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기복신앙
오늘날 교회 가운데 십자가의 복음보다는 기복신앙과 율법주의, 인본주의가 가득합니다. 거짓신앙체계의 가치관이 팽배합니다. 우리나라의 교회를 진실로 염려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다 지적하는 바입니다. 한국교회의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 알려진 목사님께서도 같은 내용으로 한국교회의 문제점을 지적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감리교단 원로목사님들을 위한 세미나에서 한 말씀입니다.
원로목사님들이 한국교회를 위해 기도하셔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지금 중병을 앓고 있습니다. 율법주의, 기복신앙, 인본주의의 중병을 앓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거짓신앙 즉 기복신앙, 율법주의, 인본주의가 십자가의 복음과 그 내용이 흡사하다는 것입니다. 비슷한 것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다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잘 분별하지 못한 채 교회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은 하나님의 길을 따라 신앙생활을 영위할 때 하나님을 참으로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어야만 하나님이 약속하신 바들을 실제의 삶에서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짓신앙에 빠져있으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약속들이 갖는 풍요한 삶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도들로 하여금 거짓신앙에 빠지게 하는 배경에는 우리 속에 있는 아담적 본성이 있습니다. 다른 말로 ‘자아’라고도 부릅니다.
참신앙은 하나님이 목적이 된 삶입니다
여러분, 참 신앙은 은혜에 의한 삶입니다. 율법주의의 반대입니다. 참 신앙은 믿음에 의한 삶입니다. 인본주의와 반대입니다. 참 신앙은 하나님이 목적이 된 삶입니다. 기복신앙과 반대입니다. 아까 하나님 안에는 모든 것이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기 위해서는 십자가에 의한 삶을 살아야만 가능합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하여야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안에 거할 수 있는 삶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참 신앙에서 거짓신앙으로 전환하려면 무엇보다 십자가에 의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십자가에 의한 삶을 이해하고 실제로 살 때, 우리 가운데에서 거짓신앙은 깨어지며 우리 삶 가운데에서 설자리를 잃을 것입니다. 이 때 신앙의 본질이 십자가에 의한 삶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에 의한 삶에서 자아는 깨어집니다. 십자가에 의한 삶에서 아담적 본성은 이미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었다는 사실을 선명하게 봅니다. 이 때가 되어야 자기의 노력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자원으로 사는 법의 필요성을 더욱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자원으로 사는 법을 배울 때
기복신앙은 성도들의 발목을 잡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원으로 사는 삶을 실제로 배우게될 때 가장 우리의 발목을 잡는 것이 기복신앙입니다. 조지 뮐러나 허드슨 테일러 등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다 하나님의 자원으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성도들은 자기들의 자원으로 살아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물론 자기가 자기자원으로 살려고 하는지조차 모른 채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어떠한 하나님의 능력도 경험하지 못하며,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태가 열리지 않습니다. 억압이 가득하며 진정한 자유가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도 열리지 않습니다. 안식이 없음은 당연합니다. 주님의 약속이 주는 풍성한 삶이 없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과 29절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요한복음 10장 10절입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보십시오. 주님이 얼마나 멋진 삶을 예비해 놓으셨는지요. 그러나 거짓신앙에 빠져 있으면 이러한 영광을 보지 못합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의 삶에서 이런 부분이 나타나질 않습니다. 아니, 대부분의 성도들은 거짓신앙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이해조차 없는 실정입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안식이 무엇인지 모르니까 대체물을 찾기에 급급할 뿐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주변에 오랫동안 교회생활을 하신 분이 계시다면 한 번 물어보십시오. “예수 믿기가 어렵습니까? 쉽습니까?”라고 말입니다. 아마, 십중팔구 “아이고, 예수 믿기 되게 어렵네요”라는 답변을 들을 것입니다. 그 성도가 진실로 정직하게 답변을 했다면 말입니다.
문제를 정확히 보아야
해결책을 찾을 수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이유는 하나입니다. 신앙의 본질을 떠나있기 때문입니다. 참 신앙에 서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의한 삶을 통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질 못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복음 위에 토대하여 신앙을 세워나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정확히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보아야 해결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만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대다수는 자신이 율법주의, 인본주의, 기복신앙과 무관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또 이론적으로는 어느 만큼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거짓신앙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게 또한 현실입니다. 그런데도 대부분 “나 자신은 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이유로 거짓신앙에 빠져있으면서도 “자기는 아니라”고 굳게 믿습니다. 이게 현실입니다.
이 장에서는 하나님의 자원으로 살지 못하도록 성도들의 발목을 붙잡는 원인의 뿌리에 있는 기복신앙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신명기 28장에 대한 오해가 있습니다
흔히 신명기 28장을 “복(福)의 장”이라고 말들 합니다. 마치 히브리서 11장을 믿음의 장, 고린도전서 13장을 사랑의 장이라고 하듯이 말입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신명기 28장의 말씀들을 인용하면서 “복”에 대해 설교를 합니다. 그러나 신명기 28장을 자세히 읽어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신명기 28장의 말씀은 신명기 전체의 관점에서 해석되어야 정확하게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자칫 28장만 가지고 말씀들을 해석하면 원래의 의미를 지나칠 위험이 있습니다. 어떤 성경구절을 해석할 때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권고하는 해석법은 전후 문맥이나 성경전체의 맥락에서 해석하는 해석 방법입니다. 이렇게 해야 오류를 범하지 않을 수 있다고 신학자들은 지적합니다. 신명기서 전체를 요약하여 말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언급하는 내용입니다.
여호와만 사랑하라
아마 어느 신학자치고 이렇게 신명기서를 요약하여 말하는 것에 대하여 불만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신명기서는 하나님만이 하나님이시라는 것 즉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하셨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성경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안에는 모든 것이 다 들어있음을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는 말씀이 신명기 28장입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 네 대적들이 일어나 너를 치려하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니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 ◇ 여호와께서 명하사 네 창고와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이며 ◇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면 여호와께서 네게 맹세하신 대로 너를 세워 자기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니 ◇ 너를 여호와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세계 만민이 보고 너를 두려워하리라 ◇ 여호와께서 네게 주리라고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사 네 몸의 소생과, 육축의 새끼와, 토지의 소산으로 많게 하시며 ◇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열으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 여호와께서 너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 (신 28:1-14)
위 구절은 분명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은혜의 복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시면 아시겠지만 우리가 무언가를 하면 하나님께로부터 무언가를 얻어낼 수 있다는 진리를 가르치는 말씀이 절대 아닙니다. 만일 이렇게 여긴다면 그것은 거짓신앙입니다. 기복신앙입니다. 실제로 이 잘못된 이해가 우리 가운데 팽배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알고있는 어느 순복음교회 목사님은 하나님의 길을 깨닫고 난 후, 기복신앙의 잘못된 폐해에 대해 설교 한 이후로 여러 성도들이 교회를 떠났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러분, 왜 기복신앙의 잘못된 면을 설교하니까 사람들이 교회를 떠났던 걸까요? 이유야 간단합니다. 그들이 돈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의 개념을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고 복을 받는다’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중 하나입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할 점은 ‘복의 개념’에 관한 부분입니다. 성경이 증거하는 복은 ‘예수 믿으면 나와도 복을 받고 들어가도 복을 받는다’는 식의 복이 아닙니다.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목회자들이 공공연히 복을 받으려면 성도들에게 무엇 무엇을 하라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십일조를 해서 복을 받는 것과 복을 받기 위해 십일조를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것을 성실하게 바치며 십일조를 통해 자신의 물질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주께 고백하는 자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그러나 복을 받기 위해서 십일조를 드린다거나 그렇게 가르치는 일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기복신앙입니다. 왜냐하면 복이 목적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복을 받기 위해 마치 투자하는 식이 되어버린 경우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신명기 28장은 복에 관한 말씀보다는 사실 저주에 관한 말씀이 더 많습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 ◇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 또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을 것이요 ◇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우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을 것이며 ◇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 ◇ 네가 악을 행하여 그를 잊으므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여호와께서 저주와 공구와 견책을 내리사 망하여 속히 파멸케 하실 것이며 ◇ 여호와께서 네 몸에 염병이 들게 하사 네가 들어가 얻을 땅에서 필경 너를 멸하실 것이며 ◇ 여호와께서 폐병과, 열병과, 상한과, 학질과, 한재와, 풍재와, 썩는 재앙으로 너를 치시리니 이 재앙들이 너를 따라서 너를 진멸케 할 것이라 ◇ 네 머리 위의 하늘은 놋이 되고 네 아래의 땅은 철이 될 것이며 ◇ 여호와께서 비 대신에 티끌과 모래를 네 땅에 내리시리니 그것들이 하늘에서 네 위에 내려서 필경 너를 멸하리라 ◇ 여호와께서 너로 네 대적 앞에 패하게 하시리니 네가 한 길로 그들을 치러 나가서는 그들의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할 것이며 네가 또 세계 만국 중에 흩음을 당하고 ◇ 네 시체가 공중의 모든 새와 땅 짐승들의 밥이 될 것이나 그것들을 쫓아 줄 자가 없을 것이며 ◇ 여호와께서 애굽의 종기와, 치질과, 괴혈병과, 개창으로 너를 치시리니 네가 치료함을 얻지 못할 것이며 ◇ 여호와께서 또 너를 미침과, 눈멂과, 경심증으로 치시리니 ◇ 소경이 어두운데서 더듬는 것과 같이 네가 백주에도 더듬고 네 길이 형통치 못하여 항상 압제와 노략을 당할 뿐이니 너를 구원할 자가 없을 것이며 ◇ 네가 여자와 약혼하였으나 다른 사람이 그와 같이 잘 것이요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 거하지 못할 것이요 포도원을 심었으나 네가 그 과실을 쓰지 못할 것이며 ◇ 네 소를 네 목전에서 잡았으나 네가 먹지 못할 것이며 네 나귀를 네 목전에서 빼앗아감을 당하여도 도로 찾지 못할 것이며 네 양을 대적에게 빼앗길 것이나 너를 도와 줄 자가 없을 것이며 ◇ 네 자녀를 다른 민족에게 빼앗기고 종일 생각하고 알아봄으로 눈이 쇠하여지나 네 손에 능이 없을 것이며 ◇ 네 토지 소산과 네 수고로 얻은 것을 네가 알지 못하는 민족이 먹겠고 너는 항상 압제와 학대를 받을 뿐이리니 ◇ 이러므로 네 눈에 보이는 일로 인하여 네가 미치리라 ◇ 여호와께서 네 무릎과 다리를 쳐서 고치지 못할 심한 종기로 발하게 하여 발바닥으로 정수리까지 이르게 하시리라 ◇ 여호와께서 너와 네가 세울 네 임금을 너와 네 열조가 알지 못하던 나라로 끌어가시리니 네가 거기서 목석으로 만든 다른 신들을 섬길 것이며 ◇ 여호와께서 너를 끌어가시는 모든 민족 중에서 네가 놀램과, 속담과, 비방거리가 될 것이라 ◇ 네가 많은 종자를 들에 심을지라도 메뚜기가 먹으므로 거둘 것이 적을 것이며 ◇ 네가 포도원을 심고 다스릴지라도 벌레가 먹으므로 포도를 따지 못하고 포도주를 마시지 못할 것이며 ◇ 네 모든 경내에 감람나무가 있을지라도 그 열매가 떨어지므로 그 기름을 네 몸에 바르지 못할 것이며 ◇ 네가 자녀를 낳을지라도 그들이 포로가 되므로 네게 있지 못할 것이며 ◇ 네 모든 나무와 토지 소산은 메뚜기가 먹을 것이며 ◇ 너의 중에 우거하는 이방인은 점점 높아져서 네 위에 뛰어나고 너는 점점 낮아질 것이며 ◇ 그는 네게 꾸일지라도 너는 그에게 뀌지 못하리니 그는 머리가 되고 너는 꼬리가 될 것이라 ◇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고 네게 명하신 그 명령과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므로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너를 따르고 네게 미쳐서 필경 너를 멸하리니 ◇ 이 모든 저주가 너와 네 자손에게 영원히 있어서 표적과 감계가 되리라 ◇ 네가 모든 것이 풍족하여도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함을 인하여 ◇ 네가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모든 것이 핍절한 중에서 여호와께서 보내사 너를 치게 하실 대적을 섬기게 될 것이니 그가 철 멍에를 네 목에 메워서 필경 너를 멸할 것이라 ◇ 곧 여호와께서 원방에서 땅 끝에서 한 민족을 독수리의 날음 같이 너를 치러 오게 하시리니 이는 네가 그 언어를 알지 못하는 민족이요 ◇ 그 용모가 흉악한 민족이라 노인을 돌아보지 아니하며 유치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며 ◇ 네 육축의 새끼와 네 토지의 소산을 먹어서 필경은 너를 멸망시키며 또 곡식이나 포도주나 기름이나 소의 새끼나 양의 새끼를 위하여 남기지 아니하고 필경은 너를 멸절시키리라 ◇ 그들이 전국에서 네 모든 성읍을 에워싸고 네가 의뢰하는 바 높고 견고한 성벽을 다 헐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의 모든 성읍에서 너를 에워싸리니 ◇ 네가 대적에게 에워싸이고 맹렬히 쳐서 곤란케 함을 당하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자녀 곧 네 몸의 소생의 고기를 먹을 것이라 ◇ 너희 중에 유순하고 연약한 남자라도 그 형제와 그 품의 아내와 그 남은 자녀를 질시하여 ◇ 자기의 먹는 그 자녀의 고기를 그 중 누구에게든지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 대적이 네 모든 성읍을 에워싸고 맹렬히 너를 쳐서 곤란케 하므로 아무 것도 그에게 남음이 없는 연고일 것이며 ◇ 또 너희 중에 유순하고 연약한 부녀 곧 유순하고 연약하여 그 발바닥으로 땅을 밟아 보지도 아니하던 자라도 그 품의 남편과 그 자녀를 질시하여 ◇ 그 다리 사이에서 나온 태와 자기의 낳은 어린 자식을 가만히 먹으리니 이는 네 대적이 네 생명을 에워싸고 맹렬히 쳐서 곤란케 하므로 아무 것도 얻지 못함이리라 ◇ 네가 만일 이 책에 기록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라 하는 영화롭고 두려운 이름을 경외하지 아니하면 ◇ 여호와께서 너의 재앙과 네 자손의 재앙을 극렬하게 하시리니 그 재앙이 크고 오래고 질병이 중하고 오랠 것이라 ◇ 여호와께서 네가 두려워하던 애굽의 모든 질병을 네게로 가져다가 네 몸에 들어붓게 하실 것이며 ◇ 또 이 율법 책에 기록지 아니한 모든 질병과 모든 재앙을 너의 멸망하기까지 여호와께서 네게 내리실 것이니 ◇ 너희가 하늘의 별같이 많았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남는 자가 얼마되지 못할 것이라 ◇ 이왕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선을 행하시고 너희로 번성케 하시기를 기뻐하시던 것 같이 이제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망하게 하시며 멸하시기를 기뻐하시리니 너희가 들어가 얻는 땅에서 뽑힐 것이요 ◇ 여호와께서 너를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만민 중에 흩으시리니 네가 그 곳에서 너와 네 열조의 알지 못하던 목석 우상을 섬길 것이라 ◇ 그 열국 중에서 네가 평안함을 얻지 못하며 네 발바닥을 쉴 곳도 얻지 못하고 오직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의 마음으로 떨고 눈으로 쇠하고 정신으로 산란케 하시리니 ◇ 네 생명이 의심나는 곳에 달린 것 같아서 주야로 두려워하며 네 생명을 확신할 수 없을 것이라 ◇ 네 마음의 두려움과 눈의 보는 것으로 인하여 아침에는 이르기를 아하, 저녁이 되었으면 좋겠다 할 것이요 저녁에는 이르기를 아하, 아침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리라 ◇ 여호와께서 너를 배에 실으시고 전에 네게 고하여 이르시기를 네가 다시는 그 길을 보지 아니하리라 하시던 그 길로 너를 애굽으로 끌어가실 것이라 거기서 너희가 너희 몸을 대적에게 노비로 팔려하나 너희를 살 자가 없으리라 (신 28:15-68)
보십시오. 복에 관한 말씀보다 저주에 관한 말씀이 4배 이상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명기 28장에서 복에 관한 부분만 빼내어 ‘복의 장’이라고 부른 배경에는 사람들의 관점이 작용한 것 같습니다.
마태복음 6장의 말씀은 기복신앙에 빠지게 될 때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동시에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하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동록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 한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 무엇을 마실까 ?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 ◇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 ◇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아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 무엇을 마실까 ? 무엇을 입을까 ? 하지 말라 ◇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마 6:19-34)
자, 이제부터 기복신앙에 대해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의 개념은
흔히 말하는 물질적인 복과 다릅니다
첫째, 성경에서 강조하는 복이란 도대체 무엇인지 알아보겠습니다.
우선 결론적으로 말씀을 드리자면, 많은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바이기도 한데, 성경 어디에서도 물질적인 복을 복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신약신학자들이 이 주장을 강조합니다. 그들의 말인 즉은, “예수님의 어떤 말씀에서도 현실적이며 물질적인 복을 찾아볼 수 없다”라고 주장합니다.
제 친구 중 한 사람이 영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습니다. 그 친구의 말입니다.
처음 영국에 건너갔을 때 영국교회에서는 한국교회를 굉장히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한국교회는 세상을 변화시킬 능력이 없고 오히려 세상의 가치관이 한국교회 안에 그대로 들어와 있다는 이유 때문에 한국교회를 더 이상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기복신앙이다.
실제로 성경은 어디에서도 복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현세적이며 물질적인 복을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한 때 미국에서 방송설교로 명성을 떨쳤던 분 가운데 짐 베이커라는 분이 있습니다. 짐 베이커 목사님의 설교는 주로 다음 구절을 인용하며 이루어졌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요삼 1:2)
짐 베이커 목사님은 나중에 어떤 일로 인해 중도에 사역을 그만두고 죄수의 신분을 면치 못했습니다. 감옥에 간 것입니다. 그런데 왜 많은 사람들이 이분의 방송설교에 매료되었던 걸까요? 해답을 그분의 설교내용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짐 베이커 목사님의 주된 설교주제입니다.
심으면 축복 받습니다. 많이 심으십시오. 그러면 30배, 60배, 100배로 거둘 것입니다.
이런 식의 설교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물질을 심으면 현세에 여러 배의 복을 받는다는 이 말에 사람들은 흥분했던 것입니다. 짐 베이커 목사님은 감옥에 간 이후, 그 안에서 성경을 다시 보게되었다고 합니다. 특히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만을 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설교 내용만을 읽은 후에 자기가 그동안 했었던 설교가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알게되었다고 합니다. 그분이 기적적으로 출감한 후에 쓴 책이 바로 ‘I was Wrong (나는 잘못되었었노라)’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은
신령한 복, 즉 영적인 복입니다
오늘날 문제는 복의 개념을 물질적이고 현실적으로 만들어 버렸다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복의 개념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복이 신령한 복 즉 영적인 복이라고 가르칩니다. 에베소서 1장 3절입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여기서 바울은 복이 “하늘에 속한 복”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즉 영적인 복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늘에 속한 복이기에 신령한 복입니다. 같은 장 4절이하에서 바울은 세 가지로 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經綸)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엡 1:4-14)
그 세 가지는 첫째, ‘하나님이 택하신 복’이며 둘째, ‘성자께서 구속을 이루신 복’이며 셋째 ‘성령으로 인치신 복’입니다. 바울은 이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복을 주신 이유는 하나님을 찬송케 하려고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복을 주시는 이유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찬송이 되게 하려는 의도 때문입니다.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미하게 하려고 함입니다.
여러분,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송축하게 하려고 복을 주셨다는 이 말씀이 이해가 되시나요? 마태복음 5장 3절부터 12절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흔히 위 말씀을 가리켜 “팔복‘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자세히 읽어보시면 아는 사실이지만 ”팔복’은 세상적이고 물질적인 복이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의 복입니다. 그렇다면 복의 궁극적인 의미는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의 복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은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본 복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아니, 구약에 보면 물질적인 축복을 말하고 있다. 그럼 그것은 어떻게 되는 것이냐?”라고 묻습니다. 맞습니다. 구약은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축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 답변에 대해 사람들은 또 질문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현실적이고 물질적인 축복을 구하라고 하신 것이 아닌가요? 구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는 왜 구약에서 현실적이고 물질적인 축복을 구하라고 하신 것일까?“라는 하나님의 의도에 대한 질문을 해야 옳습니다. 하나님은 왜 구약성경에 복을 구하라고 하신 걸까요? 해답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풍요롭고 풍성한 삶을 살기 원하신다는 아버지의 마음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축복을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창세기 1장 27절과 28절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말씀은 분명 축복에 관한 말씀입니다. 맞습니다. 분명 축복에 관한 말씀입니다. 창세기 2장 15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위 구절은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합니다. 즉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곳이 에덴 동산 밖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동산 밖에서 창조하신 다음, 동산 안으로 이끌어 들이셨습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복을 주시기 원하시며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생육하고 번성하기를 원하신다는 점을 잘 보여줍니다. 번영하는 삶을 살도록 유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염려가 없는 삶을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입을 것, 먹을 것’에 관한 염려가 없는 땅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에덴동산 안에 사람들을 들이신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의도가 잘 보여진 부분입니다.
출애굽기 3장 7절부터 10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이 구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스러운 생활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셨다”라고 기록합니다. 또 하나님이 모세를 보내셔서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자기 백성들을 인도하시기 위해서 그들 가운데 내려오실 것을 기록합니다. 포로생활하는 자기 백성들을 친히 돌보시기 위해 찾아오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도 알 수 있는 사실은 하나님의 계획이 자기 백성들을 풍요한 삶 안에 들어오게 하시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성경에 “젖과 꿀이 흐른다”라는 의미는 ‘풍요하심’을 의미합니다. 노예들을 단순히 자유케 하는 의미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자기 백성들을 먹이시되 생명의 풍성함으로 먹이시기 원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입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그렇습니다. 이 구절 역시 같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임하신 것이나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 중 하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풍요로운 삶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풍요로운 삶을 살기 원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인도하신 하나님께서는 계속하여 반역하고 하나님을 떠난 백성들에게 아담이 하나님께 순복하고 살았던 에덴 동산에서 살았던 생활을 잃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우리들의 풍료운 삶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사랑을 드러내시기 위해
에덴 동산 한 가운데 선악과를 만드셨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질문하곤 합니다. “왜 하나님은 선악과를 만들어서 결과적으로 인간이 범죄하게 만들었을까요?”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두신 이유는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내신 일과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 보이신 증표입니다. 즉 선악과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나타내는 일인 동시에 아담과 하와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이신 증표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간이 로봇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제작된 기계가 아님을 명심하십시오. 사랑은 선택입니다. 억지로 강요된 사랑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단은 “선악과를 따먹으면 하나님처럼 된다”고 하와를 미혹했습니다. 사단의 유혹에 넘어간 하와는 결국 선악과를 따먹기에 이릅니다. 아담 역시 아내가 건네주는 선악과를 함께 먹었습니다.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을 떠나게 되었으며 생명의 결핍인 죽음에 빠지게 됩니다. 건강의 결핍인 질병에 빠졌으며 사랑의 결핍인 미움과 시기 가운데 빠졌습니다. 땅을 파야 먹을 수 있는 일들이 벌어졌으며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결핍된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마치 애굽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결핍의 삶을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독생자를 육신을 입혀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삼일만에 부활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들로 하여금 풍요로운 삶을 누리도록 하셨습니다.
성경은 복을 하나님 나라의 안목에서 바라봅니다
둘째, 신약성경의 복은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바라본 복이라는 점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의 첫 설교와 마지막 설교입니다.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막 1:15)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하니 ◇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 1:3-8)
위 구절에 의하면 부활 후 승천하시기 전에 주님은 하나님 나라에 관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말씀하실 때, 주님이 쓰신 단어 가운데 “아버지”라는 단어가 있는데 매우 중요한 단어입니다. 사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표현은 유대인들에게는 충격적인 표현입니다. 지금까지 어느 유대인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니,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없었습니다. 그런 개념 자체를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일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미워했던 이유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개념에는
자기지식, 자기관점을 내려놓는 일이 포함됩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까지 하나님 나라를 언급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언급한 하나님 나라의 개념은 ’통치의 개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개념에는 자기 지식, 자기 관점을 내려놓는 일이 포함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신 배경에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지식, 사람들의 관점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왕으로 모셔들이라는 의미가 깔려 있습니다.
‘값진 진주의 비유’가 의미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우리의 모든 것으로 살 때 하나님 나라는 우리 가운데 임하십니다. 또한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 흔히 질문했던 것처럼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 식의 자기 관점을 내려놓고 배울 때, 하나님 나라는 우리 가운데 임하실 것입니다. 이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빠,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 주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와 아버지를 연관지어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별명을 붙여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별명 가운데에는 “술을 즐기는 자”, “먹기를 탐하는 자”, “죄인들의 친구”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별명 가운데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예수님은 먹고 마시는 일과 관련하여 많은 오해를 받으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먹고 마시는 일과 관련하여서 설교와 비유를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잔치와 관련하여 여러 차례 말씀을 하셨습니다. 알다시피 예수님께서 어느 곳에 가시던지 사람들이 많이 따라 다녔습니다. 특히 예수님은 죄인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죄인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식탁공동체를 많이 하였습니다. 즉 먹고 마시는 일을 자주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잔치와 관련하여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5장입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 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주었더니 ◇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 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 이 내 아들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왔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눅 15:1-32)
위 내용은 비유들로서 잃은 양, 잃은 드라크마, 잃은 아들의 비유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부분은 잃은 것을 찾을 때마다 그곳에 잔치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잔치를 말씀하시면서 아버지의 의중을 보이셨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이러이러한 하나님이시다’라고 은연중에 말씀하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잃은 것을 찾을 때마다 잔치가 있었습니다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당연히 자신들이야말로 하나님과 가까이 있어야 할 사람들로 자신들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주님은 죄인들의 친구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여기서 죄인이란 종교지도자들이나 세리, 창기들 모두를 포함하는 단어입니다. 즉, 인간 모두를 포함합니다. 그러나 종교지도자들은 ‘상대적인 의’에 빠져 자신들을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 큰 문제였습니다. 결국 그들이 끝내 예수를 믿지 못하게되는 이유이기도 하였습니다.
성경에는 잔치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잔치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는 하나님 나라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풍요함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풍요한 삶을 예비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보여주시기 위해 잔치 비유를 자주 말씀하신 것입니다.
거룩하신 주님이 부정한 곳에 오면 부정한 곳이 거룩하게 바뀝니다. 이것이 일반 종교와 기독교와의 차이점입니다. 예수님이 문둥이를 만나면 문둥이가 정결한 사람으로 바뀝니다. 예수님이 삭개오를 만나면 부정한 세리장의 집이 회개의 장이 되어버립니다. 거룩한 곳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 나라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풍요로운 삶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이 담겨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 그곳에는 항상 결핍이 있었습니다. 아담이 에덴을 떠난 후 빈곤에 이른 것처럼 말입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 집을 떠났을 때 빈곤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이 부분을 잘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면 곤고함이 그곳에 반드시 있게 마련입니다.
집회를 다니면서 자주 경험하게 되는 일이 있습니다. 처녀 시절 예수를 잘 믿었던 사람들의 얘기입니다. 처녀 때에는 주님을 위해 헌신하고, 기도하고, 봉사를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백마 탄 왕자가 나타났습니다. 불신자 왕자였습니다. 그러면 그 집에 선교사로 갑니다. 믿지 않는 남편을 예수 믿게 하려는 의욕을 가지고 말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선교하기는커녕 도리어 선교를 당합니다. 선교를 당한 후부터는 시부모 제삿날 제사 상 차리는 일을 하며 살아갑니다. 이렇게 약 10년쯤 지나면 “천부여 의지 없어서…”하며 다시 교회에 나옵니다. 수많은 억압을 끌어안은 채 말입니다. 그동안 삶 속에 엄청난 억압을 끌어안고 살아오다가 결국 다시 교회를 찾은 것입니다. 그 가운데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을 그냥 내버려두실 수 없었기에 그렇게 다시 부르신 것입니다. 집회를 다니면서 이런 일을 많이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곳에는 억압과 곤고함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자 그곳에는 억압이 있었습니다. 마치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떠나자 억압이 찾아왔듯이 말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잘먹고 잘 살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절대 행복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를 반드시 징계하시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돌이키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깨닫게 하여 돌이켜 보니까 세월만 갔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자녀야, 내가 너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네가 아느냐?”
지금까지 성경이 말하는 복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이제는 기복신앙은 무엇인지 보겠습니다.
기복신앙이란 하나님을 찾되
주님이 아닌 목적을 가지고 찾는 신앙관입니다
기복신앙은 하나님을 찾되 다른 목적을 가지고 찾는 신앙관입니다. 하나님께 헌신하되 다른 목적을 가지고 헌신하는 신앙관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되 다른 목적을 가진 신앙관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되 건강의 축복이나 자식들이 형통하기 위해 문제 해결을 위해 주님을 찾는 신앙관입니다. 문제가 생기면 주님을 찾기는 하지만 주님을 목적하여 찾는 것이 아니라 복이 목적인 신앙관입니다. 궁극적으로는 복을 받겠다는 것이 기복신앙입니다. 하나님이 수단이 되어버린 신앙관입니다.
우연히 기도원에서 누군가가 두고 간 성경책 겉 표지에 이렇게 써 놓은 글을 보았습니다.
자녀의 축복을 받으려면 목회자에게 잘 해야 한다
물질의 축복을 받으려면 십일조를 잘 내야 한다
건강의 축복을 받으려면 새벽기도를 잘 해야 한다
성경책의 주인이 새벽기도를 하는 이유는 건강의 축복을 받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십일조를 한 이유는 물질적인 복을 받기 위함입니다. 이 분이 목회자를 잘 섬기는 이유는 자녀의 축복을 받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우, 하나님을 순종하는 이유가 복을 받기 위해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신앙생활 속에는 하나님이 목적되지 않는 가치관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수단 삼아 복을 받으려는 생각이 있습니다. 전혀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만을 목적하여 살아가면 우리들 삶 가운데 하나님의 뒷받침하시는 복을 누리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복을 목적하여 신앙생활을 하면 그런 신앙생활은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어집니다. 어떨 때 부흥회에서 복을 받으라고 부흥강사가 조장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물론 어떨 때 성경적인 것처럼 보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유일한 한 가지 이유는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인해서입니다. 그분만이 목적이기에 찾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찾습니다. 이것은 샤머니즘의 변종일 뿐입니다.
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 것은
샤머니즘(Shamanism)의 변종입니다
사람들이 기복신앙에 빠지는 이유 중 하나는 분별이 어려운 점 때문입니다. 기복신앙을 분별하기 어려운 이유는 하나님이 수단만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부분도 함께 있기 때문에 어려운 것입니다. 차라리 하나님이 수단만 이라면 기복신앙의 분별이 쉬어집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아 분별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 하나님이 수단만이 되신 분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도 영광을 받으시고, 나도 잘되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이 함정입니다. 왜냐하면 이 마음이 바로 나누어진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우상숭배입니다. 십일조를 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 결과 나도 잘되기를 바라는 가치관입니다.
나누어진 마음은 우상숭배입니다. “나도 잘되고”라는 마음 속에는 두 마음이 있다는 것을 대변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오직 하나님만” 입니다. 아니면 다 가짜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아니면 아무리 하나님 운운해도 가짜입니다. 신앙은 하나님만이 유일한 열망이 되는 삶입니다. 선악과는 하나님의 주권의 상징으로 주어졌습니다. 인간을 생육하고 번성하는 축복의 자리에 두시면서 동시에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주권 아래 두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으면 인간들이 아무런 불편함이 없이 살도록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것이 싫었습니다. 자기도 하나님처럼 되고 싶었습니다. 사단의 타락의 원인을 인간 역시 시도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복하기 보다는 복을 목표하여 살기 시작한 것입니다.
오늘날 목회자들이 앞 장 서서
기복신앙을 조장할 때가 많습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기복신앙을 조장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이렇게 하면 복을 받을 것입니다. 또 이렇게 이렇게 하면 더 큰 복을 받을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설교하여 성도들로 하여금 복을 목표하여 신앙생활을 하라고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 결과 성도들은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이도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헌신합니다. “순종하면 복을 받는다”라는 믿음을 가지고 말입니다. 순종하는 일이 아름답지만 그 배경에는 거짓신앙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기복신앙의 배경에는 자기가 자기 자신을 책임져보려고 하는 자세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책임지실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 자기 인생을 자기 스스로 책임져보려는 아담적 본성에서 기복신앙이 나옵니다. 기복신앙에 빠지면 하나님을 궁극적으로 신뢰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의 왕되심을 인정한다거나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분이라고 고백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일을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게 됩니다. 기복신앙이란 사단에게서 온 가치관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인생을 자기 스스로 책임져 보려는 자세에서
기복신앙이 나옵니다
흔히 기복신앙에 빠진 사람들은 신명기 28장 1절부터 20절의 말씀을 많이 인용합니다. 그런데 알다시피 신명기 28장에는 정말 “복”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조건이 달려있습니다. “네가 만일 행하면 …”이라는 조건이 있습니다. 순종이 관건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성도들에게서 나타나는 문제점은 순종의 문제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순종하는 일에 무척 어려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순종이 잘 안 되는 일로 인하여 “예수 믿기가 무척 어렵다”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순종하면 복을 받는다고 하니까 복을 받기 위해 안간힘을 써서 순종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함에 있어서 억지로가 아닌 기쁨으로 하며,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리로 먼저 돌아가야 합니다. 이 일이 급선무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순종하는 일이 무거운 짐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다만 복을 받기 위해서 명령을 순종하려고 하면, 그 모든 명령은 무거운 짐일 뿐입니다. 순종을 해도 본질이 없는 순종일 뿐입니다. 사랑 없는 복종일 뿐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의 문제는 순종에 있습니다
신명기서 28장만 보면 분명 성경은 복에 관해 말씀을 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관점이 아닌 성경의 관점으로 눈을 돌려야 합니다. 신명기서의 저자인 모세가 어떤 의도에서 신명기서를 썼는가 하는 관점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의도를 알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신명기 28장 전체와 신명기서 전체의 내용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하는 관점에서 28장에 기록된 복을 해석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신명기서의 관점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만이 하셨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명기서 전체의 주제입니다. 2장 7절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하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고 네가 이 큰 광야에 두루 행함을 알고 네 하나님 여호와가 이 사십년 동안을 너와 함께 하였으므로 네게 부족함이 없었느니라 하셨다 하라 하시기로
위 구절은 한 마디로 “하나님이 하셨다”라는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신 일이나, 만나를 먹이신 일이나, 광야까지 인도하신 일이나, 그들에게 복을 주신 일이나, 40년 동안 함께 하셨던 모든 일들은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4장 7절부터 10절입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하심과 같이 그 신의 가까이함을 얻은 나라가 어디 있느냐 ◇ 오늘 내가 너희에게 선포하는 이 율법과 같이 그 규례와 법도가 공의로운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 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 두렵건대 네가 그 목도한 일을 잊어버릴까 하노라 두렵건대 네 생존하는 날 동안에 그 일들이 네 마음 속에서 떠날까 하노라 너는 그 일들을 네 아들들과 네 손자들에게 알게 하라 ◇ 네가 호렙산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섰던 날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나를 위하여 백성을 모으라 내가 그들에게 내 말을 들려서 그들로 세상에 사는 날 동안 나 경외함을 배우게 하며 그 자녀에게 가르치게 하려 하노라 하시매
위 말씀도 하나님이 하셨기에 하나님만 경외하며 하나님만 경배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것을 잊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만을 경외하며 살 때에 진정한 승리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 1:1)
위 구절에서 “태초에”와 “천지를 창조”를 빼면 “하나님이 … 하시니라”가 됩니다. 이것이 전체 성경의 주제입니다. 신명기서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을 이끌어내시고 온존케 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책임질 수 없습니다. 인간은 자격도 없지만 능력도 없는 존재입니다.
사무엘하 22장에 나타난 다윗의 시와 여호수아의 고백에서 우리는 하나님은 누구신지, 그리고 인간은 누군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한결같이 하나님이 하셨노라고 고백합니다.
여호와께서 다윗을 모든 대적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그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씀으로 여호와께 아뢰어 ◇ 가로되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오, ◇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흉악에서 구원하셨도다 ◇ 내가 찬송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 사망의 물결이 나를 에우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 음부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아뢰었더니 저가 그 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나의 부르짖음이 그 귀에 들렸도다 ◇ 이에 땅이 진동하고 떨며 하늘 기초가 요동하고 흔들렸으니 그의 진노를 인함이로다 ◇ 그 코에서 연기가 오르고 입에서 불이 나와 사름이여 그 불에 숯이 피었도다 ◇ 저가 또 하늘을 드리우고 강림하시니 그 발 아래는 어둑캄캄하도다 ◇ 그룹을 타고 날으심이여 바람 날개 위에 나타나셨도다 ◇ 저가 흑암 곧 모인 물과 공중의 빽빽한 구름으로 둘린 장막을 삼으심이여 ◇ 그 앞에 있는 광채로 인하여 숯불이 피었도다 ◇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뇌성을 발하시며 지존하신 자가 음성을 내심이여 ◇ 살을 날려 저희를 흩으시며 번개로 파하셨도다 ◇ 이럴 때에 여호와의 꾸지람과 콧김을 인하여 물 밑이 드러나고 땅의 기초가 나타났도다 ◇ 저가 위에서 보내사 나를 취하심이여 많은 물에서 나를 건져내셨도다 ◇ 나를 강한 원수와 미워하는 자에게서 건지셨음이여 저희는 나보다 힘센 연고로다 ◇ 저희가 나의 재앙의 날에 내게 이르렀으나 여호와께서 나의 의지가 되셨도다 ◇ 나를 또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시므로 구원하셨도다 ◇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상 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좇아 갚으셨으니 ◇ 이는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을 행하여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 그 모든 규례를 내 앞에 두고 그 율례를 버리지 아니하였음이로다 ◇ 내가 또 그 앞에 완전하여 스스로 지켜 죄악을 피하였나니 ◇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대로, 그 목전에 내 깨끗한 대로 내게 갚으셨도다 ◇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리심을 보이시리이다 ◇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자를 살피사 낮추시리이다 ◇ 여호와여, 주는 나의 등불이시니 여호와께서 나의 흑암을 밝히시리이다 ◇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에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벽을 뛰어 넘나이다 ◇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정미하니 저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에게 방패시로다 ◇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바위뇨 ◇ 하나님은 나의 견고한 요새시며 나를 온전한 곳으로 인도하시며 ◇ 나의 발로 암사슴 발 같게 하시며 나를 나의 높은 곳에 세우시며 ◇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니 내 팔이 놋활을 당기도다 ◇ 주께서 또 주의 구원의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 ◇ 내 걸음을 넓게 하셨고 나로 실족지 않게 하셨나이다 ◇ 내가 내 원수를 따라 멸하였사오며 저희를 무찌르기 전에는 돌이키지 아니하였나이다 ◇ 내가 저희를 무찔러 파하였더니 저희가 내 발 아래 엎드러지고 능히 일어나지 못하였나이다 ◇ 이는 주께서 나로 전쟁케 하려고 능력으로 내게 띠 띠우사 일어나 나를 치는 자로 내게 굴복케 하셨사오며 ◇ 주께서 또 내 원수들로 등을 내게로 향하게 하시고 나로 나를 미워하는 자를 끊어버리게 하셨음이니이다 ◇ 저희가 둘러보아도 구원할 자가 없었고 여호와께 부르짖어도 대답지 아니하셨나이다 ◇ 내가 저희를 땅의 티끌같이 부스러뜨리고 거리의 진흙같이 밟아 헤쳤나이다 ◇ 주께서 또 나를 내 백성의 다툼에서 건지시고 나를 보존하사 열방의 으뜸을 삼으셨으니 내가 알지 못하는 백성이 나를 섬기리이다 ◇ 이방인들이 내게 굴복함이여 저희가 내 풍성을 듣고 곧 순복하리로다 ◇ 이방인들이 쇠미하여 그 견고한 곳에서 떨며 나오리로다 ◇ 여호와는 생존하시니 나의 바위를 찬송하며 내 구원의 바위이신 하나님을 높일지로다 ◇ 이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보수하시고 민족들로 내게 복종케 하시며 ◇ 나를 원수들에게서 나오게 하시며 나를 대적하는 자 위에 나를 드시고 나를 강포한 자에게서 건지시는도다 ◇ 이러므로 여호와여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이다 ◇ 여호와께서 그 왕에게 큰 구원을 주시며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인자를 베푸심이여 영원토록 다윗과 그 후손에게로다 하였더라 (삼하 22:1-51)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비,나홀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 내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편에서 이끌어내어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온 땅을 두루 행하게 하고 그 씨를 번성케 하려고 그에게 이삭을 주었고 ◇ 이삭에게는 야곱과 에서를 주었으며 에서에게는 세일산을 소유로 주었으나 야곱과 그 자손들은 애굽으로 내려갔으므로 ◇ 내가 모세와 아론을 보내었고 또 애굽에 재앙을 내렸나니 곧 내가 그 가운데 행한 것과 같고 그 후에 너희를 인도하여 내었었노라 ◇ 내가 너희 열조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 바다에 이르게 한즉 애굽 사람이 병거와 마병을 거느리고 너희 열조를 홍해까지 따르므로 ◇ 너희 열조가 나 여호와께 부르짖기로 내가 너희와 애굽 사람 사이에 흑암을 두고 바다를 이끌어 그들을 덮었었나니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을 너희가 목도하였으며 또 너희가 여러 날을 광야에 거하였었느니라 ◇ 내가 또 너희를 인도하여 요단 저편에 거하는 아모리 사람의 땅으로 들어가게 하매 그들이 너희와 싸우기로 내가 그들을 너희 손에 붙이매 너희가 그 땅을 점령하였고 나는 그들을 너희 앞에서 멸절시켰으며 ◇ 때에 모압 왕 십볼의 아들 발락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사람을 보내어 브올의 아들 발람을 불러다가 너희를 저주케 하려 하였으나 ◇ 내가 발람을 듣기를 원치 아니한 고로 그가 오히려 너희에게 축복하였고 나는 너희를 그 손에서 건져내었으며 ◇ 너희가 요단을 건너 여리고에 이른즉 여리고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기르가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들이 너희와 싸우기로 내가 그들을 너희의 손에 붙였으며 ◇ 내가 왕벌을 너희 앞에 보내어 그 아모리 사람의 두 왕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게 하였나니 너희 칼로나 너희 활로나 이같이 한 것이 아니며 ◇ 내가 또 너희의 수고하지 아니한 땅과 너희가 건축지 아니한 성읍을 너희에게 주었더니 너희가 그 가운데 거하며 너희가 또 자기의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원의 과실을 먹는다 하셨느니라 ◇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 너희의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수 24:2-14)
다윗, 여호수아 모두 이스라엘의 지도자입니다. 그들 모두 같은 말을 합니다.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의 경우는 “나와 우리 집은 하나님만 섬기겠다”라고 합니다. “섬긴다”는 말은 하나님만 사랑하고 하나님만 목적하고 하나님을 향한 열망으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도우실 분이시기에 그렇게 하겠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복에 관한 진리의 길이 보입니다. 모세가 신명기서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셨다”는 진리입니다. 신명기서 6장 4절부터 9절의 말씀은 흔히 “쉐마”라고 불리는 말씀입니다.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정성을 다 해 하나님을 사랑하라”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굉장히 소중하게 생각하는 말씀입니다. 여기서도 무척이나 강조하는 부분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나누어지지 않은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 이것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신앙의 본질이 의미하는 바는 보통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도 영광받고, 나도 영광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도 영광, 나에게도 축복’은 나누어진 마음입니다. 그래서 기복신앙은 한 마디로 자기가 신이 되어 보겠다는 의지입니다. 자신이 자신의 인생을 보장하겠다는 가치관입니다. 자기 인생의 주인이 자기가 되겠다는 사고(思考)입니다. 문제는 기복신앙의 토대에서는 하나님을 대적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기복신앙에는 자유함도 없습니다. 기복신앙이 깨어지지 않고는 하나님의 즐거움 가운데 들어갈 수 없습니다.
신명기 8장 2절과 3절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신 이유가 잘 나와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인도하신 이유를 잘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광야로 인도하신 이유는 한 마디로 그들을 하나님 앞에서 겸손케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을 겸손케 하신 이유는 인생이 오직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임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행복은 하나님이 왕되시는 곳에 있습니다
알다시피 성경은 어떤 특정한 곳에 다다르면 행복이 보장되어 있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왕되심을 가르칠 뿐입니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 살면 인생의 행복이 온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신앙이란 하나님이 저리로 가라고 하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저리로 가고, 이리로 오라 하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이리로 오는 삶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단지 기록된 말씀을 연구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신앙생활이란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광야 생활할 당시에는 기록된 성경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위의 말씀이 주어진 것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 즉 친밀함 가운데 머물다가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목적에 순종하는 삶이 신앙생활임을 보여줍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모든 것이 되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안에는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면 인생은 행복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하나님도 좋고 나도 좋은 편’을 택합니다. 초점이 이렇게 맞춰집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과의 만남이 흐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기복신앙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골로새서 3장 5절과 6절입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골 3:5-6)
개인의 삶에 고통과 어려움이 끊이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고통과 어려움이 끊이지 않는 것이 인생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어려움이 오는 이유 중 탐심이 있습니다. 탐심은 개인이나 공동체가 겪는 곤란과 연관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약 1:14-15)
탐심은 우상숭배입니다. 탐심의 죄악은 개인의 삶과 공동체 가운데 하나님의 보호막을 떠나게 만듭니다. 그 결과, 어려움이 닥치게 만듭니다. 성경에 의하면, 물질에 대한 욕심은 죄악이라고 가르칩니다. 탐욕은 우상숭배와 연관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의 길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욕심이 지나치면 하나님의 길을 잃어버립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잃어버립니다. 마태복음 6장 19절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동록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여기서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는 말씀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6장 21절부터 34절입니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 한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 무엇을 마실까 ?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 ◇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 ◇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아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 무엇을 마실까 ? 무엇을 입을까 ? 하지 말라 ◇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위 말씀에서 주님은 재물과 하나님을 대비시키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은 재물과 하나님을 대비시킨 걸까요? 이것을 보아도 말세가 될수록 재물의 문제에서 지유롭지 못하면 참신앙으로 설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주님은 이것을 우리들에게 교훈하시기 위해 재물과 하나님을 대비시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다시 말씀드리지만 탐심은 우상숭배입니다. 물질에 마음이 가 있으면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게됩니다. “하나님도 잘되고 나도 잘되고”하는 식의 사고방식 안에는 탐심이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고방식은 그럴 듯 하지만 사실은 물질을 섬기고 있는 것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길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길을 보지 못하는 일은 하나님의 심판의 한 수단입니다. 하나님의 길을 보지 못하면 심각한 일이 생깁니다. 멸망으로 가기 때문입니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날까지 저희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롬 11:8)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길을 잃어버리면 즉 영적 분별력을 상실해 버리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게 됩니다. 이는 분명 심판입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의 기준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마음 눈이 밝아야 합니다. 마음의 눈이 어두워지면 보질 못하게 됩니다. 육신적으로 멀쩡한 눈이 있었지만 전혀 하나님의 길을 보지 못합니다. 관점이 흐려지기 때문입니다. 왜곡된 신앙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의 의도를 보지 못합니다. 그 배후에 기복신앙이 있기 때문입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 한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 6: 23-24)
“네 눈이 성하면”이 영어 성경에는 “네 눈의 초점을 하나로 맞춘다면”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즉 “눈이 흐려지지 않게 하면, 눈이 밝으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는 것은
종이 두 주인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는 것은 마치 종이 두 주인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도 영광, 나도 영광”식의 사고방식은 'Double Focus' 즉 두 초점입니다. 그러니까 눈이 흐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눈은 초점이 하나여야 합니다. 초점이 두 개가 되면 안됩니다. 온 몸이 어두워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초점이 하나라는 사실은 하나님만 열망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만 헌신하라는 말씀입니다.
“눈이 나쁘면”은 “눈의 초점이 두 개가 되면”이라는 의미입니다. 좋은 눈은 초점이 하나이지만 나쁜 눈은 초점이 두 개입니다. 초점이 두 개가 되면 하나님을 찾되 다른 의도를 가지고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 목적이 아니라 자기의 목적이 그곳에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두 초점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을 찾되, 다른 의도가 속에 깔려 있으면서 하나님을 찾는 격이 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하지만 다른 목적을 가지고 접근하는 격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기보다는 자기 속에 있는 야망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수단으로 삼아 섬기는 꼴이 됩니다. 이것이 “나쁜 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쁜 눈’이 ‘성한 눈’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정직하게 대면하여 서는 일이 필요합니다. 정직하게 대면하여야 초점이 하나로 맞추어집니다. 사실 하나님만 대면하여 하나님 앞에 서면 삶의 전환이 이루어집니다. 중심이 바뀝니다. 하나님을 직면하여 서지 못하면 삶의 모양은 바뀔지 모르지만 속은 그대로입니다. 안은 하나도 안 바뀝니다. 겉은 바뀌었지만 속이 바뀌지 않으면 설교를 들을 때 이런 특징이 있습니다. “아, 그래, 저 설교처럼 살아야지, 너무 감동적이야.” 그러나 다시 삶에 돌아가서는 여전히 자기 방식대로 삽니다. 설교에서 감동 받은대로 말씀을 삶에다가 적용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정직하게 하나님을 대면해야 생깁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개인이나 공동체가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대면하여 서야만 보입니다. 반면, 하나님 앞에 대면하여 서지 않으면 성령을 근심케 할뿐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입으로는 사모할지 모르지만 성령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직면하여 서는 자들은 성령의 가르침을 즉시즉시 순종하여 가르침을 받아들입니다. 자기의 어두운 부분을 고치기 위해 노력합니다. 잘 고쳐지지 않을 때에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도움을 요청합니다. 애통해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상실하면
말씀을 알아도 이해하진 못합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잃어버리면 성경을 읽지만 깨닫지는 못합니다. 말씀을 많이 알지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성경 구절들을 암송하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의도를 전혀 보지 못합니다. 자기 생각대로 다른 각도에서 성경을 볼뿐입니다. 분별력을 상실한 연고입니다. 히브리서 3장 7절부터 17절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에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를 노하여 가로되 저희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니 ◇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하였으니 ◇ 듣고 격노케 하던 자가 누구뇨 모세를 좇아 애굽에서 나온 모든 이가 아니냐 ◇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에 누구에게 노하셨느뇨? 범죄하여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자에게가 아니냐?
위 구절은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서 언급하는 가운데 그들이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하나님의 길을 알지 못하였다“라고 기록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라고 합니다. 18절과 19절입니다.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 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하나님의 길을 볼 수 없었을까요? 시편 106편에 해답이 나와 있습니다.
이에 저희가 그 말씀을 믿고 그 찬송을 불렀도다 ◇ 저희가 미구에 그 행사를 잊어버리며 그 가르침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 광야에서 욕심을 크게 발하며 사막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였도다 ◇ 여호와께서 저희의 요구한 것을 주셨을지라도 그 영혼을 파리하게 하셨도다 (시 106: 12-15)
원인이 분명하게 나옵니다. “행사를 잊어버리며 가르침을 기다리지 아니하고”가 원인이었습니다. 특히 15절은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큽니다. 사람들은 흔히 기도응답을 받으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신임한다고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도응답을 주실지라도 영혼이 멸망하도록 내버려두신다는 의미이니까요. 하나님의 길을 보지 못한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다 광야에서 서서히 죽어갔습니다. 영혼이 파리해져갔습니다. 하나님의 길을 몰랐던 연고였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하나님의 길을 몰랐을까요?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욕심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했지만 마음은 다른데 있었습니다. 그 결과 눈이 멀었습니다. 하나님의 길을 보지 못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나를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잡는 고자들에게는 ◇ 내가 내 집에서, 내 성안에서 자녀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주며 영영한 이름을 주어 끊치지 않게 할 것이며 ◇ 또 나 여호와에게 연합하여 섬기며 나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나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 내가 그를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사 56:4-7)
이사야 42장부터 66장까지는 말세지말에 회복될 교회에 대한 약속입니다. 크게 세 가지 약속이 나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바벨론의 포로들이 돌아올 것에 대한 약속
2. 궁극적으로 메시야가 올 약속
3. 말세지말에 교회를 회복시키실 것에 관한 약속
4절의 “고자”란 남성으로서 생식기에 문제가 있는 사람입니다. ‘모세오경’에서는 “고자”들은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5절 이하에서 “고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이어 받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또 6절에는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안식 안에 거할 수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와같은 하나님의 자비 안에 들어 올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 언급하는 부분이 바로 다음 절에 등장합니다. 두려운 말씀입니다.
들의 짐승들아 삼림 중의 짐승들아 다 와서 삼키라 ◇ 그 파숫군들은 소경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라 능히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요 누운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니 ◇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요 그들은 몰각한 목자들이라 다 자기 길로 돌이키며 어디 있는 자이든지 자기 이만 도모하며 ◇ 피차 이르기를 오라 내가 포도주를 가져오리라 우리가 독주를 잔뜩 먹자 내일도 오늘 같이 또 크게 넘치리라 하느니라 (사 56:9-12)
“파숫군”이라고 불렸던 자들이 있습니다. 알다시피 구약성경에서 “파숫군”이란 영적인 지도자들을 가리키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위 구절은 말씀합니다. 9절같은 경우는 짐숭들이 와서 그들을 삼킬 것이라고 합니다. 파숫군의 히브리어 뜻에는 ‘보는 자’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구약에는 “중보기도자”내지는 “예언자”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중보기도하는 일과 예언하는 일은 함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되면 기도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백성들로 하여금 보게할 자들이 위 구절에는 “벙어리”라고 합니다. “누운 자”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말해야할 자, 보아야할 자, 하나님께 고해야할 자들이 소경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벙어리가 된 것입니다. 11절에는 그들이 그렇게 된 이유를 설명하면서 탐욕이 가득한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탐욕이 가득하니까 보질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길이 가려져 있습니다. 문제가 매우 심각했다고 합니다. 직책이 파숫군인데도 보질 못하는 것은 매우 심각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자신들은 자신들이 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더욱 문제입니다. 자신들은 진리의 길에 서 있다고 믿고 있었지만 보질 못합니다. 여러분, 율법주의에 빠지면 못 봅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런 자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소경이라고 하셨습니다. 보지 못하면서 본다고 믿으니 더욱 문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보지 못하는 것은 탐심과 연관이 있습니다. 예레미야 6장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그 땅 거민에게 내 손을 펼 것인즉 그들의 집과 전지와 아내가 타인의 소유로 이전되리니 ◇ 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남하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 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아니할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않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지는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하리니 그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 ◇ 내가 또 너희 위에 파숫군을 세웠으니 나팔소리를 들으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듣지 않겠노라 하였도다 ◇ 그러므로 너희 열방아 들으라, 회중아 그들의 당할 일을 알라 ◇ 땅이여, 들으라 내가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이것이 그들의 생각의 결과라 그들이 내 말을 듣지 아니하며 내 법을 버렸음이니라 ◇ 시바에서 유향과 원방에서 향품을 내게로 가져옴은 어찜이뇨 나는 그들의 번제를 받지 아니하며 그들의 희생을 달게 여기지 않노라 ◇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이 백성 앞에 거침을 두리니 아비와 아들들이 한 가지로 거기 거치며 이웃과 그 친구가 함께 멸망하리라 (렘 6:12-21)
여기서도 하나님께서는 지배자들을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왜 심판하시는 걸까요? “탐남”이 원인입니다. 13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들은 선지자들의 말을 들었음에도 듣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예배에 대한 열정도 있었습니다. 시바와 원방에서 제사에 쓸 예물을 들여온 것을 보면 열정이 대단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그들은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 듣지 않았을까요? 그 음성이 하나님의 음성인 줄 몰랐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길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탐심이 가득했기에 하나님의 길을 몰랐습니다. 당시에, 심판이 문 앞에 와 있었지만 목회자들은 “평화라, 축복이라”만 외치고 있었습니다. 아, 얼마나 무서운 현실이었을까요?
탐심이 가득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어떤 분은 제 설교를 듣고 이런 말을 했습니다. “복을 외친 한국교회 강단 치고 부흥 안된 강단 있으면 나와보라고 그래” 이렇게 반격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복이란 성경적 의미에서의 복이어야 합니다. 그분이 진정한 복의 개념을 이해하고 말을 했더라면 좋았을 텐데요. 성경적인 복을 말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탐심을 이루기 위한 교회성장이 목적이 되어 한 말이라면 이것이 기복신앙입니다.
우리 모두 한국교회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저는 지금 교회들을 공격하고 있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한국교회를 위해 애통하며 기도합니다. “하나님, 한국교회 강단에서 기복신앙이 끊어지게 하옵소서”라고 말입니다. 어떤 선배 목사님이 후배 목회자들을 위해 한 말입니다. “여러분, 교회를 개척하거든 처음에는 죄에 대해서 설교해서는 안됩니다. 복에 대해서 설교하셔야만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부흥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잘 돌아갑니다. 헌금하면 복받는다고 해야 합니다. 예수믿으면 복받는다고 설교하십시오.” 아, 그러나 이것은 정확하게 기복신앙입니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설교입니다. 비슷하지만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 가운데 죄를 이길 능력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성경은 죄를 이길 능력이 성도와 교회 가운데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기복신앙이 원인입니다. 기복신앙에 빠져 있으면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길을 모르기 때문에 죄를 이길 생명력을 공급받지 못합니다. 기복신앙에 빠져 있으면 설교를 들을 때에는 은혜가 될지 모르지만 돌아서면 금방 잊어버립니다. 전혀 안보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기복신앙의 뿌리에는 아담적인 본성이 있습니다
기복신앙의 뿌리에는 아담적인 본성이 있습니다 사단은 우리의 아담적 본성을 이용합니다. 아담적 본성은 자기가 자신을 어떻게 보장해 보려고 하는 가치관입니다. 아담적 본성은 모든 범죄의 원인입니다. 아담적 본성은 자아를 충동질하여 자기를 기쁘게 하려고 하며, 자기를 과신하게 하며, 교만하게 만듭니다. 자아의 작용의 결과들입니다. 자기가 자신의 인생을 책임져 보려고 하는 생활양식들입니다. 여기서 기복신앙이 나옵니다. 이런 가치관에서 설교가 나오면 모두 끝장입니다. 기복신앙의 가치관은 신학공부를 많이 했건 그렇지 않건 관계없이 나타나는 가치관입니다.
사람들은 미래를 위해
오늘 쌓아두는 일에 몰두합니다
사람들은 왜 쌓아놓고 살려고 할까요? 아담적 본성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먼저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했는데 사람들은 쌓아놓고 살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오늘 먹을 것이 있어도 여전히 불안하여 내일 먹을 것까지 구합니다. 아니 평생 먹을 것을 오늘 쌓아놓으려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삶이란 그분이 우리의 생활을 책임져주는 삶입니다. 주기도문은 “나라이 임하옵시고”라는 한 줄의 언어로 압축할 수 있다고 신학자들은 말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당신의 나라를 보기 원합니다”입니다. 이 말은 “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를 원합니다”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될 때 하늘에서 이루어진 뜻이 땅(내 삶)에서 이루어질 것이며 일용할 양식, 죄용서, 시험에 안 들어감, 등등의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뜻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면서 “하나님, 전 오래 쓸 것을 구하지 않겠습니다. 하루하루 양식주시는 것으로 살겠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오래 쓸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주님이 주실 것을 신뢰하며 살겠나이다”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통치 안에서 다른 사람을 용서한 것처럼 “나의 죄를 용서하옵소서”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통치 안에 들어가면 당연히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저를 보호해 주실 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로서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쓸 것을 채우실 것을 신뢰하며 나아가는 믿음이 주기도문에 담겨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물질부분을 반드시 다루십니다
물질과 관련하여 하나님께서 우선적으로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물질에서 마음을 떼어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하시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래야 자신들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가 다루어지지 않으면 물질과 하나님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헤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이 부분을 먼저 다루십니다.
자신이 자신의 미래를 책임져 보려고 하는 자세, 더 많은 것을 쌓아보려고 하는 자세, 그 뒤에 사단이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에 잘 나옵니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靈)이라 ◇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엡 2:2-3)
이처럼 기복신앙 뒤에는 사단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복신앙을 심판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복신앙을 심판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복신앙을 심판하시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성품 때문입니다.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출 34:14)
질투는 하나님의 이름중 하나입니다. 재미있지 않나요? 하나님의 이름이 질투라니요. 누가 만일 질투라는 이름을 가졌다면 아마도 어려서부터 많은 놀림의 대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질투의 의미는 인간의 질투와 다릅니다. 인간의 질투는 범죄로 끝나지만 하나님의 질투는 하나님의 것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려는 하나님의 열심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지키시고 보호하십니다. 질투는 다른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열심”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사 9:6-7)
여기서 “열심”은 질투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질투는 하나님의 것을 스스로 지키시려는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질투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을
하나님께서 지키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택하시고 자기에게로 인도하셨습니다. 우리들이 자격이 있어서 자녀가 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죄악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죄와 사망에서 우리들을 건지셨습니다. 우리들을 당신의 기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풍요하신 삶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지키시고 우리에게 신랑이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교회를 향해 질투하십니다. 교회를 향한 열심이 있습니다. 교회는 주님의 신부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주님을 구하고 찾고 열망하되 나누어지지 않은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초점이 나누어지는 것을 하나님은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나답과 아비후의 예를 봅니다. 또 사도행전에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예를 봅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에 의해 죽임을 당합니다. 악한 일을 하다가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 전자는 예배하다가 후자는 예물을 하나님께 드리다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진 걸까요? 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영광으로 임하시면 그곳에는 하나님의 기준이 높여집니다. 말세지말에 하나님의 기준을 높이십니다. 이유는 영광으로 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특히 하나님이 세워놓으신 비전이 있으면 더욱 다루십니다. 하나님을 열망하고 사모하는 가운데 있다면 기준을 더욱 높이십니다. 그래서 그들은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길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질투를 몰랐습니다.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늘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히 12:7-13)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히 12:28-29)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들을 징계하십니다. 사랑하는 자들에게 있는 기복신앙을 다루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영광으로 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편으로 돌이키게 하시기 위해 그렇게 하십니다. 여러분, 다시 말씀드립니다. 기복신앙에 빠져있으면 절대로 하나님의 길을 보지 못합니다. 기복신앙에 있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리에 설 수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나누어지지 않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리에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 (약 4:5)
기복신앙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야 합니다
기복신앙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6장 7절부터 19절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거로 증거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를 명하노니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까지 점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이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오 ◇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지어다 아멘 ◇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위 말씀은 기복신앙에 빠지면 미혹될 수 밖에 없는 현실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복신앙에는 나누어진 마음이 있습니다. 따라서 기복신앙에는 징계가 있습니다. 그 결과 기복신앙에는 엄청난 억압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세상에 살면서 억압이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의지해야할 대상이 하나님이지 물질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기복신앙은 물질을 의지하는 신앙입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화 있을진저 패역한 자식들이여 그들이 계교를 베푸나 나로 말미암아 하지 아니하며 맹약을 맺으나 나의 신으로 말미암아 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그들이 바로의 세력 안에서 스스로 강하려 하며 애굽의 그늘에 피하려 하여 애굽으로 내려갔으되 나의 입에 묻지 아니하였으니 죄에 죄를 더하도다 ◇ (1절과 같음) ◇그러므로 바로의 세력이 너희의 수치가 되며 애굽의 그늘에 피함이 너희의 수욕이 될 것이라 (사 30:1-3)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애굽을 의지하였습니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심판을 겪었습니다. 엄청난 억압입니다.
한 사람이 꾸짖은즉 천 사람이 도망하겠고 다섯이 꾸짖은즉 너희가 다 도망하고 너희 남은 자는 겨우 산꼭대기의 깃대 같겠고 영위의 기호 같으리라 하셨느니라 (사 30:17)
하나님의 백성 한 명 앞에 적군 100명이 도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뒷받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보면 오히려 정반대의 현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 구절은 엄청난 억압이 기복신앙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대저 이는 패역한 백성이요 거짓말하는 자식이요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자식이라 ◇ 그들이 선견자에게 이르기를 선견하지 말라 선지자에게 이르기를 우리에게 정직한 것을 보이지 말라 부드러운 말을 하라 거짓된 것을 보이라 (사 30:9-10)
여기서도 죄를 정직하게 대면하려고 하지 않는 모습을 봅니다. 소경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안보이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진리만이 능력인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저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 (사 30:18)
보십시오. 하나님만이 유일한 열망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서라고 하십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자리에 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시온에 거하며 예루살렘에 거하는 백성아 너는 다시 통곡하지 않을 것이라 그가 너의 부르짖는 소리를 인하여 네게 은혜를 베푸시되 들으실 때에 네게 응답하시리라 (사 30:19)
하나님이 아니면 설 수 없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만 유일한 초점을 맞추고 하나님만을 전존재로 사랑하는 자리에 서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께로 돌이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다음과 같은 일들이 벌어집니다.
주께서 너희에게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주시나 네 스승은 다시 숨기지 아니하시리니 네 눈이 네 스승을 볼 것이며 ◇ 너희가 우편으로 치우치든지 좌편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정로니 너희는 이리로 행하라 할 것이며 ◇ 또 너희가 너희 조각한 우상에 입힌 은과 부어만든 우상에 올린 금을 더럽게 하여 불결한 물건을 던짐 같이 던지며 이르기를 나가라 하리라 ◇ 네가 땅에 뿌린 종자에 주께서 비를 주사 땅 소산의 곡식으로 살찌고 풍성케 하실 것이며 그 날에 너의 가축이 광활한 목장에서 먹을 것이요 ◇ 밭가는 소와 어린 나귀도 키와 육지창으로 까부르고 맛있게 한 먹이를 먹을 것이며 ◇ 크게 살륙하는 날 망대가 무너질 때에 각 고산 각 준령에 개울과 시냇물이 흐를 것이며 ◇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칠배가 되어 일곱날의 빛과 같으리라 (사 30:20-26)
“스승”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의중과 의도를 다시 보이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 이거였구나”라고 깨닫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22절은 우상숭배를 버린다는 말씀입니다. 우상을 불결히 여기는 일들이 벌어진 것입니다. 기복신앙을 버리고 신앙의 본질에 돌아서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바들을 다시 회복시키시며 이루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30절입니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보십시오. 주님 안에 다 있습니다. 그러니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십시오. 주님이 우리의 왕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분이 하시게 하십시오. 정직하게 하나님을 대면하여 서십시오. 말씀을 직면하십시오. 현실을 바로 보십시오. 그리고 돌아서십시오.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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