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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장 기복신앙

성경공부교재/거짓신앙체계

by 발의무리 2011. 4. 16. 06:34

본문

4단원 기복신앙

 

15장 기복신앙의 정의

 

거짓 신앙체계는 율법주의와 기복신앙과 인본주의가 삼위일체처럼 밀접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거짓 신앙체계의 또 다른 한 축은 기복신앙입니다. 이 단원에서는 기복신앙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선 제가 말하는 기복신앙은 무엇을 말합니까?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설교 시간에 복에 대해서 많이 말하는 것을 기복신앙이라고 생각하고, 그렇지 않으면 기복신앙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가 말하는 거짓 신앙체계로서의 기복신앙은 그러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복신앙의 정의

 

제가 말하는 기복신앙을 쉽게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 앞에서 살펴본 하나님 중심적인 삶과 자기 중심적인 삶의 특징들을 간단히 복습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앞에서 하나님 중심적인 삶과 타락의 본질인 자기 중심적인 삶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들과 참 신앙 혹은 거짓 신앙체계와의 관계를 살펴보았습니다. 그것들을 도표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자원 십자가의 복음

 

 

=

하나님 중심 참 신앙

하나님의 목적 하나님의 방법 신앙의 본질 성령에 의한 삶

 

자기 자원 율법주의

 

 

=

자기 중심 거짓 신앙체계

자기 목적 자기 방법 기복신앙 인본주의

 

 

 

위 도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참다운 신앙은 하나님 중심적인 삶으로서, 그 한 가지 특징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우리의 목적된 삶입니다. 그런데 신앙이 타락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수를 믿으면서도 자기 목적을 위해 삽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에서 그들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 버립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 삶, 그것이 바로 기복신앙입니다.

 

기복신앙의 좋은 예: 예레미야 시대.

 

신앙이 타락할수록 참다운 신앙은 자취를 감추고, 항상 가짜인 거짓 신앙체계가 전면에 나타납니다. 예레미야 시대는 어느 시대보다 영적으로 타락했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서에 보면, 그 당시 거짓 신앙체계가 판을 치고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당연히 전형적인 기복신앙의 예를 우리는 그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선 예레미야 시대가 시대말적인 상황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시대는 영적으로 매우 타락한 시대였습니다. 그 시대에 대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2:13). 그 결과, 하나님의 심판이 실제로 그 시대에 임해서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고, 예루살렘 성전은 무너졌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타락한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에는 하나님께 대한 큰 희생과 헌신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먼 나라에서 온 특별한 향품을 가져다가 하나님께 번제로 드렸습니다(6:20 참조). 그 외에도 그들은 다른 많은 희생들을 드렸습니다(7:21 참조). 그리고 안식일에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성대한 예배를 드렸습니다(7장 참조).

 

뿐만 아니라, 그들의 입술에는 하나님이 항상 있었습니다(12:2 참조). 그리고 그들은 선지자를 만나거나 친구나 친척을 만났을 때 묻는 첫마디는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응답이 무엇이냐는 것이었습니다(23:35, 37 참조).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모든 희생과 헌신을 전혀 받지 않으실 뿐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게 다가오는 심판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그들에게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그에 대한 주된 해답이 예레미야 6장에 나옵니다. “12)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그 땅 거민에게 내 손을 펼 것인즉 그들의 집과 전지와 아내가 타인의 소유로 이전되리니 13)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남하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14)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 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15)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아니할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않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지는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하리니 그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20)시바에서 유향과 원방에서 향품을 내게로 가져옴은 어찜이뇨 나는 그들의 번제를 받지 아니하며 그들의 희생을 달게 여기지 않노라”(6:12-15, 20).

 

성경은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탐심이 가득했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그 당시 가장 큰 자부터 작은 자까지, 종교지도자들부터 일반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총체적으로 그랬습니다. 우리가 자기 중심적인 삶의 특징에서 살펴보았듯이, 그들 속에 탐심이 가득했다는 말은 그들이 자기 목적을 위해 살았다는 말입니다. 그들에게 많은 희생과 헌신이 있었을지 모릅니다. 많은 종교적인 모양이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자기들을 위해 살았습니다. 자기 목적을 위해 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의 삶 속에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버렸으면서도 왜 그렇게 많은 희생을 드렸습니까? 그들은 자기들이 원하고 목적하는 바를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시도록 그 많은 희생을 드렸습니다. 그것이 사업에서의 성공이었든지, 자녀들을 위해 복을 내리는 것이었든지, 문제의 해결이었든지, 기도의 응답이었든지, 자기들이 목적하고 원하는 바를 하나님께서 채워주시고 해결해 주시도록 그 많은 희생과 제사를 드렸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율법주의와 기복신앙의 혼합된 모습을 봅니다. 즉 의식을 잘 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도움을 얻어내고자 하는 율법주의, 그리고 자기 목적을 위해 하나님이 수단된 기복신앙이 그것입니다. 율법주의, 기복신앙, 인본주의는 항상 같이 갑니다.

 

그런데 우리의 중심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면, 우리가 아무리 많은 희생과 헌신을 드린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여기 재벌 아들이 있다고 가정해 보십시다. 한 처녀가 그 남자를 찍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희생과 헌신을 다해 그 남자에게 잘 해줍니다. 심지어 자기 집을 팔아서까지 그 남자에게 좋은 선물들을 사주며 잘해줍니다. 그런데 그 여자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 남자와 결혼하면 얻어질 부와 명예에 관심이 있어서입니다. 그 부와 명예를 얻기 위해 그렇게 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 여자는 그 남자를 사랑하는 것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아무리 많은 희생과 헌신을 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목적을 위해 그 남자를 이용하는 것뿐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하나님이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많은 헌신과 봉사와 희생을 드린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자기의 삶에서 자기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면 그것은 전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예레미야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하나님은 그 모든 희생을 받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르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자부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예배를 기쁘게 받으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의식이 본질을 대체해 버린 율법주의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희생과 의식을 드렸으니 그들은 자신들이 누구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 결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많은 복을 주실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지고 있던 이해는 철저하게 타락한 거짓 신앙체계에 불과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오늘날 한국 교회 가운데 많은 의식들이 있습니다. 많은 예배들과 많은 기도들과 많은 헌금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인 우리들의 중심에 무엇이 있나 살펴보십시오. 우리들이 기도하는 내용을 살펴보십시오. 그 희생과 헌신을 드리는 목적을 살펴보십시오.

 

어떤 성도는 밤새도록 자기 자녀들의 가정에 복을 내려주시도록 기도하고 나서, 새벽에 기도를 마치면서 여태까지 기도하지 못한 모든 것도 채워 주실 줄로 믿습니다라고 기도합니다. 물론 그러한 부분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이해에가 있어서 하나님은 그들의 삶의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 문제입니다. 그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자신의 문제 해결, 축복 받는 것, 자녀들이 잘 되는 것, 자기들의 기도가 응답받는 것, 치유 받는 것 등뿐입니다.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존재를 다하여 사랑하는 것, 하나님의 의중을 알기 원하는 것, 그리고 그곳에 하나님과 같이 있기를 원하는 것 등은 들어보지 못한 일입니다. 전혀 관심사 밖의 일입니다.

 

또 어떤 교회에서는 그 교회에 나온 지 몇 년 안에 부자가 되지 못하면 신앙생활 잘못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그들의 삶에서 신앙생활은 돈 많이 벌기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많은 경우 그들은 성도들이 어떠한 방법으로 돈을 버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상관하지 않습니다. 투기를 하든지, 여관을 운영하든지, 술집을 하든지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저 돈만 많이 벌면 됩니다. 얼마나 타락한 기복신앙인지요.

 

물론 처음에 하나님께 나올 때는 그러한 목적을 가지고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진실로 하나님을 만났다면,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알았다면 그들은 그러한 자세를 버릴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소위 예수를 믿은 다음에도 계속해서 그러한 자세를 가지고 있다면, 전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철저하게 타락한 기복신앙 가운데 빠져 있는 사람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불신자들에게 예수님을 처음 전할 때부터 예수님을 단순한 구세주로 뿐 아니라, 주님으로 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 눈을 밝혀 예수님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광채를 비춰주시기를 기대했습니다. , 영광의 주님을, 영광의 하나님을 그들로 하여금 알게 해주시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을 전존재로 사랑하기를 기대했습니다. “1)이러하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2)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 3)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4)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5)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6)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 4:1-6).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후 11:2).

 

기복신앙의 열매.

 

우리는 앞에서 자기 목적을 위해 사는 삶의 전형적인 열매로서 사람 두려워함과 선별적인 순종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기복신앙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에서 하나님이 그들의 목적을 위해 수단된 삶이기 때문에 정확하게 동일한 열매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예레미야 시대의 종교지도자들의 삶에서 그에 대한 전형적인 예를 볼 수 있습니다.

 

사람 두려워함

 

하나님은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3)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남하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14)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 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6:13-14).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어떠한 생명도 없었습니다. 온갖 영적인 억압과 상처뿐이었습니다. 이사야 시대는 예레미야 시대보다 약 150년 전 시대입니다. 그런데 벌써 그 당시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성한 곳이 없었습니다.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어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1:6). 그렇다면, 예레미야 시대에는 어떠했겠습니까?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가, 상처가 심각하고 영적인 억압이 심각한데도,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그 상처들이 전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평강만을 전했습니다. 여기의 평강은 오늘날로 말하면 축복입니다. 성경에서 평강과 복과 생명은 모두 같은 의미로 쓰였습니다.

 

그럼 왜 그들은 평강을 외쳤습니까? 그 이유는 그들 속에 탐심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에는 평강을 외쳐야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사람들에게 은혜로운 말씀을 전하는 훌륭한 선지자로 인정받고,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몰려옴으로 자기들의 사역이 확장되기 위해 평강을 외쳐댔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는 그토록 심각한데도, 그 모든 일들이 다 잘되고 있는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그저 평강을 외쳐댔던 것입니다. 그 속에 탐심이 가득함으로 인하여 나타나는 사람 두려워함의 열매가 그대로 나타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한 중소 도시에서 가장 많은 성도들이 모이는 교회의 목사님이 후배에게 이렇게 조언했다고 합니다. “교회가 성장하는 비결을 가르쳐줄까? 오늘부터 3년 동안 새벽 예배부터 모든 예배 시간에 축복을 전해. 그러면 교회가 성장할꺼야.”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의 상태는 참으로 심각합니다. 교회와 성도들의 삶 가운데 죄의 억압이 가득합니다. 교회 중직들의 가정이 파괴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세상적인 가치관과 죄가 너무너무 팽배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대부분의 모임에서 걷혀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론은 많은 반면, 하나님의 실재는 교회와 성도들의 삶에서 거의 경험되지 않고 있습니다. 교회의 영적인 태가 철저하게 닫혀 있습니다.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전혀 알지도 못하고 사랑하지도 않습니다. 그들 속에 우상숭배인 탐심이 가득합니다. 영적 간음인 세상 사랑이 가득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은 전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축복을 외쳐대고 있습니다. 얼마나 심각하고,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모두가 탐심에서 나온 사람 두려워함 때문입니다.

 

부드러운 메시지

 

기복신앙의 또 한 가지 전형적인 열매는 부드러운 메시지를 듣기 원하는 것입니다. 기복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삶에는 그 중심에 항상 탐심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메시지를 들어도 자기들의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켜줄 메시지를 듣기 원합니다. 그러한 메시지를 성경은 부드러운 말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이 선견자에게 이르기를 선견하지 말라 선지자에게 이르기를 우리에게 정직한 것을 보이지 말라 부드러운 말을 하라 거짓된 것을 보이라”(30:10).

 

예레미야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의 삶 속에는 탐심이 가득했습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타락한 기복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자기들을 충족시켜 주는 평강의 메시지를 듣기 원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복의 메시지를 듣기 원했습니다. 그것이 그 당시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이 그들에게 평강의 메시지를 전한 가장 주된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상황이 이토록 심각한데 왜 목회자들은 전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축복의 메시지를 전합니까? 그래야 교회가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왜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은 축복의 메시지를 듣기 원합니까? 역시 그들 속에 탐심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목적과 목표를, 욕구를 충족시켜 줄 축복의 메시지를 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라고 말씀하십니다. , 우리의 모든 목적과 목표를 내려놓고, 우리의 모든 것으로 하나님을 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많은 성도들은 자기의 목적과 목표를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기의 목적과 목표를 성취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듣기 원하는 것은 당연히 축복입니다. 축복을 전하는 교회가 성장하는 것 같고, 그래서 목회자들은 더욱 축복을 외치는 것입니다. 이 시대가 얼마나 예레미야 시대와 흡사합니까!

 

이러한 기복신앙에 대해서 하나님은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그들이 나무를 향하여 너는 나의 아비라 하며 돌을 향하여 너는 나를 낳았다 하고 그 등을 내게로 향하고 그 얼굴은 내게로 향치 아니하다가 환난을 당할 때에는 이르기를 일어나 우리를 구원하소서 하리라”(2:27).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리니 그들이 피할 수 없을 것이라 그들이 내게 부르짖을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할 것인즉...그러므로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들을 위하여 부르짖거나 구하지 말라 그들이 그 곤액을 인하여 내게 부르짖을 때에 내가 그들을 듣지 아니하리라”(11:11, 14). “그들이 금식할지라도 내가 그 부르짖음을 듣지 아니하겠고 번제와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그것을 받지 아니할 뿐 아니라 칼과 기근과 염병으로 그들을 멸하리라”(14:12).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자기들의 목적을 위해 도움을 얻으려고 하나님께 많은 희생과 헌신을 드렸을지 모르지만, 보통 때는 신앙의 본질을 떠나 자기 임의대로 살다가 어려움을 당하면 도와달라고 하나님께 나오더라도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듣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기복신앙은 우리 삶에서 하나님을 우리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삼는 신앙입니다. 그 중심에는 항상 탐심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율법주의 못지않게 기복신앙이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율법주의, 기복신앙, 인본주의는 항상 같이 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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