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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차 4강 성령사역에 대한 가치관

강의자료/컨퍼런스 정리

by 발의무리 2009. 7. 9.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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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강. 성령사역에 대한 가치관

 

- 여 주봉 목사 -

 

성령사역에 대한 우리의가치관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의 가치관이라기보다는 우리가 보기에 성경이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말씀하고 계시고 그것이 예수님의 비전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보는바 대로 성령의 사역에 대한 예수님의 비전 그것을 성령사역에 대한 우리의 가치관 이라 이렇게 이름을 붙여 보았습니다.

제가 오늘 여섯 가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여섯 가지는 우리 각자가 성령사역을 감당함에 있어서 늘 염두 해두고 우리 눈앞에 또렷이 그 부분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것이 매우 중요할 것 같습니다. 성령사역을 통해서 우리가 추구하는 바 이기도 하고 우리가 바라보는 어떤 가치관이기도 하고 우리의 푯대와 같이 늘 이러한 삶을 추구하는 목표이기도 합니다.

 

첫째, 전교인 사역자화

 

성경에서 말하는 비전은 전교인 사역자화. 다시 말하면 모든 성도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하나님 나라를 위한 사역자로서 섬기는 것입니다. 전교인 사역자화라고 표현할 수 있는 그 말이 성경에서 말한 아주 중요한 가치관입니다. 우기가 어제도 마태복음 28장 18~20절을 살펴보았는데 예수님께서 열한제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혹은 세례를 주고) 내게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저들에게 가르쳐 저들로 지키게 하라." 이 말은 이미 살펴 본대로 우리 입장에서 본다면 우리가 먼저 우리 모두가 거기에 제자는 당연히 예수 믿는 모든 사람을 가리키겠습니다. 소위 말하면 일부 full time(전임) 사역자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구절을 전혀 옳게 해석하지 않은 겁니다. 그렇다면 모든 예수 믿는 사람을 가리키는데 주님의 의도는 우리 입장에서 본다면 우리 각자가 먼저 열한 제자처럼 되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예수 믿게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여 복음을 전할 뿐만 아니라 그들을 가르쳐 그들이 열한제자처럼 되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가르쳐 분부한 것에도 여기보시면 마태복음 11장 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명하시기를 마치시고 어제 저녁에도 살펴보았습니다마는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사역이 하나님나라 사역인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5장 ~ 7장 까지는 하나님 나라의 말씀 내지는 하나님 나라의 삶에 대해서 말하고 있고 8장 ~9장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성령사역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데 그렇게 말씀하고 난 다음에 예수님께서 10장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동일하게 똑같은 일을 감당하라고 말씀하십니다. 10장을 마치면서 11장 1절에 지금 말하고 있는 바입니다. 예수께서 열 두 제자들에게 명령하시기를 마치고 그 열두제자에게 명령하신 바가 첫째는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라는 것이요. 하나님 나라의 삶을 전하라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 나라의 성령사역을 감당하라는 것인데 바로 마태복음 28장에서 열 한 제자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게 분부한 모든 것을 저들에게 가서 저들에게도 전하여 가르치게 하라 이 말씀을 보면 명백하게 예수님의 의도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열 한 제자처럼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을 살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성령사역을 감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명백하게 볼 수 있습니다. 너무나 또렷합니다. 사실은 제론의 여지가 없을 만큼 두 개가 같이 갑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우리에게 산상수훈이라고 말하는 그 곳에서 대표적으로 설명되어진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성령사역을 감당하도록 우리 모두를 초청하고 계신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도는, 예수님의 의도는 모든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전교인 사역자화라고 표현하는 것에 대한 또 하나의 중요한 구절이 에베소서 4장입니다. 11절부터 보면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렇게 일꾼들을 세우셨으니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일반 성도들은 그저 직장에 가서 열심히 돈 벌어서 교회 가서 헌금하면 그 헌금가지고 복음의 사역에 헌신된 사역자들을 소위 고용해서 사역자들로 하여금 주의 일을 하게하고 일반성도들은 그저 뒤에서 뒷바라지나 하고 헌금이나 하는 것으로 인식하는데 하나님이 말씀하신 바는, 의도하신 바는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도, 선지자, 복음전하는 자, 목사, 교사를 세우셨는데 무엇 때문에 세우셨는가? 이는 성도들을 온전케 하며 온전케 한다는 말은 그들을 무장시킨다 그 말입니다. 무장시키며 그래서 봉사 일을 하게하며 성도들로 하여금 봉사 일을 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 한데까지 이르리니 여기도 보시면 하나님께서 일꾼들을 세우신 목적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감당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고 당연히 자신들이 먼저 해야겠죠. 그들로 하여금 모든 성도들을 양육하고 훈련해서 모든 지체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함으로 그리스도의 몸이 세워지기 위함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 전체를 볼 때에 하나님이 의도하신 가장 중요한 가치관 중의 하나는 전교인 사역자화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그리스도의 열 한 제자처럼 주님의 나라에 헌신되어져야 될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마태복음 5장 ~7장에서 말하는 하나님나라백성의 삶을 살고 우리 모두가 마태복음 8장 9장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의 성령사역을 감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 모두를 그 자리에 부르셨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둘째, 말씀과 성령의 조화

 

전교인 사역자화로서 우리 각자가 주님의 제자로서 세워지되 말씀과 성령의 조화가 필수입니다. 우리는 어제 저녁에 어떻게 예수님의 삶이 말씀과 성령의 조화를 이루고 성령에 의한 삶에 있어서도 성령과의 교제뿐만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을 감당하셨는가 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복음서마다 예수님의 사역이 그렇다 라고 강조한 그대로 때로는 똑같은 표현까지 사용하시면서 제자들의 사역도 그러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 아침에 사도들의 사역을 통해서 여러분 보셨겠지만 사도행전과 서신서 전체를 보면 이제 사도들이 초대교회가 예수님의 사역을 그대로 감당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 속에도 말씀과 성령의 조화를 이루되 이 말씀이 곧, 하나님 나라의 말씀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의 복음이었습니다. 똑같은 성격의 메시지입니다. 십자가복음은 예수님의 구속의 사건을 토대로 한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로서 하나님이 우리의 왕 되신 하나님의 우리의 보화 되시는 그래서 우리 모든 것으로 그 보화를 사는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것 되시는 삶이라면 사도들이 전한 십자가의 복음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든 것 되시는 삶입니다. 하나님나라의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 특별히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든 것 되시는 그래서 사도 바울 같은 경우에도 자신이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전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먼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 그분을 아는 것이 그의 인생의 유일한 목표요, 목적이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똑같은 메시지입니다. 정확하게... 그리고 이 메시지가 이제 사도들의 삶에서도 성령님과 같이 가는데 성령께 민감한 삶과 다시 말하면 성령과의 교제와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 조화를 이루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오전에도 김영식 목사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마는 사도행전 1장 1절에 보면 누가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누가복음을 가리키죠.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여기도 예수님의 사역을 두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행하시는 것은 그저 갈릴리 지나가시는 것, 나사렛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사역을 말합니다. 성경전체를 볼 때 뚜렷합니다. 성령의 사역을 감당하신 것과 가르치신 것, 이것도 물론 성령의 능력으로 하셨습니다. 그러나 말씀선포와 능력 행함 두 가지로 요약하고 있는데 시작하심부터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가르치시고 성령의 사역을 감당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모든 일을 기록했다 이렇게 되어 있는데, 우리말 성경에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원래 헬라어에 보면 이렇게 안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영어 NIV가 잘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헬라어에는 뭐라고 쓰여 있냐 하면 원어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NIV가 올바로 번역하고 있는데. 제가 우리말로 그대로 번역한다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누가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날까지 가르치시고 행하시기를 시작하신 모든 것에 대해 기록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의 공생에 전체가 기록되어 있는데 승천하신 날까지 전체에 대해서 말하면서 승천하신 그 날까지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행하시기를 시작하신 모든 것을 썼다. 다시 말하면 공생에 전체가 예수님이 가르치시고 행하시는 것에 시작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왜? 사도행전 1장 1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가? 사도행전 그 이후로 나오는 내용들이 예수님이 사도들을 통해서 자신의 사역을 계속하신 것에 불과 했기 때문에 그래서 사도들이 정확하게 예수님처럼 말씀과 성령의 조화를 이루되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 즉, 십자가의 복음과 성령과의 교제,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을 감당하신 내용이 그대로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시면 사도들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일 세대라면 이제 사도들을 제자로 삼았잖아요. 일 세대 제자들이라면 예수님을 원조로 시작 돼서 그 사도들이 가서 예수님의 명령대로 저들을 예수님 믿도록 인도하고 저들이 사도들의 가르친 모든 것을 가르쳐서 저들로 행하게 한 이 이 세대 일꾼들이 나옵니다. 성경에 보면, 예를 들면, 빌립이나 스데반 같은 일꾼들이 바로 그 이 세대에 해당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도들이 제자 삼아서 예수님이 사도들에게 명한 그대로 마태복음 28장에 나온 것처럼 그대로 실천해서 그들을 양육한 제자들이 나오는데 그들이 말씀드린 대로 빌립이나 스데반 같은 이 세대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삶을 보아도 정확하게 말씀과 성령의 조화를 이루되 성령의 교제와 성령의 능력이 같이 갔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정확하게 예수님의 사역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스데반의 예를 들면, 사도행정 6장 5절에서 10절을 보면 우선 말씀과 성령의 조화를 이루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리버디노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이라는 각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으로 더불어 변론할새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저희가 능히 당치 못하여

 

여기보시면 스데반에게 강력한 말씀의 권세가 있었고 스데반에게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맞습니까? 이 세대 제자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직접 키운 제자들이 아니고 그들에게도 이처럼 말씀과 성령의 조화가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에 의한 삶에 있어서도 그들은 성령님과의 교제와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을 감당한 것이 같이 갔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특별히 보십시오. 스데반 같은 경우에 그 당시 유대인들이 스데반을 핍박합니다. 이렇게 될 때 성경에 보면,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다 그랬습니다. 놀라운 하나님과의 교제를 말하는 겁니다. 성령과의 교제를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종의 형체를 가지고 오셨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되 자기를 못 박는 자들을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하며 돌아가신 그 예수님, 그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 우리 인류를 위한 구속을 이루시고 부활하사 죽음과 죄와 사단의 권세를 멸하시고 승리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서서 자기를 바라보고 계시는 기다리고 계시는 주님의 영광을 보았을 때, 스데반은 기꺼이 예수님처럼 나중에 보면 자기를 돌로 치는 자들을 위해서 그들을 위해 하나님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예수님처럼 자기의 영혼을 하나님 손에 맡길 수 있었던 스데반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면 성령과의 교제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통해서 성령의 조명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본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삶에서는 이렇게 성령과의 교제가 함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강력한 성령의 능력이 함께 하셨습니다. 6장 8절만 하더라도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스데반의 삶 속에서는 말씀과 성령이 같이 가되 성령만 하더라도 성령과의 교제 그래서 여기 보시면 성령에 충만한 사람 스데반이라고 하는데 이 충만함은 성령과의 친밀한 교제가운데 거하는 것을 말합니다. 내일 성령 충만함에 다룰 때 나올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성령님과의 교제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주님과 친밀하게 동행했던 성령님과의 교제가 함께 했을 뿐만 아니라 성령의 강력한 능력이 그와 함께 하시는 그러한 예수님이 사셨던 그 삶이 그대로 재생산되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말씀만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스데반 말씀만 하더라도 그는 참으로 말씀으로 무장된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그 당시 유대인들이 스데반을 대적할 때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스데반은 이스라엘 역사를 하나님 말씀에 토대해서 좍 언급하면서 저들에게 전합니다. 그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말씀으로 무장되어 있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전교인 사역자화를 추구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 비전입니다. 신학을 나온 목회자들만 말씀을 연구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모두가 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여기 스데반은 목회자가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집사의 원조라고 말하는 집사라는 칭호도 이 당시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일곱 사람이라고 일반 성도들 중에 신실하고 성령 충만하고 믿음 충만한 사람을 하나님의 일을 위해 세운 일꾼 중의 한명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 말씀으로 충만했습니다. 말씀으로 무장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스데반은 정확하게 하나님 중심적인 말씀으로 무장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이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사도행전 6장 12절~14절에 보면 그 당시 초대교회 당시 유대인들이 스데반을 위해서 거짓증인들을 세워서 고소합니다. 그런데 고소한 내용이 나옵니다.

 

사도행전 6장 12절~14절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 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가로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이 거룩한 곳'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예루살렘성전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 성전을 깨끗케 하시면서 이성을 헐라 그럼 내가 사흘 만에 세우리라 이렇게 말씀하신 내용이 있잖아요. 그러한 일들이 그 당시 팽배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이 지금 고소하고 있는 내용이 뭐냐 하면 이 사람이 참담함 사람으로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준 이 거룩한 성전을 대적하여 말하면서 이 성전을 헌다했다 율법을 폐한다고 그랬다 그러면서 대적하는 겁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그런데 이것이 정확하게 율법주의적인 가치관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성전을 깨끗케 하셨잖아요. 왜 깨끗케 하신 줄 아십니까? 그 당시 제사를 지내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구약시대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직 이루어지기 전이니깐 그러니까 성전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은 성경의 명령된 바였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이 성전에서 짐승들을 다 쫓아내시고 동전 바꾸는 상을 엎으셨어요? 왜 그렇게 하셨나요? 원래 제사 지내는 것이 마땅한데... 그 엎으시면서 뭐라고 그러냐 하면 내 아버지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그렇게 말씀도 하셨고 어떤 때는 너희는 내 아버지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다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예레미야서에도 보시죠. 예레미야 시대에 보면 안식일 날 성전에서 성대한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그곳에 보내셔서 이것이 여호와의 집이냐? 이것이 여호와의 집이라, 여호와의 집이라, 여호와의 집이라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그러면서 "하나님이 실로에 행함같이 이곳에 행하리라" 이곳을 다 파괴하리라 그 말입니다. 그때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저놈 참담하다 그랬습니다. 그 당시 그들이 가지고 있던 가치관이 뭐냐 하며 여러분 원래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의도 된 것이 아닙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어 놓고 보며 하는 첫마디가 뭐냐 하면 하늘이 하나님의 보좌요, 땅이 하나님의 발등상인데 사람이 만든 이곳에 하나님 어떻게 거하시겠습니까? 라는 것 이였고 여기 스데반도 인용하듯이 이사야서 66장 1절에 보면 하나님이 이사야를 통해서 말씀하시되 하늘이 나의 보좌요, 땅이 나의 발등상인데 내가 어찌 사람이 만든 이곳에 거하겠느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의도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그곳은 뭐하는 곳 이었는데요? 예수님이 말씀하시되 내 아버지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말한 것처럼 솔로몬도 지어 놓고 하는 말이 그러나 우리가 이곳을 향하여 기도하거든 하늘에서 들으시고 이렇게 말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이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을 찾는 곳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곳입니다. 우리 신앙은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존재를 다하여 사랑하며 하나님의 온전한 주권적인 통치아래 거하며 하나님의 길로 행하는 그래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의식은 그러한 신앙의 본질을 위한 수단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성전만 하더라도 그 예배가 본질이 아니요, 예배는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그 하나의 수단 이었고 하나님을 찾고 구하고 하나님 알기를 구하고 하나님의 마음과 의중을 알기를 구하고 하나님의 길을 알아 그 가운데 행하도록 그렇게 하나님을 찾도록 의도 된 것이 성전이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앙이 타락하여 의식이 본질을 대처해 버린 거짓신앙체계, 율법주의 가운데 빠져 있으니까 자기들의 삶에서는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의중과 의도도 전혀 알지 못한 체 자기 방법대로, 세상의 방법대로, 자기목적을 위해, 자기 욕심을 위해 살아가면서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목적과 자기 세상에서 목표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면서 여기서 의식 몇 가지 잘하면 복 주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성전을 의지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거짓신앙체계 가운데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것을 허물겠다. 실로에 행함같이 하겠다. 너희가 나를 버렸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시대에 종교지도자들이 똑같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길을 전혀 몰랐습니다. 삶에서는 철저하게 하나님을 떠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길이 무엇인지를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의중이 무엇인지를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그 시대에 와 계신데 그들은 하나님께 한다. 그러면서 그 아들을 대적했습니다. 전혀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그러면서 그 곳에서 제사를 드리면 그것이 신앙생활 잘 한 것처럼, 의식이 본질을 대처해버린 가짜 신앙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 아버지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하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아마 이방인의 뜰에서 그렇게 팔았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의중을 전혀 반영하지 않은 겁니다. 영적인 우월감 가운데 이방인을 위한 자리는 전혀 없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을 뽑으신 것도 그들을 통해 온 열방을 구원하시기 위한 통로로 그들을 뽑으셨는데 뿐만 아니라 내 아버지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다고 한 것처럼 그것을 보면 독점이니까 얼마나 수입이 많았겠어요. 그러니 많은 제사장들이 결탁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빙자해서 자기 배를 채우며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없는 체 의식이 본질을 대처해 버린 삶에서는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하나님의 길과 목적과 의중도 전혀 알지 못하고 자기 목적을 위해 살아가는 하나님이 수단에 불과한 자기 또한 타락한 강퍅한 마음대로 살아가는 그러한 그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채찍을 드신 겁니다. 그런데 지금 스데반을 대적하는 유대인들이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종교지도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예와 똑같은 예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또 다른 말로 하면 예레미야 시대에 유대인들, 자기 조상들이 가지고 있었던 예와 똑같은 그릇된 예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고소하는 것입니다. 저가 성전을 허문다고 그랬다. 이 성전을 향해서 모독하는 말을 했다. 그런데 스데반은 하나님 말씀을 좍~~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말하고 난 다음에 나중에 7장 46절에 가면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케 하여 달라 하더니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의 말한 바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목이 곧고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이것을 보면, 스데반은 정확하게 하나님 중심적인 관점에서 사람에게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과 똑같은 관점에서 하나님을 말씀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을 생각할 때에 스데반이 그렇다니까 “스데반이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일반 평신도인데” 이렇게 생각하는데 성경에는 바로 여러분이 그렇게 한다고 합니다. 여기는 여러분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이래야 한다고 하나님의 의도는 그런 관점에서 여러분을 보면 심각합니다. 심각합니다. 이렇게 설교를 하지 못할 뿐 아니라 설교를 듣는 것도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하니 그것이 얼마나 심각합니까? 웃을 일이 아닙니다. 이것이 진짜 심각합니다. 여러분 요즘 영적 분별력 이런 차원에서 보면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도움이 되겠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안 믿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사단의 뭐? 이런 것처럼 취급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한 분 이신데 인간이 하나님이라 그러느냐? 그들은 예레미야는 믿고 이사야는 믿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우리가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사야가 가지고 있던 신앙에 대한 예, 예레미야가 가지고 있던 신앙에 대한 예, 하나님이 주신 예죠? 예수님이 가지고 있던 예, 다 똑같습니다. 스데반과 똑같습니다. 그들이 이사야를 믿으면 예수님 믿어야 옳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 당시에 그런 겁니다.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자기 조상들처럼 예레미야를 대적했던 조상들과 똑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너희가 성경을 믿었다면 나를 믿었으리라 그 말이 진정으로 예레미야를 믿었더라면, 진정으로 이사야를 믿었더라면, 예수님을 믿게 되어 있습니다. 정확하게 하나님의 길에 서 있습니다. 영적 분별력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분임을 명백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뭐냐? 스데반은 집사중의 한 사람인데 말씀과 성령의 조화를 이룰 뿐만 아니라 성령에 있어서도 성령의 교제, 성령의 능력이 함께 하는 이 세대 제자들인데 예수님과 똑같았습니다. 말씀만 하더라도 정확하게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말할 뿐 아니라, 말씀으로 무장되어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 중심적인 가치관에서 말씀으로 무장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안 되어 있으면 교회에서 사표 내셔야 합니다. 요즘 집사 그러면 회의나 하는 것인 줄 압니다. 스데반과 같은 일꾼들을 세울 때 구제하는 일을 돕기 위해 세웠기 때문에 당연히 그 일을 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성경에 기록도 안 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한 일이 기록된 것은 예수님이 열두제자에게 명령한 그대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고 사역을 감당하도록 저들에게 가르치고 저들에게 행하도록 하셨는데 정확하게 그 일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집사요, 권사요, 장로라 하면서 교회에서는 회의나 하고 큰 소리나 치면서 하나님 나라 말씀은 전혀 무장되어 있지 않은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설교해서 다른 사람에게 전해야 될 텐데 설교는 둘째 치고 설교 듣는 것도 이해가 안 되고 하나님 나라의 일은 전혀 감당조차 그것은 목회자나 하는 일이라 생각하고 있으면서 그저 교회에서 찬성이요, 반대요. 이거나 하고 있으니 그게 무슨 집사입니까? 그게 무슨 권사입니까? 그게 무슨 장로입니까? 다음 주에 가서 사표 내십시오. 제가 우스개 소리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완전히 떠나 있습니다. 사표내고 처음부터 시작 하십시오. 초신자 성경공부부터 왜냐하면 오늘날 하나님 백성들이 너무나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무지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삶을 안삽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안 감당합니다. 그러면서 뭐하라 그러냐 하면 관록만 얘기합니다. 교회에서 집사는 어떻게 한다 이런 것 옛날부터 들어온 거 있잖아요. 전혀 성경과 상관없는 것. 예배시간 10분 전에 와서 양복 입고 가만히 앉아 있어야지 옆 사람이랑 얘기하면 되나? 얘기해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본질이 아니잖아요. 그거나 잘하고 있으며 신앙생활 잘하고 있는 겁니까? 우리나라에 많은 전도사님이라고 하는 분들도, 여자 전도사들도, 남자 전도사들도 스데반은 집사였는데... 하나님의 길을 가르쳐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길로 서게 하기 보다는 “에이 집사님 왜그래? 교회 잘나오고~” 요거나 하고 있어. 사표 내십시오. 다시 시작하십시오.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며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감당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삶을 가르치도록 훈련하고 전하고 살도록 하고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감당하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 세대를 보세요. 그렇게 했습니다. 빌립도 그랬습니다. 성경에 일곱 사람 중에 두 사람 얘기가 나오는데 두 사람 다 그랬습니다. 남은 사람도 그랬다고 간주 할 수 있습니다. 빌립도 여러분 말씀과 성령의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사도행전 8장 5절~13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더라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으니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그 것에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전부터 있어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친 큰 자라 하니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청종하여 가로되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더라 오래 동안 그 마술에 놀랐으므로 저희가 청종하더니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 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

 

말씀과 성령이 같이 가되 성령에 있어서도 이렇게 큰 능력이 함께 할 뿐만 아니라 빌립은 성령께 민감했습니다. 그래서 사역을 감당하다가 천사를 통해서 사막으로 가라고 할 때 갔고, 그때 큰 행렬이 있었는데 성령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길 가까이 가라 그렇게 말씀하실 때 그는 성령의 음성을 분별해서 가까이 갔고 가까이 갔을 때 어떤 사람이 성경을 읽고 가는데 큰소리로 이사야서 53장을 읽고 갈 때에 그 말이 무슨 말이냐고 물었더니 설명해 줄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이해하겠느냐고 그래서 타라고 그래서 타고 가면서 바로 거기에서 예수님을 증거해서 에디오피아 국왕의 국고를 맞은 재무장관인 내시가 예수를 믿게 되고 여러분 초대교회 당시 여러 가지 상황을 보면 에디오피아의 큰 복음의 부흥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같은 경우에도 제일 먼저 가장 오래된 사본 하나가 에디오피아에서 발견된 거거든요. 그러면 우리는 정확하게는 다 알 수 없지만 이 사람의 영향력이 적지는 않았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계획을 가지고 일하실 때에 빌립은 성령의 능력이 강력하게 나타날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 성령님과의 교제 가운데서 그 분의 인도와 의도를 깨닫고 순종할 수 있는 성령과의 교제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랬고 사도들이 그랬고 사도들이 양육하여 훈련시킨 2세대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이처럼 우리 모두가 다 사역자가 되어야 하는데 쉽게 말하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하는데 우리 모두에게 다 말씀과 성령의 조화가 필수입니다.

 

이번 컨퍼런스를 하게 된 것도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적극적으로 더욱더 하나님 중심적인 말씀으로 무장되어지고 그 삶을 실제로 삶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살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능력으로 무장시켜서 여러분이 성령과의 교제뿐만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각자가 있는 자리와 위치에서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감당하는 자리로 나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이 자리를 마련하고 계십니다. 그건 성경에서 명백하게 하나님이 의도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니까 저나 여러분이나 “내가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고 있는가?” 그것을 보고 얘기합시다. 의장 반대요! 이런 소리 그만하고 괜히 종교적인 척해가지고 교단이 어떻고 교파가 어떻고 그런 얘기 그만하고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가에서 예수님과 대화하면서 당신네 유대인들은 어디서 어떻고 우리 사마리아인들 어디서 어떻고 이런 종교적인 얘기 그만하고 진짜 우리 “예수님의 제자로 사는지?” 그것가지고 얘기 하십시다. 저도 그렇고 여러분도 그렇고 그것이 안 되었으면 진짜 하나님께 애통하는 마음으로 제자의 삶을 살도록 추구해야지 종교적인 얘기나 던지는... 그러면서 주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지 않는 것을 그것으로 정당화 시켜버리는 그러한 타락한 삶을 더 이상 살아서는 안 될 줄 믿습니다. 이번 계기로 아예 그런 껍데기는 벗어 버리고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모습으로 정직하게 서서 주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기를 시작하게 되시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 번째, 주권적인 하나님의 역사로서의 성령의 사역.

 

이것이 참 중요한 것이 이처럼 성령과의 친밀한 교제, 또한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을 감당하되 성경은 예수님이 감당하신 성령사역, 사도들이 감당한 성령 사역, 또한 스데반이나 빌립과 같이 2세대 일꾼들이 감당한 성령사역이 누구든지 그것이 주권적인 성령의 사역이었던 것을 매우 강조하고 있습니다. 주권적인 하나님의 역사로서의 성령의 사역이었던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제가 얼마 전에도 일부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참 말하는 것을 보니까 두렵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함을 진짜 찾아보기 힘든 자기의 신학적인 작은 지식가지고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판단하고 있는 그러면서 “오늘날도 치유역사가 함께 한다면 왜 꼭 교회에서만 고치냐? 병원 가서 보여줘야지?”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도 환자들을 쫓아다니면서 고치지 아니한 것 아세요? 예수님이 환자들을 쫓아다닌적 한 번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삶에도 성령의 역사는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였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임의로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역사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몇 구절만 보아도 우리가 명백하게 알 수 있습니다. 한 구절은

 

누가복음 5장 17절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그날따라 다른 날보다 더 병을 고치는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님과 함께 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사역만 하더라도 어떻게 생각하느냐하면 성령의 능력을 우리 호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다니는 줄 압니다. 예수님이나 사도 바울이나 베드로와 같은 사람은 성령의 능력이 강력한 분들이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그렇다하더라도 바울이나 베드로나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이 충만한 사람들이니깐 호주머니에 넣고 가지고 다니다가 필요한대로 꺼내 쓰는 줄 알아요. 그런데 심지어 하나님의 이들이신 예수님의 삶에서도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그곳에 함께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날은 치유하시는 성령의 능력이 더 강력하게 예수님께 임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이와 반대되는 구절도 있습니다. 마가복음 6장 5절 ~ 6절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안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심지어 없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그러니깐 자기 고향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신뢰하지 않고 불신한 고로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이렇게 소멸되고 방해되었던 것을 볼 수 있죠.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5장 19절에 보면 나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성령의 사역에도 말씀하셨죠. 이건 여러 차례 말씀하셨죠. 이러한 구절들을 볼 때에 예수님의 사역에서도 성령님의 사역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역사하신 사역이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약성경 중에서도 초대교회 당시에 성령의 역사가 강력하게 나타났다고 기록한 책이 시도행전이잖아요. 그런데 어느 책 못지않게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들을 통한 성령의 사역이건 혹은 다른 사람들을 통한 성령의 사역이건 그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서의 성령의 사역이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떤 책보다도 사도행전이 그것을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떤 책 못지않게... 몇 구절 보겠습니다. 성경을 한번 찾아보시죠.

 

사도행전 3장 11절 사도행전 3장에 무슨 내용이 있습니까?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베드로와 요한이 지나가다가 일으켜 세운 사건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구절을 읽을 때만 하더라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말씀드린 대로 베드로와 요한은 늘 성령이 충만하기 때문에 이런 일을 거뜬히 할 수 있는... 지나가다가 앉은뱅이 있으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면 “딱” 일어나는... 그러나 우리 같은 사람을 예수님의 능력이 없으니까 안 돼!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런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 그 길은 예수님도 지나가셨습니다. 능력으로 따지면 예수님을 통해서 더 강력하게 하실 수 있습니까? 사도를 통해서 강력하게 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답변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사도 베드로와 요한만 하더라도 거기 지나간 첫 번째 날이 아닙니다. 날마다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날 고치신 겁니다.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역사하신 겁니다. 주권적으로 역사하신 겁니다. 조금 있으면 더 확실하게 나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해서 일으켜 세웁니다. 나이가 한 40세 남짓 되었더라.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날마다 거기서 구걸하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성전에 온 사람은 다 그 사람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나아서 걸을 뿐만 아니라 뛰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다닙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다 놀랬습니다. 도대체 어찌된 일이냐? 그랬더니 베드로와 요한이 고쳐주었다 그랬겠죠. 그랬더니 베드로와 요한이 솔로몬의 행각이라는 곳에 머물러 있을 때, 사람들이 그에게 우르르 왔습니다. 오늘날도 아마 그럴 겁니다. 제가 가만있다가 암환자를... 암 덩어리가 떨어져 나왔다. 우르르 올려고 난리를 피울 겁니다. 줄 좍~~ 서가지고... 사람들이 이렇게 베드로와 요한에게 달려 왔습니다. 그랬더니 베드로가 그들에게 답변하는 말이 사도행전 3장 11절 이하에 나옵니다.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이 말은 요한에게 딱 달라붙으니 이 말이죠.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이거늘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여기를 보세요. 잘 보세요.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이게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여기 보면 베드로의 신경질이 나옵니다. 여기 보면 베드로가 신경질내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게 안보이십니까?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에게 달려드니까 베드로가 신경질적으로 답변하는 겁니다. 왜 우리의 경건과 능력으로 이 사람을 낫게 한 것처럼 우리를 바라보냐? 잘 보세요. “왜, 우리의 경건과 능력으로 이 사람을 낫게 한 것처럼 우리를 바라보냐?” 잘 보세요. 베드로가 자기 능력으로 고치지 않은 것은 알지요? 제가 누굴 위해 기도했더니 그 사람이 나았다는 것은 내 능력으로 하지 않은 것을 알지요? 그런데 베드로가 그 말만 한 것이 아니라 뭐라고 그랬냐 하면, “왜 내 경건으로 이 사람을 낫게 한 것처럼......”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면, 그것이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으로 한 것이지! 예를 들면, 어느 목사의 능력으로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압니다. 그 정도는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느냐면, 그래도 저 목사는 경건한 삶을 사니까 하나님이 저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저 사람은 그래도 기도 많이 하니까 하나님이 저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저 사람은 금식도 참 많이 하는 희생적인 삶을 사니까 하나님이 저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하는 말이 뭐냐 하면, 이것은 내 능력으로 되지 않는 것 뿐 만아니라 여러분 제발 잘 들으세요. 내 능력으로 치유되지 않은 것 뿐 만아니라 내 경건함 때문에 된 것도 아니라 그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려면 경건한 삶을 사는 것은 중요합니다. 문제는 그의 경건함 때문에 이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말하느냐? 경건함으로 따지면 그가 더 경건하겠습니까? 예수님이 더 경건하겠습니까? 그 길을 예수님도 여러 번 지나가셨습니다. 그러면서 사도 베드로가 뭐라고 하냐면, 다음절보세요. 주어가 뭔가? 보세요. 13절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이것이 주어입니다.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이 그 사건을 통해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고 그 날 오천 명이 구원을 받게 되었는데 그러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기위해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역사하사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 그 사람을 치유하신 것 뿐 입니다. 그 해답이 베드로와 요한에게 있지 않았어요. 그 해답이 베드로와 요한에게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주권적으로 그 날 역사하신 겁니다. 그래서 그 많은 날 중에 하나님이 그 날 치유하신 겁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베드로와 요한을 사용하신 것 뿐 입니다. 주어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니깐 사람들이 베드로를 처다 보고 달려드니까 베드로가 신경질 내고 있는 겁니다. “왜, 우리를 주목하냐?” “왜, 우리의 능력으로 이 사람을 치유한 것처럼..” “우리의 경건 때문에 이 사람을 치유한 것처럼..” “왜, 우리를 쳐다 보냐! 이것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신 사건이야.” 이렇게 말하고 있죠. 그냥 아멘만 하지 말고 잘 들으세요. 새겨서... 왜나 하면, 실컷 설교하는데도 다음 순간 돌아서면 또 사람 봐요.

사도행전 14장 3절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 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시니

 

이 경우에도 바울과 바나바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놀라운 권능과 능력을 행하셨는데 우리는 그렇게 생각한다니까요. 바울과 바나바는 특별한 사람이라, 저들은 그야말로 성령의 능력이 충만하기 때문에 아무 때나 저들을 통해서 성령의 능력이 강력하게 나타날 수 있는 사람이지만 우리 같은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 우리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니까요.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시는가하면, 이것이 바울과 바나바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 되게 하기위해 바울과 바나바의 손을 통해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셨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역사하신 겁니다. 정신 차리세요. 설교를 들을 때 졸지 말고 딴 생각하지 말고 정신 차리세요. 지금 조는 분 거의 없는데...... 제가 이런 말하니까 제가 좀 여러분 무시하는 것 같아요? 죽~~ 설교해 나가면 되지! 애들 앞에서 하는 것처럼 이러냐? 그러는데... 제가 오늘 이상하게 그렇게 되네요. 그런데 다시 제 말 들으세요. 정신 차리세요. 설교 실컷 들었는데 옆에서 얘기하는 것, 말하는 것 들어보면, 너무 너무나 인본주의적입니다. 아직까지도... “그래도 목사님! 그래도 난 성경 못 믿겠으니까...” 내 생각이 옳다. 그 얘기 밖에 더됩니까? 정신 차리세요.

사도행전 19장 11절 여러분 보세요. 사도행전 19장이 어떤 구절이지요? 바울을 통해서 에베소에 갔을 때에는 얼마나 성령의 능력이 함께 하셨던지? 바울의 몸에다가 손수건이나 앞치마 같은 것을 대었다가 환자에게 갖다 얹으면 환자가 나아버리고 귀신이 쫓겨 가고 그랬어요. 그런데 요즘 그것을 흉내 내어 미국 같은 곳에는 텔레비전 사역하면서 손수건 안수해주고 파는 사람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점도 성경은 뭐라고 표현하느냐하면 하나님이 (주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이것이 바울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주도권을 잡으시고 주권적으로 역사하신 일이였다. 이 말입니다. 사도행전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바울 자신도 직접 그렇게 얘기합니다. 어디에 나오는가? 한 예가, 데살로니가전서 1장4절~5절 나와요. 데살로니가교회에 편지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이 말은 나는 하나님께서 너희를 택하심을 알았다. 어떻게 알았냐?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이 말은 말씀드린 대로 사도행전과 같은 구절을 읽을 때, 우린 이런다니까요! “사도 바울은 특별한 사람이니까, 그냥 아무 때나 가면 성령이 충만하니까 능력이 팍팍 나는 것은 이해해, 사도 바울이 누군데, 당연히 그런 사람을 하나님이 역사하시지!” 그런데 정작 사도 바울은 뭐라고 말하고 있는가하면, 하나님이 너희를 택하신 것을 알았다. 내가 어떻게 알았냐? 내가 가서 말씀을 전하는데 하나님이 강력하게 뒷받침 하신 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이들을 택하셨구나! 내가 그것을 알았다.” 이렇게 말하고 있죠. 이것이 바울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도권을 잡으시고 주권적으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일하시는 겁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성령의 역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입니다. 가장 초대교회의 성령의 역사를 가장 많이 말하는 사도행전이 다른 어느 책보다 이것을 강력하게 강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정작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은 그들 모두가 이것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역사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인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반드시 인식해야 합니다. 아예, 여기 박혀 있어야 합니다. 우리 눈앞에 또렷이 보여 져야 합니다. 제가 오늘 여섯 가지 나누면서 이것이 성령의 사역을 감당할 때, 뿐만 아니라 우리가 바라보고 나아가야할 목표이기도 합니다. 이 한 가지, 한 가지는 우리 눈앞에 철저하게 인식되어져서 선명히 바라보고 나아가야할 목표이기도 합니다. 왜? 중요하냐하면, 성경에 말한 대로 성령의 역사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인 것을 인식하게 될 때, 아주 중요하데.... 몇 가지가 나타나는데, 하나는 우리에게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나도 교만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명백하게 보이지 않으면, 성령의 은사가 조금만 여러분에게 부어져 보십시오. 하늘을 나를 겁니다. 기고만장할 겁니다. 말은 그렇게 안 해도.... “ 네가 은사를 알아?” “네가 능력을 아니?”

또, 그 반대가 뭐냐 하면 자기는 교만하지 않으려고 노력한 나머지 자기에게 함께 하신 하나님의 성령의 기름부음과 하나님의 행하심마저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반대 극단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인 것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여기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에 보면, 우리를 질그릇에 비유했고 우리는 질그릇의 보화를 가진 자라 그랬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너무너무 중요한 올바른 예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오늘 밤 설교시간과 성령의 사역시간에 오늘 예배시간도 마찬가지고 하나님께서 엄청나게 하셨다. 더욱더 엄청난 일을 하셨다. 그것은 저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찬양리더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질그릇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주도권을 잡으시고 일하고 계실 따름입니다. 그런데 여기 중요한 것이 또 한 가지 있어요. 우리는 질그릇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 때문에 아닌데, 하나님의 일하심은, 기름부음은 보화입니다. 그것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이 자기로 인한 것으로 인식해서 마음이 교만하여 높아지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다른 사람은 자기가 안 높아지려고 하는 것은 좋은데 하나님이 기름부음으로 하나님이 목적을 이루어 가시는 소중한 보화가 와 계신데도 그것을 소홀히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둘 다 똑같은 극단입니다. 성경대로 질그릇에 담긴 보화입니다. 바울은 질그릇 이였습니다. 자신이 말한 것처럼 에베소교회에 하나님이 일하신 것 바울 때문에 일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시대에 영적인 그 어두움과 억압 가운데 있는 에베소 지역을 위해 그들을 자유케 하시고 구원하시고 그 곳에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시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기 위해 주도권을 잡으시고 주권적으로 바울의 손을 통해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신 것에 불과했습니다. 바울은 질그릇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바울은 질그릇에 불과했지만 하나님께서 그 곳에 행하셨던 그 일은 너무나 소중한 일이였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돌아보시고... 너무나 소중한 일이였습니다. 우리는 다 질그릇에 불과하여서 우리 때문에 일이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지금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를 이루어 가고 계신 겁니다. 사실 그렇게 보아야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하나님이 한사람, 한사람 하나님의 백성들은 만지시고 회복시키시고 새롭게 하시고 치유하시고 잃은 영혼을 구원하시고 자유케 하신 이 일은 보화입니다. 그것은 너무너무 중요한 하나님의 성령의 기름부음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인 것을 철저하게 인식해야 이처럼 교만하지 않습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습니다. 또 하나는 그렇게 철저하게 인식해야 하나님의 역사가 훨씬 더 자유롭게 나타날 겁니다. 여러분 한편으로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가로막는 가장 주된 이유 중의 하나가 여러분이 사람을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이 섬기는 교회에서 하나님께서 40년 된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는 사건이 있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그것을 위해 쓰임 받은 사람이 어떻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여러분의 신앙상태로, 무슨 말인지 이해되십니까? 그러면 그 사람 진짜 불쌍해 질 겁니다. 교회는 완전히 사람 중심적으로 가버릴 것이고 하나님이 어떻게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시겠습니까? 또 하나, 성령의 역사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인 것을 철저히 인식하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더 큰 역사를 자유롭게 사모할 수 있습니다. 왜요? 그것이 내게 있지 않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이 말하기를 전 세계적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위해서 진짜 성령이 강하게 역사하시고 귀하게 쓰임 받은 한 분이 계시는데 성령의 사역을 하기 전에 어떻게 하십니까? 물으니 “콜라 한잔 마시지요.” 우리 생각에는 30분 동안 간절히 기도하고... 콜라 한잔 마시다니? 무슨 말인가? 그 일이 자기에게 있지 않음을 아는 겁니다. 하나님이 주도권을 잡으시고 일하시는 겁니다. 그럼 기도 안하느냐? 기도는 평소에 해야 합니다. 어떤 한 분이 컨퍼런스 와가지고 참 귀한 분인데 그 분이 컨퍼런스 설교 하면서 말씀하시기를 컨퍼런스만을 위해서 준비하고 오면 얼마나 그것이 불쌍한 겁니까? 목사가 컨퍼런스만 준비하고 딱 끝나면, 옛날로 돌아가! 그것이 뭐냐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하나님 나라가 임하도록 중보기도하고, 말씀 묵상하고, 하나님 보이신 대로 우리 삶을 조정하여 동참하고, 하나님 나라의 우리의 삶을 드리고, 헌금 드리고, 하나님께 예배하고 이 일은 평상시에 우리가 하는 것입니다. 평상시에 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살면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그 분의 뜻을 이루시도록 그 분께 주도권을 드리고 그 분이 하시도록 하시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에 있지 않음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더 주의 일을 위하여 주의 더 강한 능력을 부으시도록 사모하고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있지 않음을 알기 때문에, 이것이 박혀지길 축복합니다. 여러분에게 뿐만 아니라 저에게도 박혀지길 축복합니다.

 

네 번째, Natural is a Supernatural and Supernatural life is in a Natural. 영어로 말했는데요, 어떤 분이 한 예기인데, 정확하게 성경적인 가치관 같은데 제가 뭐라고 변역하기가 그래서... Natural is a Supernatural 이 말은 자연적으로 초자연적인, 그리고 Supernatural life is in a Natural 초자연적인 삶이 자연적인 그 뜻입니다. 자연적으로 초자연적인 삶과 초자연적인 것이 자연적인 삶.

자연적으로 초자연적인 삶, 우리는 성령의 능력이 임하는 것도 특별한 사람에게만 임한다고 생각합니다. 기도원에서 금식을 밥 먹듯이 하는 소수, 찾아보면 맨 날 기도굴속에 들어가 있어, 이 사람은 신문도 안 봐. 텔레비전도 안보고 그 사람에게는 연속극 보는 것은 완전히 죄야! 이런 사람이나 성령의 능력을 경험할 것으로 생각해! 또, 성령의 능력이 임하면 우리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무엇인가 달라야 될 거라고 생각해! 흰 양복입고 백구두 신고 목소리도 “촥” 깔아가지고 무언가 좀 위엄이 있는, 다른 사람하고 다른 목소리를 깔아 가지고“집사님!” 그런데 예수님이 그랬겠습니까? 예수님이 흰 양복입고 백구두 신고 다니면서 머리에 포마드 바르고“집사님” 그랬겠습니까? 여러분 성령의 능력이 여러분과 함께 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이 될 필요 없습니다. 일상생활을 사는 것입니다. 당연히 주께 헌신된 삶을 살아야합니다. 말씀드린 대로 열한제자처럼 삶의 목적이 주의 영광을 위해 주의 나라를 위해 드려진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부든지, 의사든지, 교사든지, 직장인이든지, 사업가든지, 우리의 사는 목적이 주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고, 그 영광을 위해 우리 삶이 드려지는 것이고, 그 영광을 위해 우리의 삶이 조정되어져서 헌신된 삶을 살아야합니다. 우리가 감당하는 세상의 일도 하나님의 목적을 위한 삶을 살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고 그 삶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주님의 제자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보편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부로서, 의사로서 교사로서, 직장인으로서 삶을 살아가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삶이 그런 삶입니다.

<능력전도>라는 책이 그 책이 미국 크리스천 투데이라고 하는 복음주의를 대표하는 유명한 잡지에서 2차 대전 후에 미국 복음주의, 보수교단의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을 1권부터 50권까지 차례대로 선정한 것 중에 이십 몇 번째로 선정된 책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보면, 많은 간증들이 나옵니다. 비행기에서 스튜디어스를 봤더니 이렇게 써 있어가지고 나누었더니 그냥 회개하고 돌아오는, 이 많은 간증에 쓰임 받은 사람이 블레인 쿡 이라는 사람입니다. 그 분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신 일이 많은 예가 들어 있어요. 그런데 그 분은 과거에는 교회에서 필요에 따라 목회자로 섬겼는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그 이후로 빵공장 사장을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목사가 어떻게 타락해 빵공장 사장하냐 그러는데 이해가 다른 겁니다. 자기는 빵공장 사장하든 목회하든 주의 일을 위해서 하는 겁니다. 교회의 필요를 따라 교회에서, 그 일에 있어서 그 일을 할 때에는 가서 스텝으로 섬기고 빵공장 사장하는데 일 년에 백 명이 훨씬 넘는 사람도 주님께로 인도하는데... 이런 식이예요. 어떻게 하냐? 한번은 직원들이 몇 백 명이 되나봅니다. 어떤 사람이 갑자기 배를 끌어안고 통증이 있어 쓰러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빨리 엠블런스 불러야 되잖아요, 그래서 엠블런스 부르려고 그러는데 성령께서 그러시는 겁니다, “나 여기 있다” 그러니까 부르려다 말고 사무실로 잠깐 들어가서 세 명이서 공동사장인데 자기 사무실로 그 직원 들어오라 그럽니다. 와가지고 “내가 기도해줘도 되겠냐고?” “기도해달라고!” 그냥 기도하는 겁니다. 성령님의 말로 하나님 그냥 치유하시는 겁니다. 그 다음 주에 자기 온 식구들을 데리고 교회 나오는 겁니다. 이렇게 삶의 현장에서 주님께 헌신된, 그것이 빵공장사장이건 목회자건 학생이건 직장인이건 우리의 살아가는 목적이 위에서 부르신 부르심을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주님의 제자로서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야할 본분이며, 우리의 비전이고 목표입니다. 그리고 그 목적에 우리의 삶이 조정된 것입니다. 그리고 드려졌고 그렇게 주님의 인도를 따라 살아가는 가운데 성령께서 우리의 삶 속에서 주도권을 잡으시고 앞서 가시는 것입니다. 앞서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를 쓰시길 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정주분데 여러분에게 능력이 임했다고 여러분이 가정주부 때려치우고 신학대 갈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은사만 조금 나타나도 신학교 갈려고 합니다. 신학교만 가야 주의 일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학교 간다 하면 이제 보통사람 나타나면 훈장 달고 “나는 전도사야, 나는 너와 달라!” 그리고 신학교가면 보통 일은 다른 일은 안 해. 자기는 신학교 갔으니까, 자기는 구별된 사람이니까, 저런 천한 일은 할 수가 없어! 그렇게 다니니까 이제 기도해주고 다니면서 돈 받고. 이제 기도해주고 다닙니다, 저는 그것이 주님이 의도하신 삶은 전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에게 강력하게 성령의 은사가 임해도. 여러분 신학교 갈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풀타임 복음사역자로 부르시면 가야죠. 그런데 제 얘기는 그것이 아닌데 능력이 임했다고 갈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부로서, 교사로서, 여러분이 있는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얼마든지 사용될 수 있습니다.

 

지금 이길수목사님 컨퍼런스 끝나고 필리핀 가야합니다. 이번에 우리 필리핀 훈련원이 있는데 모일 사람의 수가 좀 많을 거 같다고 기도사역도 많이 오라고 저도 조금 있으면 대만 가야합니다. 대만의 기도사역도 많이 필요합니다. 대만에 가기 전에 저는 또 영국을 가야합니다. 지금 우리 팀들이 가는 곳 만해도 여러 나라고, 가기만해도 자주가고 또 여기서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기 때문에 기도사역도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이 모든 집회는 다 따라갈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다 주부로서, 직장 할 일이 있으니까 그러나 여러분 모두가 다 그렇게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되어 있어서 하나님께서 보내시면 남아공 가서 섬겨서 놀라운 일을 행하고 와서 주부로 살아가다가 주님의 사람으로 쓰임 받다가 다음 순간에 러시아 가서 하나님이 하라고 그러면 가서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시고, 그것이 Natural is a Supernatural 이란 삶입니다. 자연적으로 초자연적인~~

 

그럼 초자연적으로 자연적인 삶이 뭐냐? 그것은 아까 40살 된 앉은뱅이를 하나님이 일으켜 세웠잖아요.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서, 그러니까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달려오니까 베드로가 하는 얘기가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고 그래요. 40년 동안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자가 벌떡 일어나 뛰는 것이 베드로의 눈에는 기이한 것이 아닙니다. 왜요? 예수님과 다니면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삶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시는 것이 보편이 삶의 한 부분임을 알기에, 우리도 그렇게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재키 프린저라고 홍콩에서 참 놀라웁게 하나님께서 쓰시는 제가 재키 프린저의 사역을 보면서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오늘날 하나님이 어느 날 딱 생각하는데, 하나님이 하시면 하시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분이 하는 얘기가 “우리의 성숙한 그리스도의 삶에는 (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그 말입니다.) 소위 세상에서 초자연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그러한 일들이 보편적인 삶의 한 부분”이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고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고 우리의 길을 주도하시고 베드로에게 고넬료의 집에 보내실 때도 그랬듯이, 빌립을 사막으로 보내실 때 그랬듯이, 또 성령으로 역사하신 것이 보편적인 삶의 한 부분인 것입니다. 그것이 초차연적인 것이 자연적인 삶입니다.

다섯 번째, 철저히 인격적인 사역.

이것 또한 아주 중요합니다. 철저히 인격적인 사역. 여러분 예수님께서도 치유하실 때 때로는 보편적이지 않는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침을 탁 뱉는다던가, 한 예를 들어볼까요?

 

마가복음 8장 22절~23절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소경 하나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대시기를 구하거늘 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그러니까 어떤 때에는 소경에게 “보라” 그러면 눈이 떠졌어요. 그런데 이 경우는 데리고 나가서 침을 “텍” 눈에다 뱉은 다음에 안수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이런 구절 해석하면서 말하기를, 침이 약으로 쓰였다고 참~ 침이 약으로 쓰였으면 오늘날 침 뱉으면 소경이 났습니까? 침이 약으로 쓰였으면 그럼 그 당시 모든 소경들에게 다 침을 뱉었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안했습니다. 어떤 때에는 “보라” 그러면 나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때에는 침을 “탁” 뱉어가지고, 그 뿐만이 아닙니다.

 

마가복음 7장 32절~35절

사람들이 귀먹고 어눌한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 그의 양 귀에 넣고 침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더라

 

그러니까 뭐냐 하면, 귀머거리, 눈 먼 자를 데리고 왔는데 이렇게 손을 딱 귀에서 넣었다 뺐을 뿐 아니라 혀를 딱 꺼내가지고 “텍” 뱉어 가지고 바르면서 “에바다” 그랬어요. 그러니까 우린 어떤 때는 하나님이 하신 것을 보면, 좀 보편적이지 않은 방법을 보면 어떻게 사람을 저렇게 하냐? 말로만하면 되지? 우리도 그러는데 예수님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방법에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떤 사람들은 귀머거리 환자만 보면 손~이렇게 해가지고 빼! 방법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동참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인도를 따랐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는지는 하나님께 물어봐야죠. 아무도 모르는 겁니다. 어떤 때에는 분명한 한 가지는 보편적이라는 방법을 썼습니다. 그런데 여기 아주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보편적이지 않은 방법을 쓸 때에는 항상 따로 세웠습니다. 한쪽에 따로, 사람들 안 보이는 곳으로, 밖의 무리를 떠나서 밖으로 데리고 나갔습니다. 따로 세웠습니다. 예수님이 사람들 앞에 창피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이렇게 했다. 다른 구절들을 보면 예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그럼 왜 그렇게 했을까요? 제 추측이긴 하지만 그 사람의 인격을 위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상대방의 인격을 위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만약에 앞에 다 세워 놓고 “이 사람 귀신들린 사람입니다. 귀신아 나가라” 군중들 앞에 세워 놓으면 귀신이 들어있는지? 나갔는지? 확인도 안 되는데 사람들이 이 사람을 볼 때 어떻게 보겠습니까? 그 때부터 저 사람 옆에 가면 옮을 것 같애! 그것이 귀신이 들어오는 것도 아닌데 우리는 그런 편견이 있어가지고 저 사람은 귀신 들려가지고 저 사람 옆에 가면 귀신 옮을 거 같애! 예수님은 철저하게 인격적으로 사역하셨습니다.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하셨습니다. 이것은 성령의 사역을 감당함에 있어서 너무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은사를 살펴 보다보면 성령의 은사를 감당하는 길이 나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장이라는 장이 다른 장이 아니고 성령의 은사를 사용하는 하나님의 방법을 말합니다. 사랑의 방법입니다. 이건 명백합니다. 제가 설명 할 시간이 없는데 그러면서 거기에 보시면, 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그러니까 은사를 행할 때 오래참고 은사를 행할 때 온유함으로 해야 한다. 온유함은 친절함을 말합니다. 투기하는 자가 시기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은사를 행할 때 자랑해서는 안 되고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을 감당하되 교만해서도 안 되고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성령의 은사를 행하되 능력으로 사역을 감당하되 무례히 행해서는 안 된다. 여러분 어떤 사람에게 성령의 은사가 좀 나타난다고 반말 찍찍하면서 욕해가면서 쌍시옷 붙여가면서 하죠. 성령의 기름부음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그분이 욕해도 그 상대방을 위해서 치유 할 수 있습니다. 그분 때문에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질그릇이고 기름부음은 보화입니다.

 

하나님은 치유 받는 사람들 위해서 그 능력이 임한 그 사람을 위해서 어떤 사람이 그렇게 욕하고 무례하고 그래도 역사해서 사람들을 만지실 수 있습니다. 그날 아무리 하나님이 만지셔도 그 사람은 절대로 정당화되지 못합니다. 성경에 보면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어 그런 기적이 나타나도 사랑으로 행치 아니하면 너에게는 아무런 유익이 없다 그랬습니다. 반드시 인격적으로 하셔야 합니다. 인격적으로 하셔야 되요. 상대방의 인격을 철저하게 존중하셔야 합니다. 과거에 이렇게 우리 모임 초기에 어느 한 도시에서 기도 받으러 오던 젊은 아이가 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그 아이를 어떻게든 치유해 보려고 그 아이를 이 기도원 저 기도원 데리고 다니면서 기도를 많이 받게 했습니다. 우리 기도해주다 보면, 그 아이가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예기 한 것을 들어보면 어떤 기도원 같은데 가면 남자 전도사 혹은 남자 목사 이런 분들이 중학교 여학생인 그 학생을 딱 눕혀 놓고 배를 깔고 앉아 가지고 눈에다 손을 찌르면서 귀신아 나가라고 아이가 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치유는 전혀 못해 줄망정 상처만 주고 있는 것입니다. 너무너무 타락한 겁니다. 성령의 이름을 빙자해서 인격의 심각한 손상을 주는 것은 너무너무 타락한 겁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인격적으로 하셨습니다. 성령의 은사를 통해서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을 감당하되 절대로 무례히 행해서는 안 됩니다. 친절하게 하라고 그랬습니다. 반드시 인격적인 사역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제 얘기 잘 들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감동을 나눌 때에도 상대방의 인격을 철저하게 존중해야 합니다. 무슨 말이냐? 아무리 내가 받은 감동이 옳다할 지라도 옳다는 확신이 있다할 지라도 그것을 상대방에게 전해서 상대방이 그것을 판단해서 따라가는 것은 상대방과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의 원칙이 모든 예는 반드시 시험해 보라고 그랬습니다. 이 말은 자기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반드시 분별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나아갈 때에도 우리가 자발적인 선택의 결단을 가지고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고 하나님의 길에 가도록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는데 우리의 자유의지를 무시하고 하나님 마음대로 하실 거 같으면 순식간에 세상 다 바꿔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안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감동을 받는 것은 맞을지 모르지만 감동이 하나님께서 주신 아무리 확신이 있다할 지라도 상대방의 자유의지를 무시하면서 자기 감동받은 대로 이끌어 가면 잘못된 겁니다. 감동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자세가 잘못된 겁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신 것이라도 상대방이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자발적으로 중심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여 동참할 때만 의미가 있고 열매가 있는 것이지 다른 사람의 의지에 의해서 강압적으로 순종되어진 것은 진정한 순종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성령의 사역을 감당할 때에 반드시 인격적으로 하셔야 합니다. 철저하게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하셔야 합니다. 그에 반하는 것은 말씀드린 대로 우리가 혼돈되는 것이 역사는 여전히 나타나니까 치유는 나타나니까 능력이 임하니까 무례하고 옳지 않은 태도들 까지도 옳은 것으로 생각하는 그것입니다. 아닙니다. 하나님께 그 상대방을 생각하셔서 이들이 무례히 행함에도 불구하고 역사하셔서 치유하시고 능력을 부으실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릇된 자세가 절대로 정당화되지 않습니다. 절대로 정당화되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인격적인 사역이 예수님의 사역이고 우리가 감당해야할 성령의 사역입니다.

 

마지막으로 여섯 번째, 이것 또한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웃을 향한 긍휼에 토대한 사역입니다. 이웃을 향한 긍휼에 토대한 사역.

특별히 마태복음에 보면 이 부분이 너무나 잘 나옵니다. 제가 쭉 보면서 많이 자신을 돌이켜 보고 제가 많이 하나님의 길이 보여 지고 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말씀드린 대로 이웃을 향한 긍휼의 사랑입니다. 여러분 가장 큰 계명이 뭐죠? 네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했습니다.

 

마태복음 22장 37절, 38절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이것이 가장 큰 계명입니다. 가장 크고 가장 첫째 되는 계명입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성경에 보면 십일조를 드리라는 얘기도 있고 세월을 아끼라는 얘기도 있고 하나님께 감사하라 예배드리라 전도하라는 얘기도 있고 다 있는데 가장 큰 계명이 뭐냐? 가장 우선되는 계명이 뭐냐? 너희는 너희의 전존재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네가 지금 올바른 관계에 있는가, 없는가를 보려고 그래도 바로 그 계명으로 우리를 비추어봐야 되요. 제자 포도나무 교회 담임 목산데 포도나무교회가 지금 잘 하고 있는지 못하고 있는지를 보려면 교회가 얼마나 빨리 성장하냐? 얼마나 큰 건물이 있냐? 예산이 얼마냐? 성도들이 얼마나 세상 적으로 잘나가는 사람들이 많냐? 이것이 기준이 아니고 목사인 나와 우리 성도들이 지체들이 성경말씀대로 가장 큰 계명, 가장 우선적인 계명대로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가를 보면 우리가 올바른 관계에 있는가, 없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교회는 성장할지 몰라도 거기에서 너무나 거리가 멀다 그러면 사람 앞에 잘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선 “꽝” 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시험해 볼 수 있는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가장 큰 계명. 여러분 사업에서 얼마나 돈 많이 벌었고 헌금 얼마나 많이 했고, 아니요! 그것 보다 여러분의 인생을 테스트 해볼 수 있는 올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는지 테스트 해 볼 수 있는 가장 큰 시험이 여러분이 존재를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런데 이 첫 번째 계명과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 했습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명백하게 성경전체에 나온 것이 이 첫 번째 계명과 두 번째 계명이 나누어 지지 않습니다. 두 계명은 항상 같이 갑니다. 손바닥의 양면처럼! 예를 들면 로마서 13장 8절을 보시면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했습니다. 이 말은 NIV 성경을 보니 네 이웃을 사랑하는 지속적인 빚 외에는 어떠한 빚도 지지 말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빚 진자처럼, 빚 진자가 빚을 갚는 것처럼 살아가라 그 말입니다. 그러면서 뭐라 그랬냐하면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했습니다. 좀 전에 예수님께서 가장 큰 계명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을 말씀하시면서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 했는데 사도 바울은 로마서 13장에서 첫 번째 계명은 딱 빼놓고 두 번째 계명만 말하면서 이 계명을 행한 자는 모든 율법을 이룬 자라 그랬습니다. 왜 이렇게 나온 줄 아십니까? 당연히 첫 번째 계명이 먼저 없이 두 번째 계명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첫 번째 계명 하나님을 사랑하면 반드시 이웃을 사랑함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둘은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웃을 안사랑하명 하나님 안 사랑하는 거예요. 왜 사도바울이 이렇게 말했느냐? 금방 말씀드린 대로 이 두 개는 나누어지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이기 때문에 이처럼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을 전존재를 다해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하나님에 대한 그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 그것이 가장 큰 계명입니다, 둘이 같이 갑니다. 이것을 먼저 기억하셔야 합니다.

 

자 그러면서 여러분 마태복음 5장~7장까지는 뭐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라고 했습니까? 어제 하나님 나라의 삶 혹은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면 8장~9장까지는 뭐에 대해서 말하는 구절입니까? 하나님 나라의 성령 사역에 대해서 말하는 구절입니다. 그러면 마태복음 8장에 하나님 나라의 성령 사역에 대해서 말씀하면서 가장 먼저 나온 사건이 무슨 사건인지 아십니까? 문둥병자 고친 사건입니다. 그런데 왜 여기 나온 줄 아십니까? 제가 성경을 보면 볼수록 마태는 참으로 주도면밀하게 성경을 썼습니다. 당연히 성령의 감동으로 썼습니다. 왜 여기 나온 줄 아십니까? 이 사건은 예수님이 감당하신 성령사역을 여러 가지 면에서 아주 본보기처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그럼 제가 하나 하나 설명하겠습니다.

 

마태복음8장 1절~4절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여기에 보면 이 문둥병자는 예수님이 자기를 고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수없이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데 뭐가 확신이 없었느냐하면 자기 같은 사람을 고쳐줄지에 대해서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 때에

 

8장 3절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 진지라

 

자 여기 보세요. 그 당시 문둥병자는 육체적으로 병든 자입니다. 살이 썩어 갑니다. 제가 어려서 나환자촌에 방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분들이 이미 진행형이 아니고 다 낳은 분들입니다. 그런데 그분들 중에서는, 어떤 분들은 눈알이 썩어가지고 눈을 못 보는 분, 손이 썩어가지고 여기까지만 잘려서 있는 분, 입이 썩어가지고 이렇게 되어 있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지금 팔이 실제로 썩어가고 있는 사람인데 지금도 손가락도 썩어 들어가고 자 육신이 썩어 갈 뿐만 아니라 그 당시 문둥병자는,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지나가면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나는 부정하다, 나는 부정하다.” 소리 지르게 되어 있습니다. 가족들로 버림받은 사람입니다. 사회로부터 완전히 버림받은 사람입니다. 육신적으로 병들었을 뿐 아니라 정서적으로 철저하게 병들었습니다, 사회적으로 완전히 병든 사람입니다. 또 하나는 문둥병자는 예배를 못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문둥병자를 만진 사람도 예배에 못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영적으로 병들어 있는 사람, 이것이 문둥병자입니다. 완전히 전인적으로 병든 자입니다.

 

그런데 이 문둥병자가 예수님이 자기를 치유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자기와 같은 그런 사람을 고쳐줄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어서 그래서 원하시면 저를 치유하실 수 있나이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내가 원하노라 그랬는데 여기 아주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내가 원하노라 말할 뿐 아니라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이 문둥병자에게 손을 대셨습니다. 안수하셨습니다. 우리생각에는 문둥병을 옮을까봐 그 당시에도 많이 못 댔겠습니다. 요즘 과학적으로는 만져서는 안 옮기는지 아는데 예수님이 그것을 하나님의 아들이시니까 아실지 모르지만 그런 차원에서는 아닙니다, 자 보세요. 손을 대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기억하실 것은 여기에 핵심이 뭐냐 하면, 성경에서 보면 레위기 11장 40절, 13장 46절에 보면 문둥병자를 못 만지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적인 규례와 규칙에 의해서 문둥병자를 만지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만지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것이 아닙니다. 만져서 나아버렸으니 율법을 어길 것이 없잖아요. 나아버렸으니까, 그런데 문제는 이겁니다. 왜 만졌느냐는 것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이 그렇게 인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냐는 겁니다. 여러분 9장에도 보시면 어떤 일이 있습니까? 9장 9절부터 보면 예수께서 누구 집에 들어가십니까? 세리 집에 들어가십니다. 그런데 세리 집에 들어갔을 때,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고소하잖아요. 세리 죄인 집에 들어갔다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셨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12절에 뭐라고 말씀하시냐하면

 

마태복음 9장 12절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우리 어제 반복적으로 나왔던 말이 너의 의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보다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그랬잖아요. 그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여기에 긍휼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당연히 여기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토대로 뭐에 대한 사랑이 들어 있는 거예요? 이웃을 향한 사랑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 둘은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규례와 규칙을 지키는 것이 사랑보다 먼저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님은 가장 큰 계명이 하나님을 존재를 다해 사랑하는 것이고 그 다음이 하나님의 사랑을 토대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 그런데 여러분 잘 보세요. 이웃을 사랑하는데 여기서 아주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사랑하되 성경에서 말하는 이웃사랑은 상대방 관점에서 사랑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기 보세요. 여러분 가장 큰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거다 존재를 다해서, 두 번째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는 것이라고 그랬습니다. 다른 복음서에 보면 종교지도자들이 묻습니다. 누가 내 이웃입니까? 그렇습니까? 그들의 질문이 뭐냐 하면 누가 내 이웃이냐? 내 이웃이 누구냐? 내가 내 이웃을 발견하면 내가 사랑할게 이런 샘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질문에 예수님의 답변은 전혀 달랐습니다. 여러분 매우 달랐습니다. 관점이 다른 것 아십니까? 예수님의 답변이 뭐였습니까? 비유를 들었습니다. 무슨 비유?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다. 길가에 쓰러져 있었다. 그런데 그 길을 누가 지나 갔습니까? 제사장들이, 그런데 왜 제사장들이 그냥 지나간 줄 아십니까? 그들에게는 시체를 만지지 못하게 되어 있는 규례와 규칙이 있었습니다.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예루살렘에 예배드리러 지금 가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예배드리러 가는데 저 사람이 죽어 있으면 가서 시체를 만지는 날에는 자기가 부정해져서 예배드릴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멀리 피해 갔을 겁니다. 어쩌면 그 당시에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였을 겁니다. 거기에 누구도 지나갔습니까? 레위인도 지나갔습니다. 역시 레위인도 똑같은 이유로 피해 갔을 겁니다. 그들이 그냥 피해 간 것이 아닙니다. 예배드리러 가는 중이였을 겁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이 가서 그 사람을 치유해주고 여관에 맡기고 돈을 주며 떠났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잘 들으세요. 예수님의 답변이 뭐였습니까? 질문은 뭐냐 하면? 누가 내 이웃입니까? 라는 겁니다. 그것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뭐냐 하면 완전히 관점이 다릅니다. 그 강도 만난 사람에게 누가 이웃이 되겠느냐? 질문은 내 입장에서 내가 보기에 내 이웃이 누구냐? 이 질문인데 예수님의 답변은? 강도 만난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누가 그 사람의 이웃이 되겠느냐? 그러면 너희가 그렇게 하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문둥병자에게 손을 대셨을 때 문둥병자가 느꼈을 그 마음을 한번 생각해 보셨습니까? 이것이 긍휼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확하게 똑같은 관점에서 강도 만난 사람에게 있던 사마리아 사람이 했던 일입니다. 이것이 정확하게 예수님께서 여러 차례 말씀하시기를 나는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는 말을 너희가 알기를 바란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정확하게 예수님께서 너희 의가 바리새인보다 낫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할 때 포함된 내용입니다.

 

성령사역, 이웃 사랑의 가장 큰 표현 중의 하나입니다. 여기 보시면 의심할 나이 없이 명백합니다. 하나님을 전존재를 다해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람 입장에서 우리 입장에서가 아니라 그 사람입장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임해서 그 사람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자유케 하시고 회복시켜 치유하시도록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고 서는 그 성령사역은 이웃사랑의 가장 큰 계명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사랑이 먼저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항상 같이 갑니다. 그 사랑의 가장 큰 표현입니다. 기도사역자들에게도 더 자주 말씀드리는데 성령사역하게 되면 하고 말게 되면 말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마음 내키면 하고 마음 안 내키면 안하고 주일날도 바쁘면 안하고 사람들 만날 일 있으면 먼저 가서 만나고 나서 난 다음에 짬나면 하고 그것이 아닙니다. 성령사역은 이웃 사랑의 가장 큰 표현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그 긍휼의 토대해서 사역하셨습니다. 여러분 보세요. 5장부터 7장의 말씀 혹은 삶 8장부터 9장을 사역이라고 그랬는데 9장을 마치면서 어떻게 써있는지 어제 제가 지나가면서 말씀 드렸는데 뭐라고 말하는지 아세요. 9장마자막 부분을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마태복음 9장 35절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이것을 다시 요약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36절) 이렇게 나옵니다.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 말은 불쌍히 여기시니 긍휼을 말합니다.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이것이 왜 여기 나오는지 아십니까? 이 말은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는 것이든지 성령의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든지 그 모든 일의 배후에 이 긍휼이 있었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강조하신 이것은 복음서 전체를 보아도 명백하게 나옵니다. 여기 민망히 여기다 불쌍히 여기다 우리말이 여러 가지 말로 번역되어 있는데, 헬라어로 스플랑크 니조마이? 라는 단어입니다 창자 혹은 여자의 자궁을 가리킵니다. 자기 배속에 있는 아기에 대해서 엄마가 가지는 그 마음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지는 그 마음을 조금이라도 표현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시면 예수님은 그 긍휼로 하셨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4장 14절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 15장은 불쌍히 여기사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시고 9장 36절은 불쌍히 여기사 지금 여기 사역 감당하신 겁니다. 20장 34절은 불쌍히 여기사 눈을 치유하시고 마가복음 1장 41절은 불쌍히 여기사 문둥병자를 고치시고 6장 34절은 불쌍히 여기사 가르치시고 누가복음 7장 13절은 불쌍히 여기사 과부의 아들을 살리시고 여기 이러한 구절들을 볼 때, 예수님의 말씀전하는 것, 뿐만 아니라 성령사역의 이 배후의 핵심이 이 긍휼이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똑같이 나가라고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말한 다음에 바로 다음 장에서 제자들을 보냅니다. 그래서 여러분 이 성령사역은 긍휼에 토대한 사역입니다. 예수님의 하나님의 가장 큰 계명에 토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큰 계명에 토대해서 상대방의 관점에서 하나님을 사랑한 그 사랑의 토대의 그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그 사람에게 임하셔서 하나님의 은혜로 그 분이 하나님께로 온전히 회복되어지고 전인적이 치유가 일어나도록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하나님 앞에 구하며 하나님이 역사하시도록 주 앞에 서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러한 마음으로 설 때, 주님이 하실 것입니다. 이 일은 주님이 하십니다. 여러분이 안합니다. 일은 주님이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것은 그렇게 서야 됩니다.

 

오늘 저는 성령사역에 대한 우리의 가치관 6가지, 사실은 우리의 가치관만이 아닙니다. 보시면 알겠지만 성령사역에 대해서 성경이 말하는 핵심적인 가치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비전이기도 하고 우리가 바라볼 목표이기도 한 그러한 것인데 우리가 이것을 선명하게 인식하고 우리의 머릿속에 새겨 지길 바라고 우리 눈앞에 지속적으로 이렇게 바라고 순종해 나가므로 하나님께서 날이 갈수록 더욱 놀라운 역사를 저와 여러분을 통해서 나타나시는 축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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