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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장 율법주의의 열매들 1

성경공부교재/거짓신앙체계

by 발의무리 2011. 4. 16. 0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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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장 율법주의의 열매들 1

 

육적으로 소경인 사람은 자신이 소경인 것을 압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소경인 사람은 자신이 소경인 것을 알지 못합니다. 육적인 소경은 이 세상에서 조금 불편할 뿐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에 가면, 눈을 뜨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영적인 소경은 그 결과가 영원까지 미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심각하게도 영적인 소경은 자신이 소경인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이 영적인 소경인가 아닌가를 살펴보기 위해 율법주의의 열매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율법주의는 그 열매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율법주의의 열매들이 우리의 삶에 나타날 때 우리는 자신이 율법주의에 빠져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영적 우월감과 상습적인 죄책감

 

율법주의는 자기 의에 기초한 신앙입니다. 그래서 율법주의에서는 정해진 규정들과 규칙들을 잘 지키는 자기의 헌신과 노력이 강조됩니다. 그 결과, 그것들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 지킨 사람들은 영적 우월감을 가지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무시합니다. 반면에 그것들을 잘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은 상습적인 죄책감을 가집니다. 둘 다 율법주의의 열매입니다. 결국 둘 다 자기의 행위를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서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김 집사님은 사업을 하시는 분인데도 새벽기도를 한 번도 빠지지 않습니다. 주일예배는 어떤 일이 있어도 본 교회에 와서 드립니다. 주일이면 하루 종일 교회에서 봉사합니다. 십일조를 교회에서 가장 많이 드립니다. 일주일에 하루는 꼭 금식합니다. 그래서 일 년에 40일 이상을 금식합니다. 성경을 일 년에 최소한 일독합니다. 그는 최소한 겉으로 보기에는 사람들 앞에서 참 겸손하게 행동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김 집사님이라 할지라도, 그가 속으로 자기가 영적으로 최고라는 영적 우월감을 가지고 있으면, 그는 율법주의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기도하러 올라 간 바리새인의 모습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김 집사님이 우리의 신앙을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관점에서 올바로 이해했더라면, 그러한 영적 우월감은 절대로 갖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오히려 하나님을 더욱 알지 못한 것을 애통해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모든 헌신과 행동이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했음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구하는 자리에 있었을 것입니다.

 

상습적인 죄책감과 영적 우월감은 정반대입니다. 그러나 둘 다 같은 뿌리인 자기 의에서 나온 것입니다. 상습적인 죄책감을 가진 사람도 결국 자기의 노력으로 정해진 규례와 규칙을 잘 지킴으로써 하나님 앞에 서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 자기의 행위를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나가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돌이켰어도 하나님의 용서를 좀처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일만한 합당한 행위를 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놀라운 교만인지요. 자기 의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영적인 우월감을 가진 사람이건 상습적인 죄책감을 가진 사람이건 둘 다 자기 속에 하나님 앞에 내세울 만한 어떠한 선한 것도 없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것이 타락한 인간의 원래의 모습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신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야말로 인간의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만을 믿음으로 의지하여 한편으로는 겸손하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 주님을 더욱 알기를 구하여 주님을 추구해야 합니다. 결국 세상과 죄와 육신을 이기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임재하시고 통치하실 때,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우리가 세상과 죄와 육신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 자신을 추구할 때 우리에게 오십니다.

 

안일함

 

진정한 안정감과 안식은 오직 하나님 안에만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외에 다른 것에서 안정감을 갖는다면, 그것이 곧 타락한 거짓 신앙체계인 율법주의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러한 사람이 의지하고 서는 것은 결국 육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안일함입니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예가 요한계시록 3장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였습니다. 그들의 전형적인 특징은 안일함이었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3:17). 그들이 안일했던 이유는 세상적인 부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당연히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부가 하나님이 주신 복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안일함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그들이 결국 육신’(이 경우, 세상의 부)을 의지하여 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철저하게 율법주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임재가 걷혀 있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3:20). 그리고 그들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소중한 것이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3:17).

 

이처럼 안일함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은 우리가 율법주의에 빠져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에, 성경은 안일한 자들에 대해서 심판을 말하고 있습니다. “화 있을진저 시온에서 안일한 자와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이 든든한 자 곧 열국 중 우승하여 유명하므로 이스라엘 족속이 따르는 자들이여”(6:1). “안일한 열국을 심히 진노하나니 나는 조금만 노하였거늘 그들은 힘을 내어 고난을 더하였음이라”(1:15).

 

오늘날 우리의 상태는 어떠합니까? 로이드 존스 목사는 안일함과 자족감을 이 시대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주된 이유는 교회가 죽은 정통주의에 빠져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부흥93). 물론 로이드 존스 목사는 50년 전의 영국 교회 상황에서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날 우리나라 교회의 상황도 정확하게 동일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로이드 존스 목사가 말한 죽은 정통주의는 제가 말한 율법주의입니다.

 

반면에 우리가 올바른 신앙 가운데 있으면, 거기에 애통함과 갈급함이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를 통해서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사람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66:2).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가장 기본적인 자세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3)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4)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7)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5:3-10). 그 중에서도 예수님은 가장 먼저 심령이 가난한 것과 마음이 애통하는 것을 가장 먼저 들고 계십니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말은 자기 속에는 하나님 앞에 내놓을 만한 어떤 선한 것도 없음을 인식하는 자세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겸손입니다. 그리고 애통하는 마음은 그래서 자기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절실하게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는 자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기를 추구하는 가운데 있으면, 바로 그 가난한 마음과 애통한 마음이 있게 되어 있습니다. 안일한 마음은 자취를 감추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부흥을 예비한 자들은 항상 하나님을 아는 관점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관점에서 자신들이 얼마나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었는가를 인식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든 것을 걸고 주님을 추구하여, 주님 자신을 추구하여, 주님의 영광을 보기 위해 주님을 향해서 달려 나갔습니다. 시편 기자처럼 그들은 진실로 큰 목마름을 가지고 주님을 찾았습니다. “1)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2)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3)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42:1-3).

 

만약 우리가 신앙의 본질과 십자가의 복음과 거짓 신앙체계를 아무리 많이 배웠다 할지라도, 우리에게 영적 우월감이나 안일함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율법주의에 빠져 있다는 증거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을 알기를 실제로 간절히 추구하기보다 신앙의 본질이나 십자가의 복음에 관해서 아는 것으로 만족해 버렸기 때문에 그러한 열매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적인 지식이 인격체를 대체해 버린 죽은 정통주의, 즉 율법주의입니다.

 

전통에 대한 집착

 

율법주의는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보다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종교적인 행위를 신뢰합니다. 마음의 상태보다 외부적인 복종을 강조하며, 인격체이신 성령님보다 규례와 규칙을 신뢰합니다. 그래서 율법주의는 우리의 신앙을 일정한 규칙을 지키는 것(conformity to rules)’으로 전락시켜 버립니다. 그런데 그 규칙들이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규칙들입니다. 그 결과, 율법주의는 전통을 지나치게 의존하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모든 전통이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 기초한 전통은 좋은 전통입니다. 그리고 좋은 전통을 지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율법주의의 문제는 전통에 집착한 나머지 하나님의 말씀을 범하는 데 있습니다. 마태복음 15장에서 그 예를 볼 수 있습니다. “3)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4)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 5)너희는 가로되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6)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15:3-6).

 

그 당시 바리새인들이 받아들이고 가르쳤던 전통 중 하나는 자녀가 성전에서 자기 수입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맹세하면 부모를 부양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바리새인들은 실질적으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율법, 그 중에서도 십계명 중 하나를 어기도록 사람들을 가르쳤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에는 부모의 필요를 채우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자신들이 지킬 뿐 아니라, 지키도록 가르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그들은 전통에 집착한 나머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도록 가르쳤던 것입니다.

 

더 나아가 율법주의는 전통에 집착한 나머지 성령의 역사를 가로막습니다. 이 점이 율법주의의 가장 무서운 점 중 하나입니다. 이에 대한 좋은 예를 우리는 요한복음 5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있는 베데스다 연못을 지나시다가 38년 된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그곳에는 각색 병을 가진 많은 환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 당시 천사가 가끔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고, 그때 가장 먼저 물에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병이든지 다 치유 받는다는 전설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 전설을 믿고 그곳으로 몰려들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중에서 38년 된 병자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명하심으로써 그를 고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본 유대인들이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범했다며 예수님을 대적하고 핍박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들을 세분화하였는데, 그 중에는 물건을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기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당연히 안식일을 범했다고 생각하고 예수님을 대적하고 핍박했던 것입니다.

 

문제는 예수님께서 범한 것이 성경이 아니라, 그들의 전통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에서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그러한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율법주의적인 가치관으로 인하여 그들의 전통과 성경을 구분할 줄 몰랐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전통이 당연히 성경이라고 간주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대적했습니다.

 

그 결과, 유대인들은 본인들이 그 사실을 알건 모르건 상관없이 하나님의 성령을 거역하고 대적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그렇게 고치신 것은 전적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19)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20)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5:19-20). 이처럼 율법주의는 전통에 집착한 나머지 성령을 거역합니다.

 

요즈음은 훨씬 덜 그렇습니다만, 11년 전 제가 포도나무교회를 처음 개척할 당시만 하더라도 주일 낮 예배 시간에 찬송가를 부르지 않고 찬양과 경배를 부른다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찬양과 경배 시간에 그 가사 하나하나에 우리의 마음을 실어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인하여 하나님께 찬사를 드리고, 하나님 그분 자신을 인하여 기뻐하며, 하나님께 우리의 중심으로부터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그분을 더욱 알기를 갈망하며,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곡조 있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찬송가나 찬양과 경배나 중요한 것은 그 가사의 내용이 성경적인가 하는 것이고, 찬양을 드리는 성도들의 마음의 자세와 태도가 올바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성도들은 이러한 우리의 성경적인 태도나 자세와는 상관없이, 주일 낮 예배 시간에 찬송가를 드리지 않고 찬양과 경배를 드린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우리들을 배척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전적으로 타락한 율법주의입니다. 그들의 그러한 자세는 성경과는 전혀 상관없는, 전통에 대한 집착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자세의 심각성은 그들이 찬양과 경배를 통한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을 놓치고, 예배 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임재를 놓쳤다는 데에 있습니다. 찬양과 경배를 통한 하나님과의 그 놀라운 친밀함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는 데에 있습니다. , 그들은 전통에 집착한 나머지 성령을 거역하고 소멸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떠는 자세의 필수성

 

반면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 위해 우리가 가져야 할 중요한 자세 중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떠는 자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떠는 자세는 전통, 당시에 팽배한 신앙관, 개인의 경험이나 지식, 사람들의 의견 등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러하면 순종하고자 하는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엎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한 자세를 가지고 있어야 하나님의 길이 비춰집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가능합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11장에 나오는 침()례 요한의 자세에서 이 부분을 잘 볼 수 있습니다. 침례 요한이 감옥에 갇혔을 때, 그는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예수님이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야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예수님을 몰랐기 때문도, 그가 감옥에 들어가서 신앙이 떨어졌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가 들었을 때, 그가 생각했던 메시야와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11:2 참조). 침례 요한은 예수님을 말세에 오시는 심판의 주님으로 알았습니다(3:1-13 참조). 그리고 그는 그 심판이 곧 시작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에 대한 침례 요한의 지식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계시에 기초한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는 그저 배운 성경적인 지식이나 개인의 생각으로 예수님을 안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다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계시는 부분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신이 생각하던 메시야와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일이 달랐을 때, 침례 요한은 바리새인들처럼 자기가 받은 계시에만 기초하여 예수님을 판단하고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물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 앞에 떠는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자신이 하시는 일이 이사야서 하반부에 나오는 고난의 종의 일임을 알려주셨습니다. 그 결과, 침례 요한은 예수님을 알되, 심판의 주로만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고난의 종으로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더욱 알게 된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침례 요한의 이 사건이 마태복음 11장 맨 처음에 기록된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11장부터 예수님과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 사이의 마찰이 집중적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대적했던 것은 침례 요한에게 있었던 바로 그 자세가 그들에게 없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요한의 제자들이 돌아간 후에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11:6)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실족하지 않기 위해 필수적인 자세가 바로 그 자세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들이 침례 요한에게 있었던 것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떠는 자세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성령님의 역사에 반드시 실족하게 되어 있습니다.

 

배우고자 하는 자세가 없음

 

율법주의에 빠지면, ‘육신을 의지하고 서기 때문에 거기에 안일함이 있습니다. 성경적인 지식이 인격체와의 관계를 대체해 버렸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이론이 실제를 대체해 버렸기 때문에, 다 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전통에 집착하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규례와 규칙을 잘 지키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신앙생활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결과, 그들에게 배우고자 하는 자세가 없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자세를 할례 받지 못한 마음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스데반은 율법주의에 빠져 배우고자 하는 자세가 없이, 강퍅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대적하는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51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52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7:51-52).

 

하나님의 진리를 자기들에게 적용하지 않는 것, 그것이 율법주의의 전형적인 열매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3)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4)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23:3-4). 그리고 사도 바울도 유대인들에 대해서 동일한 것을 말했습니다. “19)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20)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21)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 하느냐”(2:19-21).

 

교회에서 가장 어려운 부류의 사람들이 바로 이러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론적으로 하나님에 관해서 잘 압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는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율법주의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들이 누구보다 하나님을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항상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려고 합니다. 성경공부 때에도 그들은 항상 정답을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적용하여 문제점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절대로 그 동일한 진리를 자기들에게 적용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영적으로 괴물입니다. 그들의 삶은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 사람을 단 한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 세우지 못합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하나님께서 거처 삼고 거하시기 원하시는 사람은 배우고자 하는 자세(a teachable spirit)를 가진 사람입니다(66:1-2 참조). 그리고 배우고자 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항상 자신에게 먼저 적용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기준에 못 미치는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늘 애통해합니다.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여 하나님 앞에 섭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자들에게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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