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장 율법주의의 열매들 2
우리는 앞 장에서부터 율법주의의 열매들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 열매들은 우리들이 율법주의에 빠지면 나타나는 열매들입니다. 율법주의에 빠지면 영적 분별력이 가리어지기 때문에, 자신이 율법주의에 빠진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열매들을 살펴봄으로써 자신을 점검해 볼 수 있습니다.
형식적인 예배.
율법주의의 또 하나의 열매는 형식적인 예배입니다. 이것은 항상 그렇습니다. 이사야 시대에도 그랬습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사 29:13). 예레미야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주께서 그들을 심으시므로 그들이 뿌리가 박히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었거늘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 마음은 머니이다”(렘 12:2). 예수님 시대의 종교지도자들도 똑같았습니다. “7)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8)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9)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마 15:7-9).
그런데 이 말은 반드시 정성이 부족한 예배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사야 시대에는 안식일, 월삭, 모든 절기와 대회를 지켰을 뿐 아니라, 수송아지, 수염소, 어린양 등 살진 짐승을 무수히 드렸습니다. 그들의 예배는 실로 정성이 많이 들어간 예배였습니다. 예레미야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시바(오늘날의 남예멘이나 에티오피아)나 원방(오늘날의 인도)에서 특별한 향료를 사다가 하나님께 정성을 다해 번제를 드렸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의 경우에는 정성으로 따지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습니다. 물론 정성이 부족한 형식적인 예배를 드린 때도 있었습니다. 말라기 시대가 그랬습니다. 그들은 좋은 짐승은 자기들을 위해 보관하고, 병든 것, 눈먼 것, 쓸모없는 것들은 하나님께 제사로 드렸습니다. 이처럼 형식적인 예배는 정성과 관련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형식적인 예배는 본질이 없는 예배를 말합니다. 예배는 의식의 하나로서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을 담는 그릇입니다. 또한 그 본질을 추구하는 수단입니다. 그런데 율법주의의 예배는 본질이 전혀 없이 외부적인 모양만 가득합니다.
우리는 예배로 나올 때 하나님을 추구하여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을 더욱 알기를 목말라하고,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기를 추구하며, 하나님의 의중과 의도를 깨달아 그곳에 같이 있기 원하는 열망으로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그 아름다운 일들을 인하여 하나님께 진심으로 찬사를 드리고, 하나님 그분 자신을 기뻐하기 위해 나와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구약시대부터 이 부분을 명백히 하고 있습니다.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셀라)”(시24:6). 우선 이 구절은 예배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에 관한 구절입니다(시24:3절 참조). 그러면서 이 구절은 하나님께 예배로 나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가는 것이라는 점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배는 단순히 우리의 필요를 위해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여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예배를 통해 그 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는 근본적으로 하나님 그분 자신을 구하여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을 찾되 온 마음으로 찾아야 합니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찾는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찾을 때, 하나님께서 만나주시기 때문입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기로 언약하고...온 유다가 이 맹세를 기뻐한지라 무리가 마음을 다하여 맹세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를 찾았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저희의 만난 바가 되시고 그 사방에 평안을 주셨더라”(대하 15:12, 15).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 29:13). 이처럼 우리의 참된 예배는 우리의 온 마음과 힘을 다해 하나님 그분 자신을 구하여 나가는 것이고, 그 결과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주의는 예배에 있어서 순서와 절차를 잘 마치는 데 초점을 둡니다. 예배를 통해서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구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본질을 추구하는 데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순서와 절차를 잘 마치면 예배를 잘 드렸다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그 순서와 절차를 진행하는 데 있어 큰 정성을 강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당만 밟고 돌아가는 예배요, 입술로만 드리는 예배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알맹이가 전혀 없는 껍데기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외부적인 정성이 가득할지 모르지만, 그들의 마음이나 삶은 하나님께 드려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마음에서부터 하나님을 구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그렇게 예배를 드렸으니, 자기들의 종교적인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타락한 율법주의적인 가치관입니까!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도 율법주의의 한 특징으로서 형식적인 예배를 들면서 이렇게 말합니다(그는 제가 말한 율법주의를 죽은 정통주의라 부릅니다). “그런 사람들의 종교나 예배는 생명력있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집에 가지만 하나님을 만날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기다린다는 마음도 없습니다. 예배 시간에 어떠한 일이 얼어날 수도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도 않습니다. 아니 우리는 주일 아침마다 언제나 그러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관례가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습관입니다. 그저 그렇게 하는 일이 옳은 일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갑자기 자기 백성들에게 찾아오셔서 그들에게 임하시고, 하나님의 성전에서 사람들 존재 전체가 사로잡힘을 당하고,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시다는 것을 의식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느낄 수 있는 것, 그러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전혀 생각지도 않습니다. 모든 것이 그저 형식적이고 그저 모든 것이 잘되어 간다는 식으로 자만에 빠진 모습입니다...교회가 부흥을 맞지 않을 때에 성가대를 강조하게 되고, 성가대를 강조하는 것뿐만 아니라, 돈을 주어 성가대를 사오기도 합니다. 또 성가대에 있는 독창자들을 돈주고 사오기도 합니다. 그리고 회중들은 가만히 앉아서 듣기만 합니다. 성가대가 그들을 위해서 노래를 부릅니다. 이것은 성령을 소멸하는 것입니다...더 나아가서 오늘날 여러분은 교회 생활에 있어서 매우 두려운 성향을 띠는 것이 프로그램이라는 것을 주목하셨습니까? 모든 것이 다 짜여져 있습니다. 어느 한 지점을 향하여 모든 일들이 행해져야 한다는 것을 저도 압니다. 그러나 분명히 우리는 성령을 소멸하는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모든 항목이 미리 정해져 있고 시간이 주어져 있습니다. 어느 시점에 시작하여 어느 시점에 마쳐야 하는 것이 다 되어 있습니다. 목회를 하는 제 친구 가운데 어떤 이들은 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주일마다 다른 교회에 가서 순회 설교를 하면 할수록 이러한 일을 더 많이 발견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적인 교회에서마저 강사로 오는 목사에게 순서가 적힌 종이를 준다는 것을 저는 반복적으로 듣습니다. 그리고 그 문자 그대로 그 앞에다 그 순서지를 놓고 그대로 행할 것을 종용합니다. 11시에 시작합니다--성경을 봉독하고 또 거기 순서지에 적힌 모든 것을 진행하여 12시가 됩니다--그런 다음에 축도가 이어집니다. 제가 볼 때 이것은 매우 심각합니다...우리가 프로그램에 너무 매여 있어서 성령께서 역사하실 틈이 없지 않습니까? 어째서 이렇게 형식적이 되었습니까?”(『부흥』97, 103쪽).
외식
율법주의는 능력이 없는 종교입니다.
율법주의의 전형적인 특징은 그것이 능력이 없는 종교라는 것입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습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없이 그저 형식과 절차로 가득 찬 종교입니다.
거룩함이나 경건은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경건의 능력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종교적인 의식들을 잘 행한다고 해서 주어지지 않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킨다고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거룩함이나 경건한 삶은 오직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 거하시며 다스리실 때에만 가능합니다. 그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과의 교제는 소홀히 하고 규례와 규칙에 대한 외부적인 복종만을 강조하는 율법주의 신앙에서는 절대로 경건의 능력이 있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말세가 가까울수록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그 능력은 없는 율법주의가 가득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1)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2)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4)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1-5). 참으로 두려운 사실은 여기에 나와 있는 특징들 중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인 우리에게 해당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이 구절이 이 시대를 염두에 두고 쓰여진 것처럼 느낄 만큼 오늘날 우리의 상태가 여기에서 경고하고 있는 상태와 너무나 비슷합니다.
그래서 나타나는 결과가 외식입니다.
율법주의는 능력이 없는 종교입니다. 그 결과 나타나는 율법주의의 열매가 바로 외식입니다. 그래서 율법주의 신앙에서는 항상 외식(위선)이 가득합니다. 율법주의 신앙은 모양과 절차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매우 경건하고 거룩한 모양을 갖춥니다. 반면에 죄를 이기는 능력은 없습니다. 죄는 속으로 숨습니다. 결과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외식입니다.
외식은 율법주의의 열매이기 때문에 매우 악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것을 매우 강력하게 꾸짖고 있습니다. “25)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26)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27)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28)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마 23:25-28).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늘날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은 탈을 몇 개씩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에 갈 때 쓰는 탈, 직장에서 쓰는 탈, 사람들 앞에서 쓰는 탈 등등. 그래서 교회에 갈 때에는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종교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사람들 보기에 그럴듯한 종교적인 모양을 갖춥니다. 그러나 그들 속에는 온갖 세상의 욕심과 정욕과 시기와 질투와 간음과 싸움과 교만과 명예욕과 미움이 가득합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과 교회 안에 세상에 있는 죄가 다 있습니다. 너무나 가슴 아픈 일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율법주의 신앙의 결과요 그 열매입니다. 율법주의에서는 절대로 죄가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반면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위해 하나님 앞에서 소중한 자세는 정직함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신앙의 본질과 진실은 항상 같이 갑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거민과 쟁변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호 4:1). 또한 우리를 인도하시는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요 16:13). 그러므로 성령님의 인도를 따르기 위해 정직함은 필수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위해 필수적인 정직함을 우리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진리에 정직하게 동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려면, 하나님의 진리에 정직하게 동의하고 서야 합니다. 그것이 누구를 통해서 주어졌건 혹은 아무리 강하고 중한 말씀이건 상관없이,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진리이면 그 앞에 정직하게 동의하고 서는 자세가 필수적입니다. 호세아 6장이 말하듯이,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날 때, 하나님의 종들을 통해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올 것을 매우 강하게 촉구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저희를 치고 내 입의 말로 저희를 죽였노니 내 심판은 발하는 빛과 같으니라”(호 6:5). 그런데 어떤 성도들은 “목사가 강단에서 성도들을 친다” 라고 말하며, 그들이 듣기 좋아하는 메시지만을 듣기 원합니다. 또 어떤 성도들은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어디 있나?” 라면서 적당히 넘어갑니다. 또 다른 성도들은 “그렇게 하면 어떻게 교회가 운영되겠나?” 라고 말하면서 타협하여 버립니다. 이러한 자세로는 절대로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둘째는 진실된 자세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반면에 사탄은 거짓의 아비입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 8:44).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간절히 구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실된 삶을 집중적으로 훈련시키십니다.
죄와 관련하여 진실된 자세는 자기의 잘못과 죄를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사람 앞에서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실된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합니다. 죄는 숨길수록 커집니다. 반면에 드러내어 고백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수록 죄의 능력은 소멸됩니다.
실제가 없음.
율법주의는 영적으로 눈 먼 종교입니다.
율법주의의 또 하나의 특징은 영적인 눈이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율법주의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대표 격인 바리새인들을 지칭하실 때 가장 흔히 사용하셨던 용어 중 하나가 소경이라는 것이었습니다. “16)화 있을진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17)우맹이요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금이냐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19)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예물이냐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24)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26)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마 23:16-17, 19, 24, 26).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마 15:14).
물론 본인들은 자신들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만 하더라고 그랬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어두움 가운데 있는 자를 위한 빛이요, 눈 먼 자들의 인도자라고 생각했습니다(롬 2:19-20 참조).
예수님의 관점과 바리새인들의 관점이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 다른 것은 이론과 실제의 차이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을 빛이라고 생각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에 관한 이론적인 지식을 누구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것은 실제입니다. 물론 이론도 중요하지만, 그것은 실제를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율법주의는 한편으로 이론이 실제를 대체해 버린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어떠한 실제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소경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주의에서는 실제가 없습니다.
율법주의에서는 이론이 실제를 대체해 버립니다. 그래서 율법주의에서는 실제가 없습니다. 말과 이론은 무화과나무의 잎사귀처럼 무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삶 속에 하나님의 실제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의 실제가 없는 것, 이것은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 볼 수 있는, 율법주의의 열매 중 매우 중요한 한 가지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응답하실 줄 믿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그러한 하나님의 실제를 삶에서 거의 경험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율법주의에 빠진 증거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실제의 관점에서 우리의 삶을 살펴본다면, 얼마나 율법주의에 깊이 빠져있는지를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이 열매를 가지고 우리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만약 바리새인들이 “실제의 열매”를 가지고 자신들의 삶을 살펴보았더라면,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에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 율법주의의 열매를 가지고 우리의 신앙을 살펴본다면, 우리는 우리 신앙의 현 주소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우리들은 바리새인들처럼 이 열매를 가지고 우리의 삶을 살펴보지 않습니다.
믿음이 없음.
율법주의의 또 하나의 열매는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믿음 없음을 강하게 책망하셨습니다. “46)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47)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요 5:46-47).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성경을 철저하게 믿었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바리새인들은 매우 보수적인 신앙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모든 성경을 일점일획 틀림없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대로 믿었습니다.
여기서도 문제는 관점의 차이입니다. 그 당시 바리새인들은 성경의 모든 내용을 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철저히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믿음이 다른 누구보다 더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그대로 믿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전혀 몰랐기 때문에 하나님을 실제로 믿을 수 없었습니다. (믿음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믿음에 의한 삶은 우리 신앙에서 필수적인 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제가 곧 『믿음에 의한 삶』을 집필하려고 합니다. 나중에 이 부분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성도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분임을 믿습니까?” 라고 물으면, 대부분의 성도들은 아멘으로 화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실제로 문제가 생기고 필요가 생길 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특히 그 문제나 필요가 매우 중대한 것일수록 더욱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의지하고, 사람을 의지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전혀 믿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의 믿음은 하나님에 관한 성경적인 진리를 지식적으로 동의하는 것일 뿐, 실제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는 집회에 다니면서 성도들에게 자주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믿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면 하나님 앞에서 설 것을 믿습니까? 그리고 하나님 앞에 서면, 이 세상에서 살았던 것으로 하나님 앞에서 선악 간에 심판을 받을 것을 믿습니까?” 그럼 대부분의 성도들은 당연히 그렇게 믿는다고 대답합니다. 이 세 가지 질문은 우리 신앙에서 가장 기본적인 사항에 관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성도들은 실제로 이 세 가지 사항을 믿지 않습니다. 만약 그들이 이 세 가지 진리만이라도 진실로 믿는다면, 우리는 절대로 이렇게 살지 않을 것입니다. 심지어 목회자들도 절대로 이렇게 목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율법주의 신앙에서는 믿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주의에서는 믿음에 대한 올바른 이해도 가리어지기 때문에, 믿음이 전혀 없으면서도 자신들이 믿음이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반대로 바리새인들처럼 자신들의 믿음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율법주의는 그 만큼 무서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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