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하나님의 자원으로 사는 삶과 십자가에 의한 삶
오늘날 교회 가운데에는 십자가의 복음에 기초한 신앙관보다는 거짓신앙체계로 대변되는 기복신앙과 율법주의 그리고 인본주의가 가득합니다. 거짓신앙체계의 가치관이 성도들 생활가운데 팽배합니다. 이같은 현실은 이 나라의 교회를 진실로 염려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다 지적하는 바입니다. 한국교회의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 알려진 어느 목사님께서도 같은 내용으로 한국교회의 문제점을 지적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감리교단 원로목사님들을 위한 어느 세미나에서 강의하시다가 언급한 내용입니다.
여기 계신 여러 원로목사님들이 한국교회를 위해 기도하셔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지금 중병을 앓고 있습니다. 율법주의, 기복신앙, 인본주의의 중병을 앓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기도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거짓신앙 즉 기복신앙, 율법주의, 인본주의가 십자가의 복음과 그 내용이 흡사하다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거짓신앙과 십자가의 복음은 내용면에서 서로 비슷한 것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완전히 다릅니다. 이런 이유로 성도들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잘 분별하지 못한 채 교회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은 하나님의 길을 따라 신앙생활을 영위할 때 하나님을 참으로 영화롭게 섬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어야만 하나님이 약속하신 바를 성도들의 삶에서 실제로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짓신앙에 빠지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 사실상 불가능해집니다. 하나님의 약속들이 갖는 풍요한 삶을 누릴 수 없습니다.
여러분, 참신앙은 은혜에 의한 삶입니다. 율법주의의 반대입니다. 침신앙은 믿음에 의한 삶입니다. 인본주의와 반대입니다. 참신앙은 하나님이 목적이 된 삶입니다. 기복신앙과 반대입니다. 그렇습니다. 참신앙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머물면서 하나님의 목적과 뜻을 깨달아 하나님의 행하심에 전존재로 동참하는 생활입니다. 이렇게 될 때에만 하나님을 경험으로 알아가는 삶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자원으로 사는 삶은
십자가의 복음에 토대한 삶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인격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즉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으로 인하여 산다는 말은 살아계시며 인격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매순간 모든 일에서 신뢰하며 사는 삶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의 복음을 토대하여 사는 생활은 다른 표현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자원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자원으로 사는 삶, 여기에 십자가의 복음이 있고 또한 성령님을 좇아 살아가는 삶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원으로 사는 삶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분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원으로 살았던 예를 우리는 성경에서 많이 찾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 57절입니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여기서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말의 의미는 예수님의 삶의 근원이 하나님이셨다는 뜻입니다. 다른 표현으로 쓰자면 예수님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자원으로만 사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자원으로 사셨다는 말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지혜만이 예수님이 의지하셨던 지혜였고, 하나님의 보호만이 예수님이 의지하셨던 보호였으며, 하나님의 능력만이 예수님이 의지한 능력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에게는 하나님만이 지혜였고, 하나님만이 보호였으며, 하나님만이 능력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자원으로 산다는 의미는
하나님만이 모든 것이 되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자원으로 산다는 말은 하나님만이 모든 것이 되는 삶을 뜻합니다. 정확하게 예수님이 사신 삶을 가리킵니다. 이해를 좀 더 돕기 위해 한 곳을 더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8장 18절과 19절입니다.
어떤 관원이 물어 가로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부자 청년이 영생의 문제를 갖고 주님께 나와 나누었던 대화입니다. 이 대화를 언뜻 읽으면 이해가 잘 안됩니다. 이유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선하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선하지 않다는 말씀은 마치 예수님이 자신의 신성을 부인하는 것같이 들릴 수 있습니다. 확실히 어떤 면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분명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자신의 하나님이심을 부인하시는 것 같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서 여러 곳에서 자신과 하나님은 하나이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일로 인해 사람들로 하여금 “참람하다”는 오해도 사셨습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여러 곳에서 자신과 하나님의 동등됨을 언급하셨습니다. 그런데 위 구절에서는 자신과 하나님의 동등함을 부인하시는 것 같아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6장 57절을 이해하고나면 궁금증이 풀리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선함을 위해서도 자신의 선함을 의지하지 않으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위(位)이심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선함을 의지하여 사시지 않고 아버지의 선함을 의지하여 사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원으로 사는 삶입니다. 여기에 십자가의 복음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거짓신앙체계에 빠지는 이유에는
“아담적 본성”이라고 불리는 “자아”가 있습니다
성도들이 거짓신앙에 빠지는 원인 중에는 영혼 속에 있는 “아담적 본성”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자아”라고도 부릅니다. 본 책자에서는 “아담적 본성”과 “자아”를 같은 의미로 혼용하여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거짓신앙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원으로 살아가지 않고 자기 자원으로 살아가도록 부추깁니다.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하나님의 자원 대신에 자기 자원을 의지합니다. 사단의 속임입니다. 이런 연유로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원으로 살아가는 가치관이 무엇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럴 때 자기 자원으로 살아가는 삶을 좀 더 선명하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원을 의지하지 않고 십자가의 복음 위에 토대하여 설 수 있을 것입니다.
참신앙에서 거짓신앙으로 전환하려면 무엇보다 신앙의 본질을 추구하는 가운데 십자가에 의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십자가에 의한 삶을 이해하고, 그 삶을 실제로 살 때, 우리 가운데에서 거짓신앙관은 깨어지며, 우리 삶 가운데에서 설 자리를 잃을 것입니다. 십자가에 의한 삶은 주님의 십자가만을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서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거짓신앙에서 참신앙으로 전환하려면
무엇보다 십자가에 의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십자가에 의한 삶에서 “아담적 본성” 즉 우리의 “자아”는 깨어집니다. 십자가에 의한 삶을 살 때 우리들은 아담적 본성이 이미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었다는 사실을 선명하게 볼 수 있게됩니다. 십자가에 의한 삶을 살 때라야 사람들은 자기의 노력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자원으로 사는 법의 필요성을 더욱 깨닫게 됩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주님의 십자가만을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서는 삶입니다. 그리고 이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서는 삶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지닙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공로를 믿음으로 의지해야만 참된 생명이 우리 속에 주어진다는 의미입니다.
“십자가에 의한 삶”이란
첫째, 십자가의 공로를 믿음으로 의지하는 삶입니다
요한복음 6장 55절부터 56절입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위 구절은 십자가의 복음 가운데 핵심적인 구절입니다. “살”과 “피”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먹고 마신다”는 표현은 문맥상 ‘믿음’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위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의지해야만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속에 주어지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같은 장 53절과 54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지하여 살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인 영생을 가질 수 있으며,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사시는 삶이 가능하게 됩니다. 53절의 “먹고 마신다”의 시제는 단순과거형입니다. 그러니까 과거 어느 한 시점에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하여 믿음으로 거듭나는 것을 언급한 말씀입니다.
“십자가에 의한 삶”이란
둘째, 항상 반복적으로 십자가의 공로만을 의지하여
우리 안에 예수께서 거하시는 삶입니다
십자가의 공로만을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서는 삶의 두 번째 의미는 항상 반복적으로 십자가의 공로만을 믿음으로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서야만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삶이 가능해진다는 의미입니다. 요한복음 6장 55절과 56절입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여기 56절의 “먹고 마신다”는 동사의 시제는 현재형입니다. 현재적으로 계속하여 반복적인 차원에서 십자가의 공로를 믿음으로 의지하여 서는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과거 어느 한 시점에서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하여 믿는 순간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의 공로를 믿음으로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서는 삶이란 과거 어느 한 시점에서만이 아니라 항상 순간순간 반복되어져야 하는 사건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항상 반복적으로 순간순간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하여 설 때에만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는 삶이 가능합니다. 그렇게 되면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에서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왜 십자가에 의한 삶을 살아야 하는 걸까요?
이제 ‘우리가 왜 십자가에 의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찾아보기 원합니다. ‘왜 우리들은 십자가에 의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추적하는 이유는 우리 신앙생활이 십자가에 의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의한 삶을 모르면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열리지 않습니다. 또한 십자가에 의한 삶을 모르면 영적 전쟁에서 어떻게 싸워야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또 영적 전쟁에서의 승리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왜 우리가 십자가에 의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은 십자가에 의한 삶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위해서도 대단히 중요한 질문입니다. 우리는 답변을 추적하는 가운데 십자가에 의한 삶의 중심에 있는 것들을 보게될 것입니다.
십자가에 의한 삶은
신앙의 본질과 밀접하게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우리 신앙생활은 십자가에 의한 삶입니다. 십자가에 의한 삶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들을 실제적으로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서는 삶입니다. 앞서 살펴본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의한 삶은 신앙의 본질과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은 아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의한 삶을 살아야 하는 그 중요성을 살펴봄에 있어 먼저 신앙의 본질을 잠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호세아 6장 6절입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예수님께서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위 구절을 두 번씩이나 인용하셨습니다. 마태복음 9장 13절과 12장 7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전후문맥과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마 9:10-13)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고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한 자들이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마 12:1-7)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질책하시면서 신앙의 본질을 보여주는 구절인 호세아 6장 6절을 인용하셨습니다. “인애”는 “사랑”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우리 말 ‘표준 새번역’ 성경에는 “사랑”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사랑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선명하게 말씀의 의미를 보여줍니다. 즉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라는 구절은 “나는 나의 백성들이 변함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제사보다 원하며, 불로 태워 드리는 제사보다 하나님을 알기를 더 원하노라”라고 이해하면 정확한 이해입니다.
이처럼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두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제사에, 하나님을 아는 것이 번제에 비교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왜 이렇게 둘을 대비하며 비교하고 있을까요? 또 하나 궁금한 사실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 레위기 등의 성경에서 번제와 제사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위 구절에서는 원치 아니하신다고 합니다. 왜 그렇게 하신 걸까요?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번제와 제사의 중요성을 이미 언급하신 다음이었는데도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신앙생활에는 본질과 의식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없는 채로 번제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기 백성들을 바라보시면서 신앙의 본질을 원하신다는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두 궁금증에 대한 답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본질이 없으면서도 하나님을 향한 열정을 갖고 번제와 제사를 열심히 드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열납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본질이 그 속에 담겨있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신앙의 본질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 후 수백년이 지난 다음 예수님께서도 신앙의 본질이 없이 하나님을 자기 열정을 다해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던 바리새인들에게 위 구절을 인용하시면서 신앙의 본질의 중요성을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수많은 제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실제로 호세아 시대에는 본질이 없는 채로 수많은 제사가 드려졌습니다. 우리는 그저 본질이 없는데도 수많은 번제와 제사가 드려졌다는 사실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그토록 수도 없이 드려졌던 제사들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주는 구절이 있습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우리 신앙은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랑이 없는 의식 즉 본질이 없는 번제나 제사는 의미가 없습니다. 여러분, 사랑이 없는 화려한 결혼식을 생각해 보셨나요? 아무리 결혼식이 화려하다 할지라도 부부간에 사랑이 없다면 사실 그 결혼식은 축복이 아니라 비극입니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차이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왜 신앙의 본질이 없는데도 의식이 가득할 수 있었던 걸까요? 사실 말이지만, 자신이 드리고 있는 제사를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다고 생각한다면 누가 예배를 드리겠습니까? 대답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에 관한 지식의 차이를 분별하지 못한 연고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알다시피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어떠한 능력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사람을 절대로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본질을 담을 수 있는 그릇과도 같아서 중요한 부분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의식이 본질을 대신할 수는 결코 없는 법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에 관한 오해를 갖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무언가 열심히 ‘종교적 행위’를 하면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열심히 뛰어듭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사랑하면 열심히 행하는 법입니다. 그렇다고해서 열심히 행동하는 그것이 곧 사랑일 수는 없는 법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이란 인격체끼리의 만남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란 인격체끼리의 만남에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의 문제점은 본질이 없는 채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본질이 없는데도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는 본질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에 관해서 많이 알면 그것이 곧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여러분, 만일 이 주장이 틀리지 않다면 바리새인들은 누구보다도 더 신앙생활을 잘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들은 정말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행위면에서 열심이 뛰어났으니까요.
이렇게 본질이 없는 신앙생활을 하게되면 나타나는 특징이 바로 거짓신앙입니다. 흔히 “거짓신앙체계”라고 부릅니다. 거짓신앙체계에는 인본주의, 기복신앙, 율법주의가 있습니다. 인본주의의 특징은 자기자원, 자기목적, 자기방법입니다. 기복신앙의 특징은 하나님을 수단삼아 이 땅에서 본인이 성취하고자 하는 바를 이루는 가치관입니다. 율법주의의 특징은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는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종교적인 헌신과 행위를 더 의지하는 신앙태도입니다.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세워지기 전에는
거짓신앙체계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은 오직 십자가의 공로로만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성도들은 하나님을 신뢰하여 나아가기보다는 자기의 행위나 헌신을 의지하여 나아가려고 합니다. 분명 거짓신앙입니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거짓신앙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실정입니다. 이들 거짓신앙체계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십자가의 복음 위에 토대하여 세워지기 전에는 사실상 거짓신앙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서게 되면 은혜에 의한 삶, 믿음에 의한 삶, 성령에 의한 삶이 가능해집니다. 신앙의 본질이 살면 십자가의 복음 위에 토대하여 설 수가 있습니다.
기도사역을 하다보면 많은 성도들에게서 거짓신앙의 견고한 진들을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의 본질에 대해 설교를 듣거나 기도 사역을 받다가 자신이 율법주의에 빠져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은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자신이 거짓신앙 속에 빠져있는지조차 모르고 살아갑니다. 거짓신앙에 빠져 있으면 당장 나타나는 특징이 찬양과 경배가 잘 되지 않습니다. 찬양과 경배는 우리들을 지성소의 지경에 이르게 하는 의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찬양과 경배를 인도하시기 원하십니다. 또한 찬양과 경배를 받기 원하십니다. 그러나 율법주의나 다른 거짓신앙에 빠져있으면 지성소에서 가지는 주님과의 친밀함까지 나아가질 못합니다. 신앙의 본질이 추구하는 바는 우리와 주님과의 만남이 얼굴과 얼굴을 마치 대면하여 만나는 것처럼 친밀함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짓신앙은 이것을 철저하게 방해합니다. 거짓신앙체계는 사람들을 지성소의 문고리만 만지고 돌아가도록 만듭니다. 성전의 뜰만 밟고 돌아서게 만듭니다. 휘장을 걷고 그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십자가에 의한 삶을 살아야 하는 첫째 이유는
자기모습을 보지 않고 지성소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여기가 바로 우리가 왜 십자가에 의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그 첫째 이유를 발견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대부분 지성소 안까지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자기 모습을 본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휘장 안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에는 십자가의 공로로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공로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휘장 안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 곳이기에 우리 모습이 그 앞에서 드러나기 시작하면 견딜 수가 없게 됩니다. 실제로 견딜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는 모든 것이 벌거벗은 것처럼 보이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생각 하나하나, 행동 하나하나, 일거수일투족까지 다 드러납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은 한 편으로 마치 죽음을 경험하는 것과도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말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사 6:5)
모세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출 20:19)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을 만나 죽을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절대로 볼 수 없었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공로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려고 한다면 그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의 빛 앞에서 드러난 자기 모습을 보면 모두가 죽을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하여 하나님의 영광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의한 삶을 우리가 살아야 하는 첫째 이유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매우 주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기도하는 가운데 깨어있는 삶을 살 때에는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하여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삶이 어렵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같은 죄를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짓고 나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처음 죄를 지을 때에는 “그래요, 주님, 저에게는 주님의 십자가 밖에 없어요”하면서 십자가에 의한 삶을 살다가도 똑같은 죄를 일백번 정도 짓고 나면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래, 난 안 되는가봐”하면서 말입니다. 이것은 분명 율법주의입니다. 거짓신앙체계입니다. 참으로 깊게 뿌리 박혀있는 거짓신앙입니다. 율법주의 설교를 처음 들으면 누구나 다 “아, 맞아, 저거야, 이제부터 율법주의를 버리고 십자가에 의한 삶을 살아야지”하면서 다짐하지만 똑같은 죄를 반복적으로 여러차례 짓고 나면 금새 풀이 죽어버립니다. ‘언제 다짐했느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삶을 추구하며 살아갈 때에 가장 먼저 부딪치는 문제는 십자가에 의한 삶을 통한 율법주의를 극복하는 문제입니다. 우리들이 십자가에 의한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만일 극복하지 못한 채 신앙생활을 하면 반복적으로 넘어지는 자기의 생활 때문에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일을 매우 어렵게 생각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렇게 율법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한 성도들은 보상심리로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할 수 있습니다. 봉사를 열심히 하는 이유의 배후에 보상심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라도 열심히 해야지, 지난날의 과오를 주님께서 덮어주실 것 같아서입니다. 무언가 상쇄될 것 같아서 그렇게 합니다. 율법주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성도들에게서 나타나는 또 다른 특징은 ‘타협주의’입니다. 이렇게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아니, 신앙생활을 그렇게 하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이야?” 이렇게 말하면서 적당히 선을 그어놓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십자가에 의한 삶을 살아야 하는 둘째 이유는
하나님의 기준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의한 삶을 살아야 하는 둘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이 하나님만 목적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만 목적되는 삶입니다. 기복신앙은 이것을 부인합니다. 하나님이 목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수단으로 여깁니다. ‘문제해결’이나 이 세상에서 얻고자 하는 바를 얻어내려는 목적으로 하나님을 찾습니다. 기도하고 봉사하는 이유가 하나님을 통해 자기의 구하고자 하는 바를 성취하는 데에 목적을 둡니다.
그런데 기복신앙은 분별하기 어려운 특징이 있습니다. 자기목적을 위해 하나님을 수단 삼는다는 일이 나쁘다는 사실은 웬만한 성도라면 다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다 압니다. 그런데 기복신앙은 대부분 다음과 같은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분별이 어렵습니다. 즉 “하나님도 영광 받으시고 나도 잘되고” 하는 식입니다. “하나님도 잘 되고, 나도 잘되고,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식의 가치관이 기복신앙입니다. 그래서 분별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 좋은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 여겨지기 쉽다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흔히 성도들이 굳게 믿는 신조 가운데 “심은 대로 거둔다”의 확신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잘 심으면 30배, 60배, 100배의 복을 받는다”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분명 성경에 따온 내용들이기는 하지만 매우 위험한 발상이 그 속에 들어있습니다. 기복신앙의 전형적인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심은 대로 거둔다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 말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만이 목적되는 삶을 의미하는 구절이지 복을 목적 삼으라고 주신 말씀이 절대로 아니기 때문입니다.
거짓신앙체계에 빠지면
영적 분별력이 사라지는 특징이 있습니다
거짓신앙체계에 빠지면 나타나는 특징은 영적 분별력을 상실해 버리는 일입니다. 우리 시대에 가장 필요한 회복의 영역이 있다면 영적 분별력의 회복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다시 보는 일입니다. 영적 분별력은 성경을 얼마나 많이 아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참으로 성경을 많이 알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갖는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는 영적인 안목이 가리어져 있었습니다. 관점이 흐려져 있었던 것입니다.
… 그만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 (마 15;14)
여러분, 주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물어보십시오. “당신은 신앙생활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아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잘 다녀야죠, 헌금도 열심히 해야죠, 기도 많이 해야되죠, 주일성수해야죠” 이렇게들 대답할 것입니다. 무언가를 열심히 하는 것을 신앙생활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이 행위가 되어있는 셈입니다. 신앙은 분명 믿음인데 말입니다. 믿음에 대한 이해가 뒤틀려 있기에 일어날 수 있는 일들입니다.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자신의 죄를 지적하면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 합니다. 누구나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죄를 지적하는 참선지자들은 자기 시대에서 거짓 선지자로 항상 낙인이 찍혔습니다. 그런데 거짓신앙에 빠지면 낙관주의와 긍정주의의 특징이 나타납니다. “잘 될꺼야. 아무렴 하나님이 좋으신 하나님인데 나를 그냥 두실까” 이런 생각에 빠집니다. 예배를 잘 드렸던 목적이 하나님께만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에게서 받을 복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잘못된 관점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영적 분별력이 사라졌기에 볼 수 없었습니다. 인간의 방법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십자가에 의한 삶을 살아야 하는 셋째 이유는
은사 중심, 능력 중심의 삶을 살지 않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기 위함입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십자가에 의한 삶이 필요합니다. 은사나 능력 중심의 삶을 살지 않기 위해서는 십자가에 의한 삶이 필수입니다. 우리나라에는 공(功)사상이 널리 퍼져있습니다 복을 받으려면 공을 들여야 한다는 사상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면 성령의 진정한 역사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워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갈 5:17)
물과 불이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거짓신앙체계는 육체의 소욕에서 나온 것들이기에 성령의 역사와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설령 은사가 나타난다 하더라도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열매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에 의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좇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마 7:22)
보십시오. 성령의 은사가 나타난다고 해서 하나님이 자신의 신학이나 신앙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처럼 거짓신앙체계 아래에서는 성령의 진정한 열매는 없습니다. 참된 안식이나 자유함도 없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 말씀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주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진정한 안식을 주시고자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참된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진정한 안식을 누리며 살아가는 성도들을 주변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입니다. 평안이 없는 얼굴들, 안식 없는 신앙생활을 다람쥐 체 바퀴 돌 듯 할뿐입니다.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휴, 예수 믿는 게 정말 징-하게 어렵구만.”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그 분의 이 한 마디 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참으로 큽니다. 많은 성도들의 푸념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말로는 다 들 잘 믿는다고 말들을 하지만 말입니다.
믿음에 관한 잘못된 이해가 난무합니다
믿음에 대한 뒤틀린 이해에 대해 잘 말해주는 성경이 있습니다. 야고보서 2장 19절입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믿음은 이론적인 지식을 통해 얻어지지 않습니다. 성경을 통해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을 보고 살아계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믿음이 생깁니다. 믿음이 있으려면 무엇보다 먼저 믿음의 대상인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을 신뢰해야 합니다. 여기에 믿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성령의 조명과 연관이 있습니다. 성령의 조명으로 아는 만큼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조명으로 아는 만큼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허드슨 테일러의 예
허드슨 테일러도 뒤늦게나마 바로 이 삶 즉 믿음에 의한 삶을 발견하였으며, 그 이후 그의 신앙생활과 그의 사역은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는 그 어려운 역경 가운데서도 중국 내륙으로 200명이 넘는 선교사들을 한푼의 도움 없이 오로지 주님만을 의지하여 파송할 수 있었고, 그 수많은 난관 가운데서도 주님 안에서 안식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삶의 비결이야말로 구원의 진리와 별 차이가 없는 쉬운 것이라며 모든 사람이 그것을 알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다음은 허드슨 테일러가 당시 영국에 있던 자기 자녀들에게 보낸 편지들입니다.
사랑하는 나의 아이들아, 너희도 예수님께 너희 마음을 맡겨 주님께서 매일 보호하시도록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기를 원한다. 나는 내 마음을 내 힘으로 보호해 보려고 애썼었단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노력은 항상 허사였지, 그러던 중 마침내 자신이 노력하는 것을 포기하고 주님께서 나를 위해 대신 보호해 주실 것을 의뢰하기로 했단다. 너희들 생각에도 이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것이다. 아마 너희들은 가끔 “나는 지금부터 이기적이지도 않고 불친절하지도 않으며 불순종하지도 않겠다”라고 작정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성공하지 못하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길 “그것을 내게 맡기라. 그러면 너의 마음을 내 능력으로 보호하리라”라고 말씀하고 계시며 또한 실제로 그렇게 해주신단다. 한 때 나는 예수님을 한 순간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자꾸 잊어버리곤 했단다. 이제는 내가 주님을 기억하려고 하지 않고 예수님께 맡기고 있으며 주님은 그렇게 해 주신단다. 이것이 가장 좋은 길이란다. 블레췰리 양에게 이것에 대해서 더 얘기해 달라고 말하려무나.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진리를 너희에게 분명히 깨닫게 해 달라고 기도하려무나. 그리고 너희가 실제로 그렇게 살 수 있도록 기도하려무나
허드슨 테일러는 물질이 필요했을 때 한 번도 다른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께서 중국을 원하시고 계시며 그 일을 위해 자신들을 중국에 보내셨다고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을 성령의 조명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만 신뢰하면서 선교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만 자기의 필요를 채우실 줄로 믿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자원으로 자기 사역을 감당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자원으로 사역을 감당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조지 뮐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2천명이나 되는 고아들을 먹여 살리면서 그는 한 번도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거나 도움의 손길을 요청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의지하여 고아의 하나님께서 친히 아이들을 먹이실 것을 믿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나 조지 뮐러의 예를 들으면서 우리들은 가끔 이렇게 생각하곤 합니다. “그런 일은 그 사람들처럼 믿음이 아주 좋았던 사람들에게나 있을 법한 일이지, 우리같은 범인들에게는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야.”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성경은 우리 모두가 이 삶을 살기를 강조하십니다. 그렇다면 왜 많은 성도들은 그들처럼 안 되는 걸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거짓신앙관 때문입니다. 거짓신앙체계에 빠져있다 보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막혀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조명으로 비쳐져야만 하나님만이 하나님의 일을 위해 우리의 필요를 친히 채우시리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자기자원이 아닌 하나님의 자원으로 살았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자기의 자원으로 살기보다는 하나님의 자원으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단 한 사람도 예외없이 자기의 능력으로 일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하나님의 자원으로 사역을 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26절부터 29절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지혜가 없는 사람들만 발탁하셔서 하나님의 일에 사용하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자신에게는 아무런 능력이 없음을 알아 하나님만 신뢰한 사람들을 쓰셨다는 말입니다. 더 이상 자기의 힘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신뢰한 사람들을 통해서만 하나님께서는 일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스스로 자신이 똑똑하다고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없습니다.
자신이 똑똑하다고 믿는 사람을
하나님은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거짓신앙체계에 빠지면 참된 의미의 믿음, 성경적 의미에서의 은혜, 하나님의 뜻 가운데 머무는 삶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참된 말씀의 의미로부터 멀어지게 되기 때문에 세상과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합니다. 무엇보다 억압이 찾아와서 영혼을 짓누릅니다. 하나님을 향해 열심을 내어보지만 진정한 기쁨이나 승리가 그 속에 없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하나님의 기도응답은 없어집니다. 점차 하나님의 치유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오래 시간이 흐르고 나면 초신자들에게 이런 말들을 많이 합니다. “열심히 믿어야 해. 뭐든지 열심히 하면 은혜 받어.” 초신자가 은혜 체험한 간증을 늘어놓으면 “처음에는 다 그런 법이야. 하나님께서 믿음 주시려고 응답도 처음에는 빨리 주시지. 처음에는 다 그래. 그걸 ‘꽃믿음’이라고 하는 거야, 우리도 다 겪었어.” 아, 기억하십시오. 이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자신이 지금 하나님과 멀어져 있는 상태에 있음을 고백하는 그 이상의 의미가 아닌 푸념일 뿐입니다.
신앙의 연륜이 쌓이면 쌓일수록
하나님의 능력이 더욱 더 필요한 법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처음할 때 응답을 자주 주시다가 신앙의 연륜이 쌓일수록 응답을 지연시키시는 분이 절대로 아닙니다. 신앙의 연륜이 쌓일수록 우리에게는 주님의 능력이 더욱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더 많아 져야합니다. 그렇다면 신앙의 연륜이 길어질수록 주님의 능력은 왜 더욱 더 안 나타나는 걸까요? 왜 모든 것이 더 안 되는 걸까요? 왜 응답은 자꾸만 지연되고 하나님을 경험하는 횟수가 줄어드는 걸까요? 혹 거짓신앙체계에 빠졌기 때문은 아닐까요? 혹 하나님의 관점이 아닌 인간의 관점으로 살고있는 것은 아닐까요?
거짓신앙체계에 빠지면 나타나는 특징이 행위가 강조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겉으로 나타나는 표현’으로서의 행위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증거로서의 행위가 아닌 본질을 대신하는 행위는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본질을 통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를 통해서 신앙생활을 하게되면 그 행위는 믿음의 외적 표현이 아니라 종교적 의무를 다하는 표현으로서의 행위로 전락된다는 것입니다. ‘공들여 복 받으려는 의식’이 가치관 속에 박혀있기 때문에 생겨난 현상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은 하나님을 위해 열심을 가집니다. 열정이 있습니다. 그러나 열심이나 열정 자체가 믿음은 아닙니다.
대개 신앙생활 초기에
율법주의적 현상이 나타납니다
우리 모두는 처음부터 온전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대개의 경우 율법주의적 특징들이 초창기에 나타납니다. 실제로 믿음의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특징은 열심히 자신의 힘으로 해보다가 거듭 실패하니까 뒤로 물러나면서 하나님의 일은 자기 힘으로 할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 때에 주님만을 붙잡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놀라운 하나님의 일을 이루십니다. 여기에 율법이 우리에게 주어진 목적이 있습니다. 율법이 주어진 목적 중 하나가 자기가 자기의 힘으로 말씀을 지켜보려고 할 때 안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목적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성취하기 위해 자기 방법으로 접근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많은 성도들 속에 거짓신앙체계가 뿌리내려져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러 이유 가운데 하나가 ‘종교성’ 때문입니다. 종교심이 강한 사람일수록 거짓신앙관을 가지고도 나름대로 충성스러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세 번 회심해야 한다. 개종이라는 회심과 정직함의 회심과 부인하는 삶으로서의 회심이 그것이다. 세 번째 단계의 회심까지 가야만 진정한 회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많은 경우 개종의 단계에서 멈추고 있다.
네, 바른 지적입니다. ‘부인하는 삶으로서의 회심’까지 가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만약 여기까지 못 가고 개종의 단계에서 멈춘다면 여기서 나타나는 현상이 율법주의와 인본주의, 기복신앙입니다.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많은 경우 그리스도인들이 마치 불교신자처럼 신앙생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이나 불교신자들 사이에 별 차이가 없습니다. 옷만 바꿔 입었을 뿐이지 중심은 똑같은 사고가 많습니다. 뿌리를 파고 들어가면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있음을 봅니다.
사람들의 근본에는
자아라는 아담적 본성이 있습니다
어느 누구나 사람들의 근본을 파고들면 그 속에 자아라고 하는 아담적 본성이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뿌리에 아담적인 본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다루어지지 않으면 신앙이 근본적으로 전환되지를 않습니다. 자아문제는 선명하게 다루어져야 합니다. 아담적인 본성은 다른 표현으로 자아라고 많이들 부릅니다. 이처럼 거짓신앙체계의 뿌리에는 타락한 본성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창세기 3장 1절부터 5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위 구절은 뱀이 하와를 유혹하는 장면입니다. 뱀의 유혹 앞에서 하와는 처참하게 무너져 내립니다. 무너진 하와는 먹음직한 그리고 보암직한 또 지혜롭게할만한 과실을 바라봅니다. 결국 따먹습니다. 많은 신학자들은 하와가 실패한 원인을 하나님처럼 되고싶었던 마음에서 찾습니다. 많은 신학자들의 견해는 하와의 실패 원인을 하나님처럼 되고싶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단이 여자에게 했던 말 가운데 “네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말이 있는데 이 유혹 때문에 넘어졌다고들 말을 합니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다는 의미는
자기 인생을 스스로 책임지려고 했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하와는 하나님처럼 되고 싶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처럼 되고 싶다’는 말은 ‘자기 인생을 스스로 책임지는 자가 되고 싶었다’는 의미입니다. 하와는 자기도 하나님처럼 위대해지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의 보호와 보장 아래서 살아가는 삶이 아닌 하나님처럼 되는 삶을 살고 싶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처럼 되기 위한 삶을 살기 위해서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사단은 이것을 속였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사단 역시 이런 과정을 거쳐 타락하였던 천사장입니다. 이사야서 14장 12절부터 15절입니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치우리로다
어느날 천사장 루시퍼는 천사장의 자리에 만족하지 못하고 창조주처럼 되고 싶어하였습니다. 오늘날 사단이 역사하는 방법 그대로입니다. 사단은 오늘날 공공연히 자신이 악한 자라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이것을 사단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선한 신이라면 자신은 악한 신으로 하나님과 대비되기를 즐거워합니다. 사단이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겨지는 것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단은 실제로 하나님에게 상대가 되질 않습니다. 사단의 상대는 천사장들일뿐입니다.
십자가에 의한 삶을 살아야 하는 네 번째 이유는
자기가 자기의 하나님 되는 것
즉, 원초적 범죄인 교만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Originsl Sin(원초적 범죄)은 교만입니다. 교만은 죄의 출발점입니다. 교만이 있으니까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기를 바랬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동등하게 된다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이 말은 자기가 자기 하나님이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처럼 된다는 말은 자기가 자기의 신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거짓신앙체계입니다. 이처럼 거짓신앙체계는 태초 때부터 있어 왔습니다. 사단은 실패하자 인간을 부추기며 넘어지게 만듭니다.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이것 보십시오. 사단 역시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였습니다. 자신의 지위를 뭇 별 위에 높이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과 비기는 존재로 자신을 높이고 싶었습니다. 교만입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살아야했던 아담과 하와를 속여 자신이 그리했던 것처럼 그들 또한 같은 방법으로 타락시킵니다. 즉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게 하는 시험을 통해 타락시켰던 것입니다.
‘스스로’라는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스스로의 관점’이 항상 문제입니다. 신앙의 본질에 서려면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삶이 필수입니다. 그런데 ‘스스로의 관점’은 항상 주님의 주권아래 들어가는 삶을 방해합니다. 거짓신앙관의 특징은 행위를 강조하는데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자원을 얻어내어 보려고 하는 신앙관이 거짓 신앙관입니다. 십자가에 의한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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