기를 부여했던 배후의 영이 사탄인 것을 알고 ‘사단아 물러가라’ 하십니다. 이것이 영분별의 은사입니다. 어떤 동기가 부여됐을 때 열심히 부어졌을 때 어떤 행동이나 언어를 말할 때 계시를 말할 때 배후에 역사하는 영이 어떤 종류인가 하는 것을 분별하는 영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종류는 능력의 은사입니다. 즉 하나님의 손에 해당하는 은사입니다. 이 은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첫 번째로는 믿음의 은사가 있겠습니다. 믿음에 대해서는 네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으로서의 믿음이 있습니다. 두 번째는 열매로서의 믿음이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로서의 믿음 사랑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 신실함(Faithful)이 열매입니다. 세 번째로는 은사로서의 믿음이 있습니다. 바울 같은 경우는 바보섬에서 전도할 때 박수무당 엘루마가 계속 괴롭혔습니다. 그때 은사로서의 믿음이 바로 이것입니다. 인간의 머리로서 상식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확신이 주어져서 이 사람이 확신에 따라 말하고 행동했을 때 하나님의 거룩한 능력이 나타나면 이것이 바로 은사로서의 믿음입니다. 바울에게 박수무당을 보면서 갑자기 초자연적인 인간의 머리로나 생각,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초자연적인 확신이 부어집니다. 이 확신을 따라 바울이 말합니다. ‘네가 소경이 될 것이다’ 그럴 때 박수무당(엘루마)이 소경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은사로서의 믿음입니다. 손에 해당하는 은사의 두 번째는 치유의 은사입니다. 병을 고치는 은사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치유의 은사가 성경에서 사용되는 것을 보면 대게 복수들로 사용됩니다. 단수들로 사용되지 않고 복수로 사용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즉, 다양한 병들을 고치는 하나님의 방법을 가리키고 하나님도 다양한 모습으로 병들을 고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가 능력 행함의 은사입니다. 다시 말해서 기적을 일으키는 은사입니다. 기적이나 이적, 기사를 일으키는 은사를 가리켜 능력 행함의 은사라고 합니다. 능력 행함의 은사 중에 가장 뚜렷한 은사는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 행함의 은사가 부어지면서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하십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께서 고린도교회 가운데서 자기를 통해 나타나신 역사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12절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 12절

사도의 표가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바울에게 능력 행함 은사가 강력하게 부어졌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은사의 종류가 있습니다. 언어의 은사 즉, 하나님의 입에 해당하는 은사입니다. 언어의 은사는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이 주어지거나 하나님께 말씀이 올라가는 은사를 말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내 입에 주어지거나 내가 드렸던 기도라던가 언어가 하나님께 올라갈 때 바로 우리는 이것이 바로 입에 해당하는 다시 말해서 언어의 은사가 되겠습니다. 예언의 은사가 대표적입니다. 예언이란 무엇입니까? 특정한 상황에서 특정한 개인에게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음성을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서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내가 언급하고 인간의 말로 설명하면 그것이 바로 예언이 되겠습니다. 사실 사도바울 같은 경우 흉년들었던 예루살렘교회를 도울 때 아가보라는 사람이 예언했던 그 예언을 듣고 흉년든 예루살렘교회를 돕기 위해서 선교여행을 떠났던 것을 명심하십시오. 제 3차 선교여행이 그렇게 해서 떠나게 된 것입니다. 사도행전 11장 28절 이하에 보면

 

사도행전 11장 28절

28.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29.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30.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여기서 바울이 아가보의 예언을 듣고 선교여행을 떠났던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때는 모이면 기도사역하고 예언을 말했던 것이 다반사였던 것 같습니다. 자연스러운 일 이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이 3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나서 처음에 두로에 갔을 때에도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사역을 받고 감동을 듣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 가이사랴에 갔을 때도 빌립집사님의 집에 갔는데 딸이 네 명 이었는데 다 예언을 했었습니다. 기도사역을 받은 것을 보면 초대교회 때는 기도 사역하는 일이 다반사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방언의 은사입니다.

세 번째는 방언 통변의 은사입니다.

 

3. 은사의 단계

세 번째 은사의 단계는 대단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교회에 은사가 접목될 때 이 단계를 따라 접목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은사가 나타나더라도 이 단계를 따라 접목되는 것은 너무나도 소중합니다. 네 단계가 특별히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은사의 단계가 있는데 은사의 단계란 은사의 목적을 최대한 성취할 수 있도록 교회가 분별하는 과정을 일컬을 때 은사의 단계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1)임무의 단계

임무의 단계란 성경에 기록된 주님의 명령을 따라 순종하는 단계입니다. 우리에게 은사가 나타나건 나타나지 않건 상관없이 성령에 나타나심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성경에서 명령하신 것들 가르치고 치유하고 위로하고 권면하는 전도하는 것은 우리가 순종해야 되는 것입니다. ‘난 은사가 안 나타나니까 난 안해도 돼’ 아니에요 누구나 다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들을 지켜 행해야 할 임무가 있습니다. 이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신실함입니다. 그래서 은사는 신실하게 시작되어야 합니다. 내게 은사가 나타나건 나타나지 않건 상관없이 이게 주의 말씀이기 때문에 지켜 행하는 그 바가 신실하게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들 내가 전도했을 때 저 사람이 예수를 믿고 안 믿고는 그 사람의 책임입니다. 그 사람이 복음을 받아드리건 안 받아드리건 그 사람의 책임입니다. 안 받아 드렸다고 해서 그것은 내 잘못이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내가 전도하지 않아서 그 사람이 예수님을 받아드리지 못했다면 그것은 내 잘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에 환자가 있으면 기도합니다. 그럼 치유하시는 분이 누구세요? 내가 아니고 하나님이시잖아요. 치유가 되던 안 되던 그것은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내가 기도해서 안 나았다. 그건 내 잘못이 아니에요. 문제는 내가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치유할 기회를 상실했다 이것이 내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바를 내가 성실하게 신실하게 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2)성령의 나타남의 단계

첫 번째 단계로 순종해 가다보면 성령의 주권으로 은사가 서서히 나타나는 단계가 있습니다. 성령이 이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내가 주의 명령을 따라서 신실하게 복음을 전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는데 갑자기 저 사람의 지나간 아픔이라든가 지나간 일들, 이름이라든가 이런 것들이 자꾸 떠올라 지식의 말씀의 은사가 부어지는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내가 적당한 위로와 권면을 해야 하는데 어떤 상황에서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생각을 부어주시면서 이 사람에게 어떤 주어진 감동이나 생각을 따라서 권면하고 위로했더니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엎어지면서 큰 위로와 안위함을 받았다고 합시다. 이럴 때 뭐가 나타난 것입니까? 지혜의 말씀의 은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이처럼 신실함을 가지고 임무를 충실하게 하다보면 두 번째 단계로 성령이 나타남이 있습니다. 이 때 중요한 핵심이 무엇인가 하면 순종입니다. 은사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할 때 기름부음이 나타났을 때 그것이 어떤 기름부음이든지 그것을 내가 순종하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순종할 때 성령의 나타남이 점점 더 확대된다는 사실입니다. 순종이 필수입니다. 어떤 감동이나 모든 것이 올 때 자꾸 말해보세요 제가 우리 지방에 독립선언문 낭독하신 33인 중에 목사님이 한 분 계십니다. 길선주 목사님이십니다.그 분이 1908년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간증할 때에 부흥이 왔다는 말이 있습니다 외손주가 지방에 있는데 제 동기며 친구였습니다. 이 친구가 몸이 아픈겁니다 간이 아파 병원에 목사님과 사모님과 다 심방 갔습니다. 제가 새물결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인데 기도해야 되겠다는 감동이 있어서 손을 얹었습니다. 손을 얹었는데 손 뒤편으로 뭔가 찌릿찌릿 한 것이 온더라구요 그래서 내가 혹 간 앞쪽아니라 뒤쪽이 아픈가 이때는 순종함이 필요합니다 자라려면 하나님께서 목사님의 간 뒤편을 만지기 원하시는 것 같다고 그랬더니 목사님이 갑자기 내손을 덥석 잡더니 맞아요 목사님 제가 간 뒤가 문제가 있어요 그러는 겁니다 맞았다 순종을 통해서 배웁니다. 중요한 부분입니다 맞으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면 되고 틀리면 내가 바보가 되면 됩니다. 간 뒤를 만지시는 것 같습니다 가만히 있어 그럼 지나가면 되는 겁니다. 그러나 중요합니다. 순종이 중요합니다. 순종하는 자에게 성령의 나타남이 더 나타납니다. 이길수 목사님 예화가 있습니다. 한참 부어주실 때 밤 12시 쯤 고속도로를 가는데 휴게소에서 갑자기 ‘여자화장실’ 이라는 생각이 들어 여자 사모님을 여자화장실로 들여보내 보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일도 없었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더 나타나게 됩니다. 순종이 필수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사역

은사가 나타나는데 특별한 사람에게 특정한 은사가 자주 나타납니다. 자주 나타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 사역을 맡기시는가보다 하고 분별하는 단계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모든 은사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은사가 자주 어떤 이에게 자주 나타납니다. 더 깊고 더 높게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때 아,,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그 사역을 지금 맡기시는가보다 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에게 예언이 자주 나타나고 어떤 이에게는 가르침이 잘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르치는 사역을 맡기시고 있나보다 하여 일을 맡겨보는 겁니다. 단계의 핵심은 지체됨입니다. 어떤 은사가 내게 자주 나타날 때 깊고 넓게 나타나고 정확하게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역을 맡기시는 것 같습니다 그럴 때는 절대로 기억 할 것이 지체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내가 교회의 지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내가 자랑을 한다든가 그것을 가지고 계급장처럼 여긴다면 절대 안됩니다.

 

(4)직분

교회가 그 사역이 나타남을 보고 직분자로 임명하는 단계입니다. 이때의 핵심은 겸손함입니다. 직분이 맡겨졌습니다. 예언이 빈번하게 깊게, 높게, 정확하게 주어지면서 교회가 나를 분별해서 예언자, 선지자로 세웠을 때에는 겸손함이 필수입니다. 모두가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해 하는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고린도전서 12장 28절 이하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고린도전서 12장 28절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 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직분이 주어지는 장면을 봅니다. 성경이 꼭 함께 말하기를 덕을 세우기 위해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해서 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게 성령의 은사의 단계입니다.

 

4. 은사의 길

길이라는 단어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의도대로 은사를 활용하는 방안입니다. 이게 길이라는 단어입니다. 성경에 길이라는 단어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그 중의 하나가 무엇인가 하면 그때 그때 그 은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바 그 의도가 길이 되겠습니다. 은사가 부어졌을 때 은사를 쓰는 방법이 있습니다.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 22절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 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 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날에 많은 사람이 와서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능력을 행했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 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니’하면서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즉, 하나님의 길을 벗어나서 은사를 활용했다는 것입니다. ‘병자도 고쳤구나 능력도 행했구나 귀신도 쫓아냈구나’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내 길을 따라 사역의 길을 따라 행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무조건 병자를 고친다고 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 병자를 고치시는 하나님의 의도는 뜻은 이루어졌지요. 그렇다고 나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내가 하나님의 길을 따라 행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쳤을 때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네가 사역하는 가치관, 사역하는 세계관이 무엇이냐’ 그때 예수님이 일곱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사역의 길 첫째로 ‘내 아버지가 이제까지 일하신다. 둘쩨로 그래서 나도 일한다. 세 번째 나 혼자서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예수님께서도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우리는 은사가 조금 부어지면 ‘다 모이세요. 줄 세우세요 4열 종대입니다’ 이러기 쉽습니다. 예수님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었습니다. 여리고성에 가셨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같으면 줄 세워놓고 한사람씩 안수 했을 겁니다. 예수님은 그날 한사람만 만지셨습니다. 삭개오.. 수많은 사람들을 뒤로 한 채로 말입니다.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었습니다. 네 번째 아들은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주시하여 본다. 다섯 번째는 아들은 아버지가 이미 행하고 있는 일을 행할 뿐이다. 여섯 번째는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신다. 사랑의 친밀한 관계 일곱 번째는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시기에 자기가 행하신 바를 아들에게 보여주신다. 아마 마태복음 7장의 사람들은 은사가 자주 나타니까 은사를 마구 사용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이득을 취했던 것 같습니다. ‘불법을 행하고 내 길에서 벗어났던 사람들아 바깥 어두운 곳으로 쫓겨나서 이를 갈게 될 것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은사의 길이 무엇이겠습니까? 고린도전서 12장의 내용은 은사잖아요. 은사 중에서 기름부음의 은사에 대하여 말하고 있고 고린도전서 14장은 직분으로서의 은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름부음이 먼저 부어지고 그 다음에 직분을 맡기는 건데 12장 마지막에 기름부음의 은사를 말하고 나서 하는 말이 내가 가장 좋은 길을 보이리라

고린도전서 12장 31절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은사의 길이 13장에 나옵니다. 사랑입니다. 사랑은 은사가 아니라 사실은 은사의 길입니다. 모든 은사를 사랑으로 행하는 겁니다. 내가 아무리 방언이 너무 뛰어나 천사의 말까지 한다 할지라도 사랑으로 하지 아니하면 꽹과리라는 것입니다. 예언의 은사가 너무 강력하게 부어져서 모든 비밀을 다 안다고 해도 사랑을 따라 하지 아니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사랑은 은사라고 하기 보다는 은사를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이런 것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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