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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하나님의 자원으로 사는 삶과 자기자원으로 사는 삶

시리즈설교/하나님자원으로사는삶

by 발의무리 2018. 2. 8.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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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장 하나님의 자원으로 사는 삶과 자기자원으로 사는 삶

 

 

십자가에 의한 삶을 살 때

하나님의 자원으로 살 수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유한하며, 하나님만이 홀로 무한한 존재임을 발견할 때 하나님을 찾는 법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나온 뒤 그들은 하나님을 열심히 찾은 것 같지 않습니다. 다만 창세기 4장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은 때가 에노스 때부터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에노스라는 말에는 하나님은 무한하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창세기 11장에는 인간들이 스스로를 지켜보려고 바벨탑을 쌓았던 모습을 보여줍니다. 자기들끼리 헤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스스로를 지켜보려고 탑을 쌓았던 것입니다. 바벨탑 사건은 하나님의 진노를 샀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은 바벨탑을 무너뜨리십니다. 하나님은 바벨탑을 무너뜨리신 다음, 하나님의 자원으로 살아가는 삶을 가르치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택하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은 후,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땅을 바라보며 날마다 걸어가야만 하는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즉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삶을 배웠던 것입니다. 자기의 힘으로 살아가는 삶이 더 이상 아니었습니다. 자기 계획대로 밀고 나가는 삶이 더 이상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하나님을 위하여 단을 쌓았습니다. 전에는 자신을 위해서 살았던 삶이었지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살아가는 법을 우리들에게 보여준 것입니다. 세월이 흐른 뒤, 애굽 땅에서 종살이하던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구출해 내실 때, 하나님께서는 애굽땅을 철저하게 징벌하시면서 당신이 얼마나 위대하신 신인가를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셨다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가르치기 위해서 그리 하셨던 것입니다.

 

광야란 하나님의 자원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치기에 안성맞춤이었습니다

 

출애굽 사건 후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인도하셔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믿음을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자원으로만 사는 법을 가르치시기 위해 그들을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광야란 하나님의 자원으로 사는 법을 가르치기에 안성맞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광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신 가장 주된 목적 중 하나는 자기자원으로 사는 거짓신앙을 파괴하고 하나님의 자원으로 사는 법을 훈련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타락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전형적인 삶의 스타일은 인본주의입니다. 자기의 능력과 재능을 믿고 사는 삶의 스타일입니다. 예수를 믿고나서도 이 오리지날 신(Original Sin)은 여전히 속에 남아 올바른 신앙생활의 길, 참된 하나님의 길을 찾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광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인도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사는 법을 배우게 하시는 것입니다.

 

신명기 81절부터 20절입니다.

 

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사십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느니라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도를 행하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곳은 골짜기에든지 산지에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들의 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너의 먹는 식물의 결핍함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로 네게 주셨음을 인하여 그를 찬송하리라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게 되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물을 굳은 반석에서 내셨으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좇아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정녕히 멸망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너희의 앞에서 멸망시키신 민족들 같이 너희도 멸망하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소리를 청종치 아니함이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억할 사실은 진정한 순종은 거짓신앙체계가 파괴된 에야 있게된다는 사실입니다. 거짓신앙이 파괴되지 않는 곳에는 진정한 순종도 없습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인도하신 목적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2절에 보면 이는 너를 낮추시며라고 나옵니다.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통해 겸손하기를 원하셨습니다. 3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위 말씀은 예수님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 인용하셨던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오늘날 이 구절을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 영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하고 육신은 양식을 먹어야 한다.”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방금 설명한 의미 그 이상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그곳으로 인도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를 더 담고 있는 걸까요? 알다시피 광야라는 곳은 자기 자원이 없는 곳입니다. 자기의 것으로 살려고 해도 살 수 없는 곳이 광야입니다. 광야는 자기 자원이 없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리로 인도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주리게 하시고 목마르게 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나요? 하나님의 자원으로만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자원으로 살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원으로만 살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만 바라보는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를 때에야 그들은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 등등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만이 자원이 되는 삶,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순종하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원으로 채우시는 삶, 이 삶을 사는 법을 배우게 하시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인본주의를 파괴시키고 창조 때에 의도하신 그리고 구속으로 더욱 더 확실해진 하나님의 자원으로 사는 법을 훈련시키기 위해서 광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끝내 성공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손만을 구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서는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시는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젖과 끌이 흐르는 가나안에 들여보내신 다음 그들이 타락하자 그들을 심판하셔서 앗시리아와 바벨론 땅으로 포로로 잡혀가게 하셨습니다.

 

예레미야 213절입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위 구절은 하나님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수의 근원으로 소개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버렸다고 합니다. 위 구절은 매우 중요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입니다. 이것의 의미는 그들이 자기 자원으로 살려고 했던 것을 뜻합니다. 자원이 무한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자기 자원으로 살려고 했습니다. 자신들을 보호하시고 약속하신 땅에 들여보내신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는 스스로 생수를 얻어보려고 노력하는 삶을 택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결국 심판에 이른 비극의 역사를 보여줍니다.

 

자기자원으로 사는 삶을 택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침내 심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자원으로 사는 삶이 아닌 자기 자원으로 사는 삶을 택한 이스라엘은 결국 망하게 됩니다. 이게 성경이 말하는 아담적인 본성대로 살았던 사람들의 종말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누가복음 153절 이하에서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주었더니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 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타락한 본성, 아담적인 본성, 타락한 자아 모두 같은 말들입니다. 이 본성이 탕자의 비유에서 등장합니다. 탕자의 비유는 하나님의 마음과 인본주의, 그리고 율법주의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비유입니다. 인본주의가 있으면 아버지의 마음을 알 수 없게 됩니다. 인본주의는 하나님의 의도와 뜻을 모릅니다. 큰아들과 작은아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었던 사고방식은 잘하면 상급, 못하면 벌이라는 선입견입니다.

 

작은아들이 집에 있을 때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스스로 독립해 보겠다고 집을 떠난 후에는 많은 문제가 일어납니다. 오늘날도 스스로 살아보겠다고 하나님을 떠난 사람 치고 잘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담 역시 고생과 땀을 흘려야만 먹을 수 있었습니다. 아담에게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생수를 만들어 보겠다고 살아보았지만 결과는 포로신세가 되어 다른 나라에 잡혀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포로로 잡혀가는 형상이 얼마나 비참했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식이 자기 눈앞에서 죽는 모습을 보았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자기 눈앞에서 말 할 수 없는 장면을 보았을 겁니다. 엄청난 고통을 겪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탕자 역시 집나간 이후 비참한 인생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돌이키고 돌아오니까 회복이 있게 되었습니다.

 

죄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담적인 본성이 처리되지 않으면 거짓 신앙체계에 빠지게 됩니다. 아담적인 본성에 관해 바울은 로마서 3장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3:23)

 

죄가 무엇일까요? 죄란 하나님을 삶 속에서 인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제 힘으로 살아보려고 하는 것이 죄입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 없이 제 스스로 살아가는 것이 죄입니다. 그렇다면 교만이란 하나님 없이 사는 것입니다. 진정한 겸손이란 하나님 없이는 아무 일도 못하는 것을 깨닫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못사는 삶이 겸손한 삶입니다.

 

자아가 하는 일은 자기변호입니다

 

아담적 본성이란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아가 나옵니다. 자아가 하려고 하는 일은 몇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자기를 기쁘게 하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기쁨과 복지에는 관심이 없고 항상 자기에게 관심을 가지는 삶의 양식이 자아의 특징입니다. 이 일을 위해 자아는 자신의 어둠을 변호하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 마음속에는 자기 변호사가 다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서 공격을 많이 받은 사람은 더욱 강력한 변호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변호사가 문제입니다. 아담적 본성을 합리화하기 때문입니다. 죄를 짓더라도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자신을 연민하게 만들어놓습니다. 아담적 본성을 버리고 하나님의 자원으로 사는 삶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속에 있는 자기 변호사가 깨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정직한 회심이란 개인이 자기 변호사의 변호를 거절하는 삶을 살기로 작정할 대 이루어집니다.

 

또한 아담적인 본성은 이처럼 항상 자기를 기쁘게 하려고 합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려는 속성 때문에 죄를 지으면 속상해합니다. 자기의 못된 모습을 보고 싶지 않으니까요. 이것이 자기를 기쁘게 하려는 속성인 자아입니다.

 

자아가 하는 일은 자기과신입니다

 

자아가 하려는 일 둘째는 자기과신입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다가 일이 잘 되면 사람들은 자기를 신뢰하게 됩니다. “역시 나였어하면서 말입니다. 흔히 십자가의 복음을 따라오다가 믿음에 의한 삶이 잘 안되는 이유는 이것 때문입니다. 자기를 신뢰하기 때문에 믿음에 의한 삶이 잘 안됩니다. 사람들은 보통 어려운 일을 만나면 이렇게 생각합니다. “, 이제 주님께 맡겨야지.” 이렇게 생각한 후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맡깁니다. 그런데도 이상한 것은 기도하는 순간은 짐을 내려놓았던 것 같은데 시간이 흐를수록 여전히 어깨에 짐을 짊어지고 있는 자신을 깨닫게 됩니다.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아니, 이게 또 웬 짐이지?”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기도할 때에는 짐을 십자가 아래 내려놓았을지 모르지만 슬그머니 다시 짐을 짊어진 것입니다. 흔히,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이 무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우,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는 자기를 신뢰하는 일에 너무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더 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에는 십자가 아래 짐을 내려놓았다가 기도가 끝난 후에는 다시 짐을 짊어지고 돌아간 결과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자신을 부인하고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기를 부인하기보다는 자기를 과신했습니다. 자기를 지나치게 신뢰했습니다. 끝내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기에 이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자기과신은 주님을 좇아가는 삶에 있어서 최대의 적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자아가 하는 일은 자만심입니다

 

과신이 굳어지면 자기교만이 됩니다. 다른 말로 자만심입니다. 자기 스스로를 높여놓는 자세입니다. 자만심이 오면 배우려는 자세가 사라집니다. 또한 자만심이 생기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정직하게 대면하려고 하질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선입견을 가지고 접근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도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성경을 많이 알았지만 그들 머리속 편견과 선입견 때문에 주님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주님이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패러다임 즉 사고방식대로 오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들은 자기들 생각과 다른 모습으로 사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에이, 아니구먼하면서 돌아섰습니다.

 

자아의 하는 일은 자기노력입니다

 

자기노력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려는 시도 역시 여기서 나옵니다. 같은 뿌리 속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과신’, ‘자기변호’, ‘자만심’, ‘자기노력이 모두가 아담적인 본성과 연관이 있습니다. 아담적인 본성은 우리 가운데에서 철저하게 배격되어야 합니다. 자기를 자기 스스로 보장하려는 자세에서 인본주의와 율법주의, 기복신앙이 나옵니다. 사람들이 물질에 관심을 두는 이유는 또 다른 보장을 위해서입니다. 물질을 더 많이 쌓아두려는 목적은 또 다른 보장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는 자기를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신뢰하려니까 스스로 무언가를 많이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더 많이 모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믿음에 의한 삶은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삶입니다.

 

주기도문의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의미는

내일의 하나님의 자원을 오늘 주옵소서뜻입니다

 

주기도문은 아래와 같이 시작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이 부분은 하나님의 이름이 온 땅에서 높임을 받으시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삶이나 우리의 순종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 부분은 사단은 이미 하늘나라에서 쫓겨난 일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사단이 쫓겨나자 하늘에서는 온전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는 일을 전제로 하는 말씀입니다. 그런 것처럼 이 땅에서도 하늘에서처럼 온전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가지고 중보기도를 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마치 열두 대문 안에 꼭꼭 숨어계신 분인양 오해하여 스스로를 자해하며 기도하는 일을 버리고 당당하게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서라는 말씀입니다. 이 나라와 온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당당하게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이 나라와 온 세상 가운데에서 높임을 받으시게 해주옵소서라고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원한을 풀어주세요. 우리의 막힌 태를 열어주세요라고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영적인 전쟁 가운데에서 승리를 주옵소서라고 밤낮으로 눈물로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기도를 은밀하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기도를 듣고싶어 하십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당연한 성도의 권리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이 권리를 갖고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성령을 구하는 기도는 성도들의 당연히 구할 기도입니다. 이 나라와 열방 가운데 하나님의 성령이 부어지며 하나님의 영광을 온 교회 가운데 부어지게 해달라는 기도는 당연한 권리의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것을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 우리의 원한을 풀어주옵소서. 하나님, 우리를 성령으로 방문해 주옵소서.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가 이루어지게 해주옵소서.”

 

주기도문에서 자신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신 부분은 크게 세 부분이 있습니다. 그중 처음에 일용할 양식에 대해서 주님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셨습니다. ,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가 갖는 의미는 이렇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는 히브리어 단어 속에는 내일 먹을 양식을 오늘 달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내일의 양식을 오늘 달라는 의미가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기도의 진정한 뜻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처음 창조하셨을 때에는 억압의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죄가 세상에 들어온 후 세상은 억압과 저주로 인해 땅이 엉겅퀴를 내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구약에서 우리들은 율법주의 사고관이 깨어지면 깨어질수록 가난의 저주들이 풀려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난의 저주라던가 억압적인 환경 등도 가만히 보면 어둠의 세력과 연관이 있습니다. 물론 오늘날 자주 등장하는 예수믿으면 다 복을 받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율법주의 사고관이 깨어지면

가난과 저주, 억압에서 풀려납니다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의미는 이렇습니다. 지금 사람들 가운데 사단의 영향으로 가난의 저주와 억압적인 환경들이 만연되어 있기 때문에, 당연히 먹을 양식을 위해서 구하는 것을 포함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임하는 내일에 있게될 하나님의 권세를 지금 주셔서 하나님의 자원으로 살게 하시고, 지금 은혜와 능력을 주셔서 현시점에서 이기게 하옵소서. 지금 이 시간에 가난의 저주와 억압적인 환경이 끊어지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지도하심이 우리 생명 가운데 있게 하시고 열매맺는 삶이 나타나도록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드려지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 일용할 양식은 하루만큼 먹을 양식의 의미를 넘어서 내일 양식을 오늘 달라는 말입니다. “오늘의 억압적인 환경을 이기기 위해 내일의 하나님의 자원을 오늘 주옵소서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내일의 하나님의 자원이란 다가올 하나님 나라, 온전히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기도가 주기도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만나를 주셔야 살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만 살겠다고 고백하는 기도가 주기도문입니다.

 

영적 분별력을 갖지 못하는 이유는

아담적 본성이 다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기준을 보지 못하는 이유는 아담적인 본성이 다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짓 신앙관의 영향 때문입니다.

 

믿음생활이란 인격체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입니다. 그런데 아담적인 본성은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욱 신뢰하게 만듭니다. 어떤 분은 믿음은 영어로 risk 라고 합니다. 모험이란 의미인데 오늘날 성도들은 모험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자기 능력으로 살면 되는데 위험부담을 느끼면서까지 모험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자기 능력으로 해결 가능한 것만 찾아가면서 살아갑니다. 굳이 신앙의 모험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답이 나오는 수준에서만 머물려고 합니다. 여기에 거짓신앙관들이 자리잡는 터가 준비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의한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는

자아가 십자가에서 이미 다루어졌다는

진리를 만나야하는 필연성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아담적 본성자아가 다루어질 수 있는 걸까요? 이것들이 다루어져야만 신앙의 본질인 친밀함이 열리는데 말입니다. 자아의 문제가 다루어져야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을 수 있는데 말입니다. 바로 여기에 십자가에 의한 삶이 있습니다. 아담적 본성이 다루어지는 일과 십자가에 의한 삶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자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미 다루어졌다는 진리를 만나는데 해결책이 있습니다.

 

많은 경우 자아를 죽여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설교시에 자아를 죽여라라고 외칩니다. 그런데 기억하십시오. 이미 자아는 죽었습니다. 어디서?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사실 많은 성도들이 자기의 자아를 죽여보려고 애를 무진장 씁니다. 그러나 기억할 사실은 자아는 이미 죽어있더라입니다.

 

문제는 여기 있습니다. 자아를 자신이 죽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담적 본성은 죽여 가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이미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보는 것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만약 그 사실을 보지 못하면 자아의 문제는 영원히 해결책이 보이질 않습니다. 십자가를 진정으로 만난 사람들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이미 죽었나이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자아가 이미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많은 성도들이 이렇게 답변합니다. “, 글쎄 머리로는 알겠는데 실제를 잘 모르겠어요. 아무리 보아도 나는 여전히 살아있는 것 같아서많은 성도들이 자주 실패하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절박하게 구합니다. “하나님, 제발 절 좀 죽여 주시옵소서.” 많은 성도들이 죄책감을 극복하기 위해 절박하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가 살아있어서 문제입니다. 저를 죽여 주시옵소서.”

 

안타까운 현실은 많은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이룩한 일들을 잘 모르고 살아간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이론으로는 다 압니다. 그러나 실제의 삶에서 성령의 조명으로 깨달으며 살진 못합니다. 그래서 여전히 죄책감과 살아있는 듯한 자신의 자아의 문제 때문에 고민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6:8-10)

 

성경은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우리보고 받아들이라고 말씀합니다. 믿으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여전히 사람들은 그 사실을 선명히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기-의를 가지고 접근을 시도합니다.

 

이런 경우, 입술로는 자기가 죄인이라고 고백하지만 속으로는 자신이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라고 여깁니다. 실제로 많은 성도들이 자기 속에 선한 것이 하나도 없음을 보지 못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못 봅니다. 자신은 그래도 괜찮은 구석이 있다고 믿습니다. 변화되어야할 부분이 있지만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라고 여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직 십자가의 공로로만 의롭게 되었다는 진리를 잘 모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하나님께서 의롭게 쓴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공통점과 부흥이 일어날 때마다 공통적으로 있었던 사실에 대해 언급하면서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진리가 재발견되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이 교리는 오래 전부터 사람들 모두 알고 있었지만 그 의미가 가려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나 요한 웨슬리가 좋은 예입니다.

 

요한 웨슬리 같은 경우는 자신의 힘으로 거룩해져보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릅니다. 철저하게 자기 관리를 했습니다. 별명이 메소디스트(Methodist)라고 불리울 정도였으니까요. 별명처럼 규칙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느 날 자기가 구원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데서 시작되었습니다. 요한 웨슬리 자신은 누구보다도 주님을 잘 믿었노라고 여겼는데 어느 날 그게 아닌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자기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여겼는데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본 것입니다. 자기가 지독하게 못된 사람이며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전혀 없는 존재였음을 보았습니다. 자신은 하나님 앞에 내세울만한 것이 하나도 없는 자임을 알았습니다. 마침내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나는 구원받지 못했구나.” 구원받지 못한 사실을 깨닫고 난 요한 웨슬리의 마음은 구원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찼습니다. 요한 웨슬리는 훗날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이렇게 자신의 모습을 본 후에만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이를 수 있다고 고백합니다. 자신 속에 어떤 선함도 없음을 발견한 후에야 자신에게 구원이 필요한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꽤 괜찮은 사람으로 여깁니다. 아담적 본성 때문입니다. 메시야를 구주로 영접하기는 하였지만, 자신의 모습이 성령의 조명으로 완전히 비춰지지 않았기 때문에, 구원받은 후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자신은 꽤 괜찮은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특히 행위 면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난 사람들은 자신들을 참으로 괜찮은 사람으로 더욱 여깁니다. 이런 경우, 성령의 빛이 비쳐온 다음에야 자신이 지독하게 교만한 사람임을 알게 됩니다. 의로운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여겼던 사람들이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깨달으려면 성령의 조명이 필수입니다. 성령의 조명만이 사람의 진정한 모습을 알게 하실 수 있습니다.

 

성령이 내주하시는 특징은

하나님을 향한 열망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를 영접한 후 구원을 받고 나면 영적인 본능이 생겨납니다. 즉 하나님을 향한 열망이 생겨납니다. 성령이 내주하시기 때문에 생기는 일입니다. 영적인 본능을 따라 행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다루시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또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사람들을 다루십니다. 이렇게 다루시는 이유는 구원받고 난 뒤에도 그리스도인들이 육적인 본능을 따라 행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여전히 육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육과 영이 다투기 때문에 성령님은 우리를 다루시기 시작합니다.

 

성령께서 다루시는 방법이 있습니다

환경과 말씀 그리고 성경이 그것입니다

 

이 때 성령님께서 사람들을 다루시는 통로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환경과 말씀, 성경이 그것입니다.

 

첫째, 환경을 통해서 사람을 다루시는 방법은 자신이 꽤 괜찮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영적인 본능을 가지고 하나님을 향한 열망이 이끄는 대로 살 때 하나님께서 많이 사용하시는 방법입니다. 즉 환경을 통해 자기 속에 아무런 선함도 없음을 보이시는 방법입니다. 환경을 통해 자기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들추어내십니다. 제 아내가 언젠가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도 당신과 결혼하기 전에는 꽤 괜찮은 여자였어요

 

제 아내는 처녀 시절부터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체계적으로 해온 사람입니다. 결혼 후 어느 순간부터 하나님이 다루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아내에게 있던 완벽주의를 깨트리시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내를 한 구석으로 몰아가십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하도 다루시니까 어느 날 아내가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구원도 받지 못할 것 같아요

 

이 고백이 의미하는 바는 현재 하나님에 의해서 자신이 다루어지고 있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와 함께 살게 하시면서 하나님께서는 아내를 다루신 것입니다. 자기 속에 아무런 선함이 없음을 보게 하신 것입니다. 당연히 아내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기본적인 진리이니까요. 그러나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자신의 속에서 자기가 괜찮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비춰주시니까 자기에 대해서 절망합니다. 추락합니다. 그 시점에서 자신을 돌아보니까 구원받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 시점에 아내의 초점은 자기-의에 가 있었던 것입니다. 한 편에서는 그래도 십자가의 공로로 구원받을 수 있어라고 생각이 들었지만 또 다른 한 편에서는 자기-의를 의지하고 있었기에 난 구원받지 못할 것 같아요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아내는 이렇게 터널 속 같은 곳에 갇혀있는 느낌이 들다가 어느 순간 빛이 비쳐오더니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하게 되더라고 말을 이었습니다. ‘주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사실이 선명하게 비춰왔습니다. 그때 아내는 , 이래서 십자가만 의지해야 하는구나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십자가에 의한 삶의 의미를 보게 된 것입니다.

 

보통 웬만한 성도들은 십자가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다 압니다. 그러나 모두 다 알고는 있지만 그 차이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절망적인 경험을 해 본 사람과 안 해본 사람에게서 크게 나타납니다. 자신이 대해 절망적인 경험을 한 사람들은 모든 일에서 있어서 자기가 하려고 하는 노력을 내려놓게 됩니다. 자기노력을 포기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내 공로가 아니라 오직 주님의 은혜로만 서는 것을 발견하여 사는 삶입니다. ‘오직 은혜에 의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 내려놓는다는 의미를 보게된 것입니다. 이후의 모든 삶에서 십자가에서 이룩하신 그 은혜의 공로를 의지하여 살기 시작합니다.

 

성령의 빛이 비쳐오면

자신의 무능력함과 하나님의 능력을 봅니다

 

성령의 빛이 비쳐오면 크게 두 가지가 발견됩니다. 빛이 비취면 철저한 자신의 무능력함과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을 봅니다. 빛을 본 사람들은 모든 일을 행함에 있어서 자기노력으로 하지 않고 주님의 은혜를 입으려고 합니다.

 

어떨 때 기도사역을 하다보면 이렇게 외치는 분이 있습니다.

 

왜 날 건드려! 건드리지만 않으면 난 좋은 사람이야! 왜 건드려 가지고 날 힘들게 하는 거야!

 

울부짖으면서 이렇게 외칩니다. 여러분, 우리 속은 하수도 구정물 모인 수채 구멍과 비슷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위는 맑아집니다. 더러운 오물찌꺼기들이 모두 다 밑으로 가라앉으니까요. 그러나 밑은 온갖 오물들로 가득합니다. 식혜 연상하시면 됩니다. 우리 속이 그렇습니다.

 

광야로 인도하시는 이유는

우리를 다루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광야로 반드시 인도하십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인도하셨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우리를 다루시기 위함입니다. 우리 속은 하수도 밑처럼 온갖 오물들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81절부터 6절입니다.

 

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사십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느니라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도를 행하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이 말씀은 성경을 잘 연구하여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힘이시며 하나님만이 생명인 것을 보게 하시려는 의도 때문에 하셨던 말씀입니다. 광야란 사람을 의지하지 못하게 하시려고 인도하신 곳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들을 똑같이 환경을 통해서 다루십니다.

 

괜히 어떤 사람이 여러분을 지금 힘들게 하고 있나요? 하나님이 다루시고 계시는 손길입니다. 하나님이 다루시면 마치 내 편이 없는 것같이 여겨집니다. 여기가도 어떤 사람이 여러분을 힘들게 하고 저기가도 다른 사람이 여러분을 힘들게 만듭니다. 이 때 조심해야 합니다. 그들과 부딪치면 상처만 받습니다. 그저 , 하나님이 지금 나를 다루시고 계시는구나여기시면서 즉각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준 가운데 즉각 서야 합니다.

 

우리가 좋은 사람이라고 자신을 생각하는 한, 가시같은 사람들이 옆에 붙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고 여기는 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공로를 의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아담적인 본성에 따라서 살아가려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루실 수밖에 없습니다. 아담적인 본성을 다루시기 위해 하나님은 이렇듯 막다른 골목으로 우리를 데려가시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들이 믿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들통이 납니다. 믿음 없는 자신을 보게된다는 말입니다. 그럼, 언제 들통나는 걸까요? 답은 광야입니다. 어려운 환경 가운데 들어가 보면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그 여부가 금방 들통납니다. 믿음이 있는 줄 알았는데 자기에게서 믿음 없는 상태가 보입니다. 자신을 못 보았을 따름이지 자기를 다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보게 하십니다. 성경은 선한 존재가 하나도 없다고 말하는데도 우리 스스로는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보지 못했을 따름이지 괜찮은 존재가 결코 아닙니다. 바울의 고백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3:)

 

그러나 그는 훗 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7:24)

 

하나님은 바울의 경우에도 환경을 통해 자기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들추어 내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좇아갈 때 광야의 과정은 반드시 거치는 과정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환경 속에 우리들을 집어넣으십니다. 우리를 빚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자원으로 사는 법을 배우게 하심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는 정직성입니다. 정직하게 하나님을 대면하여 서야 합니다. 하나님을 대면하면 할수록 이런 과정은 반드시 거칩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종들은 다 이 과정을 거쳤습니다. 한 사람도 예외가 없었습니다. 진실로 주님을 신뢰하고 주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게 하시면서도 이 과정을 지나가도록 하십니다.

 

광야를 피하면 또 다른 광야가 기다립니다

광야는 직면해야 빨리 끝나는 특성이 있습니다

 

어떨 때, 이 과정이 싫어 인간적으로 대처하려고 하는 버릇이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에이, 그 인간 만나지 않으면 되는 거지. 마주치지 않도록 피해가자. 미친개한테 물렸다 셈치자.” 그런데 기억하십시오. 다른 편으로 도망가면 다른 사람이 당신을 괴롭힐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이기 때문입니다. 도망가서 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광야는 도망가서 될 문제가 아닙니다. 부딪혀야 빨리 끝납니다. 직면해야 빨리 지나칠 수 있습니다. 도망가면 갈수록 또 다른 광야가 기다립니다. 대면하십시오. 정직하게 환경을 직면하십시오.

 

도망가거나 피하여 하나님 앞에 엎드리면 신기하게도 하나님께서는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그 부분을 지적하십니다. 성경을 읽어도 도망친 부분과 관련된 부분만 보입니다. 사람이 싫어 피해간 성도들에게는 사랑하지 않은 것은 죄입니다라는 성경구절만 눈에 띄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역사하신 것입니다. 성령님은 환경을 정직하게 직면하지 못한 여러분의 모습을 계속해서 비추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환경과 성경을 통해 다루십니다. 하나님이 다루시면 사람들은 마음이 불편해지면서 죽을 지경이 됩니다. 마치 생이빨을 뽑아내는 것만큼이나 고통스럽습니다. 자신은 좋은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아니니까요. 하나님이 지금 그 일을 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자신이 지독하게 못된 것을 보이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환경을 통해 다루십니다.

 

괜찮은 사람으로 자신을 생각하는 한

아담적 본성은 절대로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속에 어떤 선함도 없음을 보아야만 거짓신앙체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인본주의, 율법주의, 기복신앙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자기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한, 율법주의에 빠집니다. 진실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스스로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한, 아담적 본성은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많은 경우 속에 있는 자기변호사가 활동하면서 자기의 행위를 합리화시킵니다. “너처럼 착한 사람이 없어. 그 인간이 못된 것이지. 네가 잘못된 게 아냐. 사람을 잘못 만났던 거야. 너에겐 큰 책임이 없어.” 자신을 합리화시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을 참 잘도 듣습니다. 이 때 중요한 자세가 환경 잎에 정직하게 직면하여 서는 자세입니다. “하나님, 그렇습니다. 제가 그런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정직하게 대면하여 서면 자신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선함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자기에게 믿음이 없음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게 됩니다. 은혜를 구하게 됩니다.

 

유아원을 하시는 어떤 권사님이 계십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유아원 아이들이 말을 잘 듣지 않는다고 합니다. , 지금 하나님이 아이들을 통해 권사님을 다루시고 계시는 겁니다. 환경을 통해 다루시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여러분들이 엎드려 기도하려고 할 때 혹시 , 외식자여라는 내면의 소리를 들어본 경험이 없으십니까? , 대부분 이때에는 자기가 자기의 의를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는 일이 있은 다음에 들려오는 소리입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성령의 조명이 있기 전까지는 자신이 율법주의에 빠지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다루시면 우리 속에 정직성이 하나도 없음을 봅니다. 우리 안에 얼마나 율법주의 가치관이 가득한지를 알게 됩니다. 얼마나 자신이 완악한지 보입니다. 자신의 속을 보지 못하면 모릅니다.

다음은 예수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3:14-20)

 

라오디게아 교회가 자신의 실상을 보지 못하자 주님께서 하신 엄중히 하셨던 말씀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모든 것이 풍요로웠고 모자람이 없었으나 결정적인 실패의 원인을 가지고 있었는데 바로 자기 모습을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 주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에게 문을 열라고 당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광야를 거치셨습니다

 

히브리서 57절부터 9, 누가복음 423절과 24절입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원아 너를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증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의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도 광야를 거치셔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에게도 환경은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린아이처럼 광야를 대면해야 합니다. 피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다루심 앞에 직면해야 합니다. 우리 속에 선함이 없음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 속에 선함이 없음을 동의해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만 하실 수 있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이럴 때라야 독생자의 십자가만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능력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유일한 처방임을 보는 것입니다. 넘어지더라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좌절할지라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항상 깨어있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보좌 앞으로 나아갈 때에는 매순간 언제나 십자가를 바라보게 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위치를 알게 됩니다. 십자가의 공로가 아니면 자신은 전혀 의로워질 수 없는 존재임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설 수 있는 자격은 우리에게서 나오지 않습니다. 자기자원이 아닌 오직 인격체이신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보좌 앞에 설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의한 삶입니다. 어느 누가 여러분을 힘들게 하고 환경이 여러분을 어렵게 만들어도 그러나 더 이상 그것 때문에 힘들어하지 않습니다. 보좌 앞에 엎드려 십자가를 바라보고 여러분이 구원받았던 포지션(Position,위치)을 바라보면 고단함은 완전히 물러갑니다. 원래 여러분이 있었던 자리를 보면 사람들의 평가가 중요하지 않게 여겨집니다. 환경이나 다른 사람들 때문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받으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상처나 여러분의 모든 것이 내려지고 깨어집니다. 주님과 연합체가 됩니다.

 

그 동안의 상처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온전케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다는 사실을 바라보면서 치유됩니다. 관점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십자가를 이해하게 되면서 자유가 찾아옵니다. 어떤 혼돈이 닥쳐와도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끈을 붙잡게 되어 흔들리지 않고 놀라운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기쁨을 경험합니다. 승리를 경험합니다. 비록 환경이 막혀 있어도 실망이 되질 않습니다. 비록 지금은 잘 안되지만, 하나님은 완전하시니까,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분임을 확인하며 하나님이 길을 인도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십자가는 일회용이 아닙니다

지속적으로 의지하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십자가는 일회용이 아닙니다. 지속적으로 의지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매순간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러다 보면 십자가에 의한 삶이 배워집니다.

 

똑같은 죄를 수십번 짓지만 성령께서 보여주시면 절박하게 애통해 하면서 주님, 제가 그런 자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한발짝도 갈 수 없습니다. 저를 긍훌히 여기시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대개 많은 경우, 성령께서 감동하시기를 내가 너를 용서하며 새롭게 하노라라는 음성을 듣습니다.

 

어떨 때에는 하나님이 용서하시지 않는 것 같아 더 회개해야할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게 율법주의 사고입니다. 이 때에는 믿음의 말씀을 다시 붙잡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요일 1:9)

 

믿음의 말씀을 부여잡고 율법주의 사고에서 십자가의 복음으로 돌아서며 주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면 친밀함이 더 열리며 기름부으심이 더 부어집니다.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이 더 경험되어집니다. 그렇게 하는 가운데 승리가 있습니다.

 

십자가는 항상 우리 삶의 토대이어야 합니다. 우리 삶의 모든 부분이 오직 은혜로 사는 삶인데 그것의 근본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 의한 삶을 살 때 그 가운데 놀라운 승리가 있을 것입니다.

 

요한 웨슬리는 이 삶을 깨닫고 하나님의 부흥에 놀랍게 쓰임 받았습니다. 사실을 보기 전과 본 후의 차이는 이것입니다. 성령의 조명으로 자기 속에 어떤 선함도 없음을 안 후 십자가의 공로만을 붙잡았습니다. 십자가의 공로만이 자신을 새롭게 한다는 것을 안 후 그의 인생은 바뀌었고 하나님은 그를 통해 그의 세대에 세워놓으신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실 수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진리를 발견한 사실이 이토록 중요한 것입니다.

 

이 진리를 보아야 합니다. 이게 관건입니다. ‘십자가에 의한 삶에서 거짓신앙체계는 깨어지며 우리들은 신앙의 본질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 안에서 분별력이 주어지고 자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중과 목적을 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기대합시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2:8-9)

 

이 말씀은 십자가만이 우리 삶의 토대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만이 토대라면 더 이상 자기자원은 의미가 없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원으로 사역하려고 할 때가 많다는 것을 고백하고 더 이상 우리의 자원이 아니라 주님의 자원으로 서는 법을 보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오직 인격체이신 주님을 의지하여 서는 법을 구하면서 하나님만 신뢰하는 법을 더 보게해 달라고 구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되어야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나 친밀함이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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