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자기 중심적인 삶의 특징: 자기 자원
하나님 중심적인 삶이 크게 세 가지의 특징을 가지고 있듯이, 자기 중심적인 삶도 크게 세 가지의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장에서는 이 세 가지의 특징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 특징들을 살펴볼 때, 자기 중심적인 삶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 가운데 빠져 있을 경우, 그러한 사실을 더욱 선명하게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자기 중심
자기 목적 자기 방법
자기 중심적인 삶은 자기 목적을 위해, 자기 자원으로, 자기 방법대로 사는 삶입니다.
자기 자원으로 사는 삶
우리의 올바른 신앙은 하나님의 자원으로 사는 삶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만이 우리의 자원되는 삶을 말하며, 따라서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삶을 말합니다. 그러한 삶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넘칩니다.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시 144:15).
반면에 타락한 자기 중심적인 삶은 자기 자원으로 사는 삶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자기를 의지하는 삶입니다. 자기의 힘을 의지하고, 자기의 지혜를 의지하고, 자기의 지식을 의지하고, 자기의 배경을 의지하고, 자기의 능력을 의지하고, 자기의 부를 의지하고, 자기의 세상적인 지위를 의지하는 삶입니다.
자기를 의지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의지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매우 당연한 말처럼 들립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 없는 불신자들에게 해당되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지라도, 자기를 의지하는 사람은 실제로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매우 중요한 한 가지 법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려면 하나님만 의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도 의지하고 자기도 의지하면, 그것은 전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실제로 자기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은 이러한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실제로는 자기를 의지하면서도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생각합니다.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다윗은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시 18:1) 라고 고백했습니다. 만약 오늘날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당신의 힘이십니까?” 라고 물으면, 그들은 무엇이라고 대답하겠습니까? 대부분의 성도들은 아마 아무런 거리낌이나 주저도 없이 “아멘”으로 화답할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우리의 힘이 되시려면, 하나님만 우리의 힘이 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윗이 고백한 말의 의미입니다. 다윗에게는 하나님만 그의 힘이었습니다. 사울이 온 나라를 동원해서 그를 대적하고 죽이려 할 때에도, 다윗은 하나님만으로 자기의 힘과 산성을 삼고 하나님 안에서 안식했습니다.
오래 전 저희들이 첫 번째 교회를 개척할 당시였습니다. 하루는 제 아내가 시장에 가려고 하는데 호주머니에 천 원짜리 몇 개밖에 없었습니다. 교회에 앉아 있는데 힘이 빠지더랍니다. 저희 식구가 다섯인데, 가장 기본적인 것을 사기 위해서도 최소한 몇 만 원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제 아내의 마음속에 또렷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만이 너의 힘이라며....” 그러면서 하나님은 제 아내가 하나님이 자신의 힘이라고 고백해왔는데, 돈이 부족하자 힘이 빠진 것은 돈이 결국 제 아내가 의지하는 힘인 것을 비추어 주셨습니다. 제 아내는 즉시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이켰습니다. 그 이후로 제 아내는 돈이 많거나 적다고 해서 힘이 생기거나 빠지지 않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성도들은 당연히 하나님이 자신의 힘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만이 그들의 힘인 성도는 많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다윗처럼 하나님의 자원으로 사는 성도는 많지 않습니다. 많은 성도들은 하나님이 자신의 힘이라고 말하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돈, 세상의 지위, 환경, 자기 능력 등에 따라 좌우됩니다. 그것은 전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타락한 자기 중심적인 삶의 열매입니다.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는 자는 패망하려니와 의인은 푸른 잎사귀 같아서 번성하리라”(잠 11:28). “이 사람은 하나님으로 자기 힘을 삼지 아니하고 오직 그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제 악으로 스스로 든든케 하던 자라 하리로다”(시 52:7).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요 지혜롭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자니라”(잠 28:26). 이러한 구절들은 단순히 불신자들에 대해 말하는 구절들이 아닙니다. 가장 먼저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나 실제로 자기를 의지하는 자들을 두고 한 말씀입니다.
자기를 의지하는 것과 세상을 의지하는 것.
우리는 앞에서 자기 중심적인 삶과 세상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둘은 항상 같이 갑니다. 그래서 자기를 의지하는 것과 세상을 의지하는 것은 항상 같이 갑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을 의지하는 것은 결국 자기를 의지하는 자기 중심적인 삶입니다.
이사야 30장에 보면, 애굽으로 사신을 보낸 유다를 하나님은 강력하게 성토하셨습니다. “1,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화 있을진저 패역한 자식들이여 그들이 계교를 베푸나 나로 말미암아 하지 아니하며 맹약을 맺으나 나의 신으로 말미암아 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그들이 바로의 세력 안에서 스스로 강하려 하며 애굽의 그늘에 피하려 하여 애굽으로 내려갔으되 나의 입에 묻지 아니하였으니 죄에 죄를 더하도다 3)그러므로 바로의 세력이 너희의 수치가 되며 애굽의 그늘에 피함이 너희의 수욕이 될 것이라”(사 30:1-3).
그 당시 유다는 동쪽에서 서진하고 있는 강대국 앗수르로 인하여 국가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앗수르는 매우 잔인한 민족이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유다는 고심 끝에 남방에 있는 다른 강대국인 애굽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앗수르를 견제하고자 했습니다. 그 당시 아람이나 가나안 지역의 많은 작은 나라들이 그렇게 했습니다. 이러한 유다의 행위는 외교적으로 보면 지혜로운 당연한 처사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그렇게 강력하게 책망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유다의 그러한 행동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의지한 자기 중심적인 태도에서 나온 것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즉, 자기 자원을 의지한 불신의 행동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 자원을 의지하는 것은 불신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상숭배입니다.
자부심과 자랑.
타락한 자기 중심적인 삶의 한 가지 특징인 자기 자원으로 사는 삶은 자기를 의지하는 삶입니다. 그런데 자기를 의지하는 사람은 자기가 의지하는 것에 대해서 자부심을 갖게 되고, 또 그것을 자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에 대한 자부심과 자랑은 자기를 의지하는 삶을 살고 있는 열매입니다.
시편 52편에 나오는 자기를 의지하는 자를 다시 한 번 보십시오. “이 사람은 하나님으로 자기 힘을 삼지 아니하고 오직 그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제 악으로 스스로 든든케 하던 자라 하리로다”(시 52:7). 그는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즉, 하나님의 자원으로 살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실제로는 자기의 재물, 즉 자기를 의지한 자였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한 자가 전혀 아니었습니다. 자기를 스스로 든든케 하는 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동시에 자기의 계획을 자랑하였습니다. 그는 아마 돈을 많이 버는 계획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악한 것인지도 알지 못한 채 그는 그것을 자랑했습니다. 이처럼 자기를 의지하는 사람은 자기에게 속한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며, 그것을 자랑합니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영적으로 타락하여 자기 중심적인 삶으로 전락해도,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 그 사실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소경은 자신이 소경인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열매들이 우리 삶 속에 나타날 때, 우리는 우리가 자기를 의지하는 자기 중심적인 삶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외에 다른 무엇을 자랑하거나 그것으로 인하여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철저하게 타락한 자기 중심적인 삶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기도하고, 아무리 성경을 열심히 읽고, 아무리 예배를 철저히 드리고, 아무리 많이 봉사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세상의 부, 명예, 자기 지식, 경험, 열심, 배경 등 그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으로 인하여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를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의 눈에 아무리 신앙생활 잘하는 것처럼 보여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도 그렇습니다. 성도들이 자부심을 갖는 요인이 건물이나 성도들의 분포나 사람 숫자나 예산이나 목회자나 사역의 확장이나 은사이면, 그 교회는 철저하게 타락한 자기 중심적인 삶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날 성도들과 교회의 삶을 살펴보십시오. 우리가 얼마나 철저하게 자기 중심적인 삶에 빠져 있습니까! 그만큼 우리의 신앙이 타락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오늘날의 많은 교회 가운데 철저하게 걷힌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입니다.
참다운 신앙은 하나님 중심적인 신앙으로서, 하나님의 자원으로 사는 삶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만 의지하는 삶입니다. 그 삶의 열매는 오직 하나님만 자랑하며, 하나님만이 자부심의 요인이 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신구약 모두 참다운 신앙에 대해서 말하면서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30)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31)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고전 1:30-31). “23)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24)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9:23-24). “2)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 3)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빌 3:2-3).
자기를 과신.
죄는 자라나게 되어 있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예를 들어, 의식이 본질을 대체해 버린 것이 율법주의인데, 율법주의가 타락하면 의식을 남용하게 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자기 중심적인 삶이 심화되면, 열매로 나타나는 자기에 대한 자랑과 자부심이 자기 과신으로 이어집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은 예외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관대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작은 잘못에 대해서는 아주 비판적이고 통탄하면서도, 자신데 대해서는 실제로는 더 큰 잘못을 범하면서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자신을 과신하는 데서 나온 자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어떠한 예외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세의 경우에서 이 부분을 선명히 볼 수 있습니다. 반석에서 두 번째 물을 내실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물을 내라고 반석에게 명하라고 하셨습니다(민 20장). 그러나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복적인 거역으로 인하여 분을 내며 반석을 두 번 쳤습니다. 그러자 반석에서 물은 나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해서 그를 가나안 땅에 들이지 않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민 20:12). 물론 모세가 지옥 간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특권은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하나님 앞에서는 어떠한 예외도 없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은 어떤 죄에 자주 넘어질지 모르지만, 자기는 절대로 넘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는 예외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는 그들과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자세 또한 그 바탕에는 자기 과신이 있습니다. 성적인 죄에 넘어져서 자신의 삶과 가정과 사역에 엄청난 좌절을 가져온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이야기는 ‘설마 자기가 그 죄에 넘어질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라는 것이라고 합니다.
베드로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베드로는 조그마한 계집종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그것도 저주까지 해가면서 부인하는 엄청난 잘못을 범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넘어지게 된 가장 주된 이유는 자기를 과신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사탄이 그를 시험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31)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32)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1-32). 그때 베드로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절박하게 구하는 자리로 나갔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을 과신하였습니다. “33)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눅 22:33). 자기 능력을 의지하여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자기 능력을 의지하여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철저하게 무너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과거 경력과 헌신으로 볼 때, 베드로는 능히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실, 주님을 따르는 일이라면 베드로는 물불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베드로의 과거의 헌신도 본인은 미처 깨닫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했던 것입니다.
한편 하나님께서 쓰시려면, 하나님은 자기를 신뢰하는 것 혹은 자신을 과신하는 것을 철저하게 깨뜨리십니다. 우리는 베드로의 경우에서 이것을 잘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한 사건은 그에게 치명적이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 사건은 베드로를 오늘날 우리가 아는 베드로로 만든, 그에게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그 사건을 통해 베드로의 자기 자부심, 자만심, 자기에 대한 과신이 안전유리가 산산조각 나듯이 박살났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에 대해서 환멸을 느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한 후,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자신이 한 일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서 통곡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눈물이 회개의 눈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환멸의 통곡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이 있었기에 베드로는 나중에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서는 삶을 배웠습니다. 그 일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다른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로 돌아가 고기를 잡고 있는 베드로에게 찾아가셨을 때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그가 다른 제자들보다 더 예수님을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그렇게 물으셨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누구보다 사랑하였지만 자신이 과거에 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자기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주님이 아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 양을 먹이라”며 세 번씩이나 그의 소명을 다시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비로소 자기의 열심이나 열정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서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아는 베드로로 만든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것을 두고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 21:18). 여기의 다른 사람은 바로 성령을 가리킵니다. 오직 은혜에 의한 삶, 오직 성령에 의한 삶 가운데 베드로가 세워진 것입니다.
하나님께 묻지 않음.
자기 자원을 의지하여 사는 사람의 또 하나의 특징은 하나님께 묻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 묻지 않는 것은 자기 방법을 따라 사는 사람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기 자원으로 사는 사람과 자기 방법을 따라 사는 사람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아닙니다. 자기 자원으로 사는 것과 자기 방법대로 사는 것은 자기 중심적인 삶을 사는 동일한 사람의 다른 특징들입니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삼위일체처럼 서로 밀접하게 결탁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가장 잘 물었던 사람 중 하나는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 마음에 합한 자라고 증거하셨던 다윗이었습니다. 반면에 사울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였습니다. 그런데 사울의 특징 중 하나는 하나님께 묻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사울의 시대를 특징지으면서, 하나님께 묻지 않은 시대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궤를 옮겨 오자 사울 때에는 우리가 궤 앞에서 묻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매”(대상 13:3). 또한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신 중요한 한 가지 이유로서 그가 하나님께 묻지 않은 것을 들고 있습니다.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저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돌리셨더라”(대상 10:14).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도 신앙이 타락하면, 자기를 의지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묻지 않습니다. “여호와를 배반하고 좇지 아니한 자와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를 멸절하리라”(습 1:6). 보십시오. 이 구절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좇지 않는 자와 하나님께 묻지 않는 자를 같은 맥락에 두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배반하고 좇지 않는 자가 곧 하나님께 묻지 않는 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 말 성경에 “구하지도 아니한” 다는 말은 “묻지도 아니한” 다는 말입니다.
심지어 종교지도자들도 신앙이 타락하면 하나님께 묻지 않았습니다. “목자들은 우준하여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므로 형통치 못하며 그 모든 양 떼는 흩어졌도다”(렘 10:21). 이 구절의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므로”를 영어 NIV 성경은 “do not inquire of the Lord(여호와께 묻지 아니하므로)” 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리더들이 하나님께 묻지 아니한 결과, 부정적인 영향이 자신들뿐 아니라 백성들에게까지 미쳤습니다.
하나님께 묻지 않는 것은 큰 죄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죄를 “간주하는 죄(a sin of assumption)” 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당연히 우리의 계획을 뒷받침하실 것이라고 간주하는 것은 큰 죄입니다. 우리의 결정이 당연히 하나님의 뜻에 합할 것이라고 간주하는 것은 큰 죄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그 훌륭한 다윗이 이 죄를 범했던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오기 위해 수레를 새로 만들고, 온 백성을 동원하여 춤을 추고, 모든 악기를 동원하여 하나님께 찬양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언약궤를 옮기는 하나님의 방법에 대해 알지 못했습니다. 특히 그는 자신이 하는 방법이 당연히 옳을 것이라고 간주하여 하나님께 묻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자기 부하 한 명의 목숨을 잃고, 그 날의 행사는 엉망이 되었습니다.
여호수아의 경우에도 두 차례에 걸쳐 이 죄를 지었습니다. 한 번은 아이성을 처음 칠 때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구체적인 방법을 묻지 않고 쉽게 생각하여 자기 생각대로 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그 날 전투에서 대패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부하들의 목숨을 잃었습니다.
또 한 번의 잘못은 여호수아서 9장에서 기브온 사람들이 여호수아에게 나왔을 때입니다. 여호수아는 그들의 외모와 말만 듣고 그들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언약을 세웠습니다. 그들은 여호수아가 받아들이지 말았어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문제는 그가 하나님께 묻지 않았다는 데에 있습니다. “무리가 그들의 양식을 취하고 어떻게 할 것을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수 9:14).
자기 중심적인 삶의 한 가지 특징은 자기 자원으로 사는 삶, 즉 자기를 의지하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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